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10
- 빨간모자 -
"숲에서 빠져나가는 건 아주 간단하지(Exiting the forest is super simple)
그냥 길만 따라가면 돼~♪(All you do is follow these path turns)
대충 한 평생 동안만...(For the rest of your gaming life)"
숲의 오솔길을 따라 흥얼거리며 걷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빨간모자의 할머니가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집.
하기야, 빨간모자 이야기 나라에서 숲에 있는 외딴집 하면 빨간모자의 할머니의 집 뿐이지.
입고 있는 늑대 옷을 확인하고 늑대머리 후드를 고쳐쓰곤 집으로 다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톡톡
"할머니~♪ 빨간모자예요~♪"
달콤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엄마 심부름으로 맛있는 음식이랑 포도주를 가져왔어요~♪"
......
"할머니~?"
......
"저기? 할머니? Grandma? 여보세요~?"
묵묵무답인 상황에 조금 당황해서 목소리를 바꾸는것도 잊고 다시금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인기척이 났다.
문너머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두어번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양팔을 들곤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어흥~! 잡아먹을테다~!"
"......"
마주한 상대의 눈이 깜빡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상대가 입술을 달싹였다.
"...호랑이?"
"아니, 늑대라구. 보면 알잖아?"
"「어흥」하고 우는 늑대가 어딨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한숨을 쉰 여성이 붉은 눈으로 응시해왔다.
"하여튼, 늑대옷 차림으로 뭐하는거야 로우란?"
"...그러는 새초미 너야말로 어째서 여기 있어?"
예상치 못한 재회.
흔들리는 토끼귀의 소녀, 새초미의 등장에 의문을 숨기지 못하고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얼떨떨히 서있다가 새초미에게 손을 잡혀 집안으로 이끌렸다.
얌전히 바닥에 앉자, 나를 마주한채 침대에 앉은 새초미가 물었다.
"그래서, 로우란 네가 『늑대』 역할인거야?"
"맞아. 악역이니까."
"그럼 어째서 늑대의 몸에 빙의하는 대신에 그런 늑대 인형옷 따윌 입은거야?"
"늑대모양 파자마도 늑대는 늑대거든."
"대충대충이네..."
"이런건 대충 구색만 맞추면 돼.
등장인물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 해당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건 너희도 이야기 나라에서 경험해 봤을거잖아?"
내 말에 이해가 간듯 새초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모타로 이야기 나라에선 닭의 정령인 키키가 꿩의 역할을 맡았으니까."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 나라에서 미미도 지금의 새초미와 같은 말을 했었지.
아무튼 새초미의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로군.
"그러는 새초미 넌 어째서 빨간모자네 할머니 집에 있는거야?"
"내가 빨간모자의 할머니 역할이니까."
"세상에 너같은 할머니가 어딨어?"
"머리카락이 회색이라서 그런거 아닐까?"
"회색이라기 보다는 예쁜 은빛이라고 생각하는데."
"으응, 고마워."
"그나저나 머리카락 색깔로 할머니 역할이라니, 예상밖에도 정도가 있어..."
"늑대 파자마 입고서 늑대역을 맡은 로우란이 할 말이 아닌것 같은데?"
새초미의 딴죽에 그저 멋적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요술 식탁보』(북풍이 준 선물)로 식사를 차리자 새초미는 반색하며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여자나 아이 상대로는 적대행위를 삼가한다는걸 여러차례 강조한 덕분인지, 아니면 괴짜 NINJA라는 컨셉이 먹힌 덕분인지, 새초미는 의심없이 식사에 열을 올렸다.
할머니 집에 있는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투덜거리는걸 보면 배고픔 탓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다.
"빨간모자는 언제 오는걸까?"
"아마 내일이 아닐까?
밤이 늦은 지금 숲에 들어올 생각은 안하겠지."
어둑해진 바깥을 한차례 살피곤 답하자 새초미는 음식을 먹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기, 로우란?"
"응?"
"어째서 『빨간모자』 이야기 나라에 온거야?
동일한 이야기 나라에 반복해서 침략해 본다는 시도는 『백설공주』 이야기 나라로 충분했잖아?
그런데도 빨간모자 이야기 나라를 두번이나 찾아온 이유가 있어?"
새초미의 물음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대답할 말을 골라보았다.
"이유야 물론 있지. 이 곳은 다시 방문할 가치가 있을만큼 특별한 세계거든."
"특별해?"
