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5




석양이 진다. 아리마 만조의 목숨도 함께 질 시간이다.

양탄자를 타고 미미와 함께 아리마 만조의 저택으로 향했다.

"로, 로우란씨?"

"왜?"

"아까부터 쭈욱 입을 다물고 계신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나는 지금 침착해.
해야 할 건 아리마 만조 놈을 냉큼 쓰러뜨리고 손녀를 구해오는 것 뿐인 간단한 일이니까."

"그,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머지 않아 아리마 만조의 저택에 도착한다.
흥분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사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른채 생각에 잠겨있던 미미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로우란씨?"

"왜 그래?"

"로우란씨는 이야기 나라를 왜곡하는게 목적이죠?"

"맞아. 그러니까 이야기 나라가 어떻게 되든 빌어먹을 납치공갈범 따윈 주저없이 박살내버릴테지만."

내 말에 미미가 한숨을 쉬곤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침착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로우란씨?"

"왜?"

"아리마 만조라는 사람은 '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나오는 나쁜 마법사 역할이죠?"

"그래. 요술램프를 노리고 있고, 알라딘으로부터 공주님을 납치해가는 악당이지."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은 알라딘이 공주님을 납치한 나쁜 마법사를 물리치는거구요."

"그렇지."

내 대답에 몹시 말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미미가 입을 열었다.

"...로우란씨가 이대로 아리마 만조를 물리치고 오타마씨를 구하면, 이야기 나라는 원래대로 돌아가는거 아닌가요?"

"......"

끓어오르던 화가 미미의 말에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았다.

손녀를 구하면 손녀랑 헤어질지도 모른다니 이게 왠 날벼락같은 소리야!?

아찔해진 머리로 힘겹게 반박할 거리를 떠올리곤 미미의 말을 부정했다.

"...정말로 유감이지만, 거기엔 두가지 문제가 있어.
첫째, 이 시점에서 알라딘과 공주님은 '결혼'하지 않았어.
둘째, 알라딘도 마법사도 '요술램프'를 갖고 있지 않아.
두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시점에서 마법사를 쓰러뜨리면, 이야기 나라가 원래대로 돌아갈 리 없잖아?"

"결혼은 안했다손 쳐도 로우란씨와 오타마씨는 '가족'이죠? 할아버지와 손녀지만.
'모모타로 이야기'나라에선 '꿩'대신 '닭'을 동료로 삼아도 문제 없었으니까, 그런 조건은 대충 구색만 맞추면 괜찮아요."

구색 맞추기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꾸러기 수비대로서 그런 식의 발언은 어떨까 합니다 미미양.

"그리고 두번째 조건 말인데, 어쩌면 이미 조건은 갖춰져 있는게 아닌가요?"

"...설마 그럴리가. 에도 시대에 램프 따위가 있을리 없지?"

"네. 있을리 없지요.
그러니까 '램프'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죠.
'미운오리새끼' 이야기 나라에서 사령 몬스터가 주인공인 '오리'를 '타조'로 바꿨던 것처럼요."

"......"

"로우란씨? 혹시 짐작 가는게 있지 않나요?"

"...비, 비밀입니다."

"아하, 비밀이군요?"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미미가 내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로우란씨."

"...왜?"

"저, 응원할께요!
부디 오타마씨를 구하고 아리마 만조를 물리쳐주세요!"

이런 젠장...

"...아가씨도 제법 영악하구먼."

"아니아니, 로우란씨 만큼은..."

"하하하, 미미양을 따라갈 만큼은 아니라네."

"...의뭉스런 로우란씨를 상대하려면 이렇게라도 머리를 굴려야 하거든요?"

"그럼 질문있습니다 미미 선생님~! 아리마 만조 녀석을 해치우고 싶지만, 벌써부터 손녀랑 헤어지긴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런걸 왜 저한테 물어요? 그나저나 오타마씨랑 만난지 하루 밖에 안 됐으면서 잘도 거기까지 빠져들었네요."

"너희가 너무 느긋하게 와서 정들어 버린거잖아!"

"그게 왜 저희 탓이에요! 애당초 느긋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희는 이야기 기둥의 이상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날아온거거든요!?"

"아무튼 싫다고! 이대로 귀여운 손녀랑 더 있고 싶다고!"

"떼쓰지 말아요! 우리도 이틀 밖에 여유가 없어서 바쁘단 말예요!
그리고 누군 이별을 안 겪어봐서 이렇게 구는줄 알아요!?"

"게윽!?"

이야기하다가 화가 치밀었는지 미미가 다시금 내 목에 쵸크 슬리퍼를 걸었다.

"애초에 당신들이!"

꽈악-

"'신데렐라' 이야기 나라에 침략하지만 않았어도!"

꽈아악-

"죠지님이랑! 그런식의 이별은! 안했을텐데!"

꾸드득-

"큭!? 켁켁! 하, 항복!"

