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꾸벅...

쉬는시간. 책상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고 있던 중 시야 한구석에서 불규칙적으로 상하운동을 하는 물체가 관심을 끌었다.

"...유우키?"

"므...?"

정리하던 노트를 덮고선 고개를 위아래로 힘없이 흔들거리는 리토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쯤 잠겨가던 리토의 눈꺼풀이 열렸다.
부스스한 얼굴로 정신을 차린 리토는 양팔을 위로 치켜들곤 힘껏 기지개를 폈다.

"으으읏...! 하아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고 눈을 깜빡인 리토는 양손 중지로 미간을 매만졌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리토의 얼굴을 살피니 안색이 조금 핼쓱해 보였다.
하루나와 대화를 나누던 라라도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토를 보았고,
하루나도 리토에게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리토~ 괜찮아?"

"아...괜찮아."

"유우키군... 어쩐지 피곤해보여."

"괘, 괜찮아 사이렌지.
그냥...최근 아버지 화실에 가서 만화 어시스트를 한다고 바빴거든."

하루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리토는 당황하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시스트라...마감 때문에 사이바이씨께 불려갔었나보네.
연재를 3개나 맡아서 하는 인기 만화가 사이바이씨다보니 「사이바이 스튜디오」는 언제나 마감으로 바쁘다.
덕분에 마감이 임박해오면 리토에게도 구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애독하는 「영웅학원」이 나오게 되기까지는 리토의 도움이 컸다고 하겠다.
리토 뿐만이 아니라 꾸준한 연재를 위해 힘써준 사이바이씨, 저스틴, 그리고 브왓츠와 마울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아, 참고로 브왓츠와 마울은 저스틴의 부하로 있는 에이전트들이다.
금발 올백에 뾰족한 턱수염, 왼쪽 눈가에 세로로 길게 난 상처가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브왓츠.
짧은 흑발에 각진 외모의 인상파 거구가 마울이다.
둘다 눈썹을 밀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영락없는 야쿠자 스타일이다.
처음 러브러브 공원에서 저스틴 일행과 조우했을 땐, 공원에 있던 사람들도 브왓츠와 마울이 야쿠자가 아닌지 생각했으니까.
인상과는 달리 순박한 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오래 만나다보면 둘의 험악한 얼굴도 곧 익숙해지지만.

라라의 명령으로 사이바이씨의 만화를 돕기 시작한 저스틴이지만,
지금의 저스틴은 만화를 그리는데 높은 자부심을 가지게 된것 같았다.
만화 아티스트 전문가를 꿈꾸며 착실히 앞길을 준비해가고 있다고 하고.

사이바이씨의 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신인 만화가 공모전에 낼 원고도 작성하며 지내는것 같은데, 나로선 꽤나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보고 있다.
화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저스틴이 작업한 그림을 접할 수 있었는데,
저스틴에게 잠재되어있던 만화가로서의 기량은 생각 이상으로 출중해 보였으니까.
다만 그림체가 소녀만화 풍일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솔직히 '데빌루크 최강의 검사'라는 호칭과는 전혀 매치가 안되잖아?

빠른 속도로 지구에 적응한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마울과 브왓츠도 점점 지구에 익숙해져 가는것 같다.
특히나 마울은 최근 매지컬 쿄코에 푹 빠져 지내는 것 같고.
매지컬 쿄코 피규어를 발견하곤 「우효~! 귀엽다~!」라고 외친 마울을 봤을 땐 무심코 마시던 걸 뿜어버렸지만...
데빌루크로 돌아가면 지구의 애니와 만화를 퍼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던데...어찌 될라나 몰라.
마울의 계획을 알게된 저스틴의 반응을 잠시 회상해보았다.

- 문화를 발판으로 다른 별과 교류라니...마울도 성장했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던 저스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괜찮을까? 이걸로 정말 괜찮은걸까 데빌루크?


아무튼...그건 그거고, 지금은 안색이 창백한 주제에 애써 웃고있는 리토를 돌보는게 우선이다.
하루나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은 멋지다만 힘들땐 쉬는게 순리지.

"힘들다면 양호실에서 잠시 쉬다 오는게 어때 유우키?
지금 이 상태로는 수업을 들어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거라구.
선생님껜 내가 말씀드릴테니. 조금 몸을 추스리고 오도록 해.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제일이니까."

"...아키츠가 그런 말을 하니까 지나치게 설득력있는걸."

쓴웃음을 지은 리토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양호실에서 좀 쉬고 올께.
선생님껜 설명 좀 부탁해."

"걱정말라니까~"

"몸 조심해 유우키군."
"양호실까지 함께 갈래 리토?"

"고마워 사이렌지, 라라.
함께 갈것 까진 없어. 그렇게까지 힘든건 아니니까...응?"

우웅-!

일어서던 리토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휴대폰을 연 리토의 반응으로 보건데 문자가 온것 같았다.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던 리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렌 녀석, 귀찮게 굴긴..."

"무슨일이야 리토?"

라라의 물음에 리토는 수신 문자를 보여 주었다.
나도 옆에 끼어서 어떤 내용인지 읽어보았다.

탈의실로 운동복 좀 가져다 줘.

...진짜 간결하네.
앞뒤 잘라먹고 보내온 실로 간략하기 그지없는 문자였다.

"옷이라도 젖은걸까?"

"알게 뭐야 그녀석...
기껏 처음으로 보내온 문자가 심부름이나 시키는거라니..."

"그럼 안돼 리토~
렌이랑 친하게 지내야지. 친구잖아?"

"하지만 그녀석, 나랑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잖아..."

그야 렌이 라라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10년전부터 짝사랑하던 라라가 리토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렌이 리토에게 살갑게 구는건 왠만하선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리토에게 문자로 도움을 청한걸 보면 전혀 가망이 없는건 아닌데...
...설마하니 번호를 알고 있는 동성 친구가 리토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니겠지?
아무튼, 도움을 청하는 문자조차 무뚝뚝하기 그지없게 보낸걸 보면 갈길이 멀어 보였다.
그냥 내가 대신 운동복을 가져다주는게 나으려나?
리토는 지금 피곤한 상태이고, 렌은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면서도 탐탁치 않아 하니까.
라라의 충고에 우물거리면서 투덜대는 리토에게 제안했다.

"렌의 운동복이라면 내가 가져다 주도록 할께.
유우키 넌 피곤하니까 그냥 양호실로 가는게 좋을것 같아."

"...미안하지만 부탁할께 아키츠."

"괜찮으니까~"

이마를 한차례 쓸어올린 리토는 복도로 나와 양호실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리토를 보내고 나도 렌의 운동복을 가지러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렌은 몇반이지?


렌의 반은 지나가던 여학생에게 묻고서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교내 제일 미소년 렌이라면 동급생 중에선 모르는 여학생은 없으니까.
라라 일편단심인 렌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겠지만.

렌의 자리에서 옷이 든 가방을 집어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갈아입은 옷은 도로 넣어야 하니까 가방채로 들고가는게 좋겠지.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라라와 반이 달라진 이후로 렌은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사랑의 라이벌로 여기는 리토가 라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초조함도 늘어난것 같았다.
라라에게 온갖 미사여구로 구애하듯 말하는 행동도 요즘은 뜸해졌고.
어쩌다 리토와 함께 있는 라라를 볼 때면, 리토랑 다투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라라와는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하는 눈물나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것 같다.
10년 동안 줄곧 라라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던데...인생 참 각박하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탈의실에 도착했다.
어깨에 맨 가방을 한번 확인하고는 한손을 들어 손등으로 탈의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렌, 안에..."

벌컥-!

노크를 하며 말문을 연 순간 문이 안으로 열리며 누군가 내게 달려들었다.
달려든 이는 내 품에 파고들며 달라붙듯 양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왔다.

"꺄아♡ 리토~!"

"우왓!?"

남자 탈의실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에 놀라서 품안에 안겨들어온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복슬복슬해 보이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자주빛 눈동자와 정수리 부근에 더듬이마냥 튀어나온 두가닥의 머리카락.

"룬!?"

룬-엘시-쥬에리아.
특정한 계기로 성별과 인격이 바뀌는 메모루제별의 왕족, 렌-엘시-쥬에리아의 또다른 인격이자 성별.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찰싹 달라붙어 있던 룬은 고개를 들어 날보며 환하게 웃었다.

"에헤헤~ 리토...오...?"

고개를 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멈춘 룬.
품에 안긴채 멍한 표정을 짓는 룬을 내려다 보았다.

매듭이 풀려 흔들거리는 넥타이와 허리까지 흘러내린 겉옷.
양옆으로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사이로 부풀어오른 뽀얀 가슴이 계곡을 이루며 노출되어 있었다.
달라붙은 룬의 몸에서 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녀석, 브래지어 안했어!?
그러고보니 교복도 남자 교복인데...설마 학교에서 재채기로 성별이 바뀌어 버린건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굳어있던 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꺄아악!?"

퍽-!

"으악!?"

놀란 룬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떠밀었고,
룬에게 떠밀린 나는 들고있던 가방을 놓친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놓쳐버린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옷가지가 사방에 흩어졌고,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바닥의 차가움에 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팔랑~

"...응?"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고 할 때 무언가 가벼운 물체가 내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실크 재질의 천이 시야를 가렸다.
얼굴을 뒤덮은 천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코가 간지러웠다.

"아...아, 아..."

당황한채 더듬거리는 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서, 설마 이건...?
얼굴을 덮은 천을 손으로 잡았다.

"꺄아아! 이 변태야아아---!"

짜악-!




"우으으...!"

털을 세운 고양이마냥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오는 룬.
오랜만에 얼굴에 빨간 단풍잎을 새긴 나는 뺨을 살살 매만지면서 룬의 시선을 외면했다.
방금전 내 얼굴에 내려앉은 천, 요컨데 속옷을 빼앗듯이 낚아채곤 룬은 잡아먹을듯한 시선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명치 부근까지 벌어졌던 와이셔츠를 여미던 룬은,
브래지어 없이 와이셔츠를 입은게 신경쓰였는지 방금 전부터 주욱 한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대체~! 리토군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어째서 네가 온거야!?"

발을 동동 구르며 따지는 룬에게 약간 위축된채 답했다.

"리토는 피곤하다며 양호실에 갔어.
그래서 리토 대신 렌에게 운동복을 건네주려고 온거라구."

"그런..."

예상치 못한 답변에 허를 찔린듯 룬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룬은 이내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리토군에게 어필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찬스? 설마 문자를 보낸것도 렌이 아니라 룬이었던건가?
중얼거리는 룬의 말에서 대략적인 상황이 짐작해 보았다.

학교에 온 렌이 운나쁘게 재채기를 해버려서 룬으로 바뀌었다.
당장 옷을 갈아입으려던 룬은 무언가 꿍꿍이를 떠올리고는 비어있는 탈의실에 들어가 리토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마도 렌인줄 알고 옷을 가져다주려고 온 리토랑 탈의실에서 '우후후' 할 예정이었겠지.
엄청나게 적극적인 아가씨니까 아마도 냅다 리토에게 덤벼들지 않았을까?
방금전 달라붙던 룬의 행동을 보건데 거의 확실할지도.
앞뒤 잘라먹은 짤막한 문자도 룬인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려던걸테고.
굳이 '여자교복'이라고 하지 않고 '운동복'이라고 한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나름대론 리토랑 렌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온건데 어째 룬의 방해를 한 꼴이 되어버려 좀 미안했다.

"저기, 방해했다면 미안해 룬."

"...됐으니까 밖에서 기다려."

"응?"

내가 되묻자 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갈.아.입.을.거.니.까! 나가있으라구!"

"아, 알았어!"

눈썹을 추켜세우며 노려보는 룬을 피해 탈의실 밖으로 잽싸게 빠져 나왔다.
...그런데 왜 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거야?
별수없이 벽에 등을 댄채 탈의실 앞에서 룬이 갈아입길 기다렸다.
벽너머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탈의실 안에서 투덜대는 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째서 리토군은 오질 않은거야?
- 조금쯤은 라라말고 나한테 신경써줘도 좋잖아?
- 아니지, 지금 곧장 양호실로 가서 리토군의 간병을 한다면...! 리토군의 호감도 업?
- 좋아! 이걸로 가는거야!
- 그나저나 운동복 말고 그냥 여자 교복으로 갈아입을까?
- 수염이 가방채로 가져온게 다행이네. 교복도 들어있었으니까.

...룬, 너 평소엔 날 수염이라고 부르고 다니는거냐?
딱히 상관은 없지만.
룬이 리토에게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신경쓰는건 알고 있으니.
게다가 어차피 양아치니 뭐니 멋대로 부르는 녀석들도 있고.

- ...속옷은 여벌이 없네.
- 남은 속옷은 방금전 이거 하나뿐인데...별수 없나...

스르륵...

- 으... 어, 어쩐지 찝찝해... 이상한 느낌...

"......"

이럴땐 정말이지 내 귀가 밉다...
졸지에 속옷에 파렴치한 짓을 한뒤 억지로 소녀에게 입힌 변태가 된 느낌이다.
묘한 상상에 부끄러워져서 무심코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탈의실을 나온 룬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갈아입은 옷이 든 가방을 내게 들게하곤 룬은 복도를 걸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룬의 뒤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룬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방금전 갈아입은 속옷이 신경쓰이는지 룬은 가끔 치마자락과 허벅지를 매만졌다.
마음은 알겠지만 제발 그만해.
치마가 들춰지면서 자꾸만 허벅지랑 속옷이 언뜻언뜻 보여서 민망하단 말야.

"어딜 쳐다보고 있는거야?"

"...아무것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뒤돌아보며 째려보는 룬의 눈을 외면했다.
지금 긍정했다간 반대쪽 뺨에도 손바닥 자국이 생겨버리겠지.
의심스럽다는듯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룬은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열었다.

"리토군은 양호실이라고 했지?"

"응."

"그럼 난 양호실로 가볼테니까 가방은 내 자리에 놔줘."

졸지에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뭐, 이번은 룬의 방해를 한것도 있으니 얌전히 말을 듣는게 좋겠지.

"그리고..."

"?"

룬은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잠시 주변을 살피고 복도에 사람이 없는걸 확인한 룬은 내게 다가왔다.
박력있는 눈빛을 보내는 룬에 밀려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는 내 옷자락을 잡은 룬은 작게 속삭였다.

"오, 오늘일 소문내면 가만두지 않을꺼야...!"

"...안냅니다."

퍼뜨릴 리가 있나. 그랬다간 졸지에 나만 변태가 되버리잖아.
그렇잖아도 최종귀축 양아치라는 소문 때문에 한동안 좌절감에 빠져 지냈는데...
이번 일은 그냥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두는게 최선이다.
몇번씩 다짐을 받은 룬은 뒤로 나를 보곤 「흥-!」하며 콧소리를 내고 양호실로 떠나 버렸다.

...우울하다.


룬의 반으로 들어가 룬(렌)의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내 뺨을 붉게 물들인 손바닥 자국을 본 학생들의 수근대는 소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리토 대신 심부름 한번 해주는게 이렇게 정신을 피곤하게 할줄은 몰랐다.
나도 양호실에서 쉬어야 하는거 아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면 또 룬이랑 마주치게 된다고.
리토의 간병을 하고싶어 하는 룬에게 훼방꾼 취급 받는건 사절이다.
그냥 바람을 쐬면서 기분전환이나 하는게 나을까 싶어 복도를 걷는 도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라라와 마주쳤다.

"라라?"

"아, 료스케 안녕~!"

활기찬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라라에게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힘이 넘치는구나 라라는.
그 활력의 반만큼이라도 나눠받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라를 바라보다 라라의 한손에 든 유리병에 눈이 갔다.
손톱만한 크기의 약이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라라, 그건?"

"이거? 리토 주려고 가져온 약이야.
얼른 기운을 차리면 좋을텐데~"

"자양강장제 같은거야?"

"응? 그게 뭐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은 라라의 얼굴을 보고 아차싶었다.
아직 라라가 어렵거나 생소한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는걸 잊고 있었네.

"아...그러니까 '몸을 건강히 하는 약'이란 뜻이야. 피로회복제 같은거."

"응! 맞아 그런거~"

싱글벙글 웃던 라라는 문득 내 얼굴을 보곤 갸우뚱했다.

"료스케? 왠지 기운이 없어 보여.
료스케도 한알 먹어볼래?"

"...응. 고마워."

피로회복제를 먹으면 지금의 우울한 기분도 조금 나아지려나?
라라의 배려에 감사하며 건네진 알약을 받았다.
그런데 이거 물없이 먹어도 되는걸까?
...아무렴 어때. 그냥 삼키면 되겠지.
입을 열어 털어넣듯 약을 삼켰다.
어느정도 효과가 있으면 좋을텐데.
약을 먹는 내 모습을 지켜본 라라가 기대감 서린 얼굴로 물어왔다.

"어때? 힘이 나는것 같아?"

"으음...그러니까..."

-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정말로 기운이 흘러넘치는데?"

"정말? 잘됐다~"

약간 놀란듯한 내 반응에 라라는 양손을 마주하며 밝게 웃었다.
환하게 미소지은 라라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마주보는것만으로도 활기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바꾸기엔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생각 이상으로 라라가 건네준 피로회복제의 효능은 뛰어난 것 같았다.
벌써부터 온몸에 활기가 돈다고 할까?
이럴땐 약을 건네준 라라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게 맞겠지.
라라에게 지금의 느낌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할 말을 떠올려 보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뭐라고 할까...
으음... 아, 그래......



최고로 High한 기분이다...



"아파...료스케..."

"...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난 라라의 양어깨를 붙잡은채 복도 벽에 라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 라라는 괴로운듯 얕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깜짝 놀라 라라의 어깨를 놓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미, 미안! 괜찮아 라라?"

"으응, 괜찮아."

고개를 저은 라라는 어깨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갑자기 어깨를 꽉 잡길래 놀랐어."

"아...그게 말이...지...?"

"...료스케?"

말을 꺼내다말고 갑자기 입을 다문 내 모습에 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듯 나를 바라보는 라라의 모습을 마주 응시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머리카락.
짧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매끈한 허벅지.
가냘파 보이는 흰 목덜미와 초록색 리본 아래로 부풀어오른 가슴.
그리고...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향해지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

-두근

순간 가슴이 크게 울렸다.
난데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놀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갑자기 이건 무슨...?

"료스케?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

"으, 응!? 괘,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해도...으응~ 잠시만~!"

"어...?"

갑작스레 라라는 내 뒤통수에 손을 얹고 머리를 앞으로 당겼다.
가까이 다가오는 라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가운데 라라의 이마가 내 이마에 맞닿았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얼굴에 닿으며 살짝 볼을 쓸었다.

"...어디보자..."

"!?"

야...야 이 천연 아가씨야...
이성에게 이런 행동은 심장에 안좋다고!

"으응...조금 열이 있는것 같은데?"

이마를 댄채 말하는 라라의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입김이 얼굴을 뒤덮었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치아와 말랑말랑한 혀가 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입술 사이로 살짝 내밀어져 꿈틀거리는 혓바닥.

만약 맞닿으면... 부드러울 것같아...
속삭이듯 들려오는 라라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달콤해서...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눈앞의 라라에게 뻗어갔다.

"저기, 혹시 약이 잘못된거야 료스케?"

"...!"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라라의 목소리에 정신이 깨었다.
라라를 감싸안듯 내밀어지던 손을 치우곤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료스케?"

"미안!"

"아? 잠깐, 료스케?"

손을 뻗어오는 라라를 뿌리치고 황급히 달아났다.
이 이상 라라와 함께 있다간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점차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필사적으로 사고했다.

뭐야?
뭘 먹은거야 나는?
어째서 라라를 보고 이렇게 두근거리는거지?
피로회복제가 아니었던가?
대체 라라는 리토에게 뭘 주려고......!?

- 리토는 피곤해서 양호실에 갔어.

- 리토가 먹을 약이야.

- 자양강장제 같은거?

- 약이 잘못된거야 료스케?

떠, 떠올랐다!

「자양강장제」라 쓰고 「발정제」라고 읽는 약.
우주인에겐 자양강장제로 쓰이지만,
지구인이 복용할 경우, 이여자 저여자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헌팅하는 난봉꾼이 되어버리는 엉망진창인 약!
설마 라라가 미카도 선생님께 받아왔던 건가?

벌어진 입에서 자연스레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보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커진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전 라라와 함께 있을 때 생겨나던 충동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정도 반응이라면...참을 수 있어.
부작용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몰라도 어떤 효과를 가진 약인지 알았으니 대처할 방법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 대단한 방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 여자아이들을 만나지 않고 얌전히 약효과가 끝나길 기다리는게 최선일 듯 했다.
약 효과가 하루종일 간다면 차라리 하교를 하는게 나았겠지만, 기억하기로는 기껏해야 한시간 정도밖에 안되었던걸로 기억한다.
효과가 끝날 때까지 체육 창고 근처에라도 가서 쉬고 있을까?


별수 없이 수업 한시간 정도는 빠질 각오를 하고 체육 창고 쪽으로 갔다.
체육 수업중이었는지 열려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매트리스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슬슬 약효가 제대로 돌기 시작한건지 온몸엔 주체하지 못할만큼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덕분에 두근거리는 심장도 평소보다 시끄러웠지만 천천히 심장 부근을 어루만지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씩 몸이 진정해가는걸 느끼며 이대로 가만히 한숨 잘까 생각하던 차에 창고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음? 거기 누구 있나?"

운동복을 입은 포니테일의 여학생.

"...린...선배?"

"아키츠?"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린 선배가 다가왔다.
양손 가득히 공을 든 린 선배는 매트리스에 앉아 튐틀에 기대어있는 나에게 다가와 날 내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땡땡이라도 치고있는건가?
칭찬할 순 없는데."

"하하...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체육 창고에 있어야 할 사정?
뭔진 모르겠지만 기왕 만난김에 체육 비품 정리하는거나 좀 도와주면 좋겠군."

공을 내려놓은 린 선배는 날 이끌고 창고 밖에 있던 비품들을 창고로 옮기는걸 돕도록 했다.
가까워진 린 선배로 인해 다시금 커진 맥박소리를 진정시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학교 비품을 창고로 들어날랐다.
여전히 맥박은 거세게 울렸지만 처음 라라와 접했을때 보단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혹시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스스로 조심하고 있는 만큼, 달아오르던 몸도 조금은 진정한듯 했다.

"그래서? 체육창고엔 무슨 볼일이었지?"

"린 선배 말씀대로 땡땡이라고 해두죠. 틀린 말은 아니니까..."