"그래. 뭐니뭐니해도 『빨간모자』는 결말이 바뀌어도 무사했던 이야기니까."
"뭐!?"
경악과 함께 새초미가 식탁을 치며 일어났다.
"결말이 바뀌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설명할테니 일단 진정해.
그리고 우리들이 결말을 바꿨다거나 한게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보진 말아달라구."
당혹과 의문섞인 눈으로 노려보던 새초미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입을 다문채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졌다는듯 양손을 들어보이곤, '늑대'가 등장하는 또다른 이야기를 화두에 올렸다.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 염소』의 결말은 알고 있어?"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 염소가 잠자는 늑대의 배를 가르고 잡아먹힌 아기 염소들을 구하는거잖아?
늑대의 배에는 돌을 대신 채워놓고 말야."
"전개가 『빨간모자』와 비슷하지?"
"...그러네."
동의하면서도 새초미는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로우란은 『빨간모자』가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염소』이야기의 결말을 따라했다고 말하고 싶은거야?"
"그래. 정확히는 『빨간모자』빨간모자가 늑대에게 잡아먹힌 결말 뒤에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염소』의 결말이 덧붙여진거지만 말야.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늑대』라는 인물이 두 이야기를 위화감 없이 잇는 매개가 되어줬겠지.
그렇다고 '늑대의 배를 가른다.', '잡아먹힌 이를 구해낸다.', '늑대의 배를 돌로 채운다.'같이 노골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차용한 티를 내는건 어떨까 싶지만."
내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새초미가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전 로우란의 말은 믿기 어렵지만...
그게 정말로 로우란이 이곳에 온 이유라면, 로우란은 이곳에서 뭘하고 싶은거야?"
"『늑대와 일곱마리 아기염소』가 섞인 『빨간모자』이야기가 어느 정도까지의 변화를 허용하는지 확인하고 싶어.
다른 이야기와 섞여버린채 안정화된 세계가 얼마나 튼튼한지 시험해 보고 싶달까?"
"그 말대로라면, 로우란은 빨간모자 이야기를 최대한 엇나가게 진행하려고 하는거지?"
"...응, 뭐, 그렇지."
결말까지 무난히 『빨간모자』이야기를 진행하기만 해도 상관없는데.
하지만 만약 여기서 솔직히 말했다간...
- 원작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기만 할거라고? 사령사천왕이?
- 믿을 수 없어!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거야!?
괜히 쓸데없이 의심이나 받을테니, 여기선 그냥 새초미에게 맞장구 치는게 나을 것 같았다.
내 대답에 새초미는 자신만만하게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난 최대한 원래의 이야기대로 흐름이 이어지도록 할거야. 로우란을 방해하면서 말야."
"저기...눈 앞에서 그렇게 대놓고 선언하면 반응하기 곤란한데?"
"그래? 어쩌면 화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렇게 정면에서 도전받는건 싫어하지 않으니까.
새초미 널 상대로 힘싸움을 하는건 꺼려지지만, 지혜를 겨루는 대결이라면 나도 사양하지 않아도 되고."
새초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헤에, 설마 로우란은 머리를 쓰는 승부라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거야?"
"슬기로움으로 시련을 극복하는게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면, 거기에 응해주는게 악역의 도리니까."
"방심하지 않는게 좋을걸? 토끼의 지혜는 맹수조차 곤경에 빠뜨리니까."
"새초미 너야 말로 날 사령 몬스터 따위와 똑같이 취급하면 곤란해.
힘밖에 모르는 난폭하고 무식한 녀석들과는 다르니까 말야."
"그럼 로우란에게도 깨닫게 해줄께.
토끼를 깔본 포식자들의 최후를 말야."
"나야말로 깨닫게 해줄께.
악당의 뒷통수조차 후려칠 수 있는 교활한 악당이란 바로 나라는걸 말야."
"...후후후."
"하하하!"
"「「후하하하하하!!!」」"
"...로우란은, 의외로 분위기를 잘 타는구나?"
"말하지마. 부끄러우니까."
머쓱해하는 날 보곤 새초미가 싱긋 웃었다.
밤이 늦었기에 이만 잠자리에 들었다.
"늑대옷은 갈아입지 않는거야?"
"이번 이야기에서 나는 『늑대』역이니까 벗을 순 없다구."
"잘 때까지 그러진 않아도 되잖아?"
"...실은 여벌옷이 없어.
예전에 네가 준 파자마는 낡아버렸고."
"벌써?"
"『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서 제법 오래 입고 지냈거든."
