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슬 할발 형제님."

"네. 리이 수녀님."

"여기 오는게 이것으로 몇번째죠?"

"......8번째입니다."

"...하아아~~~"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는 리이 수녀님과 고개가 몸속에 파고들 기세로 움츠러 드는 나.
유리창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빛을 받아 영롱히 반짝이는 가운데
작은 방안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리이 수녀님과 나 사이엔 한동안 거북한 공기가 흘렀다.
온화한 성품으로 마을에 명성이 자자한 리이 수녀님이 드물게 미간을 살짝 매만지며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죄책감이 일었다.
감았던 눈을 뜨며 리이 수녀님은 조금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차근차근 말씀하셨다.

"신성한 성당에서, 그것도 배움을 받는 입장으로 있는 사람으로서 조는 것은 결례라고 저번에 말씀 드렸지요?
그런데 10일간의 「신학」수업중 8일을 졸면서 보내다니...
토, 일요일을 빼면 수업 내내 졸았던게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때마다 고개가 조금씩 꺾어져 내려갔다.
민망함에 숙여진 고개 때문에 코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이었다.

지금 이곳은 상담실.

「신학」 교육을 받던중 발생한 사소한 문제로 리이 수녀님께 설교를 듣는 중이다.



작년 무투회에서 듣도 보도 못한 마법사에게 마법 수십발을 사정없이 맞았을 때.
결승에서 담담의 마법 난사를 도망치고 얻어 맞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었을 때.
결국 담담의 마력이 바닥난 다음에야 제대로 싸울수 있었을때.
무투회를 통해서 뼈져리게 통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마력은 필수라고.

극강의 육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항마력이라든지 마력이라든지 마법기술 따위의 마법적인 지식이나 능력은 쥐뿔도 없었다.
마법은 한대 맞으면 말그대로 뼈속까지 아파서 아픈 내색을 안하는게 정말이지 힘들었다.

무투회가 끝난뒤 한동안 바빠서 항마력 키우는걸 잠시 미뤄두고 있었는데
저번에 동부수풀지대 탐험중 만난 엘프로부터 마법적인 능력을 부여받고나자 다시금 항마력을 키울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남은 자금을 탈탈 털어서 의욕만만인 상태로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수업시간 내내 꿈속을 헤매면서 10일을 날려보냈다.
신학 수업중에 졸다니 신앙심이 부족하단 설교를 들으며 매일매일 잠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미인이신 리이 수녀님의 가르침조차도 밀려들어오는 졸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신학 수업을 들으려면 정말로 신앙심이 필요한거야?
...설마 마왕과 거래해서 신앙심이 0이 됐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고개숙인채 테이블을 보며 고민하는 나에게 리이 수녀님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형제님에게 신학 수업은 맞지 않는것 같네요."

"네?"

"신학 수업은 신앙심을 갖고 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형제님으로선 무리일듯 하군요.
우선 형제님은 좀더 마음을 경건히 한 뒤 배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런..."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신앙심을 키워보는게 좋을듯 하군요.
신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신앙심도 키울수 있는 좋은 아르바이트니 한번 해보시겠어요?"

"......"



10일간의 신학공부에 남은 돈을 전부 바쳤기 때문에 지금은 밥값 걱정을 할 때이다.
일급 1G 짜리 봉사활동을 했다간 살림이 거덜난다고요...
결국 리이 수녀님의 권유를 사양하고 조용히 성당을 벗어났다.
신학 수업으로 항마력 올리는게 안된다면...



<1210년 공동묘지>

보름달이 뜬 밤.
공동묘지에 줄지어 놓인 비석.
묘지를 둘러싼 울타리 너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어둠.
공동 묘지를 휘감는 짙은 안개 사이로 느껴지는 희미한 이질감.
희끄무레한 그림자와 붉고 푸른 도깨비불이 비석과 수풀 사이사이를 조용히 스쳐지나 간다.
이윽고 비석 사이로 보름달을 뒤로 하며 드리운 검은 그림자.

-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여...
그대는 어디의 기사인가...

"......"

-......?

"...추, 추워...고양이가...처녀귀신...우산귀신이...누, 눈이...중얼중얼..."

-......실례했군...

검은 그림자. 붉은 망토를 걸친 해골기사는 자신의 하얀 해골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오늘도 실패인가 머슬할발?"

"...네."

"어째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는 일이 없나?
자네처럼 귀신에 잘 홀리는 사람은 또 처음이로군.
...그나저나, 자네 괜찮나?"

"예?"

"자네 안색이 창백한게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더이상 여기서 일하는건 좋지 않을듯허이."

"그, 그런가요?"

걱정스레 내 안색을 살피는 묘지기 아저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해버렸다.
어제밤은 정말로 악몽같았다.
귀신에 홀렸던건지 헛것이 자꾸만 비쳤으니...

한밤중 무덤을 파헤치는 고양이를 보곤 황급히 쫓아버렸는데
도망치는 고양이의 뒷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꼬리 둘 달린 고양이라니, 들어본적 없어...
진정하고 순찰을 재개했을땐 묘령의 귀신이 허공에 둥실 뜬채 무덤가를 지나갔고
원념이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가 버려진 우산에서 흘러나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 세계야. 아무것도 이상할것 없잖아?'라고 자기 암시까지 해보았지만...
하지만 판타지는 판타지고, 괴담은 괴담이다.
무서운건 엄연히 무서운거라고.

이상한 현상들에 홀려서 괴현상들을 쫓아가던중 느껴진 시선에 주위를 돌아봤다가
주변 나무들 사이사이의 암흑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들을 보곤 엄청난 추위를 느끼면서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순찰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묘지기 아저씨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귀신에 홀린채로 하룻밤을 야외에서 새고선 몸져 누워야 했을 것이다.
지난 며칠간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했는데, 익숙해지기는 커녕 점점 안색이 창백해질 따름이었다.
피로에 찌든 내 얼굴을 보던 묘지기 아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게 다 자네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런거라네.
마법사나 전사들이야 항마력을 키워 유령들을 무찌른다고 하지만,
우리같은 일반인들이야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유령따위 전혀 무서워 할 게 없지."

"......"

여기서도 신앙심이 필요한거야?
죽은줄만 알았다가 이세상에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에
나도 나름대론 신에게 감사하고 신앙심도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이 안습한 상황은 대체 뭐 때문이야?

역시 루시폰이냐? 루시폰 아저씨랑 계약한거 때문이냐!?
마왕은 「천제」가 지상을 멸하라고 보낸거라면서...
어째서 마왕이랑 거래했다고 신앙심이 깎이는건데?

결국 며칠간의 묘지기 아르바이트는 실패로 끝나고 여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신학 교육」과 「묘지기 아르바이트」.
항마력 증강 계획의 핵심인 두 방법이 전부다 초반부터 파탄나 버리자 맥이 빠져버렸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항마력을 올릴수 있는 방법은 동부수풀지대에서 엘프를 도와서 드래곤 모드키를 잡아주는 것인데...
10일동안 열심히 도와줘봤자 헤어질때 답례로 한번 올려주는 항마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저번에 다시 갔을적에 드래곤 모드키를 워낙 잡아댔더니 당분간은 찾아가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남은건 이제 하나뿐.

...겨울옷이 아마 120G 였지?



<1210년 북부빙산지대>

"추, 춥다아아아..."

수리가 끝난 도끼 한자루를 들고 북부빙산지대에 올랐다.
겨울옷을 사고 나니 남은 돈이 간당간당했다.
쾌유환 같은 회복 아이템을 살 돈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이럴줄 알았으면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라도 돈을 좀 빌릴걸 그랬나?
여관 아저씨라든지, 벌목장 분들이라든지, 란팡이라든지, 죠니프라든지...
뭐, 이미 무사수행을 온 지금에 와선 의미없는 후회지만.

이번 무사수행의 목표는 오직 하나!

북부의 고지대에 사는 은빛 늑대를 잡아서 최대한 많은 은색 모피를 모은다.

육체의 항마능력을 제대로 올릴수 없는 상태라면 장비의 항마력을 키우는게 낫다고 생각했고,
바로 북부빙산지대의 은빛 늑대가 떠올랐다.
은빛 늑대의 모피는 항마력을 +5 올려주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우선은 은늑대 모피로 갑옷 안에 덧대는 옷이나 토시같은거라도 만들어 쓰는게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한동안 북부빙산지대를 돌아다니면서 은빛 늑대를 잡으면서 은사의 검을 이용해 털가죽을 골라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가죽이나 벗기라고 준 은사의 검은 아니지만 솔직히 단검 갖곤 할게 딱히 생각나질 않으니...
가끔씩 만난 아이스볼을 쓰러뜨리고 얻은 얼음조각은 예쁘게 생겼기에 잡화점에나 팔까 싶어서 챙겨뒀다.


한동안 북부빙산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생각했던것보다 많은 은색 모피를 모을수 있었다.
짐승이 아닌 몬스터라서 인간을 피하는것보다 덤벼드는 녀석들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만 마을로 돌아가서 모피의 무두질을 맡기는게 좋을까?
배낭에 물품들을 챙겨넣고 자리에 일어나 마을을 향해 걸어갈때, 갑자기 위에서 앳된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응?"

철푸덕-!

바둥바둥~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 꼬맹이는 또 누구냐?
놀라서 위를 쳐다볼 새도 없이 눈바닥에 거꾸로 꽂혀버린 꼬마의 모습에 황당해서 잠시 가만히 서있었지만,
머리부터 눈속에 파묻혀 빠져나오는데 고생하는것 같아보여 두 다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읏차~"

푸핫-

"우에엣?"

다리가 들린채 눈에서 빠져나온 꼬맹이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나를 바라 보았다.

"...아저씬 누구?"

아, 아저씨?
최근 모험을 하느라 수염을 제대로 못깎았다지만 그렇게 보일 나이는 아니다 이녀석아...
맹랑한 대사를 한 꼬맹이를 불만스러운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살짝 웨이브진 갈색 장발에 예쁜 호박색 눈동자.

"여자애?"

"으...내려줘요 아저씨! 어지럽단 말예요~!"

발목이 잡힌채로 거꾸로 매달린 여자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속바지를 입었다지만 흘러내리는 치마를 가릴 생각도 안하는게 꽤 아방한듯 했다.
아직 10살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 꼬맹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쬐그만 어린애에게 아저씨 취급 당하는 현실이 서글퍼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길에 있던 이상한 팻말을 보고 뛰어내렸단 말이지?"

"네. 다리에서 뛰어내려라고 적혀있었어요."

다행히 여자애는 자살 지망생은 아니었다.
무슨 보물 탐색을 한다고 길가에 적힌 팻말에 의지해 몸을 던졌단다.
허...그런걸 믿고 겁도없이 뛰어내렸단 말이야?
요즘 애들은 무섭구먼.
물론 10살짜리 꼬맹이를 혼자 모험을 떠나게 한 부모 얼굴도 참 보고싶을 따름이다.

"아저씬 이곳에 무슨 일로 온거에요?"

"나? 난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구하러 왔지."

"뭔데요?"

"은빛 늑대의 모피라고, 사악한 기운으로 부터 착용자를 보호해 주는 물건이지."

"헤에..."

신기해하는 꼬맹이를 바라보다 문득 신경쓰이는게 있어서 주의를 준다.

"그나저나 꼬맹아."

"왜요?"

"나 아직 아저씨 아니다.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우음...눈썹이 하야니까 사실은 할아버지 아녜요?"

"......"

"그리고 저도 꼬맹이 아니에요.
어엿한 레이디라고요."

불만스러운듯 볼을 부풀리는 꼬마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었다.
타오 란팡도 그렇고, 죠니프도 그렇고...이 동네 소녀들은 하나같이 조숙한 애들뿐이네.

"그래그래. 꼬마라 불러서 미안해.
그럼 네 이름은 어떻게 되니?"

"「아리스」요. 아리스 폰 루비델."

"...루비델이라고?"

이상하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姓) 같은데...
...에, 그러니까 루비델이라면 분명히...

"저기...꼬맹아."

"「아.리.스」."

"그래, 아리스.
혹시 말이다...마왕을 쓰러뜨렸다는 분이...?"

"네. 우리 아빠에요."

...진짜냐.

마왕 루시폰을 1:1로 쓰러뜨렸다는 용사.
세상의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천제가 부른 마왕 루시폰은 힘으론 신과도 맞먹는다고 한다.(팔불출 의혹이 있지만)
그런 마왕을 쓰러뜨린 그는 명실공히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용사의 수양딸이 바로 이 꼬맹이라고?

휘둥그레 눈을 떠 놀란 표정을 짓는 날 의기양양하게 보던 아리스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곤 날 불렀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아저씬 이름이 뭐에요?"

아직 자기 소개를 안했던가?
아리스도 내 이름을 몰랐으니까 계속 아저씨란 호칭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나? 머슬 할발인데."

"이상한 이름."

"말하지마...알고 있으니."

"말하기 힘드니까 그냥 아저씨라 부를께요."

"야?!"

터무니없이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꼬맹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이녀석...장래에 거물이 될거다.




이후 아리스와 함께 왕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아리스의 무사수행도 끝나갈 즈음이었고, 10살짜리 꼬마 혼자서 되돌아가도록 놔두는것도 솔직히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첫만남에서 눈속에 파뭍혀 바둥거리는 모습만 안봤더라면 걱정이 덜했을텐데...

