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와 모모가 지구에 온지 일주일이 지났다.
정체불명의 세제로 세탁기를 고장내는 일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 큰일은 없었다.
우리 집에 거주하면서, 둘은 틈틈이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여름동안 입을 옷을 사준 답례라나.
가끔 식사 준비를 도와주는 모모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미각치인 라라가 매번 독요리를 만들어 내는걸 생각하면 이 요리 솜씨의 반만 라라에게 나눠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나도 집안 청소에는 한팔을 거들면서 혼자 지낼 때 보다 한결 집안일이 수월해졌다.
덕분에 요 일주일간은 안락함을 누릴 여유가 있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지.
다만 굳이 사건이랄 만한 일이라면, 세탁기에서 탈수가 끝난 빨랫감을 꺼내면서 내것이 아닌 속옷을 막 집어 들었을 때,
그 순간을 우연히 목격한 나나가 전력으로 라이더킥을 날려온 것 정도?
결국 그 후론 빨랫감을 널 때는 나나와 모모도 함께 하기로 했다.
다시금 돌아온 주말을 맞이해서 둘은 라라가 있는 리토네 집에 놀러 가 있다.
저녁 식사까지 하고 돌아오겠다고 모모에게서 연락도 왔으니, 나도 안심하고 외출하기로 했다.
서점도 가보고 겸사겸사 점심도 해결할 겸 상점가로 발길을 옮겼다.
"수염?"
"룬?"
상점가를 걷던중 원피스 차림의 룬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채 멈춰섰다.
반가운 마음에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하자, 룬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기껏 휴일에 나와서 만난게 너라니..."
"어이..."
한숨을 내쉬는 룬의 반응에 내민 손이 무안할 지경이다.
기분을 고친건지 축처진 어깨를 펴고 룬이 얼굴을 들었다.
"아무튼, 네가 혼자 있다니 드문 일이네?
주말마다 매번 여자를 바꿔 끼고 다닌다던데."
"아니, 그냥 주말이라 평범하게 나들이 나온것 뿐이라구.
그런데 룬 너 혼자야?"
"보면 알잖아.
뭐야? 헌팅이라도 할 속셈?"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혹시 시간 있으면 함께 도서관에라도 가지 않을래?"
"뭐?"
장난스런 헌팅 발언에 어벙벙했는지 룬은 한차례 눈을 깜박이곤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룬의 태도에 민망해져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지 마."
"...뭐, 됐어. 용무가 없으면 난 이만 갈래."
내 변명에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난 룬은 왼어깨에 맨 숄더백을 고쳐들었다.
"그리고 말야, 애초에 도서관으로 가자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니까."
팟-하고 내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댄 룬은 한차례 날 노려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가 버렸다.
쌀쌀 맞구먼.
오늘따라 신경질적인 룬의 반응에 입맛을 다시다가 서점으로 향했다.
"......"
"......"
잡지「MISTY」를 손에 든 룬.
「달러쇼크」를 막 꺼내든 나.
서점 안에서 고른 책을 훑어보던 중 신간 코터에서 이쪽으로 오던 룬과 마주쳤다.
"또 너야?"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 말라구.
아무튼 또 만나게 되다니, 마을 참 좁지?"
천연덕스럽게 웃어넘기자 룬은 짧게 한숨을 쉬곤 내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니까 만화책이라도 골라 볼 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읽어?"
"즐겨보는 만화야 있다만, 꼭 그것만 보는건 아니잖아?"
"흐응...그래? 그럼 난 이만."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룬은 패션 코너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책을 더 고르려나본지 이것저것 꺼내보는 룬의 모습을 보다가 먼저 계산대로 이동했다.
고른 책들의 계산을 끝마치고 서점을 나오며 시간을 확인하니 슬슬 점심때였다.
그렇게 배가 고픈건 아니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빵 같은 걸로 군것질 해도 좋으려나?
최근 인기있는 미소라당의 크로켓이라든가.
"......솔직히 말해봐. 너 날 쫓아온거지?"
"아니아니. 내가 먼저 여기 왔다구?"
어째서 내가 그런 스토커 취급을 받아야 하는거야?
미소라당에서 먹음직스러운 빵들을 둘러보다가 크로켓을 집어서 접시에 담고 있던중, 막 입구에서 들어온 룬과 마주쳤다.
의심이 물씬 깃든 눈으로 지긋이 날 바라보며 묻는 룬에게 어처구니 없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이걸로 오늘만 벌써 세번째 만남이다.
이래서야 룬이 의심을 가져도 이상하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먼저 온 상황에서야 억지가 따로 없다.
"왜 네가 여기 있는거야?"
"점심거리 사러 온거야.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식사도 밖에서 해결할 겸해서 나온거라고."
"아무도? 너 혼자서 사는거 아녔어?"
"라라네 동생들이 찾아왔거든.
나나랑 모모말야.
유우키네 집엔 방이 없대서, 지금 우리집에서 하숙하고 있어."
"헤에..."
내 대답에 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거야?"
"그애들, 잘도 너랑 같이 지낼 생각을 했네."
"......그러게."
뭐, 나도 동감한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지.
"두명에게 이상한 짓 같은걸 하진 않았겠지?"
안하거든요. 대체 뭔 베짱으로?
애초에 그런건 베짱도 아니지만.
"난 걔내들이 이상한 짓을 할까 오히려 걱정이다만..."
세탁기 고장낸 것 빼면 아직은 괜찮긴 한데, 가끔 특이한 우주 동식물을 소환해대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네 집에 작은 라라가 두명 지낸다고 생각해봐.」라는 내 말에, 어릴적 라라와 함께 지내면서 겪은 수난이 떠오른건지,
룬은「작은 라라가 두명...」하고 중얼거리다가 핼쓱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휘청휘청하다가 머리를 휘휘 내젓고 정신을 차린 룬은 슈크림을 골라 계산대로 갔다.
나도 크로킷이 담긴 접시를 들고서 룬의 뒤를 따랐다.
각자 선택한걸 카운터에 올려놓자 직원이 계산대를 두드렸다.
"슈크림 300엔, 크로킷 300엔.
합쳐서 600엔 되겠습니다."
"어?"
지갑을 꺼내들다 놀라는 룬의 반응에 직원이 당황하며 물었다.
"저기, 두분 함께 오신것 아니었나요?"
"아니, 저희는..."
"여기 600엔요."
옆에서 보고 있다가 냉큼 돈을 지불했다.
"야, 너?"
"뭐 어때. 세번이나 만난것도 인연인데 이번엔 내가 살께."
"하아...맘대로 해."
오늘로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채 룬은 지갑을 되돌렸다.
"오늘 아침에 말야, 모처럼 일찍 일어나서 조조로 영화를 보고 왔는데 내용이 이상했어."
"영화가 재미 없었어?"
"재미는 있었어. 근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거야.
20년전 사랑에 대해 회상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였는데, 두 남녀가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 전개가 도무지 납득이 안가더라구.
피치못할 사정으로 남자가 늦고, 사정을 말하려고 집으로 전화했을땐 이미 여자가 약속 장소로 나간 뒤였어.
남자가 여자를 데리러 약속 장소로 뛰어갔을 땐, 공교롭게도 기다리다 지친 여자도 남자의 집을 찾아가면서 둘이 엇갈려 버리는거지.
거기서 오해가 생겨버려서 점차 일이 커지면서 결국엔 비극을 맞이한다니...정말 싫었어.
어째서 둘다 휴대폰을 쓸 생각을 하지 않은거야?"
"아니, 그거야 20년 전에는 아직 휴대폰이 대중화 되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서 그런거였어?"
가게를 나온뒤 상점가에서 윈도 쇼핑이라도 하려고 가다가 룬과 방향이 같았기에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룬 가라사대, 슈크림의 의리라고 한다.
300엔짜리 의리 치고는 꽤나 대접이 후하네요.
룬의 속도에 맞춰 발걸음을 조절하며 이야기를 듣던중, 주변을 둘러보던 룬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희희낙락해 가지곤..."
"응?"
룬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다.
주말의 거리는 커플로 분주했다.
내려쬐는 여름 햇살의 따스함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지, 커플들은 거리낌없이 후끈후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서로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한껏 남에게 과시하는 애정행각에 보는 내가 더울 지경이라 커플들에게서 시선을 떼었을 때, 고개를 돌리던 룬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자주빛 눈동자가 깨끗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룬이 쌀쌀맞게 시선을 외면했다.
한차례 머리카락을 넘긴 룬은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주말에 마저 네 얼굴을 보다니,
괜히 휴일이라고 밖에 나오는게 아니었어."
"매정하구먼..."
"너한테 정붙이고 싶진 않거든?"
아, 그러십니까?
내쪽에서 불평해봤자 괜히 본전도 못 찾을것 같으니 침묵하고 있는게 상책이다.
"하아...리토군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넌 언제나 유우키 타령이구나.
그렇게 유우키가 좋아?"
"하~! 적어도 너보단 상냥하거든?"
...전언 철회.
코웃음을 치는 룬의 대응에 조금 발끈해선 무심코 비꼬았다.
"...어째서 기준이 내가 되는지 모르겠다만, 그거 절대로 유우키에 대한 칭찬이 아니니까."
"에? 어째서?"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의미야?"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용맹무쌍한 멋진 수염.
질실강건의 터프한 사나이 그 이름 아키츠 료스케! 이 정도로 평가하고 있어?"
내 말에 경계하던 룬이 동정어린 눈빛으로 날 쳐다 보았다.
"...자의식 과잉은 병이야 수염.
