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둔 은색 모피 무두질이 끝나면 어떻게 가공할까 고민하며 걷던 중 란팡을 만났다.

"오? 란팡 아냐?"

"오랜만이네요. 무슨 생각 하길래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내가 그런 얼굴을 했던가?

"별건 아니고 저번에 북부빙산지대에 갔을 때 가져온 은빛 늑대의 모피를 뭘로 가공할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내 말에 란팡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왜그래?"

"그렇잖아도 당신은 머리카락도, 수염도, 눈썹도 새하얀 삼백(三白)인데, 거기에 더해서 흰 모피라니.
상상해보니 조금 재밌어서요."

"이상하려나?"

"후후, 아뇨. 잘 어울릴꺼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혹시 흰색에 집착하는거에요?"

"집착하는건 아니고 실용적인 이유 때문에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항마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
은빛 늑대의 가죽이 항마의 효과가 있다니까, 마법의 피해를 막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그랬군요."

"아마도 모피를 10장 정도만 모으면 충분한 항마력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으니, 몇 번 더 북부에 무사수행을 가볼 계획이야."

"엣?"

내 말에 란팡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그래?"

"혹시 그 말 진심이에요?
은색 모피로 항마력을 갖춘다는 것 말예요."

"응. 그런데."

"...설마설마 했지만..."

골치가 아프다는듯 란팡이 부채를 접어 자신의 이마를 눌렀다.

"...당신 바보죠?"

"어째서!?"

"모피를 10장이나?
모자나 토시나 허리띠 정도라면 몰라도, 갑옷 위에 코트를 몇겹이나 만들어서 걸치기라도 할 셈이에요?
그 상태로 전투를 하려고?
아예 미스릴 갑옷을 두벌 겹쳐 입는다고 하지 그래요?"

"...과연, 그건 맹점이었군."

"보통은 누구라도 깨닫겠죠?"

어처구니 없어하는 란팡의 시선에 민망해져 애매하게 웃었다.
아니, 그야 게임에서는 은색 모피(항마력+5)는 소지 아이템으로 10개든 20개든 가질 수 있었으니까.
엄격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모피 수집 계획은 초장부터 파탄났다.
그래도 란팡 덕분에 무의미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게 되서 다행이네.

"그럼 신학 수업이나 묘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항마력을 올려야하나..."

"그렇게 항마력이 절실해요?"

"응. 마법 공격이 너무 아파서 말야.
무투회 때 담담이랑 죽기살기로 싸웠던 것도 마법 공격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게 아니면 누가 좋아서 그런식으로 엉망진창으로 싸우고 싶었겠어?"

내 말에 란팡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기말이죠 머슬 할발?"

"응."

"저번에 제가 말했었죠?
싸움에도 미학이 필요하다고."

"그랬지. 하지만 담담 같은 터프한 녀석을 상대로 미학을 따질 겨를은 없잖아?"

"저도 담담과는 예전에 싸워본 적이 있어요."

"엣!?"

란팡의 말에 놀랐다.
그 무시무시한 육체파 마법 전사랑 맞붙었다고?

"혹시 다치거나 하진 않았어?"

"풋...설마 걱정해주는거에요?
걱정 말아요. 당신과는 다르게 혈투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럼 승부는 어떻게 됐어?"

"무승부였어요."

"...에에에에에!?"

"뭘 그렇게 놀라요?"

"하, 하지만 그 담담이잖아!?
이쪽의 무기는 안먹히지! 마법은 드럽게 아프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던거야?"

"전부 피했는데요?"

진짜냐...

이 아가씨...내 생각보다 훨씬 더 굉장한 무도가였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와중에 란팡이 말을 이었다.

"창이건 마법이건 담담의 공격은 열에 아홉은 피했지만, 저도 담담에겐 피해를 주지 못했죠.
기예에는 앞섰지만 그 두꺼운 피부를 뚫을 힘과 마법이 부족했거든요.
회심의 일격을 맞춰도 피해를 입히지 못해서 결국 무승부로 끝내는게 고작이었어요."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곤 입술을 깨물고 분해하던 란팡은 기분을 고치며 화제를 되돌렸다.

