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례 전의 어수선한 교실.
수업 준비를 하면서 교실을 둘러보던 시즈가 고개를 갸웃했다.

"으응...?"

"시즈? 무슨 일이야?"

"료스케씨, 혹시 오늘 유이씨 보셨어요?"

"코테가와? 아니, 본적 없는데."

시즈의 물음에 코테가와의 자리로 시선을 향했다가 덩달아 고개가 기울어졌다.
코테가와의 자리는 가방도 책도, 심지어 필기구 하나조차 없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

"설마 아직 학교에 오질 않은건가?
조금 있으면 조례시간인데."

"늦잠이라도 자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풍기위원실에 들렀다 오고 있는걸지도 모르지."

똑부러진 구석이 있는 코테가와가 늦잠으로 지각하는건 상상이 가질 않으니까.
무엇보다 가정 주부인 코테가와의 어머님이 코테가와가 지각할 때까지 방치하진 않으실거라 본다.

"하지만 아직까지 교실에 와있지 않으면 조금 위험하겠는데."

"그러게요... 유이씨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는거 아닌가 몰라요."

"그럼 시즈 네가 전화를 해보는게 어때?"

"엣? 제, 제가요!?"

"왜 그렇게 놀라는거야..."

화들짝 놀라는 시즈의 모습에 의아해하자 시즈가 부끄러운 듯 낯을 붉혔다.

"그게...전 아직 휴대폰이 없거든요."

"아...미안. 내가 무신경한 소릴 했나봐."

"아, 아뇨. 괜찮아요."

"미카도 선생님께 휴대폰을 사고 싶다고 말씀드리진 않았어?
시즈라면 평소에 미카도 선생님의 조수 역할도 하고 있으니까,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물음에 시즈가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실은 미카도 선생님이 먼저 그런 말씀을 해주셨지만, 아직은 전화 사용법도 서툰 상태라 제가 사양했거든요."

"...시즈."

"네?"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지만, 아직까지 전화 주고 받는게 어렵다는건 서투르다는 수준이 아니라구."

"읏! 그, 그래도 요즘은 미카도 선생님 댁 전화기는 익숙해졌어요."

"정말? 그「다이얼식 전화기」에 익숙해졌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네."

"전화 거는 법은 아직 모르지만요."

"아하! 받는 법만 아는거구나?"

"네!"

"...그거, 수화기를 드는 것만 할 줄 안다는 의미 아냐?"

"에헤헤..."

"나참..."

멋쩍은듯 웃는 시즈의 얼굴에 덩달아 김빠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휴대폰 사용에 미리부터 겁을 먹고 구매조차 사양하는건 친구로서 걱정이다.
기본적인 기능이라면 친구들과 연락하기 위해서 자주 휴대폰을 사용하다 보면 익숙해질텐데 말이다.
기회가 될 때 미카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친구들과 함께 시즈의 휴대폰을 장만하러 가든가 해야지.




담임인 호네카와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면서 교실의 소란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코테가와의 부재에 대한 의문은 호네카와 선생님을 통해 풀렸다.

"조례를 시작하기 전에...사이렌지양."

"네?"

"방금전 코테가와양이 감기로 결석한다고 연락이 왔단다.
그러니 사이렌지양이 코테가와양에게 줄 프린트물을 대신 챙겨주겠니?"

"아...네, 선생님."

여자 위원장인 하루나에게 부탁을 마친 호네카와 선생님은 이윽고 조례를 진행하셨다.



조례가 끝나고 다시 소란스러워진 가운데 시즈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유이씨가 감기라니 큰일이네요."

"그러게. 많이 아프진 않았으면 하는데.
수업 마치면 병문안 가볼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럼 전 미카도 선생님께 약을 타올께요."

"난 수업 내용을 신경써서 필기해둬야겠네.
나중에 코테가와가 참고할 수 있도록 말야."

"네! 그런데 기왕이면 다른 여러분들과 함께 병문안 가는게 좋겠죠?"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것 같아."

"어째서요?"

"코테가와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잖아.
혹시 감기의 증상이 심각하다면, 아픈 와중에 여럿이 우르르 병문안을 가는건 폐가 될거라구.
그리고 혹시라 병문안을 갔다가 코테가와로부터 감기가 옮거나 하면 오히려 코테가와가 미안해할거 아냐."

"그건 그러네요..."

시무룩해진 시즈의 모습에 잠시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

"네?"

"병문안 인원을 두패로 나누는거지.
우선 내가 먼저 가서 코테가와의 상태를 본 뒤에, 괜찮다 싶으면 다른 친구들도 병문안을 오는걸로 말야."

"료스케씨가 먼저 유이씨의 집에 가는건가요?"

"응. 코테가와의 집주소를 아는건 나랑 시즈 정도잖아.
둘 중에 한명은 나중에 와야지 다른 친구들을 코테가와 집까지 안내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건강하니까 혹시라도 감기가 옮을 위험은 적기도 하고."

"으응,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 대신 방과후에 제가 미카도 선생님께 약을 받아올테니까 그걸 챙겨서 먼저 가주세요."

"응."


병문안 가는걸로 시즈와 고민하고 있자니, 어느샌가 친구들 사이에도 코테가와의 병문안 관련 화제가 퍼졌다.

"병문안 선물은 뭐가 좋을까?"

"멜론!"

"응응. 역시 정석이지?"

"그치만 좀 비싸지 않아?"

"쯧쯧쯧. 아키츠군.
그러니까 더욱이 멜론을 사가야 하는거라구.
코테가와는 분명 멜론을 좋아할테니까!"

리사의 확신에 찬 말에 의구심을 감추지 못한채 물었다.

"근거는?"

"그야 코테가와는 파렴치한 멜론을 둘이나 달고 있잖아~!"

"그치그치?"

