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미(白眉) 2




# 1209년 9월 동부수풀지대


"장비는 곤봉이랑 구리검 정도면 충분하려나?"

허리에 찬 구리검을 확인하곤 한손에 곤봉을 꼬나쥐고 동부수풀지대로 향했다.

허술한 장비로 인한 불안감은 없었다.
뭐니뭐니해도 동부수풀지대는 무사수행지대 중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그야말로 초심자를 위한 코스.
나무구멍이나 땅굴을 통과해서 가야 하는 길이나, 진흙탕을 헤치면서 가야하는 길 같은게 있어서 다소 번거롭다는걸 제외하면 그렇게 어려운 곳은 아니다.
강력한 몬스터들이 없어서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낮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이곳에서의 돈벌이는 시원찮다.
돈벌이 목적으로 동부수풀지대를 방문할 일은 없다고 할까?
이벤트를 위해서 무사수행을 오는 경우는 있지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내겐 이벤트에 접할 자격은 되지 않는듯 했다.

『요정의 무도회』가 벌어지는 곳.
통나무로 가로막힌 길 너머, 바위벽을 돌아가면 나타나는 장소.
'드래곤 모드키'를 주의하라는 팻말을 지나치면 나타나는, 부러진 나무들 사이로 유일하게 온전한 상태로 자라있는 나무.
혹시모를 기대를 품고 나무 아래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하지만 요정의 모습을 볼 수도, 요정의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요정의 다과회』도 볼 수 없었다.
동부수풀지대의 제일 끝자락에 위치한 곳.
거대한 둥근 기둥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시계처럼 에워싼 거대한 돌들이 놓인 공터.
스톤헨지를 연상시키는 돌무리 가운데서 휴식을 취했지만, 날이 밝아도 요정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전직 해적두목에게 요정과 교감할 감수성이 있다는게 웃기는 일이지.
어쩌면 나의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쉽지만 요정의 무도회는 다음 기회를 노릴 수 밖에.

다만 이벤트와는 별개로 동부수풀지대의 절경은 잘 감상했다.
요정의 다과회가 열린다는 돌유적지 외에도, 땅굴을 통과하면서 발견한 거대한 나무라든지.
어른 십여명이 팔을 벌려야 감쌀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 둘레에 내심 감탄했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도 그게 엘프가 수호한다는 『엘프의 영목』이었겠지.
요정을 볼수 없는 지금의 나로서는 엘프를 만나기는 요원하겠지만.




현상범을 쫓아 동부수풀지대를 탐색하길 나흘째.
동부수풀지대를 경계에서 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빙돌아 수색하던중 비밀통로를 발견했다.
진흙탕속으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자 나온 곳은 사방이 바위로 둘러싸인 장소였다.
여기서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면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하겠지만...

진흙탕속에 숨겨진 비밀통로.
사방이 가려진 장소.
이 두가지 사실은 현상범이 숨은 곳은 바로 이곳이라는 예감을 줬다.
그리고 일대를 수색하던 중 발견한 물건은 그 예감을 확신으로 바꿨다.

'고대의 우유'

체중을 줄여주는 효과를 가진 귀한 음료이자, 동부수풀지대에서 현삼범 '버나자드'가 숨어있는 장소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건.

"과연, 제대로 찾아왔단 말이지.
역시 이곳에 숨어있는게 맞았군. 현상범 버나자드."

부스럭-.

"칫, 들킨건가..."

응?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그쪽을 바라보자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머리엔 노란 구레나룻만 남은 대머리가 수풀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대충 상대가 누군지 짐작하고 쳐다보고 있으려니, 상대는 내손에 들린 곤봉을 보곤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흥. 날 찾고 있었나보지?
그래. 내가 바로 수배범인 버나자드 님이다."

...자기가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다니 찾는 수고를 덜었네.
그런데 '님'은 뭐야? 님은?
자기가 그렇게 잘났다고 생각하나보지?
조금은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자, 버나자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웃는듯한 어조로 나를 구슬렸다.

"뭐, 나도 굳이 네녀석과 다툴 생각은 없어.
날 모른척 한다면 80G를 줄테니까 여기서 사라져라.
너한테도 이득이잖아?"

