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슬 할발 형제님."

"네. 리이 수녀님."

"여기 오는게 이것으로 몇번째죠?"

"......8번째입니다."

"...하아아~~~"

땅이 꺼질듯 한숨을 내쉬는 리이 수녀님과 고개가 몸속에 파고들 기세로 움츠러 드는 나.
유리창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빛을 받아 영롱히 반짝이는 가운데
작은 방안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리이 수녀님과 나 사이엔 한동안 거북한 공기가 흘렀다.
온화한 성품으로 마을에 명성이 자자한 리이 수녀님이 드물게 미간을 살짝 매만지며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죄책감이 일었다.
감았던 눈을 뜨며 리이 수녀님은 조금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로 차근차근 말씀하셨다.

"신성한 성당에서, 그것도 배움을 받는 입장으로 있는 사람으로서 조는 것은 결례라고 저번에 말씀 드렸지요?
그런데 10일간의 「신학」수업중 8일을 졸면서 보내다니...
토, 일요일을 빼면 수업 내내 졸았던게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때마다 고개가 조금씩 꺾어져 내려갔다.
민망함에 숙여진 고개 때문에 코가 테이블에 닿을 지경이었다.

지금 이곳은 상담실.

「신학」 교육을 받던중 발생한 사소한 문제로 리이 수녀님께 설교를 듣는 중이다.



작년 무투회에서 듣도 보도 못한 마법사에게 마법 수십발을 사정없이 맞았을 때.
결승에서 담담의 마법 난사를 도망치고 얻어 맞기만 하면서 시간을 끌었을 때.
결국 담담의 마력이 바닥난 다음에야 제대로 싸울수 있었을때.
무투회를 통해서 뼈져리게 통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항마력은 필수라고.

극강의 육체를 지니고 있음에도 항마력이라든지 마력이라든지 마법기술 따위의 마법적인 지식이나 능력은 쥐뿔도 없었다.
마법은 한대 맞으면 말그대로 뼈속까지 아파서 아픈 내색을 안하는게 정말이지 힘들었다.

무투회가 끝난뒤 한동안 바빠서 항마력 키우는걸 잠시 미뤄두고 있었는데
저번에 동부수풀지대 탐험중 만난 엘프로부터 마법적인 능력을 부여받고나자 다시금 항마력을 키울 의욕이 생겼다.
그래서 남은 자금을 탈탈 털어서 의욕만만인 상태로 신학교육을 받았는데...

수업시간 내내 꿈속을 헤매면서 10일을 날려보냈다.
신학 수업중에 졸다니 신앙심이 부족하단 설교를 들으며 매일매일 잠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미인이신 리이 수녀님의 가르침조차도 밀려들어오는 졸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신학 수업을 들으려면 정말로 신앙심이 필요한거야?
...설마 마왕과 거래해서 신앙심이 0이 됐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고개숙인채 테이블을 보며 고민하는 나에게 리이 수녀님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형제님에게 신학 수업은 맞지 않는것 같네요."

"네?"

"신학 수업은 신앙심을 갖고 들어야 하는데 지금의 형제님으로선 무리일듯 하군요.
우선 형제님은 좀더 마음을 경건히 한 뒤 배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그런..."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신앙심을 키워보는게 좋을듯 하군요.
신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다 보면 신앙심도 키울수 있는 좋은 아르바이트니 한번 해보시겠어요?"

"......"



10일간의 신학공부에 남은 돈을 전부 바쳤기 때문에 지금은 밥값 걱정을 할 때이다.
일급 1G 짜리 봉사활동을 했다간 살림이 거덜난다고요...
결국 리이 수녀님의 권유를 사양하고 조용히 성당을 벗어났다.
신학 수업으로 항마력 올리는게 안된다면...



<1210년 공동묘지>

보름달이 뜬 밤.
공동묘지에 줄지어 놓인 비석.
묘지를 둘러싼 울타리 너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어둠.
공동 묘지를 휘감는 짙은 안개 사이로 느껴지는 희미한 이질감.
희끄무레한 그림자와 붉고 푸른 도깨비불이 비석과 수풀 사이사이를 조용히 스쳐지나 간다.
이윽고 비석 사이로 보름달을 뒤로 하며 드리운 검은 그림자.

- 나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여...
그대는 어디의 기사인가...

"......"

-......?

"...추, 추워...고양이가...처녀귀신...우산귀신이...누, 눈이...중얼중얼..."

-......실례했군...

검은 그림자. 붉은 망토를 걸친 해골기사는 자신의 하얀 해골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오늘도 실패인가 머슬할발?"

"...네."

"어째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는 일이 없나?
자네처럼 귀신에 잘 홀리는 사람은 또 처음이로군.
...그나저나, 자네 괜찮나?"

"예?"

"자네 안색이 창백한게 정말 위험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더이상 여기서 일하는건 좋지 않을듯허이."

"그, 그런가요?"

걱정스레 내 안색을 살피는 묘지기 아저씨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해버렸다.
어제밤은 정말로 악몽같았다.
귀신에 홀렸던건지 헛것이 자꾸만 비쳤으니...

한밤중 무덤을 파헤치는 고양이를 보곤 황급히 쫓아버렸는데
도망치는 고양이의 뒷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꼬리 둘 달린 고양이라니, 들어본적 없어...
진정하고 순찰을 재개했을땐 묘령의 귀신이 허공에 둥실 뜬채 무덤가를 지나갔고
원념이 가득한 여성의 목소리가 버려진 우산에서 흘러나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 세계야. 아무것도 이상할것 없잖아?'라고 자기 암시까지 해보았지만...
하지만 판타지는 판타지고, 괴담은 괴담이다.
무서운건 엄연히 무서운거라고.

이상한 현상들에 홀려서 괴현상들을 쫓아가던중 느껴진 시선에 주위를 돌아봤다가
주변 나무들 사이사이의 암흑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무수한 눈동자들을 보곤 엄청난 추위를 느끼면서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순찰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나를 찾으러 묘지기 아저씨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귀신에 홀린채로 하룻밤을 야외에서 새고선 몸져 누워야 했을 것이다.
지난 며칠간 비슷한 일을 반복적으로 당했는데, 익숙해지기는 커녕 점점 안색이 창백해질 따름이었다.
피로에 찌든 내 얼굴을 보던 묘지기 아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게 다 자네 신앙심이 부족해서 그런거라네.
마법사나 전사들이야 항마력을 키워 유령들을 무찌른다고 하지만,
우리같은 일반인들이야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유령따위 전혀 무서워 할 게 없지."

"......"

여기서도 신앙심이 필요한거야?
죽은줄만 알았다가 이세상에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에
나도 나름대론 신에게 감사하고 신앙심도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지금의 이 안습한 상황은 대체 뭐 때문이야?

