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게 보이는 약이 없냐고?"

"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양호실.
우주에서 이름을 떨치는 의사인 미카도 료코 선생님과 상담중이다.
가끔씩 사람을 골려먹는걸 좋아하는 미카도 선생님은 아무래도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어째서 그런걸 찾고 있는거니 아키츠군?"

"...그게..."

최근들어 주위로부터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10년은 더 들어 보인다느니, 아버지 뻘로 보인다느니 하는 말은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미카도 선생님은 웃음소리를 죽이곤 물끄러미 나를 바라 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미카도 선생님의 모습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것 같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으음...피부 트러블 같은건 딱히 없는데..."

요리조리 내 얼굴을 둘러보다가 살짝 볼을 잡아보기도 하면서 잠시 살펴보시던 미카도 선생님은
이윽고 내 정면에 앉아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씀하셨다.

"이런말 하긴 이상할진 모르지만... 아키츠군, 네 피부는 깨끗하단다.
날카로운 눈과 수염 때문에 어른스러워 보이긴 해도
피부건강의 측면에서 네 또래의 아이들과 그렇게 큰 차이는 없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가, 감사합니다."

말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어른스럽다니, 겉 늙어보인다는 말과는 들을때의 기분이 다르다.

"뭐, 정 외모가 신경 쓰인다면...우주생물 「모도리 스컹크」는 어때?
생물을 젊게 만드는 특수한 가스를 발생하는 생물인데."

"아뇨, 거기까지 바란건 아닌데요..."

나이에 맞게 젊게 보이고 싶은거지 코흘리개 어린애로 변하고 싶은 맘은 없다고요?

"흐응...아쉽네.
그럼 이거라도 써."

약간 아쉬운 티를 내던 미카도 선생님은 양호실 한쪽에 배치된 함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셨다.

"'미끌미끌 로션'...?"

"「은하 통판(통신판매)」에서 샘플로 받은 로션이지.
어느정도 피부를 매끄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
보습기능이 뛰어난 거라고."

"헤에..."

살짝 로션을 짜서 손가락에 발라보았다.
진득한 느낌의 미끌미끌한 하얀 액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떼자 길게 하얀 실이 생겨났다.

"저기...이거 조금 끈적하지 않아요?"

"그만큼 효과가 좋단다.
사용해보고 괜찮으면 얘기하렴.
정식으로 구매를 신청해둘테니까."

"조금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혹시 상하거나 한건 아닌가요?"

"우주의 특수한 식물에서 추출한 액이 재료로 쓰여서 그런거니 너무 걱정마렴."

"으응..."

조금 고민을 하다가 '미끌미끌 로션' 샘플을 집어들었다.
우주인들이 쓰는 물건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우주인용 약을 먹을 각오까지 하고 왔는데 이정도 일상용품 정도야...
몸에 좋은건 일단 쓰고 보는거지.



미카도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한 뒤 양호실을 나와 반으로 되돌아 가던 중
프린트물을 한가득 든 채 걸어오던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가꾸지 않고 일자로 내린 수수한 앞머리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있는 긴 생머리.
동글동글한 안경 너머로 비치는 순진한 눈동자의 여학생.
텐죠인 그룹의 영애 - 텐죠인 사키 선배를 보좌하는 후지사키 아야 선배다.

"아야 선배?"

"아, 아키츠군?"

오랜만의 만남에 아야 선배는 놀란듯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는데...
멋적어 하다가 아야 선배가 양손에 가득 들고 있는 프린트물로 눈이 갔다.

"아야 선배, 그건?"

"아...교무실에서 받아온 프린트물이에요."

혼자 들기엔 조금 양이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그럼 제가 들어드릴께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는...앗?"

사양하는 아야 선배로부터 프린트물을 빼내어 손에 들었다.
조금 멋대로일진 몰라도,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의 아야 선배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걸 걱정해서 항상 사양하는 느낌이니까.
정말로 도움받는걸 곤란해 한다면 돌려주겠지만...

아, 소극적이란 표현은 물론 사키 선배와 관련된 일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사키 선배를 위할때 만큼은 적극적으로 바뀌는데,
그 적극성의 반만큼이라도 아야 선배 자신에게 쏟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이 프린트물을 아야 선배의 반으로 들고 가면 되는건데...?

"저...고, 고맙「저기...」...네?"

말을 꺼내려다가 의아한듯 쳐다보는 아야 선배에게 민망해하며 물었다.

"이거 몇 반으로 들고 가는거죠?"

"...「3-D」에요."



아야 선배와 함께 3-D 교실로 가면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야 선배는 사키 선배를 진심으로 따르다 보니 주로 사키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선배는 최근 사키 선배가 멍한 모습으로 보내는 시간이 잦아 걱정이라고 했다.

가라사대, 몽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고 수업시간에도 열중하지 않는다고.

의외다. 언제나 우아하고 도도하며 자신감에 넘쳐 지내는 사키 선배가 그런 모습이라니.
사키 선배가 그렇게 변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키 선배의 통학용 자동차 바퀴가 하수도 구멍에 빠졌을 때.
저스틴의 도움을 받고 사키 선배가 저스틴에게 한눈에 반하는 사건」

이게 그나마 사키 선배가 바뀐 이유로 내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인데...
솔직히 확신은 못하겠다.
현재 시점에서 사키 선배가 저스틴을 만났는지도 알수 없는데다가...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사건들은 단지 사키 선배의 삶의 한부분일 뿐,
사키 선배의 인생 전부가 아니니까.

으응, 그래도 사키 선배가 그외의 문제로 그렇게 고민하는건 도무지 상상이 안가고...

"...역시 사랑인가?"

"엑? 사, 사랑!?"

무심코 중얼거린 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며 아야 선배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니?」
「응. 사랑이라고 하던데?」
「저 선배 굉장히 놀란것 같지 않았어?」
「뻔하지. 옆에 있는 녀석을 봐.
그 악명높은 아키츠 료스케라고.
분명 짐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좋은 점을 어필하려고 한거야.
그리고 방심한 선배에게 고백한게 틀림없어.」
「어쩜 뻔뻔스럽게. 그런데 수법이 구식이다 얘.」
「수수해보이는 타입이라 방식도 고전적인건가.」
「한물간 수법으로 여자를 낚으려고 하다니 유치해.」

"아...아..."

후다닥-

"아야 선배!?"

아야 선배는 어쩔줄 몰라하더니 돌연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잠깐만요! 그쪽은 3학년 교실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고요?
잠시 뒤면 수업이 시작할텐데...

한숨을 쉬곤 손에 든 프린트물이 흩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이미 복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아야 선배의 뒤를 쫓았다.
운동계 아가씨는 아닌걸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발이 빠르네...

멀리서 들리는 가쁜 숨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 교사의 뒤뜰에 도착할 즈음,
타닥거리던 아야 선배의 발걸음 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는 아야 선배의 등을 보면서 조용히 다가갔다.

"하아...하아...하아..."

"괜찮아요 아야 선배?"

"읏...?!"

아야 선배는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 보았다.

"아키츠군?"

"갑자기 뛰쳐나가서 놀랐다고요 아야 선배."

"...절 쫓아오신 건가요?"

"네."

"어떻게...?"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를 따라서 왔지요."

"엣..."

아야 선배는 붉어진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양볼을 가렸다.

"...아키츠군은...짖궂어요."

"아? 하하...죄송합니다."

고동소리를 들은건 사실이지만요.
워낙 급하게 뛰어서 그런지 심장의 박동도 꽤 크게 울렸고.

잠시 열을 식히던 아야 선배는 얼굴 표정을 수습하곤 사과해왔다.

"저...아키츠군. 오해받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딱히 사과 받을 일도 아니고 아야 선배의 잘못도 아닌걸요."

"그래도...혹시 기분 나쁘진 않으셨나요?"

"이 나이 또래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니까요.
미인을 도와주는 남자애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죠."

"노, 농담하지 마세요."

얼굴을 외면하고 뺨을 부여잡던 아야 선배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방금전 아키츠군의 말 말인데요...
사키님이 이상해지신 이유를 알아낸건가요?"

"알아냈다기보단 예상이지만...
평소의 도도한 사키 선배가 그렇게 방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역시 '사랑'이 원인이 아닐까요?"

"...근거는요...?"

"그..."

"그?"

그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아야 선배!
근거? 그냥 무심코 꺼낸 말이라고요.
원인을 판단할 수 있을만큼 사키 선배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인데 근거가 있을 턱이 있나.
'머리속에서 떠오른게 그것뿐이라 찍었어요'라고 말하면 바보취급 당할것 같아서 썰렁한 말로 얼버무렸다.

"...소녀는 사랑을 할 때 아름다워지니까요."

"......"

어딘가 통속적으로 들리는 대사를 내뱉고 민망해하고 있으려니
아야 선배는 가슴께에 올린 양손을 쥔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이대로 계속 대치상태로 있다간 원치도 않는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슬슬 수업시간이 다되어 간다.

"아야 선배?"

"네?"

"밖으로 나온지 시간도 꽤 지났고...슬슬 교실로 들어가야겠네요."

"아...! 벌써 이렇게 시간이!"

허둥지둥 발걸음을 놀리는 아야 선배의 뒤를 따라 뒤뜰을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 아야 선배의 반인 3-D의 문앞에 도착하자
아야 선배는 내게서 프린트물을 건네받고 인사했다.

"들어다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별말씀을. 오히려 시간만 더 걸리게 만든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아키츠군과 이야기 하는 것도 즐거웠으니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도 늦었으니 빨리 반으로 가세요."

"그래야 겠네요. 아, 그리고..."

"네?"

교실로 들어가려다 고개를 돌린 아야 선배에게 말했다.

"안경 바꾸셨네요? 훨씬 어울려 보여요."

예전의 불투명한 안경이 아닌 투명한 안경을 쓴 아야 선배는
맑은 눈동자가 매력적인 순수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칭찬을 들은 아야 선배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아키츠군..."

...놀랐다.
저렇게 웃을수도 있었구나 선배는.

