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 소년의 꿈



거센 물결이 출렁이는 끝이 없는 바다.
해수면으로부터 수백미터 위 허공에 거대한 섬이 표표히 떠있다.
섬의 중앙에는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아오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돌기둥이 거대한 고목의 껍질처럼 울퉁불퉁한 갈색 표면을 드러내고 있다.
수백, 아니, 수천 미터의 직경을 자랑하는 우람한 돌기둥은, 마치 거목과도 같이 섬 중앙에 깊이 박혀 하늘과 섬을 하나로 잇고 있었다.
정말로 식물이라도 되는양, 거대한 돌기둥에서 뻗어나온 것으로 보이는 갈색 뿌리가 섬 바닥을 뚫고 삐져나와 그 기괴한 몰골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섬의 북서쪽 끝자락에 도달한 강물은, 섬의 바닥을 움켜쥔 뿌리를 적시려는 듯 그 물줄기를 바다를 향해 쉼없이 떨구고 있다.
섬의 남쪽 끝으로는 본섬과 돌다리로 연결된 작은 섬이 있고, 그 작은 섬 위에는 타원 모양의 벽이 꽃잎처럼 붙어있는 성이 보인다.

하늘과 이어진 기둥을 가진 기기묘묘한 공중섬.

이곳이 바로 원더랜드(몽환, 夢幻).
여러 동물 정령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차원(異次元) 세계다.
이 원더랜드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 바로 이야기 기둥(노벨 폴, Novel Pole)이며, 이 기둥은 수많은 이야기 나라(노벨 월드, Novel World)로 이루어져 있다.
원더랜드의 주인인 오오라 공주와 그녀를 섬기는 12간지 전사 「꾸러기 수비대(폭렬 에토 레인져)」의 수호 아래 원더랜드에는 오늘도 평화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평화로운 원더랜드 아래, 어두컴컴한 심해의 해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렬로 늘어선 횃불이 성(城)의 어둠을 걷어낸다.
갈비뼈마냥 휘어진 돌기둥 사이로 붉은 양탄자가 홀을 가로지르며 깔려 있다.
양탄자의 끝자락에 놓인 왕좌에 걸터 앉은 한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삐죽삐죽 거칠게 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
붉은 머리카락 위로 솟아오른 고양이 귀.
붉은 벨트가 장식된 보라색 망토 아래로 드러난 회색 피부와 도발적인 복장.
비키니 같은 검정색 스포츠 브라와 왼쪽 허벅지를 드러낸 검정 타이즈, 더해서 검정 장갑에 붉은 롱부츠의 선택은, 입은 이의 평범치 않은 패션센스를 짐작케 한다.
왼손목의 하늘색 팔찌에서 작게 흔들리는 금방울의 영롱한 소리가 도발적인 복장에 언밸런스한 매력을 더해 주는 가운데, 옥좌의 인물은 작게 신음성을 흘렸다.

"왜...어째서냐? 어째서 이야기 기둥의 파괴가 생각처럼 되지 않는거지? 어째서..."

파격적인 의상을 입은채 한쪽 다리를 꼬고 옥좌에 앉아있는 인물은 해라 총사령관(사령왕邪靈王 냔마).
이야기 나라를 파괴하여 이야기 기둥을 무너뜨리고, 원더랜드를 바다속으로 가라앉힐 음모를 꾸미는 어둠의 무리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다.
그녀는 상관인 마라(사령신邪靈神 바기)의 명에 따라, 그리고 오오라 공주를 향한 그녀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몇번이고 사령 몬스터를 이야기 나라로 침투시켰다.
하지만 이야기 나라를 부수긴 커녕, 여태까지 이야기 나라에 보냈던 사령 몬스터들의 소식이 하나 둘씩 끊어져버리자, 옥좌에 앉은 해라는 초조해진듯 금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던 해라는 생각을 정한듯 몸을 일으켜 홀을 벗어나 목적지로 향했다.



사령궁의 어느 동굴안.
바닥에 그려진 붉은 마법진에는 알수없는 문자가 12방향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마법진의 바깥에는 4개의 고양이 석상이 4방을 차지하고 마법진 중앙을 바라보는 형태로 놓여있다.

동굴안으로 들어선 해라는, 마법진을 둘러싸듯 놓인 4개의 고양이 석상을 한차례 훑어보곤 마법진의 중앙으로 걸어 들어가 두 손을 모았다.
중앙에 선 해라의 손에서 빛이 모이고, 짧은 기합과 함께 해라의 손을 떠난 빛의 구슬이 넷으로 나뉜다.
흑(黑), 백(白), 적(赤), 청(靑)의 빛의 구슬이 사방을 차지한 고양이 석상에 각기 스며든다.
고양이 석상이 점차 갈라지며 그 속에서 눈부신 빛이 새어나온다.
빛이 사라지자 고양이 석상이 있던 4방에서 4명의 고양이 수인들이 해라를 경배하듯 한쪽 무릎을 꿇은채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마크가 그려진 보라색 도복을 입고, 이마에 번개무늬가 있는, 백호와 같은 거구의 남성, '백(白)색의 고우센'이 녹색 눈동자를 번뜩이며 입을 연다.

"해라 총사령관님."

검정과 보라색이 섞인 옷을 입고 검은털을 가진 주황색 장발의 여인, '흑(黑)색의 겐엔'이 금안을 뜨며 말을 잇는다.

"생명을 내려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보라색 레깅스에 슬릿이 크게 벌어진 붉은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내린 금안의 어린 소녀, '적(赤)색의 쥬켄'이 장난기가 도는 얼굴로 말을 받는다.

"뭐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양어깨와 무릎에 스파이크가 박힌 갑옷을 입은, 턱수염과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푸른 털의 사내, '청(靑)색의 로우란'이 무겁게 입을 연다.

"......저희 사천왕, 해라 총사령관님이 명하시는 대로..."

과묵한 탓인지 로우란은 뒷말을 아끼며 입을 다물었다.
넷의 모습이 만족스러운듯 자신이 창조한 사천왕들을 내려다보며 명했다.

"이야기 기둥의 파괴가 생각처럼 되질 않는구나.
그러니 너희들의 힘으로 강력한 사령 몬스터들을 창조하여 이야기 나라로 내려보내는거다!"

"「「「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사령사천왕(邪靈四天王)은 빛으로 화해 동굴을 벗어났다.
자신의 분신인 사천왕들이 떠나간 동굴에서 해라는 오오라 공주를 떠올렸다.

"후후후, 각오해두는게 좋을껄, 오오라 공주여. 아하하하하하하!"

파괴되는 이야기 나라로 인해 스스로의 무력감을 탓할 오오라 공주를 상상하며 해라는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side 청(靑)의 로우란]

...단잠에서 깨어났더니 동굴 안이었어.

뭐야 이거? 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해? 어째서 동굴이야?
방금전엔 내심 당황하면서도 다른 세명에 맞춰서 어떻게든 말을 뱉어내고, 본능적으로 푸른 빛으로 화해 동굴을 벗어났지만, 황망한 심정은 아직 추스리리지 못한 상태다.

일단 이곳이 어딘지 확인해보자.
방금전 무릎을 꿇은 우리 넷을 만족스러운듯 내려다 보았던 고양이 귀의 여성을 떠올린다.
검정 비키니 수영복에 보라색 망토 하나 걸친 빨간머리에 고양이 귀를 한 나이스 바디 미녀라...분명 해라 총사령관이라고 했었지.
거기다 이야기 기둥에, 사령 몬스터라니...

...「꾸러기 수비대(십이전지 폭렬 에토레인저)」잖아?

원래 명칭인 에토레인저에는 에뜨랑제(etranger, 이방인)라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다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건 아니고.
하여튼 여긴 나쁜놈들의 아지트고, 방금전 함께있던 흰둥이, 검둥이, 빨강이랑 나를 합쳐서 사천왕이라 불리는 나쁜 놈들이라는건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한다.
오른쪽 가슴에 초록색 고양이 눈 문양이 박혀있고, 견갑과 무릎 보호대에 스파이크가 달린 푸른색의 갑옷.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힌 남색에 가까운 털. 푸른색의 고양이 눈동자.
양옆으로 크게 3개로 갈라진 머리카락과 턱에난 수염과 양뺨에 세가닥씩 난 고양이 수염.
그리고 뒤통수에 고양이 꼬리마냥 달린 꽁지머리.

「청(靑)의 로우란」이네.

검은 빛을 내는 광선검, 통칭 다크 사벨을 다루는 검객으로 해라 휘하 사천왕 중 한명이다.
최종장에서 원더랜드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해라를 쫓던 꾸러기 수비대 12명의 발을 묶는 역할을 맡고, 최후를 맞이한 인물.
꾸러기 수비대들을 살려둬서 원더랜드의 멸망을 보고 절망하도록 만들라는 해라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꾸러기 수비대 12명 모두가 로우란 한명에게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를 정도의 강자였지.
그래봤자 원더랜드의 수호신인 코로나(대령신 고르)의 가호를 받은 12지 전사의 합체 공격기 한방에 빈사상태에 몰리는 처지가 되지만...핫핫핫.
아무튼 짧막하게 최후를 언급했지만, 실제론 혼자서 12지 전사 전원을 압도하던 흉악한 스펙의 소유자다.

내 모습의 확인이 끝낸 뒤, 꾸러기 수비대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여러 동물 정령들이 사는 원더랜드는 하늘과 이어진 이야기 기둥에 의해 지탱되며, 이야기 기둥은 수많은 이야기 나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악의 우두머리 사령신 마라의 목적은 이야기 나라를 파괴함으로써 이야기 기둥을 붕괴시켜 원더랜드를 바다 속에 잠기게 하는것.
마라에게 속아넘어가 타락한 뒤, 오오라 공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해라는, 마라의 명령에 따라 사령 몬스터들을 이야기 나라에 보내어 이야기 나라를 파멸시키려 한다.
이야기를 왜곡해 원래와 다른 결말에 도달하게 만듦으로써 이야기 나라를 파멸시키는 것이 사령 몬스터들의 목적.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야기 나라를 지키는 것이 원더랜드의 지배자 오오라 공주 휘하의 12간지 꾸러기 수비대.

똘기(쥐) 떵이(황소) 호치(호랑이) 새초미(토끼) 자축인묘(子丑寅卯)

진사오미(辰巳午未)

신유술해(申酉戌亥)
드라고(용) 요롱이(뱀) 마초(말) 미미(양)
몽치(원숭이) 키키(닭) 강다리(개) 찡찡이(멧돼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시절 나의 작은 친구들...

...그렇다지만 하필이면 내가 악역이 되어버린건 또 뭐람.
어린시절 즐겨보던 작품속의 인물들과 함께 노니는 꿈을 꾼적은 있었지만 악역 같은거 한번도 한적 없었다고.
그들을 만나게 된걸 기뻐해야 할지, 악역으로 그들 앞에 서야 하는 처지가 된걸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지금 내 모습에 투덜대기도 애매하고.

다채로운 푸른색으로 꾸며진 내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청(靑)의 로우란이라...이야기의 최후반부까지도 건재함을 과시하는 이 녀석의 몸으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으려나?
적어도 이 이름의 색이 상징하는대로, 원더랜드라는 무대 위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뒤쫒는 고양이 정도는 되도록 노력해보자고.




해라의 명령을 받고 흩어진 사천왕을 찾아 헤매다가 목표로 하던 인물을 발견했다.
하나로 묶어 뒤로 내린, 엉덩이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붉은 머리털.
붉은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가슴 중앙에 커다란 고양이 눈 문양이 박힌 차이나 드레스와 그 아래에 연보라색 레깅스를 입은 작은 몸집의 소녀.
'적(赤)색의 쥬켄'이다.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 모양새에서 들뜬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깨가 들썩이는걸 보니 당장이라도 출동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가보다.
꾸러기 수비대의 이야기 속에서도, 어린아이 마냥 즐겁게 놀 생각으로 가득차있던 쥬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차례 고개를 내젓고 쥬켄을 불렀다.

"쥬켄, 잠시 이야기를."

걸음을 빨리하며 쥬켄의 뒤에 따라붙어 이름을 부르자 달뜬 걸음을 옮기던 쥬켄의 몸이 굳어졌다.
들떠있던 모습을 보인게 부끄러웠을까, 방금전의 모습을 어떻게든 무마하려는듯 뻣뻣하게 몸을 돌린 쥬켄은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털 자체가 붉어서 뺨이 붉어진 티 같은건 확인하기 어려워서 부끄러워 하는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표정을 추스르며 쥬켄은 그 금빛 눈동자를 내게 향했다.

"로우란? 무슨 일이야?"

"해라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전에 너와 콤비를 짜고 싶어서 널 찾고 있었다."

"뭐? 콤비를 할 필요가 어디있어?"

"지금은 모르지만 차후에 양동작전처럼 둘 이상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더욱이 내 힘만으론 벅찬 일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너와 함께 행동하고 싶다."

"흐응~ 너 겉모습관 달리 겁이 많구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겁먹다니 사천왕으로서 부끄러운줄 알아."

