연말입니다.

잡담 2020. 12. 31. 23:24

다들 연말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불이 56화 상황은...
네...또 밀리고 있습니다...죄송합니다...orz;;;

귀여운 가족이 한명 늘어난 탓이라기엔 너무 긴 연중기간이라 변명도 못하겠네요ㅠㅠㅇ<-<;;;
집에 와서 딸 재우고 나면 뻗어버리는 저질 체력이란...ㅡㅡ;;;

요즘은 PC 앞에 진득히 앉아 몇시간씩 글쓰기 하는건 꿈도 못꾸는지라, 폰으로 짬짬이 글 다듬고 있습니다.
일단 오늘 추가된 소재도 있어서 글이 안써지는건 아닌데, 작업속도 생각하면 새해 첫 연휴 동안 완성은 어렵겠습니다(=.=;)
조금 더 나중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ㅠㅡ

그럼 다들 새해에는 무탈하시고 새글로 다시 뵙겠습니다m(_ _)m

Posted by 루트(根)
,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이른 토요일 오후.
공원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행인들의 눈길이 내게 꽂히는것 같아 기분에 묘하던 차에 동급생을 만났다.
짧은 스커트 차림에 숄더백을 맨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룬과 눈이 마주쳤다.
친근함을 담아 가볍게 한 손을 흔들어보이자 룬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듯 룬의 시선이 위아래로 헤매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룬은 이윽고 나를 향하곤 평소답지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엥?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미심쩍은지 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고, 설마 진짜로 날 못알아본건가?

기억이 잠시 날아간건지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숄더백에 한손을 집어넣는 모양새를 보건데, 이대로 뒀다간 치한 퇴치 스프레이 같은걸 맞을 것만 같다.
저번처럼 이로 두꺼비의 옷 소멸 가스 같은게 튀어나왔다간, 난데없이 동네방네 알몸을 자랑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위기감속에 과장스레 팔을 벌리곤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이런! 아무리 아이돌 활동으로 정신이 없다지만, 설마하니 절친이자 팬1호인 나를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응?"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찌푸리던 룬이 이내 의심스런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목소리는...혹시, 수염?"

뭐야? 날 잊은게 아니었잖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보통 외모만 보면 바로 알잖아?
나처럼 눈에 띄는 외모가 또 어디 있겠어?"

"...네 말대로, 눈에 띄긴 하네."

입술을 씰룩이던 룬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내 머리 쪽을 빤히 쳐다보던 룬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를 가리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일단, 그 뽀글머리는 대체 뭐야?"

"응? ...아!"

턱부터 이마까지를 감싸고 있는 -얼굴의 몇배는 될만큼 거대한- 검정 뽀글머리에 생각이 미쳤다.

"벗는거 잊고 있었다..."

"......"

어쩐지 주변 시선이 이상하더라니...
머쓱하니 뽀글머리를 쑤욱 잡아당기자, 룬이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룬?"

"...풋-"

아까부터 씰룩이던 룬의 입술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은데?

"푸픕...! 아, 아하하하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입을 가리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한 룬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정말 최고야, 너!
그거 완전 잘 어울린다 수염! 크-흡! 아하핫~!!"

전혀 칭찬이 아니었다.
웃음이 터진 룬 덕분에 길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야?"
"우와아...굉장한 뽀글머리."
"코스프레인가?"
"모작크 장군?"
"매지컬 쿄코의 악역?"
"아마 맞을걸? 공원에서 꼬마들이랑 매지컬 쿄코 놀이하고 있던데."
"진짜 같은 비쥬얼...굉장한 완성도인걸."
"가발 하나로 완성되는 완벽함!"
"그런데 저기 웃고 있는 여자애 혹시 RUN쨩 아냐?"
"에~ 설마?"

룬의 웃음에 전염되었는지 덩달아 웃는 사람들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룬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재밌으면 너한테도 이 뽀글머리를 씌워줄까? 응?"

"히익-히익-쿠흐흐...! 그, 그랬다간 너, 다른 의미로 전국의 남자들의 적이 될거야, 아핫핫~!"

내 위협에 룬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웅크렸다.
웃음을 그칠 기미는 전혀 없었지만.

"안돼-! 여자애가 뽀글머리가 되어버려!"
"범죄다!"

"아앙~? 네녀석들도 뽀글머리로 만들어줄까!?"

"꺄-!"
"뽀글머리 수염성인이 화났다-!"
"우리 동네에 모작크 장군이 왔어!"
"도와줘 매지컬 쿄코쨩-! 큭큭큭!"

양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번쩍 든 학다리 자세로 위협하자, 행인들은 깔깔 웃어대며 사방으로 달아나버렸다.
젠장, 정말이지 우리 동네 주민들은 하나하나 반응이 좋다니까.
투덜대면서 한숨을 쉬곤, 슬슬 웃음보를 진정시켜가는 룬을 기다렸다.



"정말이지, 만나자마자 웃기지 좀 마, 수염."

뽀글머리 분장을 벗고 룬과 함께 걸었다.
방금전 내 모습을 떠올렸는지 룬은 걷는 와중에도 이따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가발은 왜 쓰고 있었던거야 수염?"

"동네 꼬마들이랑 놀면서 악역으로 모작크 장군을 맡았거든."

"모작크 장군? 그게 누군데?"

"매지컬 쿄코에 나오는 뽀글머리 악당.
세상 모두를 뽀글머리로 만들려 하는 녀석이지."

"세상 모두를 수염투성이로 만드는거랑 뽀글머리로 만드는 것중 어떤게 더 중요해?"

"둘 다 안하거든?"

"하여간 용케도 그런 뽀글머리 가발을 구했구나?"

"실은 이거, 같이 놀던 동네 꼬마녀석한테 선물 받은거야.
매지컬 쿄코 경품으로 받은거라는데, 자기가 쓰긴 싫다면서 나한테 주더라고."

"희안한 상품도 다 있네.
뭐, 수염 너한텐 딱이었지만."

웃음을 삼킨 룬이 내 머리를 향했다.

"그나저나 머리카락이랑 수염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뀌는구나."

"하긴. 못 알아볼 정도로 인상이 바뀔 줄은 몰랐는데."

"난 혹시나 네가 평소의 금발 올백에 질려서 스타일을 바꾼건가 싶었어.
덕분에 실컷 웃었지만 말야."

키득거리는 룬의 놀림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너 의외로 동네 꼬마들에게 인기 많나봐?
딱 봐도 불량배 같이 생겼으니까 애들이 놀라서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꼬마들이 의외로 겁이 없으니까.
예전에 꼬마들 놀이에 휘말린 뒤로는, 이따금 어울리게 되더라구."

덕분에 수염성인이라거나 전설의 피구왕이라거나 따위의 소문이 나도는 처지가 되었지만, 편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싫지 않으니까.
다만, 꼬맹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호응해주는건 부끄러우니까 적당히 해줬으면 한다.



우스꽝스런 가발에 얽힌 룬의 놀림도 끝나고 화제가 바뀌었다.
룬이 아이돌 활동으로 바빴던 가운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같은걸로 말이다.

"참, 수염."

"왜?"

"풍기위원 말인데."

"코테가와?"

"응. 걔, 며칠전 감기 때문에 학교 쉬었잖아.
이젠 좀 괜찮아졌대?"

"으음, 아직이려나. 어젠 코테가와가 학교를 쉬었거든."

"뭐? 또? 분명 병문안 다음날엔 멀쩡히 등교하지 않았어?"

"그렇긴 한데, 그 날 저녁에 내린 비에 젖어선 감기가 악화됐다나봐."

"뭐랄까, 타이밍이 나빴네."

"그러게."

병문안 당시엔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던것 같았는데...
하필 비를 맞고 코테가와의 컨디션이 악화된건 운이 나빴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날 미캉도 나랑 장보고 돌아가다 소나기를 맞았는데, 미캉은 괜찮으려나 걱정이네.

"아무튼, 다음주엔 나아서 학교에서 만나면 좋을텐데."

한숨을 내쉬자 룬이 눈을 샐쭉 뜨곤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혹시~ 어제도 몰래 풍기위원 간병을 갔다거나 한거 아냐?"

놀리듯 은근히 묻는 룬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젠 시즈 혼자 코테가와네 집에 찾아갔어.
미카도 선생님께 감기약을 며칠분 더 타갔다고 하더라."

의욕 넘치게 간호사 복장으로 구급상자를 챙겨들고 뛰어가던 시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뭐, 덜렁대다 넘어져선 유체이탈해버린 시즈 때문에 하교길이 뒤집어졌지만."

"그, 그래?"

"담임인 호네카와 선생님은 기절해 버리고, 위원장인 사이렌지는 비명을 지르다 들고있던 프린트물을 쏟아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나와 시즈가 둘이서 호네카와 선생님의 영혼을 도로 원래 몸으로 되돌려 놓는 사이에,
하루나가 쏟아버린 프린트물을 리토랑 친구들이 함께 주워주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그 뒤엔 아무일 없었던것 마냥 기운차게 병문안을 떠난 시즈도 어지간히 꿋꿋했지."

고개를 내젓자 룬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라사메랑 풍기위원은 사이 좋아보였으니까."

"룬 너도 둘과 가까워 보이던데?"

"내가?"

"너 저번에 코테가와랑 시즈랑 함께 하교했잖아?"

"그땐 조금 얘길 나눠보고 싶어서 그랬던것 뿐인데."

켕길것도 없는데 괜스레 튕기는 모양새가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아 입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니까 별로 친하거나 한건 아니다?"

"시꺼. 나라고 좋아서 이런줄 알아?
나 2-A로 반을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말야.
거기다 아이돌 활동으로 바빠서 학교에 있는 시간도 부족한데 날더러 어쩌란거야?"

"그치만 너, 바쁘단 와중에도 코테가와 병문안도 갔었고.
지금도 걱정되니까 코테가와에 대해 물어본거잖아.
그거 이미 친한거 아냐?"

"...아는척 하긴..."

"훗훗."

"이상하게 웃지마!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아니. 의외로 상냥하구나 싶어서."

"......"

내 말에 룬을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왜그래?"

"의외라... 수염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알 알았어."

거기서 트집을 잡는거냐?
어쩌면 내 말을 놀림으로 받아들인 탓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곤 째려보는 룬이었지만, 까다롭게 구는 이 녀석에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 상냥함의 절반이라도 나에게 나눠주지 않을래?"

"너랑 대화해주는 것 만으로도 나는 넘칠만큼 상냥한게 아닐까? 응? 수염?"