얼씨구?
80G?
누구 코에 갖다붙이라고 그러냐?
한 1만G 라면 몰라도.

10살짜리 애한테도 잡혀가는 약골 주제에 기만 살았다고 생각하며 곤봉을 꼬나쥐었다.
이 녀석한테 걸린 현상금이면 소소한 생활비 정도는 건질 수 있겠지.
내가 전의를 다지고 있자 버나자드는 화가난 얼굴로 위협했다.

"덤빌테냐?
갑옷도 없이 곤봉 한자루로 대체 무슨 베짱인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는걸 알려주마!"

"누가 할소리!
너야말로 이 몸에게 큰소리 친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땅을 박차고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며 힘껏 곤봉을 휘둘렀다.

"뒈져버렷 로리콘 미수 자식아!"

뻐어억---!

"크어억~~~!"

옆구리에 곤봉이 틀어박혀 비명을 내지르는 버나자드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갈겼다.

"커흑!"

...기절하게 만드는것도 간단하진 않네.
이럴땐 역시 무식한 방법이 최고지.
오른손에 들린 몽둥이를 꽉 쥐었다.




동부수풀지대 검문소

"...누구요 이자는?"

"버나자드. 현상범요."

"...왜 이렇게 바뀌었소?"

기절할때까지 패다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부풀어 올라 엉망진창이 된 얼굴의 버나자드.
너무 변한 얼굴에 순간 버나자드를 못알아 본 경비대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버나자드를 인수했다.

현상금은 이후 관리를 통해 지급한다고 했다.
이걸로 한동안 여관비는 건졌군.

버나자드와의 싸움은 싸움이라기에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한대도 맞지 않고 버나자드를 쓰러뜨렸으니까.
선빵을 날리는 자가 이기는거 아니냐고 지적받으면 할말은 없지만.

아무튼 동부수풀지대 탐색은 예정보다 일찍 마무리 되었다.
남부수풀지대 탐험은 11일로 정해뒀으니, 그전까지는 장비를 정돈하며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2번째 현상범 '바니스타'와의 싸움도 이번처럼 수월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숙소 침대 누워 눈을 감았다.




"나의 이름은 프랑소아 모레!
거기 평민! 꽤나 실력있는 전사인것 같은데 나랑 겨뤄보지 않겠어?"

"네?"

무사수행을 대비해 마을에서 쇼핑을 하던 중 나를 부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화려한 흰색 의상을 입은 갈색 장발 소녀가 서 있었다.
갈색 웨이브 장발. 연회장에나 보일법한 화사한 흰 드레스에 투명한 면사포와 붉은 망토, 검정 구두.
예쁘게 디자인된 금색의 머리장식과 귓가에 꽂힌 흰꽃.
한손에 든 삐까번쩍한 장검.

...곱게 자란 귀족집 영애이신가.
나도 이곳에 떨어지기 전만 해도 무도와는 인연이 먼 신세였으니 남말할 처진 아니지만.
올챙이적 시절을 생각하며 잠시 반성하곤 거절하기로 했다.
무투회에서라면 혹시 몰라도 저 아가씨 의상은 한눈에 봐도 비싸보였다.
혹시나 찢기라도 하면 갚아내라고 생떼 부리는거 아냐?

"거절합니다. 쇼핑 중이라서요."

"이 나의 도전을 피하는 것이냐? 겁쟁이 같으니..."

"날도 늦었는데 아가씨도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는게 좋습니다."

"비루먹은 용병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것이냐?
...좋다. 그럼 네가 날 에스코트 해줄테냐?"

에스코트?
나보고?
프랑소아의 표정은 뭔가 재밌는 걸 생각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했어?
결투를 거절했으니 대신 날 에스코트 하란 말이다."

...왈가닥 귀족 아가씨의 뭔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싸우는 것 보단 낫겠지.
손익을 판단해서 결론을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스코트 해드리지요.
집이 어디「그럼 간다!」응?"

갑작스런 외침에 어리둥절하는데 프랑소아가 달려들며 검을 찔러왔다.

쉬이잇---!

"으앗!?"

기겁하며 몸을 뒤로 젖혀 검을 피하곤 재빨리 뒤로 물러나 프랑소아를 향해 고함쳤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뭐긴? 에스코트지!
말을 했으면 어디 한번 멋지게 나를 리드해 보라고!"