너에 대한 평가는 바람둥이에다 응큼한 주제에 힘만 쎈 바보로 충분해."
"...뭐, 좋아. 네가 대충 어떻게 생각하는진 알았으니까.
아무튼, 그런 평가를 받는 나랑 비교해서 상냥하다고 하는걸 칭찬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몇명이나 될거 같아?
「적어도 그녀석 보단 나으니까 힘내...」라는 위로조차 안될걸?
뭐, 네가 날 '상냥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아...너!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야유하는 내게 당황한 룬이 벌컥 화를 냈다.
"너 같은거랑 비교하지 않아도 리토군에 대해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
"오~ 그래?"
"이익...! 깔보는거야?
나도! 1학년땐 리토군이랑 같은 반이었어!
2학년이 되서야 알게된 너보다도 훨씬 오래 알고 지냈단 말야!
너보단 리토군에 대해 많이 안다고!"
"아...그렇단 말이지?"
바락바락 대드는 룬의 모습에 약간 심술이 났다.
애꿎은 불평을 들었으니 조금 정돈 골려줘도 되겠지.
"그럼 번갈아가면서 유우키에 대해 알고 있는걸 말해보는게 어때?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쪽이 이기는걸로.
네가 이긴다면 널 자극한걸 사과할께."
"좋아.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구."
"그럼 먼저 나부터 시작하지.
이거 알고 있어? 유우키가 식물을 아끼는거.
교실의 화병에 물을 갈아주는건 언제나 유우키였다구?"
"어...그랬어?"
...진짜 몰랐냐?
놀라는 룬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놀랄 지경이다.
"그럼, 이제 룬 네 차례야."
"리토군은 멋있어. 상냥하고, 용감하고..."
맞는 말이긴 하다만...
"...중학생도 그것보단 어휘력이 풍부하겠다."
"야!? 그거 무슨 의미야!"
"아무튼, 다시 내 턴."
"무시하지마!"
"유우키는 축구를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엔 축구부였대.
고등학교 와서는 여동생 혼자 집안일을 하게 놔둘 수 없어서 부활동을 그만둔 상태야.
자, 룬 네 차례."
"리토군은, 그러니까..."
"아직 내 턴이 안 끝났나 보네."
"자, 잠깐!"
"유우키의 아버지는 사이바이씨라고, 유명한 만화가지.
열혈학원을 연재하고 계셔.
자, 그리고?"
"그, 그러니까..."
"OK. 앞으로도 쭈~욱 나의 턴."
"스, 스톱! 그러니까, 리토군은 내 첫키스 상대...윽!? 렌 너는 조용히 있으라구!"
말을 꺼내던 룬이 두통이 이는지 갑자기 머리를 싸맨다.
아무래도 렌의 의식과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나보다.
"...유우키의 첫키스는 네가 아니라 렌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알고 있는거야!?"
"2학년 초에 보니까 그걸로 트라우마가 생겨있던데?"
"으으..."
"뭐, 다르긴 하지만 인정해줄께.
다시 내 차례. 리토의 집엔 거대한 우주 식물이 있어.
이름은 셀린인데 라라가 유우키의 생일 선물로 준거래.
라면을 좋아한다더라고. 흥미롭지?"
"윽..."
"아무튼 이걸로 4대 2로 내 승리인가?"
"4대 4야!
난 처음에 3개나 말했잖아!"
"...멋있고, 상냥하고, 용감하다는거?"
"그래! 그거!"
"......"
생각나는대로 주워담아도 그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속되는 리토 관련 이야기에서 밀리자 룬이 결국 버럭 소릴 질렀다.
"상관없잖아!
결국 중요한건 내면 아냐!?"
...통속적인 대사라고 트집 잡진 않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적어도 호불호나 취미 정도는 알아둡시다.
본격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룬을 내려다보자 룬이 발을 동동 구르더니 외쳤다.
"이건 불공평해!"
"...뭐가?"
"난 지구에 온지 이제 겨우 1년 밖에 안됐잖아!
이렇게 여자애를 괴롭히니 좋아!?"
이 상황에 와서 여자인걸 이유로 회피한다는건 패배 선택지입니다.
게다가 1년동안 잘만 쫓아다녔으면서 시간 타령 하는건 안된다고 생각해요.
나야 미캉이랑 리토 중학교 졸업 앨범 보면서 얘길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들이지만.
"뭐, 좋아좋아. 그럼 무승부인걸로 해두자구."
설렁설렁 신경쓰지 않는 내 태도에 결국 룬이 폭발했다.
"이...! 야쿠자같은 불량배에다 세자리수 여자아이들을 거느리고선 항상 여자를 바꿔끼고 다니는데다
여탕도 엿보고 유령한테도 추파를 던지는 여동생 모에 로리콘 변태 수염 놈아!!!"
"......"
순식간에 몰아치는 언어의 폭풍우를 내뱉곤 씩씩거리는 룬을 어벙벙한채 바라보다가 감탄사를 흘렸다.
"뭐야, 잘 말할 수 있었잖아?
유우키에 대해 말할 때도 이 정도로 술술 말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다."
"뭐?"
내 말을 멍하니 듣던 룬은 잠시후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리토군보다 네 루머 따윌...
...허무해..."
"싸움은 언제나 허무함만을 남길 뿐이야."
"불량학생인 네가 말하지 마...
정말이지 어째서 이런 전개로 되버린거야...?"
"글쎄? 아무튼 바닥은 지저분하니까 이만 일어나라구."
좌절하는 룬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데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금전의 말다툼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는지 다시 몸을 일으킨 룬과 룬의 손을 잡고있는 내 모습을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행인들이 있었다.
「저녀석, 또 여자랑 함께 있잖아?」
「지난주엔 코스프레 쌍둥이 외국인이었는데 이번엔 여고생이네?」
「응? 몇주전 주말엔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였는데?」
「아니아니. 비오던날 밤엔 포니테일의 여학생이랑 한우산을 쓰고 있었다구?」
「과연 아키츠 료스케. 볼 때마다 매번 여자가 바뀌는군...」
역시 너무 소란을 피워 버린게 잘못이었나.
이쪽을 보며 수근수근 하는 이야기가 귀를 파고 들었는지, 룬의 얼굴은 귀뿌리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역시 너랑 함께 있는게 아니었어..."
"그, 뭐냐...면목 없구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룬의 손에서 내 손을 슬그머니 치우곤 손수건을 건넸다.
"그럼 나랑 지금 유우키네 집에 가볼래?
나나랑 모모를 데리고 돌아갈 면목으로 들르면 되겠지."
여러가지 이유로 멘탈이 너덜너덜인 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보았다.
"에~ 너치곤 괜찮은 생각이잖아?
좋아! 그럼 방금전 가게에서 빵이라도 사들고 가자."
내 제안에 반색한 룬이 맞장구를 쳤다.
기분을 바꿔 다시 미소라당 쪽으로 향하던 룬이 문득 생각난듯 물었다.
"근데 리토군의 집 알고 있었어?"
"응. 미캉의 장보기를 도와주면서 알게 됐거든."
"미캉?"
"유우키의 동생말야."
"동생? ...아아, 게임속에서 만난 어린애가 리토군 동생이었구나?"
"...설마 몰랐던거야?"
"...몰랐어. 직접 대화해 본적도 없는걸."
주저하며 말한 룬의 분위기가 다시금 가라앉아 버렸다.
"난 리토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걸까...?"
"이봐, 뭘 그렇게 침울해 하는거야?
취미나 유우키의 사정 같은거야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는거잖아.
내가 알고 있는건 말해줄테니까 적당히 기운 내라고."
풀죽은 룬을 달래려고 리토와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올해 봄 구교사에서 있었던 일이라든지, 여름 축제때 있었던 일이라든지, 전골 파티때 있었던 일이라든지.
같은 반이 아니어서 이런저런 일에 함께 하지 못한게 섭섭해 보이는 룬이었지만,
리토와 친구들이랑 여름바다에 다녀온 추억을 위안삼는것 같았다.
룬의 말로는 실은 그땐 여름바다에 간게 아니라, 라라의 발명품 탓에 「오키나와」가 아닌 「오키와나」라는 외계 원시 행성에 도착해 버려 표류하게 되었다지만.
다행히 미카도 선생님의 덕분에 무사히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리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간간히 룬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은하 통신 판매에서 주문하는게 취미라든지,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소소한 이야깃거리였다.
미소라당에 다와갈 즈음 휴대폰에 메일 도착 알람이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법소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쿄코잖아? 연락을 주고받으려고 룬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께."
"여자?"
"...질문이 이상하지만. 맞아, 아르바이트 하면서 알게된 사이."
"흥. 네 오입 이야기엔 관심 없으니까 멀리 가버리라구."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무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늑장부리면 먼저 미소라당에 가 있을꺼야?"
룬의 엄포에 수긍하곤 약간 떨어져 쿄코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 쿄코 자신이 새로 출연하게 된 프로그램이 있으니 응원해달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연락을 해주는 쿄코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라 기대하고 있겠다고 답했다.
그후 서로간에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쿄코는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
사이난 운동회 같은 학교 활동을 부러워하던 쿄코가「아키츠군이 운동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재밌을것 같은데 아쉬워」라고 즐거운듯 말해준게 기뻤다.
저번에 할로윈 특집에 참가했던 닌자 소녀가 사실은 사이난 구교사에서 지내던 유령 소녀였고,
지금은 육신을 얻어서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에 쿄코는 놀라운듯 흥미진진하게 상세한 내용을 물어왔다.
