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2




"자, 맞춰봐. 앞면? 아니면 뒷면?"

"뒷면!"

"네, 유감. 앞면이었어."

"으윽...!"

펼친 손바닥에 보인 동전의 앞면에 쥬켄이 신음성을 흘린다.

"자, 틀렸으니까 벌칙."

"아우!?"

양뺨을 잡아당기자 쥬켄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정도나 당했으면 슬슬 억지부리는건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야...
우스꽝스럽게 볼이 늘어난 쥬켄이 째려보는걸 피식 웃으며 응대하곤 방금전 일을 떠올렸다.


「쥐의 시집보내기」이야기 나라에서 귀환하고 나서 며칠 후, 오늘에서야 드디어 새로운 이야기 나라로의 침입을 시도하게 되었다.
해라에게 출동 보고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서자, 여느때처럼 짬을 주체하지 못하고 사령궁을 어슬렁거리던 쥬켄과 마주쳤다.

심심하다고 투덜대는 쥬켄에게 잠시 어울려줄 겸해서 간단한 놀이를 제안했다.
내 손 안에 있는 동전이 '앞면'일지 '뒷면'일지 맞추는 놀이였다.
아무 조건 없는 놀이는 심심할것 같아서, 만약 쥬켄이 맞춘다면 원하는걸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쥬켄은 반색하며 응했다.
입을 가리며 휘어진 눈초리로 작게 웃음을 흘리는 쥬켄의 태도가 여간 수상쩍은게 아니라, 만약 이기면 뭘 바라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이기면 나대신 사령 몬스터를 만들어줘.
난 그동안 이야기 나라에 놀...정찰 임무를 다녀올테니까."

아, 그러세요? 놀러가고 싶다는 말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지경인데 잘도 정보 수집을 하고 오겠습니다 그려.
의기양양하게 출동했다가 키키랑 맞붙어서 다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어두칙칙하고 따분한 사령궁을 벗어나고픈 맘은 이해하지만 이런 일로 내 일감을 빼앗기게 되는건 사양이라구.
단순한 심심풀이에 어울려줄 요량이었는데, 어째서 이런 사심 가득한 내기로 변질된거람?
놀기 좋아하는 말괄량이의 제안에 고개를 내젓곤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결과는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잇! 다시 한번 더!"

"또 하는거야?"

"당연하지! 이길 때까지 계속 할거야!"

"쥬켄...그런건 내기가 아냐."

"시끄러 로우란. 내 파트너라면 그런 사소한 건 신경쓰지 않는 대범함을 보이란 말야."

"하아..."

부끄럼없이 당당하게 재시도를 요구하는 쥬켄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곤 내기를 이어갔다.
손등을 위로 향한채 동전을 쥔 손을 내밀었다.

"앞면? 아니면 뒷면?"

"앞면!"

"유감. 뒷면이야. 그럼, 에잇-"

"으에!?"

손바닥을 펼쳐 나온 동전 뒷면을 보여주곤 또다시 쥬켄의 볼을 잡아당겼다.

그 후로 오기가 발동한 쥬켄의 재시도가 반복되었다.

재시도.
그리고 재시도.
또 한번 재시도.
적당히 질릴 때도 되었건만 포기하지 않고 재시도.

놀러 나가고 싶어하는 쥬켄의 집념은 굉장했다.
그래봐야 맞출 턱이 없는데...
몇번을 해도 결과는 똑같다는걸 슬슬 깨달아줬으면 한다.

계속된 패배 속에서 쥬켄이 볼을 잡힌채 부루퉁한 얼굴로 항의한다.

"아우우...이샤해(이상해)!
어째서 난 매번 틀리기만 하는거야!?"

"글쎄말이다...어째서일까?"

얄밉다는듯 나를 노려보는 쥬켄을 보며 히죽 웃다가 문득 시간이 제법 흘렀음을 깨달았다.

이제 슬슬 이야기 나라로 떠날 시간이네.
사전에 준비해둬야 하는 것도 있으니, 쥬켄이랑 노는건 여기서 끝내기로 할까.
그대로 자리를 뜨려다가, 얼얼한 양볼을 매만지며 「아우우...」하고 신음을 흘리는 쥬켄의 모습에 잠시 멈췄다.

"어이, 쥬켄."

"우으으...왜?"

"잘 봐. 「앞면」이다."

동전을 앞면이 보이도록 손바닥에 올려둔다.
손등을 위로 한채 동전을 쥔 손을 쥬켄에게 내민다.

"앞? 뒤?"

"앞!"

앞면을 확신하며 희희낙락한 쥬켄의 앞에서, 말없이 손목을 비튼다.
살짝 벌어진 손틈으로 손바닥에 놓여있던 동전이 손가락 첫째 마디로 떨어져 내린다.
친절하게도 천천히 손바닥을 비틀어 보이는 내 시연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쥬켄 앞에서, 가만히 손바닥을 펼쳐 손가락 첫째 마디로 옮겨간 동전의 「뒷면」을 내보인다.

"...어? 엣?"

혼란스러워하며 동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쥬켄은 이내 무언갈 눈치챈듯 외쳤다.

"이, 이 사기꾼!!!"

"내 파트너라면 이런 사소한 속임수는 넘어가주는 대범함을 보이라구. 그럼 이만! 아디오스~!"

"야! 너 거기서!"

와악!하며 화를 내는 쥬켄에게 웃음을 터뜨리며 달아나 곧장 이야기 나라로 향했다.




이번에 향한 이야기 나라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공주에게 저주를 걸고,
십수년 뒤 영원한 잠에 빠진 공주는 난관을 헤치고 온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 왕자와 함께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다.

다만, 동화책에 나온 삽화에선 검은 용으로 변해서 불을 뿜던 마녀를 백마탄 왕자가 단칼에 목을 댕겅 베어버리던데,
공주를 깨우려면 마녀도 쓰러뜨려야 하는지, 사랑이 담긴 키스만 받으면 공주가 깨어나는지는 기억이 애매하다.

이야기의 세계관을 멋대로 비트는건 내 전문분야니까, 이런 설정을 붙잡고 고민할 필요까진 없지만서도.
여하간 이야기에 간섭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야기 나라로 향했다.

이야기 나라에 도착한 나를 맞이해 준 곳은 커다란 나무들이 즐비하게 우거진 숲 한복판이었다.
뉘엿뉘엿 서쪽을 향해 기울어져가는 해를 보건데, 지금부터 곧장 공주가 잠든 성을 찾아간다 하더라도 성에 도착할 무렵에는 밤이 되어버릴 것 같다.
이야기 나라로 향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에 너무 시간을 소비한게 문제가 됐나보다.

반성의 시간을 갖는건 일단 미뤄두고, 우선은 이야기 나라에 간단한 간섭을 끝마쳤다.
준비해온 물품을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해 두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돌발상황에 빠지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겠지.
그럼 급한건 처리했으니 나머지 세세한 사항은 숲을 벗어나면서 생각해보도록 할까.

우거진 나무들로 빽빽한 숲이라 자칫하다간 방향을 헤매기 쉬워보이지만, 비행능력이 기본으로 갖춰진 사령사천왕으로서는 하늘로 날아올라서 방향을 확인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없다.
하늘에서 주변을 내려다본 결과, 전방에 숲이 끝나는 언덕 너머로 이야기의 무대로 보이는 성이 조그맣게 보였고, 후방의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마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리상으로는 마을이 더 가까워 보이지만...그렇다고 딱히 마을에 들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꾸러기 수비대나 이야기의 축이 되는 공주, 왕자, 마녀가 마을에 있다면 모를까.
마을에 가서 이야기의 주역 중 누군가를 만나길 기대하는 것 보다는, 100%의 확률로 성에서 잠들어 있을 공주를 만나러 가는 쪽이 훨씬 견실한 선택이니까.
거기다 만약 성으로 가는 와중에 마녀와 조우하기라도 한다면 준비해온 물건을 사용해볼 수도 있을테고.

마음을 정하곤 하늘에서 내려와 정면의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꾸러기 수비대가 올때까지는 어느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테니까 당분간은 느긋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산책하면서 계획을 정돈하고, 푸른색 일색의 갑옷을 어떤 복장으로 바꾸는게 좋을까 고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지.
만에 하나 변덕스럽게 마음이 바뀌면 마을로 되돌아가 하룻밤 숙박하면 되는거고.


숲길을 걸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길 옆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짐승인가 싶어 경계하자, 수풀을 헤치며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튀어나왔다.

"하아, 다행이야. 겨우 길이 나왔네요. ...어머?"

"응?"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길게 뻗은 속눈썹 아래로 깜박이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양털마냥 포근해 보이는 웨이브진 분홍빛 머리카락과 C자형 민트색 헤어밴드 양 끝으로 보이는 양(羊)의 귀.
하얀 블라우스 가슴팍에 달린, 푸른 구슬이 중앙을 장식한 커다란 노란 리본 브로치.
눈동자 색과 같은 짧은 에메랄드 빛 스커트와 노란 리본이 달린 분홍색 신발.
소녀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차례 짧게 훑어보고 즉각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꾸러기 수비대, 양의 정령 「미미」다.

벌써 꾸러기 수비대가 이야기 나라에 도착하다니, 내가 너무 늑장을 부린 건가.
그런데 어째서 혼자뿐이지? 설마 동료와 헤어지기라도 한건가?

갑작스러운 조우에 내심 당황해하고 있으려니, 눈을 깜박이며 내 얼굴을 쳐다보던 소녀, 미미가 이윽고 깜짝 놀란듯 주춤주춤 내게서 거리를 벌리며 물러난다.
양손으로 입가를 가린 미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채 말을 더듬는다.

"아! 다, 당신은..."

놀람에서 점차 두려움으로 바뀌어가는 미미의 표정에, 혼란스런 감정을 추스리고 곧바로 대응 방향을 정했다.

"이봐 아가씨, 혹시 길을 잃은거야?"

"...네?"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어딘가의 늑대씨도 아니고 그냥 숲을 지나던 여행객일 뿐이니까."

어차피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꾸러기 수비대는 「똘기」「새초미」「찡찡이」「호치」「드라고」다섯명이 전부다.
미미를 본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미미가 꾸러기 수비대라는 사실을 내가 알아차릴 리는 없단 말이지.
미미도 내 말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듯, 움츠러든 몸을 풀며 어색한 얼굴로 사과해왔다.

"죄송해요. 숲에서 사람과 마주칠거라곤 생각못해서 그만 놀라버렸네요."

"죄송할 것 까진 없어. 그런데 아가씨는 이 시간에 혼자서 숲에 온거야?
이제 곧 날도 어두워 질텐데?"