어째서 이녀석들은 이런 저질개그를 남학생 상대로 하고 있는거야...
가슴을 받쳐올리곤 한껏 웃는 리사와 맞장구치는 미오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리토도 이런 대화는 껄끄러운지 리사랑 미오의「멜론!」「멜론!」을 연호하는 소리에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튼...병문안을 갈 사람 모집이라든지 선물이라든지는 제쳐두더라도, 방과후에 양호실로 가는건 확정이려나.
생각을 정리하는 가운데 하루나가 다가왔다.

"그럼 프린트물이랑 전달사항을 내가 모아둘테니, 나중에 아키츠군이 병문안 갈때 코테가와에게 대신 전해줄래?"

"그게 좋을것 같네. 고마워 사이렌지."

활기를 띠며 떠들석한 교실 분위기 속에서 방과후 일거리를 생각하면서 다음 수업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방과후.

하루나에게 떠밀려서 양호실 침대에 쓰러졌다.


...기억을 되짚어보자.

방과후 기세좋게 교실을 떠나 양호실로 향한 시즈.
가방을 챙기곤 시즈를 뒤따라 약을 받으러 간 나.
정리한 프린트물을 내게 주고선 양호실까지 함께 걸으며 학급 공지사항을 하나씩 알려주던 하루나.

미카도 선생님이 양호실에 없었던게 문제였나.
시즈가 간호복 차림으로 덜렁대다 나뒹굴곤 유체이탈한게 문제였나.
자기 몸을 나와 하루나에게 맡겨두고 유령 상태로 시즈가 미카도 선생님을 찾으러 나가버린게 문제였나.
양호실 침대에 시즈를 눕히곤 침대에 걸터 앉아 시즈의 몸을 돌보던 나랑 하루나가 문제였나.
나와 하루나의 잡담 중 갑자기 벽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즈가 문제였나.
유령을 무서워하는 하루나가 비명을 지르며 내게 달라붙은게 문제였나.

유령을 무서워하는건 알겠어.
그치만 사내아이의 얼굴을 가슴에 꽉 누른채 달라붙는건 부끄럽잖아요 사이렌지씨?

하루나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상태에서 말하려 입을 벌리기라도 했다간 당장 치한 취급을 당할테고...
좀 떨어져 달라는 의미로 양쪽 겨드랑이께에 손을 대곤 살짝 밀어내는 동작을 취해봤다.

"---!!"

고개를 격렬히 저으면서 하루나가 정신 못차리고 달라붙어 왔을땐 완전 망한 기분이었다.
그렇잖아도 한여름이라 가뜩이나 옷이 얇은데...
얼굴을 누르고 있는 아담하고 부드러운 언덕 두개가 도리도리 내저어지는 하루나의 고개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으니까.

이 착해빠진 위원장씨는 내 이성이 무슨 초합금Z라도 되는줄 아는걸까...


"아, 아아아! 죄송해요 하루나씨!
놀래킬 생각은 아니었어요!"

"꺄아아아아----!!"

"엣? 하, 하루나씨?"

"미, 미안해 시즈!
하, 하지만 나... 유, 유령은 조금 서툴러서...!"

'조금' 서툰게 아냐.
엄청 무서워하는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게 달라붙은채로 흠칫흠칫 몸을 떨진 말아줘.
얼굴이 풀어지려는걸 애써 참고있는 내 입장도 생각해달라구.

"괘,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걸요.
저도 개를 무서워하니까!
유령을 무서워하는 기분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유령이 무서운 애견인 하루나.
개 공포증인 유령 시즈.
상냥한 둘에게 가혹한 악의적인 조합이다.
사이가 좋아지는것도 큰일이구나.



드르륵

"「「아.」」"

횡설수설하던 둘의 대화는 양호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뭐야 이거?"

방송에서, 그리고 교실에서 자주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룬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위원장? 무라사메? 그리고...거기 남학생은 누구?"

룬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듯 하루나가 후다닥 내게서 떨어졌다.

"...수염?"

양호실 문앞에 선채 룬이 눈썹을 찌푸렸다.

"미안 아키츠군!
난 이만 가볼테니까, 코테가와에게 프린트물 잘 부탁해!"

"어, 으응..."

재빨리 말을 내뱉곤 하루나는 급하게 양호실을 떠났다.
룬은 하루나가 떠나간 방향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양호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방금전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주겠어?"

"유령을 무서워하는 사이렌지가 유체이탈한 시즈를 보고 패닉을 일으켰어."

"그 와중에 위원장에게 응큼한 짓을 했단거지?"

"아냐."

"빨개진 얼굴이나 숨기고서 말해 저질."

룬의 지적에 무심코 얼굴에 손을 대자 룬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저, 저기이..."

말문이 막혀 있다가, 아까부터 허공에 뜬채 당황해하는 시즈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했다.

"...일단 시즈부터 원래 육체로 되돌리고 얘기하자."



유령 상태의 시즈의 손을 이끌어 원래 몸으로 되돌린 뒤, 신기한듯 구경하던 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룬 넌 양호실엔 왠일이야?
오늘은 촬영으로 쉬는거 아녔어?"

오전, 오후 수업때도 없었는데 방과후에 일부러 학교에 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별거 아냐. 그냥 요즘 아이돌 활동으로 조금 지쳐서 드링크 같은걸 받을 수 없나 싶어서 온거야.
양호 선생님도 우주인이니까, 적당한 피로 회복제 정돈 있을 거 아냐."

"...아, 으응. 그렇지."

"왜 그렇게 떨떠름한 표정이야 수염?"

"아, 아니. 아무것도..."

단지 우주인용 약을 잘못 복용하고선 라라랑 린 선배에게 폐를 끼쳤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러는 수염이야말로 무라사메와 위원장이랑 양호실에서 무슨 볼일이었어?"