「아키츠군의 주위에는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구나?」라며 부러워하는 쿄코의 반응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을 기약하고 통화를 마친뒤 룬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룬에게 한 남성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안경을 쓴 시원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룬이 싫어하는 티를 내거나 하진 않았기에 아는 사람인가 생각하며 다가가자 남자가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란듯한 남자의 표정에 고개를 돌린 룬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수염. 왔어?"
"룬? 이 사람은?"
설명하려던 룬보다 먼저 남자가 의아한듯 물었다.
"저기, 혹시 남자친구니?"
"에~? 아하하 아뇨아뇨~ 무슨 그런 터무니 없는 말씀을...큭!?"
남자의 물음에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너털 웃음을 짓다가 정강이를 차였다.
"야! 너 그거 무슨 의미야!?"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곤 노려보는 룬에게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나로서는 너무 과분하다는 의미였다구?"
"진짜지?"
"그, 그렇다니까?
아무튼 이분이랑 이야기 나누던 중 아니었어?"
당황해하는 남자의 옆에서 더이상 추태를 쬘수도 없었기에 적당히 룬의 주의를 남자에게로 돌렸다.
남자는 「반짝반짝 예능」이라는 기획사 소속이었다.
신인 아이돌을 물색하러 거리에 나왔다가 룬의 모습이 보여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남자의 제의에 룬은 머리를 굴리는듯 잠시 생각하더니 곧 승낙했다.
룬이 명함을 건네받은 뒤, 또다른 신인 후보를 물색하러 남자가 떠나자 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걸로 리토군의 마음을 되찾는거야!"
"의욕만만이구나?"
"당연하지! 반드시 톱 아이돌이 되서 리토군을 내게 반하게 만들고 말겠어!"
"어 그래. 화이팅."
리토의 성향상 톱 아이돌이 되는걸로 그렇게까지 돌변한 대응을 할거라곤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데.
모처럼 기운이 펄펄나는 룬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었기에 잠자코 응원하기로 했다.
"뭐야? 좀더 응원하라구."
"아아, 유우키를 위해서 힘내겠다는거지?"
"당연하지! 난 몸도 마음도 리토군만의 것이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런 표현은 어쩐지 자신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 같아서 싫어."
자신의 모두가 상대방의 것이라는 연애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전부를 일방적으로 구속하는 사랑과 역(逆)관계에 있는 것 같으니까.
꼭두각시 서○스의 마사루군도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타인의 소유가 아니라고.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나도 저렇게 되는건지 장담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뭐야, 갑자기 깐깐하게..."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저 그런 연애관...아니, 그런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니까."
"...흐응? 혹시 샘내는거야?"
"뭐가?"
"이제 까마득하게 높은 몸이 될 내가 더이상 손에 닿지 않을까 무서워?
"......"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구먼.
피식-
"야! 왜 웃어!?"
"아니, 분명 너라면 톱스타가 되겠지.
자신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네 태도라면 충분히 가능할거라구."
"놀리는거야?"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앞으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섭섭하네."
"조금은?"
"아니, 엄청 섭섭해.
아무튼, 넌 자질이 있으니까 노력한다면 유명인이 되는것도 순식간이겠지."
"...흥.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라구.
이 참에 사인이라도 받아두는편이 좋지 않아?"
"...너무 앞서 나갔어.
그런건 데뷔하고나서 해 달라구."
"칫, 첫 사인인데.
나중에 가서 사인해달라고 울며 매달려도 안해줄거야."
"오~ 무서워무서워~"
"이게!?"
실실 웃는 내 모습에 발끈한 룬이 주먹을 날려왔다.
렌이 배운 호신술을 눈동냥으로 나마 익혔는지 의외로 룬의 주먹이 맵다고 생각하며 미소라당으로 향해 걸었다.
이후, 룬은 신인 아이돌로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RUN이라는 아이돌 네임으로-이름이랑 발음엔 차이가 없지만- 활동하면서 룬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곡명「사랑의 메타모르포제」로 인기를 휩쓸며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한 룬은,
이윽고 연예인 소식지의 앞표지, 음료수 광고 모델, 립스틱 모델 등 일상의 수많은 부분에서 그 얼굴을 보이게 되었다.
...진짜 엄청난 인기네.
듣기론 CD 매출도 1위라는데 알고 지내던 나조차 정말이지 얼떨떨할 정도다.
다만 역시라고 해야할까, 최근 룬은 그다지 학교에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2-A에 쳐들어오던 룬이 일상으로 느껴지던게 예전일처럼 느껴져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룬의 노래를 듣다가 음반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룬의 음반을 산 뒤, 서점에서 책을 고르면서 룬이 표지 모델로 나온 연예인 잡지도 한권 골라봤다.
종이가방에 음반을 함께 넣고 길을 걸으면서 연예인 잡지를 훑어보았다.
룬의 이벤트 공연이라.
한번 보고 싶은데 어디서 하는거지?
장소는... 사이난 역앞. 우리 동네잖아?
그럼 행사일은... 오늘!?
놀라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한창 이벤트가 진행되었을 시간이다.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고 자책하곤 발걸음을 빨리했다.
무대에서 활약하는 룬의 모습을 기대하며 역앞의 이벤트 장소로 서둘러 뛰었다.
『다들 즐거워~?』
「「「오~!!!"」」」
"...뭐냐 이 상황은?"
별들이 난무하는 타이틀로 장식된 무대 위에는 분홍빛 장발의 미소녀가 마이크를 잡은채 관객을 리드하고 있었다.
데빌루크의 말괄량이 왕녀 라라다.
등에 RUN♡LOVE 라는 글자가 쓰여진 겉옷을 당당히 입은 남성 팬들은 라라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었다.
얘내들 뭐하러 온거야 대체...룬은 어디있어?
룬의 콘서트 구경도 하고 운 좋으면 사인이라도 받을까 했더니.
고개를 젓곤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다가 이벤트장 한구석에서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룬이다.
내심 반가운 마음을 숨기고 다가가자 윗가슴을 드러낸 무대 의상을 입은 룬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수염이잖아?"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룬?"
"...보면 알잖아.
내 공연은 이미 끝났다구."
뾰루퉁해진 얼굴로 볼을 부풀린 룬은 내 시선을 외면하곤 콘서트장을 벗어났다.
"어이, 어디가는거야?"
"대기실에 가려는거야.
어차피 이벤트 시간은 조금 있으면 끝이니까."
라라에게 무대를 빼앗긴게 분했나본지 작게 혀를 차고 룬은 대기실로 향했다.
그런데...따라 들어가도 되나?
기왕 콘서트 구경왔는데 암것도 못하고 가긴 아쉬웠기에 내쫓을 때까진 룬의 뒤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대기실 안까지 따라 들어가자 룬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왜 따라 들어온거야?"
"콘서트를 놓쳐서 허탕만 치고 가긴 아쉬웠거든.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하아...뭐, 마음대로 해."
귀찮은듯 의자에 앉은 룬은 그동안 쌓아둔 말이 많았던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무대에 서는건 즐겁지만 재채기도 참아야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지쳐.
하지만 모두가 내게 헤롱헤롱하는 그 느낌...왠지 참을 수 없어~!"
"그, 그래? 그거 좋겠구나.
인기있는 사람의 숙명이란건가?"
"그렇다니까. 인기인이 된 날 리토군도 나를 다시 돌아 봐주는 느낌이야."
"그러고보니 방금 라라가 무대에 있었는데 유우키도 왔나보네.
멋진 공연 보여줄 수 있었어?"
"당연하지.
교장이랑 이상한 녀석들이 난입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리토군이 날 구해줬다구! 위기의 순간에 왕자님처럼 말야."
폭주한 팬들로 콘서트가 엉망이 되었던건가?
교장이라든지 모테미츠라든지 타치바나라든지...
방금전 라라의 무대 점령은 팬의 폭주를 막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걸지도 모르겠다.
꿈많은 소녀마냥 양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는 룬의 모습을 보다 원래 목적을 떠올리곤 종이 가방을 열었다.
"아, 괜찮으면 여기에 사인 부탁할께."
"응?"
내밀어진 자신의 앨범을 본 룬이 고개를 들었다.
"너도 내 팬이야?"
"길가다가 네 노래가 들리기에 생각나서 한번 사본거야.
노래 정말 잘 부르더라?"
"...네 칭찬은 별로 기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나쁘진 않네."
뿌듯한듯 생긋 웃은 룬은 앨범 위에「RUN♡」이라고 사인해 주었다.
"톱 아이돌이 될 내 사인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아핫~ 걱정말라고. 네 노래도 앞으로 기대하고 있을께."
웃으며 사인 앨범을 종이 가방에 넣자 룬이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종이 가방 안에 든 다른건 뭐야?"
"아. 여기 오기전에 서점에 들렀거든.
읽을 책이랑 네가 나온 잡지 정도?
잡지 훑어보다가 오늘 공연을 알게 되서 서둘러 온거라구."
"내가 나온 잡지? 어디 좀 보여줄래?
잡지의 평판이 궁금하니까."
"좋아. 나도 아직 제대로 보진 않았으니까."
잡지를 꺼내들자 표지 모델을 장식한 자신의 모습에 룬의 눈이 반짝이며 잡지를 낚아챘다.
"어이!? 혼자 보지 말고 같이 보자구."
"잠시만 있어봐. 나 먼저 읽고 나서..."
열심히 자신이 나오는 페이지를 찾던 룬은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굳어버렸다.
"아..."
"응? 왜그래?"
"보, 보면 안돼!"
