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앗키 오빠~!
한번쯤 이곳엔 와보고 싶었거든~"

"사, 사치!
그, 그러니까...고맙습니다."

핫팬츠와 민소매 셔츠를 입은, 뻗친 단발머리를 한 활발한 인상의 소녀.
하얀 원피스를 입은 어깨까지 오는 머리에 헤어밴드를 한 얌전한 인상의 소녀.

"어서오세요 여동생을 정말정말 좋아하는 아키츠 오빠~♪"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를 맞이하는 미오.

"저기, 죄송해요."

양 손바닥을 모으며 사과하는 미캉.
아니. 네 탓이 아니니까.

카페를 둘러보며 떠드는 두 꼬마 여자애들을 보곤 시선을 올려 천장을 향했다.

...어째서 이렇게 된거더라?




"에에~? 그럼 리토는 오늘 같이 못 들어가는거야?"

"응. 아버지 마감일이 코앞이라서 도와드려야 하거든."

쉬는시간에 들려온 리토와 라라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최근엔 식사도 챙기지 못할만큼 바빠보여서 한동안 도우러 가야할 것 같아."

리토의 말에 라라는 섭섭한듯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같이 매지컬 쿄코 플레임 보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난 그런 유치원생이나 보는 쇼는 싫다니까?"

"정마알~! 거기까지 말할건 없잖아?"

라라가 뾰루퉁하니 볼을 부풀렸다.
쿄코를 좋아하는 라라로서는 리토의 발언이 불만인가보다.
라라의 반응에는 동감한다.
상식적으로 팬 앞에서 그런 말투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의 대화에 관심을 가진건 나만이 아니었다.

"(흐흥~ 이겼다...!)"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들려온 리토의 발언에 룬은 귀를 쫑긋하더니 작게 콧소리를 흘렸다.
아이돌로서 쿄코에 대한 경쟁심이 있는지,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말아쥐곤 승리포즈를 취하는 룬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나저나 리토의 말대로라면 사이바이 스튜디오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건데.
어쩌면 미캉이 사이바이씨의 식사까지 걱정해야할 처지가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미캉 혼자 장보기에는 힘이 부칠것 같다.
...그럼 이참에 미캉에게 장보기를 권해볼까?

그렇게 노파심에 짐꾼을 자처할겸 미캉에게 장보기 권유를 했던건데...




"저기, 앗키 오빠? 듣고 있어?"

당돌한 회상은 뻗친머리 소녀의 부름에 끊겼다.

"...앗키?"

"미안미안, 이름 못 외웠거든~"

뒤통수를 매만지면서 사과하는 소녀-그러니까, '사치'였던가?-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생각해보면 애초에 서로 제대로된 자기소개도 안했으니까.

"그래서, 너희는 미캉의 친구?"

"응, 난 코구레 사치에."

"노기와 마미입니다."

활달한 쪽이 사치에, 얌전한 쪽이 마미로군.

"아키츠 료스케다."

사치에랑 마미가 빤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뭐, 뭐야?"

"오빤, 미캉의 친오빠가 아니지?"

"응. 그냥 알고 지내는 오빠인데."

"하아...역시..."

실망한듯 안도한듯 크게 한숨을 내쉬는 둘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대체?

"아아~ 유감~
오늘에야말로 미캉의 오빠를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응,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장보기하러 가는 오빠는 다른사람이라고 계속 얘기했잖아~!"

"부끄러우니까 미캉이 둘러대는건줄 알았단말야~"

"정말..."

부부- 볼을 부풀린 사치와 마미에게 미캉은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러니까 너희는 미캉의 오빠를 보고 싶어서 미캉을 따라왔단거야?"

"맞아! 미캉이 오늘 학교에서 문자를 주고 받는걸 보고선 나는 눈치챘단 말씀!
이건 분명 베일에 싸인 미캉의 친오빠를 만날 기회라고!"