불투명한 안경일 때는 맹한 모범생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순진함과 청조함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니...
안경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보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다.
교실로 들어간 아야 선배의 뒷 모습을 보며
오늘은 진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곤 서둘러 2-A로 되돌아갔다.



며칠 후, 사키 선배가 라라를 상대로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건데
사키 선배의 고민에 대한 예상은 아마도 맞은것 같다.

저스틴이 「저는 라라님의 충실한 하인입니다」라고 말한게 계기였을까?
사키 선배의 통학용 자동차 바퀴가 하수도 구멍에 빠졌을 때 저스틴의 도움을 받고
사키 선배는 저스틴에게 한눈에 반한 것 같았다.
가라사대 「생각해보면 충격적인 만남이었어요」라고...
한손으로 자동차를 들어올리는건 확실히 충격적이긴 충격적이지...

게다가 저스틴은 훤칠한 장신에 외모도 영화배우 뺨칠만큼 멋지니까.
매일 입고 다니는 해골 갑옷 패션만 벗는다면 어딘가의 연예인으로 착각할 만큼 멋진 녀석이다.
또한 은하의 지배자 데빌루크 왕가의 친위대장으로서 그 검술 실력은 두말할 나위없이 초일류.
검술에 한정한다면 아마도 최강이란 칭호를 붙여도 좋을 것이다.
초창기 트러블 설정시엔 저스틴이 최강의 적캐릭터 포지션을 맡을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최근 저스틴은 라라의 부탁으로 유우키 사이바이 선생님-리토와 미캉의 아버지이자 유명 만화가-의 어시스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휘둘리는 역할만 맡는 불쌍한 녀석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의외로 저스틴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만화가로서의 재능을 보이면서 신인상을 목표로 하는 저스틴은 만화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다.

「데빌루크왕실 친위대 대장이자...
만화가 유우키 사이바이의 '스튜디오 사이바이'의 치프 어시스턴트 저스틴」이라고 강조하는 걸 보면 말이다.

리토나 라라에겐 도움 안되는 사람으로 찍히며 괄시받는 저스틴이지만
다른 이들보다 빨리 지구에 친숙해져 가는 저스틴이 부디 스스로가 꿈꾸는 미래를 맞이하길 바란다.


아무튼, 그런 저스틴을 사키 선배가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사키 선배의 애정 공세는 어째 자꾸만 헛도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에 찾아온 저스틴에게 사키 선배가 다가가 주저하면서도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갑자기 「꺄-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리토가 엄청난 속도를 내며 사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키의 바로 뒤편에 있는 수돗가를 향해 달리던 거지만.

「혀...혀가 불타고 있어! 무...물!」
「에...잠깐...꺄~!」

퍼억-!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사키 선배의 목소리도 허무하게
리토는 결국 사키 선배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충격을 받고 쓰러진 리토와 사키 선배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둘이 쓰러진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우...우."

"또 당신입니까! 왜 항상 저를...! 핫?"

리토와 뒤엉켜 바닥에 쓰러진채 화를 내던 사키 선배는 갑자기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넘어질때 치마가 젖혀져 속옷을 훤히 드러낸 사키 선배의 뒷모습을 저스틴이 당황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리토~! 어? 저스틴?"

손에 붉은색 가루가 휘날리는 도시락을 들고 리토를 향해 다가오던 라라가 저스틴을 보았다.
...설마 스스로 만든 도시락을 방금전 리토에게 먹인거니 라라.
우주인도 먹고 며칠은 드러눕는다는 극약을?
(저런걸 먹어도 잠시 괴로워 하다가 멀쩡한 리토를 보면 역시나 인간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키와 시선이 마주친 저스틴은 곧바로 눈을 감으면서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아...저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안색이 파래진 사키 선배는 저스틴이 떠나고 난뒤에야 정신을 차리곤 리토를 노려보았다.

"잘도 그분 앞에서 나를...
오늘은 절대 용서 못합니다!"

"네녀석! 또 이런 짓을!"
"사키님에게 창피를 주다니!"

"우와아아아아~~!죄송합니다~~~~!"

도망가는 리토를 린 선배와 아야 선배가 무서운 기세로 쫓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타일 바닥에 그대로 앉은채로 있는 사키 선배에게 눈이 갔다.
치마를 바로 하고 일어서려던 사키 선배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직한 신음성을 내뱉고 그대로 주저 앉았다.
방금전 넘어지면서 다친듯 무릎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딱딱한 타일 바닥이라 충격이 컸던지 사키 선배는 바닥에 웅크린채 무릎을 감싸쥐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키 선배. 무릎이..."

가까이 다가가 걱정스레 쳐다보자 사키 선배는 표정을 태연히 고치며 말했다.

"괜, 찮아요. 이정돈 금새 털고 일어설 수 있답니다."

애써 의연한 태도로 말하는 사키 선배였지만...
무릎을 강하게 부딪혔는지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잠시 실례합니다. 사키 선배."

"에? 잠깐...!"

뒤로 돌아 무릎을 꿇고 앉아 사키 선배를 등에 업고 일어났다.
몸이 쏠리는 느낌에 당황한 사키 선배가
엉겁결에 내 목에 팔을 두른 것을 확인하곤 그대로 교사로 향해 걸었다.

"뭐, 뭐하는거죠 아키츠군?"

당황함이 뚜렷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사키 선배를 양호실로 데려가는 중이죠."

"당장 내리세요! 명령이에요!"

아하하...명령입니까.

"유감이지만 노신(老臣)은 충직하되 귀가 어둡답니다 공주님."

"지금 잘만 듣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공주가 아니라 여왕이라고 말했겠죠!"

"예이예이~"

건성으로 답하는 듯한 내 말에 사키 선배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어디가 충직한 가신인가요? 하아..."

한숨을 내쉰 사키 선배는 체념한듯 내 등에 몸을 기댔다.

"...나는 우아하고 고상한 여왕이지
공주님처럼 귀여운게 아니에요..."

"아하하...명심하겠습니다."

공주「님」이라...
그래도 동경은 하고 있나보네.

업히는걸 거부하면서 꼿꼿이 세웠던 사키 선배의 상체가 앞으로 누이면서,
부드러운 금발 롤머리가 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며 볼을 간질였다.
바람에 흔들리며 살랑거리는 머릿결에서 기분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방금전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처럼 사키 선배는 조용히 내 등에 고개를 묻었다.
자연스레 생겨난 침묵속에서 교사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 소리만이 차분히 들려왔다.

가끔은...이런 조용함도 나쁘지 않네.

고요함을 즐기며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동안 침묵하던 사키 선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한 하루에요.
하루종일 멍하게 있다가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고,
저스틴님께는 못볼 꼴만 보여드렸고...
영문을 모를만큼 혼란스러워서 모든게 엉망진창인 느낌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사키 선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사키 선배는 내 어깨에 살짝 이마를 대었다.

"어째서 라라는 내 앞을 가로막는 거죠?
어째서 유우키 리토는 나를 방해만 하는거죠?
어째서 저스틴님과는 자꾸 어긋나고만 있는거죠?
어째서 나는...이렇게 표류해야 하는 걸까요..."

"......"

내 어깨를 잡은 사키 선배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사키 선배...예상 이상으로 상심이 큰건가.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것 같은데...
여자아이를 위로해본 경험 따윈 없다고?

"...사키 선배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과 달리 거북함만 느껴지는 침묵속에서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기에
나름대로 사키 선배를 위로해보려고 입을 움직였다.

"구교사에 있었던 일, 기억하세요?"

"...그래요."

"그때 겁먹은 학생들을 의연한 모습으로 진정시키던 사키 선배는 눈부셨어요.
구교사를 혼자 벗어나지 않고 학생들을 찾기로 결정하던 모습도 정말 멋졌구요."

"...무슨말을 하고 싶은거죠?"

"저는...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키 선배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기운내세요 사키 선배."

"......"

사키 선배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채로 침묵했다.
...혹시나 한심한 위로라고 생각된건 아니겠지?
조금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땅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때 갑자기 사키 선배가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그 기세에 사키 선배의 롤머리가 뺨을 때리듯 쓸며 지나갔다.
까, 깜짝이야...!
갑작스런 사키 선배의 행동에 놀란 나를 무시하고 사키 선배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응! 그래요! 역시 나는 나답지 않으면...!
한두번의 실패 따위로 좌절하는건 이 텐죠인 사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나는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여왕이니까요!
호-호호호호!!"

방금전의 우울한 모습을 날려버리고
손등을 턱에 대고 거만함 넘치는 웃음소리를 내는 사키 선배에게
안심한 나머지 피식 웃으며 말참견을 해버렸다.

"뭐, 약간 나르시즘끼가 있는 점은 귀엽지만요."

콩-

"선배를 놀리면 못써요."

"윽,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나에게 사키 선배는 기분이 나아진듯
콧노래를 부르면서 머리를 기댔다.



이후 돌아온 린 선배랑 아야 선배와 함께 사키 선배를 양호실로 옮겼다.
미카도 선생님은 식사하러 가신듯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에
아야 선배가 사키 선배를 간호하고 있을 동안
나와 린 선배가 미카도 선생님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미카도 선생님을 찾아 사정을 설명하자 미카도 선생님은 약품 목록을 우리에게 건네주며 대신 가져오길 부탁하셨다.
사키 선배의 치료에 쓰일 약품은 아니고 재고가 없는 약품들을 점심 시간에 저택에 들러서 가져올 예정이셨다나.
내가 약품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린 선배가 어느 정도 치료용품들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했기에
린 선배와 함께 미카도 선생님의 저택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저번에 야미를 데리고 미카도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보았기에 생각보다 빨리 저택에 도착했다.
덕분에 약품을 챙기고 학교까지 여유있게 걸어오며 린 선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린 선배는 사키 선배의 호위답게 무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런데 여검사들은 대개 장발 포니테일 스타일을 선호하는걸까?
나○하의 시그넘도 그렇고, 러브○나의 모코토도 그렇고...
포니 테일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린 선배의 스타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조금은 실례가 되는 생각을 하며 대화에 맞장구를 치며 걷고 있으려니
이야기는 어느새인가 내 별명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린 선배는 도장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름대로 나에 대한 소문을 많이 알고 있는듯 했다.
그중에는 내가 접해보지 못한 것들도 꽤나 있었다.