당황하며 저지하려는 룬을 무시하고 펼쳐진 잡지로 시선을 내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거야?
표지의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던...데?"
눈에 들어온 룬의 화보집에 나도 마찬가지로 굳었다.
왼쪽 페이지에 보인건 알몸 와이셔츠의 룬이었다.
단추가 전부 풀린 와이셔츠 가운데로 드러난 앙가슴이 풍만한 볼륨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가 눈부셨다.
큰 사이즈인 와이셔츠로 인해 중요한 부분만 졀묘하게 가려진채로 룬이 미소지은 모습이 사진에 찍혀 있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룬이 있었다.
뒤로 돌아선채 끈팬티 매무새를 다잡는 룬의 손길에 손바닥만한 비키니 끈팬티 위로 엉덩이 윗부분과 골짜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정면을 바라보는 룬의 자세도 자극적이었다.
가련한 표정으로 양다리를 벌린채 양팔로 슬며시 가슴을 모으듯 자세를 취해 아래로 흐른 가슴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화보집? 아니면 와이셔츠랑 수영복 광고?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알고 지내는 사이로서 엄청난 사진을 봐버린 느낌이다.
굳어있는것도 잠시, 순식간에 잡지를 덮어버린 룬이 눈을 도끼눈을 하고선 날 노려봤다.
"...봤어?"
"어, 그러니까..."
룬의 시선이 따가운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것 같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곤 억지로 떨리는 입을 열었다.
"포, 포즈가 엄청 대단하던데?"
"뭐, 뭐가 대단하다는거야 이 변태야!"
짜아악---!
상황 타파 실패.
당황한 나머지 판단력을 잃어 정직하게 칭찬해버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룬이 힘껏 휘두른 손바닥에 왼뺨을 단풍으로 물들였다.
"어째서 이런걸 산거야! 너 설마 내 사진으로 이상한 짓 하려는거 아냐!?"
"겉표지에 네가 있길래 궁금해서 산 것 뿐이라고! 애초에 그런짓 할꺼 같냐!"
"할꺼잖아! 너 알몸 와이셔츠 패치라면서!"
"아냐!"
터무니 없는 오해를 부정했지만 룬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해두지만 아래는 제대로 입고 있었어!
위에도 밴드 붙이고 있었으니까!"
"배, 밴드?"
"아..."
뒷말이 불필요하게 자극적이었다.
무심코 상상하게 되잖아.
멍하게 있던 내게 달려든 룬이 내 멱살을 잡으며 앞뒤로 흔들었다.
"방금 말은 잊어! 잊으라구!"
"와아악!?"
"설마 너, 정말로 아이돌 사진만 모아서 하악하악 망상하는 녀석인거야!?
네가 날 갖고 이상한 상상할꺼라고 생각하면 소름끼치니까!"
"아니라고! 대체 누가 퍼뜨린거야 그런거!?"
"키리사키 쿄코의 세미누드 사진도 갖고 있었잖아!
버려 그런거!"
"싫어! 그거 선물받은 건데다가 초레어 사인본이라고!"
"하여튼 내 사진으로 이상한 짓 했다간 가만 안둘꺼야!?"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룬의 세미누드가 실린 잡지는 압수 당했다.
목표를 달성한듯 상쾌한 얼굴로 배웅해주는 룬의 모습에, 사인본을 품에 안고서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사인 받은 앨범을 만지작 거리면서 상점가를 걸었다.
리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시작한 아이돌 활동이지만, 룬은 의외로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든것 같다.
노래하는걸 좋아하고 자신을 바라봐주는 팬들이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우리 중에선 가장 먼저 자신의 길을 찾아서 앞으로 나가고 있는건 룬일지도...
고교 2학년. 사자에상 시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법과도 같은 시기도 결국 끝나는 때가 올 것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언젠가 이 금발도 수염도 필요없게 되는 날이 오면 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지금은 그저 이곳에서의 만남들이 그때도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룬처럼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뭐, 적어도 리토에게 제시된 우주의 제왕으로서의 길처럼,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꿈 만큼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상념에 잠겨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노랫소리가 상점가에 울려퍼졌다.
룬의 인기곡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다.
그러고 보면 '메타모르포제'가 인물의 성격,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던가?
애매한 기억으로 타이틀의 의미를 떠올리려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거고 지금은 들려오는 음악을 감상하는게 우선이다.
달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분좋게 상점가를 걷던 중, 서점 앞에 진열된 낯익은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생긋 웃고 있는 룬의 모습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연예인 잡지다.
풍성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과 투명한 자주빛 눈동자를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로 한권 더 살까?
방금전 고민과는 다른 이유로 심각하게 갈등한 순간이었다.
며칠 뒤, 등교를 하던중 복도에서 오랜만에 룬을 만났다.
"여~ 룬! 오랜만이잖아?"
"아, 수염!"
안경을 손에 들고 어딘가로 향하던 룬은 날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룬은 손에 쥔 안경을 들어올렸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봐."
"응?"
의아해하며 가만히 서있자 룬은 그대로 내 얼굴에 안경을 씌웠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시야는 딱히 어지럽거나 하지 않았다.
무도수 안경인가?
"룬. 이건?"
"무도수 안경이야."
"아니, 그건 아는데..."
"으음..."
안경을 쓴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룬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리저리 내 얼굴을 살펴보던 룬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보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리토 군에겐 다른 안경이 더 어울리겠지.
그건 너 줄께."
말을 마친 룬은 몸을 휙 돌렸다.
"어이? 그거 무슨 의미..."
"...아참~!"
떠나가려던 룬은 문득 생각난듯 다시 몸을 돌려 내쪽을 향했다.
"너말야, 전에 했던 말 틀렸어."
"뭐가?"
"후훗..."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은 룬은 오른쪽 검지로 내 볼을 푹 찔렀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거라고 했지?
나 오늘부터 너랑 같은 반 됐거든."
"에?"
"그럼, 잘 부탁해~"
어안이 벙벙한 내 모습에 작게 키득인 룬은 휘파람을 불고선 2-A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랄까...이거, 한방 먹은 기분이구먼.
얼굴에 씌워진 안경을 매만지다가 자연스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마법을 써서 같은반이 된건진 모르겠지만...정말이지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아가씨라니까.
2-A 교실에서 들려온 리토의 당황한 목소리에 앞으론 학교 생활이 좀더 소란스러워 질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쾌한 기분으로 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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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삽화는 암천묵시록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이번엔 삽화를 2개씩이나 그려주시더라고요ㅇㅅㅇb;
마음에 드는 장면을 그려달라고 부탁드렸는데 2지선다 질문에 둘다를 선택해주시는 포스를 보여주신 암천묵시록님이셨습니다. 쿨럭쿨럭...=3=b;;;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상황이라 민망민망...^^;;)
따귀를 날리는 장면씬을 코믹하게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ㅂ+b
코와 입에서 뭔가가 날아가는것 같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마지막 장면은 3컷으로 분할되어서 어느 위치에 넣는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교실로 들어가는 장면 바로 앞에 넣었습니다.^^
36화 삽화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m(_ _)m
35화 축전을 보내주신 터틀러님 감사드립니다.
(35화 축전 링크)
호러영화 본 뒤의 모모랑 나나의 모습이 참 귀엽고도 흐뭇했습니다*-_-*
창작그림 게시판에 올려주신 료스케 완전체 모습도 멋졌고요^^b
31화 관련으로 터틀러님께서 그려주신 삽화는 4장이 모이는대로 31화에 추가할 예정입니다.
12대 1의 전투개시 컷이 정말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두근두근하면서 봤네요~^^
멋진 축전들을 보내주신 터틀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p.s. 참조 이미지
주말의 길거리
룬의 광고들
이렇게 되야 했던 무대가(룬)
이렇게 되어버렸다(라라)
룬의 화보집
알몸 와이셔츠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 노래는 마법이 되어
p.s.2. 트러블 원작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한 간단한 등장인물 이미지(34개-_-;)
일일이 클릭하기 귀찮다면 ▷이쪽으로◁(그림이 한꺼번에 뜹니다.)
사이렌지 하루나
라라
라라(포니테일)
렌(男)
룬(女)
코테가와 유이
코테가와 유이(머리 묶음)
유우키 미캉
유우키 미캉(머리 품)
야미
모미오카 리사
사와다 미오
텐죠인 사키
쿠죠 린
후지사키 아야
후지사키 아야(안경 벗음)
무라사메 시즈(오시즈)
미카도 료코
티아유 루나틱
닛타 하루코
키리사키 쿄코
키리사키 쿄코(매지컬 쿄코 분장)
시라유리 코요미(왼쪽) & 아라이 사야카(오른쪽)
유우사키 리코
나나
나나(머리 품)
모모
모모(냉정)
유우키 사이바이(만화가)
저스틴
브왓츠(왼쪽) & 마울(오른쪽)
코테가와 유우(유이의 오빠)
셀린(우주식물)
셀린(유아)
정체불명의 세제로 세탁기를 고장내는 일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 큰일은 없었다.
우리 집에 거주하면서, 둘은 틈틈이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여름동안 입을 옷을 사준 답례라나.
가끔 식사 준비를 도와주는 모모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미각치인 라라가 매번 독요리를 만들어 내는걸 생각하면 이 요리 솜씨의 반만 라라에게 나눠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나도 집안 청소에는 한팔을 거들면서 혼자 지낼 때 보다 한결 집안일이 수월해졌다.
덕분에 요 일주일간은 안락함을 누릴 여유가 있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지.
