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실에 신간이 들어왔다.
학생들의 희망도서를 학교측에서 구매해 도서실에 배치했다고 한다.
역시 이 학교는 학생 복지에 관해선 확실히 대응해준다.
교장 선생님은 조금...문제가 많지만서도.

여튼 빌린 도서를 반납하고 신간도 살펴볼 겸 점심시간을 이용해 도서실을 찾았다.
도서실에 들어서자 대출반납 카운터에 앉아 사서를 맡던 여학생이 웃는 얼굴로 인사해왔다.
그간 종종 도서실을 들르며 적당히 낯을 익히기도 했고, 올 여름에 무너진 서가의 정리를 도운 일도 있었기에, 나에 대한 사서 소녀의 평가는 양호한 편이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책을 반납하고 새로 빌릴 도서를 찾아 서가를 돌던 중 익숙한 얼굴과 마주쳤다.

"아키츠군?"

"아라이?"

좌우에 머리핀을 2개씩 꽂은 단발머리 소녀, 아라이 사야카였다.
날 만난게 의외였는지 사야카는 신기한듯 나를 바라보았다.

"도서실에서 아키츠군을 만날거라곤 생각못했는데.
아키츠군은 무슨 일? 설마 사서 아이를 꼬시러 온거야?"

"그럴리가 있냐..."

"흐응, 꽤나 그럴싸한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보통은 책을 빌리러 왔냐고 물어보는게 맞지 않아?"

"그게 말야, 아키츠군은 하급생들 사이에선 '로사리오의 수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잖아?
'여동생 모에'라는 소문까지 합쳐져서 하급생들은 다들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몸을 사리던걸?"

"......"

...허허...난 그저 로사리오를 목걸이 마냥 목에 걸겠다고 망발을 한 철없는 하급생들을 쫓아낸 것 뿐인데...
말을 잊은 내게 사야카가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도서실엔 대체 무슨 일인가요 아키츠 '오빠'?"

...심금을 울리는 좋은 호칭이군요. 부끄럽지만.
곤란하면서도 쑥쓰러운 나머지 난처한 얼굴을 하자 사야카가 킥킥대며 작게 웃었다.

"끙...짖궂은 농담은 그만해줘.
난 그저 짬짬이 읽을 책을 빌리러 온 것 뿐이라구."

"...진짜?"

"진짜냐니...그럼 도서실에 책을 빌리러 오는것 말고 무슨 이유가 있겠어?"

"으응~그러고 보면 저번에 대출 도서가 젖었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을 봤던 것도 같고..."

팔짱을 낀채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야카에게 물었다.

"그런 아라이도 책을 보러 온거 아냐?"

"아, 난 패션 잡지 같은게 들어오진 않았나 살펴보러 왔어."

...학교 도서실에 그런것도 비치해주나?
교장 선생님 부터가 설렁설렁한 학교니까 의외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아키츠군은 이곳에 자주 오는거야?"

"가끔. 우리 학교는 도서실이 꽤나 좋은 편이라 읽을거리가 많거든."

저번에 야미가 쓰러뜨린 서가를 정리할 때 '쌀의 재배법'같은 제목의 책도 있던걸 떠올리면 정말이지 별의별 도서가 다있구나 싶다.
여러모로 책을 빌려보기엔 좋은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아키츠군은 이런 곳과는 전혀 인연이 없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상해?"

"응. 그게, 우리반 남자 아이들 중에서 도서실에 올만한 사람은 위원장인 마토에군 정도라고 생각했거든.
유우키군은 아버지 일로 드물게 오는것 같지만."

뭐, 실제로 사이난 고교의 도서실은 규모에 비해서 이용자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
그동안 도서실에서 만난 사람은 사서인 여학생을 제외하면 야미, 아야 선배, 오시즈, 리토, 그리고 오늘 만난 사야카가 전부다.

도서실을 가장 많이 이용하는건 야미. 가끔 만날 땐 키가 안닿는 위치의 책을 대신 집어주기도 한다.
이젠 슬슬 변화능력을 사용해도 괜찮을거라 생각한다. 서가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심한다면 사서도 더이상 뭐라하진 않을테고.

아야 선배는 린 선배와 함께 사키 선배의 수행원으로 행동하느라 바쁜듯 했지만, 틈틈이 짬을 내서 도서실을 찾아오곤 한다.
덕분에 아야 선배에겐 양서를 고르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문학소녀란건 아야 선배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겠지.

오시즈는 요즘엔 양호실에서 미카도 선생님을 돕느라 도서실에 방문하는 횟수는 조금 줄었다.
처음봤던 동화책이 마음에 들었는진 몰라도 그런쪽 관련으로 가끔 야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리사나 미오와 대화하는걸 보면 고교 여학생 답게 연애 관련 이야기에도 흥미가 있어 보였다.

리토의 경우는 사이바이씨의 부탁으로 동물도감을 빌리던걸 본 적이 있다.
고증에 충실하려는 사이바이씨의 자세는 본받을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망토개코원숭이'를 그릴 예정이라니...가끔은 사이바이씨가 어떤 장르의 만화를 그리시는건지 헷갈린다.
리토 본인은 딱히 도서실을 애용하진 않는 것 같다.
저번에 리토의 방에 들어갔을 때, 책장에 꽂혀있는게 교과서를 제외하면 만화책이랑 스포츠 관련 책들이었던걸 떠올려보면, 독서 자체엔 크게 흥미는 없는 것 같다.

"기왕 구교사의 책들까지 추가되서 도서실 규모도 커졌는데, 꽂혀있는 책을 마냥 썩히려니 아깝잖아.
그리고 여긴 책 동료들의 만남의 장소라고 할까?"

"책 동료?"

"오시즈나 야미, 아야 선배랑은 가끔 책을 읽으러 와서 마주치거든.
오시즈나 야미와는 서로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도 하고, 아야 선배에겐 마음에 드는 책을 추천받기도 해서 책 고르는데 도움을 받고 있어."

"응...아키츠군은 생각외로 책을 좋아했구나."

적어도 꾸준히 읽는 편이긴 하지만...

"아키츠군은 그런 것 말고 다른걸 좋아할거라 생각했어."

"어떤?"

"격렬한 투쟁. 음험한 모략.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나처럼」이라고 장난 삼아 말하는 사야카의 모습에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튼 굳이 외모만이 아니더라도 가끔 보이는 장난기도 충분히 사랑스러운데 말이지.

"아하하, 물론 농담이야.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야.
지금와선 더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오? 그건 정말 기쁜데?"

"아, 실은 아직도 그런식으로 보일 때는 가끔 있어."

"들어올리기 무섭게 능숙하게 깎아내리시는군요."

아무렇지도 않게 못을 박는 사야카의 발언에, 서가 위쪽의 책을 꺼내다가 힘이 빠져 고개가 쳐졌다.
등뒤로 깍지를 끼고 선 사야카는 선반에서 책을 꺼내든 내 모습을 올려다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도서실에서 책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보니까 확실히 인텔리한 야쿠자 보스처럼 보이거든.
저번에 공부할 때 썼던 안경만 끼고 있으면 정말 딱인데 말야."

"...그거 칭찬인거야?"

"아키츠군의 소문 중에선 그게 제일 낫지 않았어?"

확실히...적어도 여자아이 관련으로 나온 질나쁜 소문들보단 차라리 두뇌파 악당으로 불리는게 훨씬 낫다.
애매하게 웃음으로 얼버무리자 사야카는 조금 생각하더니 물었다.

"응...갑자기 떠오른건데, 아키츠군은 운동은 좋아하지 않아?
아키츠군, 운동신경은 좋아 보이니까 스포츠를 해보면 정말 잘할 것 같은데."

"으응...초등학교 이후론 딱히 뭘 해보진 않았는데."

초등학교 때 했던 피구라면 취향을 조금 넣어서 허리케인 버스터 같은 눈요기 거리를 만들며 놀기도 했지만,
중학교 이후로 딱히 운동으로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나도 경우란걸 아니까 농구같은걸 하면서 강백호의 '훗훗 디펜스' 같은 반칙같은 기술을 쓸 생각은 없었지만,
애초에 놀이에 끼워주질 않으니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우울한 흑역사로 고민하는건 정신 건강에 안좋으니까 그만두자.
고교에 들어선 친구들도 꽤나 생겼다고 나름 자신하니까, 다음에 기회를 봐서 코테가와나 다른 아이들이랑 배드민턴이라도 해보는게 좋으려나?

"그럼 테니스 해보지 않을래?"

"테니스?"

"응.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가신다구.
아키츠군도 좋아하는 운동 하나쯤은 있는게 좋아.
구경해보고 혹시 관심이 있다면 가르쳐줄께."

"어? 아라이가 가르쳐 주는거야?"

"나도 조금 정돈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싫으면 사스가 선생님께 대신 부탁드려도 되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아라이 선생님."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자 사야카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뭐랄까, 방금전이랑 분위기가 바뀌었어 아키츠군.
조금 침체한것 처럼 보이길래 독려해주려고 한 소린데, 내가 권한거지만 어쩐지 속은것 같아..."

"아냐아냐. 사실 친구들이랑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은 해보고 싶기도 했고...
미소녀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걸로 이미 충분할만큼 가치가 있으니까."

"의욕이 넘치는건 기쁘지만, 중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가지면 안되잖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사야카 말대로 고교 시절에 좋아하는 운동 하나정돈 배워두는게 좋고, 다가온 기회는 떠나기 전에 잡는 것이 성공의 열쇠다.
의욕을 불태우는 내 모습에 사야카는 작게 한숨을 쉬곤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수업이 끝나고 테니스 코트장으로 와.
구경하고 있으면 내가 코트 사용하는 시간에 함께 들어가서 가르쳐줄께.
체육 비품중에 예비 라켓도 있으니까."

"고마워 아라이. 정말로 기대하고 있을테니까."

"후후, 그렇게까지 말해주면 권한 보람이 있는걸?
그나저나 슬슬 점심 시간도 끝나 가는데 아키츠군도 이만 책 고르는걸 끝내야 하지 않아?"

"아, 벌써 시간이..."

기다려줄 생각인지 동행해 온 사야카와 함께 빌릴 책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사서가 대출 처리를 하는동안, 사서를 꼬시러 왔냐던 사야카의 말이 떠올라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보면 이 아이...이름은 뭐였지?
그동안 도서실을 방문하면서 줄곧 인사를 나누었는데, 정작 이름도 모르는 사이라니.
어쩐지 실례인것 같다고 생각하던 중 사서가 책을 돌려주었다.

"끝났어요. 재밌게 보세요."

"언제나 고마워."

"뭘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즐거우니까요.
요즘은 도서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서 저도 사서를 맡은 보람이 있거든요."

"그거 다행이네.
음...그런데 말야..."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내 모습에 사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그렇달까...
이제와서 이런 말 하기도 뭐한데, 슬슬 서로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네?"

눈을 깜박이는 사서에게 민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말야, 그동안 여기 오면서 네 이름도 몰랐거든.
그러니까 괜찮다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어?"

내 물음에 여학생이 싱긋 웃었다.

"도서실에서 헌팅은 금지에요, 바람둥이씨."

"......"

안되나보다.
뒤에서 기다리던 사야카가 킥킥대면서 축처진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상당히 막무가내인 설득방식이로구나 아키츠군?"

"부탁이니 내버려둬..."

놀려대는 사야카의 모습에 낙담해 고개를 떨궜다.

뭐, 둘다 농담이었던 것 같고 결국 어떻게든 통성명엔 성공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체육 비품으로 마련되어 있던 테니스 라켓을 하나 골라 테니스 코트장으로 향했다.
코트장에는 테니스복으로 갈아입은 여학생들이 도란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 남학생들은 하교길 발걸음을 멈추곤 녹색 철망 너머로 생동감이 느껴지는 여학생들의 복장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다들 청춘이군요.
사야카는 아직 탈의실에서 나오지 않은것 같았기에 코트 밖을 서성이던 중, 코트 옆 수돗가에서 대화중이던 리사와 미오와 마주쳤다.

"어라, 아키츠군이 여긴 왠일이야?
하교한 줄 알았는데?"

"다른 남자애들처럼 여학생들을 훔쳐보러 온거야~?
신경쓰이는 여자애가 있다든가 말야~"

호기심이 깃든 눈초리로 리사와 미오는 내 모습을 훑어보았다.
운동복 차림으로 테니스 라켓을 쥐고 있는 내게 리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보면 아키츠군, 지금 운동복 차림이네.
혹시 테니스를 하러 온거야?"

"음, 솔직히 테니스는 오늘이 처음인데..."

"그래? 그럼 나랑 미오가 테니스 가르쳐 줄까?
하나하나 정성스레 가르쳐줄 수 있는데~"

"구석구석까지 가르쳐줄께. 기대해도 좋다구~?"

요염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할짝이는 리사와 장난기가 배인 시선을 보내오는 미오에게 쓴웃음을 짓곤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사양할께.
아라이가 테니스를 가르쳐 주기로 했거든."

"어? 사야카가?"

"응. 아라이와 이야기하다 취미로 스포츠 하나정돈 배워두는게 좋을거란 얘기가 돼서, 아라이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어."

"에... 후후, 아키츠군도 꽤나 손이 빠르구나?"

"권유해준건 아라이였지만..."

"그걸 곧이 곧대로 받은 아키츠군도 보통이 아닌거야.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이건 진리라구?"

쯧쯧하며 검지를 흔들며 리사가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사야카도 많이 변했네."

"변해?"

딱히 바뀐건 없어 보이는데.
머리에 단 액세서리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고.

"뭐, 사내아이들은 여자아이의 변화 같은거엔 둔하니까.
학년 초의 사야카는 아키츠군을 무서워 했거든."

"그건 다른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잖아?"

"그야 그랬지만 말이지.
그래도 코테가와가 아키츠군을 휘어잡고 있으니까 2-A의 다른 여학생들은 비교적 빨리 아키츠군에게 익숙해졌지만, 사야카는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렸어.
학년 초엔 아키츠군쪽을 힐끗 바라보거나 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혐오? 두려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을 마친 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헌팅당하던걸 아키츠군이 도와준 뒤로는 사야카도 아키츠군에게 익숙해진것 같지만."

"즉, 지금은 괜찮다는거지?
그럼 상관없잖아."

"상당히 태평하구나 아키츠군은?"

"뭐 어때? 사이가 나빠졌다면 신경쓰일지 몰라도, 사이가 좋아졌다는건 기쁜 일이잖아?"

"확실히 좋은 일이긴 하지만...하아~ 고민이 없어서 좋겠어 아키츠군은~"

나라고 고민이 아예 없는건 아닌데...
한숨을 내쉰 리사는 분위기를 바꿔서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사야카 말인데...어때?"

"뭐가?"

"뭐긴~ 가슴이지 가슴.
탱글탱글한게 정말 훌륭하다구~?"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리사는 양 손으로 자기 가슴을 살짝 쥐어보였다.
미소녀인데 입에서 침이 흐를 것처럼 실실 웃음 짓는게 진성 에로 아저씨 같습니다 리사씨.
양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는 폼이 한두번 주물러본게 아닌가보다.

"최근 만져봤는데, 사야카, 분명 1학년 때보다 더 커진것 같았다구~?"

"호, 호오...?"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에 무심코 침을 삼키며 반응하자 리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후후후...대단할 것 같지?
아키츠군도 한번 만져본다면 벗어날 수 없을걸~?
어때? 사야카의 위크 포인트(약점테니스 용어입니다), 알려줄까?"

이 무슨 육식계 미소녀...!

"리사!!"

"어라? 일찍왔네 사야카."

태연히 손을 흔들며 웃는 리사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새빨개진 얼굴의 사야카가 양손으로 라켓을 쥔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빨개진 얼굴로 서있던 사야카는 팔을 뻗어 내 손을 꽉 쥐곤 냉큼 테니스 코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거칠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야카에게 당황한채로 질질 끌려가는 날 보곤 리사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선 명심해둬. 테니스는 사람을 맞추는 놀이가 아냐."

"...? 당연하잖아?"

"분신술을 써서 혼자서 복식 경기를 뛰지도 않아."

"...아라이...테니스가 격투기나 판타지가 아니란건 나도 알고 있어."

"응. 그럼 다행이네.
실은 사스가 선생님이 초보자를 가르칠 땐 꼭 이렇게 말씀하셨거든."

"스포츠 만화를 보고 흉내내려는 입문생이라도 있었던거야?"

"아니. 테니스공으로 크레이터를 만든 꼬마에게 기절한 뒤로 트라우마가 생기셨어."

...리얼 테○스의 왕자님을 겪으셨군요.
언제부터 스포츠가 판타지로 넘어간거야?

"원래는 이런 설명은 그냥 넘어가는데, 솔직히 아키츠군이라면 그런 일을 벌릴지도 몰라서 말야."

안합니다 그런건.
허리케인 버스터야 피구공으로 하는 초등학생용 놀이니까 장난삼아 만든거긴 하지만.

"그런 못된 장난은 하고 싶지도 않아."

"...할 수 있어?"

"노 코멘트로."

"흐응...?"

고개를 갸웃하던 사야카는 테니스 라켓을 위로 들었다.

"우선 그립 잡는법 부터 가르쳐줄께. 이렇게 잡는거야."

사야카가 라켓의 그립을 잡은 모양새를 보고 따라서 라켓을 오른손으로 쥐었다.

"어때?"

"음...조금 더 위쪽으로."

말을 하며 사야카는 내 오른손 위에 손을 얹고 잡는 법을 교정해 주었다.

"이렇게야. 알겠어?"

"응, 고마워 아라이."

"...음..."

"왜 그래?"

"아니, 뭐랄까. 딱히 이상한 의도는 없었다지만, 이렇게까지 반응이 담백해서야 약간 실망이라고 할까?"

얼굴이 빨개지며 당황하길 바라기라도 한거냐...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이성에 서먹하진 않다구?
약간 부루퉁한 사야카의 모습이 재밌게 보여 태연하게 응수했다.

"핫핫핫. 꽃이 떨어지는걸 봐도 부끄러운 시기라고 하지만,
규중 아가씨도 아니고 손이 닿는걸로 부끄러워할 만큼 순진하진 않다구?"

"하긴 그래. 여자 경험이 많은 아키츠군이니까 당연하지요?"

"......아! 역시 다시 생각해보니까 엄청 부끄러운것 같기도 하고..."

"맘에 없는 소리는 됐어 아키츠군~"

내 뻔한 능청에 피식 웃은 사야카는 다시금 지도를 시작했다.

"잘봐. 이게 포핸드 자세야. 따라해봐."

사야카는 양발을 벌리고 옆으로 서서 라켓을 쥔 오른손을 뒤로 빼면서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사야카의 자세를 따라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이렇게?"

"음, 좀 더 이렇게 팔을 빼고..."

사야카는 내 등뒤에서 내 손목을 잡고 자세를 고쳐줬다.
밀착하듯 붙어서 지도해주는 사야카의 몸이 등에 닿은 순간 무심코 어깨를 떨었다.

"아, 지금 긴장했지?"

"......"

"...혹시 두근거려?"

"으응, 솔직히 조금 부끄러워."

"아하하, 아키츠군은 솔직하네."

달아오른 내 얼굴에 사야카는 킥킥 웃으며 몸을 치웠다.
...일부러였군.
하나하나 내 자세를 교정해주면서 사야카는 작게 불평했다.

"...역시 남을 가르치는건 좀 어렵네.
아아~ 어째서 내가 아키츠군을 가르쳐 준다고 했던걸까?"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나중에 음료수 살테니까..."

"...뭐, 그걸로 좋겠지.
그럼 코치라고 불러볼래?"

"아라이 코치님?"

"후후, 착한 학생이구나 아키츠군은?"

차근차근 자세를 고쳐주면서 사야카는 잡담을 계속했다.

"코치라는 호칭은 듣기 좋았지만, 그래도 이런건 역시 남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미남 코치가 미소녀를 지도해주는 구도가 제일 이상적인데."

"은근슬쩍 자신을 미소녀라고 하지마.
틀린소린 아니지만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건 부끄럽지 않아?"

"그럼 이건 어때?
여기서 내가 미소녀인걸 긍정한다면, 아키츠군은 미남 코치가 될 수 있습니다."

"미소녀로 좋습니다.
네, 미소녀이고 말고요."

"...지조가 없어 아키츠군."

"인생, 때로는 뻔뻔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고.
상부상조, Win-Win 전략이란건 이 때를 위한 거로군요.

"근데 아키츠군, 코치는 할 수 있는거야?"

"수영 코치라면 해줄 수 있는데."

지금까지 수강생은 코테가와 한명 뿐이다.
그마저도 아직껏 맥주병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라 코치로서의 내 자질이 의심되지만...
내말에 사야카가 지긋이 나를 응시했다.

"아키츠군은...은근히 야해?"

"흑심은 없습니다."

"정말로?"

의심스러운듯 바라보는 사야카의 눈길에 무심코 사야카의 수영복 차림을 상상해버렸다.

"...역시 요만큼 정도는..."

엄지와 검지로 동전 굵기 만큼의 틈을 만들어봤다.

"풋- 적어도 솔직해서 좋네."

웃음지은 사야카는 다시 테니스 지도를 시작했다.

사야카의 지시에 따라 포핸드 자세로 서서, 바닥에서 튀어 오른 공을 테니스 라켓으로 맞춰봤다.
라켓에 맞은 테니스 공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떠올라선 철망 너머로 날아가버렸다.

"해냈어 아라이~! 첫구부터 홈런이야!"

"테니스는 야구가 아냐 아키츠군.
밖으로 날아간 공은 나중에 챙겨와줘."

"미안..."

엄격하게 말하는 사야카의 모습에 기가 죽었다.
아니, 나도 알고 있었어요.
그저 이 민망한 실책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구요.
침체한 내 모습에 사야카가 표정을 풀고 등을 두드리며 위로해줬다.

"뭐, 보통 처음은 누구나 그렇지.
공을 때리는게 아니라 밀듯이 쳐야 한다구.
제대로 치는 법을 익히도록 해.
안그럼 시합에선 지금처럼 홈런만 날리게 될지도 몰라?"

"응.
...저기, 그런데..."

"왜?"

"어쩐지 다들 쳐다보고 있는것 같은데?"

테니스 코트장에서 연습을 하던 여학생들이 가끔씩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여자애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테니스 코트장에 남학생이 들어온건 드물기도 하고, 그것도 아키츠군이다 보니 다들 호기심으로 저러는거니까."

"...철망 밖에서 남학생들도 보고 있다만?"

테니스 코트장을 두른 철망에 매달려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남학생들의 시선이 온몸을 찌르고 있었다.

"신경쓰지마. 다들 별볼일 없는 남자들이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교도 안하고 여학생들 테니스복 치마나 응시하는 원숭이 같은 애들은 특히나."

워, 원숭이...

"좀 평가가 너무한것 같은데?"

"그래? 그럼 저 애들중에 아키츠군에게 뭐라고 할 담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도 좋아."

난 담력 시험의 대상입니까?
아무래도 그럴만한 녀석은 안보이는지라 침묵하고 있는데 사야카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고교 시절의 절반이 지나가는데 좋은 사내아이 찾긴 힘드네.
이상한데 몰두해선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법석을 떠는 남학생들이라든지, 음침하게 도촬이나 하는 변태라든지, 여자아이들 가슴만 훔쳐보는 사내아이라든지...
어째서 우리 학교 남자애들은 다 이런걸까?"

"하하..."

적어도 가운데 끼어있는 남학생은 청춘이란 이름으로 용서가 되는 레벨조차 아니군요.
여학생들은 심신양면으로 좋은 아이들이 많은데, 남학생의 레벨은 여학생 레벨의 절반도 못 따라가는 것 같다.
사이난 고교는 그야말로 좋은 남자의 불모지일지도...

"정말이지 렌이 다른반이 된 이후론, 쓸만한 남자아이는 우리반에선 아키츠군 정도일지도."