"코테가와가 감기로 결석이라서 코테가와에게 전해줄 약을 타러 온거야."

"풍기위원이 감기?"

교실에서 나눴던 코테가와 병문안 계획을 짧막하게 알려주자 룬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수염 네가 먼저 병문안을 간다는거지? 혼자서."

"응. 코테가와의 상태가 괜찮아 보인다면, 시즈가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병문안 오는거지.
코테가와의 집에 가본건 나랑 시즈 둘 정도니까, 둘 중 한명은 병문안 올 친구들 인솔을 맡는게 좋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시즈는 전화 사용이 서투니까 먼저 가도 연락을 취하기 어렵기도 하고."

"그럴싸하게 얼버무리긴."

"얼버무린거 아니거든?"

"솔직히 말해서 네가 먼저 병문안 가고 싶어서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대는거잖아. 응큼하기는."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치는 룬의 지적에 잠시 마음을 되짚어보곤 수긍했다.

"그러네. 고교에서 만난 친구들 중에 가장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까."

"...아아. 그러고보면 너랑 풍기위원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응,『1-B』였지. 지금 반친구들 중에서 『1-A』가 아니었던 사람은 나랑 코테가와, 그리고 올해 편입해온 시즈 뿐이니까."

"흐응, 그렇구나."

"뭐, 그런 동질감 덕분인지 코테가와랑 시즈도 최근 사이가 좋아보이고 말야."

"그것보단 라라씨 발명품에 함께 휘말린 탓이었지만요.
그래도 그 때 합숙은 즐거웠어요~"

헤실헤실 웃는 시즈에게 마주 웃어주곤 룬에게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처지끼리 앞으로 잘 부탁한다구."

"뭐? 어째서 내가 너랑 같은 처지야?"

"2학년 됐을때 혼자만 딴 반이 되어서 울상이었잖아."

"안 그랬어! 그건 렌이라구!"

"너나 렌이나."

"한 몸에 있지만 렌이랑 난 다른 사람이거든!? 남매 같은 사이란 말야!"

"알고 있어 그건."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렌이 라라랑 떨어져서 상심한 것처럼, 룬도 리토랑 다른 반이 되어서 낙담했을거라 생각했는데.
...2학년 첫날부터 리토에게 달라붙었던걸 생각해 보면 그렇게 충격받진 않았던거려나?

룬의 항의를 흘려넘기곤 시즈와 이후 일정을 확인했다.
시즈와의 대화 중에 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곁에서 날 노려보고 있는게 무지 신경쓰였지만.

시즈는 아무래도 평소대로 미카도 선생님 저택에 돌아가 기다릴 생각인 것 같았다.

"미카도 선생님 댁에서 기다릴테니까요!
나중에 연락주시면 다른 분들과 함께 유이씨 집으로 찾아갈께요."

"응. 그럼 미카도 선생님 댁 전화번호 좀 알려줄래? 지금 폰에 등록해둘께."

"......"

"시즈?"

한참을 침묵하던 시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 모르겠어요."

"어이."

"어, 어쩔수 없잖아요! 저, 기계치니까요!"

전화번호 외우는건 기계치랑 상관없잖아...
미카도 선생님 댁에 머문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택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은 시즈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정말로 다음번에 시즈를 위한 휴대폰을 꼭 장만하도록 미카도 선생님께 부탁하든가 해야지...

"그럼 이제 어쩌지?"

"...어쩌죠?"

"...하아..."

시작부터 표류할 것만 같은 병문안 계획에 우왕좌왕하던 우리의 모습에 룬이 한심하다는듯 참견해왔다.

"그럼 무라사메는 나랑 같이 있어."

"에? 룬씨랑요?"

"나도 풍기위원 병문안에 함께 갈테니까. 괜찮지?"

"물론이죠~! 분명 유이씨도 기뻐할거예요!"

반색하는 시즈와 달리 나로선 노파심이 들었기에 룬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은거야?
아이돌은 몸관리가 중요할텐데, 감기 옮거나 하면 위험하지 않아?"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아이돌로서 건강 관리는 중요하지만, 그런건 평소에 내가 알아서 조절하니까.
아니면...아이돌은 친구를 걱정하면 안돼?"

"아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럼 됐어. 마침 오늘 저녁은 시간이 비어있으니까.
요즘은 아이돌 활동으로 바빠서 친구들 신경쓸 시간도 적었으니까, 딱 좋은 기회잖아."

"...룬 너말야."

"왜?"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멋져진거 같아."

내 칭찬이 쑥쓰러웠는지 룬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뭐야, 입발린 소린 됐어.
그리고 예쁘다도 아니고 멋지다라니 표현이 이상하지 않아?"

"아니. 라라에게 딴죽걸다 허탕치던 시절의 널 생각하면 정말로 감회가 새로워서..."

"쓸데없는 한마디는 빼!"

"하하하. 미안미안~"

"정말이지 넉살만 좋기는..."

맥이 빠진듯 룬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난 무라사메랑 같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내 연락처는 저번에 줬지?"

"응."

"그럼 가봐.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풍기위원한테 이상한 짓 하지마."

"그런 말 뿐이냐...
내 이미지가 그렇게 나빠?"

"수염변태. 사이비 팬. 그밖에 또 있어?"

"...아니. 그걸로 됐어.
아참, 그리고 병문안 선물로 뭘 사가면 좋을까?"

"슈크림으로."

"그건 네가 좋아하는거 아냐?"

태연하게 씨익 웃는 룬에게 피식하곤 양호실을 뒤로했다.




"...여기 오는건 오랫만이네."

지난 불꽃 축제때 이후로는 처음인가.
벨을 누르자 코테가와의 어머니가 마중나오셨다.

"어머, 료쨩?"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그래. 오랫만이구나.
어쩐일이니? 혹시 유이를 보러 왔니?"