"...신중하다고 이해해줬으면 좋겠군.
이야기 나라의 파괴를 방해하는 존재들에 대한 정보가 어느 것 하나 없는 지금 상황으로선 조심해서 나쁠건 없겠지."

"흥이다. 난 별로 콤비 같은거 필요 없어~
난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강하니까 말야~"

...키키의 주먹 한방에 무너지는 유리 몸뚱이면서 허세만 붙어서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코웃음을 치는 쥬켄의 태도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말괄량이가 한번에 납득할거라곤 생각도 안했으니까 크게 실망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람의 말을 귓등으로 흘러넘긴다면 곤란하다.
설득하기 이전에 아무래도 좀 추켜세워서 구슬릴 필요가 있나보다.

"그래. 넌 강하지. 사천왕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다름아닌 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에? 정말?"

내 호평가에 쥬켄의 귀가 솔깃한다.

"물론이지. 너의 뛰어남은 지금 네 모습에서 이미 드러나 있으니까.
만약 해라 총사령관님이 어려지신다면 바로 너와 같은 모습일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들 사령사천왕은 모두 해라님께 생명을 받은 자들.
그렇기에 해라님께 가장 가까운 너야 말로 가장 뛰어난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에게 콤비를 부탁하고 싶었던거다."

"후, 후후...그런거야?"

총사령관인 해라와 닮았다는 말과 우수다고 평가에 쥬켄은 기분이 들떠선 풀어진 얼굴로 해실거리고 있다.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물어오는 쥬켄을 좀더 띄워준다.

"당연하지. 너의 붉은 털은 해라님의 머리카락 색 그 자체이고 너의 눈동자는 해라님처럼 예쁜 금빛 눈동자이지 않나.
너야말로 해라님의 분신. 진정으로 해라님의 힘과 뜻을 이어받은 존재.
너 이외에 사천왕 제일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그런 너를 존중하기에 한번 더 부탁하지.
쥬켄. 부디 해라님을 위하여 너의 그 힘을 빌려주지 않겠나?"

내 아부에 쥬켄은 제법 마음이 동했는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헤헷... 너 제법 보는 눈이 있구나?
으응~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콤비가 되어줄께. 감사하라구~?"

"...아아. 고마워서 몸둘바를 모르겠군."

귀엽게 웃으면서 손을 내미는 쥬켄을 보고 마주 웃으며 손을 내민다.
장난기 많지만 마음 여린 이 녀석이라면 나중에 꾸러기 수비대를 도와줄 때 힘이 되어 주겠지.
아무튼 이걸로 「적청(赤靑)콤비」탄생이다. 어감도 좋네. 그럼 백색의 고우센, 흑색의 겐엔은 흑백(黑白)콤비로 부르면 되려나?
의기투합한 쥬켄과 기분좋은 악수를 주고 받았다.

말랑~

"......"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감촉에 무심코 쥬켄을 잡은 손에 살짝 힘을 더한다.

말랑말랑~

...와, 이거 중독되겠네.
고양이 손바닥이라서 말랑말랑한건가, 여자애 손이라서 말랑한건가.
감탄을 흘리며 손을 잡고 있으려니 눈앞에서 붉은색 오오라가 발생한다.
부들부들 떨고있는 쥬켄의 몸에서 발생하고 있는 오오라다.
과연, 적(赤)의 쥬켄이라더니 오오라도 붉은색이구나. 그런데 어째 위험한듯한...?

"언제까지 남의 손을 조물락거릴꺼야!"

"크헉-!?"

순간, 쥬켄이 상체를 숙이고 악수한 손을 끌어당기며 반대편 팔꿈치로 내 명치를 힘껏 가격했다.
이어서 앞으로 허리가 꺾인 내 목에 그대로 깔끔한 하이킥이 작렬했다.
적색콤비 결성 첫날은 파트너에게 KO당하는걸로 마무리를 지었다.




시작을 진지 컨셉으로 잡은건 실수였나보다.
한동안 쥬켄에게 무뚝뚝한 변태 녀석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눈흘김을 당하는걸 어떻게 해보려고 쥬켄에게 사과하고 다니다가, 다른 사천왕 녀석 둘(백색의 고우센과 흑색의 겐엔)에게 유치한 사랑싸움이냐?라는 비웃음을 들었다.
쬐그만 꼬맹이에게 당하는 한심한 놈이라는 평가와 함께.

야 이자식들아... 내가 진심내면 너희들 둘은 한칼에 정리할 수 있어.
꾸러기 수비대의 탑승 메카인 키린더(알바트로스)의 정화포를 강화하고 똘기의 고양이 공포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니들을 봐주고 있는거란 말야...

내가 적청콤비 운운하면서 쥬켄에게 말을 걸어대는 동안, 백색의 고우센과 흑색의 겐엔도 자기들끼리 흑백콤비를 결성해서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자기들 입으로 흑백콤비라고 부르진 않지만, 나로선 이쪽이 부르기 편해서 애용하는 호칭이다.
적청콤비랑 흑백콤비는 구성원부터가 명확히 비교되었다.
고양이라기 보단 덩치 큰 백호처럼 보이는 백색의 고우센과, 누님 스타일의 여인 흑색의 겐엔의 흑백콤비.
턱수염이 인상적인 나, 청색의 로우란과 장난기 넘치는 차이나 드레스의 소녀 적색의 쥬켄의 적청콤비.
뭐라고 할까, 키에서부터 엄청 밀리는구먼.
고우센은 그 덩치에 더해 거대화까지 쓸수 있어서, 변신으로 사령궁 천장에 닿을만큼 커진, 거대 야수 모드의 고우센을 봤을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무튼 벌써부터 사천왕 내부에서 편이 갈려버린건지, 흑백콤비는 가끔씩 우리와 마주치면 방금처럼 이쪽을 도발하곤 한다.
겐엔에게 쬐그만 꼬맹이 소리를 듣고 발끈한 쥬켄을 위로해 주려고 '땅에서부터 잰 키는 네가 작을지 몰라도, 하늘에서부터 잰 네 키는 여기있는 누구보다고 크다'라고 말해줬다가 분노한 쥬켄에게 배에 전력으로 드롭킥을 먹었다.
'여자'랑 '꼬맹이'랑 '고양이'가 합쳐진 쥬켄의 변덕스러움을 따라갈 수가 없어...
쥬켄에게 엉망진창이 되는 며칠동안 고우센과 겐엔의 비웃음을 받으며 나의 카리스마는 끝없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과묵한 검사 분위기를 풍기는 주제에 칠칠맞지 못하다는 평가는 해라 총사령관의 귀에도 들어갔나보다.
한심하게 쥬켄에게 쩔쩔매는 이유를 물어보는 해라에게 뭐라고 답해야 하나 변명거리를 생각하다가 「작은 해라 총사령관님을 보는 것 같아 함부로 대하질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해버렸다.
뭐, 상관을 닮아서 함부로 못한다는 부하한테 심하게 타박이야 할까.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내 말을 듣던 해라는 내 대답에 미묘한 얼굴이 되어선 잠시 생각하다가 날 내보냈다.
충성심이 높은건 좋지만 너희 사천왕은 동등한 입장이니까 적당히 하라는 말과 함께.



우리 사천왕들이 탄생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령 몬스터와 동행시킨 스파이 로봇을 통해서, 마침내 해라가 이야기 나라를 지키는 꾸러기 수비대의 존재를 눈치챘다.
오오라 공주의 수호자 격인 그들의 존재가 해라의 심기를 자극한 것일까, 해라는 오오라 공주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원더랜드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다만, 최근 나와 쥬켄의 모습이 영 미덥지 않았던 탓일까, 이야기 나라에 침입해 꾸러기 수비대의 주의를 끄는 임무는 흑색의 겐엔에게 맡겨졌다.
흑색의 겐엔이 이야기 나라에서 꾸러기 수비대의 발을 묶는 동안, 나와 쥬켄, 고우센은 동굴안에서 해라의 영혼을 뽑아내는 의식에 참여했다.
사천왕 셋의 힘을 모아 육체에서 빠져나온 해라의 영혼은 보라빛 구슬로 변한 뒤 사령궁을 벗어나 오오라 성으로 향했다.
남은 우리 셋에게 주어진 임무는 해라의 혼이 돌아올 동안 해라의 육체를 철저하게 지키는것.

뭐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사령궁에 누가 쳐들어 오는것도 아니고.
지금 이곳엔 나랑 쥬켄, 고우센 사천왕 세명 뿐이니까 해라의 육체를 보호한다는것도 그저 명목상의 임무일 뿐이다.
겐엔이 이번 양동작전을 맡은 탓인지 그녀의 파트너인 고우센은 제법 의기양양한 모양새다.

"그럼 난 잠시 겐엔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러오도록 하지."

...고우센 녀석, 사령실로 돌아가려는건가?
사령궁 내부에서 해라가 앉는 옥좌의 뒤에 달린 거대 모니터를 통해 이야기 나라에 파견된 사천왕과 교신을 할 수 있다.
아마도 거기서 겐엔을 모니터링 하려는 거겠지.
나도 딱히 고우센 녀석이랑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빨리 사라져줬으면 좋겠다.
호기심 넘치고 천진난만한 쥬켄이라면 몰라도, 잔학비도라는 평가에 어울리는 고우센과 겐엔과는 일부러 잘지내 볼 생각 따윈 들지 않으니까.
그런데 고우센이 사라지자 눈치를 보고 있던 쥬켄도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도 잠시 나갔다 올께. 한곳에 있으면 너무 심심하니까. 나 대신 해라님을 잘 지켜드려야 한다?"

"어? 야!?"

"웃후후~ 바이바이~!"

앗 하는 사이에 쥬켄은 잽싸게 동굴을 빠져나가 버렸다.
...농땡이 피우려고 도망쳤군 쥬켄.
다들 하나같이 진지함이 빠져가지곤...
결국 동굴 안에는 선채로 굳어있는 해라의 몸뚱이와 나뿐.
별수 없이 임무에 충실할 수 밖에 없구나.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아선 해라의 모습을 살핀다.

몸을 감싼 검정 비키니 복장에 붉은 롱부츠가 굉장히 도발적이다.
장난꾸러기 꼬마 고양이 정령 쿠키가 사령신 마라의 힘을 받아서 이런 육감적인 몸매의 해라로 바뀐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신연령까지 자란건 아닐텐데.
해라, 아니, 쿠키의 시간은 6년전, 오오라 공주로 둔갑한 마라에게 속아넘어간 그때 이후로 멈춰있다.
그렇지 않다면 해라의 진정한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쥬켄이 어린시절의 쿠키를 닮은 모습을 하지도, 쿠키의 마음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았을테니까.
행복했던 과거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오오라 공주에게 배신당했다는 믿음 때문에,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고 있는게 지금의 해라다.
마음 같아선 오오라 공주로 변해서 널 속인건 마라였고, 너는 마라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걸 해라에게 넌즈시 알려주고 싶지만...
해라의 정신은 때때로 마라와 연결되어 있는 듯한 묘사가 있어서 섣불리 행동하기가 힘들다.
아쉽지만 지금은 좀 더 기회를 엿볼 수 밖에.

혼이 빠져나가 눈을 감은채로 서있는 해라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저렇게 제자리에 선채로 굳어 있으면 잘못하면 넘어져서 다치거나 하지 않나?
한번 걱정이 들기 시작하니 지금 해라의 모습이 언제 넘어질지 위태위태한 불안정한 자세로 보인다.
바닥에 앉아서 구경만 하며 고민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맘편하게 해라를 바닥에 눕혀놓는 쪽이 안심이 될거라 생각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서있는 해라의 팔을 잡고 힘을 주자 해라의 몸이 스르르 기울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포즈가 된 해라를 조심스레 받쳐들었다.
천천히 해라를 바닥에 눕혔는데 생각만큼 자세가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릎을 반쯤 굽힌채로 쩍하고 가랑이를 벌린 모습이 남사스러웠다.
안그래도 비키니 같은 복장인데 거참 큰일이구먼.

다 큰 처자가 부끄러운 자세로 누워있는게 볼썽 사나워서, 펼쳐진 다리를 오므려 주려고 벌어진 무릎에 손을 얹었을때, 등 뒤에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뭐하는거야?"

"응?" 



 


고개를 돌리자 방금전 나갔던 쥬켄이 새빨간 털을 바르르 떨며 서있었다.

"쥬켄? 돌아온건가?"

"혹시나 너도 놀러 나가지 않을까 걱정되서 확인하러 돌아와 본거야.
그런데 해라님께 무슨 짓을 하는거지?"

"무슨 짓이라니?"

"해라님을 눕혀선 양다리를 벌리곤 무슨 불경스러운 짓을 하려는거냐고 물었어!"

바닥에 눕혀진채 벌어진 해라의 양다리를 잡고있는 내 모습을 보고 쥬켄이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하는것 같아 손을 내저었다.

"시덥잖은 오해는 하지말, 큭!?"

양손에 초승달 같이 휜 칼날을 꺼내 냅다 휘두르는 쥬켄의 모습에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캬악하고 이빨을 드러낸 쥬켄이 칼날을 내쪽으로 세웠다.

