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년 4월 xx일

동방에서 온 무역선을 털던중 희귀한 보물을 획득했다.
붉은 보석을 푸른 뱀 두마리가 휘감는 디자인의 팬던트였다.
귀족들이 많은 왕국까지 간다면 꽤나 비싸게 받을수 있어 보였다.
팬던트를 보관하고 있던 상자에는 동방의 문자로 보이는 이상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글자가 새겨진 부적이 붙어져 있었지만
밀봉을 뜯고 나자 그림도, 부적도 바스라져 버렸다.
불길하다며 불안해하는 부하들을 달래며 기분나쁜 상자와 부적 조각은 바다로 던져버렸다.」

「1209년 5월 xx일

왕국으로 가는 서부사막을 가로지르다 동굴에서 악마를 만났다.
저번달에 노략질로 획득한 팬던트를 얻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교환조건으로 하찮은 마법 나부랭이와 외모를 가꾸는 잡술따윌 내거는 악마의 무능함에 그 자리에서 도끼로 목을 날려버렸다.」

「1209년 5월 xx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화산지대를 지나던 중, 동굴근처에서 야영을 하다가 깊은 어둠이 느껴지는 동굴의 안쪽에서 연회를 하던 악마의 무리를 만났다.
그 가운데 머리에 뿔이 두개 달린 붉은 피부의 악마가 나를 보더니 유쾌한듯 말을 걸어왔다.
스스로를 마왕 루시폰이라 소개한 악마는 팬던트를 조건으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뭐랄까, 자신의 딸('그렌다'라고 하는것 같았다)에게 줄 선물로 내가 가진 팬던트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대함이 느껴지는 육체.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마왕의 모습에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바다의 지배자로서 공포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점차 노쇠해져가는 나의 육신...
어쩌면, 혹시나 어쩌면, 마왕이라면 나의 소망도 들어줄수 있는게 아닌지?
격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나는 소망을 말했다.

- 인세에 둘도 없을 '극강의 육신'을...

소원과 함께 마왕에게 팬던트를 건넨 직후, 몸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혼미한 가운데 마왕의 웃음섞인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땐 주위엔 연회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마치 모든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주름살이 사라진 내 손바닥과, 북쪽의 오아시스에서 비춰진 젊은 내 얼굴.
여전히 하얀 머리털과 수염의 끝에서 살짝 보이는 검은 털, 그리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힘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젊어진 몸으로...」

「1209년 6월 xx일

부하들을 데리고 상선들이 지나는 해상경로를 배회하던중
날이 갈수록 파도가 심해지고 먹구름이 짙게 깔린 가운데 안개에 휩싸인 지대로 잘못 들어서 버렸다.
며칠째 바다위를 정처없이 헤메면서 부하들의 사기는 점차 떨어져갔다.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항해사가 심각한 얼굴로 폭풍을 걱정하고 있었다.」

「1209 6월 xx일

폭풍이 시작되었다.
악마와 거래한 대가인가...
이상한 주술이 새겨졌던 상자도 지금에 와선 저주의 의미로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신이여, 부디 우릴 구원하소서...」




"...그래서 이 꼴인건가..."

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항해일지인지 일기인지 모를 종이뭉치를 읽어나가다 어쩔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보아하니 폭풍을 만나서 배도 박살나고 선원들은 모조리 물고기밥이 되어버린듯 했다.
지금 이몸 꼴을 보아하니 완전 죽다 살았구만...

바닷물에 반쯤 잠긴 상태에서 깨어난 뒤 어떻게든 육지로 올라와서 몸을 말리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모은 정보는 그렇게 많진 않았다.
현재 위치는 왕국의 남부 폭포지대의 가장 끝자락에 해당한다는 정보.
그리고 종이뭉치를 읽고 겨우겨우 떠올린 기억들 뿐이었다.

푸른 뱀이 붉은 보석을 감싼 팬던트, 마왕 루시폰.
기억속에서 쓰던 거대한 도끼, 부하, 해적, 노략질, 항해일지에 쓰여진 M.H.라는 이니셜.

...프린세스 메이커 2의 '머슬 할발'이었냐...

아니, 그러니까 그거잖아?
악마의 팬던트를 달라던 악마의 조건이 맘에 안들어서 썰어버렸더니,
마왕이 거래를 걸어와서 강한 육체를 조건으로 교환했다는거.

근데 그렌다는 또 뭐여?
딸내미 선물?
...꼬마공주 유시냐?
설마 여기 용사의 이름이 건버드(유시의 아버지)는 아니겠지?

악마의 거래라느니 저주라느니 한창 불길한 소리나 적어놨더니만,
결국엔 딸바보 마왕님이 딸 선물 주려고 이 몸에 젊음을 준건가.

새삼스레 지금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넘치는 힘을 주체못하고 근질근질해 하는 육체.
깨진 유리에 비친, 흰머리와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젊고 강인한 얼굴.
...무병장수는 확실할것 같네...가 아니고...

비를 피한답시고 거대한 나무 밑에 서있다가 난데없이 벼락맞고 나무구멍에 빠지는걸로 의식을 잃었는데...
영락없이 죽은줄로 알았건만, 깨어나보니 프린세스 메이커2의 세계.
게다가 '머슬 할발'이라니.(젊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일이래?

주저앉은채로 끄응...하며 앓는 소리를 내보다가
한차례 머리를 긁적이곤 엉덩이를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주위는 인기척이 드문 자연림.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고,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있는 왕국으로 가보는게 나을것 같았다.
기억에 남은 남부지대의 지리를 더듬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힘내서 살아가 볼까.
상황에 따라선 9살에 마왕을 잡은 용사가 산다는 기상천외한 세계에서...



난생 처음보는 인어 모습의 괴물(패치 피쉬)이라든가 물고기 머리의 괴인(피쉬맨)이라든가
트롤을 만나서 죽을 고생을 했다.
육체가 아무리 튼튼해봤자 애초에 내가 목숨걸고 하는 투쟁 같은걸 해본적이 있을리 없잖아?
게다가...맨손으로 뭘 어떻게 하라고?!
풍랑에 쓸려갔는지 머슬할발이 즐겨쓰던 도끼도 없는 상황에서 믿을건 오로지 무식한 완력뿐이었다.
적의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고 막으며 상대를 냅다 바닥에 내리꽂아 박살을 내는걸로 대부분의 상대를 처치했다.

다만...적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맞는 횟수가 워낙 많다 보니까,
안그래도 후줄근한 옷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그나마 아랫도리의 옷은 훼손이 덜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고마워, 망할 자식들아.

덕분에 왕국으로 가는 길의 검문소에서 마주친 왕국 경비대에겐 거지로 착각당하기까지 했다.
그후, 검문을 위해 신분증을 요구하는 왕국 경비병에게 풍랑을 만난 사실을 이야기 하며 선처를 구하는 과정에서 좀 해프닝이 있었다.

"...그럼 해변에서 왕국까지 맨몸으로 폭포지대를 지나왔단 말인가?"

질린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경비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싸움방식은 막싸움 수준이었지만, 완력이랑 몸의 튼튼함 만큼은 엄청나서 어떻게든 올수 있더라고요.

반쯤 걸레가 되어버린 내 옷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경비병들은 이내 관리에게 부탁해 간단한 신원조회를 했다.
당분간 인상착의와 관련해서 서류들(행방불명, 범죄자 목록 따위)을 훑어보던 관리는
소정의 금액으로 통행증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통행증 발급에 100G요."

...방금전에 내가 표류했다는 얘기 못들은겁니까!?
나 지금 빈털털이라고요.
무기는 커녕 갈아입을 옷도 없는 신세란 말입니다!

"...잡템으로 대신할순 없나요?"


완고한 관리에게 한동안 애걸복걸 하다가, 패치 피쉬를 잡고나서 챙긴 비늘 조각들을 건네 주고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검문소를 나올때, 여관비로 쓰라며 조금씩 돈을 보태주던 경비병들의 친절함에 눈물이 났다.

...몇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비늘(칠흑의 비늘)이 상점에서 개당 250G에 거래된다는걸 안것은 여담이다.
뭐, 그렇다 쳐도 그 당시 아쉬운건 나였기 때문에 좋은 경험 했다치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신원불명자에게 통행증을 발급해준 은혜도 있었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으라차아아아-!"

쩌어억-!

기합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도끼에 아름드리 나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이걸로 오늘 벌목장에서 할 몫은 다 끝난건가?

"수고했네 머슬할발.
처음에 일을 맡길땐 확신을 못했지만, 자넨 천생 도끼질을 할 태생이로군!
나무베는 폼이 많이 엉성하긴 해도, 이렇게나 빨리 일을 끝마치는 걸 보면 자네 도끼질 하난 역시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하하..."

도끼질 하는 폼이 엉망이지만, 워낙 힘이 넘쳐서 말입니다.
그나마 10일이 지난 지금은 적당히 그럴싸하게 보일정도로 도끼질을 하게 되었다.
역시 튼튼한 몸이 최고의 재산이지!

"아무튼, 자네 이름을 보면 확실히 도끼질을 잘할것 같긴 해."

"이름요?"

"머슬 할발이라면 무투대회의 우승을 몇번이나 해온 자의 이름이 아닌가.
엄청한 실력의 용병이자 해적두목이라더군.
그래서 처음 자네의 이름을 들었을땐 많이 놀랐었다네."

"그, 그런가요?"

"하지만 듣기로 머슬 할발은 중년은 넘은 나이라고 하던데
세상엔 특이한 동명이인도 있군?"

"핫,핫,핫... 그렇네요."

진짜로 동일인이지만요.

"그나저나...겨우 10일동안이었지만 수고해줬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나무를 벨 수 있었어.
그런데, 정말로 이제 나뭇꾼 일은 그만할건가?"
이런 말 하는것도 그렇지만 자네는 정말 소질이 있어.
평생 나뭇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거라고."

...일생을 나뭇꾼으로 지내고 싶진 않은데요.

"나뭇꾼도 좋지만 저로선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길래 그러나?"

"적어도 머슬 할발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랑 비슷한 업적이라도 이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넨 뛰어난 전사가 꿈인 모양이군?"

"네. 당분간은 용병 생활이라도 하면서 마물들을 소탕해볼까 합니다.
운이 좋다면 수확제때의 무투회에서 활약할수도 있겠죠."

젊어선 모험도 하고 명성도 쌓으면서 재산 빵빵하게 불리고,
나중엔 왕궁 무관같은 안정된 직업을 구해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 알콩달콩 함께 살 참한 신부도 찾아보고 말이죠.

"아무튼, 수확제까진 3개월도 안남았으니 그전에 경험이라도 쌓아둬야죠."

"그런가... 그럼 힘내도록 하게. 나도 응원하고 있을테니."

이후 같이 일하던 분들과 아쉬움이 담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어서오십시오 손님. 제노의 무기점입니다."

"도끼 없나요?"

"나무하시게요?"

"......"

...무기들이 죄다 검이네...

결국 벌목장에서 쓰던 도끼 한자루를 구해서 당분간 쓰기로 했다.
시작부터 엇나가는게 조금 불안하게 느껴진 하루였다.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건 바로 의식주.
나만의 집이 없다보니 여관비로 나가는 돈때문에 소지금 문제로 항상 골치가 아팠다.
소지품이라고는 도끼랑 며칠전 나뭇꾼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소량의 금액.
게다가 그 남은 돈도 며칠뒤면 다 떨어지게 된다.
옷도 옷가게에서 싸게 산 단벌로 버티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품팔이를 해야할 처지가 될것 같았다.

"...역시 돈을 버는덴 무사수행이 최고지."

남부폭포지대에서 어떻게든 몬스터와 아웅다웅해서 습득했던 아이템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혔다.

우선 무사수행 중 야외에서 잠잘때 쓸 텐트를 사기 위해서 마을 시장에 들렀다.

"우선, 텐트랑 혹시 모르니 쾌유환을 사두는게 좋을까..."

"거기 당신!"

"...응?"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만두머리를 한 차이나 드레스의 소녀가 양손에 부채를 펼쳐 든 채 서있었다.
소녀는 양옆머리에 꽃무늬 장식을 하고 이마에 나비모양 장식을 달고 있었으며, 만두머리를 묶은 끈은 무릎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당연하지만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부른게 아닌가 해서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 있으려니
붉은 차이나 드레스의 소녀는 발끈한 표정으로 한손의 부채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어딜 보는건가요! 여깁니다, 여기!"

"...나말야?"

소녀가 찾는게 내가 맞는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요! 당신.
여기에 당신말고 누가 또 있다는 거에요?"

"...저기, 미안한데..."

"뭐가 말이죠?"

다른 한손을 옆구리에 대고 인상을 찡그린 소녀에게 사죄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누군지 기억이 안나는데..."

"무슨소린가요?
저도 당신은 처음봅니다."

"엥?"

그럼 길가는 날 불러세운 이유가 뭐야?
딱히 길가다가 저 아가씨랑 부딪히지도 않았잖아?

"그럼, 무슨일이야 꼬마 아가씨?"

"꼬마라뇨!
이래뵈도 14세라고욧!!"

아니, 어떻게 봐도 미성년자잖아?
중학생 뻘이라고?

"그리고 당신한테 꼬마란 소리 들을 이유 없어요!
당신도 끽해봐야 20살 남짓으로 보이잖아요?
그리고 그 이상하게 기른 수염 좀 다듬어요. 지저분해 보이니까."

"......"

초면의 상대에게 정말이지 심한 소리다...

한동안 나를 노려다보며 씩씩 거리던 만두머리 소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후우...이게 아니지...
이러려고 말을 건게 아닌데.
당신이 이상한 소릴 하니까 원래 목적을 잊을뻔 했잖아요?"

"에, 그러니까...미안합니다?"

"어째서 의문형?
...아무튼, 좋아요.
보아하니 무술가로 보이는데 저랑 한번 겨뤄보지 않겠나요?"

"엥?"

겨뤄?

"내가?"

"네."

"...너하고?"

"그렇죠."

"......뭘 한다고?"

"아까부터 당연한걸 왜 자꾸 물어봐요?
결투 하잔 말이에요!"

신경질을 내며, 팍- 소리가 날정도로 부채를 접어 나를 가리키며 외치는 만두머리 소녀.
...그러니까 지금 난 길거리에서 도전받은 상황인거냐.
젠장, 모험의 시작을 하기도 전에 이게 왠 날벼락이야?

어느새 주위엔 사람들이 구경하러 원을 형성해 몰려들어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들이 지금부터 있을 결투를 기대하는것 같았다.
큰일났네...
14살 밖에 안먹은 여자애 상대로 싸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꼴사나운 짓거리 밖에 안될것 같다.
이겨도 소녀를 때린 폭한, 혹시나 져도 계집애보다 못한 놈이란 평가가 따를것 같아 무섭다.
그냥 적당히 속여 넘기자.

"사람 잘못 봤어. 난 무술가 같은게 아니거든."

내말이 끝나자 마자 만두머리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부채로 입을 가리며 날 노려봤다.

"시치미 떼지 마시죠.
방금 텐트랑 쾌유환 사러 간다고 하는것 다 들었습니다.
무사수행을 떠나는 사람이 무술가가 아니면 뭐라는거죠?"

이런, 방금전 중얼거린걸 들었던건가?
하지만 이런걸로 포기할 순 없지.

"어쨌든...이만 포기하시죠.
제 이름은 '타오 란팡'.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저기...나 도끼도 여관에 두고 왔는데...」..."

빠직...

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란팡이 손에 들고있던 부채가 뚝-소리를 내며 두동강이 나버렸다.

...어머나?

박살이 나버린 부채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던 란팡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 들었다.

"아, 진짜...!
사내가 이것저것 하나하나 소심하게 굴지 말란 말예욧-!"

"으갸갹!?"

파라락-!

부서진 부채를 내 얼굴을 향해 던지며 란팡은 몸을 낮춰 다리를 쓸듯 나를 공격해왔다.

"자, 잠깐? 난 아직 내 이름도 안말했다고?!"

통성명도 없이 덤벼들기냐?!

"당신의 이름따위 궁금하지도 않아욧-!"

이거...아무래도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난것 같은데?
푸른 빛의 눈동자와 반대로 붉게 달아오른 뺨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듯 했다.

"하앗!"

"으앗?!"

공중에서 날아들며 궤도를 바꾸는 부채를 피하랴,
권법으로 덤벼드는 란팡을 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결투전에 다른 부채 하나가 박살이 나버려서 부채 하나만 상대해도 된다는걸까.
뭔가 분한듯한 란팡의 표정을 보면, 원래라면 좀더 복잡했을 공격이 부채 하나를 잃음으로써 훨씬 단조로워진듯 했다.

바락바락 공격하다가 날아가던 부채를 잡아채 휘두른 란팡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치잇...! 겁쟁이처럼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꺼에요?"

"그렇게 말해도...어라?"

뭔가 가슴께가 허전해서 슬쩍 아래를 내려다 보곤 경악했다.
날아오던 부채의 공격이 스쳤는지 어느새 길게 찢어진 흔적들이 수없이 나있어 엉망이 된 내 상의...

아...아아아아아---?!
내, 내 단벌옷이 찢어졌다아아?!
평상복으론 무술가들이 날리는 부채공격을 도저히 버틸수 없는것 같았다.
이, 이래서 갑옷이 필요한건가...!

텐트랑 쾌유환 사고 나면 평상복 살 돈도 없어진단 말이다!
울분에 차서 란팡을 노려보자 란팡은 주춤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에요?"

"...피하기만 한다고 그랬지?"

"...하, 이제 제대로 싸워볼 생각이 든건가요?"

정신을 차리곤 전의를 다지는 란팡을 보며 양주먹을 불끈쥐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후회하게 해주마!"

"그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껴안아 주겠어!"

"에엑?"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란팡을 무시하곤, 양팔을 벌리고 전력으로 란팡을 덮쳐갔다.

"으라아아아아!"

"꺄아악-?!"

기겁해서 옆으로 피하면서 바로 공격태세로 들어가려는 란팡.
하지만, 상정범위 안이다!
내가 노렸던건 바로 이거다!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만두머리를 묶은 끈...!

"잡았다!"

"에? 꺅!"

불균형한 자세에서 강하게 끈을 잡힌 란팡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끌려와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는 꼬맹이들처럼 유치하지만 상관없어!
더이상 옷이 상하기 전에 빨리 끝내는게 최선이다!

일어나려던 란팡을 위에서 덮을듯이 짓눌렀다.
양손으로는 란팡의 양팔을, 양 다리로는 란팡의 다리를 속박한채 바닥에 밀어붙였다.

"으읏...?!"

고정시키던 끈이 당겨져 한쪽 머리가 풀어 헤쳐진 란팡은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전투기술이라면 모르겠지만 완력으로 비교하자면 애초에 자릿수 자체가 다르다고.
바닥에 쓰러진 란팡을 보며, 무술가를 상대해 거운 첫 승리에 나도 모르게 유열에 찬 미소가 지어졌다.

"후, 후후후...드디어 잡았다..."

"뭐, 뭐에요?"

안색이 조금 변한 란팡이 나를 바라보며 아직 지지 않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럼 이제 옷에 대한 대가를 받아볼까...

"자, 이 대가를 어떻게 치뤄 줄꺼지...?"

"무슨...?"

"모르나? 아, 과연...모르겠지.
아직 어린애에게 이해하긴 무리인가?"

내가 찢어놓은 이 옷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노동의 신성함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이해할 순 없지.

변상금을 톡톡히 뜯어내려는 마음이 듬뿍담긴 심상치 않은 내 목소리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관객들.

「서, 설마 이런 대낮에 마을 한복판에서?」
「그런 대담한...! 용자...아, 아니. 범죄자다!」
「저 소녀, 불쌍하게도...어쩌다 저런 음흉한 사내에게 싸움을...」

과연 한복판에서 소녀를 협박하는건 대담하긴 하지...
그래도 시비는 저쪽이 먼저 걸었다고?

관객들의 말을 듣던 란팡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시, 싫어...!"

눈가에 눈물마저 맺힌채로, 란팡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이미 잡혀버린 이상은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그러네...

"후후...발버둥쳐봤자...「퍽-!」...!"

순간,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던 란팡의 무릎이 내 중앙을 직격했다.

"크어억?!"

"에?"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이 전해져 오는 순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선
바닥을 뒹굴거리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

뭐, 뭐가 극강의 육신이고 최강이야?
남성의 숙명적인 약점은 그대로잖아?!
정신이 나갈것 같은 괴로움에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끙끙대고 있으려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란팡이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대로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쳐다봤다.

"저기...괘, 괜찮아요?
이봐요...?"

괜찮을것 같습니까 이 아가씨야...
걱정해주는건 고마운데, 이럴거였으면 처음부터 시비를 안걸었으면 좋았을꺼야...
무투가가 날린 니킥의 데미지는 아직까지 가라앉을줄 몰랐다.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죽을상을 하고 있는 사내들의 얼굴도 보기 싫고,
얼굴을 붉히며 어머어머를 연발하는 여인네들의 시선도 쪽팔린다.
어서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까부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민 손을 꼼지락대는 란팡의 얼굴을 보았다.

"여, 여어...꼬마 아가씨."

"네?"

"네...네 승리다."

"지금 그런걸 따지고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괜찮은거에요?"

"그, 그러니까 여관까지만 좀 부축해줘..."

"에?"

역전승을 한 란팡에게 승자의 관대함을 부탁하는 나였다.
어리둥절하던 란팡이었지만 결국엔 어찌어찌 나를 일으켜 여관까지 데려다 주었다.



질질 끌리듯 어린 소녀에게 반쯤 업혀져 오는 나를 본 여관 주인이 히죽 웃음지었다.
뭡니까 그 웃음은?

"여어~ 꼴사나운 모습이구먼. 그쪽 아가씨에게 작업 걸다가 얻어맞기라도 한거야?"

"...피해자는 제쪽입니다만..."

"그러니까 미안하다니까요...!"

얼굴을 창백히 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나와
불평하면서도 부축해주는 란팡을 번갈아 보던 여관 주인은 낄낄대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부축해주었다.

"그럼 이젠 내가 돌보도록 하지.
아가씬 이만 돌아가봐도 좋아."

"저기...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이녀석 몸하나 튼튼한건 벌목장 주인에서 충분히 들었으니까.
잠시 누워있다보면 회복하겠지."

"그럼, 이만 가볼께요.
...아, 그전에."