검으로 리드하는게 에스코트냐?!
이건 또 무슨 '친구되기 = 전력☆전개' 같은 해석이야?!

내가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프랑소아는 내게 파고들며 다시 한번 검을 내질렀다.
이게 정말로...!

몸을 비틀며 검을 피하곤, 허리춤에 찬 곤봉을 쥐고 위협용으로 힘껏 휘둘렀다.

바우우우웅-----!

"!?"

우악스런 파공음과 함께 비산한 먼지에 프랑소아가 황급히 망토로 얼굴을 가리며 물러섰다.
방금전의 위협이 효과가 있었는지 망토를 치운 프랑소아는 살짝 안색이 변해 있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무지막지한 힘을 앞세우는 타입이지 기예로 승부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왠만하면 이대로 물러나길 바라면서 인상을 쓰던 차였다.

"...잠깐."

"음?"

"그 피는 무엇이냐?"

"아? 이것 말입니까?"

곤봉에 잔뜩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이면서 싱긋 웃었다.

"며칠 전에 버나자드라는 현상범을 잡으면서 묻은 피입니다.
순순히 잡혀주질 않아서 얌전해질 때까지 손봐주다보니 곤봉이 조금 더러워졌죠."

뭐, 곤봉이 더러워진건 진흙지대 통과나 몬스터를 잡으면서 나온 체액이랑 피가 묻은 탓도 크지만.

곤봉에 남은 핏자국의 유래를 설명하자 프랑소아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잠시 굳어있던 프랑소아는 슬쩍 자신의 옷을 털더니 몸을 돌렸다.

"...흥이 깨졌군.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다.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곤란하니까."

프랑소아양의 단골 후퇴 대사군요.
오만한 대사에 비해 싱겁게 물러나는 프랑소아의 뒷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번엔 아예 흙탕물이라도 뿌려서 쫓아내든가 해야지 원...




# 1209년 9월 남부폭포지대


남부폭포지대의 탐색은 비교적 편했다.
표류했을 때 폭포지대를 거슬러 올라와 본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 때와 비교해서 3개월 만에 급격하게 강해진 자신을 실감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괴물 인어인 패치피쉬를 때려잡고, 생선 머리를 가진 괴인 피쉬맨도 단숨에 때려눕힐 수 있었으니까.

운도 따라줬는지 현상범 바니스타의 수색도 수월했다.
라플레시아가 피어있는 섬에 현상범 바니스타가 숨어있는건 알고 있었으니까.
여성 현상범이라는 점 이외에는 딱히 언급할만큼 문제는 없었다.
스스로를 붉은 장미 어쩌고 저쩌고 칭하기에 별명에 맞게 친절하게 곤봉을 핏빛 장미로 물들여줬다.

...생각해보면 범죄자 상대로는 참 인정사정 없었구나.
라플레시아 섬『요정의 다과회』를 보지 못한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곤, 한숨을 쉬곤 피투성이가 된 바니스타를 묶었다.




지상에 나라있어
왕은 위세만을 중히 하고
백성은 풍족에 겨워한다.
하늘을 경시하여 제를 아니지내고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 하니
천제 이에 노하여
천명으로 마왕을 불러세워,
마왕, 지하왕이 되어
하늘의 뜻으로 지상을 멸한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세상이 참 말세란 말이다.



"거기 당신! 이름있는 무예자처럼 생각되는군.
나의 이름은 죠니프 더 퀸, 한 수 겨뤄보자!"

"...실례지만 아가씬 몇 살?"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지. 금년 15세다.
뭐야? 혹시 당신,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어?"

"......"

속옷에 가까운, 배꼽을 훤히 드러낸 붉은색 본디지 차림에 팔목까지 감싸는 붉은 장갑.
무릎까지 오는 붉은 롱부츠를 신고 한손엔 채찍을 든 주제에 고작 15살?

천제가 노하신 이유를 알겠군.

이 세상은 꼬맹이들 복장부터가 글러먹었어...

