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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년 10월 수확제 - 무투회 16강 (1회전)

뻐어억-!

푸른 피부의 괴인, 반반 비자로의 얼굴에 곤봉을 박혀들었다.
무방비 상태로 안면 타격을 허용하다니 형편없는 실력이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반반 비자로의 턱을 주먹으로 쳐올리곤 드러난 목을 팔뚝으로 휘감아 반반 비자로를 땅에 메쳤다.

16강전은 전의를 상실한 반반 비자로의 항복 선언으로 싱겁게 끝났다.

해골 목걸이 따윌 차고 다니는 새파란 몬스터를 때려잡을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운 눈으로 쓰러져있는 반반 비자로와 손에 든 곤봉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자, 반반 비자로는 부리나케 달아나버렸다.



# 1209년 10월 수확제 - 무투회 8강 (2회전)

숲인간 담담.
창을 사용하며 마법의 소양도 다소 가지고 있는 우승 후보 중 한명이다.
강철처럼 단단한 '두꺼운 피부'로 악명높다.

강철 같은 피부라고 해도, 그래봐야 피부인데 튼튼하면 얼마나 튼튼하겠느냐고 생각했었지만...역시나 판타지 세계관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전투 개시 직후, 일검에 담담의 창을 두동강내고 그대로 담담의 몸을 베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직감했다.
설마 동방도로 베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괴물은 처음 봤다.
육신갑(肉身甲)이라는건 다름 아닌 담담의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었군.

거기까지였다면 괜찮았다.
아무리 방어가 단단해도 상처는 새겨졌고, 타격을 무효화 하는 수준의 방어는 아니었으니까.

문제라면 강철같은 방어력에 더해서 행해지는 '마법 공격'.
설상가상으로 마법의 위력조차 북부산악지대에서 잡은 현상범 카스티유의 수준을 능가했다.
이러다 담담보다 내가 먼저 쓰러지는게 아닌가 할 정도로.
카스티유를 잡고 얻은 미스릴 갑옷이 없었다면 훨씬 더 엄청난 피해를 입었겠지.
부러진 창대와 강철 건틀릿, 그리고 억척스런 방어력으로 버티면서 마법을 날려대는 담담과의 전투는 치가 떨렸다.

MP가 차고도 남는지 끝없이 날아오는 담담의 마법 공격에 이를 악물었다.
미스릴 갑옷과 근성으로 마법을 버티면서 담담을 검으로 베어 넘기고, 찍고, 날려버리길 한참...

"퉷."

봉두난발이 된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곤 피섞인 침을 내뱉었다.

"...재밌는데."

새하얀 깃털로 장식된 헬멧이 날아가고, 얼굴의 붉은 문신이 길게 찢어진 붉은 상처와 뒤섞이고, 강철같은 피부 전체가 상처투성이로 피칠갑을 한 담담.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며 창을 겨누고 선 담담의 눈을 마주보며 사납게 웃었다.

"좋아. 과연 누가 먼저 쓰러지는지,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우오옷!"

검을 겨누고 돌진하는 나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담담이 주문을 외우던 때였다.

"거기까지!"

"「「!?」」"

크루거 장군의 외침에 나와 담담은 움직임을 멈췄다.

"머슬 할발의 승리다."

"무슨...!?"

무슨 짓이냐고 외치려다 간신히 말을 삼켰다.

크루거 장군이 말을 이었다.

"두사람 모두 무투회에 걸맞는 훌륭한 싸움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투회는 서로의 기예를 겨루는 장소이지 서로의 생명을 노리는 장소가 아닌 바,
시합 내용을 고려하여 머슬 할발의 「판정승」으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


시합은 끝났다.
왕국 무투회 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한 혈투였다는 평을 남기고서.



# 1209년 10월 수확제 - 무투회 준결승

"담담을 상대로 고전했다지?"

"......"

시미터를 든 초록 터번의 남자가 히죽 웃었다.

살렘 라셀.
마법과 검술 양쪽에서 준수한 능력을 갖고 있는 사막의 전사로서 강력한 우승 후보이다.

"네 시합은 잘 봤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저급한 수준의 분쟁이더군."

"...저급해?"

"서로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돌진에 돌진에 돌진.
마치 짐승이 싸우는 듯한 형편없는 싸움이었잖나."

그 말대로다.
담담을 상대로 내가 했던건 뼈를 주고 살을 베는, 터무니없이 막심한 손해를 감내해야 하는 싸움법이었다.
담담의 마법 공격으로 내가 입은 피해는 내가 담담에게 입힌 피해량의 두배는 될 정도로 심각했으니까.
솔직히 이렇게 싸우다간 어쩌면 죽어버리는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

"그래서, 그 무식한 몸뚱아리 덕에 이기니까 기쁘더냐 애송아?"

"......"

「판정승」

일정 시간 이내에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경우 남은 체력(HP)을 기준으로 승패를 가르는 것.

8강전이 끝나고 알게된 사실이지만, 크루거 장군의 판정승 선언시에 담담은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만약 그대로 나와 싸웠다면 머지않아 패배를 시인했을거라고.
결국 나와 담담의 승패를 가른건 나(머슬 할발)의 압도적인 체력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연 승리라 부르기 적당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이어진 살렘 라셀의 말로 멈췄다.