"아..."
새초미는 입을 다물었다.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는 새초미의 모습에 피식 웃곤 손을 저었다.
"자업자득이니까 신경쓰지마.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은 갈아입을 옷 따윈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새초미의 손에서 빛무리와 함께 토끼장식이 달린 나선무늬의 요술봉이 나타났다.
휘둘러지는 요술봉 끝에서 노란 별과 분홍색 빛줄기가 방을 가득 채우며 튀어올랐다.
빛이 사라진 후 새초미는 손에 든 옷 한벌을 내밀었다.
"이거 줄께."
"하핫, 고마워."
새초미가 건넨 옷을 기쁘게 받아들었다.
고양이 발자국 무늬가 찍힌 파자마네.
귀여운 의상을 선물하는건 새초미의 취향인걸까?
파자마를 갈아입고 돌아온 뒤, 잠자리를 두고서 새초미와 짧은 실랑이가 있었다.
내가 바닥에서 자겠다는 제안을 새초미는 단칼에 끊었다.
"침대는 충분히 넓어. 그리고 바닥은 지저분해.
애써 만들어준 파자마를 더럽힐 셈이야?"
강압적이네. 하지만 싫지 않아!
손가락을 까딱까닥하며 이리 오라는 신호에 얌전히 침대 위로 올랐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침대에 함께 자는 편이 나로서는 기뻤으니까.
침대에 새초미와 마주보며 옆으로 눕자 문득 새초미가 샐쭉 웃었다.
"혹시 엉큼한 생각 하고 있어?"
"...설마."
"내 눈을 보고 말해줄래?"
"......"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시선을 회피하자 새초미의 눈에 장난기가 돌았다.
"늑대씨, 늑대씨."
"왜?"
"늑대씨는 왜 그렇게 귀가 커?"
"네 말을 더 잘 들으려고."
"늑대씨는 왜 그렇게 눈이 커?"
"너를 더 잘 보려고."
부스럭 거리는 이불 밑으로 새초미가 내 손을 맞잡았다.
"늑대씨는 손도 참 크네."
"너를 더 잘 잡으려고."
"입도 굉장히 크잖아?"
"너를 더 잘 잡아먹으려고!"
"아하하하하~!"
벌떡 몸을 일으키며 위협하자 새초미가 웃음을 터뜨리며 발버둥쳤다.
가벼운 힘으로 어깨를 잡힌채 침대에 눌려 바둥거리던 새초미와 눈이 마주쳤다.
"안 잡아먹을거야?"
"뭐?"
"로우란은 늑대잖아?"
얼빠진 날 보며 새초미가 장난스레 물었다.
"늑대는 빨간모자가 오기 전에 할머니를 잡아먹어야 하잖아?"
"...그건 원래 이야기대로인데?"
"그러니까 잡아먹지 않는거야?"
"그래. 나는 이야기에 반항하는 나쁜 늑대니까."
"이상한 말..."
새초미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밤이었다.
방금전 일로 초조해하는 내게 「이러면 아무런 계략도 안떠오르지?」라며 새초미는 배시시 웃었다.
깜찍하긴...
머릿속이 꽃밭이 된 상황에서 꿍꿍이를 꾸밀 수도 없기에 날이 밝을 때 까진 얌전히 잠에 빠지기로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잠자리에서의 이 야릇한 분위기는 다음날 해프닝을 예고하고 있던걸지도 몰랐다.
"로우란! 너 거기서!"
"쫓아오지 않으면 멈출께!"
"무리야!"
"거기선 안쫓는다고 해라!?"
난데없이 대낮부터 집안에서 새초미와 술래잡기를 하는 해프닝 말이다.
새초미의 돌격을 숨가쁘게 피하면서, 술래잡기가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보았다.
시간은 정오.
"...빨간모자가 늦네."
"그러게."
너무 늦어!
벌써 정오가 되었는데도 안와!
이래서야 아침 일찍 늑대 파자마로 갈아입은 의미가 없잖아?
어째서 이렇게 늦는거야?
설마 아직까지도 빨간모자가 찡찡이랑 노는데 빠져있는건 아니겠지?
강다리랑 미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 역할인 키키가 어떻게든 빨간모자를 할머니 댁으로 보냈을텐데.
대체 뭘하느라 이렇게 늦는거람?
"혹시 로우란 네가 빨간모자한테 뭔가 한거 아냐?"
"뭐든 내 탓으로 돌리는건 좀 봐주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늦잠 자고 있는걸지도 모르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구."