...베일에 싸인?
리토가 그렇게 비밀스런 인물이었나?

"사이난 초등학교 제일의 미소녀 미캉인걸!
그 미캉의 오빠라면 어떤 사람일지 궁금한게 당연하잖아!"

"미캉은 오빠 얘길 잘 안해주니까 궁금했거든요."

"아아아~! 보고 싶었어 미캉의 오빠~!"

"응응."

온몸으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는 사치와 마미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던졌다.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너희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미캉의 친오빠 말야."

내 말에 마미와 사치의 눈이 반짝거렸다.

"왕자님 같은 사람..."

"초절정 꽃미남에 머리도 좋고 키도 크고 상냥하기까지한 오빠!"

"그, 그러냐..."

그건 어디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입니까?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은채 황홀한 얼굴을 하는 두 녀석을 보다가 옆자리에 앉은 미캉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이러니까 리토를 소개하기 부담스럽다구요.)"

응. 알거 같네.
이렇게 터무니없는 기대를 안은 네 친구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약속장소에 도착한 나를 미캉의 친오빠로 착각한 두 녀석들이 충격받은 얼굴은 잊을 수 없다.

- 물어내 물어내! 내 기대 물어내!
- 어, 어어?
- 와, 왕자님이...수염...
- 으아아~~~! 더워! 목말라! 파르페! 아이스크림!
- 사, 사치!?

터무니없는 화풀이로 떼쓰는 사치에게 당황한 나머지, 무심코 여동생 카페에 와버렸지만...
사치와 마미를 데리고 온 내게 능글맞은 웃음으로 맞이하던 미오를 떠올리자면, 아무래도 여기온건 실수가 아닌가 싶다.

상상 속의 리토에서 빠져나온 사치가 밝게 웃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오빠같은 사람이 미캉의 친오빠일리 없으니까.
이야~ 다행이라구."

"...뭐, 그야 성씨가 다르니까."

"아니. 미캉의 오빠가 수염투성이일리 없잖아?"

"...에잇."

"꺄~ 폭력 반대~!"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건드리자 사치가 엄살을 부렸다.

"남의 얼굴 갖고 뭐라하지마라 요 녀석아."

"하지만 수염 같은건 하나도 안 멋진걸?"

"...진짜로?"

"응!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아!"

"네~ 주문하신 계절 한정 스페셜 파르페 나왔습니다~☆"

"앗키 오빠 최고~! 정말 좋아!"

넉살도 좋네. 귀여운 녀석.
무심코 피식 웃어버린 내가 잘못이지.
순식간에 태세를 바꾼 사치의 모습에 미캉은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먹겠습니다~!」」」"

오냐.
이러니 저러니해도 귀여운 녀석들이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두 녀석의 자기 소개를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둘은 미캉의 단짝이란다.
얘기하면서 떠오른건데, 두 녀석들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작년 여름에 미캉과 저스틴 일행과 얽히면서 벌인 해프닝으로 동네 꼬마들에게 피구왕이라고 불리게 된 날.
그날 미캉과 함께 공원에 놀러왔던 두 친구가 바로 사치와 마미였다는거다.
사치랑 마미는 『수염성인』이라는 호칭에 곧장 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하나도 기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뺨에 손을 대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둘의 모습에 자연스레 나도 표정이 풀어졌다.

"맛있어?"

"네. 저기, 감사합니다."

"응! 미캉의 오빠는 못봤지만 여기 온 것만으로도 만족스런 하루였어."

"유우키에 대해 그렇게 궁금하다면 내가 아는 범위에선 얘기해줄 수 있는데."

내 말에 사치와 마미가 눈을 깜빡였다.

"정말요?"

"앗키 오빤 미캉의 친오빠에 대해 알고있어?"

"알고 있달까, 같은 반인데."

"진짜~!?"

사치의 눈이 다시금 호기심으로 빛났다.

"어느 대학교? 몇학년 몇반인데?"