"「파문전사」요?"

"그렇다더군. 비교적 최근에 생긴 별명인것 같던데...
물위를 달리는 너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체페리? J○J○ 1부?
수영장에서의 사건 때문인가?
아니 뭐, 악마의 열매보단 그나마 설득력 있을것 같긴 한데,
생명 에너지나 호흡법 같은건 전 몰라요?

"그러고보면 「궁극생물」이라는 별명도 있었군."

"...그건 또 뭔가요?"

"뭐라더라, 도무지 쓰러뜨릴 수단이 안보인다고 한탄하던 불량배가 붙인 별명이 퍼진거라고 하더군.
말도 안되는 소문까지 곁들여서 말이야.
수련 중에 용암 속에 빠졌는데도 살아남았다고 하던데?"

...세상 천지에 수련 장소를 활화산으로 잡는 바보도 있습니까?

"뭐, 다른 별명들도 많았지만 도장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별명은 이거지.
「도장 파괴범」"

"에엑!? 전 도장 파괴 같은건 한적이 없는데요?"

도장 현판을 부수고 다닌다든가
무도복을 입은 수련생들에게 시비를 건다든가 한적은 없는데?
애초에 난 깡패 상대하느라 바빴던터라 도장에 폐를 끼친 기억 같은건 없다.
불만어린 표정으로 항의하는 나를 보던 린 선배는 혼잣말하듯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 쯤이었나?
초등학교 원생들이 불○슛을 연습한다고 단체로 도장을 빼먹었다더군."

"......"

할말을 잃은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은 린 선배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넌 혹시 검도를 배웠나?"

"아뇨. 아직..."

"그런가...유감이군.
배웠다면 꽤나 재밌는 승부를 할 수 있었을텐데."

린 선배는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흥미가 있다면 검도를 배워보길 권하지.
정신 수양에도 도움이 되니까."

「최근엔 여러 일이 많아서 제대로 되진 않지만...」
중얼거리며 살짝 인상을 찡그린 린 선배를 보며 아하하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리토랑 라라와 얽힌 일들 때문인가...
덤으로 에로 교장 선생님도.



대화를 나누다 어느덧 학교 교문을 지나 교사 앞까지 이르자
린 선배는 내게서 약품을 담은 봉지를 받아들었다.

"그럼 여기서 부터 헤어지도록 하지.
난 양호실로 갈테니까 넌 이만 교실로 돌아가도록."

"어, 그래도 되나요?"

"물론. 오늘은 너에게 사례를 해도 부족할 정도니까.
사키님을 양호실까지 옮겨다 주었는데 이 이상 바라는건 실례지."

"그, 그렇게까지 과장된 예는 필요 없어요.
당연한 일을 한거잖아요?"

당황하며 손사레를 치는 나를 린 선배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린 선배의 눈을 마주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헤매고 있을 때,
린 선배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작년에 네가 이 학교의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
온갖 질나쁜 소문의 주인공인 너를 정말로 경계했었다.
혹여나 사키님께 질 나쁜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면서 말이지.
만약 그런 낌새라도 보인다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내가 널 잘못 봤던것 같군."

잠시 말을 끊은 린 선배는 놀람이 서린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섰다.
한점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 곧은 눈동자에 살짝 주눅이 든 나를 바라보면서 린 선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발렌타인 데이 때 처음 너를 봤을 땐,
여자를 대하는데 서먹하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구시대 강경파 불량이라 생각했다.
사키님을 도와준 뒤 답례도 제대로 듣지 않고
바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

심상치 않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코테가와가 걱정이 되어서 빨리 자리를 떴던 것이 그런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던가.

"두번째로 봄방학 즈음.
사키님의 답례를 포기하면서까지 유우키 리토를 감싸는 널 보았을 땐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네 사욕을 채울수 있는 기회를 친구를 위해 버렸으니까."

리토와 개의 몸이 뒤바뀐 사건 말인가?
그건 리토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요.
천덕꾸러기 개의 영혼 때문에 애꿎은 리토의 몸이 다치는걸 보고 싶진 않았다.

"세번째로 구교사에서,
유령들을 피해 창고에 갖혀있던 우리들을 구해주었을때...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너에게 업혀있던 사키님의 표정이 다시 기운차게 된 것을 보고 생각했다.
너는 세간에 떠도는 악의적인 소문과 달리... 상냥한 녀석이라고."

마지막에 와서 약간 얼굴이 붉어진 린 선배는 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남의 시선에 주눅들지 말아라.
설령 다른 이들이 너를 비난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믿어줄 테니까."

"......"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 당황스러웠다.
어쨌든...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뭔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어쩐지 목이 메었다.
늦여름의 더위에 목울대가 뜨겁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가..."

슥-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눈앞을 하얀 손수건이 가렸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조금씩 눅눅해 지는게 느껴진다.
눈가를 타고 흐르던 액체가 마른 손수건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내 눈을 살짝 가린 린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말했다.

"날이 더우니까 말이지...
땀이나 닦도록 해."

"...감사합니다."

"별말을...
잠시 근처에서 쉬었다 들어가는게 좋겠군."


여름의 끝자락을 잡은 더위 속.
나무에 등을 기대고 린 선배와 함께 앉아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뜨거워진 목울대와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나무 그늘 속에서 식히며 생각했다.
린 선배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소녀들 여럿을 울렸을거라고.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대지.
폐허가 된 학교를 배경으로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
먼지가 가라앉자 운동장 한복판에 알몸에 팬티만 입은 통통한 인형이 누워 있다.
삭발당해서 대머리가 되어버린 교장이 얼굴이 떡이 된 채 기절해 있었다.

거기서 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콘크리트 더미위에 올라선 야미가 업신여기듯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크으윽... 야미 너어어!?"

상의가 찢겨져 형편없게된 몰골로 나는 야미를 올려보았다.
분노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나를 보던 야미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무줄보다 질기군요 아키츠 료스케.
이번에야 말로 그 머리카락과 수염을 몽땅 밀어드리죠.
그 변태 지구인처럼!"

꿈틀.

들려온 단어에 미간이 꿈틀거리며 불붙은듯 뜨거운 피가 심장을 흘러가는것이 느껴졌다.

"변태 지구인?
교장말이냐...?"

뿌득-
앙다문 이빨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오며 격정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교장을 말하는 거냐구!"

비참하게 대머리가 되어버린 교장의 모습을 쳐다보자 분노가 솟구쳤다.
주체할수 없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굳게 쥔채 야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었다.

야미의 금빛 머리털이 위로 솟아오르며 넘실거린다.
수많은 칼날로 뒤바뀐채 넘실거리는 금빛 머리칼.
정전기가 일어나 미세한 스파크가 튀는 가운데 야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십시오 「수염성인」."

"나 화났다 야미---!"




...이건 또 뭔 개꿈이냐...

알람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방의 침대 속.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며 멍하니 있다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없이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나온뒤, 침대에 가만히 걸터 앉아 머리를 움켜 쥐었다.

뭐냐고 이 꿈은...
오랜만에 훈훈하기 그지없는 하루를 만끽하며 보냈는데, 어째서 꿈은 난데없이 배틀물?
게다가 왠지 모르게 드래○볼의 초사이○인 각성편.

평온한 마음을 가지면서 격렬한 분노에 의해 눈을 뜬 전설의 피구왕.
그 이름 아키츠 료스케라니...
진지한 씬이 난데 없는 개그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애초에 크리링 대역으로 변태 교장이 들어가다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변태짓에 대한 응징으로 삭발당한 교장을 보면 분노보단 동정심이 인다고...

그리고 프리○ 포지션에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거꾸로 솟아오른 금발을 휘날리는 야미.
...아니, 어떻게 봐도 야미 쪽이 초사이○인이겠지!?
그것도 스파크를 튀기는 초사이○인2 버전...

교장의 변태짓으로 순수한 분노에 눈을 떠 순식간에 「초 야미 2」로 변한 야미라니,
개그 보정도 여기까지 오면 오히려 공포스럽다.

꿈은 불안한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던데...
아니면 야미랑 관련된 일중 내가 신경쓸 일이 있었던가?
곰곰히 기억을 더듬으며 신경쓰이는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건가? 라라와 야미의 1:1 승부로 인해서 학교가 붕괴해 버리는 대형 사건.
그야말로 '진심'으로 싸우는 라라와 야미의 공방으로 인해서
학교가 형체를 잃고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리는 참사.
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학교 붕괴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는 사키 선배던걸로 기억한다.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만, 룬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야미를 고용했다가 본인은 병원신세를 지고,
의뢰취소비(의뢰비의 2배)를 물려주고 학교 신축비까지 내야했던 눈물나는 상황에 빠졌지.

사키 선배나 아야, 린 선배들과는 나름대론 사이가 나쁘진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나로서는 되도록이면 막고 싶은 사건이다.
야미에게 의뢰하는걸 막거나, 의뢰를 수행하려는 야미를 말리는건 장담 못하겠지만
혹여나 정말로 사건이 발생한다면 적어도 학교가 박살나는 일은 없도록 도와야지...



다사다망했던 날로부터 며칠 뒤,
다시금 양호실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최근들어 자주 오는구나 아키츠군."

"아픈건 제가 아니지만..."

미카도 선생님께 답하고, 기절한채로 내 등에 업혀 있는 저스틴을 되돌아보았다.