"운좋게 여기까지 왔지만, 담담 같은 이류를 상대로 보여준 막싸움 따위가 내게도 통할거라 생각하지 마라."

"...이류?"

"흥. 튼튼한 몸뚱아리만 믿고 설치는 놈들은 아무리 애써봐야 이류일 뿐이야.
수련을 등한시하고 몸에만 의지하는 그런 놈들은 전사로서 실격이지."

전사 실격?

자신의 육체를 믿고 물러서지 않던 그가.
부러진 창과 건틀릿으로 검을 막아내면서, 검에 베이면서도 끝까지 마법의 주문을 외우던 그 모습이.
사그라들지 않은 전의로 가득차 날 응시하던 그 눈이.
그 시선이...

시합이 끝난 뒤.
토막난 창을 바닥에 꽂은채 짐승같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떨구던 담담의 모습이.

묵묵히 서있는 내게 살렘 라셀은 검을 겨누며 선언했다.

"그럼 관중들도 지루해 할테니 슬슬 승부를 내볼까?
유감이지만 몸 성히 걸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진 마라.
네놈의 이름은 자꾸만 그 재수없는 해적 놈을 떠올리게 만들거든."

"...벌써부터 이긴 기분이라니.
당신은 담담보다 강한거야?"

내 물음이 불쾌한 듯 살렘 라셀이 코웃음쳤다.

"나와 그딴 야만인을 비교하지 마라 애송아.
검과 마법, 그 무엇으로도 그 놈은 날 따라오지 못해."

"허어...?"

살렘 라셀의 말에 웃음을 띄곤 동방도를 검집에 되돌렸다.

"뭐야? 설마 항복 선언인가?"

"그럴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당신은 왕국 제일의 마법 전사라고 불린다며?"

"후후. 네놈도 내 위명 쯤은 들어본 적이 있나보군."

얼씨구?

"몸뚱아리만 믿고 덤비는 막싸움 따위는 담담 같은 야만인에겐 통했을진 몰라도, 나의 검과 마법을 뚫는건 불가능하다.
네 녀석은 절대로 날 이기지 못해."

"우와아~! 정말 그렇단 말이지?"

미소가 짙어졌다.

솔직히 마법 공격을 받는건 싫다.
피하는 법도 모르고 무엇보다 끔찍하리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니까 어지간하면 단숨에 승부를 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다.

"그럼 어디 그 저레벨 공격이라는걸 네놈은 받아낼 수 있는지...
어디 한번 해봐라 이 새끼야!!!"

지금의 나는 상당히 기분이 나쁘니까.




얼굴에 피가 튀었다.

"퉷."

피 섞인 침을 내뱉곤 볼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호언한대로 살렘 라셀의 마법은 담담보다 위력적이었고, 또한 정확했다.
다섯번에 한번 정도는 빗나가던 담담의 마법과는 달리 피하는 요행을 바랄 수도 없었고, 맞을 때마다 몸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받은 만큼은 확실히 돌려줬다.

처음은, 마법을 뚫고 들어온 나를 보고 코웃음치며 살렘 라셀이 시미터를 휘둘렀을 때.
만용의 대가는 살렘 라셀 자신의 뼈가 작살나는걸로 지불했다.

마법 공격이라면 모를까 마법 전사라 칭하는 반푼이의 시미터 공격 따위에 맞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어설픈 칼솜씨로는 차라리 춤이라도 추라지.

몸을 찢어버릴듯 강렬한 마법 공격과 한방한방 확실하게 육신을 박살내는 권격의 교환.

일곱번째 공격에 살렘 라셀이 시미터를 놓쳤다.
여덟번째. 공포에 질린 살렘 라셀의 가드를 부수고 얼굴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아홉번째. 배를 걷어차여 허리를 기역자로 꺾은채 피를 내뿜으며 날아간 살렘 라셀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왕국 제일의 마법 전사 좋아하시네.
몸으로 때우는건 저레벨 분쟁이라며 잘난척 하더니만, 결국 내 공격은 하나도 피하지 못했잖아?
고작 주먹질 일곱번을 못버티고 검을 놓친 주제에 이류니, 전사니, 자격이니 떠들어댔다니.

"...시시한 자식."

아홉번의 권격으로 승부가 가려진 준결승전이었다.



# 1209년 10월 수확제 - 무투회 결승 전(前) 대기실

"자네 검술 도장을 다녀볼 생각은 없나?"

"예?"

대기실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난데없는 레후톨의 말에 얼떨떨해하며 반문했다.

애꾸눈 검사 올 레후톨.
검술 수업의 선생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이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나와 맞붙을 상대이기도 하다.

"자네의 시합을 봤다네.
굉장하더군.
설마 강철의 피부라 불리는 담담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전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살렘 라셀 녀석을 그런식으로 박살내 놓을 줄도 몰랐고."

수염이 듬성듬성한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나를 보던 레후톨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그나저나 자네, 검을 다룬지는 얼마나 되었나?"

"10일 정도 되었군요."

"......"

"레후톨씨?"

괴물을 보는듯한 레후톨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잠시 후 레후톨이 눈을 깜빡이곤 웃었다.