돌아가던 중에 만난 적들은 전부 내쪽에서 처리했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면서 도끼로 머리를 박살내거나
은빛늑대처럼 모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몬스터들은 몇대 맞아주는걸 각오하곤 은사의 단검으로 처리했다.
수리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이 빠져버린 도끼덕에 찍는다기보단 두드려 패는식의 싸움을 할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어째 제대로 된 무기하나 못구하고 있는건지 원...
그런 내 전투장면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을 보곤
잘못된 습관을 익히지 않을까 걱정되어 충고했다.

"저기 꼬맹..."

찌릿.

"...아리스."

"왜요 아저씨?"

"내가 싸우는 방식은 그냥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는것뿐이니까
전투기술 향상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지말고 너도 전투라도 하면서 경험을 쌓는게 더 나을텐데?"

지금 내 전투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전투가 아니라,
튼튼한 몸만 믿고 '한대맞고 두대팬다'는 식의 막싸움이라고.
내 말을 듣던 아리스는 입을 다문채로 주저하다가 조심조심 말했다.

"...몬스터는 무서워요."

"응?"

예상치못한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서워? 몬스터가?
물론 나도 처음엔 흉악한 얼굴의 피쉬맨이 덤벼들땐 기겁하고 달아났었지만...
노력에 따라선 장래에 무신마저 쓰러뜨릴수 있는 이 아이가,
지금 이순간에는 몬스터를 두려워 하고 있다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아직 이 아이가 10살 가량인걸 간과한 내 잘못인가.
아니, 잠깐만.

"그럼 대체 어떻게 북부빙산지대까지 올수 있었던거야?"

몬스터가 죄다 피해가기라도 했나?

"하루에 만나는 몬스터들은 한두마리 뿐이었는걸요.
그때마다 근처 장애물에 숨어 있었어요."

허허...신의 가호라도 받은건가?
실제로 게임에선 한마리 만날때마다 반나절이 지나가지만
난 하루에도 몇번이나 몬스터랑 마주친다고?
게다가 숨는것만으로 수많은 몬스터를 피해서 북부빙산정상까지 올수 있는 인간이 대체 몇이나 될까?

"...아버지가 잘도 무사수행을 허락해주셨구나."

"저, 그게...몰래 나왔어요."

"엑!? 설마... 너 가출한거냐?"

"아녜요!"

빽-!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반박한 아리스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게...며칠뒤면 아빠 생일이라서 선물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쉬는날(자유행동)에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아이스볼의 「얼음조각」이 예쁘다고 얘기를 들어서..."

그러니까, 「자유행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아버지 선물 구한다고 돌발적으로 「무사수행」으로 바뀌어 버린건가.
기특한 꼬마 아가씨네.
다만 아버지가 아시면 경을 칠꺼다 아마도.

"후우...빨리 산을 내려가는게 좋겠다.
아버지가 걱정하실꺼야."

"그래도..."

"얼음조각이라면 내가 줄께."

"에?"

배낭을 뒤적거려서 무사수행중에 모은 얼음조각들을 꺼냈다.
마법적인 힘 때문인지 녹지도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세개의 얼음조각은 신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얼음조각들을 꺼내서 놀라는 아리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아버지 선물로 드리도록 해."

"예쁘다...
그런데 이걸 전부 제게 주는거에요?"

"그래. 난 그다지 쓸 일이 없으니까.
예쁘지만 내게 어울리진 않고.
아버지 드리고 남는건 네가 가지던가 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겠지."

"고마워요 아저씨~!
그럼 큐브 줄꺼에요."

"큐브?"

"저희집 집사요.
집안 청소라든가 여러가지로 바쁘거든요."

자신의 배낭에 얼음조각들을 조심스레 넣으면서 아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어린애가 그런걸 신경쓰진 않아도 돼.
그런걸 바라고 준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되면 아빠가 받는 생일 선물은 제가 아닌 아저씨의 선물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빠는 평소에 '받은 만큼 꼭 되돌려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단 말이에요."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닌거 같은데 꼬맹아?
용사라는 사람,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날 것 같다.
'몇배로 부풀려서 복수하라'고 말하지 않은걸 보면 적당히 양심적이기도 한것 같은데.

아무튼 강하게 주장하는 아리스의 모습에 자연스레 난처해졌다.
아무래도 아리스의 머리속에서는
'다른사람이 준것을 대가없이 그대로 아빠에게 건네주는것 = 다른사람이 아빠에게 선물해준것' 이라는 사고가 확립한것 같았다.
고민하던 아리스는 내가 들고 있는 도끼를 보곤 물었다.

"아저씨, 그 도끼...날이 빠졌네요?"

"응 뭐...수리를 몇번 하긴 했지만 원체 무식하게 쓰다 보니까..."

곤봉같은건 몇번 휘두르면 박살이 나니 일회용으로 밖엔 안되고.
벌목용 도끼가 그나마 가장 튼튼하긴 한데 무식하게 박살내는 식으로 휘둘러대다보니까 날이 자주 빠져 나간다.

"아! 그러면..."

아리스는 허리춤에 찬 검을 내밀었다.

"이거 아저씨 줄께요."

"응?"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검보단 나을꺼에요."

엉겁결에 내밀어진 검을 받았다.
검집에서 검을 뽑자 잘갈아진듯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건...

"...이거 「롱소드」(장검)잖아?"

검을 쓰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며 뛰어난 성능을 가진 롱소드(철제장검).
물론 모든 전사들의 구입을 희망하는 최고의 무기는 미스릴검이나 동방도지만...
그런 귀한걸 상점에서 본다는건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

게다가 최근 무기점에서 구할수 있는건 단검이나 구리검따위의 무기들뿐이었다.
무기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장간쪽의 퍼거슨 영감과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보다.
덕분에 무기류의 가격들도 전체적으로 오른데다가
전투를 할땐 도끼나 구리검 따위로 전투를 수행하는 요즘, 제발 롱소드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랬는데...
이런걸 고작 얼음조각 몇개의 대가로 준다고?

"저기... 이 검, 비싼거야.
얼음조각 몇개의 대가로 주기엔 과분한 물건이라고.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이런걸 들고있어도 쓸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아빠에게 드릴 선물'은 소중하다는 거니까요."

내가 안 괜찮다.
순진한 꼬맹이를 속여 값을 후려친 사기꾼이 되버린다고.
용사라는 아버지가 안다면 아마 두들겨 맞는 끝이 될꺼다.

한동안 어린애와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얼음조각에다가 은늑대 모피도 하나 주는걸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무두질해서 써야 하니까 우선은 상점에 맞겨둔걸 아리스가 찾아가는걸로 했지만.)
항마력을 키우러 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제대로 된 무기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요즘은 꽤나 일진이 좋다고 생각했다.



며칠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아리스에게 용사의 생일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얼음조각을 가져다 드렸더니 정말 기뻐 하시던걸요?
절 안고서 뺨도 부비부비 하고 빙글빙글 도시기에 어지러울 지경이었어요.
헤헤...정말이지 맘에 쏙 드셨나봐요."

...이쪽도 루시퍼 마왕님 못지않게 팔불출이시군요.
따님의 선물이라니까 맥을 못추시는구려...

밝게웃는 아리스의 모습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튼 아리스의 돌발 무사수행은 그렇게 순탄하게 막을 내렸다.
용사도 기쁘고 아리스도 보람있었고, 나도 롱소드를 얻었으니 결국엔 모두가 이득을 본 윈-윈 전략인가.
잘됐군 잘됐어~.



<1210년 아리스 생일>

"......(지긋이)"

"......"

"......(빤히)"

"......왜그러냐 꼬맹아."

불쑥-

내밀어진 아리스의 양손을 바라보며 무언으로 아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줘요."

"그러니까 뭘...?"

"생일선물요."

"엥?"

"오늘은 제 생일.
그러니까 생일선물 주세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려던 나에게 손을 내밀곤,
당당한 표정으로 선물을 요구하는 아리스의 모습에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난 오늘이 네 생일이라는걸 지금에서야 알았는데...
선물 같은걸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리 없잖아?"

"그럼 지금 사줘요!"

"억지 부리지마. 나도 요즘 장비를 마련하느라 힘들단 말야."

"...저번에 북쪽 산에서 만났을 때 검도 줬잖아요!"

"야...그건 아버지 선물이랑 교환했잖아?
게다가 그대신 흰늑대 모피도 양보해 줬는데..."

"으..."

나로서도 알고지내는 사이니까 여유가 된다면 꼬맹이 생일 선물정도는 챙겨주고 싶다.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정말 여유자금이 없다.
모피 무두질 값에 항마장비 만든다고 든 돈만해도 엄청 깨졌다.
자체주문 제작품은 역시나 비싸더라고.
덕분에 요 며칠간은 식비걱정까지 해야 한단 말야...
무사수행만 하면서 먹은 거친 음식들 말고 제대로된 식사를 해보고 싶다고!
하다못해 조그만 인형이라도 사주고 싶지만 지금은 늦은 시각이라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아서 무리다.

"흐윽..."

원망스러운듯 나를 쳐다보던 아리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흐윽, 훌쩍...아저씨 미워...훌쩍..."

길 한복판에서 양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아리스의 모습에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으려니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어머, 저 남자 좀 봐요.」
「어린애를 울리다니 참 못되먹은 사람도 다 있죠?」
「칭얼대는 아이를 울려놓고 태연히 서있다니 정말로 못됐어.」

내탓인가?
정말 내탓인가?
난 그저 선물살 돈이 없을 뿐인데...!

어떻게든 아리스를 달래려고 무릎을 꿇고 아리스랑 눈높이를 맞춰서 필사적으로 사과했다.

"야, 야...! 미안!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울지 좀 말아!"

"훌쩍...선물..."

"그, 그래! 선물줄께! 선물줄테니까...!
그, 그러니까 선물로 할만한게...?
...마, 맞다 이거...!"

순간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에 생각이 미쳤다.
착용한지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비너스의 목걸이」.
분명 그 행상인이 짝퉁을 팔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비록 짝퉁에 효용성은 없을지라도 디자인의 화려함은 단연컨데 진품과 같을 정도.
전체적으로 금색을 띄고 한가운데 녹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
어린애가 보기엔 진짜 보석 목걸이와 마찬가지 일거다.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훌쩍이는 아리스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차분한 목소리로 달랬다.

"좋아. 아리스에게 오빠가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보물을 줄께.
그러니까 울지마..."

"...보물? 아저씨의?"

"오빠라니깐..."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목걸이를 내 목에서 천천히 빼내어 아리스의 눈앞에 들어보인다.

"이건 「비너스의 목걸이」라고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님의 축복이 담긴 보물이지."

"여신님?"

"그래. 이걸 차고 있으면 항상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 한단다.
오빠의 소중한 보물이니까, 부디 소중히 간직해주렴."

"으, 으응..."

아리스는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오빠가 목에 걸어줄테니 잠시만 가만히 있어줄래?"

"응."

등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칼을 살짝 뒤로 넘기며 조심스레 목걸이를 아리스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아읏, 간지러워..."

"가만있어봐."

키득거리며 웃는 아리스의 움직임에 약간 고생을 한 뒤 목걸이를 무사히 장식해줬다.

"자 다 됐다~"

"어울려?"

겨우 10살짜리가 보석 목걸이로 치장했는데 어울릴까.
뭐, 눈물까지 맺힌 주제에 선물을 받고 웃는 모습은 어린애 다워서 귀여운데.
그리고 겨우 울음을 그친 아리스를 다시 자극할 필요는 없지.

"물론. 정말 예뻐."

"에헤헤..."

목걸이에 양손을 얹고 쑥스러운듯 웃는 아리스를 보며
짝퉁 목걸이도 나름 쓸만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아리스가 차고있던 목걸이에서 빛무리가 일어나더니 조그마한 금발의 정령이 나타났다.
이건...?!

"어? 요정님?"

놀라는 아리스에게 정령은 미소를 짓더니 축복의 말을 꺼냈다.

「비너스의 목걸이를 소지한 자. 그대 아리스여...
나는 목걸이의 정령. 그대에게 미의 여신 비너스의 축복을 전합니다.」

순간 환한 빛이 아리스를 감싸더니 점차 아리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 언제나 비너스의 축복이 함께하길...

금발의 정령은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목걸이 안으로 사라졌다.

......뭐여?
이거 진품이었잖아?!
난 1년이 넘도록 찼는데도 안나타 나더니만...
남녀 차별이냐?

남캐라 서러워요...

속이 장난 아니게 쓰린게 아무래도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위안해야 할것 같았다.
신기해 하는 아리스에게 적당히 생일축하 인사나 해주고 헤어질까...

"그럼, 늦었지만 생일축하해 아리스.
지금처럼 건강하고 밝게 자라길~"

"저기저기~!"

"응?"

"방금전의 요정님...정말 예뻤어!"

"그래?"

"응! 비너스 여신님도 요정님처럼 예쁠까?"

"당연히 그 이상이지. 다름아닌 미의 여신이잖아. 아름답기론 따를자가 없는 여신이시지."

"그럼, 저기...나도 여신님처럼 예뻐질 수 있을까?"

핫~!
10살밖에 안된 꼬맹이가 발랑까져가지곤...
뭐, 노력에 따라선 왕국 제일미도 가능한게 이 꼬맹이니까.

"물론. 나중엔 비너스 여신님처럼 멋진 숙녀가 될거라고."

"아핫~ 고마워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아무튼 오늘은 재산의 출혈이 컸다.
진품을 겨우 10살짜리 아리스에게 털리다니...
...속쓰린것보다 오늘 저녁 걱정부터 해야할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술보단 밥이 낫겠지...

근처 식당에서 적당히 밥이나 사먹을까 생각하던중 아리스가 물었다.

"근데 아저씬 어디가요?"

"응? 식당에 가려고.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니까."