......영문학과 6학년 7반쯤이려나?

"왜 그렇게 봐?"

"아니. 아이다워서 귀엽다구."

"난 꼬마가 아냐! 이제 벌써 6학년인걸?"

"그래그래. 미안."

항의하는 사치에게 사과하곤 말을 돌렸다.

"일단 유우키는 고교생이야.
나랑 동갑이라고 했잖아."

"오빤 대학생 아녔어?"

"...나 지금 교복 입고 있잖냐."

내 말에 사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교생은 수염 길러도 돼?"

"......"

"......"

"......디저트도 시킬래?"

"시킬래!"

사치는 반색하며 메뉴판을 펼쳤다.

"...훗, 간단하군."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미캉이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디저트를 먹으면서 화제는 다시 미캉의 오빠, 리토에 관한걸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미캉의 오빤 어떤 사람?"

"멋진 사람인거죠?"

두근두근 기대에 부푼 둘의 시선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입을 열었다.

"일단 외모는 미남이라기보단 미소년이라는 표현이 걸맞겠네."

"오오! 미소년!"

"역시 미캉의 오빠다워요!"

"응, 교내 제일 미소녀인 미캉의 오빠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내 대답이 기대에 부응했는지 활기가 도는 사치와 마미.
미캉이 우와아...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툭툭-

미캉이 팔꿈치로 슬쩍 내 옆구리를 쳤다.

"(료스케 오빠.)"

"(왜?)"

"(그렇게 허들을 높이면 어떡해요?
그렇잖아도 리토에 대해 말하기 곤란한데.)"

"(뭐 어때? 사실이잖아.)"

"(평범한 얼굴이잖아요 리토는.)"

...가족에 대한 미캉의 평가가 너무 엄하지 않아?

언제까지고 미캉과 속삭일순 없었기에, 둘만의 대화에서 빠져나온 사치와 마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리고 얼굴 외엔 어때? 미캉의 오빠는?"

방금전 사치와 마미의 상상속 리토를 떠올리곤 말을 골랐다.

"으응...이미지는 문학소년이라기보다는 활발한 스포츠맨 타입이려나?
자신있는 스포츠는 축구였지 아마."

"오~ 스포츠맨이네 미캉의 오빠는."

"그리고 상냥함으로 치면 동년배 남자들 중 제일일걸?"

"...멋져..."

마미는 시선이 몽롱한게 완전 넋이 나간 것 같다.
사치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머리에 깍지를 꼈다.

"아아~ 정말~!
미캉이 오빠를 안보여 주려는 이유를 알것 같아."

"으응... 나라도 그렇게 완벽한 오빠를 독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걸."

"에에에~~~?"

미캉의 새된 소리는 둘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가련...
하지만 사이좋은 남매라는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



"그러니까 미캉은 정말로 굉장하다니까?"

"맞아요. 저번엔 4학년 남자애한테도 고백을 받았다구요."

"응응, 그야말로 연하도 유혹하는 마성의 여자!"

초등학생인데 마성의 여자냐...
부정은 않겠다만.

미캉의 오빠에 대한 호기심을 적당히 채운 사치와 마미는 이번엔 미캉의 학교 이야기를 잔뜩 풀어내며 자랑하기 시작했다.

"사이난 초등학교에서 제일 예쁘고 멋진 여자가 바로 미캉이라구.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응. 그건 인정."

"료스케 오빠!?"

"역시 앗키 오빠! 잘 알고 있잖아?"

앗키로 호칭 고정이냐.

사치와 마미는 미캉을 화제삼아 즐겁게 이야기를 풀었다.
둘다 미캉의 절친이다보니 미캉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미캉이 난처해하며 둘을 말리려 했지만, 신나게 떠들어대는 둘을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미캉의 학교 생활이 궁금했기에 말릴 생각도 안했지만.