"아, 이거 실례했군.
터무니 없는 말을 들어서 말이지.
검 한자루로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큼 놀랄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한 내가 얼간이였군그래.
아무튼, 자네의 말대로라면 지금의 부족해보이는 모습은 당연한거였군."

"부족해요?"

내 물음에 레후톨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자네는 강해.
참격만으로 따지자면 왕국에서 자네만큼 위력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용사 정도겠지.
하지만 어설퍼.
자네의 검에는 기교가 없어.
자네의 참격은 벤다기 보다는 그냥 힘으로 후려쳐서 찢어버리는거야.
그런식으로 무기를 쓸거라면 차라리 몽둥이가 낫지.
음, 자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그것 말일세."

내 허리춤에 찬 몽둥이를 가리켜 보이곤 한차례 웃다 레후톨이 정색했다.

"분명 자네는 나보다 강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게 있을 것 같군.
제대로 배우기만 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질 수 있을걸?
만약, 강해지고 싶다면 우리 검술 도장에 오도록 하게."

"배려는 정말 감사합니다만, 결승 상대에게 이렇게 조언해주셔도 되는건가요?"

"후후. 장래 유망한 신인에게 눈도장 찍을 속셈이었으니 너무 고마워하지 말라고.
음, 다소 욕심도 있었고."

"욕심이요?"

"그래.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저 용사를 능가할 가능성을 지닌 존재를 내 손으로 키워내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그 도끼 영감탱이를 능가할 녀석을 키워보고 싶은 욕심."

도끼 영감탱이? 나(머슬 할발) 말인가?

"그 도끼 영감님은 용사만큼이나 강했나요?"

내 물음에 레후톨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마왕과의 싸움 이전, 상처입기 전의 용사의 힘은 알 수 없으니까 실제로 비교하는건 무리겠지.
그래도 용사만큼은 아닐걸?
일단 검기술로는 내쪽이 그 영감보단 뛰어나다고 자부하고 있고.
마법에는 맥을 못추는게 보일만큼 속수무책이었고."

"그, 그래요?"

"...다만..."

"?"

"끝을 모르는 체력과 투지.
모든걸 부숴버릴듯 강맹한 참격.
강하고...또한 공포스러웠지."

잠시 묵묵히 서있던 레후톨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벼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 영감은 무식하게 강해서 무투회 단골 우승자였지.
나이도 적잖이 먹은 영감이 허리도 안 좋을텐데 정말이지 무리한다니까.
가끔은 젊은 사람들에게 승리를 양보해줘도 좋을텐데.
덕분에 살렘 라셀 같은 녀석은 영감 상대로 항상 이를 갈고 있었지.
영감 상대로 어지간히도 고전하다보니, 몸뚱아리 튼튼한 녀석들을 보면 언제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한단 말야."

"아아...어쩐지."

"이만 본론으로 돌아가지.
자네는 아직 한참 젊으니까 분명 그 영감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거야."

"그럼 담담을 일격에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까요?"

"...담담?"

"네."

내 말에 말문이 막힌듯 레후톨이 입을 다물었다.

"...음...담담, 담담 말이지..."

듬성듬성 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레후톨이 인상을 쓰다가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적어도 이격은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드래곤 스케일조차 능가한다는 소문이 자자한 저 피부를 한방에 뚫기는 어렵지 않을까?"

과연 육신갑(肉身甲)의 벽은 높았다.

"음...정 자네가 꼭 초살을 노리고 싶다면야, 내키진 않네만 마법 교실 수업을 추천하지."

"NO! 절대로 NO!"

"싫은가?"

"저는 전사로서 그 녀석에게 이기고 싶은거지, 마법사로서 이기고 싶은게 아니니까요."

내 말에 레후톨이 활짝 웃었다.

"자네 뭘 좀 아는구먼!
그래! 사내 자식이라면 역시 검이지!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니까!
애꾸지만. 와하하하하!"

자기 눈을 가리키며 개그를 하는 레후톨을 따라 웃어야 할지 몰라서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자 레후톨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검을 맞대고 싸우는게 남자의 로망이지?"

"아무렴요!"

"후후. 자네랑은 참 마음이 잘 맞는것 같아."

"그렇죠?"

"그러니 언젠가 담담을 쓰러뜨리거든 꼭 말해주게나.
레후톨의 검술 교실에 다녀서 이겼다라고."

"...아, 아하하."

이 아저씨. 의외로 속물 근성이 있는 유쾌한 사람이네.
그래도 덕분에 무투회 결승은 지금까지의 답답한 기분은 날려버리고 편하게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1209년 수확제 - 무투회 시상식

"장하도다 머슬할발.
그대의 싸움은...그러니까...
...으음, 굉장히... 박력이 있었다네."

"영광입니다 폐하."

솔직히 잔인하고 우악스럽다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폐하.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거나, 골육을 박살내거나, 사람을 무기째로 날려버리는 공격은 내가 생각해도 무식했으니까.

결승전은 레후톨을 검째로 날려버리면서 끝났다.
세번 중에 한번 꼴로 치명적인 일격을 날려오는 레후톨은 강적이었다.
설마 검격으로 살렘 라셀의 마법을 능가하는 위력을 낼 줄은 몰랐으니까.