"좀 더 성실히 지내는게 좋아. 3학년이 되면 바빠지니까 말이지."

"3학년이라...아직까진 멀게만 느껴지는데 말이죠."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1년이라는 시간은 빨리 간다고?"

"...킥..."

"왜그러나 아키츠?"

린 선배는 갑자기 키득거리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유쾌한 기분으로 손사레를 치며 린 선배에게 답했다.

"아뇨아뇨~ 그게...고등학교에 들어와선 어째선지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서 말이죠.
눈코뜰새 없이 소란스러운 나날들이 계속된다고 할까요?
매일매일이 즐거워서 시간 가는줄도 몰랐거든요."

코테가와를 만나고, 미캉과 만나고, 야미, 리토와 라라를 알게 되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다양한 일들도 겪었다.
가끔씩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유쾌한 웃음이 나오는 추억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대답할거다.

"...그런가. 그건 정말 다행이로군.
그 마음가짐을 소중히 하도록 해.
중요한 시간은 그만큼 빨리 지나가서 아쉽게 느껴지거든."

"린 선배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 있었나요?"

"글쎄...딱히 없는걸?
...아, 그러고보면 한가지 아쉬운건 있군."

"뭔데요?"

"1년 전, 네가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찾아가서 한번 겨뤄보지 못한 것."

"네에?"

무심코 심장이 벌렁 뛰었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자극을 받았는지 다시금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정해 이 바보 녀석아.

"그때야 널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을 시절이니까, 멋모르고 네게 달려들었을테지.
솔직히 말해 동네 불량배들을 쓰러뜨렸다는 네 실력을 알고 싶기도 했거든.
만약 그랬더라면 꽤나 즐거운 승부가 되었을것 같은데 말이지."

"아, 아하하..."

하마터면 고교 입학 첫날부터 배틀물을 찍을 뻔 했군...
죽도로 양아치에게 매타작하는 검도 미소녀 활극물.
장담컨데 진지함도 뭣도 없는 싸움이 되었을 거다.
아마도 죽도가 몽땅 부러지는 황당한 결말로 끝날 것 같으니까.
...개그 보정이 붙는다면 케○로처럼 하늘로 날려가 버리는 씬이 연출됐을지도 모르겠지만.
린 선배가 상식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뭐, 어쩌면 괜찮은 후배를 1년 일찍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왠지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부끄러운데요?"

툭던지듯 중얼거린 린 선배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전에도 느꼈던거지만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를 리드하는 발언을 내뱉는 린 선배다.
강하고 멋져서, 그야말로 동경의 여자 선배 이미지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사키 선배의 호위라는 인상이 강해서 그렇지, 이런 모습의 린 선배를 동경하는 학생들도 꽤나 많을거 같은데...
나중에 졸업식 때 우는 사람들도 나오는거 아냐?

"그러고보면 선배들도 내년이면 졸업이로군요."

"...그렇군."

"대학생이 되는거네요."

"그래."

"지금처럼 모두와 만나지는 못하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린 선배와 사키 선배, 아야 선배를 볼수 있을까?
코테가와의 오빠(유우)처럼 인근 대학에 진학하면 만날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처럼 매일 얼굴을 맞대긴 힘들겠지만.
하지만...

"뭐, 그래도 린 선배는 언제나 사키 선배와 함께 있을것 같지만요."

"당연하다. 나의 일족은 대대로 「텐죠인 가(家)」를 받들었으니까."

"굳이 그런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겠죠."

"응?"

"린 선배는 아야선배와 사키선배랑 함께 있을 땐 언제나 즐거워 보였는걸요?"

"...아아, 그렇고말고."

약간 감회에 젖은듯 조용히 답하며 린 선배는 미소지었다.
졸업 후에도 선배들은 함께 있을 수 있겠지.
그녀들의 우정을 부럽다고 생각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린 선배를 불렀다.

"저기, 린 선배."

"응?"

"졸업할 때 말이에요. 선배의 단추를 하나 받을 수 없을까요?"

"...단추를?"

"기념으로 한개 가지고 싶어서요.
어차피 제 졸업식 때 단추를 달라는 후배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학창시절에만 해볼 수 있는 추억이니까.
어차피 주는 입장이 못된다면 받는 입장에 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보통은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부탁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요...」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린 선배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부정적인 견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좋아. 네가 바란다면."

"정말요?"

"나중에 가서 잊어버리지나 않도록 해."

농담조로 말을 건네는 린 선배의 모습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거로군요.
졸업식 때에도 나름 괜찮은 추억거리가 생기게 된지라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덜컹-

"음?"
"어라?"

갑작스레 들려온 금속음과 함께 주위가 어둑해졌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닫혀버린 창고문이 보였다.
...누군가 문을 잠궜어!?

린 선배와 함께 창고문에 다가서서 문을 당겨보았다.
덜커덕 거리는 소리만 들릴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졸지에 갇혀버렸네...이걸 어떻게 하지?
린 선배쪽을 바라보고 물었다.

"안 열리는데...그냥 문을 부술까요?"

"진정해. 어차피 다음 체육 수업때 문이 열릴거다.
괜히 학교 기물을 파손하지 말도록.
어차피 너도 땡땡이 치고 있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어른스러운 린 선배의 반응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창고문에서 물러섰다.
린 선배는 창고안에 놓인 매트리스 중 하나를 골라서 그 위에 조용히 앉았다.
차분한 린 선배의 모습에 나도 침착해져서 린선배 근처의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았다.

옅은 어둠이 깔린 체육 창고 안은 고요했다.
창고위로 난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만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었다.
희미한 숨소리 만이 들리는 가운데 린 선배쪽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가슴에 대고 앉은 린 선배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린 선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별거 아니야.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니까."

"고민이 있다면 말씀해보세요.
듣는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에헴~하며 가슴을 두드리는 날 보며 린 선배는 피식 웃었다.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던 린 선배는 조금 주저하듯 말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오니까 떠오른거지만...깊게 생각하진 않도록 해."

"네."

"넌...주술을 믿나?"

"주술요?"

"그러니까...여자아이들의 심심풀이 놀이로 쓰는 것 말이다."

아...분신사바 같은거 말이로군.
그런데 갑자기 주술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지?

"혹시... 선배는 지금 이 상황에 처한게 뭔가의 주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래."

내 물음에 답한 린 선배는 말을 꺼낸걸 후회하는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미안하군. 바보같은 물음이었어.
그런 미신 따위...믿을 가치도 없는데."

"믿어요."

"...뭐?"

"믿고 있다구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린 선배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날 놀리려는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잖아?"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린 선배는 날 응시했다.
그렇게 바라봐도 내 대답은 변함없다.

"우주인들도 만났는데 미신이라고 못믿을것도 없잖아요?
예전엔 믿지 않았지만...지금은 믿을 수 있어요."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도.
현실감이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누군가의 영혼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에 불과하던 내가, 하나의 온전한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기적.
이만큼으로도 내게 주어진 기적은 넘치도록 충분하니까.

"...그런가."

진지하게 답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린 선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믿고 있는거로군.
장난같은 미신이나 운명론 따위도."

"운명은 현실로써 받아들이는거죠.
뒤는 어찌되었든 밝고 즐거운 일만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좋은 말이군. 네가 떠올린건가?"

"아뇨. 여자를 밝히지만 중요한 순간엔 멋졌던 어느 고교생이요."

기억속에 남아있던 게임속의 주인공의 대사.
선부학원의 타○로우라면 꽤나 유명한 녀석으로 기억한다.
뭐, 명대사보단 「불○ 마를 날이 없는 녀석」,「색한이 옷을 입었다」로 더 유명한 녀석이지만, 필요한 순간엔 정말로 반할만큼 멋진 녀석이었지.

"...그건 너 아닌가?"

"...실례지만 묻는건데, 그건 여자를 밝힌다는 점 말인가요, 아니면 멋진 녀석이라는 점 말인가요?"

"그거야 네가 판단할 일이지."

"그럼...후자로 알아들을께요."

"호오?"

재밌다는듯 묘한 웃음을 짓는 린 선배에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린 선배가 말해주셨잖아요. 그렇게 주눅들어 있지 말라고.
적어도 린 선배 앞에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이죠."

"내 앞에선 말인가?
...이거참, 후배 하난 잘뒀군."

약간 쑥스러운듯 웃는 린 선배를 마주보며 나도 덩달아 웃었다.
부끄러움으로 조금 내 볼이 발개졌지만.
웃음을 멈춘 린 선배는 뭔가 결심한듯 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뒤돌아 서다오."

"...? 그러죠."

약간 붉어진 린 선배의 말대로 린 선배와 마주보던 자세를 고쳐 뒤돌아 앉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돼?"

내게 주의를 준 린 선배는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린 선배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린 선배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해주?
방금전 주술을 푸는 방법인가?

세번의 중얼거림이 끝난 뒤 창고엔 다시 정적이 방문했다.
주문을 외운 뒤, 한동안 침묵하던 린 선배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참 바보같군... 그렇게 수월히 일이 풀릴 리가 없는데..."

"선배? 실패한건가요?"

"자, 잠깐! 아직 돌아서면...!"

"......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것은 새하얀 살결.
상의를 전부 벗은채 서있는 린 선배의 모습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옴폭하게 패인 배꼽.
도톰하게 부풀어오른 가슴.
건강미 넘치는 매끄러운 살결.
운동한 뒤 땀으로 젖은 피부에서 후끈하게 느껴지는 열기...
사그라들었던 열기가 차오르며 다시금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한다.

얼굴이 빨개진 채 황급히 가슴을 가리는 린 선배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키츠?"

가까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당황하며 린 선배는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 아키츠...!
이건 피치못할 이유로..."

"......"

말없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린 선배는 초조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보다 난 아직 그럴 생각이...꺅?!"

뒷걸음질치던 린 선배는 매트리스에 발이 걸려 매트리스 위로 넘어졌다.

"으윽...!?"

넘어진 린 선배의 위에 올라타 그대로 린 선배의 양 어깨를 내리눌렀다.

"큿...! 아, 아키츠?"

몸부림치면서 내게서 벗어나려는 린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소용없어요 선배. 힘으로 날 밀쳐낼 순 없으니까.
헛된 저항일 뿐이라구요.
그러니까...

"아키츠? 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린 선배의 떨리는 눈동자를 응시한다.
아마도 지금 내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겠지.
멋대로 날뛰며 미칠듯이 타오르는 심장도.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듯 끊임없이 경련하는 근육도.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 거칠어진 숨결을 린 선배에게 토해낸다.

"...흐..."

"...그런가."

저항하던 린 선배의 움직임이 멈췄다.
당황하던 린 선배의 얼굴이 점점 침착하게 바뀌었다.
린 선배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내 얼굴을 만지려는듯 손을 뻗던 린 선배의 움직임이 멎었다.
어깨를 잡힌 상황에서 그런 움직임은 무리라구요 린 선배.
살짝 인상을 찌푸린 린 선배는 어깨를 거머쥐고 있는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키츠..."

"...후욱..."

뜨거운 숨이 폐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다.

"말했었지? 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만은 널 믿어주겠다고..."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날뛰는 심장의 박동과 린 선배의 조용한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귓가에 울렸다.

"하...악..."

"지금에 와서 말하기엔 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런 녀석이 아니란걸, 아직도 믿고 있다."

린 선배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점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 곧은 눈동자.

   그때?

멋진 눈이다.
너무도 올곧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는 눈동자.

            그때가 언제였지?

몸속에서 지칠줄 모르는 기세로 순환하는 더운 피에 갈증이 인다.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지며 린 선배의 얼굴을 응시한다.

      양호실에 사키 선배를 데려다 준 날이었나?

운동으로 배어나온 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문득...목이 말랐다.

   선배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준 날이었나?

조금씩 고개가 숙여지며 린 선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환풍구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창고를 비췄다.
바닥에 쓰러져 어깨를 붙잡힌채 나를 올려다 보는 린 선배의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날 선배가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주눅이 들지 말라고...
...뭐야... 방금전에도 내가 말했던 대사잖아...?

"크...하..."

"...만약, 내가 틀렸다면...결국 그건 내 탓이겠지..."

천천히 린 선배의 눈이 감겼다.
내 손을 잡은 린 선배의 손도 스르르 치워졌다.

"아..."

손가를 감싸주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며 추위가 느껴졌다.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창고는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가운데 어느샌가 찾아온 침묵이 무섭다.

어지러움 속에 구토감이 엄습하며 시야가 흐려져간다.

뚝...

"...?"

볼위로 튀어오른 물방울에 린 선배의 눈이 열렸다.
의아해하며 눈을 뜬 린 선배의 얼굴이 점차 변해갔다.

"아...우..."

"아, 아키츠?"

방금전까지 침착하던 린 선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번져버린 눈물 너머로 삐뚤어져 보이는 린 선배의 얼굴이 우스꽝스럽다.

"괘, 괜찮은거냐 아키츠?"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가요.
깔려 넘어진 선배가 위에서 억눌러오던 날 걱정하다니 희극이 따로 없다.
린 선배를 속박하던 손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서 뒤로 물러났다.

"...죄송해요 린 선배."

"아키츠?"

우드득-!

그대로 체육 창고 문을 뜯어버리고 창고를 뛰쳐나왔다.
뒤에서 린 선배가 뭐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성난 기세로 뛰는 심장 소리가 한가득 머리를 울리고 있었으니까.
체육 창고를 벗어나 곧장 구교사를 향했다.
최근엔 오시즈도 학교를 배회하느라 구교사엔 없으니.
지금은 낡은 책장들만이 남아있는 구교사의 도서실로 들어갔다.
현재의 도서실로 책을 전부 옮기면서 한적해진 구교사의 도서실은 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구교과서 몇권만이 흩어져 있는 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뭐라고 할까...역시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발○제」약발이 지나치겠지!?
리토가 먹었을 땐 끽해야 뽀샤시한 미화 효과에다가 버터 바른것처럼 느끼한 대사만 날리는 정도의 효능이었다고!
근데 지금 내 상태는 대체 뭐야?
방금 전 린 선배랑은 말그대로 덮치기 일보직전의 수준까지 갈뻔 했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리토나 나나 같은 지구인인데 피로회복제의 부작용이 이렇게까지 다른 이유는 대체 뭐냐고...!

보는 사람도 없겠다 식-식- 새어나가는 숨을 다스릴 생각은 애초에 포기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래봤자 답이 안나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러고보면 리토도 하루나에게 「너의 몸을 나에게 줘!」라고 말하기 직전에 약효가 끝났던가...?
허허...이거 정말 위험한 약일세...

마음같아선 미카도 선생님께 상태를 보이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 미카도 선생님께 갔다간 미카도 선생님에게마저 몹쓸 짓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미카도 선생님이 약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더라면, 애초에 리토나 라라에게 우주인용 피로회복제를 건네주진 않았을테니까.
야미나 다른 우주인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천재는 확실히 천잰데...지구인의 증상에 대한 대처는 잘못 받았다간 사단이 날지도 모르니 조심하자...

생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뜀박질치는 심장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주체하지 못하고 빨라지는 두근거림에 점차 감정이 고양된다.

뜨거워...

온몸을 가득 채울듯 치밀어오르는 격한 감정에 현기증이 날것 같았다.

외딴 곳에서 혼자 궁상떠는 상황이 서글퍼서 홧김에 옆에 있는 책장을 움켜쥐었다가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모양을 따라 뜯겨져 나간 나무조각을 보곤 침묵해버렸다.

...이 상태로 여자애를 건드렸다간 어디 뼈라도 하나 부러지겠군...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고생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빙의령이 씌였을 때도 내 의지대로 몸을 조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는것 만으로도 벅찼다.
이건 뭐, 여성을 만나면 설득이고 뭐고 없이 일단 찍어누르고 볼 기세로구먼...

몸에선 끊임없이 활력이 넘치고 있었지만 반대로 정신적으론 자꾸만 지쳐가고 있었다.
제발 좀 진정해라 이 바보 같은 육체야...
약효...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요동치는 심장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에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음에 린 선배를 만나면...사과하자...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고 알몸을 봐버린데다가 선배를 실망시켜 버렸으니까.
라라에게도 사과해야 하려나...
리토에게 줄 약을 호의로 나눠주었다가 봉변을 당할 뻔 했으니...
우주인용 약이란걸 예상했더라면 라라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할 수 있었을텐데.
어깨...많이 아팠을까?
룬에겐 미안한 일을 했군...
리토에 전적으로 목매는 아가씨에게 훼방을 놓아버렸으니.
그래도 지금쯤이면 리토랑 함께 양호실에서 우후후-하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려나?

열이 올라 여러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가운데 점차 의식이 침잠해간다.
사고가 흐릿한 가운데도 심장의 고동은 진정할 줄 모르고 거세게 뛰었다.
과연 우주인의 약은 대단하네...
발○제를 참는데도 이렇게 고생이라니 아하하...
......하아아~~~
나한텐 그럴싸한 대사 하나 떠오르지 않는데.
정말이지...쓸모없는 약이로구나...

이대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약효가 끝나 있을까?
혹시나 무의식중에 몽유병처럼 멋대로 날뛰는건 아닐까?
가물가물한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는 가운데, 시야 너머로 언뜻 금빛 물체가 보인 것 같았다.

"...아키츠 료스케?"

착각이 아니었나보다.
의식이 각성해가며 시야가 되돌아온다.
검은 구두가 바닥을 밟으면서 또각또각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무릎까지 내려온 긴 금발이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인물을 주시한다.

"......야미?"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 겁니까?"

"야미야 말로 어째서 이곳에 온거야?"

"닥터 미카도에게 진료를 받고난 뒤에, 인공육체에 대한 용건으로 오시즈를 찾고 있었습니다."

"오시즈라면...요즘엔 이곳보단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을텐데."

"그렇습니까...복도를 돌아다녀봤지만 안보였는데, 엇갈렸나보군요."

"뭐어...벽을 통과해가면서 다니니까 자칫하면 찾기 힘들지도."

또각거리는 소리가 그치고 어느새 야미는 내 앞까지 다가왔다.
책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야미가 물었다.

"...아키츠 료스케? 괜찮은건가요?"

"아아...괜찮아. 그냥 땡땡이 치고 있는것 뿐이라구."

주저앉아있는 나를 이상한듯 쳐다보는 야미의 모습에 슬쩍 미소지었다.
야미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높아지는 심박수를 인식하곤 속으론 진땀을 뺐지만.

"학교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별에서는 학력이 아주 중요하잖아요?"

"곧 들어갈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뭐. 당신이라면 알아서 하겠죠.
그것보다...조금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위험해.
눈앞에 선 야미와 마주한 이후로 안그래도 요동치던 심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대화를 계속하는건 좋지 않은데...

"방금전 유우키 리토와 만나고 왔습니다."

...리토를? 설마 「발○제」를 먹은 상태로 만난건 아니겠지?

"룬-엘시-쥬에리아를 울려버린것 같더군요."

"......뭐?"

- 리토군 바보바보!
- 뭐가 모든 여성의 마음을 듣는게 사명이란거야!

"이여자 저여자 가리지 않고 설득하려는걸 말리던 그녀를 피해 달아나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참다못한 룬은 복도에서 펑펑 울어버렸다고 한다.
...일났네.

"뭐, 그녀도 지금은 화가 풀렸는지 유우키 리토를 양호실로 데리고 가서 간호하고 있다더군요."

"아...하하..."

사랑하는 아가씨는 슬픔에 굴하지 않는 법이로군요.
그런 소릴 듣고도 꿋꿋한 룬의 태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리토가 양호실 신세를 지도록 만든 원흉은 분명 야미겠지.
아마 야미에게도 작업을 걸다가 징계를 받은걸까?
애도.

"아무튼, 유우키 리토와 대화를 하면서 신경쓰이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유우키 리토는 제가 외로움을 탄다고 하더군요."

- 나는 말이지. 단지 홀로 지구에 와서 외로워하는 너를 내버려 둘 수 없단말야.

...그런 말을 했던가 리토는?

정말로 야미가 외로워 하고 있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리토의 말을 들은 뒤의 야미는 왠지 평소보다 좀더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약에 취해서 튀어나온 대사를 가지고 야미도 그렇게 신경쓰진 않아도 될텐데...

"유우키 리토의 말을 들은 이후로 조금...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싸움말고 살아갈 길을 모르던 과거의 제 모습을...
그래서 자문했습니다.
여긴...정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라고."

말끝을 흐린 야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해주길 기다리는건가?
...그러고보면 물어볼게 있다고 했었지.
설마 방금 말에 대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거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터라 적절하게 말을 꾸며내긴 어려운데...
어쩔까 생각하다 선인들의 말중에 지금 상황에 쓰일법한 대사를 인용하기로 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오늘은 선물.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선물(Present:현재)이라고 부른다.

가만히 날 바라보는 야미에게 웃어주었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이지.

흘러간 과거는 바꿀 수 없기에 역사이고,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신비롭지.
유일하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현재야 말로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거지.

뭐, 워낙 여러곳에 쓰이다 보니까 원래 의도랑 다를지도 모르지만...난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어."

"선물...입니까."

"그래. 과거를 부정하라고 하진 않겠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진 말아줘.
너를 결정짓는 건 예전에 네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해나가는가에 달렸으니까."

"......"

조금 숨을 돌리려고 책장에 슬쩍 등을 기대는 내 모습을 야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형성하기도 했고, 나로선 나름대로 좋아하는 말이었기에 해준건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걸로 야미를 설득할수 있으려나 몰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야미를 납득시킬 만큼 공감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은 못하겠고.
이런거 말고 좀더 직접적인 경험 같은건 없으려나?

욱신거리는 몸을 가누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그러고보면 있잖아! 야미가 지구에 머무르게 된 계기가!
옳다구나 싶어서 냉큼 조용히 서있는 야미에게 말을 건다.
물론 표정은 엄청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실제로 흘러간 시간은 짧았기에, 방금전 대화에 이어 자연스럽게 다음 말이 연결되었다.

"무엇보다도...애초에 넌 이미 답을 내리고 내게 물어온거잖아?"

"네?"

어리둥절한 야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걸 참으며 표정을 바로했다.
진지한 시선으로 야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라라와의 대화, 기억해?"

"...예."

- 귀하게 자란 공주님인 당신은...나의 괴로움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이 우주를 오직 나 홀로 살아가는 괴로움을 이해하십니까...?

- 그러네...그 말대로 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 왕궁 바깥 세상을 보러 온거야!
내가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까!

"그때 넌 처음으로 과거에서 벗어날 용기를 얻은게 아니었어?"