꾸벅-하고 인사를 한뒤 여관을 떠나려던 란팡은 다시 뒤를 돌아서 나를 보았다.

"거기 당신."

"끄응...나말야?"

되물어본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란팡은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면 통성명을 안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머슬 할발."

"...이상한 이름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할말은 없다.

"뭐라고 불러야 하죠? 머슬? 아니면 할발?"

"그냥 합쳐서 '머슬 할발'이라고 불러.
나도 그게 듣기 편해."

"머슬 할발..."

중얼거리며 내 이름을 되뇌던 란팡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머슬 할발.
오늘 일은 미안했어요.
화가 났다지만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였군요."

깊게 몸을 낮추며 사과하는 모습에
괜히 민망해져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뭐...
나도 좀 추태를 보인것 같아 미안해.
그리고 아까전 일은 신경쓰지마.
고의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다음번엔 제대로 시합해보도록 해요."

"...또?"

"물론이죠.
당신은 도끼가 없었고,
나도 내 무기인 부채 한자루가 모자라 전력이 아니었으니까요.
다음번엔 저의 진심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팩- 소리를 내며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상태로 나를 보던 란팡은
이번에야 말로 몸을 돌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여관을 나섰다.

머리를 묶은 끈이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허공에서 춤추는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방금전 말을 상기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좀 봐주세요..."

제대로된 전투법도 숙지하지 못한 내가 도끼를 들고 대인전을 치렀다가는
손한번 못뻗고 일방적으로 패배하거나,
헛나간 도끼질에 팔자에도 없는 도끼살인마가 될지도 모른다고.
들어야 할 사람도 없는 가운데 허무한 메아리만이 여관을 울렸다.

모험을 계획한 첫날부터 꼬여버린 일정에 답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낭만과 열정에 부푼 첫 모험...과연 잘 할 수 있을까?



===============================
"뭘 써보고 싶나?"
"러브 코미디요."
"...그 다음은?"
"착각물이요."
"그리고?"
"안야한거요."
"흐음...그럼, 커플링은 어떤걸 좋아하나?"
"1대 1로 맺어지는거요."
"...자네..."
"네?"
"코가 길어졌네."
"......(슬그머니 코를 가린다.)"



트러블 쓰다가 막힐때 쓸듯합니다.=ㅅ=a
퀄리티는...글쎄요...-_-;
원래는 시간을 많이 스킵할 때마다 <1209년 x월 어느장소> 이렇게 표기하려고 했었는데
일창게에서 그렇게 쓰긴 이상할것 같아서 생략해놨더니 좀 이상한...-_-;;

참고로 꼬마공주 유시는 노래는 정말 좋아하지만
애니메이션 모든 편을 시청한게 아니라서, '그렌다'는 그냥 까메오입니다.



인물 목록 (1210 기준 연령)

[등장인물 이미지]

(이미지 출처 bidong.namoweb.net/bidong/pm25.html)

프랑소아 모레 (18) - 화려지만 오만한 귀족 아가씨. 갈색 웨이브 머리. 흰 드레스에 붉은 망토.
타오 란팡 (15) - 부채를 든 중화풍 소녀. 만두머리
카테나 테라 (?) - 일본도를 휘두르는 여검사.
나타샤 드리프시코 (19) - 가시곤봉을 휘두르는 비키니 차림의 여전사. 금발 벽안.
죠니프 더 퀸 (16) - 채찍을 휘두르는 노출도 높은 복장의 여자. 금발. 붉은 색상의 속옷에 가까운 차림.

아니타 카산드라 (10) - 딸의 전사 라이벌. 갈색 웨이브 장발. 입술의 오른쪽 아래에 애교점. 자만심. 무기점 알바.
웬디 라키시스 (10) - 딸의 마법 라이벌. 자칭 마☆법★소☆녀★! 잡화점 알바.
페트레시아 한 (10) - 딸의 사교 라이벌. 금발 벽안. 연보라 리본. 거만함. 부잣집.
마르시아 쉐어웨어 (10) - 딸의 가사 라이벌. 푸른 웨이브. 착하다. 마을에서 가장 예절바른 소녀. 레스토랑 알바.

쥴리에트 (22) - 댄스대회에 등장. 중동지역차림. 리본춤을 춘다.
피올리나 (23) - 댄스대회. 회색에 가까운 갈색 웨이브. 족두리 같은걸 쓰고 있으며 하얀 상의에 푸른 치마.
아니스 (20) - 댄스대회. 인도지역차림. 옅은 갈색 피부. 이마에 붉은 튤립 문양을 그렸다.
도베 (24) - 댄스대회. 무용교실의 춤선생님. 은발.

리이 수녀님 (?) - 성당의 수녀님.

발큐리아 (?) - 전쟁을 관장하는 여신.
대마법사 훼이 (?) - 유쾌한 금발 대마법사.

Posted by 루트(根)
,
"젊게 보이는 약이 없냐고?"

"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양호실.
우주에서 이름을 떨치는 의사인 미카도 료코 선생님과 상담중이다.
가끔씩 사람을 골려먹는걸 좋아하는 미카도 선생님은 아무래도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어째서 그런걸 찾고 있는거니 아키츠군?"

"...그게..."

최근들어 주위로부터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어서 고민이라고 말했다.
10년은 더 들어 보인다느니, 아버지 뻘로 보인다느니 하는 말은 솔직히 좀 충격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미카도 선생님은 웃음소리를 죽이곤 물끄러미 나를 바라 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미카도 선생님의 모습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운이 좋다면 이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것 같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으음...피부 트러블 같은건 딱히 없는데..."

요리조리 내 얼굴을 둘러보다가 살짝 볼을 잡아보기도 하면서 잠시 살펴보시던 미카도 선생님은
이윽고 내 정면에 앉아서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씀하셨다.

"이런말 하긴 이상할진 모르지만... 아키츠군, 네 피부는 깨끗하단다.
날카로운 눈과 수염 때문에 어른스러워 보이긴 해도
피부건강의 측면에서 네 또래의 아이들과 그렇게 큰 차이는 없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렴."

"가, 감사합니다."

말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어른스럽다니, 겉 늙어보인다는 말과는 들을때의 기분이 다르다.

"뭐, 정 외모가 신경 쓰인다면...우주생물 「모도리 스컹크」는 어때?
생물을 젊게 만드는 특수한 가스를 발생하는 생물인데."

"아뇨, 거기까지 바란건 아닌데요..."

나이에 맞게 젊게 보이고 싶은거지 코흘리개 어린애로 변하고 싶은 맘은 없다고요?

"흐응...아쉽네.
그럼 이거라도 써."

약간 아쉬운 티를 내던 미카도 선생님은 양호실 한쪽에 배치된 함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내게 건네주셨다.

"'미끌미끌 로션'...?"

"「은하 통판(통신판매)」에서 샘플로 받은 로션이지.
어느정도 피부를 매끄럽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지.
보습기능이 뛰어난 거라고."

"헤에..."

살짝 로션을 짜서 손가락에 발라보았다.
진득한 느낌의 미끌미끌한 하얀 액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 떼자 길게 하얀 실이 생겨났다.

"저기...이거 조금 끈적하지 않아요?"

"그만큼 효과가 좋단다.
사용해보고 괜찮으면 얘기하렴.
정식으로 구매를 신청해둘테니까."

"조금 비릿한 냄새가 나는데, 혹시 상하거나 한건 아닌가요?"

"우주의 특수한 식물에서 추출한 액이 재료로 쓰여서 그런거니 너무 걱정마렴."

"으응..."

조금 고민을 하다가 '미끌미끌 로션' 샘플을 집어들었다.
우주인들이 쓰는 물건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해도
우주인용 약을 먹을 각오까지 하고 왔는데 이정도 일상용품 정도야...
몸에 좋은건 일단 쓰고 보는거지.



미카도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한 뒤 양호실을 나와 반으로 되돌아 가던 중
프린트물을 한가득 든 채 걸어오던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가꾸지 않고 일자로 내린 수수한 앞머리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윤기있는 긴 생머리.
동글동글한 안경 너머로 비치는 순진한 눈동자의 여학생.
텐죠인 그룹의 영애 - 텐죠인 사키 선배를 보좌하는 후지사키 아야 선배다.

"아야 선배?"

"아, 아키츠군?"

오랜만의 만남에 아야 선배는 놀란듯 약간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되는데...
멋적어 하다가 아야 선배가 양손에 가득 들고 있는 프린트물로 눈이 갔다.

"아야 선배, 그건?"

"아...교무실에서 받아온 프린트물이에요."

혼자 들기엔 조금 양이 부담스러워 보이는데...

"그럼 제가 들어드릴께요."

"아니에요, 그럴 필요는...앗?"

사양하는 아야 선배로부터 프린트물을 빼내어 손에 들었다.
조금 멋대로일진 몰라도,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의 아야 선배는
남에게 폐를 끼치는걸 걱정해서 항상 사양하는 느낌이니까.
정말로 도움받는걸 곤란해 한다면 돌려주겠지만...

아, 소극적이란 표현은 물론 사키 선배와 관련된 일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사키 선배를 위할때 만큼은 적극적으로 바뀌는데,
그 적극성의 반만큼이라도 아야 선배 자신에게 쏟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이 프린트물을 아야 선배의 반으로 들고 가면 되는건데...?

"저...고, 고맙「저기...」...네?"

말을 꺼내려다가 의아한듯 쳐다보는 아야 선배에게 민망해하며 물었다.

"이거 몇 반으로 들고 가는거죠?"

"...「3-D」에요."



아야 선배와 함께 3-D 교실로 가면서 그동안의 일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야 선배는 사키 선배를 진심으로 따르다 보니 주로 사키 선배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선배는 최근 사키 선배가 멍한 모습으로 보내는 시간이 잦아 걱정이라고 했다.

가라사대, 몽롱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고 수업시간에도 열중하지 않는다고.

의외다. 언제나 우아하고 도도하며 자신감에 넘쳐 지내는 사키 선배가 그런 모습이라니.
사키 선배가 그렇게 변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사키 선배의 통학용 자동차 바퀴가 하수도 구멍에 빠졌을 때.
저스틴의 도움을 받고 사키 선배가 저스틴에게 한눈에 반하는 사건」

이게 그나마 사키 선배가 바뀐 이유로 내가 유일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인데...
솔직히 확신은 못하겠다.
현재 시점에서 사키 선배가 저스틴을 만났는지도 알수 없는데다가...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사건들은 단지 사키 선배의 삶의 한부분일 뿐,
사키 선배의 인생 전부가 아니니까.

으응, 그래도 사키 선배가 그외의 문제로 그렇게 고민하는건 도무지 상상이 안가고...

"...역시 사랑인가?"

"엑? 사, 사랑!?"

무심코 중얼거린 내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며 아야 선배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지나가던 학생들의 시선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들었니?」
「응. 사랑이라고 하던데?」
「저 선배 굉장히 놀란것 같지 않았어?」
「뻔하지. 옆에 있는 녀석을 봐.
그 악명높은 아키츠 료스케라고.
분명 짐을 들어주는 척 하면서 좋은 점을 어필하려고 한거야.
그리고 방심한 선배에게 고백한게 틀림없어.」
「어쩜 뻔뻔스럽게. 그런데 수법이 구식이다 얘.」
「수수해보이는 타입이라 방식도 고전적인건가.」
「한물간 수법으로 여자를 낚으려고 하다니 유치해.」

"아...아..."

후다닥-

"아야 선배!?"

아야 선배는 어쩔줄 몰라하더니 돌연 몸을 돌려 달아나 버렸다.
잠깐만요! 그쪽은 3학년 교실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고요?
잠시 뒤면 수업이 시작할텐데...

한숨을 쉬곤 손에 든 프린트물이 흩어지지 않게 주의하며
이미 복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아야 선배의 뒤를 쫓았다.
운동계 아가씨는 아닌걸로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발이 빠르네...

멀리서 들리는 가쁜 숨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 교사의 뒤뜰에 도착할 즈음,
타닥거리던 아야 선배의 발걸음 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몰아쉬는 아야 선배의 등을 보면서 조용히 다가갔다.

"하아...하아...하아..."

"괜찮아요 아야 선배?"

"읏...?!"

아야 선배는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 보았다.

"아키츠군?"

"갑자기 뛰쳐나가서 놀랐다고요 아야 선배."

"...절 쫓아오신 건가요?"

"네."

"어떻게...?"

"두근거리는 고동소리를 따라서 왔지요."

"엣..."

아야 선배는 붉어진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양볼을 가렸다.

"...아키츠군은...짖궂어요."

"아? 하하...죄송합니다."

고동소리를 들은건 사실이지만요.
워낙 급하게 뛰어서 그런지 심장의 박동도 꽤 크게 울렸고.

잠시 열을 식히던 아야 선배는 얼굴 표정을 수습하곤 사과해왔다.

"저...아키츠군. 오해받게 해서 미안해요."

"아뇨. 딱히 사과 받을 일도 아니고 아야 선배의 잘못도 아닌걸요."

"그래도...혹시 기분 나쁘진 않으셨나요?"

"이 나이 또래들은 호기심이 왕성하니까요.
미인을 도와주는 남자애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죠."

"노, 농담하지 마세요."

얼굴을 외면하고 뺨을 부여잡던 아야 선배는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방금전 아키츠군의 말 말인데요...
사키님이 이상해지신 이유를 알아낸건가요?"

"알아냈다기보단 예상이지만...
평소의 도도한 사키 선배가 그렇게 방심한 모습을 보인다면
역시 '사랑'이 원인이 아닐까요?"

"...근거는요...?"

"그..."

"그?"

그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요 아야 선배!
근거? 그냥 무심코 꺼낸 말이라고요.
원인을 판단할 수 있을만큼 사키 선배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인데 근거가 있을 턱이 있나.
'머리속에서 떠오른게 그것뿐이라 찍었어요'라고 말하면 바보취급 당할것 같아서 썰렁한 말로 얼버무렸다.

"...소녀는 사랑을 할 때 아름다워지니까요."

"......"

어딘가 통속적으로 들리는 대사를 내뱉고 민망해하고 있으려니
아야 선배는 가슴께에 올린 양손을 쥔채로 가만히 서있었다.
이대로 계속 대치상태로 있다간 원치도 않는 질문을 받게 될지도 모르고
슬슬 수업시간이 다되어 간다.

"아야 선배?"

"네?"

"밖으로 나온지 시간도 꽤 지났고...슬슬 교실로 들어가야겠네요."

"아...! 벌써 이렇게 시간이!"

허둥지둥 발걸음을 놀리는 아야 선배의 뒤를 따라 뒤뜰을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 아야 선배의 반인 3-D의 문앞에 도착하자
아야 선배는 내게서 프린트물을 건네받고 인사했다.

"들어다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별말씀을. 오히려 시간만 더 걸리게 만든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아키츠군과 이야기 하는 것도 즐거웠으니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도 늦었으니 빨리 반으로 가세요."

"그래야 겠네요. 아, 그리고..."

"네?"

교실로 들어가려다 고개를 돌린 아야 선배에게 말했다.

"안경 바꾸셨네요? 훨씬 어울려 보여요."

예전의 불투명한 안경이 아닌 투명한 안경을 쓴 아야 선배는
맑은 눈동자가 매력적인 순수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칭찬을 들은 아야 선배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아키츠군..."

...놀랐다.
저렇게 웃을수도 있었구나 선배는.

불투명한 안경일 때는 맹한 모범생으로만 보였는데
지금은 순진함과 청조함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니...
안경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보일 수 있다는건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다.
교실로 들어간 아야 선배의 뒷 모습을 보며
오늘은 진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곤 서둘러 2-A로 되돌아갔다.



며칠 후, 사키 선배가 라라를 상대로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건데
사키 선배의 고민에 대한 예상은 아마도 맞은것 같다.

저스틴이 「저는 라라님의 충실한 하인입니다」라고 말한게 계기였을까?
사키 선배의 통학용 자동차 바퀴가 하수도 구멍에 빠졌을 때 저스틴의 도움을 받고
사키 선배는 저스틴에게 한눈에 반한 것 같았다.
가라사대 「생각해보면 충격적인 만남이었어요」라고...
한손으로 자동차를 들어올리는건 확실히 충격적이긴 충격적이지...

게다가 저스틴은 훤칠한 장신에 외모도 영화배우 뺨칠만큼 멋지니까.
매일 입고 다니는 해골 갑옷 패션만 벗는다면 어딘가의 연예인으로 착각할 만큼 멋진 녀석이다.
또한 은하의 지배자 데빌루크 왕가의 친위대장으로서 그 검술 실력은 두말할 나위없이 초일류.
검술에 한정한다면 아마도 최강이란 칭호를 붙여도 좋을 것이다.
초창기 트러블 설정시엔 저스틴이 최강의 적캐릭터 포지션을 맡을 예정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최근 저스틴은 라라의 부탁으로 유우키 사이바이 선생님-리토와 미캉의 아버지이자 유명 만화가-의 어시스트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휘둘리는 역할만 맡는 불쌍한 녀석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의외로 저스틴은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듯 하다.
만화가로서의 재능을 보이면서 신인상을 목표로 하는 저스틴은 만화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다.

「데빌루크왕실 친위대 대장이자...
만화가 유우키 사이바이의 '스튜디오 사이바이'의 치프 어시스턴트 저스틴」이라고 강조하는 걸 보면 말이다.

리토나 라라에겐 도움 안되는 사람으로 찍히며 괄시받는 저스틴이지만
다른 이들보다 빨리 지구에 친숙해져 가는 저스틴이 부디 스스로가 꿈꾸는 미래를 맞이하길 바란다.


아무튼, 그런 저스틴을 사키 선배가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
사키 선배의 애정 공세는 어째 자꾸만 헛도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에 찾아온 저스틴에게 사키 선배가 다가가 주저하면서도 뭔가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갑자기 「꺄-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리토가 엄청난 속도를 내며 사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키의 바로 뒤편에 있는 수돗가를 향해 달리던 거지만.

「혀...혀가 불타고 있어! 무...물!」
「에...잠깐...꺄~!」

퍼억-!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사키 선배의 목소리도 허무하게
리토는 결국 사키 선배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충격을 받고 쓰러진 리토와 사키 선배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둘이 쓰러진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우...우."

"또 당신입니까! 왜 항상 저를...! 핫?"

리토와 뒤엉켜 바닥에 쓰러진채 화를 내던 사키 선배는 갑자기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넘어질때 치마가 젖혀져 속옷을 훤히 드러낸 사키 선배의 뒷모습을 저스틴이 당황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리토~! 어? 저스틴?"

손에 붉은색 가루가 휘날리는 도시락을 들고 리토를 향해 다가오던 라라가 저스틴을 보았다.
...설마 스스로 만든 도시락을 방금전 리토에게 먹인거니 라라.
우주인도 먹고 며칠은 드러눕는다는 극약을?
(저런걸 먹어도 잠시 괴로워 하다가 멀쩡한 리토를 보면 역시나 인간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키와 시선이 마주친 저스틴은 곧바로 눈을 감으면서 어색한 헛기침을 했다.

"아...저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습니다."

"......"

입을 뻐끔뻐끔거리며 안색이 파래진 사키 선배는 저스틴이 떠나고 난뒤에야 정신을 차리곤 리토를 노려보았다.

"잘도 그분 앞에서 나를...
오늘은 절대 용서 못합니다!"

"네녀석! 또 이런 짓을!"
"사키님에게 창피를 주다니!"

"우와아아아아~~!죄송합니다~~~~!"

도망가는 리토를 린 선배와 아야 선배가 무서운 기세로 쫓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타일 바닥에 그대로 앉은채로 있는 사키 선배에게 눈이 갔다.
치마를 바로 하고 일어서려던 사키 선배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직한 신음성을 내뱉고 그대로 주저 앉았다.
방금전 넘어지면서 다친듯 무릎에 생채기가 나있었다.
딱딱한 타일 바닥이라 충격이 컸던지 사키 선배는 바닥에 웅크린채 무릎을 감싸쥐고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사키 선배. 무릎이..."

가까이 다가가 걱정스레 쳐다보자 사키 선배는 표정을 태연히 고치며 말했다.

"괜, 찮아요. 이정돈 금새 털고 일어설 수 있답니다."

애써 의연한 태도로 말하는 사키 선배였지만...
무릎을 강하게 부딪혔는지 도무지 일어나지 못하는게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네요.
잠시 실례합니다. 사키 선배."

"에? 잠깐...!"

뒤로 돌아 무릎을 꿇고 앉아 사키 선배를 등에 업고 일어났다.
몸이 쏠리는 느낌에 당황한 사키 선배가
엉겁결에 내 목에 팔을 두른 것을 확인하곤 그대로 교사로 향해 걸었다.

"뭐, 뭐하는거죠 아키츠군?"

당황함이 뚜렷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보시다시피 사키 선배를 양호실로 데려가는 중이죠."

"당장 내리세요! 명령이에요!"

아하하...명령입니까.

"유감이지만 노신(老臣)은 충직하되 귀가 어둡답니다 공주님."

"지금 잘만 듣고 있지 않나요?!
그리고 공주가 아니라 여왕이라고 말했겠죠!"

"예이예이~"

건성으로 답하는 듯한 내 말에 사키 선배는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이지, 어디가 충직한 가신인가요? 하아..."

한숨을 내쉰 사키 선배는 체념한듯 내 등에 몸을 기댔다.

"...나는 우아하고 고상한 여왕이지
공주님처럼 귀여운게 아니에요..."

"아하하...명심하겠습니다."

공주「님」이라...
그래도 동경은 하고 있나보네.

업히는걸 거부하면서 꼿꼿이 세웠던 사키 선배의 상체가 앞으로 누이면서,
부드러운 금발 롤머리가 내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며 볼을 간질였다.
바람에 흔들리며 살랑거리는 머릿결에서 기분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방금전의 소란스러움이 거짓말처럼 사키 선배는 조용히 내 등에 고개를 묻었다.
자연스레 생겨난 침묵속에서 교사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 소리만이 차분히 들려왔다.

가끔은...이런 조용함도 나쁘지 않네.

고요함을 즐기며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한동안 침묵하던 사키 선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심한 하루에요.
하루종일 멍하게 있다가
수업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고,
저스틴님께는 못볼 꼴만 보여드렸고...
영문을 모를만큼 혼란스러워서 모든게 엉망진창인 느낌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사키 선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사키 선배는 내 어깨에 살짝 이마를 대었다.