다만 굳이 사건이랄 만한 일이라면, 세탁기에서 탈수가 끝난 빨랫감을 꺼내면서 내것이 아닌 속옷을 막 집어 들었을 때,
그 순간을 우연히 목격한 나나가 전력으로 라이더킥을 날려온 것 정도?
결국 그 후론 빨랫감을 널 때는 나나와 모모도 함께 하기로 했다.
다시금 돌아온 주말을 맞이해서 둘은 라라가 있는 리토네 집에 놀러 가 있다.
저녁 식사까지 하고 돌아오겠다고 모모에게서 연락도 왔으니, 나도 안심하고 외출하기로 했다.
서점도 가보고 겸사겸사 점심도 해결할 겸 상점가로 발길을 옮겼다.
"수염?"
"룬?"
상점가를 걷던중 원피스 차림의 룬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채 멈춰섰다.
반가운 마음에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하자, 룬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기껏 휴일에 나와서 만난게 너라니..."
"어이..."
한숨을 내쉬는 룬의 반응에 내민 손이 무안할 지경이다.
기분을 고친건지 축처진 어깨를 펴고 룬이 얼굴을 들었다.
"아무튼, 네가 혼자 있다니 드문 일이네?
주말마다 매번 여자를 바꿔 끼고 다닌다던데."
"아니, 그냥 주말이라 평범하게 나들이 나온것 뿐이라구.
그런데 룬 너 혼자야?"
"보면 알잖아.
뭐야? 헌팅이라도 할 속셈?"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
혹시 시간 있으면 함께 도서관에라도 가지 않을래?"
"뭐?"
장난스런 헌팅 발언에 어벙벙했는지 룬은 한차례 눈을 깜박이곤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룬의 태도에 민망해져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지 마."
"...뭐, 됐어. 용무가 없으면 난 이만 갈래."
내 변명에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난 룬은 왼어깨에 맨 숄더백을 고쳐들었다.
"그리고 말야, 애초에 도서관으로 가자고 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이니까."
팟-하고 내 코앞에 손가락을 들이댄 룬은 한차례 날 노려본 뒤,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가 버렸다.
쌀쌀 맞구먼.
오늘따라 신경질적인 룬의 반응에 입맛을 다시다가 서점으로 향했다.
"......"
"......"
잡지「MISTY」를 손에 든 룬.
「달러쇼크」를 막 꺼내든 나.
서점 안에서 고른 책을 훑어보던 중 신간 코터에서 이쪽으로 오던 룬과 마주쳤다.
"또 너야?"
"너무 그렇게 질색하지 말라구.
아무튼 또 만나게 되다니, 마을 참 좁지?"
천연덕스럽게 웃어넘기자 룬은 짧게 한숨을 쉬곤 내 손에 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니까 만화책이라도 골라 볼 줄 알았는데 그런것도 읽어?"
"즐겨보는 만화야 있다만, 꼭 그것만 보는건 아니잖아?"
"흐응...그래? 그럼 난 이만."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룬은 패션 코너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책을 더 고르려나본지 이것저것 꺼내보는 룬의 모습을 보다가 먼저 계산대로 이동했다.
고른 책들의 계산을 끝마치고 서점을 나오며 시간을 확인하니 슬슬 점심때였다.
그렇게 배가 고픈건 아니니까 오늘은 간단하게 빵 같은 걸로 군것질 해도 좋으려나?
최근 인기있는 미소라당의 크로켓이라든가.
"......솔직히 말해봐. 너 날 쫓아온거지?"
"아니아니. 내가 먼저 여기 왔다구?"
어째서 내가 그런 스토커 취급을 받아야 하는거야?
미소라당에서 먹음직스러운 빵들을 둘러보다가 크로켓을 집어서 접시에 담고 있던중, 막 입구에서 들어온 룬과 마주쳤다.
의심이 물씬 깃든 눈으로 지긋이 날 바라보며 묻는 룬에게 어처구니 없다는듯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이걸로 오늘만 벌써 세번째 만남이다.
이래서야 룬이 의심을 가져도 이상하진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먼저 온 상황에서야 억지가 따로 없다.
"왜 네가 여기 있는거야?"
"점심거리 사러 온거야.
오늘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식사도 밖에서 해결할 겸해서 나온거라고."
"아무도? 너 혼자서 사는거 아녔어?"
"라라네 동생들이 찾아왔거든.
나나랑 모모말야.
유우키네 집엔 방이 없대서, 지금 우리집에서 하숙하고 있어."
"헤에..."
내 대답에 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거야?"
"그애들, 잘도 너랑 같이 지낼 생각을 했네."
"......그러게."
뭐, 나도 동감한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지.
"두명에게 이상한 짓 같은걸 하진 않았겠지?"
안하거든요. 대체 뭔 베짱으로?
애초에 그런건 베짱도 아니지만.
"난 걔내들이 이상한 짓을 할까 오히려 걱정이다만..."
세탁기 고장낸 것 빼면 아직은 괜찮긴 한데, 가끔 특이한 우주 동식물을 소환해대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조마조마한 심정이다.
「네 집에 작은 라라가 두명 지낸다고 생각해봐.」라는 내 말에, 어릴적 라라와 함께 지내면서 겪은 수난이 떠오른건지,
룬은「작은 라라가 두명...」하고 중얼거리다가 핼쓱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휘청휘청하다가 머리를 휘휘 내젓고 정신을 차린 룬은 슈크림을 골라 계산대로 갔다.
나도 크로킷이 담긴 접시를 들고서 룬의 뒤를 따랐다.
각자 선택한걸 카운터에 올려놓자 직원이 계산대를 두드렸다.
"슈크림 300엔, 크로킷 300엔.
합쳐서 600엔 되겠습니다."
"어?"
지갑을 꺼내들다 놀라는 룬의 반응에 직원이 당황하며 물었다.
"저기, 두분 함께 오신것 아니었나요?"
"아니, 저희는..."
"여기 600엔요."
옆에서 보고 있다가 냉큼 돈을 지불했다.
"야, 너?"
"뭐 어때. 세번이나 만난것도 인연인데 이번엔 내가 살께."
"하아...맘대로 해."
오늘로 벌써 몇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채 룬은 지갑을 되돌렸다.
"오늘 아침에 말야, 모처럼 일찍 일어나서 조조로 영화를 보고 왔는데 내용이 이상했어."
"영화가 재미 없었어?"
"재미는 있었어. 근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거야.
20년전 사랑에 대해 회상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였는데, 두 남녀가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 전개가 도무지 납득이 안가더라구.
피치못할 사정으로 남자가 늦고, 사정을 말하려고 집으로 전화했을땐 이미 여자가 약속 장소로 나간 뒤였어.
남자가 여자를 데리러 약속 장소로 뛰어갔을 땐, 공교롭게도 기다리다 지친 여자도 남자의 집을 찾아가면서 둘이 엇갈려 버리는거지.
거기서 오해가 생겨버려서 점차 일이 커지면서 결국엔 비극을 맞이한다니...정말 싫었어.
어째서 둘다 휴대폰을 쓸 생각을 하지 않은거야?"
"아니, 그거야 20년 전에는 아직 휴대폰이 대중화 되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서 그런거였어?"
가게를 나온뒤 상점가에서 윈도 쇼핑이라도 하려고 가다가 룬과 방향이 같았기에 잠시 동행하게 되었다.
룬 가라사대, 슈크림의 의리라고 한다.
300엔짜리 의리 치고는 꽤나 대접이 후하네요.
룬의 속도에 맞춰 발걸음을 조절하며 이야기를 듣던중, 주변을 둘러보던 룬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정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희희낙락해 가지곤..."
"응?"
룬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다.
주말의 거리는 커플로 분주했다.
내려쬐는 여름 햇살의 따스함만으론 성에 차지 않는지, 커플들은 거리낌없이 후끈후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서로의 귓가에 밀어를 속삭이며 한껏 남에게 과시하는 애정행각에 보는 내가 더울 지경이라 커플들에게서 시선을 떼었을 때, 고개를 돌리던 룬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자주빛 눈동자가 깨끗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룬이 쌀쌀맞게 시선을 외면했다.
한차례 머리카락을 넘긴 룬은 내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게다가 주말에 마저 네 얼굴을 보다니,
괜히 휴일이라고 밖에 나오는게 아니었어."
"매정하구먼..."
"너한테 정붙이고 싶진 않거든?"
아, 그러십니까?
내쪽에서 불평해봤자 괜히 본전도 못 찾을것 같으니 침묵하고 있는게 상책이다.
"하아...리토군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넌 언제나 유우키 타령이구나.
그렇게 유우키가 좋아?"
"하~! 적어도 너보단 상냥하거든?"
...전언 철회.
코웃음을 치는 룬의 대응에 조금 발끈해선 무심코 비꼬았다.
"...어째서 기준이 내가 되는지 모르겠다만, 그거 절대로 유우키에 대한 칭찬이 아니니까."
"에? 어째서?"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무슨 의미야?"
"사자 갈기처럼 휘날리는 금빛 머리카락. 용맹무쌍한 멋진 수염.
질실강건의 터프한 사나이 그 이름 아키츠 료스케! 이 정도로 평가하고 있어?"
내 말에 경계하던 룬이 동정어린 눈빛으로 날 쳐다 보았다.
"...자의식 과잉은 병이야 수염.
너에 대한 평가는 바람둥이에다 응큼한 주제에 힘만 쎈 바보로 충분해."
"...뭐, 좋아. 네가 대충 어떻게 생각하는진 알았으니까.