"뭐, 제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저는 싸움의 미학은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자신의 공격을 상대에게 맞추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당신도 항마력으로 마법 공격을 상쇄할 생각보다는, 차라리 마법기술을 단련하는게 어때요?
제 아무리 위력이 강한 마법이라 하더라도 맞지만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몸으로 버티면서 피해를 감수하는 전투는 몸이 상하기도 하고 말예요."

"......"

번뜩였다!
앞으로의 목표가 눈앞에 뚜렷히 보이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

"엣?"

기쁨에 란팡의 한 손을 양손으로 잡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네 덕분에 단련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어!
정말로...정말로 고마워!"

"...별거 아녜요. 그저 마법사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쩔쩔매며 싸울걸 생각하니 불쌍했을 뿐이니까."

당황하며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리며 중얼거리는 란팡의 모습에 잠시 고민했다.
뭔가 답례라도 하고 싶은데...
답례할 만한게 있던가?

...아!

"맞다! 네게 주고 싶은게 있어."

"네?"



어리둥절한 란팡을 데리고 여관으로 향했다.

카운터를 지키던 여관주인이 나와 란팡을 쳐다보고 씨익 웃었다.

"오? 그 때 그 아가씨 아닌가?
오늘은 사이가 좋아 보이는걸?"

"착각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답례하고 싶다기에 마지못해 따라왔을 뿐이니까요."

한손을 붙잡힌채 부채로 눈 아래를 가린 란팡이 내게 물었다.

"그러니까 주고 싶다는건 어디 있는거죠?"

"2층의 내 방에 있어."

"...설마 방에 데려가서 이상한 짓을 할 속셈은 아니겠죠?"

"아니거든?"

낄낄 웃던 주인이 한 손으로 추잡한 사인을 보냈다.

"대낮부터 하는건가? 수완도 좋구먼."

"아녜욧!"

"이크~! 실례."

"저 사인 알아본거야?"

"그런거 몰라요!"



귓가가 새빨개진채 반박하는 란팡을 달래서 방에 들어온 뒤, 생각해둔 아이템을 찾아 건넸다.
예쁘게 반짝이는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이었다.

"이건 뭐죠?"

"요정의 꿀이야."

"...진짜예요?"

"진짜야. 남부폭포지대에서 무사수행 중에 얻은거라구."

"요정의 꿀은 이야기로 밖에 들은 적이 없었는데,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전해지는 바로는 미용에 도움이 되는 비약이래."

내 말에 요정의 꿀을 쳐다보던 란팡의 눈이 변했다.

"...정말로요?"

"응. 정말이야."

실제로 게임상에서는 사용자의 매력을 올려주는 아이템이니까.

"거짓말 아니죠?
이래놓고 정작 효과가 없거나 하는건 아니죠?"

어지간히도 마음이 혹했는지, 다짐을 받으려는 듯 재차 물어오는 란팡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뭐, 란팡은 원래부터 미인이니까 그다지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차이나 드레스의 슬릿 사이로 허벅지를 드러낸 란팡에게 헤벌레하는 마을 남정네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미, 미인이라니...입에 발린 소리 하지 말아요."

"정말인데...
아무튼, 진품이니까 효과는 확실할테니 그런 걱정은 마.
란팡의 조언에 정말로 도움을 받아서 주고 싶었던 물건이고.
적어도 감사의 마음만이라도 표하고 싶었으니까, 부디 사양하지말고 받아줬으면 좋겠어."

내 말에 우물쭈물하던 란팡은 조심스레 요정의 꿀을 받았다.

"...고마워요."

부끄러운듯 볼을 붉히며 웃는 란팡에게 마주 웃었다.

"뭘, 나야말로 정말 고마워.
덕분에 내년 목표도 정해졌고."

"어떤 목표인데요?"

"마법 전사."




12월 초, 4번째 검술 수업을 마쳤을 때, 레후톨로부터 더는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하라는 말을 들었다.
가르칠 것이 없다는 건 진심같았지만, 상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던 후반부 대사는 분명 하산(下山)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실전에서 단련하면서, 레후톨의 검술 교실을 추천하는건 잊지 않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마법 수련'과 교육비를 벌기 위한 '무사수행'의 병행이 있을 뿐이다.