등교시간, 이른아침 교문앞에서 라라에게 건네줄 이번달 용돈을 들고 라라를 기다리던 저스틴은
리토와 라라와 타고 있던 비행물체(씽씽보드)와 충돌해서 엄청난 기세로 튕겨나갔다.
공중에 떠서 날아가던 저스틴을 뛰어올라 붙잡지 않았더라면 저스틴은 그대로 저 하늘의 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길 한복판에 쓰러진채 떠돌이 개에게 다리를 물리는 패턴의 반복이겠지.
초반의 그 위압감은 어디로 날려버린건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저스틴에게 동정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카도 선생님의 치료가 끝나고 저스틴을 침대에 눕히자
함께 온 사키 선배가 걱정스레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아야와 린 선배는 사키 선배의 양옆에 시립해 있었다.

"저스틴님은 괜찮으실까요?"

"괜찮아. 그저 강하게 부딪힌것 뿐이니까.
이 사람은 튼튼하니까 한두시간 정도면 일어나겠지."

"그런가요...감사합니다 미카도 선생님."

"뭘. 그럼 난 직원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께.
너희도 아침조회 전엔 반에 들어가도록 하렴."

양호실 문을 나서려는 미카도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문득 용건이 떠올랐기에 미카도 선생님을 잠시 불러 세웠다.

"아, 저기 미카도 선생님."

"무슨 일이니 아키츠군?"

"저번에 받았던 로션 샘플이 꽤나 괜찮았는데
이번에 하나 더 받아갈 수 있을까요?"

저번에 받았던 미끌미끌 로션은 샘플이었기에 벌써 다 써버렸으니까.
실외에서 바르기엔 민망한 향의 로션이었지만 집에가서 써보니 의외로 촉촉한 느낌이 괜찮았기에,
향기만 참는다면 외출용이 아닌 실내용으론 꽤나 쓸만할 것 같았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저쪽 선반에 정품 로션이 있으니 그냥 가져가도록 하렴."

"감사합니다."

미카도 선생님이 떠나고 나자 사키 선배는 나에게 인사했다.

"저스틴 님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천만에요. 제가 도울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치료는 미카도 선생님이 다 했지만...
수업시간도 슬슬 가까워졌고, 저스틴을 옮긴것에 대해 과도한 공치사를 받는것 같아 어색했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사키 선배들께 인사한뒤 '미끌미끌 로션'을 챙겨 품에 넣고서 양호실을 나왔다.




방과후 청소시간.
밀대걸레를 씻을 물을 양동이 두개에 나눠 담은 채 계단을 올라가던 중 계단 위쪽에서
왠지 야릇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안돼!!!」

"응?"

라라의 목소리인가?
의아한 마음에 소리가 들려오는 계단 위를 향해 고개를 들자
시야를 가득 메운 사키 선배의 금발이 보였다.
...에?

퍽-

"으앗!?"

날아온 사키 선배에게 떠밀려 균형을 잃고 그만 계단 뒤로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면서 보니 나에게 부딪힌 사키 선배의 몸이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다간 사키 선배가 머리부터 계단에 부딪힐 것 같아서
양손에 들린 양동이들을 놓고 사키 선배의 몸을 껴안아 품으로 끌어들였다.

"꺄앗?"

쿵-

낙하감을 느낀것도 잠시,
계단 끝의 복도 바닥에 등이 부딪히는 감각과 함께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안전하게 착지한건가?
비교적 착지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품에 안긴 사키 선배를 바라 보았다.

내 모습은 사키 선배의 허리에 왼팔을 두르고
선배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안은 상태였다.
사키 선배는 방금전 일어났던 돌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건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안겨 있었다.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피부와 오른손에 닿은 폭신한 머릿결의 감촉.
향긋한 향수 내음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슬그머니 허리와 머리에 두른 손을 치우며 안부를 물었다.

"저...괜찮으세요 사키 선배?"

"...아...?"

고개를 든 사키 선배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내 품에서 떨어졌다.

"어, 어째서 아키츠군이 여기 있는거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이 붉어진 사키 선배의 반응에
나도 민망해져서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계단을 올라가던 중에 사키 선배가 날아왔기에 잡았던 겁니다.
갑자기 계단에서 떨어지셨길래 놀랐는데...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그래요?"

"미안, 괜찮아!?"

내가 떨어져 내렸던 복도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허둥지둥하며 놀란 얼굴의 라라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라라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붉어져 있었고
치마 위로 빠져나온 하트무늬의 꼬리가 젖어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계단 위쪽에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메랄드빛의 머릿결을 가진 소녀 룬이 있었고,
다시 사키 선배를 바라보니 오른편 복도에 떨어진 손수건이 보였다.

라라의 소꿉친구이자, 라라를 연적으로 생각하는 룬.
라라의 젖은 꼬리와 상기된 얼굴.
그리고 손수건을 들고 있는 사키 선배.

응.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간다.

꼬리가 약한 라라를 룬과 사키 선배가 희롱하려다가
오히려 라라의 괴력때문에 날려진 거겠지...

"괜찮아 라라. 그저 놀란것 뿐이니까."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걱정하는 라라를 안심시켰다.
사키 선배를 일으켜 세우고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여기, 사키 선배꺼죠?"

"...맞아요. 내가 폐를 끼쳤군요 아키츠군."

"뭘요. 다치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이죠."

대수롭지 않게 답하곤 엎지른 양동이들을 들고 일어서자 사키 선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거죠?"

"물을 다시 받으러 갑니다.
청소를 해야 하거든요."

"그럼 나도 돕도록 하지요.
방금전 일도 사과할 겸해서 말이죠."

내가 들고 있는 양동이 하나를 잡아채며 말하는 사키 선배에게 놀랐다.
청소? 사키 선배가?

"아니, 굳이 사키 선배가 그럴것까지야..."

"이 나의 말을 거부하는건가요?"

"...넵. 영광입니다."

매섭게 째려보는 사키 선배에게 얌전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계단 위쪽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룬이 내려왔다.

"에, 사키 선배님. 좀더 라라를...
...아니. 저도 함께 도울께요~"

뭔가 불만인듯 사키 선배를 설득하려던 룬은
갑자기 말을 바꾸며 웃음지었다.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가 한산하니 거기로 가요."

"화장실은 바로 저긴데?"

의아해하며 되묻는 나에게 룬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뭐 어때? 시간은 많잖아.
...그리고 할말도 있고."

또 뭔가 꿍꿍이가 있군.
룬의 장난은 오히려 자기자신이 피해를 입는 경우 밖에 못봤는데 괜찮을지 몰라...
사키 선배에게 살갑게 이야기 하며 수돗가로 내려가는 룬을 보며 한숨을 쉬곤 뒤따라갔다.




"아키츠군은 얼마나 강해?"

"뭐?"

수돗가로 내려가 물을 받고 있는데 옆에서 물어온 룬의 질문에 어리둥절하며 되묻자
룬이 씨익 웃으며 물어왔다.

"전교에서 소문이 자자하잖아~
100명의 불량과 싸워 이겼다든가, 최흉의 불량배라든가 말야."

"아...그러고보면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을 들은적이 있어요."

옆에서 듣고있던 아야 선배가 끼어들며 얘기했다.

"「사이난의 악마」라든지「불도저」「미친개」「불사신」「프○더」.
무협지처럼 서로를 명호로 부르길 좋아하는 불량배들도
아키츠군 만은 그냥 아키츠 료스케라고 부른대요.
지칭하는 별명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기억하긴 무리라나요?
사이난 뿐만 아니라 적어도 도내에서 아키츠군의 이름을 모르는 불량배는 없다고 해요."

차례차례 정보를 쏟아내는 아야 선배의 모습에 약간 벙쪄버렸다.
아니...알고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건 좋은 일이지만,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별명을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얘기해도 괜찮은건가요 아야 선배?
전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러다간 큰일난다고요...
말을 하던 아야 선배는 내쪽을 보더니 아차하는 표정을 짓곤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저기...미안해요!
아키츠군이 정말로 그렇다는건 아니에요!
그저 소문일 뿐이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렇게까지 당황하면서 사과하시면 제가 더 난처합니다만...
마주한채 서로 곤란해하는 나와 아야 선배를 보던 사키 선배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면 아키츠군, 구교사에서 두꺼운 철문을 한 주먹에 날려버렸죠."

"정말요 사키 선배?"

순간 룬의 눈이 반짝 빛난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룬은 다시한번 내쪽을 보고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강해?"

"얼마나라고 물어도, 딱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고.
강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정도는 되는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
라라랑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엑! 라라?!"

그 천방지축 아가씨랑 힘을 비교해?
힘은 아마도 내가 나을지도 모르지만...라라의 저력이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른다.
아무리 개그보정이 들어갔다지만 기합만으로 태풍의 궤도를 바꿨던 아가씨라고?
데빌루크의 왕, 기드-루시온-데빌루크의 말도 안되는 이능력(단신으로 행성을 박살낸다)을 알고있는 바에야
라라가 가진 어떤 숨겨진 힘이 있을지도 모르고.
왜, 그거 있잖아?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패턴, 각성이라는거 말야.
장르가 러브 코미디라서 그런 가능성은 낮아도
튼튼한 몸만 믿고 뻗대기엔 우주인이라는 미지의 벽이 너무도 거대하다.
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는 거지만...
그 가능성이란 것은 무한한 분야에 대한 재능의 개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무한의 힘(unlimited power)같은걸 뜻하는게 아니니까.

게다가 작년 크리스마스때 겪지 못했던가?
잠깐 개조만으로 일격에 대저택을 날려버린 서바이벌 총.
그외에도 진공청소기처럼 사정없이 에이전트들을 집어삼켰던 문어모양의 기계(고-고-바큠군)라든가,
충돌만으로 저스틴을 하늘 높이 날려버린 씽씽보드군이라든가,
사물을 손바닥 크기로 줄여버리는 기계라든가...
...라라가 발명품을 사용한다면 냅다 도망치는수 밖에 없지 않아?
애초에 라라가 친구들 상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상상할수 없으니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뚫어져라 나를 보는 사키, 린, 아야 선배와 룬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민망해서
고개를 슬쩍 돌리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이거 어쩌면, 라라와 야미의 싸움으로 학교가 박살나는 사태는 피할수 있을지도.

"아키츠군?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거죠?"