"그럼 우리집에 오지 않을래요?
아리스 생일이라고 아빠랑 큐브가 엄청 음식들을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함께 먹어요."

"어어?"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잡아 이끄는 아리스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갔다.
에라 모르겠다.
돈도 없고 배고파 죽겠는데 그깟 자존심이 대수냐.
값비싼 선물도 줬겠다, 오늘은 실컷 배나 채워야지.




...용사랑 큐브의 눈초리가 장난 아니게 무서웠다.
딸내미 주려고 만든 요리를 난데없는 남정네가 거의다 평정하고 있는걸 보는게 속이 쓰렸나보다.
하지만 보쇼. 어차피 아리스 혼자선 다 못먹는 양이고, 식사는 여럿이 할수록 즐거운 거잖소.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무서워서 밥이 안넘어 간다고요.

진품 비너스의 목걸이까지 줬는데 너무한거 아뇨?


식사가 끝나고 아리스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뒤,
용사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 식사는 즐거웠나?"

"아... 네. 덕분에..."

"그래...그렇단 말이지..."

조용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섭다.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데 대체 왜?

"그럼...이제, 내 딸의 눈에 있던 눈물자국을 설명해 보실까?"

......오 마이 갓.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죽는줄 알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리스가 선물받은 목걸이를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불한당 취급을 받을뻔했다.
험험 거리며 어색한 기침을 하는 용사의 얼굴을 보는건 나름 웃겼지만,
방금전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두번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옷 밑으로 소름이 돋은 피부를 쓸어내리고 있을때 아리스가 갸우뚱 하며 물었다.

"그러고보면 아저씨."

"응?"

"그 머리...안자르는 거에요?"

"아, 이거?"

최근 무사수행의 연속이었는지라 지금 내 머리는 다듬어지지 못한 상태로 엉망으로 길어져 있었다.
더벅머리가 되어버린 머리를 조금 매만지고 있자 아리스가 손바닥을 짝-치며 다가왔다.

"그럼 제가 다듬어 드릴께요."

"아리스 네가?"

"네. 이래뵈도 미용실 아르바이트도 해봤는걸요!"

"...평판은 어땠는데?"

살짝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자 아리스는 엣헴-하고 기침을 하더니
양손을 허리춤에 대곤 있지도 않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당당히 말했다.

"물론 최고였죠.
저한테 머리를 다듬었던 더벅머리 제크도 제가 최고라고 했는걸요."

"오~대단한걸?
하지만 오늘은 네 생일인데 그렇게까지 해주진 않아도 괜찮아."

"아저씨한텐 멋진 선물까지 받았잖아요.
꼭 보답하고 싶어요.
괜찮죠 아빠?"

아리스가 물어오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아리스는 정말 예의바르구나."

"헤헤...들었죠?"

저 팔불출 아저씨...
헤죽거리며 미소짓는 용사의 모습에 몰래 한숨짓곤 아리스에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잘 부탁할께."

목에 두르는 천과 가위를 찾는 아리스를 보며 얌전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뭐, 평판이 좋다니까 나름 괜찮겠지.




...괜찮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아저씨?"

"......"

가만히 앉아서 아리스가 들고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일자모양이 뚜렷한 바가지 머리.
일명 귀두컷.
...뭐야 이거어어언---!?

"...꼬맹아?"

"아.리.스."

"그래, 아리스...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지.
방금전 널 칭찬했다고 했던 녀석 말이다."

"제크요?"

"그래 제크. 혹시 네 나이대 또래냐?"

"네. 과일가게집 아들이에요.
항상 얼굴이 빨간 이상한 아이지만 친절한 아이에요.
저번에 과일을 샀을때 이만~큼이나 많이 과일을 주더라고요."

"아, 그래...?"

크윽...제크란 그 자식, 이 꼬맹이를 좋아하는 녀석이었구나!?
귀두머리로 컷트를 당해놓고도 좋다고 실실댔단 말이잖아!

자랑스런 표정을 짓는 아리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아리스의 뒤에서 잡아먹을듯한 표정을 짓는 용사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버렸다.
용사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가? 우리 아리스 솜씨는 최고지?"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시면 무서운데요 용사씨...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억지로 삼키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할수 밖에 없었다.
하하...당분간은 모자를 쓰고 다녀야겠네.




"아하하하하! 뭐냐 그 바가지 머리는?"

"...오랜만입니다 프랑소와 양."

"아, 그래 오랫만이구나...크흡...날 웃겨 죽이려는 셈이냐?"

"......"

아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용사의 집을 나온뒤 우울한 상태로 어둠이 드리운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좁디좁은 골목길로만 다니던 도중 도도한 귀족 아가씨 프랑소아 모레(18)와 만나게 되었다.
내 머리모양을 본 프랑소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폭소했다.
시원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예쁘긴 한데 그 대상이 나다 보니까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프랑소아는 간신히 호흡을 가라앉히곤 우아한 모습을 뽐내며 말을 건네왔다.

"아~ 시원하구나.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가신것 같아.
예를 표하지."

전 우울해 죽을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평민의 생활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런 웃기는 머리모양을 보니 말이다."

"뭐, 모든 백성들이 이런 머리를 선호하진 않으니 걱정마십시오.
그나저나 귀족의 영양께서 어째서 이런 밤중까지 거리를 배회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귀가하셔야 하는 시간이 아닌지요?"

"그건...「어라~ 이게 누구야?」응?"

프랑소와의 뒤편에서 들린 소리에 시선을 향하니 붉은 본디지 타입의 의상을 입은 금발의 미소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찍을 사용하는 여왕님 의혹이 있는 꼬마 아가씨, 죠니프 더 퀸(16)이다.

"그때의 귀족 나으리잖아?
이런 밤중에 으슥한 곳에서 밀회라도 하고있으셨나요 우아하신 귀족 나으리?"

아니꼬운듯 삐딱한 표정으로 과장스레 격식을 차리는 죠니프의 모습에 프랑소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흥. 이 내가 저런 미천한 평민과 어울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응?"

프랑소아의 대답에 고개를 든 죠니프는 그제야 나를 발견한듯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슬할발도 있었잖아?
...푸하하하! 그 머리 모양은 대체 뭐야?"

방금전의 프랑소와의 웃음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배꼽을 잡고 허리가 꺽어져라 웃어대는 죠니프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비웃지 마라. 안그래도 부끄러워 죽을것만 같다고.
엄청 극적인 죠니프의 태도 변화에 프랑소와도 따라가지 못했는지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웃던 죠니프는 애써 웃음을 멈추고는 날 보며 말했다.

"키득...아무튼 평소에 날 보고 에로 꼬맹이라고 놀린 주제에,
너도 만만찮게 변태적인 머리모양이잖아?"

뭔가 또 야한 망상을 하면서 성희롱적 대사를 하실 모양이구만...

"...신경꺼."

"...변태?"

"응?...아아, 귀족 아가씨는 모르시는가보군요?"

죠니프는 잠시 멈칫 하더니 음흉한 미소로 프랑소아를 바라보았다.
뭔가 꾸미고 있는건 알겠는데 그런 표정으로 히죽거리지마.
미소녀인 주제에 에로 중년 아저씨처럼 보인다고.

"귀족 아가씨께선..."

"프랑소아 모레. 프랑소아라고 불러라.
왠지 모르게 그 호칭은 불쾌하구나."

말을 끊으면서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프랑소아 모레.
그야 당연히 정말로 비꼬고 있는거니까요.
이 아가씨, 알고 보면 좀 나사가 빠진거 아냐?
주의를 받은 죠니프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실례. 프랑소아 영양께선 머슬할발의 머리를 보고 이상한 점을 못느끼셨나요?"

"저 웃기게 생긴 바가지 머리 말이냐?
뭐, 좀 이상하긴 하다만 나름 평민들에게야 어울리지 않느냐?
전엔 엉망진창 난 수염에 흰 눈썹덕에 애늙은이처럼 보였는데,
둥글게 자른 머리모양때문에 적어도 지저분하진 않고 나름 귀엽구나."

귀...귀엽...
차라리 비웃어줘!
수치심으로 죽을 지경이란 말야!
죠니프 좀 보라고.
웃음이 터지려는걸 억지로 참고 있다고?

"푸흡~ 그, 그렇군요... 귀여운거군요.
킥킥... 야아~ 이거, 좋겠네 머슬할발은?
귀여운 머리모양이란 소릴 들어서.
그 머리 모양을 칭찬 받으니 왠지 흥분되지 않아?"

"...뭐?"

"...흥분? 무슨말이냐?"

남들의 말에 무관심하던 프랑소아 마저도 지금의 이상한 문답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프랑소아의 반응에 죠니프는 황송하다는듯 답했다.

"이런 실례...
저희 비천한 평민들은 아가씨같이 고상한 말을 쓰지 않아서 말이죠.
보통은 저걸 바가지 머리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럼?"

씨익-

죠니프의 미소가 짙어지며 부끄럽다는듯 양팔로 몸을 감쌌다.

"「귀두(龜頭)컷」이라고 하지요. 일명 「버섯머리」.
핑크빛으로 염색까지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불끈불끈 공공외설컷이랍니다?"

"뭐...뭐...!?"

뻐끔뻐끔거리며 경악한채로 눈이 휘둥그레진 프랑소아의 반응을 즐기며
죠니프는 말을 계속했다.

"아. 순수하고 고결하신 귀족님께서 이해하시기엔 아직 무리였나요?
그럼 제가 좀더 분발하도록 하지요.
남성들이 자신의 아드님과도 같은 분신을 형상화한 머리모양으로서
저 멀리 동방의 온천에서는 남○석이라는 정력의 상징으로 형상화되기도 하는 모양새이지요.
고래를 잡는다(포경(捕鯨))는 표현이 여기에 쓰이기도 하며,
그곳에 키스해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발○하는..."

"처, 천박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죠니프의 성희롱적 대사들를 듣던 프랑소아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출 생각도 못하고 눈을 꽉 감은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죠니프에게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여기는 골목길.
길은 외길이라 앞뒤에서 프랑소와를 감싸고 있는 상황에서, 죠니프의 맞은편 방향은 바로 내쪽.
나를 향해 달려오는 프랑소와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이, 나 바로 앞에 있거든요?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에 그렇게 뛰어오면 제대로 비키지도 못한다고?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다가 골목길에 널린 쓰레기가 발뒤꿈치에 채여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을 때,
프랑소아의 태클(내 입장에선 그랬다)이 명치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퍼억-!

"꾸엑?"

"꺄악!?"

달려오던 프랑소아에 부딪혀 완전히 균형을 잃은 나는 결국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엉겁결에 나의 어깨를 붙잡은채로 함께 쓰러지는 프랑소아 아가씨께선
아무래도 확실하게 날 끝장낼 생각인듯, 안그래도 뒤로 넘어지는 내 몸을 아예 찍어 누르고 계셨다.
그렇다고 무방비로 뒤통수를 돌바닥에 부딪힐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기에
등이 돌바닥에 닿는 순간 살짝 몸을 앞으로 올려 충격을 줄였다.

뭉클-

...응?

뭔가가 닿은 듯 이마에서 느껴지는 부드롭고 촉촉한 감촉에 의아해하며
머리만 든채로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히자,
흘러내린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윤기있는 붉은 입술과 흔들리는 푸른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해보자.
뒤로 넘어가서 고개만 든 나.
그리고 내 어깨를 잡은채 그 위를 덮듯이 쓰러진 프랑소아 모래.
그리고 방금전 이마의 감촉.

아, 그러니까 방금전 이마에 닿은건 프랑소아의 입술이었나.
그거참 고풍스러운 전개군요.
보통은 직접적으로 입술끼리 부딪히는게 정석이지만.

"아...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르게 난 새하얀 치아가 보이는 가운데
경악한 표정으로 굳어있던 프랑소아는 이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팔꿈치까지 오는 흰장갑의 손등으로 입술을 거세게 닦아내면서 프랑소아는 황급히 일어섰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입술을 닦어대던 프랑소아는
눈물이 살짝 배인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곤 뛰쳐나갔다.

"바, 반드시 복수할꺼야! 이 변태 평민!"

"에? 잠깐만요? 이건 사고...!"

후다닥-

내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프랑소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휑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죠니프의 대사가 떠올랐다.

- 그곳에 키스해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설마 그걸 진짜로 믿은건 아니지?
거기다 이마잖아. 키스받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기라도 한다는거야?
당한 입장에선 확실히 나쁜 경험은 아니었지만,
방금전 죠니프의 말이 떠오른지라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바닥에 드러누운채로 차가운 지면의 감촉과 함께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저만치 떨어져 서있던 죠니프가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다가왔다.

"아하하하~! 봤어? 봤어? 방금전 그 귀족 계집애의 모습 말야.
도도한 척 했던 주제에 알고봤더니 완전히 숙맥이었잖아? 킥킥..."

"넌 야한 농담 좀 자중해..."

"흥이다~ 예쁜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거 몰라?"

...그게 가시라면 타고난 미색마저도 퇴색할꺼다.

"...가시가 꽃잎을 다 가리고 있구먼. "

"뭐야!"

발끈 하던 죠니프는 문득 생각난듯 한손을 말아쥐곤 다른 손바닥을 통-하고 두드렸다.

"아, 맞다! 일어나지 말고 잠시만 그대로 있어봐."

"뭐?"

어리둥절한 나에게 저벅저벅 다가온 죠니프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내 가슴에 왼쪽 다리를 가져다 올렸다.
그리곤 팔목까지 오는 붉은 장갑을 낀 손을 옆구리에 대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붉은 롱부츠의 굽이 가슴에 닿는 감촉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죠니프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가려졌기에 볼수 있었던건 핫팬츠 아래로 드러난 죠니프의 새하얀 허벅지 뿐이었지만.