시간도 제법 흘렀기에 그만 자리에 일어났다.
너무 시간을 들였다간 목적인 장보기를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여전히 활기찬 사치, 사치와 마미를 말리다 진이 빠진 미캉, 그런 미캉을 다독이는 마미.
셋을 뒤로하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을 하는데 홀로 내 뒤를 졸졸 따라온 사치가 물었다.

"저기, 앗키 오빠."

"왜?"

"오빤 미캉의 오빠랑 같은 반이랬지?"

"응."

"그럼 미캉의 오빠한테 나에 대해 얘기해줄래?
그리고 여자친구로서는 어떨지 한번 물어봐줘."

...요즘 아이들은 조숙하네.

"유우키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응! 미캉의 오빤 멋진 사람이고, 만약 연인이 된다면 난 단짝인 미캉이랑 한가족이 되는거잖아."

연인이 되고픈 이유가 사랑스럽네.

"좋아. 한번 물어볼께."

"정말이지? 약속한거다?"

"후후, 그래."

"헤헷...아참!"

배시시 웃다 말고 뭔가 떠오른듯 사치가 탄성을 내뱉었다.

"저기, 앗키 오빠~♪"

몸을 배배꼬면서 애교를 부리는 사치의 모습에 웃음을 참곤 물었다.

"왜 그래?"

"집에 전화를 해야하는데 폰 좀 빌려줄 수 있어?"

"여기."

"고마워~!"

폰을 건네받곤 사치는 몸을 돌렸다.

"마미."

"왜? 사치."

"화장실 같이 가자."

"아, 응."

그냥 밖에 나가서 통화해도 괜찮을텐데.
사치는 마미와 손을 잡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보통 친구랑 함께 화장실에 간다던데 그런건가보다.



"다음 방문을 기다리겠습니다냐~☆"

고양이 여동생 이벤트는 끝난거 아녔냐 미오.
변덕스레 어투가 바뀌는 미오의 인사를 받으며 여동생 카페를 뒤로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사치에게 폰을 돌려받고 주머니에 넣었다.

"오빠랑 미캉은 이제부터 장보러 가는거야?"

"그래. 너무 늦으면 문을 닫는 곳도 있을테니 슬슬 가봐야지."

헤어지려는 사치와 마미에게 미캉이 주의시키듯 엄하게 말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볼께.
사치랑 마미도 다음엔 이런식으로 료스케 오빠를 곤란하게 하지마."

"미캉이 친오빠를 소개시켜준다면 그렇게 할께~"

"응. 다음엔 미캉의 오빠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정말이지...이상한 기대 하지 말아."

둘의 요청에 미캉은 답답한듯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참, 앗키 오빠."

"응?"

사치의 손짓에 몸을 기울이자 사치가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미캉의 오빠에게 나랑 마미의『사진』꼭 보여줘~?)"

"뭐?"

"아하하~! 그럼 바이바이~!"

"꺅~!?"

놀라는 마미의 손을 붙잡고 사치는 크게 뜀박질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날 두고 어느샌가 저만치 달려나간 사치가 크게 손을 흔들었다.

"알았지? 약속이야~!"

"그래."

피식 웃곤 마주 손을 흔들었다.
둘을 떠나보내고 미캉이 궁금한지 물었다.

"사치가 뭐라고 말했어요?"

말해주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캉에게 말해도 될거였다면 일부러 귓속말로 전하진 않았겠지.

"으응...비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애매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내게 미캉은 입술을 비죽였다.




장보기는 빠르게 이뤄졌다.
폐점시간을 신경쓰다보니 다소 서둘러 장보기를 마쳤다.

예상대로라고 해야하나?
오늘 미캉이 산 물건은 여간 많은게 아니었다.
평소보다 몇배는 많은 미캉의 짐.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면서 묵묵히 물건을 고르는 미캉을 따라가며 속으로 안도했다.
미캉 혼자였다면 몇번씩이나 나눠서 쇼핑해야 했을테니 함께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네."

"그러게요."