아무튼, 그런 평가를 받는 나랑 비교해서 상냥하다고 하는걸 칭찬으로 받아들일 사람이 몇명이나 될거 같아?
「적어도 그녀석 보단 나으니까 힘내...」라는 위로조차 안될걸?
뭐, 네가 날 '상냥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아...너! 대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야유하는 내게 당황한 룬이 벌컥 화를 냈다.
"너 같은거랑 비교하지 않아도 리토군에 대해선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고 있으니까!"
"오~ 그래?"
"이익...! 깔보는거야?
나도! 1학년땐 리토군이랑 같은 반이었어!
2학년이 되서야 알게된 너보다도 훨씬 오래 알고 지냈단 말야!
너보단 리토군에 대해 많이 안다고!"
"아...그렇단 말이지?"
바락바락 대드는 룬의 모습에 약간 심술이 났다.
애꿎은 불평을 들었으니 조금 정돈 골려줘도 되겠지.
"그럼 번갈아가면서 유우키에 대해 알고 있는걸 말해보는게 어때?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 쪽이 이기는걸로.
네가 이긴다면 널 자극한걸 사과할께."
"좋아. 얼마든지 받아들이겠다구."
"그럼 먼저 나부터 시작하지.
이거 알고 있어? 유우키가 식물을 아끼는거.
교실의 화병에 물을 갈아주는건 언제나 유우키였다구?"
"어...그랬어?"
...진짜 몰랐냐?
놀라는 룬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놀랄 지경이다.
"그럼, 이제 룬 네 차례야."
"리토군은 멋있어. 상냥하고, 용감하고..."
맞는 말이긴 하다만...
"...중학생도 그것보단 어휘력이 풍부하겠다."
"야!? 그거 무슨 의미야!"
"아무튼, 다시 내 턴."
"무시하지마!"
"유우키는 축구를 좋아해서 중학교 시절엔 축구부였대.
고등학교 와서는 여동생 혼자 집안일을 하게 놔둘 수 없어서 부활동을 그만둔 상태야.
자, 룬 네 차례."
"리토군은, 그러니까..."
"아직 내 턴이 안 끝났나 보네."
"자, 잠깐!"
"유우키의 아버지는 사이바이씨라고, 유명한 만화가지.
열혈학원을 연재하고 계셔.
자, 그리고?"
"그, 그러니까..."
"OK. 앞으로도 쭈~욱 나의 턴."
"스, 스톱! 그러니까, 리토군은 내 첫키스 상대...윽!? 렌 너는 조용히 있으라구!"
말을 꺼내던 룬이 두통이 이는지 갑자기 머리를 싸맨다.
아무래도 렌의 의식과 말다툼이라도 하고 있나보다.
"...유우키의 첫키스는 네가 아니라 렌으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알고 있는거야!?"
"2학년 초에 보니까 그걸로 트라우마가 생겨있던데?"
"으으..."
"뭐, 다르긴 하지만 인정해줄께.
다시 내 차례. 리토의 집엔 거대한 우주 식물이 있어.
이름은 셀린인데 라라가 유우키의 생일 선물로 준거래.
라면을 좋아한다더라고. 흥미롭지?"
"윽..."
"아무튼 이걸로 4대 2로 내 승리인가?"
"4대 4야!
난 처음에 3개나 말했잖아!"
"...멋있고, 상냥하고, 용감하다는거?"
"그래! 그거!"
"......"
생각나는대로 주워담아도 그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계속되는 리토 관련 이야기에서 밀리자 룬이 결국 버럭 소릴 질렀다.
"상관없잖아!
결국 중요한건 내면 아냐!?"
...통속적인 대사라고 트집 잡진 않겠지만, 관심이 있다면 적어도 호불호나 취미 정도는 알아둡시다.
본격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룬을 내려다보자 룬이 발을 동동 구르더니 외쳤다.
"이건 불공평해!"
"...뭐가?"
"난 지구에 온지 이제 겨우 1년 밖에 안됐잖아!
이렇게 여자애를 괴롭히니 좋아!?"
이 상황에 와서 여자인걸 이유로 회피한다는건 패배 선택지입니다.
게다가 1년동안 잘만 쫓아다녔으면서 시간 타령 하는건 안된다고 생각해요.
나야 미캉이랑 리토 중학교 졸업 앨범 보면서 얘길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들이지만.
"뭐, 좋아좋아. 그럼 무승부인걸로 해두자구."
설렁설렁 신경쓰지 않는 내 태도에 결국 룬이 폭발했다.
"이...! 야쿠자같은 불량배에다 세자리수 여자아이들을 거느리고선 항상 여자를 바꿔끼고 다니는데다
여탕도 엿보고 유령한테도 추파를 던지는 여동생 모에 로리콘 변태 수염 놈아!!!"
"......"
순식간에 몰아치는 언어의 폭풍우를 내뱉곤 씩씩거리는 룬을 어벙벙한채 바라보다가 감탄사를 흘렸다.
"뭐야, 잘 말할 수 있었잖아?
유우키에 대해 말할 때도 이 정도로 술술 말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다."
"뭐?"
내 말을 멍하니 듣던 룬은 잠시후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리토군보다 네 루머 따윌...
...허무해..."
"싸움은 언제나 허무함만을 남길 뿐이야."
"불량학생인 네가 말하지 마...
정말이지 어째서 이런 전개로 되버린거야...?"
"글쎄? 아무튼 바닥은 지저분하니까 이만 일어나라구."
좌절하는 룬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데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금전의 말다툼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는지 다시 몸을 일으킨 룬과 룬의 손을 잡고있는 내 모습을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행인들이 있었다.
「저녀석, 또 여자랑 함께 있잖아?」
「지난주엔 코스프레 쌍둥이 외국인이었는데 이번엔 여고생이네?」
「응? 몇주전 주말엔 갈색 단발머리 여자애였는데?」
「아니아니. 비오던날 밤엔 포니테일의 여학생이랑 한우산을 쓰고 있었다구?」
「과연 아키츠 료스케. 볼 때마다 매번 여자가 바뀌는군...」
역시 너무 소란을 피워 버린게 잘못이었나.
이쪽을 보며 수근수근 하는 이야기가 귀를 파고 들었는지, 룬의 얼굴은 귀뿌리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역시 너랑 함께 있는게 아니었어..."
"그, 뭐냐...면목 없구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룬의 손에서 내 손을 슬그머니 치우곤 손수건을 건넸다.
"그럼 나랑 지금 유우키네 집에 가볼래?
나나랑 모모를 데리고 돌아갈 면목으로 들르면 되겠지."
여러가지 이유로 멘탈이 너덜너덜인 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보았다.
"에~ 너치곤 괜찮은 생각이잖아?
좋아! 그럼 방금전 가게에서 빵이라도 사들고 가자."
내 제안에 반색한 룬이 맞장구를 쳤다.
기분을 바꿔 다시 미소라당 쪽으로 향하던 룬이 문득 생각난듯 물었다.
"근데 리토군의 집 알고 있었어?"
"응. 미캉의 장보기를 도와주면서 알게 됐거든."
"미캉?"
"유우키의 동생말야."
"동생? ...아아, 게임속에서 만난 어린애가 리토군 동생이었구나?"
"...설마 몰랐던거야?"
"...몰랐어. 직접 대화해 본적도 없는걸."
주저하며 말한 룬의 분위기가 다시금 가라앉아 버렸다.
"난 리토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걸까...?"
"이봐, 뭘 그렇게 침울해 하는거야?
취미나 유우키의 사정 같은거야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는거잖아.
내가 알고 있는건 말해줄테니까 적당히 기운 내라고."
풀죽은 룬을 달래려고 리토와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올해 봄 구교사에서 있었던 일이라든지, 여름 축제때 있었던 일이라든지, 전골 파티때 있었던 일이라든지.
같은 반이 아니어서 이런저런 일에 함께 하지 못한게 섭섭해 보이는 룬이었지만,
리토와 친구들이랑 여름바다에 다녀온 추억을 위안삼는것 같았다.
룬의 말로는 실은 그땐 여름바다에 간게 아니라, 라라의 발명품 탓에 「오키나와」가 아닌 「오키와나」라는 외계 원시 행성에 도착해 버려 표류하게 되었다지만.
다행히 미카도 선생님의 덕분에 무사히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리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간간히 룬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은하 통신 판매에서 주문하는게 취미라든지, 달콤한 것을 좋아한다든지 하는 소소한 이야깃거리였다.
미소라당에 다와갈 즈음 휴대폰에 메일 도착 알람이 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자「마법소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쿄코잖아? 연락을 주고받으려고 룬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전화 좀 하고 올께."
"여자?"
"...질문이 이상하지만. 맞아, 아르바이트 하면서 알게된 사이."
"흥. 네 오입 이야기엔 관심 없으니까 멀리 가버리라구."
"그런거 아니라니까...
아무튼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줘."
"늑장부리면 먼저 미소라당에 가 있을꺼야?"
룬의 엄포에 수긍하곤 약간 떨어져 쿄코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 쿄코 자신이 새로 출연하게 된 프로그램이 있으니 응원해달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연락을 해주는 쿄코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울 따름이라 기대하고 있겠다고 답했다.
그후 서로간에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쿄코는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
사이난 운동회 같은 학교 활동을 부러워하던 쿄코가「아키츠군이 운동회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재밌을것 같은데 아쉬워」라고 즐거운듯 말해준게 기뻤다.
저번에 할로윈 특집에 참가했던 닌자 소녀가 사실은 사이난 구교사에서 지내던 유령 소녀였고,
지금은 육신을 얻어서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이야기에 쿄코는 놀라운듯 흥미진진하게 상세한 내용을 물어왔다.