"...그 거짓말 진짜?"

"...어째서 거짓말이란 전제를 까는거야?"

"핫핫핫~ 그렇게 너무 띄워주면 넙죽 물어버릴지도 모른다구?"

"아하하, 아키츠군이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물것 같아 무서우니 그만둘래."

"...난 무슨 맹수입니까?"

"1학년 때부터 나온 코테가와씨의 별명을 보면 알잖아?"

네. 반막할 말이 없네요.
'맹수 조련사'라는 호칭 덕분에 코테가와는 1학년 때부터 풍기위원회의 정점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코테가와로서는 그런 별명을 달갑지 않게 여기겠지만.

"음, 농담이 아니고 아키츠군은 좀 무서워.
무엇보다도 그 눈이."

"눈?"

"맹수같은 눈이야. 그대로 바라보고 있으면 잡아먹힐것 같은 느낌이랄까...
처음 보았을 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정말로 무서웠거든.
처음부터 아키츠군과 1대 1로 마주보며 얘기하는 코테가와씨나 리사같은 사람이 대단한거라고.
뭐, 그래도 지금와선 나도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아아...그래서 학년 초에 사야카가 날 꺼려했던건가?
그랬던게 지금처럼 보통으로 이야기를 나눌정도가 되었다니, 사야카의 대범함에 감사해야겠군.

잡담을 끝내고 사야카는 바구니에 담긴 테니스공을 가리키며 연습 사항을 지시했다.

"이제부턴 방금 배운 포핸드 스트로크를 계속 반복하는거야.
라인 안쪽으로 테니스 공이 들어가도록 연습하도록 해.
바구니에 든 공을 다 쓰면 다른 사람에게 코트를 양보해줘.
코트 수가 모자라서 돌아가면서 써야 하거든.
바닥에 떨어진 공은 다시 바구니에 담아놓도록 하고."

"응, 그렇게 할께."

"그럼 난 코요미랑 연습하고 있을테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줘?"

말을 마친 사야카는 라켓을 들고 코트 한쪽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코요미에게 다가갔다.

라켓과 테니스 공을 들고서 네트 너머에 텅빈 상대편 코트를 바라보았다.
네, 솔직히 공 몇번 쳐보고 바로 시합이라는 전개는 우습죠.
조금쯤은 단식 경기 같은걸 기대한건 사실이지만요.
'우후후-', '아하하-' 하면서 알콩달콩 치는것까진 바라진 않았습니다만.
포핸드 스트로크만 배운 상태론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야카가 정성껏 가르쳐줬으니 배운대로 열심히 연습해봅니까.

포핸드 스트로크로 공이 라인 안으로 들어가도록 연습했다.
공을 담은 바구니가 비워지자, 코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코트 구석을 돌며 바닥에 널려있는 공을 도로 주워담으며 코트를 둘러보았다.

사야카는 방금전 말한대로 코요미와 함께 연습중이었다.
리사는 미오와, 하루나는 양갈래 댕기머리 소녀와 함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라켓을 휘두르는 여학생들의 움직임에서 생동감이 느껴졌다.
이거라면 확실히 철망 밖에서 구경하는 남학생들의 심정을 알것도 같다.

곧 테니스 공으로 바구니가 가득차자 코트 구석에 바구니를 내려놓고 여학생들의 운동하는 자태를 감상했다.
시원시원하게 치는게 정말이지 멋지네.
나도 포핸드 스트로크 외에도 백핸드 스트로크나 서브 같은것도 해보고 싶은데.
나중에 사야카의 연습이 끝나면 가르쳐달라고 할까?
활기 넘치는 소녀들의 모습을 지켜고보고 있을 때,
라인 구석으로 찔러들어온 코요미의 공을 받아넘기려고 급하게 움직이던 사야카가 발을 헛디뎠는지 균형을 잃고 코트를 굴렀다.

"사야카!?"

코요미의 외침과 쓰러진 사야카의 모습에 놀라 사야카에게 달려갔다.

"아라이? 괜찮아?"

"아야야..."

오른쪽 무릎을 부여잡으며 사야카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구르면서 다쳤는지 무릎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서 손수건 같은건 가져오지 않았는데...우선 양호실로 데려가야할 것 같았다.
단짝인 코요미가 사야카의 몸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사야카...걸을 수 있겠어?"

"응, 어떻게든..."

코요미의 부축을 받으며 절뚝 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사야카의 모습에, 보다 못한 리사가 둘을 불러세우곤 나를 지목했다.

"그렇게 억지로 움직이는 것도 상처에 안 좋을것 같은데, 그냥 아키츠군에게 업어달라고 하는게 어때?"

"맞어맞어~ 사내아이는 힘이 세잖아?
사야카에게 테니스도 배웠으니까 아키츠군도 그정도 서비스는 해주라구."

"응... 아무래도 그러는게 낫겠지."

리사와 미오의 말에 수긍하곤 사야카의 앞에 앉아 등을 내밀었다.

"자, 업혀 아라이."

"어? 아냐, 아키츠군이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에이~ 힘들게 걷는게 뻔히 보이면서 고집부리진 말라구~"

"순순히 업혀업혀~"

"꺄악~?"

거절하는 사야카의 양어깨를 리사와 미오가 붙잡곤 억지로 사야카를 내 등뒤에 태웠다.
당황한 사야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사야카의 허벅지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작게 소리를 내지른 사야카를 업은채 리사와 미오의 휘파람 섞인 야유를 들으며 양호실로 향했다.




코트를 벗어나 운동장을 지날때 등뒤에 업힌 사야카가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 아키츠군."

"뭘, 나야말로 아라이에게 테니스를 배웠는데 이 정도야 약과지.
아, 혹시 지금 업은 상태가 불편하진 않아?
상처에 자극이 간다든지 말야."

"...그럼...조금 천천히 걸어줬으면 해."

나름대론 조심해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걸음걸이가 좀 거칠었던가?
사야카의 요구대로 속도를 늦춰 좀더 느릿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이래서야 무슨 거북이 걸음 같군.

"...무겁진 않아?"

"전혀."

여자아이들은 그런게 신경쓰이는걸까나?
룬도 그랬고, 역시 이런쪽 얘기는 되도록 피하는게 상책이다.

"아키츠군은...역시 친절하구나.
사납게 생겼는데."

"친절까지야...당연한 일이라구.
게다가 사내아이들은 이런 상황을 동경하니까."

"그래?"

"그렇다니까. 여자아이에게 의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건 모든 남학생들의 꿈이라구?
그런식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호감도 업~! 이라는 느낌일까나?"

"아하하~ 동기가 불순해."

"그래서 싫어?"

"아니. 노력하는 사내아이는 싫어하지 않으니까.
방금전 코트장에서 말했지? 아키츠군에게 뭐라고 할 담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봐도 좋다고. 그거랑 같은거라구."

"모미오카도「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역시 어떻게든 행동으로 옮기는게 보기 좋은거려나?"

"그런 의미에선 아키츠군은 합격이야. 자랑해도 좋아."

"핫핫핫. 고마운 말씀을.
그렇게까지 좋게 평가해주면 나로선 정말 기쁜걸?"

"...좋은 평가라...응..."

사야카의 호의적인 평가에 발걸음도 가벼워진 것 같았다.
살짝 들뜬 기분에 잠겨 있는데 사야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실은 말야...나, 아키츠군이 싫었어."

"...그래?"

"오해하진 말아줘. 예전엔 그랬다는 얘기니까."

"응..."

"...화내지 않아?"

"안내. 예전일이라고 했잖아?
지금은 아니란 거니까 괜찮다구."

직설적인 말이 조금은 아팠지만 과거형이라는게 위안이 되었다.

"...얘기, 좀더 계속할까?"

"응. 아라이의 이야기도 궁금하고, 다른 사람에겐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도 알고 싶었으니까."

"...렌을 알고 있어?"

"알고 있어. 라라의 소꿉친구잖아?"

"남자인 아키츠군이 보기에 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

"음...얼굴도 예쁘게 생겼고, 성격도 그렇게 나쁘진 않은것 같고, 나름 머리도 좋은 것 같고, 운동도 어느정도 하는데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편단심이지.
그야말로 남녀 모두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타입이랄까?
적어도 내가 만난 남학생들 중에선 렌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없었어."

라라를 설득하는 화술은 느끼해서 닭살이 돋는 수준이었지만, 여자들에겐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테니 그건 넘어가고.

"역시 그렇지?
1학년 때 렌이 우리반으로 전학왔을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아, 이 사람은 정말 왕자님 같은 사람이구나.」라고."

왕자님 같은 사람이 아니고 진짜로 왕족이지만.

"렌은 라라 외엔 관심이 없는것 같았지만...그래도 렌을 볼 때면 두근거렸어.
아키츠군을 보면 반대로 무서워서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예전 일이 떠오른듯 사야카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곤란한 녀석...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렌과는 다른반이 되었어.
...왜였을까?"

"응?"

"이상하지... 어째서 1-A반의 친구들이 전부 2-A반으로 올라왔는데, 어째서 렌만 그렇게 다른 반이 되었을까...?"

그러게 말이다.
2학년이 되면서 라라랑 다른 반이 되어 눈물을 글썽이던 렌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억세게 운이 나빴다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아키츠군이 2-A반으로 등교하는 모습을 봤을 때 생각했던거야.
아...이사람만 아니었으면 렌은 계속 우리반에 있어주었을텐데...하고 말야."

"......"

"하하...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투정이었지만 그땐 나도 정말로 심각했어.
미소년인 렌이랑 무서워보이는 불량배가 뒤바뀌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가 없었어.
그리고...자꾸만 늘어가는 이런저런 괴담 속에서 자꾸만 네가 무서워져서...어느새 같은 반에 있는 것조차 싫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이건 뭐, 더러운 벌레를 보는듯한 정도의 혐오감이 아니었던거로군요.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궁금했다지만, 솔직히 이건 예상 이상으로 견디기 힘들다.
직접적인 원망이 깃든 솔직한 고백 덕분에 마음이 실시간으로 브레이크 하고 있었다.

"그런데...코요미랑 함께 헌팅남들에게 붙잡혔을 때, 네가 와줬던거야."

"...아? 아아, 금연한다고 했을 때 말야?"

"...응."

어깨를 잡은 사야카의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해서, 음흉한 미소로 다가오는 남자들이 무서워서,
제발 누군가 도와주길 바랐을 때...정말로 싫어하던 사람이 도와주러 온게 이상하면서도 기뻤어..."

스스로 말해놓고서도 이상한 듯 사야카는 작게 키득거렸다.

"피에 굶주린채 언제나 분쟁거릴 찾아 다니면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상대도 무자비하게 쓰러뜨린다는 소문 때문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조마조마 했는데 생각과 달리 헌팅남들을 말로 타일러 보낸 것도 이상했어.
아니, 신기했다고 할까? 그때 아키츠군이 소문처럼 흉포한 사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어."

실은 나중에 철권제재를 가했습니다.
물론 반성없이 헌팅을 계속했던 헌팅남들의 자업자득이지만요.

"그 때 아키츠군이 말해준 옛 소문의 진상이란걸 듣고 정말 웃었어.
중학교 때 히로인은 정말로 권(拳)이었던거야?"

"하하, 애초에 중학교 때 여학생들은 말을 걸기라도 하면 다들 무서워하며 달아났는걸."

그놈의 몹쓸 소문 덕에 여학생들에게 짐승 취급 당했던 걸 생각하면...
씁쓸한 추억이 되살아 나서 살짝 풀이 죽었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게 아니잖아."

"......"

"뭐, 솔직히 예전일은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하지만, 이제와서 바꿀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우리들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라는 대사도 있잖아?
지금은 아라이 너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랑 대화해주는 여학생도 있고...그러니까 내 청춘의 시작은 고교생 부터라구?"

"풋-, 긍정적이네 아키츠군은."

작게 웃은 사야카는 잠시 뜸을 들이곤 말을 이었다.

"흡연에 대해 해명하는 아키츠군에게 가까워졌을 때, 정말로 곤란해하는 아키츠군의 모습이 신선했어.
그때 문득 생각했던거야. 아, 이 사람은 어쩌면 정말로 보통의 소년은 아닌가.
험악해보이는 주제에 실은 순진해서...불량스러워 보이려고 고집을 피우면서도, 정작 행동은 우리랑 다를바없는 사람인건 아닐까...하고 말야."

...놀랐다.
그렇게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보였던거야.
아키츠군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코테가와씨에게 쩔쩔매는 모습이라든지, 리사나 미오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걸 볼 때마다, 아키츠군은 생각하고 있던 모습과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가 사야카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야카가 보통으로 접해왔었기에 몰랐지만 그런 사정이 있었던가.

"그리고...언제였더라? 아키츠군, 등교하면서 물벼락을 맞은 적이 있었지?"

"아아, 그땐 정말 나도 황당했어.
비도 오지 않는 날에 하늘에서 물벼락을 맞을 줄은 몰랐거든.
앞으론 꼬박꼬박 우산을 챙겨오자고 생각했었다구? 아하하~"

"...아키츠군은...조금은 화를 낼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잖아?
누구나 실수는 하니까 그런것에까지 화를 낼 생각은 없어?"

"그런게 아냐!"

"어, 어...?"

갑작스런 사야카의 외침에 놀라 무심코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우뚝멈춘 날 상관하지 않고 사야카는 가라앉은 어조로 속삭였다.

"난 말야...물뿌리개를 뒤집어쓰고 물에 빠쥔 생쥐마냥 꾀죄죄한 꼴로 서있는 아키츠군을 봤을 때...싫었어.
아키츠군이 그런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는게.
물에 젖어서 떨고 있는걸 마치 구경거리처럼 둘러싸선, 아무도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슬펐어."

어깨를 잡은 사야카의 손길이 강해졌다.
어쩐지 후회가 섞인듯한 목소리로 사야카는 내뱉듯 중얼거렸다.

"중학교 시절에도...아키츠군은 그런 식으로 주욱 혼자였던걸까?"

"......"

"나는...그런 시간을 보내고서도 아키츠군이 계속 상냥함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놀라워..."

스트레스는 중학교 3학년의 6개월 동안 완전히 날려보냈습니다.
스트레스의 주원인이자, 더불어 스트레스 해소의 발판이 되어준 도내학군단연합에겐 고맙게 생각한다.
이류쯤은 되어보이던 두뇌파 보스 녀석도.
뭐, 그건 그거고... 물벼락 맞았을 때는 사야카의 도움으로 상황을 넘길수 있었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때 손수건을 건네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구경하던 아이들도 다들 흩어졌잖아?"

"나는 그 때...도움이 될 수 있었던걸까?"

"물론. 넌 내게 웃어줬잖아?
그걸로 이미 넘치도록 충분해.
스마일은 공짜지만 마음의 양식이니까."

"...풋, 뭐야 그게?"

웃음을 터뜨린 사야카는 답답한 기분이 나아진 듯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키츠군도 참 운이 나쁜 것 같아.
그 일이 있고 바로 다음날 '여동생 모에'니 하는 소문을 뒤집어 써버렸잖아?"

"아..."

범인은 미오인가, 아니면 여동생 카페에 들어온 다른 학생인가.
덕분에 하급생들을 대하기 껄끄러워 졌다.
애초에 만날 일은 거의 없으니까 별 상관은 없는것 같지만.

"후후, 그나저나 그날 손수건 돌려줄 때 혹시 두근거렸어? 아키츠 '오빠'?"

"...조금은."

동급생에게 오빠라고 불리니까 좀 미묘하긴 했지만.
머뭇거리며 답하자 사야카는 작게 키득거렸다.

"오빠라고 하니까 생각난건데 말야, 아키츠군은 가끔 연상으로 보이기도 해."

"음...그거 나이 들어보인단 얘긴 아니지?"

"아니. 의지가 된다는 말이야.
행동력이랑 추진력이 강하다고 할까...
돌발상황 같은거에도 침착하게 잘 대응해왔잖아?"

"그랬던가?"

"응. 헌팅남들에게서 여자아이들을 빼내온거라든지, 운동회 때 낙하하는 여학생을 쫓아가서 안전하게 받아들인 거라든지,
이상한 가스로 다들 어린애가 됐을 때 아이들을 돌봐준 거라든지 말야.
그 때문인지 지금 와선 다른 아이들도 은근히 아키츠군에게 의지하고 있는걸?
그러니까 어른스러워 보인다는건...믿음직 하다는거야."

「가끔 얼빠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며 사야카는 내 목에 팔을 감곤 몸을 기대왔다.

"아키츠군의 등은 크구나...어쩐지 안심이 돼."

"아하하~ 그런 칭찬은 기쁜걸?"

"...코요미는...이런 기분이었던걸까?"

작게 귓가를 울리는 사야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도착한 양호실 문을 열었다.



양호실은 텅 비어 있었다.
미카도 선생님과 오시즈 둘다 자리를 비운것 같았기에, 어쩔수 없이 구급상자를 찾아서 사야카의 상처를 소독하기로 했다.
양호실 침대 위에 사야카를 앉히곤, 바닥에 앉아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사야카의 무릎을 치료했다.

"아야..."

"많이 아파?"

"아니, 소독하고 나니 참을만해."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아키츠군?"

"왜?"

"지금 이렇게 날 앉힌건...일부러 그런거야?"

"응?"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우뚱 기울이자, 사야카의 허벅지 사이에 있는 새하얀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노골적이야 아키츠군."

"......"

테니스복 차림으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고 앉아있는 사야카.
양호실 바닥에 앉아 사야카의 다리 앞에서 얼굴을 기울여 허벅지 사이를 바라보는 나.
...어떻게 보나 소녀의 치마 속 풍경을 노골적으로 훔쳐보는 짐승이군요.
냉큼 고개를 숙여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구급상자를 정리하고 원래 위치에 가져다 두었다.
대범해진건지 아니면 익숙해진건지 딴청을 피우는듯한 내 행동을 보며 피식 웃은 사야카는 내게 손짓했다.

"아키츠군."

"왜그래?"

"미안하지만 침대에 좀 눕고 싶어서 그런데,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리는걸 좀 도와줄래?"

"...알겠어."

환자는 왕이로군요.
한숨을 쉬곤 사야카의 다리를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려주었다.

"자, 그럼 이제 미카도 선생님이 오실때까지 여기서 얌전히..."

"에잇-!"

"엇?"

양호실 침대에 사야카를 눕히고 몸을 일으키려다 갑자기 내 목뒤로 감겨진 양팔에 이끌려 앞으로 쓰러졌다.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겨우 쓰러지는걸 면하자 눈앞에 사야카의 얼굴이 들어왔다.
침대에 드러누운 사야카는 양팔로 내 목을 붙잡은채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라이...?"

양호실 천장의 불빛 탓에 내 몸에 깔린듯 드러누운 사야카의 몸 위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침대로 쓰러지면서 흐트러진 듯 밀려올라간 치마 밑으로 속옷이 드러나 보였다.
내 목을 휘감은 여자아이의 피부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단발 아래로 보이는 예쁜 눈동자.
가만히 응시해오는 사야카의 시선에 심장의 고동이 차츰차츰 빨라져만 갔다.

"...두근두근해?"

살짝 웃은 사야카는 조금 몸을 일으켜 내 옷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곤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스읍-

목덜미 근처에서 들려오는 간지러운 숨소리에 목덜미가 떨려왔다.
곧 내 품에서 얼굴을 뗀 사야카는 싱긋 웃음지었다.

"응...역시 담배 냄새 같은건 나지 않네.
살짝 땀내음이 나지만."

"읏..."

나도 모르게 귓가가 빨개졌다.

"아하하, 신경쓰이는거야?
응...리사의 말이 맞네."

"...뭐가?"

"아키츠군은 위기상황이나 돌발상황엔 터무니없이 행동력이 강한 주제에, 여자아이와 두근두근한 상황에 처하면 정말이지 귀여운 반응을 한다고."

오해요 그건.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상정외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덜미를 휘감은 양팔을 놓아주지 않은채 킥킥거리던 사야카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그대로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한채 사야카의 오른손이 내 머리에서 헤어밴드를 벗겨내었다.

"아..."

헤어밴드가 치워지면서 올백으로 넘겼던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시야를 가릴듯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사야카가 미소가 짙어졌다.

"응...그래.
체육제 때 헤어밴드 빌리면서 생각했던거지만...역시 이쪽이 훨씬 맘에 들어."

헤어밴드를 쥔 사야카의 오른손이 다시금 목에 둘러졌다.

"아키츠군의 눈은 무섭지만...가끔은 매력적으로 보이기도해.
왜냐하면 아키츠군은 상냥한데다가 믿음직하니까, 그걸 알고나면 오히려 용맹한 눈으로 느껴지거든."

사야카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차분하게 응시해오는 사야카의 시선에 홀린듯 눈을 떼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만났을때 말야, 책을 좋아한다는걸 알고나서 재밌어져서 무심코 웃음이 나왔어.
아. 이 사람은 정말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말야.
의외로 책을 좋아하고, 곤란한 일엔 손을 내밀어주고, 불량배처럼보이지만 실은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그리고 조금은 엉큼하고 말야."

"윽..."

"매지컬 쿄코 사인본을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무심코 웃어버렸어.
의지가 되면서 조금 무서운 아키츠군도 이성에 관심이 있는 사내아이였구나 하고 말야.
응. 보통의 사내아이..."

「우리반 남자애들을 보면 '보통'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이라며 나지막이 중얼거린 사야카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런 보통이, 여자아이들에게 기대를 갖게 만드는거야."

긴 이야기를 끝낸 사야카가 기대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키츠군은...어떤게 궁금해? 나에 대해 알고 싶은건 없어?"

"아라이에 대해서?"

"그래. 보답이랄까, 뭔가 바라는건 없어?
아키츠군이라면...지금이라면 나의 삼부수치 정돈 알려줄 수 있는데."

마지막에와서 분위기가 엉망인것 같습니다만...
농담처럼 말하는 사야카에게 방금까지 굳어있던 몸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사야카에 대해서 알고 싶은건 많이 있지만, 삼부수치 같은건 굳이 필요없다.

"...나로선 네 취미라든지, 네가 잘하는거라든지, 네가 좋아하는 책이나 머리장식 같은거에 더 관심이 있는데..."

수치 몇개를 아는것 보다는, 같은 걸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되는게 더 보람있다고 생각하니까.
내 대답에 눈을 깜빡이던 사야카는 살짝 볼을 물들이며 싱긋 웃었다.

"...후후. 응, 그런 섬세한 점이 맘에 든다는거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사야카는 내 목을 잡고있던 양팔을 풀었다.



"오늘은 고마웠어 아키츠군."

"나야말로 고마워.
이렇게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눠본것도 오랜만이었으니까 즐거웠다구.
그나저나 슬슬 미카도 선생님을 찾으러 나가볼테니 여기서 기다릴래?"

"응, 그럼 부탁할께."

...드르륵-

침대에서 일어나 양호실 문에 가까워지자,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며 미카도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안으로 들어와 양호실 문을 도로 닫은 미카도 선생님은 그제서야 우릴 발견한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 너희들 아직 안가고 뭐했니?
혹시 다치기라도 한거야?"

"아, 네. 아라이가 무릎을 다쳐서 말이죠.
일단 응급 처치는 했지만..."

"그래? 어디 내가 한번 볼께."

미카도 선생님의 진단 결과는 간단한 찰과상 이었다.
구급상자로 해둔 응급처치만으로도 충분했는지 무릎에 거즈와 테이프로 상처를 가리는걸로 치료는 끝났다.
충격이 많이 가셨는지 적당히 걸을수 있게된 사야카를 부축한뒤 미카도 선생님께 인사드리고 양호실을 나왔다.
도중에 미카도 선생님이 닫아놓은 문을 열면서 고개를 돌려 미카도 선생님을 향했다.

"그런데 미카도 선생님."

"왜그러니 아키츠군?"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인데, 굳이 양호실 문을 도로 닫을 필요는 없지 않았어요?"

