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이른 토요일 오후.
공원에서 만난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행인들의 눈길이 내게 꽂히는것 같아 기분에 묘하던 차에 동급생을 만났다.
짧은 스커트 차림에 숄더백을 맨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룬과 눈이 마주쳤다.
친근함을 담아 가볍게 한 손을 흔들어보이자 룬은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듯 룬의 시선이 위아래로 헤매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룬은 이윽고 나를 향하곤 평소답지않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누구?"
엥?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미심쩍은지 룬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고, 설마 진짜로 날 못알아본건가?
기억이 잠시 날아간건지 어찌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은근슬쩍 숄더백에 한손을 집어넣는 모양새를 보건데, 이대로 뒀다간 치한 퇴치 스프레이 같은걸 맞을것만 같다.
저번처럼 이로 두꺼비의 옷 소멸 가스 같은게 튀어나왔다간, 난데없이 동네방네 알몸을 자랑하게 될지도 모르고.
그런 위기감과 속에 과장스레 팔을 벌리곤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아무리 아이돌 활동으로 정신이 없다지만, 설마하니 절친이자 팬1호인 나를 잊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응?"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찌푸리던 룬이 이내 의심스런 눈으로 입술을 달짝였다.
"그 목소리는...혹시, 수염?"
뭐야? 날 잊은게 아니었잖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보통 외모만 보면 바로 알잖아?
나처럼 눈에 띄는 외모가 또 어디 있겠어?"
"...네 말대로, 눈에 띄긴 하네."
입술을 씰룩이던 룬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갔다.
내 머리 쪽을 빤히 쳐다보던 룬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를 가리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일단, 그 뽀글머리는 대체 뭐야?"
"응? ...아!"
턱부터 이마까지를 감싸고 있는 -얼굴의 몇배는 될만큼 거대한- 검정 뽀글머리에 생각이 미쳤다.
"벗는걸 잊고 있었다..."
"......"
어쩐지 주변 시선이 이상하더라니...
머쓱하니 뽀글머리를 쑤욱 잡아당기자, 룬이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
"룬?"
"...풋-"
아까부터 씰룩이던 룬의 입술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은데?
"푸픕...! 아, 아하하하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어떻게든 입을 가리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한 룬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저, 정말 최고야, 너!
그거 완전 잘 어울린다 수염! 크-흡! 아하핫~!!"
전혀 칭찬이 아니었다.
웃음이 터진 룬 덕분에 길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뭐야?"
"우와아...굉장한 뽀글머리."
"코스프레인가?"
"모작크 장군?"
"매지컬 쿄코의 악역?"
"아마 맞을걸? 공원에서 꼬마들이랑 매지컬 쿄코 놀이하고 있던데."
"진짜 같은 비쥬얼...굉장한 완성도인걸."
"가발 하나로 완성되는 완벽함!"
"그런데 저기 웃고 있는 여자애 혹시 RUN쨩 아냐?"
"에~ 설마?"
룬의 웃음에 전염되었는지 덩달아 웃는 사람들의 모습에 괜스레 부끄러워져서 룬을 흘겨보았다.
"...그렇게 재밌으면 너한테도 이 뽀글머리를 씌워줄까? 응?"
"히익-히익-쿠흐흐...! 그, 그랬다간 너, 다른 의미로 전국의 남자들의 적이 될거야, 아핫핫~!"
내 위협에 룬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채 웅크렸다.
웃음을 그칠 기미는 전혀 없었지만.
"안돼-! 여자애가 뽀글머리가 되어버려!"
"범죄다!"
"아앙~? 네녀석들도 뽀글머리로 만들어줄까!?"
"꺄-!"
"뽀글머리 수염성인이 화났다-!"
"우리 동네에 모작크 장군이 왔어!"
"도와줘 매지컬 쿄코쨩-! 큭큭큭!"
양손을 갈고리 모양으로 번쩍 든 학다리 자세로 위협하자, 행인들은 깔깔 웃어대며 사방으로 달아나버렸다.
