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12




- 빨간모자 -




『빨간모자』의 후반부 전개는 늑대가 잠든 사이,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가르고 빨간모자와 할머니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보고 네 배를 갈라달란 말야?"

"...우선은 잠재운다는 생각은 없는거냐?"

내 배를 빤히 쳐다보다가 가위를 찾기 시작한 키키에게 딴죽을 걸곤 슬그머니 배를 가리는 나.

"설마 자장가를 불러달란 얘긴가요?"

의문섞인 눈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미.

"또 무슨 엉뚱한 꿍꿍이를 품은거람..."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누르는 새초미.

"맛있는걸 잔뜩 먹고나면 잠이 잘 오는데찡."

자기만의 수면요법을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찡찡이.

"개랑 늑대 망신 시키지 말고, 그냥 알아서 자주면 안되겠소이까?"

마지막으로, 이마를 짚으며 탄식하는 강다리.

이야기의 후반부로 가기 위한 여정은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다.



"어찌됐건 늑대 역할인 로우란공을 재워야 이야기대로 빨간모자를 구할 수 있단 소리 아니오?"

"그런데 어떻게 재워야 할까요?"

"미미공의 의견대로 자장가를 불러서 재우든, 찡찡이 말대로 먹을걸 줘서 식곤증이 오게 만들든, 일단 할 수 있는건 뭐든 해봐야지 않겠소?"

"하지만 그런다고 로우란씨가 순순히 잠들어주긴 할까요?"

"미미 말이 맞아. 차라리 이대로 저 녀석을 때려눕혀서 잠들게 만드는 편이 훨씬 더 건설적이지 않겠어?"

과격한 키키의 발언에 엿듣다가 무심코 움찔했다.
다행히도 꾸러기 수비대 각각의 내심은 어쨌든, 빨간모자라는 인질이 내 뱃속에 들어있는 상황에서, 꾸러기 수비대도 마냥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경련하는 입술을 매만지며 표정을 관리하는 날 강다리가 힐끔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의견은 온건한 수단이 통하지 않을 때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작전명은 『북풍과 태양』이 어떻겠소?"

"북풍과 태양?"

"그렇소. 태양의 따스함으로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이야기처럼 하는거요.
태양이 소용 없다면 사나운 북풍의 바람으로 여행자의 옷을 강제로 벗길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런데 원래 이야기랑은 시도하는 순서가 다르지 않아?"

"그렇지만 싸우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좋지 않을까요?"

"하긴..."

의견이 모이자 일행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가 『태양』 역할이야?"

"「「「......」」」"

키키의 물음에 일행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가위 바위 보!!!」」」"

한차례 외침과 함께 희비가 엇갈렸다.

"「「「휴우...」」」"

"아."

안도하는 일행들 사이로 키키의 얼빠진 목소리가 흘렀다.
주먹을 쥔채 망연히 서있던 키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잘부탁해 키키."
"키키씨 힘내세요!"
"힘내시구려 키키공."
"힘내찡~!"

"...하아..."

일행의 응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곤 키키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의욕 없어 보이네."

"시끄러. 이게 다 네 녀석이 재워달라고 떼를 쓰니까 그런거잖아."

"무례하긴. 누가 떼를 썼다고 그래?
남을 애 취급하지 마."

"웃겨. 자장가 불러달라는 녀석이 애가 아니면 뭐야?"

"...음, 틀린말은 아니군."

코웃음치는 키키에게 얌전히 수긍했다.
그렇잖아도 불편한 기분을 숨길 생각도 않는 녀석에게 항의해봤자 들을 것 같지도 않으니.

"그럼 애보기 잘 부탁해 엄마."

"누가 엄마냐!"

"나보고 애라며?"

벌컥 고함을 지른 키키가 짜증나는듯 머리카락을 박박 헤집었다.

"젠장, 어쩌다 내가 이런 꼴을..."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한거 아녔어?"

"시끄러! 네 탓이잖아!"

어른스러운 몸매랑 다르게 어지간히 도발내성이 없네.
간단한 도발을 걸면 앞뒤 안가리고 잘 걸릴 것 같다.

씩씩거리던 키키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키키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키키의 노래(링크)》
《키키의 노래(가사)》

키키가 노래를 마무리 짓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저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거북한지 슬그머니 붉어진 얼굴로 키키가 째려보았다.

"뭐야?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해!"

"아, 뭐랄까..."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의외로 깜찍한 노래를 부르는구나."

"뭐, 뭐야? 그래서 나빠!?"

"아니, 마음에 들었다구."

"큭..."

주먹을 부들부들 쥔채로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키키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그렇게 맘에 안들었나?

- 그냥 지나치지 말고 차라도 권해줘. ...싫어? 나중에 날계란을 던질테야!
- 이쪽을 바라봐줘. 이제 어딜 갈까? 영화, 만화, 놀이공원, 그리고 밤엔... ...싫어? 나중에 삶은 달걀을 던질테야!

"뭘 그렇게 싫어하는거야? 귀여운 노래였는데."

"그럼 이게 좋아할 일이냐!
대체 내가 왜 사령사천왕을 상대로 이런 부끄러운 흉내를 내야하는거야!"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키키는 바닥을 지근지근 밟아대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무 흥분했잖아. 진정해."

"윽..."

"괜찮아? 차라도 마실래?"

"너한테 부탁한거 아니거든!?"

키키가 새빨개진 얼굴로 악을 썼다.
아무래도 내가 가사를 갖고 놀린다고 생각하나보다.

귀가 따가워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틀어 막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쳐 어깨로 숨을 쉬는 키키의 모습에 슬그머니 귀를 막은 양손을 치웠다.
한차례 머리를 쓸어넘기고선 투덜대곤 키키가 삐딱하니 물었다.

