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7




"오랴아아아!"

강다리가 내지른 뼈다귀 봉을 피해 뒤로 몸을 뺐다.

beep-!
퍼억!

"!?"

전자음과 동시에 급격히 늘어난 뼈다귀 여의봉이 복부를 강타했다.
타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와중에 견제를 위해 손을 들어 강다리를 겨눴다.

"다-크 파이,「빡!」큭!?"

내 손동작을 보자마자 강다리는 내지른 봉을 돌리며 내 손목을 후려쳤다.
건틀릿 너머로 전해지는 얼얼함에 황급히 강다리와의 거리를 벌렸다.

"여의봉인가? 꽤나 재미있는 무기를 갖고 있군 자네는?"

"원래는 턱을 노리고 있었는데 말이오."

"하! 그것 참 무서운 말이로군. 읏!?"

강다리와의 거리가 벌어지기 무섭게 구름을 탄 드라고가 화염을 내뿜었다.
드라고의 불을 다크 파이어로 상쇄하다가 털이 그을리는 냄새에 무심코 눈살을 찌푸렸다.

드라고가 내뿜은 불길이 멎고 싸움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었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들은 강다리와 드라고 두명뿐.
호치는 알라딘을 업고 똘기랑 미미, 오타마와 함께 안전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래봤자 싸움의 소리가 다소 들릴 정도의 거리였지만.

네 명이 안전하게 이동할 때까지 내 발을 묶는다는게 강다리와 드라고의 목적이었으니, 둘의 목적은 달성한거려나.
봉을 겨누고 선 강다리,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드라고를 번갈아보며 농을 던졌다.

"...원래 이야기대로 무대가 사막이었으면 위험했겠어.
그렇잖아도 더운데 이런 화염까지 받는다면 통구이가 되었겠지."

한차례 기침을 하곤 손을 휘저으며 주위의 열기를 내쫓는 내 모습에 강다리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다르구려 드라고공."

"음? 무엇이 말입니까?"

"사령사천왕의 실력은 드라고공과 호치공 둘을 압도할 정도라 하지 않았소?
비록 그게 두분의 역량을 온전히 내보이기 힘든 실내에서 이뤄진 싸움이었다 해도 말이외다."

"그랬지요. 첫 싸움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결코 방심해선 안되는 상대입니다."

"하지만 지금 저자는 사령사천왕의 격에 맞는 강함도, NINJA라고 할 정도로 요사스러운 술법도 보여주지 않고 있잖소?
이래서야 평소처럼 거대한 덩치를 앞세워 덤벼드는 사령몬스터 쪽이 더 위협적인게 아니오?"

눈앞에서 상대를 과소평가하는건 좀 그만둬주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깔보이는것도 좋지 않으니 다소는 자기 변호는 해둘까.

"NINJA 인술은 알라딘의 몸을 빌리고 있을 때 충분할 정도로 시험해 봤으니 구태여 싸움에서 쓸 것도 없어.
그리고 내 임무 중엔 너희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 것도 있다구.
처음 접한 꾸러기 수비대를 상대하는 데에는 좀 더 신경을 써야한단 말이지."

내 말에 강다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여유만만한 발언은 귀공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외까?
정보수집 운운 이전에...밀리는 상황에서도 검을 쓰지 않다니, 우리도 어지간히 얕보이는 모양이구려."

빈정거림이 섞인 강다리의 말에 마침 잘됐다 싶어 되물었다.

"...너희를 과소평가했다는건 인정하지.
하지만 얕보고 있는건 너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뭐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강다리와 드라고의 물음에 손을 들어 저만치 멀찍이 물러나 있는 미미 일행을 가리켰다.

"싸우기 전에 미미가 말했지.
'오타마와 알라딘을 보호하기 위해서' 똘기를 싸움에서 제외한다고."

실은 고양이 공포증 탓에 전투가 불가능한 똘기를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제외시킨거지만.

"사령사천왕을 앞두고서 알라딘이라는 짐짝을 보호하며 싸우려 하다니...
싸움 전에 귀중한 전투 멤버를 빼는 너희의 행각에 어처구니가 없어서「그렇다면 나도 검을 쓸 필요는 없겠군.」이라고 했었지.
그랬더니..."


- 로우란씨는 허세를 잘 부리시네요.


가소롭다는듯 코웃음치는 미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부러 자존심을 박박 긁으며 도발을 하다니 깜찍한 녀석 같으니라구.

"그런식의 얕보이면 사령사천왕인 나로서는 꽤나 자존심이 상하니까 말야.
그렇다면 검 없이도 너희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걸 보이는 수 밖에 없잖아?"

"즉, 당신은 미미양의 도발에 넘어간거로군요."

드라고의 가차없는 지적에 수긍했다.

"부정할 순 없겠군.
하지만 이제와서 검을 쓸 생각은 없어.
불리하다는 이유로 말을 뒤집는건 그다지 유쾌하지 않으니까."

"온갖 더러운 수를 구사하는 NINJA라고 들었소만..."

"하핫~! 그 표현 어쩐지 자주 듣는군.
새초미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일도 있지만...
싸움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말을 뒤집는건 사령사천왕으로서 부끄럽잖나."

날 보는 강다리의 눈빛이 바뀐 것 같았다.

"...귀공의 이름이 로우란이라고 하셨소?"

"그래. 그러는 자네는 강다리였지."

"...미미양을 도와준 은혜는 감사히 생각하고 있소.
우리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하시오?"

"이제와서 난데없이 무얼...
그거라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이야기 나라의 보물들이 너희에게도 통용되는지 확인할 겸 도와준거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때 미미는 환자였고 난 의원이었으니, 의원으로서 내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야."