의심으로 가득찬 새초미의 시선에는 그저 억울할 따름이다.
슬슬 조바심이 이는지 창밖을 살피던 새초미가 뭔가 떠오른듯 내게 손짓했다.
"로우란, 로우란."
"왜그래?"
"어쩌면말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아서 빨간모자가 오지 않는걸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할머니가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았으니까 빨간모자가 안오고 있을지도 모른단거야."
"아니, 그 논리는 이상하잖아."
내 딴죽을 무시하고 새초미가 말을 이었다.
"원래 『빨간모자』이야기 대로라면, 할머니가 늑대에게 잡아먹힌 뒤에 빨간모자가 찾아오잖아?
그러니까 빨간모자가 오지 않는건, 아직까지도 할머니가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않았기 때문일거야!"
"그런식으로 인과관계로 묶는건 이상하잖아?
애초에 그 둘은 별개의 사건이라구."
"하지만 여긴 이야기 나라니까, '이야기의 순서'가 인과로서 성립할지도 모르는걸?"
"...확실히, 그렇게 말하면 부정하기도 곤란하네."
"그러니까 로우란! 나를 먹어!"
"싫습니다."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네.
술래잡기의 원인을 떠올리곤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새초미를 살폈다.
"순순히 먹어줄 생각은 없어 로우란?"
"없어. 내가 왜 새초미 널 먹어야해?"
"애초에 늑대 역할인 로우란이 날 잡아먹지 않으니까 아무 사건도 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는거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날 닥달하곤 새초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게다가 어제 내가 말했지?
난 최대한 원래의 이야기대로 흐름이 이어지도록 할거라구!"
"...그래서 나에게 먹히시겠다?"
"이것이 나의 각오야!"
"누가 거기까지 하라고 했어!?"
"시끄러! 먹어라!"
"으아아!? 잡아먹힌다!"
"네가 잡아먹는 쪽이잖아!"
"누군가! 도와줘~~~!!"
"야! 너 거기서!
여자애를 부끄럽게 만들 셈이야? 아앗!?"
콰당!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덤벼들던 새초미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새초미의 모습에 놀라서 뜀박질을 멈추고 되돌아왔다.
"괜찮아 새촘아?"
쓰러진 새초미를 부축해 일으키는데 새초미의 손이 재빨리 움직였다.
꽉.
"잡았다..."
"엑?"
무릎을 굽힌채 부축하던 날 새초미가 껴안았다.
뻣뻣하게 굳어선 옴짝달싹 못하게 된 내 귀로 새초미가 속삭였다.
"날 먹어."
"내키지 않아."
"부탁할께."
"그런걸 내게 부탁해도..."
"...조금 정도는 내 부탁을 들어줘도 좋잖아.
가끔은 변덕을 부려도 괜찮잖아?
로우란은...나쁜 늑대니까."
"......"
목을 감싼 팔에서 떨림이 느껴진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란 이런거려나.
이미 새초미에게 붙잡혔고, 이대로 거절하더라도 새초미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새초미의 어깨를 잡아 몸을 밀어내곤 새빨간 새초미의 눈의 마주봤다.
"...좋아. 네가 바란다면 잡아먹어주겠어.
빨간모자를 먹기 전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대로 새초미를 안아들고 침대에 뉘였다.
침대에 누운 새초미가 다소 당황한채 날 올려다보았다.
"저기, 로우란...? 어째서 침대에 온거야?"
"이야기의 원래 흐름을 지키려는 너를 존중하고 싶었으니까."
- 할머니를 잡아먹은 늑대는 침대에 누워 빨간모자를 기다렸답니다.
노래하듯 이야기를 읊고선 말을 덧붙였다.
"다만, 잡아먹는 방식은 내가 정할테지만."
"로우란의 방식...?"
긴장한듯 작게 움츠리는 새초미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이제와서 무섭다고 말해도 그만두지 않을테니까."
"......"
내 으름장에 새초미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내 귀를 쓰다듬으며 새초미가 속삭였다.
"...할머니의 귀는 왜 그렇게 커?"
새초미의 물음에 한차례 눈을 감았다 떴다.
"...상냥한 네 목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귀를 만지던 손이 눈가를 어루만졌다.
"할머니의 눈은, 왜 그리 커?"
"어여쁜 네 모습을 더 눈에 담으려고."
천천히 새초미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참 크네."
"따스한 너의 손길을 더 잘 느끼려고."