"...글쎄, 이상해?"

"...아뇨. 별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응수하는 미카도 선생님을 보다가 양호실을 나왔다.

"6명인가..."

"뭐가 말야 아키츠군?"

"아니 아무것도. 그냥 선생님이나 친구들도 참 취미가 나쁘다고."

"응?"

알쏭달쏭한 얼굴의 사야카를 부축하곤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구석을 돌자, 의리있게도 아직껏 테니스복도 갈아입지 않고 남아있던 하루나, 리사, 미오, 코요미가 간호복 차림의 오시즈와 함께 사야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처는 어떠냐며 호들갑을 떨며 사야카를 대하는 다섯명을 보곤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섰다.




다음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 자리에 앉자, 사야카가 인사해왔다.

"좋은 아침이지 아키츠군?"

"아, 좋은 아침 아라이.
다리는 이제 괜찮은거야?"

"물론. 간단한 찰과상이라서 금방 나았다구?
그것보다... 이거 받아."

씨익 웃은 사야카는 한손에 든 조그만 주머니를 내게 건내었다.

"뭐야 이건?"

"쿠키야. 집에서 간식으로 만들어 본건데, 어제 일도 있으니 아키츠군에게도 좀 나눠줄까 싶어서."

"아, 고마워. 그럼 사양않고~! 잘 먹겠습니다~"

기꺼워하며 건네받은 주머니의 포장을 풀어서 안에 든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고있자 사야카가 궁금한듯 물었다.

"어때? 맛있어?"

"응. 정말로 맛있어.
아라이는 쿠키를 잘 만드는구나?"

"물론. 이번건 자신작이니까."

"고마워 아라이."

"후후...같은 반이 되었으니 잘 부탁할께 아키츠군."

"아핫~ 뭘 새삼스럽게...응. 나도 잘 부탁해 아라이."

"아, 그리고 공부 가르쳐줘."

"공부?"

"아키츠군은 공부 잘했지? 모르는게 있어서 말야.
대신 앞으로도 테니스 가르쳐 줄께."

"좋아. 나로서도 바라던 바니까."

"그래서 이것 말인데..."

의지되는 사내아이라는 칭찬에 혹해서 쉬는 시간을 죄다 문제 풀이로 보내버렸다.
방과후엔 사야카도 그만큼 열심히 테니스 지도를 베풀어 주었기에 상관없었지만.
공부나 테니스와는 별개로 사야카와 일상적인 화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늘어나 즐거웠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리사가 사야카의 바디체크를 실시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싱글싱글 웃으면서「크게 해줄께~」하곤 달라붙는 리사가 사야카는 곤란한 듯 했다.
그때마다 코요미가 정색하면서 리사를 말리는 해프닝이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리 반은 정말이지 트러블이 넘치는구나」하고 생각하곤 대출 도서를 덮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p.s. 며칠 뒤 도서실에서 만나 책을 추천해달라는 오시즈에게 동화나 설화 관련 책을 골라주었다.
고마워하는 오시즈에게 덤으로 한권 더 책을 골라주었다.

「일주일만에 배우는 닌자 은신술」

다 읽으면 미카도 선생님께도 보여드리라는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하는 오시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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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보면서 하악하악하며 썼습니다(...)
삽화를 그려주신 암천묵시록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ㅅ☆)/~♥

그동안 구지가를 부르시며 스스로를 갈아버리신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m(_ _)m

은팔님, 불장구님, 절삭기님, 암천묵시록님께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야미의 도서관 이야기를 써주신 은팔님 감사드립니다.
감상은 그저 야미는 귀엽귀엽...*=ㅅ=*b~♥

룬의 욕실 이야기를 써주신 불장구님 감사드려요^^
새침떼는 룬의 모습이 마음을 간질이는게 실실 웃음이 나왔습니다+ㅠ+b

미캉의 비오는날 이야기와 그 흑역사, 비오는날의 그림, darkside 그림을 올려주신 절삭기님 감사드립니다~(+_+)~
어리지만 고민많은 소녀의 이야기가 보기 좋았습니다(>ㅅ<)b

마지막으로 수많은 축전과 32화 삽화를 그려주신 암천묵시록님.
축제의 코테가와&료스케, 배꼽 핥기(...)의 미캉, 버서커DX의 붕가붕가&료스케 최후의 날,
자창게 크리스마스 버전으로 올리신 글 + 간지쩌는 터프가이 료스케 양아치 버전&액막이 제거 버전, TS버전 료스케(女)&리토(女) 흑백&컬러판.
그리고 이번에 32화에 쓰인 아라이 사야카과 료스케의 양호실 침대 이벤트씬까지...!ㅠㅠb
그야말로 명장면의 향연이었습니다. 부왘-! 하고 눈이 뚫어져라 봤네요.(◎ㅅ◎)^
다만 32화 삽화 받고 약속한 오늘 정오까지 업로드는 실패...쿨럭쿨럭...=3=;

다시한번 축전을 보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읽어주시는 독자분들도 정말 감사드려요!(>_<)/~★


p.s. 참조 이미지

커졌다.
Posted by 루트(根)
,
"파파."

"응?"

"그 얘기 다시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
난 누가 뭐래도 파파를 믿어."

어느 가정집의 저녁식탁.
순수한 눈빛을 보내오는 아이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중년 사내는 진중한 어조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들아. 너한테는 들려주마."

- 올바른 판단력이 있는 성인들은 절대 듣지 않을 꿈같은 이야기.

- 현실에서 일어나도 믿을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를...

"거 아저씨! 애한테 이상한 헛바람 넣지 말고 전화나 좀 빌려달라니까요!?"



오랜만의 장보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나보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어둑한 땅거미가 깔려 있었다.
문을 열고 현관앞에 쇼핑백을 내려놓았을 때, 목욕탕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물 잠그고 나가는걸 깜빡했던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틀어져 있었으면 물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가볍게 탄식하곤 목욕탕으로 향했다.

달칵-

"어?"
"아..."

"...어라?"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눈을 동그랗게 뜬채 이쪽을 바라보는 두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욕조에 반쯤 잠긴채 상반신을 드러내고 있는, 드세보이는 눈매를 가진 슬림한 체형의 분홍빛 웨이브 장발의 소녀.
다른 한명은 막 욕조에 들어갈 참이었는듯 몸을 반쯤 돌린채 욕조를 잡고 서있는, 비교적 성숙한 몸매를 가진 분홍 단발의 소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소녀들의 목욕 장면에 당황한 가운데, 두 소녀의 엉덩이 부근에 난 하트 모양의 검은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꼬리? 설마 이 아이들...?

"엿보지마-!"

따악-!

"으큿!?"

도끼눈을 한채 얼굴을 붉힌 장발소녀가 힘껏 집어던진 대야에 얼굴을 직격 당한뒤,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욕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욕실 문에 기대어 살짝 붉어진 코를 매만지면서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렸다.
저 녀석들 '데빌루크' 성인이잖아? 어째서 우리 집에 저 애들이 있어?

"팬티 훔쳐가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악용하지만 말아주세요~♡"

난 내용물보다 속옷에 더 관심이 많은 변태가 아닙니다. 반대라도 문제일 것 같지만.
속으로 반박하며 힐끗 본 빨래바구니 속엔 둘의 것으로 보이는 드레스와 호박치마, 스트라이프 니삭스가 들어있었다.
그나저나 난데없이 남의 집 욕실을 점거하고 있는 두 우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우선은 음료라도 대접할까?



목욕을 끝내고 나온 두 소녀에게 음료수를 대접하고 마루에 마주 앉았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간단한 자기소개가 오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라고 할까...분홍 머리의 두 소녀는 라라의 쌍둥이 여동생들이었다.

방금전의 장발을 정리해 트윈 테일로 묶은,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송곳니가 인상적인 소녀가 데빌루크의 제 2왕녀 나나 아스타 데빌루크.
몽실몽실한 단발에 얌전해 보이는 소녀가 데빌루크의 제 3왕녀 모모 베리아 데빌루크.
라라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달리 두 쌍둥이 자매는 연한 자주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나나는 앞머리에 검은 끈을 나비모양으로 묶어 머리띠처럼 두르고, 목에는 금빛 구슬이 달린 검정 리본을 매고 있었다.
원피스와 손목부터 팔목 약간 위까지를 가리는 소매, 스트라이프 니삭스는 빨강과 검정의 배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모모는 푸근하게 보이는 단발에 검정 머리띠를 하고, 양옆으로 삐친채 말려들어간 더듬이 머리가 작게 자기 주장을 하고 있었다.
모모의 옷은 색의 배합이 녹색과 검정색 메인인걸 제외하면 나나와 거의 동일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데빌루크의 왕녀 둘이서 야심한 시각부터 우리집에 무슨 볼일이지?
생각을 정리하다가 너무 빤히 둘을 바라다 보았나보다.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 음료수를 마시던 나나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치마자락을 슬그머리 내리며 두다리를 모았다.

"...뭘 빤히 쳐다보는거야 변태녀석."

"아니, 이상한 곳을 바라본게 아니거든?"

"거짓말 하지마. 짐승같은 눈을 하고 있잖아?"

"이 눈매는 선천적인 거라고!?"

"아까 목욕탕 훔쳐봤으면서...!"

알고 그랬겠냐!?
대체 '남정네 혼자 사는 집에서 목욕탕 문을 열었더니 난데없이 여자애가 있었습니다' 라는 전개가 보통 있을거 같냐고?
......리토한텐 있었군.
목욕 도중에 갑자기 라라가 알몸으로 튀어나오는 걸로 우주인과의 경사스러운 첫 조우를 완수했었지.
퍼스트 컨택트가 알몸의 교제라니 가끔은 현실이 더 판타지군요.
고의 여부를 떠나서 알몸을 본건 사실이라 뭐라 항의하지도 못하고 침묵하고 있자 모모가 끼어들어왔다.

"진정해 나나. 한창일 나이에 혼자 살다보니 료스케씨도 이것저것 쌓인게 많았을 거라구?"

...변호는 좋지만 멀쩡한 사람을 변태로 몰아가지 맙시다 모모씨.
그런쪽 이야기엔 서먹한 나나는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간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만.

"?이것저것?"

"그러니까 사춘기 소년 특유의..."

"아니아니. 자꾸 이상한 쪽으로 몰아붙이지 말라고.
애초에 너희들, 남의 집에 와선 태연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었다니 이상하잖아?"

"네가 너무 안와서 그렇잖아!
정말이지 밤늦게까지 안들어오고 뭘하고 있던거야?
대체 몇시간을 흘려 보냈는지...기다리다가 진이 빠지는줄 알았단 말야."

"아, 오늘은 장보기로 시간을 보내서..."

내탓? 내탓이야?
약속도 없이 찾아온건 이녀석들인데 어째서 내가 미안한 감정이 드는거람?

"실은 대화만 나누다 갈 예정이었는데 료스케씨의 귀가가 너무 늦어져서 몇시간을 기다리다 보니 지쳐서 말이죠.
허락없이 욕실을 쓴건 죄송해요."

정중히 사과해오는 모모의 태도에 뭐라 하기도 어른스럽지 못한것 같다 머리를 긁적이곤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뭐, 됐어.
실수한 내 탓도 있으니까.
그 이야긴 이제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구."

"네. 그전에...오늘 저희와 만난 일은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응...?"

"모모. 정말로 이녀석한테 부탁할거야?"

"그만둬 나나. 이녀석이라니.
아무리 수백명의 여성들과 잤다든지, 온갖 비열한 수단으로 수많은 여성을 울린 귀축이라는 소문이라든지 여러가질 들었다지만,
눈앞에서 그런식으로 말하는건 실례야."

"...저기, 난 그렇게까진 말하지 않았는데?"

초면인데도 나 평가 무지 낮아!?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태연하게 변호를 가장한 독설을 내뱉는 모모씨는 역시 무서운 아이 입니다.
나나도 살짝 질린듯한 얼굴로 있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에게 친절하게 마실것까지 대접한 나는 오히려 신사라고 불려야하는게 아닙니까?
농담같은 분위기라는건 알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음료수를 마시고서 감사의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말이죠.

"그런데 비밀로 해달라니...다른 사람들에겐 너희가 이곳에 온 일을 말하지 않은거야?"

"네.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언니가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 되서 지구에 온건가?
지극한 언니 사랑이군요.
그 기특함을 봐서라도 여기선 약속을 지켜주는게 도리지.

"아아 그렇다면 잘됐군. 이제 나만 입다물고 있으면 너희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테니까."

"약속 감사드려요."

"음, 그나저나 말인데..."

"무슨 일이시죠?"

"목욕 후의 음료는...맛있었어?
슬슬 감상을 들어도 좋을 타이밍인 것 같은데 말이지."

"네? ...아, 네. 아주 맛있었..."

이제 적당히 감사를 표하라는 의미로, 은근슬쩍 컵에 시선을 주고 물어보는 내게 어리둥절한채 대답하던 모모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말을 멈춘 모모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나나도 곧 안색이 바뀌었다.

"......"
"......"

"어이? ...여보세요?"

어째서 긴장한 표정으로 손에 든 컵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설마?"
"...너..."

"왜, 왜?"

심상치않은 둘의 분위기에 무심코 앉은 상태에서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버렸다.

"너, 너 대체 여기에 뭘 넣은거야!"

"으어어~!?"

넣다니 뭘? 난 귀축이 아니고 이건 에로게임도 아니거든요!?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달려든 나나가 내 멱살을 잡고 앞뒤로 마구 흔드는 통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물어보기 좋은 타이밍은 커녕 터무니없는 지뢰를 밟았나봅니다.
...다음번엔 타바스코를 잔뜩 넣은 토마토 쥬스를 먹여줄까보다.



우습지도 않은 해프닝에 한참을 시달리고 나나와 모모가 진정하고 나서야, 둘의 방문 용건을 들을 수 있었다.

"끄응...게임 시나리오 만든걸 봐달라고?"

아직도 어질어질한 머리 때문에 이마를 감싼채 물었다.

"네. 언니가 만든 '가상현실게임'에 언니랑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려 해요.
언니의 약혼자와 친구들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일단 플롯은 잡아뒀는데 한번 읽고 평가해 주시겠어요?"

모모가 건넨 용지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트러블 퀘스트」? 가상현실로 초대?
어떤 내용인진 나도 궁금하니까 딱히 부탁할 일도 아니지만...내 감상이 도움이 되려나?"

"물론이죠. 료스케씨도 이번 가상현실게임에 초대되는 사람중 한명이니까, 의견을 내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꺼에요.
아, 참고로 시나리오는 제가 짰어요. 나나는 도움이 안되서 손이 모자랐거든요."

생글생글 웃으며 내뱉은 모모의 말에 나나가 발끈 항의했다.

"뭐야? 나도 함께 게임을 고쳤잖아!"

"중요한 부분은 내가 다했잖아.
그리고 넌 지구에 와선 매일 놀러다녔으면서..."

나나에게 눈을 흘기곤 모모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료스케씨는 보기보단 책략가 타입이라고 들어서 시나리오 부분에서 좋은 조언을 받을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책략?"

의외의 단어에 갸우뚱하자 모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저스틴으로부터 보내진 보고서를 보았어요.
평상시에는 언니와 같은반 동급생으로 활동하면서 간교한 혓바닥을 이용해 모두를 속이고 있지만, 그 실체는 사이난에 떠도는 모든 괴담의 뒤에 존재하는 흑막.
사이난의 모든 불량배들을 휘하에 거느린채 암약하고 있으며, 비열하고 야비한데다 치졸하고 음흉하기까지한,
심계에 있어선 악마도 울고갈만큼 더럽기 짝이 없는 독사같은 남자.
그의 모략에 당한것으로 보이는 우주 최악의 범죄조직 SOLGAM의 간부는 아직까지도 정신착란증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오케이, 거기까지."

터무니 없는 중상모략에 머리가 더 아파져 관자놀이를 누르곤 모모의 말을 멈췄다.
저스틴의 개인적인 감정이 물씬 배어나오는 황당한 보고서가 대체 어떻게 나온건진 잘 알았다.
내 이름을 팔아먹던 불량배 녀석들 때문에 뭔가 엉뚱한 오해를 한것 같은데...
다음에 만나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어야 겠다.
저번에 봤던 저스틴의 만화(은하의 랩소디)나 한권 구해서 사인해달라고 부탁하면 분위기가 좀 좋아지려나 몰라.
저스틴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면서 모모가 가져온 게임 시나리오를 읽어보았다.
대략적인 설정은 다음과 같았다.

「트러블 퀘스트」
장르 : 가상현실RPG(Role-Playing Game)

공주를 납치한 마왕을 용사가 쓰러뜨리는 이야기.
마왕은 커스텀 NPC인 매지컬 쿄코가 맡는다.
공주는 라라. 용사는 리토.

마왕의 성은 대륙의 끝에 있다.
게임오버가 되면 맨처음 마을로 되돌아간다.

마왕 쿄코는 리토에게 반해있다.
리토가 자신의 애인이 되어준다면 라라를 해방하고 모두를 현실세계로 되돌려주겠다고 제안하는 쿄코.
여기서 리토의 대답으로 라라에 대한 리토의 마음을 판단한다.

마왕 쿄코의 HP는 무한이므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쓰러뜨릴수 없다.
'정원사' 직업인 리토의 '물뿌리개'만이 HP 무한인 마왕 쿄코를 쓰러뜨릴수 있는 유일한 키아이템이다.


...리토에게 반했으면 라라가 아니라 리토를 납치해야지.
그리고 대륙의 끝에 있는 마왕성이라니 너무 멀어!
방금전 손이 모자라다는 모모의 말을 듣건데 자잘한 이벤트를 넣을 시간 여유도 없어보이는데...마왕성까지 이동하는 동안 대체 뭐하고 즐기라고?
실속도 없는 몬스터 사냥만 하다가 지루해서 짜증낼지도 모른다구?
게다가 마왕성까지 가는중에 만약 게임오버 되기라도 하면 '맨처음 마을'로 돌아간다니...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 딱 좋은 설정이다.

더군다나 마왕을 쓰러뜨리는 방법이 리토가 가진 '정원사의 물뿌리개' 밖에 없다는건...최후에 와선 '동료'도 '레벨업'도 의미가 없단 거잖아.
'초대'했다는 라라의 친구들은 결국엔 '들러리' 역할 밖에 못한다는거 아냐?
'가상현실'이라는 경이로운 기술은 좋다지만, 아무리봐도 이건 멀티 플레이어용 시나리오라기 보단, 그냥 1인용 게임에서나 쓸법한 시나리오다.

어디서부터 딴죽을 걸어야 할지 몰라 침묵하고 있자 모모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기...어떤가요?"

「'트러블' 퀘스트답게 엉망진창입니다」라고 대답하려다가, 기대를 품은채 바라보는 모모의 눈동자에 주춤했다.

"...괜찮은거 같은데?"

"정말요?"

거짓말입니다.
소드 마스터 야○토 식의 엔딩이 나올게 뻔히 보이는 플롯입니다.
그래도, 속은 좀 시커멓다지만 내심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아이에게,
그것도 언니와 언니의 친구들을 위해 분발해서 시나리오를 짜온 아이에게 매몰차게 대하는건 차마 못하겠다.
손을 깍지끼며 기뻐하는 모모의 반응을 보면 좋게 말하길 잘한것 같긴 하다.

"확실히 유우키는 꽃들을 잘 돌봐주니까 정원사 직업이 딱 어울려보여."

"언니의 약혼자분은 식물을 아끼나보죠?"

"뭐, 그녀석은 상냥하니까. 언제나 학교에서 꽃병의 물을 갈아주는걸 봤거든."

"헤에...좋은 분이네요."

"잠깐 모모? 우린 그 녀석이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거든?"

리토에게 호의를 표하는 모모를 나나가 제지하며 참견해왔다.

"좋잖아 나나.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중 나쁜 사람은 없어."

"...속검은 네가 할 말이 아니잖아."

식물을 소중히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든 듯, 모모로서는 리토에 대한 평가를 후하게 주고 싶나보다.
작게 투덜대던 나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지금 시나리오 대로라면 리토와 라라를 뺀 다른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 역할만 할뿐이라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지만...솔직히 고치기엔 번거롭다.
스토리가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어차피 하루이틀 안에 클리어하곤 두번 다시 플레이 하지도 않을 게임인데, 그렇게까지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건가?
그래도 기껏 도움을 부탁해왔는데 아무 조언도 안하는건 성의가 없어보여서 조금 말을 덧붙였다.

"굳이 참견을 하자면...마왕이 있는 장소는 시작 지점에 가까운 곳으로 잡는게 좋겠어.
라라의 친구들은 전부 학생이라서 많아야 하루 이틀 정도밖에 여유가 안돼.
그러니까 대륙의 끝까지 모험을 하는건 시간상으로 어려움이 많다구.
중요한건 유우키가 라라를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게임을 시작하는 마을의 근처에 마왕성이 있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그렇게하면 레벨업에는 문제가 있을순 있겠지만, 유우키의 물뿌리개 아이템이 있다면 레벨에 상관없이 게임 클리어는 문제가 없으니까."

"네."

"그리고 기왕이면 현실에서 라라의 상황을 적용해보는것도 좋을것 같아."

"언니의 상황?"

"예전에 라라의 결혼 후보들이 라라를 노리고 있고, 유우키가 그들로부터 라라를 지켜낸 적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어.
그런 이야길 참고하면 실제 유우키의 성향을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으음..."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진 모모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궁금한게 생겼기에 나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게임에는 누구누구를 초대할거야?"

"아, 그건 여기 적혀있어. 내가 초대장을 보낼 예정이거든."

나나가 건네준 목록을 살펴보았다.

「초대 목록」언니(라라 사타린 데빌루크)
유우키 리토
유우키 미캉
사이렌지 하루나
모미오카 리사
사와다 미오
텐죠인 사키
쿠죠 린
후지사키 아야
금색의 어둠(야미)
룬 엘시 쥬에리아(렌 엘시 쥬에리아)
아키츠 료스케(나)
코테가와 유이
오시즈(무라사메 시즈)
사이난 고교 교장



"...교장은 빼."

"왜?"

"변태니까."

허구헌날 엿보기에 알몸으로 여자아이를 껴안으려드는 위험인물이 어째서 목록에 있는거야?
차라리 리토의 단짝친구 사루야마라면 이해라도 되지.
내 극단적인 평가에 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가 변태라고 말할 정도라니...도저히 상상이 안가는데?"

"이봐..."

"왜? 틀린 말은 아니잖아."

요 꼬맹이가...?

"...너희 우주인들도 만만치 않거든?"

"어째서?"

"라라의 약혼자 후보였던 녀석들도 죄다 변태였잖아?
변태(변신)능력을 가지고서 정신을 잃은 여자아이에게 촉수 플레이를 하던 최악의 변태도 있었고,(기-브리 입니다.)
벌레보다 작은 주제에 라라랑 결혼하겠다던 변태도 있었고,(극소 우주인 프류마 입니다.)
짜리몽땅 두꺼비처럼 생긴 이등신 주제에 성격 최악인데다 옷만 녹이는 두꺼비를 데리고 다니는 변태도 있었다고.(라코스포 입니다.)
아니~ 정말이지 그런 변태들을 당당히 신랑감으로 지목한 우주인의 변태성도 참으로..."

"우리 아빠 욕하지마!"

"끄엑!?"

분노한 나나의 맨손조르기를 뒤에서 받아버렸다.
등뒤에서 팔로 목을 조르며 매달려오는 나나를 떨쳐내려고 양손을 들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욕후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나나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며 흘러갔다.

"뭐야?"

"음...샴푸 향이 참 좋네."

나도 쓰는 샴푸지만.

"뭐, 뭘 맡고 있는거야 이 변태가!"

퍼억!

"악! 폭력 반대!"

달라붙어오던 나나가 떨어지면서 조르기는 풀렸지만 대신 주먹을 얻어 맞았다.