"너무해! 절친인데!"

"절친 아니거든? 은근슬쩍 밀어붙이지마."

"아니아니, 생각해봐. 나랑 코테가와, 시즈, 그리고 룬 너는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공통점이 있잖아?"

"그게 뭔데?"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룬에게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우리 넷은 2-A의 『아웃사이더 동맹』이니까!"

"뭔소리야?"

어처구니 없다는 룬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2-A에 나중에 합류한 학생들이란거지.
나와 코테가와는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2-A반, 그러니까 원래 1-A였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었지.
시즈는 미카도 선생님께 몸을 얻고난 뒤에야 2-A로 편입했고.
룬 너는 2학년 들어서 다른 반이 되었다가 2-A로 돌아왔잖아.
이렇게 넷이 합쳐 『아웃사이더 동맹』!"

"두번 말하지마. 그런 부끄러운 호칭."

"영어니까 그럴싸해보이지 않아?"

"전혀. 그리고 설명이 엉성해!
그냥 1-A가 아니었던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말했으면 알기 쉽잖아?"

"어? 하지만, 룬 넌 1학년 때 유우키랑 라라랑 같은 반이었잖아?"

내 말에 룬은 고개를 저었다.

"1-A에 다녔던건 렌이고.
난 2학년 때부터 등교했으니까."

"......어? 에!? 진짜!?"

"뭘 그렇게 놀라는거야?"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란 룬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방금 룬의 발언은 『지금에서야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급이다.
그런 마당에 내 말이 횡설수설하게 된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 그...! 난 줄곧 룬 네가 1-A 반인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반 친구들을 알게 된건 올해 여름이 되어서거든?"

"진짜냐..."

경악하는 날 이상하게 보던 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수염 네가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1학년 때 전학왔을 땐 렌으로만 등교했다구.
지구에서는 몸이 뒤바뀌는 패턴도 바뀌어서, 내 몸으로 돌아온건 작년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가능했으니까.
거기다 내가 제대로 몸이 바뀌게 되니까 2학년에 올라선 나 혼자만 다른 반이 되어버렸고."

룬의 푸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2학년 첫날 복도에서 리토와 실랑이를 벌이던 렌이 룬으로 변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룬으로 변한 렌을 보고 여자애가 됐다며 놀라던 리사랑 미오.
거기서 라라가 처음으로 둘에게 룬을 소개해준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때 리사랑 미오가 룬을 보고 놀랐던건, 렌이 '처음보는 여자애(룬)'로 변신하는걸 처음봤기 때문이라는거군.
그 전까지는 다른 학생들은 룬과 안면이 없었다는건데.
즉, 시기상으로 따지면 2-A 학생들에게 가장 낯선 이는 나도, 코테가와도, 시즈도 아닌 룬이 되어버리는거다.

어긋나 있던 나의 인식을 깨닫곤 당황스러움을 추스르는 동안, 룬의 이야기는 2학년 초반에 다른 반으로 있었을 때의 지루한 일상에 대한 푸념이 되어있었다.

"리토군을 만나는데 반이 다르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가뜩이나 렌이랑 활동 시간을 나눠야 하니까 시간도 없어 짜증만 나구."

"그건 고생이었겠네. 그래도 늦게나마 2-A로 반이 바뀌어서 다행이지?"

"다행이라기보단 뿌듯하단 기분?
2-A에 들어온건 내가 그 변태 교장을 상대로 교섭해서 쟁취해 낸거니까 말야."

룬은 의기양양하게 코를 세우곤 흐흥- 콧소리를 내더니, 어째선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정작 2-A에 들어왔더니 아이돌 활동 때문에 등교하는 날이 줄어버렸지만."

"하하...힘내."

"전혀 의욕이 나지 않는 응원이네. 고마워."

아니꼬운듯 룬이 대꾸했다.

"...아무튼, 요점은 그거야.
2-A 녀석들에겐 수염 너보단 내가 더 어색한 상대일걸?
신학기로부터 한참 지나서 2-A에 들어온데다 아이돌 활동으로 등교도 뜸했으니까."

자기가 말해놓곤 낙담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린 룬의 모습에 당황해서 위로할겸 다독였다.

"야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모미오카나 사와다는 너랑 친해 보이던걸?
룬룬이라고 별명까지 지어 부르잖냐."

"...아아, 위원장이랑 친하게 지내는 둘 말이지?
하긴, 걔들은 넉살이 좋더라. 너 상대로 장난을 거는 애들이니까.
보통이라면 너같은 불량배에겐 무서워서 말도 안 붙일텐데."

부정할 수가 없어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다만, 기껏 위로해주려는 사람의 정면에서 험담을 내뱉는 룬 너의 뻔뻔함도 만만찮다고 생각해.
어찌됐건 가라앉을뻔 하던 분위기도 괜찮아졌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찌됐건, 환영합니다! 아웃사이더 동맹에 오신 것을!"

"와아- 전혀 기쁘지 않은 환영."

무덤덤한 말과 달리 룬은 조금 미소지었다.



화제는 라라랑 우리집 식객 둘(나나와 모모)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사이바이 스튜디오에서 만화의 마감으로 바쁜 저스틴을 대신해서, 라라가 나나와 모모에게 용돈을 대신 전해주기로 했다는 얘기.
나나랑 모모가 용돈도 받을겸 내일 라라를 만나러 미캉네 집에 놀러갈거라는 얘기.
사이바이씨의 마감을 돕기 위해서 리토랑 미캉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갈 예정이라는 얘기.
만화가로서 『은하의 랩소디』라는 작품으로 수상한 저스틴의 활약.
거기서 '라라의 호위대장이 어째서 만화가를 하는거야?'라며 기가막혀하는 룬의 핀잔.

"그런데 나나랑 모모의 용돈은 그냥 라라가 수염 너한테 대신 건네주면 되는거 아냐?"

"남을 통해서 전달하는거랑, 본인이 직접 용돈을 쥐어주는거랑은 만족감이 다를테니까.
그리고 용돈 운운하지만, 어쩌면 동생들을 집에 초대할 구실로 삼은걸지도 모르지."

"헤에...라라 그 사고뭉치도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렇지? 라라도 묘하게 내일을 기대하고 있던걸 보면 뭔가 자매끼리 하고 싶은거라도 있는거려나?"

드물게 라라에게 호의적인 룬의 발언에 맞장구쳤다.

"...뭐,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집보기지만."

"응? 수염 너랑 라라네 동생들이 같이 놀러가는거 아녔어?"

"라라가 부탁했거든.
내일은 나나랑 모모와 셋이서 지내고 싶다고."

- 미안해 료스케! 그치만 하루나랑 약속했는걸.

하루나가 어쨌길래 나나랑 모모만 오라는걸까.
의아해서 하루나를 쳐다봤을때 하루나도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는걸.
그렇지만 자매끼리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데, 거기서 굳이 하루나 운운을 추궁하고 싶은 맘은 없었기에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모처럼 자매들끼리만 있는건데 눈치없게 방해할 수도 없잖아."

"그런것 치고는 풀죽어 보이는걸?"

눈치빠른 룬의 지적에 웃는데 입맛이 썼다.

"으음, 혼자 있는건 오랫만이라 그런가봐.
내일은 적당히 시간을 보낼거리를 찾아보려구."

"하여간, 그렇단건 넌 내일 할 일이 없단거지?"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

"잘됐네."

"뭐가 말야?"

"할일 없는 수염 네가 심심하지 않도록, 내가 친절히 일거리를 준다는거야."

"어, 그러니까...감사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하는 내게 룬은 실소를 흘리더니 용건을 말했다.

"별건 아니고 택배 하나만 대신 받아줘.
지구의 택배를 받으려는데, 마땅한 수신처가 없어 곤란했거든."

"그러고보니 넌 우주선에서 살고 있었지?"

지구에 온지 1년은 되었을텐데 여전히 우주선 생활이라니, 아직은 지구에서 거주지를 구할 생각은 없나보다.

"응. 은하통신판매에서 사는 물건이라면 그냥 우주선에서 받으면 되는데, 지구 물품의 경우는 그게 안되거든.
고작 택배 하나 받겠다고 『탑 아이돌 RUN의 정체가 실은 우주인이었다!』라고 밝혀지는 꼴은 우습잖아?"

자기가 말하고서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한차례 고개를 흔들곤 룬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해줄거야?"

"그정도야 간단하지. 맡겨줘."

"고마워. 그럼 주소 알려줘.
지금 배송 요청하면 내일 중에는 도착할테니까."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 룬과 느긋히 대화를 이어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앞이었다.

"어쩌다보니 집까지 동행하는 모양새가 됐네."

"괜찮지 않아? 수염 네 집 주소만 아는것 보다는 직접 와보는편이 나중에 물건 받으러 올 때 헤메지 않을테니까."

"그것도 그러려나."

그럴싸한 말에 수긍하곤 문을 열려는데, 무슨 생각인지 룬은 내 손에 들고있던 뽀글머리를 집어가더니 내 머리에 폭-하고 씌웠다.
순식간에 완성된 모작크 장군 코스프레.

"뭐야?"

"그냥. 라라네 동생들 반응이 궁금해서.
아마 다들 너인줄 모를걸?"

"설마 그러겠냐.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 중에 남자는 나 밖에 없는데."

헛웃음을 흘리며 현관을 열자,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나다.

"아, 료스케 왔어?"

반기듯 나오던 나나가 갑자기 멈춰섰다.



"......누구?"

"...나야. 아키츠 료스케."

"료스케!?"

경악하는 나나의 반응에 불만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를 봐도 나잖아?"

"뽀글머리잖아!?"

"...풋!"

결국 룬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돌의 체면인지 입을 가리면서 소리를 죽이는 룬에게 나나의 의식이 향했다.

"어, 너는?"

"안녕. 나나였지?"

금새 표정을 추스리곤 미소짓는 룬에게 감탄하는데 나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 잘도 왔네."

어쩐지 떨떠름해하는 어조에 룬이 눈을 깜빡이다 생긋 웃었다.

"으응~ 나, 뭔가 했던가?"

"......딱히."

어쩐지 미묘해진 분위기에 룬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럼 아키츠군. 난 이만 가볼께."

아키츠군이라니, 설마 나나 앞이라고 내숭이냐?
미소지으며 룬은 깔끔히 몸을 돌렸다.



룬이 떠나가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나나가 불만스레 혀를 찼다.

"어쩌다 저런 녀석이랑 같이 오게 된거야?"

저런 녀석이라니, 의외로 룬에 대한 평가가 나쁘다.