첫사랑이랑 헤어진 화풀이를 이제와서 나한테 하지마.
생각해보니까 지금은 내 손녀 구하러 가는 비장한 장면이라고!




미미와 다투느라 비틀거리는 요술 양탄자를 어찌어찌 이끌고서 아리마 만조의 저택에 다다른 참이었다.

콰아아아아아---!!!

"「「!?」」"

굉음과 함께 저택 지붕을 뚫고 거대한 화염 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저택을 휘감은 불길에 놀라 양탄자를 조종해 지면에 내려섰다.

"불이야!" "젠장! 어서 도망쳐!"

저택 밖으로 닌자복을 입은 녀석들이 뛰쳐나오고 있었기에 길을 막아섰다.

"뭐야!?" "진 영감이잖아!?"

"오타마는!? 우리 손녀는 어딨나!?"

"알게 뭐야! 지금쯤 '그놈들'이랑 불길 속에 있겠지!"

"뭐?"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다급히 밀어붙이려는 닌자들에게 거리를 벌리곤 손을 펼쳤다.
어느새 한손에 쥐여진 지팡이를 닌자들에게 겨눴다.

"시간이 없으니 네놈들의 상대는 이걸로 대신하마!"

"뭐라는거야?" "죽고 싶소 영감?" "그냥 죽여버려!"

"심판의 시간이다 이 잡놈들아!

『춤추어라 지팡이야!』"

내 외침에 손에서 빠져나간 지팡이가 허공을 날며 닌자들 난타했다.

빠아악-! 뿌직! 콰드득! 우직!

"크악!?" "캬...갸를..." "우웨엑!" "아악! 내, 내 다리!"

"로우란씨, 저건...?"

"'북풍의 선물' 그 세번째, 악당을 혼내주는 '요술 지팡이'지.
그것보다 빨리 뛰어! 내 손녀가 저 불 속에 갇혀 있다잖아!"

"네, 네에!"

닌자들을 박살내며 오체를 정성스레 찜질해주는 지팡이를 뒤로 하고 미미와 저택으로 달렸다.
입구건 벽이건 불길에 휩싸인 저택으로의 침입은 어려워 보였지만 대책이야 있지.

"흥! 이런것 따윈..."

품안에서 꺼내든 '붓'으로 불길의 벽을 향해 크게 원을 그렸다.
원이 완성되자 벽과 불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은 그저 뻥 뚫린 구멍으로 변했다.

"그건 또 뭐죠?"

"'마량의 신기한 붓'. 그림에 실체를 부여하는 붓이지.
원래는 좀 더 섬세한 용도로도 쓸 수 있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하니까.
이대로 구멍을 만들면서 중앙까지 돌파한다!「빠아악-!」크억!?"

"로우란씨!?"

난데없이 뒤통수를 얻어맞고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뭐, 뭐야 방금 전 공격은?
당황해서 몸을 돌리자 다시 한번 뭔가가 내 어깨를 가격했다.

따악!

"큭!?"

몸을 피하며 앞을 확인하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닌자를 상대하고 있던 요술 지팡이가 날 목표로 덤벼들고 있었다.

빡!빡!빠바박!

"악! 악! 악!"

"꺄아악!? 로우란씨!"

젠장! 그러니까 나도 악당이다 이거냐?

"『머, 멈춰라 지팡이야!』"

뚝-

내 외침에 지팡이는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 아고고... 나죽네에에..."

"괜찮으세요 로우란씨?"

쓰러져선 맞은 곳을 부여잡고 끙끙대는 날 미미가 당황해서 부축했다.

"어째서 요술 지팡이가 로우란씨를 습격한거죠?"

"나쁜 닌자들을 죄다 때려눕혔으니까, 다음 목표로 날 정했나보지.
하지만 나는 분명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라딘인데, 어째서 악당 취급을 받아야 하는거야?"

"사령 사천왕이 악당이 아니면 뭐겠어요?"

"......"

미미의 핀잔에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하는데 어쩐지 손이 허전했다.

"이런!? " "아..."

손에서 놓쳐버린 요술 붓이 저만치 바닥에 떨어진채 화염에 불타고 있었다.
...터널을 뚫어서 일직선으로 통과하는 방법은 이제 못 써먹겠군.

"이렇게 된 바엔, 요술 양탄자로 하늘에서 저택으로 들어가야겠네."

"침입하는건 어떻게든 되더라도 불난리 속에 양탄자가 무사할까요?
양탄자가 불타면 탈출할 수단이 없잖아요."

"괜찮아. 일단 손녀를 만나기만 하면 '화염을 잠재울' 방법은 있으니까."

"바늘?"

소매에서 꺼내든 '바늘'을 보고 미미가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정령소환! 드라고!』"

외침과 함께 저택에서 솟아오른 녹색 빛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었다.

빛의 기둥이 사라지고, 저택 위 허공에 오색빛과 함께 터번과 붉은 망토를 두른 초록빛 용, '드라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 위에 서서 저택을 내려다보던 드라고가 검지를 하늘 높이 뻗었다.