불그스름해진 하늘을 가리키며 묻자 미미가 찔끔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원랜 동료들과 함께 왔었는데 실은 그만 사고로 뿔뿔이 흩어져버려서...
그래서 헤어진 동료들을 찾아서 숲을 탐색하던 중이었어요."

미미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탐색? 수풀 속에서? 그거 보통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지 않아?"

"......"

겸연쩍은 얼굴로 침묵한 미미의 태도에 어느정도 미미가 처한 상황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십중팔구 또 키린더가 얘내들을 하늘에서 랜덤 포인트에다 떨어뜨리기라도 했겠지.
「브레멘 음악대」편에선 호치 혼자 다른 장소에 떨어지기도 했고.
「파랑새」에피소드에선, 아예 폭포 위에다 꾸러기 수비대들을 떨궈 버려서 일행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이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지.
매번 이런식으로 출격하고도 기운이 쌩쌩한 꾸러기 수비대의 터프함은 경이롭다고 평가해도 좋겠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며 납득한 내게 미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 그런데 당신은..."

"로우란이라고 불러. 그러고보면 자기 소개가 아직이었지?"

"미미에요. 로우란씨는 무슨 일로 숲을 지나고 계셨던건가요?"

"숲 너머에 있는 고성에 가보려고."

"...성?"

"그래. 마녀의 저주에 걸려 100년째 성에 잠들어 있는 공주를 만나러 가는거야."

내 대답에 미미가 눈을 가늘게 뜬다.
경계심을 보이며 힐끗힐끗 내 눈치를 살피는 미미를 보고 고민했다.
어느덧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을 보니, 조금 더 있으면 어둑해질텐데 어떡한다?
현재 위치에서 성과 마을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곤 미미에게 물었다.

"동료를 찾는 중이라고 했지?"

"...네."

"우선은 나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지 않을래?"

"엣?"

놀라는 미미에게 엄지를 세워 내가 걸어온 길의 뒷편을 어깨 너머로 가리켜 보였다.

"적어도 이런 우거진 숲에서 동료와 마주칠 확률은 낮을거라고 생각해.
내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숲의 끝자락에 마을이 있어. 어쩌면 네 동료들도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너만 괜찮다면 내가 마을까지 데려다줄께."

"아뇨. 거기까지 해주실 것 까지는..."

"그렇게 사양할 필요는 없어. 거기다 하늘을 보니 곧 어두워질것 같은데, 이대로 숲에 홀로 머무르는건 위험해.
잘못하다간 무서운 들짐승을 만날지도 모른다구?"

"거, 겁주지 마세요!"

안색이 파래지며 외치는 미미에게 사과의 제스쳐를 취하곤 차선책을 제시해봤다.

"아니면 나랑 성까지 동행하는건 어떨까?
마을과는 반대 방향이지만, 성에서 내 볼 일만 끝마치면 도로 마을로 데려다 줄 수 있,"

"마을까지 에스코트 잘 부탁드려요."

상큼한 미소와 함께 즉답하는 미미에게 말을 끊겼다.
「성으로 가는건 절대로 안돼!」라는 신호가 노골적으로 전해지는 미미의 미소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명감에 불타는 눈빛으로 양손을 불끈 쥔채 작게 승리의 포즈를 취하는 미미를 애써 못본척하며, 몸을 돌려 마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료들과 따로 떨어져서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로우란씨처럼 친절한 분을 만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아하하~ 거기까지 말하면 부끄러운걸~"

미미의 감사에 쑥스럽게 응대하며 숲길을 걷던 중 미미가 신경쓰이는듯 물음을 던졌다.

"저, 그런데...혹시 제가 동행해서 로우란씨에게 폐가 된건 아닌가요?"

"응? 아냐아냐. 전혀. 어차피 성에는 느긋하게 가볼 생각이었으니까."

"정말인가요? 성에 볼일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의심스럽다는듯한 미미의 반응에 조금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뭐어...원래라면 지금쯤 성에 도착했어야 하니까, 예정이 조금 늦춰지긴했지.
그래도 문제는 없어. 설마하니 「그 녀석들」이 벌써 이곳에 도착했을리는 없을테고."

"「그 녀석들」...이요?"

"이쪽 사정 때문에 만나기가 좀 껄끄러운 녀석들이야.
나로선 그 녀석들이 오지 않은 이상, 성엔 천천히 가봐도 돼.
그리고 이번 여정은 원래 내가 늑장을 부린 탓이 크니까 미미 네가 신경쓸 것 없어.
성에서 볼일은 내일 봐도 괜찮으니까."

"그런가요? 후우...다행이네요."

내 말에 안도한 듯 미미는 편하게 웃었다.
내게 폐를 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건지, 아니면 내가 늑장부리는 처지가 된게 다행이란건지 알쏭달쏭한 미소다.
몰래 이쪽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모양새를 보면 어느정도 짐작은 간다만.



미미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이동하다 보니, 마을에 도착해 여관을 찾을 즈음에는 어느덧 날이 저물어 있었다.
여관 앞에서 멈춰서 주머니 안을 확인해보았다.

"왜 그러세요 로우란씨?"

"잠시 소지금을 확인했어.
사실 마을에 머물 예정은 없었고, 혼자 다니느라 지갑도 가볍게 준비한 편이어서.
혹시 여윳돈 있어?"

"...죄송해요. 저, 돈은 갖고 있지 않아요."

하긴, 애초에 다른 세계에서 온거니까 이 세계의 돈 같은걸 갖고 있을리가 없지.
미안해하는 미미의 모습을 보니 괜히 물어본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풀죽은 미미를 달랜 뒤,「소지금에 여유가 되려나...」하고 중얼거리곤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여관 주인에게 하룻밤 묵을 방이 있는지 물어보자 여관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방은 몇개로 하실 예정이오?"

당연히 두개지.
여관 주인의 말에 움찔하고 날 보는 미미의 반응에서부터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
만약 주머니 사정이 안되면 나중에 접시닦이로라도 변상하면 되겠지.

"으음, 방은 두개로 부탁,「하, 한방으로 해주세요!」푸흡!?"

터무니 없는 미미의 발언에 사레가 들렸다.
가슴을 두드려 쿨럭임을 진정시키곤 벙찐 얼굴로 미미를 보자, 미미가 붉어진 낯으로 더듬더듬 해명했다.

"그, 그러니까...굳이 돈을 두배로 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로우란씨도 예정에 없던 지출이라 부담되실텐데 절약하는게 좋잖아요?"

예정에 없던 지출보단 방금전 네 주장이 훨씬 더 부담스러운데?
붉어진 얼굴로, 하지만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담긴 눈빛으로 주장하는 미미의 모습에 기침을 가라앉히곤 입을 열었다.

"음. 그런거구나. 난 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길래 너도 의외로 조숙하구나 하고 생각했지 뭐야."

"아니에욧! 거기다 고양이는 제가 아니라 로우란씨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새빨개진 얼굴로 빽-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박하는 미미에게 수긍하곤 되물었다.

"그런데 정말 한 방으로 괜찮아?"

"...저는 괜찮아요."

토라진 얼굴로 외면하는 미미에게서 시선을 돌려 여관 주인과 마주했다.

"제 동행이 괜찮다고 하니 방은 하나로 하지요."

"그렇소? 그럼 더블(double)이랑 트윈(twin) 중 어느 걸로 하시려오?
가격은 더블이 좀 더 싸오만..."

눈짓으로 의견을 구하자, 미미는 「더블? 트윈?」하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럼 더블로 부탁드려요. 그 편이 더 절약되니까요."

"알겠소. 방은 2층에 있으니 좋은 시간 보내시구려."

덤덤하게 키를 건네주는 여관 주인에게 인사하곤, 미미와 함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런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방 한 가운데 놓여있는 커다란 침대 하나와 그 위에 놓인 이불 하나.
딱봐도 2인용 침대다. 그 외에 다른 침대는 없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그 결론 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고보니 「더블 룸」은 둘이서 쓸 침대 하나,
「트윈 룸」은 각자 사용할 침대 두개가 있는 방이었던가?"

"알고 있었죠!? 로우란씨는 알고 있었던거죠!?"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쥔채 빨개진 얼굴로 격렬하게 항의해오는 미미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치며 손사레를 쳤다.

"아, 아니, 솔직히 나도 이건 좀 헷갈리던 터라..."

"우...어째서 이런 일이..."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선 머리를 움켜쥐는 미미의 모습에 나도 난색을 숨기지 못하며 제안해봤다.

"역시 이런건 곤란할테니 방을 바꿔야겠네."

"...돈은 있으세요? 더블룸을 잡는데도 소지금을 거진 다 쓰신것 같던데요?"

"아, 뭐...여차하면 미미 네가 쓸 1인실 하나만 잡으면 되니까."

"엣? 그럼 로우란씨는 어쩌구요?"

"난 밤산책이나 하고 올께. 하루 정도는 안자도 괜찮거든.
기왕 이렇게 된거, 오늘 밤 중에 성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네 동료를 찾는건 내일 성에서 돌아온 다음에 제대로 도와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 안돼요!"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미미가, 방을 나서려는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가, 같이 있어요!"

"......"

"......"

자기가 말해놓고선 얼굴이 완전 익어버린 미미를 어처구니 없다는듯이 바라보다가 툭-하고 중얼거렸다.

"...역시 너 발랑 까졌구나?"

"틀려욧!!!"




잠시간의 소란 후, 방에 짐을 풀고난 뒤 여관의 욕실에서 피로를 풀었다.
하루간 쌓인 피로는 목욕과 함께 날려보내는게 제일이지.
개운한 기분으로 가운을 입고선 욕실을 나왔다.
입욕 뒤의 따끈따끈하고 나른한 기분을 만끽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방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아, 아냐! 그런거 아니라구!」

방문 너머로 들리는 당황한 미미의 외침에 동작을 멈추곤, 문 손잡이로 가져가던 손을 슬그머니 치웠다.

「그게...혼자 놔두면 어디서 뭘 할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곁에 있는 쪽이 더...」

「다행히 그쪽은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동료와 통신중인가?
생각해보면 미미는 컴팩트 형태의 소형 기기를 가지고 있었지.
아마 그걸 사용해서 다른 꾸러기 수비대원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나보다.

「응, 그래. 조심할테니까 맡겨줘.
나도...꾸러기 수비대니까.」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이며 미미는 말을 맺었다.
더이상 대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통신이 끝난것 같은데, 조금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되려나.
방안의 기척을 신경쓰면서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센 뒤 노크했다.

「네, 넷!」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미미에게 문 너머에서 묻는다.

"들어가도 될까?
혹시 개인적인 용무를 보는 중이라면 조금 기다릴께."