역시 루시폰이냐? 루시폰 아저씨랑 계약한거 때문이냐!?
마왕은 「천제」가 지상을 멸하라고 보낸거라면서...
어째서 마왕이랑 거래했다고 신앙심이 깎이는건데?

결국 며칠간의 묘지기 아르바이트는 실패로 끝나고 여관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신학 교육」과 「묘지기 아르바이트」.
항마력 증강 계획의 핵심인 두 방법이 전부다 초반부터 파탄나 버리자 맥이 빠져버렸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항마력을 올릴수 있는 방법은 동부수풀지대에서 엘프를 도와서 드래곤 모드키를 잡아주는 것인데...
10일동안 열심히 도와줘봤자 헤어질때 답례로 한번 올려주는 항마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저번에 다시 갔을적에 드래곤 모드키를 워낙 잡아댔더니 당분간은 찾아가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남은건 이제 하나뿐.

...겨울옷이 아마 120G 였지?



<1210년 북부빙산지대>

"추, 춥다아아아..."

수리가 끝난 도끼 한자루를 들고 북부빙산지대에 올랐다.
겨울옷을 사고 나니 남은 돈이 간당간당했다.
쾌유환 같은 회복 아이템을 살 돈도 모자랄 지경이었으니...
이럴줄 알았으면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라도 돈을 좀 빌릴걸 그랬나?
여관 아저씨라든지, 벌목장 분들이라든지, 란팡이라든지, 죠니프라든지...
뭐, 이미 무사수행을 온 지금에 와선 의미없는 후회지만.

이번 무사수행의 목표는 오직 하나!

북부의 고지대에 사는 은빛 늑대를 잡아서 최대한 많은 은색 모피를 모은다.

육체의 항마능력을 제대로 올릴수 없는 상태라면 장비의 항마력을 키우는게 낫다고 생각했고,
바로 북부빙산지대의 은빛 늑대가 떠올랐다.
은빛 늑대의 모피는 항마력을 +5 올려주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니
우선은 은늑대 모피로 갑옷 안에 덧대는 옷이나 토시같은거라도 만들어 쓰는게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한동안 북부빙산지대를 돌아다니면서 은빛 늑대를 잡으면서 은사의 검을 이용해 털가죽을 골라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가죽이나 벗기라고 준 은사의 검은 아니지만 솔직히 단검 갖곤 할게 딱히 생각나질 않으니...
가끔씩 만난 아이스볼을 쓰러뜨리고 얻은 얼음조각은 예쁘게 생겼기에 잡화점에나 팔까 싶어서 챙겨뒀다.


한동안 북부빙산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생각했던것보다 많은 은색 모피를 모을수 있었다.
짐승이 아닌 몬스터라서 인간을 피하는것보다 덤벼드는 녀석들이 많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만 마을로 돌아가서 모피의 무두질을 맡기는게 좋을까?
배낭에 물품들을 챙겨넣고 자리에 일어나 마을을 향해 걸어갈때, 갑자기 위에서 앳된 비명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응?"

철푸덕-!

바둥바둥~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 꼬맹이는 또 누구냐?
놀라서 위를 쳐다볼 새도 없이 눈바닥에 거꾸로 꽂혀버린 꼬마의 모습에 황당해서 잠시 가만히 서있었지만,
머리부터 눈속에 파묻혀 빠져나오는데 고생하는것 같아보여 두 다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읏차~"

푸핫-

"우에엣?"

다리가 들린채 눈에서 빠져나온 꼬맹이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나를 바라 보았다.

"...아저씬 누구?"

아, 아저씨?
최근 모험을 하느라 수염을 제대로 못깎았다지만 그렇게 보일 나이는 아니다 이녀석아...
맹랑한 대사를 한 꼬맹이를 불만스러운 얼굴로 빤히 바라보았다.
살짝 웨이브진 갈색 장발에 예쁜 호박색 눈동자.

"여자애?"

"으...내려줘요 아저씨! 어지럽단 말예요~!"

발목이 잡힌채로 거꾸로 매달린 여자애는 앓는 소리를 내며 바둥거렸다.
속바지를 입었다지만 흘러내리는 치마를 가릴 생각도 안하는게 꽤 아방한듯 했다.
아직 10살 정도로 밖에 안보이는 꼬맹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쬐그만 어린애에게 아저씨 취급 당하는 현실이 서글퍼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니까...길에 있던 이상한 팻말을 보고 뛰어내렸단 말이지?"

"네. 다리에서 뛰어내려라고 적혀있었어요."

다행히 여자애는 자살 지망생은 아니었다.
무슨 보물 탐색을 한다고 길가에 적힌 팻말에 의지해 몸을 던졌단다.
허...그런걸 믿고 겁도없이 뛰어내렸단 말이야?
요즘 애들은 무섭구먼.
물론 10살짜리 꼬맹이를 혼자 모험을 떠나게 한 부모 얼굴도 참 보고싶을 따름이다.

"아저씬 이곳에 무슨 일로 온거에요?"

"나? 난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구하러 왔지."

"뭔데요?"

"은빛 늑대의 모피라고, 사악한 기운으로 부터 착용자를 보호해 주는 물건이지."

"헤에..."

신기해하는 꼬맹이를 바라보다 문득 신경쓰이는게 있어서 주의를 준다.

"그나저나 꼬맹아."

"왜요?"

"나 아직 아저씨 아니다.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우음...눈썹이 하야니까 사실은 할아버지 아녜요?"

"......"

"그리고 저도 꼬맹이 아니에요.
어엿한 레이디라고요."

불만스러운듯 볼을 부풀리는 꼬마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었다.
타오 란팡도 그렇고, 죠니프도 그렇고...이 동네 소녀들은 하나같이 조숙한 애들뿐이네.

"그래그래. 꼬마라 불러서 미안해.
그럼 네 이름은 어떻게 되니?"

"「아리스」요. 아리스 폰 루비델."

"...루비델이라고?"

이상하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姓) 같은데...
...에, 그러니까 루비델이라면 분명히...

"저기...꼬맹아."

"「아.리.스」."

"그래, 아리스.
혹시 말이다...마왕을 쓰러뜨렸다는 분이...?"

"네. 우리 아빠에요."

...진짜냐.

마왕 루시폰을 1:1로 쓰러뜨렸다는 용사.
세상의 타락한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천제가 부른 마왕 루시폰은 힘으론 신과도 맞먹는다고 한다.(팔불출 의혹이 있지만)
그런 마왕을 쓰러뜨린 그는 명실공히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 용사의 수양딸이 바로 이 꼬맹이라고?

휘둥그레 눈을 떠 놀란 표정을 짓는 날 의기양양하게 보던 아리스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곤 날 불렀다.