젠장, 정말이지 우리 동네 주민들은 하나하나 반응이 좋다니까.
투덜대면서 한숨을 쉬곤, 슬슬 웃음보를 진정시켜가는 룬을 기다렸다.
"정말이지, 만나자마자 웃기지 좀 마, 수염."
뽀글머리 분장을 벗고 룬과 함께 걸었다.
방금전 내 모습을 떠올렸는지 룬은 걷는 와중에도 이따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가발은 왜 쓰고 있었던거야 수염?"
"동네 꼬마들이랑 놀면서 악역으로 모작크 장군을 맡았거든."
"모작크 장군? 그게 누군데?"
"매지컬 쿄코에 나오는 뽀글머리 악당.
세상 모두를 뽀글머리로 만들려 하는 녀석이지."
"세상 모두를 수염투성이로 만드는거랑 뽀글머리로 만드는 것중 어떤게 더 중요해?"
"둘 다 안하거든?"
"하여간 용케도 그런 뽀글머리 가발을 구했구나?"
"실은 같이 놀던 동네 꼬마녀석한테 선물 받은거야.
매지컬 쿄코 경품으로 받은거라는데, 자기가 쓰긴 싫다면서 나한테 주더라고."
"희안한 상품도 다 있네.
뭐, 수염 너한텐 딱이었지만."
웃음을 삼킨 룬이 내 머리를 향했다.
"그나저나 머리카락이랑 수염만으로도 인상이 확 바뀌는구나."
"하긴. 못 알아볼 정도로 인상이 바뀔 줄은 몰랐는데."
"난 혹시나 네가 평소의 금발 올백에 질려서 스타일을 바꾼건가 싶었어.
덕분에 실컷 웃었지만 말야."
키득거리는 룬의 놀림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너 의외로 동네 꼬마들에게 인기 많나봐?
딱 봐도 불량배 같이 생겼으니까 애들이 놀라서 도망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꼬마들이 의외로 겁이 없으니까.
예전에 꼬마들 놀이에 휘말린 뒤로는, 이따금 어울리게 되더라구."
덕분에 수염성인이라거나 전설의 피구왕이라거나 따위의 소문이 나도는 처지가 되었지만, 편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가 싫지 않으니까.
다만, 꼬맹이들이랑 놀아주고 있을 때 호응해주는건 부끄러우니까 적당히 해줬으면 한다.
우스꽝스런 가발에 얽힌 룬의 놀림도 끝나고 화제가 바뀌었다.
룬이 아이돌 활동으로 바빴던 가운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 같은걸로 말이다.
"수염."
"왜?"
"풍기위원 말인데."
"코테가와?"
"응. 걔, 그저께 감기 때문에 학교 쉬었잖아.
이젠 좀 괜찮아 졌대?"
"으음, 아직이려나. 어제도 코테가와가 학교를 쉬었거든."
"그래? 병문안 때는 그렇게 안보였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나빴나보네."
"글쎄..."
그저께 병문안 했을 당시 코테가와네 어머님 말씀으론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셨는데...
성실한 코테가와가 꾀병으로 쉬었을리도 없고.
설마 병문안 때 왁자지껄 떠들었걸로 악화된걸까?
"아무튼, 다음주엔 나아서 학교에서 만나면 좋을텐데."
한숨을 내쉬자 룬이 눈을 샐쭉 뜨곤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혹시~ 어제도 몰래 풍기위원 간병을 갔다거나 한거 아냐?"
놀리듯 은근히 묻는 룬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젠 시즈 혼자 코테가와네 집에 찾아갔어.
미카도 선생님께 감기약을 며칠분 더 타갔다고 하더라."
의욕 넘치게 간호사 복장으로 구급상자를 챙겨들고 뛰어가던 시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
"...뭐, 덜렁대다 넘어져선 유체이탈해버린 시즈 때문에 하교길이 뒤집어졌지만."
"그, 그래?"