"길가다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집까지 와버렸어.
그런데 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라의 친구잖아."

"별로, 언니의 친구라고 나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건 아니잖아."

나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녀석, 분명 모모랑 같은 타입이야.
겉으로는 친한척 해도 속으론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른단 말야."

너 지금 룬이랑 모모를 동시에 까내리고 있잖냐...

"그러고보니 모모는?"

"미카도 선생님한테 갔어.
약초 관련으로 얘기를 나눌게 있다고 했거든."

답하던 나나가 손으로 내 머리께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도 슬슬 그 이상한 가발은 벗어."

"아..."

나나의 지적에 슬그머니 뽀글머리 가발을 벗고서 집에 들어섰다.




"......"

팔락-

"......"
"......"

팔락-

"「「......」」"

팔락-

팔락-

"잠깐, 나 아직 다 못봤어."

옆에서 뻗어진 손이 페이지를 도로 앞으로 넘겼다.
소파에 앉아서 고양이 잡지를 읽던 중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나나였다.
묵묵히 사진을 감상하던 나나가 문득 물었다.

"료스케는 고양이를 좋아하는거야?"

"응. 사랑스럽잖아.
다소 멋대로에 앙탈을 부리긴 하지만 그게 좋아."

"흐응, 그렇구나."

시시덕거리며 사진을 감상하던 중 한곳에 눈이 고정됐다.

"아, 이녀석 귀엽지?"

"어디어디?"

"여기. 구석에 있는 작은 녀석 말야.
오드 아이인가? 양쪽 눈 색이 다른데?"

"오오...!"

내 말을 따라 사진 한구석에 자그맣게 보이는 녀석에 얼굴을 가까이 한 나나가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나랑 같은 감상을 가진것 같아서 기쁘긴 한데...

"나나? 그렇게 얼굴로 가리면 내가 못 보는데?"

"헤헤, 이녀석 귀여워."

"야?"

잡아먹을듯 잡지에 얼굴을 가까이 댄 나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잡지를 옆으로 빼냈다.

"잠깐? 나 아직 다 못 즐겼어!"

"너만 눈이냐!? 나도 감상 좀 하자."

항의하는 나나에게 콧방귀를 뀌곤 잡지를 들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야, 치사하게! 그럼 너만 보는거잖아!"

"이게 방금전 나나 네 행동이다. 알았으면 조금은 반성하는게 어때?"

"이잇!"

불쑥-! 푹!

"뿌엣-?"

잡지를 얼굴에 가까이 해서 혼자 읽으려는 척 하던 내 얼굴을 나나가 자기 얼굴로 밀어냈다.
정확히는 자기 머리로 내 뺨을 밀어버린거지만.

"으이잇...!"

"그, 그만!?"

모모랑 나나 둘이서 유치하게 다투는 상황을 직접 겪에 될 줄이야...
고양이 감상과는 별개로 지금 다툼도 싫진 않지만, 이대로 당할 수야 없지.
걸어온 장난은 피하지 않는게 즐거운법.
나나의 손길을 피해 한손으로 잡지를 들어올렸다.

"하하하! 봐라! 팔길이가 긴 내 쪽이 대!승!리!"

"비겁하잖아!"

"와하하하하! 함께 보던걸 먼저 독차지한 녀석이 누구더라?"

"으...! 너! 그 팔 정말 안내릴거야?"

리치가 짧아서 잡지에 손이 닿지 않아 약이 오른 나나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소파에 다리를 올려선 드러누워버린 나.

"아앗!?"

"이야아~ 친절하게 자리까지 양보해주다니 고마워라. 냐하하~"

소파 전체를 차지한 채 능글능글 웃으면서 책을 과시하듯 양손으로 쭉 들어올리곤 감상에 들어갔다.
자리를 빼앗긴 나나가 어처구니 없단 감정을 감추지 못한채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정말 유치하게 이럴거야!?"

"훗... 보시다시피 제가 아직 풋내나는 고교 2학년이라서."

"수염까지 길렀으면서 풋내는 무슨..."

쿡-

"윽!?"

핀잔을 준 나나에게 옆구리를 찔려 움찔 몸을 떨었다.

"......"

"뭐, 뭐야?"

손가락을 내민채 말없이 날 빤히 쳐다보는 나나의 모습에 불안해 묻자, 나나가 손가락을 구부렸다.
기분탓인지 나나의 눈이 반짝인 것 같다.

간질간질-

"히윽!? 큭!? 그, 그만!"

"흐응? 헤에? 뭐라고 료스케?"

어쩐지 장난기 가득한 어조로 내 옆구리를 찌르고 간질이는 나나의 손가락에 꿈틀꿈틀 허리를 비틀었다.

"그, 그만해! 간지럽잖아!?"

"싫으면 얌전히 소파에서 비키라구~ 응?"

"후, 후후! 물러서지 않는다! 빌지 않는다! 되돌리지 않는다! 제왕에게 후퇴란 없다!"

"미꾸라지처럼 몸을 배배 꼬면서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과장된 화법에 어이없어진 나나가 손가락을 치우자 책을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내려 슬그머니 옆구리를 가렸다.


소파에 누워서 책을 펼쳐든 내 머리맡에 얌전히 쭈그려 앉아 책을 감상하던 나나가 툭 내뱉었다.

"료스케. 나 슬슬 이 자세 불편한데. 고개도 아프고."

"음, 그럼 나도 이만 일어나서 책을 같이 읽을까?
생각해보면 아깐 나도 어른스럽지 못했고."

"곧장 일어나지 않는걸보면 료스케 너, 실은 소파에서 일어나기 싫은거지?"

"일어나고 싶지 않소이다-"

"이상한 말투."

"이것이 바로 나의 베스트 포지션."

"게으름뱅이."

"나태 포-즈."

"소파에 달라붙어 있는거 같아."

"후후, 소파와 나는 하나!"

"부러워-"

"흠, 누울래?"

"...어...?"

나나가 눈을 깜빡였다.

"음...그래도 돼?"

"사양하지 마시고."

어차피 이건 깊이 조절이 되는 스윙 소파니까, 등받이를 안쪽으로 밀면 둘이서 누울 공간이 충분하단 말이지.
책을 받쳐들던 한팔을 내려 등받이 아래 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데, 나나가 머리 맡에서 꼬물꼬물 기어와 소파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풀썩-

...?

나나가 내 몸 위에 드러누웠다.

......으응?

곤혹스러워하는 내 배위에 등을 대고 누운 나나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위치를 조절했다.
자세를 잡는 와중에 다리와 다리가 슥슥 스친다.

"딱딱해."

그럴리 없다. 절대로.
...아마도.

"배가 좀 더 폭신폭신하면 좋을텐데."

...아, 복근 얘기군. 알고 있었다.
...정말로.

"소파처럼 취급하라고 해도, 별로 닮은 감촉도 아니잖아."

중얼중얼 푸념하며 어색해하는 나나의 말에 방금 전 대화를 반추했다.

나나: 소파에 눕고 싶어.
나: 소파와 나는 하나!
나나: 소파에 눕고 싶다구!!
나: 누워라!!

-『도킹!』

아무래도 소파 깊이 조절이 된다는걸 몰랐나보다.

"료스케."

"으응?"

"책 안읽어? 나 마저 읽고 싶은데."

"음, 그러려고 했어."

나나의 재촉에 소파 등받이 아래에 집어넣었던 한손을 슬그머니 빼선 책을 펼쳐들었다.
굳이 여기서 어색한 대응을 했다가 나나랑 서먹해질순 없지.
나나는 내 가슴께에 머리를 기댄채 책에 보려다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료스케. 책이 너무 위쪽에 있어서 보기 불편해. 좀더 아래로 내려."

"이렇게?"

누운채 높이 펼쳐든 책의 위치를 내 머리 부근에서 내 가슴께로 바꿨다.
몇번의 조정 끝에 책은 나나가 들고 읽기로 했다.
나는 책 대신 내 위에 누운 나나의 허리에 팔을 둘렀고.
옆으로 굴러떨어지지 말라는 의미로 말이다.

"이상한데 손대지마."

"오냐."

"으응, 익숙해지니 이 자세도 그럭저럭 괜찮네."

"팔자 좋구먼."

잡지로 시선을 집중하는 나나에게 안도하곤, 나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뭐야?"

"잡지가 잘 안 보여서."

"흥이다-. 료스케는 얌전히 소파나 하고 있으라구."

내말에 코웃음치면서도 나나는 책이 잘 보이도록 자세를 고쳐잡았다.

잡지의 내용은 알찼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코테가와가 봤다면 반색했을만큼.
문제는 잡지를 들고서 내 위에서 태평하게 이리뒹굴 저리뒹굴하는 나나에게 있었다.

"야. 너무 몸을 흔들지마.
떨어진다구?"

그렇잖아도 너 떨어질까봐 팔까지 두르고 있는데.
나나의 몸을 따라서 잡지가 흔들려서 제대로 잡지 읽기도 힘들고.

"응? 고양이가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그치만 떨어질 걱정은 없다구. 봐봐."

소파 밖으로 늘어뜨려진 나나의 꼬리가 마루 바닥을 탁- 짚었다.
하트 모양의 꼬리 끝으로 바닥을 짚은채 나나가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헤헹~♪ 이거야말로 내 세번째 다리야!"

그 표현은 그만둬. 세번째 다리라고 하니까 이상한 의미로 들린단 말이다.
말해두지만 이건 내 머릿속이 음란한 탓이 아니다.
나나랑 모모가 다툴 때마다 서로의 꼬리를 잡고 아웅다웅하다가 헐떡이는 꼴을 보다보면 싫어도 이상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렇잖아도 너희 세 자매는 특히 꼬리가 민감한 체질이라 남이 만지는건 싫어하면서 자매끼리는 그런데 거리낌이 없단말이지.

"그리고 료스케는 지금 소파잖아?
딱딱해서 불편한 소파면서 조금 움직이는걸로 불평하지마-"

불평이 아니라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거거든?
이봐! 항의하는 것마냥 장난스레 다리를 움직이지마!
네가 움직이면 내가 곤란하고, 내가 곤란해지면 네가 곤란해진단 말야.

앓는 소리를 흘리는 내 모습이 도리어 장난기를 자극했는지 나나는 키득이며 꼬물꼬물 몸을 움직였다.
돌핀팬츠 차림으로 올라탄 채로 허벅지랑 엉덩이를 스치는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민소매 차림으로 몸을 옆으로 세워도 안됩니다. 틈이 벌어지니까 아웃입니다!

...안되겠다.