"저기, 아저씨."

"아저씨 아니라니까..."

"아저씬 이름이 뭐에요?"

아직 자기 소개를 안했던가?
아리스도 내 이름을 몰랐으니까 계속 아저씨란 호칭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나? 머슬 할발인데."

"이상한 이름."

"말하지마...알고 있으니."

"말하기 힘드니까 그냥 아저씨라 부를께요."

"야?!"

터무니없이 사람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꼬맹이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이녀석...장래에 거물이 될거다.




이후 아리스와 함께 왕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아리스의 무사수행도 끝나갈 즈음이었고, 10살짜리 꼬마 혼자서 되돌아가도록 놔두는것도 솔직히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첫만남에서 눈속에 파뭍혀 바둥거리는 모습만 안봤더라면 걱정이 덜했을텐데...

돌아가던 중에 만난 적들은 전부 내쪽에서 처리했다.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면서 도끼로 머리를 박살내거나
은빛늑대처럼 모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몬스터들은 몇대 맞아주는걸 각오하곤 은사의 단검으로 처리했다.
수리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날이 빠져버린 도끼덕에 찍는다기보단 두드려 패는식의 싸움을 할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어째 제대로 된 무기하나 못구하고 있는건지 원...
그런 내 전투장면을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아리스의 모습을 보곤
잘못된 습관을 익히지 않을까 걱정되어 충고했다.

"저기 꼬맹..."

찌릿.

"...아리스."

"왜요 아저씨?"

"내가 싸우는 방식은 그냥 마구잡이로 도끼를 휘두르는것뿐이니까
전투기술 향상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러지말고 너도 전투라도 하면서 경험을 쌓는게 더 나을텐데?"

지금 내 전투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합리적인 전투가 아니라,
튼튼한 몸만 믿고 '한대맞고 두대팬다'는 식의 막싸움이라고.
내 말을 듣던 아리스는 입을 다문채로 주저하다가 조심조심 말했다.

"...몬스터는 무서워요."

"응?"

예상치못한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서워? 몬스터가?
물론 나도 처음엔 흉악한 얼굴의 피쉬맨이 덤벼들땐 기겁하고 달아났었지만...
노력에 따라선 장래에 무신마저 쓰러뜨릴수 있는 이 아이가,
지금 이순간에는 몬스터를 두려워 하고 있다고는 생각치도 못했다.
아직 이 아이가 10살 가량인걸 간과한 내 잘못인가.
아니, 잠깐만.

"그럼 대체 어떻게 북부빙산지대까지 올수 있었던거야?"

몬스터가 죄다 피해가기라도 했나?

"하루에 만나는 몬스터들은 한두마리 뿐이었는걸요.
그때마다 근처 장애물에 숨어 있었어요."

허허...신의 가호라도 받은건가?
실제로 게임에선 한마리 만날때마다 반나절이 지나가지만
난 하루에도 몇번이나 몬스터랑 마주친다고?
게다가 숨는것만으로 수많은 몬스터를 피해서 북부빙산정상까지 올수 있는 인간이 대체 몇이나 될까?

"...아버지가 잘도 무사수행을 허락해주셨구나."

"저, 그게...몰래 나왔어요."

"엑!? 설마... 너 가출한거냐?"

"아녜요!"

빽-!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반박한 아리스는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게...며칠뒤면 아빠 생일이라서 선물을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쉬는날(자유행동)에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아이스볼의 「얼음조각」이 예쁘다고 얘기를 들어서..."

그러니까, 「자유행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아버지 선물 구한다고 돌발적으로 「무사수행」으로 바뀌어 버린건가.
기특한 꼬마 아가씨네.
다만 아버지가 아시면 경을 칠꺼다 아마도.

"후우...빨리 산을 내려가는게 좋겠다.
아버지가 걱정하실꺼야."

"그래도..."

"얼음조각이라면 내가 줄께."

"에?"

배낭을 뒤적거려서 무사수행중에 모은 얼음조각들을 꺼냈다.
마법적인 힘 때문인지 녹지도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세개의 얼음조각은 신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얼음조각들을 꺼내서 놀라는 아리스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걸 아버지 선물로 드리도록 해."

"예쁘다...
그런데 이걸 전부 제게 주는거에요?"

"그래. 난 그다지 쓸 일이 없으니까.
예쁘지만 내게 어울리진 않고.
아버지 드리고 남는건 네가 가지던가 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겠지."

"고마워요 아저씨~!
그럼 큐브 줄꺼에요."

"큐브?"

"저희집 집사요.
집안 청소라든가 여러가지로 바쁘거든요."

자신의 배낭에 얼음조각들을 조심스레 넣으면서 아리스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어린애가 그런걸 신경쓰진 않아도 돼.
그런걸 바라고 준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렇게 되면 아빠가 받는 생일 선물은 제가 아닌 아저씨의 선물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빠는 평소에 '받은 만큼 꼭 되돌려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셨단 말이에요."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닌거 같은데 꼬맹아?
용사라는 사람,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날 것 같다.
'몇배로 부풀려서 복수하라'고 말하지 않은걸 보면 적당히 양심적이기도 한것 같은데.

아무튼 강하게 주장하는 아리스의 모습에 자연스레 난처해졌다.
아무래도 아리스의 머리속에서는
'다른사람이 준것을 대가없이 그대로 아빠에게 건네주는것 = 다른사람이 아빠에게 선물해준것' 이라는 사고가 확립한것 같았다.
고민하던 아리스는 내가 들고 있는 도끼를 보곤 물었다.

"아저씨, 그 도끼...날이 빠졌네요?"

"응 뭐...수리를 몇번 하긴 했지만 원체 무식하게 쓰다 보니까..."

곤봉같은건 몇번 휘두르면 박살이 나니 일회용으로 밖엔 안되고.
벌목용 도끼가 그나마 가장 튼튼하긴 한데 무식하게 박살내는 식으로 휘둘러대다보니까 날이 자주 빠져 나간다.

"아! 그러면..."

아리스는 허리춤에 찬 검을 내밀었다.

"이거 아저씨 줄께요."

"응?"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검보단 나을꺼에요."

엉겁결에 내밀어진 검을 받았다.
검집에서 검을 뽑자 잘갈아진듯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는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건...

"...이거 「롱소드」(장검)잖아?"

검을 쓰는 이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며 뛰어난 성능을 가진 롱소드(철제장검).
물론 모든 전사들의 구입을 희망하는 최고의 무기는 미스릴검이나 동방도지만...
그런 귀한걸 상점에서 본다는건 그야말로 하늘에 별따기.