"그래서, 슬슬 잠이 오냐?"

키키의 물음에 싱긋 웃었다.

"한곡 더."

뻐억!

"꾸엑!?"

키키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바닥을 굴렀다.
난데없는 폭력에 뺨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키키가 덤벼들었다.

"뭐, 뭐하는거야!?"

"내가 할 말이다! 기껏 자라고 노래를 불렀더니 어째서 안자는거야?"

"가사가 재밌길래 귀를 기울이다 보니."

"...이렇게 된 이상 이걸로 잠재워야겠네."

이마에 십자마크를 만든 키키가 주먹을 들어올렸다.

"어? 야, 너 『태양』 역할이라며?"

"내 주먹이 바로 태양이다! 태양권!"

"눈이! 눈이이이~~~!?"

키키의 주먹에 눈을 얻어맞고 뒹굴었다.

"너무하잖아! 내 눈 좀 봐! 퍼렇게 멍이 들면 어쩔거야!?"

"넌 원래 퍼렇잖아! 티도 안나!"

"너무해! 차라리 달걀을 던져!"

"...그놈의 노래가사, 영원히 기억에서 소거시켜주마!!!"

"엄마야~~~!?"

"누가 엄마냐!"



"심하네요..."

"내 이럴줄 알았소."

"어쩐지 키키가 무섭다찡."

"동감이네."

구경꾼 근성을 발휘하는 꾸러기 수비대 일행은 키키의 돌발 행동을 말릴 생각이 없나보다.

"어, 어?"

"하아아앗!"

"어이쿠!?"

뒷걸음질치다 울퉁불퉁한 지면에 걸려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키키가 돌진해왔다.
몸통 박치기에 당해 그대로 넘어진 내 위에 키키가 올라타 마운트 자세를 취했다.

"그럼 이대로 한숨 푹 재워주마!"

"주먹으로?"

"주먹으로."

"난폭해!"

"시끄러! 늑대가 안자면 빨간모자를 구해낼 수가 없잖아!
하는김에 아주 영원히 잠재워주마!!"

"큭!?"

있는 힘껏 주먹을 치켜든 키키에 반응해 양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키키가 노리던 것이었다.

지이익!

키키의 손이 늑대 파자마의 지퍼를 내리고, 파자마 속으로 키키가 거칠게 한쪽 팔을 집어넣은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저리 비켜!"

파자마 안으로 침입한 키키의 팔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가리던 팔로 억지로 키키의 몸을 밀어냈다.

물컹-

"「「!?」」"

...Oh.

손바닥에 눌린 말랑한 감촉에 경악한 가운데 키키의 몸이 튕기듯 일어났다.
마운트 자세를 유지한채 한팔로 가슴을 가린 키키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 이자식...!"

무섭다.
방금전 해프닝 탓에 키키의 눈초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도리도 없으니, 우선은 키키가 열어놓은 파자마 지퍼부터 닫으려 배꼽 쪽으로 손을 뻗었다.

"적당히 해!"

몸 아래로 꼬물꼬물 내려가던 팔을 키키가 잡았다.
정확히는 키키의 가랑이 사이에 내 팔이 꽉 끼였다.
내 팔을 양 허벅지로 조인채,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달아오른 키키가 나와 눈을 마주했다.

"너어...베짱 한번 좋은데?"

분명 칭찬은 아니었다.
단순히 파자마 지퍼를 올리려던 내 손길이, 내 위에 올라탄 키키에겐 자신의 다리 틈을 만지려는 행동으로 보였나보다.
으르렁거리는 키키의 모습에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오해하지마?
난 그냥 지퍼를 잠그려고 한 것 뿐이야?
그야 방금전 내 행동에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건 네가 내 위에 억지로 올라타있기 때문이잖아?

"헤에?"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키키가 붉은 입술로 싱긋 미소지었다.
즉,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단 말이다.
분명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릴 생각이 없다는 의지군요?

"...음, 그러니까 마운트 자세는 이제 그만 풀어주지 않을래?
이런 모습 소문나면 부끄럽고."

"누군 좋아서 이러는줄 알아!?
그 잘난 주둥이부터 다물게 만들어줄까?"

조심스러운 내 권유는 역으로 키키를 자극했나보다.
말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는지 다시금 주먹을 치켜드는 키키의 모습에 잽싸게 몸을 옆으로 굴렸다.

"꺅!?"

내 팔을 붙잡는답시고 가랑이를 힘껏 오므린게 키키의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그 상태로 제대로 된 마운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리 없으니까.
짧게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키키를 피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사납게 이쪽을 노려보며 천천히 일어나는 키키에게서 엉거주춤 멀어졌다.

다행히 사태는 다른 꾸러기 수비대 일행이 키키를 말리면서 진정되는 '듯' 했다.

"차, 참으시오 키키공!"

"이거 놔-! 저녀석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부끄러운 척 하며 대놓고 도발하는거 봤잖아!
부끄러운건 오히려 내 쪽이란 말야!"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날뛰는 키키를 동료들이 힘껏 말리며 달랬다.

"차, 참아 키키. 늑대를 재우고 빨간모자를 구하기 위해서잖아."

"그래요. 부끄럽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요 키키."

"그럼 너희도 자장가 불러!"

"「「어?」」"

"설마 이런 꼴을 나 혼자만 당하게 할 셈이야?"

아무래도 불쌍한 희생양-『태양』-이 늘어날 것 같았다.




자기들끼리 소근소근 얘기하며 협의 끝에 다음 타자가 정해졌다.
미미가 뼈다귀 여의봉을 양손에 모아들고 내 앞에 섰다.

"그거 강다리 것 아냐?"