"아, 괜찮아요 사키 선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룬을 바라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라라가 발명품만 쓰지 않는다면 해볼만 하긴 한데."

"정말?"



이후 전개는 빨랐다.
「라라에게 세상의 고통을 좀 알려줘」라는 룬의 요청을 어색한 미소로 승낙했다.
라라를 설득해 데려온다며 교실로 돌아가버린 룬을 뒤로하며 생각했다.

원래라면 야미에게 라라를 혼내달라고 부탁해야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둘의 싸움 속에 그야말로 학교가 박살날테니까.
차라리 내가 맡아서 얌전히 끝내는게 좋겠지.
친구끼리니까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싸울것도 아니고.
적당히 5분정도 어울리며 시간을 끌면 되려나?

라라가 올때까지 기다릴겸 수돗가 옆에 앉아 잠시 쉬면서
학교를 배회하는 떠돌이 강아지나 바라보고 있으려니 린 선배가 약간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아키츠."

"린 선배?"

"그때 나는 분명 널 믿겠다고 했다...
하지만, 설마 여자아이를 상대로 주먹질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얼굴에 수심이 깃든 린 선배를 보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럼?"

고개를 내젓는 나에게 의아해하는 린 선배에게 싱긋 웃었다.
어떤 마법의 나라 공주님께선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더라고요.

"타격계 기술 따윈 결국 이류.
관절기야 말로 패자의 기술이죠."

실제로 쓸건 유술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지...

웅성웅성...

난데없이 몰려들어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 때문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벌써부터 이리저리 이야기가 퍼진듯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오는 학생들을 보다가
사키 선배쪽을 쳐다보았다.

"저기...사키 선배?"

"뭔가요 아키츠군?"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버리면 학교내 싸움같은 교칙위반에 걸리지 않나요?"

"걱정마시죠. 텐죠인 가(家)는 교칙 하나 둘 정도는 무마할 수 있으니까요."

"아, 네..."

그러고보면 텐죠인 그룹이 우리 학교 후원자였지.
축제의 후원도 하고 있었던걸로 기억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의 사키 선배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나로선 사건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고 받은 일인데
어째 사건이 더 커질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룬과 함께 라라가 수돗가에 도착했다.
뒤이어 리토와 하루나, 코테가와, 리사, 미오, 사야카, 코요미...안면이 있는 친구들은 전부 온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단체로 몰려와!?
몰래 데려오는거 아니었어?
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라라는 왠지 의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라라에게 손을 들어 우호적인 표시를 한다.

"아, 어서와 라라."

"료스케~! 이야긴 잘 들었어."

"응, 그럼 얘기는 빠르겠네. 조속히 시작할까?"

"그래~! 그리고 이런일로 그렇게 고민하지 말아."

"응?"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라라가 활짝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외쳤다.

"욕구 불만이라면 언제든지 내가 상대해 줄테니까~♬"

"쿨럭!?"

「「「에에엑!?」」」

상상을 초월한 대사에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려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경악한 학생들의 반응을 보건데 라라의 황당한 발언은 잘못 들은게 아닌것 같았다.
손짓으로 룬을 가까이 불러 물었다.

"콜록콜록...대, 대체 뭘 어떻게 말했길래 라라가 저렇게 말하는거야?"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어?
그저 「중학교때처럼 싸우지 못하는 평화로운 고교 일상속에서
아키츠군은 파괴욕구에 시달리며 투쟁을 갈구하고 있다」라고..."

그 대사도 충분히 이상해!
뭐냐고? 사람을 무슨 전투 머신처럼 생각하는 대사는?

기침을 참으려고 고생하는 나에게 코테가와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아키츠군?"

"고, 고마워 코테가와."

"뭘요. 그리고 투쟁심이 남아 있다면
다음부턴 운동을 하면서 건전하게 욕구를 해소 하세요."

"......"

교실에서 룬에게서 제대로 대사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오해하지 않았는지 방금전 대사를 이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다만 룬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아이들이 많다는거지...
어느쪽이든 위로가 안돼!?
고개를 끄덕이는 리사와 미오를 보며 앓는 소리를 내며 기침을 멈추려 애썼다.

"괜찮아 료스케?"

걱정스레 물어오는 라라에게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아...미안하지만 1분만 기다려줘.
기침만 멈추고 곧 「결투」를 할테니까."

지켜보는 학생들의 오해를 풀려고 굳이 「결투」라는 말을 강조하며 답했다.
그러자 방금전까지 쑥덕거리던 학생들은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금 목소리를 죽이며 소근거렸다.

「결투라고?」
「야한 의미가 아니었어?」
「연약한 여자애랑 결투?」
「귀축이다! 분명 여자애를 괴롭히는걸 즐기는게 틀림없어!」

「세자리수가 넘는 여자를 울렸다는 아키츠 료스케라고.
뭔가 숨겨놓은 속셈이 있을게 틀림없어.」
「그걸까? 패배한 여자애의 몸을 희롱하는거.」
「배리○블 지오?」
「야해!」
「욕구불만이라잖아. 분명 파괴욕구와 성적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음흉한 속셈이야!」

어이? 아직 앳된 아가씨들이 입에 담기엔 대사들이 좀 부끄럽지 않아?
이렇게되면 오해를 풀고 자시고도 없어 보였다.
신경쓰지말고 결투를 마무리 짓는게 최선이지.

어느새 기침도 그쳤기에 정신을 수습하고 똑바로 일어서자 라라를 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료스케~.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는거야?"

"아아...잘 부탁할께."

저스틴과 야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라라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사히 끝나면 좋을텐데 말이지...
긴장으로 얼굴이 경직되어 가는데 갑자기 생각난듯 라라가 손바닥을 퐁-소리 나게 두드렸다.

"아! 오늘은 「매지컬 쿄코 플레임」보러 가야 하니까 조금만 싸울께~"

"...풋. 큽큽..."

윙크를 하며 사과해오는 라라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을 막으면서 웃음을 참는 나를 라라가 이상한듯 보았다.

"또 몸이 안좋은거야 료스케?"

"아하하...아냐아냐~. 이건 그냥 즐거워서."

"그래?"

갸웃하는 라라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런 아가씨였지.
상식을 깨는 발명품들로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만
언제나 낙천적이고 순수한 밝은 미소로 사람들을 달래주는.

방금전까지 라라를 경계하며 전의를 다지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둘이서 부르는 듀엣도 화음이 맞아야 아름답잖아?
라라 만큼은 아니라도 좀더 긴장이 풀고 마음가짐을 편하게 하자.
기왕 하는거 즐겁게 하는게 좋으니까.

텐션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굽혀 몸을 뒤로 젖히곤 기묘한 포즈를 취했다.
왼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으론 라라를 가리키며 대사를 내뱉었다.

"그럼 라라. 여기서 흑백(黑白)을 확실히 가려주지!
너의 순수를 증명해 보라고!"

"응?"

알쏭달쏭한 얼굴의 라라를 보며 판결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입에 털이 나있는 봉을 넣다 뺐다 하면서
마지막에는 하얀 액체를 뱉어내는건 뭘까?"

"양치질?"

"정답! 백(白)이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질문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더니
정답을 듣고선 안색이 하얘졌다.
쌤통이네. 방금전 욕구불만이니 어쩌니 멋대로 말했던 녀석들은 반성하라고!

멍-!

떠돌이 개가 짖는 소리를 신호로 라라를 향해 달려들면서,
마주 달려온 라라를 향해 왼손바닥을 뻗었다.

"읏차-"

가드 자세를 취하는 라라의 오른팔을 잡은채로
오른발을 내밀어 내딛어진 라라의 오른 발목을 잡아챘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라라는 반사적으로 오른발에 체중을 실으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오른 다리를 쑥 밀어넣으며 라라의 뒤쪽 왼 다리를 걸어 올렸다.
체중을 앞으로 내민 오른발에 모두 실었던 라라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어라?"

바닥에 등을 댄 채 큰 대(大)자로 누워버린 라라는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내 웃으며 일어났다.

"헤에~ 료스케는 신기한 기술을 쓰는구나?"

"유술이라고 하지."

신기한듯 바라보는 라라는 딱히 다치거나 하진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가급적이면 데미지를 적게 주는 방법으로 싸우고 싶었으니까.

"그럼 이쪽도!"

"!?"

콰앙-!

꽉 쥐어진채 힘껏 휘둘러진 라라의 오른 주먹을 옆으로 피하자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놀라서 힐끗 뒤를 돌아보니 학교의 건물 벽이 둥글게 함몰되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권압만으로 벽을 파내 버리다니...
이거 정말 농담같은 파워잖아?

놀랄 틈도 없이 쏟아지는 라라의 주먹을 받아내면서 고민했다.
지금 상황은...그러니까 그거지?

모 웹코믹에서 나○하가 페○트를 향해 스타라이트 브레이커를 날릴때의 대화씬.
「페○트가 피하면 지구는 개박살~!」
「!? 노렸구나 이것아!?」


주먹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학교 건물이 충격을 받는다면 이건 뭐 답이 없네요.
학교 건물이 망가지는걸 막으려면 튼튼한 몸을 믿고 깡으로 버티는 수 밖에는.
애초에 싸울 때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꿀껄...
지금와서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라라와 공방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차례 공방이 오간뒤 라라가 살짝 거리를 벌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으응..."

"왜그래 라라?"

라라는 주먹을 줬다 펴며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주먹에 제대로 맞은 느낌이 없는데...뭘 한거야 료스케?"

"...별로.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충격을 조금 줄인것 뿐이라고."

무식하게 있는 그대로 타격을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흘려보내는게 최고지.

"에~? 그런게 가능한거야?
...그렇다면~!"

다시금 돌진해오는 라라가 휘두른 주먹을 손으로 받아내려 했을 때,
갑자기 라라의 주먹이 사라지고, 라라가 내 뒤로 돌아 내 팔과 몸통을 깍지를 한채 껴안아 왔다.

"헤?"

"이렇게 하면 타격을 흘려보내진 못하겠지?"