「괘,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태연한 얼굴로 미미가 맞이해줬다.
나와 마찬가지로 목욕 가운 차림인 미미는 침대 한쪽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살짝 젖어있는 분홍 머리카락에 잠시 눈길을 주다가, 미미가 앉은 침대 반대편에 엉덩이를 걸터앉았다.

"그럼 내일은 어떻게 할래?
앞서 말했듯이 난 내일 중으로는 성에 가보려고 해.
아침 일찍 마을을 나설 셈인데, 미미 네 예정은 어때?
만약 마을에서 동료를 찾거나 기다릴 생각이라면, 나도 성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대로 네 동료 찾기를 도와줄께."

"그거 말인데요. 저도 로우란씨와 동행해도 괜찮나요?"

"나랑? 동료들은 어쩌고?"

"그거라면 괜찮아요. 방금 전 동료들에게서 다들 무사하다고 연락이 왔거든요.
그리고 「내일 성에서 만나자」라고 동료들과 이야기가 되서, 이렇게 된 김에 저도 로우란씨와 함께 성에 가고 싶어요."

"그거 다행이네. 그런데 처음부터 성이 목적지는 아니었나봐?
혹시 날 배려해서 장소를 고른거라면 기쁘지만, 뚜렷한 목적지 없이 떠도는 여행은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구."

"아, 아하하...이곳은 초행이라 그만 부주의했어요. 다음엔 조심해야죠."

미미는 곤란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다른 꾸러기 수비대와는 「성」에서 만나게 되는건가.
만약 나보다 꾸러기 수비대가 먼저 성에 도착한다면 성을 지키는 마녀를 대신 쓰러뜨려 주려나?
사령 몬스터도 아닌 마녀를 상대한다고 「정령소환」 같은걸 낭비하진 않으려나 몰라.
어쩌면 이야기 나라를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싸움을 회피할지도 모르지만.



생각을 정리하곤 침대 한켠에 자리를 잡고 베개를 바로 놓았다.
목욕가운 차림이지만 몸을 닦고나서 입은거였으니까 이대로 입고 자도 별 상관은 없겠지.
갑옷을 입고 자는건 애초에 논외니까, 다음번에 이야기 나라를 방문할 때는 잠옷 같은거라도 챙겨와야 하려나?

내가 잘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미미는 여전히 침대 한켠에 앉은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적잖이 남사스럽거나 내가 옆에 있는게 불안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다지 믿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일단 미미를 안심시켜보기로 했다.

"어쩐지 불안해보이는데 괜찮아?"

"아, 아뇨. 그런일은..."

"처음보는 사이라 별로 내게 믿음이 가진 않겠지만 걱정하지 말고 자.
잠자는걸 노려서 건드리거나 하진 않을테니까."

"...하긴 그렇네요."

잠시 턱을 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미미의 반응에 김이 빠졌다.

"신용해주는건 기쁜데, 조금은 낯선 사람을 의심하는게 좋아.
그렇게 대뜸 남을 믿어버리다간 나중에 큰코 다칠지도 모른다구?"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적어도 로우란씨는 잠자는 여성을 덮치는 파렴치한은 아닌것 같은걸요."

"그건 여자의 감?"

"글쎄요? 「노 코멘트」라고 말하고 싶지만...굳이 이유를 들자면 믿음이에요.
길잃은 절 마을까지 데려다 준 로우란씨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까요."

"...그거 고마운 평가로군."

반쯤 미미에 이끌리다시피 마을로 향하게 된 경위는 접어두더라도, 미미의 과분한 평가가 민망해서 슬그머니 달아오른 볼을 쓰다듬었다.
뺨을 매만지는 내 모습을 이상한듯 바라보던 미미는 이윽고 작게 숨을 들이쉬곤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불 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이 전해진다.
열이 식어 뺨을 매만지던 손을 내리고 이불을 걷어올리는데, 입가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미미가 힐끗힐끗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로우란씨는 잠자는 공주님을 만나러 성에 가는거죠?"

"그래. 100년 씩이나 잠들어있는 공주라니 흥미가 동해서 말야."

"공주님을 깨우러 가는건가요? 그...키, 키스로..."

자기가 말하고선 낯이 홍당무가 되어버린 미미가 얼굴을 가리듯 이불을 끌어올린다.
이불위로 눈만 내놓은채로 이쪽을 살피는 미미의 모습을 보노라면, 저게 과연 정보를 캐내려는 속셈인지, 아니면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물어보는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딱히 말해줘도 별 문제가 될 내용은 아니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공주를 깨우거나 하는게 목적은 아냐."

"그런가요?"

"그래."

"그럼 왜 만나러 가는거죠? 잠들어 계신 공주님과는 이야기도 나눌 수 없잖아요?
설마 얼굴만 보고 끝이라는건 아니죠?"

"글쎄...궁금하면 성 안에 함께 들어가볼래?"

"네?"

백문이 불여일견. 내가 뭘할 속셈인지 이유를 찾느라 이리저리 캐묻는것 보단, 직접 같이 가보는게 훨씬 나을테지.
어차피 나머지 꾸러기 수비대들도 성으로 향할테니까, 성 안이든 성 밖이든 만날 장소의 차이는 크게 없을테고.
내 제안에 눈을 깜박거리던 미미는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는 모양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마치고 조용해진 방에선 색색 낮은 숨소리만 들려온다.
내일 마주하게 될 일을 예상하고 추가적인 대처안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우연히 이쪽을 바라보던 미미와 눈이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선 얼굴을 돌리는 미미의 모습에 쓴웃음이 났다.
믿는다 어쩐다 말은 해도, 낯선 이와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지금 상황이 낯부끄럽고 당황스러운건 어쩔 수 없겠지.
긴장감 속에 잠에 들지 못하는 미미를 배려할겸 가볍게 말문을 열었다.

"잠자는 공주님 하니까 생각난건데, 예전에 이곳 사정이랑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어떤 이야기죠?"

"저주에 걸린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괴물의 이야기야."

"엑? 괴물이요?"

괴물이라는 말에 미미는 깜짝 놀란듯 소리를 높였다.

"응. 녹색 피부에 험상궂은 외모를 가진 오우거였지.
혹시 잠이 오지 않거든 한번 들어볼래?"

미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누인 몸을 일으켰다.

"이야기는 그의 보금자리인 늪지대가 동화나라 사람들로 붐비게 되면서 시작해.
사악한 영주에 의해 쫓겨난 동화나라 사람들이 지낼 곳을 찾아 늪지대로 모이게 된거지.
늪지대가 소란스레 북적이면서 골머리를 썩이던 괴물은 결국 집을 뛰쳐나와선, 쫓겨난 사람들을 도로 성에 들여보내 달라고 영주에게 항의하러 가.
그런데 그 당시에 영주는 용이 지키는 성에 갖힌 아름다운 공주를 구하러 갈 용사를 모집하고 있었어.
때마침 성에 도착한 괴물을 본 영주는, 공주를 구하는 임무를 괴물에게 맡겨버리지.
공주를 구해오면 동화나라 주민들을 성으로 도로 불러들이겠다고 구슬려서 말야."

"헤에..."

괴물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신기한듯 미미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동행인 수다쟁이 당나귀와 함께하는 괴물의 고생스럽지만 익살맞은 모험담.
그리고 이야기는 괴물과 수다쟁이 당나귀가 용이 지키는 성에서 무사히 공주를 구해오는 장면까지 왔다.

"대체 무슨수로 용을 물리친거죠?"

"물리쳤다고 할까, 수다쟁이 당나귀가 용을 꼬셨어.
알고보니 용이 암컷이었거든.
그걸 눈치챈 당나귀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그녀의 마음을 훔쳐버린거였지."

"...굉장하네요! 종족을 뛰어넘은 사랑이군요?"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미미가 반응한다.
용의 입장에서는 사랑이어도, 당나귀한텐 생존본능에 의한 필사적인 연기였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얘기하진 않았다.
나중에는 정말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도 하고.

그후 영주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가던 중 만난, 자의식 과잉의 숲의 사나이 로빈훗의 등장과 괴물과 힘을 합쳐 그들을 때려잡는 공주의 활극에 미미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러브 스토리.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얌전빼고 번거롭기만 한 공주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공주의 모습에 놀라는 괴물.
흉측하게 생겼고 툴툴대지만 자신을 구해주고 배려해주는 괴물에게 끌리는 공주.
우스꽝스럽지만 유쾌하고 두근두근한 관계를 다룬 이야기가 이어지자 미미가 신기한 듯 중얼거린다.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공주님이라니..."

"이상해?"

"이상해요."

그런가. 하긴 동화에서 공주의 운명의 상대는 백마탄 왕자님이니까.
꾸러기 수비대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뺨에 한손을 얹은 미미는 곤란한듯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지었다.

"...이런 이야기도 싫진 않아요."

"후후, 그거 다행이네."

발갛게 뺨이 달아오른 미미를 보곤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여행이 계속되면서 공주와 괴물은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었어.
하지만 괴물은 자신의 늪을 되찾기 그녀를 구했을 뿐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되도록이면 공주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려고 했지"

"분명 괴물씨는 부끄러워서 그랬던걸거에요."

"아하하, 분명 그랬겠지.
괴물이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든 말든, 여행을 함께 하면서 수다쟁이 당나귀의 재치 속에서 괴물과 공주는 조금씩 가까워졌어.
하지만 이야기는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어.
무사히 공주를 구했지만 공주에게는 저주가 걸려있었거든."

"아, 그러고보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저주에 걸린 공주님'이라고 하셨죠?
대체 어떤 저주였죠?"

"해가 지면 「괴물」이 되는 저주."

"네에!?"

"그리고 이게 오해의 시발점이 되지.
여행의 끝이 다가오던 어느날 밤, 공주는 괴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수다쟁이 당나귀에게 들켜버려.
자신에게 걸린 저주를 알아챈 당나귀에게 공주는 체념한채 중얼거리지.
「끔찍한 괴물을 누가 좋아하겠니.」라고...
어여쁜 인간일때의 모습이 아닌, 흉칙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괴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거지.
그리고...그때 마침, 공주에게 줄 꽃을 손에 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공주가 지내는 동굴로 다가가던 괴물은, 공주의 그 말을 듣곤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만거야."

"그런..."

"결국 괴물은 공주에게 꽃을 건네주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렸지.
그리고 날이 밝고, 맞이하러 온 영주에게 공주를 보내줄때까지도 괴물은 공주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어.
결국 공주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지 않은채, 괴물은 당나귀와 함께 자신의 보금자리인 늪지대로 돌아가버렸지."

"그럴수가..."

이야기에 몰입했는지 안타깝다는듯 중얼거리는 미미에게 질문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영주와 함께 돌아간 공주는 과연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요?"

"행복..."