다음달 스케쥴은 검술 도장 올인으로 내심 확정하곤, 우승 상품인 은사의 검을 공손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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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9년 10월 수확제 - 댄스파티

"휘유~ 정말이지 화려하군."

무투회가 끝나고 들른 댄스파티 장에선 각지의 여성들이 저마다의 미를 뽐내고 있었다.

양 손목에 단 리본을 나풀거리며 춤추는, 중동 계열의 아가씨로 추정되는 쥴리에트.
양팔을 펼치고 푸른 드레스를 나부끼며 춤추는 회색 장발의 여성 피올리나.
인도풍 의상을 입고서 고난이도의 춤을 선보이는 옅은 갈색 피부의 아니스.
은발에 어울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서 실력을 뽐내는 무용 교실의 여선생 도베.

그리고...

"어머? 당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거죠?"

"게엑..."

"뭐에요!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반응이라니 실례잖아요!"

녹색의 꽃장식을 단 갈색 만두머리소녀.
붉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양손에 부채를 든 '타오 란팡'은 푸른 눈동자로 나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도 댄스 파티에 출전한거야?"

"당연하죠."

"어쩐지 무투회에선 안보이더라니."

"수련도 좋지만, 레이디라면 자신을 가꿀 줄도 알아야겠죠?"

"인정."

무투회에서 강자들과 겨루면서 동시에 댄스파티에도 참가할 수 있을 정도면 란팡은 꽤나 다재다능한 아가씨 같았다.

"그래서, 제 춤은 어땠어요?"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훌륭했어.
차이나 드레스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가 특히 매력적「퍽!」큭!?"

"장난치지 말아욧!"

"장난이 아니라 진심「또 여관신세를 지게 해드릴까요?」죄송합니다."

노려보는 란팡에게 사과하곤 다시 감상을 말했다.

"무도가로서의 유연함과 경쾌함을 살린 움직임이 인상적이었어.
소도구인 부채를 띄워보인 곡예라거나, 머리 뒤로 길게 내려온 끈들이 부채를 펼치며 일어난 바람에 하늘거리는 효과가 제법 예뻤다구."

란팡이 조금 놀란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뇨. 의외로 성실하게 얘기해주는구나 싶어서요.
당신이니까 건성으로 대답해주는게 아닌가 했거든요.
꽤나 신경써서 보고 있었나봐요?"

"평소의 나는 너에게 대체 어떤 인상인거야?"

"힘은 센 주제에 근성없고 건성에다가 툭하면 도망칠 궁리만 하는 음흉남."

"......"

그러고보니 첫 만남 땐 그랬군.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뒤통수를 매만지는데 뒤에서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네가 왜 여기 있는거야?"

...설마설마설마...?

"...란팡."

"왜 그래요?"

"부디 지금 내 등 뒤에 서있는 여자가 금발에 빨간 속옷만 입은 에로 꼬맹이가 아니라고 말해줘."

"누가 꼬맹이야!"

퍽!

"큭!?"

뒤에서 힘껏 엉덩이를 걷어차여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신을 덮쳐오는 나를 보던 란팡은, 무술가답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피해버렸다.
당연히 난 그대로 바닥에 엎어질수 밖에 없었고.
엎어진채로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는 '죠니프 더 퀸'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속옷이 아냐! 본디지 스타일이라고!"

그거나 이거나 노출도랑 부끄러운건 매한가지 아냐!

그거냐? 스트라이크 위○즈?
팬티가 아니니까 부끄럽지 않아요?
아니면 이 자식이 내 주인○?
맨살이 아니라 살색 스패츠니까 괜찮아?

"그렇게 내놓고 다니면 안부끄럽냐?"

"핫~! 그런건 몸매에 자신이 없는 여자들이나 그런거지!
나같은 미녀는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구."

허허...그러세요?

"그럼 만져봐도 돼?"

"되겠냐!
쳐다보는거랑 만지는건 애초에 달라!
애태우는 남성들을 보는게 즐거운거라구!"

살짝 몸을 가리면서 반박하는 죠니프.
갑작스런 난입자에 란팡은 어리둥절하며 내게 물었다.

"저기, 이 사람은 누군가요?"

"란팡은 초면이었던가?
이 애는 죠니프 더 퀸.
노출증이 있고 의외로 괴롭히는 재미가 있는 15살 꼬맹이."

"노출증이 아니얏! 본디지 패션이라니까!"

화내는 모습이 적당히 화제를 돌리는게 좋아 보였다.

"그래그래. 본디지 패션.
너도 댄스파티에 참가한거야?"

"흥! 물론이지!
아까 내가 춤출때 심사위원 아저씨(대신) 얼굴 봤어?
굉장한 표정으로 날 보더라고.
나의 매력에 홀딱 빠진게 틀림없어."

굉장한 표정?
기가 막힌 표정이겠지.

"...대신님은 똑똑한 여성을 좋아하는데?"

"뭣? 그럴리가...!
분명히 배나온 아저씨들은 이런 복장을 좋아한다고..."

"너 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지식을 배운거야?"

콩-하고 죠니프의 이마를 살짝 두드렸다.

"아얏!"