# 1209년 12월 말

마법 수업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가던중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이니즈 오크」라고 수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신경이 쓰여 돌아보자 보따리를 들고 걸어가는 행상인의 모습이 보였다.
청색 중화복, 기다랗게 기른 날카로운 손톱, 붉고 돼지처럼 퉁퉁한 얼굴에 메기수염, 뾰족한 귀에 달린 팬더 귀걸이.
그야말로 수상한 분위기를 물씬 풍겨대니 사람들은 하나같이 힐끔거리기만 할뿐 섣불리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피하기 바쁜 느낌이었다.
하지만 행상인이라면 무언가 괜찮은 물건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다가가서 대화를 걸어보았다.

왕국에 와서 만나는 첫 손님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행상인의 태도가 싫지만은 않았다.
다만 손까지 잡으며 살갑게 구는건 부담스러웠기에 슬그머니 손을 치우고 판매 물품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정령의 반지】(1000 G)
【유니콘 뿔피리】(1000 G)
【풍유환】(1200 G)
【비너스 목걸이】(1500 G)
【미인의 드레스】(4000 G)


5개의 아이템이 행상인이 내놓은 전부였다.

여기서 내가 쓸만한건 뭐가 있을까?


우선 '정령의 반지'.
서부사막지대에서 샘의 정령에게 돌려줄 경우 기품을 올려준다.
반지에 장식된 '정령의 알'은 서부사막지대에서 샘의 정령의 자식이다.
샘의 정령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반지를 돌려주지 않으면 샘이 말라버린다.
돌려주면 기품을 올려주는건 둘째치더라도, 일단 양심상 반지를 샘의 정령에게 돌려준다 이외의 선택지는 없다.


다음으로 '유니콘의 뿔피리'.
동부수풀지대에서 캠핑 도중 사용하면, 다음날 유니콘을 만나서 돌려줄 경우 감수성을 올려준다.
단순히 게임이었다면야 좋을것도 없는 이벤트의 하나일 뿐이지만, 유니콘이라는 신수를 실제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감수성을 올리면 요정을 만날 수 있다는 점도 끌리는 점이었고.


'풍유환'.
진주조개 모양의 상자안에 진주마냥 곱게 놓여져 있는 진홍색의 둥근 약.
복용하면 가슴이 커진다.
가슴을 만지면 커진다느니, 우유를 먹으면 커진다느니 세간에 도는 민간요법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확실한 효과를 보증하는 절세의 보물.
머리카락 나는 약만큼이나 세간에 전설로 회자되는 물건이다.
언젠가 내 집을 마련하고 결혼했을 때, 아내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 같다.


'비너스의 목걸이'.
중앙의 녹색의 둥근 보석과 그 주위로 4개의 은빛 진주가 장식된 화려한 금빛 목걸이다.
비너스의 목걸이 매력, 기품, 감수성에 보정이 있다.
거기에 더불어 매번 생일 때마다 비너스 여신의 축복이 내린다는 대단한 효과가 있다.
(나이에 비례해 매력, 기품, 감수성을 높여준다.)
적어도 미의 여신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인간은 역사에도 손꼽힐 정도겠지.


마지막으로 '미인의 드레스'.
나체에 가깝게 노출이 아슬아슬한 옷이다.
속이 비치는 얇은 천으로 재단된 의상.
비키니에 가까우면서도 잘못 움직이면 은밀한 곳이 슬쩍 비칠것만 같은 엄청난, 옷이라기보다 천쪼가리에 가까운 물건.
이걸 '드레스'라고 당당히 소개하는 행상인이 경악스러울 따름이다.
밤의 전당의 여성들도 이런 옷은 안 입겠다...
본디지의 미학을 당당히 피력하던 죠니프도 이걸 입으라고 준다면 주저없이 따귀를 날릴 것만 같은 노출도였다.


...그러고보니 '악마의 팬던트'는 없군.
생각해보면 당연한가.
'악마의 펜던트'는 지금쯤 마왕씨의 딸인 그렌다가 생일 선물로 받았을테니.
덕분에 이 몸도 더없이 건장한 육체로 회춘한거지만.



아무튼, 살건 정해졌군.

"살건 정했냐해?"

넉살좋게 웃으며 두손을 비비고 있는 행상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따리째 주시오."

"...진심이냐해?"

"물론."

지금 기회를 놓치면 떠돌이 행상인이 언제 다시 왕국에 돌아올지도 알수 없고.
다시는 구하지 못할 물건들을 방치하느니, 수집용으로 생각하고 전부 사두는게 좋겠지.