"...너 대체 뭐하는거야?"

"훗훗훗~ 이걸로 드디어 내 발아래 깔린 남자가 생겼다~!
그것도 무투회 우승자를 발아래 두게 되다니...! 아~ 짜릿해~"

...여왕님 놀이냐?
오른손등으로 살짝 입술을 가리며 교소를 짓는 죠니프는 지금 구도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선물로 준 비너스 목걸이, 우스꽝스런 바가지 머리, 변태 의혹 같은 사건들 덕분에
뭐라고 반박할 기운이 나지 않아 될대로 대란 식으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방금전 프랑소아를 향한 보복에 대한 만족감이 상승작용을 했는지 점점 텐션이 올라간 죠니프는 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오호호호호~!
자아~ 귀여운 목소리로 짖어보련?"

"냥냥-"

"잠깐, 그게 아니잖아! 누가 고양이 흉내를 내랬어?
이럴땐 보통 멍멍이 흉내를 내는거잖아!"

엇나가는 박자에 죠니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난 개보단 고양이가 더 좋은데.

"고양이 귀엽잖아 고양이."

"응, 고양이 귀엽지. 나도 좋아해.
하지만 넌 하나도 안 귀엽거든?"

"너무하시옵니다 「에로 더 퀸」."

"「죠니프 더 퀸」이야!"

퍽-!

"아야!?"

옆구리를 걷어차여서 신음소리를 내자 죠니프는 발을 치우곤 콧방귀를 뀌었다.

"흥-! 쌤통이다.
이름 갖고 장난치니까 그런거라고.「근육 할아범」"

"사과할테니까제발그부르는법은좀봐주세요."

"후후...좋아. 그럼 한가지만 더~!"

죠니프는 몸을 숙이더니 그대로 내 배 위에 앉았다.
다리를 벌려서 얼굴을 마주보며 앉는 말타기 자세가 아니라,
벤치에 앉듯 옆으로 앉아서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이야~ 복근 한번 탄탄하잖아?
역시 물렁 근육은 아니란거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요 죠니프씨?"

"후후...! 어릴적 부터 꿈이었어...
남자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보는 게 말야...!"

...그건 그 의미가 아닌데 에로 꼬맹아?
보통은 아내가 남편을 휘두르는걸 '깔아뭉갠다'고 표현하는거라고.
그리고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내면 그런 꿈이 생기는거냐 대체...

남의 배위에서 잘도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웃는 죠니프를 보곤,
이 아가씨도 프랑소아양처럼 상식이 엇나갔다고 생각하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잠시동안 벌어진 여왕님 놀이가 끝나자 죠니프는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나를 끌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프랑소아에게 작년 무도회에서 당했던 울분도 풀었고, 상식이 살짝 어긋난 소원도 성취했는지라 죠니프로선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았나보다.
테이블에 앉아 술을 주문한 죠니프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엔 술이 최고지~!"

"어이, 너 아직 미성년..."

"난 충분히 어른이라고!
이 쭉쭉빵빵한 나이스 바디가 안보이는거야?"

"야!? 가슴 모으지마! 이 에로 꼬맹아!"

"꼬맹이 아니라니까!"

발끈하며 양손으로 가슴을 모아 올려 포즈를 취하는 죠니프의 모습에 기겁하며 말렸다.
재미있어 하면서 구경하는 손님들의 시선속에서 죠니프와 아웅다웅 투닥거리길 잠시,
술이 테이블에 놓여지자 죠니프는 다툼을 멈추고 눈을 빛내며 술잔을 바라보았다.

"헤에...이렇게 나오는구나?"

...이렇게?

"죠니프. 너, 혹시 술 마시는거 오늘이 처음이냐?"

"읏, 천만에! 그냥 여기 주점 컵은 어떻게 생겼나 본거라구!"

"아, 그러십니까..."

주점컵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죠.
뭔가 흥미로운듯 바라보는게 정말로 처음 마시는거 아냐 이거?
술잔을 나누어 각자 손에 들고선 건배사와 함께 술잔을 부딪혔다.
그대로 술을 마시려다가 맞은편에 앉은 죠니프의 행동이 신경쓰여서
술잔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며 죠니프를 바라보았다.
죠니프는 양손으로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살짝 눈을 감은채 술을 머금은 죠니프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써..."

"무리해서 마시진 마."

"그런거 아니니까 신경꺼."

"지금 쓰다고 했잖아."

"안그랬어!"

"성장기에 술은 몸에 안좋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억지부리지말고... "

"...아, 진짜 꼬장꼬장하게!"

짜증나는 듯 죠니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술잔을 잡아챘다.

"기껏 술마시는데 분위기 떨어지게 할꺼야?
게다가 사내자식이 무슨 술을 그렇게 찔끔찔끔 마시는거야?"

"아니, 이건 너 술마시는 모양새가 걱정되서 지켜보느라..."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뭐야 폼안나게? 건배사까지 했는데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잖아! 얼른 마시라고!"

"게웁?!"

벌컥벌컥...

목덜미가 잡힌채로 죠니프에게 강제로 술을 먹여졌다.
아니, 그러니까 난 그냥 점잖게 마시고 싶다니까.
이래서야 내가 술을 마시는게 아냐.
술이 날 먹는거지.
살려줘...



이후가 정말로 큰일이었다.
전직 해적두목답게 나야 술을 마신다고 크게 취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처음에는 억지로 마시는듯 했던 죠니프가 취기가 오르면서 정말로 술맛에 들렸는지
쉴새없이 술잔을 비워내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조마조마했다.

취기가 올라 비틀비틀하며 화장실에 가는 죠니프도 걱정이거니와,
나도 볼일을 봐야 했던지라 죠니프를 뒤따라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마치고 기왕이면 죠니프를 데리고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화장실 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결국 숙박 결정을 하곤, 잠에 빠진 죠니프를 등에 업고선「휘익~! 수완 좋은데 형씨!」라고 야유하는 취객에겐 감자를 날려주면서 2층의 숙소로 올라갔다.

잠꼬대 하는 죠니프를 침대에 눕혀주랴, 도중에 토해서 더럽혀진 바닥을 청소해주랴,
내 옷에 묻어버린 토사물 때문에 목욕을 하고 주인장에게 가운도 한벌 빌리랴 정신이 없었다.
내 근심만으로도 바쁜데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 아가씨야...
마지막으로 더운듯 자꾸만 이불을 걷어내는 죠니프에게 이불을 다시 걷어올려준 뒤, 옆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에 들었다.




다음날, 술이 깬 죠니프와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너 술버릇 나쁘니까 음주는 그만둬.」

「꺄아악! 이 짐승아!」

(퍽퍽퍽-!)


술버릇 때문인지, 아니면 더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잠결에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깨어난 죠니프가,
눈을 비비면서 잠옷 가운 차림으로 푸념을 하던 나를 범죄자로 오해한 것이다.
저는 미성년자에게 손을 대는 나쁜 어른이가 아니에요.
...죠니프의 난동 중에 의도치 않게 알몸을 보긴 했지만.
아무튼 펑펑 울음을 그치지 않는 죠니프의 오해를 푸느라 정말이지 고생했다.
평소에는 뻔뻔스럽게 잘만 야한 도발을 했으면서,
옷을 입는 것도 잊은채 인생이 끝난것처럼 울어제끼는 죠니프의 모습에 어쩔줄 모르고 자기변호와 사과를 거급했었으니...

XX하고 XX한 흔적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는걸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서야
죠니프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납득하곤 울상이 된 얼굴을 간신히 수습했다.
이후 평소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이불로 알몸을 가린채,
내 엉덩이를 걷어차 방 밖으로 쫓아낸 죠니프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음부터 죠니프에겐 술 대신 파르페 같은걸 권하든가 하자.



이후 숙박을 끝내고 체크아웃을 할 때, 술마시면서 지갑을 잃어버린건지 당황하는 죠니프의 모습에 주인장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나야 물론 항마 장비를 마련하는데 돈을 전부 썼는데다가 어제 술값도 대신 지불했기에 무일푼이었고. 하하...

결국 무전숙박으로 한동안 둘이서 주점 웨이터,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주인장의 취향인지 만화에나 나올법한 여종업원 복장으로 갈아입은 죠니프의 모습에
휘파람을 불면서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지 않을래?」라고 말했다가 한대 맞았다.

그후 주점 근처를 지나던 타오 란팡에게 미묘한 시선을 받았다든가,
알바 도중에 죠니프의 엉덩이를 만지려던 손님들이 음속으로 휘둘러지는 채찍에 맞아 들것에 실려나가는 사소한 일들을 빼곤 평화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은 언제 모으지...?
항마 장비니 뭐니, 모험과 낭만도 좋지만 언제나 휑하니 얇디얇기 그지없는 지갑을 보노라면,
안정적인 노후 같은건 꿈도 꾸지 못하는게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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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중인데 주말이라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3월이 지나갔네...OTL;
우선은 생각나는것들 부터 적고 있습니다.
트러블은 몇편 뒤의 것이 먼저 떠올라서 그 부분을 우선 끄적이고 있고...-_-;

아무튼 오랜만에 쓰는 프린세스 메이커2 팬픽이네요.0ㅅ0;
4화가 되어서야 아리스(용사 딸)도 등장했고...
원래 자창게에 프메 팬픽 처음 올렸을 때는 아리스만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ㅅ=a
그래도 트러블보단 짧게 끝내려고 생각한거니까, 프메에 등장하는 여성들 전부가 이야기에 쓰이진 않겠죠.^^;

[캐릭터 이미지 참조_jpg]

롱소드 : 공격+12, 전투-2
얼음조각 : 체력+10, 스트레스-10
은색의 모피 : 항마+5
비너스의 목걸이(*) : 매력+136 기품+136 (기본상승+20, 추가상승+116)

Posted by 루트(根)
,
"...그러니까...얼마라고요?"

"다 합쳐서 5000G 다해."

"......"

천천히 계산을 해본다.
무투회때 매번 승리할 때마다 받은 300G들을 모아서 1200G.
거기에 우승 상금 3000G를 합쳐서 4200G.
틈틈이 해둔 알바로 벌어둔 돈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처 치료, 식비, 여관비로 나가는 처지다.

아, 지금 내가 뭘 하는 중이냐고?
청색 중화풍의 옷을 입고 팬더 귀걸이를 한 붉은 피부의 뚱보 행상인과 대화하고 있다.
상점에서 팔지 않는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이상한 떠돌이 행상인.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여관으로 돌아가던중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이니즈 오크」라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신경이 쓰여 돌아보던중 발견한 행상인이다.
괴상한 옷차림, 기다랗게 기른 날카로운 손톱, 붉고 돼지처럼 퉁퉁한 얼굴에 메기수염, 뾰족한 귀.
그야말로 수상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대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힐끔거리기만 할뿐 섣불리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나쁘다는듯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기 바쁜 느낌이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외관이었지만,
무언가 괜찮은 물건이 없을까 싶어서 다가가서 대화를 걸어보았다.

왕국에 와서 첫손님이라며 호들갑을 떨어주는게 싫지만은 않았지만,
손까지 잡으며 너무 가까이 붙어오면 오히려 겁날 지경이라
애써 웃으며 판매 물품을 둘러보았다.

어디 보자...

유니콘의 뿔피리, 비너스의 목걸이, 풍유환, 미인의 드레스.

4개의 아이템이 행상인이 내놓은 전부였다.

기억하기론 유니콘의 뿔피리는 동부수풀지대에서 유니콘을 만날경우 감수성을 올려주었고,
비너스의 목걸이는 매번 생일때 마다 매력, 기품, 감수성이 오르고,
풍유환은 복용하면 가슴이 커지고,
미인의 드레스는 나체에 가깝게 노출이 아슬아슬한 옷이다.

여기서 내가 쓸만한건 뭐가 있을까?

우선 유니콘의 뿔피리.
비싼돈 주고 유니콘의 뿔피리를 사도, 유니콘을 만나고선 내가 "아!"하고 신기해하는걸로 끝.
아무리 봐도 손해보는 장사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부터, 난 감수성도 뭣도 없다고 스스로 깨달았지만...

다음으로 비너스의 목걸이.
전체적으로 금색을 띄고 한가운데 녹색의 둥근 보석.
그리고 그 주위로 4개의 은빛 진주가 장식된 화려해 보이는 목걸이다.
매력적이고 기품넘치는 느낌을 주는 목걸이고 매년 비너스 여신의 축복이라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매력적이고 기품넘치고 감수성이 뛰어나진다는걸 체감할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신님의 축복이라는것을 일생에 한번이라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은 역사에도 손꼽힐 정도라는건 안다.

그리고 풍유환.
진주조개 모양의 상자안에 진주마냥 곱게 놓여져 있는 진홍색의 둥근 약.
복용한 여성의 가슴을 크게 해준다.
가슴을 만지면 커진다느니, 우유를 먹으면 커진다느니 세간에 도는 민간요법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효과 확실한 절세의 보물.
머리카락 나는 약만큼이나 세간에 전설로 회자되는 물건이다.

마지막으로 미인의 드레스.
속이 미치는 얇고 투명에 가까운 천으로 재단된 의상.
비키니에 가까우면서도 잘못 움직이면 은밀한 곳이 슬쩍 비칠것만 같은 엄청난 옷.
아니, 이걸 '드레스'라고 당당히 소개하는 행상인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밤의 전당의 스트리퍼들도 이런 옷은 안입겠다...
본디지의 미학을 당당히 피력하던 죠니프도 이걸 입으라고 준다면 금방이라도 따귀를 날릴것만 같았다.