게다가 최근 무기점에서 구할수 있는건 단검이나 구리검따위의 무기들뿐이었다.
무기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장간쪽의 퍼거슨 영감과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보다.
덕분에 무기류의 가격들도 전체적으로 오른데다가
전투를 할땐 도끼나 구리검 따위로 전투를 수행하는 요즘, 제발 롱소드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바랬는데...
이런걸 고작 얼음조각 몇개의 대가로 준다고?

"저기... 이 검, 비싼거야.
얼음조각 몇개의 대가로 주기엔 과분한 물건이라고.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이런걸 들고있어도 쓸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아빠에게 드릴 선물'은 소중하다는 거니까요."

내가 안 괜찮다.
순진한 꼬맹이를 속여 값을 후려친 사기꾼이 되버린다고.
용사라는 아버지가 안다면 아마 두들겨 맞는 끝이 될꺼다.

한동안 어린애와 입씨름을 하다가 결국 얼음조각에다가 은늑대 모피도 하나 주는걸로 이야기를 끝마쳤다.
(무두질해서 써야 하니까 우선은 상점에 맞겨둔걸 아리스가 찾아가는걸로 했지만.)
항마력을 키우러 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제대로 된 무기를 입수할 수 있었기에 요즘은 꽤나 일진이 좋다고 생각했다.



며칠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아리스에게 용사의 생일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얼음조각을 가져다 드렸더니 정말 기뻐 하시던걸요?
절 안고서 뺨도 부비부비 하고 빙글빙글 도시기에 어지러울 지경이었어요.
헤헤...정말이지 맘에 쏙 드셨나봐요."

...이쪽도 루시퍼 마왕님 못지않게 팔불출이시군요.
따님의 선물이라니까 맥을 못추시는구려...

밝게웃는 아리스의 모습에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튼 아리스의 돌발 무사수행은 그렇게 순탄하게 막을 내렸다.
용사도 기쁘고 아리스도 보람있었고, 나도 롱소드를 얻었으니 결국엔 모두가 이득을 본 윈-윈 전략인가.
잘됐군 잘됐어~.



<1210년 아리스 생일>

"......(지긋이)"

"......"

"......(빤히)"

"......왜그러냐 꼬맹아."

불쑥-

내밀어진 아리스의 양손을 바라보며 무언으로 아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줘요."

"그러니까 뭘...?"

"생일선물요."

"엥?"

"오늘은 제 생일.
그러니까 생일선물 주세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려던 나에게 손을 내밀곤,
당당한 표정으로 선물을 요구하는 아리스의 모습에 황당해서 나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난 오늘이 네 생일이라는걸 지금에서야 알았는데...
선물 같은걸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리 없잖아?"

"그럼 지금 사줘요!"

"억지 부리지마. 나도 요즘 장비를 마련하느라 힘들단 말야."

"...저번에 북쪽 산에서 만났을 때 검도 줬잖아요!"

"야...그건 아버지 선물이랑 교환했잖아?
게다가 그대신 흰늑대 모피도 양보해 줬는데..."

"으..."

나로서도 알고지내는 사이니까 여유가 된다면 꼬맹이 생일 선물정도는 챙겨주고 싶다.
하지만 미리 알고 있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정말 여유자금이 없다.
모피 무두질 값에 항마장비 만든다고 든 돈만해도 엄청 깨졌다.
자체주문 제작품은 역시나 비싸더라고.
덕분에 요 며칠간은 식비걱정까지 해야 한단 말야...
무사수행만 하면서 먹은 거친 음식들 말고 제대로된 식사를 해보고 싶다고!
하다못해 조그만 인형이라도 사주고 싶지만 지금은 늦은 시각이라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아서 무리다.

"흐윽..."

원망스러운듯 나를 쳐다보던 아리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흐윽, 훌쩍...아저씨 미워...훌쩍..."

길 한복판에서 양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는 아리스의 모습에 당황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으려니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어머, 저 남자 좀 봐요.」
「어린애를 울리다니 참 못되먹은 사람도 다 있죠?」
「칭얼대는 아이를 울려놓고 태연히 서있다니 정말로 못됐어.」

내탓인가?
정말 내탓인가?
난 그저 선물살 돈이 없을 뿐인데...!

어떻게든 아리스를 달래려고 무릎을 꿇고 아리스랑 눈높이를 맞춰서 필사적으로 사과했다.

"야, 야...! 미안!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울지 좀 말아!"

"훌쩍...선물..."

"그, 그래! 선물줄께! 선물줄테니까...!
그, 그러니까 선물로 할만한게...?
...마, 맞다 이거...!"

순간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에 생각이 미쳤다.
착용한지 1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비너스의 목걸이」.
분명 그 행상인이 짝퉁을 팔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비록 짝퉁에 효용성은 없을지라도 디자인의 화려함은 단연컨데 진품과 같을 정도.
전체적으로 금색을 띄고 한가운데 녹색의 보석이 달린 목걸이.
어린애가 보기엔 진짜 보석 목걸이와 마찬가지 일거다.

최대한 태연한 모습으로, 훌쩍이는 아리스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얹고 차분한 목소리로 달랬다.

"좋아. 아리스에게 오빠가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온 보물을 줄께.
그러니까 울지마..."

"...보물? 아저씨의?"

"오빠라니깐..."

아무튼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목걸이를 내 목에서 천천히 빼내어 아리스의 눈앞에 들어보인다.

"이건 「비너스의 목걸이」라고해.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여신님의 축복이 담긴 보물이지."

"여신님?"

"그래. 이걸 차고 있으면 항상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 한단다.
오빠의 소중한 보물이니까, 부디 소중히 간직해주렴."

"으, 으응..."

아리스는 어느새 눈물을 그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목걸이를 쳐다보았다.

"오빠가 목에 걸어줄테니 잠시만 가만히 있어줄래?"

"응."

등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칼을 살짝 뒤로 넘기며 조심스레 목걸이를 아리스의 목덜미로 가져갔다.

"아읏, 간지러워..."

"가만있어봐."

키득거리며 웃는 아리스의 움직임에 약간 고생을 한 뒤 목걸이를 무사히 장식해줬다.

"자 다 됐다~"

"어울려?"

겨우 10살짜리가 보석 목걸이로 치장했는데 어울릴까.
뭐, 눈물까지 맺힌 주제에 선물을 받고 웃는 모습은 어린애 다워서 귀여운데.
그리고 겨우 울음을 그친 아리스를 다시 자극할 필요는 없지.

"물론. 정말 예뻐."

"에헤헤..."

목걸이에 양손을 얹고 쑥스러운듯 웃는 아리스를 보며
짝퉁 목걸이도 나름 쓸만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아리스가 차고있던 목걸이에서 빛무리가 일어나더니 조그마한 금발의 정령이 나타났다.
이건...?!

"어? 요정님?"