야미가 유독 라라를 따랐던 이유.
그리고 리토의 암살 의뢰가 취소된 이후에도 지구에 남았던 이유.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라라에게 끌리면서 야미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던게 아닐까?
라라에게 다가가면서 조금씩 주변의 사람들을 알게되고 그렇게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날들.
야미가 과거를 극복하고 한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건,
적대해오던 야미조차 포용하려던 라라의 밝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중요한건 그때 대사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고 야미가 받아들이면 되는거다.
야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그렇게 믿게 만들면 되는거지.
불량배들 상대로 말도 안되는 허풍 쳐본게 어디 한두번인가.
이번에도 뻥을 친게 들킨다면 남은 수염도 잘려나갈지 모르지만, 야미가 휑하니 우주로 떠나버리는 결말보다는 백배낫지.
그러니까 자, 와라! 의심암귀가 됐든, 자학모드가 됐든 모조리 받아쳐주마!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던 야미는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물음을 한거였네요."

"아...? 하하...그렇지? 답이 정해진 질문만큼 따분한건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라라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도 많이 알게되었잖아?
코테가와나 미캉, 사이렌지, 모미오카, 사와다, 오시즈 같은 친구들 말야."

긴장한 내가 바보같을 정도로 무난히 설득되어 버렸다.
...아니, 정말로 라라의 말이 야미에게 그만큼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일지도.
어지럽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벌써 가을인데도 덥네...
아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건가?
열을 식힌답시고 고개를 젓던중 바닥에 널부러진 과학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지구의 자전축은 약 23.5도 기울어져 계절의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가을인데 이렇게 더운건가.
기울어진 자전축 때문에 내 몸도 따라서 옆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고.

...사고가 엉망이다...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걸 알수 있을만큼 얼굴이 후끈거렸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날 보던 야미가 갸우뚱하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어쩐지 얼굴이 붉습니다만..."

"괜...찮아."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무슨 말을 하는겁니까?"

턱을 가슴에 붙인채 대답하는 내 모습에 야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대로 내게 가까워진 야미는 몸을 숙인채 손을 내밀어 내 이마를 짚었다.

야미의 손이 닿은 순간, 급격하게 심장의 박동이 커졌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일어서며 야미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야말로 심장이 터질듯이 난동을 부리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것 같았다.

...미칠것만 같아...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자...
차분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거다.
숨을 고르기 위해 가슴에 붙였던 턱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야미의 숙여진 몸이 있었다.
발목까지 가린 검정색 구두.
흑색 밸트가 장식된 탐스러워 보이는 매끈한 허벅지.
몸을 숙이면서 아슬아슬하게 허벅지에 걸쳐진 짧은 치마 사이로 언듯 하얀 속옷이 보인것 같았다.
작게 부풀어오른 아담한 가슴.
새하얀 얼굴과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고양이 귀 같은 악세서리. 흔들리는 금발과 진홍색 눈동자.
두근거리는 심장때문에 야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뻗어진 팔 너머로 야미의 매끈한 겨드랑이가 눈을 사로잡았다.

...특이한 취향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말이지...

야미의 신체 하나하나가 망막에 새겨지면서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자꾸만 시선에 주의가 가는지라 심호흡 하는것도 잊어버렸네.
...차라리 소수를 세는게 나았으려나?
눈을 떼지 못하고 야미를 바라보던 중, 야미의 손이 치워졌다.
내 이마에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선 야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서, 설마 이상한 시선을 보낸걸 들켰나?

"거짓말을...열이 나고 있잖습니까?
어서 닥터 미카도에게 가보는게 좋겠군요."

"그건... 좀 곤란한데..."

난처한 미소를 띄운 내 모습에 야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겁니까?"

"그게...실수로 우주인용 약을 복용해서 말이지.
아까부터 이성을 보면 자꾸만 심장이 멋대로 날뛰어서 말야.
가슴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게... 도무지 진정이 안되더군."

우주인용 약을 지구인이 먹었을 때의 부작용 같은건 미카도 선생님도 잘 모르니까, 괜히 갔다간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런 곳에 혼자있었던 겁니까?"

"그래. 그대로 학교에 있다간 내가 버티지 못할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렇게 야미 너와 가까이 마주보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곳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고."

"이상한 곳?"

의아한 얼굴의 야미에게 솔직히 대답해줬다.

"입술이라든지, 가슴이라든지, 허벅지라든지......겨드랑이라든지."

"...변태는 질색입니다."

"하하... 그래...그렇겠지."

"......"

야미에게 한차례 웃어주곤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가봐...
슬슬 참는 것도 힘들다구."

이젠 아예 온몸이 심장이 되어버린듯 거칠게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다.
이거 잘못하다간 하루종일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거 아냐?
귀를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야미가 다시 한번 물어왔다.

"그럼 당신은 계속 여기 있을 예정입니까?"

"몸 상태가 호전될때 까지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까?"

"그래. 시간이 지나면 약효도 사라질테니.
그냥 여기서 물러나주는게 돕는거라구.
미안하지만 배웅은 못해주니 이해해줘."

안그래도 몸 전체가 날뛰고 싶어 근질근질한 지경인데,
지금 배웅하려고 일어섰다간 그대로 야미를 덮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있는게 그나마 몸을 다스리는데는 제일 나아 보였다.

"...배웅 같은건 필요없습니다."

또각-하고 내딛어진 구두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려왔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어째서입니까?"

알면서 묻는거지 야미?
답이 정해진 질문만큼 지루한건 없다고 아까 얘기했잖아.

"가까이 오면...널 상처입힐지도 몰라..."

이제는 솟아오르는 감정이 성욕인지 가학욕구인지 모를정도로 사고가 거칠어져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야미와 접한다면 지금의 충동을 돌이킬 수 없을지 몰라 두렵다.
야미의 구두가 발치에 놓였다.
내 몸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멈춰선 야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감정한 어조로 야미가 말을 이었다.

"전 킬러입니다."

"...!?"

"과거를 부정할 생각 따윈 없습니다.
그간 수많은 의뢰를 받았고 결국엔 전설이라는 과분한 칭호도 받았습니다."

"야미...!「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다가와도 쉽게 다치지 않습니다."

야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마주보았다.

"전...강합니다."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한 야미는 어느덧 평소의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보다,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다면 외롭지 않습니까."

"아...아하하~!"

웃음이 북받쳐 온다.
그래도 아직까진 야미가 가장 외로움을 탈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쪽이 야미의 배려를 받게 될 줄이야.

"응... 정말로 그래. 아플때 곁에 누군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덕분에... 지금은 외롭지 않아."

기분좋은 간지러움이 가슴을 채운다.
두근대는 심장은 여전히 지칠줄 모르고 사나운 기세로 뛰고 있었지만
열기로 달아오른 몸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져서 유쾌한 웃음이 나왔다.

야미의 배려가 기뻐서 조금 더 이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다시 한번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날 물끄러미 보며 서있던 야미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뭔가 바라는 건 없습니까?"

"바라는 거?"

"기왕 이렇게 된거, 저번에 닥터 미카도의 진료실로 절 옮겨 준 보답이라도 할겸 해서 말입니다.
뭔가 도와줄 일은 없습니까?"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야한 짓은 싫습니다!"

퍼억-!

"으갹~!"

야미의 머리카락 펀치가 명치에 명중했다.
급소에 전해지는 회심의 충격.
오호...이 펀치라면 세계를 노릴 수 있겠구나.
격투 만화씬이 아니지만.
한심한 비명을 지른 내게서 머리카락을 거둔 야미는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조금 전의 진지함은 어디로 간겁니까?"

"아니 뭐랄까...슬슬 몸이 달아올라서 분위기라도 바꿀겸..."

"...후우..."

한숨을 내쉰 야미는 몸을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대로 가만히 계십시오."

가까이 온 야미는 내쪽으로 등을 향한채 내 다리 사이에 주저 앉았다.

"엣... 야미?"

"진정하시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어벙벙한 나에 비해서 야미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저라고 해도 몸이 닿는 정도로 당황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내 가슴에 등을 기대며 앉은 야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가슴을 만진다거나 하는 짓은 꿈도 꾸지 마시죠."

...농담이었는데 그건...
정색하며 딱잘라 말하는 야미에게 굳이 반박하고 싶진 않았다.
주저앉은 야미의 몸 주위로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넓게 퍼졌다.
슬쩍 팔을 들자 풍성한 야미의 금빛 머리칼이 손등을 타고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손등을 스치는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에 두근대는 심장이 더 빨라진것 같았다.
내게 등을 기댄 야미의 체향이 후각을 자극하며 마비될것같은 달콤함이 뇌리에 파고 들었다.
조금 주저하다가 살며시 팔을 벌려 뒤에서 야미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상한 곳을 만지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황송하옵니다 작은 공주님~ 윽!?"

야미의 손가락이 볼을 꼬집었다.

"에고...그냥 장난인데..."

"분위기 타서 멋대로 굴지 마시죠."

뒤돌아 보며 톡쏘듯 말한 야미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팔안에 담긴 야미의 몸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온다.
계절은 가을. 식욕도 왕성하고 더불어 잠자기에 딱 좋은 시기다.
조금 졸음이 몰려오는걸 느끼곤 야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말야...만약, 이대로 잠들면 어떻게 되는걸까?
몽유병처럼 난리치지나 않을지 좀 걱정인데..."

"걱정하지 마시길. 혹시나 색골로 변해 날뛴다면 그땐 구교사째로 날려버려 드리죠.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전혀 안심이 안되는데요!?"

정말이지 상식을 모르는 우주인 소녀다...
되도록이면 평화적인 해결을 원합니다 야미씨.


도서실 창문 너머로 학교의 벨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울려퍼지는 벨소리가 어쩐지 자장가 같다.
품안에 있던 야미는 주위에 널린 책을 머리카락으로 집어들곤 읽고 있었다.
정말이지 책을 좋아하는구나 야미는...
달아오른 몸과 반대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차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지 편안해진 것 같아."

"...그러고보면, 아기는 엄마의 심장소리에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난 아이는 아니지만.

등을 기댄 야미에게서 심장의 고동이 몸을 타고 전해져온다.
규칙적으로 울려오는 박동에 마음이 안정되며,
야미의 심장 소리에 맞춰 내 가슴의 박동도 차츰차츰 진정되어 갔다.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비친 금빛 머리카락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응...야미는 좋은 엄마가 될거야..."

"......편히 쉬시길..."

조용한 야미의 목소리가 어루만지듯 귓가를 맴돌았다.
품안에 느껴지는 기분좋은 온기와 두근대는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몰려오는 노곤함 속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깨어났을 땐 양호실의 침대 안이었다.

잠에 빠진 나를 야미가 안고 양호실로 데려온 것 같았다.
야미에게 대강 사정을 전해들은 미카도 선생님은 곤란한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주인용 자양강장제가 지구인에게 그런 부작용이 있을줄은 몰랐어.
이건 더이상 학생들에게 주면 안되겠네..."

자양강장제가 든 유리병을 한 손에 들고 미카도 선생님은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미카도 선생님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왜 그러니 아키츠군?"

"아, 아뇨. 아무것도..."

빤히 바라보는 날 눈치채고 의아해하는 미카도 선생님께 고개를 젓곤 일어섰다.

"그럼 몸도 괜찮아졌으니 전 이만 교실로 돌아갈께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렴~"

손을 흔드는 미카도 선생님께 인사하고 양호실을 빠져나왔다.

교실로 돌아가면서 방금전 양호실에서 본 「자양강장제」의 생김새를 떠올려 보았다.
어두운 색을 띈 구슬 크기만한 환약.
...내가 먹은 약이랑 다르게 생겼잖아?
내가 먹은건 밝은 색을 띄고 손톱만한 크기의 환약이었는데...
입안에 넣으면서 우연히 본 거지만, 스마일 마크 마냥 얼굴 그림이 약에 그려져 있던것 같기도 하고.

그럼...내가 먹었던건 대체 뭐였던거지?




방과후, 뒤뜰에서 린 선배를 만났다.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

"아, 아키츠?"

"파렴치한 짓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아아아아---!"

"자, 잠깐! 갑자기 무슨...?"

거두절미하고 냅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죄부터 했다.
린 선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과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 있었던 해프닝의 원인을 알게 되자, 말그대로 땅을 파고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니까.


교실로 돌아가 쉬는시간에 라라에게 물어서 내가 복용한 약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버서커DX」

한알로 원기 1000배가 된다는 데빌루크 전사의 비약이다.

먹으면 활기가 넘치게 된다는 라라의 말을 나 나름대로 적절하게 이해한 결과,
일단 복용하고 나면 엄청나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즉, 내가 느꼈던 두근거림은 극대화된 투쟁심으로 인한 거였다.

투쟁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태에서 이성을 접했기에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해버린 것.
흔들다리 효과군요. 압니다.
게다가 만난 사람들마다 다들 한 실력하는 여성들이다 보니까 고취된 투쟁심이 장난 아니었겠지.
린 선배보다 라라와 야미에게 더 두근 거렸던 이유도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린 선배 보다는 라라와 야미가 훨씬 더 강하니까.

죽고 싶다...
그걸 난 사랑의 열병같은거라고 착각해서는...!
여자애들한테 손을 대려고 하던 행동도 「발○제」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것도 전부다 내 탓이었잖아!?
투쟁심을 성욕으로 착각하다니 대체 어디의 바보자식이냐!?

라라의 설명을 들은 뒤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 하다가 친구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 당했다.
머리 아픈 아이를 보는 듯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친구들의 시선에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올랐다.


그리고...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지금 이렇게 린 선배에게도 사과하고 있는거고.
말 그대로 이마로 땅을 파는 내 모습에 린 선배는 어쩔줄 몰라 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면서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느라 린 선배는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창고에서의 일로 린 선배는 화나 있지 않았다.
가슴을 보였던것 때문에 얼굴이 꽤 붉어져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들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선배를 앞에 두고 「선배랑 주먹다짐 하고 싶은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건 정말 염치가 없었고...
끙끙 머리를 굴리다가 「선배의 모습에 두근거리는걸 참지못해 그만 실수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배를 놀린다고 한대 맞았다.

틀린말은 아니었는데...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빨개진 얼굴로 주먹을 휘두르는 린 선배는 귀여웠다.

그래도 노산승룡패는 너무 하지 않습니까 선배...

아래턱을 맞고 수직으로 떠오르며 쓸데없는 감상을 안는 나였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깊고 푸르러 이대로 하늘로 빠져들것만 같았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활기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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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 되기 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좀 늦었네요-_-;

소재 자체는 2월에 생각했던건데 참...-_-a
(살 붙인건 6월이지만)
암튼, 갈길이 멀군요^^;

「버서커DX」는 1학년 때 등장한 약입니다.
알약 형태로 1번, 스프레이 형태로 1번 나왔었죠.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려나요?=ㅅ=?)

효과는 료스케의 설명대로입니다.
원작에서 팽귄이 먹었을땐 폭주한채 하늘을 날았지요.
실험쥐가 먹었을땐 유리상자를 부수고 학생들을 공격하며 날뛰었고.
약 이름 그대로 광전사 효과가 있습니다.
료스케가 먹은건 원작에서 리토가 먹었던「자양강장제」가 아니었던거죠.

이상, 광전사 버프 상태로 전개된 료스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 덤으로 마지막 씬은 공중에 떠오르면서 본 장면.


p.s. 참고 이미지

룬1

룬2

라라(버서커DX편)

쿠죠 린

힘세고 강한 야미

버서커DX

자양강장제 복용시

노산승룡패



p.s2. 트러블 쓴다고 백미 밀린것 생각하면 좀 난감=_=a;
백미 완결은 트러블 완결되고 난 다음이려나요...--;;;
(소재는 쌓이고 있으니 백미도 완결까지 가겠지만)
구상해둔 파랜드 택틱스 팬픽은 백미 연재할 때나 쓸수 있으려나?=ㅂ=;;;


p.s3. 린과의 대화 후반 파트에서 띄어쓰기 했던것... 몽땅 취소 되어 있었더군요-_-;;;
수정했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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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흠흠~♪"

가방을 챙겨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교한다.
오늘따라 몸에서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이 그야말로 컨디션 최상!

무엇을 숨기랴?
오늘이 바로 인기 만화가 유우키 사이바이 선생님(37)의 만화 「영웅학원」의 신간이 나오는 날이다.
피가 끓는 것처럼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영웅학원」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후로, 언제나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발행된 최신본.
하교시간을 이렇게까지 애타게 기다렸던 날은 오랜만이었다.

슬쩍 지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자금은 만전. 문제가 될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절대로 산다.
두권 산다! 감상용과 소장용으로 각각 한권씩!
기다려라 신간아~ 내가 간다!

"후...후후후..."

기쁨으로 자연스레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중에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봐...아키츠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어.」
「어딘가에서 순진한 여자애라도 꼬신걸까?」
「뭔가 못된 꿍꿍이라도 떠오른 걸지도 몰라. 왜, 최근엔 야쿠자마저도 울렸다고 하잖아?」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과장이 심했다 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깡패라도 잡은거 아냐?」

깡패가 아니고 우주 마피아였습니다만...
지나가는 학생들의 오해섞인 수근거림에 귀가 간지러워진지라 한차례 헛기침을 하곤 잽싸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하교길을 벗어나 도착한 상점가는 쇼핑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점가 한편에 「本」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서점으로 들어가 신간코너를 살펴 보았다.

영웅학원, 영웅학원...있다!

다행히도 신간코너 한쪽에 꽂혀있는 「영웅학원」신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학교 수업 때문에 늦게 서점에 와서 그런지, 남아 있는 신간은 한권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머지 한권을 더 사려면 다른 서점에도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한권이라도 건진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달래며 「영웅학원」으로 손을 뻗었다.
약간 아쉬움을 품은 채 「영웅학원」의 커버에 손을 올렸을 때, 누군가의 손이 내 위로 겹쳤다.

덥썩-

"응?"

"에?"

내 손등에 올려진 희고 가는 손가락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손가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 저...? 호, 혹시..."

마주한 사람은 틀어올린 머리에 둥근 무테 안경을 쓴,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는 여성이었다.
안경의 여성은 왠지 당황한듯 내 얼굴을 보며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이 사람은...

"...하루코 선생님?"

"사이바이 선생님?"

그래. 미캉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인 닛타 하루코 선생님이다.
어려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순진한 성격이라 거짓말에 약한 분이다.
그리고 하루코 선생님의 말처럼 내 이름은 사이바이...가 아니잖아!

하루코 선생님, 설마 날 사이바이씨로 착각하고 있어?
가발을 쓰고 사이바이씨 역할을 했을때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가!?
무심코 하루코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른 내 행동에 하루코 선생님은 「역시...!」라며 눈을 빛냈다.

양손을 맞잡고 순진하게 눈을 빛내는 하루코 선생님은 설레일만큼 귀여웠지만,
이상하리만치 쉴새없이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으로 내등은 조금씩 축축해져 갔다.

"학생복 차림이라 설마했는데...
정말로 사이바이 선생님이셨다니...!"

"에? 아...아하하~ 그, 그게 말이죠..."

어쩌지?어쩌지?
이미 늦은것 같지만 모르는척 하루코 선생님을 회피할까?
아니면 이대로 오해를 유지하곤 재빨리 여기를 벗어날까?
그것도 아니면 솔직하게 실토해? 아니, 그러면 미캉에게 폐가...

예상치 못한 조우였기에 대처할만한 방안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말을 돌려보자.

"그, 그런데 하루코 선생님께선 서점에 무슨 일로?"

"저야 물론 사이바이 선생님의 팬이니까요.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었거든요."

"아...네, 그렇군요."

누가 봐도 기쁜듯한 표정으로 즐겁게 이야기하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애써 마주 웃어주었다.
활기차게 대답하던 하루코 선생님은 나를 보다 뭔가 떠올랐는지 조금 머뭇거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저기...그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해요."

"네?"

"그, 그러니까..."

의아해하며 하루코 선생님을 바라보자 하루코 선생님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심결인지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듯 살짝 감싸는 포즈를 취한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서 깨달았다.
그 때 현관문에서의 해프닝 말이구나!

"아, 아뇨. 그거야 제쪽이 오히려 실례를..."

파렴치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내 볼도 함께 붉어졌다.
붉어진 내 얼굴을 힐끗 본 하루코 선생님은 더듬거리면서 사죄하듯 허리를 숙였다.

교사로서 방정맞은 모습을 보여서 죄송했다는 둥 사과해오는 하루코 선생님의 행동에 양심이 찔렸다.
애초에 난 사이바이씨가 아닌데다가 사과는 내쪽에서 하는게 맞는거 아냐?
주변에서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사람들도 신경쓰여서 하루코 선생님을 진정시켜야할 것 같았다.
양손이 무릎에 닿을듯 허리를 숙인 하루코 선생님의 어깨를 잡고 몸을 세웠다.

"진정하세요 하루코 선생님."

"사이바이 선생님?"

"그 때의 일은 하루코 선생님께서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서로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고, 다행히 하루코 선생님께서도 다치진 않으셨으니까 다행한 일이죠.
오히려 저로서는 득을 봤달까,"

"네?"

...아, 실수.
내 쪽이 잘못이었다는 식의 대사를 하려던게 말 잘못 골랐다.

"아, 아니 하루코 선생님같은 미인을 도울수 있어서 기뻤단 의미로..."

"엣?"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당황해서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게 아니라 좋은 향기가 났달까...콧잔등을 간질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달까...
자그마한 몸집이 갸날펐달까..."

"에? 엣?"

당황한 나머지 칭찬인지 성희롱인지 모를 말만 횡설수설 늘어놓아 버렸다.
헌팅이라도 할 작정인건가 나는...!?

"저...사, 사이바이 선생님?"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싸매며 신음을 흘리는 내 모습에 하루코 선생님이 어쩔줄 몰라했다.

"괘, 괜찮습니다. 하루코 선생님."

"괜찮다니요? 그렇게 안색이 나쁜데..."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그저 자기혐오에 빠진 소년의 허무한 자학일 뿐이니까.

이대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간 지리멸렬한 대사로 자폭해버릴것 같다.
그냥 적당한 대사로 빨리 대화를 끝내고 여길 벗어나자.
아무래도 그게 최선일것 같으니까.

안절부절 못하며 내쪽으로 주춤 손을 뻗어오던 하루코 선생님의 양어깨를 잡는다.

"꺅?"

놀라는 하루코 선생님의 반응을 무시하고 힘주어 말한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하루코 선생님께선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여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지 말고 좀더 자신을 가져도 좋다구요?"

그러니까 이런 소모적인 사과 주고받기는 이걸로 끝! 이해했어요?