"담임인 호네카와 선생님은 기절해 버리고, 위원장인 사이렌지는 비명을 지르다 들고있던 프린트물을 쏟아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지."
나와 시즈가 둘이서 호네카와 선생님의 영혼을 도로 원래 몸으로 되돌려 놓는 사이에,
하루나가 쏟아버린 프린트물을 리토랑 친구들이 함께 주워주면서 사태는 진정되었지만.
"그 뒤엔 아무일 없었던것 마냥 기운차게 병문안을 떠난 시즈도 어지간히 꿋꿋했지."
고개를 내젓자 룬은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라사메랑 풍기위원은 사이 좋아보였으니까."
"룬 너도 둘과 가까워 보이던데?"
"내가?"
"너 저번에 코테가와랑 시즈랑 함께 하교했잖아?"
"그땐 조금 얘길 나눠보고 싶어서 그랬던것 뿐인데."
켕길것도 없는데 괜스레 튕기는 모양새가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아 입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니까 별로 친하거나 한건 아니다?"
"시꺼. 나라고 좋아서 이런줄 알아?
나 2-A로 반을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았단 말야.
거기다 아이돌 활동으로 바빠서 학교에 있는 시간도 부족한데 날더러 어쩌란거야?"
"그치만 너, 바쁘단 와중에도 코테가와 병문안도 갔었고.
지금도 걱정되니까 코테가와에 대해 물어본거잖아.
그거 이미 친한거 아냐?"
"...아는척 하긴..."
"훗훗."
"이상하게 웃지마!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아니. 의외로 상냥하구나 싶어서."
"......"
내 말에 룬을 입을 다물곤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왜그래?"
"의외라... 수염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알 알았어."
거기서 트집을 잡는거냐?
어쩌면 내 말을 놀림으로 받아들인 탓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가늘게 뜨곤 째려보는 룬이었지만, 괜스레 까다롭게 구는 녀석에게 나도 할 말은 있었다.
"그 상냥함의 절반이라도 나에게 나눠주지 않을래?"
"너랑 대화해주는 것 만으로도 나는 넘칠만큼 상냥한게 아닐까? 응? 수염?"
"너무해! 절친인데!"
"절친 아니거든? 은근슬쩍 밀어붙이지마."
"아니아니, 생각해봐. 나랑 코테가와, 시즈, 그리고 룬 너는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공통점이 있잖아?"
"그게 뭔데?"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룬에게 의기양양하게 내뱉었다.
"우리 넷은 2-A의 아웃사이더 동맹이니까!"
"뭔소리야?"
어처구니 없다는 룬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2-A에 나중에 합류한 학생들이란거지.
나와 코테가와는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2-A, 그러니까 원래 1-A였던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되었지.
시즈는 미카도 선생님께 몸을 얻고난 뒤에야 2-A로 편입했고.
룬 너는 2학년 들어서 다른 반이 되었다가 2-A로 돌아왔잖아.
이렇게 넷이 합쳐 아웃사이더 동맹!"
"두번 말하지마. 그런 부끄러운 호칭."
"영어니까 그럴싸해보이지 않아?"
"전혀. 그리고 설명이 엉성해!
그냥 1-A가 아니었던 학생들의 모임이라고 말했으면 알기 쉽잖아?"
"어? 하지만, 룬 넌 1학년때 유우키랑 라라랑 같은 반이었잖아?"
내 말에 룬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렌이었고.
난 2학년 때부터 등교했으니까."
"......어? 에!? 진짜!?"
"뭘 그렇게 놀라는거야?"
내 반응에 덩달아 놀란 룬이 날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방금 룬의 발언은 『지금에서야 밝혀진 충격적인 진실!』급이다.
당연히 말이 횡설수설하게 된건 어쩔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 그...! 난 지금까지 룬 네가 1-A 반인줄 알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반 친구들을 알게 된건 올해 여름이 되어서거든?"
"진짜냐..."
경악하는 날 이상하게 보던 룬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수염 네가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지만, 1학년때 전학왔을 땐 렌으로만 등교했었어.