"머리에 나사 하나가 빠진 이상한 사천왕이라고 말은 들었소만, 직접 보니 더 괴이하구려."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
지금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로서는 강다리 자넬 처음 봤을 때부터 한번 겨뤄보고 싶었지."

"소인과? 혹시 정보수집 때문에 그러는거요?"

"아니. 그것만이 이유는 아냐."

"그럼 무엇 때문에 그런거요?"

고개를 갸우뚱 하는 강다리의 모습에 손가락으로 강다리의 옷을 가리켰다.

"너의 그 패션 센스는 제법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말에 강다리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푸른 도복을 내려다보곤 도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파란색이라 그런것이외까?"

"물론!"

멀찍이 싸움을 지켜보던 미미가 내 손짓과 강다리의 행동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하핫!"

유쾌하게 웃은 강다리가 봉을 고쳐잡았다.

"동료들에게 듣던대로 꽤 경쾌한 성격이구려."

"뭘, 기왕 하는거 즐겁게 하는게 좋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소인도 로우란공과의 싸움에는 기대하고 있었소.
검술을 볼 수 없는 점은 유감이지만, 부디 소인을 실망시키지 말아주셨으면 하외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보지.
사령사천왕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걸 깨닫게 될테니까.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나는 강해."

"흥! 지금껏 수많은 이야기 나라를 구해온 우리들 또한 만만치 않을거요!"

"...담화가 끝났으면 이제 싸움을 재개해도 괜찮겠습니까?"

구름을 타고 팔짱을 낀채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드라고가 담담히 물었다.




알라딘 일행을 피신시킨 호치가 싸움에 합류하고 다시금 전투가 시작했다.

강다리의 여의봉을 피하면서 호치의 주먹을 비껴냈다.
그대로 호치의 가슴 옷깃을 잡은채 발목을 후려쳐 호치를 매쳤다.

"큭!?"

바닥에 매쳐진 충격에 신음을 흘리는 호치를 보며 의아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으...뭐가 말이냐?"

"어째서 대호(大虎)로 변신해서 덤비지 않는거지?
그 편이 더 위력적일텐데?"

"......"

내 말에 주저하는 호치의 반응을 보곤 혀를 찼다.
과연...그러니까, 좋아하는 상대(오타마)에게 호랑이로 변신한 네 모습을 보이는게 두렵다 이거냐?

"이야기 나라를 지킨다고 생각 했으면...죽을 생각으로 지켜야지!"

"읏!?"

내 발길질을 피해 황급히 몸을 굴리며 거리를 벌리는 호치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다섯 손가락 끝에서 자그마한 푸른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지폭염탄!"

다섯개의 푸른 불꽃이 호치에게 뿜어져 나갔다.

"얕보지 마시오!"

호치의 앞으로 뛰쳐나온 강다리가 여의봉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쏘아진 불꽃을 흐트러버렸다.

"멋지군!"

똘기의 바람개비 검법처럼 여의봉으로 마법을 튕겨낸건가?
감탄사를 흘리자 강다리가 뼈다귀 여의봉을 내게 겨누고 자세를 잡았다.

"로우란공, 혹시 장난하는게요?
겨우 이런 구슬만한 불덩어리를 날리다니 말이오."

"견제하는데는 그정도 크기면 적당하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큰 것 하나가 더 낫지 않소?
구태여 비효율적으로 다섯개로 나눌 이유가 있는거요?"

"그 쪽이 멋지잖아."

"...하?"

눈이 점이 된 강다리를 향해 열변을 토했다.

"다섯 손가락에서 나가는 불꽃이 더 근사하잖아.
NINJA는 낭만이라고!
강다리 자네가 사무라이 컨셉으로 행동하는것처럼 말이지."

"내 어조는 원래 이렇소이다!"

반박하는 강다리에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엣? 그거 취미로 하는거 아녔어?"

"그 무슨 무례한...! 이러니까 NINJA는!"

발끈하면서 봉을 내지르는 강다리에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하! 이거 실례했군. 그럼 답례로 진짜 사무라이에게 NINJA의 진심을 보여주지!"

"해볼테면 해보시오!"

"기꺼이! 12지대차륜(十二支大車輪)!"

양손 검지를 편채로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한다.
검지에 푸른 불꽃이 솟아오르자, 그대로 양팔을 움직여 몸을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렸다.
12개의 작은 푸른 불덩이가 원둘레를 따라 허공에서 불타올랐다.
원을 그린 뒤, 오른손이 아래로, 왼손이 위로 간 자세로, 정면에서 고리를 이룬 12개의 작은 푸른 불덩이를 보며 자랑스레 웃었다.

"이것이 12지대차륜이지. 그리고...!"

양손을 마주잡고 검지와 엄지를 펴자, 12개의 불꽃이 하나로 합쳐져 주먹만한 크기의 푸른 불덩이를 이루었다.

"이것이 바로 12지 합체광선이지."

의기양양하게 내보인 기술에 강다리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12지' 합체 광선이라니, 혹시 12지 전사인 우리를 도발하고 있는게요?
거기다 일부러 힘을 12개로 애써 나눈 뒤에, 그걸 다시 공들여 합체하는 번거로움이라니, 정말로 비효율의 극치구려."

"그야 12지라는 이름이 멋지니까!
그리고 합체는 로망이잖아!"

"로우란공은 마초공과 죽이 잘 맞을것 같구려."

투덜대는 강다리에게 빙긋 웃으며 선언했다.

"그럼 받아라! 이것이 바로 나의 낭만의 결정체! 12지 합체「빈틈입니다.」엣?"

화아아아아!

"우오오오오!?"