"네. 마이크 대신 빌렸어요."

그것 참 본격적이네.

"힘내시오 미미공~!"
"미미야 힘내~!"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꾸러기 수비대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뼈다귀 여의봉을 마이크처럼 입가에 가져간 미미가 노래를 시작했다.


《미미의 노래(음악)》
《미미의 노래(가사)》

이윽고 조용해진 미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불렀다.

"...이봐?"

"...새근-"

"야..."

바닥에 웅크리고선 옅은 숨소리를 내뱉는 미미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으응?"

어깨를 잡고 흔들자, 부시시 일어난 미미가 눈을 비비곤 기지개를 켰다.

"후와아...벌써 아침인가요?"

"아니. 너 방금 전까지 자장가 부르던 중이었거든?"

"어머? 어느새 제가 꿈속이었던거죠?"

"...네 쪽이 잠에 빠지면 어떡하냐."

이 녀석도 정말 정말 엉뚱한 기질이 있다니까.
한숨을 쉬는 내게 미미가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잠이 오나요 로우란씨?"

도리도리.

"이상하네요. 이렇게나 잠이 잘 오는데."

- 잠이 올 때면 떠올려봐요 미미를.
- 하나에서 백까지 나를 생각해봐.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나라에서 잠잘때 실제로 노래가사대로 시도해 보긴 했지.
미미(羊)가 하나. 미미(羊)가 둘.
도중에 방해받아서 깨버렸지만.
정작 잠에 빠지려는걸 깨워버린건 미미 본인이었다는게 아이러니지만.

"자. 그럼 다음은 누구 차례려나? 새초미?"

"잠깐! 아직 제 차례 안끝났어요!"

"응? 혹시 한 곡 더 부를거야?"

"아뇨. 노래 부르기는 이걸로 끝이예요.
소용없는 방법을 계속 고집할 순 없으니까, 이젠 두번째 방법을 시도해도려구요."

방금전 작전타임 동안 새로 떠올린게 있는걸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미미를 보는데, 이어진 미미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저를 잡아먹어 주세요!"

...내가 어느새 자장가에 홀린건가?
졸린 나머지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아니. 굳이 할머니는 안 잡아먹어도 되는데."

"누가 할머니에요!? 누가봐도 『양』이잖아요!"

낯을 붉히며 화를 내고선 미미가 말을 이었다.

"로우란씨의 말대로라면 빨간모자 이야기의 후반부 전개는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양』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는거죠?"

"맞아."

"그리고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양 이야기에선 늑대가 양을 잡아먹은 뒤에 잠에 빠지고요."

"그렇지."

"그러니까 빨간모자와 양을 둘 다 잡아먹은 늑대는 두배로 잠이 잘 올거예요."

어때요? 라며 자신만만하게 물어오는 미미.
뭐니 그 워즈맨 이론.

"참고로 이건 찡찡이가 식곤증 이야기를 한것에서 떠올린거예요."

아, 네.

하지만 마냥 웃을 수 만도 없는게, 미미의 말대로 내가 미미까지 잡아먹고나면 정말로 잠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는거다.
이 곳 『이야기 나라』에서 '이야기의 흐름(순서)'이라는건 '인과'만큼이나 거스를 수 없는 강제력을 가지니까.

아무튼 의도는 알겠다.
일곱마리 아기양의 이야기 흐름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켜서 나를 재운뒤에 빨간모자를 구하겠다는 속셈이겠지.
그런데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미미는 예상 이상으로 강심장인 것 같다.

"잡아먹히는거 무섭지 않아?"

"...무서워요.
솔직히 빨간모자를 삼킨 늑대 파자마 속이 어디로 연결되어있는지도 모르고..."

미미는 한차례 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저는 비전투 멤버니까 실제로 로우란씨와 싸우는 멤버에 없어도 괜찮고.
무엇보다 동료들이 반드시 절 구해줄테니까요."

"흐응...뭐, 그렇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어."

내가 납득하자 미미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미미가 손을 들어 내 귀―정확히는 후드에 달린 늑대 귀 장식―를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귀가 커졌어요?"

"...뭐하는거야?"

"네? 그야 주된 흐름은 빨간모자 잖아요?
그러니까 빨간모자의 원작대로 진행하려구요."

"그치만 그거 빨간모자의 대사잖아?
남은 역할은 할머니 밖에 없어."

"......"

콱!

"아얏!?"

콱!콱!콱!

"악!윽!큭!? 그, 그만해!"

욱신거리는 발등을 부여잡은채 끙끙대는 내 모습을 미미가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어째서 내가 아는 여성들은 죄다 괄괄한 성격인거야..."

"흥, 자업자득이죠."

탄식하는 내게 코웃음치는 미미의 대꾸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럼 잡아먹을테니까, 눈 감아."

"필요 없어요. 각오라면 이미 했으니까."

"귀염성 없긴."

"애초에 전 할머니니까 귀염성 같은거 필요없거든요?"

"에이~ 그렇게 토라지지 말구."

"안토라졌어요."

입술을 삐죽이는 미미의 태도에 어색하게 웃으며 달랬다.

"아무튼...그럼 잘 먹겠습니다~♪"

지이익-

한손을 미미의 어깨에 올린채 다른 한 손으로 파자마 지퍼를 끝까지 내렸을 때였다.

"Rabbit Carrot Pretty Change!"

새초미의 외침과 함께 분홍 빛무리가 내 몸을 휘감으며, 파자마 지퍼를 커다란 『옷핀』이 꿰뚫었다.

"어, 어?"

옷핀에 걸려 잠글 수 없게 되어버린 지퍼에 당황해 굳어있던 사이,

"에잇~!"