"어째서 라라는 내 앞을 가로막는 거죠?
어째서 유우키 리토는 나를 방해만 하는거죠?
어째서 저스틴님과는 자꾸 어긋나고만 있는거죠?
어째서 나는...이렇게 표류해야 하는 걸까요..."

"......"

내 어깨를 잡은 사키 선배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사키 선배...예상 이상으로 상심이 큰건가.
뭐라고 위로를 해줘야 할것 같은데...
여자아이를 위로해본 경험 따윈 없다고?

"...사키 선배가 얼마나 상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과 달리 거북함만 느껴지는 침묵속에서
가만히 입다물고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기에
나름대로 사키 선배를 위로해보려고 입을 움직였다.

"구교사에 있었던 일, 기억하세요?"

"...그래요."

"그때 겁먹은 학생들을 의연한 모습으로 진정시키던 사키 선배는 눈부셨어요.
구교사를 혼자 벗어나지 않고 학생들을 찾기로 결정하던 모습도 정말 멋졌구요."

"...무슨말을 하고 싶은거죠?"

"저는...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키 선배의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기운내세요 사키 선배."

"......"

사키 선배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채로 침묵했다.
...혹시나 한심한 위로라고 생각된건 아니겠지?
조금 민망한 나머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땅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때 갑자기 사키 선배가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그 기세에 사키 선배의 롤머리가 뺨을 때리듯 쓸며 지나갔다.
까, 깜짝이야...!
갑작스런 사키 선배의 행동에 놀란 나를 무시하고 사키 선배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응! 그래요! 역시 나는 나답지 않으면...!
한두번의 실패 따위로 좌절하는건 이 텐죠인 사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나는 언제나 아름답고 우아한 여왕이니까요!
호-호호호호!!"

방금전의 우울한 모습을 날려버리고
손등을 턱에 대고 거만함 넘치는 웃음소리를 내는 사키 선배에게
안심한 나머지 피식 웃으며 말참견을 해버렸다.

"뭐, 약간 나르시즘끼가 있는 점은 귀엽지만요."

콩-

"선배를 놀리면 못써요."

"윽,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나에게 사키 선배는 기분이 나아진듯
콧노래를 부르면서 머리를 기댔다.



이후 돌아온 린 선배랑 아야 선배와 함께 사키 선배를 양호실로 옮겼다.
미카도 선생님은 식사하러 가신듯 자리를 비우셨기 때문에
아야 선배가 사키 선배를 간호하고 있을 동안
나와 린 선배가 미카도 선생님을 찾으러 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미카도 선생님을 찾아 사정을 설명하자 미카도 선생님은 약품 목록을 우리에게 건네주며 대신 가져오길 부탁하셨다.
사키 선배의 치료에 쓰일 약품은 아니고 재고가 없는 약품들을 점심 시간에 저택에 들러서 가져올 예정이셨다나.
내가 약품을 제대로 구별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만 린 선배가 어느 정도 치료용품들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했기에
린 선배와 함께 미카도 선생님의 저택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저번에 야미를 데리고 미카도 선생님 댁을 방문해 보았기에 생각보다 빨리 저택에 도착했다.
덕분에 약품을 챙기고 학교까지 여유있게 걸어오며 린 선배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린 선배는 사키 선배의 호위답게 무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런데 여검사들은 대개 장발 포니테일 스타일을 선호하는걸까?
나○하의 시그넘도 그렇고, 러브○나의 모코토도 그렇고...
포니 테일로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린 선배의 스타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지울수 없었다.

조금은 실례가 되는 생각을 하며 대화에 맞장구를 치며 걷고 있으려니
이야기는 어느새인가 내 별명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린 선배는 도장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름대로 나에 대한 소문을 많이 알고 있는듯 했다.
그중에는 내가 접해보지 못한 것들도 꽤나 있었다.

"「파문전사」요?"

"그렇다더군. 비교적 최근에 생긴 별명인것 같던데...
물위를 달리는 너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지."

...체페리? J○J○ 1부?
수영장에서의 사건 때문인가?
아니 뭐, 악마의 열매보단 그나마 설득력 있을것 같긴 한데,
생명 에너지나 호흡법 같은건 전 몰라요?

"그러고보면 「궁극생물」이라는 별명도 있었군."

"...그건 또 뭔가요?"

"뭐라더라, 도무지 쓰러뜨릴 수단이 안보인다고 한탄하던 불량배가 붙인 별명이 퍼진거라고 하더군.
말도 안되는 소문까지 곁들여서 말이야.
수련 중에 용암 속에 빠졌는데도 살아남았다고 하던데?"

...세상 천지에 수련 장소를 활화산으로 잡는 바보도 있습니까?

"뭐, 다른 별명들도 많았지만 도장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별명은 이거지.
「도장 파괴범」"

"에엑!? 전 도장 파괴 같은건 한적이 없는데요?"

도장 현판을 부수고 다닌다든가
무도복을 입은 수련생들에게 시비를 건다든가 한적은 없는데?
애초에 난 깡패 상대하느라 바빴던터라 도장에 폐를 끼친 기억 같은건 없다.
불만어린 표정으로 항의하는 나를 보던 린 선배는 혼잣말하듯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작년 이맘때 쯤이었나?
초등학교 원생들이 불○슛을 연습한다고 단체로 도장을 빼먹었다더군."

"......"

할말을 잃은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피식 웃은 린 선배는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넌 혹시 검도를 배웠나?"

"아뇨. 아직..."

"그런가...유감이군.
배웠다면 꽤나 재밌는 승부를 할 수 있었을텐데."

린 선배는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흥미가 있다면 검도를 배워보길 권하지.
정신 수양에도 도움이 되니까."

「최근엔 여러 일이 많아서 제대로 되진 않지만...」
중얼거리며 살짝 인상을 찡그린 린 선배를 보며 아하하 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리토랑 라라와 얽힌 일들 때문인가...
덤으로 에로 교장 선생님도.



대화를 나누다 어느덧 학교 교문을 지나 교사 앞까지 이르자
린 선배는 내게서 약품을 담은 봉지를 받아들었다.

"그럼 여기서 부터 헤어지도록 하지.
난 양호실로 갈테니까 넌 이만 교실로 돌아가도록."

"어, 그래도 되나요?"

"물론. 오늘은 너에게 사례를 해도 부족할 정도니까.
사키님을 양호실까지 옮겨다 주었는데 이 이상 바라는건 실례지."

"그, 그렇게까지 과장된 예는 필요 없어요.
당연한 일을 한거잖아요?"

당황하며 손사레를 치는 나를 린 선배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린 선배의 눈을 마주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헤매고 있을 때,
린 선배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작년에 네가 이 학교의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
온갖 질나쁜 소문의 주인공인 너를 정말로 경계했었다.
혹여나 사키님께 질 나쁜 행동이라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면서 말이지.
만약 그런 낌새라도 보인다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내가 널 잘못 봤던것 같군."

잠시 말을 끊은 린 선배는 놀람이 서린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섰다.
한점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 곧은 눈동자에 살짝 주눅이 든 나를 바라보면서 린 선배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발렌타인 데이 때 처음 너를 봤을 땐,
여자를 대하는데 서먹하지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구시대 강경파 불량이라 생각했다.
사키님을 도와준 뒤 답례도 제대로 듣지 않고
바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지."

심상치 않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코테가와가 걱정이 되어서 빨리 자리를 떴던 것이 그런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던가.

"두번째로 봄방학 즈음.
사키님의 답례를 포기하면서까지 유우키 리토를 감싸는 널 보았을 땐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네 사욕을 채울수 있는 기회를 친구를 위해 버렸으니까."

리토와 개의 몸이 뒤바뀐 사건 말인가?
그건 리토 본인의 잘못이 아니었으니까요.
천덕꾸러기 개의 영혼 때문에 애꿎은 리토의 몸이 다치는걸 보고 싶진 않았다.

"세번째로 구교사에서,
유령들을 피해 창고에 갖혀있던 우리들을 구해주었을때...
의지가 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너에게 업혀있던 사키님의 표정이 다시 기운차게 된 것을 보고 생각했다.
너는 세간에 떠도는 악의적인 소문과 달리... 상냥한 녀석이라고."

마지막에 와서 약간 얼굴이 붉어진 린 선배는 내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남의 시선에 주눅들지 말아라.
설령 다른 이들이 너를 비난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믿어줄 테니까."

"......"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 당황스러웠다.
어쨌든...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뭔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어쩐지 목이 메었다.
늦여름의 더위에 목울대가 뜨겁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가..."

슥-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눈앞을 하얀 손수건이 가렸다.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조금씩 눅눅해 지는게 느껴진다.
눈가를 타고 흐르던 액체가 마른 손수건을 천천히 적시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내 눈을 살짝 가린 린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말했다.

"날이 더우니까 말이지...
땀이나 닦도록 해."

"...감사합니다."

"별말을...
잠시 근처에서 쉬었다 들어가는게 좋겠군."


여름의 끝자락을 잡은 더위 속.
나무에 등을 기대고 린 선배와 함께 앉아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뜨거워진 목울대와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나무 그늘 속에서 식히며 생각했다.
린 선배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소녀들 여럿을 울렸을거라고.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뜨겁게 들끓어 오르는 대지.
폐허가 된 학교를 배경으로 피어오르는 먼지 구름.
먼지가 가라앉자 운동장 한복판에 알몸에 팬티만 입은 통통한 인형이 누워 있다.
삭발당해서 대머리가 되어버린 교장이 얼굴이 떡이 된 채 기절해 있었다.

거기서 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는 콘크리트 더미위에 올라선 야미가 업신여기듯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었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크으윽... 야미 너어어!?"

상의가 찢겨져 형편없게된 몰골로 나는 야미를 올려보았다.
분노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나를 보던 야미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무줄보다 질기군요 아키츠 료스케.
이번에야 말로 그 머리카락과 수염을 몽땅 밀어드리죠.
그 변태 지구인처럼!"

꿈틀.

들려온 단어에 미간이 꿈틀거리며 불붙은듯 뜨거운 피가 심장을 흘러가는것이 느껴졌다.

"변태 지구인?
교장말이냐...?"

뿌득-
앙다문 이빨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오며 격정을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교장을 말하는 거냐구!"

비참하게 대머리가 되어버린 교장의 모습을 쳐다보자 분노가 솟구쳤다.
주체할수 없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굳게 쥔채 야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었다.

야미의 금빛 머리털이 위로 솟아오르며 넘실거린다.
수많은 칼날로 뒤바뀐채 넘실거리는 금빛 머리칼.
정전기가 일어나 미세한 스파크가 튀는 가운데 야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십시오 「수염성인」."

"나 화났다 야미---!"




...이건 또 뭔 개꿈이냐...

알람소리에 눈을 떠보니 내 방의 침대 속.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며 멍하니 있다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없이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나온뒤, 침대에 가만히 걸터 앉아 머리를 움켜 쥐었다.

뭐냐고 이 꿈은...
오랜만에 훈훈하기 그지없는 하루를 만끽하며 보냈는데, 어째서 꿈은 난데없이 배틀물?
게다가 왠지 모르게 드래○볼의 초사이○인 각성편.

평온한 마음을 가지면서 격렬한 분노에 의해 눈을 뜬 전설의 피구왕.
그 이름 아키츠 료스케라니...
진지한 씬이 난데 없는 개그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애초에 크리링 대역으로 변태 교장이 들어가다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변태짓에 대한 응징으로 삭발당한 교장을 보면 분노보단 동정심이 인다고...

그리고 프리○ 포지션에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거꾸로 솟아오른 금발을 휘날리는 야미.
...아니, 어떻게 봐도 야미 쪽이 초사이○인이겠지!?
그것도 스파크를 튀기는 초사이○인2 버전...

교장의 변태짓으로 순수한 분노에 눈을 떠 순식간에 「초 야미 2」로 변한 야미라니,
개그 보정도 여기까지 오면 오히려 공포스럽다.

꿈은 불안한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던데...
아니면 야미랑 관련된 일중 내가 신경쓸 일이 있었던가?
곰곰히 기억을 더듬으며 신경쓰이는 일을 떠올려보았다.

...그건가? 라라와 야미의 1:1 승부로 인해서 학교가 붕괴해 버리는 대형 사건.
그야말로 '진심'으로 싸우는 라라와 야미의 공방으로 인해서
학교가 형체를 잃고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리는 참사.
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학교 붕괴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는 사키 선배던걸로 기억한다.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만, 룬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야미를 고용했다가 본인은 병원신세를 지고,
의뢰취소비(의뢰비의 2배)를 물려주고 학교 신축비까지 내야했던 눈물나는 상황에 빠졌지.

사키 선배나 아야, 린 선배들과는 나름대론 사이가 나쁘진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나로서는 되도록이면 막고 싶은 사건이다.
야미에게 의뢰하는걸 막거나, 의뢰를 수행하려는 야미를 말리는건 장담 못하겠지만
혹여나 정말로 사건이 발생한다면 적어도 학교가 박살나는 일은 없도록 도와야지...



다사다망했던 날로부터 며칠 뒤,
다시금 양호실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최근들어 자주 오는구나 아키츠군."

"아픈건 제가 아니지만..."

미카도 선생님께 답하고, 기절한채로 내 등에 업혀 있는 저스틴을 되돌아보았다.

등교시간, 이른아침 교문앞에서 라라에게 건네줄 이번달 용돈을 들고 라라를 기다리던 저스틴은
리토와 라라와 타고 있던 비행물체(씽씽보드)와 충돌해서 엄청난 기세로 튕겨나갔다.
공중에 떠서 날아가던 저스틴을 뛰어올라 붙잡지 않았더라면 저스틴은 그대로 저 하늘의 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길 한복판에 쓰러진채 떠돌이 개에게 다리를 물리는 패턴의 반복이겠지.
초반의 그 위압감은 어디로 날려버린건지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저스틴에게 동정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카도 선생님의 치료가 끝나고 저스틴을 침대에 눕히자
함께 온 사키 선배가 걱정스레 저스틴을 바라보았다.
아야와 린 선배는 사키 선배의 양옆에 시립해 있었다.

"저스틴님은 괜찮으실까요?"

"괜찮아. 그저 강하게 부딪힌것 뿐이니까.
이 사람은 튼튼하니까 한두시간 정도면 일어나겠지."

"그런가요...감사합니다 미카도 선생님."

"뭘. 그럼 난 직원회의가 있어서 이만 가볼께.
너희도 아침조회 전엔 반에 들어가도록 하렴."

양호실 문을 나서려는 미카도 선생님을 바라보다가
문득 용건이 떠올랐기에 미카도 선생님을 잠시 불러 세웠다.

"아, 저기 미카도 선생님."

"무슨 일이니 아키츠군?"

"저번에 받았던 로션 샘플이 꽤나 괜찮았는데
이번에 하나 더 받아갈 수 있을까요?"

저번에 받았던 미끌미끌 로션은 샘플이었기에 벌써 다 써버렸으니까.
실외에서 바르기엔 민망한 향의 로션이었지만 집에가서 써보니 의외로 촉촉한 느낌이 괜찮았기에,
향기만 참는다면 외출용이 아닌 실내용으론 꽤나 쓸만할 것 같았다.

"그래?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저쪽 선반에 정품 로션이 있으니 그냥 가져가도록 하렴."

"감사합니다."

미카도 선생님이 떠나고 나자 사키 선배는 나에게 인사했다.

"저스틴 님을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천만에요. 제가 도울수 있는 일이었으니까요."

치료는 미카도 선생님이 다 했지만...
수업시간도 슬슬 가까워졌고, 저스틴을 옮긴것에 대해 과도한 공치사를 받는것 같아 어색했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사키 선배들께 인사한뒤 '미끌미끌 로션'을 챙겨 품에 넣고서 양호실을 나왔다.




방과후 청소시간.
밀대걸레를 씻을 물을 양동이 두개에 나눠 담은 채 계단을 올라가던 중 계단 위쪽에서
왠지 야릇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안돼!!!」

"응?"

라라의 목소리인가?
의아한 마음에 소리가 들려오는 계단 위를 향해 고개를 들자
시야를 가득 메운 사키 선배의 금발이 보였다.
...에?

퍽-

"으앗!?"

날아온 사키 선배에게 떠밀려 균형을 잃고 그만 계단 뒤로 넘어졌다.
뒤로 넘어지면서 보니 나에게 부딪힌 사키 선배의 몸이 옆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다간 사키 선배가 머리부터 계단에 부딪힐 것 같아서
양손에 들린 양동이들을 놓고 사키 선배의 몸을 껴안아 품으로 끌어들였다.

"꺄앗?"

쿵-

낙하감을 느낀것도 잠시,
계단 끝의 복도 바닥에 등이 부딪히는 감각과 함께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안전하게 착지한건가?
비교적 착지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품에 안긴 사키 선배를 바라 보았다.

내 모습은 사키 선배의 허리에 왼팔을 두르고
선배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감싸안은 상태였다.
사키 선배는 방금전 일어났던 돌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건지 아무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 안겨 있었다.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피부와 오른손에 닿은 폭신한 머릿결의 감촉.
향긋한 향수 내음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슬그머니 허리와 머리에 두른 손을 치우며 안부를 물었다.

"저...괜찮으세요 사키 선배?"

"...아...?"

고개를 든 사키 선배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며 내 품에서 떨어졌다.

"어, 어째서 아키츠군이 여기 있는거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이 붉어진 사키 선배의 반응에
나도 민망해져서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계단을 올라가던 중에 사키 선배가 날아왔기에 잡았던 겁니다.
갑자기 계단에서 떨어지셨길래 놀랐는데...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그래요?"

"미안, 괜찮아!?"

내가 떨어져 내렸던 복도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허둥지둥하며 놀란 얼굴의 라라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라라는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붉어져 있었고
치마 위로 빠져나온 하트무늬의 꼬리가 젖어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계단 위쪽에선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메랄드빛의 머릿결을 가진 소녀 룬이 있었고,
다시 사키 선배를 바라보니 오른편 복도에 떨어진 손수건이 보였다.

라라의 소꿉친구이자, 라라를 연적으로 생각하는 룬.
라라의 젖은 꼬리와 상기된 얼굴.
그리고 손수건을 들고 있는 사키 선배.

응.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간다.

꼬리가 약한 라라를 룬과 사키 선배가 희롱하려다가
오히려 라라의 괴력때문에 날려진 거겠지...

"괜찮아 라라. 그저 놀란것 뿐이니까."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며, 걱정하는 라라를 안심시켰다.
사키 선배를 일으켜 세우고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여기, 사키 선배꺼죠?"

"...맞아요. 내가 폐를 끼쳤군요 아키츠군."

"뭘요. 다치지 않은것만 해도 다행이죠."

대수롭지 않게 답하곤 엎지른 양동이들을 들고 일어서자 사키 선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거죠?"

"물을 다시 받으러 갑니다.
청소를 해야 하거든요."

"그럼 나도 돕도록 하지요.
방금전 일도 사과할 겸해서 말이죠."

내가 들고 있는 양동이 하나를 잡아채며 말하는 사키 선배에게 놀랐다.
청소? 사키 선배가?

"아니, 굳이 사키 선배가 그럴것까지야..."

"이 나의 말을 거부하는건가요?"

"...넵. 영광입니다."

매섭게 째려보는 사키 선배에게 얌전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계단 위쪽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룬이 내려왔다.

"에, 사키 선배님. 좀더 라라를...
...아니. 저도 함께 도울께요~"

뭔가 불만인듯 사키 선배를 설득하려던 룬은
갑자기 말을 바꾸며 웃음지었다.

"운동장에 있는 수돗가가 한산하니 거기로 가요."

"화장실은 바로 저긴데?"

의아해하며 되묻는 나에게 룬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뭐 어때? 시간은 많잖아.
...그리고 할말도 있고."

또 뭔가 꿍꿍이가 있군.
룬의 장난은 오히려 자기자신이 피해를 입는 경우 밖에 못봤는데 괜찮을지 몰라...
사키 선배에게 살갑게 이야기 하며 수돗가로 내려가는 룬을 보며 한숨을 쉬곤 뒤따라갔다.




"아키츠군은 얼마나 강해?"

"뭐?"

수돗가로 내려가 물을 받고 있는데 옆에서 물어온 룬의 질문에 어리둥절하며 되묻자
룬이 씨익 웃으며 물어왔다.

"전교에서 소문이 자자하잖아~
100명의 불량과 싸워 이겼다든가, 최흉의 불량배라든가 말야."

"아...그러고보면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을 들은적이 있어요."

옆에서 듣고있던 아야 선배가 끼어들며 얘기했다.

"「사이난의 악마」라든지「불도저」「미친개」「불사신」「프○더」.
무협지처럼 서로를 명호로 부르길 좋아하는 불량배들도
아키츠군 만은 그냥 아키츠 료스케라고 부른대요.
지칭하는 별명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기억하긴 무리라나요?
사이난 뿐만 아니라 적어도 도내에서 아키츠군의 이름을 모르는 불량배는 없다고 해요."

차례차례 정보를 쏟아내는 아야 선배의 모습에 약간 벙쪄버렸다.
아니...알고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건 좋은 일이지만,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별명을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얘기해도 괜찮은건가요 아야 선배?
전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러다간 큰일난다고요...
말을 하던 아야 선배는 내쪽을 보더니 아차하는 표정을 짓곤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저기...미안해요!
아키츠군이 정말로 그렇다는건 아니에요!
그저 소문일 뿐이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으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렇게까지 당황하면서 사과하시면 제가 더 난처합니다만...
마주한채 서로 곤란해하는 나와 아야 선배를 보던 사키 선배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면 아키츠군, 구교사에서 두꺼운 철문을 한 주먹에 날려버렸죠."

"정말요 사키 선배?"

순간 룬의 눈이 반짝 빛난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룬은 다시한번 내쪽을 보고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강해?"

"얼마나라고 물어도, 딱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고.
강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정도는 되는데..."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께.
라라랑 싸워서 이길 수 있어?"

"엑! 라라?!"