하늘에서 쏟아져내린 화염을 뒤집어쓰곤 비명을 지르며 뒹굴뒹굴 바닥을 굴렀다.
덤으로 발사직전의 12지 합체광선은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드라고공!?"

"실례했습니다. 너무 무방비하길래 그만..."

"아니 뭐...소인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소이다만..."

"두번 겨뤄본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데, 저자는 다소 푼수끼는 있지만, 방심해도 좋은 상대는 아닙니다."

"젠장, 정말이지 고평가 해주는구먼..."

그을린 털에 불평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생각 이상으로 하늘에서 덤비는 드라고는 성가셨다.
하늘과 땅에 번갈아 시선을 주며 싸우는건 힘들다고.

강다리와 공수를 주고 받는 가운데 드라고의 화염 공격이 이어졌다.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강다리의 여의봉을 피하랴, 구름을 타고 공중에서 공격해오는 드라고의 화염을 피하랴 정말이지 정신이 없네!

둘의 합공에 바쁘게 손발을 놀리고 있는 와중에 호치도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품에서 선글라스를 꺼낸 호치는 저만치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오타마를 한차례 바라본 뒤 선글라스를 썼다.

"호치호치!"

선글라스를 쓰고 거대 호랑이로 변신한 호치가 본격적으로 덤벼들면서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내지른 봉을 횡으로 휘둘러 옆구리를 노리는 강다리의 공격을 몸을 숙여 피했다.

"다크 파이어(小)"

검지에서 쏘아진 검푸른 불줄기가 길게 꼬리를 늘이며 뻗어나간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불줄기를 뛰어넘으며 나를 포착한 강다리가 봉을 내리쳤다.

자유자재로 길이가 변하는 강다리의 여의봉.
하늘에서 쏘아지는 드라고의 화염줄기.
그리고 포효와 함께 덤벼드는 호치의 육중한 공격.

세 방향에서 덤벼드는 꾸러기 수비대는 생각 이상으로 상대하기 버거웠다.

좀처럼 공세로 전환할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수세를 유지하던 중, 드라고의 불길에 신경쓰다가 그만 강다리의 봉에 옆구리를 가격당했다.
몸을 가눌 새도 없이 호치가 휘두른 앞발에 얻어맞고는 멀찍이 날려져 바닥을 뒹굴었다.

"으윽...!"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을 때는 이미 강다리와 드라고, 호치 셋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역시 실내가 아닌 개방된 공간에서는 꾸러기 수비대 각자의 특색을 확실히 살릴 수 있는것 같다.
털이 그을려 다소 엉성한 꼴이 된채 낭패한 기색을 드러낸 날 보며 셋은 이미 결판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우리들의 승리겠구려."

"이제 승패는 명백하니 항복하는게 어떻습니까?"

강다리와 드라고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걸로 이겼다고 생각하는거냐?"

"물론이오. 지금 상태로는 다시 싸워도 방금 전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라 생각하오만."

"정말 그럴까?"

그때 묵묵히 있던 호치가 으르렁 거리며 입을 열었다.

"...오타마씨 앞에서 너와 싸우는 모습은 더이상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얌전히 이야기 나라를 떠나라."

"자비를 베풀 셈인가?
사령 사천왕을 상대로?
건방지기 짝이 없군."

"...오타마씨는 널 퇴치하는걸 원치 않으셨다."

"......"

"어제와 오늘, 할아버지로서 오타마씨를 대하는 너를 보았다.
화목한 할아버지와 손녀 같았지.
어쩌면, 너도 오타마씨를 소중히 여겼던게 아닌가?"

...아냐.

소강상태가 될 기색을 보이는 셋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이런 결말로는 납득시킬 수 없어.

"...여기까지인가."

"이제 단념할 생각이 들었습니까?"

드라고의 물음에 정색했다.

"응? 무슨 말이야?"

"패배를 선언하려던게 아니었습니까?"

"천만에. '정보수집'이 여기까지라는 의미였지."

"뭐요?"

다시금 봉을 겨누는 강다리에게 친절하게 내 대사를 상기시켜주기로 했다.

"아까 말했었지. 사령사천왕의 강함을 보여주겠다고.
꾸러기 수비대에게 자비를 베풀어지고서 '네 그렇습니다'하고 물러날 사령사천왕이 있을것 같으냐?
이젠 나도 본격적으로 나설테니 각오하는게 좋아."

"네놈...! 진심으로 오타마씨가 살고 있는 이곳을 부술 셈이냐!?"

"로우란공은 오타마씨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던게 아니었소?"

"...소중히 생각하냐고 물었나?"

싸움이 시작되기 전, 내 정체가 폭로된 뒤 망연해하던 오타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하핫. 웃기는군."

"네놈!"

분기탱천해서 덤벼드는 호치의 앞발을 한팔로 막았다.

으직!

앞발이 막히자 그대로 아가리를 벌려 팔뚝을 물어뜯는 호치의 공격에 이를 악물었다.

"...똘기는, 슌린을 선택하지 않았지."

쥐의 시집보내기 이야기 나라에서 똘기는 슌린 대신 꾸러기 수비대로서의 사명을 중시했었다.

"미미도 첫사랑을 선택하지 않았어."

꾸러기 수비대로서 사명을 위해서, 미미도 신데렐라 이야기 나라에서 만난 첫사랑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가 뭘 말하고 싶은가 하면..."


- 할아버지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빌고 싶었어요.


"...너희가 꾸러기 수비대로서 있기를 선택했듯이, 내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거다!"

이제와서 이런 곳에서, 위태롭게 그지없는 평화에 절어...
태어난 날의 결심조차 잊은 채로, 계집애 뒷바라지나 하며 그렇게 늙어가는 것따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채로 여기서 모두 손놓아 버리는 것 따위! 있을 수 있을까보냐!"