지구에 와선 몸이 뒤바뀌는 패턴도 바뀌어서, 내 몸으로 돌아온건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가능했으니까.
거기다 내가 제대로 몸이 바뀌게 되니까 2학년에 올라선 나 혼자만 다른 반이 되어버렸고."
룬의 푸념이 귀를 기울이면서도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2학년 첫날 복도에서 리토와 실랑이를 벌이던 렌이 룬으로 변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룬으로 변한 렌을 보고 여자애가 됐다며 놀랐던 리사랑 미오에게 라라가 처음으로 룬을 소개해준 것 같다.
그러니까 그 때 리사랑 미오가 룬을 보고 놀랐던건, 렌이 '처음보는 여자애(룬)'로 변신하는걸 처음봤기 때문이라는거군.
그 전까지는 룬과는 안면도 없었다는건데.
즉, 2-A 학생들에게 가장 낯선 이는 나도, 코테가와도, 시즈도 아닌 룬이 되어버리는거다.
어긋나 있던 인식을 깨닫곤 당황스러움을 추스르는 동안, 룬의 이야기는 다른 반으로 있었던 2학년 초반의 지루한 일상에 대한 푸념이 되어있었다.
"리토군을 만나는데 반이 다르니까 얼마나 불편했는지 알아?
가뜩이나 렌이랑 활동 시간을 나눠야 하니까 시간도 없어 짜증만 나구."
"그건 고생이었겠네.
그래도 늦게나마 2-A로 반이 바뀌어서 다행이지?"
"다행이라기보단 뿌듯하단 기분?
2-A에 들어온건 내가 그 변태 교장을 상대로 교섭해서 쟁취해 낸거니까 말야."
룬은 의기양양하게 코를 세우곤 흐흥- 콧소리를 내더니, 어째선지 이내 시무룩해졌다.
"...정작 2-A에 들어왔더니 아이돌 활동 때문에 등교하는 날이 줄어버렸지만."
"하하...힘내."
"전혀 의욕이 나지 않는 응원이네. 고마워."
아니꼬운듯 룬이 대꾸했다.
"...아무튼, 요점은 그거야.
2-A 녀석들에겐 수염 너보단 내가 더 어색한 상대일걸?
신학기로부터 한참 지나서 2-A에 들어온데다 아이돌 활동으로 등교도 뜸했으니까."
자기가 말해놓곤 낙담했는지 어깨를 늘어뜨린 룬의 모습에 당황해서 위로할겸 다독였다.
"야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모미오카나 사와다는 너랑 친해 보이던걸?
룬룬이라고 별명까지 지어 부르잖냐."
"...아아, 위원장이랑 친하게 지내는 둘 말이지?
하긴, 걔들은 넉살이 좋더라.
너 상대로 장난을 거는 애들이니까. 보통이라면 너같은 불량배에겐 무서워서 말도 안 붙일텐데."
부정할 수가 없어 어설프게 웃음을 흘렸다.
다만, 기껏 위로해주려는 사람의 정면에서 험담을 내뱉는 룬 너의 뻔뻔함도 만만찮다고 생각해.
어찌됐건 가라앉을뻔 하던 분위기도 괜찮아졌으니 상관없으려나.
"어찌됐건, 환영합니다! 아웃사이더 동맹에 오신 것을!"
"와아- 전혀 기쁘지 않은 환영."
무덤덤한 말과 달리 룬은 조금 미소지었다.
화제는 라라랑 우리집 식객 둘(나나와 모모)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만화의 마감으로 바쁜 저스틴을 대신해서 라라가 나나와 모모에게 용돈을 대신 전해주기로 했다는 얘기.
나나랑 모모가 용돈도 받을겸 내일 라라를 만나러 미캉네 집에 놀러갈거라는 얘기.
사이바이씨의 마감을 돕기 위해서 리토랑 미캉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갈 예정이라는 얘기.
만화가로서 '은하의 랩소디'라는 작품으로 수상한 저스틴의 활약.