"네. 코테가와가 감기로 결석이라 걱정됐거든요."

"그거 고맙구나. 들어오렴."

"감사합니다. 코테가와는 지금 어떤가요?"

"이제 많이 좋아진 것 같아.
그래도 유-짱은 걱정되는지 유이에게 줄 약 심부름을 갔단다."

"유우씨도 계셨나보네요.
대학 강의가 빨리 끝났나봐요?"

"아니. 그게말야, 사랑스런 동생이 걱정이라 오늘은 강의를 쉬고 병간호를 해주겠다나?
유이는 자길 땡땡이칠 핑곗거리로 삼지 말라고 투덜댔지만 속으론 기뻐하지 않았을까?"

"사이좋은 남매네요."

"후후, 그렇지?
먼저 올라가보렴. 난 마실 것 좀 가져올테니."

코테가와의 방은 2층이었지.
예전 기억에 조금 들뜬 기분으로 계단을 올랐다.



똑똑.

방문 앞에서 노크하자 문 너머로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들어와."

엄마 아닌데.
그렇지만 사양 않고~

경쾌한 기세에 맏겨 활짝 문을 열었다.

"엄마인줄 알았어?
유감! 나였습니다~!☆ 랄까, 나..."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리며 농담과 함께 들어오다 보인 풍경에 말을 흐렸다.

침대에 앉아 파자마 상의를 풀어헤친 코테가와.
몸을 닦으려 했는지 한 손에는 수건을 든채 굳어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굳어있던 코테가와가 황급히 옷을 추스렸다.

"엣? 아키츠군!?
잠깐! 나가요!"

"어째서?"

"어째서라니!
보면 몰라요? 아니, 보지 말아요!"

"응. 흐트러진 모습이 섹시하네!"

"이~~~! 나갓!!!"

코테가와의 고함에 냉큼 문을 닫았다.

후우-후우-

문 너머로 코테가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좀 지나고 숨소리가 진정된 듯 하자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뭐예요?"

"할머니~ 저예요. 빨간모자예요~"

"누가 할머니예요 누가..."

한차례 앓는 소리가 들리곤 조용해졌다.

"정말이지 뻔뻔하기는...들어와요."

허락도 떨어졌겠다, 다시 들어가볼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무새를 가다듬은 코테가와가 침대에서 맞이해줬다.

"잘 지냈어? 그리고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게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말하는건가요?"

"물론. 난 늑대가 아니니까."

"저도 할머니도, 빨간모자도 아녜요."

말대꾸 하며 코테가와가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

"아플 때마저 화를 내면 건강에 좋지 않다구."

"어느 입이 말하는 건가요.
그렇게 된게 누구 때문인데.
가슴에 손을 얹고 방금전 일을 떠올려보는게 어때요?"

코테가와의 말을 따라 얌전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방금전 광경을 떠올려 보았다.

"...병문안 와서 정말로 좋았다...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솔직한 대답에 코테가와의 눈이 냉랭해졌다.

"...저질. 파렴치해."

"미안미안~ 사과의 의미로 푸딩 줄께!
병문안 선물로 가져온거라구."

"먹을 걸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거죠?
...하지만 고맙게 받죠."

코테가와는 건네받은 푸딩을 침대 맡에 내려두었다.
바로 먹진 않네.
지금은 그다지 식욕이 없나보다.

"몸은 좀 어때?"

"이제서야 묻는거예요?
뭐, 열은 내려서 이제 괜찮아요."

"그래...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자 이번엔 코테가와가 물었다.

"학교는 별 일 없었나요?"

"응. 평소랑 다름없었으니 걱정할거 없어."

"평소랑 다를바 없단건 걱정할 요소 뿐이란거잖아요.
저희반이니까 더더욱."

"...부정할 수 없네. 항상 떠들석하니까.
하지만 그런게 청춘이잖아~"

"절도라는게 있겠지요? 특히 아키츠군은."

"아하하~ 코테가와는 너무 깐깐하다니까~"

"허투로 듣지 말아요."

"정말이지~ 그러지말고 오늘 정도는 그런 걱정 없이 푹 쉬라구.
막 감기에서 회복한 뒤잖아?"

코테가와는 불만스러운듯 볼을 부풀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방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유이, 료짱. 마실걸 좀 가져왔는데 들어가도 되니?"

"...들어와, 엄마."

"실례할께~"

방에 들어오신 코테가와 어머님은 생글생글 웃으며 준비해온 음료를 건네주셨다.

"여기. 그다지 준비한건 없지만."

"아뇨. 고맙습니다 어머님."

"뭘~ 내가 오히려 고마운걸.
병문안 고마워 료짱. 유이도 기뻐할거야."

"기뻐한적 없거든?"

"그럼 못써 유이.
걱정해서 온 친구에게 그게 무슨 말이니?"

한차례 코테가와를 나무라곤 어머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럼 난 가볼께. 편하게 있으렴~"

어머님이 자리를 뜨시자, 코를 우뚝 세우곤 코테가와에게 뽐냈다.

"후후후, 방금전 봤지?
이게 나의 인망이라니까."

"...언제부터 엄마랑 사이좋게 된 거예요 아키츠군?"

"장보면서 얼굴을 익혔지. 미캉이랑 쇼핑갈 때 이따금 얼굴을 뵈었거든.
실은 어머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알고 계셨던거지만.
그래도 여름 축제때 이후론 쇼핑에서 뵐 때마다 인사 드리고 있으니까."

"유우키네 집은 미캉이 가계를 담당하나보군요.
어린데 대단하네요 미캉은."

"아, 나도 자취하고 있었으니까."

"알고 있어요."

"나도 대단하지?"

"...그러네요."

"그럼 칭찬해~ 칭찬해~"

"......네에. 아키츠군은 정말 대단하네요."