「아키츠군의 주위에는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나는구나?」라며 부러워하는 쿄코의 반응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을 기약하고 통화를 마친뒤 룬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룬에게 한 남성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안경을 쓴 시원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룬이 싫어하는 티를 내거나 하진 않았기에 아는 사람인가 생각하며 다가가자 남자가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란듯한 남자의 표정에 고개를 돌린 룬이 날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수염. 왔어?"
"룬? 이 사람은?"
설명하려던 룬보다 먼저 남자가 의아한듯 물었다.
"저기, 혹시 남자친구니?"
"에~? 아하하 아뇨아뇨~ 무슨 그런 터무니 없는 말씀을...큭!?"
남자의 물음에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너털 웃음을 짓다가 정강이를 차였다.
"야! 너 그거 무슨 의미야!?"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 쌍심지를 켜곤 노려보는 룬에게 황급히 변명했다.
"아, 아니. 나로서는 너무 과분하다는 의미였다구?"
"진짜지?"
"그, 그렇다니까?
아무튼 이분이랑 이야기 나누던 중 아니었어?"
당황해하는 남자의 옆에서 더이상 추태를 쬘수도 없었기에 적당히 룬의 주의를 남자에게로 돌렸다.
남자는 「반짝반짝 예능」이라는 기획사 소속이었다.
신인 아이돌을 물색하러 거리에 나왔다가 룬의 모습이 보여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남자의 제의에 룬은 머리를 굴리는듯 잠시 생각하더니 곧 승낙했다.
룬이 명함을 건네받은 뒤, 또다른 신인 후보를 물색하러 남자가 떠나자 룬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걸로 리토군의 마음을 되찾는거야!"
"의욕만만이구나?"
"당연하지! 반드시 톱 아이돌이 되서 리토군을 내게 반하게 만들고 말겠어!"
"어 그래. 화이팅."
리토의 성향상 톱 아이돌이 되는걸로 그렇게까지 돌변한 대응을 할거라곤 도저히 상상이 안가는데.
모처럼 기운이 펄펄나는 룬에게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었기에 잠자코 응원하기로 했다.
"뭐야? 좀더 응원하라구."
"아아, 유우키를 위해서 힘내겠다는거지?"
"당연하지! 난 몸도 마음도 리토군만의 것이니까."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런 표현은 어쩐지 자신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 같아서 싫어."
자신의 모두가 상대방의 것이라는 연애관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전부를 일방적으로 구속하는 사랑과 역(逆)관계에 있는 것 같으니까.
꼭두각시 서○스의 마사루군도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그녀 자신의 것이라고. 타인의 소유가 아니라고.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나도 저렇게 되는건지 장담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
"뭐야, 갑자기 깐깐하게..."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
그저 그런 연애관...아니, 그런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뿐이니까."
"...흐응? 혹시 샘내는거야?"
"뭐가?"
"이제 까마득하게 높은 몸이 될 내가 더이상 손에 닿지 않을까 무서워?
"......"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구먼.
피식-
"야! 왜 웃어!?"
"아니, 분명 너라면 톱스타가 되겠지.
자신감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 네 태도라면 충분히 가능할거라구."
"놀리는거야?"
"아니라니까. 그나저나 앞으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섭섭하네."
"조금은?"
"아니, 엄청 섭섭해.
아무튼, 넌 자질이 있으니까 노력한다면 유명인이 되는것도 순식간이겠지."
"...흥.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라구.
이 참에 사인이라도 받아두는편이 좋지 않아?"
"...너무 앞서 나갔어.
그런건 데뷔하고나서 해 달라구."
"칫, 첫 사인인데.
나중에 가서 사인해달라고 울며 매달려도 안해줄거야."
"오~ 무서워무서워~"
"이게!?"
실실 웃는 내 모습에 발끈한 룬이 주먹을 날려왔다.
렌이 배운 호신술을 눈동냥으로 나마 익혔는지 의외로 룬의 주먹이 맵다고 생각하며 미소라당으로 향해 걸었다.
이후, 룬은 신인 아이돌로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RUN이라는 아이돌 네임으로-이름이랑 발음엔 차이가 없지만- 활동하면서 룬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곡명「사랑의 메타모르포제」로 인기를 휩쓸며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한 룬은,
이윽고 연예인 소식지의 앞표지, 음료수 광고 모델, 립스틱 모델 등 일상의 수많은 부분에서 그 얼굴을 보이게 되었다.
...진짜 엄청난 인기네.
듣기론 CD 매출도 1위라는데 알고 지내던 나조차 정말이지 얼떨떨할 정도다.
다만 역시라고 해야할까, 최근 룬은 그다지 학교에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2-A에 쳐들어오던 룬이 일상으로 느껴지던게 예전일처럼 느껴져 어쩐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룬의 노래를 듣다가 음반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룬의 음반을 산 뒤, 서점에서 책을 고르면서 룬이 표지 모델로 나온 연예인 잡지도 한권 골라봤다.
종이가방에 음반을 함께 넣고 길을 걸으면서 연예인 잡지를 훑어보았다.
룬의 이벤트 공연이라.
한번 보고 싶은데 어디서 하는거지?
장소는... 사이난 역앞. 우리 동네잖아?
그럼 행사일은... 오늘!?
놀라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한창 이벤트가 진행되었을 시간이다.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다고 자책하곤 발걸음을 빨리했다.
무대에서 활약하는 룬의 모습을 기대하며 역앞의 이벤트 장소로 서둘러 뛰었다.
『다들 즐거워~?』
「「「오~!!!"」」」
"...뭐냐 이 상황은?"
별들이 난무하는 타이틀로 장식된 무대 위에는 분홍빛 장발의 미소녀가 마이크를 잡은채 관객을 리드하고 있었다.
데빌루크의 말괄량이 왕녀 라라다.
등에 RUN♡LOVE 라는 글자가 쓰여진 겉옷을 당당히 입은 남성 팬들은 라라의 행동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었다.
얘내들 뭐하러 온거야 대체...룬은 어디있어?
룬의 콘서트 구경도 하고 운 좋으면 사인이라도 받을까 했더니.
고개를 젓곤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다가 이벤트장 한구석에서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룬이다.
내심 반가운 마음을 숨기고 다가가자 윗가슴을 드러낸 무대 의상을 입은 룬이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수염이잖아?"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룬?"
"...보면 알잖아.
내 공연은 이미 끝났다구."
뾰루퉁해진 얼굴로 볼을 부풀린 룬은 내 시선을 외면하곤 콘서트장을 벗어났다.
"어이, 어디가는거야?"
"대기실에 가려는거야.
어차피 이벤트 시간은 조금 있으면 끝이니까."
라라에게 무대를 빼앗긴게 분했나본지 작게 혀를 차고 룬은 대기실로 향했다.
그런데...따라 들어가도 되나?
기왕 콘서트 구경왔는데 암것도 못하고 가긴 아쉬웠기에 내쫓을 때까진 룬의 뒤를 따라가보기로 했다.
대기실 안까지 따라 들어가자 룬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왜 따라 들어온거야?"
"콘서트를 놓쳐서 허탕만 치고 가긴 아쉬웠거든.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하아...뭐, 마음대로 해."
귀찮은듯 의자에 앉은 룬은 그동안 쌓아둔 말이 많았던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무대에 서는건 즐겁지만 재채기도 참아야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지쳐.
하지만 모두가 내게 헤롱헤롱하는 그 느낌...왠지 참을 수 없어~!"
"그, 그래? 그거 좋겠구나.
인기있는 사람의 숙명이란건가?"
"그렇다니까. 인기인이 된 날 리토군도 나를 다시 돌아 봐주는 느낌이야."
"그러고보니 방금 라라가 무대에 있었는데 유우키도 왔나보네.
멋진 공연 보여줄 수 있었어?"
"당연하지.
교장이랑 이상한 녀석들이 난입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어.
리토군이 날 구해줬다구! 위기의 순간에 왕자님처럼 말야."
폭주한 팬들로 콘서트가 엉망이 되었던건가?
교장이라든지 모테미츠라든지 타치바나라든지...
방금전 라라의 무대 점령은 팬의 폭주를 막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걸지도 모르겠다.
꿈많은 소녀마냥 양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는 룬의 모습을 보다 원래 목적을 떠올리곤 종이 가방을 열었다.
"아, 괜찮으면 여기에 사인 부탁할께."
"응?"
내밀어진 자신의 앨범을 본 룬이 고개를 들었다.
"너도 내 팬이야?"
"길가다가 네 노래가 들리기에 생각나서 한번 사본거야.
노래 정말 잘 부르더라?"
"...네 칭찬은 별로 기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나쁘진 않네."
뿌듯한듯 생긋 웃은 룬은 앨범 위에「RUN♡」이라고 사인해 주었다.
"톱 아이돌이 될 내 사인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아핫~ 걱정말라고. 네 노래도 앞으로 기대하고 있을께."
웃으며 사인 앨범을 종이 가방에 넣자 룬이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종이 가방 안에 든 다른건 뭐야?"
"아. 여기 오기전에 서점에 들렀거든.
읽을 책이랑 네가 나온 잡지 정도?
잡지 훑어보다가 오늘 공연을 알게 되서 서둘러 온거라구."
"내가 나온 잡지? 어디 좀 보여줄래?
잡지의 평판이 궁금하니까."
"좋아. 나도 아직 제대로 보진 않았으니까."