거기서 '라라의 호위대장이 어째서 만화가를 하는거야?'라며 기가막혀하는 룬의 핀잔.
"그런데 나나랑 모모의 용돈은 그냥 라라가 수염 너한테 대신 건네주면 되는거 아냐?"
"남을 통해서 전달만 하는거랑, 본인이 직접 용돈을 쥐어주는거랑은 만족감이 다를테니까.
그리고 용돈 운운하지만, 어쩌면 동생들을 집에 초대할 구실로 삼은걸지도 모르지."
"헤에...라라 그 사고뭉치도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렇지? 라라도 묘하게 내일을 기대하고 있던걸 보면 뭔가 자매끼리 하고 싶은거라도 있는거려나?"
드물게 라라에게 호의적인 룬의 발언에 맞장구쳤다.
"...뭐,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날 집보기지만."
"응? 너랑 라라네 동생들이 같이 놀러가는거 아녔어?"
"라라가 부탁했거든.
내일은 나나랑 모모만 왔으면 좋겠다고."
하루나가 어쨌길래 나나랑 모모만 오라는걸까.
의아해서 하루나를 쳐다봤을때 하루나도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는걸.
그래도 초대에 쏙 빠진건 조금 쇼크여서, 그 자리에서 깊게 물어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넘어가 버려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모처럼 자매들끼리만 있는건데 눈치없게 방해할 수도 없잖아."
"그런것 치고는 풀죽어 보이는걸?"
눈치빠른 룬의 지적에 웃는데 입맛이 썼다.
"으음, 혼자 있는건 오랫만이라 그런가봐.
내일은 적당히 시간을 보낼거리를 찾아봐야지."
"하여간, 그렇단건 넌 내일 할 일이 없단거지?"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
"잘됐네."
"뭐가 말야?"
"할일 없는 수염 네가 심심하지 않도록, 내가 친절히 일거리를 준다는거야."
"어, 그러니까...감사합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하는 내게 룬은 실소를 흘리더니 용건을 말했다.
"별건 아니고 택배 하나만 대신 받아줘.
지구의 택배를 받으려는데, 마땅한 수신처가 없어 곤란했거든."
"그러고보니 넌 우주선에서 살고 있었지?"
지구에 온지 1년은 되었을텐데 여전히 우주선 생활이라니, 아직은 지구에서 거주지를 구할 생각은 없나보다.
"응. 은하통신판매에서 사는 물건이라면 그냥 우주선에서 받으면 되는데, 지구 물품의 경우는 그게 안되거든.
고작 택배 하나 받겠다고 『탑 아이돌 RUN의 정체가 실은 우주인이었다!』라고 밝혀지는 꼴은 절대 당하기 싫어!"
자기가 말하고서도 어처구니 없었는지 한차례 고개를 흔들곤 룬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래서, 해줄거야?"
"그정도야 간단하지. 맡겨줘."
"고마워. 그럼 주소 알려줘.
지금 배송 요청하면 내일 중에는 도착할테니까."
문제가 해결되어 안심한 룬과 느긋히 대화를 이어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앞이었다.
"어쩌다보니 집까지 동행하는 모양새가 됐네."
"괜찮지 않아? 수염 네 집 주소만 아는것 보다는 직접 와보는편이 나중에 물건 받으러 올 때 헤메지 않을테니까."
"그것도 그러려나."
그럴싸한 말에 수긍하곤 문을 열려는데, 무슨 생각인지 룬은 내 손에 들고있던 뽀글머리를 집어가더니 내 머리에 폭-하고 씌웠다.
순식간에 완성된 모작크 장군 코스프레.
"뭐야?"
"그냥. 라라네 동생들 반응이 궁금해서.
아마 다들 너인줄 모를걸?"
"설마 그러겠냐.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 중에 남자는 나 밖에 없는데."
헛웃음을 흘리며 현관을 열자, 경쾌한 발소리가 들렸다. 나나다.