더는 위험할 것 같아 슬그머니 허벅지를 들었다.

들썩-

"꺅!?"

내 허벅지에 밀려올라가 자세가 흐트러진 나나가 깜짝 놀라며 내 허리를 붙들곤 몸을 가눴다.

"뭐, 뭐야?"

"...십수년된 소파여서 방석이 잠시 이상해진거야."

"이게~!"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한 얼버무림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툭-!

"윽!?"

방금 일을 장난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나가 머리로 내 턱을 쑤욱 밀었다.

"방석이 휘어진 소파는 이렇-게 밀어서 펴줘야지-"

내 허벅지에 나나의 다리가 휘감기며 조였다.
그 상태로 나나는 머리로는 내 고개를 위로 밀면서, 동시에 다리랑 엉덩이로 내 허벅지를 아래로 밀기 시작했다.

그만해---!?

방석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구요오오오!?

머릿 속에 맹렬한 경고음이 울렸다.

치, 침착하자.
여기서 냅다 나나를 소파 밖으로 집어던지는건 하수의 수단.
나라면 분명 이 상황을 어색하지 않게 벗어날 타개책을 떠올릴 수 있을터...!
내 턱은 나나의 머리에 밀려 점점 위로 꺾이고 있고, 아드님을 숨기듯 앞으로 굽혔던 허벅지는 나나의 허벅지랑 엉덩이에 밀려서 도로 내려갈 것만 같다.

...일단 타임!

시간을 벌겸 양손으로 나나의 허리를 잡아서 들어올렸다.

"꺅!?"

허리가 붕 떠버린 나나의 비명이 샜다.

"뭐야? 료스케."

"그, 그렇게 날뛰면 방석이 위험하잖아."

"뭐야? 째째하게.
어차피 딱딱한데 방금처럼 꾹꾹 눌러서 부드럽게 펴줘야지."

안 부드럽다고! 오히려 딱딱해진다고!

"언제까지 허리 들고 있을거야?"

"...자, 자아- 높다- 높아-♬"

"와아아~~~♪
...지금 아이 취급 하는거지?
이거나 먹어랏-!"

도리도리도리!

"어그그그그~~~?"

발끈하며 내 턱을 밀던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대는 나나.
나나의 분홍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뒤덮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정신이 없는 와중, 허리를 잡힌채 바둥거리던 나나가 내 옆구리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간질간질-

"그하하하핫!? 그흣, 너 또!?"

옆구리를 간질이는 나나의 손짓에 턱을 밀린채 웃다 몸을 움찔 비틀었다.

"자, 잠깐 나나!? 간질지마!"

"네 손부터 치우고 얘기해!"

지기 싫다는 오기인건지 장난이 동한건지 나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나는 더 나아가 손가락에 더불어 꼬리로 쿡쿡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했다.
간지러움으로 몸을 꿈틀꿈틀 비트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나나의 허리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바둥거리던 나나의 다리가 내 다리를 스치거나 민소매 아래가 밀려올라가 배꼽이 드러나거나 하는 불상사의 연속.

"윽! 다리 흔들지마, 소파에선 얌전히 좀...!"

"너야말로 흔들흔들하지마! 어지럽단 말야!"

"나나 네가 간질고 있어서 흔들리는거거든!? 잠깐!? 허리 흔들지마!?"

붙잡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옷차림이 흐트러지니까 날뛰는건 적당히해.

휘익! 찰싹!

"따거!? 머리카락으로 얼굴 때리지 마!"

"어림없지! 더 맞아라!"

"후앗!? 머리카락이 눈 찔렀어!"

"읏!? 숨 토하지마! 뜨거!"

"...아하! 후욱-후욱!"

"히이익-!? 너, 너 정말...!"

"내 눈의 원수!"

"이이...!"

잔뜩 오른 나나가 한차례 몸을 웅크렸다.

휙! 찰싹!

"아팟!? 뭐, 뭐야? 이거 꼬리잖아!?"

튀어오른 나나의 검은 하트모양 꼬리가 내 뺨을 때렸다.

"얌마! 이거 반칙이잖아!?
난 꼬리 같은거 없는데!"

"헹- 꼬리도 내 몸의 일부거든?"

"치사해!"

"억울하면 료스케도 나한테 세번째 다리를 쓰든가!"

......아니, 그건 아웃이지?

"물론 있다면 말이지만~! 후흥~!"

의기양양해하는 나나의 태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빈틈!"

"어랏?"

나나의 다리가 내 다리를 감고 달라붙었다.
나나의 꼬리가 나나의 허리를 받쳐들고 있는 내 손목을 휘감고는 옆으로 잡아당겼다.
나나의 양손이 내 허리를 잡곤 끌어당겼다.

"자세가 불편하니까 슬슬 진심으로 갈께!"

자신의 허리를 띄우려는 내 손에 대항하듯 용을 쓰는 나나의 전력에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아니아니! 눕지마! 부탁이니까 이대로 떠있어!"

"시끄러! 슬슬 불편하단말야! 료스케는 방석이니까 가만있어!"

"아니아니아니! 누우면 더 불편할텐데?"

"왜?"

"방석에 튀어나온 부분 있단말야!"

"뭔소리야!?" "푸훗-!"

멀찍이서 터져나온 웃음 소리에 나와 나나는 우뚝 멎었다.

"「「......어.」」"

"아."

모퉁이에 숨어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던 모모와 눈이 마주쳤다.

"「「「......」」」"

"...모모?"

"엣, 음...다녀왔어 나나."

웃음을 죽이곤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모와 반대로 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일까?"

유치하게 티격태격 하던 모습을 들켜 부끄러웠는지 나나의 몸이 굳고 손목을 휘감은 꼬리가 스르륵 풀렸다.
기회다 싶어 나나의 허리를 잡은채로 정중히 소파 밖으로 나나를 내려주곤, 슬그머니 몸을 쪼그린채 소파에 앉았다.

"...딱히 이상한건 안했거든?"

일어선 나나가 켕기듯 목소리를 높이자 모모가 가볍게 웃었다.



"알아. 둘이서 사이좋게 놀고 있었잖아?
나나도 참 아이처럼 즐겁게."

"아이 아니거든!"

"그래그래."

나나의 항의를 흘려넘기며 모모가 소파에 바로 앉은 내게 다가왔다.

"그런데 대체 뭘하다 그렇게 된거죠?"

"고양이 잡지 보는 걸로 다투다가 그만..."

"방금 전 모습이랑 도저히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요."

기가 막히다는 듯 쳐다보던 모모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료스케씨는 왜 그렇게 얌전히 앉아 계신가요?"

무슨 소리냐는듯 쳐다보는 나나의 시선을 무시한채 날 쳐다보는 모모의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

"혹시, 튀어나온 방석이 잘 안들어갔나봐요?"

이녀석...분명 알고서 묻는거지?

웃음기를 머금은 모모를 원망스레 보다 이내 한숨을 쉬곤 감사를 표했다.

"...어쨌든 고마워. 적절한 때 개입해줘서."

"어머? 전 오히려 아쉬워하실줄 알았는데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착각이었다지만 예전에 나나의 위기 때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녀석이 내뱉을 말은 아니라고 본다.
농담을 건넬 정도로 사이가 가까워 졌다고 본다면야 기쁘지만.

"기왕 같이 사는데 어색해질 일 없이 편하게 지내는게 좋으니까.
하숙하는데 껄끄러운 일이 있으면 너희도 지내기 불편하고, 나도 라라를 볼 면목이 없어지니까."

"으응, 그럼 료스케씨는 언니를 생각해서라도 자매인 저희를 소중히 대해주시는거군요?
피가 섞이지 않은 여동생이니까?"

"그 컨셉 아직도 하는거였어?
뭐어, 여동생 같은 느낌으로 접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엑..." "어머나..."

나나가 질색인 얼굴을 하고, 모모는 입을 가렸다.

"여동생 카페 단골인 료스케씨가 그러니까 이상하게 들리는거 알아요?"

"...네가 먼저 말했잖냐."

억울하다는 듯 항의하자 모모는 쿡쿡 웃었다.

"그런데 료스케 『오빠』."

냉큼 오빠라 부르는거냐.
모모 녀석, 완전 신났군.

"...왜?"

"방금 전 나나의 꼬리에 당했잖아요.
오빠도 오빠의 그걸로 나나를 혼내주지 그랬어요."

"...그거 농담?"

"진심인데요? 시작은 나나가 먼저 한걸요.
나나가 오빠에게 없는 꼬리를 쓰는게 반칙이 아니라면, 오빠가 저랑 나나에게 없는 부위를 쓰는 것도 괜찮은거겠죠."

"전혀 괜찮지 않을 것 같은데."

"방금 전에 꼬리로 얼굴을 맞았으니까, 오빠도 얼굴에 반격하면 세이프.
단, 나나는 여자아이니까 때리는것 대신에 가볍게 문지르는걸로 하면 세이프."

"세이프는 무슨, 아웃이잖아."

"세이프죠?"

의아하다는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모.
스스럼 없이 대해주는건 기쁘지만 에로하게 들리는 농담은 자중해라.

"잠깐? 모모! 지금 료스케 편을 드는거야?"

어리둥절해 하던 나나가 모모의 부추김에 발끈해 달려들었다.

"무슨 얘긴지 몰라도 방금전 다툼은 료스케가 먼저 시작한거거든?"

"그치만 오빠에게 없는 꼬리를 쓴건 치사하지 않니?"

"전혀! 그리고 료스케가 왜 네 오빠야?"

"그럼 나나도 오빠라고 불러불래?"

"싫거든!"

"자, 오빠? 나나에게 조금정돈 따끔한 맛을 보여주는게 어때요?"

"무시하지마!"

나나의 아우성을 뒤로 하고 재촉하는 모모의 태도에 곤란했다.
일단 발끈한 나나를 대신 달래는데, 모모가 다시금 장난스레 말을 걸었다.

"오빠 오빠."

"...또 왜?"

"궁금한게 있어서 그런데요.
오빠걸 조금 쓰다듬어 봐도 되나요?"

"...에엥?"

눈을 동그랗게 뜬 내 반응에 모모가 천연덕스레 달라붙었다.

"저랑 나나에겐 없는 부위라서 감촉이 궁금하거든요.
짧으면 부드러울지, 길면 빳빳할지 그런거 말예요."

난데없는 급전개!?

"뭐야? 료스케도 꼬리 같은게 있었어?"

나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이야 나나.
우리 꼬리는 뒤에 달렸는데 오빠껀 '앞'에 달려있거든."