하루코 선생님을 응시하며 아이 컨택트를 주고받았다.
이 주제로 대화하는건 이만 끝내자는 뜻을 되도록 마음 상하지 않게 에둘러 말했는데 알아들었으려나?
선생님이라는 직함도 있고 아마도 이해했을거라 생각하지만...

하루코 선생님의 어깨에 올려진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양볼 위로, 하루코 선생님의 눈자위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엄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입가를 가린 양 손가락 사이로 달뜬듯한 한숨이 새어나오며 얼굴을 간질었다.
옅은 민트향이 배인 숨결을 타고 하루코 선생님의 스러질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이런건... 곤란해요, 사이바이 선생님..."

...뭐가 곤란하다는 건가요 하루코 선생님?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

톡-톡-

"응?"

등 뒤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손엔 책을, 다른 손엔 붕어빵 봉투를 든, 무릎까지 오는 금발이 인상적인 소녀...그러니까 야미가 서있었다.
내가 야미를 바라보자 펼쳐든 책을 한손으로 탁-소리나게 접은 야미는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쳐다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야미?"

"여성을 설득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좀 더 장소를 가리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응?"

주위로 신경을 돌리니 서점 곳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하루코 선생님도 이제서야 상황을 눈치챈듯 화악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더니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하루코 선생님은 나를 보곤 중얼거렸다.

"...아키츠...료스케?"

...망했다.


야미가 부른 내 이름을 듣고 망연한 표정을 지은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결국 서점 밖으로 나와서 하루코 선생님께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서투르게 거짓말을 하다간 불필요한 오해가 더 커질수도 있고.
미캉과 관련된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야미도 하루코 선생님의 곁에서 내 해명에 귀를 기울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하루코 선생님은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어떻게든 수긍해주었다.

"그랬군요. 사이바이 선생님 대신으로..."

"미캉의 아버지는 만화가였군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납득하는 둘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하루코 선생님은 뭔가 신경쓰이는게 떠올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때의 사인본은..."

"아. 그건 사이바이 선생님의 친필 사인이 맞아요.
가정방문에 찾아뵙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면서 닛타 선생님께 건네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중간 과정에서 약간은 각색이 있었지만 뭐 어때.
사이바이씨의 팬인 하루코 선생님께 이정도 립서비스는 센스지.

"그런가요..."

하루코 선생님은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굳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들러서 사이바이씨의 사인본을 받아왔던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인본마저 가짜인 상태로 하루코 선생님께 들켰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자니 식은땀이 난다.

동경하던 사이바이 선생님은 가짜였고,
옷도 젖어버리곤 야한 짓까지 당했다.
거기에다 소중히 간직했던 사인본마저 가짜였다면 정말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루코 선생님과의 오해도 풀렸겠다,
이곳에서 찾은 신간은 사죄도 할겸 하루코 선생님께 양보하기로 하고
난 이만 「영웅학원」신간을 찾으러 다른 서점에나 가볼까?

서점을 나오면서 들고왔던 영웅학원 신간을 하루코 선생님께 건넸다.

"이건 닛타 선생님께 드릴께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책을 품에 안은 하루코 선생님은 당황하며 사양했다.

"하, 하지만 이건 아키츠군이 먼저 집은건데..."

"괜찮아요. 원래 한권으론 부족했으니까."

"에?"

"신간을 두권 사려고 했거든요.
어차피 여기서 한권을 구했어도 다른 서점에도 들러야 하니까,
이건 닛타 선생님께서 가지시는게 낫겠죠."

출간 당일에 감상용이랑 소장용을 한꺼번에 모으는건 고생이네.
여기 말고 다른 서점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데 전철이라도 타고 가야 하려나?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아, 저! 잠시만요!"

목례를 하고 물러나는 나를 보던 하루코 선생님이 황급히 내 손을 잡았다.

"가, 같이 가요."

"네?"

"아...저, 저도 두권 필요하니까..."

긴장했던 탓인지 땀이 배인 하루코 선생님의 손은 미끄러웠다.

"그럼 저도 같이 가도록 하죠."

"야미 너도?"

옆에서 합류 의사를 비친 야미는 부연해 설명했다.

"방금전까지 소설 코너에서 책을 보고 있었지만 서점 주인이 청소하느라 자꾸만 먼지가 흩날려서 말입니다."

그건 서점에서 쫓아내려는 신호인데?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얼마나 오래 서있었어?"

"서점 주인 말로는 네시간이라더군요."

"......"

너무하잖아 그건!?
게다가 주인 아저씨가 시간까지 말했다면 보통 거기서 그만 읽어야 하는거 아냐?
힐끗 바라본 서점 입구에선 채플린 수염을 한 안경낀 점장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벙긋거리는 입모양을 보건데 「그 아가씰 데리고 얼른 가버려」라는 말인듯 했다.
훠이훠이 손짓까지하며 온몸으로 떠나라는 신호를 보내는 점장의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야미는 아예 눌러앉듯 서점에 있었는지 한손에 붕어빵 봉투도 들고 있고...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야미는 봉투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내서 내게 권했다.

"당신도 붕어빵 하나 어떻습니까?
아까 너무 많이 사서 식어버렸지만..."

"...잘 먹을께."

모처럼의 호의를 무시하기도 그랬기에 야미에게 붕어빵을 건네받곤 입에 넣었다.
단팥빵 사건 이후론 한동안 팥이 들어간건 피했었는데...오랜만에 먹으니까 꽤 괜찮네.
이미 식어버린 붕어빵이었지만 공복상태라는 상황, 군것질이라는 즐거움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당황하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붕어빵을 건네는 야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후 일정을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전철부터 타야겠네.



덜컹-덜컹-

붕어빵을 완식한 뒤, 하루코 선생님과 야미와 함께 옆마을 서점으로 가기 위해 전철에 탔다.
의외로 미캉 관련 이야기로 야미와 즐겁게 대화를 풀어나가던 선생님은 내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키츠군은 사이난 고교의 학생이었나요?"

"네. 올해로 고교 2년생이죠."

"젊네요. 어려도 저보단 연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아니~ 저 지금 교복 입고 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사이난 고교 춘추복인데 당연히 고교생으로 보는게 맞지 않아?

"그게...학생들과 교류를 위해서 선생님들이 교복을 입는 학교도 있다잖아요."

정○고?
J.A.V 이사장이 계신?

아무튼 어딜가나 이 수염이 문제다.
덕분에 중학교 시절에 담배 살 때도 신분증 달라는 소리 한번 들어본적 없었다고.
이 나이에 아저씨 취급 받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반쯤 설움을 담아서 하루코 선생님에게 태클을 걸었다.

"그러는 닛타 선생님이야 말로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요?"

"뭐가 말인가요?"

- 이 앞의 커브 때문에 전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닛타 선생님, 동안이라서 영락없이 고교생으로 보이는걸요?
사복이 아닌 교복차림이었다면 동년배 여학생으로 착각했을거라고요."

"어, 어른을 놀리면 못써요!"

"아하하~! 료스케 선생님이라고 불러보는게 어때요?"

"내쪽이 연상이라구요!
정말...「덜컹-!」꺅?!"

급작스런 흔들린 전철안에서 균형을 잃은 하루코 선생님은 마주서있던 내쪽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손을 뻗어 부축을 했는데...
...어째 자세가 좀 묘하다?

양 손바닥을 내 가슴에 얹고 기대듯 내 품에 얼굴을 묻은 하루코 선생님.
하루코 선생님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듯 선생님의 허리에 팔을 두른 나.
가늘고 부드러운 옆구리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며 하루코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세요 닛타 선생님?"

"에엣...?"

고개를 든 하루코 선생님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보였다.
맞닿은 하루코 선생님의 몸이 순간 경직된 걸 느끼곤 다시 한번 하루코 선생님을 불렀다.

"...닛타 선생님?"

"꺄앗!?"

하루코 선생님은 놀라며 황급히 일어서며 몸을 뺐다.
...정확히 말하자면, 「빼려고 했었다」.

퍽!

"크풉?!"

"꺅!"

뜨압!? 혀 씹었어!
일어서려던 하루코 선생님의 머리에 턱이 부딪히는 바람에 호쾌할 정도로 혀를 씹어 버렸다.
또다시 균형을 잃고 뒤로 주저앉으려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지만 잡을 겨를이 없었다.
아픈 나머지 나도 전철 손잡이를 놓쳐버려서 몸이 기우뚱 하는 중이라고.

스르륵...꽉-.

그렇게 꼴사납게 전철 바닥에 쓰려지려는 우리 둘을 잡아오는 손길이 있었다.
어느새 손모양으로 형태를 만든 야미의 머리카락이 나와 하루코 선생님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다.
손모양의 머리카락에 기댄채 간신히 몸을 추스리는 우리 둘을 지탱하며 야미가 말했다.

"부끄러운 모습은 이만 자중하시죠. 두사람."

"미안..."
"미안해요..."

우리 셋중에 제일 어린데...우리들 중에서 가장 어른스럽군요 야미는.
기묘한 모습의 우리를 보면서 수근거리거나 킥킥 웃는 승객들의 소리에 낯을 들 수 없었다.



전철에서의 해프닝이 끝나고 겨우 목적지인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Amaz○n」이라는 이름만큼이나 큰 규모의 서점이었기에 다행히 「영웅학원」신간을 찾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영웅학원」신간을 집어들었다.
야미는 어느새인가 소설 코너로 가서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었다.

책을 보는 야미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해야하나...?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책을 볼때 야미 얼굴은 무표정이고.
그래도 몇시간을 계속해서 읽고 사는걸 보면 즐거운것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나도 뭔가 더 사볼 책은 없으려나?
일단 급한 용무는 끝난지라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기에 잠시 서점을 둘러볼겸 다른 코너를 볼까 싶었다.

"아키츠군? 뭔가 더 살게 있어요?"

"모처럼 이곳 서점까지 왔는데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보려구요.
닛타 선생님께서도 함께 돌아보실래요?"

"으응, 좋아요."

내 권유를 탄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서점의 코너를 돌아보았다.

「10대를 위한 교양 도서」「20대를 위한 자기계발 도서」
「금주의 베스트셀러」「세계 명작 100선」「요리」

진열대에서 몇권을 꺼내서 훑어보다가 마음에 드는건 체크만 해두고 계산할때 한꺼번에 들고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책들을 골라보는 나에게 하루코 선생님은 신기한듯 물었다.

"아키츠군은...책을 좋아하는가 보군요?"

"아 뭐...일단은 교양이니까요.
책을 읽을 땐 마음이 편안해져서."

"후후...보기완 달리 문학소년이네요."

쿡쿡대며 작은 소리로 웃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민망해져서 콧수염을 슬쩍 매만졌다.
뭐...내 외모랑 안어울린다는건 인정해.
그건 사실이니까.
단지 중학교 재학중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에 빠져든 시기가 있었을 따름이다.
자기 위안 목적으로 독서에 취미를 붙이다 보니까 문학소년 흉내도 수박 겉핥기 수준일 뿐이고...

그렇다고 공만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슛돌이처럼
독서를 통해서 내 외로움이 사라지는건 아니었고,
공을 친구 삼아서 축구로 이름을 떨쳤던 슛돌이와는 달리
독서를 친구 삼아서 세기의 지성인(움베르트 ○코 라든지...) 수준에 도달할 만큼 내가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건전한 방식으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취미였기에 나 스스로는 꽤나 만족하고 있다.
게다가 독서를 취미로 가졌던 덕에 고교 들어선 언어영역 시험도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됐으니 결과적으론 좋은 걸까나?

"아키츠군은...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랑 많이 다르네요."

"네?"

"거친 외모랑 달리 차분한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나이에 맞게 장난스러운 면도 있고,
어떨 땐 덤벙대는 모습도 보이고...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즐거워진다고 할까요?"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다...
하루코 선생님의 칭찬에 멋쩍어져 속이 근지러웠다.

"아,아하하~! 하루...닛타 선생님도 참~"

"...그렇게 호칭에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하루코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으니까."

"어, 정말요?"

"사이바이 선생님 흉내낼 때도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았나요?
게다가 겉모습으론 오히려 저보다 연상으로 보이고..."

"이렇게 보여도 전 아직 17세 입니다만!?"

"...그럼, '하루코 누나'라고 불러볼래요?"

"에?"

"노, 농담이니까 그렇게 정색하지 말아요? 무섭다구요...!"

눈이 동그래진 내 모습에 당황하며 하루코 선생님은 손을 저었다.
설마 아까 전철에서 「선생님이라기 보단 동급생으로 보인다」며 놀렸던 걸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건 아니겠지...?
말해놓고선 되려 자기가 당황하는 하루코 선생님의 반응에 난처한 웃음이 흘렀다.
확실히 다섯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날것 같으니 누나라고 불러도 틀린건 아닌데...
그래도 살면서 누나라고 불러본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누나라고 부르라면 나라도 해도 조금은 쑥스럽다고요?

어색한 분위기로 하루코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는데 구원의 손이 뻗어졌다.

"다들 찾고 있던 책은 찾았습니까?"

먼저 계산을 끝낸건지 한손에 종이봉투를 든 야미가 카운터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응. 지금은 괜찮은 책이 더 없을까 한번 돌아보는 중인데...야미는 뭘 골랐어? "

"저 말입니까?"

야미는 봉투에 든 책을 꺼내보였다.

어디보자...「전래동화 모음집」,「사랑에 살다」,「작은 아씨들」
그리고...

"...「어린왕자」?"

"「세계 명작 100선」 코너를 지나다 발견했습니다.
여름 축제 때 당신이 추천해 줬었죠..."

책들을 다시 봉투에 담으면서 야미는 말을 이었다.

"소개글에 따르면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라고 했고,
한번쯤 사서 보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긴 야미는 전래동화나 명작소설, 연애소설 쪽에 관심이 많았지?
즐겁게 읽어준다면 나도 추천해준 보람이 있을텐데 말이지.
아무튼 야미도 용무가 끝났으니, 서점 안을 돌아보는건 이정도로 끝내고 이만 책을 골라서 집으로 돌아가볼까?

"저, 저기..."

"...응?"

야미랑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눈여겨둔 책을 골라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바지춤을 잡아 당겼다.
날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처음보는 어린 꼬마가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마음에 드는 사내아이였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왜 그러니?
혹시 부모님이랑 따로 떨어진거야?"

"으응~ 그런게 아니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꼬마는 왠지 기대감이 어린 눈초리로 날 보았다.
...왜?

"저기...혹시 형 이름이 '아키츠 료스케'야?"

"어? 맞긴 한데..."

처음 보는 아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같은 동네에 있던 꼬맹이들이라면 몰라도 여기에 사는 아이들이 내 이름을 알진 않을텐데?
내 대답을 들은 아이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면서 크게 외쳤다.

"거봐! 내가 맞다고 그랬지!"

외침이 끝나자 진열대 끝에서 하나둘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정말이야?"
"진짜 아키츠 료스케?"
"이 오빠가?"
"정말로 있었구나..."

...엥?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나를 둘러싸곤 초롱초롱 눈을 빛내기 시작한 꼬맹이들의 모습에 무심코 주춤하며 몸을 뒤로 뺐다.
난데없는 상황에 야미는 의아해하며 날 쳐다보았다.
하루코 선생님도 나랑 꼬마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해 하셨고.
그렇게 바라보셔도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목소리에 서점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내쪽으로 쏠렸다.
뭐야 이건? 도무지 짐작도 안가는 이 상황은?
서, 설마 몰래 카메라 같은 건가?

"지금 이 소란은 대체 뭔가요 아키츠 료스케?"

"나한테 묻지 말아줘..."

신기하다는듯 이리저리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들의 시선에 견디다 못해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아이를 불렀다.

"저기...얘야?"

"응!"

"그...물어보기 미안한 말이다만,
대체 네 친구들이 어째서 이렇게 놀라고 있는건지 물어도 될까?"

"어? 형 몰랐어?"

알면 내가 이렇게 묻고 있겠냐!?
눈을 깜빡이던 아이는 친구에게서 책을 건네받아 나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거."

"...「영웅학원」?"

"형은 영웅학원 몰라?"

"그야 알고 있지. 좋아하는 만화인걸.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까~ 여기 좀 봐."

사내아이는 책의 끝부분을 뒤적이더니 거의 마지막 부분을 집고 펼쳤다.
...후기? 「사이바이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밀어진 「영웅학원」신간을 잡고서 후기라 적힌 부분을 읽었다.
하루코 선생님과 야미도 호기심이 인듯 내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함께 후기를 읽었다.
몇가지 잡담과 함께 시작된 후기를 읽던 중 내 눈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었다.


Q:영웅학원을 집필하시면서 모티브로 삼았던게 있으신가요?

A:강인한 정신력과 뜨거운 마음으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지요.
그나이 또래들 답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소문들이 꽤나 도움이 되었죠.
가끔은 말도 안되는 전설들도 있었지만요.
사실은 그런게 더 재밌어서 조금씩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Q:말도 안되는 전설이라면?

A:흔히들 도시전설이라 부르는 것들 말입니다.
천명의 불량배와 겨뤘다고 하는 중학생 이야기 같은거죠.
학창시절 특유의 허풍섞인 이야기들이었지만, 갈피를 잡을수 없는 기묘함을 가진 인물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잡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할까요?


본 기자가 개인적으로 알아낸 자료에 따르면
유우키 사이바이 작가님이 살고 있는 사이난에서 떠도는 소문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대 100의 싸움에서 승리한 중학생.
천명의 불량배를 상대한 양아치.
백명의 여자와 잤다는 중학생.
천명의 여자를 애인으로 거느린 양아치.
귀신을 부리는 사령술사.
피구공을 다루는 도장파괴범.
도라○몽.
...

전형적인 도시전설에 걸맞게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 뿐이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사실은 사이난의 모든 도시괴담들에는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키츠 료스케」

한 사람이 정말로 이토록 많은 괴담의 주인공이 될수 있는 것인가?
혹시나 이야기로만 떠도는 가공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키츠 료스케라는 인물은 실존하는것 같았다.

사이난에서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취재해 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딱히 불량배가 아니라도 이 도시에서 녀석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금발 올백에 헤어밴드. 목걸이와 체인형 팔찌. 결정적으로 콧수염과 턱수염, 그리고 구레나룻.
이런 외모를 한 학생은 그 녀석 하나뿐이니까.
최근엔 구레나룻을 잘랐다고 하던데...글쎄, 실연이라도 당한거 아냐? 하하~!"

"그 녀석과는 결코 맞서면 안돼.
전설을 쓰러뜨린답시고 덤벼들었던 놈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구.
학군단 연합이라고 위세좋게 떠들던 녀석들은 이젠 뿌리조차 안남았고...
패닉에 빠져서 자중지란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아마도 녀석이 뭔가 했겠지."

"녀석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도망쳐야지.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숨을 생각은 절대로 하지마.
피치 못해 숨게 된다면 결코 눈을 뜨면 안돼.
만약 눈을 뜬다면, 어둠속에서 널 응시한 채 입술이 찢어질듯 미소를 지은 녀석을 보게될 테니까..."

"장신구를 하나 벗을 때마다 변신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고 깡패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인데...녀석은 언제나 피에 젖은 십자가 목걸이를 품속에 넣고 다닌대.
지금까지 거의 본 사람이 없지만, 일단 꺼내들면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

"여자? 젠장! 사이난의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그 녀석이 먹어치웠다고!
멋모르고 헌팅하다가 그 자식한테 박살난게 한두번이 아냐.
헌팅당하던 여자애들이 꺄꺄 거리면서 녀석의 등뒤에 달라붙었을 때 얼마나 열불이 뻗쳤는지 알아?
어째서 그딴 수염을 좋아하는거야?"

"건강한 아이. 조금 날카롭게 생겼지만...
가끔 시장에서 모습을 보곤 해요. 동생이랑 같이 쇼핑하는 모양이던걸?"

"아! 나도 그 형 알고 있어! 수염별에서 온 수염성인이야!
지구인들의 얼굴을 수염으로 뒤덮기 위해 지구에 왔대.
공원에서 회전 회○리슛 쓰는 것도 봤다?"

"동네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모습을 봤어요.
의외로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

"피구왕."

"바다에서 본 몸매가 꽤 멋졌어.
...말해두지만 몸매 뿐이야?"

"의외로 평소 학교에선 조용해.
가끔씩 사고를 일으키긴 하지만 선생님의 지시에는 잘 따르는것 같았어.
청소 같은 것도 안 빼먹던데?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거물의 냄새가 나는 녀석이야.
난 알 수 있어.
예전에 겁도 없이 녀석에게 싸움을 걸었을 때, 나한테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 학생은 학생답게 놀아.

하하, 걸작이지?
녀석에게선 어딘지 보통 양아치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일반인에게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더군.
어쩌면, 그게 바로 거물이 가지는 품격이라는 건지도 모르지.
최근에 듣기론 야쿠자 조직의 비밀병기라거나, 야쿠자 그룹의 후계자라는 소문까지 있던데...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이상이 「영웅학원」의 소재에 쓰였다는 도시 괴담의 주인공 「아키츠 료스케」에 대한 소문들이다.
그외에도 많은 재미난 소문들이 있었으나 페이지 문제로 간략히 마무리 한다.
다양한 소문 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아키츠 료스케」라는 인물의 행적이 궁금하다면 「영웅학원」다음권을 기대해주시길 바라며...


"...쿨럭..."

후기를 다 읽은 뒤 총체적으로 내린 나의 감상은 사레걸린 소리였다.

뭐 이런 쓸데 없는것까지 시시콜콜 써놓은거야?
마지막에 와선 영웅학원 후기가 아니라 그저 황당무계한 가십거리 범벅이 되어버렸잖아?

야미와 하루코 선생님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당신은 제가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유명인이었군요."

"기쁘진 않은데 말이지..."

"아, 아키츠군...아무리 그래도 애인이 천명이나 되는건 역시..."

"오해입니다."

"...정말이에요?"

"오해입니다."

순진하게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주세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천명의 애인같은거 가능할리 없잖아요?
「영웅학원」을 덮자 지켜보던 아이들이 너도나도 할것없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저기~! 가장 재밌었던 싸움 얘기해줘~!"
"영웅학원 주인공처럼 멋진 얘기였어?"
"어떻게하면 여자애들이랑 사이좋게 지낼수 있어?"
"오빠는 술래잡기 자신있어?"
"회전 ○오리슛 한번 보여줘~!"

"자, 잠깐만...!?"

즐겁게 떠들어대는 아이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정신이 없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런저런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는게 난처해 하다가,
결국 꼬맹이들의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서점 밖에서 허리케인 버스터를 시연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뚜렷한 나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쏘아지는 피구공에 아이들과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해줘서 조금 쑥스러웠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친절하게 「허리케인 버스터」라고 소개해줬지만
모두들 「회전 회○리 슛」을 연호했다는 것 정도일까...?