벌어진 파자마 안으로 미미가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삐빗-

그리고 거의 동시에, 전자음과 함께 뱃속에서 길쭉하니 튀어나온 뼈다귀 여의봉이 강다리를 향해서 뻗어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뼈다귀 여의봉이 향하는 곳으로 강다리가 뛰어오고 있었다.
멈출줄 모르고 뼈다귀 여의봉을 힘껏 움켜쥔 강다리가 기합을 내뱉었다.

"으라아앗!"

어어어? 하며 당황하는 사이, 이번에는 뼈다귀 여의봉이 급격하게 줄어들며 파자마 밖으로 빠져나왔다.
여의봉 끝에 미미와 빨간모자를 매달고서...

"Rabbit Carrot Pretty Change!"

미미와 빨간모자가 파자마 밖으로 탈출한 순간, 두번째로 쏟아진 새초미의 마법은 파자마 앞섶을 수많은 옷핀으로 완전히 잠궈 버렸다.
구태여 말하자면, 갈라진 늑대의 배를 도로 꿰맸다는 이야기대로의 전개였다.

"어이쿠?" "꺅!?" "아얏!?"

다만, 마무리는 조금 어설펐지만 말이다.
여의봉에 매달린채 내 뱃속을 탈출한 미미와 빨간모자는 줄어드는 여의봉을 지탱하고 있던 강다리와 충돌해 볼썽 사납게 나뒹굴었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둘을 보호하려고 몸을 던진 강다리는 꽤 봐줄만 했다.

"괜찮소? 미미공? 빨간모자?"

"으...괜찮아요."

"아야야..."

엉덩이를 매만지며 엉거주춤 일어선 미미와 눈이 마주쳤다.

"물어볼게 있는데."

"네. 뭔가요?"

"강다리의 뼈다귀 여의봉은 처음부터 구출작전을 염두해두고 들고 있었던거야?"

"네. 로우란씨의 뱃속에서부터 빨간모자를 데리고 빠져나오기 위해서였죠."

"언제부터 계획했지?"

"날뛰는 키키를 말리면서부터요."

단순히 키키 다음으로 자장가를 부를 사람을 정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이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군.

"말했잖아요? 전 비전투 멤버니까, 제가 할 수 있는걸 하겠다고."

보통 비전투 멤버는 위험을 무릅쓰고 늑대 뱃속에 들어가거나 하지 않습니다.

"...거참, 단순히 잡아먹히는 아기양인줄 알았더니..."

"당신도 말했잖아요? 잡아먹힌 아이들을 구하는건 '엄마 양'이라고."

"반박할 말이 없군."

당찬 녀석 같으니라구.


"빨간모자 누나~!"

"찡찡아~!"

구해진 직후 어리둥절하던 빨간모자는 품에 뛰어들어 마냥 좋아라하는 찡찡이 덕에 이내 얼굴을 풀고 까불거렸다.

"몸은 좀 괜찮니?"

키키가 빨간모자를 다독이며 물었다.

"엄마? ...아! 할머니는?"

"괜찮아. 이제 모두 끝났으니까."

새초미가 곁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어? 벌써?"

끝이라는 말에 빨간모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품에 안긴채 어리광부리는 찡찡이.
곁에서 자신을 다독이는 엄마(키키)와 할머니(새초미).
뼈다귀 여의봉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며 점검하는 강다리.
그리고 늑대(나)에게 말을 거는 미미.

옷핀이 덕지덕지 붙어 엉망이 된 파자마를 매만지며 투덜거리던 나와 빨간모자의 눈이 마주쳤다.
뚫어져라 날 쳐다보는 빨간모자의 시선에 무심코 엉덩이를 뒤로 뺐다.

빨간모자 구출작전이 수월하게 성공한 덕분인지 키키는 속이 후련하다는듯 웃었다.

"자 그럼, 이야기대로 빨간모자도 구했고, 늑대의 배도 꿰맸으니..."

빨간모자가 히죽 웃으며 키키의 말을 이어받았다.

"이젠 늑대를 쓰러뜨리기만 하는 되는거네?"

"「「「...어?」」」"

...어?




- 우리들의 싸움은 지금부터다!

그딴 싸움 필요없습니다. 빌어먹을.

"죽어!"

"윽!? 빨간모자 주제에!"

"뭐?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대는 건방진 애완견이!"

"『늑대』라고!"

"아아, 늑대였지?
응큼하게 치맛 속 훔쳐볼 때부터 알아봤어! 이 짐승아!"



"...도와줘야 하는거 아니오?"

"...어느 쪽을?"

와와! 꺄꺄! 하며 싸우고 있는 나와 빨간모자를 저만치서 구경하던 꾸러기 수비대가 곤란한듯 서로를 마주봤다.
강다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여의봉을 고쳐쥐었다.

"일단은 로우란 공을 퇴치해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 늑대역을 물리치는게 빨간모자 이야기 나라의 결말이니까 말이외다."

강다리의 말에 수긍한 꾸러기 수비대 일행이 끼어들면서 싸움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정령소환!』떵이!"

소환된 소의 정령 떵이가 빨간모자를 보곤 순식간에 거대 황소로 변신해 달려들었다.

"무오오오오---!!!"

"으오오오오!?"

새빨갛게 된 눈을 번뜩이며 돌진해오는 떵이의 모습에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몸을 던지며 피했다.
폭주하는 떵이의 모습에 빨간모자도 당황한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엑? 뭐야 저 황소는?"

"저건 떵이야 빨간모자 누나!"

"떵이?"

"우리들의 동료올시다! 떵이가 변신한 모습을 보는건 처음일테지만 말이오."

"맞아요. 저번에 이곳에 왔을 땐 떵이가 변신한 적은 없었거든요."