그 천방지축 아가씨랑 힘을 비교해?
힘은 아마도 내가 나을지도 모르지만...라라의 저력이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른다.
아무리 개그보정이 들어갔다지만 기합만으로 태풍의 궤도를 바꿨던 아가씨라고?
데빌루크의 왕, 기드-루시온-데빌루크의 말도 안되는 이능력(단신으로 행성을 박살낸다)을 알고있는 바에야
라라가 가진 어떤 숨겨진 힘이 있을지도 모르고.
왜, 그거 있잖아?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패턴, 각성이라는거 말야.
장르가 러브 코미디라서 그런 가능성은 낮아도
튼튼한 몸만 믿고 뻗대기엔 우주인이라는 미지의 벽이 너무도 거대하다.
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는 거지만...
그 가능성이란 것은 무한한 분야에 대한 재능의 개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무한의 힘(unlimited power)같은걸 뜻하는게 아니니까.

게다가 작년 크리스마스때 겪지 못했던가?
잠깐 개조만으로 일격에 대저택을 날려버린 서바이벌 총.
그외에도 진공청소기처럼 사정없이 에이전트들을 집어삼켰던 문어모양의 기계(고-고-바큠군)라든가,
충돌만으로 저스틴을 하늘 높이 날려버린 씽씽보드군이라든가,
사물을 손바닥 크기로 줄여버리는 기계라든가...
...라라가 발명품을 사용한다면 냅다 도망치는수 밖에 없지 않아?
애초에 라라가 친구들 상대로 그렇게까지 하는 건 상상할수 없으니 쓸데없는 가정이지만.

뚫어져라 나를 보는 사키, 린, 아야 선배와 룬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민망해서
고개를 슬쩍 돌리고 대답하려다 멈칫했다.
...이거 어쩌면, 라라와 야미의 싸움으로 학교가 박살나는 사태는 피할수 있을지도.

"아키츠군?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거죠?"

"아, 괜찮아요 사키 선배."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룬을 바라보고 조심스레 말했다.

"...라라가 발명품만 쓰지 않는다면 해볼만 하긴 한데."

"정말?"



이후 전개는 빨랐다.
「라라에게 세상의 고통을 좀 알려줘」라는 룬의 요청을 어색한 미소로 승낙했다.
라라를 설득해 데려온다며 교실로 돌아가버린 룬을 뒤로하며 생각했다.

원래라면 야미에게 라라를 혼내달라고 부탁해야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면 둘의 싸움 속에 그야말로 학교가 박살날테니까.
차라리 내가 맡아서 얌전히 끝내는게 좋겠지.
친구끼리니까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싸울것도 아니고.
적당히 5분정도 어울리며 시간을 끌면 되려나?

라라가 올때까지 기다릴겸 수돗가 옆에 앉아 잠시 쉬면서
학교를 배회하는 떠돌이 강아지나 바라보고 있으려니 린 선배가 약간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아키츠."

"린 선배?"

"그때 나는 분명 널 믿겠다고 했다...
하지만, 설마 여자아이를 상대로 주먹질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얼굴에 수심이 깃든 린 선배를 보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그럼?"

고개를 내젓는 나에게 의아해하는 린 선배에게 싱긋 웃었다.
어떤 마법의 나라 공주님께선 이렇게 주장했다고 하더라고요.

"타격계 기술 따윈 결국 이류.
관절기야 말로 패자의 기술이죠."

실제로 쓸건 유술이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지...

웅성웅성...

난데없이 몰려들어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 때문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벌써부터 이리저리 이야기가 퍼진듯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오는 학생들을 보다가
사키 선배쪽을 쳐다보았다.

"저기...사키 선배?"

"뭔가요 아키츠군?"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버리면 학교내 싸움같은 교칙위반에 걸리지 않나요?"

"걱정마시죠. 텐죠인 가(家)는 교칙 하나 둘 정도는 무마할 수 있으니까요."

"아, 네..."

그러고보면 텐죠인 그룹이 우리 학교 후원자였지.
축제의 후원도 하고 있었던걸로 기억하고.
자신만만한 표정의 사키 선배의 모습에 살짝 한숨을 쉬었다.
나로선 사건을 크게 벌이지 않으려고 받은 일인데
어째 사건이 더 커질것만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룬과 함께 라라가 수돗가에 도착했다.
뒤이어 리토와 하루나, 코테가와, 리사, 미오, 사야카, 코요미...안면이 있는 친구들은 전부 온것 같았다.
어째서 이렇게 단체로 몰려와!?
몰래 데려오는거 아니었어?
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라라는 왠지 의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쪽으로 다가오는 라라에게 손을 들어 우호적인 표시를 한다.

"아, 어서와 라라."

"료스케~! 이야긴 잘 들었어."

"응, 그럼 얘기는 빠르겠네. 조속히 시작할까?"

"그래~! 그리고 이런일로 그렇게 고민하지 말아."

"응?"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라라가 활짝 웃는 얼굴로 활기차게 외쳤다.

"욕구 불만이라면 언제든지 내가 상대해 줄테니까~♬"

"쿨럭!?"

「「「에에엑!?」」」

상상을 초월한 대사에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려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경악한 학생들의 반응을 보건데 라라의 황당한 발언은 잘못 들은게 아닌것 같았다.
손짓으로 룬을 가까이 불러 물었다.

"콜록콜록...대, 대체 뭘 어떻게 말했길래 라라가 저렇게 말하는거야?"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어?
그저 「중학교때처럼 싸우지 못하는 평화로운 고교 일상속에서
아키츠군은 파괴욕구에 시달리며 투쟁을 갈구하고 있다」라고..."

그 대사도 충분히 이상해!
뭐냐고? 사람을 무슨 전투 머신처럼 생각하는 대사는?

기침을 참으려고 고생하는 나에게 코테가와가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아키츠군?"

"고, 고마워 코테가와."

"뭘요. 그리고 투쟁심이 남아 있다면
다음부턴 운동을 하면서 건전하게 욕구를 해소 하세요."

"......"

교실에서 룬에게서 제대로 대사를 전해들은 친구들은 오해하지 않았는지 방금전 대사를 이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다만 룬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아이들이 많다는거지...
어느쪽이든 위로가 안돼!?
고개를 끄덕이는 리사와 미오를 보며 앓는 소리를 내며 기침을 멈추려 애썼다.

"괜찮아 료스케?"

걱정스레 물어오는 라라에게 애써 웃으며 답했다.

"아아...미안하지만 1분만 기다려줘.
기침만 멈추고 곧 「결투」를 할테니까."

지켜보는 학생들의 오해를 풀려고 굳이 「결투」라는 말을 강조하며 답했다.
그러자 방금전까지 쑥덕거리던 학생들은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금 목소리를 죽이며 소근거렸다.

「결투라고?」
「야한 의미가 아니었어?」
「연약한 여자애랑 결투?」
「귀축이다! 분명 여자애를 괴롭히는걸 즐기는게 틀림없어!」

「세자리수가 넘는 여자를 울렸다는 아키츠 료스케라고.
뭔가 숨겨놓은 속셈이 있을게 틀림없어.」
「그걸까? 패배한 여자애의 몸을 희롱하는거.」
「배리○블 지오?」
「야해!」
「욕구불만이라잖아. 분명 파괴욕구와 성적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음흉한 속셈이야!」

어이? 아직 앳된 아가씨들이 입에 담기엔 대사들이 좀 부끄럽지 않아?
이렇게되면 오해를 풀고 자시고도 없어 보였다.
신경쓰지말고 결투를 마무리 짓는게 최선이지.

어느새 기침도 그쳤기에 정신을 수습하고 똑바로 일어서자 라라를 보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료스케~.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는거야?"

"아아...잘 부탁할께."

저스틴과 야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라라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무사히 끝나면 좋을텐데 말이지...
긴장으로 얼굴이 경직되어 가는데 갑자기 생각난듯 라라가 손바닥을 퐁-소리 나게 두드렸다.

"아! 오늘은 「매지컬 쿄코 플레임」보러 가야 하니까 조금만 싸울께~"

"...풋. 큽큽..."

윙크를 하며 사과해오는 라라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입을 막으면서 웃음을 참는 나를 라라가 이상한듯 보았다.

"또 몸이 안좋은거야 료스케?"

"아하하...아냐아냐~. 이건 그냥 즐거워서."

"그래?"

갸웃하는 라라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이런 아가씨였지.
상식을 깨는 발명품들로 주위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만
언제나 낙천적이고 순수한 밝은 미소로 사람들을 달래주는.

방금전까지 라라를 경계하며 전의를 다지던 내 모습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둘이서 부르는 듀엣도 화음이 맞아야 아름답잖아?
라라 만큼은 아니라도 좀더 긴장이 풀고 마음가짐을 편하게 하자.
기왕 하는거 즐겁게 하는게 좋으니까.

텐션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굽혀 몸을 뒤로 젖히곤 기묘한 포즈를 취했다.
왼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으론 라라를 가리키며 대사를 내뱉었다.

"그럼 라라. 여기서 흑백(黑白)을 확실히 가려주지!
너의 순수를 증명해 보라고!"

"응?"

알쏭달쏭한 얼굴의 라라를 보며 판결을 위한 질문을 던졌다.

"입에 털이 나있는 봉을 넣다 뺐다 하면서
마지막에는 하얀 액체를 뱉어내는건 뭘까?"

"양치질?"

"정답! 백(白)이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질문을 듣고 얼굴이 붉어지더니
정답을 듣고선 안색이 하얘졌다.
쌤통이네. 방금전 욕구불만이니 어쩌니 멋대로 말했던 녀석들은 반성하라고!

멍-!

떠돌이 개가 짖는 소리를 신호로 라라를 향해 달려들면서,
마주 달려온 라라를 향해 왼손바닥을 뻗었다.

"읏차-"

가드 자세를 취하는 라라의 오른팔을 잡은채로
오른발을 내밀어 내딛어진 라라의 오른 발목을 잡아챘다.
몸이 앞으로 쏠리자 라라는 반사적으로 오른발에 체중을 실으며 균형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오른 다리를 쑥 밀어넣으며 라라의 뒤쪽 왼 다리를 걸어 올렸다.
체중을 앞으로 내민 오른발에 모두 실었던 라라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어라?"

바닥에 등을 댄 채 큰 대(大)자로 누워버린 라라는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 못하다가 이내 웃으며 일어났다.

"헤에~ 료스케는 신기한 기술을 쓰는구나?"

"유술이라고 하지."

신기한듯 바라보는 라라는 딱히 다치거나 하진 않아 보여 다행이었다.
가급적이면 데미지를 적게 주는 방법으로 싸우고 싶었으니까.

"그럼 이쪽도!"

"!?"

콰앙-!

꽉 쥐어진채 힘껏 휘둘러진 라라의 오른 주먹을 옆으로 피하자 갑자기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놀라서 힐끗 뒤를 돌아보니 학교의 건물 벽이 둥글게 함몰되어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권압만으로 벽을 파내 버리다니...
이거 정말 농담같은 파워잖아?

놀랄 틈도 없이 쏟아지는 라라의 주먹을 받아내면서 고민했다.
지금 상황은...그러니까 그거지?

모 웹코믹에서 나○하가 페○트를 향해 스타라이트 브레이커를 날릴때의 대화씬.
「페○트가 피하면 지구는 개박살~!」
「!? 노렸구나 이것아!?」


주먹이 스치지도 않았는데 학교 건물이 충격을 받는다면 이건 뭐 답이 없네요.
학교 건물이 망가지는걸 막으려면 튼튼한 몸을 믿고 깡으로 버티는 수 밖에는.
애초에 싸울 때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꿀껄...
지금와서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라라와 공방을 계속했다.

그렇게 몇차례 공방이 오간뒤 라라가 살짝 거리를 벌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으응..."

"왜그래 라라?"

라라는 주먹을 줬다 펴며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주먹에 제대로 맞은 느낌이 없는데...뭘 한거야 료스케?"

"...별로. 맞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충격을 조금 줄인것 뿐이라고."

무식하게 있는 그대로 타격을 받을 생각은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흘려보내는게 최고지.

"에~? 그런게 가능한거야?
...그렇다면~!"

다시금 돌진해오는 라라가 휘두른 주먹을 손으로 받아내려 했을 때,
갑자기 라라의 주먹이 사라지고, 라라가 내 뒤로 돌아 내 팔과 몸통을 깍지를 한채 껴안아 왔다.

"헤?"

"이렇게 하면 타격을 흘려보내진 못하겠지?"

등뒤에 선 라라가 내 몸을 잡은 채로 깍지낀 양손에 힘을 준다.

꽈아악-

엄청난 압력이 전해지며 몸을 압박해왔다.
체중을 실어 찍어 눌러내리듯 압박해오는 라라로 인해서 지면이 살짝 패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애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거력이었지만, 지금은 그걸 느낄 겨를이 아니었다.

물컹-

야? 야?! 잠깐만?
가슴! 가슴이 닿고 있다고!
물컹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부드러운 덩어리가 등을 압박하면서 사고가 헝클어졌다.
게다가 등에서 느껴지는 두 돌기의 감촉은...서, 설마...
아찔한 감촉 속에서 가까스로 입을 열어 등뒤에서 날 잡고있는 라라에게 소근거렸다.

"(라, 라라...)"

"응? 왜 료스케?"

"(너, 너...어째서 속옷 안 입은거야?)"

"그렇지만 그거 항상 입고 있기 괴로워~"

괴롭다고 브래지어 벗지마 이 아가씨야!?
그거 가슴 처지는걸 방지해 준다고?

"(다, 달라붙지마!)"

"에~지금 결투중인데?"

결투고 뭐고, 마시멜로 같은 감촉 때문에 나 지금 얼굴이 붉어진거 안보여?
이대론 정말 이성이 위험하겠다 싶어서 억지로 힘을 주어 라라의 깍지를 풀어내었다.
만만찮은 힘의 라라였지만 다행히도 내쪽이 힘에선 앞섰으니까.
깍지를 풀며 황급히 거리를 벌리는 나를 보며 라라는 곤란한듯 볼을 부풀렸다.

"잡기 기술도 힘으로 풀어버리니까 곤란하네..."

내쪽이 더 곤란합니다.
순진한 라라 상대로 성희롱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료스케를 상대로 보통 공격은 힘들겠네...그렇다면~!"

라라는 다시금 의욕적인 표정을 지으며 하트 모양의 꼬리를 흔들거렸다.
뭔가 색다른 공격을 할 셈인가?

"에잇!"

빠지직-!

"으갹!?"

순간 라라의 하트모양 꼬리에서 빛이 일어나며 레이져가 나를 직격했다.
레, 레이져도 쏠수 있었던 거냐 라라?
예상치 못한 레이져 공격 한방에 입고 있던 옷들이 죄다 너덜너덜해졌다.

"이, 이런...!"

"페케! 반중력 윙(Wing)"

「아 네 라라님!」

파앗-

갑자기 라라의 등뒤로 거대한 검은색 박쥐 날개가 생겨나며 라라를 공중에 띄웠다.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라라는 의욕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료스케의 잡기는 위험하니까~
그럼 다시 간다!"

비융-!

"으아앗~!?"

다시금 꼬리에서 발사된 레이져를 황급히 피하면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반중력 윙」이라고!?
페케의 트랜스 폼 능력 중 하나인거냐!
상대가 공중에 떠있으면 나로선 대책이 안선다고!

말그대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게다가...지금 이대로 계속 꼬리빔을 맞다간 옷이 홀랑 벗겨질거다.
공공장소에서 알몸으로 수치를 쬘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한참을 피하다가 라라가 쏜 레이저에 맞은 학교 벽의 콘크리트가 무너져 떨어져 내리는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방금전까지 짖어대던 떠돌이 개의 모습도.
이런...학생들은 일찌감치 대피해 있었기에 괜찮겠지 싶었는데!

"위험해 멍멍아~!
「뿅뿅워프군」!"

구해주려고 다리에 힘을 주던 나보다 라라가 한걸음 빨랐다.
재빨리 팔찌 모양의 워프장치를 개에게 던져 어딘가로 워프시켜버리고 라라는 한숨을 쉬었다.

"휴우...다행이다."

"개는 어디로 워프된거야 라라?"

"급한 나머지 좌표 설정을 제대로 못했는데...
대충 이 장소에서만 벗어날 만큼만 워프 시켰어."

말도 안되게 먼곳으로 날려보낸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강아지다 보니까 옷이 벗겨질 염려도 없고 말이지.
마찬가지로 안도한 나를 보고 라라가 다시 말을 걸었다.

"료스케~ 시간도 많이 지난것 같은데
슬슬 마무리를 지을께~"

"마무리?"

서로가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마무리 선언을 한다고?
설마...「필살기」 같은게 있다고 주장하시는건 아니겠지요 라라님?

"그럼 「비장의 무기」!
간다~!!"

"뭐어!?"

진짜였습니다.
방금전까지의 레이져빔과 달리 스파크까지 일어나며 꼬리에서 빛이 모이는 현상에 기겁했다.
위험해...! 필살기라니, 이건 격투만화가 아니라고!
이대론 나도 위험하고 그대로 학교붕괴의 결말로 끝날것 같아서 황급히 라라를 저지해야 했다.

라라의 발 아래까지 달려가서 힘껏 위로 뛰어올랐다.

"에? 료스케?"

순식간에 자신이 떠 올라있는 위치에 도달한 나를 보며 놀란 라라의 얼굴을 신경쓸 겨를도 없이,
스파크 속에서 빛무리를 일으키고 있는 라라의 꼬리를 한손으로 움켜잡았다.

"히약!?"

"엑?"

순간 라라는 야릇한 비명과 함께 아래로 낙하했다.
덩달아서 꼬리를 잡고 있던 나까지도...

...아. 그러고 보면 라라는 꼬리가 약점이었지.
성감대 같은 부위라니까 긴급상황이 아니면 왠만해선 잡지 말아야 하지만...

낙하하면서 아래를 쳐다보니 낙하 예상 지점에 수돗가가 덩그러니 있었다.
위험하잖아!
아직까지 방전이 완료되지 않은 라라의 꼬리를 잡은 채로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라라를 내 위쪽에 오도록 했다.
라라 정도라면 그냥 놔둬도 다치진 않겠지만, 여자애를 대하는 기본 매너입니다. 아마도.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상황에서 살짝 고개를 비틀어 어깨로 수돗가를 들이받았다.


쿠웅-!
쏴아아아아아-----!

"우풉?"
「와앗!?」
"꺄아~!"

방금전 충돌로 수도꼭지가 부서진건가?
엄청난 양의 물이 나와 라라에게 쏟아져 내렸다.
게다가 내 경우엔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내린 덕분에 코로 물이 가득 들어가 버렸다고.

"우푸웁! 켁켁...!
젠장...내가 다신 공중전 따위 하나 봐라!
음음, 쿨럭... 아무튼 라라? 몸은 괜찮아?"

헝클어진채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우고 라라쪽을 바라보며 안부를 묻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물에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가운데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피부가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와앙~! 차가워~"

"어, 어째서 알몸인거야-!?"

「으으응...」

"페케?!"

옆에서 들린 기계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페케가 물에 젖은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수도관 파열로 뿜어진 물의 압력에 튕겨져 날아간건가.
하지만 굳이 말할께 페케...
너 너무 잘 떨어져!
포스트 잇 수준으로 잘떨어져 나간다고 페케...!

당황한 나머지 꼬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나보다.
라라가 달아로른 얼굴로 눈을 꼭 감은채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적거렸다.

"히익...꼬, 꼬리는 안돼..."

"미...미안.
아, 아무튼... 이걸로 내 승리지?
그럼 승부는 이제 끝...「후우웅~~!」응?"

갑작스레 들여온 파공음에 고개를 돌리자 몸통만한 크기의 거대한 금빛 주먹이 쏜살같이 날아오고 있었다.
석파천경권...?
아니, 그것보다 피해야 하잖아!?

황급히 꼬리를 놓고 라라를 안은채로 피하자 방금전까지 내가 서있던 자리(수돗가)는 금빛 주먹에 의해 무참히 박살나 버렸다.
식은땀을 흘리며 정면을 보자 금빛 주먹을 머리카락으로 되돌린 야미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서있었다.

"야, 야미?"

"프린세스를 내려놓으시죠 아키츠 료스케."

"아참..."

조심스레 라라를 내려놓고 옆에 놓여진 페케를 주워다 라라에게 건네 주었다.

"아, 고마워~ 료스케."

"으응. 뭐..."

페케가 정신을 차린다면 다시 의상을 복원하겠지.
...앞으론 적어도 속옷까지 페케에게 구현하도록 하진 말아줘 라라.

알몸 상태의 라라를 보던 야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키츠 료스케...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이상한 일은 하지 않았어?"

"우우...료스케는 바보!
난 특별히 꼬리가 민감하니까 맘대로 만지면 안돼!"

"에? 미, 미안..."

"......"

야미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

"그러니까...아키츠 료스케 당신은,
알몸 상태인 프린세스 라라에게 민감한 부분을 만지는 야한짓을 했단 말이군요."

"아냐! 아, 아니...분명 꼬리를 잡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위험을 피하려고...!
그리고 방금까지 우린 결투 중이었다고!"

"결투?"

"그래! 여기에 있는 학생들이 증인...인데...어라?"

주변에 애들이 한명도 없네...
그러고보니 방금전 과격해지는 격투를 피해서 다들 도망갔었지?
의심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야미에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저기 거짓말이 아냐?
정 의심되면 라라에게 물어보라고?"

한줄기 희망을 가슴에.
아직껏 알몸인 채로 기절한 페케를 매만지고 있던 라라를 가리켰다.
야미는 잠시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다가 천천히 라라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프린세스 라라."

"응? 야미짱."

"제가 오해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 여쭙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방금전까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응! 료스케의 욕구불만을 해소시켜주고 있었어~"

"......그렇습니까......"



천연 사고뭉치 아가씨 라라를 믿은 내가 바보였습니다.
야미는 나를 응시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키츠 료스케."

"으응?"

"실은 방금전...교장을 때려눕히고 왔습니다."

교장 선생님...또 변태같은 시선을 보내다가 징계 당하셨나 보군요.
...그런데 왠지 이 상황, 어디서 겪은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지금까지 지구인들 중에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은 교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제 착각이었습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불행한 사고로..."

"박살내 드리죠.
방금전 야한 시선을 보내오던 교장처럼...!"

야미의 금발이 한올한올 거꾸로 일어선다.
분노 때문인지 햇빛에 반짝인것인지 몰라도
물결치듯 넘실거리는 야마의 금발이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그러니까 그날 아침의 꿈은 「예지몽」이었군요?
야미의 모습에서 방금전까지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제 의문도 풀었으니까 내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군.
이런 상황에서도 단 한가지 비책 정도는 있지.
라라만이 아니고 나도 비장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죠셉 죠스타!