채찍을 휘둘러 바닥을 치면서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만족스러운듯 웃는 금발 여자애를 보면서
머리가 아파지는걸 느끼곤 한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만두머리에 부채를 든 차이나 드레스 소녀, 타오 란팡.
하얀 드레스와 면사포에 붉은 망토를 두른 도도한 아가씨, 프랑소아 모레.
그리고...지금 눈앞에 서있는 붉은 본디지 복장의 금발 소녀, 죠니프 더 퀸 15세.
차례차례 만나는 도전자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재수가 옮붙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체격이나 외모가 한싸움 하게 생겼지만 솔직히 거리의 왈패들 정도의 놈들은 기세에 눌려서 찍소리도 못하고 피했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 여자 무투가들은 도무지 겁이 없나보다.
아니면 셋 다 혈기왕성한 10대라서 겁이 없는건지.
(주점에서 들은 바로는 타오 란팡은 금년 14세, 프랑소아양은 금년 17세라 했다.)
귀찮은 얼굴로 서있는 나를 보다 못한 죠니프가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당신! 대체 싸울 생각이 있는거야!"

"전혀."

"뭐라고!
...흐응~ 혹시, 당신도 내 채찍 맛을 즐기고 싶어하는 변태?"

멀쩡한 사람을 함부로 변태취급하는거 아니다.
도대체 부모란 사람은 딸내미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모양이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쉬곤, 유혹하듯 혀를 할짝이면서 어른스러운 티를 내고 싶어하는 15살 꼬마 여왕님을 불렀다.

"이봐 아가씨."

"뭐야? 겨우 싸울 마음이 생긴거야?"

이상한 업소를 연상시키는 복장을 한 사람을 상대로 잘도 싸울 생각이 나겠다.

"이제 슬슬 가을인데 그렇게 내놓고 다니면 춥지 않아?"

"쓸데없는 참견이야!
이건 뇌살적인 자태로 적을 유혹하려는 거라고!"

"...뇌살?"

"그래! 잘 보라구?
이렇게~!"

난데없이 양팔로 가슴을 받치듯 포즈를 취하면서 죠니프는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이...? 난 SM 복장엔 애초에 관심을 안 갖는다고?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죠니프는 한쪽 눈을 감아 윙크를 보내면서 콧소리를 내었다.

"흐으응...자, 어때~?"

"...풉."

"아! 당신 지금 웃었지!"

"아니아니아니웃다니천만에요여왕님"

"지금 건성으로 말하고 있잖아!"

얼굴이 새빨개져서 씩씩대던 죠니프는 오른손에 쥔 채찍을 움켜쥐며 외쳤다.

"이제 됐어! 당신도 내 채찍 맛을 보면 결국엔 내 발밑에 굴복하게 될거야!"

"어느 쪽이냐면 난 괴롭힘 당하는것 보단, 괴롭혀 주는걸 더 좋아하는데..."

"이...이 변태! 죽엇-!"

쫘아악-!

"으핫!? 네가 남말 할 처지냐!"

사정없이 휘둘러지는 채찍을 피하면서 재빨리 죠니프를 향해 접근했다.
방금전 대화하면서 알게모르게 서로간의 거리를 점점 좁혀뒀기에 금새 죠니프의 눈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익...!"

발악하듯이 채찍을 휘두르려는 죠니프의 오른 어깨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은 죠니프의 배에 댄채 다리를 걸곤 반 어거지로 죠니프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메치기를 제대로 배운적이 없이 쓰는 자기류 힘밀기다.
...격투수업 레벨이 높아지면 메치기도 가르쳐 주려나?

쿵-

"으윽!?"

딱딱한 돌바닥에 잘못 부딪히면 위험하기에 마지막엔 살짝 속도를 늦춰 충격을 줄였다.
그래도 데미지는 있는지라 한동안 어지러워하던 죠니프는 이윽고 정신이 들자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어디에 손대는거야 이 짐승!"

퍽!퍽!

방금전 쓰러뜨리면서 오른손을 그대로 죠니프의 배에 대고 있는걸 봤나보다.
채찍도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젠 승부고 뭐고 상관없이 발길질을 해대는게 좀 무섭다.

"야!? 잠깐, 좀 진정해!"

"방금전의 치한같던 손놀림부터 사과해!"

"뭐가 어째? 이건 다 네 옷차림 때문이잖아!"

"하! 뭐야? 결국 나한테 짐승처럼 발정했다는 거잖아? 이 변태가!"