찡찡이와 강다리, 미미의 보충 설명에 빨간모자가 재미난걸 발견한 눈빛으로 변했다.

"헤에, 그거 잘됐는걸?
헤이! 떵아! 컴온!"

"무우-?"

순순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떵이를 보고 씨익 웃은 빨간모자가 풀쩍 뛰어올랐다.
날쌘 몸놀림으로 떵이의 등에 올라탄 빨간모자가 내쪽을 가리키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달려라!"

"무우우우우-----!!!"

빨간모자를 등에 태우고 돌진하는 떵이의 모습에 어처구니 없어하면서도 피할 자세를 잡았다.

"내가 그런 뻔히 보이는 돌진에 당할 것 같으냐!"

떵이의 돌진을 피해 옆으로 힘껏 몸을 날린 순간, 빨간모자가 떵이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아아아앗---!"

퍼어억!!

"우겍!?"

떵이의 돌격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시간차로 날아온 빨간모자의 드롭킥에 개구리같은 비명을 내뱉곤 바닥을 나뒹굴었다.

"굉장해! 빨간모자 누나!"

"아하하하하! 봤어? 굉장하지?"

정말이지 오늘 몸한번 험하게 굴리는군.
찡찡이는 태평스레 응원이나 하고 있고.
빨간모자는 자랑스레 웃고나 있고.
속으로 푸념을 내뱉곤 몸을 일으키다가, 강다리의 뼈다귀 여의봉 공격을 맞고 또다시 하늘을 날았다.

"어째서 빨간모자 뿐만이 아니라 너희들까지 덤비는거야!?"

"그야 당연한거 아니오? 로우란공만 쓰러뜨리면 이야기는 원래대로 돌아가잖소?"

"거참 타당한 이유네!"

"무오오!"

"이크! 정말이지 쉴 틈을 안주는군...!"

아무래도 오늘은 작정하고 당하는 팔자인가보다.

"Rabbit Carrot Pretty Change!"

삐끗-

"끄아아아아~~~!?"

다만 난데없이 신겨진 하이힐 탓에 발목을 접질러서 다칠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나이스 할머니!" "새초미야!"

엄지를 치켜세우는 빨간모자와 호칭에 항의하는 새초미.

원망할 새도 없이 다급히 하이힐을 벗어던지곤 키키의 날카로운 발차기를 간신히 피했다.

"나이스 엄마!" "키키야!"

잡담하는 와중에도 하이힐 굽으로 공격해오는 키키의 발차기를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야야, 너희들 정말 치사한거 아니냐?"

"「「「「전혀.」」」」"

여자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이도 좋네.

남자 일동은 질색했다.
정확히는, 강다리만 질색했다.
찡찡이는 그냥 빨간모자 누나를 응원하고 있고, 떵이는 폭주상태라서 「무오오!」라는 말 밖에 안하고.

포위망을 좁혀호는 꾸러기 수비대와 빨간모자를 보다가 막막함에 고개를 떨궜다.
솔직히 목적도 이룬 마당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사령궁으로 달아나고 싶은데...
...그런데 어떻게 달아나지?




어느새 땅거미가 내린 바깥.
빨간모자의 집에서 창밖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빨간모자는 찡찡이와 논다고 방에 들어가 있다.
나머지 꾸러기 수비대는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따금씩 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중이다.
집 한구석에 널부러져있는, 이제는 누더기가 되어버린 늑대 파자마를 한차례 응시하곤 방금전 싸움을 떠올렸다.

그때, 일방적으로 진행되던 싸움은 찡찡이의 갑작스런 난입으로 멈췄다.
꾸러기 수비대와 빨간모자를 막아서듯 내 앞에 선 찡찡이의 행동에 나도 빨간모자도 꾸러기 수비대도 다들 당황했다.
뭐, 찡찡이가 나에 대한 동정심-다소는 있었겠지만-으로 자신의 동료를 말리고자 한건 아니었다.

- 로우란찡이 떠나버리면 빨간모자 누나랑 헤어져야 한단 말야찡!

내가 퇴치되거나 달아나버리면 빨간모자가 살고 있는 이야기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 싫었던거였다.
찡찡이의 말에 감동한 빨간모자가 냉큼 내 목덜미를 붙잡고 내가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고.
빨간모자에게 휘둘리면서 반강제로 늑대 퇴치에 휘말렸던 다른 꾸러기 수비대는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엔 찡찡이와 빨간모자의 의사에 반대하지 않았다.

싸우는 와중에 내 수제 늑대 파자마가 넝마가 되서 떨어져나간 뒤라, 나는 더이상 '늑대'라고 부를수 없는 모양새였으니까.
결과적으론 이야기대로 '늑대'를 퇴치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

"생각해보면 엉뚱하게 맞아 떨어진 해결책이었네요."

"너도 알잖아? 이런건 구색만 맞추면 된다니까."

미미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하곤 대꾸했다.

"그런 의도로 일부러 늑대 파자마를 입은거야?"

"응. 솔직히 이야기처럼 정말로 배를 가르는건 무섭잖아."

내 대답에 새초미가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아무리 악역을 맡았다지만 누가 좋아서 배가 째지는 경험을 하고 싶겠어?

"그럼 그냥 빨간모자를 구한 뒤에, 새초미의 마법으로 로우란씨의 늑대 파자마를 벗겨버렸다면 좋았을걸 그랬네요."

"그러게. 아니면 늑대 파자마를 다른 동물 파자마로 바꾸는 걸로 늑대를 퇴치했다고 볼 수도 있고."