남은 둘이 경계심을 높이며 덤벼드는 것과 동시에 외쳤다.



"『삼켜라!』"



순간,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다.



"뭐, 뭐요!?"

퍼억-!

"카-학!?"

"호치공!?"

"이런 어둠속에서 '선글라스'를 낀 녀석은 장님이나 다를바 없지."

변신 도구가 '선글라스'인 시점에서 어둠은 치명적인 단점이지.
...그러고보면 야행성 호랑이인데 정작 변신도구가 선글라스라니, 설마 이거 개그를 노린건가?
어느새 변신이 해제되어 쓰러진 호치를 지나쳐 강다리에게 돌진했다.

카앙-!

"큭! 이건 대체..."

어둠속에서 어떻게든 봉으로 내 공격을 막은 강다리가 당혹해하며 중얼거렸다.

"어때? 이번 인법은 마음에 들었나?"

"인법이라고? 이게? 태양이 사라진 것이...?
말도 안되는 능력이잖소!"

"이것이, 이야기를 움직인다는 것이다!"

경악하는 강다리에게 대꾸하곤 강다리를 걷어차 날려버린다.

"강다리!? 이런!"

드라고가 견제 및 시야를 확보할겸 화염을 내뿜었다.

"이크! 하지만!"

다른 이들과의 연계 공격이었다면 제법 위협적인 기술이겠지만...

"일대일이 된 이상, 네게 승산은 없어! 다크 파이어!"

"웃!?"

드라고의 화염과 다크 파이어가 충돌했다.
하지만 길항하는 것도 잠시 뿐.
길게 뻗어나간 검푸른 불줄기가 곧 드라고의 화염을 뚫고 드라고를 집어삼켰다.
'입에서 불을 뿜는 공격'의 문제는 숨을 들이키는 동안에는 화염이 끊어진다는 것이지.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감시간이로군."

밝은 하늘 아래 선채 쓰러진 호치, 강다리, 드라고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럼 남은건 똘기 하나인가?"

"!?"

멀찍이서 알라딘의 앞에 서있는 똘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를 악물곤 떨리는 손으로 빔사벨을 드는 똘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에선 미미가 오타마에게 무언가를 다급히 말하고 있었다.
미미의 말을 들은 오타마는 당황하더니 잠시 후 결심한 듯 일어서 이쪽을 보았다.

"응?"

저벅저벅-

오타마가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 오타마씨! 무슨 생각이세요!?"

미미의 외침에도 오타마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미미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게 아닌가?
혹시라도 오타마를 앞세워 꾸러기 수비대가 회복할 시간을 벌 속셈은 아닌지 의심했는데.

마침내 내 앞에 도착해 멈춰선 오타마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싸우는 마당에 이제와서 이야기를?
...뭐, 좋아. 잠깐 정도라면 들어주지."

"...당신은...할아버지이신가요?"

"...응?"

"오타마씨!"

오타마의 물음에 미미가 안타까운듯 외쳤다.

"말씀드렸잖아요! 로우란씨는 오타마씨의 할아버지가 아니예요.
로우란씨가 이곳에 온건 겨우 어제였으니까요!"

"어제?"

고개를 돌린 오타마의 시선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로우란씨와 저희는 어제 이곳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며칠 전까지만해도 로우란씨는 다른 이야기 나라에서 저희와 싸우고 있었다구요."

"...다소 인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미미가 며칠전 나와 만났다는 말은 진실이지."

내가 긍정하자 오타마의 눈썹이 떨렸다.

"...미미씨가 말해주셨어요.
사령몬스터라는 이들의 목적은 이야기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맞아. 이야기 나라를 부수고, 나아가 이야기 기둥을 파괴한다.
마지막엔 지탱하는 이야기 기둥을 잃은 원더랜드를 바다에 가라앉히는 것.
그것이 사령몬스터들의 목적이지.
미미를 비롯한 꾸러기 수비대는 사령몬스터를 막고 이야기 나라를 구하는 녀석들이고."

"...정말로 이곳을 부술 셈인가요?"

"꾸러기 수비대가 전부 쓰러진다면 그렇게 되겠지."

"어째서..."

오타마의 입술이 떨렸다.

"어제는...다정하셨잖아요..."

"그 때 난 할아버지 역할이었으니까."

"...저를 구하러 와주셨잖아요?"

"아리마 만조의 저택으로 간 것 말이냐?
정말로 널 구했다면 이야기 나라가 원래대로 돌아가버렸겠지.
다행히도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이 널 구해줘서 그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단다."

"제가 보물이라고...
수십년을 찾아 헤매던 램프보다...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래. 애당초 찾아 헤멘적도 없는 요술램프 따위가 중요할리 없잖아."

"!?"

"그만두세요!"

충격을 받은듯 굳어버린 오타마의 뒤에서 미미가 외쳤다.
나를 노려보는 미미의 눈매가 매서웠다.

"그런 불필요한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잖아요 로우란씨?"

"불필요하다니. 나는 나 나름대로 다정하고 친절하게 답해줄 셈이었는데.
너도 말했잖나. 그런건 단지 '설정'이라고."

"...그 말이 오타마씨를 상처입힌다 해도 말인가요?"

"오타마가 태어나지도 않았을적 설정 정도로 상처를 입는다니 과장이겠지."

어깨를 으쓱여보이자 미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타마씨가 걱정되서 이곳까지 데려왔다고 하셨잖아요?
고작 이런 대화를 나누려고 그랬던건가요?"

"둘 다 맞아.
그 때 나는 할아버지로서 생각했어.
그리고 지금은 사령사천왕으로서 행동할 때이지."