"『바람! 구름! 천둥이여!』"

쿠르릉...!

순식간에 먹장구름이 모이며 하늘이 거친 울음을 토했다.
먹장구름에서 쉴새없이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가 삽시간에 대지를 적셨다.
저택을 휘감은 화염이 잦아들며 어느새 불길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순식간에 사건 해결이군.

드라고, 네가 넘버 원이다.

망연히 불이 꺼진 저택을 바라보고 있자, 저택 문으로 네 명이 걸어 나왔다.

"오타마야!" "여러분!"

"할아버지!?"
"미미야?" "진 영감님?" "아라기토공?"

저택 밖에 주저앉아있는 나와 미미를 보고 오타마와 똘기, 호치, 강다리가 달려왔다.

"할아버지!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네가 납치됐다는 편지를 받아서 달려왔단다. 혹시 다친데는 없니?"

"네, 이 분들이 절 구해주셨거든요."

오타마의 말에 곁에 서있던 꾸러기 수비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신세를 졌군. 우리 손녀를 지켜줘서 정말 고맙네."

"별 말씀을요~!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죠!"
"여인을 겁박하는 비열한 무리들을 그냥 두는건 도리가 아니지 않소이까?"
"오히려 저희 탓에 오타마씨가 이런 일을..."

마지막 호치의 말이 어째 신경 쓰였다.

"응? 자네들 탓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엣? 그게..."
"에...그러니까 말이외다..."
"그, 그것이..."

어리둥절해서 꾸러기 수비대들을 보자 셋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못다한 얘기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하고, 일단은 자리를 피하도록 하세나."




진료소로 돌아와 오타마와 꾸러기 수비대 일행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니 내용은 이랬다.

아리마★만조의 즐거운 추리 시간』
1. 여행자로 보이는 녀석들(꾸러기 수비대)이 '요술 램프'를 찾는 사람에 대해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입수했다.
여행자들은 '요술램프'와 더불어 간간히 '알라딘'이라는 이름을 언급했다.


2. '진 영감', 그러니까 나, '아라기토 진나이'의 옛 호칭 중에 '아라진'이라는 호칭이 있다.
즉, 아라진 = 알라딘. 그렇다면 진 영감과 요술램프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3. 고사기(이 동네는 걸핏하면 고사기 타령이야!)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마신의 종족은 '진(Djinn)'이라 불리운다』

즉, '진 영감'이라는 호칭은 그가 마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선이라 불리면서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포함한 온갖 기물을 사용하는 진 영감은 램프의 마신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고.


4. 그렇다면 과연 '요술 램프'란 무엇인가?
요술 램프는 마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럼 '진 영감'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즉! '요술 램프'라는 것은 바로 그의 손녀인 '오타마'였던 것이다!


아리마 만조가 꾸러기 수비대에게 들려줬다는 논리 전개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그 망할 놈의 머릿 속에선, 내가 알라딘이면서 동시에 램프의 마신 진(Djinn)이고,
내 손녀 오타마는 공주님이면서 진(Djinn)을 조종할 수 있는 요술 램프라 그거야?

그래서 내 손녀를 납치해서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려 했던거고?

악당 주제에 톡톡튀면서도 정신나간 발상 하나 만큼은 제법 참신했는지라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그리고 아리마 만조의 저택이 화염에 휩싸이게 된 경위는 이랬다.

오타마가 납치된 뒤, 나와 미미보다 한발 앞서 협박장을 발견한 꾸러기 수비대가 '가짜 요술 램프'를 들고 아리마 만조를 찾아갔던 것이다.
아마도 가짜 요술 램프를 오타마와 교환할 셈이었든가 했겠지.
다만 문제라면...가짜랍시고 내 진료소에서 꺼내 들고간 물건이, 가장 눈에 띄는 색이라는 이유로 집어든 '여우 누이'의 '붉은 호리병'이었다는거지만.

꾸러기 수비대가 무사히 오타마를 구해낸 뒤, 가짜 요술 램프인걸 깨달은 아리마 만조는 홧김에 호리병을 집어던져 깨뜨려버렸다고 한다.
과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붉은 호리병이 부서진 순간, 그 안에서 터져나온 화염은 순식간에 저택을 휩쓸었고, 심각한 화상을 입은 아리마 만조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달아났다고 한다.
그것이 나와 미미가 목격했던 아비규환의 진상이었다.

...다음부턴 위험물은 좀 더 주의해서 보관하도록 해야겠다.
하마터면 손녀마저 큰일날 뻔 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똘기가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진 영감님! 어째서 우리가 '알라딘'을 찾을 때 그게 영감님이라고 말하지 않았죠?
만약 그 때 제대로 말만 해줬다면 이런 초(超) 위험한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잖아요? 네?"