행상인의 메기 입술이 찢어질듯 귓가에 걸렸다.

"합쳐서 8700 G 다해!
하하하! 왕국 손님은 참 통이 크다해!"

...아무래도 새해 첫 일정은 서부사막지대로 돈벌이

무사수행 가는 걸로 잡아야 할 것 같다.




# 1210년 1월 말

"...이상해."

이상하다.

마법 수업을 마치고 여관에서 쉬다가 중얼거렸다.

대마법사 페이가 찾아오질 않아.

마법 수업을 4번 들으면 페이가 처음으로 찾아와서 '마법기술'을 높여주는게 아니었나?
분명 발큐리아 여신은 전사 수업(검술 수업+격투 수업+무사수행)을 6번, 12번 채웠을 때마다 꼬박꼬박 나타나줬는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한참 뒤에 원인을 찾았다.

대마법사 페이의 첫번째 방문 조건은 이렇다.

마법 교육 4회 이상 + 마법평가 100 이상

...마법평가가 부족했구나.

마법평가는 마법기술+마력+항마력+명성으로 정해진다.
게임 시작 때 기본적으로 주어진 마법기술, 마력, 항마력이 있기 때문에 초기 마법평가는 0이 아니다.
기본적인 마법평가가 있다보니 마법 교육을 4번 하면, 마법평가는 기본적으로 100을 넘기에 자연스레 페이가 등장했지.

하지만 순수 육체파인 머슬 할발의 초기 마법평가는 0!

마법기술0, 마력0, 항마력0 의 위용!

그나마 미스릴 갑옷과 은색 모피의 항마력을 따지면 다소의 마법평가는 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건데 나의 현재 마법평가는 100을 넘기진 못한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남은 길은 하나 뿐이지.




마을을 거닐던 중 지인을 만났다.
새하얀 드레스에 붉은 망토를 두른 갈색 머리의 미녀가 마주선채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흐응...오늘은 네 녀석이 내 상대려나?"

"만나고 싶었습니다 프랑소아양!"

"뭣...!?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거냐!"

얼굴이 새빨개져선 당황하는 프랑소아에게 힘차게 손을 뻗었다.

"승부!"

"응?"

퍼엉!

"꺄악!?"

화염이 프랑소아를 집어삼켰다.




전사평가가 10 올랐다.(아마도)

...orz

마법은 정확히 명중했다.
폭음과 함께 자욱히 먼지가 일어났을 땐 무심코 「해치웠나!?」하고 외쳤을 정도니까.
하지만 흙먼지가 가라앉은 곳에는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는 프랑소아가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먼지를 걷어내고 고개를 든 프랑소아가 당황한 내게 무서운 시선을 보내며 검을 뽑았다.

그 뒤로는 분노한 프랑소아의 공격이었다.
재차 마법을 날려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날아오는 마법을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뚫어버린 프랑소아의 돌진에 경악했다.
그 뒤로 이어진, 프랑소아의 분노가 섞인 무시무시한 기세의 찌르기를 다급히 피했다.
어떻게든 메치기로 프랑소아를 쓰러뜨리긴 했는데 결국 오른건 마법평가가 아닌 전사평가.

전투가 끝난 뒤.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는 프랑소아의 모습은 마법 공격으로는 아무런 타격도 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좌절포즈로 쓰러져있는 날 프랑소아가 불쾌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봤다.

"이긴 주제에 그 꼴사나운 모습은 뭐지 평민?
그리고 방금 전의 그 웃기지도 않는 광대 놀음은 대체 뭐였고?"

과, 광대 놀음?
내 마법이?

"...이..."

"응?"

"마법 전사가 되려는 나의 원대한 야망이..."

"크흠!"

프랑소아가 황급히 입을 가리곤 고개를 돌렸다.
몇차례 헛기침을 하곤 프랑소아가 웃었다.

"큼! 음, 그래...
그러니까, 마법 전사가 네 꿈이란 말이지?"

"...웃고 싶으면 맘껏 웃으시죠."

"설마. 적어도 나는 비참하게 땅을 기며 좌절하는 평민의 꿈을 부수지 않을 정도로는 자비롭단다."

...눈에 동정심이 물씬 담겨있는뎁쇼?

무릎을 굽히곤 살며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상냥하게 말하는 프랑소아의 시선이 아팠다.
뭐야...이겼는데 이 패배감은...