"공주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간단해.
진실한 사랑이 담긴 키스를 받는 것이지.
하지만, 과연 영주는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영주가 공주를 신부로 고른건 마법의 거울을 통해서 공주의 빼어난 미모를 알았기 때문이지.
거기다 공주를 구하는 것조차 괴물에게 떠맡겼던 영주가, 밤이면 괴물로 변하는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아뇨."

"그렇지. 그리고 사실 영주가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던건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서였거든."

"그런건 너무해요!"

울컥해선 격하게 반응하는 미미를 달래며 말을 이었다.

"앞에서 말했잖아. 사악한 영주라고.
동화나라 주민들을 내쫓은 행동에서부터 그런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지?"

"......"

미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가 영주와 함께 떠난 후, 괴물이 당나귀와 함께 늪지대로 돌아오는 부분에서부터 이야기를 재개한다.
수다쟁이 당나귀의 설득과 괴물의 자괴감 섞인 격한 반응.
그리고 마침내 풀리는 오해.

"결국 수다쟁이 당나귀의 끈질긴 설득으로 괴물은 공주에 대한 오해를 풀고, 다시 한번 공주를 만나기 위해서 영주가 있는 성으로 떠나지."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는 미미에게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풀어낸다.

"괴물이 결혼식장에 도착했을 땐, 결혼식이 끝나갈 쯤이었어.
결혼식의 거의 모든 절차가 끝나고 이제 신랑과 신부의 키스씬만 남은 때였지.
당연하지만 괴물의 난입에 결혼식장은 엉망진창이 돼버려.
소란스러움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혼식장 창문 너머에선 천천히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어.
그리고...마침내 해가 산의 뒤로 그 몸을 숨겼을 때, 괴물과 영주와 참석객들의 눈앞에서 어여쁜 공주는 저주에 걸린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되돌아온거야."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조마조마해하면서 미미가 나를 재촉한다.
뒷이야기가 어지간히도 궁금한지 들뜬 미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 입을 연다.

"그러니까..."

"네!"

코가 닿을듯 접근한 미미의 숨결이 얼굴에 엷게 퍼진다.

"...너무 가깝지 않아?"

살짝 젖은 분홍 머리카락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샴푸향이 비강을 간질인다.
앞으로 숙인 몸을 따라 살짝 벌어진 목욕 가운 틈으로 보이는 새하얀 피부가 눈부시다.

이야기로 서로간의 거리감을 줄이려는 목적은 있었지만, 이런 물리적인 의미는 아니었어요.
내 말에 눈을 깜박이던 미미는, 이윽고 달라붙을 듯 가까워진 거리를 깨닫곤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죄, 죄송해요! 이야기에 너무 정신이 팔려있다 보니..."

"아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거기까지 이야기에 몰입해줬다니 나로선 기쁘니까.
그리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접해주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안심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해 있었잖아.
잠도 제대로 못 이룰 것 같아 보였는데, 지금 모습을 보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될 것 같아서.
이제 긴장은 어느정도 풀렸지?"

"...네."

농담처럼 건네는 말에 미미는 쑥쓰러워하면서도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서로간의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좋아. 그럼 이야기를 마저 할까.
괴물로 변해버린 공주의 모습을 지켜본 영주는 비명을 지르며 사병들에게 공주를 잡으라고 시키곤 외쳤어.
결혼식만 올리면 왕국은 자신의 것이 될테고, 그 뒤엔 괴물이 된 공주는 영원히 가둬놓을거라고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다면 지금까지 왈가닥 같은 행실을 보여준 공주가 아니겠지.
숲의 사나이들을 상대하던 때처럼, 공주는 괴물과 힘을 합쳐 사병들을 쓰러뜨렸어.
그리고 최후까지 발악하던 영주는, 수다쟁이 당나귀가 데려온 용에게 먹혀 최후를 맞이하게 돼."

"용이라면 공주가 갇혀있던 성에 있던 그...?
당나귀가 해냈군요!"

"그랬지. 정말이지 대단한 당나귀라니까.
영주가 쓰러진 후, 공주의 저주를 알게된 괴물은 공주와 사랑의 입맞춤을 해.
그순간 공주님은 눈부신 빛무리와 함께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지."

"아, 드디어 공주님의 저주가 풀리는거로군요."

눈을 빛내는 미미의 모습에 뒷 이야기를 들은 후의 반응을 기대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공주가 다시금 지상에 발을 내딛었을때...공주는 「괴물」의 모습이었어."

"에에에에에!?"

눈이 동그래진 미미가 경악성을 울렸다.

"에? 엣? 어째서인거죠? 공주님의 저주는 사랑이 담긴 키스로 풀리는게 아니었던가요?"

"저주는 풀렸겠지. 그런 설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마, 공주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괴물과 함께 하길 원했기에 자신도 괴물의 모습이 된거겠지."

"그런..."

"그리고 그 둘은 괴물의 보금자리인 늪지대로 돌아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야기를 끝맺자, 아연해하던 미미는 잠시후 헛웃음을 내쉬며 침대에 풀썩 누웠다.

"아하하...뭔가 정신없으면서도 굉장히 유쾌한 이야기였어요."

"그랬다니 다행이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야기로서는 만족스러웠던걸까나?"

"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였어요.
로우란씨는 정말 독특한 이야기를 알고 계시는군요?"

그야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었으니까.
시대적으론 여기보다 몇년쯤 뒤에 만들어진 작품이니까 미미가 알 리는 없겠지만.

"하핫~! 그렇게 평가해주니까 나도 이야기 한 보람이 있는걸?
그럼 이 다음은 어디보자...2부 「겁나 먼 왕국(Far Far Away)」은 어때?"

"풋!? 뭐에요 그 왕국 이름은!?"

희안한 네이밍 센스를 들은 미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불을 꽉 부여잡은채 한참을 키득이던 미미가 살짝 고인 눈물을 훔치고 진정하길 기다려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잠시 쉬었다가 곧 다음 이야기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내일 해야할 일도 있으니까 다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해줄께."

"아..."

「내일」이라는 단어에 미미의 귀가 떨린다.

"그..."

"응? 혹시 밤샘하며 듣고싶어?"

"...아뇨."

뭔가 말하려던 미미는 이내 고개를 젓곤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다음번에도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차분히 웃는 미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마주웃었다.

"아아, 그러게.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

"......"

침묵이 맴돈다.
침대에 몸을 맡기고 미미는 이불을 끌어올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로우란씨."

"그래. 잘자렴 미미야."

서로에게 건넨 인사를 마지막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공주가 나오는 이야기 책을 보면 말야, 대개는 백마탄 왕자님 같은 사람이 나오잖아?"

"그렇죠."

"...여긴 백마로 오기엔 너무 험난하지 않아?"

"...동감이에요."

숲. 숲너머 늪지대. 늪지대 너머 가시덤불.
이건 도저히 백마 같은걸 타고 올만큼 만만한 지형이 아니다.
평탄한 숲길을 조금 벗어나니 나타나는 울퉁불퉁하고 괴악한 지형에 기가 질릴 지경이다.

"여기까지 험난하면 어째서 백년이 지나도록 공주를 구할 수 없었는지 반대로 납득이 간다고 할까...대체 뭐야 이 지형은?
무슨 「마법의 성」이라도 되는건가?"

"마녀의 저주에 걸린 공주님이 잠들어 있으니까...후우...마법의 성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노래 제목을 이야기한거지만 당연하달까 미미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다.
가시덤불 지대를 지나서 등장한 구릉을 오르던 미미는, 구릉 마루에 도착하자 기운이 빠진듯 바닥에 주저앉아 지친 숨을 골랐다.
험난한 지형들을 피해가거나 돌파하거나를 반복하면서 지쳐버린 미미를 위해서 여기서 잠시 멈춰서 휴식을 갖기로 했다.


선선한 바람에 점차 안색이 편안해지는 미미를 곁눈질로 확인하곤 성까지의 거리를 확인했다.
비교적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이제 성은 저만치 눈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까지 가까이 있었다.
덩굴로 뒤덮힌 성의 주변에는 널찍이 파인 해자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식물들이 다채로운 색상으로 저마다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여유롭게 풍경을 만끽하고 있자니 마치 소풍 온 기분이 든다.

"좋은 경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쥬켄도 데려올걸 그랬나..."

"쥬켄은 누구죠?"

"내 파트너. 놀러나가고 싶다는걸 애써 말리고 온건데 이 풍경을 보니 어째 혼자 온게 미안해져서 말야."

"사이가 좋은가보네요."

"그럴까? 장난기가 많아서 곤란할때도 있지만 동료들 중에선 확실히 그 녀석이 제일 낫지.
그리고 생각보다 놀려 먹는 재미도..."

미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령궁을 벗어날 때 반울상이 되어 쫓아오던 쥬켄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침묵한 내가 이상한듯 미미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미미야."

"네?"

"칼을 휘두르며 쫓아오는 여자애를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대체 무슨 짓을 한거에요 로우란씨?"

「기념품이라도 챙겨서 가져다 주면 화를 풀려나...」따윌 중얼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나를 미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바람을 쐬며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하곤 미미의 모습을 살폈다.
이제 어느정도 체력은 회복되었을텐데, 어쩐지 미미는 초조한 느낌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의아하던차에 미미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응? 이제 슬슬 출발할까?"

"아뇨, 그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는 미미의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자니, 미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잠시만 숲에 다녀올께요."

"응? ...아아, 난 좀 더 쉬고 있을께.
너무 멀리 가진 말구."

"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미미는 몸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마을을 떠난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다.
슬슬 동료들에게 연락을 취하려는 거려나?
이윽고 미미의 모습이 나무 사이로 숨어버리자, 나도 문득 떠오른게 있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살피다 들꽃이 무리지어 핀 곳으로 다가가 허리춤에 찬 두루주머니 끈을 풀어 그 중 몇 송이를 조심스레 담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성에 도착할 수 있는데, 어쩌면 그 전에 꾸러기 수비대와 싸우는 처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로서는 좀 더 이야기 나라에 익숙해지기 전까진 되도록이면 꾸러기 수비대와 직접 대결하는건 피하고 싶은데...

뭔가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차였다.

"꺄아악!?"

"!?"

미미가 사라진 방향에서 들려온 비명소리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뛰었다.
들짐승의 습격인가!?
설마 농담삼아 건넸던 말이 현실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검을 뽑아들며 수풀을 뛰어넘었다.

"미미야!"

"엣...?"

"아..." 

 

 


전방의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쓰러지듯 주저앉은 미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파이(π)자 모양으로 벌어진 다리 한쪽 발목에 걸린 순백의 천조각도.

...통신이 목적이 아니었던거구나.

수풀을 뛰어넘자 들어온 예상 외의 광경에 굳어버린채, 눈을 동그랗게 뜬 미미를 마주본다.