"오해는 무슨! 네가 내 손바닥 잡고 주물럭댈때부터 알아봤어! 이 음흉한 놈아!
그래도 파트너니까 믿어줄랬더니 이젠 해라님께마저...! 용서못해!"

"그러니까 오해라고옷!?"

점잖은 말투도 집어던지곤, 작은 몸집에서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쥬켄의 맹스피드 돌격을 정신없이 피했다.
돌진과 함께 쥬켄이 쏘아내는 칼날들이 동굴벽을 장식하듯 촘촘히 박혀간다.
듣는 귀를 갖지 않은 쥬켄을 상대로 이리저리 물러서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쥬켄의 칼날을 피해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누운 해라의 어깨를 잡고 들어올려 앞으로 내밀며 외쳤다.

"해라님 실드!"

멈칫.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쥬켄은 내 방패가 된 해라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감히 해라님을 방패로 쓰다니 뼛속까지 썩어빠졌구나 로우란."

"어...썩어빠졌단 표현은 우리한텐 칭찬 아닌가?"

"......"

"......"

말없이 붉은 오오라를 노골적으로 뿜어대는 쥬켄에게 황급히 변명했다.

"이봐 쥬켄. 진정하라구. 설마 내게 생명을 주신 해라님께 내가 무례할리가 있을까?
난 그저 서있는 자세로는 넘어지시지 않을까 걱정되서 바닥에 눕혀드린것 뿐이야.
방금전 네가 본건 다리가 벌어진게 민망해서 모아드리려고 한 장면이라구."

"...정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리고 다리 좀 만진것 가지고 해라님이 화내진 않을,"

"지금 내 분노가 해라님의 기분이야!"

"뭐야 그 폭론!? 멋대로잖아 너!?"

"해라님을 가장 닮은게 나라고 말한게 누구였는데!
가랑이를 벌려서 쳐다보는걸 화내지 않으면 뭐를 화내야 된다는거야!"

"내가 벌렸냐!? 눕히다 보니 그냥 벌어진거라고!"

분노한 쥬켄과 대치하며 한창 말다툼 하던중, 해라의 혼이 동굴로 되돌아왔다.
뭔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지 보랏빛 혼이 육체 위에 떠서 흔들흔들 맴돌고 있었다.
역시 오오라성 침입은 실패한건가.

"해라님!?"

놀란 쥬켄의 비명을 들으며 관제실로 간 고우센과 이야기 나라에서 꾸러기 수비대를 상대하고 있을 흑의 겐엔을 불렀다.
상처입은 해라의 영혼을 육체에 되돌리기 위해선 사천왕 넷의 힘이 필요하다나 어쨌다나.

황급히 귀환한 겐엔과 고우센의 힘을 모아 무사히 해라의 혼은 육체에 깃들 수 있었다.
영혼의 데미지가 육체에도 전달된건지 피를 흘리며 원한 섞인 말을 내뱉는 해라의 모습은 조금 무서웠다.



이번 양동작전의 결과, 뜻밖에도 나와 쥬켄은 해라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해라의 명령대로 동굴에 남아 충실히 해라의 몸을 지키고 있었다는 이유로.
뭐, 사실은 이상한 오해 때문에 쥬켄과 싸우고 있었던거지만 좋은게 좋은거지.
쥬켄도 기껏 얻은 신임을 쓸데없는 폭로전으로 날려버릴 생각은 없는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는 쥬켄의 눈빛이 전보다 조금 험해지긴 했지만.
동굴 안에서 쥬켄을 피해 달아나는데 바빠 점잖은 말투도 죄다 던져버린것도 내 이미지 하락에 한 몫 한것 같다.

아무튼 적당히 신임도 얻었겠다, 얼마뒤 나는 해라와 대면하여 나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었다.

"정보 수집?"

"그렇습니다.
꾸러기 수비대의 정보, 오오라 공주에 대한 정보, 원더랜드의 정보를 모으는데 집중하고 싶습니다."

"흐음... 어차피 부서뜨릴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나?"

"송구합니다. 허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습니다.
또한 만약 적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반드시 매번 위태롭다 하였습니다.

꾸러기 수비대의 존재를 알지 못하던 과거에 저희들은 언제나 실패를 거듭해 왔습니다.
이야기 나라에 침입한 사령 몬스터들이 전부 퇴치된 원인이 꾸러기 수비대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좋은 성과였지만, 그들의 존재를 안 직후에 행해진 양동작전의 실패는 그들에 대한 정보의 부족이 원인이라고 저는 판단했습니다.

사령 몬스터는 분명 꾸러기 수비대 개개인보다 강합니다.
하지만 동료와 함께 싸우는 꾸러기 수비대 들은 때때로 저희의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이곤 합니다.
양동작전 이후 충분한 공을 들여 출격시킨 사령 몬스터들조차 꾸러기 수비대에게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꾸러기 수비대의 방해를 넘어서 의미있는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선,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행해야 할 것은 정보 수집입니다.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이야기 나라에 침투해 이야기 나라와 이야기 기둥, 원더랜드에 대해 조사하고 쫓아온 꾸러기 수비대들을 상대하며 그들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밝혀내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제게 눈앞의 작은 승리보다 먼 훗날의 영광을 바칠수 있게 해주십시오."

요약하면 '밖에 나가고 싶으니까 내보내 주세요. 그리고 져도 화내지 말아요~ 언젠간 좋은 소식 가져올테니까요.'다.
양동작전이 실패하고 나서 해라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는지 내 말을 곱씹곤 고개를 끄덕였다.

"...달변이로군. 좋다, 로우란. 네가 거기까지 말한다면 한번 믿어보도록하지.
이번에 이야기 나라에는 네가 가도록 해라. 이야기 나라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네게 맡기겠다.
꾸러기 수비내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는 쓸만한 정보를 모아오도록."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해라에게서 정보 수집 활동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선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 나라로 파견될 수 있었다.

이야기 나라에 침입한 뒤, 희미한 기억을 떠올려 꾸러기 수비대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보았다.

- 사천왕이 사령 몬스터를 이야기 나라로 보내서 이야기 나라의 이야기를 왜곡시킨다.
- 사령 몬스터의 이야기 나라 침입을 확인하면 꾸러기 수비대는 「키린더」를 타고서 시공을 넘나들며 이변이 발생한 동화세계로 들어온다.
- 꾸러기 수비대가 이야기 나라에 머물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 사령 몬스터는 「요지경(현마경, 現魔境)」의 빛에 쏘이면 본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 꾸러기 수비대는 요지경을 사용하여 키린더에서 대기중인 동료를 부를 수 있다.
- 꾸러기 수비대가 쓰러뜨린 사령 몬스터는 키린더의 정화포로 정화시킨다.
- 만약 사령 몬스터를 찾지 못해도, 원래 이야기대로 결말을 맞이한다면 이야기 나라는 유지된다.


이번에 내가 가게 된 이야기 나라는 「쥐의 시집보내기」다.
이 동화는 어여쁜 외동딸을 가진 쥐부부가 최고의 신랑감을 찾기 위한 여정을 다루고 있다.
고양이, 개, 사람, 해, 구름, 바람, 벽을 신랑후보로 찾았다가 마지막에는 쥐가 최고의 신랑감임을 알게되어 쥐신랑과 쥐신부가 결혼하면서 쥐의 시집보내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나의 맨 처음 할 일은 이 이야기를 비틀어 버리는 것.

동화 쥐의 시집보내기에서 변경된 것은, 쥐가 최고라는 결론 이후의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쥐가 최고라는 결론에 납득하지 못한 신랑후보들이 쥐와 무술로 승부를 본다는 전개.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 쥐인 똘기를 포함한 8명의 신랑후보가 승부하는 무술대회다. 쉽게 말해서 신부 쟁탈전이다.
8강전은 오늘 치루고, 준결승전과 결승전은 내일 열린다.

당연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끼어들어야 하기에 나도 신랑후보중 하나로 참여한다.
변신하지 않은 원래 모습으로.
사실 다른 녀석들 몸에 깃들어도 상관없지만 모처럼 밖에 나온거고 아직은 내 정체를 아는 녀석도 없으니까 진짜 몸으로 활동하고 싶은거다.
다만 꾸러기 수비대 출격 엔트리엔 거의 매번이라고 할만큼 1호인 대장 똘기가 들어있었으니까, 똘기의 고양이 공포증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대회장에 가기 전에 복면을 사서 얼굴을 가렸다.
NINJA컨셉으로 나가면 복면을 쓴걸 어느정도 무마할 수 있겠지.

평소의 갑옷대신 무도복과 복면 차림으로 무술대회장에 도착하고 잠시 후, 쥐신부의 아버지가 무도복 차림의 똘기의 손을 이끌고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의 시집보내기」라는 이야기 제목에서부터 내심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쥐신랑 역으로는 똘기가 나오게 된건가.
그런데 다른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의 모습은 안 보이는데 똘기 혼자서 이곳에 왔을리는 없고...역시 나머지는 관중석에 있는걸까?
슌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쥐신부의 신랑을 결정하는 무투대회의 취지와 간단한 선수 소개가 끝나고 곧바로 8강전이 시작되었다.


제 1 경기는 스컹크 선수가 악취나는 가스로 날다람쥐를 기절시켜 준결승에 올랐다.

이어지는 제 2 경기는 NINJA 컨셉의 나와 근육 너구리의 시합이었다.
근육질의 너구리는 힘깨나 쓸법해 보였지만 그래봤자 사령사천왕인 이 몸의 상대는 아니었다.
휘둘러지는 너구리의 주먹을 비껴내며 턱을 가격해 너구리를 쓰러뜨리는걸로 시합을 끝냈다.

제 3 경기는 족제비와 다람쥐의 경기였는데, 이마에 계인을 4개를 박은 다람쥐 녀석이 어깨치기로 족제비를 관중석 벽까지 날려버렸다. 살벌하구먼~

마지막 제 4 경기는 꾸러기 수비대의 대장인 생쥐 똘기와 소라게의 경기였다.
주황색의 화려한 무도복을 입은 똘기가 「선수 필승!」을 외치며 주먹을 날리다가 소라게의 껍질에 막혀 물러났다.
그리고 소라게의 반격이 시작되었는데...입에서 불을 내뿜는 소라게는 처음 본다만?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화염공격에 똘기는 정신없이 대회장을 뛰어다녔다.
똘기 녀석은 즐겨쓰던 광선검은 안 꺼내고 뭐하고 있는거람?
뭔가 정신이 사납던 4번째 경기의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나중에 가선 화염을 추진제 삼아 미사일마냥 날아다니던 소라게가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다 장외패당하는 것으로 8강전은 마무리 되었다.




8강전이 끝나고 대회장을 빠져나온 뒤, 갑갑한 복면은 벗어두고 마을을 돌면서 왕만두 몇개를 사서 거리를 걸었다.
해라에게 정보 수집 활동을 한다곤 했지만 딱히 꾸러기 수비대에 대한 정보를 해라에게 내뱉을 생각도 없고, 설령 정보를 제공하더라도 별로 해라가 유용하게 활용할 것 같지도 않다.
정보 수집도 못하고 무의미하게 일회용으로 소모되던 사령 몬스터들을 떠올려보면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다.
나중에 해라가 쿠키였을 때의 연인이었던 호치에 대한 소식 정도만 전해주기로 할까.
정보가 맘에 안찬다면 벌로 벼락같은걸 내릴지도 모르겠지만.
담담히 생각을 정리하곤 먹음직스런 냄새를 흩뿌리는 만두 봉지를 들고 적당히 쉴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럼 어디서 먹는다...「어째서~! 어째서~!」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의 투정소리에 이끌려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가보니, 길가에서 울먹이는 멧돼지의 정령 찡찡이와 그 옆에서 찡찡이를 달래는 토끼의 정령 새초미를 발견했다.
노란색 모자를 쓰고 가슴에 커다란 수정구가 달린 녹색옷을 입은 갈색의 아기 멧돼지 찡찡이.
빨간 재킷에 분홍색 미니 스커트. 분홍 양말에 붉은 구두. 새하얀 피부에 예쁜 붉은 눈동자. 자그마한 몸매에 발목까지오는 풍성한 은발의 머리카락과 그 위로 난 긴 토끼귀의 새초미.
똘기와 함께 이야기 나라로 출격한 꾸러기 수비대 멤버는 저 둘인가.

무슨 일인가 싶다가 배고프다고 보채는 찡찡이의 모습에 이해하곤, 꾸러기 수비대와 조우한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며 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음, 얘야?"

"우...?"

"괜찮다면 이거라도 먹으련?"

저녁거리로 산 왕만두를 하나 건네주자 찡찡이가 눈을 빛내며 만두를 집어들었다.

"우와~! 감사합니다찡!"

"...찡?"

○징어 소녀?
반색하며 왕만두를 집어먹는 찡찡이의 말투에 애매한 얼굴로 서있자 새초미가 안도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휴우...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천만에. 보아하니 너도 제대로 먹지 못해 보이는데 하나 어때?
아, 난 로우란이라고 해"

"로우란? 아, 혹시 무투대회에 나왔던 로우란이야?"