나나와 나의 드잡이질이 끝날 즈음 모모는 고민이 풀린듯 생글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고마워요. 도움이 되었어요."

"아야야...별말을. 나야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지."

뺨을 매만지면서 답한 내게서 나나를 떼어내곤 모모는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럼 멋진 게임이 완성되길 바랄께."

"후후, 기대해주세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둘은 돌아갔다.
라라의 연구실에 있는 게임을 수정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나.
게임 스토리는 둘째 치고라도 실감나는 가상현실을 체험할수 있는 기회니까, 게임속으로 가는 초대장이 오는 날이 기대되었다.




- ...나...

우음...

- 어나...

...?

"일어나란 말야!"

퍼억!

"우읍!?"

배에 작렬한 일격에 눈이 번쩍 떠졌다.

"컥!? 뭐, 뭐야?"

"대체 언제까지 자고 있을꺼야?"

눈꺼풀을 비비며 억지로 눈을 뜨자 분홍 트윈테일의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너냐...?"

"가상현실게임 수정이 다 끝나서 찾아왔어."

"...혼자 온거야? 모모는?"

"모모는 먼저 게임속에 들어가있어. 최종 테스트 중이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돌린 다음에 널 조금 일찍 데려오라고 하더라구."

"...이 시간부터? 너 지금 몇시라고 생각하는거야? 흐암..."

하품이 나오는 입가를 가리면서 휴대폰을 열어보니 시간은 아직 5시였다.
아침부터 부지런한건 좋다지만,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시나리오 진행을 위해서 너한텐 네가 맡은 배역을 설명해줘야 하거든."

"그래? ...그럼 잠시만 기다려줘.
곧 일어나 씻을테니까."

"좋아. 서두르라고."

"......"

"...? 얼른 일어나지 않고 뭐해?"

"아, 그러니까 잠시만 더 있다가..."

(해석 : 아침이라 아드님이 한껏 쌩쌩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뭘 그렇게 침대안에서 꾸무적대는거야?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어서 일어나라고~!"

"잠깐!?"

미처 제지할 새도 없이 나나는 냅다 이불을 잡아당겼고,
펄럭 소리와 함께 하반신을 가리던 이불이 페이스 오픈했다.
다리 사이에 불룩하게 솟아난 부분을 보고 눈이 화등잔만해진 나나는 이불을 걷어올린채로 굳어져버렸다.

"꺄아아아악---!"

곧이어 방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른 나나는 순식간에 한쪽 벽에 등을 대고 바짝 달라붙었다.
양손에 쥔 이불로 목 아래까지 가리면서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는 나나에게 가볍게 탄식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있다가 나간다고 했잖아..."

"뭐, 뭐야 그건!"

"...생리현상."

민망한 모습을 보인지라 한숨을 쉬곤 일어나자 나나가 기겁하며 뒷걸음질치려다 벽에 등을 부딪혔다.

"오지마! 이 짐승아!
그대로 평생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릉 거리는 나나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씻으러 가는거니까 진정하고 이불이나 내려놔."

경계를 풀지않는 나나를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다 씻을 즈음에는 녀석도 긴장이 풀리겠지.
그나저나 이른 아침부터의 초대라니 대체 뭘 말하려는 거지?




"......왜 내가 악역이야?"

샤워후 「물질 디지털화 전송 디바이스」를 통해 나나와 함께 게임속으로 들어가 모모에게 맡은 배역을 듣고 처음 내뱉은 말이다.
라라를 납치한 결혼후보(악역) 역할을 맡게 될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변태인데다가 과대망상에 빠진 그런 한심한 녀석들 흉내를 내야 한단말야?

"잘됐네. 꼭 맞는 역할을 맡게되서."

...설마 나나 네가 추천한건 아니겠지?
작게 키득거리는 나나의 옆에서 모모가 설명했다.

"료스케씨가 흑막 이미지가 강하니 악역 연기엔 제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무엇보다 초대받은 분들중 리토씨를 제외한 남자분은 료스케씨 뿐인걸요?
교장은 료스케씨가 제외하셨잖아요."

사루야마는? 사루야마는!?
불쌍한 사루야마... 초대도 못받다니.
중학교 때부터 리토의 친구였으면서...

속으로 애도를 표하곤 모모의 설명을 들었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결혼 후보들의 라라 쟁탈전'을 참조해 게임 플롯을 조금 바꿨다고 한다.

「라라를 납치한 라라의 결혼 후보(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리토와 그 일행들이 모인다.
궁지에 몰린 악당(나)은 마왕(매지컬 쿄코)을 소환하고, 리토와 일행들은 최후의 결전을 준비한다」는 식의 전개로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짧고 간결한 구성이었다.
이전의 조언대로 시작의 마을에 마왕성을 만들어 놓았기에, 시간 낭비없이 재깍재깍 보스에게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설사 리토 일행이 패배해 게임 오버가 되더라도, 시작의 마을에서 몇번이고 부활해 재도전할 수 있으니까.

"근데 왜 마지막은 매지컬 쿄코 소환이야?
약혼자 후보만 쓰러뜨려도 유우키의 성향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것 같은데."

"그야 매지컬 쿄코는 언니가 좋아하는 캐릭터인걸요?
언니의 취향이니까 존중해주세요."

"아 네..."

약간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모모는 킥킥대다가 말을 덧붙였다.

"실은 기껏 만든 커스텀 캐릭터인데 안쓰기도 아깝고, 지금은 자고 있는 언니가 깨어났을 때 저희 대신 언니를 상대해 줄 인물이 필요했거든요.
가만히 성안에 갇혀있는 역할은 언니로선 너무 지루할테니까요."

라라는 자고있는 채로 게임속으로 들어온건가?
나나와 모모는 라라가 모르는 새에 이야기를 진행시키고픈 모양이다.
하긴, 라라가 여동생들이 리토를 시험하기 위해 벌인 일을 알았다면 이유가 어찌되었든 말리려고 할테니까.
라라가 잠에서 깨어나더라도 매지컬 쿄코의 부탁이라면 다소 이상하더라도 얌전히 있어줄테고.
생각을 정리하고 납득하는 내게 나나가 덧붙였다.

"될수 있으면 초대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수 있도록 이끌어줘.
약혼자인 유우키 리토 외에도 언니의 친구들 성향도 알아봐야 하니까.
아, 그리고 이걸 가지고 있도록 해."

나나가 건넨 물건을 받아들었다.
매지컬 쿄코 모자에 달려있는 괴상한 햇님 모양의 장식이었다.

"매지컬 쿄코를 소환하는 물건이야.
유우키 리토 일행과 싸우다 힘에 부칠때 쓰도록 해."

"그럼 이걸 쓰면 매지컬 쿄코가 나타나서 이벤트가 진행되는건가?"

"응. 우선 쿄코가 널 쓰러뜨린 뒤에."

"......머라고요?"

이상한 말을 들어서 그런지 혀가 꼬였다.
내가 아니라 리토랑 일행들을 쓰러뜨려야 하는게 맞지않아?

"어째서? 쿄코는 아군 아녔어?"

"응? 당연히 아니지.
처음 플롯짰을 때, 매지컬 쿄코는 리토에게 반해있다는 설정이었잖아.
그러니까 리토와 적대시하는 악당인 널 없애는거지."

도움을 청해도, 청하지 않아도 죽는건 똑같다는 겁니까?
도와주러 온 녀석이 하필이면 적에게 반해있어서 아군 뒤통수를 친다고 하니까 도무지 답이 안나오네요.
벌레씹은 표정을 지은 내게 나나가 쯧쯧하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주인공 일행이 고생하며 상대하던 적을 단숨에 쓰러뜨리는걸로 최종보스의 강력함을 인식시킨다.
정석중에 정석이잖아? 네가 이해하라구."

그야 「팀킬하는 보스」가 닳고 닳은 클리셰라면 클리셰지만...
이미 주인공 일행에게 당해서 다죽어 가는 중간보스를 순살시켜봤자 얼마나 강해보인다고?
아무튼 난 적당히 악역을 연기하다가 최후엔 쿄코의 강함을 알리기 위한 제물이 되면 된다 이거군요.

이후 나나와 모모에게 마지막으로 내 역할을 확인받았다.
둘이서 라라가 만든 게임을 수정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들였기에, 게임속에서의 세세한 판단은 내게 일임한다고 했다.
지구에 와서 놀러다니느라 작업에 소홀했다며 나나를 구박하는 모모의 모습을 보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대강 짐작이 갔다.
뭐, 리토의 마음을 확인하는건 둘이 알아서 할테고, 난 그저 적당히 악역을 연기하다가 져주면 되겠지.
플롯도 간단한 편이라 연기하는덴 딱히 곤란할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도착한 거대한 홀.
홀의 끝에 놓인 중세 의자 밑에서 시작된 호화로운 붉은 양탄자의 길은 홀의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고풍스러운 중세 의자에 앉은채 을씨년스러운 고요함만이 감도는 홀의 공기를 들이마시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심해..."

나나와 모모가 잠에 빠진 라라가 있는 침실로 이동한뒤, 나혼자 마왕성의 홀에서 기다린지 몇시간째.
천장을 장식한 커튼을 멍하니 바라보며 보내는 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도 안오네...
등교도 못하고 게임속으로 초대되었는데 몇시간째 제자리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나나랑 모모는 둘이서 이야길 나누거나 매지컬 쿄코(가짜)를 조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모니터링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낼수나 있지, 나만 홀에 앉아서 대체 뭘하라고?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마을 밖으로 나가 몬스터 사냥이라도 할수 있었다면 좋을텐데...
...아니지. 자고로 피할수 없다면 즐겨라고 했다.
익숙한 악당 연기나 해보는게 시간 보내기에 좋을것 같아 몸을 일으켰다.

"아아~ 흠흠! ...후후, 어서와라 용사여..."

실상은 중간보스라도 마음만은 최종보스입니다.

"이몸은 10번 찔러야 죽는다!"
"메라조마가 아니다. 메라니라."
"피○스 윙!" "카라○티 엔드!"
"세상의 반을 줄테니 나와 손을「아, 아키츠?」...응?"

갑자기 들려온 내것이 아닌 목소리에 기긱기긱 거리며 억지로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열린 홀의 입구로 들어온 린 선배와 아야 선배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적막한 홀의 공기가 싸늘하다.

"...아...저기, 이건 지루해서 그냥 연극을..."

그러니까 그렇게 안쓰런 얼굴로 외면하지 말아요!
안그래도 마왕님 흉내로 의기양양하는 모습을 보여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라구요!
얼굴이 화끈거리는걸 감추려고 화제를 돌리려다 사키 선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걸 깨달았다.

"사키 선배는요? 함께 오지 않으셨어요?"

"아. 혹시나 위험이 있을지 몰라 우리가 먼저 들어온거다."

"사키님 어서요."

"자, 잠깐만...안에 있는거 아키츠군이죠?"

홀 밖으로 나간 아야 선배와 대화하는 사키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요. 들어가지 않으면 현실로 돌아가지 못한다구요~!"

"알곤 있지만 이 차림으론 조금..."

망설이다 아야 선배의 손에 이끌려 홀안으로 들어선 사키 선배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잊었다.

양손으로 꼭 쥐고 있는 채찍.
가랑이를 간신히 가린 V자 모양 팬티.
배꼽과 앙가슴을 통째로 노출시키는 본디지 패션.
목에 채워진 가시가 달린 개목걸이.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옷차림은 아니다.
살짝 입을 벌린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얼굴을 붉히곤 사키 선배는 가슴과 다리 사이를 손으로 가렸다.

아니...저것도 확실히 여왕님은 여왕님인데...
사키 선배가 평소 생각하는 퀸은 저런 풍속점에서나 통용될법한 속된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년 문화제에서 풍속점 본디지 패션으로 폭주하던 사키 선배의 모습은 잊고 싶었는데 말이지...

눈을 가리고 낮게 탄식한 내 반응을 어떻게 생각한건지 사키 선배가 당황하며 변명했다.

"오해예요 아키츠군! 이 옷은 길드에서 멋대로...!"

"아...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되요 사키 선배.
평소의 선배가 기품있는 분이란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가끔씩 학교에서 보이는 기행이라든지, 경쟁심리를 자극받으면 상식과 수치심을 집어던지는 행동이 문제지만 말이죠.
손사레를 치며 강하게 부정하는 사키 선배를 보면 확실히 상식이라든가 부끄러움은 있는 것 같다.
예전에 치마가 들춰진 모습을 쬐였을때 부끄러워 한적도 있고.
여기선 그냥 옷차림에 신경쓰지 않는척 넘어가는게 나을것 같다.

"어차피 게임속 복장일 뿐이니까 너무 거북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 그렇죠? 호, 호호..."

안도하며 표정을 추스른 사키 선배의 뒤로 린 선배와 아야 선배가 나란히 섰다.
사키 선배의 파격적인 옷차림에서 눈을 돌려 린 선배와 아야 선배의 옷차림을 보았다.

린 선배는 평소의 검도 소녀 이미지가 반영되었는지 사무라이 개조복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흰색 머리띠가, 목에는 무릎까지 오는 흰색 머플러가 둘러져 있었고,
바깥쪽 엉덩이가 노출될 정도로 폭이 좁은 청색 천조각이 앞뒤로 하반신을 가리고 있었다.
통째로 틔여있는 다리 양옆은 고작 끈 2개만으로 고정되어 있어, 옆에서 보면 하반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복장이었다.

아야 선배는 검은 바탕에 붉은색으로 강조를 넣은 모자와 상의, 무릎 위까지 오는 검정 호박치마, 붉은 구두에 보라색 로브를 두른 마법사였다.
양손에는 지팡이와 마법서로 보이는 책을 각각 들고 있었다.
살짝 패인 가슴골이 드러나는 상의라는걸 제외하면, 얌전한 아야 선배답게 비교적 조신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실 혼자서 있느라 심심했거든요."

"마을 사람에게 성에 가보라는 얘길 들었어요.
현실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수 있다면서...
그런데 아키츠군은 여기서 뭘하고 있었던거죠?"

"전 중간보스 역을 맡아서 말이죠.
절 쓰러뜨리고 공주를 구할 용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주? 용사?"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셋을 보곤 의아해하며 물었다.

"...길드에서 퀘스트를 받고 오신게 아닌가요?"

"확실히 길드란 곳에서 마왕을 쓰러뜨리라는 말은 들었지만..."
"정보를 얻기 위해 몇몇 마을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꼭두각시처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더군."
"솔직히 지금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곤혹스러워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듯 했다.


나나와 모모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 간단히 현재 상황을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초대된 상황이고, 게임을 클리어하면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다.
중간보스인 나를 쓰러뜨리면 최종 보스인 마왕이 등장한다.
마왕을 쓰러뜨리려면 초대된 사람들이 전부 모여야 한다.
(나나와 모모가 각 인물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쉽도록, 초대된 전원이 함께 성에 오도록 말을 유도했다.)
초대된 사람은 (나와 라라를 제외하고) 12명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선 준비가 부족하니, 우선은 마을로 돌아가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하도록 하십시오."

설명을 끝마치고 나서 퇴실을 권하자 사키 선배가 제안해 왔다.

"아키츠군도 함께 가지 않겠나요?"

"네?"

"이런 을씨년스러운 곳에 혼자 있는건 아키츠군도 바라지 않겠죠?"

상냥하네. 가끔 경쟁심리로 폭주하는것만 빼면 조금 도도해도 확실히 좋은 사람이다.
린 선배와 아야 선배도 사키 선배의 그런 면에 빠져든 거겠지.

"배려 감사드립니다 사키 선배.
다만...선배들과 함께 하는건 어렵겠네요.
혹시나 사람들이 찾아오면 지금처럼 안내해줘야 하거든요."

"그런가요..."

"그리고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선배들을 만나서 저도 심심하진 않았으니까요."

"저, 저기...!"

"아야 선배?"

사키 선배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자, 옆에서 주저하던 아야 선배가 머뭇거리며 나섰다.

"그럼 제가 함께 남아있을까요?"

"네?"

"그...혼자선 외로울테니까..."

놀란 눈으로 아야 선배를 바라보았다.
말을 꺼낸 아야 선배는 민망한 듯 볼을 살짝 붉히곤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야 선배의 제안에 사키 선배와 린 선배는 마주보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뒤 수긍했다.

"뭐, 괜찮겠죠. 아키츠군이라면 신뢰가 가니까."

"그 말씀은 기쁩니다만...괜찮습니까?"

"아야가 결정한 일은 존중해 주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대로 아키츠군을 혼자 두고 가기도 미안하고 말이죠."

"그래. 방금전까지만해도 이상한 행동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잖나.
대화상대라도 있다면 적적하진 않겠지."

말을 마친 린 선배는 옆에서 우물쭈물 하고있는 아야 선배의 어깨를 잡았다.

"(아야.)"

"(린?)"

의아한 표정의 아야 선배에게 린 선배는 진지한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말해두는거지만...해주법 같은걸 사용할 생각은 하지마?)"

"그, 그런 유혹하는 행동, 할 수 있을리 없잖아!"

린 선배의 충고에 아야 선배는 볼이 빨개져선 속삭이는 것도 잊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아야 선배의 고함에 린 선배는 쇼크를 받은 듯 굳어버렸다.

"유, 유혹... 유혹이었던가 그건..."

"저, 저기...린?"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아선 머리를 감싸쥐며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린 선배의 모습에 아야 선배가 당황해서 부축했다.
우울한 얼굴로 중얼중얼 거리던 린 선배는 얕은 신음을 흘리곤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내 손을 잡고서 홀 한쪽 구석으로 이동한 린 선배는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아키츠."

"네. 린 선배."

"아야는 말이다...순진하고 한결같고 다정한 아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널 믿지만, 혹시라도 그......밀어넘어뜨리거나 하진 마라?"

"!?"

체육창고에서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말에, 말을 꺼낸 린 선배도 나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그런 일 할리가 없잖아요?
그...! 린 선배 때는 예상치 못한 장면에 저도 그만 실수를..."

"그러니까 불안하단 말이다...!
어째서 아야는 그런 주술 같은걸..."

작게 투덜대던 린 선배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무튼, 그때처럼 자신을 잃진 마라.
나는 괜찮았지만 아야는 상처받을지도 모르니까."

"네. 근데 그렇게 걱정되시면 린 선배도 남으시는건..."

"사키님을 홀로 둘순 없잖나.
그리고 널 믿는다는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니까."

하하...기쁜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린 선배.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철컥-

"...어머?"

대화를 끝마치고 사키 선배와 린 선배가 홀 밖으로 나가려고 문에 손을 대었을 때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시죠 선배?"

"문이 열리지 않아요."
"잠겨있어..."

"그런..."

당황하는 우리의 머리위로 메시지가 떴다.

- 보스 필드에서는 도망칠 수 없습니다.

- 아직도 모르겠느냐...? 대마왕으로 부터는 도망칠 수 없다는걸...!

모 영감님의 대사가 메시지를 따라 머리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건...?"

"아무래도 이곳에선 마음대로 나갈수 없나보군요."

"그럼 어떻게 나가야 하죠?"

"게임오버가 되서 마을에 되돌아가는 수밖엔 없겠네요."

"그런..."

아연하는 아야 선배와 달리 린 선배가 앞으로 나섰다.

"순순히 져줄거라 생각하진 마라."

"싸우시려고요?"

"이런기회는 좀처럼 드무니까 말이지."

"게임 속이니까 조금 거칠게 갈지도 모른다구요?"

"바라던 바다."

검을 든 린 선배의 뒤로 사키 선배와 아야 선배가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검사인 린 선배가 전위, 채찍을 다루는 사키 선배가 중위, 마법사인 아야 선배가 후위인가?
그대로 가만히 나를 직시하며 린 선배는 검을 세웠다.
움직이지 않는데...경계하고 있는건가?

"오지 않나요?"

"섣불리 덤비기엔 위험하니까.
네가 규격외란건 라라와 맞붙었을 때 충분히 알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대치할 뿐이라면 시간만 흐를 뿐인데.

"...오지 않으면 이쪽에서 먼저 갑니다?"

"좋다. 와라!"

"『메라』"

"뭣!?"

주문과 함께 손에서 나온 화염구가 린 선배에게 명중했다.

"마법!?"

"검사를 상대로 일부러 접근전을 할 필요는 없겠죠."

드래○ 퀘스트에선 동네 꼬마들도 쓰는 기본 주문이라지만 견제용으로 쓰기엔 충분하다.

"큭! 아야, 원호를!"

이대로는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린 선배는 접근전을 시도했다.
생각했던것 보다 뜨거운 반응이네요 린 선배.
게임속인데도 승부에 필사적이다.

아야 선배가 마법서를 여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린 선배가 검을 휘둘렀다.
뒤로 물러서 피하면서 펼쳐진 손바닥을 사키 선배쪽으로 향했다.
린 선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사키님!"

"『메라』"

"큿...!"

"린!"

사키 선배를 향해 날아가던 화염구를 린 선배가 대신 몸으로 막았다.
약점을 노리는 건 기본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도한거지만 역시나랄까 충성심으로 무장한 린 선배였다.

"파티를 짜서 협동해 덤비는줄 알았는데 이래서야 팀웍도 기대하기 힘들겠군요.
그런데, 언제까지 사키 선배를 지키면서 싸울 수 있을까요 린 선배?"

"얕보지 마시죠!"

"!?"

쫘악-!

어느새 린 선배의 뒤에서 빠져나온 사키 선배가 세차게 휘두른 채찍을 피했다.

"난 신경쓰지말고 공격해요 린."

"하지만..."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잖아요?
이런때마저 호위를 한다면 오히려 곤란하지 않겠어요?"

완전히 동감입니다.
게임은 즐기라고 있는거라고요.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것 같아 단검을 내리고 린 선배와 사키 선배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렇더라도 제 고집으로 시작한 싸움에 사키님에게 피해가 간다면..."

"난...! 언제까지나 지켜지기만 하는 무력한 아이가 아니에요!"

외침과 함께 채찍으로 한차례 바닥을 때린 사키 선배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덤비세요! 싸움여왕인 이 텐죠인 사키가 상대해 드리죠!"

"사키님..."

감동한듯 아야 선배와 린 선배가 제각기 무기를 들었다.
과연, 우정 파워라 이건가.
현실로 보는건 처음이었다.

"...멋진 눈이로군요 사키 선배."

"...흥. 언제라도 난 멋졌어요."

아하하...반박할 여지가 없군요 정말로.
어째서 여기 소녀들은 하나같이 근사할 따름인지...
지금 상황은 '모두의 힘을 하나로' 이벤트 같은 느낌이라, 마음은 이대로 져주고 싶지만...
우선 분위기를 읽고 일단 수세로 돌아서기로 했다.


다시금 사키 선배의 채찍이 파공음과 함께 날아왔다.
매서운 소리를 내며 쇄도해오는 채찍 끝을 한손으로 움켜잡자 채찍끝에 달린 십자모양의 추가 보였다.
이거...꽤나 흉악한데? 길이가 길때부터 생각했지만 풍속점에서 쓰는 그런 솜방망이 같은 무기가 아니잖아?
무기가 실전용 채찍이라면 차라리 복장도 본디지 대신 카우보이 같은 복장으로 해줄것이지...
잡념에 빠져 있는것도 잠시, 아야 선배의 외침과 함께 날아온 마법에 채찍을 놓고 피했다.

어느새 몸을 추슬러 덤벼드는 린 선배가 휘두른 검을 왼쪽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들어 막았다.

"!? 한손으로 막아!?"

단검에 막혀 얼굴 가까이서 전진을 멈춘 검에 린 선배의 눈이 벌어졌다.
그대로 오른 손을 뻗어 린 선배의 배에 가져다 대었다.

"『메ㄹ-"

빠아악-!

"웁!?"

메라를 쓰기 위해 오른 손을 펼친 순간 린 선배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나 싶더니 힘찬 박치기가 내 얼굴에 명중했다.
이건 또...상상 이상으로 가열한 격투 스타일이군요 린 선배.