양손 가득히 장바구니를 들고 마지막 상점을 나섰을 땐 해가 제법 내려와 있었다.
미캉과 사치, 마미를 데리고 카페에 들어갈 때부터 예정보다 귀가가 늦어질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며가며 걸릴 시간을 고려해보건데 역시 귀가는 밤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나나와 모모에게 먼저 저녁을 먹으라고 카페에서 미리 연락을 해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라라가 집에 혼자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락해보라고 부탁했으니 다들 배곯고 있진 않겠지.

"이대로라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다녀올 즈음엔 밤이겠구나."

"...네?"

"사이바이씨, 최근 마감으로 바쁘댔으니까.
그러니까 스튜디오에서 쓸 식재까지 산거 아녔어?"

"......"

"미캉?"

"아, 미안해요. 조금 멍해 있어서..."

"그래?
여하튼 걱정하지 마.
귀가가 늦어지더라도, 안전하게 집까지 에스코트 해 줄테니까!"




쏴아아아아아아------



"......"

"......"

기시감이 든다.
전에도 비슷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에 불안을 느끼길 잠시, 사나운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를 피해 근처 놀이터의 놀이기구 안으로 숨었다.

이글루처럼 생긴 반구형의 작은 놀이기구에서 비를 피할 수 있는건 다행이었지만...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놀이기구 여기저기에 나있어서 비를 피하기에 좋은 구조물은 아니었다.
앉는 위치를 잘못 잡았다간 구멍으로 들어오는 비바람에 옷이 젖어버릴것만 같았으니까.

뭐, 비를 피해 놀이터까지 오는 와중에 옷은 이미 쫄딱 젖어버렸지만 하핫~!
...변덕스런 여름 날씨에 어울리는 것도 정말이지 못할 짓이로군.

천장에 구멍이 뚫려있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이지.
놀이기구 안에서 미캉과 마주 앉아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번쩍-!
콰르릉!

"꺅!?"

쿵-

"윽!?"

천둥소리에 놀란 미캉이 놀이기구 벽에 뒤통수를 부딪혔다.
뒤통수를 매만지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미캉의 모습이 아파보여 나도 눈살이 찌푸려 졌다.
그러고보면 미캉은 천둥번개를 무서워했지.

"마주 앉아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올래?"

"네?"

"손이라도 잡으면 좀 더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야."

"...별로, 괜찮아요.
거기다 부끄럽고.
저도 이젠 아이가 아니니까..."

"별로 부끄러워할 것 없잖아."

내 말에 미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이에요?"

"응."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거 아니죠?"

"딱히. 무서워한 걸 갖고 놀릴 생각은 없어.
무서운건 무섭다고 하면돼.
억지로 참고 있을 일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하아...됐어요."

미캉은 한숨을 쉬곤 주섬주섬 일어났다.
몸을 일으켜 다가온 미캉은 잠시 멈췄다.

"료스케 오빠.
좁으니까 다리를 좀 더 벌려주세요."

"어? 응."

...응? 좁은데 다리를 벌리라는건 이상하지 않아?
미캉의 요구에 맞춰 다리를 벌리자, 미캉은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어...

내 품에서 약간 거리를 벌린채 등을 보인채 앉아 있는 미캉.

...이 자세는 조금 아슬아슬하지?

곁에 앉아 손이라도 잡아주면 덜 무서워 할거라 생각해서 권한건데...
곤란한 나머지 무심코 옆을 살피고는 아차 싶었다.
내 양옆은 둘 다 시원하게 구멍이 크게 뚫려 있었으니까.

...응. 지금 상황은 자업자득이네.

내 옆자리에 앉으려 했다간 그대로 비에 젖어버릴테니까.
방금전 내 권유를 미캉이 이런 식으로 해석해 받아들인건 당연했다.

그러니까 전언 철회.
그야 이러면 부끄럽겠지.
나도 부끄러운걸.



쿠르릉-!