무투대회 구경했을텐데 왜 이렇게 놀란 반응일까 의아해 하다가 시합때와 달리 지금은 복면을 벗어둔 상태란걸 깨닫곤 해명했다.



"그럼 로우란은 무사수행 중인거야?"

"맞아. 강한 녀석이 있을까 싶어서 무사수행의 일환으로 이번 무투 대회에 참가하게 됐어.
시합에서 복면을 쓴건 NINJA라는 설정이니까. 이번 대회에 참가하려고 제법 먼 곳에서 왔거든."

깊고 깊은 바다 밑 사령궁에서 올라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만두를 나눠 먹으면서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된 건데, 현재 새초미와 찡찡이는 똘기와는 별도로 행동하는 중이었다.
새초미의 두서없는 불평에서 대략적으로 정보를 유추해보자면, 슌린의 집에서 슌린 가족, 똘기, 새초미, 찡찡이가 함께 식사를 하던중, 똘기와 쥐신부인 슌린의 애정행각을 보다못한 새초미가 찡찡이를 억지로 데리고 무작정 슌린의 집을 나온것 같다.
애정행각? 역시 같은 쥐라서 그런가, 똘기와 슌린은 서로에게 제법 호감을 갖고 있는걸까?
그러고보면 무투회장에서 슌린의 부친이 똘기를 사위라고 불렀던것 같고.
새초미의 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슌린네 가족들은 똘기에게 꽤나 호의적인가보다.

슌린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새초미의 기분은 영 안 좋아보였다.
잔뜩 볼을 부풀인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지만.

"똘기도 슌린씨 앞에선 뭐가 그리 좋다고 싱글벙글 거리는지..."

"결혼할 상대잖나. 좋은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무투회 승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잖아!
그런데 벌써부터 둘이 좋은 분위기구...
그리고 너도 결혼후보잖아. 화나지도 않는거야?"

"어, 나? 난 별로. 사실 결혼이란걸 이런 무투회 따위로 결정하는것도 우습잖아?
그런건 슌린 아가씨의 마음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해.
역시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끼리 맺어지는게 제일이니까."

내 대답에 화내다말고 입을 다물어버린 새초미를 보며 말을 잇는다.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한건 무사수행의 이유도 있지만, 혹시라도 슌린씨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는걸 막고 싶었기 때문이야.
만약 내가 우승하더라도 '나는 고양이니까 쥐와 결혼할 수는 없다'라고 변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대로 가면 또다시 고양이, 개, 인간, 해, 구름, 바람, 벽, 그리고 다시 쥐로 돌아가는 무의미한 악순환에 빠질거라고 경고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듣자하니 똘기라는 너희 동료가 슌린 아가씨와 사이가 좋은것 같아 보이고, 실력도 걸출해 보이니 무사히 결승까지 오겠지.
난 쥐아가씨가 행복해질 수 있단걸 알게됐으니 만족이라구."

내 말에 찡찡이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손을 활짝 벌렸다.

"헤헷~ 로우란은 좋은 사람이구나찡!
방금전에 만두도 줬었고!"

"아하하~ 고맙구나 찡찡아."

까불며 날 치켜세워주는 찡찡이의 태도에 웃으며 모자 위를 쓰다듬어 주었다.
꾸러기 수비대에게 칭찬받을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기쁜 오산이네.
그런데 미안 찡찡아... 이거 그냥 대회에 참가할 구실로 생각해뒀던 변명거리야.
그래도 어린아이다운 순진한 미소를 보이는 찡찡이의 모습이 귀여워서 마주 웃어주고 있자니, 갑자기 새초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새촘아?"

"그래...알았어. 그럼 나 혼자서라도 사령 몬스터를 찾을테니까 찡찡이 넌 똘기한테나 가라구!"

타타탁-!

"아 새촘아!? 어디가 찡!?"

도망치듯 달아나버린 새초미의 행동에 찡찡이가 허둥지둥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고 있다.
누가 토끼 아니랄까봐 발이 엄청 빠른듯 새초미의 모습은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황급히 일어나 찡찡이에게 당부했다.

"내가 새초미를 쫓아가 볼께. 찡찡이 넌 일단 똘기에게 돌아가."

"나, 나도 따라갈래 찡!"

"미안하지만 넌 아직 작은데다 어려서 네 걸음에 맞춰 뛰다간 새초미를 놓치게 될거야.
여긴 내게 맡기고, 대신 똘기에겐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

"우...알았어 찡."

마지못해 납득하며 돌아서는 찡찡이의 모습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라는 속담을 잠시 떠올리곤, 새초미가 달려간 곳으로 힘껏 뛰었다.
아무리 빨라봤자 다리 길이부터가 다르니까 도중에 방향이 틀어지지만 않는다면 머지않아 따라잡을 수 있을거다.


얼마 달리지 않아서 길 저만치서 터덜터덜 걷는 새초미의 뒷모습이 보였다.
기운이 빠진채 걷는 새초미의 한손에는 붉은 패가 쥐어져 있었다.
방금전까진 대화하는데 빠져서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저게 사령 몬스터의 정체를 드러낸다는 「요지경」인가?
혹시 정말로 혼자서 사령 몬스터를 찾아 돌아다닐 셈? 변변한 전투 능력도 없는데?
위기감이 부족한 행동에 기가 차기도 해서 조금 맥빠진 어조로 새초미를 불렀다.

"어이, 새촘아."

"...로우란? 왜 따라온거야?"

"왜냐니? 갑자기 뛰쳐나가 버리니까 놀라서 쫓아온거잖아."

"내버려둬. 난 내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는 것 뿐이니까."

"찡찡이가 걱정했어."

"......"

자신이 충동적으로 움직였다는 자각은 있었는지 새초미는 입을 다물었다.

"일단 찡찡인 슌린씨의 집으로 돌려보냈어.
좀 있으면 어두워질테고 찡찡인 아직 어린아이니까.
그리고 여자애 혼자 저녁에 돌아다니는건 위험하니까 너도 그만 돌아가도록 해."

"......"

사실 객관적인 위험도로 따지면 사령 사천왕과 단 둘이 마주하고 있는 지금이 가장 위기의 순간일테지만.
내 충고에 새초미는 답하지 않고 가만히 바닥을 보고 있었다.

"새촘아?"

"...넌 어떻게 생각해?"

"뭘?"

"똘기가 슌린과 결혼하는 것 말야.
그렇게되면 결국 이야기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채 예정대로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찡찡이도 그게 좋을거라 생각하고 있고.
그런데 나 혼자만 굳이 사령 몬스터를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어.
...역시 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고 있는걸까...?"

중얼거리던 고개를 숙인 새초미의 등을 보며 잠시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네가 무슨말을 하고 대체 지금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똘기와 슌린씨의 관계를 지지한건 둘의 사이가 정다워 보였기 때문이었어.
결혼이란건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 이루어지는게 제일 행복하니까.
일단 내 생각은 그래."

"......"

"하지만 네가 그걸 납득할 수 없다면 협력해줄께."

"에?"

놀란듯 새초미의 빨간 눈이 깜빡인다.

"모든게 원래대로 돌아간다느니, 사령 몬스터라느니...너희가 무슨 목적으로 이 대회에 참여한건진 묻지 않겠어.
내가 결혼을 목적으로 대회에 참여한게 아닌것처럼,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란게 있을테니까.
일단 너희들의 목적은 똘기와 슌린씨가 결혼하면 자연스레 이룰 수 있는거지? 하지만 넌 그걸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거고.
그리고 내가 제대로 이해한건진 모르겠지만, 그 사령 몬스터란걸 찾으면 구태여 그 둘이 결혼하지 않더라도 너희의 목적은 이뤄지는거지?"

"으, 으응...맞아."

"그럼 도와줄께. 사령 몬스터를 찾는 일.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어째서 도와주려는거야?"

"너 혼자선 위험하니까. 사령 몬스터를 찾는다며?
괴물(몬스터)이라 불리는 녀석을 여자애 혼자서 찾으러 가는 꼴을 두고 볼까보냐.
그리고 내 NINJA로서의 감은 무투 대회의 우승보단 몬스터 헌터를 노리는 쪽이 더 무사수행에 걸맞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고마워."

덧붙이듯 말한 농담에 새초미가 고개를 숙였다.
이야아~ 여자애한테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쑥스러운데 말이지.
더욱이 이야기를 비튼 원흉으로서, 원흉을 잡으러 온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다는 지금 상황은 제법 민망했기에 말을 돌리기로 했다.

"아무튼 이제 슬슬 어두워질 무렵이니까, 오늘은 탐색은 그만두고 새초미 너도 이만 슌린씨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
내일부터는 나도 수색을 도와줄테니까."

점잖게 충고한 내게 새초미는 난데없는 폭탄을 투하했다.

"...오늘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분홍 스커트 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쥐며 중얼거리는 새초미의 말에 몸이 굳었다.
침묵해버린 내 태도에 새초미가 이상한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우란?"

"어, 음...될 수 있으면 그런 말은 다른 녀석에겐 하지 않는게 좋아."

"어째서?"

어째서긴 어째서야! 두근거리니까지!
그야 방금전 말에 이상한 의미 따윈 없다는걸 알고 있지만...
귀여움이란 이런거다!라고 주장하는듯한 외모를 해가지고선 그런말을 해대다니, 하마터면 내 부동심이 흔들릴뻔 했다니까.

......미안, 거짓말이야. 실은 아까부터 계속 두근거리고 있었어.

팬시한 분홍과 빨강 컬러링의 옷이 귀여워!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가 예뻐!
흔들리는 토끼귀가 사랑스러워!
발목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워!
이상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몸짓이 꽉하고 껴안고만 싶어!

머릿속에서 사고가 하이텐션으로 전개된 나머지 조금 열이 오른 상태로, 새초미에게 어째서 돌아가지 않는지 묻자 새초미는 주저하며 답했다.

"그렇게 화내며 집을 뛰쳐나와 버렸는데 지금 돌아가기는 좀...
오늘은 마음을 정리하고 싶어."

"어디서 자려구?"

"......"

너도 참 대책없구나 정말.
말문이 막힌 새초미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머리 속에서 끊임없이 귀여워를 연발해대는 사고를 정리하곤 우물쭈물하는 새초미에게 제안했다.

"그럼 내 침낭을 빌려줄께."

"어?"

말과 함께 내가 꺼내든 침낭을 보곤 새초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대체 어디서 꺼낸거야?"

"인법. 난 NINJA니까."

"...뭐야 그게?"

새초미가 작게 웃는다.
동굴에서 쥬켄과 드잡이질 할때, 쉴새없이 등뒤에서 무수한 칼날을 꺼내들던 쥬켄의 칼날 투척을 받아내면서 몸으로 배운거다.
애초에 이야기 나라 전체를 바꾸는 능력도 있는데 침낭 하나 꺼내는것 쯤이야...

사양하려는 새초미에게 혼자 야숙하는것도 적적했으니까 괜찮다며 답하곤, 꺼내든 침낭을 들고선 새초미와 함께 야숙할 장소를 물색했다.




"다크 파이어(小)"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작고 검푸른 불꽃을 장작에 뿌리자 새초미가 놀란 눈을 했다.

"로우란? 방금 그 불은 뭐야?

"NINJA 인술 「다크 파이어」.
내 털과 같은 파란 불이야. 멋지지?
원래는 검을 사용해서 시전하는게 제대로 된 사용법이지만, 이런식으로 변형해서 NINJA 인법처럼 쓸 수도 있어."

"넌 뭐든 NINJA구나?
검푸른 불꽃은 처음봐."

"푸른색은 좋아. 멋진 사자성어도 있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운치있지?"

"그건 푸른색(靑)이 아니잖아.
맑은(淸) 바람(風)과 밝은(明) 달(月)이지."

"어, 그런가?"

어수룩한 내 반응에 새초미가 작게 키득였다.
싱거운 농담을 되받아치면서 새초미의 기분도 제법 나아진 듯 했다.


"그나저나 사령 몬스터라고 했던가? 새초미 네가 찾고 있다는 그 녀석의 특징은 어때?"

"몰라."

"어...몰라?"

"사령 몬스터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고, 거기다 본모습을 숨기고 있어. 때때로 사람들의 몸에 빙의해 있기도 해.
이 요지경을 비추어야 사령 몬스터는 원래 모습을 드러내게 돼."

"요지경이라는 물건에 의지해서 찾아야 한다면, 나랑 떨어져서 개별행동으로 찾는다는 선택은 도움이 되지 않겠네.
원래 혼자 돌아다니게 둘 생각은 없었지만."

"남은 시간은 하루... 그동안 사령 몬스터를 찾아야 하는데..."

하루? 그렇다면 꾸러기 수비대가 이야기 나라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이틀'이 한계라는 거로군.

"뭐어~ 지금 생각해봐야 소용없으니까, 일단은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고 자세한 계획은 내일 정하자구."

초조해하는 새초미를 달래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구름한점 없이 맑은 밤하늘은 그야말로 별의 바다라 할만큼 별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야경을 보는건 처음이로구나.

"예쁘네. 밤하늘이 이렇게 멋질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는데."