"그건 미안하네.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날 '진 영감'이라 부르니까 말일세. 아라진이라는 호칭으로는 이젠 불리지 않는다네.
멀리서 온 손님들이 이미 쓰지 않은지 오래인 '아라진'이라는 호칭을 알고 있을거란 생각하진 못했지.
거기다 요술 램프를 찾는 사람은 '아리마 만조' 한명 뿐이었니까."

"어래? 그럼 진 영감님은 요술 램프를 찾으러 다닌 적이 없어요?"

"...그러고보면 수십년 전에, 꿈에 선조님이 나타나셔서 요술 램프를 찾으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군.
나도 한때는 보물에 혹해서 그 요술 램프라는걸 찾아다녔지만, 오타마가 태어난 뒤로는 그만뒀다네."

"어째서요? 뭐든지 들어주는 요술램프라니 초(超) 멋지잖아요?"

"그야 손녀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잖나."

당연하다는듯 대꾸하는 내게 말문이 막힌 똘기가 뒤로 물러났다.

"하, 할아버지도 참...부끄러운 얘긴 그만하세요."

"하지만 정말로 내 제일의 보물은 오타마 너란다."

쿡-쿡-

쑥쓰러워하는 손녀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미미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러냐며 쳐다보자 미미가 속삭였다.

"(언제까지 시치미 떼실거에요 로우란씨?)"

"(무슨 시치미?)"

"(정말...)"

미미가 일어나더니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어, 어?"

"오타마씨?"

"네? 미미씨?"

"아침에 쓰러졌던 일로 아라기토씨에게 여쭤보고 싶은게 있거든요.
죄송하지만 잠시만 아라기토씨와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올께요."

"어? 미미야, 아직 몸이 불편해?"
"아직 이곳 풍토에 적응이 안된거야?"
"동료로서 문제가 있다면 저희도 알고 싶군요."
"그렇다면 우리도 함께 듣는 편이 낫지 않겠소 미미공?"

똘기, 호치, 드라고, 강다리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미미가 살짝 낯을 붉혔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여성으로서 민감한 내용이라..."

"「「「「!?」」」」"

미미의 변명에 당황해선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넷의 모습에 실소했다.
그런 날 째려보곤 미미는 내 손을 이끌로 진료실 밖으로 나섰다.




뜰 한쪽 구석으로 날 이끈 미미가 질책하듯 물었다.

"언제까지 이 곳에 머무르실거죠?
오늘은 오타마씨의 납치건도 있어서 다들 정신이 없을테지만,
내일이 되서 사령 몬스터의 행방을 찾다보면 머지않아 제 동료들도 로우란씨를 의심스러워 할텐데요?
언제까지고 정체를 숨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건 아니시겠죠?
아니면 『사령조람』으로 강제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질질 시간만 끄시려는 건가요?"

"그래도 오늘은 안돼. 나도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필요하니까.
거기다, 하다 못해 할아버지로서 손녀에게 뭔가 선물 하나 정도는 마련해주고 싶잖아?
같은 여성으로서 미미 넌 오타마가 어떤걸 좋아할 것 같아?"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던 미미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툭하고 중얼거렸다.

"...딱 한가지 오타마씨가 진심으로 기뻐할 만한 선물이 있네요."

"정말? 그게 뭔데?"

"이야기 나라를 원래대로 되돌리는거죠."

"엣?"

미미의 대답에 눈을 깜빡이자 미미가 타이르듯 말했다.

"오타마씨에게...공주님에게 진짜 알라딘을 돌려주세요.
알라딘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공주님과 결혼해야 하는 주인공이잖아요?"

"그게 내가 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거야?"

"네. 그리고 설령 이 세계에서 알라딘과 오타마씨가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라 하더라도,
오타마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는 진짜 알라딘이죠?
겨우 하루 동안 할아버지 흉내를 냈을 뿐인 당신이 아니고 말이에요."

"...무심코 눈물이 나올 만큼 엄한 말이네."

"거짓말 마세요. 눈물은 한방울도 흘리고 있지 않으면서."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도 있잖아?"

"뻔뻔하네요. 애초에 로우란씨가 공주님을 손녀로 만들었다가 정이 들어버린걸 누굴 탓하는거에요?"

"아하하, 그럴지도.
뭐...그래도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겠지?
이제 밤도 늦었고, 오늘 하루는 종일 정신이 없었잖아?"

"...오늘까지만 입막음 해드릴께요. 내일이 되면 저도 어떻게 되든 모르니까요."

"고마워.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맙다고 하지 말아요.
감사 받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까."

"에이~ 부끄러워 하기는~"

히죽대며 웃는 날 미미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로우란씨는 화내지 않는군요?"

"화내줬으면 해?"

"...저는, 당신이 나쁜 사람이었으면 해요."

"흐응? 그거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거야?"

"아뇨. 나빠요. 이야기 나라를 어지럽히니까 나쁜게 당연하잖아요?"

"그럼 뭐가 문제인데?"