싸움이 끝난 뒤에야 떠오른게 있었는지 미미와 키키는 저마다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걸로 빨간모자가 납득했을까?
로우란에게 잡아먹혔던걸로 화가 많이 났던데, 결국 싸우는건 똑같았을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새초미의 의문에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주억이며 동의했다.

"아무튼, 구색만 맞추면 의외로 이야기를 따라가는건 수월하다구.
너희들도 비슷한 경험은 있잖아?
꿩대신 닭이라고, 『모모타로』의 꿩 역할을 키키가 했던것처럼."

"뭐? 네가 그 얘길 어떻게 알아?"

"미미랑 얘기하다가 알게 된건데."

"난 닭이거든? 다시 그런 역할을 맡는건 질색이야."

다소 못마땅한듯 어조로 대꾸하는 키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뭐야? 할말 있어?"

"딱히. 그냥 새(鳥)가 나오는 이야기면 네가 고생 좀 하겠구나 생각했을 뿐이야."

"...놀리는거냐?"

"아무튼, 구색맞추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말 돌리지마!"

옆에서 주먹을 흔들며 위협하는 키키를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융통성이 있는거 같지 않아?"

"그게 이야기 나라를 어지럽혀도 된다는 의미는 아녜요 로우란씨."

"그런 의미는 아녔어.
그냥 이야기가 성립하는 기준이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다는 점이 재밌어서 얘기한것 뿐이라구."

손사레치는 날 빤히 보던 꾸러기 수비대는 내키지 않는듯이 동의했다.

"...하긴, 그런데도 이야기가 멀쩡히 돌아가는걸 보면, 생각보다 이야기 나라는 튼튼한가봐요."

"뭐어, 그런게 딱히 맘에 들진 않지만."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거요 키키공?"

"온갖 새의 역할은 다 나한테 오잖아."

키키의 짧은 푸념에 꾸러기 수비대가 곤란해하거나 말거나 나는 화제를 이어갔다.

"나로선 그런 융통성이 싫진 않아.
이야기를 바꿀 여지를 남겨주니까.
결국 이 이야기는 빨간 꼬맹이가 맹수에게 잡아먹혔다가 구출되었다는 이야기잖아."

"빨간 꼬맹이? 빨간모자를 얘기하는거죠?"

미미의 물음에 코웃음쳤다.

"흥. 저런 왈가닥은 그냥 빨간 꼬맹이로 충분해.
오늘 내가 그 녀석에게 당한걸 생각하면..."

투덜대는 내게 꾸러기 수비대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왜 빨간모자를 잡아먹는게 늑대가 아니고 맹수죠?"

"이번에 늑대 역할을 맡은 내가 늑대 파자마를 입은 '고양이'였으니까.
이야기의 융통성을 위해선 최대한 두루뭉실한 편이 좋으니, 늑대나 고양이 둘 다에 해당하는 맹수로 했지."

"보통 고양이는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는데요."

"사령 사천왕이 보통 고양이는 아니잖아."

백색의 고우센 녀석이라면 호치보다 훨씬 거대한 고양이로 변신할 수 있기도 하고.
미미도 굳이 마무리된 이야기에 딴죽을 걸 필요는 못느꼈는지 고개를 젓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찡찡이와 놀던 빨간모자를 밤이 늦었단 이유를 들어 간신히 잠자리로 보냈다.

"에~ 더 놀고 싶은데."

"안돼. 다음에 놀면 되니까.
착한아이는 이만 잘 시간이예요."

"아이 취급하지마.
그럼 찡찡아. 다음에 보자."

"빨간모자 누나..."

"...그렇게 아쉬워하지마."

빨간모자가 울먹이는 찡찡이를 가만히 안았다.

"다음에 함께 놀면 되니까. 응?"

"...으응."

간신히 웃음을 보인 찡찡이에게 빨간모자는 마주 웃어주곤 일어났다.

"야옹아. 넌 잠시 따라와."

"야, 야옹이...?"

뒤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린다.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게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겁도 업이 날 또다시 애완동물로 삼은 빨간모자에게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자장가라도 불러줄까?"

"......"

빨간모자는 말없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빠악!

"악!?"

쓰러진 내 목덜미를 잡고 빨간모자는 날 질질끌며 방으로 들어갔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려."

방문이 닫히기 직전 보인건, 내 명복을 빌듯 양손을 모으는 강다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잠시후, 빛의 구슬이 된 나는 빨간모자의 집을 뒤로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냉랭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령궁.
여전히 살풍경하고 을씨년스런 알현실의 분위기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옥좌에 앉아 난감한 얼굴로 나와 쥬켄을 내려다보는 해라.
한심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백의 고우센과 흑의 겐엔.
그리고, 내 옆에서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는 쥬켄.

손가락으로 옥좌를 톡톡 두드리던 해라가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명을 듣도록 하지."

"이 멍청이가 날 잡아먹으려 했다구요!"

"잡아먹혀도 안죽는다니까?
조금 실험했던것 뿐이잖아?"

"뭐? 조금? 실험?
네가 먹혀봐야 그딴 소릴 안하지!
사과해! 날 잡아먹은거 당장 사과해!"

"뭐야? 조금 뱃속에 들어간 것 가지고 화내기는!
멀쩡히 살아서 나왔으니까 됐잖아?"

"이게 정말!?"

콱!

"악!?"

분노한 쥬켄에게 발등을 밟혔다.
발등을 부여잡은 채 알현실 바닥을 구르는 내 꼴에 흑백콤비 녀석들은 기가 차다는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만."

해라의 낮은 경고에 흑백콤비와 쥬켄은 입을 다물었고 나도 억지로 자세를 바로했다.

"...골치 아프군."

무릎을 꿇은채로 발등을 매만지며 끙끙대는 나와 씹어먹을듯 날 노려보는 쥬켄의 모습에 해라는 피곤한듯 미간을 문질렀다.