"앞?"

모모의 연보라색 눈동자가 웃음기를 띄었다.

"조금만, 조금만이면 되니까요.
조금 호기심을 채울 뿐이니까요. 네? 오빠?
귀여운 여동생의 부탁이예요~"

"그렇게 재촉하니까 더 부끄러운데..."

"제가 상스럽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난데없이 손댄다고 하니까...
나라도 부끄러움 정도는 있다구."

"부끄러운가요? 하긴, 오빠껀..."

모모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아...죄송해요.
오빠에겐 자존심에 상처를 주려던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거 같은데?"

"정말~ 여동생이 이렇게 사과하구 있잖아요~?"

팔짱을 낀채 장난기를 머금은 모모의 미소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나나에겐 난데없는 모모의 사과가 이해가 되지 않은것 같았다.
내 어깨를 토닥이는 와중에도 나나는 머리에 물음표가 날고 있는것마냥 혼란스러워 보였으니까.
다만 모모의 반응을 보고 내가 충격을 받았을거라 짐작하곤 날 달래려는 모양새가 기특했다.

"어...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기운내 료스케."

"음...고마워 나나."

"괜찮아? 얼굴에 문지를래?"

"풋-!"

"...모모?"

황급히 표정을 추스린 모모가 의아해하는 나나에게 물었다.

"저기, 나나? 뭘 문지른다는거려나?"

"에? 그야 료스케의 꼬리 같은거 말야.
모모가 그랬잖아. 우리한텐 없는 부위라며."

"으흠! 그렇게 표현하긴 했지만..."

"뭐, 뺨을 때린건 나도 미안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와라! 료스케!"

"잠깐, 나나. 진정하고,"

"좋아!"

"료스케씨!?"

기세를 몰아 외치는 나나에 덩달아 호응하는 나.
난데없는 급전개에 당황해선 평소처럼 날 부른 모모.

"혹시 여동생에게 이상한 걸 할 셈은 아니죠? 오빠?"

"네가 세이프라며?"

"아웃-! 세이프지만 아웃-!"

"뭔 소리야."

"그야 오빤 분명 이상한 쪽으로 오해 하고 있을테니까!"

"괜찮아. 나는 자세하다."

"아니, 그러니까,"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

"들어!!!"

소파에서 일어나 나나의 앞에 서자 모모가 뒤에서 달려들었다.

"안돼요! 오빠!"

등에 달라붙지마라. 가슴 닿는다.
내 허리에 팔을 두른채 낑낑 뒤로 잡아당기던 모모가 외쳤다.

"나나! 물러나!"

"뭐, 뭐? 왜?"

"얼른!"

"헤헹~! 늦었습니다~♪"

냉큼 나나의 양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나의 얼굴을 엉망진창 문질문질했다.

"냐아앗~~~!?"

부비부비 당하면서 뺨에 닿은 수염의 감촉에 비명을 지르던 나나가 눈을 깜빡였다.

"까끌까끌해!? ...응? 어라? 의외로 보들보들해?"

제가 한 말이 있어서인지 질색하면서도 나나는 얼굴을 밀어내진 않았다.
당황함이 가시자 수염의 감촉에 조금 신기해하기도 했고.

"저번에 게임하다가 닿았을 땐 수염이 까끌까끌했는데..."

"그 때보다 수염이 더 자랐으니까."

"수염이 길어지면 부드러워 지는거야?"

"보통 그런 편이지."

신기한듯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나나가 멈칫했다.

"...료스케."

"왜?"

"포옹까지 허락해준 적은 없는데."

어깨에 얹었던 손을 은근슬쩍 등뒤로 돌린걸 용케도 알아챘네.

"...덤으로 부탁해."

"응큼해."

"후후. 미안."

"그렇게 기분 좋아?"

"응. 껴안는건 좋아하거든. 마음이 따스해지잖아."

"그렇다고 스스럼없이 여자아이에게 포옹하진 마."

"네. 반성할께요."

"...혹시 내가 어리니까 멋대로 대하는건 아니지?"

"그럴리가."

"그럼 됐어. 정말이지...너무 오래 끌진마."

한숨을 내쉬곤 나나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부끄러운지 뺨에 닿은 나나의 볼이 뜨거웠다.
잠시 이대로 온기를 만끽하는 와중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절 잊고 계신거 아닌가요? 오빠?"

"설마. 잊지 않았어 모모."

"알고 있죠? 저도 등 뒤에서 포옹해주고 있거든요?"

...그냥 매달린거 아녔어?
그것도 좋지만.
내 허리를 잡아당기던 팔에서 힘을 뺀 모모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큰일나는줄 알았잖아요."

"뭐가?"

"전 또 오빠가 이성을 잃고 나나에게 야한 짓을 하는게 아닌가 했는데."

모모의 말에 나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오해한거 아니라고.
너랑 나나에게 없고 나한테 있는거라면 『수염』이잖아."

"...오빠가 이상한 방향으로 오해하게 말을 했잖아요!"

"오해는 네가 하게 만들었겠지?"

"부-부-! 재미없어! 좀 더 재밌게 반응해!"

등을 두드리며 떼쓰는 모모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났다.
방향성은 다르지만 모모 이녀석도 나나 못지않게 장난기가 많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으니까.

"정말이지...
좋아요! 그럼 저도 수염 만질래요."

"응?"

"아까 제가 한다고 그랬죠? 대답은 듣지 않아요."

그리곤 모모는 폴짝 뛰어서 내 등을 기어올랐다.
말랑한 감촉이 등을 쓸며 올라가다 모모가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나와 뺨을 맞대고 있는 나나와 얼굴이 부딪히지 않도록, 반대편 어깨 뒤에서 고개를 내민 모모가 내 뺨에 손을 대었다.

"흐응, 나나 말대로 부드럽네요.
이 정도까지 길면 수염이 따끔하진 않나봐요."

"응? 설마 정말 감촉이 궁금했던거야?"

"놀리려던건 있었지만, 궁금하긴 했죠.
저희 아빤 수염이 없거든요."

내 수염을 만지막거리던 모모가 대꾸했다.

"거기도 오빠는 『수염성인』이다 뭐다 소문이 무성했으니, 오빠의 수염은 어떤 느낌일지 신경쓰이기도 했고요.
솔직히 궁금하잖아요?"

모모의 말에 나나가 맞장구쳤다.

"알거 같아. 며칠 전이랑은 수염의 감촉이 다른 것도 신기했거든. 료스케만 그런거야?"

"남들도 비슷해."

소문이 자자한 『수염성인』의 수염의 감촉이 궁금하다라?
매니악한 호기심이긴 한데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내심 납득하곤 나나를 껴안은채 얌전히 있는데 갑자기 귓등에 뜨거운 한숨이 뿜어졌다.

후웃-

"히윽!? 뭐, 뭐야?"

"네? 숨을 내쉰 것 뿐인데요?"

"그, 그래?"

"......"

"......"

하아아-

"힛!?"

모모의 더운 숨이 다시금 귀에 뿜어졌다.
숫제 노골적으로 하아-하아- 숨소리를 흘리는 모모.
귓가를 자극하는 숨결에 나나를 포옹하던 자세에서 부자연스럽게 허리가 숙여졌다.

"료스케? 왜?" "아, 아니..."

"어머, 오빠? 어째서 허리를 뒤로 빼시나요? 꼭 주저앉을 것처럼. 네?"

"...피곤해서 그래."

능청스레 묻는 모모에게 애써 태연히 대꾸하자 모모가 귓가에 속삭였다.

"후훗...저질~"

야, 이게?

냠-

"히익!?"

입술로 귀를 무는 모모의 행동에 얕은 비명이 샜다.

"그, 그만해!"

"흐흥~ 저번에 오빠한테 실컷 놀림받은 복수예요.
당하고만 있는건 제 성미에 차질 않으니까요."

중학생이냐!
...중학생 맞네.
정말이지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네.

불평을 생각하기 무섭게 귀에 닿는 입술을 감촉에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이건 카레에 넣은 당근의 몫!"
"이건 개조교복 사진을 언니한테 보낸 몫!"
"이건 밀크티에 넣은 우유의 몫!"

밀크티는 네가 만들었잖...!

남의 귀를 하모니카 취급하는 모모의 만행에 점차 허리가 뒤로 빠지는데, 갑자기 뺨을 맞대고 있던 나나가 습격했다.

"이건 야채볶음에 넣은 피망의 몫!"

너도냐!?

앙-하고 나나에게 목을 물렸다.
목을 누른 송곳니에 움찔할 틈도 없이, 목에 닿은 뜨거운 혀의 감촉에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마루에 주저앉는 내 등에서 모모가 재빨리 내려왔다.
아들의 상태를 숨기기 위해 바닥에 쪼그려 앉은 내 모습을 모모가 장난기 도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어라라? 오빤 어째서 그렇게 몸을 둥글게 만채로 있는거야?"

"...동물 흉내 내는 중이야."

"헤에? 어떤 동물?"

"쥐며느리. 천산갑. 아르마딜로. 아무거나."

"와아 굉장해-! 오빤 흉내를 정말 잘내는구나?"

전혀 마음이 깃들지 않은 감탄사를 내뱉곤 모모는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모모는 생각하는거야!"

3인칭?

"오빠라면 좀 더 능숙히 동물의 흉내낼 수 있을거라고!"

능숙히라니 뭘 어떻게 하라고?
나나가 잔뜩 흥분한 모모의 모습에 걱정스레 물었다.

"모모,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데? 괜찮아?"

"괜찮아! 즐거우니까! 오랫만의 우월감... 황홀해-♪"

발그래한 양뺨을 감싸쥐고 숨을 내뱉는 모모의 행동에 나나가 질린듯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속삭여지는 모모의 꼬득임에 나나의 눈빛이 변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앉은 내 앞에 두 녀석이 나란히 섰다.

"오빠아~" "료스케~"

"뭐, 뭐야?"

수상쩍게 활짝 웃는 두 녀석에게 움찔하며 대꾸하자 둘은 배시시 웃었다.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거지?"

"...뭔데?"

"「「용돈주세요. 네에~?」」"

귀엽게 웃는 두 녀석.
평소에도 이렇게 마음이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얼마만큼?"

"그러니까..."

내뱉어진 요구조건에 꿀꺽 침을 삼켰다.
조심스레 입이 열리고, 모모와 나나가 조용히 웃었다.



협상의 결과는...



데굴데굴.

"에잇~" "냐하하~!"

"아아아아아~~~!?"

"심판의 시간이다! 굴러라!" "햣하~!"