"...좀 더 뻔뻔하고, 좀 더 나쁜 사람이라면...
손녀랑 헤어지기 싫어하는 모습 같은걸 보여주지 않으면, 저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거 설마 네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고민 따윈 아니지?"

"...조금은 오타마씨와 로우란씨를 떼어놓는게 망설여졌을 뿐이에요."

"그건 참 쓸데없...지는 않지만! 고마운 일이지만!
그런데 여기서 더 나쁜 사람이 되라고 하는건 어떤 일인데?
오타마에게 가서 사실 공주님인 너를 손녀로 삼은건 실험의 일환이었다고 말하곤 껄껄 웃기라도 해야해?"

"...실험?"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게 있다고 했잖아?
그걸 위해서 알라딘의, 주인공의 운명을 비틀어 보려 했거든."

"...그게 당신에겐 필요했나요?"

"그래. 필요했지."

"오타마씨를 휘말리게 해서라도?"

"응."

짜악-!

따귀에 고개가 돌아갔다.
얼얼한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똑바로 하자 미미가 눈물을 글썽인채 노려보고 있었다.

"...역시 당신은 최악이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미미에게 수긍하곤 씨익 웃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내가 나쁜 녀석인건 나도 인정하니까 너도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
인과응보라는 말 정돈 알고 있고, 지금껏 해왔던 것에 대한 결과는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있으니까."

"때려눕힌 뒤에 잔뜩 매도할지도 몰라요?"

"중상모략이라면 모를까, 정당한 비난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
어차피 썩어빠졌단 표현 같은건 우리들에겐 칭찬이나 마찬가지고."

"...후회하지 말아요."

"흥. 너희야말로 진심이 된 나랑 싸울 걱정이나 해둬."

서로 마주보며 서있길 잠시, 미미가 입을 열었다.

"...볼."

"응?"

"치료하는게 좋겠어요. 오타마씨가 보면 걱정할테니까."

"아! 그렇군. 손녀를 걱정시키는건 안되지."

뺨을 계수나무 잎으로 문질렀다.
멀쩡해진 뺨을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었다.

"손녀 일로 맞은거라서 기왕이면 그대로 놔두고 싶었는데, 거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걸."

"나중에 싸움이 끝나면 다시 때려 드릴까요?"

"어이쿠 무서워라. 네 손바닥은 제법 매서워서 두번 당하는건 사양하고 싶은데?"

"어차피 본 모습으론 그다지 아프지도 않을거면서..."

내 엄살이 가당찮은듯 딴죽을 걸던 미미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진 탓인지 우리를 부르러 오타마가 오고 있었다.

미미가 나와 한차례 눈을 맞추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하룻밤 묵게 해주신다고 하셨죠?
그럼 잘 부탁드려요 '아라기토씨'."

"...편히 쉬다 가시게나 '미미양'."




밤이 깊었다.

이불을 바닥에 깐 뒤, 장농에서 꺼낸 분홍색 토끼 파자마를 들여다 보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할아버지. 저예요."

"오타마니? 들어오렴."

끼이익-

방으로 들어온 오타마가 내 손에 들린 파자마를 보곤 눈을 깜박였다.

"할아버지, 그건?"

"내가 쓰던 잠옷이란다. 예전에 선물 받은 물건이지."

"소중한 물건인가보네요. 제가 손질해 드릴까요?"

"괜찮단다. 이건 그냥 추억 삼아 꺼내본거니까.
그보다 무슨 일이니?"

"미미씨가 할아버지가 제게 할 말이 있을거라고 하셔서..."

"미미양이?"

고개를 끄덕며 오타마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미미가 배려를 해준건가.

"...그러고보면 네게 줄게 있었구나."

"제게요?"

"그래. 너도 한창 예쁘게 꾸미고 다닐 무렵인데, 지금껏 변변한 장신구 없이 지내도록 두다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그래서 오늘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받아주겠니?"

꺼내든 물건을 오타마 앞에 내보였다.

"...반지?"

"우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란다.
손을 내밀어 보렴."

조심스레 내밀어진 오타마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삿된 기운을 몰아내는 영험한 반지라고 하는데 이게 널 지켜줬으면 좋겠구나. 소중히 여겨주렴."

"......"

"이런? 혹시 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니?"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안색이 좋지 않은 오타마의 모습을 염려해 묻자 오타마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 여행자분들과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요..."

"불안해?"

"네. 요술램프와 할아버지의 옛 호칭을 부르며 찾아온 여행자 분들.
요술램프에 미쳐 흉행을 벌이던 아리마 만조.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미씨가 보여준 태도.
모든게 불안하게만 느껴져요...
마치,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이 모든것이 무언가의 전조인 것만 같은 기분이..."

"걱정도 심하구나.
널 혼자 두고 내가 무슨 일을 당하거나 할 리 없잖니."