"아, 료스케 왔어?"
반기듯 나오던 나나가 갑자기 멈춰섰다.
"......누구?"
"아키츠 료스케."
"료스케!?"
경악하는 나나의 반응에 불만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를 봐도 나잖아?"
"뽀글머리잖아!?"
"...풋!"
결국 룬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이돌의 체면인지 입을 가리면서 소리를 죽이는 룬에게 나나의 의식이 향했다.
"어, 너는?"
"안녕. 나나였지?"
금새 표정을 추스리곤 미소짓는 룬에게 감탄하는데 나나의 눈이 가라앉았다.
"...너, 잘도 왔네."
어쩐지 떨떠름해하는 어조에 룬이 눈을 깜빡이다 생긋 웃었다.
"으응~ 나, 뭔가 했던가?"
"......"
어쩐지 미묘해진 분위기에 룬이 먼저 한발 물러섰다.
"그럼 아키츠군. 난 이만 가볼께."
아키츠군이라니, 설마 나나 앞이라고 내숭이냐?
미소지으며 룬은 깔끔히 몸을 돌렸다.
룬이 떠나가자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나나가 불만스레 혀를 찼다.
"어쩌다 저런 녀석이랑 같이 오게 된거야?"
저런 녀석이라니, 의외로 룬에 대한 평가가 나쁘다.
"길가다 우연히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집까지 와버렸어.
그런데 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라의 친구잖아."
"별로, 언니의 친구라고 나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건 아니잖아."
나나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저녀석, 분명 모모랑 같은 타입이야.
겉으로는 친한척 해도 속으론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을지 모른단 말야."
너 지금 룬이랑 모모를 동시에 까내리고 있잖냐...
"그러고보니 모모는?"
"미카도 선생님한테 갔어.
약초 관련으로 얘기를 나눌게 있다고 했거든."
답하던 나나가 손으로 내 머리께를 가리켰다.
"그리고 너도 슬슬 그 이상한 가발은 벗어."
"아..."
나나의 지적에 슬그머니 뽀글머리 가발을 벗고서 집에 들어섰다.
"......"
팔락-
"......"
"......"
팔락-
"「「......」」"
팔락-
팔락-
"잠깐, 나 아직 다 못봤어."
옆에서 뻗어진 손이 페이지를 도로 앞으로 넘겼다.
소파에 앉아서 고양이 잡지를 읽던 중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나나였다.
묵묵히 사진을 감상하던 나나가 문득 물었다.
"료스케는 고양이를 좋아하는거야?"
"응. 사랑스럽잖아.
다소 멋대로에 앙탈을 부리긴 하지만 그게 좋아."
시시덕거리며 사진을 감상하던 중 한곳에 눈이 고정됐다.
"아, 이녀석 귀엽지?"
"어디어디?"
"여기. 구석에 있는 작은 녀석 말야.
오드 아이인가? 양쪽 눈 색이 다른데?"
"오오..."
내 말을 따라 사진 한구석에 자그맣게 보이는 녀석에 얼굴을 가까이 한 나나가 감탄의 한숨을 흘렸다.
나랑 같은 감상을 가진것 같아서 기쁘긴 한데...
"나나? 그렇게 얼굴로 가리면 내가 못 보는데?"
"헤헤, 이녀석 귀여워..."
"야..."
잡아먹을듯 잡지에 얼굴을 가까이 댄 나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며 잡지를 옆으로 빼냈다.
"잠깐? 나 아직 다 못 즐겼어!"
"너만 눈이냐? 나도 고양이 보고 싶다구."
항의하는 나나에게 콧방귀를 뀌곤 잡지를 들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야, 치사하게! 그럼 너만 보는거잖아!"
"이게 방금전 나나 네 행동이다. 알았으면 반성하는게 어때?"
"이잇!"
불쑥-! 찰싹!
"뿌엣-?"
잡지를 얼굴에 가까이 해서 혼자 읽으려는 척 하던 내 얼굴을 나나가 자기 얼굴로 밀어냈다.