세기말 모히칸 마냥 활개치는 모모와 나나. 그리고 마루를 데굴데굴 구르는 나였다.




p.s. ...다음번 장보기 물건은 카레, 당근, 피망이다! 각오해라 꼬맹이들아!


=======================

"큰일이야 아케치군!
현실 시간으로 10년이 지나버렸어!"

근 2년만에 이불이로 뵙습니다...m(_ _)m;
10주년도 날려먹었고, 더 늦었다간 2년 연중 같은 타이틀을 추가 획득할 것 같아서 전반부만 먼저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반부는 나나랑 모모가, 후반부는 다른 녀석이 활약해주겠지요.

그나저나 우습게도 양아치 수염 패션을 졸업하는 제한시간인 10년이 현실에서 먼저 지나가 버렸네요...어허허...OTL;;;
나중에 해당 에피소드 적을 때 참 민망할 듯...;;;


그럼 주말 마무리 잘하시고 다음편에 다시 뵙겠습니다.m(ㅠㅠ)m


p.s. 54화의 내용과 모순이 없도록 하려고, 전반부에 룬과의 대화를 조금 고쳤습니다.

수요일: 코테가와 감기 걸린 날(53화)
목요일: 룬 등교. 코테가와 등교. 미캉과 장보기한 뒤에 폭우가 쏟아짐(54화)
금요일: 코테가와 감기로 또 결석함. 룬은 아이돌 활동으로 결석.
토요일: 이번편(55화)


p.s.2. 참고 이미지
모작크 장군


p.s.3. 요즘 닌텐도 스위치 구하기 힘드네요.
링 피트 어드벤쳐 하고 싶은데...ㅠㅠ

Posted by 루트(根)
,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이른 토요일 오후.
공원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행인들의 눈길이 내게 꽂히는것 같아 기분에 묘하던 차에 동급생을 만났다.
짧은 스커트 차림에 숄더백을 맨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룬과 눈이 마주쳤다.
친근함을 담아 가볍게 한 손을 흔들어보이자 룬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듯 룬의 시선이 위아래로 헤매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룬은 이윽고 나를 향하곤 평소답지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엥?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미심쩍은지 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고, 설마 진짜로 날 못알아본건가?

기억이 잠시 날아간건지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숄더백에 한손을 집어넣는 모양새를 보건데, 이대로 뒀다간 치한 퇴치 스프레이 같은걸 맞을것만 같다.
저번처럼 이로 두꺼비의 옷 소멸 가스 같은게 튀어나왔다간, 난데없이 동네방네 알몸을 자랑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위기감과 속에 과장스레 팔을 벌리곤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아무리 아이돌 활동으로 정신이 없다지만, 설마하니 절친이자 팬1호인 나를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응?"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찌푸리던 룬이 이내 의심스런 눈으로 입술을 달짝였다.

"그 목소리는...혹시, 수염?"

뭐야? 날 잊은게 아니었잖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보통 외모만 보면 바로 알잖아?
나처럼 눈에 띄는 외모가 또 어디 있겠어?"

"...네 말대로, 눈에 띄긴 하네."

입술을 씰룩이던 룬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내 머리 쪽을 빤히 쳐다보던 룬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를 가리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일단, 그 뽀글머리는 대체 뭐야?"

"응? ...아!"

턱부터 이마까지를 감싸고 있는 -얼굴의 몇배는 될만큼 거대한- 검정 뽀글머리에 생각이 미쳤다.

"벗는걸 잊고 있었다..."

"......"

어쩐지 주변 시선이 이상하더라니...
머쓱하니 뽀글머리를 쑤욱 잡아당기자, 룬이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룬?"

"...풋-"

아까부터 씰룩이던 룬의 입술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은데?

"푸픕...! 아, 아하하하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입을 가리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한 룬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정말 최고야, 너!
그거 완전 잘 어울린다 수염! 크-흡! 아하핫~!!"

전혀 칭찬이 아니었다.
웃음이 터진 룬 덕분에 길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야?"
"우와아...굉장한 뽀글머리."
"코스프레인가?"
"모작크 장군?"
"매지컬 쿄코의 악역?"
"아마 맞을걸? 공원에서 꼬마들이랑 매지컬 쿄코 놀이하고 있던데."
"진짜 같은 비쥬얼...굉장한 완성도인걸."
"가발 하나로 완성되는 완벽함!"
"그런데 저기 웃고 있는 여자애 혹시 RUN쨩 아냐?"
"에~ 설마?"

룬의 웃음에 전염되었는지 덩달아 웃는 사람들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룬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재밌으면 너한테도 이 뽀글머리를 씌워줄까? 응?"

"히익-히익-쿠흐흐...! 그, 그랬다간 너, 다른 의미로 전국의 남자들의 적이 될거야, 아핫핫~!"

내 위협에 룬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웅크렸다.
웃음을 그칠 기미는 전혀 없었지만.

"안돼-! 여자애가 뽀글머리가 되어버려!"
"범죄다!"

"아앙~? 네녀석들도 뽀글머리로 만들어줄까!?"

"꺄-!"
"뽀글머리 수염성인이 화났다-!"
"우리 동네에 모작크 장군이 왔어!"
"도와줘 매지컬 쿄코쨩-! 큭큭큭!"

양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번쩍 든 학다리 자세로 위협하자, 행인들은 깔깔 웃어대며 사방으로 달아나버렸다.
젠장, 정말이지 우리 동네 주민들은 하나하나 반응이 좋다니까.
투덜대면서 한숨을 쉬곤, 슬슬 웃음보를 진정시켜가는 룬을 기다렸다.

"정말이지, 만나자마자 웃기지 좀 마, 수염."

뽀글머리 분장을 벗고 룬과 함께 걸었다.
방금전 내 모습을 떠올렸는지 룬은 걷는 와중에도 이따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가발은 왜 쓰고 있었던거야 수염?"

"동네 꼬마들이랑 놀면서 악역으로 모작크 장군을 맡았거든."

"모작크 장군? 그게 누군데?"

"매지컬 쿄코에 나오는 뽀글머리 악당.
세상 모두를 뽀글머리로 만들려 하는 녀석이지."

"세상 모두를 수염투성이로 만드는거랑 뽀글머리로 만드는 것중 어떤게 더 중요해?"

"둘 다 안하거든?"

"하여간 용케도 그런 뽀글머리 가발을 구했구나?"

"실은 같이 놀던 동네 꼬마녀석한테 선물 받은거야.
매지컬 쿄코 경품으로 받은거라는데, 자기가 쓰긴 싫다면서 나한테 주더라고."

"희안한 상품도 다 있네.
뭐, 수염 너한텐 딱이었지만."

웃음을 삼킨 룬이 내 머리를 향했다.

"그나저나 머리카락이랑 수염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뀌는구나."

"하긴. 못 알아볼 정도로 인상이 바뀔 줄은 몰랐는데."

"난 혹시나 네가 평소의 금발 올백에 질려서 스타일을 바꾼건가 싶었어.
덕분에 실컷 웃었지만 말야."

키득거리는 룬의 놀림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너 의외로 동네 꼬마들에게 인기 많나봐?
딱 봐도 불량배 같이 생겼으니까 애들이 놀라서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꼬마들이 의외로 겁이 없으니까.
예전에 꼬마들 놀이에 휘말린 뒤로는, 이따금 어울리게 되더라구."

덕분에 수염성인이라거나 전설의 피구왕이라거나 따위의 소문이 나도는 처지가 되었지만, 편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싫지 않으니까.
다만, 꼬맹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호응해주는건 부끄러우니까 적당히 해줬으면 한다.

우스꽝스런 가발에 얽힌 룬의 놀림도 끝나고 화제가 바뀌었다.
룬이 아이돌 활동으로 바빴던 가운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같은걸로 말이다.

"수염."

"왜?"

"풍기위원 말인데."

"코테가와?"

"응. 걔, 그저께 감기 때문에 학교 쉬었잖아.
이젠 좀 괜찮아 졌대?"

"으음, 아직이려나. 어제도 코테가와가 학교를 쉬었거든."

"그래? 병문안 때는 그렇게 안보였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나빴나보네."

"글쎄..."

그저께 병문안 했을 당시 코테가와네 어머님 말씀으론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는데...
성실한 코테가와가 꾀병으로 쉬었을리도 없고.
설마 병문안 때 왁자지껄 떠들었걸로 악화된걸까?

"아무튼, 다음주엔 나아서 학교에서 만나면 좋을텐데."

한숨을 내쉬자 룬이 눈을 샐쭉 뜨곤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혹시~ 어제도 몰래 풍기위원 간병을 갔다거나 한거 아냐?"

놀리듯 은근히 묻는 룬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젠 시즈 혼자 코테가와네 집에 찾아갔어.
미카도 선생님께 감기약을 며칠분 더 타갔다고 하더라."

의욕 넘치게 간호사 복장으로 구급상자를 챙겨들고 뛰어가던 시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뭐, 덜렁대다 넘어져선 유체이탈해버린 시즈 때문에 하교길이 뒤집어졌지만."

"그, 그래?"

"담임인 호네카와 선생님은 기절해 버리고, 위원장인 사이렌지는 비명을 지르다 들고있던 프린트물을 쏟아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나와 시즈가 둘이서 호네카와 선생님의 영혼을 도로 원래 몸으로 되돌려 놓는 사이에,
하루나가 쏟아버린 프린트물을 리토랑 친구들이 함께 주워주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그 뒤엔 아무일 없었던것 마냥 기운차게 병문안을 떠난 시즈도 어지간히 꿋꿋했지."

고개를 내젓자 룬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라사메랑 풍기위원은 사이 좋아보였으니까."

"룬 너도 둘과 가까워 보이던데?"

"내가?"

"너 저번에 코테가와랑 시즈랑 함께 하교했잖아?"

"그땐 조금 얘길 나눠보고 싶어서 그랬던것 뿐인데."

켕길것도 없는데 괜스레 튕기는 모양새가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아 입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니까 별로 친하거나 한건 아니다?"

"시꺼. 나라고 좋아서 이런줄 알아?
나 2-A로 반을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말야.
거기다 아이돌 활동으로 바빠서 학교에 있는 시간도 부족한데 날더러 어쩌란거야?"

"그치만 너, 바쁘단 와중에도 코테가와 병문안도 갔었고.
지금도 걱정되니까 코테가와에 대해 물어본거잖아.
그거 이미 친한거 아냐?"

"...아는척 하긴..."

"훗훗."

"이상하게 웃지마!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아니. 의외로 상냥하구나 싶어서."