"후흥~"

"이런 걸로 기뻐요?"

"응! 매우!"

"...완전 엎드려 절받기잖아요.
이따금 애 같이 군다니까요 당신은."

"우리, 아직, 미성년. 어른, 아냐."

"로봇같은 말투 하지 마요. 이상하니까."

코테가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쇼핑때 엄마랑 만난다는거 말인데요."

"응."

"혹시 엄마한테 저에 대해 이상한 얘길 하진 않았죠?"

"설마아~
해봤자 후배들에게 언니님~(오네사마) 언니님~이라고 불리며 존경받는단 얘기 정도였지."

"충분히 이상하잖아요!"

"뭘~ 그 얘기 듣고 어머님 엄청 웃으시던데 이야기가 맘에 드셨던게 아닐까?"

"엄마..."

머리를 싸매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놀리는건 이쯤으로 하기로 했다.

"좋은 어머니시잖아. 미인이시고.
나중엔 코테가와도 저런 온화한 성품이 되는걸까?"

"지금 제 성품은 날카롭단거예요?"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는데.
그래도 부드러운 성격의 어머님과 달리 코테가와의 성격이 똑부러지는게 신기하긴 해."

"...저로선 이 성격은 남자들 탓도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남자들?"

"지금까지 만난 사내아이들은 전부 여자들을 괴롭히고 놀기만 좋아하는 변변찮은 남자아이들 뿐이었으니까...
괴롭힘 당하는 여학생들을 남자애들로부터 지키려면 다소 드세지는건 어쩔 수 없잖아요.
다함께 해야할 일이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곤란에 빠진 동물이 있으면 남자들은 모른척하거나 남에게 미루거나 비웃기나 하고...
그러니까 어릴적부터 남자애들은 정말 싫었어요."

"그건...큰일이었네."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그런 녀석들 뿐이었다면 성격이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네.
나도 중학교 시절 비일상적인 모히칸 깡패들에게 줄기차게 시달린 탓에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 있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코테가와는 푸념만 늘어놓은게 마음에 걸렸는지 말을 덧붙였다.

"...뭐, 그렇지 않은 사내아이도 있긴 했지만."

"오? 드물게 좋은 아이도 있었나보네.
어떤 아이였어?"

"이름은 몰라요. 그냥 우연히 한번 만났을 뿐이라...
초등학교 5학년때 즈음, 나무에서 못내려오는 고양이를 구해준 남자아이가 있었어요.
제 또래로 보였는데, 덕분에 또래 남자들 전부가 멋대로고 못 써먹을 사람들인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멋진 남자아이였구나."

"...하지만..."

"?"

고개를 숙인 코테가와가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로...예, 정말로... 그 한명만 유일한 예외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그, 그래...?"

코테가와의 박력에 밀려 무심코 말을 더듬었다.
내뱉어진 말과 함께 코테가와가 풍기고 있는 기운은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 절망. 압도적인 절망감.

"후후...설마, 중학교 시절동안 괜찮은 남학생을 단 한 명도 못 만날 줄은...솔직히 예상 밖이었어요."

동년배 남자들에 한정하면, 정말이지 여긴 무슨 의인이 10명도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같은 말법적인 동네인가보다.
오오 붓다여!

"하, 하하...코테가와도 고생이었구나."

굳이 이런 우중충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진 않았기에, 화제를 돌려보았다.

"아무튼 그 남자아이말야, 상냥한 아이였네."

"네. 남자에 대해서 유일하게 좋은 인상을 가지게 해준 아이니까요."

"마치 추억의 사내아이로구나."

"......"

코테가와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그 날의 일을 꿈으로 꾼 적도 있으니까."

담담하게 말을 이으며 코테가와는 허공을 응시했다.

"학교의 소란스러움 속에 휩쓸릴 때면 이따금 생각해요.
그 때의 상냥한 남자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하고 말예요."

"그렇게 멋진 사내아이였다면, 지금쯤 즐거운 청춘을 보내고 있는거 아닐까?
혹시 만나고 싶어?"

"...할 수 있다면 만나고 싶네요."

"어쩌면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지."

"쿡쿡. 낭만적이네요 아키츠군은."

코테가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이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런데 설마하니 그 소년이 당신이었다는 얘길 하려는건 아니겠죠?"

"엣? 아니아니, 설마."

당황해선 곧바로 부정했다.
소중한 추억에 농담으로 끼어들 생각은 없으니까.
내 부정을 코테가와는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였다.

"그럴줄 알았어요.
그때의 사내아이가 아키츠군 같은 매서운 눈초리를 가졌다면 잊고 싶어도 못 잊을걸요?
그리고 그 남자아이는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랑 함께 있었으니까 아키츠군일리 없겠죠."

"응. 난 외동이니까 말이지.
그런데 중학교 시절은 그렇다 치고, 지금은 어때?
고교엔 괜찮은 남학생들은 없었어?"

"으응...지금도 남자들에 대한 평가는 크게 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고교 들어선 괜찮은 사람도 없진 않았죠."

"정말? 누군데?"

"렌군이네요.
학년초에는 라라를 두고 유우키군이랑 다투면서 소란을 피웠지만, 요즘은 비교적 얌전하잖아요.
여학생에게 상냥하고 운동에도 소질이 있으니 문무겸비라는 말이 어울리고.
라라와 관련되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라라와 얽히면 사리분별을 못한다는게 단점이긴 해도, 라라에게 한결같고 성실하다는 점은 좋게 평가하고 있어요."

"응응. 그리고?"

"없어요."

"...네?"

"그러니까, 더는 괜찮은 남학생은 모른다구요."

"에에~? 괜찮은 남학생이 초등학교 시절에 한 명, 고등학교 시절에 한 명. 딱 두 명 뿐이야?"

"네."

"나는? 나~느~은~?"