"힉!?"

또다시 들려온 천둥소리에 미캉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덜컥 등을 기대온 미캉의 허리에 엉겁결에 팔을 둘렀다.
자신의 허리를 감싼 팔에 미캉이 몸을 움찔하는게 전해졌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때때로 천둥이 울리면 미캉의 몸이 떨리고, 그 때마다 미캉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이 실린다.

피부에 들러붙은 옷자락은 드문드문 살색을 내비치고 있다.
쉴새없이 놀이기구를 때리는 빗줄기에 귀가 멍멍한 탓인가.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서 번지는 체향에 현기증이 인다.

"...빠."

"......"

"...료스케 오빠."

어렴풋이 들린 미캉의 부름에 깜짝 놀라 정신을 되돌렸다.

"왜그래? 혹시 자세가 불편해?"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미캉은 주저하듯 입을 우물거리더니 작게 속삭였다.

"...닿고 있어요."

"어!?"

"...수염."

"에? 아...아아! 미안!"

"......"

품에 미캉을 넣은채 붙어있다보니 그만 수염이 미캉의 얼굴에 닿았었나보다.
머리를 조금 들어 얼굴을 떼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닿지 않은거지? 정말로?



빗줄기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름인데도 저녁 소나기 탓에 주변엔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미캉의 입에선 뽀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비, 그치지 않네요."

"그러게. 너무 늦으면 사이바이씨도 걱정하실텐데 큰일이야."

"......"

사랑스런 딸의 귀가가 늦으면 마감 걱정을 할 때가 아니겠지.
동의를 구하자 미캉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짐, 무겁지 않았어요?"

"괜찮아. 힘이라면 자신있거든.
이렇게 많은걸 너 혼자 이렇게 장보기 하도록 둘 순 없잖아."

그냥 배달로 부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될 양이었지만 말야.

"그리고 앞으론 장볼게 많다면 먼저 권해줘.
혼자서 다 하려다가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위험하잖아.
난 몸은 튼튼하니까 기왕이면 좀 더 의지해주면 기쁠거라구."

내 팔에 닿은 미캉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안해요."

"아니, 별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심술부려서 미안해요."

"어?"

"......"

허리에 둘러진 팔에 손을 얹은채 미캉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귀여운 장보기 동료에게 짐꾼 희망서를 냈더니, 난데없이 미안하다는 얘길 들었다.
무엇에 대한 심술인지,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캉은 그다지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가보다.
반성하고 있는데 구태여 어떤 내용인지 다그치고 싶진 않다.
그보단 가라앉은 분위기 전환겸 화제를 돌려보기로 했다.

"이렇게 비를 피하고 있으니까, 너희 집에 처음 묵었을 때가 생각나네."

"...네. 그 때도 지금처럼 비가 심하게 내렸죠."

"응. 문을 열자마자 비가 쏟아지다니, 정말이지 여름 날씨는 변덕스럽다니까."

"그러게 말예요."

푸념하는 내게 미캉이 키득였다.

"...그땐 고마워요.
오빠가 없었다면, 코테가와 언니랑 야미가 없었다면, 아마 꽤 쓸쓸했을테니까."

"아아, 수영장 즐거웠지."

그 땐 리토도 라라도 여행가고 없었으니.
천둥번개에 무서워 떨고있는 미캉을 혼자 둘 수 있을리 없고.
그 날 묵었던 것도, 넷이 함께 수영장에 놀러간 것도 즐거운 기억이다.

"...다음에도 함께 놀러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응. 나도 기대하고 있으니까."



"아! 라라 언니에게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해야 하는데!"

"라라는 동생들이랑 저녁 먹고 있을테니 너무 걱정마."

"나나랑 모모씨랑요?"

"응. 아마 함께 저녁 먹으면서 매지컬 쿄코라도 보고 있지 않을까?
오늘 학교에서 매지컬 쿄코 하는 날이라고 라라가 들떠있더라구."