아무튼, 내가 살건 대충 정해졌군.

웃으며 넉살좋게 두손을 비비고 있는 행상인에게 살 물건을 가리켰다.

"으음...비너스의 목걸이와 풍유환을 주시오."

"애인한테라도 주려오?"

"댁이 알거 없으니까..."

비너스의 목걸이로 여신의 축복을 받는다면 좀더 축복받은 인생을 살수 있겠지.
눈으로 보이진 않겠지만 살면서 좋은 기회를 만날 행운이 올지도 모르고.
풍유환은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아내에게 선물로 주는게 좋을것 같다.

무엇보다 떠돌이 행상인이 지금 떠나버리면 언제 다시 왕국에 돌아올지도 알수 없고,
지금 사두지 않으면 누군가가 선수를 취해버려서 영영 구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 둘다 사두는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비너스의 목걸이와 풍유환 두개를 고른것이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꽤 비싸네?

무투회로 번 4200G와 아르바이트 비용을 계산해봤지만,
그동안 여러가지 일로 소비한 금액도 있다보니 물건을 둘 다 사기에는 금액이 몇백G는 부족했다.



"...혹시 이거 바가지 아뇨?"

"나 이사람 못믿나해?"

...언제 본적이 있다고 대뜸 믿겠습니까?
정색을 하는 행상인에게 반쯤 어이가 없어하길 잠시,
아무래도 흥정이 필요할것 같아서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깎아주시면 않될까요?
둘다 사기엔 가격이 조금 비싼데요."

"사기 싫으면 사지 마라해.
...응?"

완고하게 거절하듯이 매몰차게 말하던 행상인은 갑자기 내 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뭘 바라보나 싶어서 시선을 따라가보니, 내 옆구리에 차여진 '은사의 검'이 보였다.
은사의 검을 알아본건가?
행상인은 약간 놀란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당신...혹시 무투회 우승 경험자냐해?"

"네. 올해 우승자입니다만..."

"댁의 검을 준다면 싼값으로 팔아줄수도 있는데..."

"절대 안돼요!"

기겁하며 한걸음 물러나 거절했다.
판다고? 은사의 검을?
농담이 아니다.
팔다가 걸렸다간 내 인생은 말 그대로 끝장난다.
무투회에서의 악평에 더해서 국왕이 하사한 검을 팔았다는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고!

강한 거절의 표시에 입맛을 다시던 행상인은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조건을 바꿨다.

"흐음,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해?"

"어떤?"

"필요한 물건을 구해다 준다면 4000G에 물건을 팔겠다 해."

행상인의 말로는 세상을 돌아보면서 희귀한 물건을 모아 파는 입장으로,
새로운 물건을 매입할 필요를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무투회에서 우승할 만큼 실력이 됨을 알게 되자,
대신해서 위험한 지역으로 가서 물건을 구해오길 바라게 되었단다.
행상인이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0일의 기한내로 동부수풀지대에서 지정하는 해당 물품중 하나를 가져오는것.

하나. 동부수풀지대 어딘가에 있다는 고대의 우유.
둘.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요정의 다과회나 요정의 무도회. 그곳에서 요정으로부터 얻은 요정의 꿀.
셋. 유니콘을 잡아서 얻는 유니콘의 뿔.
넷. 산고양이를 잡아 얻을 수 있는 캣츠아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본 결과 나름대론 괜찮은 조건인것 같아서 승낙했다.

"알겠습니다.
10일내로 넷중 하나의 물품만 구해오면 되는거죠?"

"그렇다해.
5000G 짜리를 4000G랑 물건 하나와 교환해주는거니 나쁜 조건 아니다해."

자꾸 그렇게 '해, 해' 거리지 말아요 이 가짜 외국인.

"뭐, 좋아요.
10일내로 꼭 구해올테니, 그때 다시 거래하도록 하죠.
물건을 구하면 어디로 찾으러 가면 되나요?"

"당분간 여관에서 지낼테니 그곳으로 오라해."

"알았어요.
아, 그리고..."

"뭔가 해?"

그대로 길을 떠나려다 다시한번 뒤돌아서 행상인에게 주의한다.

"아셨죠?
이 두 물건은 저랑 거래하기로 약속한겁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팔면 안됩니다! 알았죠?!"

"아, 알았다해."

잡아먹을듯한 눈빛으로 으르릉거리는 나에게 질린듯이 답하는 행상인을 보며
만족한 얼굴을 하곤 여관으로 돌아가 여행장비를 꾸렸다.

...그런데 4000G를 제외하면 무사수행 용품을 사는데 얼마를 쓸수 있는거지?




"끄응...결국 이번에도 이따위 장비인가..."

손에 든 곤봉과 허리에 찬 구리검을 우울하게 바라보면서 동부수풀지대를 향했다..
4000G를 빼고 남는 재산으론 여행때 필요한 텐트와 쾌유환 사기에도 빠듯했다.
도끼는 이가 빠져서 지금은 수리한다고 맡겨둔 상태고...

은사의 검은 아무리 좋아도 단검이라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고.
어쩔까 주저하다가 결국엔 숙소에 놔두고 온 은사의 검을 떠올리곤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거 아무리 봐도 예식용인데, 기왕이면 폼나고 실용성 좋게 장검으로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아?

원하는 물건을 구해주는것 보다, 차라리 서부사막지대 같은 곳에서 괴물들을 잡으며 돈을 버는게 빠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인간도 아니고 괴물들이 화폐 따위를 가지고 있을리 없잖아?(드래곤이라면 몰라도)
쓰러뜨린뒤 떨군 잡템들을 가져다 팔면 돈이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로선 제대로 된 방어구는 커녕 무기조차 갖춰지지 않아서 조금 위험할 것 같아 포기했다.
역시 행상인의 말대로 비교적 덜 위험한 동부수풀지대에서 원하는 물건을 찾아다 주는게 나을것 같았다.

'고대의 우유', '요정의 꿀', '유니콘의 뿔', '캣츠아이'라...

다른건 모르겠는데, 유니콘...
...설마 환수랍시고 마법 공격을 퍼붓거나 하진 않겠지?



<동부수풀지대 - 요정의 무도회>

부러진 나무둥지들 사이로 혼자서 멀쩡히 서있는 나무.
가만히 멈춰서 서늘한 바람을 느끼는 가운데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타고 속삭임이 들려온다.

'저기저기, 저 사람좀 봐.'
'온몸에서 뭔가 불길한 냄새가 나.'
'장난을 쳤다간 심상치 않을것 같아.'
'무서워...'
'오늘 축제는 못하겠네...돌아가자 얘들아.'

"......"



<동부수풀지대 - 요정의 다과회>

한가운데 둥근 기둥이 서있고, 그 주변을 시계처럼 거대한 돌들이 에워싼 공터.
스톤헨지를 연상시키는 돌들의 무리들 가운데 드러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어딘가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기저기, 저 사람좀 봐.'
'...피냄새.'
'후끈한 땀내도 나.'
'다과회를 하려는데 왠 불청객이지?'
'이런 냄새속엔 다과회는 못하겠어. 다른곳으로 가자 얘들아.'
'으응...'

"......"

...우울하다 죽자.

솔직히 내가 지금 냄새가 나긴해.
며칠동안 제대로 씻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동부수풀지대를 지나면서 냄새 하나 안 날 사람이 누가 있어?
오는 내내 나무 구멍이나 땅굴, 진흙탕을 헤쳐나와야 했으니까 당연하잖아?

게다가 수근수근 다 들릴듯이 속삭이는건 대체 뭐야? 괴롭힘?
요정의 꿀을 얻을수 없을까 하고 조금이나마 가졌던 희망은
대화조차 시도하지 못할만큼 요정들에게 기피되는 상황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비참하다...

휴식하긴 커녕, 스트레스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동부수풀지대 - 엘프의 영목>

요정들의 수근거림을 듣고 우울한 가운데 수색을 계속하다 다른 나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만큼 거대한 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른 십여명이 팔을 벌려야 감쌀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 둘레에 내심 감탄했다.
설마 이게 엘프의 영목인가...

한낯동안 수색만 하느라 지친것도 있어 나무 그늘에서 잠시 휴식이나 할까 싶어서 엘프의 영목으로 다가가는데
나무 그림자 속에 누군가 서있는게 보였다.

"누구?"

"응?"

조용히 서있는 모습이 적대의사는 없어보였기에 말을 걸자,
상대는 약간 놀란듯 나를 보더니 말을 걸었다.

"이런...당신에겐 내가 보이는가?"

모습을 드러낸 인형은 적발에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한 귀가 드러났다.

"...엘프?"

"아, 알고 있는건가.
난 이 엘프의 영목을 수호하는 자라네.
내가 보이다니 자네는 의외로 감수성이 풍부한지도 모르겠군."

감수성?
그런게 나한테도 있었던가?
의외로 난 섬세한 인간일지도 모른다며 생각하고 있는데
무언가 주저하던 엘프가 한가지 부탁을 해왔다.

듣기론 드래곤 모드키가 엘프의 영목의 수액을 빨아먹어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래곤 모드키를 쫓아내기 위해서 인간의 전투기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드래곤 모드키로부터 엘프의 나무를 지키는데 당신의 전투기술을 나눠줄수 있겠나?
대신 나의 마법기술을 전해주지."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엘프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육체는 머슬 할발이 악마와 거래하면서까지 추구했던 소망의 결정체다.
애용하던 무기도, 거대한 함선도, 함께하던 부하들도 모두 잃고서,
절망속에 유일하게 남은 육신을 이런곳에서 녹슬게 해야 한다고?

"거절하지. 이 몸의 육체는 내게 남은 유일한 것이자 삶의 증거.
나의 육체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들지 마라."

"그런가...그렇겠지.
당신은 전사니까...
내가 실례를 했군."

낙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나는 엘프를 손을 들어 저지했다.
너무 그렇게 침울해하지 말라고.
적어도 낯선자에게 부탁할만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모른척할 정도로 매정하진 않아.

"...다만, 드래곤 모드키를 대신 잡아줄순 있지."




"키이익!"

"뒈졋!"

퍼억-!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드래곤 모드키의 머리를 곤봉으로 박살내버렸다.
체액을 흩뿌리며 쓰러진 녀석을 합쳐서 잡은 드래곤 모드키의 수는 10여 마리.
행상인이 부탁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주변을 수색하면서 드래곤 모드키를 잡기를 계속.
어느새 엘프의 영목 주위를 배회하던 드래곤 모드키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엘프의 영목 근처의 수색도 거의 끝난지라 이젠 슬슬 다른곳도 돌아봐야 하기에 엘프에게 돌아갔다.

"엘프의 영목 주변의 드래곤 모드키들은 다 잡았다고 봐.
하지만 더이상은 어렵겠군.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찾고 있는게 있어서 말야."

내 말에 엘프는 고개를 저으며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아니. 오히려 고맙군.
이것으로 엘프의 영목의 수호도 당분간 안심할수 있겠군.
혹시 뭔가 바라는것이 있다면 이야기 하게.
내가 도와줄수 있는것이라면 도와줄테니."

엘프의 말에 혹시나 하며 행상인이 찾는 물건중 몇개를 말해보았다.

"고대의 우유, 요정의 꿀, 캣츠아이중 하나를 찾고 있는데
혹시 아는게 있나?"

유니콘은 영수이니 아무래도 숲의 수호자로 보이는 엘프에게 부탁하는건 실례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엘프는 미안한듯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가진건 없군.
요정의 꿀은 요정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선물해준다니까, 요정을 만난다면 친해지도록 노력해보게."

...지금 그 친해지는게 안되서 문제라니까?
미안해하는 엘프의 얼굴을 보며 불평하기는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엘프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물었다.

"가끔이라도 좋으니 이렇게 와서 나를 도와줄수 있겠나?
보답으로 약간의 마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전투기술을 대가로 바치지 않는다면야 좋다.
당분간 무기를 제대로 장비하기 전까진 수행을 위해서 이곳을 방문해야 할것 같기도 하고.

"...가끔이라면야."

"고맙군.
그럼 지금 마법을 전해주도록 하지."

엘프로부터 소량의 마법적 능력을 전해받았다.
사실 무언가 빛이 났다는것 이외엔 그다지 느낌이 없어서 제대로 받은건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애초에 머슬할발의 마법평가가 0이었던걸 떠올려 보면 마법에 대해 무지하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마력, 마법기술, 항마력이 몽땅 0이었으니 마법의 능력을 느끼고 자시고 할게 없었겠지.
엘프의 보답을 받고 기분좋게 헤어진 뒤 탐험을 계속했다.



<동부수풀지대 -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공터>

7일동안 동부수풀지대를 탐험했다.
'고대의 우유', '요정의 꿀', '유니콘의 뿔', '캣츠아이'.
넷중에 하나만 구하는대로 마을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생각되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산고양이들은 너무 재빨라서 잡으려고 하면 싸우기도 전에 도망치느라 항상 놓치기 일쑤였다.
요정들은 만나기도 전에 기피되었고.
그리고 유니콘은 어땠냐면...

"빌어먹을 유니콘!
처녀만 밝힌다더니 진짜로 안나타나네."

광대한 동부수풀지대를 돌아다니며 헤멨지만 유니콘은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진짜 유니콘의 뿔피리라도 갖고 있어야지 시비라도 걸러 오는건가?

7일이 지나는 시점까지도 소득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기한이 지나서 행상인이 떠나가버리는거 아냐?