"입도 굉장히 커졌잖아?"
"...가까이 있으니 그렇게 보이는거란다."
가까워진 내 얼굴을 마주하던 새초미가 멈칫했다.
"대사가 달라 로우란."
"말했지? 잡아먹는 방식은 내가 정한다고."
눈빛이 흔들리는 새초미를 달래듯 말을 건넸다.
"아프지 않게 할테니까, 무섭다면 눈을 감고 있어."
"......응."
천천히 새초미의 눈이 감겼다.
새초미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늑대 파자마의 앞섶 지퍼를 조심스레 내렸다.
지이익-
맞잡은 새초미의 손에 힘이 실렸다.
똑똑똑!
"「「!?」」"
"할머니~! 있어~?"
문 밖에서 빨간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가 왔군.
어느새 눈을 뜬 새초미가 숨죽인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잠시 생각하다가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 주겠니?
곧 끝난단다."
"엣, 잠깐, 로우, 읍?"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하는 새초미의 입을 막았다.
"(쉿, 여기까지와서 그만두라고 말할 셈이야?)"
"...할머니?"
밖에서 의아한듯 부르는 빨간모자의 소리에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할머니는 조금 볼 일 중이니까, 미안하지만 조금만 밖에서 기다려주렴."
"......"
빨간모자는 대답이 없었다.
삐걱
"어?"
드드득- 우직!
문 손잡이에서 나는 심상찮은 소리에 당황해서 말이 떨렸다.
"저, 저기 빨간모자야? 이 할미를 보고싶단 마음은 알겠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지 않으련?"
"할머니 목소리가 아니잖아!!!"
콰직! 벌컥!
고함과 함께 힘차게 문이 열렸다.
"「「「......」」」"
부서진 문고리를 쥔채 푸른 눈동자를 부릅 뜬 빨간모자.
그리고 침대 위에서 새초미(할머니)의 입을 틀어막은채 위에 올라탄 나(늑대).
빨간모자의 손에 들린 바구니가 떨어졌다.
"할머니한테서 떨어져!"
순식간에 덤벼든 빨간모자의 다리가 눈앞에 솟았다.
빠악!
"큭!"
우당탕!
침대 밖으로 구르는 날 뒤로하고 빨간모자는 새초미를 부축했다.
"할머니! 괜찮아!?"
"괘, 괜찮아 빨간모자."
새초미를 등 뒤에 숨긴 채 날 노려보는 빨간모자를 보며 입가를 훔치곤 일어섰다.
"흥, 빨간모자 네가 오기 전에 할머니를 먼저 잡아먹으려 했는데 일이 귀찮게 됐군."
"너...! 뭐하는 짓이야 이 똥개야!"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빨간모자에게 코웃음치곤 말을 정정했다.
"하! 누가 똥개라는거냐? 이 몸은 개가 아니라 늑대다!"
"...뭐?"
"너랑 네 할머니를 잡아먹기 위해서 지금까지 얌전히 멍멍이인척 하고 있었던거라구."
"너, 너...! 날 속였구나!"
"속이고 자시고간에, 애초에 애완견으로 삼는다면서 다짜고짜 끌고온게 누군데그래!"
"으윽...!"
이를 갈며 분해하던 빨간모자는 등뒤에 선 새초미에게 사과했다.
"할머니 미안해. 내 탓에 할머니를 위험에 빠지게 만들어버렸어."
"아, 아냐! 빨간모자는 나쁘지 않아! 나쁜건 로우...아니, 저 늑대니까!"
"눈물겨운 가족애로군. 그래봤자 소용없지만."
"뭐?"
"그야 너희 둘 모두 사이좋게 내 뱃속에 들어갈 운명이니까.
마지막 배려로 내 뱃속에 들어갈 순서 정도는 정하게 해주지. 아하하하하!"
분한듯 노려보는 빨간모자의 행태에 피식 웃었다.
"뭐야? 그 눈은?
너 먼저 잡아먹히고 싶으냐?"
"그, 그래! 할머니에겐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할테니까!"
"아, 안돼!"
빨간모자의 결심에 새초미가 당황해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 위험해!"
"빨간모자보다 날 먼저 먹어! 안그러면 이야기의 순서가...!"
"할머니..."
호소하는 새초미의 등 뒤로 빨간모자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할머니에게 손대게 하진 않아! 부탁이야. 할머니 대신 나를 먹어!"
"아, 안돼!"
"어째서야? 나는 할머니를 지키고 싶은데...!"