정확히는 자기 뺨으로 내 뺨을 밀어버린거지만.
"으기깃...!"
"스, 스톱!?"
고양이 감상과는 별개로 뺨으로 뺨이 밀리는 상황도 나쁘진 않지만, 이대로 당할 수야 없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게 유치하지만 즐거운법.
나나의 손길을 피해 한손으로 잡지를 들어올렸다.
"하하하! 봐라! 팔길이가 긴 내 쪽이 대!승!리!"
"치사해!"
"와하하하하! 함께 보던걸 먼저 독차지한 녀석이 누구더라?"
"으...! 그 팔 정말 안내릴거야?"
"내려야지. 나도 읽어야 하니까. 단, 방금처럼 나만 볼거다!"
"유치해!"
"최고의 칭찬이야."
과장된 자세로 뽐내듯 책을 얼굴에 가져가는 시늉을 했더니 별안간 나나가 달려들었다.
냉큼 내 무릎에 올라타 앉은 나나는 나와 책 사이 공간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이걸로 시야 확보!"
...너 정말 저돌적이구나.
돌핀팬츠 차림으로 남의 무릎에 앉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기분도 모르고 나나는 남의 무릎 위에서 팔자 좋게 까불어 대고 있었다.
놀라서 움찔했던게 부끄러웠기에, 나직이 맥빠진 한숨을 내쉬었다.
"꺅!?"
귓가에 입김이 닿았는지 나나가 앳된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료스케?"
당황스레 귓가를 매만지며 올려다보는 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 자세를 바로하다가 무심결에 그만...
고의는 아니었어. 미안해."
"...뭐어, 일부러가 아니면 됐어."
귓볼을 만지작거리던 나나는 이내 고개를 바로했다.
다시금 잡지로 묵묵히 시선을 집중하는 나나에게 안도하곤, 나나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번엔 또 뭐야?"
"잡지가 안 보여서."
"헹!"
내말에 오히려 장난스레 내 볼을 밀어내는 나나의 얼굴 탓에 고개가 돌아갔다.
이 장난 계속하는거야?
"흥이다! 료스케는 얌전히 의자나 하고 있으라구."
"내 고양이!"
돌아간 내 고개랑 반대 방향으로 잡지를 들고선 흥얼거리며 감상하는 나나의 모습에 오기가 솟았다.
"어이쿠! 이런."
"꺅!?"
나나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화들짝 놀란 나나가 몸을 떨었다.
"뭐, 뭐야 또?"
"의자에 앉았으면 안전벨트를 해야지."
"뭔소리야! 네가 자동차야?"
"응. 탑승감 끝내주지?"
"갑갑해!"
"그럼 얌전히 핸들을 이쪽으로 돌리는게 어때?
그러기 전까진 안전을 위해서 안전벨트를 풀 수 없다구?"
"핸들? 이상한 비유 말고 쉽게 말해!"
"내 냥이 내놔!"
"이 고양이 애호가!"
허리를 잡힌채 무릎 위에서 바둥거리던 나나가 한손을 뒤로 돌렸다.
간질간질-
"아하하하핫!? 그, 그만!?"
옆구리를 간질이는 나나의 손가락에 몸을 움찔 비틀었다.
"자, 잠깐!? 허리 흔들지마!"
"네 손부터 치우고 얘기해!"
"이게...!"
서로 지기 싫다는 오기인건지 둘다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지러움으로 몸을 꿈틀꿈틀 비트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입을 열었다.
"큿, 아, 아하하! 내, 내 냥이!"
"윽! 허리 흔들지마, 의자면 얌전히 좀...!"
네가 간질고 있어서거든!?
누가 뭐래도 나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냥냥! 냥냥!"
"푸흡, 우, 웃기지마 료스케."
나나의 입술이 씰룩이면서 허리를 간질던 손길이 약해졌다.
이 기회를 놓칠순 없지!
열심히 고양이를 연호했다.
"냥냥! 냐냥냥!"