동부수풀지대를 경계에서 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빙돌아 수색하다가 발견한 비밀통로.
진흙탕속으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 발견한 이 곳이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미수색지였다.
여기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정말이지 다른 방도라도 생각해야 할것 같았다.
다른 장비나 텐트를 팔거나 해서 돈을 마련하든가,
비너스의 목걸이 하나만 사고 풍유환은 그냥 포기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재검토 하면서 수색하던중 나무뿌리 틈으로 무언가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이건...?"

기대에 가득차 나무뿌리를 헤집자 그곳에서 무언가를 봉한듯한 상자가 드러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하얀 액체가 들어간 고풍스러운 병이 나타났다.
고대의 우유.
눈물을 글썽이며 소중히 상자를 다시 덮어 품에 넣었다.

"핫핫핫! 드디어 찾았다!
이런곳에 있었다니...!"

...7일동안 지지리 운도 없더니 드디어 득템했구나.
빨리 마을로 돌아가려는 마음에 급히 일어서자 갑자기 근처의 수풀이 흔들렸다.

부스럭-.

"칫, 들킨건가..."

응?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그쪽을 바라보자
왼쪽눈에 안대를 하고 노란 구레나룻만 남은 대머리가 수풀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누군가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려니 상대는 내손에 들린 곤봉을 보곤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흥. 날 찾고 있었나보지?
그래. 내가 바로 수배범인 바나자드 님이다."

...난 관심도 없었는데 자기가 알아서 정체를 밝히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으니 바나자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웃는듯한 어조로 나를 구슬렸다.

"뭐, 나도 궂이 네녀석과 다툴 생각은 없어.
날 모른척 한다면 80G를 줄테니까 여기서 사라져라.
너한테도 이득이잖아?"

얼씨구?
80G?
누구 코에 갖다붙이라고 그러냐?
한 1000G라면 몰라도.

10살짜리 애한테도 잡혀가는 약골주제에 기만 살았다고 생각하며 곤봉을 꼬나쥐었다.
이녀석한테 걸린 현상금을 타면 당분간 생활비는 건질 수 있겠지.
내가 전의를 다지고 있자 바나자드는 화가난 얼굴로 위협했다.

"덤빌테냐?
갑옷도 없이 곤봉 한자루로 대체 무슨 베짱인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걸 알려주마!"

"누가 할소리!
너야말로 사람 잘못 만났다고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며 힘껏 곤봉을 휘둘렀다.

"뒈져버렷 로리콘 미수 자식아!"

"뭐, 뭐라는거야? 으아악~~~!"

뻐어억---!

옆구리에 곤봉이 틀어박혀 비명을 내지르는 바나자드의 목에 춉을 날렸다.

"크억!"

기절할줄 알았는데, TV에서 봤던것처럼 간단히 기절하진 않네.
...이럴땐 역시 무식한 방법이 최고지.
오른손에 들린 몽둥이를 꽉 쥐었다.



<동부수풀지대 - 검문소>

"...누구요 이자는?"

"바나자드. 현상범요."

"...왜 이렇게 바뀌었소?"

기절할때까지 패다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부풀어 올라 엉망진창이 된 얼굴의 바나자드.
너무 변한 얼굴에 순간 바나자드를 못알아 본 경비대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바나자드를 인수받았다.

현상금은 이후 관리를 통해 지급한다고 하였다.
이걸로 한동안 여관비는 건졌군.

무사히 행상인과의 거래를 마치고 비너스의 목걸이와 풍유환을 건네받은뒤 휘파람을 불며 숙소로 돌아갔다.
덕분에 빈털털이가 됐지만 며칠뒤 공식적인 발표와 함께 나올 바나자드의 현상금이라면 당분간은 식비 걱정은 없을듯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현상범 바나자드를 체포한 공으로,
머슬 할발을 왕국의 이름으로 표창합니다."

「저자가 그 흉악한 바나자드를 붙잡았다고?」
「과연 강해 보이는군. 저 우악스러운 근육좀 봐.」
「처음 바나자드를 보았던 경비병이 무척이나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렇대요. 처음엔 바나자드인줄 몰랐대요.」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팼다지요?」
「그렇다지? 어찌나 지독한지, 아직까지도 나무몽둥이를 보면 발작을 한다던걸?」
「흉악한 현상범에 걸맞는 흉악한 현상금 사냥꾼이네요.」
「저번의 무투회때 소문도 있고, 젊은데 꽤나 우악스러운 사람인가보구먼...」

"......"

전사평가가 오르고 스트레스가 올랐습니다.



==========
새해맞이는 극장에서 해리포터와 함께 했습니다.=3=

늦었지만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어제 저녁까지 문넷 접속이 안되길래 올리는건 오늘은 안써도 되나(...)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잤습니다( -_-);
그러다가 오늘 남은 시간내로 빨리 쓸수 있는거라도 써보자 싶어 적어놨던게 이거--;
(정작 글을 쓰면 트러블이나 요거나 편하게 써지는건 없었지만요...-_-;)
급히 쓰느라 아가씨가 한명도 등장하지 않아서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양해를 구합니다=ㅅ=;;;

원래 비너스의 목걸이는 1500G
풍유환은 1200G 입니다.
(플레이 다시 하면서 알았네요-ㅅ-;)

머슬할발이 가격을 몰랐던건 게임한지 십년은 넘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랬거나
에디트 플레이어라서 금액에 신경을 쓰고 살지 않았거나 둘중 하나겠죠(...)

감수성 문제는 머슬할발의 경우엔 소심함 = 감수성이 되시겠습니다.
문학적으로 교양이 높거나 섬세할 경우엔 정상적으로 감수성이 높게 나오겠지만요.



그리고 전 이제 신입사원연수받으러 갑니다^^;
2주에 한번꼴로 주말에 집으로 올것 같습니다.
따라서 트러블과 백미 연재가 느려지게 되는점 양해 바랍니다^^;;

암튼, 교육 잘다녀오겠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

지상에 나라있어
왕은 위세만을 중히 하고
백성은 풍족에 겨워한다.
하늘을 경시하여 제를 아니지내고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 하니
천제 이에 노하여
천명으로 마왕을 불러세워,
마왕, 지하왕이 되어
하늘의 뜻으로 지상을 멸한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세상이 참 말세란 말이다.



"거기 당신! 이름있는 무예자처럼 생각되는군.
나의 이름은 죠니프 더 퀸, 한수 겨뤄보자!"

"......실례지만 아가씬 몇살?"

"알려주지 못할것도 없지. 금년 15세다.
뭐야? 혹시 당신,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

속옷에 가까운, 배꼽을 훤히 드러낸 붉은색 본디지 차림에 팔목까지 감싸는 붉은 장갑.
무릎까지 오는 붉은 롱부츠를 신고 한손엔 채찍을 든 주제에 고작 15살?

천제가 노하신 이유를 알겠군.

이 세상은 꼬맹이들 복장부터가 글러먹었어...

채찍을 휘둘러 바닥을 치면서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만족스러운듯 웃는 금발 여자애를 보면서
머리가 아파지는걸 느끼곤 한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만두머리에 부채를 든 차이나 드레스 소녀, 타오 란팡과의 일전에서 불길함을 느낀건 위기를 직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이후로 차례차례 만나는 도전자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재수가 옮 붙은것 같다고 생각했다.

난 당췌 결투 신청을 받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젊어진 지금의 모습으로 '머슬 할발'이라고 자기 소개를 해도 동명이인 소릴 듣는 마당에 전사평가니 뭐니 하는것도 거의 없지 않아?

내 체격이나 외모가 한싸움 하게 생겼지만, 솔직히 싸움 좀 한다는 놈들 치곤 딱히 나한테 시비거는 녀석은 못봤다.
거리의 왈패들 정도의 놈들은 기세에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고 피했고,
일정 수준 이상의 무술가들은 만나더라도 슬쩍 훑어보더니 무시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고수들은 걸음걸이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을 아니 어쩌니 하던데, 그런 방법으로 내 역량을 재기라도 한건가?
(며칠전 덤벼들었던 홀스트 하임만이라는 꼬꼬마놈은 사람 보는 눈이 삐었다 치고...)

...그런데 왜 난 여자 무예가들에게 자꾸만 도전 받고 있는겨?



프랑소아 모레(17세)에게 도전을 받았을땐 그러려니 했다.
철모르는 귀족 아가씨라서 사람 볼줄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그 아가씨의 도전을 어떻게 처리했더라...



"나의 이름은 프랑소아 모레!
거기 평민! 꽤나 실력있는 전사인것 같은데 나랑 겨뤄보지 않겠어?"

"응?"

움찔-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기죽은듯 한걸음 물러선 화려한 백색 의상의 장발 소녀가 보인다.
갈색 웨이브 머리. 연회장에나 보일법한 화사한 흰 드레스에 붉은 망토.
예쁘게 디자인된 금색의 머리장식과 그옆에 꽂힌 흰꽃.
삐까번쩍한 검과 최고급 미스릴 갑옷.
...곱게자란 귀족집 영양이신가.
나도 이곳에 떨어지기 몇달전만 해도 편하게 놀고 먹는 신세였으니 남말할 처진 아니지만.
올챙이적 시절을 생각하며 잠시 반성한뒤, 거절하려 했다.
무투회에서라면 또 몰라도 저 아가씨 의상...비싸보이는데, 혹시라도 찢으면 갚으라고 생떼 부리는거 아냐?

"거절합니다. 쇼핑중이라서요."

"이 나의 도전을 피하는 것이냐? 겁쟁이 같으니..."

"날도 늦었는데 아가씨도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는게 좋습니다."

"비루먹은 용병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것이냐?
...좋다. 그럼 네가 날 에스코트 해줄테냐?"

엥? 대체 뭔소리래?
뭔 에스코트?
프랑소아의 표정은 뭔가 재밌는 걸 생각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어?
결투를 거절했으니 대신 날 에스코트 하란 말이다."

...왈가닥 귀족 아가씨의 뭔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싸우는 것 보단 낫겠지.
손익을 판단해서 결론을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스코트 해드리지요.
집이 어디...「그럼 간다!」응?"

갑작스런 외침에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자
눈앞을 찔러오는 화려한 검끝이 보였다.

쉬이잇---!

"으헤엑?!"

기겁하며 몸을 뒤로 젖혀 검을 피하곤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프랑소아를 향해 고함쳤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뭐긴? 에스코트지!
말을 했으면 어디한번 멋지게 나를 리드해 보라고!"

검으로 말하는게 에스코트냐?!
이건 또 무슨 「친구되기=전력☆전개」같은 해석이야?!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프랑소아는 내쪽으로 파고들며 다시한번 검을 내질렀다.
이게 정말로...!

몸을 비틀며 검을 피하곤 머리 위로 도끼를 들어올리고선,
프랑소아의 전면을 향해 전력으로 내리쳤다.

바우우우웅-----!

투콰콰콱!

"꺄앗-?!"

바닥을 내리찍은 도끼에 먼지와 함께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프랑소아를 황급히 망토로 얼굴을 가렸다.
후두둑 소리를 내며 돌조각들이 떨어지고 이윽고 드러난 함몰되어버린 길바닥을 본 프랑소아는 살짝 안색이 변한것 같았다.
왠만해선 이렇게 무식한 공격을 하는 상대를 만나보진 못했을 테니까.
완전히 박살나버린 바닥과 내 손의 도끼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프랑소아는 슬쩍 자신의 옷을 털더니 몸을 돌렸다.

"흥...오늘은 이만 물러나겠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곤란하니까."

프랑소아양의 단골 후퇴 대사군요.
다음번엔 아예 흙탕물이라도 뿌려서 쫓아내든가 해야지 원...



......아무튼, 그때 프랑소아와의 결투를 무사히 끝낸건 좋았지만...
며칠 뒤 또 결투 신청을 받았다.
또다른 여성 격투가에게.

나타샤 드리프시코라는 여전사와 대치했을때는 컬쳐 쇼크를 받았다.
18살 먹은 아가씨가 해골 비키니 차림을 하고 가시곤봉을 휘두르는데,
움직일때마다 상반신의 특정 부위가 덜렁덜렁 하는게 정말이지 눈둘 곳이 곤란했다.
그건가?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상대를 유혹해서 치명타를 날리는 전법인가?



그리고...지금 눈앞에 서있는 죠니프 더 퀸, 15세.
뭔놈의 도전자들이 죄다 여자뿐이냐는,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는 최후의 열쇠.

기억상에 존재하는 여성 무투가 5명 중 4명을 만났다.
만난 순서로 타오 란팡(14세), 프랑소아 모레(17세), 나타샤 드리프시코(18세), 죠니프 더 퀸(15세).

오케이. 이걸로 드디어 결론이 났다.

어째서 전사로서 사람들의 평가 및 기교적인 역량이 부족한 나에게 도전자가 생기는지,
홀스트 하임만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왜 여성인지에 대한 답...

결론 : 다들 10대라서 경험 및 안목 부족

나나 그녀들이나 무술가로서의 역량이나 실전 경험은 매우 부족한 상태.
그러니까 겉보기만 그럴법하게 한싸움 할것같은 육체의 나를 무술가로 잘못 판단했을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젊은데다가 갑옷도 안입고 도끼 하나만 달랑들고 다니니,
만만해도 이만큼 만만한 상대는 찾기 어려웠으리라...



음음, 하며 스스로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죠니프가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당신! 대체 싸울 생각이 있는거야!"

"전혀."

"뭐라고!
...흐응~ 혹시, 당신도 내 채찍 맛을 즐기고 싶어하는 변태?"

멀쩡한 사람을 함부로 변태취급하는거 아니다...
도대체 부모란 사람은 딸내미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모양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쉬곤,
유혹하듯 혀를 할짝이면서 어른스러운 티를 내고 싶어하는 15살 꼬마 여왕님을 불렀다.