놀라는 아리스에게 정령은 미소를 짓더니 축복의 말을 꺼냈다.

「비너스의 목걸이를 소지한 자. 그대 아리스여...
나는 목걸이의 정령. 그대에게 미의 여신 비너스의 축복을 전합니다.」

순간 환한 빛이 아리스를 감싸더니 점차 아리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 언제나 비너스의 축복이 함께하길...

금발의 정령은 상냥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목걸이 안으로 사라졌다.

......뭐여?
이거 진품이었잖아?!
난 1년이 넘도록 찼는데도 안나타 나더니만...
남녀 차별이냐?

남캐라 서러워요...

속이 장난 아니게 쓰린게 아무래도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며 위안해야 할것 같았다.
신기해 하는 아리스에게 적당히 생일축하 인사나 해주고 헤어질까...

"그럼, 늦었지만 생일축하해 아리스.
지금처럼 건강하고 밝게 자라길~"

"저기저기~!"

"응?"

"방금전의 요정님...정말 예뻤어!"

"그래?"

"응! 비너스 여신님도 요정님처럼 예쁠까?"

"당연히 그 이상이지. 다름아닌 미의 여신이잖아. 아름답기론 따를자가 없는 여신이시지."

"그럼, 저기...나도 여신님처럼 예뻐질 수 있을까?"

핫~!
10살밖에 안된 꼬맹이가 발랑까져가지곤...
뭐, 노력에 따라선 왕국 제일미도 가능한게 이 꼬맹이니까.

"물론. 나중엔 비너스 여신님처럼 멋진 숙녀가 될거라고."

"아핫~ 고마워요 아저씨~!"

오빠라니까!

아무튼 오늘은 재산의 출혈이 컸다.
진품을 겨우 10살짜리 아리스에게 털리다니...
...속쓰린것보다 오늘 저녁 걱정부터 해야할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술보단 밥이 낫겠지...

근처 식당에서 적당히 밥이나 사먹을까 생각하던중 아리스가 물었다.

"근데 아저씬 어디가요?"

"응? 식당에 가려고.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니까."

"그럼 우리집에 오지 않을래요?
아리스 생일이라고 아빠랑 큐브가 엄청 음식들을 만들었다고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함께 먹어요."

"어어?"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잡아 이끄는 아리스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갔다.
에라 모르겠다.
돈도 없고 배고파 죽겠는데 그깟 자존심이 대수냐.
값비싼 선물도 줬겠다, 오늘은 실컷 배나 채워야지.




...용사랑 큐브의 눈초리가 장난 아니게 무서웠다.
딸내미 주려고 만든 요리를 난데없는 남정네가 거의다 평정하고 있는걸 보는게 속이 쓰렸나보다.
하지만 보쇼. 어차피 아리스 혼자선 다 못먹는 양이고, 식사는 여럿이 할수록 즐거운 거잖소.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무서워서 밥이 안넘어 간다고요.

진품 비너스의 목걸이까지 줬는데 너무한거 아뇨?


식사가 끝나고 아리스가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뒤,
용사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 식사는 즐거웠나?"

"아... 네. 덕분에..."

"그래...그렇단 말이지..."

조용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섭다.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데 대체 왜?

"그럼...이제, 내 딸의 눈에 있던 눈물자국을 설명해 보실까?"

......오 마이 갓.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죽는줄 알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리스가 선물받은 목걸이를 자랑하지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불한당 취급을 받을뻔했다.
험험 거리며 어색한 기침을 하는 용사의 얼굴을 보는건 나름 웃겼지만,
방금전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두번다시 경험하고 싶진 않았다.


옷 밑으로 소름이 돋은 피부를 쓸어내리고 있을때 아리스가 갸우뚱 하며 물었다.

"그러고보면 아저씨."

"응?"

"그 머리...안자르는 거에요?"

"아, 이거?"

최근 무사수행의 연속이었는지라 지금 내 머리는 다듬어지지 못한 상태로 엉망으로 길어져 있었다.
더벅머리가 되어버린 머리를 조금 매만지고 있자 아리스가 손바닥을 짝-치며 다가왔다.

"그럼 제가 다듬어 드릴께요."

"아리스 네가?"

"네. 이래뵈도 미용실 아르바이트도 해봤는걸요!"

"...평판은 어땠는데?"

살짝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자 아리스는 엣헴-하고 기침을 하더니
양손을 허리춤에 대곤 있지도 않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면서 당당히 말했다.

"물론 최고였죠.
저한테 머리를 다듬었던 더벅머리 제크도 제가 최고라고 했는걸요."

"오~대단한걸?
하지만 오늘은 네 생일인데 그렇게까지 해주진 않아도 괜찮아."

"아저씨한텐 멋진 선물까지 받았잖아요.
꼭 보답하고 싶어요.
괜찮죠 아빠?"

아리스가 물어오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우리 아리스는 정말 예의바르구나."

"헤헤...들었죠?"

저 팔불출 아저씨...
헤죽거리며 미소짓는 용사의 모습에 몰래 한숨짓곤 아리스에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잘 부탁할께."

목에 두르는 천과 가위를 찾는 아리스를 보며 얌전히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뭐, 평판이 좋다니까 나름 괜찮겠지.




...괜찮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아저씨?"

"......"

가만히 앉아서 아리스가 들고있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본다.
일자모양이 뚜렷한 바가지 머리.
일명 귀두컷.
...뭐야 이거어어언---!?

"...꼬맹아?"

"아.리.스."

"그래, 아리스...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지.
방금전 널 칭찬했다고 했던 녀석 말이다."

"제크요?"

"그래 제크. 혹시 네 나이대 또래냐?"

"네. 과일가게집 아들이에요.
항상 얼굴이 빨간 이상한 아이지만 친절한 아이에요.
저번에 과일을 샀을때 이만~큼이나 많이 과일을 주더라고요."

"아, 그래...?"

크윽...제크란 그 자식, 이 꼬맹이를 좋아하는 녀석이었구나!?
귀두머리로 컷트를 당해놓고도 좋다고 실실댔단 말이잖아!

자랑스런 표정을 짓는 아리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아리스의 뒤에서 잡아먹을듯한 표정을 짓는 용사의 모습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버렸다.
용사가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가? 우리 아리스 솜씨는 최고지?"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시면 무서운데요 용사씨...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억지로 삼키고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수긍할수 밖에 없었다.
하하...당분간은 모자를 쓰고 다녀야겠네.




"아하하하하! 뭐냐 그 바가지 머리는?"

"...오랜만입니다 프랑소와 양."

"아, 그래 오랫만이구나...크흡...날 웃겨 죽이려는 셈이냐?"

"......"