"...역시 당신은 최악이에요."

"칭찬 고맙군."

"그...!"

힘겹게 말을 잇는 오타마에게 시선을 향했다.

"뭐야?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남았나?"

매달리는듯한 시선으로 오타마가 떨리는 왼손을 들어 반지를 보였다.

"서...선물..."

"......아. 그러고보면 그런것도 줬던가.
아무래도 할아버지 역할에 몰입한건 실수였나보군."

"...에...?"

"다시 말해줄까?
이야기 나라를 부수는 사령사천왕의 입장으로선, 너에게 그 반지를 건네준건 그야말로 번거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는거다."

"...어째서...그렇게 매정하게 말씀하시는거예요?"

오타마는 가슴께에 손을 모은채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말씀하셨잖아요..."

입술이 작게 떨렸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함께...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라 말씀하셨잖아요..."

다시금 깨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기뻤는데..."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내린다.

"아침...맛있었는데..."

...후우.

한숨을 쉬곤 웃음을 띈 채 상냥하게 오타마를 부른다.

"...얘야."

"!? 하, 할아버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식사인데 그 정도 배려는 해줄 수 있단다."


"!"

충격으로 오타마의 눈이 크게 떠진다.
차오르는 눈물이 어느새 넘쳐흐른다.

"읏...으읏..."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는 오타마의 모습에 안타깝다는듯 말을 이었다.

"...지금에 와서도 너는 여전히 상냥하구나.
알라딘의 몸을 빼앗고 있던 내게 화라도 낼 줄 알았더니, 설마 아직도 나를 할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는거니?"

"...어쩌면...정말로 어쩌면...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로우란이라고 말했을텐데.
그런데도 알라딘이 아닌 이 나를 할아버지라고...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입술을 깨문채 눈물 맺힌 눈으로 쳐다보는 오타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며 울먹이는 오타마의 모습에 문득 떠오른게 있어 손바닥을 탁하고 쳤다.

"아, 그렇군!


혹시 이야기처럼 날 껴안아주려는거니 오타마야?

좋아하잖니? 『설녀의 딸 이야기』."

"...그만..."

"응?"

"그만해주세요!"

오타마가 어깨를 감싸안은채 주저앉았다.
괴로운듯 고개를 숙인채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우윽...
윽...으읏..."

양손을 가슴에 모은 오타마의 얼굴에서 눈물을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다...당신은...할아버지가 아니예요."

"......"

"하, 할아버지는...상냥하셔서...
언제나 핏기많은 사람들에게 훈계하면서도 정성스레 치료해주셨어요.
불평하시면서도 다친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상냥한 분이세요.
그, 그러니까..."

한차례 울음을 삼키고 억지로 말을 잇는다.

"사람들을 상처입히는 당신은...할아버지가 아니예요."

오타마가 왼손 약지에 낀 반지에 손을 가져간다.

"...당신이 이곳을 부수도록 놔두지 않겠어요."

반지를 문지르자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오른다.

"왜냐하면 이곳은...
무엇보다 소중한,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한 보물이니까!!!"

반지에서 솟아오른 연기가 허공에 하나로 뭉쳤다.
연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무라이 의상의 거인이 오타마의 곁에 섰다.
거인이 공손히 오타마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무엇이든 소원을 말씀해주십시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오타마가 고개를 들었다.

"...도와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오타마가 외쳤다.

"이 곳을...할아버지와 저의 소중한 장소를 지켜주세요!"

"분부대로."

반지의 거인이 미소지었다.




거대한 바위가 허공을 가른다.
인력으로 이뤄지는 거인의 돌팔매.
아니, 차라리 투석병기라 부르는게 걸맞을 정도였다.
가까워지면 거대한 주먹을 휘두르고, 멀어지면 거대한 바윗덩이를 던진다는 단순한 패턴이었지만 그 위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대일 상황으로 사령사천왕을 쓰러뜨린다는건 역시나 무리지.

...일대일 상황이라면 말이다.

반지의 거인을 무력화하는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방금전 쓰러뜨렸던 꾸러기 수비대도 하나 둘 몸을 추스리고 다시금 내게 덤벼들었고.

장시간의 싸움으로 지친 모습의 반지의 거인이 휘두르는 아름드리 나무를 피했다.
반격삼아 거인을 향해 쏘아보낸 다크 파이어는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하늘을 날아서 공격을 피한뒤 체력을 회복하려는 거인.
견제로 거인에게 오지폭염탄 세례를 날리려다, 거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틈에 호치에게 기습 태클을 먹었다.
땅바닥을 나뒹굴고 일어서 손톱을 세워 호치에게 돌진하려던 차였다.

"으, 으오오오오오!!!"

필사적으로 뻗어진 강다리의 봉끝을 한손으로 붙잡았다.
손에 가로막혀 여의봉의 돌진이 멎었다.
넝마가 된 차림으로 비틀거리는 강다리를 보며 조소했다.

"흥. 마지막에 와서 힘이 모자랐군."

"...그렇게 생각하시오?"

"뭐?"

딸깍
파지직!

"!?"

뼈다귀 여의봉 끝에서 튀어나온 두가닥 침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전격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전기 쇼크로 움켜쥔 여의봉을 놓치곤 비틀거리자 강다리가 힘겹게 웃었다.

"헤, 헤헤...방심했구려."

"큭...이, 이런 얄팍한 공격 따위로..."

"지금이오 드라고공!"

쥐어짜듯 외치는 강다리의 모습에 억지로 저릿한 몸을 움직였다.
강다리의 시선을 따라간 끝에는 드라고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섬뜩한 예감이 든 직후, 검게 물든 하늘이 울음을 토했다.