"......"

내 말에 룬을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왜그래?"

"의외라... 수염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알 알았어."

거기서 트집을 잡는거냐?
어쩌면 내 말을 놀림으로 받아들인 탓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곤 째려보는 룬이었지만, 괜스레 까다롭게 구는 녀석에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 상냥함의 절반이라도 나에게 나눠주지 않을래?"

"너랑 대화해주는 것 만으로도 나는 넘칠만큼 상냥한게 아닐까? 응? 수염?"

"너무해! 절친인데!"

"절친 아니거든? 은근슬쩍 밀어붙이지마."

"아니아니, 생각해봐. 나랑 코테가와, 시즈, 그리고 룬 너는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공통점이 있잖아?"

"그게 뭔데?"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룬에게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우리 넷은 2-A의 아웃사이더 동맹이니까!"

"뭔소리야?"

어처구니 없다는 룬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2-A에 나중에 합류한 학생들이란거지.
나와 코테가와는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2-A, 그러니까 원래 1-A였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었지.
시즈는 미카도 선생님께 몸을 얻고난 뒤에야 2-A로 편입했고.
룬 너는 2학년 들어서 다른 반이 되었다가 2-A로 돌아왔잖아.
이렇게 넷이 합쳐 아웃사이더 동맹!"

"두번 말하지마. 그런 부끄러운 호칭."

"영어니까 그럴싸해보이지 않아?"

"전혀. 그리고 설명이 엉성해!
그냥 1-A가 아니었던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말했으면 알기 쉽잖아?"

"어? 하지만, 룬 넌 1학년때 유우키랑 라라랑 같은 반이었잖아?"

내 말에 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렌이었고.
난 2학년 때부터 등교했으니까."

"......어? 에!? 진짜!?"

"뭘 그렇게 놀라는거야?"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란 룬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방금 룬의 발언은 『지금에서야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급이다.
당연히 말이 횡설수설하게 된건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 그...! 난 지금까지 룬 네가 1-A 반인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반 친구들을 알게 된건 올해 여름이 되어서거든?"

"진짜냐..."

경악하는 날 이상하게 보던 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수염 네가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1학년때 전학왔을 땐 렌으로만 등교했었어.
지구에 와선 몸이 뒤바뀌는 패턴도 바뀌어서, 내 몸으로 돌아온건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가능했으니까.
거기다 내가 제대로 몸이 바뀌게 되니까 2학년에 올라선 나 혼자만 다른 반이 되어버렸고."

룬의 푸념이 귀를 기울이면서도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2학년 첫날 복도에서 리토와 실랑이를 벌이던 렌이 룬으로 변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룬으로 변한 렌을 보고 여자애가 됐다며 놀랐던 리사랑 미오에게 라라가 처음으로 룬을 소개해준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때 리사랑 미오가 룬을 보고 놀랐던건, 렌이 '처음보는 여자애(룬)'로 변신하는걸 처음봤기 때문이라는거군.
그 전까지는 룬과는 안면도 없었다는건데.
즉, 2-A 학생들에게 가장 낯선 이는 나도, 코테가와도, 시즈도 아닌 룬이 되어버리는거다.

어긋나 있던 인식을 깨닫곤 당황스러움을 추스르는 동안, 룬의 이야기는 다른 반으로 있었던 2학년 초반의 지루한 일상에 대한 푸념이 되어있었다.

"리토군을 만나는데 반이 다르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가뜩이나 렌이랑 활동 시간을 나눠야 하니까 시간도 없어 짜증만 나구."

"그건 고생이었겠네.
그래도 늦게나마 2-A로 반이 바뀌어서 다행이지?"

"다행이라기보단 뿌듯하단 기분?
2-A에 들어온건 내가 그 변태 교장을 상대로 교섭해서 쟁취해 낸거니까 말야."

룬은 의기양양하게 코를 세우곤 흐흥- 콧소리를 내더니, 어째선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정작 2-A에 들어왔더니 아이돌 활동 때문에 등교하는 날이 줄어버렸지만."

"하하...힘내."

"전혀 의욕이 나지 않는 응원이네. 고마워."

아니꼬운듯 룬이 대꾸했다.

"...아무튼, 요점은 그거야.
2-A 녀석들에겐 수염 너보단 내가 더 어색한 상대일걸?
신학기로부터 한참 지나서 2-A에 들어온데다 아이돌 활동으로 등교도 뜸했으니까."

자기가 말해놓곤 낙담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린 룬의 모습에 당황해서 위로할겸 다독였다.

"야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모미오카나 사와다는 너랑 친해 보이던걸?
룬룬이라고 별명까지 지어 부르잖냐."

"...아아, 위원장이랑 친하게 지내는 둘 말이지?
하긴, 걔들은 넉살이 좋더라.
너 상대로 장난을 거는 애들이니까. 보통이라면 너같은 불량배에겐 무서워서 말도 안 붙일텐데."

부정할 수가 없어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다만, 기껏 위로해주려는 사람의 정면에서 험담을 내뱉는 룬 너의 뻔뻔함도 만만찮다고 생각해.
어찌됐건 가라앉을뻔 하던 분위기도 괜찮아졌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찌됐건, 환영합니다! 아웃사이더 동맹에 오신 것을!"

"와아- 전혀 기쁘지 않은 환영."

무덤덤한 말과 달리 룬은 조금 미소지었다.

화제는 라라랑 우리집 식객 둘(나나와 모모)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만화의 마감으로 바쁜 저스틴을 대신해서 라라가 나나와 모모에게 용돈을 대신 전해주기로 했다는 얘기.
나나랑 모모가 용돈도 받을겸 내일 라라를 만나러 미캉네 집에 놀러갈거라는 얘기.
사이바이씨의 마감을 돕기 위해서 리토랑 미캉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갈 예정이라는 얘기.
만화가로서 '은하의 랩소디'라는 작품으로 수상한 저스틴의 활약.
거기서 '라라의 호위대장이 어째서 만화가를 하는거야?'라며 기가막혀하는 룬의 핀잔.

"그런데 나나랑 모모의 용돈은 그냥 라라가 수염 너한테 대신 건네주면 되는거 아냐?"

"남을 통해서 전달만 하는거랑, 본인이 직접 용돈을 쥐어주는거랑은 만족감이 다를테니까.
그리고 용돈 운운하지만, 어쩌면 동생들을 집에 초대할 구실로 삼은걸지도 모르지."

"헤에...라라 그 사고뭉치도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렇지? 라라도 묘하게 내일을 기대하고 있던걸 보면 뭔가 자매끼리 하고 싶은거라도 있는거려나?"

드물게 라라에게 호의적인 룬의 발언에 맞장구쳤다.

"...뭐,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집보기지만."

"응? 너랑 라라네 동생들이 같이 놀러가는거 아녔어?"

"라라가 부탁했거든.
내일은 나나랑 모모만 왔으면 좋겠다고."

  • 미안해 료스케! 그치만 하루나랑 약속했는걸.

하루나가 어쨌길래 나나랑 모모만 오라는걸까.
의아해서 하루나를 쳐다봤을때 하루나도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는걸.
그래도 초대에 쏙 빠진건 조금 쇼크여서, 그 자리에서 깊게 물어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가 버려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모처럼 자매들끼리만 있는건데 눈치없게 방해할 수도 없잖아."

"그런것 치고는 풀죽어 보이는걸?"

눈치빠른 룬의 지적에 웃는데 입맛이 썼다.

"으음, 혼자 있는건 오랫만이라 그런가봐.
내일은 적당히 시간을 보낼거리를 찾아봐야지."

"하여간, 그렇단건 넌 내일 할 일이 없단거지?"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

"잘됐네."

"뭐가 말야?"

"할일 없는 수염 네가 심심하지 않도록, 내가 친절히 일거리를 준다는거야."

"어, 그러니까...감사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하는 내게 룬은 실소를 흘리더니 용건을 말했다.

"별건 아니고 택배 하나만 대신 받아줘.
지구의 택배를 받으려는데, 마땅한 수신처가 없어 곤란했거든."

"그러고보니 넌 우주선에서 살고 있었지?"

지구에 온지 1년은 되었을텐데 여전히 우주선 생활이라니, 아직은 지구에서 거주지를 구할 생각은 없나보다.

"응. 은하통신판매에서 사는 물건이라면 그냥 우주선에서 받으면 되는데, 지구 물품의 경우는 그게 안되거든.
고작 택배 하나 받겠다고 『탑 아이돌 RUN의 정체가 실은 우주인이었다!』라고 밝혀지는 꼴은 절대 당하기 싫어!"

자기가 말하고서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한차례 고개를 흔들곤 룬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해줄거야?"

"그정도야 간단하지. 맡겨줘."

"고마워. 그럼 주소 알려줘.
지금 배송 요청하면 내일 중에는 도착할테니까."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 룬과 느긋히 대화를 이어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앞이었다.

"어쩌다보니 집까지 동행하는 모양새가 됐네."

"괜찮지 않아? 수염 네 집 주소만 아는것 보다는 직접 와보는편이 나중에 물건 받으러 올 때 헤메지 않을테니까."

"그것도 그러려나."

그럴싸한 말에 수긍하곤 문을 열려는데, 무슨 생각인지 룬은 내 손에 들고있던 뽀글머리를 집어가더니 내 머리에 폭-하고 씌웠다.
순식간에 완성된 모작크 장군 코스프레.

"뭐야?"

"그냥. 라라네 동생들 반응이 궁금해서.
아마 다들 너인줄 모를걸?"

"설마 그러겠냐.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 중에 남자는 나 밖에 없는데."

헛웃음을 흘리며 현관을 열자,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나다.

"아, 료스케 왔어?"

반기듯 나오던 나나가 갑자기 멈춰섰다.

"......누구?"

"아키츠 료스케."

"료스케!?"

경악하는 나나의 반응에 불만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를 봐도 나잖아?"

"뽀글머리잖아!?"

"...풋!"

결국 룬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돌의 체면인지 입을 가리면서 소리를 죽이는 룬에게 나나의 의식이 향했다.

"어, 너는?"

"안녕. 나나였지?"

금새 표정을 추스리곤 미소짓는 룬에게 감탄하는데 나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 잘도 왔네."

어쩐지 떨떠름해하는 어조에 룬이 눈을 깜빡이다 생긋 웃었다.

"으응~ 나, 뭔가 했던가?"

"......"

어쩐지 미묘해진 분위기에 룬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럼 아키츠군. 난 이만 가볼께."