"하지만...불안해지는걸 어쩔 수 없는걸요?
어째선지 자꾸만 할아버지가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옛날, 요술 램프를 찾아 헤메던 시절로 할아버지가 되돌아갈 것만 같아서...
아리마 만조처럼 탐욕에 빠져 흉행에 이르지 않을까 불안해서..."

"오타마야..."

작게 몸을 떠는 오타마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네 이리도 날 걱정해줘서 기쁘지만, 네가 불안해하거나 슬퍼하면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단다."

오타마를 천천히 다독이며 미미가 말한 소위 '설정'을 내뱉었다.

"수십년 전 꿈에서 선조님의 계시를 받은 이후, 내가 어째서 더이상 요술램프를 찾지 않았는지 아니?"

"...아뇨."

"원래 나의 청춘은 요술램프에 홀려 있었단다.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신비한 램프에 말이다.
그것만 바라며 삼십여년을 허송세월로 보냈단다."

생각해보면 본편에서 지나가듯 나왔던 알라딘의 집념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군.
오타마의 불안감을 가시도록 온기가 나눠지길 바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갓 태어난 너를 보았을 때,
곤히 잠들어 있는 널 안아들었을 때,
잠에서 깨어나 날 보며 생긋 웃어주는 널 보았을 때,
처음으로 보물보다 더 소중한게 있다는 걸 깨달았단다.

수십여년간 계속되어 온 램프에 대한 욕망보다 더, 너의 행복한 미소를 보고싶다는 갈망이 나를 새롭게 채워주었던 거란다.

요술램프를 더이상 찾지 않은 이유는 그것 뿐이야.
나는 네가 있는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할아버지는 요술 램프를 찾길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으세요?
지난 30년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는게 괴롭지 않으셨어요?"

"후회하지 않는단다.
너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손녀를 얻은 난 이미 충분히 행복한걸.
그리고 만약, 존재도 모르는 램프를 찾아 떠돌던 30년이 다름아닌 너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었다면, 나는 그 기다림을 준 선조님에게 감사한단다."

꼬옥하고 옷깃을 쥐는 오타마의 손길이 전해졌다.

"아! 그렇군. 혹시라도 이제 와서 요술 램프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우리 오타마에게 어울리는 멋진 신랑감을 소원으로 빌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단다."

"할아버지도 참..."

"하하하. 그럼 만약 오타마 네가 요술램프를 찾는다면 어떤 소원을 빌고 싶니?"

웃으며 묻자 오타마는 내 품에 얼굴을 묻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할아버지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수 있길 빌고 싶었어요."

"......그래. 그렇게 될거란다."

가만히 오타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밤도 늦었으니 이만 방으로 돌아가렴."

"...할아버지."

"왜 그러니?"

"...오랜만에, 할아버지와 함께 자고 싶어요."

안겨있던 오타마가 부끄러워하며 응석을 부렸다.

거 참, 다 큰 처자가...

...어쩌면 아직 불안이 채 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이정도 부탁은 들어줄까.
어차피 내일이면 이 관계도 끝이고.



이부자리에 눕자, 곁에 누운 오타마가 내 품을 파고 들었다.

"오늘따라 어리광쟁이가 되었구나 오타마야."

"후후..."

부끄러운듯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오타마를 사랑스레 보다가 문득 떠오른게 있었다.

"그러고보면 이렇게 함께 자는 것도 오랜만이로구나.
그리운 기분도 드는데 우리 오타마가 좋아하던 옛날 이야기라도 해줄까?"

"'설녀의 딸' 이야기 말이죠?
'설녀 이야기'의 결말에 제가 울자 당황한 할아버지께서 그 이야기를 해주셨죠."

『설녀 이야기』
인간 남자와 결혼해서 살아가던 설녀가, 어느날 자신의 정체를 남자에게 밝히자, 무서워한 인간 남자가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래. 넌 상냥하니까 그런 슬픈 결말은 싫어했었지.
결국 슬퍼하는 널 달래려고 '설녀의 딸' 이야기를 해줬어야 했지."

뭐, 이건 내 자작 이야기가 아닌 『요괴소년 호야』에 나왔던 이야기지만!
'설녀의 딸'은 '설녀 이야기'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인간 남자에게 배신당한 설녀는 원한으로 마을을 얼어붙게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딸을 앞세워 마을 전체를 얼린다.

하지만 설녀의 딸을 사랑한 소년이 있었고, 소년은 마을을 얼리려는 소녀를 자신의 몸으로 꼭 껴안았다.

소년은 자신의 몸이 차갑게 얼 때까지도 설녀의 딸을 껴안은채 놓치지 않았고, 이윽고 설녀의 딸은 소년의 체온에 녹아내려 물이 되었다.

소년은 남겨진 물 웅덩이를 보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한다.

하지만 그 때, 녹아내린 물에서 소녀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소년의 사랑이 소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소년과 소녀의 사랑을 본 설녀는 결국 마음을 고쳐먹고, 셋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분명 해피엔딩인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이걸 들은 오타마가 또다시 울어버려서 내가 두배로 곤란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오랜만에 다시 들은 이야기에 그리움이 일었는지 오타마는 눈물을 훔치곤 물었다.