우울한 얼굴로 주섬주섬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 프랑소아가 손을 내밀었다.

"풋. 이걸로 얼굴이라도 닦으렴."

선심 쓰듯 내밀어진 프랑소아의 손수건을 받았다.
프랑소아가 쓰고난 뒤라 먼지가 묻어있는 손수건이었다.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
평민이 쓴 손수건을 다시 쓸 생각 따윈 없으니."

"......"

미소지으며 내뱉어진 밉살스런 말은 흘려듣고 묵묵히 손에 놓인 손수건을 내려보다 코에 댔다.

킁킁.

"무, 무슨 천박한 짓이냐!"

"아뇨, 좋은 향기가 난다 싶어서."

퍽!

"아얏!?"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차여서 쩔쩔매는데 프랑소아가 내 목덜미에 검을 겨눴다.

"프, 프랑소아 아가씨?"

"한번만 더 그런 저속한 짓을 하면 베어버릴테다!"

"예!"

"...흥!"

씩씩거리며 경멸하는 눈으로 날 노려보던 프랑소아는 크게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섰다.
떠나려는 프랑소아의 뒤에서 물었다.

"아, 손수건 돌려드릴까요?"

"쓰고 버려!"

써도 되는거였구나.

어느새 프랑소아의 모습은 사라졌다.

...뭐, 일단 손수건은 챙겨둘까.
재질도 고급이고.
고이 접어서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길거리 도전으로 마법평가를 올릴 생각은 이번 달엔 단념해야할 것 같다.
얌전히 마법수업이나 더 들을 수 밖에.
마법 전사로의 길은 생각만큼 순탄치는 않을 것 같았다.




# 1210년 2월 말

"야-호~! 마법을 배우고 있는 전국의 여러분~!
제가 여러분 모두의 우상, 인생의 목표인, 세계 제일의 마법사, 페이 누나예요~!"


"이얏후우우우우우!!!"

"꺅!?"

환희!
압도적 기쁨!
파란 드레스에 빨간 모자를 쓴 금발의 유쾌한 여성, 대마법사 페이의 방문에 광희난무했다.

"우, 우후후~ 상당히 열광적인 반응에 이 누나도 살짝 놀랐는걸~?"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마법사 페이님!
아, 대마법사란 칭호보다 누나라는 호칭이 더 좋을까요?"

"후훗, 경애의 마음만 담겨 있다면 뭐-든 원하는대로 부르렴~"

"대마법 소녀! 압도적 소녀! 17세! 천사! 여신! 페이쨩!"

"쨔, 쨩은 쪼오~금 부담스러울까나~?"

"그럼 17세 여신!"

"에...그러니까 그 17세 연호는 대체 뭐니?"



"아무튼 이 누나는 마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들이 너~무 좋거든?
아, 너는 이제 아이라고 부를 나이는 아니려나?"

"머슬 할발입니다.
마법을 좋아하는 착한 어린이입니다."

"...흰머리는?"

"새치입니다!"

"...풋! 아하하~! 너도 참 별난 애구나?"

폭소하며 페이는 내게 축복을 내렸다.
눈부신 빛이 실내를 뒤덮었다.
솟아오르는 고양감과 함께 눈을 떴을 땐 페이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페이쨩 최고!
과연 17세 대마법 소녀!



...자아, 그럼 드디어 마법평가가 100을 넘겼을테니, 나도 마법사 흉내는 낼 정도는 되었단 말이렷다?

그럼 이번에야 말로!




"어라? 머슬 할발 아냐?"

"죠니프!
골목길에서 마주칠 줄이야! 그야말로 운명이 따로 없군! 각오해랏!"

"어, 어?"

- 머슬 할발의 마법공격!

"꺄악~!"




전사평가가 10 올랐다.(아마도)



MP가 부족해...orz

사정을 알게된 죠니프가 좌절해서 바닥에 드러누운 날 실컷 비웃었다.

"새로운걸 보여준다더니 겨우 마법 두방? 조루네 푸훗."

"어흑..."

허탈한 심정으로 바닥에 드러누운채 차가운 지면의 감촉을 맛봤다.
한참을 낄낄대던 죠니프가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다가왔다.

"흐응...뭘 그리 기운이 없이 축 늘어져 있어?
나 정도의 미인이 눈앞에 서 있으면 금새 벌떡!하고 일어서는게 사내아냐?"