"로우란이 살던 곳의 밤하늘은 이곳이랑 많이 달랐어?"

"응. 내가 있던 곳에선 별을 볼 수 없었거든."

"...어떤 곳에 살고 있었던거야 로우란은?"

바다 밑이요.
다만 지금 이야기해 줄 일은 아니었기에 화제를 돌렸다.

"아직 달도 밝고 잠도 안오는데 이야기 하나 해줄까?"

"어떤 이야기?"

"너랑 달을 보니까 떠오른 이야기인데, 달의 공주님이었던 미소녀 전사 달의 토끼(츠키노 우사기, 月野 うさぎ)의 모험 이야기야."

들어는 보았나 달의 요정 세○러 문.
타칭 우주의 지배자.

달의 전사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악과 싸워나가는 달토끼의 모험에 같은 토끼인 새초미는 눈을 빛내며 이야기에 몰입했다.
강적과의 싸움에 위기에 빠진 순간, 푸른 별의 왕자님이 달토끼를 구해주러 멋들어지게 등장한 씬에선 몽롱한 얼굴로 얼굴을 붉혔다.

몇몇씬들은 나의 실연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때때로 웃음이 터졌지만.

"...그리고 달토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달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파앗~!

한바퀴 돌며 양손을 교차시키고 포즈를 잡은 내 모습에 새초미가 폭소를 터뜨렸다.

"....풉. 아하하~!
로우란이 그러니까 이상해!
근엄하게 생겨선 그런 포즈에 대사라니..."

세○러 문의 포즈에선 폭소하던 새초미였지만, 그래도 푸른별의 왕자가 하는 장미꽃 던지기 포즈는 제법 호평이었다.
어딘가의 천공○심권의 후계자씨가 높은 곳에서 내뱉는 명대사들도 마찬가지로 환대받았다.

그후, 이야기가 클라이막스로 향하며 보여주는 새초미의 반응은 정말로 볼만했다.
푸른 별의 왕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악당들에게 달토끼가 위험에 빠질때마다 도와주는 장면에서 눈을 반짝이다가, 왕자의 사망씬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악의 조직을 쓰러뜨린 달토끼는 되살아난 푸른 별의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에는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으면 이야기를 풀어가는 나도 흥이 나는지라 이야기가 끝나고 말을 덧붙였다.

"이 이야기에 얽힌 노래도 있다? 들어볼래?"

"응! 들려줘!"

귀를 흔들흔들 움직이면서 눈을 빛내며 재촉하는 새초미의 요청에 체면도 버리고 옛 추억의 노래를 기억의 구석에서 끄집어내 열창했다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살며시 너에게로 다가가
모든걸 고백할텐데...


세○러 문 이야기 다음에 꺼낸 명탐정 우사미쨩 시리즈엔 새초미는 얼굴을 붉혔다.
변태 곰 쿠마키치가 냥미의 물건을 가지고 하는 온갖 괴이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새초미가 잔뜩 화를 냈다.
실수. 토끼가 나오는 이야기랍시고 고른게 그만 성희롱이었다...
쿠마키치 네이놈!


파란색에 연관된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라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아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이건 피폐해진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지어진 노래라고 해."

"마음이 따스해지는 이야기네."

"그치? 차가운 색이라는 편견과 다르게 파란색에도 따뜻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가득하다구?
파란색은 봄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니까.
파랑색과 더불어 몇몇 색은 신수와 함께 계절과 방위를 상징하기도 해.
청룡은 봄과 동쪽을, 주작은 여름과 남쪽을, 백호는 가을과 서쪽을, 현무는 겨울과 북쪽을 나타낸다고 해."

그리고 그 사방신에서 유래를 둔게 바로 우리 사령사천왕이지.
내가 청룡, 쥬켄이 주작, 고우센이 백호, 겐엔이 현무의 이미지다.
악당 주제에 신수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실없는 생각에 빠져있을때 내 말을 들으며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새초미가 입을 열었다.

"...로우란은..."

"응?"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물론이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지역의 이야기를 듣는것도 내가 무사수행을 떠난 이유 중 하나인걸?
할 수 있다면 언젠가 서역에 산다는 세라자드라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천일야화(千一夜話)로 유명한 사람인데, 무려 천하루동안 쉬지않고 이야기를 펼치고도 이야기 보따리가 바닥나지 않았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렇게 오랜시간 이야기를 풀어내고서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엔 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까?"

들뜬 내 말에 새초미는 뭔가를 떠올리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대답했다.

"으음~ 만약 이야기책으로 기둥을 쌓는다면 아마도 하늘에 닿을만큼 많지 않을까?"

살풋 웃으며 농담처럼 꺼낸 새초미의 말에 놀란 얼굴로 새초미를 보았다.
기둥이랑 하늘? 어라? 이건 이야기 기둥에 대한 언급이지?
실제로 이야기 기둥은 수많은 이야기 나라들로 구성되어 하늘까지 닿아있으니까 비유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지.
지금까지는 사령궁에서만 지내느라, 원더랜드에 가서 실제로 이야기 기둥을 본적이 없는데 언제쯤 원더랜드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새삼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야기 기둥의 존재가 놀라운건 놀라운거였기에 솔직하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반색했다.

"우와! 하늘까지 닿는 이야기의 기둥이라니, 그거 정말 장관이겠는걸?"

"즐거워 보이네 로우란? 어쩐지 어린애같아."

"그야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흥분할거라구.
하늘까지 닿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기둥이라니, 상상만 해봐도 멋지잖아?
그리고 정말 하늘까지 닿을만큼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이야기는 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거 아냐?
앞으로 있을 무사수행 중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까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대된다구.
아아~ 과연 내가 평생동안 세상에 있는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듣는건...그렇게 즐거워?"

"응. 즐거워.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풍족하게 채워주는걸?
나는 말야, 세상에 퍼져있는 이야기들은 지상에 내려온 별이라고 믿고 있어.
어두운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을 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처럼,
별의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은 저마다 품은 빛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는 거라고 말야."

"......"

"그러니까 만약, 세월이 흐르고 언젠가 나의 여행도 이야기로 남게 된다면...
내가 지금까지 접해왔던 다른 모든 이야기들처럼, 나의 모험도 저 빛나는 별과도 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마지막에 가선 스스로의 희망사항에 괜스레 쑥스러워져선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낭만주의 NINJA 역할에 몰입해서 말을 해댄다지만, 악당 역할로 등장한 주제에 이런 가당찮은 꿈이라니 나도 참 꿈이 크구먼.
붉어진 낯을 모닥불의 열기 탓으로 돌리며 애꿏은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려니 새초미의 말이 들려왔다.

"...고마워 로우란."

"...에? 뭐가?"

느닷없는 감사 인사에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들자 새포미가 살풋 미소지었다.
모닥불이 튀어 오르며 타닥이는 소리가 이는 가운데, 새초미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말야,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의문으로 생각했던게 있었어.
어째서 내가 이곳으로 출동하는 멤버로 뽑힌걸까 하고 말야.
로우란이 보이에 난 강해 보여?"

난데없는 질문에 잠시 새초미의 몸을 훑어보았다.
귀엽게 깜빡이는 새빨간 눈동자와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 위로 나있는 토끼귀.
작게 부풀어오른 가슴과 새하얗고 가느다란 팔다리.
...싸움은 커녕 연약해서 도무지 손찌검을 할 엄두도 못내겠네.
기억을 뒤져봐도 새초미가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장면은 없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약해 보여.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새초미 네가 사령 몬스터라는 괴물과 싸울만큼 강해 보이진 않아.
...음, 혹시 내 말로 기분 상하진 않았어?"

"아냐, 로우란 네 말이 맞는걸. 난 사령 몬스터와 싸우기엔 약하니까.
내가 가진건 변신능력 뿐인데, 어째서 키린더가 날 출동 멤버에 넣은건지 이해할 수 없었어.
비록 키린더는 똘기와 나와 찡찡이가 이곳에 오는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해줬지만...
싸울 능력도 없는 내가, 보기 싫은 장면을 보면서 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하지만...」이라며 잠시 말을 멈춘 새초미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로우란 네 말을 듣고 떠올랐어. 어째서 내가 꾸러기 수비대가 되려고 했었는지를 말야."

"내 말?"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아..."

"나는...로우란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야기 나라를 지키고 싶었어.
수많은 이야기 나라들이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랐던거야.
그런데도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 능력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고 있었다니, 나도 잠시 어떻게 됐었나봐.
너무 당연해서 잊고 있었지만, 내가 싸우는 이유는 나의 나약함을 변명삼아 물러설 순 없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는데..."

"새촘아..."

"그러니까, 고마워 로우란.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분명 내가 여기 온건 로우란의 그 말을 듣기 위해서였을거야."

"......"

"나는...로우란과 만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없이 모닥불로 시선을 향하는 내 모습이 무엇이 그리 재미있어 보이는지, 새초미는 작게 킥킥 웃음을 흘리곤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흐르고 졸음이 몰려오는지 꾸벅이는 새초미를 침낭에 재웠다.

"...그럼 잘자 로우란."

"잘 자 새촘아."

등을 보이며 침낭에 누운 새초미를 보곤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새초미가 있는 상황에서 맘편히 잠들긴 어려웠기에 그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체력이야 충분하니까 하루 밤새는것 정도야.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쥐의 시집 보내기 이야기는 내일이면 결말이 난다.
무투 대회에서 똘기가 우승하고 슌린과 결혼하면 이야기 나라는 무사히 구해진다.
똘기가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내일까지 나를 쓰러뜨려도 이야기 나라를 구해진다.
새초미가 선택한 길은 후자지만 과연 언제쯤 알아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시간 여유는 있고 새초미 혼자 돌아다니는건 걱정도 되니 옆에서 지켜봐주긴 하겠지만, 늦으면 똘기가 우승하는 결말로 끝날지도 모르겠다.

일렁이는 모닥불을 응시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바닥이 불편해서 그런지 아니면 잠꼬대탓인지, 새초미가 몸을 뒤척이며 이불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몸을 일으켜 새초미가 누워있는 침낭으로 다가갔다.
모닥불을 등에 지고서 솟아오른 내 그림자가 새초미의 몸을 가렸다.
흐트러진 이불 안으로 붉은 패가 보인다.
저게 사령 몬스터의 정체를 드러내고 동료를 소환하는데 사용된다는 「요지경」인가.
멈춰 선채 관찰하듯 물끄러미 요지경을 내려다 보길 한참... 천천히 몸을 숙여 손을 앞으로 가져갔다.
눈을 감은 새초미의 조용한 숨결이 손등에 퍼진다.

"...밤바람은 쌀쌀하니까."

흘러내린 이불을 잡고 위로 끌어올려주곤 몸을 일으켰다.

자리로 돌아와 나무기둥에 등을 기댄채 모닥불에 나무를 집어넣고 하늘을 본다.
별자리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지구와는 배경 자체가 다르니까.
그래도...이렇게 많은 별무리를 보는건 처음이구나.

침낭에 싸인채 잠들어있는 새초미의 등을 바라본다.
침낭 밖으로 나와있는, 발목까지 닿는 은발과 하얀 토끼귀.
꾸러기 수비대를 접한 어린시절엔 정말 예쁘다! 하고 감탄했었지.
그러고보면 프랑스의 어느 목동이 자신의 곁에서 잠에 빠진 아름다운 소녀를 보며 뭐라고 했더라? 

 

 

"......밤하늘의 수많은 별무리 가운데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의 곁에 내려와 잠들어 있습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던 문장이 이거였나 몰라.
중학교 시절에 읽은 글이라 영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느낌이 비슷하면 됐지 뭐.
기억도 희미한 서술을 읊다니, 처음보는 별하늘의 아름다움에 괜스레 감상적이 되었나보다.

바람이 분다.
흩날리는 이파리와 함께 새초미의 귀도 나부끼듯 작게 흔들린다.

...감상적이 되지 말라는것도 무리지.
지금 내가 이 곳에 있는 것 자체로도 몽환적인 느낌이 드니까. 아니, 정말이지 말그대로 몽환(夢幻-원더랜드)이로구나. 하하...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금 옛 기억을 떠올린다.
비록 추억을 곱씹는것이 다가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될지라도.
지금은 그저, 처음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노력할 뿐...




날이 밝았다.
눈을 뜬 새초미와 근처 샘에서 세수하고서 계획을 세웠다.
내가 먼저 그럴싸한 의문을 던졌다.

"내가 듣기론 무투회 이전, 원래 슌린씨의 신랑후보는 여덟이었어.
쥐, 고양이, 개, 사람, 해, 구름, 바람, 벽.
그리고 지금 무투 대회에 나온 신랑후보도 여덟이지.
쥐, 고양이, 다람쥐, 날다람쥐, 족제비, 너구리, 스컹크, 소라게.
우연치고는 어쩐지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아?"

"로우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우선은 무투회 참가자들부터 확인해봐야 겠네."

의욕을 불태우며 중얼거리린 새초미가 요지경을 꽉 쥐고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로우란. 일단 8강전에서 떨어진 날다람쥐, 족제비, 너구리, 소라게를 찾아보자.
준결승 진출자인 다람쥐랑 스컹크는 나중에 찾기로 하고.
어차피 둘은 준결승전 시간이 되면 알아서 시합장에 가있을테니까, 로우란의 시합이 끝나고 같이 확인해보면 되니까."