등뒤에 선 라라가 내 몸을 잡은 채로 깍지낀 양손에 힘을 준다.

꽈아악-

엄청난 압력이 전해지며 몸을 압박해왔다.
체중을 실어 찍어 눌러내리듯 압박해오는 라라로 인해서 지면이 살짝 패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거력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느낄 겨를이 아니었다.

물컹-

야? 야?! 잠깐만?
가슴! 가슴이 닿고 있다고!
물컹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부드러운 덩어리가 등을 압박하면서 사고가 헝클어졌다.
게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두 돌기의 감촉은...서, 설마...
아찔한 감촉 속에서 가까스로 입을 열어 등뒤에서 날 잡고있는 라라에게 소근거렸다.

"(라, 라라...)"

"응? 왜 료스케?"

"(너, 너...어째서 속옷 안 입은거야?)"

"그렇지만 그거 항상 입고 있기 괴로워~"

괴롭다고 브래지어 벗지마 이 아가씨야!?
그거 가슴 처지는걸 방지해 준다고?

"(다, 달라붙지마!)"

"에~지금 결투중인데?"

결투고 뭐고, 마시멜로 같은 감촉 때문에 나 지금 얼굴이 붉어진거 안보여?
이대론 정말 이성이 위험하겠다 싶어서 억지로 힘을 주어 라라의 깍지를 풀어내었다.
만만찮은 힘의 라라였지만 다행히도 내쪽이 힘에선 앞섰으니까.
깍지를 풀며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나를 보며 라라는 곤란한듯 볼을 부풀렸다.

"잡기 기술도 힘으로 풀어버리니까 곤란하네..."

내쪽이 더 곤란합니다.
순진한 라라 상대로 성희롱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료스케를 상대로 보통 공격은 힘들겠네...그렇다면~!"

라라는 다시금 의욕적인 표정을 지으며 하트 모양의 꼬리를 흔들거렸다.
뭔가 색다른 공격을 할 셈인가?

"에잇!"

빠지직-!

"으갹!?"

순간 라라의 하트모양 꼬리에서 빛이 일어나며 레이져가 나를 직격했다.
레, 레이져도 쏠수 있었던 거냐 라라?
예상치 못한 레이져 공격 한방에 입고 있던 옷들이 죄다 너덜너덜해졌다.

"이, 이런...!"

"페케! 반중력 윙(Wing)"

「아 네 라라님!」

파앗-

갑자기 라라의 등뒤로 거대한 검은색 박쥐 날개가 생겨나며 라라를 공중에 띄웠다.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라라는 의욕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료스케의 잡기는 위험하니까~
그럼 다시 간다!"

비융-!

"으아앗~!?"

다시금 꼬리에서 발사된 레이져를 황급히 피하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반중력 윙」이라고!?
페케의 트랜스 폼 능력 중 하나인거냐!
상대가 공중에 떠있으면 나로선 대책이 안선다고!

말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게다가...지금 이대로 계속 꼬리빔을 맞다간 옷이 홀랑 벗겨질거다.
공공장소에서 알몸으로 수치를 쬘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한참을 피하다가 라라가 쏜 레이저에 맞은 학교 벽의 콘크리트가 무너져 떨어져 내리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방금전까지 짖어대던 떠돌이 개의 모습도.
이런...학생들은 일찌감치 대피해 있었기에 괜찮겠지 싶었는데!

"위험해 멍멍아~!
「뿅뿅워프군」!"

구해주려고 다리에 힘을 주던 나보다 라라가 한걸음 빨랐다.
재빨리 팔찌 모양의 워프장치를 개에게 던져 어딘가로 워프시켜버리고 라라는 한숨을 쉬었다.

"휴우...다행이다."

"개는 어디로 워프된거야 라라?"

"급한 나머지 좌표 설정을 제대로 못했는데...
대충 이 장소에서만 벗어날 만큼만 워프 시켰어."

말도 안되게 먼곳으로 날려보낸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강아지다 보니까 옷이 벗겨질 염려도 없고 말이지.
마찬가지로 안도한 나를 보고 라라가 다시 말을 걸었다.

"료스케~ 시간도 많이 지난것 같은데
슬슬 마무리를 지을께~"

"마무리?"

서로가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무리 선언을 한다고?
설마...「필살기」 같은게 있다고 주장하시는건 아니겠지요 라라님?

"그럼 「비장의 무기」!
간다~!!"

"뭐어!?"

진짜였습니다.
방금전까지의 레이져빔과 달리 스파크까지 일어나며 꼬리에서 빛이 모이는 현상에 기겁했다.
위험해...! 필살기라니, 이건 격투만화가 아니라고!
이대론 나도 위험하고 그대로 학교붕괴의 결말로 끝날것 같아서 황급히 라라를 저지해야 했다.

라라의 발 아래까지 달려가서 힘껏 위로 뛰어올랐다.

"에? 료스케?"

순식간에 자신이 떠 올라있는 위치에 도달한 나를 보며 놀란 라라의 얼굴을 신경쓸 겨를도 없이,
스파크 속에서 빛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라라의 꼬리를 한손으로 움켜잡았다.

"히약!?"

"엑?"

순간 라라는 야릇한 비명과 함께 아래로 낙하했다.
덩달아서 꼬리를 잡고 있던 나까지도...

...아. 그러고 보면 라라는 꼬리가 약점이었지.
성감대 같은 부위라니까 긴급상황이 아니면 왠만해선 잡지 말아야 하지만...

낙하하면서 아래를 쳐다보니 낙하 예상 지점에 수돗가가 덩그러니 있었다.
위험하잖아!
아직까지 방전이 완료되지 않은 라라의 꼬리를 잡은 채로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라라를 내 위쪽에 오도록 했다.
라라 정도라면 그냥 놔둬도 다치진 않겠지만, 여자애를 대하는 기본 매너입니다. 아마도.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상황에서 살짝 고개를 비틀어 어깨로 수돗가를 들이받았다.


쿠웅-!
쏴아아아아아-----!

"우풉?"
「와앗!?」
"꺄아~!"

방금전 충돌로 수도꼭지가 부서진건가?
엄청난 양의 물이 나와 라라에게 쏟아져 내렸다.
게다가 내 경우엔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내린 덕분에 코로 물이 가득 들어가 버렸다고.

"우푸웁! 켁켁...!
젠장...내가 다신 공중전 따위 하나 봐라!
음음, 쿨럭... 아무튼 라라? 몸은 괜찮아?"

헝클어진채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고 라라쪽을 바라보며 안부를 묻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물에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가운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피부가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앙~! 차가워~"

"어, 어째서 알몸인거야-!?"

「으으응...」

"페케?!"

옆에서 들린 기계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페케가 물에 젖은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수도관 파열로 뿜어진 물의 압력에 튕겨져 날아간건가.
하지만 굳이 말할께 페케...
너 너무 잘 떨어져!
포스트 잇 수준으로 잘떨어져 나간다고 페케...!

당황한 나머지 꼬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나보다.
라라가 달아로른 얼굴로 눈을 꼭 감은채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적거렸다.

"히익...꼬, 꼬리는 안돼..."

"미...미안.
아, 아무튼... 이걸로 내 승리지?
그럼 승부는 이제 끝...「후우웅~~!」응?"

갑작스레 들여온 파공음에 고개를 돌리자 몸통만한 크기의 거대한 금빛 주먹이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석파천경권...?
아니, 그것보다 피해야 하잖아!?

황급히 꼬리를 놓고 라라를 안은채로 피하자 방금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수돗가)는 금빛 주먹에 의해 무참히 박살나 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면을 보자 금빛 주먹을 머리카락으로 되돌린 야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서있었다.

"야, 야미?"

"프린세스를 내려놓으시죠 아키츠 료스케."

"아참..."

조심스레 라라를 내려놓고 옆에 놓여진 페케를 주워다 라라에게 건네 주었다.

"아, 고마워~ 료스케."

"으응. 뭐..."

페케가 정신을 차린다면 다시 의상을 복원하겠지.
...앞으론 적어도 속옷까지 페케에게 구현하도록 하진 말아줘 라라.

알몸 상태의 라라를 보던 야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키츠 료스케...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이상한 일은 하지 않았어?"

"우우...료스케는 바보!
난 특별히 꼬리가 민감하니까 맘대로 만지면 안돼!"

"에? 미, 미안..."

"......"

야미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

"그러니까...아키츠 료스케 당신은,
알몸 상태인 프린세스 라라에게 민감한 부분을 만지는 야한짓을 했단 말이군요."

"아냐! 아, 아니...분명 꼬리를 잡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험을 피하려고...!
그리고 방금까지 우린 결투 중이었다고!"

"결투?"

"그래! 여기에 있는 학생들이 증인...인데...어라?"

주변에 애들이 한명도 없네...
그러고보니 방금전 과격해지는 격투를 피해서 다들 도망갔었지?
의심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야미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저기 거짓말이 아냐?
정 의심되면 라라에게 물어보라고?"

한줄기 희망을 가슴에.
아직껏 알몸인 채로 기절한 페케를 매만지고 있던 라라를 가리켰다.
야미는 잠시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다가 천천히 라라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프린세스 라라."

"응? 야미짱."

"제가 오해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여쭙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방금전까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응! 료스케의 욕구불만을 해소시켜주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천연 사고뭉치 아가씨 라라를 믿은 내가 바보였습니다.
야미는 나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키츠 료스케."

"으응?"

"실은 방금전...교장을 때려눕히고 왔습니다."

교장 선생님...또 변태같은 시선을 보내다가 징계 당하셨나 보군요.
...그런데 왠지 이 상황, 어디서 겪은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지금까지 지구인들 중에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은 교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제 착각이었습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고로..."

"박살내 드리죠.
방금전 야한 시선을 보내오던 교장처럼...!"