아키츠군이라니, 설마 나나 앞이라고 내숭이냐?
미소지으며 룬은 깔끔히 몸을 돌렸다.

룬이 떠나가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나나가 불만스레 혀를 찼다.

"어쩌다 저런 녀석이랑 같이 오게 된거야?"

저런 녀석이라니, 의외로 룬에 대한 평가가 나쁘다.

"길가다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집까지 와버렸어.
그런데 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라의 친구잖아."

"별로, 언니의 친구라고 나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건 아니잖아."

나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녀석, 분명 모모랑 같은 타입이야.
겉으로는 친한척 해도 속으론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른단 말야."

너 지금 룬이랑 모모를 동시에 까내리고 있잖냐...

"그러고보니 모모는?"

"미카도 선생님한테 갔어.
약초 관련으로 얘기를 나눌게 있다고 했거든."

답하던 나나가 손으로 내 머리께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도 슬슬 그 이상한 가발은 벗어."

"아..."

나나의 지적에 슬그머니 뽀글머리 가발을 벗고서 집에 들어섰다.

"......"

팔락-

"......"
"......"

팔락-

"「「......」」"

팔락-

팔락-

"잠깐, 나 아직 다 못봤어."

옆에서 뻗어진 손이 페이지를 도로 앞으로 넘겼다.
소파에 앉아서 고양이 잡지를 읽던 중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나나였다.
묵묵히 사진을 감상하던 나나가 문득 물었다.

"료스케는 고양이를 좋아하는거야?"

"응. 사랑스럽잖아.
다소 멋대로에 앙탈을 부리긴 하지만 그게 좋아."

시시덕거리며 사진을 감상하던 중 한곳에 눈이 고정됐다.

"아, 이녀석 귀엽지?"

"어디어디?"

"여기. 구석에 있는 작은 녀석 말야.
오드 아이인가? 양쪽 눈 색이 다른데?"

"오오..."

내 말을 따라 사진 한구석에 자그맣게 보이는 녀석에 얼굴을 가까이 한 나나가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나랑 같은 감상을 가진것 같아서 기쁘긴 한데...

"나나? 그렇게 얼굴로 가리면 내가 못 보는데?"

"헤헤, 이녀석 귀여워..."

"야..."

잡아먹을듯 잡지에 얼굴을 가까이 댄 나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잡지를 옆으로 빼냈다.

"잠깐? 나 아직 다 못 즐겼어!"

"너만 눈이냐? 나도 고양이 보고 싶다구."

항의하는 나나에게 콧방귀를 뀌곤 잡지를 들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야, 치사하게! 그럼 너만 보는거잖아!"

"이게 방금전 나나 네 행동이다. 알았으면 반성하는게 어때?"

"이잇!"

불쑥-! 찰싹!

"뿌엣-?"

잡지를 얼굴에 가까이 해서 혼자 읽으려는 척 하던 내 얼굴을 나나가 자기 얼굴로 밀어냈다.
정확히는 자기 뺨으로 내 뺨을 밀어버린거지만.

"으기깃...!"

"스, 스톱!?"

고양이 감상과는 별개로 뺨으로 뺨이 밀리는 상황도 나쁘진 않지만, 이대로 당할 수야 없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게 유치하지만 즐거운법.
나나의 손길을 피해 한손으로 잡지를 들어올렸다.

"하하하! 봐라! 팔길이가 긴 내 쪽이 대!승!리!"

"치사해!"

"와하하하하! 함께 보던걸 먼저 독차지한 녀석이 누구더라?"

"으...! 그 팔 정말 안내릴거야?"

"내려야지. 나도 읽어야 하니까. 단, 방금처럼 나만 볼거다!"

"유치해!"

"최고의 칭찬이야."

과장된 자세로 뽐내듯 책을 얼굴에 가져가는 시늉을 했더니 별안간 나나가 달려들었다.
냉큼 내 무릎에 올라타 앉은 나나는 나와 책 사이 공간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걸로 시야 확보!"

...너 정말 저돌적이구나.
돌핀팬츠 차림으로 남의 무릎에 앉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기분도 모르고 나나는 남의 무릎 위에서 팔자 좋게 까불어 대고 있었다.
놀라서 움찔했던게 부끄러웠기에, 나직이 맥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꺅!?"

귓가에 입김이 닿았는지 나나가 앳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료스케?"

당황스레 귓가를 매만지며 올려다보는 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자세를 바로하다가 무심결에 그만...
고의는 아니었어. 미안해."

"...뭐어, 일부러가 아니면 됐어."

귓볼을 만지작거리던 나나는 이내 고개를 바로했다.
다시금 잡지로 묵묵히 시선을 집중하는 나나에게 안도하곤, 나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번엔 또 뭐야?"

"잡지가 안 보여서."

"헹!"

내말에 오히려 장난스레 내 볼을 밀어내는 나나의 얼굴 탓에 고개가 돌아갔다.
이 장난 계속하는거야?

"흥이다! 료스케는 얌전히 의자나 하고 있으라구."

"내 고양이!"

돌아간 내 고개랑 반대 방향으로 잡지를 들고선 흥얼거리며 감상하는 나나의 모습에 오기가 솟았다.

"어이쿠! 이런."

"꺅!?"

나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화들짝 놀란 나나가 몸을 떨었다.

"뭐, 뭐야 또?"

"의자에 앉았으면 안전벨트를 해야지."

"뭔소리야! 네가 자동차야?"

"응. 탑승감 끝내주지?"

"갑갑해!"

"그럼 얌전히 핸들을 이쪽으로 돌리는게 어때?
그러기 전까진 안전을 위해서 안전벨트를 풀 수 없다구?"

"핸들? 이상한 비유 말고 쉽게 말해!"

"내 냥이 내놔!"

"이 고양이 애호가!"

허리를 잡힌채 무릎 위에서 바둥거리던 나나가 한손을 뒤로 돌렸다.

간질간질-

"아하하하핫!? 그, 그만!?"

옆구리를 간질이는 나나의 손가락에 몸을 움찔 비틀었다.

"자, 잠깐!? 허리 흔들지마!"

"네 손부터 치우고 얘기해!"

"이게...!"

서로 지기 싫다는 오기인건지 둘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지러움으로 몸을 꿈틀꿈틀 비트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큿, 아, 아하하! 내, 내 냥이!"

"윽! 허리 흔들지마, 의자면 얌전히 좀...!"

네가 간질고 있어서거든!?
누가 뭐래도 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냥냥! 냥냥!"

"푸흡, 우, 웃기지마 료스케."

나나의 입술이 씰룩이면서 허리를 간질던 손길이 약해졌다.
이 기회를 놓칠순 없지!
열심히 고양이를 연호했다.

"냥냥! 냐냥냥!"

"...풋!"

멀찍이서 터져나온 웃음 소리에 나와 나나는 우뚝 멎었다.

"「「......어.」」"

"아."

모퉁이에 숨어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던 모모와 눈이 마주쳤다.

"「「「......」」」"

"...모모?"

"엣, 음...다녀왔어 나나."

웃음을 죽이곤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모와 반대로 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 언제 왔어?"

"조금전일까?"

"구체적으론?"

"탑승감 어쩌고 할 때부터?"

"딱히 이상한거 안했거든!"

켕기듯 나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모모가 가볍게 웃었다.

"알아. 둘이서 힘내서 냥냥하고 있었잖아?"

...뭘까. 이 틀리지 않으면서도 틀린 듯한 발언은.

"사이 좋네요."

"그런거 아니거든!"

"그런데 대체 뭘하다 그렇게 된거죠?"

"...모든건 고양이를 향한 마음이 불러온 슬픈 사건이었던거야."

"뭐라는 거야?"

나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저녁엔 내일 라라를 보러 갈때 가져갈 먹거리를 사러 나왔다.
뭘 사갈지 고르는 과정에서 모모와 나나 사이에 조금 실랑이가 있었지만.

"...나나? 어째서 조각 케이크가 하나만 빼곤 전부 당근 케이크야?
나 당근 싫어하는거 알고 있지? 그리고 이럼 다양하게 먹지 못하잖아."

"이러지 않으면 모모 네가 혼자 다 먹을거잖아?"

"...누굴 먹보처럼 생각하는거니?"

눈을 가늘게 뜬 모모에게 나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 그렇게 말해놓고선, 저번에 내 몫의 아이스크림까지 먹었잖아!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두던건데...!"

"아하하, 그랬던가?"

나나의 울분섞인 반응에 모모는 난처한듯 시선을 피하며 웃어넘겼다.
부끄러운지 낯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다이어트 한다고 모모가 저칼로리 식단을 준비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운동하다 한번 쓰러지고 나서는 다이어트도 그만두기로 한걸로 알았는데,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모모의 먹성이 늘었나?
삐져버린 나나를 나나를 달래며 사과하는 모모의 모습을 보건데, 최근 모모의 군것질이 늘어난 듯 보였던건 그저 기분탓이 아니었나보다.

"칫...봐주는건 이번만이야?
다음에 내걸 먹으면 그땐 두고봐?"

"그래, 알았다니까."

모모의 설득에 한층 누그러진 나나는 잠시 투덜거리더니 당부와 함께 한발 물러섰다.

귀가후.
간식으로 사온 아이스크림컵을 냉동실에 넣으려는 나를 말리며 나나가 펜을 들었다.
그리곤 컵 바닥에 슥슥 이름을 적어넣었다.

『나나』,『모모』,『아케치』

진짜냐...
먹는거에 이름 적어두는거 처음 봤어.

"아케치 아니고 아키츠라니까..."

"뭐 어때? 뜻만 통하면 됐지."

되긴 뭐가 돼...
천연덕스레 대꾸하는 나나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나나가 덧붙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면, 야미랑 얘기할 때 실수로 널 아케치라고 불렀는데 의외로 야미의 반응이 좋길래 버릇이 된걸지도..."

야미가?
...소년탐정 김○일의 애독자인 그 녀석이 '아케치'라는 별칭에 어떤 상상을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나의 말에 모모가 쿡쿡 웃으며 거들었다.

"잘됐네요. 똑똑해보이는 성씨잖아요? '아케치'씨?"

공부하기 싫어서 가출한 너희들에게 필요한 성씨가 아닐까?

고개를 젓고는 지금 먹을 아이스크림을 뺀 나머지를 냉동실에 넣었다.
나나와 모모와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문득 이번 여름은 정말 길구나 싶었다.
가을이 잠시 왔다 싶더니 도로 여름이 되어버리고.
대체 언제 여름이 끝나려나 모르겠네.

Posted by 루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