"...방금전 파렴치한 짓을 해놓고선 잘도 좋게 보이길 바라네요 아키츠군은."

코테가와의 핀잔에 모른척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하다 목이 마른 코테가와가 음료를 마시는 동안 코테가와의 방을 둘러보았다.

우선 침대 맡에 놓인 나른한 표정의 고양이 인형.
기억을 더듬어보니 여름 축제때 코테가와가 사격 놀이로 딴 인형이네.
여전히 고양이 관련 물품을 좋아하는구나.

다른건 없나 살피다 책장에 꽂힌 두꺼운 앨범이 보였다.
...이거 혹시 졸업 앨범이려나?
앉은 채로 이동해서 앨범을 꺼내들었다.

"앗! 코테가와의 초등학교 앨범 발견~!"

"아키츠군. 보는건 뭐라고 안할테니까 적어도 허락은 받으세요."

"엣? 봐도 괜찮아?"

"딱히 숨길것 없잖아요?"

"칫, 반응이 재미없어."

"대체 무슨 반응을 원하는거예요?"

나의 중학교 시절 앨범은 외로움의 상징이라서, 졸업 때 받은 뒤 펼쳐보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그럼 사양없이 보기로 할까~!



코테가와의 초등학교 시절 앨범을 본 감상은요...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트윈테일 코테가와라니...뿅가죽겠네.

"...어째서 나는 코테가와랑 같은 초등학교가 아니었던거야...!"

"징그럽게 뭘 울먹거리는거예요!?"

울먹여? 통곡하고 싶다고 나는!

"그렇지만 어릴적 귀여운 코테가와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는걸..."

"귀, 귀엽다고 하지 말아요!"

"저기, 이 사진 갖고 싶은데...안돼?"

"안돼요!
애초에 남의 기념 앨범 사진을 달라니 무례한 말 하지 말아요."

"큭...!"

아쉬움의 눈물을 삼키곤 코테가와의 어릴적 모습이 담긴 사진을 폰으로 찍었다.

"멋대로 찍기는..."

다행스럽게도 코테가와는 불평하면서도 억지로 사진찍는걸 막거나 하진 않았다.


"아하하~ 이 시절에도 코테가와는 눈매가 매서웠구나."

"아키츠군 만큼은 아니거든요?"

기가 세보이는 인상의 코테가와의 사진을 보며 웃자 코테가와가 딴죽을 걸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에 젖었는지 코테가와도 곁에서 함께 앨범을 구경했다.
이따금 푸념을 늘어놓긴 했지만, 여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며 소소한 기억을 떠올리는 코테가와는 다소 들떠 보였다.



"초등학교 앨범은 이걸로 끝이네.
아쉽지만 기분을 고치고 중학교 시절 앨범으로 갈까~"

"수십장을 찍어놓고선 아쉽다고 말하는거예요?"

어이 없어하는 코테가와의 핀잔을 흘려넘기곤 중학교 앨범을 열었다.

"코테가와의 사진은... 아! 여깄네.
오~ 중학교때까진 계속 트윈테일이었구나 코테가와는.
...응?"

...응?

......응응???

중학교 사진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금의 코테가와를 바라본다.

말이 없어진 내 모습에 코테가와가 불안한 듯 물었다.

"왜 그래요? 사진이 뭔가 이상해요?"

"아, 아니. 귀여워.
귀여운데..."

다시한번 중학생 시절의 귀엽디 귀여운 트윈테일 코테가와를 살펴본다.

그 몸매는 평탄하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대체 뭐가 일어난거,"

"어디를 보고 말하는건가요!?"

쭈우욱---!

언성을 높이며 코테가와가 양볼을 사정없이 쭉쭉 잡아당겼다.

"아, 아파!"

"시끄러워욧!
시선을 어디에 두고 있어요 이 저질!"

한껏 붉어진 얼굴의 코테가와에게 변명하지 못하고 실컷 뺨을 괴롭혀지며 시달렸다.




"코테가와."

"왜요?"

"말하기 좀 그런데, 너 지금 땀투성이가 됐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 장본인이 잘도 말하네요."

방금전 일로 한창 화내던 코테가와는 피곤에 절었는지 다시금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몸 닦아야 하지 않아?"

"...원랜 몸을 닦아두려 했는데 아키츠군이 와서 못 닦은 거라구요."

"아...미안."

"화내는거 아니니 신경쓰지 말아요.
그리고 병문안은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 가봐요.
역시 슬슬 몸을 닦아야 하니까."

땀으로 몸에 들러붙은 파자마의 감촉이 불쾌한 듯 코테가와는 눈썹을 찡그렸다.
머리 맡에 놓인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보곤 즉흥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럼 방금전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등을 닦아 줄께."

"웃기지 말아요 파렴치한!"

당치않다는 듯한 외침에 잠시 귀를 막곤 다시 한번 권했다.

"하지만 그 상태로는 코테가와도 찝찝할 거잖아?"

"제 몸은 제가 알아서 닦을수 있어요."

"하지만 등은 혼자선 힘들지?"

"끈질기네요..."

"순수한 선의라구."

"응큼한 속셈은 전혀 없단 건가요?"

"......"

시선을 피하곤 휘파람을 불자 코테가와는 이번으로 몇번째인지 모를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당신은 어디까지나 파렴치한인거라구요."

코테가와는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등만 부탁해요."

"앗싸~!"

"등만이예요? 다른 곳은 스스로 닦을 수 있으니까!
이상한데 만지면 가만 안둘테니까!"

"응, 맡겨줘~!
후회하지 않을 거라구 후후후..."

"지금 아키츠군의 모습을 보면 벌써부터 후회가 드는데요."

한차례 이마를 짚곤 코테가와는 침대 위에서 몸을 뒤로 돌렸다.

"...파자마는 스스로 걷을테니까요."