"응. 그런데..."

"왜? 로우란?"

"음...내가 이런 말 하기도 이상하지만... 그 「요지경」이라는거, 나한텐 써보지 않아?"

"로우란은 믿고 있는걸?"

"어?"

담백한 새초미의 대답에 벙쪘다.
아니, 너 지금 말은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 격이란거 알고 있어?
안 그래도 어젯밤 네 발언 때문에 여러모로 심란한데 말이다.
어안이 벙벙한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새초미는 킥킥거리곤 살짝 도드라진 가슴을 폈다.

"로우란도 날 믿어줬으니까.
갑자기 사령 몬스터를 찾는다는 뜬금없는 내 말을 아무 의심없이 믿어줬잖아.
그러니까 난 그런 로우란을 믿고 싶어."

...결혼하고 싶다.
뭐니? 이 천사는?

"......고마워."

아니...그래도 그렇게까지 순수하게 믿어주니까 양심이 무지하게 아픈데요.
이거 혹시 나중에 내 정체를 밝힐땐, 전투는 커녕 내가 죽어서 새초미에게 사죄해야 하는거 아닙니까?
양심이 쿡쿡 찔려 쓰라린 속내를 감추고서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아무튼 경호는 맡겨줘. 보디가드 역할은 톡톡히 해줄께니까."

"후훗, 기대할께."

내 속내야 어떻든 훈훈한 분위기에 서로 웃음짓고 있는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소리가 난데없이 초를 쳤다.

꼬르륵...

"앗...이, 이건..."

새초미의 작은 몸에서 울리는 허기진 소리에 그만 새초미의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버렸다.
어제 슌린의 집을 나올 때부터 새초미는 제대로 먹지 못한것 같으니 그렇게 이상한건 아니지만.
부끄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배를 가린 새초미의 모습에, 방금전까지의 갑갑함은 잠시 던져두곤 웃으며 새초미에게 아침을 권했다.




마을로 돌아와 아침을 해결하곤 시합시간 전까지 새초미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용의선상의 동물들을 찾았다.
사실 8강전에서 패한 녀석들은 새초미도 그다지 크게 의심하고 있진 않았지만 혹시나 모르니까라는 의미에서 찾아보는 거였다.
졌다곤 하지만 이틀간 벌어지는 무투회를 구경도 안하고 갈 녀석들은 아니었는지, 마을을 배회하는 녀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즉시 새초미가 요지경을 내밀면서 요지경의 사용법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요지경의 붉은 덮개가 양옆으로 열리며 드러난 둥근 거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령조람(邪靈照覽)!」"

"우와아아아아아!?"

"또 변화 없음인가..."

"큭...뭐하는 짓이냐 너희들!"

"미안! 튀어!"



바쁘게 마을을 돌아다닌 결과 운 좋게도 준결승이 있기 전까지 4명의 탈락자를 전부 만날 수 있었다.
물론 탈락자들에게선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짓이냐며 화내는 날다람쥐, 족제비, 너구리, 소라게에게 사과하곤 새초미를 데리고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는게 내 일이었다.

탐색하고 도주하느라 진이 빠진 상황에서, 4명의 탈락자중에선 사령 몬스터가 없었다는 결과에 실망하고 있는 새초미를 달래던 중 고개를 든 새초미가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초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니 마을 중앙에 놓인 대형 스크린에서 무투회 경기장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 잠시 후, 쥐 시집보내기 무투대회 준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무투회!? 벌써 시작할 시간이 된건가!

"로우란! 좀 있으면 네 경기가 시작하잖아!?"

"아차!? 탐색하느라 바빠서 깜빡잊고 있었어!"

"네가 잊고 있으면 어쩌잔거야!?"

"윽...그, 그래도 괜찮아. 지금은 무사수행보단 사령 몬스터를 찾는 쪽이 더 중요하니까 저런 대회 정도는..."

"야, 이 바보야!"

"새, 새촘아?"

나야 어차피 똘기의 전력 분석 외엔 무투회에 볼일은 없었고, 아직 똘기는 필살기인 폭렬 질풍검도 익히지 않은 상태라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았는데, 난데 없는 새초미의 고함에 깜짝 놀랐다.
새초미의 기세에 밀려 주춤거리자 새초미가 화난 얼굴로 외쳤다.

"이 대회에 참가하려고 멀리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포기하겠다는거야?
날 돕겠다고 할 정도의 자신감이라면, 자기 앞가림 정돈 확실히 하라구!
이런 시합 같은건 순식간에 이기고 돌아오란 말야!"

한껏 고함을 지르곤 씩씩대던 새초미는 아연히 서있는 내 모습을 올려보다가 뾰루퉁한 얼굴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게, 게다가 혹시라도 똘기가 준결승에서 지면, 그건 사령 몬스터의 계획대로 되는거잖아. 그런건 싫단 말야.
해가 지기까진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까, 사령 몬스터는 시합이 끝난 다음에 찾아도 돼.
그러니까...지금은 너의 목적을 우선시 하도록 해."

하...멋지잖냐, 너...
낮은 웃음을 터뜨리곤 주머니에서 복면을 꺼내 얼굴에 두른다.

"좋아, 그렇게 말한다면 보여줄께. NINJA의 실력을 말야.
네 말대로 이런 대회같은건 순식간에 끝낼테니까."

"응, 그 자세야.
그럼 먼저 가 로우란. 난 뒤따라 갈테니까."

"그건 아니될 말이지."

"응?"

"이제 남은 용의자들은 준결승전 참가자 뿐이잖아? 그럼 당연히 요지경을 가진 너도 가야지.
그리고 내 승리를 기원해주는 네가 구경하지 않으면 누가 내 모습을 구경한다는거야?"

말을 마치고 곧장 새초미의 몸을 안아 들었다.

"꺅!?"

"힘껏 달릴테니까 꽉 잡으라구?"

"자, 잠깐 로우란? 꺄악-!?"

바닥을 박찰때마다 주변풍경이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광경에 목덜미를 꽉 끌어안은 새초미의 비명을 들으며 대회장으로 향했다.



열심히 발을 놀린 덕분에, 심판의 부전승 선언이 울리기 전에 「잠깐 타임!」 을 외치며 아슬아슬하게 무투회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 목에 매달리듯이 품에 꽉 안겨있는 새초미가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경기장 위에서 날 기다리던 스컹크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겁먹고 달아난줄 알았더니, 어디서 누굴 안고 온거냐?"

"누구긴! 승리의 여신이다!"

"바, 바보야! 얼른 내려줘!"

새초미가 바둥거리면서 양손으로 내 목을 두드렸다.
품안에서 새초미를 내려놓자 붉어진 얼굴의 새초미가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새초미에게 무릎을 꿇고 얼굴을 마주했다.

"일단, 네게 감사할께.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 시합에 참가하지 못했을거야."

"...내게 이런 창피까지 줬으니까 이 시합 절대로 지지마."

"아하하, 그래. 이번 시합, 반드시 이길테니까.
그러니 승리를 바라는 의미에서 손등에 키스해도 될까?"

"엣...!?"

"승리의 영광을 너에게."

놀라는 새초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손등에 입을 맞추려다가 멈칫했다.

"로, 로우란?"

...복면을 하고 있어서 입을 맞추질 못해...

"...복면 NINJA 컨셉을 후회하게 된건 처음이다...
아, 지금이라도 복면 벗고,"

"됐으니까...! 얼른 올라가 제발!"

자신의 손을 잡고서 추태를 부리는 내게, 새빨개진 새초미가 황급히 내 등을 떠밀어 억지로 날 무투장에 올려놓았다.
무대위에 올라서자 방금전 내 행동을 지켜보던 스컹크가 코웃음을 쳤다.

"헹! 신랑후보로 올라온 놈이 벌써부터 바람기냐?"

"상관없어. 난 여기에 무사수행하러 참가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어찌됐든 새초미와 약속했으니까, 이번 시합은 반드시 이긴다.
갓파 심판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시합 개시!"



...기합을 넣고 참전한 것에 비해 허무한 승리였다.
스컹크의 독가스공격을 피하면서 다크 파이어를 도깨비불 마냥 연발로 날려보냈다.
다크 파이어(小)! 다크 파이어(小)! 다크 파이어(小)! 다크 파이어(小)! 다크 파이어(小)!
다섯 손가락에 힘을 모아서! ○지폭염탄(小)!
독가스 이외의 결정타가 부족한 스컹크는 결국 다크파이어(小) 연발에 무릎을 꿇었다.
스컹크가 시합장을 내려가고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새초미에게 브이(V) 사인을 보냈다.

"어때? 간단했지?"

"응. 멋졌어 로우란."

무도회장을 채운 독가스 냄새에 코를 막은 새초미가 내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내 시합이 끝난 직후 나와 새초미는 준결승에 참전했던 스컹크와 다람쥐에게 각각 요지경을 쬐곤 사과하면서 튀었다.
사령 몬스터일지도 모르는 용의자에게 일일이 양해를 구한뒤에 요지경을 쬘 순 없었으니까.
6명의 용의자에게서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 새초미의 안색은 어두웠다.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마.
만약 사령 몬스터를 찾지 못한다면, 네가 바라진 않겠지만,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똘기가 우승한다는 선택지는 아직도 유효하지.
정 안되면 기회를 봐서 결승전에서 내 정체를 드러내든가.
...그런데 고양이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한 똘기 앞에 내 모습(고양이)을 보이는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 위로에도 새초미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새초미는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다른 사람일지도 몰라."

"새촘아? 어딜 가는거야?"

"...로우란.
나...잠시 혼자서 찾고 싶어."

"위험하진 않겠어?"

"괜찮아. 이번엔 찡찡이도 함께 갈테니까."

아직 어린 그녀석이 도움이 되려나...
찡찡이가 울음을 터뜨릴때 빔병기마냥 발사되는 「울음포」는 분명 무지막지한 위력이긴 하지만.
하긴, 요지경에 반응할 사천왕은 정작 나니까 걱정할 이유가 없으려나...하하...
다만 떠나는 새초미의 귀가 기운이 없이 축 처져 있는게 신경쓰였다.



준결승전에서의 피로를 풀라는 배려로, 결승전 시합까진 제법 시간에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새초미와 찡찡이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더이상 밖을 돌아다닐 이유는 없었기에 그대로 선수 대기실에 앉아 쉬기로 했다.
선수 대기실에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길 한참, 결승전 시각이 가까워져 몸을 풀어둘 겸,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던 중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작은 발걸음으로 선수 대기실 안으로 들어온 온 누군가는 내 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서 내 이름을 불렀다.

"...로우란..."

"아, 새초미구나. 이제 온거야? 성과는 좀 있었어?"

몸을 일으키며 반기는 내게 새초미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새초미의 손에는 요지경이 들려있었다.

"로우란, 결승전은 아직인거야?"

"아, 그렇지 않아도 조금 있으면 결승전이 시작되니까 막 일어나서 준비하던 참이었어.
준결승때처럼 관중들을 기다리게 하면 안되니까 슬슬 나가봐야지."

"......"

요지경을 쥔채 늘어뜨려진 새초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채 서있는 새초미의 모습에 갸우뚱 하다가, 고개를 젓곤 대기실 문으로 향한다.

"아무튼 드디어 결승이구나.
금방 끝내고 함께 사령 몬스터를 찾으러 가줄테니까, 새초미 너두 계속 그렇게 서있지 말고 시합 보러 가자구."

고개를 숙인 새초미를 지나쳐 대기실 문으로 향한다.
대기실 입구를 지나 밖으로 한걸음 옮기려던 찰나, 들려온 목소리가 내딛어질 걸음을 막았다.

"멈춰, 로우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끼릭-하고, 무언가가 뒤틀리는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새촘아?"

"뒤돌아보지마."

방금전 준결승전때와 달리 딱딱하게 굳은 새초미의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우란...묻고 싶은게 있어."

"뭔데?"

"무투회 결승전에 나간다면, 정말 이길 생각이야?"

"응, 물론이야. 넌 똘기와 슌렌이 결혼하는건 바라지 않았으니까 사령 몬스터를 찾으려 한거잖아.
그리고 너에게 약속했으니까. 반드시 이기겠다고.
덤으로 아까전 널 부끄럽게 만든것에 대한 사과라고 생각해줘."

"......만약..."

새초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만약...내가 너에게 져달라고 부탁한다면...너는 져줄 수 있어?"

"뭐?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왜..."

"대답해!"

새초미의 외침에 입을 다문다.
초조한듯 재촉하는 새초미의 시선을 느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시합을 포기할 수 있다는거야?"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건 네 응원 덕분이니까.
그러니까, 만약 그것이 정말로 너의 바람이라면..."

"......"

대답이 없다.
하지만 곤혹스러워하는 새초미의 분위기는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기에, 천천히 뒤로 돌아서 새초미를 마주본다.

"...새촘아..."

"미안..."