이마를 매만지는 죠니프에게 한숨이 나왔다.

"...대신님이 보시고 천박하다고 생각하지나 않았을지 걱정이다.
다음 번엔 좀 조신한 복장으로 와."

"조신한?"

"그래. 기왕이면 똑똑해 보이는 옷차림으로 말야."

"그럼 안경+본디지로..."

"너 자꾸 본디지 고집할래?"



왠지 재밌어하는 란팡의 방관으로, 죠니프와 말도 안되는 콩트를 연출하기를 한참.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듬에 따라 대화는 중단되었다.

"어머나? 그때의 그 천박한 평민아냐?"

...이건 또 설마로군...

"...란팡."

"흰 드레스에 붉은 망토. 갈색 웨이브에 흰꽃과 금빛 서클릿을 한 아가씨에요."

"친절한 설명 고마워."

척-하면 착-이라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묘사해준 란팡에게 목례를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는, 흰 드레스가 어울리는 귀족 아가씨.
프랑소아 모레다.

"...오랜만입니다."

"당신 같은 평민이 이런 곳엔 어쩐 일이지?"

"왕국의 아가씨들이 선보이는 춤을 구경하러 왔습니다.
꽃이 가득한 정원에는 나비가 꼬이는 법이니까요."

"핫, 의외로 입담이 있잖아?
그래서, 당신의 마음에 드는 꽃은 찾았어?"

"알고 지내던 이들은 만났지요."

"그래?"

내 말에 프랑소아는 란팡과 죠니프를 번갈아 보곤 짙은 미소를 지었다.

"흐응...한명은 이국의 계집아이고, 다른 한쪽은..."

무례한 언동에 란팡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 졌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죠니프를 빤히 보던 프랑소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내뱉듯이 말했다.

"평민들이 부러워. 그렇게 싸구려 천조각을 입어도 부끄럽지 않으니까."

"뭐야!"

발끈한 죠니프가 당장이라도 잡아먹을듯이 한걸음 나서자 기겁해서 죠니프를 말렸다.

"차, 참아 죠니프?"

"어째서 내가!?"

"우선 침착해."

죠니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당긴 다음, 조롱기 어린 미소를 지은 프랑소아를 보았다.

"아이에게 하는 말로는 어른으로서 잘못하셨습니다."

"내가 평민에게 뭐라하든 상관할 이가 누가 있단 말이냐?"

"밀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훌륭한 이는 겸손함으로써 자신을 높입니다.
화려함은 현명함을 갖출때 더 아름답지요.
당신께서 스스로를 가꾸고자 하신다면, 저희가 당신을 존중하는 만큼 당신도 저희를 존중하는 현명함을 보여 주십시오."

"격에 맞는 상대라면 나도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저들은 정원의 화려한 꽃과 달라.
나비도 찾지 않을 하찮은 잡초들일 뿐이니까."

"물론 그녀들은 꽃 같은게 아닙니다."

"응?"

의외란듯 나를 보는 프랑소아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응시한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녀들이 꽃이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겠지.
죠니프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살짝 떨림이 전해져온다.
진정하라고. 나쁜 뜻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들은 꽃처럼 얌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 세상을 볼 수 있는 그녀들은, 정원의 꽃이라기 보다는 새장을 벗어난 새라고 해야겠지요."

손에 잡힌 죠니프의 어깨에서 떨림이 잦아든다.
그래도 이걸로 안심하면 곤란하지.
거만한 성품의 프랑소아라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의외로 프랑소아는 아무말 없이 나를 보며 제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시선을 피하면 지는거라 생각했기에 계속 프랑소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나중에 무례하다고 혼나는건 아니겠지?

잠시 후, 프랑소아는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시시해."

정말로 재미없다는듯 프랑소아는 뒤로 돌아서서 고개를 돌려 힐끗 이쪽을 봤다.

"당신, 이름이 뭐였지?"

"머슬 할발입니다."

"그래..."

중얼거리듯 말한 프랑소아는 조용히 파티장을 떠나버렸다.
참견이 지나쳐 화나게 한건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를 걱정하고 있으려니 뭔가가 손등을 톡톡하고 건드렸다.
시선을 내려보니 죠니프가 한 손가락으로 어깨에 올려진 내 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제 놔줄래?"

"아...그래."

어깨를 잡은 손을 놓자 죠니프는 살짝 팔을 움직이며 몸을 풀었고, 뒤에 서있던 란팡이 물었다.

"방금전 그 아가씬 누구죠?"

"프랑소아 모레. 검술에 소양이 있는 귀족 영애야.
신경이 날카로울 사춘기 아가씨지."

"뭐라고 할까...굉장히 공격적인 느낌의 사람이군요."

"그래! 뭐야 그 여자는! 이 선구적인 패션 감각을 모른단 말야?"

발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주장하는 죠니프에게 사과했다.

"미안. 그건 나도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

"뭐야!"

버럭-! 하던 죠니프는 문득 뭔가 떠오른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에로 꼬마야?

"그나저나 너, 이름이 머슬 할발이었구나?"

"응? 몰랐던가?"

"저번에 싸웠을땐 듣지도 않고 가버렸으니까."