"설녀씨의 남편도 만약 그녀의 정체를 알았을 때, 그녀를 상냥히 안아주었다면...그녀에게도 다른 결말이 있었을까요?"

"물론이란다."

웃으며 오타마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딸의 사랑을 보곤 돌아서서 애달프게 우는 늙은 설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슬퍼보였지.

이야기가 끝나자 졸음이 몰려오는듯 눈꺼풀을 깜빡이는 오타마를 재웠다.

"너무 늦게 자면 몸에 안 좋으니 이만 자려무나."

"네...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손을 잡아주는 내게 안심한 미소를 짓곤 오타마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타마가 잠에 든걸 확인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부엌에서 병과 술잔을 들고 대청마루로 돌아오자, 선객이 있었다.

"미미?"

"좋은 밤이네요 '아라기토씨'."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미미가 내 손에 들린 병과 술잔을 보곤 눈이 가늘어졌다.

"이 늦은 시간에 술이라니 추천하진 못하겠는데요."

"너무 그렇게 나무라지 마려무나.
그냥 생각나서 가져온 것 뿐이란다.
그것보다 아가씨는 아직껏 자지 않은건가?"

"오타마씨의 방에서 잠을 자다가 방금전 문여는 소리에 깼어요."

"안자고 깨어있었구먼."

"...상관없잖아요.
그보다 지금부터 술인가요?"

"술은 아니지만, 공연히 마음이 뒤숭숭해서 말일세.
대작은 바라지 않지만 적적한 노인네의 말동무라도 되어주지 않겠나?"

"...잠시만이라면요."

승낙을 받곤 미미의 곁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달을 안주 삼아 술잔에 병을 기울였다.
잔을 입에 대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잔을 들고서 달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미미가 물었다.

"...오타마씨와 이야기는 다 끝내셨나요?"

"그래.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 작별 선물을 줬지."

"뭘요?"

"반지."

"...결혼 반지요?"

"큰일날 소릴...그냥 패물일세.
뭐, 소중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오타마가 주는건 자유지만."

결혼하니까 문득 떠오른게 있었다.

"그러고보면 호치가 내 손녀에게 반해있는 눈치던데?"

"네? 호치가요?"

"그래. '쿠키'라는 좋아하는 고양이 정령이 있다고 했으면서도 내 손녀에게 홀릴 줄이야.
뭐, 그만큼 내 손녀가 예쁘긴 하지만."

"...'쿠키' 얘기를 꺼내시는건가요? 기껏 신경써서 '아라기토씨'라고 불러드렸더니."

"세세한건 신경쓰지마.
어차피 지금은 다들 자고 있으니, 너도 일부러 그런 배려는 안해도 괜찮아."

"정말이지, 이쪽은 혹시나 동료들에게 로우란씨의 정체가 들키지나 않을지 아까부터 조마조마했는데."

"하하, 그건 미안하군.
아무튼, 호치가 여자 보는 눈이 있다는건 알지만, 내 손녀는 못 줘.
그 녀석이 만에 하나 날 이긴다면야 사윗감으로 고려 정도는 해보겠지만. ...정말로 고려해볼 뿐이지만."

"치졸하게 굴지 마세요. 그랬다간 손녀가 시집도 못갈테니까.
그리고 이기고 자시고간에, 아무리 호치가 오타마씨에게 반해있어도, 호치가 이야기 나라에 남을 리 없겠죠?"

"...그건 너희가 '이방인(etranger, 에뜨랑제)'이기 때문이야?"

"저희가 '꾸러기 수비대(에토레인저)'이기 때문이에요."

미미의 말에 침묵하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물어볼게 있어."

"뭐죠?"

"'쥐의 시집가기' 이야기 나라 말인데."

"로우란씨가 처음 갔던 곳 말이군요?"

"...똘기는, 만약 무투회에서 우승했다면 슌린과 결혼했을까?
이야기 나라의 결말을 위해서 쥐 신부와 결혼했을까?"

"그럴리는 없었을거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똘기가 말했는걸요.
자신은 이야기 나라를 지킬 사명이 있으니 그런 걸 신경쓸 순 없다고."

"큭큭, 그거 참 가차없구먼.
슌린이 불쌍하군."

"냉정하지만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해요."

"...그렇겠지..."

"그런데, 그 잔은 언제까지 들고만 계실건가요?"

미미의 지적에 손에 든 잔을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술잔에 담긴 달이 작게 일렁였다.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다, 인가.

"로우란씨?"

대청마루에서 몸을 일으키는 날 미미가 이상한듯 불렀다.
마당을 내려가 뜰 한 귀퉁이를 차지한 앙상한 벚꽃나무 앞에 섰다.

쪼르륵-

술잔을 기울여 잔에 담긴 액체를 벚꽃나무에 뿌렸다.