"...풋!"
멀찍이서 터져나온 웃음 소리에 나와 나나는 우뚝 멎었다.
"「「......어.」」"
"아."
모퉁이에 숨어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던 모모와 눈이 마주쳤다.
"「「「......」」」"
"...모모?"
"엣, 음...다녀왔어 나나."
웃음을 죽이곤 목소리를 가다듬는 모모와 반대로 나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 언제 왔어?"
"조금전일까?"
"구체적으론?"
"탑승감 어쩌고 할 때부터?"
"딱히 이상한거 안했거든!"
켕기듯 나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모모가 가볍게 웃었다.
"알아. 둘이서 힘내서 냥냥하고 있었잖아?"
...뭘까. 이 틀리지 않으면서도 틀린 듯한 발언은.
"사이 좋네요."
"그런거 아니거든!"
"그런데 대체 뭘하다 그렇게 된거죠?"
"...모든건 고양이를 향한 마음이 불러온 슬픈 사건이었던거야."
"뭐라는 거야?"
나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저녁엔 내일 라라를 보러 갈때 가져갈 먹거리를 사러 나왔다.
뭘 사갈지 고르는 과정에서 모모와 나나 사이에 조금 실랑이가 있었지만.
"...나나? 어째서 조각 케이크가 하나만 빼곤 전부 당근 케이크야?
나 당근 싫어하는거 알고 있지? 그리고 이럼 다양하게 먹지 못하잖아."
"이러지 않으면 모모 네가 혼자 다 먹을거잖아?"
"...누굴 먹보처럼 생각하는거니?"
눈을 가늘게 뜬 모모에게 나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너... 그렇게 말해놓고선, 저번에 내 몫의 아이스크림까지 먹었잖아!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두던건데...!"
"아하하, 그랬던가?"
나나의 울분섞인 반응에 모모는 난처한듯 시선을 피하며 웃어넘겼다.
부끄러운지 낯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다이어트 한다고 모모가 저칼로리 식단을 준비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운동하다 한번 쓰러지고 나서는 다이어트도 그만두기로 한걸로 알았는데,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모모의 먹성이 늘었나?
삐져버린 나나를 나나를 달래며 사과하는 모모의 모습을 보건데, 최근 모모의 군것질이 늘어난 듯 보였던건 그저 기분탓이 아니었나보다.
"칫...봐주는건 이번만이야?
다음에 내걸 먹으면 그땐 두고봐?"
"그래, 알았다니까."
모모의 설득에 한층 누그러진 나나는 잠시 투덜거리더니 당부와 함께 한발 물러섰다.
귀가후.
간식으로 사온 아이스크림컵을 냉동실에 넣으려는 나를 말리며 나나가 펜을 들었다.
그리곤 컵 바닥에 슥슥 이름을 적어넣었다.
『나나』,『모모』,『아케치』
진짜냐...
먹는거에 이름 적어두는거 처음 봤어.
"아케치 아니고 아키츠라니까..."
"뭐 어때? 뜻만 통하면 됐지."
되긴 뭐가 돼...
천연덕스레 대꾸하는 나나의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자 나나가 덧붙이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면, 야미랑 얘기할 때 실수로 널 아케치라고 불렀는데 의외로 야미의 반응이 좋길래 버릇이 된걸지도..."
야미가?
...소년탐정 김○일의 애독자인 그 녀석이 '아케치'라는 별칭에 어떤 상상을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나의 말에 모모가 쿡쿡 웃으며 거들었다.
"잘됐네요. 똑똑해보이는 성씨잖아요? '아케치'씨?"
공부하기 싫어서 가출한 너희들에게 필요한 성씨가 아닐까?
고개를 젓고는 지금 먹을 아이스크림을 뺀 나머지를 냉동실에 넣었다.
나나와 모모와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문득 이번 여름은 정말 길구나 싶었다.
가을이 잠시 왔다 싶더니 도로 여름이 되어버리고.
대체 언제 여름이 끝나려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