"튀는거야아아아아-----앗!"

"이제 교장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당신만은 예외입니다.
아키츠 료스케 당신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처리해드리지요...!"

한손을 검으로 변형시키며 야미는 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엄청 무서운 기세를 내뿜는 야미에게 소름이 돋았지만...

"얌전히 따라잡힐것 같으냐!"

달리는 가운데 오른발로 대지를 힘껏 내리 찍었다.

"하아압!"

쿠웅---!

순간 오른발을 내딛은 바닥을 중심으로
거대한 울림이 대지를 타고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읏...!?"

쫓아오던 야미는 흔들리는 지면 위에서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서려는 야미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다음에 야미 네가 할 말은 이거다.「노린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크...노린겁니까 아키츠 료스케...핫?!"

"당연하지! 이 아키츠 료스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하고 있다고!"

"크윽...!"

거짓말이지만.
도망치기 전에 심리전을 걸어볼까 생각하며 야미를 내려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그만 쓰러진 야미의 다리 사이로 시선이 가버렸다.

"!?"

야미는 황급히 다리를 오므리며 양손으로 치마를 가렸다.
주섬주섬 일어나며 얼굴을 붉히며 노려보는 야미의 시선에 얼굴이 따가웠다.

"...이것도 노린거겠지요 아키츠 료스케?"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그렇군요!」으헥!?"

퍼어억-!

야미의 몸이 앞으로 급격히 숙여지며 내리쳐진 머리카락 발차기를
다급히 피하면서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이 상태에서 심리전 같은걸 걸었다가는 나중에 진짜로 뼈도 못추릴 것 같았다.

공격해오는 야미로부터 가장 피해가 적을만한 지역으로 도망치다가 구교사 건물에 다다랐다.
여기라면 남들에게 피해는 가지 않겠지?
멀리서 추격해오는 야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구교사 안으로 들어섰다.


낮이 긴 여름이라 아직까진 밝은 밖과 달리, 어두컴컴한 구교사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풍기며 고요속에 싸여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트랩 같은거라도 만들어 둘텐데 그럴 시간은 없고...어쩐다?

멍멍-!

응?

난데없이 들려온 개 짖는 소리에 구교사를 둘러보니 복도 한편에
방금전 라라의 기계로 워프되었던 떠돌이 개가 보였다.
이녀석...여기로 워프된건가?

가까이 다가가자 오히려 겁도 없이 다리를 물려는 개의 목덜미를 잡은채로
주변을 살피다가 라라의 「뿅뿅워프군」을 찾아 주웠다.
으응...원하는 장소로 이동할수 있는 '뿅뿅워프군'이라...
사용할수 있다면 사용하고픈 매력적인 선택지이지만 두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옷은 워프 되지 않기 때문에 워프를 하면 알몸이 된다.」
「둘째, 워프기계의 사용법을 모른다.」

사용할수 없는 기계는 일찌감치 포기하기로 하고 품에 넣었다.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라라에게 돌려주면 되겠지.

결국 남은건 쉴새없이 나를 깨물려고 시도하는 멍멍이 뿐인가...



왕!왕-!

"힘껏 달려주라고 멍멍아~"

엉덩이를 한차례 살짝 때려주자 황급히 복도 끝으로 도망가는 강아지를 보며 생각했다.
부디 야미를 열심히 혼란시켜주길 바래.
한동안 구교사 안에서 술래잡기를 계속하다보면 적당히 야미도 지쳐서 포기하겠지.
소리를 죽이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복도를 가로지르다가 복도 2층으로 통하는 구멍이 보였다.
저번의 구교사 탐험때 만들어 졌던 거였지?
잘되었다 싶어서 그대로 점프해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후...이정도로 쉴새없이 움직인다면 아무리 야미라도 쉽게 나를 발견하지는...「여기 있었습니까 아키츠 료스케」"우아악!?"

심장이 떨어질듯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소리가 들린곳을 바라보자 복도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야미가 걸어나왔다.

"어디까지 도망가나 했더니, 결국 이정도 였군요."

"저기..."

"뭡니까?"

한손을 들어 야미를 멈추고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가 있는 곳이 들킨거지?
소리도 안내고 계속 이동했는데?"

"...관찰력이 부족하군요 아키츠 료스케.
주변을 둘러보시죠."

"주변을?"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점이 없다 살펴보다가 무엇인가 빛나는 선이 보였다.
이건...?
금빛 실선, 아니, 야미의 금빛 머리카락들이 복도 곳곳으로 길게 뻗어져 나가 있었다.
설마...구교사 전체를 머리카락의 결계로 만든건가!?

"스스로 궁지에 빠진 사냥감을 놓치는 사냥꾼은 없습니다."

...완전히 거미줄에 갖힌 나비 꼴이로군.

"이건 사기야!"

"몸뚱이 자체가 비상식적인 당신에게 그런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당치 않다는듯 반박한 야미는 머리카락의 칼날들을 세우며 선언했다.

"아무튼, 이걸로 끝입니다 아키츠 료스케.
야한 짓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루게 해드리겠습니다."

...툭. 데구르르...

멈칫-

무언가 가벼운것이 떨어지며 구르는 소리에 야미가 걸음을 멈추었다.
경계하듯이 주변을 돌아보던 야미는 의심스러운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겁니까?"

"아니, 이번엔 내가 아닌데?
트랩같은걸 설치할 시간도 모자랐고...「똑- 똑-」응?"

기기긱...

드르르륵...!

"뭐, 뭐야...?"

처음에는 조용한 소음이 들이더니 점차적으로 소음의 크기가 커져갔다.
명백히 이상한 현상에 당황한 나와 야미가 서로 마주보고 있을때 마침내 바닥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지직-!

쩌어억-!

"으앗!?"

갈라지기 시작한 복도 바닥의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린 유리창을 보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대체 구교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걸까요?"

"그, 글쎄? 나도 대체 뭐가 뭔지..."

「꺄아아아아아아-----!」

비명소리?

갑자기 들려온 여자아이로 추측되는 비명소리에 놀라서 야미를 바라보았다.

"야미, 이건..."

"누군가 위험한 상황에 빠진걸까요?
하지만 구교사에 들어올 사람은 없을텐데..."

"그런것보다 먼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자구."

야미의 손을 잡고 재빨리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손이 잡혀 잠시 움찔하던 야미는 조용히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윽...그러니까 오해라니까."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을 듣도록 하죠."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까워 질수록 복도 전체를 울리는 진동은 점점 커져만 갔다.
여학생의 비명은 1층의 복도 귀퉁이에 있는 교실에서 들려오는듯 했다.
아무래도...여자애가 있는 곳이 이 현상의 진원인가보군.
황급히 교실안으로 들어서자 교실 뒤편 구석에 새하얀 그림자가 보였다.

{꺄아아아아-----! 싫어-----!}

왕왕-!

"오시즈?"

예전에 구교사에서 만났고, 이후로 하루나의 몸에 빙의해서 하루동안 같이 지냈던 유령-오시즈가 눈물을 매단채로 구석에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개를 무서워하는 오시즈는 떠돌이 개가 점점 다가갈수록 패닉상태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휘리릭~펄럭~
들썩- 쿠르르르릉!
드드득...!
쾅! 우지끈!

커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려올라가는 가운데,
의자, 책상, 사물함, 쓰레기통, 석고상, 청소도구들이
엄청난 기세로 교실을 날아다니며 이곳 저곳에 부딪히고 있었다.
날아오는 물체들을 피하며 당황스레 오시즈를 불렀다.

"으앗!? 오시즈! 진정해...!"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오시즈라는 저 유령이 한 일이었군요.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지금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것 같습니다."

야미는 가까워지는 물체들을 머리칼날로 묵묵히 베어내며 말했다.
점점 들썩임이 심해지는 교실의 모습에 다급한 마음으로 오시즈를 보았다.
처음으로 겪은 오시즈의 영능력은 상상했던것 이상으로 강력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잘못하면 구교사가 무너질것만 같아서 비명을 지르는 오시즈쪽으로 다가갔다.

왕-!

{싫어! 오지말아주세요!}

팅-팅-
찌이익-

다가가던중 일어난 폴터가이스트에 몸이 뒤로 밀려나가는 느낌과 함께
교복단추가 떨어져 날아가 버리고 상의가 찢겨져 나갔다.
이거...장난이 아니잖아?

촤아악-!

「읏!?」

딱-!
털썩-

뒤에서 야미의 신음소리가 들리면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선은 오시즈를 진정시켜야 이 소란도 가라앉을 수 있으니까...
상의가 완전히 걸레가 되어버린 가운데 앞으로 계속 걸어가서
오시즈쪽으로 다가가려는 멍멍이를 복도 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오시즈. 멍멍이는 쫓아냈으니 괜찮아."

{하우우우...!}

쉬이잉-
쿵- 쿵-!

벽을 향한채로 양어깨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오시즈의 모습과 여전히 날아다니는 물체들을 보건데
아직까지 오시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것 같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오시즈의 모습에 뒷머리를 한차례 긁적이곤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이런건 사이렌지처럼 상냥한 아가씨가 해주는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지..."

푸념을 늘어놓으며 천전히 무릎을 굽혀 웅크리고 있는 오시즈의 등뒤에 앉았다.
그리곤 살며시 두팔을 벌려 오시즈의 몸을 천천히 껴안고 속삭였다.

"이제 괜찮으니까...그러니까 이만 진정하라고 공주님."

{...아...료스케씨?}

툭-툭...
털썩...

오시즈가 진정된 듯 이리저리 떠다니던 물체들은 힘을 잃고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진정했어?"

{......}

아무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오시즈의 모습이 이상해서 다시 한번 오시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시즈?"

{......따뜻해...}

살며시 눈을 감으며 양손으로 내 팔을 잡아오는 오시즈의 모습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매몰차게 뿌리칠수도 없는지라 엉거주춤 앉은채로 구석에서 오시즈에게 붙어있는데 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에서 소리가 났어!」
「여기에 들어온게 맞아?」

학생들의 목소리?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라, 리토, 코테가와랑 사키 선배, 룬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의 모습이다.

"료스케 무사해~?"
"...야미!? 아, 아키츠 이건...?"
"야미짱?"

놀란듯 우리를 바라보는 학생들 중에는 방금전 결투를 구경하던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날 쫓아온 야미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라라가 데려온걸까?
아무튼 정작 소란스러웠던 일은 그럭저럭 해결되었지만 말이지.
놀란 친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웃으며 말했다.

"여어~ 어서들 와.
유감이지만 이미 일은 다 끝마친 상태라고."

"「이미」?"

"그렇다니까."

"그, 그럴수가...어째서 이런 짓을...!"

이런 짓?
심상치 않은 학생들의 모습에 갸우뚱하곤 학생들의 시선이 모인곳으로 자연스레 눈을 돌렸다.

내 뒤쪽에는 방금전까지만 해도 물체들을 베어넘기던 야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헐...이거 어떻게 된거야?
방금 전의 부유물 정도에 당할 야미가 아닐텐데?
당황해서 야미를 보고 있는데 이상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뱅글뱅글 눈이 놀아가며 기절해있는 야미의 얼굴에 한가득 뿌려진 하얀 액체.
...저거 '미끌미끌 로션'이잖아!?
저게 왜 야미 얼굴에 있어!?
문득 뜯겨져 나간 상의에 생각이 미쳤다.
아...방금전 폴터가이스트 때문에 품에서 날아가버린 로션을 야미가 베어넘겼나보네.
로션이 터지면서 끈적끈적한 액이 얼굴에 뿌려져 당황한 사이에
부유물에 머리라도 부딪혀 기절한건지 야미의 이마 한쪽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기절해 쓰러져 있는 채로 온몸에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뿌려진 야미.
그리고 상의가 완전히 찢어져 나가서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나.

......살려줘.

「「「아키츠군...」」」

"오해야!"

「「「이 변질자---!!!」」」




징계란 이름의 폭우를 뚫고 엉망이 된채로 구교사를 벗어나 도착한 학교의 뒤뜰.
한적한 공터에서 룬과 마주한채로 가만히 손에 얹어진 물건을 바라보았다.

'미끌미끌 로션(샘플용)'

"......"

답례를 하고 싶다는 룬에게 갔더니 내밀어진 것이다.

"...이건 뭐야?"

"은하통판에서 요즘 인기의 제품이야.
미카도 선생님이 피부에 정말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시던데?
뭐, 이건 사실 덤으로 받은거고...
요즘 외모 문제로 고민이 많다길래 특별히 의뢰비 대신 주는거니까 고맙게 받아."

턱-

내 손에 추가로 얹어진 물건들을 쳐다 보았다.

* 은하통판 매출 1위! 깔끔한 남자가 되십시오! *「매끈매끈 면도기」
* 털많은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드립니다! *「반들반들 제모제」

...어디에 쓰라고...?
쓰디쓴 액체가 목을 넘어가며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꿈을 꾸었다.

솟구친 검은 머리, 짙은 눈썹, 콧수염과 턱수염이 듬성듬성 난 거친 얼굴.
붉은 자국 다섯개가 불꽃처럼 가슴에 새겨지고 어깨 부분엔 흰 뿔이 달린 검은 보호구를
상체에 장착한 근육질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통키야...]

전 료스케인데요 나태풍(본명:이치게키 단쥬로)씨?

[피구왕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너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단다.]

...안듣고 있군.
아니, 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건가.

[그런 너에게 가르쳐주마! 타이거를 쓰러뜨릴 수 있는 필살기를...!]

불○슛?

뭐, 내쪽에서 아무리 말해봐야 들리지도 않을테고
그냥 필살기 구경이나 제대로 해볼까...

[저기 산이 보이느냐?]

잘 보입니다.
도시에 있는 산 치곤 꽤 절경이네요.

[그럼 똑똑히 봐두거라. 이 아버지가 보여주는 최고의 필살기를!]

전 댁의 아드님이 아니라니까요?

[ 흐으으으읍...! ]

얌전히 바라보고 있자 나태풍은 뒤로 돌아서며
산을 마주보곤 오른주먹을 힘껏 쥐었다.

[간다!




 불꽃슛!파산포(破山砲)-----!!!!! ]

---------------!!!!!


순간 귀로 포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강맹한 파공음이...
공진폭발 속에서 일그러진 기류들이 만들어낸 맹렬한 소용돌이가...
대기가 터져나가며 발생한 격렬한 충격파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 콰르르르르릉......!

하늘을 꿰뚫을듯 엄청난 기세로 중첩되며 쏟아져 나간 바람은
뇌우를 몰고온 폭풍처럼 한동안 대지를 흔들다가 사라졌다.

울림이 멎고 광포한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흉측하게 파헤쳐진 대지만이 붉은 속살을 드러낸채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허, 허허...

...산이 사라졌네?


황당함 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때
호쾌한 웃음을 한바탕 지은 나태풍이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하하하하하-! 보았느냐 통키야? 이것이 바로 불꽃슛파산포!]

"웃기지마!? 당신 방금 파산포라고 했잖아!?
게다가 이게 피구?
사람 잡을 일 있어요?
아니, 애초에 피구공도 안썼잖아!?"

내가 태클을 걸거나 말거나 나태풍은 힘차게 엄지를 치켜 세우곤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상쾌한 웃음을 날렸다.

[그럼 난 이만 가보마.
아무쪼록 나를 뛰어넘는 세계 제일의 피구왕이 되거라.]

어이 이봐요 나태풍씨?
이 세상엔 일본 피구연맹 같은것도 없다고?!

[언제나 하늘에서 너를 지켜봐주마...]

거짓말 하지 마요!
댁 안죽은거 다 알고 있거든요!?

[아, 이 필살기는 한번 쓰는데 마라톤을 완주(42.195km)하는 정도의 체력이 소모되니 주의하거라.]

그 설정만 불○슛입니까.

[그럼 이만~ 아디오스~!]

나태풍은 훗-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두손가락을 모아 이마에 갖다대곤 저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

구름 저편에서 나름대로 포즈를 잡으며 회상씬에 나올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나태풍씨에게 삿대질을 해대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답지않게 격투 만화 같은 씬을 연출했더니 해괴한 꿈을 다 꾸네.
약이라도 타먹어야 하는거 아냐?
최근들어 이상한 꿈만 꾼다고 투덜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목욕탕으로 향했다.




"...위장약이 필요다고?"

"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니?"

"...최근 속이 쓰려서..."

살살 손바닥으로 배를 만지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날의 결투 이후, 전교에는 나에 대한 소문이 하나 퍼졌다.

「최종귀축 아키츠 료스케」

싸운 여자는 쓰러뜨린 뒤 남김없이 옷을 찢어서 알몸으로 만드는 변태.
구교사 으슥한 곳으로 여자아이를 유인해서 손을 댄 변질자.
그리고 마침내는 유령에게까지 그 마수를 뻗은 끝모를 욕망의 화신.

- 그때 난 들었지. 아키츠 료스케의 말을.
「난 인간을 그만둘테다 라라!
난 인간을 초월하겠다! 우왓하하하하하-----!!」
그 외침 이후로 녀석은 정말로 인간을 초월했지.
...윤리적인 의미로 말야.

- 구교사에서 흐느끼는 여자아이의 목소리를 들었어.
학생들이 도착했을 땐 아키츠는 이미 끝낸 뒤였다고 해.
뭘 끝냈냐고? 몰라서 물어?

- 귀엽게 생긴 유령 여자애를 끌어안고 있었다니까.
눈물이 글썽 맺혀있는 유령 소녀의 모습은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불쌍했어.
가엾게도...아키츠 료스케의 마수는 저승에서 조차 피할수 없는걸까?



사실 섞인 루머들의 폭풍우속에 남은건 산산조각이 나버린 섬세한 내 마음.
「피는 철, 마음은 유리」라더니 그 말이 딱이다.
조각조각 박살이 나서 흔적도 찾기 힘들더란 말이지.

라라를 이겼는데...
학교붕괴도 막아냈는데...
영광도 뭣도 없는 상처뿐인 승리군요 이건.



중얼거리는 내말을 듣고 식은땀을 흘리는 미카도 선생님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했다.

"미카도 선생님... 모범생으로 보이고 싶어요..."

싱긋.

"포기하면 편하단다..."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는 미카도 선생님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또륵...

흘러내린 물방울은 덧없는 양아치를 위해...
왠지 절실히 농구가 하고 싶어진 어느 여름의 하루였다.



====================
다행히 2월이 가기 전에 올리는군요^^;

그나저나 내용이 생각보단 슬림(?)해졌네요.
생각날때마다 수첩에 적어뒀던 소재들 5개중에 4개는 폐기한듯...=_=;
(컴퓨터로 쓰는 도중에 추가로 넣은것들도 있지만)
그래도 뭔가 집어넣은게 많아서 내용이 중구난방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p.s.1. 13화에서 비교적 여성스러웠던 '쿠죠 린'(텐죠인 사키의 호위. 3학년. 포니테일 검도소녀)의 말투를 남성적인 어조로 정정합니다.
13화에의 상황에선 당황해서 그랬다든지 부끄러워서 어조가 이상하게 변했다든지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작 참고할때 제가 어투 참고를 잘못한것 같더군요-_-a;

참고사항으로 사키의 자기 호칭은 '나'


p.s.2. 학교를 떠돌던 개는 원작에서 자주 학교를 떠돌며 등장한 개.
1학년때 리토가 작아지는 사건을 비롯해서 학교에서 꽤나 자주 모습을 보였습니다.


p.s.3. 라라의 풍압 펀치.
료스케의 꿈에 나왔던 파산포의 기본 원리죠.
뭐,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요(...)

아무튼, 본 작품은 트러블의 작명 센스를 준수합니다.
(데빌 루크 성인 = 악마 꼬리가 달린 우주인)


p.s.4. 라라를 상대로 한 유술 장면은 정하늘 님의 무협소설 '살 검(殺 劍)'에 등장한 무애(武愛)의 첫 전투장면에서 참조했습니다.


p.s.5.이번 편 관련 이미지.

저스틴 (before)

저스틴 (after)

라라의 풍압 펀치

왼쪽부터 린, 사키, 아야

어린시절의 사키와 린, 아야

계단 근처에서 청소하던 라라

아야, 린

달리는 아야

미소짓는 린

라라와 야미의 날개

물에 맞고 떨어진 페케

오시즈

오시즈를 진정시키는 하루나

라라와 야미의 비장의 수가 충돌한 뒤 폐허가 된 학교


Posted by 루트(根)
,
"......"

"이건 어떨까 야미짱?"

"이것도 괜찮아 보이는데요 코테가와 언니."

"그것도 예쁘네. 야미짱 생각은 어때?"

"...저는 잘 모르겠군요."

"그래?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도록 해 야미짱."

"...저기..."

조심스레 손을 들어 주의를 끈다.
세 아가씨의 시선이 모이자 살짝 불평섞인 어조로 말을 꺼냈다.

"아직 고르지 못한거야? 벌써 한시간째라구?"

"가만 있어봐요 아키츠군.
수영복은 어울리는걸 골라야 한다구요."

레이스가 달린 원피스 형의 수영복을 한손에 든 채로 대답하는 코테가와에게 살짝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수영복 매장.
야미의 수영복을 고르기 위해 코테가와, 미캉과 함께 야미를 데리고 온 것이다.



리토의 집에서 수영장에 가기로 미캉과 약속한 다음날...그러니까 오늘 아침.
미캉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코테가와에게 연락했을 때, 당면한 문제를 알아차렸다.

「수영장 말인가요?」

「응. 이번에 새로 오픈한 「사이난 워터랜드」가 꽤나 평가가 좋더라고.
코테가와도 이번 여름엔 바다에 가보질 못했잖아?
안그래도 무더운 여름인데 피서라도 한번 하는게 좋지 않을까 해서.」

「으응...지금 바로 만나는건 아니겠죠?
이렇게 갑작스럽게 약속이라니... 적어도 준비할 시간은 있어야 한다구요.」

그거야 즉흥적으로 한 약속이다 보니 어쩔수 없네요.
불평하는 코테가와에게 사죄하고 말을 계속했다.