"아니. 넘어뜨리는데 딴곳 잡다간 네 옷이 벗겨지니까.
공개 노출 플레이라도 할 생각이냐?"

"윽?!"

원래라면 넘어뜨리기 할 때 허리춤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팬티처럼 생긴 핫팬츠를 잡고 비틀었다간 자칫하면 위험한 곳이 노출될지도 몰랐으니까.
소매라도 있는 복장이었다면 그거라도 대신 잡았겠지만...
이건 뭐, 잘못하다간 옷안으로 손이 파고들어갈것 같아서 제대로 손도 못대겠다.

"자. 이해했으면 자의식 과잉은 이쯤 해두고 그만 일어나."

"잠깐...!? 혼자서 일어날 수 있어!"

반항하는 죠니프의 양손을 잡아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죠니프에게 채찍을 주워다 건네주곤 물러났다.

"그럼, 승부는 내가 이긴거지? 난 이만 간다."

"크윽...! 다음번엔 오늘처럼 쉽진 않을꺼야!"

"...또 덤비려고?"

"물론이지! 그땐 반드시 내 채찍으로 당신을 울리고야 말겠어!"

"...넌 먼저 그 변태적인 취미부터 고치는게 좋겠다..."

"신경꺼!"



으르렁거리며 채찍을 말아쥐고서 죠니프는 사라졌다.
이윽고 하나둘씩 구경꾼들도 사라지자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건 이득이 안돼...
무사수행때 몬스터들을 잡으면 돈이랑 아이템을 주잖아?
현상범을 때려잡으면 갑옷이나 현상금을 주잖아?
무투회때의 승리는 적어도 상금은 주잖아?
근데 마을에서의 결투는 이게 뭐야?
이겨봤자 땡전 한푼도 안떨어 진다고.

명성? 어차피 지금 덤비는건 10대의 고만고만한 애송이들이고,
도토리 키재기 하는데 올라갈 명성이 정말로 있기나 한거야?
솔직히 구경하던 사람들도 피식피식 웃으면서 관람하고 있었으니까, 당췌 명성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이 간다.

...뭐, 도전을 받은 상대와 안면을 트게 된다는 것 하나만은 그나마 이점이라고 해야 하나.
다음에는 그럴싸한 무투가들이 나타나주길 바라며 하루의 쇼핑을 마무리지었다.




# 1209년 9월 북부빙산지대


"으아아아아아아~~~~~!!!"

철푸덕-!

바둥바둥~

눈덩이에 거꾸로 파묻혀서 발버둥치다가 간신히 상체를 빼냈다.

"푸핫! 죽는줄 알았네...
아무리 무기가 필요하다지만, 이런 미친 짓은 두 번 다신 하지 않아!"

북부빙산지대에 숨겨져 있다는 『동방도』.
『무신의 검』과 『발큐리아의 검』 다음 가는 무기『동방도』의 가치에는 떨치기 힘든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빙산의 정상과 정상을 잇는 얼음다리 위에서 냅다 몸을 던지는건 정말 제정신이 아닌 행동이었다.
떨어져내린 설원 근처의 동굴에서 발견한 동방도를 챙기고는 투덜대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목표인 현상범 탐색을 시작했다.

북부빙산지대는 춥다는 문제를 제외한다면 지금의 내겐 큰 위협은 없었다.
산 정상 부근에서 조우한 은빛늑대가 다소 성가셨지만 동방도를 몇번 휘둘러 때려잡을 수 있었고.
잡은 녀석으로부터 가끔 얻는 은빛 모피는 항마력에 도움이 되기에 가방이 허용하는만큼 챙겨두기로 했다.

아, 가끔씩 만난 아이스볼을 잡고 얻은 얼음조각도 챙겨뒀다.
예쁜 모양새가 잡화점에 괜찮은 가격을 받고 팔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현상범만 잡으면 이번 무사수행은 깔끔하게 마무리 될거라 생각하며 기대에 찬 발걸음을 옮겼다.



마법의 불벼락이 몸에 떨어졌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돌진해 눈앞의 적을 베었다.

"우어어어억---!"

즈아아앗---!!

쩌어엉-!

"크윽!? 젠, 장...! 이 괴물이!"