"아야!"

"응!『푸프린』!"

이걸로 끝이 아니었나?
셋의 협동 플레이는 생각보다 뛰어났다.
아야 선배의 주문이 끝나자 린 선배의 옷이 살짝 흔들렸다.
버프계열 마법인가?
분위기를 타기로 해서 버프가 끝날때까지 가드를 풀지않고 대비하고 있는데 흔들리던 린 선배의 앞섶이 난데없이 풀어헤쳐졌다.

- 기절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몸이 굳어버렸다.
상태이상 공격이었나?
좌우로 풀어헤쳐진 옷 사이로 드러난 뽀얀 가슴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검을 쥔 양팔에 가슴이 살짝 눌리며 가슴 계곡이 부각되었다.
갑작스런 해프닝에 린 선배는 얼굴이 삶은 낙지마냥 붉어졌다.
그나저나 체육창고에서 실감한거지만 확실히 린 선배의 몸매도 꽤나 볼륨이...

"뭘 보는거냐 이 응큼한 녀석!"

퍼억-!

"아후~!?"

검사인데 검 대신 주먹을...
기절상태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깔끔한 일격을 허용해버렸다.
황급히 가슴을 가리곤 냅다 주먹을 날리는 린 선배에게 뺨을 맞고 뒤로 날려졌다.

"미안해 린...!"

"괘, 괜찮다 아야..."

어쩔줄 모르며 사과하는 아야 선배의 모습에 린 선배는 옷섶을 추스르며 붉은 얼굴을 진정시켰다.

"아고고... 버프인줄 알았더니 상태이상 공격이었습니까?"

"아직 끝난게 아니었나?"

"그정도로 끝날거면 중간 보스같은 역할은 못하죠."

아야 선배를 쓰러뜨리든 마법서를 빼앗든 마법은 무력화 해는게 좋겠는데...
게임 시스템 상으로 상대방의 장비품인 마법서를 빼앗을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안경을 벗기든지 해서 아야 선배의 시력을 빼앗든가 하지 뭐.

"움직임을 봉쇄하다니 꽤 귀찮은 기술이군요.
역시 마법사인 아야 선배부터 처치했어야 했을까요..."

"에...?"

"그렇게 순순히 놔둘거라 생각하진 마라!"

다시한번 검을 휘둘러오는 린 선배를 단검으로 저지하고 허리에 둘러진 천을 잡고서 린 선배를 엎어메쳤다.

"큭!?"

바닥에 매쳐지며 가까스로 낙법한 린 선배가 일어나는 동안 아야 선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옆에서 견제하듯 휘둘러진 시키 선배의 채찍을 피하고 아야 선배에게 쇄도해간다.
어느새 아야 선배의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내 모습에 아야 선배가 패닉 상태에 빠져 손을 내밀었다.

"『푸, 푸프린!』"

주문과 함께 아야 선배의 상의가 흘러내리면서 새하얀 가슴이 드러났다.

- 기절했습니다.

또냐!?

"아야!"

쫘아악-!

곧이어 다시금 휘둘러진 사키 선배의 채찍에 등을 가격당하고선 무력하게 앞으로 넘어졌다.
...아야 선배의 코앞에서...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어진 몸이 아야 선배를 밀어 넘어뜨리면서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꺄!?"

"크...!"

팔을 제대로 뻗지도 못한채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엎어진 자세가 꽤나 꼴사나웠다.

바닥에 쓰러지며 겹쳐진 몸을 타고 긴장한 아야 선배의 떨림이 전해져온다.
경직이 풀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새하얀 가슴을 양팔로 가리고 새빨간 얼굴을 한 아야 선배가 날 올려다보고 있다.
흘러내려간 안경 위로 순진해보이는 예쁜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과 흔들리는 여린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아야 선배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갔다.

"아..."

"안경, 삐뚤어졌어요."

조심스레 안경을 바로 씌워준 뒤, 아야선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싸움은 멈췄다.
뭐라고 할까 분위기 적인 이유로.
다시 한번 게임오버 의사를 타진하는 내게 사키 일행은 미묘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진짜 트러블 퀘스답다고 해야하나, 파렴치한 마법때문에 아까전의 진지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그저 김샌듯한 기분만 든다.
가장 싸울 의욕만만하던 린 선배도 지금에 와선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느라 신경이 산만해져 있고...
솔직히 이렇게 되서야 더이상 할 마음도 안났다.

"그럼 잠시후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선배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셋을 마을로 돌려보냈다.
물리 공격과 달리, 마법 공격의 경우에는 통증같은걸 느끼지 않기에 마법으로 게임오버 시켰다.
셋 덕분에 방금전의 지루함을 날려보낼수 있었기에 나로선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수 있었기에 선배들에게 고마웠다.
게임오버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는 아야 선배에겐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함께 있어주겠다고 말해준 것, 기뻤어요」라고.




사키 일행을 보내고 잠시 후 새 손님이 찾아왔다.

가슴께까지 오는 풍성한 에메랄드빛 머리와 더듬이 마냥 위로 솟구친 두가닥의 머리카락. 룬이다.
허리에 칼을 차고 온걸로 보건데 직업은 검사인것 같은데...어째 장비가 많이 부실해 보인다.
목에 금속 링 목걸이와 견갑을 제외하곤 요염해보이는 비키니형 갑옷이 룬이 장비한 물품의 전부였다.
이 게임...설마 「노출도 = 방어력」인건가...

홀 안으로 들어와 옥좌에 앉아있는 날 발견한 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수여...아키츠군?"

...이녀석 방금 수염이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나?

"혼자 온거야?"

"그래. 뭐가 이상해?"

"...아, 그러고보니 너 혼자 다른 반이었지..."

가끔씩 2-A에 놀러오긴 한다지만, 반이 다르다 보니까 게임속으로 들어올때 다른 일행과 함께 올 가능성도 적었겠지.
내 말에 룬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약올리는거야?"

"천만에. 그건 그렇고 유우키나 다른 사람들도 왔는데 만나지 못한거야?"

"뭐? 리토군도 왔어?"

"응. 지금쯤이면 아마 마을에... 야! 어디가?"

"당연하잖아? 리토군한테 갈꺼야!"

설명도 채 다듣지 않고 입구로 되돌아가는 룬의 모습에 기가 찼다.
결말은 대충 예상된다지만...

철컥-

"이익! 안 열리잖아?"

...역시.

"유감스럽지만 그 문은 열지 못할껄?"

"뭐?...설마...!"

문고리를 밀고 당기길 멈춘 룬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한 짓이야?"

"뭐?"

"이거 당장 열지 못해!
날 이런데 가두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야..."

어째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말이지...
유쾌하지 않은 기시감에 관자놀이를 슬며시 누르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수도 있는데...
얌전히 있으면 가볍게 상대해준 뒤 빨리 마을로 돌아가게 해주지."

"...상대한다고?"

"그래. 사키 일행도 그런 식으로 나갔으니까."

"선배들?"

"룬 네가 오기 전에 이곳에 왔기에 적당히 상대하다 보내드렸다구.
사키 선배를 지키려는 린 선배의 손속은 제법 매서웠지만 그것 나름대로 재밌었지.
사키 선배나 아야 선배는 좀 서툴긴 했지만 꽤나 열정적이라서, 나로선 즐거웠고."

"셋을 동시에!? 지치지도 않는거야?"

"아? 고작 세명을 상대하고 바닥날 체력이었으면 악명값도 못해먹지 않겠어?"

여자 세명과 싸워 지칠거였으면, 깡패들 상대로 반년 가까이 쉬지도 않고 난투극을 벌이진 못했겠지.

"악명은...역시..."

룬은 인상을 찌푸리곤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다.

"응? 저항하려는거야?"

"그런 요구를 듣고서 내가 순순히 당해줄 것 같아?"

"...뭐, 좋아. 네 성격으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나랑 한번 어울려 보자구.
솔직히 얌전히 당해주기보단 이렇게 팔팔하게 저항해주는게 나로선 더 재밌거든?"

"이...죽어! 이 짐승아!"

"누가 짐승이냐! 『메라!』"

"꺄악!?"

칼을 뽑아 달려오다가 정면에서 화염구를 뒤집어쓴 룬에게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체력이 바닥나면 원하지 않아도 바닥에 눕게 될테니 어디 한번 힘껏 저항해보라고?"

"이 귀축!"

"하하하하하! 겁도없이 혼자 들어온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꺄아악!"

룬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야? 거기서!"

"쫓아오지마 이 변태야!"

"누가 변태야? 이 너구리같은 아가씨야!"

"뭐야!?"

홀의 기둥을 사이사이로 요리조리 달아나는 룬의 뒤를 쫓았다.
한참을 달아나던 룬은 어느덧 체력이 다했는지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헥헥..."

"보기 안타깝네...그러니까 얌전히 항복하라고~!"

"엄마야~!"

"잡았다-!"

"꺄아~!?"

낮게 몸을 던져 룬의 다리를 잡아 넘어뜨렸다.

"후후, 이제 더이상 도망칠순 없...응?"

앞으로 고꾸라진 룬의 엉덩이가 보였다.
옆구리에 하늘거리는 투명한 천이 장식된 하의의 뒤쪽은 T자에 가깝게 만들어져 있어, 깔끔히 엉덩이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야! 어딜 보는거야 이 변태야!"

퍽-!

"윽!?"

무심코 시선을 고정했다가 화가난 룬의 뒷발길질에 턱을 걷어차였다.
박치기 당하고, 주먹에 맞고, 바닥에 부딪히고, 걷어차이고...오늘 참 얼굴이 고생하네요.

"야? 여기까지 와서 이러기냐?
얌전히 굴기만 하면 마을로 무사히 보내주겠다니까?"

"그런식으로 여자아이들을 울린거야? 이 수염!"

몸을 돌리며 휘둘러지는 룬의 손목을 잡았다.
저항하는 룬의 양팔을 잡고 바닥에 쓰러뜨렸다.
가슴께까지 오는 풍성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바닥위로 넓게 흐트러졌다.
양팔이 구속되면서 당황한 룬의 자주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이렇게까지 난리를 피우고 너도 참 끈질기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고집은 이제 그만 부리라구."

"큿, 뭘 멋대로...!
렌으로 왔더라면..."

렌으로 왔더라면 결과가 바뀌었을거라 생각하는건가?

"...딱히 렌이라도 상관없는데?"

"뭐, 뭐!?"

뭐가 그리 놀라운지 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아. 가상현실이니까 딱히 아프거나 하진 않을테니 안심하라고?"

"뭐, 뭘...?"

"그럼 즉시."

"어!? 자, 잠깐! 적어도 너 얼굴은 좀 닦고...!"

"...네가 한거잖아 이건..."

얼굴에 묻은 발자국 따위를 대충 닦곤 룬을 내려다보았다.

"됐냐?"

"응.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이전에 나는..."

"괜찮아 괜찮아. 금방 끝날테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라구."

"읏...!"

어쩐지 지나치게 긴장한 룬의 모습에 어린아이 달래듯 최대한 부드럽고 사근사근하게 말해보았다.
흔들리는 눈망울로 날 보며 울상을 짓던 룬은 살짝 어깨를 떨곤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을 정도로 무서운거야?

"그, 적어도 상냥하게..."

......뭘......?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은데?
두 다리를 모은채로 바닥에 드러누운 룬의 모습과 룬의 양팔을 붙잡고 올라타 있는 내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응...무슨 상황인지 이해했다.
뭔가를 빌미로 부조리한 요구를 강요하는, 범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상황이지요 이건.

...그냥 빨리 끝내는게 좋겠다.
분명 곤란한 상황인데 어째서 나도 덩달아 긴장해선 두근거려 버리는건지...
눈앞에 있는 룬의 도톰한 입술을 잠시 바라보다, 입가에 걸쳐있는 머리카락을 검지로 살짝 눌러 치웠다.

순간 놀란듯 룬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너, 너... 대체 뭘..."

"아, 실례.
머리카락이 붙어 있어서 말이지."

결코 이상한 생각을 했다거나 한건 아니에요.
검지를 살짝 들어보이자, 입술을 매만지던 룬은 불붙은듯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럼 이만 마을로 돌아가라구.『메라』"

"이...! 절대로 죽일꺼야 이 수염아!"

......쓸데없는 원망을 받아버렸습니다.



우르르~~~!

「「「꺄악!?」」」

"...응?"

룬이 사라진 직후, 홀의 문이 열리며 문틈으로 세명이 쓰러지듯 굴러 들어왔다.
샌드위치 마냥 겹쳐 쓰러진 녀석들은 리사, 미오, 그리고 오시즈였다.

"...셋이서 대체 뭐하고 있는거야?"

내 물음에 셋의 얼굴이 홍시마냥 붉어졌다.

"아...아하하...뭐라고 할까, 왠지 묘~한 소리가 들려서 안에서의 일이 궁금했다고 할까~?"

"으, 응! 그래그래~! 좋은 시간을 방해하는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저기...그런일은 역시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료스케씨..."

엿들을 생각 만만이었군요.
다들 뭘 오해했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리사와 미오는 그런 가운데도 눈이 초롱초롱하고, 오시즈는 완전히 얼굴이 익은 상태로 어쩔줄 모르고 있고.

"음...미안한데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었거든?
그저 마을로 돌려보낸것 뿐이라구?"

"그래그래~ 그렇다고 쳐."

...안 믿나보다.
그나저나 얘네들 옷차림도 꽤나 매니악하네.

오시즈는 짧은 치마의 갈색 닌자복이었다.
배에 덧댄 푸른 천 위로 붉은 끈을 묶어 고정하고서 목에는 보라색 머플러를, 허리에는 장도를 맨 차림이었다.

리사는 쇄골부터 가슴 사이를 지나 배꼽에 이르는 부분을 전부 드러낸 고동색 바니걸 복장이었다.
왼팔에는 금빛 링 팔찌를 차고 흰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미오는 양갈래 머리를 노란 꽃 장식이 달린 머리끈으로 꾸미고 있었다.
리사보단 노출이 덜한 바니걸 차림에 오른팔엔 주홍색 링 팔찌를 차고서 은색 하이힐을 신었다.

직업도 그렇고 좌우가 바뀐걸 빼곤 똑같은 팔찌도 그렇고...리사랑 미오는 어째서 저렇게 페어룩이람?

"아무튼 지금 여기에 있어도 그다지 할 수 있는건 없으니까, 다시 마을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도록 해."

"룬이랑 우리 말고도 온 사람이 있어?"

"사키 일행에게 말해두었으니까 마을로 가서 만나면 알아.
그리고 홀에서 나가려면 일단 게임오버가 되야 하니까 이해해줘."

"에~ 아키츠군이랑 싸워야 하는거야? 그건 자신 없는데..."

"어...설마 싸울 생각이야?"

"물론, 기왕에 하는 게임이니까 즐길수 있는건 즐기는게 이득이잖아?"

전적으로 동감이다.

"뭐, 그건 그렇지만...그 파티로 제대로 싸울수 있겠어?
바니걸 2명에 닌자 1명이라니 아무리 봐도 밸런스가 너무 나쁜데."

"무시하지 않는게 좋을걸? 적어도 한방 먹여줄 수는 있을테니까~"

"응?"

"에잇~! 그럼 비장의 기술~! 『파후파후~!』"

"읍!?"

순식간에 달려든 리사가 내 얼굴을 그대로 자기 가슴에 묻어버렸다.

"어때~? 바니걸의 서비스는?"

"!?!?"

- 경직되었습니다.

"아, 통하네?"

맨가슴으로 얼굴을 누르며 비비는 행동에 속으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비, 비켜...!"

"꺄아~♪말하지마~ 간지럽다구?"

몸의 경직에서 회복되자 황급히 리사를 뿌리치고 뒤로 물러났다.

"아하하하 아키츠군 얼굴이 빨개~"

"이, 이게 대체 누구 때문이라고..."

"후후~ 귀엽네. 이 누나의 가슴이 그렇게 기분 좋았으려나~?"

뺨을 가리며 꺄아거리는 야하고 귀여운 토끼 아가씨다.

"부끄러워 하는건 나 뿐이야? 어쩐지 아이 취급 당한것 같아..."

"...뭘 모르는구나 아키츠군?"

"뭐를?"

"에잇~! 파후파후~!"

- 경직되었습니다.

또냐!?
처음보다 조금 강하게 조여오는 리사의 가슴에 파묻혀 당혹해하는 내 귓가에 리사가 작게 속삭였다.

"(남자의 마음을 희롱하는 시점에서, 여자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는걸.)"

"...!?"

따뜻한 숨결과 함께 귓가에 닿은 리사의 말에 화악하고 얼굴이 붉어졌다.
부드러운 감촉보다 귓가에 낮게 속삭여오는 말이 훨씬 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작게 키득거린 리사가 뒤로 물러서고 나서야 가까스로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릴 수 있었다.
정말이지...터무니 없는 짓을 해 주잖아?

주춤거리며 물러나선 쩔쩔매는 내 모습이 재밌어 보였는지 미오가 끼어들었다.

"꽤나 부끄러워 하네 아키츠군~?
나도 그거 해줄까?"

기분 좋을것 같지만, 정신적으로 방심 상태에 빠진 지금으로선 아무래도 내 이성이 위험할것 같습니다!

"아하하~ 사양하지 말라구~
그럼 나도~ 『파후파...아앗!?"

익숙치 않은 하이힐을 신은채로 뛰려던게 문제였을까, 미오는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다.
균형을 잃고 허우적대며 쓰러지려던 미오를 정면에서 받아들여 멈췄다.

"괜찮아?"

"에에...괜찮아 괜찮아~ 아하하..."

내 가슴께를 양손으로 짚은채 미오는 주춤주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그나저나 갑자기 끌어안다니 아키츠군은 대담하네~"

"그런거 아니거든?"

"에~ 좀더 반응해줘. 기껏 이렇게 예쁜 소녀가 곁에 있는데."

자화자찬입니까? 확실히 틀린 소린 아니지만요.
피식 웃는 내 모습에 불만스러운듯 볼을 부풀리던 미오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을 반짝였다.

"오. 아키츠군은 역시 몸이 탄탄하네에~"

스윽스윽-

"으히익!? 뭐하는거야!?"

옷섶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내 가슴께를 더듬는 미오의 손길에 기겁하며 미오에게서 떨어졌다.
꼼지락거리던 손바닥을 바라보던 미오가 싱긋 웃었다.

"음~ 구교사 사건때도 생각했던거지만 역시 훌륭한 몸이네~"

에로한 대사 금지!
성희롱이다 이건!

"후후...이제 알겠지 아키츠군? 우릴 만만하게 보진 말라구.
그럼 공격이다 시즈~!"

"넵. 염력집중~!"

구웅...!

오시즈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킨 직후 무형의 압력이 몸을 짓누르다 사라졌다.

- 내성저항했습니다.

"어라? 안통하네요. 그럼...!"

오시즈는 닌자처럼 두손을 모아 수인을 맺으면서 외쳤다.

"이얍 풍둔의 술법~! 꺅~!?"

휘이잉~! 펄럭~!

컨트롤이 실패했는지 강렬한 바람과 함께 시즈의 치마가 거꾸로 뒤집혔다.
위로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론 과감한 각도의 삼각 천조각이 보였다.

"꺄아~! 보지 마세요~!"

염력 컨트롤에 실패하면 어째서 항상 에로한 전개로 가는거야?
당황하며 치마를 부여잡은 오시즈는 바람을 미처 제어하지 못하고 당황해하고 있었다.
유일하다고 할 공격수가 저 모양이니 숨겨놓은 한수가 없는 이상, 더 이상의 분전은 힘들겠군.

"자 그럼...이걸로 보여줄건 충분히 보여준거지?
더이상 보여줄게 없다면 이제 슬슬 끝내고 싶은데."

"보, 보여주다니...! 전 그런 헤픈 여자가 아니에요!"

"어?"

"이건 고의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실수라구요!"

방금전까지 리사랑 미오와의 해프닝 때문에 이상한 쪽으로 오해한건지,
뒤집어진 치마를 내리면서 반박하는 오시즈의 모습에 잠시 말을 잊었다.

"...아무튼, 더이상 장난을 받아도 내쪽이 곤란하니까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가라구.『메라』"

"꺄아~잡아먹힌다~!"

"누가 잡아먹어!?『메라!』"

에로틱한 소재로 개그를 날리던 리사, 미오, 오시즈 파티를 물리치고 홀의 끝에 있는 옥좌에 다시 앉았다.



기이익-

...곧바로 4연전인가?

"아키츠 료스케?"

"야미?"

야미 너도 바니걸이냐...
검은 바니걸 옷에 갈색 스타킹.
머리엔 검정 토끼귀 머리띠를, 목엔 검은 나비 리본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멋부리기 용인지 양 팔목엔 하얀 소맷부리가 맵시있게 달려 있었다.

"성으로 가서 성주를 쓰러뜨리라는 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당신이 성주였습니까?"

"내가 성주 역할인게 맞긴 하지만 내가 쓰러질 차례는 지금이 아닌데.
날 물리치고 현실로 돌아가려면 유우키 일행과 함께 와야 하거든."

"유우키 리토? 혹시 여기에 저희들이 온건 프린세스 라라와 관련된 일입니까?"

"응. 비슷하다고 할까?
성에 갇힌 라라를 구하고 이 이야기의 결말을 내기 위해선 유우키가 필요하니까.
그러니 마을에서 유우키 일행과 만나서 다시 오도록 해."

"...그냥 여기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싶습니다만..."

"함께 기다릴수 있으면 나야 좋지만...
먼저 들어온 사람이 있으면 다음 일행이 들어오지 못하거든."

"그렇습니까..."

"아, 그래도 야미 너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외롭다거나 심심하진 않았어.
고마워. 걱정해줘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부끄러워하기는~"

빡-!

"윽!?"

휘둘러진 머리카락을 회수하며 야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을 쓰러뜨리고 마을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오도록 하지요."

"아, 마을로 가려면 여기서 게임오버 되야지 돌아갈수 있어."

"게임오버?"

"나랑 싸워서 져야 한다는 말이지."

"그렇군요."

입구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야미는 잘됐다는듯 되돌아왔다.

"그럼 내친김에 한번 겨뤄보도록 하죠."

"...그냥 져주는게 아니라?"

"지구에 와서 몸이 둔해진 참에 좋은 운동이 될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오기전까지 조금 정도는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겠지요?"

싸울 의욕 만만이군요.

"뭐, 좋아.
단, 가능하면 너무 요란하게 싸우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멀지않은 곳에 라라가 자고 있거든.
잠에 빠진 공주님을 깨우는게 왕자님의 키스가 아니라 성이 무너지는 소음이라면 로맨틱하지 않겠지?"

'물질-디지털 전송'과 관련된 메인 컨트롤 룸이 성안에 있으니 조심해야 하기도 하지만.

"...혹시 지금 상황을 즐기고 있습니까?"

"나름대로는.
게임속으로 초대되서 성주라는 거창한 명함까지 단거, 기왕이면 최대한 즐겨주는게 예의니까."

더군다나 이런 판타지 같은 분위기라면 더더욱 말이지.
머리카락을 주먹으로 변화시켜가는 야미를 향해, 연극같은 모양새로 몸을 숙이며 정중하게 한손을 내밀었다.

"그럼 댄스 한곡 추시겠습니까?"

대답은 휘둘러지는 야미의 손이었다.


개시를 알리는 대사로부터 야미와 어울리길 잠시, 말이 댄스지 실상은 펀치와 칼날의 소나기였다.
세로로 휘둘러진 머리카락의 칼날에 계단 위쪽에 놓여있던 옥좌가 깔끔히 반으로 나뉘어졌다고.
주의를 준 탓인지 해머 같은걸로 내리찍는 식의 우악스러운 공격은 자제하고 있었지만.

...그나저나 하이힐이란게 신은채로 뛸수도 있는거였나?