나를 향해 내밀어진 요지경이 보인다.
가늘게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힘을 준 새초미의 양손 사이로 요지경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고 있다.
죄악감에 낯을 흐린 새초미가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린다.

"미안... 하지만, 없는걸...
어디에 찾아봐도 사령 몬스터 같은건 없었는걸...!
슌린씨도! 슌린의 아버지, 어머니도!
심판도! 어디에도 사령 몬스터는 없었는걸...!"

어딜 갔나 했더니 지금까지 다른 이들 찾아다니며 요지경을 사용해보고 온건가.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날 찾아왔단거로군.
그렇다면 지금 새초미가 느끼는 죄악감은 불합리할 따름이다.

"미안해...로우란을 믿겠다고 말했는데, 결국 나는..."

"네가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야."

"로우란..."

"넌 날 믿지 못한게 아냐.
날 믿고 싶으니까 이렇게 하는거잖아?
네가 다른 모든 사람을 찾아보고 나서야 날 찾아온게 그 증거라구."

고개를 들어 한숨을 내쉬곤, 아직도 죄악감에 혼란스러워하는 새초미를 보며 웃었다.

"네가 날 믿는다고 말 해줬을때, 정말 기뻤어.
만난지 하루도 되지 않은 나를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게 놀라웠고, 내 일을 나보다 더 생각해주고, 그런 날 응원해주는 네가 고마웠어."

"...로우란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가끔 부끄러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지만..."

"아하하...그랬던가?
아무튼 그렇게 봐줬다니 정말 기뻐.
좋은 사람이란 평가는 처음 들었으니까.
여태까진 무례하다느니 한심하다느니 썩어빠졌다느니 하는 구박만 받고 지냈거든."

실없이 웃으며 머리를 매만진다.
그리고 나를 향한채 천천히 풀어지는 새초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의 끝을 고하는 말을 던진다.

"이런 나를 좋게 봐주어서 고마워.
그리고...미안해. 너의 믿음에 보답해주지 못해서.
어쩌면, 좀 더 빨리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걸지도 모르겠네."

"로, 로우란...?"

"만약...할 수 있다면, 네가 나에게 보여준 믿음에 응해주고 싶었어."

새초미의 귀가 흔들리며 눈이 크게 벌어진다.
요지경을 쥔 새초미의 손에 다시금 힘이 들어간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패가 양쪽으로 벌어지며 거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조람(邪靈照覽)!」"

새초미의 외침과 함께 요지경에서 뿜어져나온 눈부신 빛이 내 몸을 감싼다.
눈을 찌르는 빛에 눈을 감자, 내 몸이 형체를 잃고 푸른 빛의 도깨비불로 화한다.
서서히 잦아드는 빛 속에서 무도복 대신 재구성된 갑옷의 무게가 느껴진다.
감은 눈을 뜨자 울음을 터뜨릴듯한 새초미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

 

 

"...달콤한 꿈의 끝을 알리는 빛이라는건, 서러우리만치 눈부시군.
과연...언제나 이런 식으로 사령 몬스터들을 찾아왔던건가..."

"...로우란..."

"다시 소개하지. 나는 청(靑)의 로우란.
해라 총사령관님의 휘하 사령사천왕 중 한명이다."

"그럴수가...믿었는데...
너만은 아닐거라고...믿고 싶었는데...!"

"......"

...나 이제 죽어도 좋습니까?
절망감이 가득한 새초미의 얼굴 때문에 아까부터 죄악감으로 양심이 사정없이 브레이크 하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여기서 냉큼 사과하고 화해하고 끝이란 결과 따윌 들고 돌아갔다간 뒷일이 무섭다.
적어도 뒷감당이 되는 정도에서 마치려면 싸우는 생색이라도 내야지 별수 있나.

...그런데...새초미 얘는 똘기랑 찡찡이는 대체 어디다 놔두고 혼자서 날 찾아온거야...?
설마 나만은 사령 몬스터가 아닐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거야?
아니, 미안해요 진짜로...
다시금 위가 쿡쿡 쑤신다.
새초미는 아직껏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째서...어째서 너야? 어째서 네가 이런 짓을 하는거야?"

"...때로는 말못할 진실도 있는 법이지."

내가 이러는거야 이야기 나라의 피해를 줄여볼까 싶어서 직접 나선거지.
하지만 모든걸 말해주기엔 아직 어느것 하나 최종전에 들어설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똘기는 필살기 폭렬 질풍검도 못배웠고,
키린더도 정화포를 강화하지 못한 상태고,
사령신 마라에게 저승행 티켓을 끊어줄 12간지 합체기는 배우지도 않았고,
호치는 연인의 소식도 모르는 상태고,
해라도 옛 추억에 흔들리는 소녀 상태가 아니고,
쥬켄도 꾸러기 수비대 편에 설만큼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고!

매정하게 말을 마친 날 노려보면서 눈물이 잔뜩 고인 얼굴로 새초미가 하늘높이 요지경을 치켜들고 외친다.

"「정령 소환!」 호치! 드라고---!"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끝나고 빛과 함께 두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터번을 두르고 붉은 망토를 걸친 초록색 동양용 드라고.
녹색 옷을 입은, 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호랑이 호치.
드라고와 호치의 등장에 무심코 허리춤의 광선검으로 손을 가져가려다 멈춘다.

아직은 아냐...

허리춤으로 가져가던 손을 도로 들어올린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날카로운 발톱이 길게 솟아오른다.
알고 있어? 고양이도 엄연한 맹수라고?
내 손톱 끝에 맺힌 푸른 불길에 호치와 드라고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각각 자세를 잡는다.

자, 그럼...일이 이렇게 되었고, 여기까지 와서 염치도 없이 발을 뺄 수도 없으니...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이야기의 피날레를 장식해 보자구.
마침 나쁜 놈에게 속아 울고 있는 소녀를 도우러 온 용감한 전사도 둘이나 있겠다...
그럼 악당스러운 최후를 맞이하러 가볼까!

푸른 불꽃이 맺힌 손톱을 날카롭게 세우며 포효와 함께 호치와 드라고의 사이로 뛰어 들었다.




타는 냄새와 함께 털썩-하는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대기실 벽은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것만 같은 발톱 자국과 새까맣게 그슬린 자국이 무수히 새겨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다.
내 눈앞에는 쓰러져 있는 호치와 드라고.
손끝의 불꽃을 희롱하듯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다.

"흥. 꾸러기 수비대라더니, 겨우 이정도였던가?
그렇다면 이걸로......?"

......음? 아니, 이거 내가 이기면 안되는거잖아!
분명 격렬한 싸움 끝에 패배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했었는데, 어디서부터 일이 틀어진거야?

대기실 안에서의 싸움은 시종일관 나의 우세였다.
육탄전을 시도하려다가 내 손 끝에서 쏟아지는 불길에 당황하며 피하기 바빴던 호치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드라고는 그나마 입에서 불길을 내뿜고 손끝에서 전격을 쏘아보냈지만, 쏘아낸 불길과 전격 모두 다크 파이어(小)에게 삼켜져 버렸다.
좁은 대기실이라는 공간에서 피할 곳이 한정되었던 둘은 결국 내 공격에 맞고 나란히 쓰러지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 둘이 패배한 원인이라면...역시 좁은 대기실 탓인가.
호치와 드라고의 주력 특기는 각각 '거대 호랑이'와 '거대 드래곤'으로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협소한 대기실의 공간에서 거대 호랑이와 드래곤으로 변신하는 것은 오히려 움직임에 제한을 주기 때문에, 결국 호치와 드라고는 나에게 불리한 싸움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계산 착오다. 적어도 대기실을 벗어나 넓은 공간으로 나왔더라면 호치와 드라고도 전력을 낼 수 있었는데.
나도 변신 모드를 의식한 나머지 변신전 상태의 호치와 드라고의 전력을 과대평가해서 공격해버렸다.

예측 실수로 인해 파탄난 계획에 속으로 패닉에 빠진채, 승자의 여유를 부리는 척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을 만지작거리며 서있었다.
아무래도 이 두 녀석이 회복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릴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겠는데...
'나와 싸운 너희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나의 야심찬 계획을 알려주마!' 같은 말 따위로 시간이나 끌어볼까 싶어서 천천히 쓰러진 둘을 향해 걸어가자,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둬!"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선 양팔을 벌린채 선 새초미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요.
죄책감 속에서도, 시간끌기 좋을 핑계가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자괴감 탓인지 입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비켜라. 여자랑 아이는 상대하지 않아."

"이제 그만둬! 왜 이렇게 싸워야 해?
로우란은...좋은 사람이잖아."

"네 멋대로의 착각일 뿐이야."

"그랬다면! 어째서 어젯밤엔 덤비지 않은거야?
어째서 그때 그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거야?
어째서 그런 이야기들을 해준거야?"

새초미의 외침에 입을 다문다.
멈춰선채 가만히 새초미를 바라보자, 새초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 내린다.

"...말...했었잖아...
여러 곳을 다니며, 수많은 이야기를 알고 싶다고...!
네 모험도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고...말했었잖아...!"

"......"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고 흐느끼는 새초미의 모습에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아,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너희와 함께 원더랜드에서 놀고 싶었어.
근심없이 웃으며 뛰어놀다가 기분좋게 깨어나던 어린시절의 꿈처럼 말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수 없어.

그게...사실 이 세상은 아직 마음을 놓고 지낼수 있을만큼 평화롭지 않잖아?

바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음산한 망령의 악의가 끝나지 않는 한,
언젠가 낙원을 지탱하는 하늘의 기둥은 뿌리를 잃고 낙원을 바닷속으로 떨굴테고,
그와 함께 세상에 가득찬 이야기들도 저마다의 빛을 잃고 심해속으로 가라앉아 버릴테니까.

그러니까...아직은 아니야.
나는 저 바다의 밑바닥에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나의 바람과 아쉬움을 담아 새초미를 향해 중얼거린다.

"...어느 깊은 가을 밤,"

"...로우란?"

새초미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 슬픈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즈막히 말했습니다."

의아한 듯 나를 올려다보는 새초미에게 담담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우란..."

천천히 한손을 들어 손바닥을 새초미의 얼굴에 가까이 가져간다.
눈동자가 흔들리던 새초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크허엉-!



새초미의 뒤에서 뛰쳐나온 호치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새초미를 안아들고 대기실을 벗어나 도망치는 호치를 쫓아 움직이려다가, 드라고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피해 일부러 크게 뛰며 틈을 보였다.
순간, 희뿌연 기운이 시야를 차단했다. 안개? 아니, 구름인가?
가려진 시야에 긴장한채 몸을 웅크리고 있자 잠시후 구름은 사라졌고, 셋 또한 대기실에서 자취를 감췄다.

과연, 둘다 뛸 정도까지는 회복했나보네.

새초미를 데리고 황급히 대기실 밖으로 달아난 호치와 드라고를 쫓아 무도회장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실내를 벗어나 내리쬐는 빛에 잠시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주변을 살펴본다.
무도회장 아래 잔디에는 새초미가 있고,무도회장 위에선 호치와 드라고가 제각기 선글라스와 여의주를 손에 들고 서있었다.

"「호치호치!」"

"「바람! 구름! 천둥이여!」"

주문과 함께 선글라스를 낀 거대 호랑이로 변한 호치와 거대한 드래곤이 된 드라고의 포효에 대기가 한차례 떨렸다.
드디어 변신 상태의 호치와 드라고와의 싸움인가.

경기장의 관객들은 난데없는 두 괴수와 나의 난동에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싸움을 말리려는듯 날 보며 새초미가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관중들의 비명속에 파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경기장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싸움이 시작되었다.
어깨 높이가 내 키와 비슷한 덩치의 거대 호랑이로 변신한 호치가 날린 앞발 휘두르기를 비껴내며 물러난다.
제법 묵직한 일격. 역시 호치의 덩치가 있으니까 공격력이 만만찮다.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하늘에서 드라고가 내뿜는 화염을 피해 황급히 옆으로 뛰었다.
거대 드래곤이 된 드라고가 내뿜는 화염은 변신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자 호치와 드라고가 태세를 가다듬는다.
중거리는 화염을 내뿜는 드라고의 영역이지만, 대기실에서 마음껏 당한 기억 탓인지, 드라고도 섣불리 화염공격을 하지 못한채 경계하고 있다.
변신한 뒤에도, 공방이 이뤄지는 동안 서로가 제대로 들어간 결정타를 넣지 못하는 상태로 여기까지 전투가 늘어져 버렸으니까.
이미 관객들은 모두 달아나고 경기장에는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그나저나 슬슬 이만큼 싸웠으면 꾸러기 수비대 공격담당들 상대로 나름대론 분전했다고 말해도 될텐데.
흑백콤비 녀석들에겐 쥬켄이랑 싸잡혀서 사천왕치곤 약해빠졌단 소릴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사천왕으로서 체면치레는 했다고 생각한다.