"엣, 그치만, 그럼 이야기 나라가... 아무튼 안돼!"
"영문을 모르겠어 할머니!"
아니, 그 장면에선 적어도 빨간모자가 소중하니까라고 말해라. 할머니잖아.
새초미의 대답에 빨간모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빨간모자와 새초미 사이에 누가 먼저 나(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인지 말다툼은 계속되었다.
새초미는 원래 이야기대로 할머니인 자신이 먼저 늑대에게 잡아먹혀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빨간모자는 자신이 얼마나 할머니를 사랑하는지를 언급하며, 자신이 먼저 잡아먹히겠다는 주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부탁이야! 우리 할머니를 잡아먹는 대신에 나를 먹어!"
"안돼! 빨간모자 대신 날 먹어!"
빨간모자의 푸른 눈동자와 새초미의 붉은 눈동자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나야! 나를 먹어!"
"안돼! 나를 먹어!"
빨간모자가 새초미를 가리키며 외쳤다.
"할머니는 주름투성이니까 맛이 없을거야! 그러니 날 먹어!"
"뭐, 뭐라구?"
발끈한 새초미가 빨간모자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빨간모자 같은 어린애는 풋내가 날거야! 그러니 날 먹어!"
"뭐, 뭐야!?"
"내가 뭐 틀린말 했니?"
"이, 이...!"
서로가 희생하려는 아름다운 조손간의 사랑은 어느샌가 추한 트집잡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부들부들 떨며 서로를 노려보는 빨간모자와 새초미의 모습에 질려 둘을 말리기 위해 손을 들었다.
"자자, 이제 그만 진정하라구.
어차피 조손 모두 사이좋게 나한테 먹힐 처지인데, 그만 사이좋게 지내자구. 응?"
"그럼! 너는 어느 쪽이 좋은데!"
"맞아! 누가 더 좋은거야!"
"엣?"
둘 사이에 튀던 불똥이 내게 옮겨붙었다.
"애초에 네가 순서를 정하라니 뭐니 하니까 이렇게 된거 아냐!"
"그래! 무슨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나 몰라라 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따지는 둘의 박력에 밀려 뒷걸음질쳤다.
"자! 말해봐!"
"누가 먼저야?"
"지, 진정해. 순서 같은건 아무래도 좋잖아?"
"거짓말하지마!
난 금발에 푸른눈이고, 할머니는 은발에 붉은 눈이잖아!
애초에 타입이 정반대라구!"
난데없이 너희들 매력 포인트를 강조하지 마라.
"내쪽이지?
내 눈이 예쁜 보석 같다고, 내 머리카락도 예쁜 은빛이라고 말했잖아?"
"아니, 내쪽이지?
애초에 네가 내 애완견이 된것도, 내 금발 푸른눈에 헤롱헤롱해서 날 따라왔기 때문이잖아?"
...죽을 맛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둘에게 끙끙대고 있던차에 툭하고 새초미가 중얼거렸다.
"...말했던 주제에."
"응?"
"무섭다고 말해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방금전 내게 속삭였으면서."
"......"
빨간모자의 눈이 험악하게 빛났다.
"아, 그래! 그랬었지! 하하하! 그래. 역시 내뱉은 말을 뒤로할 순 없으니까!"
"이겼다!"
"으그극..."
새초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빨간모자는 분한듯 신음을 흘렸다.
어째서 이런걸로 분해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빨리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마음 뿐이라 곧장 새초미의 손을 잡았다.
"자, 그럼 방금 전의 계속을 해보자구."
"...응."
시선을 피하는 새초미의 손을 잡고 이끌던 차였다.
꾹꾹.
내 파자마를 붙잡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저기..."
"응?"
빨간모자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딸기 케이크 먹을 때, 딸기는 먼저 먹는 쪽? 아니면 나중에 먹는 쪽?"
빨간모자의 질문에 새초미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이젠 좀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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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비공개 모드로 해뒀었다니...
정말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아아!!!!!OTL;;;;;;
나는 정말 바보......ㅠㅠㅠㅠㅠㅠ
청출어람 11화(빨간모자 하(下)편)로 빨간모자편이 마무리되도록 하겠습니다m(_ _)m;
이불이는 청출어람 11화 다듬으면서 1화부터 정주행 중입니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 후반부 전개와 관련된 대화 같은걸 재확인한 뒤에 이불이 55화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엑셀로 에피소드 목록 오랫만에 확인 했네요=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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