야미의 금발이 한올한올 거꾸로 일어선다.
분노 때문인지 햇빛에 반짝인것인지 몰라도
물결치듯 넘실거리는 야마의 금발이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그러니까 그날 아침의 꿈은 「예지몽」이었군요?
야미의 모습에서 방금전까지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제 의문도 풀었으니까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군.
이런 상황에서도 단 한가지 비책 정도는 있지.
라라만이 아니고 나도 비장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죠셉 죠스타!

"튀는거야아아아아-----앗!"

"이제 교장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당신만은 예외입니다.
아키츠 료스케 당신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처리해드리지요...!"

한손을 검으로 변형시키며 야미는 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엄청 무서운 기세를 내뿜는 야미에게 소름이 돋았지만...

"얌전히 따라잡힐것 같으냐!"

달리는 가운데 오른발로 대지를 힘껏 내리 찍었다.

"하아압!"

쿠웅---!

순간 오른발을 내딛은 바닥을 중심으로
거대한 울림이 대지를 타고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읏...!?"

쫓아오던 야미는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서려는 야미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다음에 야미 네가 할 말은 이거다.「노린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크...노린겁니까 아키츠 료스케...핫?!"

"당연하지! 이 아키츠 료스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하고 있다고!"

"크윽...!"

거짓말이지만.
도망치기 전에 심리전을 걸어볼까 생각하며 야미를 내려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그만 쓰러진 야미의 다리 사이로 시선이 가버렸다.

"!?"

야미는 황급히 다리를 오므리며 양손으로 치마를 가렸다.
주섬주섬 일어나며 얼굴을 붉히며 노려보는 야미의 시선에 얼굴이 따가웠다.

"...이것도 노린거겠지요 아키츠 료스케?"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그렇군요!」으헥!?"

퍼어억-!

야미의 몸이 앞으로 급격히 숙여지며 내리쳐진 머리카락 발차기를
다급히 피하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상태에서 심리전 같은걸 걸었다가는 나중에 진짜로 뼈도 못추릴 것 같았다.

공격해오는 야미로부터 가장 피해가 적을만한 지역으로 도망치다가 구교사 건물에 다다랐다.
여기라면 남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겠지?
멀리서 추격해오는 야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구교사 안으로 들어섰다.


낮이 긴 여름이라 아직까진 밝은 밖과 달리, 어두컴컴한 구교사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고요속에 싸여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트랩 같은거라도 만들어 둘텐데 그럴 시간은 없고...어쩐다?

멍멍-!

응?

난데없이 들려온 개 짖는 소리에 구교사를 둘러보니 복도 한편에
방금전 라라의 기계로 워프되었던 떠돌이 개가 보였다.
이녀석...여기로 워프된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오히려 겁도 없이 다리를 물려는 개의 목덜미를 잡은채로
주변을 살피다가 라라의 「뿅뿅워프군」을 찾아 주웠다.
으응...원하는 장소로 이동할수 있는 '뿅뿅워프군'이라...
사용할수 있다면 사용하고픈 매력적인 선택지이지만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옷은 워프 되지 않기 때문에 워프를 하면 알몸이 된다.」
「둘째, 워프기계의 사용법을 모른다.」

사용할수 없는 기계는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하고 품에 넣었다.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라라에게 돌려주면 되겠지.

결국 남은건 쉴새없이 나를 깨물려고 시도하는 멍멍이 뿐인가...



왕!왕-!

"힘껏 달려주라고 멍멍아~"

엉덩이를 한차례 살짝 때려주자 황급히 복도 끝으로 도망가는 강아지를 보며 생각했다.
부디 야미를 열심히 혼란시켜주길 바래.
한동안 구교사 안에서 술래잡기를 계속하다보면 적당히 야미도 지쳐서 포기하겠지.
소리를 죽이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다가 복도 2층으로 통하는 구멍이 보였다.
저번의 구교사 탐험때 만들어 졌던 거였지?
잘되었다 싶어서 그대로 점프해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이정도로 쉴새없이 움직인다면 아무리 야미라도 쉽게 나를 발견하지는...「여기 있었습니까 아키츠 료스케」"우아악!?"

심장이 떨어질듯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자 복도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야미가 걸어나왔다.

"어디까지 도망가나 했더니, 결국 이정도 였군요."

"저기..."

"뭡니까?"

한손을 들어 야미를 멈추고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가 있는 곳이 들킨거지?
소리도 안내고 계속 이동했는데?"

"...관찰력이 부족하군요 아키츠 료스케.
주변을 둘러보시죠."

"주변을?"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점이 없다 살펴보다가 무엇인가 빛나는 선이 보였다.
이건...?
금빛 실선, 아니, 야미의 금빛 머리카락들이 복도 곳곳으로 길게 뻗어져 나가 있었다.
설마...구교사 전체를 머리카락의 결계로 만든건가!?

"스스로 궁지에 빠진 사냥감을 놓치는 사냥꾼은 없습니다."

...완전히 거미줄에 갖힌 나비 꼴이로군.

"이건 사기야!"

"몸뚱이 자체가 비상식적인 당신에게 그런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당치 않다는듯 반박한 야미는 머리카락의 칼날들을 세우며 선언했다.

"아무튼, 이걸로 끝입니다 아키츠 료스케.
야한 짓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루게 해드리겠습니다."

...툭. 데구르르...

멈칫-

무언가 가벼운것이 떨어지며 구르는 소리에 야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경계하듯이 주변을 돌아보던 야미는 의심스러운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겁니까?"

"아니, 이번엔 내가 아닌데?
트랩같은걸 설치할 시간도 모자랐고...「똑- 똑-」응?"

기기긱...

드르르륵...!

"뭐, 뭐야...?"

처음에는 조용한 소음이 들이더니 점차적으로 소음의 크기가 커져갔다.
명백히 이상한 현상에 당황한 나와 야미가 서로 마주보고 있을때 마침내 바닥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지직-!

쩌어억-!

"으앗!?"

갈라지기 시작한 복도 바닥의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 유리창을 보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대체 구교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요?"

"그, 글쎄? 나도 대체 뭐가 뭔지..."

「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

갑자기 들려온 여자아이로 추측되는 비명소리에 놀라서 야미를 바라보았다.

"야미, 이건..."

"누군가 위험한 상황에 빠진걸까요?
하지만 구교사에 들어올 사람은 없을텐데..."

"그런것보다 먼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자구."

야미의 손을 잡고 재빨리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손이 잡혀 잠시 움찔하던 야미는 조용히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윽...그러니까 오해라니까."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을 듣도록 하죠."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까워 질수록 복도 전체를 울리는 진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여학생의 비명은 1층의 복도 귀퉁이에 있는 교실에서 들려오는듯 했다.
아무래도...여자애가 있는 곳이 이 현상의 진원인가보군.
황급히 교실안으로 들어서자 교실 뒤편 구석에 새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꺄아아아아-----! 싫어-----!}

왕왕-!

"오시즈?"

예전에 구교사에서 만났고, 이후로 하루나의 몸에 빙의해서 하루동안 같이 지냈던 유령-오시즈가 눈물을 매단채로 구석에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오시즈는 떠돌이 개가 점점 다가갈수록 패닉상태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휘리릭~펄럭~
들썩- 쿠르르르릉!
드드득...!
쾅! 우지끈!

커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려올라가는 가운데,
의자, 책상, 사물함, 쓰레기통, 석고상, 청소도구들이
엄청난 기세로 교실을 날아다니며 이곳 저곳에 부딪히고 있었다.
날아오는 물체들을 피하며 당황스레 오시즈를 불렀다.

"으앗!? 오시즈! 진정해...!"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오시즈라는 저 유령이 한 일이었군요.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지금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것 같습니다."

야미는 가까워지는 물체들을 머리칼날로 묵묵히 베어내며 말했다.
점점 들썩임이 심해지는 교실의 모습에 다급한 마음으로 오시즈를 보았다.
처음으로 겪은 오시즈의 영능력은 상상했던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잘못하면 구교사가 무너질것만 같아서 비명을 지르는 오시즈쪽으로 다가갔다.

왕-!

{싫어! 오지말아주세요!}

팅-팅-
찌이익-

다가가던중 일어난 폴터가이스트에 몸이 뒤로 밀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교복단추가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상의가 찢겨져 나갔다.
이거...장난이 아니잖아?

촤아악-!

「읏!?」

딱-!
털썩-

뒤에서 야미의 신음소리가 들리면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선은 오시즈를 진정시켜야 이 소란도 가라앉을 수 있으니까...
상의가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가운데 앞으로 계속 걸어가서
오시즈쪽으로 다가가려는 멍멍이를 복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오시즈. 멍멍이는 쫓아냈으니 괜찮아."

{하우우우...!}

쉬이잉-
쿵- 쿵-!

벽을 향한채로 양어깨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오시즈의 모습과 여전히 날아다니는 물체들을 보건데
아직까지 오시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것 같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오시즈의 모습에 뒷머리를 한차례 긁적이곤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이런건 사이렌지처럼 상냥한 아가씨가 해주는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지..."

푸념을 늘어놓으며 천전히 무릎을 굽혀 웅크리고 있는 오시즈의 등뒤에 앉았다.
그리곤 살며시 두팔을 벌려 오시즈의 몸을 천천히 껴안고 속삭였다.

"이제 괜찮으니까...그러니까 이만 진정하라고 공주님."

{...아...료스케씨?}

툭-툭...
털썩...

오시즈가 진정된 듯 이리저리 떠다니던 물체들은 힘을 잃고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진정했어?"

{......}

아무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오시즈의 모습이 이상해서 다시 한번 오시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시즈?"

{......따뜻해...}

살며시 눈을 감으며 양손으로 내 팔을 잡아오는 오시즈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매몰차게 뿌리칠수도 없는지라 엉거주춤 앉은채로 구석에서 오시즈에게 붙어있는데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에서 소리가 났어!」
「여기에 들어온게 맞아?」

학생들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라, 리토, 코테가와랑 사키 선배, 룬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다.

"료스케 무사해~?"
"...야미!? 아, 아키츠 이건...?"
"야미짱?"