급조한 공연을 즐겁게 구경해준 사람들에게 화답한 뒤에야 야미와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간신히 서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철을 타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이만 해산하기로 했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하루코 선생님은 「영웅학원」 한권을 야미에게 건네주었다.
책을 손에 들고 갸우뚱하는 야미를 보며 하루코 선생님은 싱긋 미소지었다.

"한권은 야미에게 줄께."

"저...말인가요?"

"물론.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건 즐거운 일이니까."

아아, 그런 거였군.
그러니까 하루코 선생님은 감상용이랑 선물용으로 책을 산건가?
납득했다.
과연이라고 할까...훌륭한 팬의 모범이시로군요 하루코 선생님.

"(그게... 사실은 두권으로 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응?

작게 속삭이며 야미에게 책을 건넨 하루코 선생님은 한껏 기지개를 폈다.

"아아~ 즐거운 하루였어~"

"...그렇네요. 재밌는 하루였습니다."

기운차 보이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야미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수긍했다.
뭐, 나도 하루코 선생님을 속였던거에 대한 죄책감도 덜었으니 의미있는 하루였다고 할까나?

"저도 즐거웠어요. 아, 그리고 이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서 하루코 선생님께 건넨다.

"이건 뭔가요?"

"사이바이 선생님의 명함이에요."

유우키 사이바이씨의 이름과 함께 사이바이 스튜디오의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명함.

"다음 가정방문 땐, 직접 사이바이 선생님이랑 약속을 잡아보시는 것도 좋을거에요."

같은 사이바이씨 팬으로서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나나 리토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사이바이 선생님을 하루코 선생님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명함을 건네받은 하루코 선생님은 놀란 얼굴을 하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키츠군. 다음번엔 꼭 진짜 사이바이 선생님을 만나뵐테니까."
그리고..."

끼이익-

하루코 선생님이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도중에 말을 끊긴 하루코 선생님은 버스와 우리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아키츠군. 야미."

"안녕히 가세요 닛타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닛타 하루코."

"정말... 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좋은데."

"쯧쯧쯧~! 그럼 닛타 선생님께서 먼저 편하게 대해주셔야죠~"

어른쪽에서 먼저 말을 놓아야죠.
장유유서잖아요?

"아하하~ 그런걸까?"

익살맞게 손가락을 흔들며 반박한 내 모습에 한차례 웃음을 터뜨리곤 하루코 선생님은 버스에 올랐다.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 하루코 선생님은 즐거운 얼굴로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럼...다음에 만나면 함께 사인본을 받으러 가요, 료스케군. 야미짱~!"

"에?"

벙찐 얼굴로 하루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익숙치 않은 장난이 부끄러웠는지 상기된 얼굴을 한채 하루코 선생님은 킥킥거리고 있었다.
이름으로 불러지는건 솔직히 예상에 없었는데...
이대로 그냥 보내드리면 한방 먹은 느낌에 영 떨떠름할것 같다.

자고로 상대방이 먼저 한걸음 다가와 준다면 이쪽은 두걸음 다가가 주는게 예의.
왠지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유쾌함을 담아, 닫히기 시작한 버스문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다음에 봐요 하루코 누나~!"

「꺄아악~!?」

딱쿵~!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하루코 선생님이 휘청~하고 몸을 기우뚱하는게 보였다.
버스봉 한쪽에 이마를 부딪히곤 이쪽을 바라보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폭소했다.

"아하하하~! 안녕히 가세요 하루코 선생님~!"

한손으로 배를 부여잡곤 웃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채 한껏 손을 흔들면서 하루코 선생님을 배웅했다.
이마를 매만지며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던 하루코 선생님도 이내 피식 웃곤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귀염성 있는 선생님이시라니까.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와 야미도 정류장을 떠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미는 걸어가면서 오늘 산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땐 앞을 보면서 다니는게 좋을텐데 말이지...
독서에 열중하는데 일부러 야미에게 말을 걸기도 그래서 나도 덩달아 사왔던 책 중 한권을 꺼내 들었다.


「선(禪)」《 여인을 안고 강을 건너다 》

탄산(坦山) 스님과 한 젊은 중이 강가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여인이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탄산이 말했다.

"아가씨, 제가 건네 드리죠."

그리고는 그 여인을 안아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반나절을 걸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절에서 자게 되었을 때, 젊은 중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우리처럼 출가한 사람은 여색(女色)을 가까이할 수 없는데, 아까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아! 그 여인 말인가?"

탄산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일찌감치 내려놓았는데, 그대는 아직도 안고 있는가?"


"...그러고 보면..."

"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고 야미를 보았다.

"방금전, 닛타 하루코를 누나라고 부르더군요.
모습을 보니 많이 놀란것 같던데... 실례가 아니었습니까?"

"아...그거야 하루코 선생님, 연상이고...
게다가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으니까."

하루코 선생님으로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순진한 분이라 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가 기대되었다는 점이 더 컸다.

내 답변을 들은 야미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럼 저에게도 야미 누나라고 부르는게 어떻습니까?"

야미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부르는건 미캉 또래 정도 되는 애들한테나 가능한거라고.

"야미...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리 봐도 넌 나보다 연하라고?"

"크로노스력으로 24세입니다."

"진짜!?"

순간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린채로 굳어버렸다.
...그럼 이제부턴 '야미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거야?
겨우 중학생처럼 보이는 애한테?
설마 야미가 24세였다니...그것도 크로노스력일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지!?

망연하게 야미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크로노스력」은 대체 뭐야?

현재 지구에서 통용되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라고!
「크로노스력」 1년이 100일인지 200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속았다는 생각이 물씬 들어서 야미를 째려보자 야미는 슬쩍 책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귀여운 포즈 취하지마...!
그런다고 내가......

헤실헤실 풀리려는 표정을 억지로 다잡으면서 야미에게 물었다.

"그럼 지구 나이로 야미는 몇살인데?"

내 물음에 야미는 가만히 검지를 세우곤 입술을 가렸다.



"......비밀입니다."




p.s. 야미가 영웅학원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코 선생님의 배포용 서적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나보다.

앞으로는 세권 사자.

감상용. 소장용. 그리고 포교용.



====================================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다루고 싶어서 구상했던 이야기입니다.
원랜 18화랑 19화 사이에 쓸 예정이었는데,
워낙 연재가 뜸했던지라 본편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뒷전으로 밀려났다가 이제야 쓰게 되네요^^;

시라유리 코요미나 아라이 사야카 양의 이야기도 쓰고 싶은데...
생각해둔건 있으니 계절이 맞다면 나오겠죠=ㅂ=a

즐겁게 봐주시면 감솨하겠습니다. 쿨럭...m(_ _)m;;;


터틀러님 축전(영웅학원 후기를 읽는 료스케, 야미, 하루코 선생님)


p.s.참고 이미지

유우키 사이바이

독서하는 야미

하루코 선생님 1

하루코 선생님 2



Posted by 루트(根)
,
나의 이름은 케이즈.
데빌루크에 대항하는 우주 마피아 'SOLGAM'의 일원이다.
살인청부, 불법무기제조 등 실질적인 모든 범죄에는 모두 우리가 관련되어 있을 만큼 거대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은하에서 이름 높은 의사, 닥터 미카도의 행적을 찾고선 보스의 명을 받아 닥터 미카도를 데려오고자 부하들과 함께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 지구로 파견되었다.
닥터 미카도의 의학 기술을 이용한다면, 생체 강화수술로 상식을 넘은 능력을 가지는 최강의 병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 병사들이 우리 조직의 상품으로 우주에 나돌면 데빌루크가 통일한 이 우주를 다시 전란의 세상에 되돌리는 일도 꿈이 아니지.

지구에 도착한 뒤 6명의 수하들과 함께 며칠간 닥터 미카도의 행동을 관찰하고선 헛웃음만 지었다.
은하 제일의 의학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겨우 젖내나는 꼬맹이들의 생채기 따위나 돌보고 있다니.
너의 쓰임새는 그런 하찮은 게 아니야 닥터 미카도.
우리 'SOLGAM'이라면 너의 능력으로 우주를 혼돈의 도가니로 되돌릴 수 있단 말이다.
이제 그만 너의 소꿉장난도 끝날 시간이다.
금색의 어둠과 데빌루크의 왕녀만 조심한다면 이런 미개한 행성에서 우릴 방해할 녀석 따윈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게스텔이 배신했다.

네즈란과 함께 여학생 납치 임무를 수행하던 중, 갑자기 동행한 네즈란을 공격한 것 같다고 한다.
게스텔, 네즈란과는 별도로 미카도 감시역으로서 맞은편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덱스터와 베르난도의 보고였다.
미카도를 감시하던중 갑자기 학교 한쪽에서 큰 굉음이 들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더니
그곳에는 거대하게 함몰된 복도 벽에 파묻혀 정신을 잃은 네즈란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긴급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게스텔은 납치하려던 여학생을 내버려둔 채 그 자리에 멈춰서 가만히 네즈란을 내려다보았다고 했다.
덱스터가 당황하며 게스텔에게 통신을 보냈지만 게스텔은 통신을 연결하려는 행동도 보이지 않은 채 어리둥절해하는 여학생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굉음에 놀란 학생들이 복도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닥터 미카도조차 양호실을 벗어나는 바람에 애초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건너편 옥상에서 멀찍이 떨어져 대기상태로 미카도를 감시하던 덱스터와 베르난도로서는 기절한 네즈란을 데려올 여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기절한 네즈란은 데려올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게스텔과 네즈란을 내버려둔 채 임시 거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덱스터와 베르난도였다.
징후조차 없었던 게스텔의 배반으로 「인질을 이용해 닥터 미카도를 회유한다」는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게스텔 녀석...여자를 밝히는 놈이었는데, 설마하니 납치할 여학생과 눈이 맞은 건 아니겠지?
여자에게 홀려 임무를 망각할 정도로 글러 먹은 녀석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찌 됐건...조직을 배신한 대가는 무섭다 게스텔.
저 세상에서조차 후회하게 해주마.
솟아오르는 분노를 눌러담고 남은 부하 넷과 함께 다음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밤이 찾아왔다.




...뭐냐.

{...아...아...아...}
{...롭다...괴...롭...}
{...워...추워...}
{나...살...고...싶...어...다시...!}
{외...로워...누...군가...}


뭐냐고 이건...

{...즈...님?}
{아아...케이...님...!}
{...째서...우릴...왜...}
{아...파...괴...로워...그...러...니까...}
{...도...함께...!으...흑...}
{흑...흐...쿠흐흐흐흐...!}
{크흐흐흐흐흣...!}
{크...크크큭...!}


"게...게스텔!? 네즈란!? 너, 너희들이야!?"

허공에 떠있는 희뿌연 인형들 사이에서 발견한 익숙한 녀석들의 모습에 덱스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채로 머리가죽이 반쯤 벗겨지고 눈알이 빠져나간 채,
뜯겨져나간 입술 때문에 이빨과 잇몸이 고스란이 드러난...이제는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외모로 변해버린 녀석들을...
처참한 모습으로 이제는 살아있는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반투명한 두 녀석의 모습에 할 말을 잊은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등뒤에서 누군가의 이빨이 딱딱 소리내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투명한 모습으로 허공에서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녀석들의 아래에서 검은 로브를 쓴 인형이 홀로 서있었다.
한손으로 로브에 가린 얼굴을 잡은채 우리를 바라보는 녀석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작게 키득거리던 녀석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품평하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바로 등뒤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절규하는 망령들을 아랑곳 하지 않는 녀석의 모습에 오한을 느끼곤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바보같은...겨우 눈만 마주친 정도로 설마 이 내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나는 전 우주에 공포로 통하는 'SOLGAM'의 간부.
위험도 'Lv.S'인 행성도 아닌, 겨우 미개한 문명의 혹성에 사는 원주민 따위에게 겁먹을 것 같으냐?
낮게 울부짖는 망령들을 애써 무시하며 녀석을 마주보았다.

"넌...누구냐?"

"......"

내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녀석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녀석의 말은 내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태양의 가호가 사라진 밤은 망자들의 시간..."

"...뭐?"

"너희들의 운명...심연의 어둠속으로 끌어내려 주겠다."

"미친...! 쏴버려!"

무저갱에서 들려오는듯한 음산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불안한 마음을 고함속에 파뭍은채 총을 꺼내어 녀석을 겨누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미증유의 힘이 손에서 총을 빼앗아 가버렸다.

"뭣!?"

부하들의 총마저 모두 공중에 뜬채 정지해 있는 모습에 헤스테르가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케, 케이즈님! 이건...!"

"우선 후퇴한다!"

순식간에 무장이 해제되어버린 우리는 허공에 높이 떠오른 총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상대에게 무장도 없이 덤비는 자살행위를 할 생각 따윈 없다.
달아나며 뒤를 돌아보니 검은 로브의 놈은 달아나는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뭘하는거지?

"으아악!"

갑자기 철퍽소리와 함께 덱스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져 뒹굴었다.
바보 자식! 아무 장애물도 없는 평평한 바닥에서 넘어지다니...
......!?

"도...도와...꺽!?"

"덱스터!?"

"멍청아! 어서 달려!"

쓰러진 덱스터의 비명에 놀라 발걸음을 멈춘 헤스테르를 닥달하며 두번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바보 녀석의 뒤치닥거리를 한다고 발걸음을 지체했다간 분명 놈에게 붙잡힐게 틀림없다.
그리고...본능이 절대로 멈추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발버둥질치던 덱스터의 몸이 기이한 모습으로 꺾이던 걸 보고선...



덱스터를 내버려 두고 베르난도, 에스텔, 헤스테르와 함께 방금전의 장소에서 벗어나자 어느덧 개천가에 가까워 졌다.
검은 로브와의 거리가 한참 떨어졌다고 판단, 잠시 멈춰서 몸을 추스렸다.
숨을 몰아쉬던 헤스테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헉...허억... 이, 이제 어쩌죠 케이즈님?"

"......"

남은 부하는 베르난도, 에스텔, 헤스테르 3명.
데빌루크의 왕녀 라라-사타린-데빌루크와 우주 제일의 킬러 금색의 어둠 두명을 신경쓰는 것만도 힘든데 부하들마저 잃었다.
나타난 적의 정체도 알지 못하는 기분 나쁜 상황에서는 굳이 위험한 선택을 할 이유는 없지.

"...귀환한다. 닥터 미카도 포섭은 실패다.
이미 인원이 절반으로 줄었다. 불가해한 적이 나타난 마당에 증원을 요청하고 기다리거나 할 처지가 아니야."

불가사의한 힘을 사용하는, 닥터 미카도와의 연계성조차 알 수 없는 적.
이유도 모른채 알수도 없는 적에게 공격 당하는 상황에 처해서 임무를 실패하다니, 이 케이즈 인생 최대의 오점이다.

"하지만...다른 동료들은..."

"멍청한 자식! 방금전 그 꼴을 보고도 모르겠나?
그 녀석들은 이미 죽은 거라고! 살아있는 녀석이 그렇게 투명해져서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닐것 같으냐!"

"......"

입을 다물어버린 헤스테르의 모습에 진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우선, 이곳을 벗어난다.
방금전의 적에게 공격당한다면 우리 안전도 장담하지 못해."

화륵-

"응?"

작은 소리와 함께 오른쪽에서 밝은 빛이 나며 어두운 밤을 밝혔다.
베르난도의 옷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와악!? 부, 불이다!"

"베르난도!?"

갑자기 옷자락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베르난도는 황급히 손으로 옷을 털었다.
그러나 옷자락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당황한 베르난도는 바닥에 누워 몸을 뒹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옷전체로 번져가는 불길에 베르난도는 점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아...아으으으으!"

"진정해라 베르난도!"

"미친! 너라면 진정할거 같냐!"

"뭐, 뭐!?"

눈이 돌아갔는지 벌개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베르난도는 미친듯이 주변을 살피다 개천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둠속에서 검게 출렁이는, 허리까지 오는 물에 들어간 베르난도는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온몸을 물에 담갔다.

풍덩-!
풍덩-!

......?
방금전...물에 들어가는 소리가 '두번' 들렸다.
에스텔과 헤스텔에게 손짓으로 개천가에서 물러나게 한뒤 주위를 살피다가 눈이 커졌다.
개천 상류에서 집채만큼 거대한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그르르....

그림자가 이동하며 부글거리는 물소리와 짐승같은 울음소리에 전신의 털이 쭈뼛쭈뼛 일어서는것 같았다.
황급히 개천에 잠겨있을 베르난도를 불렀다.

"베르난도! 개울은 위험하다!
어서 나와라!"

......

"베르난도!"

첨벙-

베르난도가 들어갔던 물위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하나 올라왔다.
허공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려고 애쓰던 손은 이내 수면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 이건 무슨..."

「그르르...워어억------!」
「캬우우우우---」
「크르릉...」
「가아아아아아------!」
「그워어어어------!」


갑자기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들에 놀라 에스텔과 헤스테르와 함께 황급히 개천가를 벗어났다.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피해 달리기 시작하길 한참.
정신을 차려보니 숲속이었다.
...최악이다.
습한 기운을 품고 있는 숲엔 희뿌연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가 떨어지면 서로를 놓칠지도 모를만큼 짙은 안개.
부하들의 모습을 살피자 에스텔과 헤스테르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한시바삐 숲을 벗어나 우주선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려고 안개에 가려진 나무들을 조심하며 나가는 길을 찾았다.
나와 헤스테르, 에스텔이 일렬로 서서 좁은 숲길을 헤쳐나갔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자 헤스테르만이 등뒤에 서있었다.
...에스텔은 어디있지?

"...에스텔은 어디갔나?"

"네?"

"에스텔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

내말에 뒤를 돌아본 헤스테르는 약간 당황한듯 나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언제 사라졌는지..."

"그걸 대답이라고...!"

흥분해서 얼굴이 시뻘개져서 헤스테르를 질책하려던 나는 이내 진정하고 몸을 돌렸다.

"...에스텔을 찾는다."

"네?"

"길을 잃었을 뿐인지도 모르니까, 옷에 달린 통신기를 이용해 위치를 추적한다."

"아..."

에스텔이 가진 통신장치의 신호는 금새 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에스텔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안개가 짙어서 잠시 헤메었을 뿐인가.
당황해서 통신으로 연락을 취한다는 생각조차 못한건지 한곳에 멈춰있는 에스텔의 행동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통신을 연결했다.
통신으로 위치만 파악한다면 에스텔 쪽에서 금새 우릴 쫓아올 수 있겠지.

...에스텔이 통신을 받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헤스테르를 데리고 에스텔의 신호가 잡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것은 흙바닥에 널부러져있는 에스텔의 옷 뿐이었다.
벨트조차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옷가지들.
마치 증발한것 마냥 사라진 에스텔의 흔적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풀쪽을 향해 질질 끌려간듯 옷 앞자락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발이 들린채로 끌려갔었는지 구두는 바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다.
그리고...수풀쪽으로 난 커다란 흔적 위로 깊게 파인 10개의 손가락 자국.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우우우우우------!

앉아서 흔적을 살피고 있던중, 멀리서 들려오는 귀곡성에 헤스테르가 한차례 몸을 떨었다.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던 헤스테르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스테르? 무슨일이냐?"

"...가야해요..."

"가다니 어딜?"

"...들리지 않아요?"


{...리...와...}
{...께...가자...함...}
{워...추...워...필요...해...너...의...가...죽...}
{...를...먹고...다...시...살아...날...크흐...!}
{크...흐흐흣...!}



"...!"

"...동료들이...부르고 있어요..."

들려오는 망령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자 헤스테르는 가만히 귀곡성이 들려오는 수풀 저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멈...춰!?"

떠나가는 헤스테르를 말리기 위해 다가가다가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속에서 두개의 인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몸의 절반의 피부가 벗겨져 붉은 근육이 드러난 인형과 해골 인형이 헤스테르에게 말없이 손짓하고 있었다.

"지금 갈께요..."

"헤스테르!"

수풀가까이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자리에 서서 외치는 내 모습에 헤스테르가 살짝 뒤돌아 보았다.

...키득...

- ...아직도 내가...로...

멀어져가던 헤스테르가 남긴 목소리가 속삭이듯 내 귓가를 맴돌았다.
어느새 헤스테르는 두 인형과 함께 숲의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한치앞도 보기 힘든 어두운 숲속에서 결국은 나 하나만 남았다.
...기분나쁜 꿈을 꾸는것만 같았다.

배신한 녀석은 벽에 처박혀 기절했던 녀석과 나란히 처참한 몰골로 나타났다.
허공에 고정된채 뒤틀리던 녀석.
허리밖에 안차는 검은 개천속으로 자취를 감춘 녀석.
안개속에서 증발해버린 녀석.
동료의 목소리에 홀려버린 녀석.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점점 등뒤가 축축히 젖어갔다.

사아아아아---

흠칫-!

어느새 바람에 부딪히며 들려오는 풀잎의 소리마저도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미카도의 소꿉놀이에 어울리는 태평함만이 가득차있다며 조소했던,
바보같을 정도의 평화로움만 느껴지던 마을과는 전혀 다른 장소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어떻게 된거지...?

닥터 미카도의 포섭은 실패인가?
보스의 질책은 어떻게 하지?
적은 누구지?
왜 우릴 공격한 거지?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지?

태평스러워 보이던 낮의 풍경이 거짓말처럼 미친 광기로 가득한 밤.

...여긴...대체 어디지?

여기는...
이 미친 공간은...

...난...지금 어디에 있지?

흔들리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곤 비틀거리면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헤메고서야 숲을 빠져 나오고서야 압박받던 정신이 편안해지는것 같았다.

숲을 벗어난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아지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둔 예비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 할 때, 뒷자리에서 낯익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로 걸어들어 오다니...이제 도망은 포기한 모양이군."

"우아아아악!?"

백미러에 비친, 뒷좌석에 앉아있는 검은 로브의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자동차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동차 문을 당겨 닫았다.
......당겨?

"...알지 못했나...
내게서 벗어날 순 없어..."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나는 다시 운전석에 앉은채 차문을 닫고 있었다.
그럴리가...난 분명 자동차 밖으로 나갔는데...!
조금씩 등뒤가 축축히 젖어가는 가운데 놈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왔다.

"동요하고 있군.
두려운건가?"

옴짝달싹 못하고 굳어버린 나의 어깨 너머에서 놈은 무감정한 어조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타락한 자야...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으니.
...그저..."