"아, 아아..."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 미미의 눈이 점점 크게 뜨이며 입이 벌어진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두번째 비명이 구릉 전체를 울렸다.




"최악...최악이에요..."

나무를 향해 쭈그리고 앉아선 중얼거리는 미미의 등은 애수에 젖어 있었다.

"우우...어째서 이런 일에..."

"미안. 혹시나 들짐승에 습격받은건 아닌지 놀라서 뛰어온거였는데..."

"...걱정해준건 고마워요. 그치만...그치만...!"

몸을 휙 돌려선 울상을 지은채 날 쳐다보는 미미의 태도에 곤란해져선 위로랍시고 농담을 건넸다.

"너무 신경쓰지마.
치마에 가려서 빠듯이 세이프였으니까."

"어딜 보고 있었던 거에요!?"

장난스레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운 내게, 결국 미미의 화가 폭발했다.

얌전한 사람이 화나면 무섭다고, 분노 모드로 따지고 드는 미미의 기세에 밀려서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은 몸을 숙여 방금전 일을 성심성의껏 사과하고 나서야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여자애한테 그런 성희롱 발언은 안돼요! 알겠어요?"

"아아...이번 일로 절실히 깨달았어..."

한참동안 이어진 타박이 겨우 끝나고, 녹초가 되어버린 내 옆에서 조심스레 말을 건네오는 이가 있었다.

- 저기, 이제 슬슬 이야기 해도 괜찮나요?

"응? 그러고보니 넌 누구야?"

방금전 미미가 비명을 지르게 만든 원인이 된, 공중에 떠있는 둥근 빛의 구슬에게 말을 걸었다.
생긴 모양새가 마치 사령 몬스터가 도망칠 때 변신하는 빛의 구슬 같다.
아마 그 탓에 미미가 이 녀석을 사령몬스터로 착각해서 비명을 질렀던거겠지.

내 물음에 구슬에서 빛이 점점 사그라들더니 그 속에서 날개가 달린 조그마한 몸집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날개달린 작은 여인을 본 미미가 놀라며 외쳤다.

"설마 요정님!?"

- 그렇답니다. 혹시 여러분은 성으로 향하시는 중이신가요?

"네, 요정님."

미미가 눈을 반짝이며 답한다.
방금전까진 무서워 했으면서 요정이란걸 아니까 금새 표정이 바뀌는구나.
미미의 대답에 요정이 생긋 웃었다.

- 그러시군요. 전 사악한 마녀를 쓰러뜨리고 공주를 구할 용사님께 드릴 검을 보관하는 요정이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용기에 걸맞는 지혜를 겸비하셨다면, 이 검을 건네 드릴테니 부디 마녀를 무찌르고 잠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주세요.

허어...검이라?
여느 이야기에서 많이 들어본 전개인데, 100년이나 되도록 보관하고 있는 검이라면 녹슬진 않았으려나 몰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괜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얼떨떨한 나와 달리 미미는 요정을 보게되자 활기가 도는 모양새다.

- 그럼 여러분의 지혜를 시험하겠습니다.
아침엔 네발, 점심엔 두발, 저녁엔 세발로 걷는 것은 무엇일까요?

뭐야, 스핑크스가 냈던 수수께끼잖아?
그럼 간단하네.

"정답은 사,"

"괴물이요."

"......"
- ......

"응?"

엉뚱한 답변에 침묵한 나와 요정의 반응에 미미가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곤란해하는 요정의 모습에 은근슬쩍 흥정을 걸어본다.

"...재시도는 안돼?"

생긋.

요정이 곱게 미소지었다.

- 안돼요.

팟-

"앗!? 요정님?"

홀연히 자취를 감춘 요정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미미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갈까."

"저...설마 답이 아니었던건가요?"

"...아마도."

...너 그거 진심으로 답한거였냐.
날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한건줄 알았는데.

"뭐어...난 내 검이 있으니 상관없어.
거기다 어쩌면 우리보다 저 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공주를 구하러 올 백마탄 왕자님이라거나 말야.
왕자가 손에 넣어야 할 검을 우리가 획득하면, 꾸러기 수비대인 미미로서는 좋지 않은 전개이기도 할테고.
허리춤에 찬 다크 사벨을 툭툭 쳐보이곤 다시 성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달음박질로 들판을 가로 지르다 등뒤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힘껏 옆으로 뛰어오른다.
방금전까지 서있던 대지를 거대한 화염 줄기가 휩쓸고 지나간다.

- 촐랑촐랑 잘도 피하는구나!!!

구릉의 작은 숲에서 요정과 만난걸 제외하면 성까지 가는동안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마녀」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다.

성으로 이어진 해자를 막 건너려던 우리 앞에 나타나, 묻지도 않고 순식간에 거대한 흑룡으로 변신한 마녀의 모습에 나와 미미는 뒤돌아보지 않고 힘껏 도망쳤다.

흑룡이 내뿜은 불길을 피해 울상을 지으며 달아나는 미미를 불렀다.

"미미야!"

"네?"

숨가쁘게 달리다 절박한 표정으로 내쪽을 보는 미미에게 제안해봤다.

"수다쟁이 당나귀가 말솜씨로 붉은 용을 꼬신것처럼 너도 저 마녀를 꼬셔보지 않을래?"

"무리한 얘기 하지 말아요! 전 '여자'라구요!"

"난 '그런 쪽'도 관대하니까 괜찮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꺄악~!?"

"와하하하하! 튀어~!"

"웃을때가 아니잖아요! 꺄아아~~~!"

"이런! 조심하라구? 엇차~!"

"아앗~!?"

지친 탓인지 뛰다가 발을 헛디뎌 균형을 잃고 쓰러지던 미미를 안아든채로 곧장 뛰었다.

"아하하! 만나려던 공주는 못 만나고 공주님 안기나 하면서 도망치게 될줄은 몰랐어!"

"꺅!? 웃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보세욧~!"

불길을 피해 한참을 달아나던 중, 내 목에 팔을 두른채 안겨있던 미미가 다급히 외쳤다.

"로우란씨! 달아나지만 말고 어떻게 좀 해봐요!
허리의 그 검은 장식이에요!?"

"바라는대로."

적당히 성에서 거리도 떨어졌겠다, 새로운 방법을 시험해 보기엔 안성맞춤인 조건이네.
달아나다 멈춰서선 미미를 내려놓고 용을 마주봤다.

"어이 마녀!"

- 뭐냐?

"이거 아나?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걸."

"그러니까 고양이는 당신이잖아요!"

"어쨌거나~!"

미미의 딴죽을 넘기곤 용을 향해 「콩」을 던진다.
코앞까지 날아온 콩을 보며 하찮다는듯 용이 크게 입을 벌린 순간, 하늘로 뻗은채 펼친 손바닥을 꽉 쥐며 외쳤다.

"「커져라!」"

쩌어억---!

- !?

손톱만한 콩에서 터지듯 쏟아져나온 거대한 덩굴들이 일제히 용을 에워쌌다.
순식간에 덩굴에 전신을 구속당한 채 대지에 추락한 용의 모습을 보면서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는건 이럴때 쓰는거지.
콩 한톨이라도 방심하면 안된다구.
어때? 이걸로 한건 해결이지?"

"......"

넌지시 동의를 구하자 입을 벌린채 서있던 미미가 손가락으로 덩굴를 가리키며 물었다.

"방금 그건 뭐였죠?"

"NINJA 인법 「거대화」야."

"...그 NINJA 컨셉은 아직도 하는거였나요?"

"응?"

"아, 아뇨. 아무것도..."

"아무튼, 내 능력으로 잭과 콩나무 이야기에서 나오는 「요술콩」의 힘을 구현한거야.
잭과 콩나무 이야기는 알고 있지? 하늘까지 자라나는 거대한 콩나무의 이야기 말야.
그 덕분에 저 마녀도 옴짝달싹 못하고 있잖아?"

"굉장하네요..."

감탄하는 미미에게 마저 설명을 해주는 사이, 덩굴 안에서 벗어나려고 한참을 바둥거리던 용은, 결국 녹초가 되어버린 마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두고보자!」라는 외침과 함께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도망가는 마녀를 뒤로하고, 우리는 무사히 성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공주가 지낼 방이라기엔 조금 누추하네."

홀을 지나 계단을 올라 탑 꼭대기의 외진 방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공주를 발견했다.
물레바늘에 찔렸던 방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잠자는 모습을 보니까 예쁘긴 확실히 예쁘네.
구하러 온 왕자가 첫눈에 반할만 하달까.

"...이제 어떡하실거죠?"

물끄러미 공주를 쳐다보는 내게 미미가 조심스레 물었다.

"깨울건가요?"

"아니. 그런건 공주를 구하러 올 왕자가 하겠지.
요정의 수수께끼를 풀고 전설의 검을 손에 넣고, 공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왕자.
서사적인 전개로는 이게 제일이잖아?"

"하지만 무찔러야 할 마녀는 로우란씨가 쓰러뜨렸잖아요.
굳이 검이 필요한가요?"

"어..."


요정의 수수께끼를 맞춘 왕자님은 요정이 보관하고 있던 전설의 검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검은 한번 휘두르면 단번에 용의 목조차 베어넘길 수 있을 만큼 굉장한 검이었답니다.

- 용기와 지혜를 갖춘 당신이라면 분명 이 검으로 공주님을 구해드릴 수 있을거에요.

요정의 말에 용기를 얻은 왕자님은 성까지 쉬지않고 말을 몰았어요.
한시라도 빨리 사악한 마녀를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하지만 성의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요정의 문제를 맞추지 못한 한 여행자가 귀찮게 덤벼오는 마녀를 혼쭐을 내서 쫓아버렸다지 뭐에요.

참 잘됐죠?



"......"

"......"

참 서사적인 전개로군요.

그런 의미를 담은 미미의 시선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곤란하게 됐네."

"하아..."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내 모습에 미미가 나직히 한숨을 내쉰다.

백년간 요정이 보관해오던 전설의 검. 그리고 그 검에 목이 달아나는 마녀.
그런데 마녀가 이미 달아나버린 마당에야, 전설의 검은 그냥 맥거핀이 되어버렸단 말이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퐁- 하고 손바닥을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이건 나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일지도 몰라."

"...무슨 뜻이죠?"

움찔하며 내 거동을 살피는 미미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거 아냐. 왕자가 오기 전에 끝마쳐 둘 일이 있거든.
무방비 상태의 공주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공주는 일어나지 않을테고..."

"무슨..."

"쓰러뜨릴 마녀가 사라졌다. 왕자가 넘어설 시련이자, 공주에 대한 진실된 사랑을 증명할 수단도 없어졌지.
그렇다면 다른 시련을 준비해주면 되겠지?
더럽혀진 공주를 보더라도 왕자가 변함없는 사랑을 맹세한다면, 그의 사랑의 진실성도 한층 더 빛날테지."