"라라 언니는 매지컬 쿄코의 열성적인 팬이니까요."

"듣기로는 라라가 매지컬 쿄코의 할로윈 공연 무대에도 나갔다던데?
저번에 그걸로 신나게 자랑하더라구.
너도 야미랑 함께 무대에 올랐다며? 재밌었어?"

"......잊고 싶어..."

미캉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신음을 흘렸다.

"미캉?"

붉어진 얼굴로 미캉은 어깨 너머의 내게 눈을 흘겼다.

"왜 그래?"

"...아빠의 스튜디오 간다고 하니까 떠오른건데,
아빠인척 하고 하루코 선생님께 한 일, 잊지 않으니까요."

"...사고였습니다."

"변태."

"윽."

날 째려보던 미캉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왜 하필 그때 료스케 오빠를 아빠랑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그런..."

투덜투덜 중얼거리다 말고 미캉은 말을 삼켰다.




비가 그쳤다.

천장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잦아들고 불그스레한 노을 빛이 놀이기구 안에 내렸다.

미캉이 옷을 털고 일어났다.

미캉을 놀이기구 밖으로 내보내고 장바구니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비를 피해 놀이기구 이쪽저쪽에 놔둔 장바구니들을 모으는데, 놀이기구 밖에서 서성이던 미캉이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오빤 앞으로도 계속 기를거예요 그 수염?
말하긴 그렇지만 그 모습은 솔직히 나이들어 보여요.
오빠도 그렇게 보이긴 싫죠?"

"응? 그야 나도 계속 이렇게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럼 자르는거예요?"

"응. 앞으로 5년 정도 지나면."

"...그때면 전 지금의 오빠 나이가 되어있겠네요."

어이없다는듯한 미캉의 어투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네. 그럼 이건 어때?
미캉은 내게 여고생 모습을 보여주고, 나는 미캉에게 깔끔해진 모습을 보여주는걸로.
미캉의 여고생 모습은 꼭 보고 싶으니까."

넉살좋게 웃으며 대꾸하자 미캉은 어쩔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약속한거예요?"

"물론."

짐을 모아들고 천장에 머리가 부딪히지 않게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놀이기구 밖으로 나온 내게 미캉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기대하고 있을께요 료스케 오빠."

노을에 물든채 미캉이 미소 지었다.




다음날.

오후의 쉬는시간에 뒤늦게 사치의 부탁이 떠올라 혼자 있는 리토에게 몰래 말을 걸었다.

초등학생 여자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가 리토에게 냉담한 시선을 받았다.
왜 그런걸 묻느냐고 하길래, 너랑 관련있는 얘기니까라고 답했다.
그래도 6학년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은근히 떠봤더니 리토가 경악한 얼굴로 「너 설마...」라고 중얼거렸다.

5살 터울인데 거기까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리토의 취향의 범위가 생각보다 좁네.

아무래도 지금 말을 꺼내는건 시기상조 같았기에, 굳어버린 리토에게 방금건 농담이었다고 사과하곤 자리를 떴다.
사치와 마미에겐 중학생이 된 뒤에 다시 도전하길 바란다고 말해주려고 다짐하곤 두번째 약속을 떠올리며 폰을 들었다.



p.s. 두번째 약속은 무시하기로 했다. 파렴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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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뵙습니다m(_ _)m
3월 이후로 근 2개월만에 올리는 글이로군요;

그간 코멘트로 격려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 연중 공지 서두 같은건 아니고-_-;
그냥 최근 기쁜 격려 코멘트를 많이 들어서 정말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문제라면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많으나, 이제 새벽이라 내일 출근 준비를 해야한다는거죠-_-;

그러므로 잡담은 생략하고 업로드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들 즐거운 하루 맞으시길 바랍니닷~!


p.s. 참조 이미지

노기와 마미(왼쪽), 코구레 사치에(오른쪽): 미캉의 친구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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