상황이 대충 수습된 뒤 침공한 이야기 나라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파트너인 쥬켄과 호흡을 맞춰보기 위해서 둘이 함께 출동했던 것.
이야기 나라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도록 몇가지 지침을 빼면 애드립으로 행동하기로 한 것.
내가 앞장서 시선을 끌어서 빨간모자에 빙의한 쥬켄을 꾸러기 수비대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것.
이번 출격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출격에서는 꾸러기 수비대의 허를 찌를 수 있을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

다만, 그 과정에서 내가 사전 협의 없이 멋대로 쥬켄을 뱃속에 삼켜버린 것이 문제가 되었다.
쥬켄으로서는 난데없이 동료 뱃속에 들어간 꼴이었으니까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하지만 나와 쥬켄의 신경전은 겐엔과 고우센의 코웃음에 의해 끝났다.

"하! 정말이지 하찮군. 그렇지 않나 고우센?"

"동감이다 겐엔. 겨우 그딴 몸풀기를 보고랍시고 자랑스레 떠드는 꼴이라니 우습군 우스워."

"뭐? 야! 너희들 다시 한번 말해봐!"

"진정해 쥬켄!"

벌떡 일어나 금빛 눈을 부릅뜨고서 백의 고우센과 흑의 겐엔을 노려보는 쥬켄을 다급히 말렸다.
그런 쥬켄의 분노에 겐엔과 고우센은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채 대꾸했다.

"뭐야? 우리가 틀린말이라도 했나?"

"말이야 바른말이지, 사령사천왕이 둘씩이나 이야기 나라에 다녀와서 하는게 고작 이런 한심한 보고와 추태라니 우습지 않을수가 있나? 응?"

"이게...!"

사천왕끼리 신경전이라니,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군.
발끈하는 쥬켄을 뒤에서 만류하고는 대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우리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로군?"

"흥! 당연한 소리를!"

씩씩거리는 쥬켄과 녀석을 달래는 나를 제치고, 고우센과 겐엔이 자신있게 해라 앞에 나섰다.

"해라님! 부디 저 백색의 고우센과!"
"저 흑의 겐엔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호오? 기회라..."

"네! 고작 정보수집 따위에 힘을 쏟는 로우란에게 해라님께서는 자비롭게도 여러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저녀석은 해라님께 실망만 안겨주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정보수집 운운하는 로우란의 말은 단순히 임무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우센과 겐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해라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여기서 가만히 입다물고 있어서야 내 행동을 용인해준 해라의 체면이 안서지.
자신만만한 둘에게 담담히 물었다.

"고작 정보수집이라니?
진정으로 해라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적을 파악하고 올바른 정보를 수집하는게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걸 모르나보군?
정보야 말로 힘이다."

내 물음에 둘은 코웃음쳤다.

"웃기는 소리! 이야기 나라에서 저희는 그야말로 신!
그런 마당에 정보 따위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지?"

적어도 엉뚱한 곳(이야기 나라)에 화풀이 해대는건 그만둘 수 있겠지.
해라(쿠키)의 진정한 원수가 원더랜드의 오오라 공주가 아니라 사령신 마라라는걸 모르면, 결국 쿠키가 나중에 짊어질 죄의식만 커질 뿐이잖아.
그리고 고우센의 말마따나 내가 이야기 나라에서 신이 된 것마냥 날뛸순 있어도, 흑막인 사령신 마라를 쓰러뜨리고 결말을 내기 위해서는 다른 준비도 필요하니까.

"고우센 너의 말대로 우리가 힘이 부족한건 아니지.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건 힘이 아니라 바로 정보다.
꾸러기 수비대를 상대하기 위해서 모아야 하는 정보 말이다."

"크하하하하! 정말이지 답답하군!"

어처구니 없다는듯 고우센은 으르렁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입만 열면 그놈의 정보, 정보, 정보!
대체 언제까지 네녀석의 허풍을 들어줘야 하는거지?"
애초에 로우란 네놈은 항상 정보타령을 하는 주제에, 약해빠진 꾸러기 수비대 따윌 상대로 무능하게 매번 실패만 반복하잖나?"

"그런 약해빠진 생쥐 녀석들을 상대하는데 필요한 정보는 오직 하나.
어떻게 하면 그녀석들이 더 공포를 느끼며 쓰러질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지."

...그 약해빠진 생쥐 한마리에게 탈탈탈 털릴 두분께서 왜 이렇게 허세가 드셨나?
아니꼬운 나머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내게 비웃음을 날리고서 둘은 다시금 해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해라님! 저희 둘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이야기 나라를 파괴하고 꾸러기 수비대를 해치우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맡겨만 주십시오."

둘의 간청에 해라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로우란."

"예. 해라 총사령관님."

"겐엔과 고우센의 말대로, 나는 너에게 여러차례 기회를 주었다."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해라가 말을 이었다.

"분명 미래를 대비하고자 한 너의 마음은 알겠으나, 둘의 말대로 언제까지고 패배만을 반복할 순 없겠지.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의 승리도 중요하니까.
그러니 로우란. 다음 이야기 나라 출격은 겐엔과 고우센에게 맡기겠다.
혹여 나의 결정에 할 말이 있다면 발언할 기회를 주겠다."

"...겐엔과 고우센이 해라 총사령관님의 기대를 만족시키길 바랍니다.
해라님의 뜻에 이견은 없습니다."

"크흐흐." "후후후."

묵묵히 고개를 숙이자 고우센과 겐엔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흘렸다.
곁에서 울컥하려는 쥬켄을 손을 들어 말렸다.

"조용."