"아, 안돼요! 설마 그, 그런짓을...!"

"그래, 그 설마다."

히죽 웃으며 매직펜을 꺼내들어 보였다.
양팔을 휘두르며 내게 덤벼들려던 미미는 눈앞의 매직펜을 보곤 눈이 점이 되었다.

"...어? 엣?"

"뭐야, 왜 그런 얼굴인데?"

"아, 아니에요! 나, 나도 차암 괜한 생각을..."

미미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는듯 몸을 돌렸다.
그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곤 펜 뚜껑을 열었다.

"아무튼, 우스꽝스런 얼굴이 된 공주에게 진지하게 키스할 왕자는 보통 없겠지만."

"엣?"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려는 듯 손바닥으로 양볼을 감싸쥐고 있던 미미가 내말에 화들짝 놀라며 돌아본다.

"자, 그럼 별나라에서 온 공주님처럼 만들어줄테니 각오,"

"여, 역시 안돼에에에에!"

"뚫-!?"

옆구리에 전력으로 돌진해온 미미에게 부딪혀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고고...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죄, 죄송해요!"

내 항의에 무심코 사과하던 미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흔든다.

"아, 아니지! 여, 역시 안돼요 그런짓은!
공주님의 얼굴에 낙서는...!"

"과연...그럼 내기 할래?"

"네?"




"단장(斷腸)과 관련된 동물은?"

"어...오리?"

"뿝뿌~! 답은 원숭이다.
자식을 잃은 어미 원숭이가 슬픔으로 창자가 끊어져 죽은 것에서 유래한 고사야."


"박쥐, 고래, 토끼, 양, 닭.
이 중에 포유류(哺乳類)가 아닌 것은?"

"포유류...?"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

"서, 성희롱이에요!"

성희롱은 무슨.
정답을 재촉하는 내게 미미가 얼굴이 빨개진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고래요."

"땡~. 정답은 닭."

"거짓말!? 키키는 그렇게나 가슴이 큰데..."

"너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성희롱 발언 하지마!?"

대체 어쩌다가 이런 천연 성희롱 유감계 소녀와 이런 일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면...내기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공주의 얼굴에 낙서하려는 나와 그런 날 말리려는 미미 사이의 실랑이는 서로의 소지품을 건 내기로 이어졌다.
내가 내는 문제를 맞추면 미미에게 나의 소지품을 한개씩 주는거고, 틀리면 미미가 나에게 소지품을 주는 방식이다.
분명 처음엔 내 매직펜 하나만 걸고 세가지 문제 정도만 낼 셈이었는데, 어째 미미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했던 대화를 떠올려 봤다.



"로우란씨. 혹시 방금전 마녀에게 사용한 요술콩 아직 남아 있나요?"

"그야 물론이지. 원래 잭과 콩나무의 요술콩은 세톨이였으니까 말야."

"그렇단 말이죠..."

"혹시 갖고 싶어?"

내 물음에 미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기 조건에 요술콩도 포함시키지 뭐."

"저기..."

"응?"

"그것도 걸고 내기해요."

미미가 손가락으로 내 허리춤에 찬 다크사벨을 가리켰다.
슬슬 얘가 무슨 속셈을 하고 있는지 깨닫곤 질린 얼굴이 되어 미미를 쳐다봤다.

"설마 내 밑천을 다 털어갈 셈이야?"

"이기시면 되잖아요. 대신 저도 지면 제 물건을 드릴테니까요."

"...진심이냐?"

"물론이죠. 혹시 겁나세요?"

"천만에!"



미미의 빤히 보이는 도발에 타서 내기에 동의했다.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 내건 도전을 받지 않는다는건 이야기의 극적인 전개라는 측면에서 봐도 도리가 아니지.
만약 내가 진다면 순전히 맨몸뚱이로 꾸러기 수비대를 상대해야 겠지만...

하지만 날 무장해제 시키려는 미미의 시도는 좋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성과가 의욕을 따라가지 못했다.
맛보기용으로 십이지에 관한 문제를 몇개를 내봤지만 맞춘게 별로 없었다고 할까.

덕분에 지금까지 내가 내놓은건 망토와 요술콩 한톨이다.

왜 한톨밖에 안 뺏겼냐고 한다면 혹시나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서로 다른 주머니에 한톨씩 넣어두고 있었으니까다.
미미에게 치사하다는 소릴 들었지만, 신발을 한짝씩 나눠서 건네주던 미미가 할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전까지만해도 꾸준히 쌓아올린 승리의 영광을 만끽하는건 좋았지만, 지금와서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여, 여기요..."

"...아니. 괜찮으니 그냥 그건 네 옆에 놔둬."

머뭇거리는 태도로 미미가 내민 양말을 정중히 사양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익어버린 꼴을 보면서까지 양말을 받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양말을 숨기며 안도하는 미미를 보면 확실히 잘한 선택인듯 싶다.

머리띠와 신발,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 조끼, 노란색 손가방, 그리고 양말.

방금전까지의 내기의 결과로 미미가 빼앗긴 물품들이다.

상의를 맵시있게 꾸미던 조끼를 벗고 리본을 풀어낸 미미의 블라우스 차림에 조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맨발을 드러낸채 하얀 블라우스와 에메랄드 빛의 짧은 스커트만 입은 미미의 복장을 보노라면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하고 걱정이 든다.
반 울상이 된 미미에게 슬며시 물었다.

"여기까지 하는게 어떨까?
내걸 탐내는건 알겠지만 너 지금 분명 무리하고 있는거라구."

"...무리하고 있지 않아요."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 미미의 태도에 나직히 한숨을 내쉬곤 다음 문제를 냈다.

"낙타라는 생물이 있어.
혹이 하나인 것과 혹이 두개인 것이 있고 각각 단봉낙타와 쌍봉낙타로 불려.
북아프리카랑 인도와 호주.
그리고 중국과 중앙 아시아.
이 중에 단봉낙타가 살고 있는 곳은 어딜까?"

"......"

힌트랍시고 일부러 순서대로 끊어서 읽어준건데 유감이지만 초조함에 사로잡힌 미미는 내 의도를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정답은 북아프리카, 인도, 호주."

"...훌쩍..."

곤란한듯 머리를 매만지는 내 앞에서 미미는 코를 훌쩍이며 일어섰다.
왜 그러나 싶다가 몸을 숙여 치마를 걷어붙이려는 미미의 태도에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야야야!? 그만둬!
너 지금 대체 뭘 하려는거야!?"

"그, 그치만 이제 남은건..."

"그렇다고 대뜸 그런 민망한 행동 하지마!
거기다 옷대신 그 컴팩트를 주면 해결되는 문제잖아?"

아까전 손가방에서 꺼내두었던, 양머리가 장식된 분홍색 컴팩트를 가리킨다.

"이건 안되요!"

미미가 당황해서 고개를 내젓는게 답답해서 말했다.

"저기 말야...여성한테 화장도구가 중요한건 알지만, 그것도 상황을 따지며 챙겨야 하는 거잖아?"

"...에?"

"난 화장도구엔 관심없고, 여자애 소지품을 함부로 만지진 않을테니까 그렇게 기겁하지마.
딱히 안을 열어 보거나 하지도 않을테니까."

"...여기요."

미미가 주저하면서 건넨 컴팩트를 건네 받았다.

"후우...정말이지, 진작 이랬음 됐잖아. 사람 놀라게 만들지 말아."

"...놀랐나요?"

"그야 당연하지.
눈앞에서 그런 상황이되면 누구라도 놀라.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가 내기를 빌미로 불쾌한 일을 강요하는 꼴이 되버리잖아.
난 그런 취미가 아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하여간 이젠 너도 더는 걸게 없어보이는데 적당히 포기하라구."

"......"

내 말에 미미는 잠시 고개를 숙여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번만 더 해봐요."

"이봐..."

"어서요."

미미의 재촉에 신음이 새었다.
뭔가 역전극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건가?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무슨 꿍꿍이야?

당황스러우면서도 문제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세상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포유류는...너 뭐하는거야?"

"그냥,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것 같아서요."

...옷매무새가 흐트러지면 단추를 풀어야 하는겁니까...?
버튼이 풀린 블라우스가 살짝 벌어져 있습니다만?

"죄송해요. 문제가 뭐였죠?"

"그러니까 세상에서 제일 수가 많은 포유류는 뭐냐고 물었,"

딸깍-

야!? 너 방금 어디 단추 풀었어!?

금속음에 움칠하곤 말을 멈추자 미미가 양손을 가슴에 모은채 애처로운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로우란씨..."

"왜, 왜그래?"

"보시다시피 전 이제 가진 것도 별로 없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지는 제 모습이 한심해서...적어도 한번만이라도 더 이기고 싶어서 포기할 수 없었던거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약 이번 문제마저 틀린다면...전 분명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버리겠죠..."

아. 그래. 양털을 죄다 깎아버린 양처럼 볼품없이...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거람?

안타까운듯 중얼거리며 옷깃을 잡는 미미의 손길에 단추를 풀어헤친 블라우스가 조금씩 벌어진다.
그 광경에 무심코 얼굴이 붉어져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날 추적하듯 미미가 묻는다.

"만약 제가 진다면...전 로우란씨에게 무엇을 드려야 할까요?"

그런걸 내게 물으면 어떡해!?
블라우스냐 스커트냐 아니면 속옷이냐.
셋중 어느것도 고를 수 없는 지독한 질문이다.

"저기...아직 문제를 틀린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그런 부끄러운 질문은 하지마.
조금만 더 고민해보면 분명 맞출수 있을테니까..."

"저도 이렇게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하다못해 힌트라도 있다면..."

"에? 힌트?"

흐트러진 옷차림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은채 울먹이는 미미의 모습에 당황해서 말이 튀어나왔다.

"어, 그러니까...열두간지에 해당하는 동물인데...알겠어?"

"......"

"......"

사락-

"첫번째! 십이지의 첫번째 동물 말야!
작고 귀여운데다 고양이랑 관련있는 그 동물!"

"아, 고마워요. 정답은 쥐죠?"

"......"

"로우란씨?"

"...정답입니다."

"와아~"

만세를 부르곤 손을 내민 미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떨리는 손으로 요술콩이 담긴 주머니를 건냈다.
방금전 울먹이는 표정은 오간데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주머니를 받아드는 미미의 모습에 딴죽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방금 일부러 그런거지?"

"네? 뭐가 말인가요?"

통하지도 않을 딴청 피우지마.
잔뜩 얼굴을 붉힌 주제에 터무니 없는 수단을 써오기는...