"『천둥이여!』"

순간, 온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특대의 벼락을 무방비 상태로 직격당하는 경험은 신선했다.
덕분에 온몸의 털이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이젠 청(靑)의 로우란이라고 할만한 모습도 아니겠군.

...그래도...이 정도라면 납득할 수 있는 결과일테지.

너무 방심한탓에 예상보다 꼴이 말이 아니지만.
큰 대(大)자 모양으로 쓰러진 상태로 손가락을 움직여보려던 차였다.



"아라기토오오오오오오------!"



"「「「!?」」」"

난데없이 들려온 절규에 모두의 주의가 한곳으로 쏠렸다.
언덕 한켠에서 저마다 무기를 꼬나든 복면인 무리와 붕대 투성이의 사람이 등장했다.
부축하는 이들을 뿌리친 붕대를 감은 남자가 악을 쓰며 외쳤다.

"아라기토는 어디있나!?
어디있어! 그 놈은...! 날 이렇게 만든 놈은!!!"

"...그 목소리는 설마...아리마 만조?"

강다리의 중얼거림에 남자가 눈을 번뜩였다.

"네놈들은...내 저택에 왔던 그놈들이구나!"

찌이익-!

"「「「!?」」」"

남자, 아리마 만조가 얼굴을 동여맨 붕대를 찢자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화상으로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에는 노쇠함을 숨기지 못할 만큼 수많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늙어버린 아리마 만조의 모습에 모두가 말을 잊었다.

"봐라 이 몸을!
불타버린 얼굴만해도 이렇게 비참한데, 이렇게나 늙어버린 내 모습을!
한순간에...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런 늙은이가 되어버렸어..."

실성한듯 중얼거리는 아리마 만조의 모습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건지 깨닫곤 혀를 찼다.

"네 녀석, '우라시마 타로의 상자'를 열었군?"

"로우란!?"

"그런!?"

"아직도 정신이 있는거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게 꾸러기 수비대가 숨을 삼킨다.

호치, 드라고, 강다리, 그리고 반지의 거인의 모습을 확인한다.
방금 전의 격전탓에 다들 피로감을 내비치고 있다.
나도 탄내를 풍기는 고양이가 되어버렸으니, 어지간히도 격하게 싸웠었군.

상황 파악을 끝낸 내게 아리마 만조가 되물었다.

"우라시마 타로의 상자...?"

"진료실에 있던 봉인된 상자 말이다.
상자 속에 담겨있던 '세월'에 휩싸여 나이를 먹어버린거겠지.
보아하니 네놈들이 진료소를 빈집털이 하다가 멋대로 뜯어버린걸테고."

역시 오타마를 진료소에 혼자두지 않은건 정답이었군.
내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진상을 들은 아리마 만조가 발악했다.

"그, 그런걸로 내 젊음이...!
내 생명이 빠져나갔단 말이냐!
아라기토... 아라기토 때문에!"

도둑질한 주제에 뭔 소리야.
자업자득이면서.
실성한듯 아리마 만조가 횡설수설했다.

"그, 그렇지!
'젊음의 약'!
그것만 있으면 내 몸을 되돌릴 수있어!
찾아내야만...! 젊음의 약을 찾아내야만...!
아라기토의 진료실에 있을거야 분명!"

아리마 만조의 헛된 꿈에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그건 이제 없다."

"뭐? 무슨말이냐!
혹시 네가 알고 있지? 네가 알고 있는거지!?
어디있냐!? 젊음의 약은 어디있어!?"

"글쎄? 지금쯤 뒤뜰 벚꽃나무의 양분이 되어있지 않을까?"

키득거리며 비웃자 아리마 만조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젊음의 비약이...내...내 젊음이..."

"탐욕에 눈이 먼 자의 최후는 언제나 비참한 법이지."

"흐아아아아!!!"

절규하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하던 아리마 만조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리마 만조의 시선 끝에는 두려움을 품은 눈으로 아리마 만조를 쳐다보는 오타마가 홀로 서 있었다.

오타마를 인식한 아리마 만조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여."

"네?"

"죽여!"

광분한 아리마 만조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내 인생을 망친 복수다!
아라기토와 그 놈의 손녀를 없애버려!"

"「「「하앗!」」」"

아리마 만조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동행한 수하들이 일제히 화살을 겨눴다.

싸움의 여파를 신경쓴 탓에 다른 이들과 오타마 사이의 거리가 멀다.
꾸러기 수비대가 미처 행동에 나설 틈도 없이 화살비가 쏟아진다.

화살비 앞에서 눈을 크게 뜬채 굳은 오타마의 모습이 내 시야를 채운다.



"오타마씨이이이!?"



누군가의 비명. 절규.

살을 꿰뚫고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린다.



"......?"



눈을 꼭 감은채 움츠러 들어있던 오타마가 조심스레 눈을 열었다.
전신에 드리운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든 오타마의 눈이 크게 떠진다.

"아...아..."

오타마가 경악한채 입을 가린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눈앞에 서있는건 그냥 고양이니까.
등뒤에 화살이 박힌 탓에 다소 고슴도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말야.

...빌어먹게 아프네...
정령이 아니었더라면 즉사였겠지.

하지만 고작 이야기 나라의 악당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사령사천왕의 수치잖아.
무엇보다 돌에서 태어난 사천왕이 화살비에 꿰뚫려 죽는다는 결말 따위는 인정 못한다구.
앞선 싸움의 여파로 지금은 억지로 버티고 서있는게 고작이지만.

다행히 오타마의 몸에 이른 화살은 없었다.
보험으로 품에 넣어둔 '피터팬'의 '도토리 목걸이' 덕분에 '화살'이 죄다 나에게 '명중'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타마에게 상처는 없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괜찮으냐...?"