{우...우우...}
{아...아아아...!}
{...파...아파...}
{...즈...님...함께...}


어느새 뒷자석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고통스러운 얼굴의 부하들의 사령(死靈) 속에서 놈은 고개를 들었다.
백미러 너머로 비춰진, 로브 아래의 얼굴은 치아를 드러낸 채 입술이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네 부하들과 똑같이 만들어줄 뿐이니까."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철컥-

콰아아아아앙------!!!



차문을 열고 도망치면서 기폭 장치를 발동시켰다.
형편없이 땅바닥을 구르면서 간신히 고개를 들어 폭염에 휩싸인 자동차를 보았다.
이거라면 그 놈도...

"...더러운 불꽃이군."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목이 꺾어져라 뒤를 돌아보자 상처하나 없는 놈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뒷문은 열리는 소리조차 없었는데, 어느새 놈은 내 등뒤에 서있다고?
타오르는 불꽃 너머에서 일그러져가는 사령들의 모습이 보인다.
기괴하게 비틀어지는 사령들은 원념이 가득한 목소리를 쉴새없이 내뱉기 시작했다.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죽은 부하들의...사령들의 단말마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돈다.

악몽이다...

온몸을 짓누르는것 같은 진득한 비명에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아냐...내가 죽인게 아냐...
이젠 됐잖아. 제발 사라져...!

원념섞인 저주에 마음이 꺾일것만 같은 가운데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와닿았다.
방금전까지 들려오던 절규도, 흐릿하게 일그러져가던 사령의 모습도 격렬해진 화염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맺힌 절규조차 집어삼킨 화염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토할 듯한 메스꺼움에 욕지기가 일었다.
도망치는것조차 잊곤 바닥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는 내 등 뒤에서 녀석의 속삭임이 들렸다.

- 진정해...구토를 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 없어...
안심해...
안심해... 케이즈.

방금전까지의 무감정한 목소리가 마치 거짓말이었던것처럼...
아이를 달래는듯 부드럽게 속삭여오는 녀석의 목소리는,
그저 이대로 녀석의 말에 몸을 맡긴채 안심감을 얻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기괴한 모습으로 사라져간 부하들도,
귓가에 메아리치던 짐승의 울부짖음도,
어둠속에서 보았던 불가사의한 물체들도...
차라리... 전부 꿈이었다면...

하지만 코를 찌르는 뜨겁고 매캐한 연기 내음은...악몽같은 이 순간이 현실임을 잔혹하리만치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 ...케이즈.

그만둬...

- 케이즈...

날 내버려 둬...

- 눈을 떠...케이즈.

더 이상 날 혼란시키지 마...!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채 귀를 틀어막자 귓가를 파고들던 녀석의 속삭임이 멎었다.
눈과 귀를 막으면 모든 무서운 일들이 사라질 것이라 믿는 어린 아이처럼,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지금 이 현실에서 벗어나길 기원했다.


"...그런가.
그럼 결국 이걸로 마지막이로군..."

틀어막은 귀로 가늘게 들려온 목소리에 강제적으로 현실감이 돌아왔다.
눈을 뜨자 어느샌가 내 앞에 선 녀석의 로브의 발치가 보였다.
천천히 웅크린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어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후드의 그림자에 가려진 녀석의 얼굴은 어둠으로 가득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약간 아래로 숙여진 후드의 모양새 만이 녀석이 날 내려다 보고 있음을 알게 했다.

"유감이군...이렇게 끝나 버리게 되다니.
...아무튼, 괜찮겠지. 저 불꽃속의 것과 마찬가지로 너 또한 훌륭한 재료가 될테니까..."

마찬가지...라고?

설마 진홍빛 화염 속에서 아우성치던 원귀들처럼...나 또한 그렇게 만들 셈이냐?
껍질이 벗겨지고, 눈알이 빠지고, 입술조차 뜯겨져나간채 비참하게 절규하던 그 모습으로?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중얼거리는 녀석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평온한 어조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목소리에선 스산한 광기가 느껴졌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음습한 악의가 온몸을 강렬하게 찔러온다.

공포로 미칠것만 같은 정신을 애써 붙잡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통제가 안되어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달아나는건 포기했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놈의 시선을 마주하며 억눌린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대체 넌...누구냐! 이 괴물아...!"

"...스..."

미약하게 입술을 움직이며 짧게 대답한 놈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그만 미혹의 달빛 아래 잠들어라."



뇌리를 흔드는 충격에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갔다.
어느샌가 바닥에 쓰러진채 억지로 눈을 떠 녀석을 올려다 보았다.
화마로 검붉게 물든 밤하늘, 달빛을 등지고서 녀석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깨어나면 네 부하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있을테니..."

낮게 울려퍼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이 감겼다.
멀어져 가는 의식속에서 생각했다.
어둠속을 환히 물들인 검붉은 화염.
영혼의 단말마를 들으며 광희하던 녀석은...틀림없이 악마였다고...



...죽고 싶지...않아...




- 문제편 終 -




「에비~!」
「크헤헤헤헤-!」

"우아아-!"
"꺄아아!"
"으악!"
"꺄! 나왔다!"

날카로운 이빨을 세운 늑대인간, 피쉬맨, 설인, 외눈의 거인, 미이라들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과 호기심에 이끌려 몰려든 사람들로 번잡한 「귀신의 집」.
올해들어「사이난 유원지」의 단골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 시설이다.
학년초 구교사의 유령 사건 때 미카도 선생님의 소개로 우주인 실업자들이 사이난 유원지의 귀신의 집에 대거 채용된 뒤 일어난 쾌거다.

전골파티 다음날.
주말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던중 다 함께 「사이난 유원지」로 놀러왔다.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자이로 스윙 등을 타면서 즐기던 도중 귀신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꽤나 인기있는 추천 장소였고 마침 대기줄의 길이도 적당했던지라 한번 구경해 보기로 했다.
유령을 무서워하는 하루나도 있었기에 귀신의 집에서 부터는 팀을 나눠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라라는 리토에게 매달렸고, 미캉은 야미와 팔짱을 꼈고, 라사와 미오는 하루나의 양옆에 붙으며 물었다.

"그럼 하루나찌는 어딜 가고 싶어?"

"으응...이번엔 조금 조용한걸 탈까?"

"그럼 저기 회전 그네에 가보자. 같이 갈 사람?"

"으응...우리도 같이 가볼래 라라?"

"응, 좋아 리토~"

역시나라고 할까, 리토는 하루나가 속해있는 그룹과 동행하는걸 선택했다.
리토와 라라, 하루나랑 리사, 미오가 회전 그네를 타러 떠나고,
미캉은 야미의 팔을 잡은채 귀신의 집을 가리켰다.

"야미짱. 나랑 귀신의 집 보지 않을래?
친구들이 여기가 정말 무시무시하대."

"그러죠."

"아키츠군은 어떻게 할꺼죠?"

"나도 귀신의 집으로 가볼까 하는데...코테가와도 함께 가지 않을래?"

"그럴까요?"

미끌미끌한 문어형 우주인씨가 나오면 야미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조금 걱정이고,
인원을 나눈다면 반반으로 하는게 좋겠지.
코테가와랑 함께 야미와 미캉의 뒤에 줄을 서 기다리면서 귀신의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캉네 초등학교에선 담력시험 비슷하게 생각하고 도전하는 아이들이 많은것 같았다.

"「구교사 묵시록 괴담」?"

"네. 유원지에서 그렇게 홍보하던걸요?
불가사의한 예언에 따라 차례차례 벌어지는 참극의 결말.
실화에 바탕을 뒀다고 선전하는지라 인기 만점이라구요?"

뭐야 그거? 「구교사의 유령 사건」으로 불리던게 아니었어?
쓸데없이 거창한 명칭이 붙은 이야기를 듣는새 어느덧 귀신의 집에 입장하게 되었다.
어디...얼마나 무서울지 기대되는데?



「에비...히이익!?」
「크흐......흐악!?」
「히이익~! 죽이지마~!」
「죄송합니다아아아! 용서해주세요!」

"...어째서 귀신들이 다들 도망치는거죠?"

"......"

의아해하는 미캉 옆에서 야미는 침묵했다.
귀신의 집에서 튀어나오던 귀신들은 야미를 보는 순간 모조리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 버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여기 우주인들은 모두 야미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우주제일의 킬러로 유명한 야미를 상대로 겁주려는 녀석이 있다면 내 쪽에서 한번 얼굴을 보고 싶다.

"미안 야미짱. 괜히 내가 여기로 오자고 해서..."

"괘, 괜찮습니다."

사과해오는 미캉의 모습에 야미로선 드물게 말까지 더듬고 있고...
내심 찔리는게 많은가보다.
두려움으로 가득차야 할 귀신의 집이 웃지못할 이상 현상으로 채워져 가는 모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모르고 있는데 뒤따라오던 남녀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여기가 그렇게 무섭다면서?
그런데 어째서 귀신들이 다들 저렇게 우왕좌왕하는거야?"

"(쉿...조용. 저 앞에서 걸어가는 금발 녀석 보여?
사이난 최악의 양아치 아키츠 료스케라구.)"

"(설마...그 악명높은 불량배?)"

"(그래. 뒷골목에서 얼쩡거리는 녀석들 치고 그녀석에게 안맞아본 녀석이 없을 만큼 폭력적인 녀석이라고.
보나마나 여기서 일하는 녀석들은 저녀석에게 맞아봤던 놈들이겠지.
저기봐. 얼굴을 보자마자 겁먹곤 냅다 튀고 있잖아?)"

"(야만적이야...)"

아니, 내가 아니라 야미를 보고 도망친거라고.
누가 누굴 겁줬다는거야?
야미를 바라봤지만 흐지부지하게 변해버린 귀신의 집에 대해 불평을 하는 미캉 때문에
야미는 식은땀을 흘리며 모른척 딴청을 피우고 있고.
코테가와는 쓴웃음을 짓곤 야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결국 귀신의 집 탐험은 엉망진창인 감상만 남고 끝나버렸다.



"야아아...미안. 그만 우리도 모르게 몸이 반응해서 말이지."
"놀러온건데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

귀신의 집 탐험이 끝나고 잠시 귀신역을 하고 있던 우주인들과 이야기 할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놀러왔다는 말로 오해를 풀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된 우주인들은 미캉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그쪽의 꼬마 아가씨는 못보던 분인데?"

"아...전 미캉이라고 해요."

"구교사 탐험 때 있던 유우키 리토의 여동생이에요."

"그때 그 소년 말이로군?"

리토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우주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곳이 꽤나 인기가 있나보죠?
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고."

"물론이지. 우리 유원지의 명물이라구.
닥터 미카도 덕분에 다시 할 수 있었던 직장인데 기왕 하는거 최고로 만들지 않으면!"

프로정신이 넘치시네요 아저씨들.
의욕적인 우주인들의 태도에 감탄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듣기론 유원지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매지컬 쿄코 플레임」에서 단역으로 출연을 제의 받았단다.
그렇기에 좀더 박진감있는 귀신 흉내를 내기 위해서 최근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최근엔 그동안 인기를 끌었던 「구교사 묵시록 괴담」이외에도 새로운 소재를 만들어 내려고 고민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꼭 연락 부탁한다면서 명함을 건네주던 우주인들에게 인사를 한뒤 헤어졌다.



그후 넷이서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놀이기구들을 타고 돌아다니던 중, 멀찍이서 리토와 하루나 단 둘이 걷고 있는걸 보게 되었다.
걷다가 근처 벤치에 피곤해 하는 모습의 하루나를 앉히곤 아이스크림을 사러 판매대로 뛰어가는 리토의 모습에 상황이 대충 짐작이 갔다.
활력이 넘치는 라라, 리사, 미오의 페이스에 따라가지 못한 리토와 하루나가 잠시 쉴겸 산책을 하는것 같았다.
하루나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면서 리토는 하루나에게 대관람차를 권하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피곤하지도 않고 유원지 전체를 한눈에 구경할 수 있는 놀이기구니까 좋은 선택인데, 단둘이 대관람차라니...대담해졌구나 리토.
관람차에 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의식할지도 모르겠지만.
탈만한 놀이기구는 거의 다 돌아봤기에 우리도 리토와 하루나를 따라 대관람차로 유원지 투어를 마무리 하기로 했다.

리토와 하루나, 나와 코테가와, 야미와 미캉이 순서대로 관람차에 탔다.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관람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바퀴의 제일 아래부분에 위치한지라 볼만한 풍경은 없었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맞은편의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유원지 투어가 즐거웠는지 코테가와는 살짝 미소지은채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가만히 코테가와의 옆모습을 감상하다가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고개를 돌린 코테가와와 눈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는게 들켰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코테가와랑 마주보는 상황이 쑥쓰러워서 그랬을까
무심코 고개를 밑으로 숙이다가 코테가와에게 툭-하고 정강이를 채였다.

"윽?"

"변태-. 어딜 보는거에요?"

다리를 오무리고 살짝 치마를 움켜쥔채로 코테가와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 치마 아래 속옷을 엿보려 한다는 식으로 코테가와에게 오해를 산 것 같았다.

"따, 딱히 이상한 의도는 없었어?"

"말을 더듬는건 내심 찔리는게 있기 때문이죠?"

"으..."

경치가 아니고 네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고백하면 맞으려나?
살짝 볼을 부풀린 코테가와의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오른편 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코테가와를 불렀다.

"그럼, 여기에 앉아."

"에?"

"훔쳐볼까봐 걱정되는거라면 함께 앉아서 구경하자고."

"그, 그건..."

"주저하는건 내심 걸리는게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근처의 아이가 말했습니다."

"...하아...알겠어요."

당황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코테가와는 이윽고 체념한듯 조심스레 일어나 내 오른편 자리에 앉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차례 숨을 내쉰 코테가와는 눈을 흘기며 물었다.

"...혹시 이걸 노린건 아니겠죠?"

"계획대로"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대사입니다.
기왕이면 검은 공책이라도 펼쳐 들고서.

"이...이 난봉꾼!"

"노, 농담이야!"

얼굴이 빨개져선 주먹을 휘두르려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황급히 사과하며 성난 코테가와를 달랬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요란법석을 떠느라 관람차가 소리를 내며 덜컹거리자 통제실에서 경고가 들어왔다.

「거기 두사람, 관람차에서 외설행위는 금지입니다.
대관람차 안에선 얌전히 경치를 감상해주세요.」

"읏...!"

터무니없는 방송을 듣고선 코테가와는 움직임을 딱 멈춰버렸다.
째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식으로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자
코테가와는 들어올린 주먹을 말아쥔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이것이야 말로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법이지.
결국 코테가와는 불합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어느덧 관람차는 절반 높이까지 올라왔고, 창 너머론 유원지 정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코테가와도 기분을 풀곤 내려다보이는 경치들을 차근차근 감상하기 시작했다.
나도 경치 구경이나 할겸 왼쪽 창문 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코테가와는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까?
시선을 느꼈는지 코테가와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의아한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키츠군? 왜 그렇게 쳐다보는거죠?"

"그냥, 오른쪽 경치는 어떤가 싶어서 말야."

"왼쪽에 앉아서 오른쪽 창밖을 쳐다보려면 불편하지 않아요?"

그야 불편은 하지만...
함께 앉아 있으면서 서로 반대 방향만 바라보니까 어쩐지 외면하는것 같잖아.

"음...나로선 코테가와랑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달까...? 아하하..."

"...아키츠군은..."

"응?"

"후우...뭐, 아키츠군이 불편하지 않는다면 좋아요."

한차례 머리를 매만진 코테가와는 별다른 이견없이 수긍했다.
그렇게 한동안 코테가와가 앉은 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올라가는 관람차 속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평화로운 분위기에 잠겨있었다.
그런데 코테가와로서는 창밖을 바라도던 내 시선이 어쩐지 신경쓰였나보다.
힐끔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코테가와의 모습에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아, 미안. 혹시 신경쓰인다면 이제 그만 고개 돌릴테니까..."

"그게 아니에요."

코테가와는 부정하곤 내 얼굴에서 비스듬히 시선을 옮겼다.

"저도 그냥 반대쪽 경치가 궁금해졌을 뿐이니까요."

내 뒷편에 있는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한 코테가와의 모습에 민망해져서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자의식 과잉이었던 건가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그대로 코테가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걸 계속했다.
그런데...

관람차 안에서 바로 옆에 앉은채로 맞은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이 상황.
서로의 어깨가 붙을 정도의 거리에 있다보니 의도치 않게 시선이 자꾸만 코테가와의 얼굴을 향하게 된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부드러운 흑빛 머리카락.
오똑한 코 아래로 윤기가 도는 붉은 입술.
그리고...흔들림없이 또렷한 눈동자.
청아함 속에 강인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 가만히 코테가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면,"

"으, 으응?"

갑자기 말문을 연 코테가와에 당황해 버벅이고 있자 코테가와가 말을 이었다.

"구레나룻은 이제 기르지 않네요?"

"아...이젠 익숙해졌으니까."

구레나룻을 처음 잘랐을 땐 인생이 끝난 것만 같은 좌절감으로 한동안 악몽에 시달렸었지만...
4년 동안 쌓아왔던 인연의 무게는 구레나룻 하나 자르는 정도로 위협받을만큼 가볍지는 않았나보다.
최근 1년동안엔 점점 학우들과의 사이도 개선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고.
...개선되고 있는걸까?
적어도 이래저래 얼토당토 않은 소문으로 시끄러운 나랑 이야기하는 친구들도 생긴걸 보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과거 구레나룻으로 덥수룩했던, 지금은 맨들맨들해진 볼에 살짝 손을 댄다.
까끌까끌한 느낌이 아닌 매끌한 피부의 감촉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코테가와는 피식 웃곤 말했다.

"구레나룻을 다시 기르지 않기로 한건 잘했다고 봐요.
덕분에 털보처럼 보였던 1학년때 보단 많이 나아졌으니까요."

"그, 그래?"

털보입니까.
그래도 양아치 보단 훨씬 낫네.

"나중에 가선 익숙해졌지만, 처음 아키츠군을 봤을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아요?
사나운 눈매에 털보같이 무성한 수염. 무슨 산적두목처럼 보였다고요."

"......"

...구세대 양아치 마냥 한껏 구레나룻을 길러서 다니던 예전의 나는 참 대단했네요.
그런 털보 패션으로 용케도 4년을 버텼으니 말이죠.

"그래도 그때 용케도 말을 걸었네 코테가와는.
보통은 무서워서 피하질 않아?"

"옳지 않다고 생각한걸 그냥 보고 지나칠 순 없었어요.
명확하게 말을 하면 알아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올바름을 추구하는 코테가와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듯 했다.
그래도 1년이 지난 지금은 코테가와도 꽤나 유연함이 늘어났다고 본다.
만약 코테가와가 지금의 성격이었다면 1년전 고교 입학식때 나에게 말을 걸어줄 일은 없었겠지.

"그리고...잘못이 있다면 지적해주는게 친구잖아요?"

"......"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것은 좋은 가족과 친구라는 말이 정말이었군요.
약간 감회에 젖어 만족감에 잠겨있는데, 그런 내 침묵을 오해했는지 코테가와가 약간 당황한듯 덧붙였다.

"아, 그렇다고 그때 아키츠군이 나빴다는건 아니에요.
그대신 1학년 학급 활동에서 아키츠군은 여러모로 힘써줬으니까 솔직히 감사하고 있어요.
...저기, 혹시 방금전 말 때문에 기분 상했어요?"

"으으응...코테가와가 그런 사람이라서 기뻤어."

"뭐, 뭐에요. 부끄러운 소릴 하기는..."

쑥쓰러운듯 코테가와는 살짝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후, 힐끗 내쪽을 바라본 코테가와는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보니까 하는 말인데요."

"응?"

"역시 아키츠군은 수염을 자르는게 나을거 같아요."

"에...또 그 이야기야?
그건 교내 봉사랑 시험 내기때 이미 끝난 얘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조금은 단정한 모습이 보기도 좋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코테가와는 양손을 들어 내 얼굴쪽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무슨...?"

"...잠시만 그대로 있어요."

코테가와는 가만히 내 입가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입술을 살짝 누른 손가락이 내 코 밑과 턱 아래를 살며시 가렸다.
가느다랗고 부드러운 손가락의 감촉에 당황하면서 빤히 나를 바라보던 코테가와를 마주보았다.
이윽고 코테가와는 뭔가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얼굴에 얹어진 두 손을 치웠다.
양 손을 내린 코테와가는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그래요."

"뭐가 말야?"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건 아니란걸 말예요."

"심해!?"

"그러니까, 수염 잘라볼 생각 없어요?"

"이야기의 맥락을 못잡겠습니다만!?"

어째서 거기서 「그러니까」로 연결되는거야?

풋...

"억지로 권하진 않아요.
그냥 그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것 뿐이니까."

킥킥대던 코테가와는 다시 오른편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우리가 탄 관람차는 다시금 지상으로 내려왔다.
유원지 직원이 관람차 문을 열어주자 코테가와는 기운차게 밖으로 나갔다.

"읏차-"

대관람차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코테가와는 내쪽을 향했다.

"당신은 수박이라고 봐드리죠."

"어?"

"줄이 이렇~게 그어져 있잖아요?"

코테가와는 양쪽 검지 손가락을 코밑에 대고선 콧수염을 그리듯 양옆으로 주욱 선을 그었다.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인 코테가와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거리며 웃곤 양손을 뒤로 돌렸다.
등 뒤로 손깍지를 낀채 살짝 몸을 숙인 코테가와는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한번 정도는 생각해봐요."

말을 마치고 경쾌하게 몸을 휙 돌린 코테가와는 멀찍이서 보이는 라라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개구쟁이처럼 활기 넘치는 코테가와의 뒷모습을 홀린듯 바라보다 방금전 권유를 떠올려 보았다.

...이걸 정말 잘라버려...?

제자리에 멈춰서 턱을 괸채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심했다.
고등학교 들어서 처음 본 코테가와의 장난스런 행동에 무심코 마음이 움직였다가 놀라 고개를 홰홰 저었다.
진정하자 나...이성적으로 생각하자고.
순간적인 유혹 때문에 약속을 어기고선 하나같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대체 몇이던가.
꼭 하지 말라는걸 했다가 스스로 불행에 빠지는 결말을 내가 따라할 것 같아?
몸에 닥치는 물리적인 위험 같은거야 이제와선 아프지 않을만큼 튼튼해졌지만,
남은 5년을 기다리지 못해서 염색이랑 수염을 없애버리곤 하루하루가 사고로 가득찬 엉망진창 생활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뭐, 솔직하게 말해서 코테가와에게 단정하게 변한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망도 있다.
코테가와에게 권유받기도 했으니까, 수염을 깎은 뒤에 코테가와의 평가도 들어보고 싶고.
언젠가는 반드시 코테가와 앞에서 「음핫핫! 이것이 바로 이몸의 완전체다!」라고 뽐내줄거라고.
그러니까... 5년 후에 말이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갔던 수많은 선인들의 교훈을 헛되이 하진 않습니다.
기왕 얘기가 나온거 내심 핀잔 들을 각오를 하고, 「강산이 반만큼 변할 정도의 세월」을 기약하며 코테가와에게 답했다.