남은건 어떻게 하면 그럴싸하게 지는가 하는건데...
보통은 똘기가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게 정석인데, 아직 고양이 공포증을 극복하지 못한 똘기가 움직이기나 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슌린 가족을 대피시키느라 없는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똘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잠겨있던 중, 긴장된 공기를 헤치고 정면에서 돌진해오는 호치를 보곤 정신을 차렸다.
일단 호치의 일격을 피한뒤 생각하려고 몸을 낮췄을 때, 갑자기 나를 부르는 앳된 소리가 들렸다.

"로우란찡?"

"찡찡아?"

퍼어억-!!!

"커흑!?"

"로, 로우란찡!?"

예상치못한 찡찡이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호치가 휘두른 강렬한 앞발에 정통으로 맞고 훨훨 공중을 날았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찡찡아.
타의로 하늘을 날고 있는 나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는 찡찡이에게 속으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드디어 이 괴로운 벌칙 게임 같은 싸움도 끝나는구나.

한참을 날아서 경기장 밖의 관중석 벽에 등을 부딪히곤, 그 자리에 등을 기대고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집채만한 덩치의 대호의 일격에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훨씬 더 거대한 드라고 엉덩이에 깔리는것 보다야 낫지뭐.
아무튼 이정도로 꼴사나운 모습도 보여줬겠다...나는 방금전 공격을 최후의 일격으로 받고 쓰러진걸로 하자구.
정신적인 피로감 탓에 나도 이젠 돌아가서 쉬고 싶으니까.

이대로 푸른 빛의 구슬로 화해 사령궁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내 쪽으로 짧은 걸음을 재촉하며 뛰어오는 찡찡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호치랑 드라고는 위험하게 애를 말릴 생각도 안하고 뭐하는거야?
내가 그런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내게 가까이 다가온 찡찡이가 우르르 눈물을 글썽였다.



......아......이거 내가 위험한거였구나...



쓰러진 상대에게 확인사살을 하려는 겁니까.
나는 최후는 찡찡이의 「초특대 울음포」로 장식하는거군요.
안색이 새파래졌지만 난 원래 털이 파란색이라 새파래진 티도 안나...핫핫핫.

"로, 로우란 괜찮아찡?
미안...내가 그때 로우란을 불러서찡..."

"네 탓이 아냐. 전투 중에 한눈을 판 내 잘못이지.
그러니까 신경쓰지마. 그리고 사내 녀석이 그렇게 울음이 헤프면 못쓴다?"

네가 울면 슬퍼하는 사람이 있어.
주로 네 눈앞에 선 내가 나의 안전 때문에.

"그, 그치만, 로우란이 호치랑 드라고랑 싸우니까찡..."

"...아아, 그거? 내가 새초미를 울려서 혼나고 있던거야."

아직 정황을 파악못한 찡찡이를 위해 짧막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찡찡이가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하, 하지만 로우란은...친절하게 먹을것도 주고, 새초미를 데려와주고, 똘기랑 슌린의 결혼을 축하해주려 했잖냐찡!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싸워야하는거야찡!"

"...아, 그게 어찌 된거였더라...? 원래는 똘기와 슌린을 응원해주려고 했는데 이유가 생겨서 그러질 못하게 됐거든.
대신 새초미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둘을 응원할수도, 새초미를 도와줄 수도 없었어.
두 약속중 아무것도 지킬수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잘못한거지."

"로우란찡..."

"또, 또 울려고 그런다...아서라. 애들 울리는 취미는 없어.
자꾸 그러면 간지럼태워서 웃겨버린다?"

실은 이 몸의 나이로 따지면 내가 찡찡이보다 어리지만!
겉은 어른이니까.

그나저나 나 언제쯤 여길 떠나면 되는거지?
한대 맞고 쓰러진 연기하는것 치곤, 찡찡이에게 주절주절 잘도 말을 늘어놓는 내 상황을 깨달았다.
계속 이러다간 쌩쌩한 모습으로 보일까봐 일부러 간간히 기침을 해서 상태가 나쁜 척 엄살을 피운다.
이정도 쉬었으면 슬슬 체력회복됐다고 일어나서 3차전을 시작해야 하는건가, 아니면 이대로 계속 엄살부리고 주저앉아있다가 도망치듯 떠나버릴까 고민하는 내 모습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꼴사나웠다.

내심 시원찮은 고민을 하는 가운데, 훌쩍이는 찡찡이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달래고 있으려니, 아래를 향한 내 시야 끝에 분홍 양말에 빨간 신발과 은빛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새초미였다. 방금 전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다가 전투가 끝나자 내게 가까이 다가온 새초미는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들 너무 경계심이 옅다니까 그러네...

더이상 싸우지 못할것처럼 보여서 방심한건가? 그렇게 보인다면 나야말로 환영인데...
아무튼 새초미 뒤에 조금 떨어져 서있는 호치와 드라고에게 공격의사가 없다는것 정도는 알려주도록 하자.

"...훌륭했다. 너희들의 승리로군."

그러니까 더이상 싸움은 사양.
이야기 나라도 곧 원래대로 되돌릴테니까.
속 마음이야 어떻든 담담히 나의 패배를 인정하자,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던 새초미의 입이 열렸다.

"왜 제대로 싸우지 않은거야?"

"...무슨 말이지?"

"시치미 떼지마. 찡찡이의 외침에 신경을 쓰다가 당하고, 내가 가로막았을 때도 주저했었잖아.
너 정말 싸울 생각은 있었던거야?"

"싸웠다. 그리고 방심해서 졌다. 그뿐이지."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

"그 다크 파이어라는거, 원래는 검으로 쓰는거라며?
애초에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쓰지 않았잖아."

"......"

어제 지나가듯 말한걸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군.
새초미의 단언에 어쩔수 없는 한숨이 나왔다.
내 입이 방정이지.
입을 우물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돌리고 토해내듯 말을 내뱉었다.

"...승리를 너에게 바치겠다고 했었지.
무투회 결승전은 아니었지만, 약속은 지켰다."

"!? 너..."

"널 속인 빚은 이걸로 갚은걸로 했으면 좋겠군."

"...바보같아."

"...매정한 평가네.
그런 바보를 믿은 새초미 너도 만만치 않잖아?"

슬슬 새초미 상대로 무거운 분위기 잡기도 껄끄러웠던지라 딱딱한 어조를 버리고 가벼운 말투로 되돌아오자, 어쩐지 원망스러운듯한 시선을 보내오던 새초미의 눈빛이 흔들린다.

"...바보같이 성실하게 밤새 불침번을 서준 네가 더 바보야."

이젠 누가 더 바보인지 겨루는 싸움입니까? 이거 완전 애들 수준이잖아.
그나저나 별로 피곤한 티는 안냈다고 생각했는데 불침번 서준걸 들킬줄은 몰랐는데.
새초미의 지적에, 결국 난 뭐하나 제대로 숨기지도 못했다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곤, 낮게 탄식하며 뇌까렸다.

"...아아...그럴지도...
덕분에 아직 잠이 덜 깼나봐.
조금만 더 달콤한 꿈을 꾸고 싶다고...그렇게 생각해버렸어."

"......"

나른함을 머금은 내 말에 새초미는 입을 다물었다.

"......로우란."

"왜?"

"이야기 나라는...정말로 부수고 싶었던거야?"

"......"

"만약 내가 널 무투회장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야기 나라는 원래대로 돌아가는거였잖아."

"...그러고보면 그렇네."

"넌...해라의 부하잖아? 이야기 나라를 부수러 온거였잖아...
그런데 왜...?"

어쩐지 우울해보이는 얼굴로 질문하는 새초미의 물음에 잠시 답할 말을 생각해 보았다.

"글쎄...어째서일까..."

"......"

"...음, 그렇네..."

새초미가 토끼귀를 쫑긋 세운다.
총명한 너라면, 내가 진심으로 싸우지 않았다는걸 눈치챘던 것처럼,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별무리 아래서 새초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웃었다.

"...이야기는 정말 좋아하니까."

다시금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이는 새초미의 눈을 마주본다.

"...네 눈은...예쁜 보석 같아."

하얀 피부가 확 하고 붉게 달아오른 새초미를 눈에 담으며 눈꺼풀을 닫는다.
이윽고 내 몸이 푸른 빛의 구슬로 변해 하늘로 떠오른다.
부서져 황폐화된 경기장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찾으면서, 풍경은 다채로운 색으로 물든 꽃밭으로 바뀌어간다.
왜곡되지 않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이야기 나라를 확인하곤, 하늘을 올려다보는 새초미와 찡찡이의 모습에 한차례 공중에서 원을 그린 뒤 사령궁으로 귀환했다.




사령궁의 알현실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해라 총사령관에게 찾아가 경과를 보고했다.
이야기 나라를 파괴하지 못한 책임은 추궁당하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꾸러기 수비대의 역량을 파악하는게 나의 본래 임무였으니까.
내심 안도하며 해라에게 차례차례 정보를 풀어놓았다.

- '똘기'는 광선검을 다루며, 광선검을 풍차돌리듯 돌리는 방법으로 기탄을 튕겨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새초미'는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으나 비전투 인원으로 판단된다.
- '찡찡이'또한 비전투 인원으로 판단된다.
- '호치'는 거대 호랑이로 변신할 수 있으며, 이는 백색의 고우센과 비슷한 능력으로 보인다.
- '드라고'는 구름을 부리고 화염을 내뿜으며 번개를 내리꽂는다. 거대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다.

담담히 내 보고를 듣다가 '호치'라는 이름에 작게 반응하는 해라의 모습에 내심 쓴 웃음이 났다.
옛 연인과 헤어진지도 벌써 6년이니 그럴만도 하다지만.
호치의 이름에 심란해진 탓인지, 보고가 끝나자 해라는 추가적인 질문없이 잠시 생각할게 있다며 나를 내보냈다.




아무튼, 이걸로 첫번째 출정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현실을 벗어나자,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치며 알현실 밖 한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쥬켄이 반색하며 다가왔다.

"앗~! 이제 알현은 다 끝난거야 로우란?"

"어? 으응. ...설마 날 기다려준거야 쥬켄?"

드디어 쥬켄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걸 그만둔걸까하고 감격하고 있자니 쥬켄이 활짝 웃었다.

"응~! 바깥 세상에 대해 물어볼게 있어서 말야."

...아, 그것 때문이었냐?
호기심 많을 나이로군요.

"사령궁 밖은 어땠어?
이번에 간 이야기 나라는 어땠어?
꾸러기 수비대라는 녀석들은 어떤 녀석들이었어?
어떤식으로 그녀석들을 골탕먹였어?
거기 음식은 맛있었어?"

자신도 이야기 나라로 '놀러'나가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이래저래 답답했나보다.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흥미진진하게 물어오는 쥬켄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어지러워 손을 내저으며 쥬켄을 말렸다.

"자, 잠깐만 쥬켄! 대답해 줄테니까 제발 차근차근 하나씩 물어보라구."

"응~ 그럼 우선...처음으로 이야기 나라에 다녀온 감상은 어때 로우란?"

"첫 감상이라? 으음..."

고민에 잠긴 나의 대답을 쥬켄이 두근두근한 얼굴로 기다린다.

"...그렇군..."

곧바로 떠오른 감상을 그대로 툭 하고 내뱉었다.

"새초미가 귀여웠어."

"......"

안절부절하지 못하던 몸짓이 가라앉고, 기대감에 반짝이던 금빛 눈동자가 별 해괴한걸 보는 심정을 담아 나를 향했다.
어처구니 없다는듯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쥬켄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새초미가 엄청 귀여웠어."

"제대로 들었으니까 반복하지 않아도 되거든?"

"중요하니까 두번 말했습니다."



쥬켄한테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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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를 그려주신 터틀러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들 새해 맞이는 잘 하셨나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장 4개월만...이네요-_-;

그것도 이불이 40화가 아닌 다른 작품으로 말이죠^^;

갑자기 꾸러기 수비대가 머릿속에 한가득 들어와 버렸다고 표현해야 하려나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은 2011년에 노트에 적어둔 반바닥 정도의 분량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2년정도 잊고 지냈는데, 작년 추석때 소재 노트 뒤지다가 이불이 사이에 슬쩍 숨어있는 요걸 발견하고선, 느닷없이 꾸러기 수비대에 불타올라 쓰기 시작했습니다.
9월중에 완결까지 대충 써놓았죠.

...거기서 1화 분량 제대로 다듬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_-;;;
터틀러님이 후반부 삽화까지 보내주셨는데...OTL;;;;

아무튼;;; 청출어람은 중편 분량으로, 대여섯편 정도로 완결시킬 예정입니다.

이불이 40화는 일단 잠시 보류합니다.
쓰다가 좀 중구난방이 되어버린 감도 있어서 잠시 정리좀 하려구요.
40화 이외의 소재들을 몇개 모으긴 했지만, 연재가 안되면 다 소용없는 짓이니 청출어람 완결하면, 이불이도 마저 쓰겠습니다(_ _);;;
아니면 병행해서 쓰든가 할테죠

새해 계획 중 하나는 '한달에 한편 이상 글쓰기' 입니다.

...너무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네요...ㅠㅠ;

올해는 연재 펑크내는 짓 좀 안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_ _)m


p.s. 참조 이미지

이미지 통합 보기 링크(약 20MB) - 펼치기 하면 스크롤 압박 있음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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