"...뭐, 됐어.
아무튼 이걸로 내기는 끝,"

"아뇨, 한번 더해요."

"넌 날 대체 얼마만큼 벗겨먹을 셈이야!?"

"로우란씨가 할 말이에요!?"

블라우스와 치마뿐인 차림을 보이면서 미미가 항의했다.
미미의 움직임을 따라 흐트러지는 블라우스가 묘하게 선정적이라 생각하던 차에 스르륵하고 흘러내리는 스커트를 보곤 기겁해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나는 내 모습에 미미도 다급히 옷을 여몄다.
블라우스와 흘러내린 치맛자락을 부여잡은채 비난의 눈초리를 보내는 미미의 태도에 억울해하며 무릎을 꿇었다.

"제길...이럴줄 알았으면 방금전에 져주는게 아니었어..."

"로우란씨는 신사네요."

"어째서일까...칭찬을 들었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아..."

블라우스 앞섶을 가린채 한손으론 스커트 단추를 여미는 미미를 보며 이마를 싸매다가 결국 지친 얼굴로 제안했다.

"...벌칙을 바꾸자."

"...바라던 바에요."

역시 부끄럽긴 했나보다.
옷을 여미고 얌전히 자리에 앉는 미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미가 받을 벌칙은 얼굴에 낙서하는 걸로 바꿨다.

다음 문제는 뭘 낼까 고민하고 있는데 미미가 내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보고 물었다.

"로우란씨. 요술콩은 두톨이 전부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응? 아, 이건 요술콩이 아냐.
그냥 귀향길에 가져갈 선물로 챙겨둔거야.
혹시나 해서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걸 내기에 걸진 않아."

내 말에 미미가 의심반 호기심반의 눈으로 주머니를 바라봤다.

"뭐가 들었기에 그런거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물건인지 보여줄 수 있으세요?"

"안될건 없지만...
어쩐지 기대하는 것 같아 미안한데 보고나서 실망하진 마."

조심스레 주머니의 끈을 풀어 미미에게 건네줬다.
건네받은 미미가 꾸러미 안을 살펴보곤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꽃?"

의아한 듯한 미미의 시선에 볼을 긁적였다.

"아까 구릉에서 쉬면서 캔거야.
말했었지? 파트너가 있다고.
나랑 그 녀석이 지내는 곳은 어두칙칙한 곳이라서 그런곳에 계속 있다보면 분명 울적해 질테니까.
삭막한 곳이긴 하지만 꽃이라도 피어있다면 그나마 분위기가 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말야.
그녀석, 분명 꽃 같은건 처음 볼테고."

"......"

물끄러미 주머니 안을 내려다보던 미미가 끈을 홀치곤 도로 주머니를 내밀었다.

"로우란씨의 말대로 이건 내기에 걸만한 물건이 아니네요."

"알아주니 기뻐."

싱긋 웃는 날 따라 미미도 작게 웃었다.

"...로우란씨는 다정한 분이네요."

"아하하 쑥스러운 말은 하지마~"

옷차림만 단정했다면 좀 더 좋은 분위기였을거라 생각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다음 문제 간다.
다음 네 한자성어와 관련있는 동물을 순서대로 전부 나열하시오.
오비이락(烏飛梨落) 계명구도(鷄鳴狗盜) 호가호위(狐假虎威) 수구초심(首丘初心)"

"엣? 자, 잠깐만요!
갑자기 너무 어려워 졌잖아요?
방금까지만해도 훈훈한 분위기였는데!"

"그건 그거, 이건 이거."

"치사해요!"

"누가 할 소리야?
치사하게 야한 모습으로 사람을 홀리려고 한 대가야."

"야, 야하다고 하지 말아요!"

미미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조그맣게 물었다.

"...힌트는 없어요?"

"줄 것 같아?"

"......"

스륵-

"동물은 다섯 종류인데 한마리가 두번 등장하니까, 총 여섯마리의 동물을 순서대로 답하면 돼.
더이상 힌트는 없으니까 적당히 단추 잠궈."

말없이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는 미미를 제지하며 말했다.

"그러니까...까마귀, 닭, 개, 여우, 호랑이, 그리고...개?"

"아깝네. 까마귀, 닭, 개, 여우, 호랑이, 여우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닭 울음소리를 잘내는 사람과 개 흉내를 내는 도둑.」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
「여우는 죽을때 구릉을 향해 머리를 둔다.」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지.

그럼 설명은 이만 하고...드디어 기다리던 벌칙 타임이로구나?"

"으윽..."

앓는 소리를 흘리는 미미의 앞에서 히죽 웃어보이곤 다시 한번 매직펜 뚜껑을 열었다.

"자아 그럼~ 어떤 낙서를 해볼까?"

-! -!

"응?"

"!?"

매직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놀리듯 말을 걸던 차에, 바닥에 놓아둔 미미의 컴팩트에서 신호음이 들려왔다.
동료에게서 온 연락인가?
갑작스런 신호음에 미미의 얼굴이 굳었다.
일단은 모른척 미미에게 건네주려고 컴팩트를 집어들자, 컴팩트가 열리더니 멋대로 통신이 연결되어 버렸다. ...에엑!?

내심 당황한 날 무시하고 컴팩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미야! 성까지 가는게 좀 늦어질 것 같아!
갑자기 나타난 검은 용에게 습격당해서 지금 열심히 달아나는 중이라, 으앗~!?」
- 쿠오오---!!!
「도망쳐!」

이 목소리는 똘기?
컴팩트 너머로 소란스러움이 여과없이 전해져온다.

「큭!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갈테니까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사령사천왕의 시선을 끌어,」
- 크아아아아!
「으아악~!?」

뚝-

똘기의 목소리가 끊어지고 통신이 종료되었다.

"......"

"......"

미미와 나 사이에 침묵이 감돈다.

...얘네들은 정말이지 조심성이 없구나.
「인어공주」이야기 나라에서는 컴팩트를 집은 인어공주 본인에게 확인도 안하고 술술 정보를 불더니 여기서도 그러기냐...

이런 돌발상황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미미와 시선을 마주하자, 새파래진 얼굴로 굳어버린 미미가 입술을 질끈 깨문다.

"...계..."

"?"

"계속해요.
아직, 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내기가 계속되는 한 공주님의 얼굴에 낙서하진 않는거죠?"

"......"

그러고보면 그 문제를 두고 내기가 시작된거지.
그나저나 엄청 강단 있네.
아무래도 미미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할 필요가 있나보다.
후우- 한숨을 쉬고 한손을 미미의 뺨에 가져가자 미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감은 미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 매직펜으로 양뺨에 고양이 수염을 슥슥 그려넣었다.

"?"

"생각보다 어울리는데?"

조심스레 눈을 뜬 미미의 얼굴을 컴팩트 거울에 비춘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

아기 양과 늑대
아기 양이 어느 날 밤 혼자서 집으로 오다가 큰 늑대를 만났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늑대에게 아기 양은 말했습니다.

"절 잡아먹으려는건 알아요.
그렇지만 저에게 한 곡조 연주해주세요.
죽기 전에 한번 더 춤을 출 수 있게. 저는 춤추는 걸 너무나 좋아한답니다."

"좋아. 해보지. 내가 널 먹기 전에 네가 춤추는 걸 보고 싶으니까 말이야."

늑대는 가까이 놓여있는 목동의 피리를 집어들고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늑대가 피리를 불고 어린 양이 경쾌한 춤을 추는 동안, 개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이건 내 탓이야.

개들에게 붙잡힌 늑대는 중얼거렸습니다.

"내 일은 어린 양을 잡아먹는 것이지, 양에게 춤추라고 피리를 불어주는게 아닌데.
나는 학살자에 불과한데 어째서 피리꾼 행세를 하려고 했을까?"

"썩 잘 불지도 못하셨어요."

하고 어린 양은 말했습니다.



"양의 꾀임에 빠져 애당초 목적을 뒷전으로 한 늑대라니, 어쩐지 지금의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

미미의 안색에 그늘이 진다.

"뭐어~ 이런 상황에서도 이야기를 늘어놓는 나도 구제할 방법이 없지만.
사령사천왕으로서 할일보다 서툰 이야기꾼 흉내를 우선하다니 한심한 노릇이지."

"...하지만,"

"음?"

"로우란씨의 이야기는...재미있었어요."

"...그거 영광이네."

씨익 웃음짓곤 동전을 손에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앞? 뒤? 어느쪽?"

"...네?"

"마지막 내기야.
내 손에 든 동전의 방향은 앞면일까? 아니면 뒷면일까? 맞춰봐.
네가 이긴다면 이대로 물러날께.
하지만 틀린다면...각오하는게 좋을거야."

꿀꺽-

내 경고에 미미가 마른 침을 삼킨다.
한참을 뚫어져라 내 손을 바라보던 미미가 고민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아...「앞면」이요."

"......"

말없이 손목을 한바퀴 뒤튼다.
손바닥을 열어 손마디 부근에 놓인 동전의 「앞면」을 보인다.
환해진 미미의 얼굴을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이겼네. 그럼 내기는 이걸로 끝이군."

"정말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래. 스스로 내건 약속을 깨는건 내 신조와 어긋나니까.
거기다 본의가 아니었다곤 해도 컴팩트를 열어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깬 마당에 이 이상 염치없이 굴고 싶지도 않아."

내기로 빼앗겼던 망토와 요술콩 주머니를 챙기곤 미미에게 손수건을 건네준다.

"이건...?"

"나중에 얼굴 씻고나서 닦을 때 쓰도록 해.
그거 수성펜이었으니까 오래가진 않을거야."

"......"

받아든 손수건과 나를 번갈아 보는 미미에게 손을 흔들곤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응?"

"...속여서 미안해요."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미미의 태도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성실한 녀석이구나 너.
그런 녀석 싫진 않아."

사과에 답례하듯 한손을 가슴께에 얹곤 정중히 몸을 숙였다.

"그럼 안녕히, 용감한 아가씨."

인사를 마치곤 미미의 눈앞에서 푸른 구슬로 변해 성을 빠져나왔다.




사령궁으로 돌아와 알현실로 향하던 중 통로 끝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칼을 흔들며 통로를 서성이는 쥬켄의 모습에 반가이 불렀다.

"어이~ 쥬켄~!"

멈칫-

내 부름에 걸음을 멈췄던 쥬켄은 이내 못들은척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멀어져가는 쥬켄의 모습에선 내 말을 무시하는 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곤란하게 됐군...
아무래도 알현실로 가는건 조금 미뤄질 것 같다고 생각하곤 빠른 걸음으로 쥬켄의 뒤를 쫓았다.

"기다려 쥬켄~!"