"넌 야한 농담 좀 자중해..."

"흥이다~ 예쁜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거 몰라?"

...그게 가시라면 타고난 미색마저도 퇴색할꺼다.

"...가시가 꽃잎을 다 가리고 있구먼. "

"뭐야!"

발끈 하던 죠니프는 문득 생각난듯 한손을 말아쥐곤 다른 손바닥을 통-하고 두드렸다.

"아, 맞다! 일어나지 말고 잠시만 그대로 있어봐."

"뭐?"

어리둥절한 나에게 저벅저벅 다가온 죠니프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내 가슴에 왼쪽 다리를 가져다 올렸다.
그리곤 팔목까지 오는 붉은 장갑을 낀 손을 옆구리에 대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붉은 롱부츠의 굽이 가슴에 닿는 감촉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죠니프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가려졌기에 볼수 있었던건 핫팬츠 아래로 드러난 죠니프의 새하얀 허벅지 뿐이었지만.

"...너 대체 뭐하는거야?"

"훗훗훗~ 이걸로 드디어 내 발아래 깔린 남자가 생겼다~!
그것도 무투회 우승자를 발아래 두게 되다니...! 아~ 짜릿해~"

...여왕님 놀이냐?
오른손등으로 살짝 입술을 가리며 교소를 짓는 죠니프는 지금 구도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뭐라고 반박할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마법평가 획득 계획이 두번째로 좌절한 상황.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아 될대로 대란 식으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방금전 패배에 대한 보복에 만족감이 상승작용을 했는지 점점 텐션이 올라간 죠니프는 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오호호호호~!
자아~ 귀여운 목소리로 짖어보련?"

"냥냥-"

"잠깐, 그게 아니잖아! 누가 고양이 흉내를 내랬어?
이럴땐 보통 멍멍이 흉내를 내는거잖아!"

엇나가는 박자에 죠니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난 개보단 고양이가 더 좋은데.

"고양이 귀엽잖아 고양이."

"응, 고양이 귀엽지. 나도 좋아해.
하지만 넌 하나도 안 귀엽거든?"

"너무하시옵니다 「에로 더 퀸」."

"「죠니프 더 퀸」이야!"

퍽-!

"아야!?"

옆구리를 걷어차여서 신음소리를 내자 죠니프는 발을 치우곤 콧방귀를 뀌었다.

"흥-! 쌤통이다.
이름 갖고 장난치니까 그런거라고.【근육 할아범】."

"사과할테니까제발그부르는법은좀봐주세요."

"후후...좋아. 그럼 한가지만 더~!"

죠니프는 몸을 숙이더니 그대로 내 배 위에 앉았다.
다리를 벌려서 얼굴을 마주보며 앉는 말타기 자세가 아니라, 벤치에 앉듯 옆으로 앉아서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이야~ 복근 한번 탄탄하잖아?
역시 물렁 근육은 아니란거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죠니프?"

"후후...! 어릴적 부터 꿈이었어...
남자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보는게 말야...!"

...그건 그 의미가 아닌데 에로 꼬맹아?
보통은 아내가 남편을 휘두르는걸 '깔아뭉갠다'고 표현하는거라고.
그리고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내면 그런 꿈이 생기는거냐 대체...

남의 배위에서 잘도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웃는 죠니프를 보곤 몰래 한숨을 쉬었다.




# 1210년 3월 말

마법 교육 8회째.
대마법사 페이의 방문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한가닥 다르다!

고작 3개월만에 보여준 무지막지한 성장속도에, 마법 교실 선생님 페트만으로부터 '역대 최고의 자질을 가진 학생'이라는 찬사도 들었으니까!

작년 12월부터 올해 3월까지, 4개월간 총 8번의 마법 교육.
6번째 마법 교육으로 페이가 처음 방문했으니, 그걸 기반으로 나의 성장 속도도 대충 역산할 수 있다.

아마 지금쯤이면 충분히 나의 마법 공격이 먹힐터!

MP?
모르는 아이군요.

마법은 2번만 쓸 수 있으면 더 이상은 필요 없다고! ...아마도!

『제 3회 마법평가 획득 계획』, 시작합니다!




"란팡! 나다! 결투해주라!"

"엣? 꺄아아!?"