해라는 진절머리가 나는듯 손가락으로 재차 팔걸이를 두드렸다.

"...좋아. 그럼 겐엔, 고우센.
너희 둘의 솜씨를 기대하마.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도록."

"「「해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알현실 나오고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한참을 걷고, 알현실에서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될 즈음 쥬켄이 매서운 눈으로 째려봤다.

"방금전엔 왜 말린거야?"

"그야 저기서 더 싸웠다간 해라님께서 우리에게 실망하실테니까."

"애초에 이렇게 된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는거야?"

"그야...내 탓이지."

머쓱해진 날 뚱한 얼굴로 째려보던 쥬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빨간모자에 빙의해 놀았던 경험에 들떠있던 쥬켄으로서는, 다음 출격 기회를 겐엔과 고우센 흑백콤비에게 빼앗긴게 어지간히 아쉬운것 같았다.
툴툴거리며 나를 타박하는 쥬켄에게 사과하고는 화제를 돌려 보았다.

"그러고보니 어땠어? 첫 출격은?"

"첫 출격? 그야..."

내 물음에 쥬켄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툭하고 내뱉었다.

"...당연히 최악이지.
누가 좋아서 잡아먹히는 경험을 하고 싶겠어?"

"그럼 나한테 잡아먹힌 경험을 빼면 어때?"

내 물음에 쥬켄이 수상한듯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뭘 묻고 싶은건데?"

"그냥. 출격 기회가 줄어든걸 아쉬워하는걸 보면, 뭔가 괜찮은 일도 있었지 않을까 해서."

"......"

말없이 째려보는 쥬켄에게 능청스레 웃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쥬켄은 이내 푸욱 한숨을 내쉬곤 뒤통수를 매만지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말해두지만, 어딘가의 멍청한 늑대 녀석에게 잡아먹힌 경험은 끔찍했어.
이건 명심해."

"응. 그건 미안해."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이 만들어준 과자는 그럭저럭 맛있었어.
졸졸 나를 따르는 꼬마 멧돼지 녀석도 조금은 귀여웠고.
새초미 녀석이 당황하는 꼴도 볼만했고."

할머니 역할을 하던 새초미가 떠올랐는지 쥬켄은 말하다 말고 키득 웃었다.
이것저것 이야기 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 둘 떠올리는 쥬켄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뭐, 그래서, 조금은 재밌었어. 이제 됐어?"

"...그래."

"왜그래 로우란?"

"아니, 아무것도."

그렇게 기분좋게 웃으면서 뭐가 '조금' 재밌었어냐.

"그나저나 네 망토 안에 숨어서 사령궁으로 귀환할 때 말야.
어쩐지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 안쓰러운 눈으로 널 배웅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

"...착각이겠지."

빛의 구슬로 변해서 이야기 나라를 떠나기 직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이, 빨간모자한테 목덜미가 잡힌채 방안으로 끌려가던 꼴이었으니까.
내가 빨간모자한테 도망치기 위해 이야기 나라를 떠났다고 꾸러기 수비대가 착각하더라도 무리는 아니겠지.

사령 사천왕이 꾸러기 수비대에게 동정섞인 시선을 받을 줄은 예상 밖이었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꾸러기 수비대가 키린더를 통해 공격해오지도 않았으니 좋은거 아니겠어?



"하아...앞으론 또다시 따분한 사령궁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걸까?"

앞일을 생각하면 막막한지 쥬켄이 벌써부터 침울한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쥬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뭘 그렇게 우울하게 있어? 당연히 밖으로 나가는거지."

"뭐? 그치만 해라님은 겐엔과 고우센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셨잖아.
마음대로 이야기 나라에 가면 해라님께 혼날거라구."

기대와 염려가 뒤섞인 쥬켄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굳이 우리가 이야기 나라에 얽매일 필요는 없잖아?"

"어?"

"이야기 나라가 안되면 『원더랜드』로 가자구.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의 본거지 말야."

"정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색하는 쥬켄에게 장난스런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해라님께서는 이야기 나라에 출동을 흑백 녀석들에게 맡겼지만, 우리에게 근신을 요구한게 아니었잖아.
나는 여전히 정보수집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해라님을 설득한 뒤에 원더랜드로 놀러...음, 그러니까 조사로 시간을 보내고 오자구."

내 말에 쥬켄의 눈이 힐쭉 휘었다.

"...응. 조사는 중요하지. 후후후."

낮게 웃음을 교환하곤 서로의 주먹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데 로우란? 청소 도구는 왜 챙기는거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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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쌀쌀해진게 벌써 가을이군요.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청출어람 12화로 빨간모자 에피소드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꾸러기 수비대 캐릭터송은 구글 검색하다가 유튜브 링크타고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해라의 테마(사령왕 냔마)와 새초미의 테마(독백 로맨스)가 좋더군요.
키키의 테마도 가사가 귀여워서 신선했습니다.

다음화는 원더랜드 방문 이야기가 되겠죠.

...일단 이단 옆차기부터 쓰고 말이죠;
벌써 1년이나 손놓고 있었다니 참...ㅠㅠ
올 4월쯤에 이불이 에피소드 정리를 해두긴 했는데...
비중 문제도 있으니 일단은 재독하면서 다음편에 적당한 에피소드를 골라봐야겠네요;


그럼 1년이 훌쩍 지나가버렸지만 이불이 55화로 뵙겠습니다m(@_@)m;



p.s. '나는 이차원에 불타는 이단 옆차기'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삽화를 그려주신 터틀러님의 픽시브 계정 링크입니다.

https://www.pixiv.net/member.php?id=9020975

 

TURTLER [pixiv]

図が好きな亀です. mail → greendragoon@naver.com

www.pixiv.net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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