토끼귀를 나풀나풀 휘날리며 하이힐 차림으로 사정없이 돌진해오는 야미의 모습에 미묘한 감상을 안는 나였다.

야미의 공격을 걷어내고 적절하게 마법으로 견제해가며 야미를 옥좌가 있는 근처까지 몰아넣었다.
다리쪽으로 공격을 걸어오는 날 피해서 뒤로 물러나던 야미는 계단 모서리에 뒤꿈치가 걸리며 몸이 기울었다.

"읏...!"

균형을 잃고 뒤로 휘청 넘어지려는 야미의 손을 맞잡았다.
그대로 한발 내딛어 계단을 밟으며 다른손으론 야미의 허리를 지지하며, 반쯤 쓰러지듯 몸이 뒤로 기운 야미를 내려다 보았다.
계단 위로 발을 올린 탓에 야미의 토끼귀가 내 머리카락에 닿을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코가 닿을 정도의 거리에 야미의 동공이 커지면서 맞잡은 손에 손톱이 파고들었다.

"...야한 짓은..."

경고하지 않아도 그런 짓은 안한다고.
야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야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줘 야미를 일으켰다.

"후후...즐거운 댄스였습니다 레이디."

균형을 잡고 일어선 야미의 손등에 장난스러운 태도로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부끄러운 짓을 태연하게 하는군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기가찬 듯 중얼거리는 야미에게 싱긋 웃었다.

모르는구나 야미는.
이건 말이지, '롤플레잉(역할극)' 이라구?

"그런데 몸풀기는 이걸로 되었을까?"

"...다음에도 상대 부탁드리죠."

야미는 치마의 양옆을 살짝 들어올리는 듯한 판토마임으로 응수했다.




야미를 마을로 돌려보내고 세로로 쪼개진 옥좌도 어떻게든 겉은 멀쩡하게 보이도록 세워놓은 뒤,
마지막으로 리토와 하루나, 코테가와, 미캉의 파티를 맞이했다.

하루나는 짧은 주름치마에 코르셋처럼 보이는 상의 위로 망토를 두른 경장 차림이었다.
옷을 고정하는 끈이 등뒤가 아닌 앞쪽에 달려 있었기에 가슴골과 배꼽이 드러나 보였다.
머리엔 평소의 붉은 머리핀대신 잎사귀 모양의 노란 액세서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치마위로 둘러진 검대에 장검이 고정되어 있었다.

코테가와는 꽃잎 모양 액세서리가 달린 민소매 무투가 복장이었는데, 평소의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틀어올려 평소보다 활발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배꼽 높이부터 크게 벌어진 슬릿 사이로 허벅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보였다.

미캉은 핫팬츠와 배꼽을 노출시킨 상의, 망토를 두르고서 한손에 마법서를 들고 있었다.
품이 넓은 탓인지 미캉의 움직임에 따라 옷이 피부에 닿을락 말락 흔들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리토는 말 그대로 정원사였다.
셋에 비해서 디자인이 많이 조악한.
아무리 여존남비라지만 엄연히 스페셜 직업인데 마을사람A 같은 차림이라니...대우가 너무 심하잖아!?

어찌됐건 리토 파티의 구성원은...

"검사, 무투가, 마법사, 그리고 정원사인가?
어쨌든 어서와 모두."

"아침조례를 할때까지도 학교에 오지 않길래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더니...아키츠군도 여기로 초대된거였군요."

"에~ 걱정해준거야? 그건 꽤 기쁜걸."

코테가와의 말에 흐뭇해하고 있으려니 하루나와 미캉이 차례로 질문해왔다.

"게임을 클리어 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던데, 아키츠군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마왕을 쓰러뜨리라고 하던데, 료스케 오빠가 마왕이에요?"

"우선 사이렌지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YES. 우선은 마을로 돌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라고.
미캉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NO. 나는 말하자면 파수꾼이지."

"파수꾼?"

"그래. 초대된 모두가 함께 오기 전까진 여길 통과시키지 않는 역할이라고 할까?"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한 아이템(리토가 가진 정원사의 물뿌리개)은 있지만,
될수 있으면 초대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수 있도록 해달라는 나나의 부탁을 생각하면, 여기선 한번 돌려 보내는게 맞겠지.

"뭐, 일단은 이 성의 성주 역할을 맡고 있어."

"성주?"

"뭐야? 혹시 이야기 전개를 모르는거야?"

"그게...길드에서 직업을 받고 바로 여기로 왔는걸요."

"으응..."

길드에서 바로 이곳으로 온건가, 곤란하게 됐네.
뭐, 튜토리얼도 없었던것 같으니까 말해도 상관없으려나.

"간단히 말하자면 프린세스 라라를 납치한 라라의 약혼자 후보랑 마왕을 쓰러뜨리고 라라를 되찾는게 게임 클리어 조건이야."

"...설마 우릴 여기로 데려온건 라라의 약혼자 후보인거야?"

"아니. 약혼자 후보란건 어디까지나 게임속 역할일 뿐이야.
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거든."

"아키츠 네가?"

"초대된 사람들중에 유우키 말고 남자가 나 뿐이어서 말야.
...말해 두지만, 절대로 악역같다는 이유로 뽑힌게 아냐."

「「「「......」」」」

절대로 믿지 않는듯한 눈초리를 보내오는 넷의 시선에 무안해져, 헛기침을 하곤 설명을 계속했다.

"초대된 사람은 나와 라라, 너희들을 제외하면 8명이야.
사키, 린, 아야 선배, 룬, 모미오카, 사와다, 오시즈, 야미. 이렇게.
지금쯤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너희들만 돌아가면 12명이 전부 모이는거야.
만나서 다시 이곳으로 오라고."



다들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었기에, 넷은 불평없이 게임오버를 선택했다.
리토가 가진 '정원사의 물뿌리개'의 대(對)마왕용 특수 스킬이 1회용인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해 전투에 들어가기는 껄끄러웠는데 다행이었다.

"분발하길 바라고 있으니 다들 힘내라고.
나도 계속 여기에서 기다리기만 하는건 지루하거든..."

마왕성에 들어가놓고선 130시간째 렙업만 하는 용사일행 때문에, 지루함은 커녕 안절부절 못하고 의자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던 마왕님도 계셨지만.

리토 일행을 돌려 보내고 한숨을 돌리며 현재 상태를 확인했다.
현실감이 반영되어서 그런지 연속으로 전투를 수행하면서 옷이 조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리저리 구르고 피하면서 몸도 지저분해진것 같고.
룬에게 얼굴 좀 닦으란 소리도 들었는데...좀 씻는게 나으려나?

마을로 귀환한 리토가 일행들을 모아 오기까진 조금 시간이 있을것 같았기에 먼저 나나와 모모가 있는 컨트롤 룸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아, 안녕하세요 료스케씨."

컨트롤 룸을 찾아 걷던중 통로 한가운데서 하늘색의 짧은 투피스 위로 후드가 달린 하얀 망토를 걸친 모모와 마주쳤다.

"나나랑 같이 있는거 아니었어?"

"나나는 매지컬 쿄코와 함께 언니가 있는 방으로 갔어요.
그런데 나간지 한참이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길래 상황을 보러 내려온거에요."

"라라가 깨어난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은데 자세히는 가봐야 알것 같아요."

"나도 함께 가도 될까?"

"네."

설마 자기가 만든 성에서 나나가 길을 잃었을리는 없고,
궁금하기도 하고 무슨일이야 있겠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모모를 따라갔지만...

연극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파탄날 지경에 처했습니다.



「그때 공연 재밌었지 쿄코짱?」

「에? 으응 그래 라라짱.」

「그러고보면 그땐 정말 미안했어.」

「어? 뭐, 뭐가...?」

「나랑 오시즈짱이랑 야미짱 셋이서 무대에 올랐을때 말야...」

라라가 있는 침실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나랑 모모와 얼굴을 마주한채 식은땀을 흘렸다.
할로윈 특집에서 매지컬 쿄코를 직접 본게 문제가 된건가...!
이것저것 즐거운듯 말을 걸어오는 라라에게 대답하는 쿄코(가짜)의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배어있었다.

"(설마 언니...쿄코랑 만난적이 있었던걸까?)"

"(응. 얼마전에 쿄코의 공연에 직접 참가했다고 자랑하던걸.)"

"(이런 경우는 상정해두질 않았는데...어쩌죠?)"

「아 맞다. 사인해줘 쿄코짱!」

「사, 사인?」

큰☆일☆났☆다.

쿄코짱 대핀치!
아무리 라라가 어리버리하다고 해도 진짜 사인본을 본 이상, 엉터리 사인을 해줬다간 그대로 탄로날 위험 100%다.

"(어, 어쩌지?)"

"(어쩌긴. 여기서 끝내던가 라라를 설득해 봐야지.)"

"(료스케씨가요?)"
"(할수 있겠어?)"

"(어떻게든. 그런데 계속 할꺼야?)"

"(할수 있다면 좀 더 언니의 친구분들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솔직히 몇주간 고생한게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가보고 싶어.)"

"(...그럼 나중에 라라에게 꾸중들을 각오 정돈 해놓으라구.)"

요점은 끝까지 들키지 않는게 아니라, 연극의 클라이맥스까지만 라라의 호기심을 돌려놓으면 되는거니까.
라라의 침실로 들어가자 파렴치한 초소형 비키니 복장의 쿄코가 더듬거리며 라라의 말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일어난거야 라라?"

"아 료스케, 안녕~!
그것보다 이것봐. 진짜 쿄코짱이야."

네. '진짜' 파렴치한 복장이네요, 초소형 비키니 갑옷...

"응. 라라에겐 미안한데, 사실 쿄코는 지금 무대를 준비하느라 바쁘니까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만 보내줘야 할 것 같아."

"...아, 맞아!
그러니까 라라짱, 난 이만...!"

"아! 쿄코짱?"

애매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곤 부리나케 나가버리는 쿄코를 아쉬움이 남은 눈길로 바라보던 라라는 날 향했다.

"무대라니?
무슨 말이야?"

"라라 널 위한 무대를 준비하고 있어."

"에? 날 위한?"

"응. 못된 약혼자에 의해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기 위한 용사의 모험담이라고 할까?
유우키가 널 구하기위해 여기까지 오는 깜짝 이벤트지."

"리토가?"

"응. 유우키를 돕기 위해 다른 친구들도 초대되서 이곳까지 오려고 노력중이야.
아마 조만간 라라 네가 있는 여기까지 달려올걸?"

"으응, 리토가 말이지..."

쿄코로부터 리토에게로 관심이 바뀌었는지 방금전의 아쉬움대신 기대의 눈빛을 보이는 라라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호화로운 드레스에 보석 머리장식을 한 라라는 정말로 동화속에 나올법한 공주님 이미지였다.
여기서는 좀더 화제를 연극 내용에 돌려 라라의 관심을 확실히 옮기는게 좋을까?

"그나저나 옷이 정말 잘 어울리네.
그러니까 정말로 공주님 같은걸?"

"헤헷...고마워~"

"뭐, 네 평소 모습관 조금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긴 하지만..."

"에에~~~? 너무해 료스케.
나 이래뵈도 진짜 공주인데..."

불만스러운듯 볼을 부풀이는 라라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나쁜 의미는 아니었어.
평소의 넌 언제나 활발하니까, 지금처럼 탑에 갇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는 공주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네가 성을 떠나 지구로 온건 아버지가 결정해주는 약혼자가 아닌, 너 스스로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싶어서 였잖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지금처럼 탑에 갇혀서「멋진 왕자님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려」란 말을 듣는다면,
「싫어!」라고 외치곤 못된 약혼자를 물리치고 성을 탈출해선, 너만의 왕자님을 찾으러 오히려 네쪽에서 모험을 떠날 것 같다고 할까?"

호기심 많고 그야말로 자유분방함이 천원돌파하는 라라라면 정말로 그런 일을 태연히 해치워줄 것만 같다.

"아하하...그런 평가는 처음 들어."

쑥스러운듯 배시시 웃는 라라의 반응을 보면 마음이 상한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연인을 찾는 여행을 떠납니다. 찾지 말아주세요.」라며 성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도 곤란하니까, 조금은 역할을 누르는 말을 추가하는게 좋을것 같다.

"아, 그렇다고 해도 가끔은 이런 역할도 나쁘진 않겠지?
자신을 구하기위해 오는 멋진 왕자님이 있다니 로맨틱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애써준다는건 누구에게라도 기쁘니까.
이번만큼은 리토쪽에서 먼저 라라에게 손을 내밀 기회를 줘보자고.

"아하하~! 맞아. 리토는 우주에서 제일로 멋지니까!"

정말로 기쁜듯 라라는 환하게 웃음지었다.



"그럼 난 준비할께 있어서 가볼께.
유우키가 올 때까지 잠시만 여기에 있어줘."

"응. 힘내 료스케~"

「아! 나 방금전까지 자고 있었는데 머리 눌리지 않았을까?」하며 부산스레 거울을 찾는 라라를 뒤로하고 방을 벗어났다.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오자, 문밖에서 기다리던 나나와 모모, 쿄코가 맞이해주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어요."

"언니를 정말이지 잘 구슬렸네. 역시 꽤나 모략가잖아?"

"...그건 좀 듣기 거북한데.
적어도 라라에게 한말은 진심이었다구."

"그렇네요. 꽤나 화기애애했고.
언니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사이가 좋았군요?"

"친구니까."

라라의 인상적인 행동력이나 호기심은 반년동안 같은반을 하면서 충분히 이해했다고.

"아, 그런데 말야..."

"왜?"

방금전 라라의 마지막 말을 듣고 원래 홀 밖으로 나온 용건이 떠올랐다.

"좀 씻고 싶은데...
보다시피 지금 몰골이 이래서."

조금 먼지가 묻어있는 옷을 들어보이자 매지컬 쿄코가 나섰다.

"흐음. 그럼 성에 있는 욕탕을 쓰도록 해.
아까 써봤는데 꽤 좋더라구. 장소 알려줄테니까 따라와."



쿄코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욕탕을 본 감상은 한마디.

"넓구만..."

층 전체를 사용한것마냥 넓은 욕탕의 규모에 감탄하고선 간단히 몸을 씻은 뒤 욕탕에 몸을 담궜다.
반신욕탕인지 욕탕에 들어가 앉자 아랫배 바로 위까지 물에 차올랐다.
피부에 전해지는 기분좋은 뜨거움에 가볍게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리토 일행이 오기전까진 여기서 반신욕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도 좋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은 비우고 멍하니 따뜻함을 만끽하며 한참을 노닥거리던 중, 등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료스케 실례할께~"

"......에? 라라?"

내 옆을 지나치며 욕탕 가운데로 들어가는 라라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분이 들뜬듯 엉덩이 위의 꼬리가 경쾌하게 흔들거렸다.

"온도가 딱 좋네~"

"어이, 잠깐!?
어째서 네가 여기 있어?"

"쿄코짱에게 물어서 왔어.
머리가 조금 누운게 신경이 쓰여서 리토가 오기전에 몸을 깨끗이 해두려구."

"그렇다고 내가 쓰고 있는데 들어오는건..."

"에~ 괜찮잖아? 이렇게 넓은데 욕심쟁이처럼 혼자 쓸 생각이야?"

볼을 푹푹 부풀리며 항의하며 라라는 욕탕 안에서 얼굴을 마주한 채 몸을 담궜다.

아니...그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희뿌연 김이 어느정도 몸을 가려주긴 한다만 솔직히 고교 남학생에겐 자극이 심하거든요?
반신욕탕이라 아랫배 위로는 상반신이 죄다 노출되어 있다고요.

긴장으로 바짝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사이, 라라는 물을 찰박거리며 흥흥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을 문지르던 라라는 약간 달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대돼."

"...뭐가?"

"리토가 날 구해주러 오는게 말야."

"응? ...아아, 유우키는 성실하니까 널 구하러 오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껄."

"정말?"

"응. 지금쯤 아마 널 구하기 위한 동료들을 모으고 있지 않을까?
동료들과 힘을 합쳐 악당을 무찌르는게 왕도니까.
그리고 마지막엔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

"에헤헤..."

라라는 기쁜듯 웃음을 흘리며 몸을 씻겨 내렸다.
행복한 상상으로 들떴는지, 수면위로 나온 꼬리가 콧노래를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때때로 꼬리에서 흩뿌려진 물방울이 하나둘 수면에 파문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라라가 의아한듯 나를 바라보았다.

"료스케? 왜 그렇게 보고 있어?"

"아, 미안. 꼬리를 바라보고 있었어."

"꼬리?"

라라는 갸웃거리며 자신의 꼬리를 돌아봤다.
거기에 답하듯 들어올려진 꼬리가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응. 리듬에 맞춰서 살랑거리는 모양새가 재밌어 보여 무심코 시선이 가더라고.
뭐라고 할까, 눈앞에서 흔들리는 강아지풀(고양이풀) 같다고 할까?
바라보고 있으면 간지러운 기분이 돼."

내 평가에 라라는 킥킥대며 웃었다.

"아하하~ 강아지풀이라니, 료스케는 고양이야?
친구들 말로는 고양이과 대형동물이라고 하던데."

맹수입니다 그건. 요만큼도 사랑스럽지 않아요.
어릴땐 귀엽겠지만.

"료스케는 어쩐지 재밌게 칭찬을 하는구나?
조금은 기쁠지도..."

곧게 뻗은 왼팔에 한바퀴 꼬리를 감아올린 라라는 싱긋 웃었다.

"아, 그래도 꼬리를 만지거나 하는건 안돼?
우리 자매는 특히 꼬리가 민감하니까."

만지지 않아요. 그럼 성희롱이 되어버리잖아.
기분이 좋아보이는 라라와의 대화를 이어갈 겸, 라라가 무심결에 내뱉은 단어를 화제거리로 삼기로 했다.

"라라 너 자매가 있었어?"

"응. 얘기 안했던가?
나나와 모모라고 하는 쌍둥이 여동생들이야.
둘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구~"

"동생들을 정말 좋아하는가 보구나 라라는."

"응~! 정말정말 소중한 아이들인걸~!"

"...그렇구나."

내리사랑이 정말 대단하네요.
형제자매간의 우애라...조금 부러운걸.

"왜그래 료스케?"

"...아무것도 아냐.
그럼 나나랑 모모는 어떤 아이들이야?
라라 너처럼 기계 만지는걸 좋아하는거야?"

"응? 아니, 나나랑 모모는 기계보단 동물이나 식물과 대화하는걸 좋아해.
나나는 동물과, 모모는 식물과 마음을 통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헤에...신기한 능력이네."

"그렇지? 데빌루크에서도 그 애들밖에 없는 특별한 능력이래."

즐겁게 동생 자랑을 늘어놓는 라라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여동생이 사랑스러워 어쩔줄 모르는 착한 언니로군요 라라양.

"네가 그렇게까지 자랑스러워하는 아이들이니까, 정말로 한번 만나보고 싶어지는걸?"

"그래? 그럼 다음번에 료스케랑 친구들에게도 소개해줄께!
아아~ 그러고보면 지금쯤 둘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거의 1년 반을 떨어져 있으면서 동생들이 보고 싶어 졌는지 라라는 아련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게 그리워하지 않아도 잠시 뒤면 곧 만나게 될테니 놀라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이윽고 씻는걸 끝마친 라라가 몸을 일으켰다.

"난 다 씻었는데 료스케는 아직 멀었어?"

"아...난 좀있다 나갈께."

여전히 꿋꿋한 아드님이 자중하지 않고 계신지라, 지금 물밖으로 나오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그럼 나 먼저 나갈께 료스케. 공연 힘내줘~"

"응~ 맡겨달라구."

......갔나.

뭐, 뜻밖의 해프닝이기도 했지만 꼬리로 장난치는 라라의 모습도 봤고,
나나와 모모에 대한 이야기도 더 들을수 있었기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럼, 아드님이 가라앉을 때 까지만 잠시만 더 쉬었다 나갈까...



저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닥터 미카도의 병원과 나나님의 동물원을 하나로 합친다면 데빌루크는 명실공히 우주 제일의 동물병원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칠판엔 「병원 + 동물원 = 동물병원」이라고 적혀 있다.

"그럼 올해 문화제엔 애니멀 찻집이다!"

신인만화가 응모작 「은하의 랩소디」를 나눠주며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저스틴에게 사루야마가 외쳤다.
어느샌가 고양이 꼬리를 단 사루야마는 가죽 패션의 투피스로 갈아입고 있었다.

바니걸 옷을 입은 렌이 투덜대면서 우유가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웃흥~ 바니걸을 내놓으세요~♥"

에로교장늑대가 한호흡에 동물병원을 날려버렸다.

"집을 잃었습니다. 재워주세요."

바니걸 차림의 야미가 종이박스 안에 들어간채 문앞에서 시위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집은 동물을 키우지 않아."

"거짓말. 목욕탕에 고양이를 숨겨두고 있으면서..."

타월을 걸친채 냉장고를 뒤지던 나나가 꼬리를 세우며 외쳤다.

"빌어먹을! 훔쳐갈 우유가 없어!"

"미안해요. 두사람이 들어가기엔 냉장고가 작아서 우유를 버렸어요."

아야 선배가 동전 두개를 건네며 말했다.

"냉장고 문을 여는 방법? 잠시만 기다려라."

린 선배가 옷을 벗더니 주문을 외웠다.

"냉장고 안은 크리스마스네요."

우산을 들고 눈덩이를 굴리던 코테가와가 수박을 주웠다.

"호박이 열린걸 보니 여름이군요."

"트릭 오어 트릿~!"

미캉이 쓴 호박 가면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우오오오~!"

1700만 제노 부르츠파의 호박등을 본 저스틴이 괴물 원숭이로 변신했다.

"없어져라!"

피콜로가 손바닥을 펼쳐 달을 지웠다.



......난잡한 꿈이다.
따뜻한 물에 몸이 한껏 나른해진 나머지 깜빡 졸았나보다.
시간도 꽤 지난것 같은데 이만 나도 슬슬 나가도록 할까.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을때 갑자기 거친 소리와 함께 입구가 활짝 열렸다.

"야! 적들이 오는데 언제까지 노닥거리고 있을...!?"

"......"
"......"

침묵만이 가득한 욕탕에서, 몸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방울이 또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함께 굳어있던 나나가 움직였다.

"꺄아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휘둘러진 나나의 주먹에 맞곤 도로 욕탕안으로 날려버려졌다.



"어머? 무슨일 있었어 나나?"

"...별로."

"흐응...?"

퉁명스러운 나나의 태도에 살며시 뺨을 매만지고 있는 나를 힐끗 본 모모는 리토와 다른 사람들이 성으로 향하고 있다고 알려줬다.

"생각보다 유우키 일행이 오는게 늦었는데?"

"마을 밖에서 사냥하면서 레벨업을 하고 왔나봐요.
료스케씨에게 게임오버 되고 나서 아무래도 레벨을 올릴 필요성을 느꼈겠죠."

...마왕을 일격에 쓰러뜨리는 치트 아이템이 있다는걸 알면 화낼까?
그들 나름대로 사냥을 즐겼다면 굳이 따지진 않겠지.

"이제 곧 리토씨 일행이 성에 도착 할테니 료스케씨는 이대로 홀로 가셔서 대기해 주세요."

"응. 맞겨줘."

컨트롤 룸을 나서려는 나를 나나가 불러세웠다.

"잠깐, 그전에...이번엔 조금쯤은 진지하게 싸워줘.
아까 언니의 약혼자 녀석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설득해서 게임오버 시켰잖아.
설마 이번에도 말로 끝낼 셈은 아니겠지?"

"일단 싸울 생각은 있는데."

"그럼 일부러 져주진마.
적어도 그녀석이 진지하게 라라 언니를 생각하고 있는건지 알고 싶으니까, 제대로 안하면 통과시키지 말라고.
언니를 좋아한다는 녀석이 헤이해진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는건 싫어."