「아하하...미안해.
하지만 바로 당장에 수영장에 가진 않을꺼야.
우선 야미도 만나서 출발해야 하니까.」

「야미짱도?」

「응. 그게 말이지, 유우키랑 라라 일행이 바다로 놀러 갔다던데 미캉 혼자서 집을 보게 되었거든.
바다에 따라가지 않은걸 아쉬워 하는것 같고, 혼자 집보기를 시키는것도 그래서 미캉이랑 수영장 약속을 잡았어.
미캉은 야미랑 사이가 좋아 보이니까 야미도 같이 간다면 좋아할꺼라고.」

「야미짱에겐 벌써 얘기 한건가요?」

「으응...아직 말하진 않았지만...하, 하지만 괜찮아!
서점이나 도서관을 둘러보면 금방 찾을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응?」

약간 주저하면서 코테가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야미짱, 수영복 갖고 있던가요?」

「......에?」



코테가와의 걱정은 괜한게 아니었다.
코테가와랑 미캉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는 동안
내가 야미를 찾아서 수영장에 놀러가는걸 승낙받고 데려왔을 때,
야미가 수영복을 갖고 있지 않은걸 알게 되었다.

야미가 수영장 가는걸 취소하고 물러나려 하자 코테가와랑 미캉과 내가 말리느라 잠시 말썽이 있었다.
급작스레 잡힌 약속인데 괜히 야미가 신경을 쓰도록 만든것 같아서 양심이 찔렸다.



결국 오전엔 야미의 수영복을 고른뒤에 오후에 「사이난 워터랜드」로 가기로 의견을 모으곤,
상점가의 수영복 매장으로 함께 들어간 것으로 현재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방금전까지 말을 주고 받던 코테가와는 야미의 수영복을 골라주며 왠지 모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고,
미캉도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어머니(유우키 링고)의 센스를 물려 받았는지
맵시있는 수영복을 골라서 야미에게 권하고 있다.
쉴새없이 건네지는 수영복들에 혼란스러워 하는 야미의 모습은 꽤나 볼만했다.
단지 유일한 불만이라면...

살짝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수영복이 있다.
원피스 타입을 집어드는 코테가와가 있다.
수영복이 있다.
레이스 달린 투피스를 고르는 미캉이 있다.
수영복이 있다.
수영복들을 손에 든채로 멀뚱멀뚱 서있는 야미가 있다.
수영복이 있다.
수영복이 있다.
수영복이 있다...



...점원은 어딜 갔나?

멀찍이 떨어진 다른 수영복 매장에서 매당긴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점원으로부터 마음의 거리가 느껴진다.
우리가 있는 매장 주위는 점원들의 모습이 힐끔힐끔 보이는게 아무리 봐도 쉬쉬 피하는 분위기였고,
이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없었다.

아니...뭐, 알고는 있어.
날카로운 인상-고의가 아니지만-을 한 금발에 수염을 기르고 목걸이에 체인팔찌를 찬 양아치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어슬렁 어슬렁 거리니까 시비라도 붙지 않을까 두려워서 피하는거.

하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온 이후론 식료품 가계 분들이나 장보러 온 어른들, 동네 꼬맹이들이랑은 어느정도 친숙해 졌고,
학교에서의 유쾌한 만남들에 워낙 만족하다 보니까
지금의 이런 상황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적어도 어른의 여유란걸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1시간 전, 수영복 매장에 들어서자 주위가 텅 비어버리는 해프닝을 겪고 나는 어벙벙했고
코테가와랑 미캉은 황당해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나에게 어깨를 토닥여주던 코테가와랑 미캉의 상냥함이 아팠다.
그만둬 제발...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이라고?

그 후 마음을 추스르고 세 아가씨들과 함께 수영복 쇼핑을 한지 1시간...

아가씨들의 쇼핑은 의외로 길었다.

눈여겨 본 수영복을 체크해두고 다른 매장으로 가서 수영복을 찾아본다.
그리고 다시 괜찮은 수영복을 체크해두고, 또다시 다른 매장에서 다른 매장으로 돌았다.
수영복 매장을 전부 돌고 난 뒤, 처음의 매장으로 돌아가 체크해 둔 수영복을 골라서 살펴보았다.
이거...생각보다 더 오래걸리는게 아닐까?

"저기...우리 오늘 안으로 수영장에 갈 수 있는거지?"

"걱정말아요 아키츠군. 적어도 점심먹기 전엔 끝마칠테니까요."

"그, 그래?"

손바닥을 팔랑팔랑 흔들며 답하는 코테가와를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서하러 나왔는데 어째 야미의 수영복 사는걸로 목적이 바뀐것 같아...
뭐, 코테가와도 뭔가 잔뜩 챙겨온 모습을 보면 수영할 생각 만만인것 같으니 걱정은 없겠지.
「으음...」신음성을 흘리며 수영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야미의 모습을 보곤
조금 정도는 이 시간을 즐겁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그럼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이 앞에서 만나도록 해요."

"알겠어. 그럼 나중에 봐~"

"나중에 봐요 료스케 오빠. 그럼 가자 야미짱."

"그러죠..."

「사이난 워터랜드」에 들어와 여자 탈의실로 향하는 코테가와, 야미, 미캉을 잠시 바라보다
나도 남자 탈의실을 찾아 들어갔다.

탈의실 내에서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몸을 피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방금전 수영복 매장에서 이미 겪은 일이기에 조용히 구석에 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쑥덕쑥덕 거리던 사람들도 관심을 돌리면서 탈의실은 다시 소란스러워 졌다.

「모테미츠 선배. 오늘 야구부를 쉬고 수영장에 온건 대체 뭣때문에...」

「후후...이런 더운 여름하면 당연히 수영장이지.」

「부활동의 피로를 수영으로 푸는것입니까?」

「바보녀석! 수영장하면 여자! 여자하면 헌팅 아니냐!」

「「「과연 모테미츠 선배!」」」

「후후...너희들에게 내 헌팅 테크닉을 보여주지.」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중생이로구먼.
방금전 목소리는 아마도 야구부의 모테미츠 선배와 그 후배들이다.
2학년때 도촬 매니아란게 발각되어 정학처리를 받고 여자의 적으로 찍힌 요주의 인물로,
항상 예쁜 여자아이를 체크해두곤 추파를 던지며 지내기 때문에 본받고 싶지 않은 선배의 표본이다.

기억나는 모테미츠의 헌팅 장면들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기에 그렇게까지 경계하진 않아도 될듯 하지만...
교장 선생님과 함께 뭔가 저돌적인 모습으로 해프닝을 일으켰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 좀 걱정이 되긴 하다.
촉수로 변태적인 행위를 하려는 우주 생명체들 보단 훨씬 낫지만서도...

"어? 피구왕 형?"

"엥?"

난데없는 호칭에 고개를 돌리니 꼬마애 한명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서있었다.

"아, 진짜다!"

얼굴을 마주보자 짝-하고 손뼉을 치곤 웃으며 꼬마는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때 공원에서의 히어로 놀이 재밌었어."

"그, 그러냐?"

미캉이랑 함께 저스틴의 검을 피하며 꽁지빠지게 달아났던 그때 사건 말인가.
뭐, 나로서도 그때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은 정말 고마웠으니까...

"형도 수영장에 놀러온거야?"

"어? 응. 날도 더우니까 좀 시원하게 놀고싶어서 말이지."

"혼자 온거야?"

"아니. 친구들이랑 함께.
넌 가족들과 함께 온거니?"

"응. 아빠가 주말이라고 함께 놀아주러 나오셨거든."

"그래...?"

씨익-하고 웃는 개구쟁이 꼬마의 표정은 정말이지 시원하구나.

「히로시~ 이만 가자. 엄마가 기다릴꺼야.」

"앗, 잠시만 아빠!
그럼 난 이만 갈께.
형도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아~"

"고마워. 너도 아빠 엄마랑 즐겁게 놀다 가렴~."

꼬마는 한차례 손을 크게 흔들더니 웃으면서 아빠의 손을 잡고 탈의실을 나갔다.
화목한 가정이구나.
자의는 아니었다지만 나도 부모님 속 좀 덜 썩였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지.
...양아치 스타일을 벗어나는 그날까지 힘내자.
쩝-하고 입맛을 다시다가 머리를 한차례 긁곤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수영복을 입고나와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코테가와와 야미, 미캉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키츠군, 먼저 와있었네요."
"료스케 오빠. 오래 기다렸어요?"
"......"

"어서와. 그다지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오른손에 튜브를 들고 있는 코테가와는 레이스 장식과 함께 가운데 리본이 장식된 상의와 랩스커트가 있는 러플 비키니를 입고 있었다.
귀여운 고양이 무늬가 그려진 팬시한 디자인의 튜브와 달리 비키니 상의밖으로 가슴 아래가 살짝 드러난 수영복 차림은
단정함을 강조하던 평소 코테가와의 모습과 대비되는것 같아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보면 리사가 말했었지.
「코테가와씨는 파렴치한 일을 싫어한다면서, 정말 파렴치한 몸을 갖고 있잖아~」라고.
동감이다.
코테가와에게 말하면 아마 화내겠지만...

비치발리볼을 왼쪽 옆구리에 낀 미캉은 가로 줄무늬가 있고 하의 양쪽에 끈장식이 달려있는 스트라이프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착 달라붙는 하의 위로 어딘지 모르게 강조되어 보이는 골반 부위가 눈에 들어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쪽을 파인애플처럼 묶은 구슬 머리끈은 풀지 않은걸 봐선 그상태로 수영장에 들어갈 생각인듯 했다.

마지막으로 코테가와와 미캉의 뒤를 따라오는 야미는...
프릴이 장식된 상하의. 상의와 끈이 링으로 연결되었고 하의는 랩스커트 위로 리본이 장식된 검은색 프릴 비키니였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 비키니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예쁘네...
하지만 유카타도 그렇고 수영복까지 검은색 일색으로 할것까진 없을텐데.
예전에 유카타를 고르던날 야미가 입었던 옷처럼, 가끔씩은 검은색에서 벗어난 옷차림도 보고싶은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치마 아래로 비키니 하의가 살짝 드러나 보이는데...프릴 치마가 짧은 타입인건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마십시오."

"에?...아, 미안..."

얼굴이 붉어져서 랩스커트 아래를 손으로 살짝 가리는 야미를 보며 퍼뜩 정신을 차리곤 사과했다.
생각하다가 무심코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다행히 오늘의 야미는 기분이 나쁘진 않은듯 예전과 같은 머리카락 펀치를 날려오진 않았다.
안도하며 사과하는 나를 보며 코테가와랑 미캉이 나무라는 듯한 어조로 책망했다.

"아키츠군...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보는건 실례라구요."

"맞아요 료스케 오빠."

"미안. 새로 산 수영복이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만 실수했네."

"......"

스커트를 가린채로 침묵한 야미의 모습에 왠지 초조해져서 재빨리 화제를 딴곳으로 돌렸다.

"그나저나 코테가와는 작년의 수영복과는 다른거구나?"

"네?"

"왜 그, 1학년 수학여행때는 연하늘색 수영복을 입었잖아.
혹시 이번에 새로 산거야?"

"아...그래요.
야미 수영복을 고르다가 제것도 함께 샀거든요."

"흐응...예전것도 꽤나 어울렸는데...
새 수영복이 정말 마음에 들었나봐?"

"어? 으...으응! 그래요!"

...왜 더듬고 있어 코테가와?
약간 어색하게 웃느라 입주위가 굳어진게 보인다고.

"저기 코테가와 언니. 잠시만..."

"응?"

미캉이 슬쩍 코테가와의 손을 잡고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간다.
뭔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는걸까?
둘이 뭔가 대화하고 있는 모양인데...

...힘들어져? 비결? 관심없어? 운동?

띄엄띄엄 들려오는 소리로는 당최 무슨 얘긴지 짐작이 안간다.
일부러 귀기울여 엿들을만큼 염치없진 않지만 좀 궁금하긴 하다.
당황한것 같은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건데 뭔가 답하기 난감한 화제인가?

"저기..."

"응?"

멍하니 둘의 모습을 쳐다보다가 옆에서 들린 야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야미는 나를 바라보며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아...하하, 뭘~"

새로 산 야미의 수영복 칭찬했던것 말이구나.
하마터면 맥락을 놓칠 뻔했네.

코테가와랑 미캉도 대화가 끝났는지 야미와 내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미캉의 아쉬워 하는 모습을 보건데 만족스러운 답은 듣지 못한듯 했다.

"얘기는 다 끝난거야?"

"그런 셈이죠."

살짝 헛기침 하고 답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궁금증이 일어 물었다.

"그런데 코테가와. 최근 운동하고 있어?"

"네? 아뇨. 특별히 하고 있는 운동은 없는데...
왜 그래요?"

"아니, 방금전 미캉과 얘기 도중에 운동 얘기가 나온듯 해서..."

"......"

"코테가와?"

"...에에에에엑---!?"

"까,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기성을 지르는 코테가와에 놀라서 한걸음 물러났다.
내가 뭔가 실수 한건가?
코테가와는 살짝 떨리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킨채 더듬더듬 물었다.

"아, 아키츠군. 설마...들었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코테가와에게 기가 눌려서 솔직히 답했다.

"그...「힘들다」느니 「비결」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서..."

"...!"

...아무래도 난 지뢰를 밟은것 같다.
양손으로 뺨을 감싸쥐며 얼굴이 새빨개진 코테가와는 입을 벌린채로 소리없는 비명을 내고 있었다.
게다가 코테가와는 물론이고 미캉마저 살짝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게 공공연히 말하기엔 거북한 이야기였는듯 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코테가와는 내 어깨를 힘껏 움켜쥐며 쓰러뜨릴것만 같은 기세로 강하게 말했다.

"잊어요 아키츠군! 방금전 들은건 잊어요! 알았죠!?"

"네, 넵!"

얼굴이 잔뜩 상기된 상태로 노려보면서 말하는 코테가와의 얼굴은 예쁘면서도 장난 아니게 무서웠다.
코테가와에게 양 어깨를 잡힌채로 한동안 앞뒤로 탈탈탈 흔들리며 생각했다.
의도했건 아니건 여자들의 밀담은 파고드는게 아니라고.

"알았죠!? 절대로! 절대로 기억하면 안되니까? 절대에요!"

...이 나라 말로 그런 표현은 「반드시 기억해!」란 말과 같다는거 알고 있는건가요 코테가와씨?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흔들거리는 고개를 어떻게든 끄덕이면서 답하며 바랬다.
머리 어지러우니까 이제 좀 봐주세요 코테가와씨...

한동안 주의를 거듭주던 코테가와는 겨우 내 어깨를 풀고 물러났다.
내가 어질어질한 정신을 추스리는 가운데
어떻게든 진정한 코테가와는 팔짱을 낀채 토라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키츠군은 세심함을 좀더 몸에 익혀야 해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엿들은 말을 꺼내는데는 되도록 주의하도록 하자고 결심한 순간이었다.

"아무튼, 이제 그만 수영하러 가요."

"저쪽 큰 풀장에 가볼래요 코테가와 언니?"

"그럴까? 가자 야미짱."

"알겠습니다."

저기...준비운동은 안하고 들어가는 건가요?
수영모 착용한 사람들도 없는걸 보면 준비운동도 필요없을것 같기도 하고...
기억속에 있는 상식을 어디까지 적용시켜야 할지 모르겠네.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세명의 뒤를 따라 풀장으로 들어갔다.




"꺄악?"

"아하하~ 시원해!"

"기분좋네요~"

"물놀이는 이렇게 하는겁니까?"

서로에게 물을 퍼서 뿌리는 물놀이를 하는 셋을 보다가 나도 끼어들어 볼까 싶어서 가까이 갔다.
야미는 물놀이가 어색한지 조금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타킷은 야미로 할까? 좀더 적극적인 모습을 끌어내보고 싶기도 하니까.
손에 물을 조금 담아 감싸쥐고서 야미쪽을 겨눈다.
조준 완료.

"어이~ 야미~"

"네?"

"받아랏!"

손을 꽉 잡고 손바닥의 물을 발사한다!

촤악-!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던 야미는 내 손에서 발사된 물벼락을 맞고 머리를 적셨다.
뚝...뚝...하며 물방울이 야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걸 보며 웃으며 선언했다.

"핫핫핫~! 어때?
아키츠 료스케 특제 손물총이다~!"

"...과연.
아키츠 료스케. 이건 도전입니까?"

"당연하지!"

"...좋습니다. 그대로 전해드리죠."

푸화악---!

"우꺄악~~~!?"

순간적으로 야미가 일으킨 거대한 물보라에 휩쓸려 원숭이같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버렸다.
과연 우주인.
물장난조차 예사롭지 않군...!
이만큼이나 즐겨준다면 나로서도 기쁠 따름이지만...

"적어도 힘 조절 좀 해줘 야미이이이이이~~~!?"

첨벙~!

한바탕 물보라를 일으키며 풀장 한가운데에 머리부터 다이빙한 나를 보던 야미의 말소리가 들렸다.

"...승부가 아니었습니까?"

적어도 이런 배틀같은 느낌은 아니거든요 야미씨?

"아니,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까 야미짱."

"그냥 사이좋게 물을 튀기면서 노는거라고 야미짱."

난처한듯 웃으며 야미에게 설명해주는 코테가와랑 미캉을 보다가
코테가와가 하고 있는 튜브에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면 코테가와는 아직 수영을 할 줄 몰랐지?

"어이~ 코테가와."

"왜그래요 아키츠군?"

"저번에 수영 배우다 말았던거 있잖아.
이번 기회에 수영 다시 배워보지 않을래?"

"으응...어쩔까요..."

물놀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미캉과 야미를 보던 코테가와는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그럼 야미랑 미캉이 놀고 있는 동안 배워보도록 할께요."

"그래? 그럼 이쪽으로..."

수영하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는 장소로 움직여서 코테가와에게 자유형에 대해 가르쳤다.
코테가와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라 학교 체육수업때도 꽤나 우수한 성적을 내는걸로 알고 있는데
수영에선 왠지 모르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튜브없이 활동하는것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상태라 하루만에 가르치긴 힘들것 같고,
수영장에 온 목적은 수영 배우러 온게 아니라 노는것이다 보니,
그냥 간단히 몸을 푸는 정도만 가르치다가 미캉이 부르는 소리에 수영수업은 종료되었다.

"료스케 오빠, 코테가와 언니.
저기 저 워터 슬라이드 한번 타지 않을래요?"

미캉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성처럼 생긴 건물들을 휘감으며 내려오는 워터 슬라이드가 보였다.

"그럴까? 그럼 코테가와, 수영연습은 여기까지만 하고 워터 슬라이드 타러 가지 않을래?"

"그, 그래요."

방금전 수영 연습이 조금 무리였는지 약간 긴장된 표정이었던 코테가와는 반색하며 미캉과 야미 쪽으로 갔다.

워터 슬라이드가 시작하는 위쪽에 도착해서 아래를 내려다 봤는데...
이거 어째 워터 슬라이드 기울기가 조금 스릴넘쳐 보이는데?
코테가와랑 미캉도 약간 경직된 표정이고...
가만히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럼, 어떤 순으로 탈까?"

"이건 어떻게 타는 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으응...그냥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가는걸 즐기는거지.
혹시 모르니까 야미는 미캉과 함께 내려오면서 안전에 주의해줘."

"저, 저기 아키츠군..."

"코테가와?"

"그...같이 내려가도 될까요?"

"에?"

의아해서 바라보자 코테가와가 튜브를 들어보였다.
아...튜브를 내려 놓고 타야 하는건가.

"슬라이드 마지막에는 풀로 들어가야 하니까 조금..."

"아아, 알겠어. 그럼 내가 가장 먼저 출발해서 출구에서 잡아줄테니까
나 다음으로 코테가와가 출발하고 그 후에 미캉, 야미 순으로 오도록 하자."

"알겠어요 료스케 오빠."

"잘 잡아줘야 해요 아키츠군?"

"걱정말라고~"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이상한 곳에 손대진 말아요."

"넵~주의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있을께~! 간다~!"

익살맞게 경례 포즈를 취한후 워터 슬라이드 입구로 몸을 던졌다.
샤아아앗~!
가파른 슬라이드를 내려가면서 얻어진 속력으로 360도로 몇번씩 회전을 반복한다.
아마도 밖에서 보았던 건물을 뱅글뱅글 돌면서 내려가는 구간인것 같았다.
최근의 놀이기구는 정말 스릴이 넘치잖아?

「꺄아아아아악!?」

에? 코테가와?
쉴새없이 돌고있는 와중에 머리가 향한 통로쪽에서 여자아이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코테가와가 내려오는게 생각보다 빨라!?
너무 긴장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이러면 내가 밖으로 나온뒤에 몸을 일으킬 시간마저 부족할지도 모른다구?

이윽고 워터 슬라이드의 출구가 보이면서 풀장에 가득찬 물이 보였다.
어떻게든 몸자세를 바로 해서 코테가와를 받아줘야 할텐데 시간에 맞을까?
속도를 보아하니 이대로는 슬라이드에서 힘차게 튕겨져 날아가 풀에 빠지는 형세인데,
받아주려면 아무래도 입구 근처가 나을듯 했기에 양손을 슬라이드에 대며 속도를 줄였다.

촤아악~!

슬라이드에서 힘차게 튕겨져 나가려는 몸이 정지하자,
슬라이드를 잡은 손을 떼고 풀로 조용히 내려가려는데 바로 귓가에 코테가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어느새인가 끝까지 내려온 코테가와의 새하얀 다리가 눈앞을 메우고 있었다.

엑? 벌써!?

"꺄아아아악!?"

퍽-!

"으앗!?"

내려오던 속도 그대로 내 등에 부딪힌 코테가와는 나와 몸이 뒤엉켜 버렸다.
나도 양손을 놓고 있던차에 뒤에서 힘을 받았기에 나랑 코테가와는 사이좋게 풀장으로 빠지고 말았다.

첨벙~

"푸핫~! 콜록콜록!"

의도치않은 잠수를 해버렸기에 기도로도 물이 들어가버려서 기침이 났다.
눈도 아직 제대로 못뜨고 있는 상황이고...
하지만 약속대로 코테가와는 어떻게든 물에 빠지지 않도록 제대로 잡아주는데 성공했으니 다행인가?

"쿨럭, 흠흠. 괜찮아 코테가와?"

"......"

"코테가와?"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이상해서 눈을 깜빡거려서 제대로 눈을 떠보니 코테가와의 등이 보였다.
정면에서 잡아주려고 했는데 실수한건가?
겨드랑이 사이로 양손을 넣어서 코테가와를 물위로 들어올리는 형태였다.
본래라면 등쪽에 손가락을 대고 들어올리는 형식이었을텐데...