잡지를 꺼내들자 표지 모델을 장식한 자신의 모습에 룬의 눈이 반짝이며 잡지를 낚아챘다.
"어이!? 혼자 보지 말고 같이 보자구."
"잠시만 있어봐. 나 먼저 읽고 나서..."
열심히 자신이 나오는 페이지를 찾던 룬은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굳어버렸다.
"아..."
"응? 왜그래?"
"보, 보면 안돼!"
당황하며 저지하려는 룬을 무시하고 펼쳐진 잡지로 시선을 내렸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는거야?
표지의 사진도 예쁘게 잘 나왔던...데?"
눈에 들어온 룬의 화보집에 나도 마찬가지로 굳었다.
왼쪽 페이지에 보인건 알몸 와이셔츠의 룬이었다.
단추가 전부 풀린 와이셔츠 가운데로 드러난 앙가슴이 풍만한 볼륨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다리가 눈부셨다.
큰 사이즈인 와이셔츠로 인해 중요한 부분만 졀묘하게 가려진채로 룬이 미소지은 모습이 사진에 찍혀 있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룬이 있었다.
뒤로 돌아선채 끈팬티 매무새를 다잡는 룬의 손길에 손바닥만한 비키니 끈팬티 위로 엉덩이 윗부분과 골짜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정면을 바라보는 룬의 자세도 자극적이었다.
가련한 표정으로 양다리를 벌린채 양팔로 슬며시 가슴을 모으듯 자세를 취해 아래로 흐른 가슴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화보집? 아니면 와이셔츠랑 수영복 광고?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알고 지내는 사이로서 엄청난 사진을 봐버린 느낌이다.
굳어있는것도 잠시, 순식간에 잡지를 덮어버린 룬이 눈을 도끼눈을 하고선 날 노려봤다.
"...봤어?"
"어, 그러니까..."
룬의 시선이 따가운게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해야 할것 같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곤 억지로 떨리는 입을 열었다.
"포, 포즈가 엄청 대단하던데?"
"뭐, 뭐가 대단하다는거야 이 변태야!"
짜아악---!
상황 타파 실패.
당황한 나머지 판단력을 잃어 정직하게 칭찬해버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룬이 힘껏 휘두른 손바닥에 왼뺨을 단풍으로 물들였다.
"어째서 이런걸 산거야! 너 설마 내 사진으로 이상한 짓 하려는거 아냐!?"
"겉표지에 네가 있길래 궁금해서 산 것 뿐이라고! 애초에 그런짓 할꺼 같냐!"
"할꺼잖아! 너 알몸 와이셔츠 패치라면서!"
"아냐!"
터무니 없는 오해를 부정했지만 룬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말해두지만 아래는 제대로 입고 있었어!
위에도 밴드 붙이고 있었으니까!"
"배, 밴드?"
"아..."
뒷말이 불필요하게 자극적이었다.
무심코 상상하게 되잖아.
멍하게 있던 내게 달려든 룬이 내 멱살을 잡으며 앞뒤로 흔들었다.
"방금 말은 잊어! 잊으라구!"
"와아악!?"
"설마 너, 정말로 아이돌 사진만 모아서 하악하악 망상하는 녀석인거야!?
네가 날 갖고 이상한 상상할꺼라고 생각하면 소름끼치니까!"
"아니라고! 대체 누가 퍼뜨린거야 그런거!?"
"키리사키 쿄코의 세미누드 사진도 갖고 있었잖아!
버려 그런거!"
"싫어! 그거 선물받은 건데다가 초레어 사인본이라고!"
"하여튼 내 사진으로 이상한 짓 했다간 가만 안둘꺼야!?"
한동안의 실랑이 끝에 결국 룬의 세미누드가 실린 잡지는 압수 당했다.
목표를 달성한듯 상쾌한 얼굴로 배웅해주는 룬의 모습에, 사인본을 품에 안고서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사인 받은 앨범을 만지작 거리면서 상점가를 걸었다.
리토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시작한 아이돌 활동이지만, 룬은 의외로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든것 같다.
노래하는걸 좋아하고 자신을 바라봐주는 팬들이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우리 중에선 가장 먼저 자신의 길을 찾아서 앞으로 나가고 있는건 룬일지도...
고교 2학년. 사자에상 시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법과도 같은 시기도 결국 끝나는 때가 올 것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언젠가 이 금발도 수염도 필요없게 되는 날이 오면 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지금은 그저 이곳에서의 만남들이 그때도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나도 룬처럼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뭐, 적어도 리토에게 제시된 우주의 제왕으로서의 길처럼,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지는 꿈 만큼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란다.
상념에 잠겨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노랫소리가 상점가에 울려퍼졌다.
룬의 인기곡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다.
그러고 보면 '메타모르포제'가 인물의 성격, 감정의 변화를 의미한다던가?
애매한 기억으로 타이틀의 의미를 떠올리려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면 되는거고 지금은 들려오는 음악을 감상하는게 우선이다.
달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기분좋게 상점가를 걷던 중, 서점 앞에 진열된 낯익은 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생긋 웃고 있는 룬의 모습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연예인 잡지다.
풍성한 에메랄드빛 머리카락과 투명한 자주빛 눈동자를 유리창 너머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로 한권 더 살까?
방금전 고민과는 다른 이유로 심각하게 갈등한 순간이었다.
며칠 뒤, 등교를 하던중 복도에서 오랜만에 룬을 만났다.
"여~ 룬! 오랜만이잖아?"
"아, 수염!"
안경을 손에 들고 어딘가로 향하던 룬은 날 보더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내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룬은 손에 쥔 안경을 들어올렸다.
"잠시만 그대로 있어봐."
"응?"
의아해하며 가만히 서있자 룬은 그대로 내 얼굴에 안경을 씌웠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시야는 딱히 어지럽거나 하지 않았다.
무도수 안경인가?
"룬. 이건?"
"무도수 안경이야."
"아니, 그건 아는데..."
"으음..."
안경을 쓴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룬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리저리 내 얼굴을 살펴보던 룬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보이더니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리토 군에겐 다른 안경이 더 어울리겠지.
그건 너 줄께."
말을 마친 룬은 몸을 휙 돌렸다.
"어이? 그거 무슨 의미..."
"...아참~!"
떠나가려던 룬은 문득 생각난듯 다시 몸을 돌려 내쪽을 향했다.
"너말야, 전에 했던 말 틀렸어."
"뭐가?"
"후훗..."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은 룬은 오른쪽 검지로 내 볼을 푹 찔렀다.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거라고 했지?
나 오늘부터 너랑 같은 반 됐거든."
"에?"
"그럼, 잘 부탁해~"
어안이 벙벙한 내 모습에 작게 키득인 룬은 휘파람을 불고선 2-A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랄까...이거, 한방 먹은 기분이구먼.
얼굴에 씌워진 안경을 매만지다가 자연스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무슨 마법을 써서 같은반이 된건진 모르겠지만...정말이지 행동력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아가씨라니까.
2-A 교실에서 들려온 리토의 당황한 목소리에 앞으론 학교 생활이 좀더 소란스러워 질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쾌한 기분으로 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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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삽화는 암천묵시록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이번엔 삽화를 2개씩이나 그려주시더라고요ㅇㅅㅇb;
마음에 드는 장면을 그려달라고 부탁드렸는데 2지선다 질문에 둘다를 선택해주시는 포스를 보여주신 암천묵시록님이셨습니다. 쿨럭쿨럭...=3=b;;;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상황이라 민망민망...^^;;)
따귀를 날리는 장면씬을 코믹하게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ㅂ+b
마지막 장면은 3컷으로 분할되어서 어느 위치에 넣는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교실로 들어가는 장면 바로 앞에 넣었습니다.^^
36화 삽화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m(_ _)m
35화 축전을 보내주신 터틀러님 감사드립니다.
(35화 축전 링크)
호러영화 본 뒤의 모모랑 나나의 모습이 참 귀엽고도 흐뭇했습니다*-_-*
창작그림 게시판에 올려주신 료스케 완전체 모습도 멋졌고요^^b
31화 관련으로 터틀러님께서 그려주신 삽화는 4장이 모이는대로 31화에 추가할 예정입니다.
12대 1의 전투개시 컷이 정말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두근두근하면서 봤네요~^^
멋진 축전들을 보내주신 터틀러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p.s. 참조 이미지
주말의 길거리
룬의 광고들
이렇게 되야 했던 무대가(룬)
이렇게 되어버렸다(라라)
룬의 화보집
알몸 와이셔츠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 노래는 마법이 되어
p.s.2. 트러블 원작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한 간단한 등장인물 이미지(34개-_-;)
일일이 클릭하기 귀찮다면 ▷이쪽으로◁(그림이 한꺼번에 뜹니다.)
사이렌지 하루나
라라
라라(포니테일)
렌(男)
룬(女)
코테가와 유이
코테가와 유이(머리 묶음)
유우키 미캉
유우키 미캉(머리 품)
야미
모미오카 리사
사와다 미오
텐죠인 사키
쿠죠 린
후지사키 아야
후지사키 아야(안경 벗음)
무라사메 시즈(오시즈)
미카도 료코
티아유 루나틱
닛타 하루코
키리사키 쿄코
키리사키 쿄코(매지컬 쿄코 분장)
시라유리 코요미(왼쪽) & 아라이 사야카(오른쪽)
유우사키 리코
나나
나나(머리 품)
모모
모모(냉정)
유우키 사이바이(만화가)
저스틴
브왓츠(왼쪽) & 마울(오른쪽)
코테가와 유우(유이의 오빠)
셀린(우주식물)
셀린(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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