...무슨 드라마에 나오는 시어머니냐?
언니를 뺏긴 심정인지, 어째 심술보가 나온것 같다.

"하지만 그걸 알아보는건 나중에 매지컬 쿄코가 해야할 역할 아니었어?"

"읏...! 그러니까 만에 하나 쿄코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원사의 물뿌리개'로 쿄코가 쓰러질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좀더 사전 조사가 필요하달까...
그래! 남자들은 주먹으로 대화한다던데, 그런걸로 마음을 통할순 없어?"

"무리."

No 야만. 중학교 경험으로 따져보건데 주먹으로 대화해서 친구가 된 녀석들은 없었어요.
대화라면 몰라도, 소년 만화의 주인공도 아니고 주먹에 실린 구상같은걸 알만큼 내 감수성이 높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안되겠으면 악당같은 분위기로 녀석에게 도발이라도 해보란 말야.
뭔가 진지한 느낌으로 가야 분위기도 사는데, 유우키 리토란 녀석은 위기감이 조금도 없어 보이고...
너도 악역을 맡았으면 좀더 악당답게 행동해. 악역인데 어째서 이렇게 나른한 분위기야?"

"으음...그래도 방금전까지 잘만 대화하다가 갑작스레 정색하면서 대하는것도 좀 어색한데."

"뭐? 불만이야?
...그럼 네가 분발할 수 있도록 도와줄께."

"네가?"

"그래. 잠시 몸 좀 숙여봐."

"응?"

"어서."

"...이렇게?"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추자 나나가 내 양뺨을 잡았다.
양뺨을 잡힌채 나나의 자주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나나가 입을 열었다.

"눈감아."

"...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거 기분 나쁘니까 눈감아."

옆에서 구경하던 모모가 「어머어머~」하며 기대하는 눈초리로 입가에 손을 올린다.
...뭐랄까...어느 의미로는 키스신 예고와 비슷한 상황이긴 한데 말이지...
3번 다시 생각해보아도 지금 상황에서 난데없이 그런 식의 전개가 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아니, 분명 나도 분위기적인 이유로 조금 긴장되긴 하지만, 이녀석 설마 노리고 그러는건가?
이대로 있어도 알수 있는건 없기에 생각을 끝마치곤 순순히 눈을 감았다.
왼뺨에 올려져있던 나나의 오른손이 치워지는가 싶더니 이마에 무언가 차가운 감촉이 달렸다.

눈을 뜨자 뭔가를 쥐고있는 나나의 오른손이 눈앞에서 치워지는게 보였다.
손에 쥐여져 있는건 검정펜이었...펜!?

"자~! 다됐다."

나나는 뭔가 거창한 일을 해냈다는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탄생! 악행 료스케!"

"뭐야 이거어어어언!?"

황급히 거울을 보자 나타난건 이마에 쓰여진 M 자.

"마왕에게 세뇌된 중간보스 역이야. 멋지지?"

멋지긴 개뿔...!
나 이제 막 씻고 나왔는데!
속으로 절규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안지워져! 유성펜이냐!?

송곳니를 드러내며 검지 손가락으로 처억 나를 가리킨 나나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자! 가라 악행 료스케!"

"가긴 어딜가? 요 말괄량이야-!"

약오른 나머지 나나의 양볼을 잡고 주욱 잡아당겼다.
볼이 늘어나며 당황한 나나가 거세게 항의했다.

"므하허야!(뭐하는거야!)"

"세뇌된 나는 여자아이를 괴롭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으소!(거짓말하지마)!"

물러나긴 커녕 도리어 내 뺨을 잡아당겨오는 나나의 대범함을 존경하며,
나나의 유성펜을 빼앗아 면사로 가린 양볼에 소용돌이(@)를 그려줬다.

"어머~ 사이가 좋네요~"

"누가!"
"핫핫핫~ 그렇게 보입니까?"

뭐, 맹랑한 녀석은 싫어하지 않지만요.

"이게뭐야? 더러워졌잖아~!"

면사랑 피부에 함께 그려진 낙서에 울상이 된채로 날 걷어차려고 하는 나나를 피해서 홀로 도망쳤다.
아무튼 조금 골탕을 먹긴 했지만 나나의 부탁대로 이번엔 악역답게 보이도록 노력해볼까.



「라라와 결혼해 은하의 지배자가 된다.」
「라라를 이용해 최강의 병기를 만든다.」

프린세스 라라의 약혼자들을 보았을때 생각했다.
이따위 약혼자 후보들의 존재는, 스스로 유능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존재들의 야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 이렇게 추하고 무능한 주제에 욕심만 가득찬 쓰레기들조차 터무니없는 지위를 노리는데, 그렇다면 존귀한 이몸이 안될건 뭐야?

내 곁에 있는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프린세스 라라의 두뇌」,「은하의 지배자」,「무능한 후보들」.

이것만으로도 후계자 쟁탈전이라는 진흙탕에 기꺼이 몸을 던질 이유는 충분했다.
그후 쓰레기같은 후보들을 하나둘 처리해 나가며, 후계자 자리를 향해 차근차근 다가갔다.



...그러던 어느날...아침에 눈을 떴을때 문득, 생각했던거다.

어째서 이런 녀석들 뿐이지?

어째서 '데빌루크'인 약혼자 후보는 나타나지 않았던거지?
약해빠진 녀석은 싫어하는게 데빌루크 왕인데, 어째서 같은 종족인 데빌루크인 후보자는 보이지 않았던거지?
'강력한 힘'과 '같은 종족'이라는 장점을 가진 데빌루크인이라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쓰레기같은 후보들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훌륭한 후계자인데?

어째서 그녀의 어릴적 친구는 약혼자 후보가 아니었던거지?
유려한 외모와 영리함. 무엇보다도 공주에게 일편단심으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자 스스로를 꾸준히 갈고 닦아온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인재인데?

어째서 당연히 후보라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들은 약혼자 후보가 아니고,
하나같이 무능하고 정신 이상자에 야심만 가득한 제왕병자들이 약혼자 후보로 있는거지?
설마 통일 은하를 다시 한번 전란의 소용돌이에 밀어넣고 싶어하는「SOLGAM」처럼, 기드 루시온 데빌루크도 같은걸 바라고 있단 말인가?

그때...불현듯 오한이 엄습했다.
이건 혹시 데빌루크 왕의 의도가 아닌가.
공주와의 결혼을 미끼로 내걸고, 주제 파악을 못하는 야심가들을 골라 제거하기 위한 '함정'일 뿐인게 아닌가.

나의 착상이 단순한 망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선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데빌루크' 약혼자 후보가 있는지, 정말로 왕이 되기에 적합한 후보가 있는지...
분수를 모르고 폭주하는 약혼자 후보들을 상대하면서 필요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알짜배기가 없이 쓰레기들만이 가득찬 후계자 쟁탈전은 더이상 내 자긍심을 채우지도, 만족감을 주지도 못하게 되었다.

후계자 선정의 숨은 의도가 있는지, 함정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때문에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필요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 분주하던 나날들 속에서 나의 불안은 자꾸만 커져갔다.

왕의 의도는 무엇인가?
단순히 후계자를 고르는 의식일 뿐인가?
무능한 후계자들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꼴을 즐기기 위함인가?
아니면 후계자 자리에 탐을 내는 야심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인가?
그것도 아니면 후계자로 하여금 통일 은하를 분열시키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니...애초에 이것은 정말로 왕의 의도인가?

끊임없이 생겨나던 의혹은 차츰차츰 호기심으로 변해갔고,
깨달았을땐 나의 목적은「후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성체가 지금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던 거대한 원동력이자, 때론 파멸로 향하는걸 알면서도 빠져나올수 없게 만드는 강렬한 마약.
가속해나가는 나의 호기심이 나를 인도하는 방향은 후자였다.

궁금했다.

과연 승냥이 같은 야심가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리고, 공주가 선택한 '야심과 동떨어진 최후의 약혼자 후보'만이 남는다면 왕은 대체 어떻게 나올까?

알고 싶었다 왕의 의도가.

아니, 「왕의 '반응'」이.

그 '최후의 약혼자 후보'마저 쓰러뜨린다면 왕은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왕의 '후계자 선택'이 강자를 고르려는 시합장이든, 야심가들을 처리하기 위한 미끼이든, 아니면 은하를 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으려는 음모이든,
노망난 왕의 장난이든, 아니면 진심으로 딸을 생각하는 마음의 결과이든 이젠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왕에 대한 나의「호기심」은 채워지니까.


그리고...마침내 내 호기심을 충족할 기회가 찾아왔다.
지금 이렇게 프린세스 라라와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 한곳에 모이게 되었으니까.
일부러 너희들이 한자리에 모이도록 수고스럽게 유도한 가치가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변수를 없앨 수 있으니까.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했나?

...정말로 돌아갈수 있을거라 생각해?

여기서 너희들을 쓰러뜨리고 나서 이대로 컨트롤 룸을 망가뜨리면,
너희들과 너희를 이곳으로 초대한 존재 모두 차원의 미아가 되어 영원히 표류하게 될텐데?
'죽음(게임 오버)'을 통해서도 도망칠 수 없는 이 가상공간에서...

상궤를 벗어난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 유우키 리토?
라라의 약혼자인 너도 친구들도 모두 파멸시키면 그때 프린세스의 반응은 어떨까?
망가져가는 프린세스의 모습을 알게되면 이런 혼란을 방조한 왕은 어떤 반응을 할까?
궁금하지 않나? 부서진 자신의 딸을 생각할지, 후계자 쟁탈전이 파탄난것을 안타까워할지 말이다.

...후후...2년 전에도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본 녀석들이 있었지.
일어날리 없는 기적을 바라며 그때와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나에게 저항하겠다는 것이냐?
발버둥쳐봐라, 필사적으로.
보여봐라, 너희의 '반응'을.
의미없는 저항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다 허무하게 사그라져가는 희망으로 나의「호기심」을 채워다오.



"...라는 설정인데...이봐, 안색이 시퍼렇다구?"

"아니, 너 방금 눈이 진심이었으니까...!"

내 눈은 원래 이렇습니다.

"...난데없이 앉혀놓고 한다는 말이 그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농담이라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이로군요."
"심장에 나빠요!"

바닥에 주저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일행 중 몇몇은 질린듯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이런 악질적인 설명을 늘어놓는거에요?"

"진지하게 싸우라고 하길래, 진지하게 설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나의 요구에 따라 적당히 음모론과 망상전개를 섞어서 '악역 약혼자 후보'를 만든 결과물이다.

"...상당히 적당적당한 음모론이네요."

"애초에 반쯤 정신이 나가서 폭주하는 캐릭터라는 설정이니까 말야.
음모론을 꾸밀 때 행동의 논리성이나 말의 타당성을 따질 필요가 없어서 편했다구?"

근거? 없어. 미쳤으니까.
논리? 없어. 미쳤으니까.
대화? 안통해. 미쳤으니까.
그야말로 악당의 훌륭한 표본이다.

"에~ 싫다~ 그런거."

"뭐라고 할까...상대하기 싫은 타입의 적이군요. 그런 비상식인은..."

상식적으로 안 움직이니까 무서운거지, 상식이 통하면 무섭겠냐?
아무튼, 이 정신나간 설정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준 일행들에겐 고마울 따름이다.

"거기까지 하지 않아도, 그냥 마을에 떠돌던 루머대로 해도 충분히 악당일 것 같습니다만..."

"루머?"

야미의 말에 의아해하자 다른 사람들이 덩달아 하나둘 입을 열었다.

"정보를 모을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 봤지만, 정보란 것들이 대부분 성주에 대한 비난뿐이었어요."
"마을 처녀들은 전부 성주의 검은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든가."
"셀수없는 모략으로 왕국을 도탄에 빠뜨렸다든가."
"성의 지하 감옥엔 수많은 소녀들이 갇혀있다든가."
"납치된 프린세스는 성의 구석진 방에 갇혀 이상한 플레이를 강요당하며 매일을 눈물로 지새운다든가 말이죠."

...대화 스크립트를 루머로만 잔뜩 채워놓은거냐...
아무리 시간이 없었다지만, 메인 스토리를 제외하면 이 게임 진짜 대충 만든 것 같다.

"제일 압권이었던건 「하렘왕이 되어 천명의 여자를 거느릴 목적으로 라라와의 결혼을 이용한다」였어요."

"...진짜 불순한 동기네요."

마을에서의 평가만으로도 이미 충분할만큼 악당이었습니다.
바닥을 기는 평가치에 무심코 감상이 튀어나왔다.
왕의 역할은 그런걸 위해 있는게 아니지 않아?
너무한 평가에 표정이 엉망이된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미캉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마엔 왠 낙서에요?"
"「M」?"

"아, 이거? 세뇌되었다는 설정이라..."

이마의 M은 마인드 컨트롤의 M!
덧붙여서 세뇌도구는 유성펜입니다.

"마왕의 부하중에 하얀 망토를 뒤집어쓴 당돌한 계집아이가 있어서 말야.
나한테 이런 낙서를 하고 명령을 하려 하길래, 홧김에 조금 손을 대 버렸지."

지금 생각하면 어른스럽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내 말에 룬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여자아이에게 손댄거야?"

"아, 아니 뭐...조금 사이가 좋아지려고 한 방식이 나빴다고 할까,
조금 당돌한 면이 귀여워서 아이 상대로 무심코 거칠게 해버렸달까...
더럽혀졌다고 울상이 된채로 말하는 모습은 꽤나 귀여웠지만."

"...NPC 상대로?"

"아니, 사람인데?"

「「「「......」」」」

"너말야..."

룬이 천천히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아, 이제 전투를 하는게 좋을까?
이야기 들으면서 충분히 쉰것 같으니까 다들 슬슬 일어나는게..."

"닥치고 죽어! 이 여자의 적!"

"으앗!?"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갑작스레 휘둘러진 검에 놀라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몸을 바로 세우자, 칼끝을 내게 향한 룬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여자아이를 괴롭히니 좋아? 이 외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룬이 달려들었다.
동작은 어설픈데 기세 하나는 정말이지 끝내주게 강렬하네요.
격렬한 기세로 검을 휘두르며 덤벼드는 룬에 당황해서 이리저리 검을 피하며 손사레를 치며 자기변호를 했다.

"아니아니아니! 가상현실이라서 그렇게 아프진 않았을테니까?
거기다 울려버린건 나도 조금은 반성하고 있으니까?
옷까지 더럽혀 버린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앗-!?"

"옷이 문제가 아니야 이 짐승아아아아---!"

"아니! 그 반응 절대 이상해!?
너 분명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

"이상한건 네 머릿속이야아아아아---!"

"으힉!?"

평소의 그 얌전빼던 너구리 아가씬 어디갔어?
룬의 뒤에서 몽둥이를 손에 쥔채 당황한 리토의 모습이 보인다.
다른 인물들은...어째서 느긋하게 대화하고 있어!?

「...괴멸적인 커뮤니케이션이군요 저건.」

「저기...어떡하죠?」

「아무튼, 이미 쓰러뜨릴 이유는 충분히 넘치지 않나요?」

「분명 아키츠 료스케는 '초대받은 사람'은 14명이라고 했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프린세스 라라, 그리고 저희들 12명.
그런데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인물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면...아마도 우리를 초대한 인물이 아닐까요?」

「오오 또다시 보는건가! 명탐정 야미야미~!」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에에~ 부끄러워 하는거야~ 역시 야미야미는 귀엽네~!」

「과연...그럼 아키츠를 쓰러뜨리면 문제의 인물도 모습을 드러낸단 말이로군.」

「어떻게 되었든 결국은 전투가 되는거군요.」

결론을 내린 린 선배가 검을 빼들고 룬의 원호로 나서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전투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룬의 검과 시간차로 날아오는 린 선배의 검을 피했다.

"간다 아키츠! 너의 파렴치한 짓을 심판해주도록 하지."

멋진 연기입니다 린 선배.
검을 휘두르는 동작에 힘이 잔뜩 실려있는 것 같지만요.

"리, 린 선배? 조금 기합을 과하게 넣으신게 아닌지...?"

"이미 알고 있을거다 아키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만은 널 믿겠다고.
방금전 '네가 했던 말'을 확실하게 신뢰하고 있으니 신경쓰지 마라."

엄청 신경쓰여!
어쩐지 신뢰의 방향이 달라!?

"오해입니다! 차분히 대화하면 안다구요?"

"오해든 뭐든 어차피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널 쓰러뜨려야 하잖나.
그러니까... 일단 벤다. 대화는 그 다음이다."

"뭡니까 그 묭-한 대사는!?"

평소의 얌전빼던 모습을 집어던지고 눈을 부라리는 룬의 검을 피하고 린 선배의 찌르기를 단검으로 받아냈다.
애초에 나나가 원하던대로 진심이 듬뿍 묻어나오는 배틀이 되긴 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카오스였다.

리사랑 미오는 부끄러워하는 야미를 만지작거리면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바니걸 : 전투중에 명령을 무시하고 논다.


진짜 캐릭터 특징에 충실하네요 저 둘은.
덕분에 야미도 당분간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듯 했다.

룬과 린 선배의 공격을 피해 이동하자 곧이어 코테가와의 돌려차기가 날아왔다.
경쾌하게 휘날리는 포니테일을 시선으로 쫓으면서 몸을 숙여 피했다.
돌려차기로 인해 벌어진 슬릿이 신경쓰였는지 코테가와는 곧 다리대신 주먹을 휘둘러 왔다.

"왜 자꾸만 쳐다 보는거에요?"

"그게말야, 역시 포니테일을 한 코테가와는 신선해 보이잖아?
평소보다 활발한 느낌이라 무심코 시선이 간달까...암튼 여러가지 의미로 굿잡!"

"상쾌한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며 말하지 말아욧!
좋아서 이런 차림 한게 아니니까!"

「싸우면서 잘도 만담을 하는군요...」

리사와 미오에게 만지작거려 지느라 배틀에 참가하지 못하고 있는 야미가 중얼거렸다.

린 선배와 룬, 코테가와의 연이은 공격을 피하며 주위를 살피자, 원호를 할 생각인지 미캉이 마법서를 펼쳐드는 모습이 보였다.

"『푸프린!』"

순간 코테가와의 앞섶이 풀어헤쳐졌다.

- 기절했습니다.

난데없이 상의가 벗겨지는 봉변을 당한 코테가와는 황급히 가슴을 가렸다.

"읏, 뭘보는거에요 이 저질!"

퍽!

"컥!?"

경직된 상태에서 코테가와의 어퍼컷에 턱을 맞고선 날아갔다.

"죄송해요 코테가와 언니! 그런 마법인줄 몰라서..."

옷을 여미는 코테가와에게 당황하며 사과하는 미캉의 모습에, 같은 경험을 했던 린 선배의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슬프게도 역사는 반복되는거로군요.


코테가와가 이탈하면서 틈이 생긴 룬과 린 선배의 공세를 빠져나와 하루나와 리토가 있는 홀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달려오는 내 모습에 리토는 몽둥이를, 하루나는 양손 포핸드로 검을 거머쥔채 덤벼들었다.
의욕은 좋지만 나도 계속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해선 곤란하다고?
조금쯤은 그럴싸하게 균형을 이뤄야 나중에 일부러 져줬다는 소린 안들을테니까.
리토의 몸이 나와 하루나 사이에 오도록 위치를 잡고서, 리토의 몸을 잡아 그대로 하루나에게 집어던졌다.

"우아악~!"

"유우키군!"

높이떠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리토의 모습에 하루나는 당황해서 검을 놓고 리토를 껴안듯 받아들였다.
일석이조의 찬스!

"『메-「꺄아악!」"

짜아악-!

"끄억!?" "크핫!?"

두명을 동시에 공격하려고 자세를 잡기 전에, 순식간에 뒤로 튕겨진 리토와 충돌해 밀려나 버렸다.
어째서야?
내품에 안겨 뺨에 손자국이 난채로 기절한 리토의 얼굴를 내려다보다 하루나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앞섶이 풀어헤쳐지며 드러난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곤 새빨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하루나가 있었다.

...아...해줬구나 리토.
하루나의 품으로 리토가 떨어졌을 때, 리토의 손길이 하루나의 옷섶을 파고들며 가슴을 움켜쥐었던 것 같다.
무슨 마법(푸프린)도 아니고...여기까지 오면 이미 스킬의 영역이군요.

하루나에게 맞아 헤롱거리는 리토의 몸을 부축하며 주위를 살피자 룬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 꼬나쥔 검을 내지르려는 룬의 앞에 잽싸게 리토를 방패로 내밀었다.
이름하여 프렌드 실드!
착한 아이는 현실에서 따라하지 맙시다.
나? 게임속이니까 괜찮아요.

기절한 리토를 방패로 삼자 룬은 우뚝 검을 멈췄다.

"왜그래? 오지 않는거야?"

"칫...! 이 비겁자!"

"후후후~ 어설픈 마음으론 악당역은 못하잖아?"

분한 표정으로 검을 내리는 룬에게 능글능글한 얼굴로 대꾸하는데, 갑자기 리토가 내 손을 풀어내며 달아났다.
그대로 양팔을 특이하게 흔들며 달려나가는 리토의 모습에 당황했다.
분명 방금전까지 기절상태였는데 어째서? 게다가 움직이는 모양새도 무슨 꼭두각시 인형마냥...
리토가 달려나가는 방향엔 양쪽 검지를 세운 오시즈가 리토를 향해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엔 성공이네요~!」

"염력이었냐!"

"이야압~!"

"으앗?"

오시즈의 염력 조종으로 리토라는 방패가 사라지자, 그대로 룬은 분노의 기세를 담아 칼을 휘둘러 왔다.
끈질기게 달라붙어오는 룬을 피해 뒤로 힘껏 뛰어 거리를 벌렸다.
이거...아무래도 슬슬 전투를 마무리 짓는게 낫지 않아?

"방심하는 건가요?"

"!"

사키 선배의 경고와 함께 날아오는 채찍을 몸을 굴려 피했다.
채찍을 든 사키 선배와 함께 오시즈가 새로이 공격에 가담해왔다.

"여자를 울리는 못된 남자는 연애퀸인 이 텐죠인 사키가 심판해 드리죠. 영광으로 아세요."

"하핫~! 송구할 따름이군요!"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휘둘러진 채찍을 피한 직후, 검지와 중지를 세운 손으로 내쪽을 가리키는 오시즈의 모습이 보였다.

"료스케씨! 앞으론 여자아이를 대할 때는 좀더 상냥함을 가져주세요! 염력집중!"

명쾌한 공격 신호 정말 고마워 오시즈.
오시즈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서있던 장소에서 재빨리 옆으로 뛰며 오시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메라』"

"꺄악!?"

화염구를 직격당한 오시즈가 놀라 염력의 제어를 흐트린 사이, 사키 선배를 제압하기로 했다.
휘둘러진 사키 선배의 채찍을 붙잡고 힘껏 잡아당기자, 사키 선배의 몸이 채찍을 따라 이끌려왔다.
그대로 다리를 걸며 왼손을 사키 선배의 오른쪽 어깨에, 오른손을 사키 선배의 허리에 가져간 순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잡아당겨지듯 흔들리던 사키 선배의 허리 벨트와 목걸이에 연결된 끈이 끊어지며 본디지가 흘러내렸다.

"...에?"

상의가 완전히 흘러내려가 상반신 알몸이 되어버린 사키 선배는 일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사키 선배의 맨허리에 한손을 올려놓은채로 넘어뜨리기를 할 생각을 멈춰버리고 굳어버렸지만.
이윽고 현상을 파악한 사키 선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베...베짱 한번 좋군요 아키츠군."

"아,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고로..."

공교롭게도 어깨와 허리에 손을 댈 때 목걸이와 벨트가 벗겨져서 오해하는진 모르겠지만, 이건 엄연히 오시즈의 염력 현상이라고요?

"그런건...적어도 손을 치우고 나서 말하라구욧!"

"뜨악!?"