"...5년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네?"

"어?"

예상했던 코테가와의 것이 아닌 앳된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자, 놀란 얼굴의 미캉이 내 앞에 서있었다.
미캉의 뒤에서 따라 내려오는 야미를 보건데 관람차에서 이제 막 내린 것 같았다.
방금전까지 바로 눈앞에서 등을 돌려 걸어가던 코테가와는, 어느새 멀찌감치 떨어져서 라라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오랫동안 상념에 잠겨 있었나보다.
기껏 고민하다 꺼낸 말이 대답없는 메아리로 끝나버린 덕분에 영 모양새가 민망하다.
본의 아니게 내 말을 듣게 된 미캉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료스케 오빠? 방금 말은..."

"...아무것도 아냐. 못들었다면 그냥 잊어줘."

부끄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적당히 얼버무리곤 관람차에서 내린 야미와 미캉을 인솔해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캉은 납득가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그런가요...」라고 중얼거린 후, 더이상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나이에 비해서 어른스러운 미캉의 태도가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고맙게 느껴졌다.
리토처럼 하늘에서 여자애가 뚝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새 딴 사람이랑 얘기하는 상황을 겪을 줄이야.
다음엔 적어도 얼굴을 들고 얘길 해야지. 생각에 너무 빠져있지도 말고.

그렇게 대관람차를 마지막으로 주말의 유원지 투어는 끝을 맺었다.




그리고...즐겁게 주말을 보내고 나선, 또다시 유쾌한 한주가 계속될거라는 기대를 안았지만...
세상일이 꼭 바라는대로 돌아가진 않는다는걸 깨달았습니다.




「으아악!」

쿠우우웅---!

쉬는시간. 학교 한쪽에서 들려온 굉음에 놀라 소리가 들린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도중에 도서실에서 뛰쳐나온듯, 책을 들고 복도를 달려가던 야미와 합류했다.

"야미, 너도 들었어?"

"당연합니다. 그런 큰소리, 듣지 못하는게 이상하지요.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요?"

"글쎄? 우선 가보면 알겠지. 큰일은 아니어야 할텐데..."

대화를 나누며 현장에 도착해서 먼저 본것은 당황한채 서있는 하루나와 코테가와의 모습이었다.
하루나와 코테가와의 근처에는 바이저를 쓰고 광택이 나는 소재의 코트를 입은 두명의 사내가 있었다.
옆머리를 밀어버린 모히칸 스타일의 장발 사내는 무너진 벽에 파묻혀 기절해 있었고,
웨이브진 머리를 포니테일로 틀어올린 사내는 제자리에 선채 쓰러진 동료 사내를 삿대질하고 있었다.
두 손가락으로 쓰러진 남자를 가리키던 사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녀자를 겁박하는 남자는 맞아도 싸다고."

멋진 할머님이시로군요. 동경합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말하는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위풍당당 자체였다.

그런데 멋지게 서있는 사내를 보던 야미의 표정이 굳었다.
조용히 한손을 칼로 변환시킨 야미는 옆에 서있던 나에게 작게 말했다.

"저 남자의 가슴에 새겨진 마크... 'SOLGAM'의 표식 입니다."

"SOLGAM?"

"우주의 모든 범죄와 관련되어 있는 마피아 조직입니다."

"허어...?"

'SOLGAM'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그런 악명 높은 조직이 여긴 무슨 일이지?

포니테일의 남자는 하늘을 찌를듯 올렸던 손을 내리곤 하루나와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다치신곳은 없으세요? 하루나씨, 코테가와씨?"

"엣?" "에에?"

웃으면서 살갑게 말을 건네는 남자의 모습에 하루나와 코테가와는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서있었다.
둘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와, 안부를 물어오는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하던 중 멀찍이 서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아, 아키츠군!"
"아키츠군!"

"료스케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남자는 환한 얼굴이 되어 한팔을 크게 흔들었다.

"아! 료스케씨! 야미씨!"

반가운듯 팔을 휘휘 흔드는 남자의 모습이 트리거가 됐는지 칼로 변형시킨 손을 치켜들고 야미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놀라서 남자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는 야미의 뒷덜미를 잡곤 야미를 들어올렸다.
내 손에 매달려 공중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던 야미는 빼꼼 고개를 돌려 나를 째려보았다.

"무슨 짓입니까 아키츠 료스케?"

"진정해. 오시즈잖아?"

"무슨...?"

"아! 알아보겠어요?"

"오랜만...은 아니구나 오시즈."

반가운듯 다가오는 남자, 정확히는 남자에게 빙의한 상태인 오시즈를 향해 남은 한손을 들어올리며 화답했다.

"이런 모습이라 혹시나 못 알아볼까 걱정했어요."

오시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바이저에 가려진 눈과 코트에 가려진 입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에게 말을 건네온 오시즈는 어쩐지 기분이 좋은것 같았다.

"후후...이걸로 벌써 두번째네요?"

"응? 뭐가?"

"료스케씨가 알아차려 준 횟수말예요."

"아..."

하루나에게 오시즈가 빙의했을 때를 말하는거로군.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일때 톡톡하고 내 팔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있었다.
팔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덜미를 잡힌 고양이 같은 포즈로 나를 노려보는 야미가 있었다.

"...아키츠 료스케."

"어?"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껍니까?"

"아...미안해 야미."

오시즈랑 대화하느라 야미를 들고 있던걸 깜빡했네.
팔을 내려 뒷덜미를 잡힌 야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 혹시 옷이 늘어나진 않았어?"

"전투복이라 상관없습니다.
그나저나 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었군요."

"다음부턴 주의할께."

"에티켓을 문제 삼은게 아니라, 바보같은 완력이라고 말한거 였습니다만..."

야미는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돌리곤 오시즈를 향했다.

"구교사에서 만났던 유령...입니까?"

"네. 야미씨도 건강해보여서 다행이네요~"

생글생글 웃던 오시즈는 문득 호기심이 인듯 나를 바라보며 약간 들뜬 분위기로 물었다.

"그래서...이번엔 어떤 추리를 하셨나요 명탐정님?"

오시즈라고 눈치챈 것 말인가?
뭐, 날 「료스케씨」라고 부르는건 오시즈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부르는 방법이나 말투도 낯이 익었고.
그래도 솔직히 말하자면 반쯤 찍기였지.
설마 리토나 하루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오시즈가 빙의할줄은 생각도 못했으니까.
아무튼 오시즈의 의문에 답해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건..."

"아! 역시 듣지 않을래요~♪"

오시즈는 갑자기 손가락으로 살짝 내 입술을 눌렀다.
말문이 막힌채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에 오시즈는 생긋 웃었다.

"때로는 모르는게 더 기쁘거든요."

알쏭달쏭한 말이네.
뭐, 트릭이 밝혀진 마술은 재미가 시들해지는것과 같은거려나?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 셋의 모습은 다른 이들을 당황시켰나보다.
코테가와와 하루나는 물론이고, 어느새 몰려온 리토, 라라, 미카도 선생님께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요컨데 'SOLGAM'이라는 조직의 남자에게 오시즈가 빙의한 상황이라고 간략하게 요약했다.
솔직히 지금 내가 알고 있는건 그것 뿐이었고.
자세한 이야기는 오시즈가 설명했다.

오늘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돌아다니던 오시즈는 복도 구석에 숨어있는 두 남자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상한 낌새에 몰래 다가가던중 두 남자가 코테가와와 하루나를 납치하려는 장면을 목격했단다.
난데없는 위기 상황에 놀란 가운데 오시즈는 기지를 발휘해 남자들 중 한명의 몸에 빙의했다.
두 남자를 동시에 상대하기보다는 한명의 몸에 들어가서 나머지 한명을 쓰러뜨리는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명의 남자(포니테일)의 몸을 빼앗은 오시즈는 옆에서 코테가와를 납치하려던 남자(모히칸)를 염력으로 날려버렸다.
복도를 함몰시키며 벽에 처박힌 모히칸 남자는 기절했고 그 이후의 상황은 나와 야미가 지켜본것과 같다.
사정을 들은 우리는 오시즈(포니테일 남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오시즈 덕분에 위험한 사태를 사전에 피할수 있었던 둘은 안도했고, 사정을 들은 미카도 선생님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미카도 선생님과 'SOLGAM'은 과거에 연관된 적이 있었던것 같았다.

...기억났다. 미카도 선생님을 데려가려고 인질을 이용해 협박하던 그 조직 말이군.
지금에 와선 코빼기도 안보이는 라라의 약혼자 후보들 만큼이나 존재감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학생들이 위기에 처할뻔 했다며 자책하는 미카도 선생님을 친구들과 함께 달래곤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우선 기절한 모히칸 사내는 놔두고 빙의당한 상태인 포니테일 남자에게서 정보를 받아내기로 했다.
오시즈가 포니테일 사내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온뒤 정보를 얻어내자는 의견에 오시즈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나를 보았다.

"저...몸 밖으로 빠져나오는걸 좀 도와주실래요 료스케씨?"

"응?...아, 아직 익숙하지 않은가보구나?"

"...네."

저번에 하루나에게 빙의했을때도 완전히 자력으로 빠져나온건 아니었으니 오시즈로서는 아직 경험이 미숙했나보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런걸로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데.

우선 오시즈가 빠져나가고 난 뒤 정신을 차릴 남자에 대응하기 위해 오시즈의 눈을 천으로 가렸다.
시야가 가려진 상태가 된 오시즈는 불안한듯 살짝 몸을 떨었지만 손을 마주잡자 조금씩 진정해갔다.
마주잡은 손바닥으로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잘 부탁드릴께요 신사님."

"물론이죠 아가씨."

긴장을 풀려고 했는지 떨림이 가시지 않은 어조로 농담처럼 말을 건네오는 오시즈의 장단에 맞춰주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 그야 남성의 손을 잡으며 할말은 아니었지만 속은 엄연히 오시즈라고.
리토도 말했잖아. 겉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마주잡은 손이 조금씩 쥐어지며 힘이 실리는걸 느낀다.
그대로 의식을 집중한채 오시즈를 남자의 몸에서 빼내었다.



이후 눈이 가려진 채 정신을 차린 남자를 추궁한 결과 알게된 정보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이들은 우주 마피아 'SOLGAM' 소속이다.
2. 지구에 온 인원은 모두 7명. 간부인 '케이즈'와 그의 부하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3. 이곳에 온 목적은 미카도 선생님을 'SOLGAM'으로 끌어들이는 것.
4. 포니테일의 남자와 모히칸 장발 남자가 학교에 온 목적은 미카도 선생님을 협박할 수단으로 쓸 인질을 납치하기 위한것.

포니테일 남자와 모히칸 남자를 다시 잠재운 뒤 적당한 곳에 가둬두고 앞으로의 대응에 대해 미카도 선생님과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남은 적의 수는 5명뿐.
적들의 위치는 포니테일 남자의 통신기로 왔던 신호를 라라가 역추적 할수 있다.
빙의와 염력을 사용하는 오시즈, 다양한 트랜스폼 능력을 쓰는 야미, 천재 발명가이자 괴력의 소유자인 라라, 거기에 덤으로 나.
뭐...오시즈는 개를 무서워하고, 야미는 미끌거리는 것에 약하고, 라라는 꼬리가 약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런거야 서로서로 보충해주면 되는거고.
천재 의학자 미카도 선생님은 후방 지원쪽에 특화되신 분이니 제외한다 하더라도
그냥 이대로 적의 아지트로 냅다 쳐들어가서 정면에서 박살을 내놓아도 간식먹을 시간도 안걸릴 전력이다.

하지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나 전력은 많을 수록 좋지.
한 손을 들고 친구들의 주의를 끌었다.

"저기말야. 이런 건 어떨까?"

"어떤?"

"머릿수가 많은 쪽이 유리하니까 좀더 인원을 늘리는것 말야."

"하지만 전력이 될만한 사람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라구요.
설마 위험한 적을 상대로 일반인을 말려들게 할 셈은 아니겠죠?"

"안심해. 추가될 사람들은 보통이 아니니까."

"그럼?"

의문을 표하는 친구들을 보곤 지갑을 열었다.
「사이난 유원지」라는 글자가 크게 박힌 명함을 지갑에서 꺼내 친구들에게 보이곤 씨익 웃었다.

"그 아저씨들...요즘 새로운 소재로 고민이라던데 이번 기회에 보은이라도 하라고 해야지."

명함에 적힌 연락처를 보며, 귀신의 집에서 봤던 수많은 이형의 외계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보의 부재는 인식의 괴리를 낳는다.

이제 미지에 대한 무서움을 알려줄 시간이다.




밤이 되고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진 가운데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협력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저씨들."

"뭘, 닥터 미카도에겐 신세진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 전문이기도 하고. 오히려 불러줘서 고맙다고."

괜찮다며 손을 내저으며 웃는 늑대인간을 바라보았다.
집채만한 외눈의 갑각 문어를 필두로, 온몸이 비늘로 뒤덮힌 피쉬맨, 돌고래같은 얼굴의 괴인, 두개의 뿔이 난 드라큘라같은 외모의 외계인,
길다란 털로 뒤덮힌 설인, 다른 이들보다 머리 두개는 더 큰 외눈의 거인, 붕대를 칭칭 감은 미이라, 온몸을 가시와 같은 갑주로 두른 외계인,
작은 털뭉치같은 수십명의 소형 외계인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까지.
「사이난 유원지」에 근무하는 우주인들을 이번 일에 끌어들였다.
미카도 선생님 덕분에 다시금 일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된 우주인들은 그동안 미카도 선생님께 보답할 기회를 갖고 싶었나보다.
'SOLGAM' 이라는 이름의 무게에 조금 위축되던 우주인들이었지만 위험상황을 최대한 제거한뒤 전개되는 계획을 듣고 다시금 기운을 찾은것 같았다.
설사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땐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니까.
라라, 야미, 오시즈, 내가 각각 적을 1명씩 상대하고 남은 1명을 우주인들이 단체로 상대하면 끝나는 일이고.
다만 이번 계획은 외계인들에게 「귀신의 집」용으로 쓸 소재를 재공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으니까 되도록이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저마다의 몸에 소형 카메라를 장착하곤 나중에 영상을 하나로 편집해 「귀신의 집」에 쓸 예정이라고 하니까.

「귀신의 집」처럼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잡아보는게 이번 계획의 요지였다.
이번 계획에서 라라는 「데루데루비전군」을 만들어 주었다.
「데루데루비전군」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실감나는 영상을 보여주는 기계로,
작년 수학여행의 「유령의 밤」때, 유령으로 분장했던 사람들마저 꽁지 빠져라 도망칠 정도로 리얼한 귀신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나의 요구사항을 반영해서 붙잡아둔 'SOLGAM' 소속 두 남자의 모습을 추가했다.
눈좀 뻥 뚤리고 입도 시원하게 열린, 좀 많이 호러틱한 모습으로.

처음에 적들의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건 나 하나로 하기로 했다.
라라나 야미의 경우는 이미 적들이 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상황.
정체불명의 것을 접했을 때의 공포심을 자극할 계기를 만들려면 내가 나서는게 낫다고 판단했다.
라라와 야미, 오시즈 외계인 아저씨들과 다시 한번 계획을 확인한후 각자의 위치로 이동한 뒤 계획을 시작했다.
「데루데루비전군」이 보이지 않도록 내 등에 배치하고서 준비해둔 검은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적들의 아지트로 들어섰다.
나를 발견한 'SOLGAM' 의 사람들은 경계하는 모습으로 대형을 짰다.

"왠 놈이냐!"

"......"

내가 누군지 묻는다면 대답해주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알수없는 상대」라는 연기를 해야 하니까 대답은 불가.
침묵으로 일관하며 몰래 「데루데루비전군」의 영상 재생 기능을 작동시켰다.

{...아...아...아...}
{...롭다...괴...롭...}
{...워...추워...}
{나...살...고...싶...어...다시...!}
{외...로워...누...군가...}


순간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했다.
이거 왜 이렇게 음이 끊기는거야?
반나절만에 이것저것 기능을 많이 넣다보니까 조금 부실한가?

{...즈...님?}
{아아...케이...님...!}
{...째서...우릴...왜...}
{아...파...괴...로워...그...러...니까...}
{...도...함께...!으...흑...}
{흑...흐...쿠흐흐흐흐...!}
{크흐흐흐흐흣...!}
{크...크크큭...!}


의도했던것과 달리 단락적으로 들려오는 느릿느릿한 목소리는 예상했던것 보다 더 음울했다.
으음...내가 지정한 대사였지만 이런 방식으로 재생되니까 나도 듣기가 참 거북하네.

"게...게스텔!? 네즈란!? 너, 너희들이야!?"

내 등 뒤로 나타난 영상에 경악해 굳어있던 남자 중 한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게스텔이랑 네즈란이었나보네.
뭐, 그 두 녀석들은 지금쯤 미카도 선생님의 창고에서 얌전히 자고 있을거라고.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들 사이로 누군가의 이빨이 딱딱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효과가 빨리 나타난것같아 즐거워 무심코 웃음이 새었나보다.
다른 녀석들과는 디자인이 조금 다른 옷을 입은, 간부로 보이는 인물이 나를 노려보았다.
(바이저로 시선이 가려졌지만 비틀린 입매로 보건데 노려보는게 맞았다.)
오른쪽 이마에서 입술 오른쪽 옆까지 길게 흉터가 나있는 모히칸 스타일의 인물이 간부인 '케이즈'인것 같았다.
들었던 정보를 재확인 하기 위해 적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들었던대로 남은 인원은 다섯명이 맞는것 같네.
이정도 인원이라면 나름대로 괜찮은 귀신의 집 시나리오가 짜여질 것 같은데?
가만히 서서 물끄러미 녀석들을 주시하던 중 갑자기 케이즈가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에 화가 난 듯 케이즈는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넌...누구냐?"

"......"

그러니까 알려줄수 없다니까 그러네...
아니면 나한테 「너희들에게 알려줄 이름따윈 없다!」라는 대답을 바라는거야?
케이즈의 의문을 무시하고 분위기를 잡을겸 음성의 고저와 장단에 주의하면서 적당히 소설 속에서나 나올법한 대사를 꺼냈다.

"...태양의 가호가 사라진 밤은 망자들의 시간..."

"...뭐?"

"너희들의 운명...심연의 어둠속으로 끌어내려 주겠다."

나름대론 분위기를 잡는다고 한껏 목소리를 끌어내렸는데 생각만큼 잘 먹히진 않았나보다.
어안이 벙벙해진 케이즈는 이내 고함을 치며 부하들을 지휘했다.

"미친...! 쏴버려!"

부하들은 제각기 총을 꺼내들어 나를 겨누었다.
역시 생각처럼 이야기가 풀려가는건 아니로군요.
하지만 어차피 이것도 상정하던 범위 안이다.
적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갑자기 손에서 총들이 빠져나와 허공으로 떠 올랐다.

"뭣!?"

당황하는 케이즈와 부하들의 마음도 이해한다.
건물벽을 통과해서 상황을 지켜보던 오시즈가 폴터가이스트로 적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린 거니까.

"케, 케이즈님! 이건...!"

"우선 후퇴한다!"

오시즈의 폴터가이스트로 순식간에 무장이 해제되어버린 녀석들은 허공에 떠오른 총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는 녀석들을 가만히 주시했다.
로브를 입은채로 녀석들을 뒤쫓아 뛰었다간 신비감이고 뭐고 죄다 박살이다.
그렇게 할거였다면 애초에 절규가면을 쓴채로 식칼 들고 등장했겠지.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다.
도망친 녀석들을 몰아넣는건 다른 사람들의 역할.
귀신역을 맡은 아저씨들이 잘해줘야 할텐데 말이지.

놀라는 역할에 충실해주길 바라는 의미로, 도망가는 녀석들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배웅해주었다.

"으아악!"

...엥?

갑자기 철퍽소리와 함께 달아나던 한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넘어져 뒹굴었다.
난데없이 바닥을 구른 녀석은 황급히 일어서려다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도...도와...꺽!?"

"덱스터!?"

"멍청아! 어서 달려!"

일어나려고 발버둥질치던 남자의 양팔과 다리가 허공쪽으로 꺾이는 모습을 보곤 케이즈는 남자를 내버려둔 채 달아났다.
도망치는 녀석들을 보다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기절시켰다.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가 기절한걸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며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위험하니까 혼자 나서는건 피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투명인간 아저씨..."

"아, 미안. 그래도 방금전 모습은 꽤나 심령현상 같았지?"

혹시 모를 변수에 대비해 몰래 동행한 투명인간의 넉살좋은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멋졌어요 아저씨."

"고마워. 그럼 난 이만 약속 장소로 가볼테니까 일이 다 끝나면 만나자구."

투명인간의 기척이 사라지고 오시즈가 아래로 내려왔다.

"수고하셨어요 료스케씨."

"오시즈야말로 수고많았어.
나야 뭐 수상쩍은 행동을 연기하기만 했으니."

"그럴리가요. 방금전 달아난 사람들을 대할때의 료스케씨의 목소리는 정말 실감났다구요."

"아...그거야, 불량배들 상대로 가끔씩 했던 짓이라...
경험이 있다고나 할까?"

영양가 따윈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경험도 지금에 와선 도움이 되는군요.

"사실 내 목소리보단 라라의 발명품이 더 공이 컸지.
알수 없는 현상을 보면 두려워하는게 보통이니까."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형상을 담은 「데루데루비전군」이 없었다면 이만큼 효과를 내긴 힘들었겠지.

"오시즈도 이만 약속장소로 가봐. 이번 계획은 오시즈의 역할이 크니까 힘내주길 바랄께."

"아, 네! 맡겨주세요~!"

기운차게 대답한 오시즈는 의욕적인 모습으로 떠나갔다.
오시즈의 떠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지정된 위치로 이동했다.

도주경로를 예상해 각 지점에 배치된 인원들.