아리스의 배웅을 받으며 용사의 집을 나온뒤 우울한 상태로 어둠이 드리운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좁디좁은 골목길로만 다니던 도중 도도한 귀족 아가씨 프랑소아 모레(18)와 만나게 되었다.
내 머리모양을 본 프랑소아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폭소했다.
시원하게 미소짓는 얼굴이 예쁘긴 한데 그 대상이 나다 보니까 기분이 더 우울해진다.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프랑소아는 간신히 호흡을 가라앉히곤 우아한 모습을 뽐내며 말을 건네왔다.

"아~ 시원하구나.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가신것 같아.
예를 표하지."

전 우울해 죽을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평민의 생활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런 웃기는 머리모양을 보니 말이다."

"뭐, 모든 백성들이 이런 머리를 선호하진 않으니 걱정마십시오.
그나저나 귀족의 영양께서 어째서 이런 밤중까지 거리를 배회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귀가하셔야 하는 시간이 아닌지요?"

"그건...「어라~ 이게 누구야?」응?"

프랑소와의 뒤편에서 들린 소리에 시선을 향하니 붉은 본디지 타입의 의상을 입은 금발의 미소녀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채찍을 사용하는 여왕님 의혹이 있는 꼬마 아가씨, 죠니프 더 퀸(16)이다.

"그때의 귀족 나으리잖아?
이런 밤중에 으슥한 곳에서 밀회라도 하고있으셨나요 우아하신 귀족 나으리?"

아니꼬운듯 삐딱한 표정으로 과장스레 격식을 차리는 죠니프의 모습에 프랑소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흥. 이 내가 저런 미천한 평민과 어울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응?"

프랑소아의 대답에 고개를 든 죠니프는 그제야 나를 발견한듯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머슬할발도 있었잖아?
...푸하하하! 그 머리 모양은 대체 뭐야?"

방금전의 프랑소와의 웃음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배꼽을 잡고 허리가 꺽어져라 웃어대는 죠니프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비웃지 마라. 안그래도 부끄러워 죽을것만 같다고.
엄청 극적인 죠니프의 태도 변화에 프랑소와도 따라가지 못했는지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웃던 죠니프는 애써 웃음을 멈추고는 날 보며 말했다.

"키득...아무튼 평소에 날 보고 에로 꼬맹이라고 놀린 주제에,
너도 만만찮게 변태적인 머리모양이잖아?"

뭔가 또 야한 망상을 하면서 성희롱적 대사를 하실 모양이구만...

"...신경꺼."

"...변태?"

"응?...아아, 귀족 아가씨는 모르시는가보군요?"

죠니프는 잠시 멈칫 하더니 음흉한 미소로 프랑소아를 바라보았다.
뭔가 꾸미고 있는건 알겠는데 그런 표정으로 히죽거리지마.
미소녀인 주제에 에로 중년 아저씨처럼 보인다고.

"귀족 아가씨께선..."

"프랑소아 모레. 프랑소아라고 불러라.
왠지 모르게 그 호칭은 불쾌하구나."

말을 끊으면서 살짝 눈썹을 찌푸리는 프랑소아 모레.
그야 당연히 정말로 비꼬고 있는거니까요.
이 아가씨, 알고 보면 좀 나사가 빠진거 아냐?
주의를 받은 죠니프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실례. 프랑소아 영양께선 머슬할발의 머리를 보고 이상한 점을 못느끼셨나요?"

"저 웃기게 생긴 바가지 머리 말이냐?
뭐, 좀 이상하긴 하다만 나름 평민들에게야 어울리지 않느냐?
전엔 엉망진창 난 수염에 흰 눈썹덕에 애늙은이처럼 보였는데,
둥글게 자른 머리모양때문에 적어도 지저분하진 않고 나름 귀엽구나."

귀...귀엽...
차라리 비웃어줘!
수치심으로 죽을 지경이란 말야!
죠니프 좀 보라고.
웃음이 터지려는걸 억지로 참고 있다고?

"푸흡~ 그, 그렇군요... 귀여운거군요.
킥킥... 야아~ 이거, 좋겠네 머슬할발은?
귀여운 머리모양이란 소릴 들어서.
그 머리 모양을 칭찬 받으니 왠지 흥분되지 않아?"

"...뭐?"

"...흥분? 무슨말이냐?"

남들의 말에 무관심하던 프랑소아 마저도 지금의 이상한 문답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 프랑소아의 반응에 죠니프는 황송하다는듯 답했다.

"이런 실례...
저희 비천한 평민들은 아가씨같이 고상한 말을 쓰지 않아서 말이죠.
보통은 저걸 바가지 머리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그럼?"

씨익-

죠니프의 미소가 짙어지며 부끄럽다는듯 양팔로 몸을 감쌌다.

"「귀두(龜頭)컷」이라고 하지요. 일명 「버섯머리」.
핑크빛으로 염색까지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불끈불끈 공공외설컷이랍니다?"

"뭐...뭐...!?"

뻐끔뻐끔거리며 경악한채로 눈이 휘둥그레진 프랑소아의 반응을 즐기며
죠니프는 말을 계속했다.

"아. 순수하고 고결하신 귀족님께서 이해하시기엔 아직 무리였나요?
그럼 제가 좀더 분발하도록 하지요.
남성들이 자신의 아드님과도 같은 분신을 형상화한 머리모양으로서
저 멀리 동방의 온천에서는 남○석이라는 정력의 상징으로 형상화되기도 하는 모양새이지요.
고래를 잡는다(포경(捕鯨))는 표현이 여기에 쓰이기도 하며,
그곳에 키스해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발○하는..."

"처, 천박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죠니프의 성희롱적 대사들를 듣던 프랑소아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출 생각도 못하고 눈을 꽉 감은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죠니프에게 등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여기는 골목길.
길은 외길이라 앞뒤에서 프랑소와를 감싸고 있는 상황에서, 죠니프의 맞은편 방향은 바로 내쪽.
나를 향해 달려오는 프랑소와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이, 나 바로 앞에 있거든요?
가뜩이나 좁은 골목길에 그렇게 뛰어오면 제대로 비키지도 못한다고?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다가 골목길에 널린 쓰레기가 발뒤꿈치에 채여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을 때,
프랑소아의 태클(내 입장에선 그랬다)이 명치에 정확하게 들어왔다.

퍼억-!

"꾸엑?"

"꺄악!?"

달려오던 프랑소아에 부딪혀 완전히 균형을 잃은 나는 결국 그대로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엉겁결에 나의 어깨를 붙잡은채로 함께 쓰러지는 프랑소아 아가씨께선
아무래도 확실하게 날 끝장낼 생각인듯, 안그래도 뒤로 넘어지는 내 몸을 아예 찍어 누르고 계셨다.
그렇다고 무방비로 뒤통수를 돌바닥에 부딪힐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기에
등이 돌바닥에 닿는 순간 살짝 몸을 앞으로 올려 충격을 줄였다.