새빨간 얼굴을 한 사키 선배에게 사정없이 발등을 짓밟히곤 비명을 지르며 손을 치웠다.

"사키님! 이걸...!"

"고, 고마워요 아야."

급히 달려온 아야 선배가 망토를 벗어 사키 선배에게 걸쳐주었다.
망토로 몸을 가린 사키 선배는 다시금 날 둘러싼 코테가와와 린 선배의 모습을 보곤 바닥의 채찍을 회수해 뒤로 물러났다.
근접전중에 채찍 공격은 자칫하다간 원호는 커녕 아군을 맞출수도 있으니까.

코테가와와 린 선배가 무서운 눈으로 맹공을 걸쳐왔다.
방금전의 일 때문인지 공격의 기세가 아까보다 더 강렬했다.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니는군요!"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생각이냐!"

"아니, 이제 저랑은 충분히 싸운거 같으니까?
슬슬 최종보스전을 대비해서 쉬는건 어때요?"

"거절한다!"

"그런건 아키츠군을 때려눕히고 나서 하도록 하죠."

표현 무지 과격해!?
악당과는 타협하지 않는다는 의지입니까?

어느새 노닥거리고 있던 리사와 미오, 야미까지 일어나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리토와 다른 사람들도 가세해 순식간에 12명에 둘러싸인 형상이 되었다.
전의로 가득찬 눈을 한채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행들을 보자니,
구교사에서 귀축 의혹을 받고 친구들에게 불합리한 분노가 실린 징계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지금은 몸을 사리는게 낫겠다 판단한 즉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천장에 매달렸다.

"뭐야 그건!?"

"뭐긴 뭐야? 천장으로 피신한거지!"

"이건 롤플레잉 게임이잖아!?
어째서 혼자 액션 게임하듯 놀고 있는거야!?"

황당한 얼굴로 태클을 거는 리토의 말을 무시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생존본능의 결과입니다.

"하하하~! 그럼 다들 밑에서 머리 좀 식히고 있으라구~"

"당장 거기서 내려오지 못해요?"

"싫어.『메라』"

"꺄악~!"

천장에 매달린채로 날린 화염구에 리토 일행이 다급히 몸을 피했다.
천장까지 날아올라 공격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야미 뿐이다.
그 야미라도 마법 3~4방만 제대로 맞으면 게임 오버다.
아무리 몇시간 동안 레벨을 올렸다지만 HP가 그렇게 쉽게 올라가는 수치도 아니니까.
견제를 위해 날려대는 화염구를 피하느라 리토 일행의 포위망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이거 비겁하지 않아? 공격이 닿지 않는다구~!"
"아~ 정말~! 누가 어떻게든 해봐요!"

"제가 한번 해볼께요."

날아오는 화염구를 피하면서 떠드는 소리에, 아야 선배가 나섰다.
약간 얼굴이 상기된채 마법서를 펼친 아야 선배가 주문을 외웠다.

"『푸프린!』"

- 기절했습니다.

그거냐!?

콰앙-!

상의가 흘러내린 아야 선배의 모습을 보며, 굳어진 신체로 추락해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버렸다.

"됐어~! 총공격 찬스~!"
"좋았어! 공격이다~!"

"윽... 이런...!"

우르르 몰려드는 일행들을 보곤, 몸을 일으키면서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힘껏 잡아당겼다.

「「「꺄아~!?」」」

양탄자 위에 서있던 몇몇이 균형을 잃고 뒤로 굴렀다.
곧장 구멍이 뚫린 포위망을 빠져나오려 하자 리사가 앞을 가로막았다.

"또 도망친다! 잡아!"

허리춤에 찬 단검에 왼손을 가져갈 때 리사가 돌진해왔다.

"에잇~!『파후파후~!』"

- 경직되었습니다.

폴짝 뛰어오른 리사가 내 머리를 잡고 가슴에 묻었다.
이녀석 또!?

"아하하~ 간지럽다구~?"

쉬이익-!
스각-!

경직에서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일행들의 공격을 등뒤에 고스란히 직격당했다.
경직이 풀려 리사에게서 벗어나는 시간동안 그야말로 수십차례는 공격당한것 같았다.
등짝의 상처는 검사의 수치라고 했는데!
아, 물론 다른 의미로는 남성의 훈장이지만요.

"헤에...역시 중간보스인가?
마을 밖의 몬스터는 야미야미에겐 다들 한방이었는데~?"

"체력과 튼튼함 빼면 시체니까."

"그럼, 어디까지 버티나 한번 볼까?"

"뭐?"

- 진짜 지옥은 지금부터다.

싱글싱글 웃으며 내뱉은 말치곤 악당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리사에게 무심코 움찔하곤 단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희대의 정신나간 연계공격이 시작되었다.




『푸프린』
"파렴치해욧-!"
짜아악-!

『파후파후』"아앙~"
스각- 서걱-

『푸프린』
"꺄아악~! 죽어! 이 짐승아!"
뻐억-!

『파후파후』"후후, 누나의 가슴은 좋아~?"
팅-! 카캉-!

『푸프린』
"천벌-!"
퍼억!

『파후파후』
......

리사와 미오의『파후파후』와 연계되는 등짝베기에 더해서,
어째선지 아야 선배까지 가세해서 상태이상 공격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미캉은 차마 파렴치한 마법을 쓸 생각은 못한채 구경하고 있었다.
방어

수치심를 포기하고 공격 일변도로 덤벼드는 일행 덕에,
기절과 경직을 오가면서 손 한번 뻗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변칙 플레이...! 쿨럭!?"

푸학-

"야 잠깐!? 푸웃...!"

『푸프린』인지 『파후파후』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중부터 코피까지 나기 시작했다.
분명 출혈계통이 아닌 혼란계 상태이상 공격인데 신사적인 이유로 코피와 함께 HP가 깎이고 있는게 개그다.
슬슬 현기증이 일기 시작하는게 진짜 위기감이 느껴진다.

"야 그만!"

푹-

"잠..."

푹-

"사, 살려...!"

푹-

문답무용으로 찔러오는 공격에 필사적으로 물러나며 손바닥을 펼쳤다.

"『메...메ㄹ..."

물컹~

"어머나~ 아키츠군은 야하네~"

쑥 내밀어진 내 손목을 잡은 리사가 그대로 내 손바닥을 가슴에 가져대곤 히죽 웃었다.

푸웃-

아아...쫙쫙 피가 빠져나간다......
코에서부터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이 바닥에 고인다.

"커...크헉-"

반쯤 의식이 날아간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채 쓰러졌다.
입고있던 옷은 칼날과 채찍에 맞아 여기저기 베어져 엉망진창이었다.
공격이 그치고 코피도 적당히 멎자, 무릎을 손으로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후...후후후...이렇게까지 날 몰아붙인건 너희가 처음이다."

"아니, 쌍코피 흘리면서 그 말투는 그만둬.
이제 카리스마 요만큼도 없으니까..."

리토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나저나 괜찮아?
피를 그렇게 많이 흘렸는데?"

"하...이런걸로 죽을리 없잖아?"

개그보정으로 죽으면 개그가 따로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있는건지 무슨 말을 하고싶은건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다...

이런 몸이 되고나서 피를 흘린적은 한손에 꼽는 정도였는데...
물론 진지함과는 동떨어진 이유였지만.
과다 출혈로 쓰러진다는건 미캉의 가정방문 때 이후론 없을거라 생각했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로군요.
아무튼 이대로 더 싸우다간, 마왕(매지컬 쿄코)을 소환하기도 전에 게임 오버 될 것 같다.
이제 적당히 패배한 악역을 연기하고, 남은 일은 전부 마왕에게 떠넘기기로 하자.
우선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굴려 어떻게든 리토 일행의 싸움을 칭찬하는 말을 꺼내기로 했다.

"대단하군...너희들의 의지는 충분히 알았다.
동료와 승리를 위한 자기희생『푸프린』『파후파후』...멋진 승부였다."

"그러니까 무리한 설명은 그만 하라니까?
그런데 정말로 괜찮은거야?"

"아아, 정말이지 꽤나 위험했다.
태어나서 내게 이만큼 피를 흘리게 만든건 너희가 두번째였으니..."

"첫번째는 누군데?"

"그건 미-"

"『푸, 푸프린!』"

푸학...!

새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주문을 외운 미캉의 노출씬에 다시금 코피가 터졌다.
망토가 흘러내리면서 노출된 겨드랑이와 쇄골.
벨트와 지퍼가 느슨해지며 흘러내린 핫팬츠 위로 드러난 치골.
미캉의 모습을 뇌리에 새긴채 코피의 웅덩이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위험...진짜로 죽는다...!

"미, 미캉?"

"아, 미, 미안해요.
그러니까...메, 메라를 읊는다고 생각해서..."

"후, 후우...크..."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추슬러 기는 듯한 움직임으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방금 말은 아무래도 지뢰였나보다.
빨개진채 노려보는 미캉의 모습을 보건데 말했다간 혼나는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 말하면 사회적인 의미로 죽는건가?
피를 너무 흘려 반쯤 정신이 나간 탓인지 판단력이 흐려진것 같았다.


어찌됐건 이젠 마왕을 소환할 차례다.
아니, 차례가 아니라도 부른다.
이대로 개그같은 공격을 더 받았다간 피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주머니에서 우스꽝스러운 태양무늬 팬던트를 꺼내들었다.

"크흠...하여튼 저승길 가는 선물로 보여주도록 하지.
마왕의 앞에서도 지금처럼 싸울수 있는지 기대하겠다...!"

- 매지컬 쿄코 소환!

팬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홀을 가득 채웠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옥좌가 놓여진 홀의 끝에 4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비키니 갑옷을 입은 매지컬 쿄코(가짜)와 공주님 드레스의 라라, 후드가 달린 망토를 쓰고 변장한 나나와 모모였다.

"라라!"

"리토!"

환한 얼굴로 리토를 반기는 라라를 잠시 멈추게 한 쿄코가 앞으로 나섰다.
눈을 살짝 찡긋하며 신호를 교환한 나와 쿄코는 연기를 시작했다.

"수고했어. 아키츠 료스케."

"마왕 매지컬 쿄코, 나를 대신해 부디 이들에게 심판의 불길을!"

"싫어."

"뭐?"

"싫다고 했어.
난 리토군을 좋아하니까.
그리고...넌 이제 필요없어."

화르륵.

쿄코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내 몸을 감싼다.
이제 내 역할은 이걸로 끝이다.
타오르는 화염속에서 한껏 해방감으로 가득찬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아아------!"

- 내성저항했습니다.

"......"

"......"

몸을 불사르던 화염이 꺼졌다.
쿄코와 나 사이에 거북한 침묵이 생겨났다.

...내성을 무슨 메탈 슬라임한테 맞췄나...

함께 연기하던 쿄코가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삿대질 포즈로 서있다.
힐끗 나나와 모모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나나가 조용히 엄지를 내렸다.

- 알아서 쓰러져.

분위기 좀 파악하란 말이로군요.

"...크, 크으으윽!
내가 이렇게 쓰러지다니..."

가슴을 꾹 누르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황당해하는 리토 일행의 모습이 보이거나 말거나 난 내 역할에 충실하렵니다.

"저기...아키츠군?"

"하지만 기억해둬라...!
내가 이렇게 쓰러져도 언젠가 제 2, 제 3의 내가 나타난다는걸...꼴까닥."

어이없는 단말마와 함께 힘없이 고개를 늘어뜨렸다.

"...아키츠군?"

"......"

"대답좀 해요 아키츠군."

"반응이 없다. 그냥 시체인 것 같다."

"잘만 대답하고 있잖아욧!!!"

퍽!

"으엑!?"

코테가와에게 옆구리를 걷어차여 비명이 새었다.
바닥에 누운채 옆구리를 매만지는 내 옆에 코테가와가 주저앉았다.

"적당히 제대로 대답하라고요 아키츠군.
마왕인가 하는 사람은 이제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니까."

"아, 그래?
그럼 이제 나 일어나도 되지?"

"...회복이 빠르군요.
방금전까진 빈사상태였으면서."

"하하...게임이니까 이정도 일은 예사라구."

"...걱정했다구요."

"응?"

작게 들린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코테가와는 슬쩍 시선을 외면했다.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코테가와는 말똥말똥한 눈초리로 올려다보는 내 모습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릴 질렀다.

"아아~! 진짜...!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거에요!?
걱정해서 나빴어요! 됐어요?"

"엑? 어째서 화를 내!?"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다고!?
불합리함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코테가와는 골치가 아픈듯 미간을 눌렀다.

"아아~ 정말이지...
그것보다! 가만있어봐요."

코테가와는 오른손으로 내 뒤통수를 살짝 들어올렸다.
지긋이 응시하며 가까워지는 갈색 눈동자에 조금 가슴이 뛰었다.

"잠시 눈 좀 감아봐요."

"어? 으, 응..."

코테가와의 말에 얌전히 눈을 감았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 천이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코테가와?"

"뜨지 말고 잠시만 있어요. 얼굴 닦아 줄테니까."

정성스레 얼굴을 닦아오는 손길이 어쩐지 간지럽게 느껴졌다.
코테가와의 행동이 끝나기를 가만히 기다리며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이윽고 코테가와의 손길이 그치고 눈을 뜨자, 피가 묻어있는 코테가와의 무투복이 보였다.
옷자락 끝을 들어 내 얼굴을 닦아주었나보다.
내 머리를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은 코테가와가 중얼거렸다.

"뭐, 이번 일은 아키츠군의 자업자득이었다지만...
역시 조금은 지나쳤다고 생각해요."

"......고마워."

......응.

아픈건 싫지만...
건강한게 제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간병받는건 역시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린 시절, 병치레를 하던 날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성스레 돌봐주시던 부모님과의 추억이 떠올랐다.

"아...저기말야, 다음에 함께 연극이라도 보러가지 않을래? 재밌을거야."

"은근슬쩍 권유하지 말아요."

"아야야..."

피식 웃은 코테가와에게 귀를 잡혔다.




코테가와랑 촌극을 빚는 동안 리토에 대한 마왕 쿄코(가짜)의 유혹이 계속되었다.
어떻게 하고 있나 쳐다보니 쿄코는 리토에게 자신과 라라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며 옥좌의 팔걸이에 걸터 앉았다.

"우후후- 꺄악~!?"

쿠당탕!

"아윽!?"

한껏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옥좌에 앉아 포즈를 잡으려던 쿄코는 갑자기 둘로 갈라진 옥좌에서 떨어져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덤으로 세로로 나뉜 옥좌가 쓰러지며 쿄코의 머리에 부딪쳤다.
야미가 잘라놓은 옥좌를 폼나라고 도로 붙여놓은게 잘못이었나...
당황해하며 엉덩이랑 머리를 매만지는게 카리스마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힐끗 야미를 바라보니 야미도 쿄코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불쌍하다...

뭐, 이런 저런 불상사가 있었지만 이야기는 그나마 제대로 진행되었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있는 선택지이기도 하고.
현실의 라라와 가상현실에서 프로그래밍된 가짜 쿄코 중에 선택하라면 답은 하나뿐이지.
다만 하루나가 옆에 있는 상황이라 리토는 대답을 주저하다가 답했다.

널 좋아하는지도 모른다고...

리토 나름대로 고민해 도달한 대답에 라라는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답하며 미소지었다.
...꿋꿋하고 좋은 아가씨로구먼...
리토를 향한 라라의 변함없는 마음이 결국엔 리토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 것이겠지.

하지만 리토의 대답은 쿄코를 만족시키지 못했나보다.
어정쩡한 사람은 싫다는 말과 함께 쿄코는 리토 일행에게 화염을 뿌렸다.
다만, 결과는 리토의 물뿌리개에 의해 시전된 정원사의 궁극기「라이트닝 샤워」로 원턴킬 당한 쿄코의 패배였지만.

...예상은 했다지만 역시 조금 허무해...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가상현실과도 안녕이로군.

쿄코가 쓰러지고나자 베일로 얼굴을 가렸던 나나와 모모도 정체를 드러내었다.
시나리오를 통해 리토와 친구들의 성향을 알게 되어 둘은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다.
예상치 못하게 동생들과 만나게된 라라는 재회에 기뻐했지만, 동시에 친구들에게 폐를 끼친것 같다며 사과해왔다.
라라와 리토를 위한 무대도 무사히 마무리 되면서, 우리들은 무사히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랬을 터인데...




"여긴 대체 어디야!?"

"꺄아아악!"

갑자기 뛰쳐나와 입을 벌리며 덤벼드는 악어를 붙잡아 강으로 집어던지곤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악어? 어째서 열대우림? 어째서 전기 뱀장어?
......아마존이잖아 여긴!?

현실세계로 돌아온건 좋지만, 워프장치의 문제였는지 사키 선배, 린 선배, 아야 선배, 룬과 나는 아마존 우림 한가운데 떨어져 버렸다.
사키 선배가 휴대폰으로 텐죠인 그룹에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해외 로밍 서비스가 안되잖아!?
결국 아마존 우림을 벗어나 사람이 있는 곳을 발견할 때까지 걸어야 했다.

철퍽-!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바라보니 나무뿌리에 다리를 걸려 룬이 넘어져 있었다.
놀라서 다가가 일으켜 세우자, 룬은 진흙투성이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으긋...뭐야 이게..."

"괜찮아? 이런곳에서 한눈 팔고 걷다간 위험하다구."

손수건을 꺼내 지저분해진 룬의 얼굴을 닦아주는데 룬이 무릎께에 손을 가져가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

다리를 다친건가?
확인해보니 무릎이 벗겨져 피가 나고 있었다.
상처에 뭍은 진흙을 치우고 사키 선배의 손수건으로 상처를 감싸곤 혹시나 하고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

일어나려던 룬은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편 무릎을 잡으면서 몸을 지탱했다.
이래서야 걷게하는건 안 좋겠군.
한숨을 쉬고 룬을 앞에 등을 보이며 주저앉았다.

"업혀."

"싫어, 변태."

아직까지도 신경쓰고 있었냐...

"이상한데 만지거나 하지 않을테니까...
사람이 사는 곳까지 나가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

잠시 주저하던 룬은 내 등에 몸을 실었다.
룬의 허벅지를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적어도 주위는 살피고 걸으라고.
잘못해서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위험하잖아?"

"잠시 한눈을 팔았을 뿐이야. 신경꺼."

퉁명스러운 룬의 반응에 입맛을 다시곤 사키 일행과 함께 아마존 우림을 걸었다.


처음보는 희귀한 동식물의 위험성 때문에 네 소녀들을 데리고 우림을 헤쳐나가는건 꽤나 고역이었지만 생각만큼 힘들진 않았다.
오감에 걸리는 소리나 냄새에는 되도록 주의하며 접근해오는 생물을 파악하며 안전해보이는 길을 찾아 우림을 헤쳐나갔다.
동행하던 사키 선배 일행도 긴장이 조금은 풀렸는지, 간간히 게임속(트러블 퀘스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긴것 같았다.

선배들이 게임속의 경험을 갖고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난 룬의 투정을 받아줘야 했지만...

"그러니까 뭐가 라라랑 자기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라고 지껄이는거야?
야한옷을 입고서 리토군에게 꼬리치던 주제에..."

"응. 그렇네."

"거기에 리토군도 리토군이야.
조금쯤은 날 의식해주면 좋잖아?
어째서 라라한테만 신경을 쓰는거야?"

"응응, 그러게."

리토는 아마 하루나도 의식하고 있었을테지만.

"...야, 제대로 듣고 있는거야?"

"물론이지. 멋진 모험에 대한 회상을 하고 있잖아?"

"웃기지마.
누가 마왕의 고백 따윌 보려고 모험을 했겠어?"

...미안하게 됐네요.
그 스토리 구성에 나도 참여 했는지라 비판이 따갑게 마음에 꽂힌다.
쌓인게 많았는지 룬의 푸념은 쉴새없이 계속됐다.

"...게다가 말이야, 거기서 왜 갑자기 라라가 나오는거야?
나도 공주님 연기 같은거 잘할 수 있단 말야.
그랬더라면 연약한 내가 짐승한테 습격당하는 일도 없었을거라구."

...짐승입니까 나는...
그나저나 룬이 공주님이라?
확실히 어울리긴 하겠군.
룬이 메모루제 별의 왕족이라는걸 가끔 잊는단 말이지.

"아, 그러고보면 룬 너도 왕족이었지."

"...뭐야? 그럼 지금까지 날 뭘로 봤던거야?"

"뭐냐니...친구? 덤으로 남들 앞에선 내숭 떠는 꼬마 너구리."

"한마디가 많아~! 게다가 하나도 기쁘지 않아!
이미지 관리를 잘한다고 말하라구!"

"으악!? 미안!
알았으니까 귓가에 대고 소리지르지 좀 마...!"

귀청 떨어지는줄 알았네...
참고로 지금은 너구리라기 보단 살쾡이같습니다.

"하아..."

한참을 투덜대던 룬은 불평하기도 지쳤는지 내 목에 팔을 걸곤 등에 넙죽 기댔다.

"...바보같아..."

맥빠진 어조로 중얼거린 룬은 그대로 낮은 숨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룬을 업은채로 사키 일행과 이동하길 한참.
룬이 졸면서 흘렸는지 조금 눅눅해진 어깨에 곤란해질 즈음, 운좋게 우림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로 간신히 민가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학생복 차림으로 우림을 걷고 있던 우리의 모습에 안내인은 꽤 놀란것 같았지만 재밌는 이야기 거리가 생겼다며 넉살좋게 대해주었다.

안내인의 집에서 전화를 빌려 사키 선배가 텐죠인 그룹에 연락을 취하고서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헬기로 마중을 나오는 위엄을 보여준 텐죠인 그룹의 힘으로 입국 관련 절차도 무사히 해결되었다.
끝은 조금 험난하긴 했지만 게임속 연기는 즐거웠고 모처럼 해외여행도 했기에 개인적으론 꽤나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p.s. 트러블 퀘스트에서의 일이 떠올라 쿄코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몇시간 뒤 짬을 내 전화를 걸어준 쿄코와 간단한 인사를 주고 받다가 최근 해외 콘서트를 다녀왔다는 이야길 들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태어나서 첫 해외 여행으로, 아마존 우림에서 오지탐험을 하고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활화산 수련」에 이은 새로운 수련 방식이냐고 진지하게 질문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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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삽화는 터틀러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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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OTL;;;
2개월 만에 인사드리는군요;;
2월말에 대충 완성되나 싶더니 이거저거 뜯어고치고 하면서 결국 펑크 냈네요...ㅇ<-<;;;

기다려주신분들께 죄송하고도 감사합니다.m(_ _)m;;;
개학하시는분들이 많으신듯한데, 학생분들은 새학기 맞이 잘하시길 바랍니다*^^*
다들 좋은 꿈 꾸세요~^^

p.s. 참조 이미지

목욕중인 나나와 모모

나나 아스타 데빌루크

모모 베리아 데빌루크

홀의 내부

사키, 린, 아야(게임속)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싸움여왕)



룬: !?

오시즈의 인술

야미(1)

야미(2)

코테가와, 미캉, 하루나

코테가와

욕탕 깊이는 대충 이쯤

데빌루크 세자매

파후파후(드○곤볼/드퀘) - 혼란계출혈계공격

푸프린

푸프린

푸프린

인간VS자연

p.s.2.

리사, 미오, 오시즈, 나나, 모모의 복장은 OVA를 참조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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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부터 2012년 1월까지 타입문넷 창작그림 게시판에서 받은 '나는 이차원에 불타는 이단 옆차기'의 축전 모음입니다.
축전을 올려주신 분은 나르샤 님, 신이다 님, 절삭기 님, 암천묵시록 님 입니다.

축전 보내주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


이상으로 축전을 정리합니다.
축전으로 폭탄 세례를 받을줄은 몰랐는데 그저 감사드릴뿐...ㅠㅠ
많은 관심 정말로 감사드립니다~~~!m(_ _)m

다들 행복한 한해 되세요~!*^^*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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