코테가와가 등을 보인채 파자마 상의를 벗은 뒤, 양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렸다.

다소 사심이 들어가긴 했지만, 기왕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하도록 할까.

대야의 물에 수건에 적셔 짠 뒤 코테가와의 등에 대었다.
수건이 등에 닿았을 때 코테가와는 흠칫 몸을 떨었지만, 묵묵히 등을 닦자 침착해진듯 코테가와는 얌전히 몸을 맡겼다.

"혹시나 싶어 다시 말하지만 이상한데 만지지 말아요."

"응. 안그럴께."

"......이상한 사진 찍거나 하면 안돼요?"

"알았어~"

꼼꼼히 등을 닦던 중 등에 맺힌 물방울들이 모이더니 등을 따라 또르륵 흘러내렸다.
파자마 바지까지 물이 흘러내릴까봐 황급히 한손을 코테가와의 허리에 받쳤다.

"꺅!? 다, 당신!? 뭐하는거예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코테가와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수건을 덜짰는지 물이 흘러내렸거든.
바지까지 젖을까봐 급하게 손으로 막았는데. 미안해."

"...정말이죠?"

의심스러움을 지우지 못한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곤 수건을 다시 적셨다.

등에 묻은 땀을 닦아내고선 옆구리로 수건을 향하자 코테가와가 움찔하며 몸을 비틀었다.

"에? 잠깐! 거기까지 부탁하진 않았어요!"

"기왕 하는 김에 조금 더,"

"한도라는게 있겠죠!"

빡!

머리를 힘껏 뒤로 젖힌 코테가와에게 얼굴을 직격당했다.
안면을 맞고선 그대로 나가떨어져 마루 바닥에 대(大)자로 뻗었다.
문제라면 코테가와도 기세가 지나친 나머지 덩달아 침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는 거지만.

"꺅!?"
"왓!?"

침대 밖으로 등부터 떨어지는 코테가와를 누운채로 낚아챘다.
위치로 봐선 내 몸위로 굴러떨어질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바닥에 머리를 부딪히거나 하면 큰일이니까.

...하지만 상반신 알몸인 코테가와를 뒤에서 껴안은 자세가 된건 역시 문제지요!




코테가와의 허리에 두른 팔에서 전해지는, 땀에 젖어 끈적하면서도 미끌거리는 배의 감촉이라든가.
몸에 닿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라든가, 어지러이 흩어진 머리카락의 감촉이라든가, 가까이서 들리는 얕은 숨소리라든가, 은근히 풍기는 땀 냄새라든가...

긴장한 나머지 한차례 침을 삼키자, 코테가와의 입이 열렸다.

"...언제까지 붙어 있을 건가요?"

"허, 허리가 풀려서 그러니 잠시만 시간을 줘."

"변명은 그게 다인가요?"

"...네."

후우-

한차례 숨을 내뱉곤 코테가와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힐끗 보았다.

"...감기 옮을지도 몰라요."

"응..."

"...감기 나으면 가만 안 둘테니까."

"...응."

조금씩 하복이 땀으로 젖어가는 가운데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의 열기는 감기에 걸린 탓일지도 모른다고.




긴장된 시간의 끝은 의외로 어이없이 찾아왔다.

꼬르륵-

감기로 계속 누워만 있던 탓이었을까.
배에서 난 작은 소리에 코테가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주섬주섬 일어나 파자마 상의를 도로 입은채 침묵한 코테가와에게 침대 맡에 있던 푸딩을 가리켰다.

"...푸딩 먹을래?
일단 병문안 선물이거든."

"...주세요."

고개를 숙인채 끄덕이는 코테가와의 앞에서 푸딩 뚜껑을 열고 스푼을 집어들었다.

"자, 아앙~"

"......"

코테가와 침묵.

푸딩을 뜬 스푼을 내민채로 기다리던 날 한참 응시하던 코테가와가 손을 뻗었다.

"...거기까지 어울려줄 생각은 없거든요?"

푸딩과 스푼을 낚아챈 코테가와는 묵묵히 푸딩을 입에 넣었다.

"...맛있네요."

"마음에 든것 같아서 다행이네.
모미오카랑 리사는 무조건 멜론이어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말야."

"어째서 멜론?"

"이유, 듣고 싶어?"

"...아뇨. 듣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그 두사람이라면 제대로 된 이유를 댈 리 없으니까."

"심하네. 뭐, 그말대로지만."

어깨를 으쓱하곤 휴대폰을 열었다.

"뭐해요?"

"친구들에게 병문안을 와도 괜찮다고 연락하려고.
상태가 안 좋으면 병문안은 보류하려고 했거든."

얘기하다보니 연락이 좀 늦었지만, 병문안은 오고 싶은 사람만 오면 되겠지.



병문안을 희망하던 룬과 다른 친구들에게 간단히 연락을 돌리곤 코테가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렇게 바라보면 맘놓고 먹기 힘든데요."

시선이 신경쓰였는지 푸딩을 먹다말고 코테가와가 눈을 흘겼다.

"미안. 조금 잡념이 들어서."

"어떤거죠?"

"나도 감기 걸리고 싶어...라든지 하는거."

"아픈 사람 앞에서 배려없이 잘도 그런 말을 하네요 아키츠군은."

"미안해. 그냥 예전에 바랬던 소망이 떠올랐을 뿐이야."

"아픈게 소망이예요?"

"아니. 친구들이 병문안 와주는거."

"...사치스런 꿈이네요.
그래봐야 아키츠군은 튼튼하니까 어지간해선 아플 일은 없겠죠."

"말씀하신대로..."

어차피 배부르고 염치없는 소망을 진심으로 바라진 않았다.
그냥 친구들이 걱정해주는 상황을 동경했을 뿐이니까.

다만 코테가와에겐 기왕 내뱉은 망상 섞인 푸념에 어울려주길 바랄 뿐이다.