큰 보폭으로 쥬켄과의 거리를 줄이며 다가가 쥬켄의 앞으로 돌아서자 쥬켄의 발걸음이 멈췄다.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쥬켄을 마주하며 살갑게 웃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무시하면 섭섭하잖아.
잘 지냈어?"

"흥."

안부를 묻자 쥬켄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출동전에 했던 내기 때문에 여태껏 화가 나 있었던걸까?
어지간히도 불만이 쌓인듯 잔뜩 볼을 부풀린채 시선을 외면하는 쥬켄의 태도에 난처한 얼굴로 조심스레 가까이 몸을 숙였다.

"저기...혹시 화 많이 났어?"

"......"

한차례 눈썹을 꿈틀거린 쥬켄은 휙-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내게 등을 보인채로-실제로는 허리까지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에 등이 거의 가려져 있었지만-쥬켄은 팔짱을 꼈다.
모양새를 보면 제법 심통이 난것 같은데 어쩐다?
그래도 더이상 내앞에서 사라지거나 하진 않은걸 보면, 제대로 사과한다면 어떻게든 화를 풀수 있을것 같은데...

"음, 쥬켄? 저번일은 내가,"

휙-

"...잘못했으니까 제발 화를 풀어주지 않을래?"

휙-

얼굴을 마주하고 사과하려고 쥬켄 앞에 설 때마다 자꾸만 요리조리 등을 돌려버리는 쥬켄의 태도가 여간 얄미운게 아니다.
약이 올라서 그대로 양손을 쥬켄의 허리께로 가져갔다.

"...에잇~!"

"꺄아아!?"

뒤에서 쥬켄의 허리를 잡아 번쩍 들어올리자 귀여운 비명이 통로를 울렸다.

"꺄악! 이거 놓지 못해? 이 저질아!"

"핫핫핫!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꽁해있지 말라니까?"

"웃지마! 이 사기꾼아! 이제 너 같은건 내 파트너도 아냐!"

"에엣!? 그런! 너무하잖아!?"

"너무한건 너야!"

내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착지한 쥬켄이 날 올려다보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쥬켄의 폭언에 충격받은 느낌을 살린 내 표정이 어지간히도 인상이 깊었던지, 뚱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쥬켄은 잠시후 고개를 돌려 큽-하고 소리를 죽였다.

일단 반은 성공인가. 한번 말꼬를 튼 이상은 침묵을 고수하긴 어려울테고, 웃음을 보인 마당에 화난 분위기를 유지하기도 어려울테니까.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얼버무린 쥬켄은 다시금 얄밉다는 듯 날 쏘아봤지만 다행히 방금전보단 기세가 수그러져 있었다.

"그래. 날 내버려두고 이야기 나라에 놀러가니 재밌었어?"

"그때의 내기 건은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해라님께 출동 허가까지 받고 나온 상황에서 내기로 일감을 뺏겼다간 해라님을 뵐 면목이 없잖아.
대신 다음번에 네가 출동할 기회가 온다면 나도 여러모로 도움을 줄테니 이번 일은 용서해주지 않을래?"

"으음..."

은근슬쩍 해라를 걸고 넘어지며 용서를 구하자 쥬켄은 강하게 나가기 애해했는지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기회를 틈타 오면서 챙겨뒀던 복주머니를 꺼내 쥬켄에게 내밀었다.

"아, 그리고 화해의 표시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야기 나라에 갔을때 마음에 드는게 보여서 기념품겸 챙겨왔어."

"기념품?"

기념품이란 말에 쥬켄의 귀가 쫑긋섰다.
호기심 어린 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는 쥬켄의 앞에 복주머니를 열어 보였다.
은은한 꽃내음이 번지며 노란 꽃술을 품은 자주색 꽃이 얼굴을 내민다.

"꽃?"

"언덕에 피어있던걸 몇송이 가져온거야.
어둡고 돌 밖에 없어 재미없는 이곳도 꽃을 심어두면 조금은 분위기가 나아질 것 같았거든."

"야생화가 기념품이라니 어지간히도 바깥이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네 말대로 여기가 따분하다는건 동의해.
매일매일 이런 칙칙한 곳에서 사령몬스터나 만들고 있어야 한다니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라구."

쥬켄은 목소리를 낮춰 불만을 늘어놓곤 머리뒤로 깍지를 꼈다.

"아아~ 심심해. 나도 이야기 나라에 놀러가고 싶은데 뭔가 좋은 건수가 없으려나?"

"뭐, 조급해하지 않아도 머지않아 분명 기회가 오겠지.
예를 들면 흑백 녀석들이 된통 당하고 오면 그 때를 노린다거나?"

"에~ 너도 제법 성격이 나쁘잖아?"

킥킥거리며 핀잔을 주는 쥬켄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객관적으로 봤을때 가능성 있는 전개니까.
물근육인 흰녀석과 자의식 과잉인 검은 녀석.
그 흑백 두 녀석이 함께 출격해도 생쥐 한마리 못잡는다는데 걸지."

흑의 겐엔은 마법을 다루는 주제에 칼들고 설치다가 궁지에 몰리고, 백의 고우센은 덩치 값도 못하고 똘기의 폭렬신풍검과 강화 정화포의 첫 재물이 되어버리니까.

"아하하~! 너무 평가가 짜 로우란.
그래도 그녀석들이 골탕먹을걸 생각하면 쌤통인걸."

사사건건 부딪치는 두녀석에 대한 평가가 통쾌한지 쥬켄은 킥킥 웃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느 이야기 나라를 다녀온거야?"

기념품으로 받은 꽃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쥬켄이 물었다.

"이번에 간곳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이야기 나라였는데..."

해라에게 보고할 내용의 리허셜을 겸해 이야기를 풀었다.

"...결국 요술콩에 잔뜩 혼이난 마녀는 줄행랑을 치고 나는 당당히 성으로 들어설 수 있었단거지."

"그런데 어째서 굳이 요술콩 같은걸 사용한거야?
너라면 그런거에 의지하지 않아도 마녀 따윈 간단히 쓰러뜨릴 수 있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이번 출동의 목적은 두 이야기 나라를 하나로 엮어보는 것이었으니까.
「잭과 콩나무」와「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세계관을 하나로 합쳤을 때, 각각의 이야기 속 능력이 어디까지 유효하게 발휘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요술콩을 사용해본거야."

"헤에...정보수집을 하러 다닌다더니 그런것들도 조사하는거로구나?
그런데 이번엔 그 생쥐 녀석들의 방해는 들어오지 않은거야?"

"어느정도 방해가 있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어.
이야기 나라로 전송되는 도중에 사고가 생겼는지 꾸러기 수비대가 다들 뿔뿔이 흩어졌더라구.
덕분에 정작 만나본 녀석은 미미라는 여자애 한명 뿐이었으니까."

"뭐야? 방금전까지만 해도 거기에 대한 얘긴 쏙 빼놓고 있었잖아."

"넌 녀석들을 생쥐 녀석들 정도로 평가하니까 딱히 그녀석들 이야기엔 관심없을거라 생각해서 뺀거야.
거기다 그런것보단 이야기 나라에서 나의 멋진 활약상이 더 중요하잖아?"

"잘난척은 그만하고 얘기나 마저 해."

"쳇..."

쥬켄의 핀잔에 투덜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미미랑은 숲에서 길을 잃고 헤메는걸 도와주면서 알게 됐어.
그땐 나도 그 애가 꾸러기 수비대라는 사실은 몰랐거든.
성까지 따라오려 할 때부터 의심해봤어야 했는데...내 경험 부족 탓이지.
마녀를 물리치고 성에 들어온 뒤, 이야기에 간섭하려는 날 미미가 막으려 했고, 둘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내기가 벌어졌지."

"...내기? 어떤 내기였는데?"

"문제를 내서 서로의 소지품 뺏아오기."

"......"

"왜 그래 쥬켄?"

"...아니, 계속해봐. 그래서, 넌 이겼어?"

"핫핫핫! 그야 당연하지. 승승장구 했는걸?"

"뭘 빼앗았는데?"

"어..."

쥬켄의 질문에 멈칫했다가 재촉을 받고 주섬주섬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머리띠랑 신발, 리본, 조끼, 손가방, 그리고 양말...으음..."

"왜 거기서 얼굴이 빨개지는거야?"

그때의 해프닝이 떠올라서 무심코 낯을 붉혔나보다.
내 얼굴을 본 쥬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솔직히 말해봐. 너 내기하면서 사기쳤지?"

"넌 날 그런 녀석으로 보는거야?"

"응. 네가 나한테 한걸 생각해봐."

"......"

쥬켄에게 했던 동전 내기건도 있었기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판단한 쥬켄은 물뿌리개로 꽃에 물을 주는걸 멈추고 일어섰다.

"그러니까 넌 내기를 빙자한 속임수를 써서 생전 처음 본 여자애를 홀랑 벗겨버렸다는거지?"

"야. 아무리 나라도 거기까지 하진..."

"속옷 색깔은?"

"......"

"역시 했잖아! 이 변태야!"

촤악-!

"푸읍!?"

거북한 얼굴로 입을 다문 내게 발끈한 쥬켄이 물뿌리개를 휘둘렀다.
잔뜩 물벼락을 맞고 비에 젖은 고양이꼴이 되버려 눈살을 찌푸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뿌드득-」응?"

콰지직---!!!

"으악!?"

"꺄아아!!"

품에서 들린 소리에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물을 흠뻑 머금은 주머니를 찢고 터져나온 거대한 콩줄기에 나와 쥬켄은 사이좋게 사령궁 통로 끝까지 휩쓸려나갔다.



엄청난 기세로 삽시간에 자라난 초거대 콩나무로 인해 사령궁은 엉망진창이 되버렸다.
사태를 파악한 해라에게 잔뜩 꾸중 듣곤 한동안 쥬켄과 사이좋게-쥬켄은 동의하지 않았지만-사령궁 복구에 힘쓰는 신세가 됐다.
적어도 다음 여행전까진 심심하지 않을것 같다고 웃으며 던진 농담에 돌아온건 울분이 담긴 쥬켄의 펀치였다.

사령궁에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바다가 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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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를 맡아주신 터틀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4개월 만에 찾아뵙네요...;

다들 연휴 잘 보내고 계신지요.

...늑장연재 정말 죄송합니다m(_ _)m;;

2월쯤에 렛잇고...가 아니고, 겨울왕국(Frozen) 볼 즈음에 올릴수 있을거래 생각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요;

2화 쓰면서 터틀러님께 여러모로 폐를 끼치기도 했고...쿨럭...=ㅁ=;

정신줄 똑바로 잡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OTL

그럼 3화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m(_ _)m;

다들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p.s.참조 이미지

터틀러님 삽화 러프 ver(미미)

요술콩에 속박된 사령몬스터

미미 관련 이미지 링크(약 2MB)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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