현재 오시즈는 개천가로 지원을 나갔다.
개천가에는 피쉬맨과 문어괴인을 비롯한 수중형 우주인들이 잠복하고 있다.
아마도 계획대로 된다면 개천가에서 한명을 잡을 수 있겠지.
나머지 적들은 우리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몰이식으로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기로 했다.
개천가의 일이 끝나고 여유가 된다면 오시즈랑 다른 사람들은 각자 다른 지점을 지원하러 가게 될 예정이었다.

투명인간은 숲으로 지원을 나갔다.
늑대인간과 사이클롭스, 미이라 등의 우주인들은 숲에서 대기중이었다.
털뭉치같은 소형 외계인들은 구교사 건물에서 꺼내온 인체모형에 들어가 수풀 사이에 숨어 있었고.
라라의 도움으로 숲에 인공 안개를 형성한뒤 무리의 가장 뒤에 떨어진 녀석을 포획하는 작전이었다.
혹시나 저항이 심하거나 소리를 막는데 실패할 위험에 처한다면 라라의 「뿅뿅 워프군-개량형」으로 붙잡은 적을 강제 워프시키기로 했다.
준비해둔 함정 안으로 워프될테니까 탈출 할 생각 따윈 못하겠지.
미리 말해두지만 알몸 상태라서 도망치지 못하는게 아냐. 구덩이가 깊어서 못 탈출하는거라고.

계획의 구체적인 실행 같은거야 우주인 분들에게 위임했다.
어차피 놀래키기 전문은 그분들이고, 「귀신의 집」에 어울리는 시나리오를 나름대로 생각해둔게 있을테니까.
다들 알아서 잘 놀래켜 주시겠지.

라라와 야미는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공중에서 지상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여차하면 라라의 전송 시스템 「데다이얼」에 우주인들을 등록해뒀으니 적들이 도망치는 방향에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수도 있고.

그리고 나는 녀석들 소유의 자동차 근처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혹시 도망책으로 자동차를 사용할지 모른다며 제기된 의견에 내가 지원한거 였는데...
자동차가 두대였다.
한대는 아지트 옆에 세워둔 차량. 다른 하나는 아지트에서 멀리 떨어진 공터에 주차된 차량.
설마 들통난 아지트에 다시 되돌아와서 차를 탈 생각을 할 녀석은 없겠지.
두번째 차량이 있는 공터의 경우는 숲이랑 가까웠기에 아무래도 확률상 더 높다고 판단했다.
두번째 차량이 있는 공터에 도착해 자동차 뒷자석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 앉아 있었다.
혹시나 숲에서 빠져나오는 녀석이 있다면 그때가 내 차례겠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주인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고함을 통한 위협으로 적들을 한곳으로 유도하고 있는듯 했다.
만약에 적들이 예상에서 한참 벗어나는 돌발 행동을 한다면 한명씩 사로잡는걸 포기하고, 그대로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일망타진할 예정이었다.
아직까지 따로 연락이 없는걸 봐선 현재까지는 예정되로 되고 있는것 같은데...

가만히 있기도 심심해서 챙겨왔던 「데루데루비전군」을 만지작거렸다.

{케...님...}
{...로워...}
{께...가자...}


...이거 아직도 말썽이네.
방금부터 지직거리는 음향효과는 여전히 고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스위치를 켜면서 뭔가 조작 미스라도 있었는지 영상마저도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걸 계속 위협용으로 쓸수 있을까 모르겠네...
심령현상으로 치부시킨다면 깜빡거리는 유령도 있을법하다고 우기고 싶지만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 갈지가 문제다.
잠시 스위치를 내려놓고 「데루데루비전군」을 사용하지 않고 놀래킬 방법을 생각하던 중 오시즈가 자동차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왔다.

"료스케씨."

"아, 오시즈. 하던 일은 잘 됐어?"

"물론이죠."

오시즈의 설명으론 대부분의 일은 예정되로 되었다고 한다.
개천에서는 오시즈가 염력으로 한명의 옷자락에 불을 붙이고 개천가로 유도해서 적을 포박했다고 한다.
숲에서는 안개속에서 동료들에게서 떨어진 남자를 우주인들이 달려들어 속박하고 숲으로 들어가려고 했단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동료들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취하려는 남자의 모습에 다급하게 「뿅뿅 워프군」을 사용해서 함정 안으로 이동시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남자는 알몸인채 함정에 빠졌고, 숲의 바닥에는 남자의 옷만 떨어져 있는 이상한 형상이 되어버렸지만.
그리고는 다음 지점으로 우주인들이 이동하려던 중 변수가 생겼다.
부하 한명이 사라진걸 간부인 케이즈가 눈치채곤 신호를 추적해서 되돌아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정에 없던 일에 우주인들과 오시즈는 당황했지만,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즉흥적인 무대를 마련했다.
바닥에 흩어진 동료의 옷을 조사하는 두명(케이즈와 부하 한명)의 뒤에서 몰래 접근한 오시즈는 그대로 부하의 몸에 빙의했다.
그리고는 부하의 몸에 들어간채로 오시즈는 우주인들이 있는 곳으로 합류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케이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비틀거리면서 사라져버렸고.
그리고 이제 막 케이즈가 숲을 벗어나 이쪽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 이제 남은건 케이즈 뿐인거야?"

"아마도요. 그래도 함정에 빠진 사람의 행방을 확인한 뒤에야 모든게 확실하게 끝나겠죠."

오시즈의 말이 끝날즘 차창 너머로 비틀거리며 공터로 걸어오는 케이즈의 모습이 보였다.
난 뒷자리 아래에 숨고, 오시즈는 케이즈가 걸어오는 방향의 반대쪽 차문으로 통과해 나간뒤 숨어서 케이즈의 움직임을 살폈다.
자동차 앞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케이즈는 털썩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걸려고 키를 꺼내는 케이즈의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을 걸었다.

"제발로 걸어들어 오다니...이제 도망은 포기한 모양이군."

"우아아아악!?"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발견한 케이즈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자동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잠깐만!?
타이밍 실수했다.
시동을 걸고 자동차가 출발하고 나서 말을 걸었어야 했는데...!
쫓아가려고 뒷문을 열려고 할때 갑자기 케이즈가 달아나던 자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며 뒷문을 열고 내리자 케이즈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료스케씨~!"

"...오시즈?"

"네. 혹시 몰라서 일단 이 몸에 깃들었는데 괜한 참견이었던가요?"

"아냐.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고마워 오시즈."

"헤헤..."

오시즈(케이즈)는 쑥쓰러운듯 웃었다.

"그럼 이대로 이 몸 상태로 우주인 여러분들께 돌아가는게 좋을까요?"

"...아니. 그럴게 아니라 우선 다시 차 안으로 돌아가자.
차안에서 케이즈가 차문을 잡고 문을 열기 직전의 상황을 다시 재현하는거지."

"그리고는요?"

"빙의를 풀고 잠시 대기해줘.
혹시나 또다시 케이즈가 도망치려거든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빙의를 시도해줄래?"

"물론이에요 료스케씨."

오시즈(케이즈)와 함께 자동차로 돌아가 방금전 상황을 연출했다.
오시즈(케이즈)는 운전석에 앉아 자동차 앞문에 닫은 채로,
나는 뒷자석에 앉아 오시즈(케이즈)를 쳐다보는 채로.
그 상태로 오시즈는 케이즈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정신을 차린 케이즈는 차문을 닫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경악한듯 입을 크게 벌렸다.

케이즈의 입장에선 귀신이 곡할 노릇일거다.
분명 문을 열고 달아났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자동차 안이라는 상황.
오시즈의 빙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트릭이다.
1:1 상황에 한정한다면 상대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을테니까.
놀라는 케이즈의 마음을 좀더 흔들어 보기로 했다.

"...알지 못했나...
내게서 벗어날 순 없어..."

대마왕에게선 벗어날 순 없습니다.
RPG에서 보스 필드에선 도망칠 수도 없다고.
물론 진정한 흑막, 히든 보스는 오시즈.

케이즈의 심박수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동요하고 있군.
두려운건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녀석의 등을 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타락한 자야...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으니.
...그저..."

{우...우우...}
{아...아아아...!}
{...파...아파...}
{...즈...님...함께...}


「데루데루비전군」의 스위치를 켰다.
조금씩 끊김 현상이 심해지면서 귀신들의 음성은 이제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한데 어우러진 절규로 변해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의도한건 아니지만 호러 분위기 좀 연출한 뒤에 쓰러뜨릴 뿐이라고.

"네 부하들과 똑같이 만들어줄 뿐이니까."

"우, 우아아아아아아아아------!!!"

철컥-

또다시 차문을 열고 뛰쳐나가던 케이즈의 움직임이 멈췄다.
오시즈가 다시한번 케이즈의 몸에 빙의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자동차 안에 케이즈를 잡아두는건 오시즈로서도, 나로서도 번거로운 짓이었기에 나도 이만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무슨 외부적인 충격이라도 있었던걸까? 아니면 평소처럼 라라의 덤벙 스킬이 작동한 걸까,
「데루데루비전군」은 뭐가 잘못 되었는지 화면도 음성도 마음대로 꺼져버렸기에 그냥 자동차 뒷좌석에 내버려둔 채 나왔다.

자동차로부터 빠져나온 오시즈(케이즈)에게서 10미터 가량 떨어진 정면에 자리를 잡고 오시즈(케이즈)에게 신호를 보냈다.
오시즈가 케이즈의 몸에서 빠져나온 순간, 갑자기 폭음과 함께 자동차가 화염에 휩싸이며 폭발해버렸다.

콰아아아아앙------!!!

머엉...

폭발에 밀려 넘어져 땅바닥을 구르는 케이즈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몸을 일으킨 케이즈는 내가 바로 근처에 있는것도 모른채 내게서 등을 돌린 상태로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케이즈 이자식...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기본 스킬인 자폭장치를 자동차에 부착해 뒀던건가?
멋모르고 자동차 안에 남아있었다간 낭패를 면치 못했을꺼라 생각하며 타오르는 화염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말은 뭐가 있나...

"...더러운 불꽃이군."

"!?"

내 목소리에 목이 꺾어져라 뒤를 돌아본 케이즈는 눈을 크게 뜨곤 그 자세로 굳어 버렸다.
그런 케이즈를 무시하고 타오르는 자동차를 보았다.
자동차 뒷자석에서 일그러져가는 귀신의 영상들이 보였다.
기괴하게 흔들리는 영상과 함께 저주처럼 느껴지는 말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죽기싫어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어째서내가?


...아...
이거 좀 무섭다...

화염속에서 완전히 고장났는지 「데루데루비전군」은 똑같은 말만 무수히 반복하고 있었다.
케이즈는 바닥에 주저앉아 귀를 막은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약간 쫄아서 불타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자동차는 완전히 폭염에 휩싸였다.
뜨거운 열기속에서 결국 「데루데루비전군」이 폭발한 것 같았다.
덕분에 방금전까지의 소름끼치는 음성은 사라져버려서 내심 안도했다.

바닥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는 케이즈의 모습이 악당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뭐, 방금전의 상황은 나도 조금 무서웠으니까...
살짝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면서 케이즈를 진정시켜보기로 했다.
사실은 케이즈에게 말을 걸면서 나 자신도 달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케이즈의 등뒤로 얼굴을 가까이 해서 살살 달래보았다.

"진정해...구토를 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 없어...
안심해... 안심해... 케이즈."

케이즈에게 말을 걸면서 조금씩 나 자신도 진정해가는것 같았다.
내 몸의 떨림은 이제 가셨는데 케이즈는 도무지 진정하는것 같지 않았다.
설마 울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케이즈."

응답없음.

"케이즈?"

수신거부.

"눈을 떠. 케이즈."

이젠 아예 무릎을 꿇고선 몸을 웅크리고 귀를 틀어막아버린 케이즈의 모습에 할말을 잃었다.
...'SOLGAM' 이라며. 우주 제일의 마피아라면서.
이렇게까지 애가 맛이 간것처럼 굴다니, 그렇게까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은건가?
정면으로 돌아서 몸을 웅크린 녀석을 내려보다가 한숨을 쉬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여기서 더 압박을 해도 나중에가면 외부의 자극을 외면해버릴테니 슬슬 끝을 내야 하는데...
고민하며 서있던 나에게 라라로부터 받은 통신기에 신호가 들어왔다.

- 료스케! 다른 녀석들은 전부 붙잡은거 확인했어.
이제 료스케쪽으로 간 한명만 잡으면 돼~

"...그런가.
그럼 결국 이걸로 마지막이로군..."

이제 이 무대도 여기서 막을 내리면 되겠지.
케이즈는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더 이상 호러같은 장면은 없을테니까 진정하라고 케이즈.

"유감이군...이렇게 끝나 버리게 되다니.
...아무튼, 괜찮겠지. 저 불꽃속의 것과 마찬가지로 너 또한 훌륭한 재료가 될테니까..."

「데루데루비전군」도, 케이즈 너도 「귀신의 집」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꺼라고.
그래도 솔직히 아쉽네. 내 역할은 처음이랑 마지막에 대사 몇번하고선 끝이라니.
투덜투덜 부루퉁한 얼굴을 억지로 숨기고 있자 케이즈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듯 억지로 몸을 일으킨 케이즈는 날 노려보며 탄식하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대체 넌...누구냐! 이 괴물아...!"

...이 모히칸 머리가 지금 싸움거는건가?
눈꼽만큼 생겨났던 동정심마저 사그라들며 머리에 핏대가 섰다.
하여간 깡패들이나 이 놈이나 레퍼토리는 하나도 변하질 않아요.
내 정체를 물어봤자 알려주지도 않았을테지만,
조금 약이 오른 김에 들릴듯 말듯 입을 작게 열어 속삭였다.

"...캐스퍼."

꼬마유령 캐스퍼.
유령인 오시즈가 떠올라서 내뱉은 이름이다.
애초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말하기도 했지만, 들렸더라도 도움도 안되는 정보.
최후의 최후까지 기만으로 가득찬 대답에 잔뜩 고민이나 하라고.

화난건 화난거고, 그래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해야 했기에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검지 손가락으로 케이즈의 이마를 짚었다.

"...그만 미혹의 달빛 아래 잠들어라."

하지만 검지 손가락은 훼이크.
엄지 손가락에 올려놓고 한껏 힘을 모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케이즈의 이마를 튕겼다.
손가락 한개라고 만만하게 생각하진 않았겠지?
이마를 맞고 케이즈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들려는 케이즈를 내려다 보았다.
끈질기네...이만 안심하고 기절하라고.

"깨어나면 네 부하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있을테니..."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끝난 「귀신의 밤」계획에 자축하며 웃는 날 보던 케이즈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절한 케이즈와 부하들을 전부 묶어둔 뒤, 라라가 저스틴에게 연락을 취했다.
저스틴이 온다면 이들을 은하 경찰에게 넘겨주겠지.

미카도 선생님께선 자신을 위해 힘써준 라라, 야미, 오시즈, 나, 그리고 「귀신의 집」의 우주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다들 미카도 선생님께는 도움을 받은 사이였기에, 보은의 차원으로 한 일이었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 끼가 보이긴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미카도 선생님의 인망이 이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본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이번 「귀신의 밤」을 실행하면서 촬영한 영상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처음 'SOLGAM'과 조우하고 한명을 잡을 때의 영상.
개천에서 한명을 잡을 때의 영상.
숲에서 두명을 잡을 때의 영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부인 케이즈를 잡은 영상.

오시즈가 빙의해서 전개되는 이야기중에 케이즈를 잡을때의 부분은 적당히 편집이 필요해 보였다.
도망치다가 멈춰선 난데없이 명랑한 어조로 되어버리는 케이즈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니까.
모아진 영상을 들고 우주인들은 고마워하면서 돌아갔다.
얼마뒤면 「사이난 유원지」의 「귀신의 집」에선 새로운 프로그램을 볼 수 있겠지.
직접 출연까지 한 입장인 우리로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몇주 뒤, 「사이난 유원지」에 명물 「귀신의 집」에서 들리는 비명이 더 커졌다는 소문을 들었다.
「구교사 묵시록 괴담」에 이어서 새로 내놓은 프로그램은 「귀신의 집」을 훨씬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프로그램의 모티브가 된 참조영상을 「귀신의 집」에서 볼 수 있도록 해뒀는데 그 영상을 두고 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데루데루비전군」으로 처리한 귀신의 모습과 절규라든지 허공에 떠오르는 총기들.
홀로 몸이 공중으로 꺾어지는 남자.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남자.
옷만 남긴채 증발해버린 남자.
귀신에 홀려 떠나가버린 남자.
자동차에서 기이한 현상을 겪고 결국엔 붙잡혀버린 남자.
그리고...사령(死靈)들을 이끌고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검은 로브.

영상이 CG 처리 되었다느니 아니라느니,
중간에 필름을 이어붙인것 같은 장면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적으로 검은 로브의 정체에 쏠려있었다는 것.
분명 이야기의 전개에서는 우주인 아저씨들과 오시즈의 역할이 가장 컸는데 말이다.
관객들의 눈에는 마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모든 현상을 일으키며 괴물들을 조종하는것처럼 보였나보다.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서 유원지측이 「'구교사 묵시록 괴담'과 마찬가지로 이번 작품 또한 실화에 바탕을 두었습니다.」라고 홍보한게 문제였다.

관객들은 「구교사 묵시록 괴담의 배후에 아키츠 료스케가 있었듯이
사이난에서 벌어진 이번 이야기의 배후에도 아키츠 료스케가 있을것이다.」라는
실로 논리와 합리성이 무시된 폭거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한 것 같았다.

사령을 다루며(데루데루비전군이었습니다), 염력을 사용하고(오시즈였습니다),
괴물들을 지휘하는 비스트 마스트로서(귀신의 집 우주인 아저씨들입니다), 시간마저 멈추는 무시무시한 악마(The W○rld?) 아키츠 료스케.

어디의 삼류 스토리에나 나올법한 만능 캐릭이냐?

가관인건 마지막에 케이즈의 질문에 답했던 말을 가지고 별의별 추측이 난무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들린 「...스...」라는 글자를 가지고 온갖 추측이 나왔다.
당연히 검은 로브의 정체(누구 마음대로?)인 「아키츠 료스케」가 나와야 한다는 대답은 양반이었다.
온갖 마술에 능통한 「캐스터」일 것이라고 하는 녀석이 있었다.
초능력을 사용했으니 「에스퍼」일 것이라고 하는 녀석도 있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하데스」라고 주장하는 녀석까지 나왔다. 명부를 관장하는 「명왕」이라나...



결국...「귀신의 밤」이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의 제목은 잊혀지고
어느샌가 관객들 사이에서는 「사령왕(死靈王)의 저주(詛呪)」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덕분에 우주인 아저씨들의 원망섞인 불평을 듣을 처지가 되었다.
다행히도 「매지컬 쿄코 플레임」 출연준비를 하느라 우주인들이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게 되자 그런 불평은 더이상 듣지 않게 되었지만.
「사령왕」이니 「명왕」이니 하며 수근거리는 학생들을 모습에 살며시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우주인 아저씨들이 미카도 선생님께 보은할 기회를 준답시고 나름 선의에서 계획한건데 말이지...
어쩐지 조금 곤란한 소문에 시달리게 된것 같아 골머리가 아팠다.




p.s. 편집된 영상을 본 야미가 감상을 말해줬다.

"기분 나쁠만큼 집요하게 사람의 마음을 추적하더군요.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충분히 당했다고 생각했지만...제 착각이었군요.
당신과의 심리전은 진심으로 피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 해결편 終 -



======================================
...다음편은 훈훈한걸로 쓰자.

SOLGAM은 원작 78, 79화에만 등장하고 그대로 끝.
오시즈와 '귀신의 집' 우주인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 SOLGAM 편이었습니다.



솔직히 75화에서 오시즈가 학교에 등장했을땐 78화의 하루나, 코테가와 납치편에서 활약할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옴니버스. 그런건 없고 원작에선 그저 트러블만 일으키고 살지...OTL
평소 미카도 선생님께 신세를 지던 외계인들이 도와준다는 전개도 살짜쿵 기대했었지만...

관우 : 그런거 없다.



별수 있나요; 어차피 저분들이 없어도 사건은 해결되니까.
그래도 저로서는 미카도 선생님이 평소에 은혜를 배풀어준 사람들이
거꾸로 미카도 선생님께 도움을 줄수 있을정도로 나타나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번편은 그런 의미에서 조금 살을 붙여본 것^^;

오시즈는 여러모로 능력의 활용도가 높았기에 이번 편에서 가장 많이 활약해주었습니다.
빙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염력을 이용해 물체들을 움직이거나, 불을 일으키거나, 각성 상태의 사람마저도 꼭두각시마냥 조종할 수 있으니까요.
다크니스에 나왔던 암살자의 잉여 염력과 비교하자면...

그나저나 원래 유원지 이야기는 원작 100화 이후에나 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보내는군요=_=a;
뭐, 다음에 소재거리가 떠오르면 다시한번 유원지 보낼지도 모르죠=ㅅ=;

유원지 명칭이야 「사이난 유원지」일거라고 찍었습니다.

악마꼬리,날개의 우주인은 「데빌루크 성인」
불쓰는 우주인은 「후레이무 성인」
연인들의 공원은 「러브러브공원」
수영장 이름이 「사이난 워터랜드」
학교 이름이 「사립 사이난 고교」
그러니까 유원지 이름은 「사이난 유원지」



p.s.부하들의 이름은 게스텔, 네즈란, 덱스터, 베르난도, 에스텔, 헤스테르.
부하 6명은 악역인데다 단역이고, 일일이 이름짓기 귀찮아서 선현의 예를 모범으로 삼아 가나다 네이밍으로 갑니다(...)

괴기한 대사 형식은...칠성전기에서 참조했습니다.
나름대로 괴기한 분위기를 떠올리려고 해도 제 기억속에서 가장 괴기스러웠던 장면은 저주받은 시스콤(...) 성기사씨의 전투 장면이었으니까요-_-a;
쓰다보니까 어느새 비슷한 양상으로 되어버린...OTL;;

p.s.2.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유원지 놀이기구로 이계트립은 선례가 없었으므로 료스케는 신경쓰지 않고 지냅니다.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식으로 살다간 노이로제 걸리기도 할테고.
혹여 롤러 코스터 앞에 갑자기 웜홀이 나타나서 빨려들어간다는 식의 초전개는 없음(...)

p.s.3.근데 저스틴도 확실히 데빌루크 성인이었군요. 꼬리가 있었네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쎄보이는 땋은 댕기 머리처럼 생긴 꼬리가.

p.s.4. 내용 설명을 위한 이미지 링크

SOLGAM

차량 2대

데루데루비전군

귀신 영상

귀신의 집에서 일하는 우주인들

털뭉치형의 우주인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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