"그거 마실거 아니었어요?"

"...아니. 이젠 필요없으니까."

"그래요?"

그대로 병에 담긴 액체도 마저 벚꽃나무에 쏟아버리곤 탄식하듯 숨을 내쉬었다.

"...약속을 지킨다는건...어려운 일이군."

"네?"

어떻게되든 내일이면 모두 끝이니까.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곤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방금까지 궁상을 떨어서 미안해.
오타마가 신경쓰이긴 했지만, 하룻밤 시중은 잘 들어줬으니까 할 만큼은 한 것 같고.
이제 미련은 없으니까, 내일이면 불필요한 사정은 신경쓰지 말고 싸우자구."

"순순히 이야기 나라를 원래대로 되돌리진 않는건가요?"

"그럴리가 없잖아?
내가 어째서 고생고생해가며 여러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았는데?
그걸 전부 활용해보기 위해서인게 당연하잖아?
너희와 싸우다보면 뒤섞인 이야기 나라에 좀 더 익숙해질 수 있을텐데 그런 기회를 놓칠수도 없고 말야.

그리고 네가 방금전 말했지?
너희는 '꾸러기 수비대'라고.
그러니 나도 '사령 사천왕'으로서 너희를 상대해 줄게.
환자랑 의원 놀이도 내일이면 끝이니까."

대청마루에 걸터 앉은 미미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여 미미와 눈을 맞추곤 웃었다.

"이젠 오타마를 내세워서 날 설득하려해도 소용없으니까.
이야기 나라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면, 알라딘을 되찾고 싶다면, 『사령조람』으로 날 끄집어내든가 해."

"...후회하실거에요."

"흥. 후회라면 방금 전까지도 질릴만큼 했어."

허리를 바로 세워 한걸음 물러나 미미에게 휘휘 손을 내저었다.

"자자, 그럼 얘기는 여기서 끝이야.
그만 내일을 위해서 잠이나 푹 자둬.
졸음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으니까.
자는 동안 비겁한 수단을 쓴다거나 하진 않을테니 걱정말고."

"로우란씨가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잘거라구요."

대청마루에 일어난 미미가 옷 매무새를 고치곤 돌아섰다.

"그리고 잠자리 걱정은 안해요.
적어도 로우란씨가 자는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는것 하나만큼은 신뢰하고 있으니까요."

"그것 참 핀포인트인 신뢰네."

방문을 열고 문지방 너머로 한걸음 내딛은 미미에게 인사했다.

"잘자. 말동무가 되어줘서 고마웠어."

"...저야말로 요술 양탄자를 태워줘서 고마워요.
안녕히 주무세요."

낮게 한숨을 쉬곤 미미가 문을 닫았다.




미미가 들어가고 적막해진 뜰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올려다본 밤하늘엔 만월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달조차 부끄러워 숨을 정도의 미인이라는건 우리 손녀를 가리키는 말이지."

폐월(閉月).

"『삼켜라』"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의 커튼 한 구석에서 거대하고 어둑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하나 둘 별빛이 사라지고 어느샌가 별빛 하나 없는 새까만 어둠이 달 주변에 드리운다.

그리고...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가 달을 물었다.
날카로운 검은 이빨 사이로 달이 자취를 감췄다.

달이 사라지고 드문드문 별빛만 남은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보곤 몸을 돌려 손녀가 잠든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아침상을 차리는데 오타마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오타마가 오기 전에 아침상 준비는 끝냈다.
'요술 식탁보'는 정말 편리하다니까.

"할아버지...?"

"일어났니 오타마?"

웃으며 반기자 차려진 상을 본 오타마가 어쩔줄 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가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아니란다.
사실 오늘만큼은 내가 아침을 준비하고 싶었거든."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은걸요."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렴.
나이를 먹으니 어쩐지 말이다...뭔가, 아직 내가 손녀에게 해줄 수 있는게 좀 더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니까."

다만 요리는 전적으로 요술 도구에 의지하는것 뿐이지만.

"그럼 밥상은 제가 옮길께요."

"아니, 밥상 정도야 나도 들수 있단다."

"연로하신데 무리하지 마시구요."

"그럼 안전하게 함께 옮기지 않겠니?"

"네~!"

오타마와 함께 상을 들고 부엌을 나서자, 힐끗하고 뜰에 눈길을 준 오타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저것 좀 보세요 할아버지!
벚꽃이 만개했어요!
이미 수명이 다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 그거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어쩌면 저게 어제 손님들이 가져온 복일지도 모르지."

오타마의 말에 싱긋 웃으며 아침상을 방으로 들였다.


이제 곧 이야기의 끝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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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완료가 될 듯 합니다.

어제 전부 완성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네요-_-;

연휴 잘보내셨길 바라며 좋은 꿈 꾸시길~!


※참조

여우 누이의 붉은 호리병: 던지면 불의 벽이 생겨난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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