......이겼다아아아아아!

마법평가 UP!



"이건 또 무슨 소란이지?
응? 그 평민아냐?"

"프랑소아양! 결투해주세요!"

"뭐?"

BOOM-!

이겼다!



"죠니프! 나다! 결투해주라~!"

"꺄아악~! 꺼져 이 영감탱이야~!"




"야 이 나쁜놈아아아아아------!"

죠니프의 고함이 거리가 떠나가라 울렸다.
귀청을 울리는 고함에 비틀거리자 죠니프가 따졌다.

"야! 머슬 할발!
만만해 보이는 사람만 골라서 건드리고 다니는게 그렇게 좋아? 응!?"

어지간히도 분했는지 눈물을 글썽이면서 씩씩거리던 죠니프가 홱- 몸을 돌렸다.

"이제 됐어!
너랑은 두번 다시 안 싸울거야!"

화가 난 죠니프의 모습에 크게 실수했다 싶어, 떠나가려는 죠니프를 뒤쫓았다.

"자, 잠깐 기다려! 내가 잘못했어!"

"이익! 이거 놔!"

죠니프의 붉은 롱부츠에 매달려서 사과했다.

"정말로 미안해! 평가에 눈이 멀어서 내가 잠시 어떻게 됐나봐!
제발 용서해줘! 사죄의 뜻으로 원하는게 있다면 들어줄테니까!"

"...뭐든지?"

"가능한 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

"칫-. 째째하기는.
...그럼 나중에가서 무르기 없기다?"

화를 삭이며 진정한 죠니프의 반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 차였다.

툭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란팡이 부채로 내 어깨를 짚은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란팡의 부탁도 들어줄께."

툭툭.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란팡이 물러서자 반대편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채 무서운 웃음을 짓고 있는 프랑소아가 서 있었다.

"당연히 프랑소아양의 부탁도..."

"어머? 무슨 말을 하는걸까나 이 평민은?"

"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겠지?"

"......"

"이 나를 두번씩이나 기만했으니, 당연히 그정도 각오는 되어 있을테지?"

"...뭐든 명령하시죠 아가씨."

체념하고 말하자 곁에서 듣고 있던 죠니프가 눈을 반짝이며 크게 팔을 흔들었다.

"어? 그럼 나도! 나도 명령으로 할래!
나도 한번 쯤은 손끝만으로 남자를 부려먹고 싶어!"

"예이~ 여왕님. 언제든 명령하십셔~"

"뭐야! 왜 그렇게 반응이 시큰둥해!?
좀 더 감동하라구!"

따지는 죠니프를 달래며 혹시나 싶어 란팡을 쳐다봤다.
설마 너도 '부탁'으로는 만족 못하는거냐?
내 시선에 란팡이 가만히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그 정도는 알아서 판단해 주세요."

"...네."




결투는 모두 끝났다.

마법평가는 순조롭게 올랐다.
...올랐을 것이다.
무투회 때랑 달리 여자 상대로 기세등등하게 군다는 평가가 대다수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진정한 지금에 와서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그저 몰염치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남았다.
마법 평가 조금 올리겠답시고, 지인들 상대로 어지간히도 추잡하게 굴었지.
덕분에 예정에도 없고 기약도 없는 약속을 해버렸고.

죠니프, 란팡, 프랑소아 셋은 부탁(명령)을 보류했다.
지금은 딱히 그럴싸한 부탁이 떠오르질 않기 때문이란다.
다만, 혹여라도 약속을 잊어먹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에, 대체 얼마나 막중한 부탁을 해올지 벌써부터 불안했다.
조급함에 일을 그르친 하루를 반성하고, 다음부터는 부디 조심하자고 다짐하며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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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백미 구버전 울궈먹기는 끝났군요.(아마도)
5화부터는 (리메이크)라는 표시를 안써도 되려나...=_=a;

그럼 좋은 연휴 되세요^^


p.s.

대마법사 페이



1. 담담 vs 란팡

담담과 맞붙을 시 란팡의 회피율은 85% 정도입니다.
길거리 도전자 상태로 둘이 싸우면 대개 무승부로 끝납니다.


2. vs 프랑소아

패인: 미스릴 갑옷이 나빠 미스릴 갑옷이.


3. vs 죠니프

패인: 체력의 반도 못 깎은 마법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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