퍼엉!

"큭!?"

카스티유의 마법에 또다시 뒤로 날려지곤 이를 악물었다.

마법이라는거 정말이지 더럽게 아프네!
빌어처먹을 현상범 놈이 주제 파악도 못하고 마법을 쓰고 난리야!
남자답지 못한 자식!
칼을 꺼내들고 기세등등할 땐 언제고 이젠 자존심도 없이 마법만 펑펑 날려대는 엿같은 자식들은 죄다 뒤져버리라지!

내심 악담을 하며 동방도를 겨누고 자세를 잡자, 믿을 수 없는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카스티유가 중얼거렸다.

"네 놈...정말로 인간이냐?"

"뭐?"

"어째서 아직도 살아있지? 이미 한참 전에 죽었어야 하는데...!"

"하! 마법 따위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내 새끼라면 거지 같은 마법 따위에 의지하지 말고 검으로 덤벼봐!"

"...이걸로 덤비라고 괴물 자식아?"

엉망진창으로 이가 나가고 휘어진 자신의 검을 들어보이며 카스티유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과연 동방도가 명검이긴 명검이로군.
피식 웃은게 심기를 건드렸는지 카스티유가 발악하며 손을 펼쳤다.

"이제 그만 좀 죽어라! 이 괴물 놈아!"

콰아앙!

"윽! 이 자식이 치사하게 또 마법을!"

온몸을 뒤흔드는 충격에 이를 깨물고 카스티유에게 덤벼들었다.

"야 이 새끼야! 오늘 내가 널 못때려잡으면 사람이 아니다!"

펑!

"야 이,"

퍼엉!

"큭!? 이게 진짜!"

퍼어엉-!

"으윽...네 놈! 진짜로 죽여버린다아아아아!"

즈오옷---!

카아앙-!

"크흑!"

...?
내 검을 간신히 받아낸 카스티유가 떨리는 팔을 부여잡은채 물러섰다.
방금전엔 마법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기에 의아해하길 잠시, 곧 이유를 깨닫곤 눈을 희번득 떴다.

"오호라...? 너 이제 MP가 바닥났구나?"

"!?"

"겨우 마법 여덟번 싸지르고 끝이었냐? 웃기네.
그러니까 내가 그 엿같은 마법 따위 쓰지 말라고 했잖아?"

절망스런 얼굴이 된 카스티유를 보며 이빨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웃었다.

"넌 이제 뒈졌다고 복창해라아아아아아아!!!"




북부빙산지대 검문소

"...누구요 이자는?"

"카스티유. 현상범입니다."

"...끔찍하게도 당했군.
그런데 자네는 괜찮나? 자네도 잔뜩 피를 흘린 것 같은데..."

"응? 아아, 괜찮습니다."

피칠갑을 한 내 미스릴 갑옷을 보며 경비대원이 걱정스레 묻자 웃으며 답했다.

"이건 제 피가 아니거든요."

"그, 그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곤 경비대들은 쓰러져있는 카스티유를 인수했다.
현상금은 이번달 말에 나온다는 설명을 듣곤 검문소를 떠났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 현상범 인계니까 굳이 추가 설명을 요구할 건 없었다.

북부빙산지대의 탐험은 내게 우수한 아이템과 더불어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인간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검 『동방도』.
카스티유를 때려잡고 빼앗은 최강의 갑옷 『미스릴 갑옷』.

그리고 마법의 무서움을 배웠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언제까지고 마법공격을 몸으로 때울 순 없다.
온 몸이 뒤흔들리는 고통을 일부러 겪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조만간 대응책을 고심할 필요가 있을 듯 했다.
우선은 항마력을 높여준다는 은색 모피를 가공해야 하려나?
마음을 정하곤 은색 모피의 무두질을 해줄 장인을 찾으러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 이름은 홀스트 하임만!
그대! 이름있는 전사로 보이니 나와 한 수 겨뤄보자!"

...좀 쉬자 이 놈들아...

갈색 머리에 푸른 머리띠를 두른 청년 검사를 피곤한 눈으로 응시했다.
한손에는 방패를, 한손에는 검을 쥔 철갑옷의 검사.

응. 그래. 이거야.

무기를 들고 맞붙는게 진짜 피끓는 전투지.