뭉클-

...응?

뭔가가 닿은 듯 이마에서 느껴지는 부드롭고 촉촉한 감촉에 의아해하며
머리만 든채로 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히자,
흘러내린 갈색 웨이브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윤기있는 붉은 입술과 흔들리는 푸른 눈망울이 눈에 들어왔다.

...상황을 파악해보자.
뒤로 넘어가서 고개만 든 나.
그리고 내 어깨를 잡은채 그 위를 덮듯이 쓰러진 프랑소아 모래.
그리고 방금전 이마의 감촉.

아, 그러니까 방금전 이마에 닿은건 프랑소아의 입술이었나.
그거참 고풍스러운 전개군요.
보통은 직접적으로 입술끼리 부딪히는게 정석이지만.

"아...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르게 난 새하얀 치아가 보이는 가운데
경악한 표정으로 굳어있던 프랑소아는 이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

팔꿈치까지 오는 흰장갑의 손등으로 입술을 거세게 닦아내면서 프랑소아는 황급히 일어섰다.
흐트러진 갈색 머리카락을 다듬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입술을 닦어대던 프랑소아는
눈물이 살짝 배인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곤 뛰쳐나갔다.

"바, 반드시 복수할꺼야! 이 변태 평민!"

"에? 잠깐만요? 이건 사고...!"

후다닥-

내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프랑소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휑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죠니프의 대사가 떠올랐다.

- 그곳에 키스해주면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설마 그걸 진짜로 믿은건 아니지?
거기다 이마잖아. 키스받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서기라도 한다는거야?
당한 입장에선 확실히 나쁜 경험은 아니었지만,
방금전 죠니프의 말이 떠오른지라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바닥에 드러누운채로 차가운 지면의 감촉과 함께 찝찝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저만치 떨어져 서있던 죠니프가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다가왔다.

"아하하하~! 봤어? 봤어? 방금전 그 귀족 계집애의 모습 말야.
도도한 척 했던 주제에 알고봤더니 완전히 숙맥이었잖아? 킥킥..."

"넌 야한 농담 좀 자중해..."

"흥이다~ 예쁜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거 몰라?"

...그게 가시라면 타고난 미색마저도 퇴색할꺼다.

"...가시가 꽃잎을 다 가리고 있구먼. "

"뭐야!"

발끈 하던 죠니프는 문득 생각난듯 한손을 말아쥐곤 다른 손바닥을 통-하고 두드렸다.

"아, 맞다! 일어나지 말고 잠시만 그대로 있어봐."

"뭐?"

어리둥절한 나에게 저벅저벅 다가온 죠니프는
꿀꺽-하고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내 가슴에 왼쪽 다리를 가져다 올렸다.
그리곤 팔목까지 오는 붉은 장갑을 낀 손을 옆구리에 대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붉은 롱부츠의 굽이 가슴에 닿는 감촉에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며 죠니프를 바라보았다.
시야가 가려졌기에 볼수 있었던건 핫팬츠 아래로 드러난 죠니프의 새하얀 허벅지 뿐이었지만.

"...너 대체 뭐하는거야?"

"훗훗훗~ 이걸로 드디어 내 발아래 깔린 남자가 생겼다~!
그것도 무투회 우승자를 발아래 두게 되다니...! 아~ 짜릿해~"

...여왕님 놀이냐?
오른손등으로 살짝 입술을 가리며 교소를 짓는 죠니프는 지금 구도가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선물로 준 비너스 목걸이, 우스꽝스런 바가지 머리, 변태 의혹 같은 사건들 덕분에
뭐라고 반박할 기운이 나지 않아 될대로 대란 식으로 얌전히 누워있었다.
방금전 프랑소아를 향한 보복에 대한 만족감이 상승작용을 했는지 점점 텐션이 올라간 죠니프는 나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오호호호호~!
자아~ 귀여운 목소리로 짖어보련?"

"냥냥-"

"잠깐, 그게 아니잖아! 누가 고양이 흉내를 내랬어?
이럴땐 보통 멍멍이 흉내를 내는거잖아!"

엇나가는 박자에 죠니프가 인상을 찌푸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난 개보단 고양이가 더 좋은데.

"고양이 귀엽잖아 고양이."

"응, 고양이 귀엽지. 나도 좋아해.
하지만 넌 하나도 안 귀엽거든?"

"너무하시옵니다 「에로 더 퀸」."

"「죠니프 더 퀸」이야!"

퍽-!

"아야!?"

옆구리를 걷어차여서 신음소리를 내자 죠니프는 발을 치우곤 콧방귀를 뀌었다.

"흥-! 쌤통이다.
이름 갖고 장난치니까 그런거라고.「근육 할아범」"

"사과할테니까제발그부르는법은좀봐주세요."

"후후...좋아. 그럼 한가지만 더~!"

죠니프는 몸을 숙이더니 그대로 내 배 위에 앉았다.
다리를 벌려서 얼굴을 마주보며 앉는 말타기 자세가 아니라,
벤치에 앉듯 옆으로 앉아서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이야~ 복근 한번 탄탄하잖아?
역시 물렁 근육은 아니란거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요 죠니프씨?"

"후후...! 어릴적 부터 꿈이었어...
남자를 엉덩이로 깔아뭉개보는 게 말야...!"

...그건 그 의미가 아닌데 에로 꼬맹아?
보통은 아내가 남편을 휘두르는걸 '깔아뭉갠다'고 표현하는거라고.
그리고 어린시절을 어떻게 보내면 그런 꿈이 생기는거냐 대체...

남의 배위에서 잘도 우아한 포즈를 취하며 웃는 죠니프를 보곤,
이 아가씨도 프랑소아양처럼 상식이 엇나갔다고 생각하며 몰래 한숨을 쉬었다.




잠시동안 벌어진 여왕님 놀이가 끝나자 죠니프는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나를 끌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프랑소아에게 작년 무도회에서 당했던 울분도 풀었고, 상식이 살짝 어긋난 소원도 성취했는지라 죠니프로선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았나보다.
테이블에 앉아 술을 주문한 죠니프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엔 술이 최고지~!"

"어이, 너 아직 미성년..."

"난 충분히 어른이라고!
이 쭉쭉빵빵한 나이스 바디가 안보이는거야?"

"야!? 가슴 모으지마! 이 에로 꼬맹아!"

"꼬맹이 아니라니까!"

발끈하며 양손으로 가슴을 모아 올려 포즈를 취하는 죠니프의 모습에 기겁하며 말렸다.
재미있어 하면서 구경하는 손님들의 시선속에서 죠니프와 아웅다웅 투닥거리길 잠시,
술이 테이블에 놓여지자 죠니프는 다툼을 멈추고 눈을 빛내며 술잔을 바라보았다.