...네. 그래서 문제였군요.

"아, 아키츠구운...!"

뒤돌아선 상태로 목덜미가 빨개져서 부들부들 떨고있는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그래. 코테가와가 화난 이유는...

코테가와의 뒤쪽에서 내밀어진 내 손가락이 비키니 상의 안으로 파고들었으니까.
부드러운 감촉도 느껴지고 이건 정말이지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어딜 만지는 거에욧! 이 변태!"

짝-!

씩씩거리면서 코테가와는 슬라이드에서 멀어져갔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따귀구나 아야야...
맡겨둔 튜브를 찾아오려고 슬라이드 꼭대기로 다시 올라가는 코테가와의 모습을 뺨을 매만지며 바라보는데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료스케 오빠! 조심!"

"응?"

파악-!

"큽!?"

첨벙~!

난데없이 머리를 내리밟고 지나간 인형 때문에 다시 한번 풀장에 머리를 박고 물을 마시게 되었다.

"푸핫! 콜록콜록...! 뭐, 뭐야?"

기침을 하면서 눈을 떠보니 미캉을 안은 야미가 풀 한가운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하게 슬라이드 앞에 있으면 안됩니다 아키츠 료스케."

아...그러니까, 나랑 부딪히려는 미캉을 야미가 안고서 피한건가.
코테가와를 붙잡는것만 생각하다보니 다음에 내려올 사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내 잘못이네...

"미안."

"괜찮으세요 료스케 오빠?"

"아아...괜찮아. 멀쩡하다고.
미캉이야 말로 놀라진 않았어?"

"전 괜찮아요. 그런데 코테가와 언니는?"

"코테가와라면 튜브를 가지러 올라갔어.
데리고 올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방금전 엉큼한 짓 때문에 화난걸 풀어줘야 하기도 하니까.

"함께 올라갈까요?"

"아니, 그럴것 까지야...
나혼자 올라가볼께. 사과해야 할일도 있고."

"네?"

갸우뚱하던 미캉은 약간 붉어진 내 뺨을 보더니 아항~ 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살짝 눈을 반개해서 바라보는 미캉의 표정에 주춤하며 변명했다.

"따, 딱히 이상한 의도가 있었던건 아니야?"

"아직 아무말도 안했어요."

"으..."

"...야한짓을 한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야미!? 그게 아니라...
...그, 그럼 다녀올께!"

빤히 나를 바라보는 미캉과 야미의 시선을 피해서 황급히 워터 슬라이드에 오르는 계단으로 갔다.
빨리 코테가와의 화를 풀어주지 않으면 후폭풍이 두려울것만 같았다.

어떻게 사과를 해야하나 고민하면서 계단을 올라가보니 워터 슬라이드 입구에서 코테가와가 튜브를 든채 주저앉아 있었다.

"코테가와!? 무슨 일이야?"

놀라서 다가가는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코테가와는 신음성을 흘리며 답했다.

"그게...다리에 쥐가 난것 같아요 아키츠군."

종아리를 움켜잡고 괴로워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재빨리 다가가 다리를 잡았다.

"다리를 펼테니 손을 잠시 놔줘."

"알겠어요."

쥐가 난 쪽의 무릎을 쭉펴게 하고 코테가와의 발목을 잡아 몸쪽으로 잡아당겼다.
코테가와가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계속해서 발목을 당겼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몇번을 반복하자 종아리에서 일던 경련이 어느정도 사라진것 같아서
코테가와의 다리를 놓고 물었다.

"어때 코테가와? 이제 좀 괜찮아?"

"이제 괜찮은것 같네요.
고마워요 아키츠군."

종아리에 손을 대고 안도하는 코테가와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우선은 풀장 밖으로 나가서 좀더 맛사지를 하는게 좋을거야."
혹시나 걷기 힘들면 말해줘.
업고 내려갈테니까."

"돼, 됐어요.
이정도는 그냥 걸어도 된다구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 손을 잡고 일어선 코테가와를 부축해서 조심스레 워터 슬라이드를 내려왔다.

코테가와를 부축한채로 풀밖으로 나가자 미캉과 야미가 놀라서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코테가와 유이?"

"코테가와 언니,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 다리에 쥐가 나서 그러니까 잠시 쉬면 돼."

"먼저 그늘에 가서 발 맛사지부터 받으라고."

코테가와를 근처 그늘로 옮겨서 발 맛사지 준비를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야미랑 미캉은 얼음팩을 좀 사와줄 수 있을까?"

"아...네. 빨리 다녀올께요."

야미와 미캉이 팩을 사러 떠나고 나도 코테가와의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역시 준비운동은 해야 했구나.
어찌보면 내 탓인가?
야미와 미캉은 괜찮은걸 보면 수영 교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방금전 익숙치 않은 수영을 배우다보니 다리 근육에 무리가 갔었나보다.
약간 양심이 찔리는걸 느끼며 열심히 코테가와의 다리를 맛사지 해주고 있을때 코테가와가 입을 열었다.

"저기...아키츠군."

"응?"

"방금전엔 화내서 미안해요."

"어? 아니, 그건 내가 잘못한거니까 내가 사과해야 할 일이잖아?"

"하지만 원래는 내가 너무 빨리 내려와서 그렇게 된거잖아요?
게다가 부축해주려다 그런게 아니었나요?"

"그렇긴 한데..."

고의가 아닌걸로 다 용서된다면, 세상에 경찰은 필요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 그런 대사로 초를 칠만큼 무심하진 않다.

"뭐, 고의가 아니었다지만 손길은 참 파렴치했죠."

"윽...주의하겠습니다."

"방금전 있었던 일은 지금 맛사지 해주는걸로 변제하도록 하죠.
그런데...맛사지 하는것 힘들지 않아요 아키츠군?"

"괜찮아. 체력에는 자신있으니까 말이지."

"그래도..."

사내아이가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상황이 낯부끄러운듯 코테가와는 살짝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적당히 맛사지가 되었다면 그만하는게 좋을까?

"코테가와. 다리는 좀 어때?"

"으응...이제 괜찮은것 같으니까 맛사지는 더 하지 않아도 좋아요."

편한 표정이 된 코테가와를 보고 수긍하며 물러나자 멀찍이서 미캉과 야미가 돌아오는게 보였다.

"코테가와 언니! 여기 얼음팩 가져왔어요."

"다리는 괜찮습니까?"

"아, 이제 많이 좋아졌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웃으며 고마움을 표한 코테가와를 보고 안도하는 둘에게서 얼음팩을 건네 받았다.

"그럼 이걸 갖고 있다가 필요할때 쓰도록 해.
난 마실거라도 사서 올테니까 야미와 미캉은 코테가와랑 여기서 잠시 쉬고 있어."



셋을 그늘에 쉬게 한뒤, 워터랜드의 매점에 들어가니 다양한 음료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걔중엔 이상한 것도 섞여 있었지만.
오이맛 펩시? 뭐냐 이 갓파들이나 좋아할 법한 음료는...
치르밀? 가루 우유인가? 지금 이런걸 마시긴 그렇고, 몸에 좋다는데 다음에 한번 마셔볼까?

부탁받은 음료를 사서 돌아오는데 4명의 남자가 코테가와들을 둘러싸고 있는게 보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발걸음을 빨리 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아름다운 아가씨들. 나와 함께 멋진 시간을 보내지 않겠어?」
「「「과연 모테미츠 선배! 처음부터 직구다!」」」

모테미츠으으으으으으으!?

「뭐에요 오빠들은?」

「당신은...」

코테가와가 야미와 미캉의 앞에 나서며 경계의 눈빛을 한다.

「오? 나를 알고 있나보군 예쁜 아가씨.
야구부의 에이스이자 장래 프로가 확실한(예정) 이 몸을!」
「「「과연 모테미츠 선배! 이미 사이난의 유명인이시군요!」」」

저 앵무새들 같은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테미츠도 참 한가하네.

「코테가와 언니. 이 사람은...?」

「작년, 여학생 도촬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받은 모테미츠 선배야.」

순간 미캉과 야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뭐, 상대가 도촬범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이겠지.
그런데 모테미츠가 오히려 더 놀란듯한 포즈를 취했다.

「설마...넌 2-A의 코테가와 유이?」

「? 절 아시나요?」

「알다마다! 그 흉포한 아키츠 료스케를 수족 부리듯 한다는 '맹수 조련사'...「그런 별명 몰라욧-!」」

얼굴이 새빨개져서 항의하는 코테가와에게 뜨끔해하며 물러난 모테미츠는 표적을 야미로 바꿨다.

「그쪽의 금발 미녀씨. 나랑 둘이서 리조트에 가지 않겠어?」

「...거절합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

스륵-

포기하지 않고 치근대는 모테미츠를 보던 야미의 머리카락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위험신호? 걷던 것에서 당장 달리기로 전환해 속력을 높인다.
늦지 말아라...!

"안 그래도 마침 좋은 데를 알고 있어서「료스케 킥-!」꾸엑!?"

첨벙~!

「「「모테미츠 선배!」」」

날려간 모테미츠가 빠진 풀장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야구부원들을 보며 한숨을 쉬곤 코테가와 일행을 바라보았다.

"음료수 사왔어. 늦진 않았지?"

"아뇨. 나이스 타이밍이에요 료스케 오빠."

"곤란하던 차에 적절했어요."

"다행이네. 혹시 방해한건 아니지 야미?"

"민머리를 만들어 보낼까 생각했지만...상관없습니다."

스님 머리 만들일 있냐...
삽시간에 관우수염을 기른 하리마 같은 기인이 아닌 바에야 다시 머리 기르려면 한참 걸린다고?

"...어째서 당신이 긴장합니까?"

"아, 아니 반사적으로 말이지..."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가리며 물러났나보다.
어이없다는듯 나를 보던 야미는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수염성인「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니까.」...그렇습니까?"

"아키츠군은 정말로 수염이랑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니까 말이죠.
처음 만났을때 이후로 머리는 쭉 저 스타일이었다구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건 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잖아?
머리스타일이 바뀌지 않는건 그거야.
「2차원 미소녀의 대부분은 갈아입을 옷따윈 없다는 법칙」 같은거.
왠만해선 머리스타일도 처음 그대로를 유지하는게 대부분이잖아?
타○의 대모험에서 마암은 머리 모양을 바꿨지만.

"가끔은 다른 머리 스타일로 바꿔 보는건 어때요 료스케 오빠?"

"...빗자루 머리는 어떨까?"

쟝 피에○ 폴나레프씨나 니카이○ 베니마루씨처럼 말이지.
같은 금발에다가 양아치스러운 느낌도 있고.

"좀 보통인걸로 말이에요."

"센스 없어요 아키츠군."

"으...내 머린 이걸로 충분히 괜찮으니까, 다들 이만 음료수나 마시라구~"

사온 음료수를 하나씩 건네주면서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했다.
다음부턴 겁없이 꼬이는 헌팅남들이 없기를 바라며.



음료수를 마시며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사이난 워터랜드 이벤트가 개최되겠습니다.
참가는 4인1조로 진행될 예정이며 1,2,3등 외에도 추첨을 통해서 많은 분께 소정의 경품이 제공되오니
가족과 함께 오신 분이나, 커플분, 친구들과 함께 오신 분들은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벤트?"

"최근에 오픈해서 여러가지 행사를 많이 하나봐요.
저번엔 인기 아이돌인 키리사키 쿄코도 게릴라 콘서트로 왔다던걸요?"

"그래?"

"그럼 적당히 쉬었으면 이벤트나 보러 갈까?"

"이벤트라...흥미롭겠군요."



공지된 장소로 가보니 풀장위에 부유물로 이루어진 무대가 세워져 있었다.
무대와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해적선 처럼 꾸며진 모형배가 있었고,
무대와 해적선까지 이어진 풀장 주변에는 모형 대포들이 놓여있었다.
저게 이번 이벤트 장소인가?
하나 둘씩 관객들이 모여 무대 근처를 메우고 곧이어 사회자로 보이는 여성이 무대위로 올라왔다.

「오늘도 저의 「사이난 워터랜드」를 이용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벤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4인1조로 진행되는 이벤트의 이름은 「피터팬」입니다.」

그것 참 메르헨틱한(동화적인) 이름이군요.

「4인은 각각 피터팬, 팅커벨, 웬디, 릴리(인디언 소녀) 역을 맡습니다.」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1. 게임 시작시에 피터팬과 팅커벨은 육지에, 웬디와 릴리는 해적선에 있다.
이벤트시 좌우에서 대포알이 날아온다.
웬디와 릴리를 육지로 무사히 옮기면 성공이다.
가장 빨리 구출에 성공한 순으로 등수가 매겨진다.

2. 피터팬은 네모모양의 큰 수영보드 하나를 받는다.
수영보드 위에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할 수 있다.
바다에 빠져도 괜찮고, 좌우에서 날아오는 대포알을 맞아도 실격처리 되지 않는다.

3. 팅커벨은 항상 피터팬과 동행해야 한다.
(사회자 왈, 「항상 수영보드 위에 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죠?」)
날아오는 대포알을 방패로 막을수 있다.

4. 웬디와 릴리는 피터팬과 팅커벨을 따라 해적선에서 육지까지 무사히 빠져나와야 한다.
대포알에 맞으면 실격이다.

5. 팅커벨, 웬디, 릴리 셋중 한명이 바다에 빠지면 실격이다.


「이상이 개략적인 진행방법입니다.
그나저나 실제로 웬디랑 릴리가 하는 역은 같은데 역할을 나눈 의미를 모르겠어요.
그냥 이벤트 제목이 피터팬이라 괜시리 생색내는걸지도 모르죠.」

어이? 사회자가 그런말 해도 되는거야?
황당한 내 심정과는 반대로 객석에서 잠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팁을 드리자면 웬디와 릴리역은 어린아이나 여성분들께 맡기시는게 좋을꺼에요.
제공되는 수영보드를 시험해봤는데 성인 남성 둘정도는 간신히 버티더라고요.
팅커벨은 항상 피터팬과 동행해야 하니까, 결국 수영보드에는 팅커벨과 다른 한명만 탈수 있겠죠?
팅커벨, 웬디, 릴리 세명이 합쳐서 성인남자 둘의 무게보다 가볍다고 생각하신다면 셋이 함께 타는걸 도전해 보시길 바랍니다~」

거짓말이다. 저건 진짜 거짓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생 평균 체중도 40킬로그램은 넘는다고?
세명이 전부 어린아이들이라서 셋이 함께 탈수 있다고 쳐.
그런데 그상태에서 대포알 피하랴, 막으랴 수영보드 위에서 왔다갔다 한다면 분명 수영보드가 뒤집어지거나 가라앉는다.
'물위에 가만히 떠있을 때' 성인 남성 두명 무게를 '간신히' 버틴다고 했으니까.
그런 판국에 세명이 함께 타라는건 그야말로 함정.
혹시 저 사회자 일부러 저러는건가?
체중에 자신이 있다면 한번 승부해봐라! 이런거?

주변을 바라보니 아이들 동반의 가족들은 딱히 고민하는 모습은 없었는데,
애인동반이나 여학생들끼리의 집단에선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릴만큼 고민하고 있다.
아니, 아무리 세명타기를 고민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라니까.
가만히 떠있는거라면 몰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가라앉는다고?
가라앉으면 공개적으로 아가씨들의 마음이 브레이크 한다.

이 이벤트는 아무래도 1명씩 차근차근 옮기는게 성공률이 높아 보였다.
빨리 구출한 순서대로 순위를 매기기 때문에 1위를 하려면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겠지만...
50미터를 한번 왕복하는것과 두번 왕복하는건 메꿀수없는 시간차가 존재하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해적선 쪽을 보고 있으려니 사회자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만으로 이해하지 못하신 분들도 계실테니, 간단하게 연습시합을 해보겠습니다.
이곳에 계신 멋진분들 중에 시범을 보여주실 지원자 있으신가요?」

아직까지 고민하기 때문인지 연습시합이라 힘빼기 싫은건지 소심하기 때문인지 지원하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사회자는 잠시 기다리다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 분들이 많으시군요?
음, 그럼 사회자인 제가 한번 뽑아볼께요. 거기 파인애플 머리에 투피스를 입은 예쁜 꼬마 아가씨~
잠시만 나와주시겠어요?」

"에? 저, 저요?"

미캉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사회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거기 꼬마 아가씨와 같이 오신 분들께서도 함께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어쩌죠 아키츠군?"

"어쩌긴. 이것도 나름 즐기는 법이잖아? 한번 가보자고."

"그럼..."

엉거주춤 일어난 미캉을 뒤따라 나와 코테가와, 야미가 무대로 나가자 사회자가 놀랐다는듯 말했다.

「휘유~ 언니들도 예쁘네 꼬마 아가씨? 그리고...」

차례로 시선을 옮기던 사회자는 내쪽을 바라보다 잠시 움찔하더니 이내 넉살좋게 웃었다.

「후훗~ 아버님도 참 터프하게 생기셨네요~」

"...오빠입니다."

「아... 이런~ 제가 실례했네요.
실례지만 나이가?」

"열일곱 입니다."

「에엥?」

잠시 갸우뚱 하던 사회자는 폭소하면서 내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두드려댔다.
아야야! 이 아가씨 굉장히 대범해?

「아하하하~! 그런데 왜이렇게 겉늙었어?
우리 아빠 친구라고 해도 믿겠다~!
이정도면 피터팬이 아니라 후크선장이잖아?」

발돋움을 해서 내 목에 팔을 걸며 농을 건네는 사회자의 모습에 관객석에서 폭소가 일어났다.
쇼맨십이 뛰어난 사회자 같다.
조용한 분위기를 박살내는게 장난 아니네요.
더불어 나의 유리같은 마음도 박살.

「어? 피구왕 형이다!」

「아, 공원의 수염성인!」

「저쪽은 그때 그 꼬마 아가씨 아냐?」

헐...1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탈의실에서 만났던 히로시라는 사내아이의 목소리도 얼핏 들린것 같고.

객석에서 나와 미캉을 알아보는 관객들의 모습에 사회자가 휘파람을 불렀다.

「이거~ 어쩌다보니 제가 꽤나 유명한 분들을 초대하게 되었나보군요?
그럼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역할 분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내가 피터팬, 야미가 팅커벨, 그리고 코테가와와 미캉이 웬디와 릴리 역을 맡기로 했다.

먼저 야미를 수영보드에 태우고 내가 물에 뜬채로 수영보드를 밀며 해적선을 향해 헤엄쳐 나가자
숙지한대로 양쪽에서 대포알(공)이 날아왔다...인데?
...대포알이 무지하게 커!?
작게는 배구공 크기에서 크게는 지름이 1미터는 되어보이는 대포알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특히 1미터 짜리 공, 저런걸 방패로 막았다간 그대로 밀려나서 바다에 빠진다고!?
속였구나 사회자!

"...요격하겠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뭐?"

쉬익-!

순간 야미의 머리칼이 무수한 칼날로 바뀌며 날아온 대포알들을 반토막내기 시작했다.
「오오오~!」하는 감탄성이 관객석으로부터 들려오지만 이래도 괜찮은거야?
이거 나중에 대포알값 물려달라고 하는건 아니겠지?

"야, 야미? 그러면 수영장측에 폐가 아닐까?"

"?"

「'팅커벨'씨~! 대포알은 다시 써야 하니까 자르는건 제발 그만둬주세요~!」

안색이 나빠진채로 부탁하는 사회자의 말에 야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날을 주먹으로 바꾸어서 대포알들을 쳐내었다.

「멋지다 언니~!」
「깜짝쇼인가?」
「박력있잖아~!」

「...방패는 어쩌고요?」라는 사회자의 중얼거림도 들리지만...좋은게 좋은거지.



대포알들의 위협을 피해 코테가와랑 미캉이 있는 해적선에 무사히 도착하자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으응~ 중간과정이 조금 이상했지만 드디어 해적선에 도착한 피터팬과 팅커벨!
과연 무사히 웬디와 릴리를 구할수 있을까요?」

코테가와와 미캉이 가까이 다가오자 물었다.

"이제 한명씩 타고 가면 되겠지?
누구부터 출발할까?"

"미캉 네가 먼저 출발하도록 해."

"그럴까요?"

"타십시오 유우키 미캉."

야미가 내민 손을 잡고 조심스레 수영보드에 미캉이 올라서자
수영보드는 한차례 기우뚱하더니 제대로 균형을 잡았다.

"역시 이 수영보드...위태위해 하네요."

"정말로 두명이 적정용량이로군요."

"그럼 미캉 먼저 데려다주고 돌아올께.
코테가와는 좀있다가 다시「아니~ 피터팬이라면 거기선 좀더 대범하게 행동해야죠~!」...?"

응? 뭔소리래?

야미와 미캉을 실은 수영보드를 밀며 헤엄을 치려는데 갑작스레 걸어온 사회자의 말에 잠시 멈춰 무대쪽을 바라보았다.

「그냥 둘다 한꺼번에 구해서 가죠?」

「힘내 피구왕!」
「아가씨 셋쯤은 가볍게 데리고 가라고!」
「사내아이잖아! 그정도는 가볍게 해치워~!」

사회자의 선동에 호응하듯 관객들이 힘차게 응원을 보내왔다.

...농담이지?

방금전 수영보드 흔들리는거 못봤어?
셋이 타면 가만히 있을 땐 괜찮을지 몰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십중팔구 가라앉는다고?

「수영보드가 믿음직스럽지 못해 걱정인가요?」

걱정 안되게 생겼습니까 사회자 누나?

「수영보드를 믿지마세요.
수영보드를 믿는 저를 믿으세요.」


"뭔소리야!?"

생뚱맞은 소리에 버럭- 소리를 지르고 코테가와를 바라봤다.
관객들의 응원에 당황하던 코테가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시, 싫어요!
안타요! 절대로!"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코테가와를 보자 동정심이 들었다.
이해는 한다. 지금 탔다가 수영보드가 가라앉으면 공개적 망신이니까.
자기탓이 아니라지만 충격을 받고 갑작스레 다이어트를 시작할수도 있고,
그 이전에 부끄러워 죽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한번에 구해오는데 성공하신다면 소정의 상품을 드리겠습니다~
자자~ 힘내세요~!」

「어이~! 경품까지 걸렸다고!」
「연습시합인데 편하게 해보라구!」
「필살기를 보여줘 피구왕!」

여기까지 응원을 받으면 더이상 물러설수 없게 된다.
관객들 김새게 만들면 민망해서 고개를 들수가 없고.
하지만 코테가와에게 탑승을 강요하자니 후환이 두렵다.
이렇게 되면...