그랬던가.
그러고보면 항상 도전자만 이름을 말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나도 도전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통성명은 할수 있었을텐데 말이지.

"그럼 설마 이번 무투회 우승자가 너야?"

"무투회 우승? 머슬 할발이?"

신기한듯 쳐다보는 죠니프와, 놀란듯 바라보는 란팡의 모습에 무심코 기분이 들떴다.
우쭐한 표정으로 선사받은 '은사의 검'을 내밀자 둘의 눈이 동그래졌다.

"에에~ 정말이었잖아?"

"암~ 물론이고 말고. 이 몸께서 바로 올해 무투회의 우승자이시다~!"

"「「...재수없어!」」"

"핫핫핫! 존경해라 이 몸을~!"

이젠 나의 명성도 조금은 높아졌을꺼라 생각하며 장미빛 미래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삐딱한 표정으로 날 째려보던 죠니프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무투회에서 엄청난 혈투가 벌어졌다는 얘기가 나돌던데...혹시 뭔가 아는게 있어?"

"응? 혹시 나랑 담담이랑 싸웠을때 얘기려나?"

"담담? 얼굴에 이상한 문신을 한 창잡이 녀석?"

"응. 무투회 2회전 상대였는데, 쓰러뜨리는데 엄청 고생했거든.
그 녀석이랑 칼질 한번 마법 한번 사이좋게 교환하면서 싸우다보니까 서로 꽤나 심한 꼴이 됐었지."

판정승으로 담담에게 이긴 씁쓸한 기억을 곱씹는데 죠니프가 초를 쳤다.

"설마 피하지도 않고 싸웠어?"

"피할 시간에 한대라도 더 때리는게 이기는거야."

"우와아...무식해."

"시끄러! 싸움에 무식하고 말고가 어딨어?
어쨌든 우승했잖아!"

열을 내며 반박하는 나에게 란팡과 죠니프는 충고하듯 말했다.

"기왕이면 멋진 모습으로 이기면 좋잖아요.
보는 국왕폐하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즐거워할 거라고요."

"맞아! 그리고 계속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이기면, 너랑 싸웠던 우리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는것 같아 싫단 말야."

"그러니까 역시 싸움에도 미학이 있어야 해요."

뭐여? 미학이라니, 이게 무슨 동방이야?
탄막은 아름다워야 한다 뭐 그런거냐고?
적어도 사내놈들끼리 싸울 때 미학 따질 생각은 안해봤다.

둘의 핀잔을 받으면서 다짐했다.
검술 수업을 듣고난 뒤엔 이번처럼 진흙탕 싸움 따윈 두번 다시 하지 않을거라고.




【예술상】죠니프 더 퀸

"아하하하하~! 봤어? 봤어?"

죠니프가 가슴을 뽐내며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뜨렸다.

"축하해요 죠니프양."

"축하해. 에, 죠니프."

"방금 에로 꼬맹이라고 하려고 했지?"

"하하하 설마."

째려보던 죠니프가 기분을 고치곤 웃었다.

"뭐, 됐어. 오늘의 난 기분이 좋으니까.
둘에게 한턱 낼께."

"어머? 저도인가요?"

"물론~!"

"오오~! 뭐 사주려구?"

반색하는 내게 죠니프가 눈을 빛냈다.

"후후...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엔 술이 최고지~!
이 죠니프 더 퀸의 사교계 넘버 원으로 가는 첫걸음을 기념하는 첫 술자리야!"

"...쥬스나 마시러 가자."

"왜!?"

"술은 스무살부터야."

"에에~ 영감같은 소리하지 말고~ 응?
내 축하일이잖아?"

"안돼. 15살 밖에 안 됐으면서 벌써부터 발랑 까져 가지곤."

"난 다 컸다고!
이 쭉쭉빵빵한 나이스 바디가 안보이는거야?"

"야!? 가슴 모으지마! 이 에로 꼬맹아!"

"꼬맹이 아니라니까!"

발끈하며 양손으로 가슴을 모아 올려 포즈를 취하는 죠니프의 모습에 기겁하며 말렸다.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재미있어하는 란팡의 시선 속에서 죠니프와 아웅다웅 투닥거리길 잠시...

결국 무투회 우승을 기념할 겸, 내가 죠니프의 축하턱으로 술대신 고급 요리를 사는걸로 일정을 잡았다.

레스토랑에서 눈을 반짝이며 요리를 고르는 죠니프와 란팡의 모습에,
얘내들도 나이대에 어울리게 귀여운 면도 있구나 싶어서 작게 웃었다.

"죠니프. 멋대로 남의 요리 가져가지마."

"남자가 그런걸로 째째하게 굴지마."

"음식을 통째로 가져가는걸 놔두라고?"

"식탁 위는 지금 전쟁 중이야."

남의 요리에 멋대로 포크를 찍어서 서슴없이 약탈하는 해적같은 소행!
전직 해적 두목을 상대로 터무니 없는 만행을 저지르는 죠니프를 나이프와 포크로 막으면서 생각했다.
이 녀석은 사교계 대뷔 이전에 테이블 매너부터 배워야 할 녀석이라고.

"나는 해적왕이 될거야!"

"사교계 데뷔는 어쨌어!?"