"이봐 아가씨..."

"뭐야? 겨우 싸울 마음이 생긴거야?"

이상한 업소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사람을 상대로 잘도 싸울 생각이 나겠다...

"...이제 슬슬 가을인데 그렇게 내놓고 다니면 춥지 않아?"

"...! 쓸데없는 참견이야!
이건 뇌살적인 자태로 적을 유혹하려는 거라고!"

"...뇌살?"

"그래! 잘 보라구?
이렇게~!"

난데없이 양팔로 가슴을 받치듯 포즈를 취하면서 죠니프는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이...? 난 SM 복장엔 애초에 관심을 안갖는다고?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죠니프는 한쪽눈을 감아 윙크를 보내면서 콧소리를 내었다.

"흐으응...자, 어때~?"

"...풉."

"아! 당신 지금 웃었지!"

"아니아니아니웃다니천만에요여왕님"

"지금 건성으로 말하고 있잖아!"

얼굴이 새빨개져서 씩씩대던 죠니프는 오른손에 쥔 채찍을 움켜쥐며 외쳤다.

"이제 됐어! 당신도 내 채찍 맛을 보면 결국엔 내 발밑에 굴복하게 될거야!"

"어느쪽이냐면 난 괴롭힘 당하는것 보단, 괴롭혀 주는걸 더 좋아하는데..."

"이...이 변태! 죽엇-!"

쫘아악-!

"으악! 네가 남말 할 처지냐?!"

사정없이 휘둘러지는 채찍을 피하면서 재빨리 죠니프를 향해 접근했다.
방금전 대화하면서 알게모르게 서로간의 거리를 점점 좁혀뒀기에 금새 죠니프의 눈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익...!"

발악하듯이 채찍을 휘두르려고 뒤로 빠지는 죠니프의 오른팔을 지나치면서
왼손으론 죠니프의 오른 어깨를 잡고, 오른손 바닥을 죠니프의 배에 대곤 밀듯이 바닥에 쓰러뜨렸다.
예전에 TV에서 보던 유도선수들처럼 냅다 꽂아버리고 싶지만,
그런건 배운적도 없으니 그냥 자기류로 쓰러뜨릴수 밖에.

쿵-

"으윽!?"

딱딱한 돌바닥이라 잘못 부딪히면 위험하기에 마지막에 살짝 속도를 늦춰 충격을 줄였다.
그래도 데미지는 있는지라 한동안 어지러워 하던 죠니프는 이윽고 정신이 들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어디에 손대는거야 이 짐승!"

퍽!퍽!

방금전 쓰러뜨리면서 오른손을 그대로 죠니프의 배에 대고 있는걸 봤나보다.
채찍도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젠 승부고 뭐고 상관없이 발길질을 해대는게 좀 무섭다.

"야?! 잠깐, 좀 진정해!"

"방금전의 치한같던 손놀림부터 사과해!"

"뭐가 어째? 이건 다 네 옷차림 때문이었다고!"

"하! 뭐야? 결국 나한테 짐승처럼 발정했다는 거잖아? 이 변태가!"

"아니. 넘어뜨리는데 딴곳 잡다간 네 옷이 벗겨지니까.
공개 노출 플레이라도 할 생각이냐?"

"윽?!"

소매라도 있는 복장이었다면 그거라도 잡았겠지만,
이건 뭐, 잘못 잡았다간 옷안으로 손이 파고들어갈것 같아서 제대로 손도 못대겠다.

"자. 이해했으면 자의식 과잉은 이쯤 해두고 그만 일어나."

"잠깐...?!혼자서 일어날 수 있어!"

반항하는 죠니프의 양손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죠니프에게 채찍을 주워다 건네주곤 물러났다.

"그럼, 승부는 내가 이긴거지? 난 이만 간다."

"크윽...! 다음번엔 오늘처럼 쉽진 않을꺼야!"

"...또 덤비려고?"

"물론이지! 그땐 반드시 내 채찍으로 당신을 울리고야 말겠어!"

"...넌 먼저 그 변태적인 취미부터 고치는게 좋겠다..."

"신경꺼!"



으르렁거리며 채찍을 말아쥐고서 죠니프는 사라졌다.
이윽고 하나둘씩 구경꾼들도 사라지자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건 이득이 안돼...
무사수행때 몬스터들을 잡으면 돈이랑 아이템을 주잖아?
무투회때의 승리는 적어도 상금은 주잖아?
근데 마을에서의 결투는 이게 뭐야?
이겨봤자 땡전 한푼도 안떨어 진다고.

명성? 어차피 지금 덤비는건 10대의 고만고만한 애송이들이고,
제대로 한끝발 날리는 용병들은 상대도 안한다.
도토리 키재기 하는데 올라갈 명성이 정말로 있기나 한거야?

결투중 도끼 사용 숙련도 올릴 시도는 상상도 못했다.
나도 미숙하고 상대도 미숙한데, 까딱 잘못하다간 눈먼 도끼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단 보장이 없으니...
결국 무투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결투는 맨손으로 벌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무기점에서 쓸만한 무기들은 죄다 검뿐...
그거냐?
만병지왕은 검이다, 그런거?
원래의 머슬할발 영감님은 도끼들고 잘만 우승하셨잖아.
뭐, 발큐리아의 검이라든가, 무신의 검이랑은 당연히 비교도 안되겠지만...

하여튼 이대로 도끼를 쓰지도 못하느니 차라리 검으로 무기를 바꿔볼까 생각도 든다.
도끼를 잡으면 손에 익은 감촉이 드는건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도끼를 사용한 전투기술같은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선 본능적으로 몸에 익힌 기술이 나온다는데,
애초에 생사의 갈림길 문제가 아니라 공격의 명중률과 정확성 문제였기 때문에
육체에 새겨진 본능 같은게 도움될것 같진 않았다.
...무투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철검이라도 한자루 사서 훈련해볼까?



결국 한동안 고민하다가 장기적으로 봤을땐 검을 드는게 우수한 무기를 얻기 편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틈틈이 모아둔 자금을 쪼개어 무기점으로 향했다.
철검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다 떨어졌어요?"

"네. 무투회 준비한다고 용병들이 철검을 다 사갔거든요."

"미스릴검이나 동방도는요?"

살 돈도 부족하지만 허탈해서 물어본다.

"손님...어디서 들으셨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귀한 검들이 아무때나 쉽게 상점에 들어올리가 없잖습니까."

"...남은 무기는 뭐가 있나요?"

"어디보자...곤봉, 구리검, 철의 단검 세 종류가 있군요."

"......"

각목에 대못 박은것 같은 15G 짜리 곤봉.
무슨 청동기 시대를 회상시키는 40G 짜리 구리검.
뒷골목 왈패들이나 쓸것 같은 130G 짜리 철의 단검.

...이걸로 무투회에 나가라고?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16강>

"흐아압-!"

부아앙----!

콰앙!

"크윽!?"

강하게 휘둘러진 곤봉을 원형 방패를 들어 간신히 막아낸 홀스트 하임만은 주춤거리며 한걸음 뒤로 밀려났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질린듯한 표정의 홀스트 하임만의 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을 계속한다.
저번에 맨손으로 맞붙었을때 알지 못했나?
나한텐 말이지...

"믿을건 힘밖에 없다고오오---!"

"이런 무식한...!"

그럼 넌 유식해서 지고 있냐!
여러모로 미숙한 티가 나는 홀스트 하임만이지만, 철갑옷과 방패로 방어력을 꾀한 것은 나름대론 괜찮은 생각이었다.
하지만...방어력을 위해서 스피드를 희생시킨 네녀석은, 힘은 세지만 명중률은 형편없던 나에겐 그야말로 밥일 뿐이지...!
무거운 방어구들로 인해서 움직임이 느린 홀스트 하임만은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기 보단 방어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건 나에겐 더할나위 없는 최적의 샌드백이었다.

다시 한번 크게 휘둘러진 곤봉에 홀스트 하임만은 이를 악물며 방패를 들어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아앙-!
빠직-!

"엥?"

툭...데구르르...

반토막난 곤봉이 바닥을 구르는걸 보며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러졌네...?"

"...! 후, 후후...!"

방패를 든 채 멍하니 있던 홀스트 하임만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웃음을 흘렸다.
몸을 가리던 방패를 치우고 검을 들어 나를 가리킨채 선언했다.

"이젠 내 차례다!
이번에야 말로 지금까지의 굴욕을 되갚아주마!"

"아, 그러냐?"

태연하게 허리춤에서 새 곤봉을 꺼내들자 검을 든 그 자세로 굳어 버리는 홀스트 하임만.
능글능글 웃으며 곤봉을 들어올린 나는 홀스트 하임만에게 친절히 알려주었다.

"유감이지만 아직 내 배틀 페이지는 끝나지 않았지."

"야, 이 치사한...!"

"안들려!"

바우웅----!

퍼어어엉----!

"크아앗!?"

다시한번 힘껏 휘둘러진 곤봉에 몸통을 직격당한 홀스트 하임만은 휘잉~ 하고 허공을 날아 경기장 한구석에 처박혔다.
그래도 힘 조절은 했으니 죽진 않겠지.
심판을 보던 크루거 장군은 기절한 홀스트 하임만을 보고선 나의 승리를 선언해 주었다.



1회전(16강)에서 예전에 맞붙은적이 있는 홀스트 하임만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나보단 낫겠지만 경험부족이란 약점은 피할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 무거운 갑옷으로 인한 느린 움직임이 홀스트 하임만의 패착이었다.
부서진 곤봉정도야 1승때 마다 받는 돈 300G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고.

2회전(8강) 상대도 지금처럼 편한 상대라면 좋겠다고 바라며 상금을 세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8강>

마법의 불벼락이 몸에 떨어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전진해 눈앞의 적에게 검을 내리친다.

"우어어어억---!"

즈아아앗---!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구리검에 적의 지팡이가 순식간에 반토막 났다.
질린듯한 표정으로 이를 갈던 상대가 지팡이를 내던지며 악담을 퍼부었다.

"이...무슨 놈의 몸뚱아리가 맨몸으로 마법 수십개를 버텨?!
젠장...! 어쩌다 이따위 무식한 놈에게 걸려서..."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냐!?
나 지금 이 몸에 들어온지 겨우 석달밖에 안됐다고?
안그래도 수십발의 마법을 맨몸으로 받아냈더니 더럽게 아파 죽을것 같단말야.
판정패 당하기 싫어서 하나도 안아픈척 태연을 가장하곤 있었지만,
정말이지 그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싶었다.

나...대회가 끝나면 성당이랑 묘지에 갈꺼야...
그래서 항마력을 키워서 돌아올께.
더러운 마법 데미지 같으니...

그나저나 무투회에 출전한 10살 가량의 여자애라곤 아무도 없는데 용사의 딸이란 소녀는 다른 축제에 참석한걸까?

(***프린세스 메이커2의 본편 시작은 1210년부터입니다.)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준결승>

8강에서 마법사를 상대로 힘겨운 승리를 거머쥐고,
준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칼 폭스라는 맹인 무투가였다.
기억하기론 권법 교실의 교관이었던걸로 아는데, 맹인이었던가...

휘둘러지는 무기를 맹인인 칼 폭스가 제대로 피할수 있을지 몰라서 무기 사용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잠시 정신을 팔았더니 어느새 내 뒤를 점한 칼 폭스에게 관절기를 당해버렸다.

"윽?"

"어디다 정신을 팔고 있는건가?"

양팔과 양다리의 관절이 속박된 채로 칼 폭스를 등에 매단 자세가 되어버린 나는 얕게 신음소릴 뱉었다.
이거...정말 장난아니게 아픈데?
꼼짝달싹 못한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린 나.
등에 매달린 칼 폭스는 '쯧'소리를 내면서 혀를 찼다.

"이렇게 어이없이 끝나게 되는군. 유감일세."

정말로 유감스럽다는듯 입맛을 다시는 칼 폭스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끝이라고?
최강의 육체를 가진 주제에 공격한번 못해보고 이토록 무력하게 패배해야 한다고?
바다의 공포로 군림하던, 언제나 두려움과 공포 속에 불려지던 이몸이?
나약하고 초라한 내 영혼으론, 천고의 육신조차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는거냐?
나는 이렇게 쓰러질 순 없어...

국왕의 옆에 선 크루거 장군이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판결을 내리려는듯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게 보였다.
온몸에 힘을 주어 칼 폭스의 관절기를 빠져나오려고 애쓴다.

"소용없네. 이 기술은 힘으로 풀수 있는게..."

"뿌드득...!"

"!"

이빨을 악물고 천천히 제자리에서 일어난다.
깍지를 낀채 내 몸을 꽉 압박하고 있던 칼 폭스의 몸을 잡아 풀어버렸다.

"...엄청난 힘이로군 자네."

이젠 오히려 내게 손목을 잡힌채 허탈하다는듯이 말하는 칼 폭스를 바라보며 나는 미소지었다.

"제게 한번 잡히면, 못벗어납니다."

절대로 풀어버리지 않겠다는듯 칼 폭스를 잡은 양손에 힘을 주자
칼 폭스는 인상을 살짝 찡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내가 진걸로 하지."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결승>

- 담담은 숲인간이라 불리며 두꺼운 피부때문에 방어력이 뛰어나다.
전투와 마법 센스가 양쪽 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두대맞고 한대 친다!"