...그러니까 부탁이니 마법은 쓰지마.

쓰지마.

전의와 한심한 마음이 뒤섞인채 곤봉을 꼬나쥐곤 홀스트 하임만을 향해 한걸음 내디뎠다.




"현상범 바나자드, 바니스타, 카스티유를 체포한 공으로, 머슬 할발을 왕국의 이름으로 표창합니다."

"저자가 그 흉악한 바나자드, 바니스타, 카스티유를 붙잡았다고?"
"고작 한 달만에 그 셋을 잡았어? 굉장한데?"
"과연 강해 보이는군. 저 튼튼한 근육 좀 봐."
"그런데 붙잡힌 현상범을 본 경비병들이 무척이나 놀랐다고 하던데?"
"그렇대요. 처음엔 현상범인줄 몰랐대요."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팼다지요?"
"그렇다지? 어찌나 지독한지, 버나자드와 카스티유는 아직까지도 나무몽둥이를 보면 발작을 한다던걸?"
"여자라고 봐주는건 없었다지? 붉은 장미 바니스타도 피투성이로 실려왔다던데?"
"흉악한 현상범에 걸맞는 흉악한 현상금 사냥꾼이네요."
"젊은데 꽤나 우악스러운 사람인가보구먼..."

"그러고보면 며칠전 거리에서 싸움 봤어요?"
"무슨 싸움?"
"저 현상금 사냥꾼과 갑옷차림의 청년 검사의 싸움 말예요."
"아, 맞아. 피투성이 곤봉으로 청년 검사를 멀리 날려버렸다지?"
"그런데 왜 검을 쓰지 않고 몽둥이를 썼을까요?"
"손대중에 자신이 없어서라고 그러지 않았어?"
"응? 손맛이 있어서라고 그랬던것 같은데?"
"어느쪽이든 무지막지하구먼."

"......"

수근대는 주민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신경쓰이는 표창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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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이 46화와 청출어람 7화 진척이 늦어져 죄송합니다.m(_ _)m;

이불이 46화는 쓰다보니 내용이 어째 심심해 보여서 좀 더 생각중입니다.
...좀 있으면 45화 쓴지 한달이 되네요( --);
여차하면 46화는 지금까지 구상한대로 그냥 쓰고, 47화를 기약하는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보류입니다. OTL;

청출어람 7화는 전개 방향을 두고 고민하다가 살붙이기가 덜 된 상태네요-_-;
이것도 마무리를 잘 해야 할텐데 말이죠...;

이전 내용을 울궈먹는 느낌이라 양심 찔리는 백미도 3화 중반부턴 리메이크 플롯대로 진행되겠지요^^;



그럼 다들 주말 잘보내시고, 아마도 다음 주에 셋(火,靑,白) 중 하나로 뵙겠습니다!;;;



p.s. 프린세스 메이커2 설정 (현재 1209년)


타오 란팡(14세)



프랑소아 모레(17세)



죠니프 더 퀸(15세)


(링크)등장인물 이미지(전투, 댄스, 라이벌, etc.) - 다소 이름이 다를 수 있습니다.


*동방도: 상점표 최고의 검.
*미스릴갑옷: 방어와 항마가 뛰어난 최고의 갑옷
*칠흑비늘: 방어력 상승
*은색모피: 항마력 상승

# 현상범 목록
버나자드(동부): 애꾸. 약하다.
바니스타(남부): 여자. 전투기술이 좀 더 높지만 그뿐.
카스티유(북부): 수염 대머리. 마법도 쓰지만 MP가 80 이라 마법공격은 8번이 한계.(마법공격은 MP 10을 소모한다.)

# 동부수풀지대
요정의 무도회: 요정과 함께 춤추는 밤. 예술을 높여준다. 필요 감수성 100
요정의 다과회: 요정과의 아침 다과회. 요리솜씨를 대폭 늘려준다. 필요 감수성 150

# 남부폭포지대
요정의 무도회: 위와 동일. 예술치 상승이 크다. 필요 감수성 200
요정의 다과회: 위와 동일. 요리솜씨를 늘려준다. 필요 감수성 30

# 북부빙산지대
무신: 천계로 가는 길을 지키는 수문장. 전투 방면의 최종보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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