놀란듯 우리를 바라보는 학생들 중에는 방금전 결투를 구경하던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날 쫓아온 야미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라라가 데려온걸까?
아무튼 정작 소란스러웠던 일은 그럭저럭 해결되었지만 말이지.
놀란 친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웃으며 말했다.

"여어~ 어서들 와.
유감이지만 이미 일은 다 끝마친 상태라고."

"「이미」?"

"그렇다니까."

"그, 그럴수가...어째서 이런 짓을...!"

이런 짓?
심상치 않은 학생들의 모습에 갸우뚱하곤 학생들의 시선이 모인곳으로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내 뒤쪽에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물체들을 베어넘기던 야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헐...이거 어떻게 된거야?
방금 전의 부유물 정도에 당할 야미가 아닐텐데?
당황해서 야미를 보고 있는데 이상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뱅글뱅글 눈이 놀아가며 기절해있는 야미의 얼굴에 한가득 뿌려진 하얀 액체.
...저거 '미끌미끌 로션'이잖아!?
저게 왜 야미 얼굴에 있어!?
문득 뜯겨져 나간 상의에 생각이 미쳤다.
아...방금전 폴터가이스트 때문에 품에서 날아가버린 로션을 야미가 베어넘겼나보네.
로션이 터지면서 끈적끈적한 액이 얼굴에 뿌려져 당황한 사이에
부유물에 머리라도 부딪혀 기절한건지 야미의 이마 한쪽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기절해 쓰러져 있는 채로 온몸에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뿌려진 야미.
그리고 상의가 완전히 찢어져 나가서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나.

......살려줘.

「「「아키츠군...」」」

"오해야!"

「「「이 변질자---!!!」」」




징계란 이름의 폭우를 뚫고 엉망이 된채로 구교사를 벗어나 도착한 학교의 뒤뜰.
한적한 공터에서 룬과 마주한채로 가만히 손에 얹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미끌미끌 로션(샘플용)'

"......"

답례를 하고 싶다는 룬에게 갔더니 내밀어진 것이다.

"...이건 뭐야?"

"은하통판에서 요즘 인기의 제품이야.
미카도 선생님이 피부에 정말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시던데?
뭐, 이건 사실 덤으로 받은거고...
요즘 외모 문제로 고민이 많다길래 특별히 의뢰비 대신 주는거니까 고맙게 받아."

턱-

내 손에 추가로 얹어진 물건들을 쳐다 보았다.

* 은하통판 매출 1위! 깔끔한 남자가 되십시오! *「매끈매끈 면도기」
* 털많은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드립니다! *「반들반들 제모제」

...어디에 쓰라고...?
쓰디쓴 액체가 목을 넘어가며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꿈을 꾸었다.

솟구친 검은 머리, 짙은 눈썹, 콧수염과 턱수염이 듬성듬성 난 거친 얼굴.
붉은 자국 다섯개가 불꽃처럼 가슴에 새겨지고 어깨 부분엔 흰 뿔이 달린 검은 보호구를
상체에 장착한 근육질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통키야...]

전 료스케인데요 나태풍(본명:이치게키 단쥬로)씨?

[피구왕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너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안듣고 있군.
아니, 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건가.

[그런 너에게 가르쳐주마! 타이거를 쓰러뜨릴 수 있는 필살기를...!]

불○슛?

뭐, 내쪽에서 아무리 말해봐야 들리지도 않을테고
그냥 필살기 구경이나 제대로 해볼까...

[저기 산이 보이느냐?]

잘 보입니다.
도시에 있는 산 치곤 꽤 절경이네요.

[그럼 똑똑히 봐두거라. 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최고의 필살기를!]

전 댁의 아드님이 아니라니까요?

[ 흐으으으읍...! ]

얌전히 바라보고 있자 나태풍은 뒤로 돌아서며
산을 마주보곤 오른주먹을 힘껏 쥐었다.

[간다!




 불꽃슛!파산포(破山砲)-----!!!!! ]

---------------!!!!!


순간 귀로 포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강맹한 파공음이...
공진폭발 속에서 일그러진 기류들이 만들어낸 맹렬한 소용돌이가...
대기가 터져나가며 발생한 격렬한 충격파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 콰르르르르릉......!

하늘을 꿰뚫을듯 엄청난 기세로 중첩되며 쏟아져 나간 바람은
뇌우를 몰고온 폭풍처럼 한동안 대지를 흔들다가 사라졌다.

울림이 멎고 광포한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흉측하게 파헤쳐진 대지만이 붉은 속살을 드러낸채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허, 허허...

...산이 사라졌네?


황당함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때
호쾌한 웃음을 한바탕 지은 나태풍이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하하하하하-! 보았느냐 통키야? 이것이 바로 불꽃슛파산포!]

"웃기지마!? 당신 방금 파산포라고 했잖아!?
게다가 이게 피구?
사람 잡을 일 있어요?
아니, 애초에 피구공도 안썼잖아!?"

내가 태클을 걸거나 말거나 나태풍은 힘차게 엄지를 치켜 세우곤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상쾌한 웃음을 날렸다.

[그럼 난 이만 가보마.
아무쪼록 나를 뛰어넘는 세계 제일의 피구왕이 되거라.]

어이 이봐요 나태풍씨?
이 세상엔 일본 피구연맹 같은것도 없다고?!

[언제나 하늘에서 너를 지켜봐주마...]

거짓말 하지 마요!
댁 안죽은거 다 알고 있거든요!?

[아, 이 필살기는 한번 쓰는데 마라톤을 완주(42.195km)하는 정도의 체력이 소모되니 주의하거라.]

그 설정만 불○슛입니까.

[그럼 이만~ 아디오스~!]

나태풍은 훗-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두손가락을 모아 이마에 갖다대곤 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구름 저편에서 나름대로 포즈를 잡으며 회상씬에 나올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나태풍씨에게 삿대질을 해대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답지않게 격투 만화 같은 씬을 연출했더니 해괴한 꿈을 다 꾸네.
약이라도 타먹어야 하는거 아냐?
최근들어 이상한 꿈만 꾼다고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목욕탕으로 향했다.




"...위장약이 필요다고?"

"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니?"

"...최근 속이 쓰려서..."

살살 손바닥으로 배를 만지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날의 결투 이후, 전교에는 나에 대한 소문이 하나 퍼졌다.

「최종귀축 아키츠 료스케」

싸운 여자는 쓰러뜨린 뒤 남김없이 옷을 찢어서 알몸으로 만드는 변태.
구교사 으슥한 곳으로 여자아이를 유인해서 손을 댄 변질자.
그리고 마침내는 유령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은 끝모를 욕망의 화신.

- 그때 난 들었지. 아키츠 료스케의 말을.
「난 인간을 그만둘테다 라라!
난 인간을 초월하겠다! 우왓하하하하하-----!!」
그 외침 이후로 녀석은 정말로 인간을 초월했지.
...윤리적인 의미로 말야.

- 구교사에서 흐느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어.
학생들이 도착했을 땐 아키츠는 이미 끝낸 뒤였다고 해.
뭘 끝냈냐고? 몰라서 물어?

- 귀엽게 생긴 유령 여자애를 끌어안고 있었다니까.
눈물이 글썽 맺혀있는 유령 소녀의 모습은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불쌍했어.
가엾게도...아키츠 료스케의 마수는 저승에서 조차 피할수 없는걸까?



사실 섞인 루머들의 폭풍우속에 남은건 산산조각이 나버린 섬세한 내 마음.
「피는 철, 마음은 유리」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조각조각 박살이 나서 흔적도 찾기 힘들더란 말이지.

라라를 이겼는데...
학교붕괴도 막아냈는데...
영광도 뭣도 없는 상처뿐인 승리군요 이건.



중얼거리는 내말을 듣고 식은땀을 흘리는 미카도 선생님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미카도 선생님... 모범생으로 보이고 싶어요..."

싱긋.

"포기하면 편하단다..."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미카도 선생님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또륵...

흘러내린 물방울은 덧없는 양아치를 위해...
왠지 절실히 농구가 하고 싶어진 어느 여름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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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2월이 가기 전에 올리는군요^^;

그나저나 내용이 생각보단 슬림(?)해졌네요.
생각날때마다 수첩에 적어뒀던 소재들 5개중에 4개는 폐기한듯...=_=;
(컴퓨터로 쓰는 도중에 추가로 넣은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집어넣은게 많아서 내용이 중구난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p.s.1. 13화에서 비교적 여성스러웠던 '쿠죠 린'(텐죠인 사키의 호위. 3학년. 포니테일 검도소녀)의 말투를 남성적인 어조로 정정합니다.
13화에의 상황에선 당황해서 그랬다든지 부끄러워서 어조가 이상하게 변했다든지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작 참고할때 제가 어투 참고를 잘못한것 같더군요-_-a;

참고사항으로 사키의 자기 호칭은 '나'


p.s.2. 학교를 떠돌던 개는 원작에서 자주 학교를 떠돌며 등장한 개.
1학년때 리토가 작아지는 사건을 비롯해서 학교에서 꽤나 자주 모습을 보였습니다.


p.s.3. 라라의 풍압 펀치.
료스케의 꿈에 나왔던 파산포의 기본 원리죠.
뭐,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요(...)

아무튼, 본 작품은 트러블의 작명 센스를 준수합니다.
(데빌 루크 성인 = 악마 꼬리가 달린 우주인)


p.s.4. 라라를 상대로 한 유술 장면은 정하늘 님의 무협소설 '살 검(殺 劍)'에 등장한 무애(武愛)의 첫 전투장면에서 참조했습니다.


p.s.5.이번 편 관련 이미지.

저스틴 (before)

저스틴 (after)

라라의 풍압 펀치

왼쪽부터 린, 사키, 아야

어린시절의 사키와 린, 아야

계단 근처에서 청소하던 라라

아야, 린

달리는 아야

미소짓는 린

라라와 야미의 날개

물에 맞고 떨어진 페케

오시즈

오시즈를 진정시키는 하루나

라라와 야미의 비장의 수가 충돌한 뒤 폐허가 된 학교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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