"헤에...이렇게 나오는구나?"

...이렇게?

"죠니프. 너, 혹시 술 마시는거 오늘이 처음이냐?"

"읏, 천만에! 그냥 여기 주점 컵은 어떻게 생겼나 본거라구!"

"아, 그러십니까..."

주점컵은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죠.
뭔가 흥미로운듯 바라보는게 정말로 처음 마시는거 아냐 이거?
술잔을 나누어 각자 손에 들고선 건배사와 함께 술잔을 부딪혔다.
그대로 술을 마시려다가 맞은편에 앉은 죠니프의 행동이 신경쓰여서
술잔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며 죠니프를 바라보았다.
죠니프는 양손으로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조심스레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살짝 눈을 감은채 술을 머금은 죠니프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써..."

"무리해서 마시진 마."

"그런거 아니니까 신경꺼."

"지금 쓰다고 했잖아."

"안그랬어!"

"성장기에 술은 몸에 안좋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억지부리지말고... "

"...아, 진짜 꼬장꼬장하게!"

짜증나는 듯 죠니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술잔을 잡아챘다.

"기껏 술마시는데 분위기 떨어지게 할꺼야?
게다가 사내자식이 무슨 술을 그렇게 찔끔찔끔 마시는거야?"

"아니, 이건 너 술마시는 모양새가 걱정되서 지켜보느라..."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뭐야 폼안나게? 건배사까지 했는데 첫잔은 무조건 원샷이잖아! 얼른 마시라고!"

"게웁?!"

벌컥벌컥...

목덜미가 잡힌채로 죠니프에게 강제로 술을 먹여졌다.
아니, 그러니까 난 그냥 점잖게 마시고 싶다니까.
이래서야 내가 술을 마시는게 아냐.
술이 날 먹는거지.
살려줘...



이후가 정말로 큰일이었다.
전직 해적두목답게 나야 술을 마신다고 크게 취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처음에는 억지로 마시는듯 했던 죠니프가 취기가 오르면서 정말로 술맛에 들렸는지
쉴새없이 술잔을 비워내는 모습을 바라보는게 조마조마했다.

취기가 올라 비틀비틀하며 화장실에 가는 죠니프도 걱정이거니와,
나도 볼일을 봐야 했던지라 죠니프를 뒤따라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마치고 기왕이면 죠니프를 데리고 들어갈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화장실 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결국 숙박 결정을 하곤, 잠에 빠진 죠니프를 등에 업고선「휘익~! 수완 좋은데 형씨!」라고 야유하는 취객에겐 감자를 날려주면서 2층의 숙소로 올라갔다.

잠꼬대 하는 죠니프를 침대에 눕혀주랴, 도중에 토해서 더럽혀진 바닥을 청소해주랴,
내 옷에 묻어버린 토사물 때문에 목욕을 하고 주인장에게 가운도 한벌 빌리랴 정신이 없었다.
내 근심만으로도 바쁜데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 아가씨야...
마지막으로 더운듯 자꾸만 이불을 걷어내는 죠니프에게 이불을 다시 걷어올려준 뒤, 옆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에 들었다.




다음날, 술이 깬 죠니프와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랬다.


「너 술버릇 나쁘니까 음주는 그만둬.」

「꺄아악! 이 짐승아!」

(퍽퍽퍽-!)


술버릇 때문인지, 아니면 더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잠결에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깨어난 죠니프가,
눈을 비비면서 잠옷 가운 차림으로 푸념을 하던 나를 범죄자로 오해한 것이다.
저는 미성년자에게 손을 대는 나쁜 어른이가 아니에요.
...죠니프의 난동 중에 의도치 않게 알몸을 보긴 했지만.
아무튼 펑펑 울음을 그치지 않는 죠니프의 오해를 푸느라 정말이지 고생했다.
평소에는 뻔뻔스럽게 잘만 야한 도발을 했으면서,
옷을 입는 것도 잊은채 인생이 끝난것처럼 울어제끼는 죠니프의 모습에 어쩔줄 모르고 자기변호와 사과를 거급했었으니...

XX하고 XX한 흔적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는걸 차근차근 설명하고 나서야
죠니프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납득하곤 울상이 된 얼굴을 간신히 수습했다.
이후 평소의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이불로 알몸을 가린채,
내 엉덩이를 걷어차 방 밖으로 쫓아낸 죠니프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음부터 죠니프에겐 술 대신 파르페 같은걸 권하든가 하자.



이후 숙박을 끝내고 체크아웃을 할 때, 술마시면서 지갑을 잃어버린건지 당황하는 죠니프의 모습에 주인장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나야 물론 항마 장비를 마련하는데 돈을 전부 썼는데다가 어제 술값도 대신 지불했기에 무일푼이었고. 하하...

결국 무전숙박으로 한동안 둘이서 주점 웨이터,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주인장의 취향인지 만화에나 나올법한 여종업원 복장으로 갈아입은 죠니프의 모습에
휘파람을 불면서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지 않을래?」라고 말했다가 한대 맞았다.

그후 주점 근처를 지나던 타오 란팡에게 미묘한 시선을 받았다든가,
알바 도중에 죠니프의 엉덩이를 만지려던 손님들이 음속으로 휘둘러지는 채찍에 맞아 들것에 실려나가는 사소한 일들을 빼곤 평화로운 나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은 언제 모으지...?
항마 장비니 뭐니, 모험과 낭만도 좋지만 언제나 휑하니 얇디얇기 그지없는 지갑을 보노라면,
안정적인 노후 같은건 꿈도 꾸지 못하는게 아닐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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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중인데 주말이라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3월이 지나갔네...OTL;
우선은 생각나는것들 부터 적고 있습니다.
트러블은 몇편 뒤의 것이 먼저 떠올라서 그 부분을 우선 끄적이고 있고...-_-;

아무튼 오랜만에 쓰는 프린세스 메이커2 팬픽이네요.0ㅅ0;
4화가 되어서야 아리스(용사 딸)도 등장했고...
원래 자창게에 프메 팬픽 처음 올렸을 때는 아리스만 등장할 예정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ㅅ=a
그래도 트러블보단 짧게 끝내려고 생각한거니까, 프메에 등장하는 여성들 전부가 이야기에 쓰이진 않겠죠.^^;

[캐릭터 이미지 참조_jpg]

롱소드 : 공격+12, 전투-2
얼음조각 : 체력+10, 스트레스-10
은색의 모피 : 항마+5
비너스의 목걸이(*) : 매력+136 기품+136 (기본상승+20, 추가상승+116)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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