죠니프와의 치열한 저레벨 투쟁은 담담히 차를 마시던 란팡이 양손에 든 부채로 우리 이마를 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셋 중 가장 연하인 란팡에게 설교를 들게 된, 다소 부끄러운 경험으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 1209년 11월 검술 교실

레후톨의 권유로 찾아간 검술 수업은 확실히 수업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레후톨이 자리를 비운 사이, 검술 도장의 현판을 부수려고 찾아온 도장 파괴범을 박살내는 와중에 체감한거지만.
도장 파괴범을 물리친 것에 대해서 레후톨의 칭찬을 받은건 좋았다.

다만 레후톨이 자리를 비웠던 이유가 술사러 나갔기 때문이라는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애들 가르치면서 틈만 나면 술을 홀짝이는건 제발 그만둡시다 레후톨 선생님.
무투회에서의 호쾌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간겁니까?

아무튼, 사람 보는 눈 하나('애꾸'니까라는 레후톨의 아저씨 개그는 애써 무시했다)는 자신있다는 레후톨의 평가에 따르자면,
나는 무투회 당시보다 적어도 두 단계는 더 강해졌단다.
...대체 단계의 구분은 어떻게 하는거야?

그리고 거기에 이은 발큐리아의 두번째 방문.

"나날이 정진하는 머슬 할발, 그대의 모습은 실로 훌륭하구나.
뛰어난 전사로 성장한 그대에게 축복을 내리마."


조만간 서부사막지대로 무사수행을 결심하며, 몸가짐을 바로하고 발큐리아의 축복을 받아들였다.



# 1209년 11월 마을

"거래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또 오시오."

(물리적인 의미로) 가벼워진 몸으로 샬름씨의 잡화점을 나섰다.

수확제로 바빴던 탓에 처분하지 못한 장비들을 잡화점에 팔아치웠다.
버나자드와 바니스타를 때려잡고 얻은 가죽갑옷과 비늘갑옷.

쓰지도 않을거 빨리 처분하는게 낫지.

...그러고보면 기념품도 하나 있었네.

품에서 「얼음 조각」을 꺼냈다.
북부빙산지대에서 아이스볼을 잡고 얻은 전리품.

마법적인 이유인지 녹지 않고 냉기를 품은채 반짝이는 「얼음 조각」을 태양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면서 장식용으로 계속 보관해둘까 생각하던 차였다.

"와아~ 예쁘다!"

"응?"

갑자기 들려온 감탄사에 고개를 돌리자, 녹색과 흰색 배색의 목면드레스를 입은 갈색 장발의 귀여운 여자애가 신기한듯 내 손에 들린 「얼음 조각」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그건 뭐예요?"

"이거? 이건 「얼음 조각」이라고, 무사수행 하면서 얻은 전리품이란다."

"그거 제게 팔아주지 않을래요?"

"응? 가지고 싶니?"

"네! 곧 있으면 아빠 생일이라 생일선물을 찾고 있었거든요."

자기가 갖고 싶은게 아니라 아빠 생일선물?

"꼬마 아가씬 몇 살?"

"9살요. 그리고 꼬마 아녜요. 아리스에요."

"응, 아리스라고 하는구나."

아빠 선물이라니, 9살 밖에 안된 애가 기특하네.

"저기, 이만큼으로 살 수 있어요?"

꼬마...아니, 아리스가 주섬주섬 용돈 주머니를 열어보였다.
가진 금액은 90 G인가? 아이가 가질 돈 치고는 상당한 거금이다.

시세를 따지자면 얼음조각(600 G)을 잡화점에 팔면 300 G지만...
아빠 선물을 구하는 기특한 아이에게 주는 편이 훨씬 유용하게 쓰이는걸테지.
그 편이 나도 흐뭇하고.
잠시 적당한 이유를 생각해보곤 마음을 정했다.

"돈은 괜찮은데, 대신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뭔데요?"

고개를 갸웃하는 아리스에게 얼음조각을 내밀었다.

"사실은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되서 아직 생소한게 많거든.
길도 잘 모르겠고. 그러니 마을 안내 좀 해주지 않으련?
얼음조각은 안내해주는 답례로 줄께."

내 말에 아리스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네! 좋아요~♪"



기뻐하며 총총걸음으로 마을 안내하는 아리스를 뒤따랐다.

"여긴 샬름 아저씨의 잡화점이에요."

"여긴 제노 아저씨의 무기점이구."

"여긴 리이 수녀님이 계신 성당이죠."

"여긴 론발디리 아저씨의 병원이에요.
예전에 찬걸 너무 먹어 배탈이 났을때 갔더니 하루만에 나았어요.
정말 마법사 같았어요."

병원이라...혹시나 무사수행하다 다치면 들러봐야겠다.

기세좋게 걸어가던 아리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은 마르 아줌마네 옷가게예요."

진열대에 세워진 옷들에 시선을 고정한 아리스의 모습에 물었다.

"혹시 가지고 싶은 옷이 있는거니?"

내 물음에 아리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있지만...전 아직 입을 수 없대요."

아리스의 시선이 고정된 곳엔 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실크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가격은 2000 G.

...맙소사. 동방도 한자루 가격이랑 같잖아?
여긴 명검보다 여성복 한벌 가격이 더 비싼 것 같다.