"...어째서?"

오타마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째서 당신이 이런 짓을 하는 거예요!
어째서 저를 구한 거예요?"

"그륵..."

벌어진 입에서 피거품이 일어난다.
억지로 피를 삼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아이는 어른이 지켜주는 거니까."

오타마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힘껏 웃는다.
오타마가 안심할 수 있도록.

"안심해. 이런건,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까."

"거짓말..."

눈물 짓는 오타마에게 피식 웃었다.

"이런? 넌 숙녀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애로구나?
그렇게 눈물이 헤퍼서야. 하하."

능글거리며 놀리는데도 오타마는 볼을 적신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곤란한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스레 오타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울지 말렴...
네가 울면 나도 슬프니까..."

"...읏..."

"네가 좋아하는 행복한 이야기를 들려줄게.
그러니까..."

꽈아악-

오타마가 날 껴안았다.

"...물러서렴.
피가 묻을 거야."

"...하지 말아요..."

오타마의 목소리가 떨린다.

"정말로, 할아버지인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

껴안은채 흐느끼는 오타마의 옷에 피가 번져간다.


...그러니까...

너무 늦게왔다구 너희들...

저만치서 꾸러기 수비대와 반지의 거인이 아리마 만조 일행을 해치우는 모습을 눈에 넣으며 낮게 탄식했다.




싸움은 끝났다.

덤으로 내 전투의욕도 꺾였다.

그야 맨정신으로 몸에 박힌 화살을 뽑히는 경험을 당하면 전투할 정신이 아니게 되니까.
이런건 대책없이 뽑아버리면 위험하다고!
...뭐, 화살이 박힌채로 사령궁에 가봤자, 제대로 치료해 줄 녀석 따윈 없으니 어쩔수 없나.

아무튼 그 덕에 화살 맞았을 때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 된 상태로 오타마의 무릎베개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넓네 오타마는.


"할아버지는 괜찮은건가요?
아직껏 저렇게 정신을 잃고 계신데..."

"알라딘? 연로한 몸이라서 휴식이 필요할 뿐이야.
이야기 나라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알라딘도 정신을 차리겠지."

"다행이다..."

안도하는 오타마를 무릎베개를 받은채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할아버지를 좋아하는군?"

"네. 하나 뿐인 소중한 가족인걸요."

"...그래."

기쁜듯이 웃는 오타마의 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미미가 다가오자 다시금 넉살좋게 웃어보였지만.

"이야아~ 미소녀의 무릎베개를 할 수 있다니 아픈 보람이 있네 아하하"

"정말이지..."

미미가 어처구니 없다는듯 쳐다보다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괜찮아. 이정도로 어떻게 될거였으면 사천왕은 못해먹지."

미미는 안심하면서도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요술 램프는...'반지'였군요."

"그래."

'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서 등장하는 '요술 반지'에게 '요술 램프'로서의 역할을 부여한게 사건의 전말이다.

"어제 '램프'에 대해서 추궁했을 때 보여준 로우란씨의 반응.
그리고 그날 밤 로우란씨가 오타마씨에게 준 '선물'.
오타마씨에게 반지를 문질러보라고 귀띔한건 정답이었네요.
하지만 그게 요술 반지라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서 오타마씨에게 반지를 준거였죠?"

"그 때 나는 할아버지였으니까."

"...로우란씨다운 말이네요.
당신은 언제나 맡은 역할에 충실했군요."

가만히 한숨을 쉬곤 미미가 표정을 고쳤다.

"그럼...하루 동안의 휴일은 즐거웠나요?"

"......아. 즐거웠고 말고."

"이제 오타마씨에게 알라딘을 돌려줄 시간이에요."

"...그렇군."

미미의 말대로 이제 돌아갈 때겠지.
묵묵히 오타마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키자 미미가 주저하다가 물었다.

"로우란씨."

"왜?"

"'우라시마 타로'는 무슨 말이었지요?"

"...응?"

"저는 어제 당신이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를 해줬을 때부터 줄곧, 우라시마타로가 받았던 '용궁의 상자'를 열어서 당신이 할아버지 모습으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용궁의 상자'는 아리마 만조가 열기 전까진 봉인되어 있었죠.
그렇다면 대체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던거죠?
어째서 그 이야기를 섞을 필요가 있었던거죠?"

"그냥 섞은거라곤 생각하지 않는거냐?"

"로우란씨니까 거기에 무언가 의미가 있을테죠?"

"...쓸데없는걸 신경쓰는군."

"그치만 궁금하잖아요.
저희가 이겼으니까 떠나기 전에 그 정도는 알려주시겠죠?"

"내가 왜..."

"키린더의 정화포를 맞는거랑, 얌전히 진상을 알려주시는거랑 어느걸 택하실건가요?"

"...너, 은근히 무서워..."

생긋 웃는 미미에게 질려하는데 오타마가 말문을 열었다.

"두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뭐?" "네?"

"스스럼없어 보여서요."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오타마씨?"

"뭐, 승부가 난 마당에 구차하게 아웅다웅하고 싶진 않으니까.
그래도 일단은 하하호호 웃으며 지낼 수 있는 관계는 아닐텐데."

"그치만 아침에 미미씨가 치료받을 적엔, 「「스톱!」」"

폭탄을 투척하려는 오타마를 확급히 제지했다.
불필요한 말은 금지입니다.
미미로서도 풍기문란한 사람으로 인식되는건 사양하고 싶은가보다.
내 쪽을 한차례 힐끗 보곤 미미는 더이상 날 추궁하는걸 멈췄다.
내심 불만스러운지 볼이 부루퉁하게 나와 있었지만.