마법을 날려대는 담담과의 전투는 치가 떨렸다.
초반에는 마법에 엉망진창으로 당하면서 담담의 마력이 바닥나길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도중에 경기장 바닥에서 돌맹이를 주워서 던지거나,
부서진 곤봉을 던지거나 하면서 담담의 집중력을 분산시켰다.

체력에서의 엄청난 우위성을 믿고선 뼈를주고 살을 깎는 전법을 구사하길 한참...
이윽고 담담의 마법 공격이 뜸해지자 그때부턴 그야말로 시궁창 싸움이었다.

창을 들고 달려오는 담담에게 맞서 구리검을 창과 부딪힌 뒤론 그대로 개싸움으로 끌고갔다.
창을 뺏고 니킥을 날려 담담을 쓰러뜨린 후 넘어진 담담의 위에 올라타 쉴새없이 주먹을 날렸다.

마법 수십발로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나와 주먹질로 만신창이가 된 담담의 막싸움은
얼굴에 있는 무늬가 문신인지 멍인지 분간되기 어려워질 만큼 엉망이 된 담담의 항복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머슬 할발의 승리다."

「「「......」」」

무투회를 구경온 사람들의 침묵이 아프다.
떨떠름한 목소리로 승리선언을 한 크루거 장군은 국왕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왕국 백성들에게 왕국 무투회 역사상 가장 몰상식한 결승전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시상식>

"장하도다 머슬할발.
그대의 싸움은...그러니까...
...으음, 굉장히... 박력이 있었다네."

"......영광입니다 폐하."

그냥 솔직히 투박하다고 하셔도 됩니다 폐하.
멍투성이가 된 담담의 옆에서 국왕의 입발린 치하를 들었다.
거북함에 엉거주춤히 서있으면서, 부디 시상식이 빨리 끝나길 바랬다.

정말이지 이번에 번 돈으론 도장이나 다녀야지 원...


<1209년 댄스파티>

"휘유~ 정말이지 화려하군."

무투회가 끝나고 들른 댄스파티 장에선 각지의 여성들이 저마다의 미를 뽐내고 있었다.

중동지역차림의 쥴리에트(21)라는 여성은 리본을 이용한 댄스를 췄고,
피올리나(22)라는 회색 장발의 여성은 양팔을 벌리고 민족특유의 춤을 추었다.
인도쪽 의상을 입은 옅은 갈색 피부의 아니스(19)는 이마에 붉은 튤립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한다리만으로 균형을 유지한 채 추는 춤은 꽤나 고난이도로 보였다.
무용 교실의 선생님인 도베(23)는 은발에 어울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예술적인 미가 돋보이는 춤을 추었다.

그리고...

"어라?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거죠?"

"게엑..."

"뭐에요!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반응이라니 실례잖아요!"

녹색의 꽃장식을 단 갈색 만두머리소녀.
붉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양손에 부채를 든 '타오 란팡'(14)은
푸른 눈동자로 나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도 댄스 파티에 출전한거냐?"

"당연하죠."

"무투회는 어쩌고?"

구경이라면 모르겠지만 대회에 참가하는건 무투회, 예술대회, 댄스파티, 요리대회 네곳중 한곳만 지원이 가능하다.

"수련도 좋지만, 레이디라면 자신을 가꿀 줄도 알아야겠죠?"

"인정."

무투회랑 댄스파티 양쪽에서 순위권에 들 정도면 꽤나 다재다능한 아가씨 같았다.

"그래서, 제 춤은 어땠어요?"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훌륭했어.
차이나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가 특히 매력적...「퍽!」켁?!"

"장난치지 말아욧!"

"아니, 진심「또 여관신세를 지게 해드릴까요?」...죄송합니다."

노려보는 란팡에게 사과하곤 다시 감상을 말했다.

"무예로 단련된 부드러운 유연성을 강조하면서 부채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건 멋졌어.
특히나 머리뒤로 길게 내려온 끈들이 부채를 펼치며 일어난 바람에 하늘거리는 효과는 정말이지 예뻤다구."

"에..."

란팡이 조금 놀란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뇨. 의외로 자세히 얘기해주는구나 싶어서요...
당신이니까 건성으로 대답해주는게 아닌가 했거든요.
꽤나 신경써서 보고 있었나봐요?"

"...평소의 나는 너에게 대체 어떤 인상인거야?"

"근성없고 건성에다가 툭하면 도망치는 음흉남."

"......"

할말을 잊고 가만히 있는데 뒤에서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당신이 왜 여기 있는거야?"

...설마설마설마...?

"...란팡."

"왜그래요?"

"부디 지금 내 등 뒤에 서있는 여자가 금발에 빨간 속옷만 입은 에로 꼬맹이가 아니라고 말해줘..."

"누가 꼬맹이야!"

퍽!

"으갹?!"

뒤에서 엉덩이를 걷어차져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신을 덮쳐오는 내 몸뚱아리를 보던 란팡은, 무술가답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피해버렸기에 난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수 밖에 없었다.
엎어진채로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는 '죠니프 더 퀸'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속옷이 아냐! 본디지 스타일이라고!"

그거나 이거나 노출도랑 부끄러운건 매한가지 아냐!

그거냐? 스트라이크 위○즈?
팬티가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아요?
아니면 이 자식이 내 주인○?
맨살이 아니라 살색 스패츠니까 괜찮아?

"그렇게 내놓고 다니면 안부끄럽냐?"

"핫~! 그런건 몸매에 자신이 없는 여자들이나 그런거지!
나같은 미녀는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구."

허허...그러세요?

"그럼 만져봐도 돼?"

"되겠냐!
쳐다보는거랑 만지는건 애초에 달라!
애태우는 남성들을 보는게 즐거운거라구!"

살짝 몸을 가리면서 반박하는 죠니프.
갑작스런 난입자에 란팡은 어리둥절하며 내게 물었다.

"저기, 이 사람은 누군가요?"

"아, 란팡은 초면인가?
이 애는 죠니프 더 퀸.
노출증이 있고 의외로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15살 꼬맹이."

"노출증이 아니얏! 본디지 패션이라니까!"

화내는 모습이 적당히 화제를 돌리는게 좋아 보였다.

"그래그래. 본디지 패션.
아무튼, 너도 댄스파티에 참가했지?"

"흥! 물론이지!
아까 내가 춤출때 심사위원의 얼굴 봤어?
굉장한 표정으로 날 보더라고.
나의 매력에 홀딱 빠진게 틀림없어."

굉장한 표정?
기가막힌 표정이겠지.

"...대신님은 똑똑한 여성을 좋아하는데?"

"뭣? 그럴리가...!
분명히 배나온 아저씨들은 이런 복장을 좋아한다고..."

"너 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지식을 배운거야..."

콩-하고 죠니프의 이마를 살짝 두드렸다.

"아얏...!"

이마를 매만지는 죠니프에게 한숨이 나왔다.

"...대신님이 보시고 천박하다고 생각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다.
담번엔 좀 조신한 복장으로 와."

"조신한?"

"그래. 기왕이면 똑똑해 보이는 옷차림으로 말야."

"그럼 안경+본디지로..."

"너 자꾸 본디지 고집할래?!"



왠지 재밌어 보이는 란팡의 방관으로, 죠니프와 말도 안되는 콩트를 연출하기를 한참.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듬에 따라 대화는 중단되었다.

"어머나...그때의 그 천박한 평민아냐?"

...이건 또 설마로군...

"...란팡."

"흰 드레스에 붉은 망토. 갈색 웨이브에 흰꽃과 금색 머리장식의 아가씨에요."

"친절한 설명 고마워."

척-하면 착-이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묘사해준 란팡에게 목례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는, 흰 드레스가 어울리는 귀족 아가씨.
프랑소아 모레(17)다.

"...오랜만입니다."

"흐응~ 당신같은 평민이 이런 곳엔 어쩐 일이야?"

"꽃에 나비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핫, 의외로 입담이 있잖아?
그래서, 당신은 맘에 드는 꽃은 찾았어?"

"알고 지내던 이들은 찾았습니다."

"그래?"

내말을 들은 프랑소아는 란팡과 죠니프를 번갈아 보곤 짙은 미소를 지었다.

"흐응...한명은 이국의 계집아이고, 다른 한쪽은..."

무례한 언동에 란팡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 졌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죠니프를 빤히 보던 프랑소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듯이 말했다.

"평민들이 부러워...그렇게 싸구려 천조각을 입어도 부끄럽지 않으니까."

"뭐야!"

발끈한 죠니프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듯이 한걸음 나서자 기겁해서 죠니프를 말렸다.

"차, 참아 죠니프?"

"어째서 내가?!"

"우선 침착해."

죠니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당긴 다음, 조롱어린 미소를 지은 프랑소아를 보았다.

"아이에게 하는 말로는 어른으로서 잘못하셨습니다."

"내가 평민에게 뭐라하든 상관할 이가 누가 있단 말이냐?"

"밀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훌륭한 이는 겸손함으로써 자신을 높입니다.
화려함은 현명함을 갖출때 비로소 아름다운것.
당신께서 스스로를 가꾸고자 하신다면,
저희가 당신을 존중하는 만큼, 당신도 우리를 존중하는 현명함을 보여 주십시오."

"저들은 정원의 화려한 꽃과 달라.
나비도 찾지 않을 하찮은 잡초들일 뿐이야."

"물론 그녀들은 꽃같은게 아닙니다."

"응?"

의외란듯 나를 보는 프랑소아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응시한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녀들이 꽃이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겠지.
죠니프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살짝 떨림이 전해져온다.
진정하라고. 나쁜 뜻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들은 꽃이 아닙니다.
결코 화단속에서 남에 의해 가꾸어지는,
하염없이 멈춰서 나비만을 기다리는 꽃이 아닙니다.

그녀들은 새장을 벗어난 새입니다.
행복을 찾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선 이들입니다."

손에 잡힌 어깨에서 떨림이 잦아든다.
그래도 이걸로 안심하면 곤란하지.
거만한 성품의 프랑소아라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의외로 프랑소아는 아무말 없이 나를 보며 제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시선을 피하면 지는거라 생각했기에 계속 프랑소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나중에 무례하다고 혼나는거 아냐?

잠시 후, 프랑소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시시해."

정말로 재미없다는듯 프랑소아는 뒤로 돌아서서 고개를 돌려 힐끗 이쪽을 봤다.

"당신, 이름이 뭐였지?"

"머슬 할발입니다."

"그래..."

중얼거리듯 말한 프랑소아는 조용히 파티장을 떠나버렸다.
...참견이 지나쳐 화나게 한건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때를 걱정하고 있으려니
손등을 톡톡하고 건드리는 느낌이 왔다.
시선을 내려보니 죠니프가 한손가락으로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기, 이제 놔줘."

"아...그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자 죠니프는 살짝 팔을 움직이며 몸을 풀었고,
뒤에 서있던 란팡이 내게 물었다.

"방금전 그 아가씬 누구죠?"

"프랑소아 모레. 검술이 취미인 귀족의 영양이야.
신경이 날카로울 17세의 사춘기 아가씨지."

"뭐라고 할까...굉장히 공격적인 느낌의 사람이군요."

"그래! 뭐야 그 여잔! 이 선구적인 패션 감각을 모른단 말야?"

발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주장하는 죠니프에게 사과했다.

"미안. 그건 나도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뭐야!"

버럭-! 하던 죠니프는 문득 떠오른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에로 꼬마야?

"그나저나 너, 이름이 머슬 할발이었구나?"

"응? 몰랐던가?"

"저번에 싸웠을땐 듣지도 않고 가버렸으니까."

그랬던가.
그러고보면 항상 도전자만 이름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나도 도전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통명성은 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지.

"그럼 설마 이번 무투회 우승자가 너야?"

"무투회 우승? 머슬 할발이?"

신기한듯 쳐다보는 죠니프와, 놀란듯 바라보는 란팡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져서
우쭐한 표정으로 선사받은 '은사의 검'을 내밀었다.

"에에~ 정말이었잖아?"

"암~ 물론이고 말고. 이몸께서 바로 올해 무투회의 우승자이시다~!"

「「...재수없어!」」

"핫핫핫! 존경해라 이몸을~!"

이젠 나의 명성도 조금은 높아졌을꺼라 생각하며 장미빛 미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때
죠니프가 삐딱한 표정으로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듣기론 왕궁 무투회 역사상 가장 몰상식한 막싸움이었다던데..."

"......"

"딴청 피우는걸 보니 사실이구나?"

"시끄러! 싸움에 무식하고 말고가 어딨어?
어쨌든 우승이라구!"

열을내며 반박하는 나에게
란팡과 죠니프는 충고하듯 말했다.

"기왕이면 멋진 모습으로 이기면 좋잖아요.
보는 국왕폐하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워할 거라고요."

"맞아! 그리고 계속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이기면,
싸웠던 우리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것 같아 싫단 말야."

"그러니까 역시 싸움에도 미학이 있어야 해요."

뭐여? 이게 무슨 동방이야?
탄막은 아름다워야 한다 뭐 그런거냐고?!

"아, 좋아. 좋다고.
내 도끼에 비살상 설정만 걸어준다면야 그까짓거 아름답게 싸워주마!"

"...억지쓰지말아요."

"뭐야, 애 같아."

이거참, 전투기술 부족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어이없어 하는 둘에게 푸념아닌 푸념을 늘어놓다가
사내 녀석이 시끄럽다고 핀잔을 들어버렸다.
누가 내 고충좀 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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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어서 계속 써봤는데 어제 낮부터 시작했거늘 지금 다 써진건 대체 왜이런건가...ㅇ<-<
아무튼, 1209년에 할일은 대충 끝난듯?

트러블도 써야 되는데 중간부분 메꾸는게 참 어렵군요-ㅅ-;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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