그러고보니 목면 드레스를 입은 이 소녀도 제법 잘사는 집 딸인가보다.

동경하는 눈으로 실크 드레스를 보던 아리스는 잠시 후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돌리곤 안내를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여긴 발본 아저씨의 레스토랑이에요.
가끔 아빠랑 외식하러 오는데 엄청 맛있어요."

진짜냐...
수확제 기간에 이 곳에서 죠니프랑 란팡과 함께 식사 한번 하는데만 수백G가 들었는데, 아리스가 귀한집 자식인건 확실한 것 같다.

케이크 가격을 확인하면서 지갑의 돈을 하나하나 세는 아리스의 모습에 눈시울을 붉혔다.
...좋은 아이야. 정말 좋은 아이야...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에 손수건으로 눈을 꾹꾹 눌렀다.

내가 뒤에서 청승을 떨거나 말거나 아리스는 돈을 꺼내 발본씨로부터 케이크를 구매했다.

"케이크 가격은 80 G란다."

"네. 여기요~!"

"여깄단다. 잘 들고 가거라."

"네. 영차~!"

기세좋게 케이크 상자를 받은건 좋았지만, 비싼 값을 하는건지 9살인 아리스에겐 좀 잡기 어려운 크기의 케이크 상자였다.
케이크 상자가 기울지 않도록 몸앞으로 상자를 내밀며 걷는 아리스로부터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다.

"아앗?"

"내가 들어줄께."

"엣? 그치만..."

"열심히 마을을 안내해 준 답례야.
귀여운 숙녀를 에스코트하는건 신사의 기본 소양이고."

프랑소아양처럼 난데없이 검을 내지르는 에스코트가 아니라면 나로서도 대환영이다.

내 말에 아리스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 대신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어, 그치만..."

내 부탁에 아리스가 당황한듯 우물쭈물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눈썹이랑 머리카락이 새하얀데...
거기다 듬성듬성 흰수염까지 나있구...
젊은 할아버지 아녔어요?"

"......"

설마 할아버지라 부르려다가 아저씨로 봐준거였냐?
아무래도 수염은 깔끔하게 관리해야 할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돌아오셨어요 아가씨?"

저택으로 들어선 아리스를 집사복을 입은 청년이 맞이했다.
과연 부잣집 꼬마 아가씨였나.
그런데 군청색 머리카락에 뾰족한 귀라니, 이 집사 인간이 아니잖아?
아리스의 뒤에서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있는 날 보며 청년이 눈을 깜박였다.

"실례시만 그분은?"

"응. 아빠 생일선물을 구해준 아저씨야.
답례로 마을 구경하는거 도와주고 왔어~!"

"그러셨군요."

배시시 웃는 아리스에게 마주웃어주곤 청년이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아가씨께서 신세를 졌나보군요. 감사합니다.
전 아가씨의 교육을 담당하는 집사 큐브라고 합니다."

"네. 전 머슬 할발이라고 합니다.
여기 아리스가 산 생일 케이크입니다."

"이런, 감사합니다. 머슬할발씨."

"아뇨. 별말씀을요."



...응?

큐브?

...집사 큐브!?

프린세스 메이커의 귀염둥이 큐브!?

눈을 깜빡이며 큐브를 바라보자, 큐브도 뭔가 떠올린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에 아리스가 이상한듯 말을 걸어왔다.

"왜그래 큐브?"

"머슬할발이라면 무투회 우승자셨군요.
최근 악명을 떨치던 현상범들을 잡았다고도 들었습니다.
고명한 분을 만나뵙게되서 기쁘군요."

"아뇨. 그저 운이 좋았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생일 축하 잘 해드리렴 아리스."

"응. 고마워요 아저씨~! 바이바이~!"

크게 손을 흔드는 아리스와 목례하는 큐브를 뒤로 하고 저택을 나왔다.




귀엽고 착한 어린아이를 만났다고 생각했더니 천계의 아이였습니다.

'마왕을 쓰러뜨린 용사'의 이었습니다.

그것도 9살.

응. 9살.



...여기 아직 프롤로그도 안 끝난 시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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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느슨하게 보냈더니 어느새 내일이면 추석연휴네요-_-;

연휴 동안 잘 써지길...
다들 추석 잘 보내세요^^



# 인물 소개

아리스(9살): 용사의 딸 (디폴트 네임: 올리브 오일)



큐브: 집사


# 프린세스 메이커 2 이야기

천상에서 아이가 내려오는 날: 1209년 생일(9살)
게임의 시작: 1210년 생일(10살)
백미(白眉)의 시작: 1209년 6월


# 댄스파티
【예술상】죠니프

(예술상은 매력이 높은 사람이, 기술상은 예술이 높은 사람이, 우승은 종합력이 높은 사람이 뽑힌다.)


# 아이템
얼음조각(600 G)
케이크(80 G)
목면 드레스(500 G) 기품+15 (도스판에서는 '나뭇결 드레스'로 오역되었다.)
실크 드레스(2000 G) 기품+40. 13살부터 입을 수 있다.


# 용돈
【자유 행동】시 아리스의 용돈: 나이(9살) X 10 = 90 G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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