"아아~ 나도 간병 받고 싶어~
걱정 받고 위로 받고 싶어어~"

"...후우..."

넋두리를 무시하고 푸딩을 먹던 코테가와가 한숨을 흘렸다.

"아키츠군."

"응?"

"자."




입안에 들어온 스푼에 무심코 입을 다물자, 달콤하고 말랑한 푸딩이 입안을 채웠다.

스푼이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눈을 깜빡이며 입안에 든 푸딩을 우물거리는 내게서 코테가와는 눈을 돌렸다.

"그걸로 감기가 옮는다면요. 응석쟁이씨."

조금 귓볼이 붉어진 코테가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렀다.

"...코테가와."

"뭐예요?"

"나, 얼굴이 뜨거운게 감기 걸린거 같아."

"그런가요. 잘됐네요."

"간병해줘."

"환자에게 잘도 그런걸 부탁하네요 당신은...
뭘 해줬으면 하는데요?"

"아까 푸딩 좀 더 먹여줘."

"싫어요."

"하, 한번만. 한번만 더."

"시끄러워요. 한번 줬으면 됐잖아요."

사정하는 내 얼굴을 외면한채 코테가와는 묵묵히 푸딩을 먹었다.

"조금만! 끝만이라도 좋으니까!"

"절대로 싫어요."




이후는 병문안 온 친구들로 떠들썩했다.
심부름 다녀온 유우씨가 룬을 보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 룬이 보인 모습은 내숭 그 자체였다.

"어라...? 너는?"

"안녕하세요~♡ RUN입니다~♡"

교태로운 목소리로 귀여움을 뽐내면서 룬이 유우씨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와아~ 풍기위원장에게 이렇게나 멋진 오빠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아하하~ 인기 아이돌 RUN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이거 기쁜걸.
아참, 싸인해주지 않을래?"

"후후, 물론이예요~☆"

싸인을 받고 기뻐하며 유우씨가 방을 떠나자 룬이 날보며 히죽 웃었다.

"좋은 남자잖아? 너와는 다르게 말야."

"쳇- 내가 뭐 어때서..."

쿡쿡 옆구리를 찌르는 룬에게 투덜거렸다.

"풍기위원의 오빠말야, 매끈한 얼굴에 금발이었지.
너도 저 오빠처럼 깔끔하게 다니는게 어때?
저번에 준 제모제 아직 안썼지?"

"쓰겠냐 바-보-"

"뭐? 너야말로 수염바보 주제에...!"

열받은 룬이 숫제 손날로 옆구리를 푹 찔러왔다.

"큭!? 너, 너어...?"

"깔끔한게 뭐 어때서 그래? 언제까지 지저분한 수염으로 있을꺼야 바보- 바보-"

"야! 이래뵈도 미카도 선생님이 깨끗한 피부라고 인정해주신 몸이거든?"

"하! 깨끗한 피부? 수염에 뒤덮여서 잘 모르겠는거얼~?
일단 수염부터 어떻게 처리하고 그런 소릴 해."

"그냥 깨끗한 피부라는 말 안할께."

"수염에 대한 그 집착...끈질기네."

"그쵸?"

질린듯한 룬의 말에 시즈가 동의하자 구경하던 코테가와도 거들었다.

"1학년땐 훨씬 더 심했지.
구레나룻까지 길렀으니까."

"정말? 우와아..."

질색하던 룬이 궁금한지 물었다.

"그런데 이 수염바보가 어떻게 구레나룻을 없앤거야?"

"타의 백퍼센트. 수염킬러에게 당했어."

"야미짱에게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아요 아키츠군."

당신이야말로 순전히 야미의 탓인양 말하지 마시죠 수염킬러B양.



코테가와 중학교 시절 앨범을 펼쳐본 나나가 반색했다.

"나랑 같은 트윈테일이네?"

"응. 사랑스러운 모습이네."

"어쩐지 나랑 비슷한 스타일이라 친숙해."

앨범 속 코테가와를 뚫어져라 보는 나나의 모습에 모모가 키득 웃었다.

"얘, 나나. 혹시 지금 가슴을 신경쓰고 있는거야?"

"!? 아, 아니거든!?"

"어머 그래?
뚫어져라 한 곳만 보는것 같아서 난 영락없이 그런줄로만 알았지."

"이...! 가슴이 작다고 놀리는거야!?"

히죽히죽 웃는 모모에게 나나가 폭발했다.
평탄한 중학교 시절 코테가와 사진을 가리키면서 나나가 외쳤다.

"두고 보라구! 나도 크면 코케가와처럼 빵빵해질거라고!"

"코테가와야!
빵빵하다고 하지마!"

호칭에 항의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크크크! 뭐 어때? 귀엽기만 하잖아 코케가와."

"웃기지 마시죠 아케치군."

어딘가의 탐정물 생각나게 하는 성씨는 그만둬 그만둬.

당황함이 가득한 소란스러움 속에서 다시금 어릴적 코테가와의 앨범을 펼쳐들었다.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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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를 맡아주신 터틀러님 감사합니다!m(_ _)m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근 11주일 만에 찾아뵙는 글이네요;
개인적인 일이다 뭐다하면서 연재주기를 파토내버려서 면목이 없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여동생이랑 여자친구에게 독자분들께 미안하지도 않냐고 혼나기도 했고;
여러모로 할 말이 없었죠OTL;

일단 다음편 쓰기 시작했습니다.
완결내려면 최소한 월간연재는 유지해야하니...-_-;

기다려주셔서 죄송하고 감사드립니다mㅠㅠm;

그럼 다들 월요일 맞이 잘하시길~!@ㅁ@;;;


p.s. 참조 이미지

전화가 서툰 시즈

어린 추억

코테가와 초등학생

코테가와 중학생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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