몸을 가누고 돌아가려는 나를 이번에는 오타마가 불러세웠다.

"저..."

"왜 그러지?"

"고마워요."

"......뭐?"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맞춘 오타마가 미소지었다.

"비록, 원래 이야기에서 할아버지와 저의 관계가 지금과 달랐다 하더라도...저는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 덕분에 저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어쩌면 당신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하아..."

기가 막힌듯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오타마가 움찔한다.
오타마의 뒤에서 내게 눈을 부라리는 호치의 모습에 그만 쓴웃음이 지어졌다.

"그, 그래서 말인데요..."

쩔쩔매면서도 오타마는 말을 이었다.

"만약...제가 당신 앞에 마주섰을 때...
그 때 당신을 안아주었더라면, 당신은 싸우지 않았을까요?"

- 혹시 이야기처럼 날 껴안아주려는거니 오타마야?
좋아하잖니? 『설녀의 딸 이야기』.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의 결말처럼, 저도 온기로 당신의 마음을 녹일수 있었을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럴리가 없잖아.
온기로 내 마음을 녹인다니, 뭐든 이야기대로 된다고 생각하지마."

"로우란씨!"

미미가 도끼눈이 되선 잡아먹을듯 노려봤다.
무서워라...

퉁명스런 내 말에 오타마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언젠가 당신의 마음을 녹여줄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


- 저는, 당신이 나쁜 사람이었으면 해요.


응. 미미 네 말이 맞아.
...나도, 오타마가 좀 더 나쁜 아이였다면 좋았을걸 그랬어.


가만히 오타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엣? 저, 저기...이건?"

"...괜찮아."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오타마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곤 작게 웃었다.

"온기는...
줄곧 채워져 있었으니까.
처음 널 안아들었을 적부터."

오타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할아버지...?"

"행복하렴."

오타마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푸른 빛의 구슬로 화했다.

"아...!"

다급히 빛의 구슬로 뻗어지는 오타마의 손길을 피한다.
아연히 올려다보는 오타마에게 작별인사 하듯 한차례 그녀의 머리 위를 돈 뒤 하늘로 올랐다.



"거짓말쟁이!"




오타마가 외쳤다.

"원래대로...모든게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언제나 함께 있어주겠다고 했으면서...!

할아버지는...거짓말쟁이야!"


울음을 터뜨린 오타마를 달래듯 꾸러기 수비대가 모여든다.

순백의 모래가 천천히 대지를 뒤덮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야기 나라를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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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오랜만입니다.orz;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 나라는 벗어났지만 전개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월요일 출근이 있으니 일단 먼저 업로드합니다.

후기나 세세한 수정(+뒤섞인 이야기 나라의 설명)은 나중에 할지도 모르겠네요...-_-;



삽화를 맡아주신 터틀러님 감사합니다.

삽화를 보내주신게 어언 3년이 가까워지는데 이제서야 사용할 수 있었네요. 쿨럭쿨럭...;;;



10월에 쓴다, 11월에 쓴다, 12월에 쓴다, 크리스마스에 쓴다, 연말까지 완성한다...
계획 잡아놓고서 정작 마무리 된건 새해 첫날도 아니고 둘째날 새벽이었다는 사실...OTL;
글쓰러 별다방에 갔던 것도 근 3개월 만이었죠-_-;

징하게 연재가 늘어지는 제 글을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ㅠㅠ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p.s. 관련 이야기 나라

1. 알라딘과 요술램프

※(원작)꾸러기 수비대 17화. 무대는 에도시대로 동일. 등장인물은 아라기토 진나이(알라딘), 아라기토 오타마(손녀=공주), 아리마 만조(악당)와 닌자들.

- 요술 램프: 램프의 마신이 잠들어 있다.
- 요술 반지: 반지의 마신이 잠들어 있다.

2. 노시와 유탄: [중국] 계수나무 잎(치유와 부활의 힘)

3. 탈무드의 요술사과: 세가지 보물. 요술 망원경, 요술 양탄자, 요술 사과(만병통치)

4. 피터팬

- 요정의 가루: "하늘을 나는데 필요한 건 약간의 믿음과 신뢰, 그리고 '요정의 가루'지."

- 도토리 목걸이(입맞춤): 피터팬이 웬디에게 준 '입맞춤'. 착용자는 화살에 명중한다. 착용자를 화살(1발)로부터 보호한다. 단, 도토리이므로 '다수'의 화살에 대한 보호는 할 수 없다.

5. 북풍이 준 선물: [노르웨이] 요술 식탁보(먹을것이 나온다), 요술 지팡이(악당을 때린다)

6. 여우누이: [한국 설화] 붉은 호리병(깨뜨리면 불바다)

7. 마량의 요술붓: [중국] 그린 것이 현실화되는 요술붓. 그림 솜씨가 좋아야 함.

8. 잠자는 숲속의 공주: (물레)바늘. 모든 것이 잠에 빠진다. 화염조차 예외는 아니다.

9. 젊음의 샘물: 마시면 젊어진다.

10. 까막나라 불개: [한국 설화] 까막나라 왕의 지시로 해와 달을 삼키는 개의 이야기. 일식과 월식에 관한 설화.

11. 이반 왕자와 회색늑대: [러시아] 죽음의 물(치유), 생명의 물(부활)

12. 우라시마 타로 이야기

- '공주님'이 사는 '바닷속'의 시간의 흐름은 (육지에 비해) 느리다.

- 오오라 '공주'가 머무는 원더랜드의 시간의 흐름은 (육지에 비해) 느리다.

- '바닷속'에 있는 사령궁의 시간의 흐름은 (육지에 비해) 느리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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