"저기 코테가와..."

"안들려요! 안들려!"

"...잠깐만 진정해."

귀를 막고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코테가와를 달랬다.

"야미랑 미캉도 잠시 해적선으로 다시 올라와줄래?"

"? 그러지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료스케 오빠?"

해적선으로 올라선 야미에게 물었다.
기억하기론 하얀 날개를 꺼내서 날아다닐수 있었던것 같은데...

"야미. 변화능력중에 비행기능도 있지?"

"날개를 만들어서 날수는 있습니다만."

"혹시 미캉을 안고도 날 수 있어?"

"네."

"그럼 야미는 내가 해적선을 출발할 때 미캉을 안고 날아와줘.
난 코테가와를 데리고 갈께."

"대포알은 어떻게 하고요?
수영보드를 타고 가는 속력으론 맞으면 실격이라고요."

걱정하는 코테가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굳이 수영보드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잖아?"

"네?"

의아해하는 셋을 보며 씨익- 웃었다.

"혹시 「리퀴드 마운티니어링」이라고 들어봤어?"



「잠시 대화를 나누는 피터팬과 웬디 일행.
과연 기대에 부응해 줄것인가?」

그래, 충분히 응해 줄테니까 걱정말라구요.

"그...아키츠군?
정말 믿어도 되는거죠?"

"괜찮다니까. 예전에도 성공했었다고."

"그, 그럼 잘 부탁해요."

"그럼 잠시만 실례~."

"꺄앗?"

「오오오~! 대담하네요! 피터팬이 웬디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습니다!
뭔가 하려는걸까요?」

「「「꺄아~!」」」
「「「우우~!」」」

응원소리와 야유소리가 뒤섞여 들리는 가운데 코테가와를 안아들고 물었다.

"준비됐지 야미, 미캉?"

"물론입니다."

"잘부탁해 야미짱."

미캉을 뒤에서 껴안는 상태로 선 야미를 보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육지로 설정된 무대까지는 대충 50미터.
한번에 간다!

"그럼 출발!"

"네."

- 변신!

순간 야미의 등에서 새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몸을 가릴만큼 거대한 날개가 펼쳐지며 야미는 미캉을 안고 날아올랐다.

「오오~! 이건 뭔가요 대체?!
팅커벨이 날개를 단채 날고 있습니다.」

「천사 언니다~!」
「날개달린 팅커벨?」
「진짜 요정인가!?」
「꺄아~ 예뻐~!」

「말씀드리는 순간 피터팬, 웬디를 안고 물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대로라면 물에 빠지게 되는데 뭔가 작전이 있는걸까요?」

"으라차아! 간다앗!"

무섭게 질주하는 기세 그대로 물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팟-! 팟-! 팟-!

발이 내딛어진 수면에 물이 튀어오르면서 허공에 비산했다.
튀어오른 물방울이 반짝이며 빛나는 가운데 내 발은 어느새 물위에서 다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헛? 저게 뭔가요?
지금 물위를 달리고 있는건가요?」

「소금쟁이?」
「등평도수 아냐?」
「동영상으로만 봤던 '물위를 달리는 스포츠'?」
「실제로 가능한거였어!?」

'리퀴드 마운티니어링(liquid mountaineering)'
물위를 달리는 스포츠.
무협소설속에선 등평도수(登平渡水)라고 불린다.
물위에 한걸음을 내딛고 그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한발을 내딛는다는 단순한 사고에서 출발한 시도.
진위 여부를 놓고 말이 많았었지만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억속에서는 만화같다고만 생각된 일이 여기선 가능하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펑-! 펑-!

사람들이 놀라던 말던 나는 날아오는 대포알을 피하기에 바빴다.
야미야 미캉을 안고 대포알이 닿지 않는 높이까지 올라간듯 해서 안심이지만,
내가 안고 있는 코테가와가 대포알에 맞으면 그대로 아웃이니까.
그러던중 내가 달리는 방향으로 날아오고 있는 대포알들이 보였다.
달리는 경로상에 물위에 둥둥 떠있는 대포알도.
저거라면...

물위에 떠있는 대포알에 가까워지자 발을 내딛어 대포알을 밟고 힘껏 뛰어올랐다.

탓-!

"꺄아악!?"

높이 뛰어오르자 방금전까지 내가 서있던 곳을 대포알들이 지나가는게 보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곤 이제 눈앞에 가까워진 육지에 발을 내딛었다.
이윽고 야미도 미캉을 안은채 조용히 육지에 상륙하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휘익~!」
「최고다 너희들~!」
「물위를 달리다니 좋은구경 했다구!」
「천사 언니~!」

「예정과 달리 독특한 경기진행을 해주신 네분께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특히 날아오른 팅커벨과 물위를 달린 피터팬은 정말 인상깊었네요.
거기에 대한 질문을 한번 드리고 싶은데요,
팅커벨에게 묻겠습니다. 그렇게 날수 있었던 비결이 뭐죠?」

"...10살이니까요."

「네?」

당황해하는 사회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좀 당황한지라
야미에게 속삭여 물었다.

"(어이 야미? 대체 무슨 의미야?)"

"(지구의 책에서 10살이면 날 수 있다고 읽었습니다.)"

아즈○가 대왕?
지구에 대한 이상한 지식이 쌓이고 있는거 아냐?
그냥 우주인이니까로 답변하거나,
적어도 새의 깃털을 이용해 하늘을 날았던 다이달로스와 이카루스 얘기가 나올꺼라 생각했다고.

「뭐...아무튼. 그럼 이번엔 피터팬에게 묻겠습니다.
방금전처럼 물위를 멋지게 달릴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요?」

"...튼튼한 육체?
그리고 내딛은 걸음이 빠지기 전에 다른 한발을 내딛는게 전부랄까요?"

나름대로 정석적인 대답이었는데 사회자로서는 약간 불만이었나보다.

「에에~ 재미없게 그러지 마시고~
비결은 바로 그 수염아닌가요?」

「「「수염성인! 수염성인!」」」

관객중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 별명이 퍼진건 알겠는데,
수염이랑 이게 뭔 상관이래?

"(이스라엘의 삼손도 힘의 근원이 머리칼이라고 했잖아요?
뭔가 재밌는 얘기로 말좀 맞춰달라고요?)"

익살맞게 속삭이는 사회자와 들뜬 관객들을 보건데
분위기에 맞춰주는게 재밌을것 같았다.

"그러니까 발바닥에 참기름을 열심히 바르면..."

「아하, 그런가요?...라고 할리가 있겠냐 이자식아!?
나더러 해님달님의 호랑이꼴 나라고!?」

"으악!?"

나더러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
이 누님 완전 놀려먹는걸 즐기고 있어?
싱긋 웃으면서 등짝을 후려치시는 사회자 누나에게 쩔쩔매는걸로
한동안 관객을 웃기고는 축하인사와 함께 경품을 받고 다함께 무대를 내려왔다.




그리고 그 경품이 문제인데...

"......"

"엿보면 가만두지 않겠어요?"

"...네."

"들어가자 야미짱, 미캉."

"네~" "예."

"......"

사이좋게 욕실로 들어간 셋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른 방을 은은하게 밝히는 불빛과 화려한 실내장식들.

조용히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손에 들려 있는건 낮에 경품으로 받은 물건.

「4인 가족용 1일 호텔 이용권」

그래서 4인1팀이었냐.
입맛을 다시다가 숙박권을 내려놓았다.



무대를 내려온 뒤 사이난 워터랜드 내의 「고급호텔 1일 이용권」을 확인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우리는
저녁도 가까워졌기에 식사도 할겸 오늘 바로 이용권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평소에 맛보지 못했던 호화 요리를 대접받고 만족감속에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잠자리 문제로 잠시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벽쪽에 배치된 커다란 더블베드 두개.

요컨데 가족용 방이니까 엄마아빠 둘이서 한침대, 아이들 둘이서 한침대 이렇게 쓰라는 건가?
더블베드 하나를 셋이 쓰기엔 좀 비좁아 보였고
약간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코테가와도 신경쓰였기에
차라리 내가 소파에 자는게 어떨까 제안했지만 만류받았다.

"이불도 큰것 두개뿐인데 밤에 어쩌려고 그래요?
여름감기는 조심해야 한다구요."

"하지만...신경쓰이지 않아?"

"물론. 허튼짓하면 죽어요."

"쿨럭..."

"안심하십시오 코테가와 유이.
이상한 낌새가 있다면 단숨에 날려버릴테니까요."

"자자, 야미짱도 코테가와 언니도 진정해요.
료스케 오빠도 그렇게 서먹하게 굴지 말고요."

잠시 이야기가 오간 후 침대에서 서로간에 조금씩 간격을 두고 눕는걸로 합의를 보았다.



방금전까지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동안 어느새 목욕을 마친 셋이 욕실을 나왔다.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가운을 입고 나온 세명은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끝난거야?"

"네. 이젠 아키츠군이 들어갈 차례에요."

"그럼..."

욕실에 들어가자 커다란 욕조와 함께 1인샤워실이 배치되어 있었다.
수영장에 다녀왔으니 소독약도 신경쓰이고...깔끔하게 목욕으로 할까.

목욕을 끝마치고 가운을 걸친채 나오자 방금전 목욕 가운을 입은 그대로 침대에 올라가 있는 코테가와, 야미, 미캉이 보였다.

"? 그 차림으로 자는거야?"

"딱히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러고보면 자고 간다는 건 계획에 없다보니 잠옷같은걸 가져오진 않았지.
나도 오늘은 가운으로 자는게 좋겠네.

왼쪽에 있는 더블베드에는 코테가와가, 오른쪽 더블베드에는 야미와 미캉이 앉아 있었다.
그럼 난 왼쪽 침대에서 자는건가?
왼쪽 침대로 가서 걸터앉자 코테가와는 경고했다.

"다시 말하지만...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안합니다. 그런데..."

나와 코테가와가 있는 침대와 야미와 미캉이 있는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과 미묘하게 바뀐것 같은데...

"...왠지 두 침대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것 같지 않아?"

1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이 놓아진 두침대를 보며 물었다.
들어가기전엔 이것보단 좀더 넓었던것 같은데 말이지.

"물론이죠. 그렇게 옮겼으니까요."

"어째서?"

"그야 혹시나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키츠 료스케."

[코테가와-나] [야미-미캉] 순으로 침대에 누워서
혹시나 내가 야한 짓을 시도할땐 야미가 나를 저지할수 있다는 말이었다.

"료스케 오빤 신용이 없네요..."

난처한듯 웃는 미캉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 인망이 없네요 나는.
아니, 이성을 경계하는걸론 당연한 반응인가?

여동생 모에설에다 초중고 연령을 안가린다는 소문과 네자리수 애인설.
눈빛만 마주쳐도 임신시킨다고 여기지 않는것만 해도 어디야...
아니, 고마워요 진짜.
...훌쩍.



"그럼 모두 잘자~"
"잘자요."
"좋은꿈 꾸세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저마다 인사를 마치고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덮곤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의 불을 껐다.
딸깍 소리와 함께 방은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고 있었고
옆방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옆방 사람들은 잠도 없나보네요..."

"그러게...방음도 좀 안되는것 같기도 하고..."

살짝 불평을 늘어놓던 코테가와에 동의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좀더 기다려보고 너무 시끄러우면 호텔 직원에게 연락을 넣던가 해야지.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으려니 갑자기 음악이 뚝 하며 멎었다.
옆방도 이만하고 자려는 건가?
이제 편히 잘수 있겠군 하며 안심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벽너머에서 미묘한 신음성이 들려왔다.

「아흣...」
「...좋아해 사치코.」
「나, 나도...! 하으읏, 아앙...」
「허억...허억...」
「조, 좀더 강하게!」
「이, 이렇게?」
「아으아아, 아앙! 읏, 아응...! 읏...! 키, 키스해줘...」
「사치코!」
「우웁, 아아앙! 응! 흑! 기, 기분좋아...」

「「「「......」」」」

옆방에서 들리는 커플로 생각되는 둘의 신음소리에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생방송으로 에로씬을 듣는거잖아!?
거북한 침묵이 내리앉은 가운데 옆방의 소리만이 벽을 넘어 전해져왔다.

문득 코테가와쪽을 바라보자 코테가와는 등을 돌린채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파, 파렴치해...!"

중얼거리면서 신음하는 코테가와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저런 소리를 듣고 태연히 있을 여학생은 없겠지.
...천연소녀 라라나 에로콤비인 리사와 미오라면 태연할지도 모르지만.

야미랑 미캉쪽은 잘자고 있나 싶어서 반대편 침대를 돌아보니
달빛을 받은 야미의 금빛 머리카락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이 야미, 머리카락이 움직이고 있다고?"

쉭-!

"으힉!?"

허공에 휘둘러진 위협적인 머리카락의 움직임에 깜짝놀랐다.
경고성 공격인듯 빗나간 머리카락을 거두며 야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상한짓 하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야미짱~! 진정해..."

아무래도 야미는 약간 패닉상태에 빠진것 같았다.
경계심이 증가해서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려는 야미에게 미캉도 당황한듯
자신의 빨개진 얼굴을 수습하지 못한 상태로 야미의 어깨를 잡고 달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해야 이 난감항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요?


한동안 계속되었던 패닉상태는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가 잦아들고서야 끝났다.
가만히 누워있었는데도 왠지 피로해...
얼굴이 빨갛게 된 우리 넷은 한동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다가 그대로 조용히 잠들었다.




"흑..."

"......"

"흐읏..."

"...?"

잠을 설치던 중 귓가에 들려온 신음소리에 눈이 떠졌다.
괴로운것을 참는듯한 소리에 무슨일인가 싶어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코테가와?"

"아, 아키츠군? 깬거에요?"

"아니...신음소리가 들리길래 뭔가하고..."

당황한 코테가와의 얼굴을 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코테가와는 침대에 앉아 양손으로 자신의 종아리를 감싸쥐고 있었다.

"설마 다시 쥐가 난거야?"

"...예. 자다가 갑자기 쥐가 나서..."

"맛사지 할테니까 잠시만 다리를 펴줄래?"

"...알았어요."

스탠드 불을 키자 이마에 살짝 땀이 배인 코테가와의 모습이 보였다.
코테가와의 다리를 펴고 정성껏 종아리를 맛사지하기 시작했다.

"아읏...!"

맛사지를 하면서 통증을 느낀건지 코테가와는 입을 가리며 신음소리를 죽이려고 애썼다.
방금전 내가 소리를 듣고 잠이 깬걸 의식한건가.
은은한 조명빛 아래에서 야미와 미캉을 깨우지 않으려고
붉어진 얼굴을 한채 입을 막고 눈물을 글썽이며 신음을 죽이는 코테가와.
...왠지 모르게 배덕감이 무지 솟는데요 코테가와씨?
코테가와가 의도한건 아니지만「응응...!」거리며 틀어막은 입에서 새어나오는 코테가와의 소리에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져 갔다.



이윽고 간신히 다리 경련이 풀리자 코테가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고마워요 아키츠군."

"뭘~. 아무튼 여유가 된다면 더운물로 한번 더 목욕하는게 좋을거야.
근육을 풀어줘야 하거든."

"그럼 전 잠시 씻고 잘테니까 아키츠군 먼저 자도록 해요."

"그럴께."

코테가와가 목욕탕으로 들어간 후 나도 이만 자려고 스탠드 불을 끄려다가
야미와 미캉이 자고 있는 옆 침대로 눈이 갔다.

자기전 이불을 걷어낸 상태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이불은 침대 아래쪽에 놓여 있었다.
이불없이 가운만 입고서 자고 있는 상태인데...
...가운이 위로 밀려 올라갔네.
......무념.

몸을 뒤척이느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가운이 밀려올라가면서
야미랑 미캉은 배꼽까지 드러난 상태였다.

둘의 무방비한 모습도 범죄였지만
가뜩이나 후지야마 볼케이노틱한 내 아드님의 기세도 충분히 범죄였다.
자중하자 아드님아...

둘의 모습을 그대로 놔두면 여름감기 걸릴것 같아 걱정이었지만
내가 가운을 직접 내려 주긴 좀 위험해 보였기에
아래로 내려간 이불을 가만히 끌어올려서 가슴께로 덮어주었다.
얼굴을 마주한채로 사이좋게 잠이 든 두사람의 모습을 내려다 보면서 작게 말했다.

"잘자, 둘다..."

-

...?
설마 깬건 아니겠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안들렸는데 기분탓인가.
살짝 갸웃 하다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스탠드 불은 코테가와가 잘 때 꺼주겠지...




짹- 짹-

"으음...응?"

창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의식이 각성하며 눈을 천천히 떴다.
무언가가 머리를 감싸고 있는 감각과 얼굴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흐릿한 초점을 억지로 맞춰 눈을 뜨자
양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 가슴에 껴안은 상태로 잠에 빠진 코테가와가 보였다.

...위험.
상황적으로도 위험하고
무엇보다도 내 이성이 위험.

살며시 빠져나갈까 했는데 머리가 꽉잡힌 상태라 억지로 풀어내면 깨울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저기...코테가와?"

"으응...
...응?"

코테가와는 한손으로 눈을 비비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시야가 정상이 아닌지 아니면 잠이 덜 깬건지 멍한 얼굴로 있던 코테가와는 툭 입을 열었다.

"...아키츠군?"

"아...좋은아침 코테가와."

"......?"

"코테가와?"

"...꺄아아아!"

퍽-!

화들짝 놀라면서 밀어내는 코테가와에 의해 나는 두 침대 사이의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아야야..."

"미, 미안해요!
그러니까 이건 인형인줄 알고...!"

인형?
평소에 고양이 인형이라도 안고 자는건가?

엉덩방아를 찧은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데 갑자기 시야를 금발 머리카락이 가득 메웠다.

터억-

"비명소리를 듣고 깨어났습니다만,
괜찮습니까 코테가와 유이?"

내 몸에 걸터앉은채로 칼날로 변형시킨 머리카락을 들이댄 야미가 코테가와에게 물었다.
방금전 비명에 미캉도 놀랐는지 침대에서 일어나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무슨일이에요 코테가와 언니?"

"괘, 괜찮아요!
아무일도 아니었으니까...!
호텔에 묵었던걸 깜빡해서 놀랐을 뿐이에요."

"그렇습니..."

"야미짱?"
"야미짱 왜그래?"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침묵한 야미에게 코테가와랑 미캉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침묵하던 야미는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키츠 료스케..."

"으응?"

"...지금 제 엉덩이에 닿은 물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상황을 확인하자.
방금전 코테가와에게 밀려나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내 가운이 살짝 벌어졌다.
그 직후 야미가 내 위에 올라탔다.
문제는 어제 야미의 가운은 배꼽까지 말려올라간 상태였다는 것.

...어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가운을 내려줬어야 했어...
그랬다면 이런 트러블따위, 생기지 않았을텐데.
아침부터 쌩쌩한 아드님의 힘찬 기세와 더불어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 속에서
불붙은듯 빨간 야미의 굳은 얼굴을 보며 말을 내뱉었다.

"...생리현상?"

"아, 아키츠군?"

"료, 료스케 오빠?"

당황한 표정의 코테가와랑 미캉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야한짓은..."

세상만사, 체념이 중요합니다.

"싫습니다!"

퍼어억---!

"꺄울~!"




"여기 체크아웃이요."

"네. 저희 호텔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정말 격렬하시더군요."

"...뭐가 말입니까?"

"에이~ 남자들 사이에 부끄러워하시긴~.
말그대로 늑대같은 소릴 들었는데요?"

"......"

얼굴에 멍이라도 들었다면 이런 소린 안들었을텐데.
원망스러워 하면 안되는데 이럴땐 튼튼한 몸이 원망스러워 진다...

체크아웃을 하는동안 옷을 갈아입고 내려온 코테가와, 야미, 미캉을 본 호텔 종업원들에겐
'색골'이라느니 '절륜'이라느니 '짐승'이라느니 '범죄자'소리까지 들었다.
거기! '원조교제'라고 말하지마!




다음날 길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에겐 「악마의 열매」를 어디서 구했는지 질문받았다.
「수염수염 열매」를 먹은 피구왕」
물위를 뛰어다니는 이유가 악마의 열매를 먹어서 수영을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랬으면 애초에 수영도 못하고 가라앉는게 아닌가 물어보자,
'수영보드를 잡고 헤엄'쳤으니까 가라앉기가 애매했다고 반박했다.
나중에 가선 내가 농담으로 말한 '발바닥에 참기름 바르고 물위를 달린다'는 얘기까지 진실미를 띄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으니까 물위를 달릴때 바르고 달린다고 하던가?
분위기 따라 해준 농담이 진짜가 되어 돌아와 버렸다.
내 입이 방정이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중학교때의 악명은 줄어가는것 같은데
갈수록 이상한 소문이나 별명은 늘어만 가는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
동생의 닥달로 쓰게된 18편-_-;
늦어서 죄송합니다=_=;;

늦었지만 새해복 많이들 받으시고
꾸준히 써보도록 노력 하겠습니다m(_ _)m;;;

새해 소망은 야한거 없이 써보는 겁니다.

다음편은 원래라면 조연 아가씨의 이야기일 예정이었지만
연재가 늦어진 관계로 본편 71, 72의 학교 붕괴편(라라vs야미)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코테가와가 수영복을 새로 산 이유 : 상의가 맞지 않게 되었습니다=ㅅ=a
코테가와 : 좀 힘들어졌네...

이야기 관련 이미지들

코테가와, 야미, 미캉의 수영복

코테가와 수영복

야미 수영복

야미와 미캉의 수영복

미캉 수영복 서비스컷

야미 흰날개

기타 이미지

사이난 워터랜드

우주인이 물놀이를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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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 코테가와야말로 파렴치한 몸매를...

코테가와 당황

모테미츠 삭발씬

여고생 아이돌 키리사키 쿄코

리코와 미캉의 어머니 - 유우키 링고(패션 디자이너)


p.s.'기연담 외전(일상편)'은 언제 나오려나?
'행복한 결말을 바래서'는 언제 나오려나?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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