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쨍쨍히 내리쬐는 여름의 오후.
후끈한 열기 속에서 가볍게 장보기를 마치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는 두 꼬마 우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으로 마루에 대(大)자로 널브러져 있었고, 원피스 차림의 모모는 지친 기색으로 부채를 부치며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 오셨어요 료스케씨?"
"료스케에에에...아이스크림 사왔어?"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진이 빠진 목소리로 반응하는 나나를 향해 장바구니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반색하며 일어나 다가온 나나와 모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곤, 종이박스안에 넣어서 베란다 한쪽에 보관해뒀던 선풍기를 꺼내왔다.
최근 들어 계속된 무더위에 나나와 모모는 노곤하게 바닥에 늘어져 버렸다.
이런 더위라면 진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지만, 아무래도 데빌루크성인은 보통사람보다 여름에 더 약한 것 같다.
라라의 말에 따르면 데빌루크에선 여름이라는 계절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일까?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라라도 여름엔 때때로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면 여름엔 별도의 피서 수단이라도 알아봐야 할 듯했다.
에어컨을 장만하든가, 시원한 카페에라도 데려가서 시간을 보내든가, 아니면 에어컨이 나오는 미캉네 집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싸들고 놀러 간다든가.
개인적으론 3번. 더위도 피하고 나나랑 모모가 라라와 만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니까.
선풍기에 씌워둔 비닐 커버를 벗기고, 선풍기 날을 한차례 닦은 뒤 전원을 연결해 틀었다.
아이스크림을 다먹은 나나와 모모가 선풍기 앞에 앉아 기분 좋은지 눈을 감았다.
"하아 시원해..."
나른한 표정을 지은 나나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흩어지며 울렸다.
"아~~~ 우리는~ 우주인이다~"
사실입니다.
TV에서 본건지 우주인 놀이를 하는 나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 나나. 그렇게 선풍기에 가까이 앉아 있으면 나한테 바람이 안오잖아?"
"모모 넌 부채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억지 부리지 마. 나도 부채만으론 안된다구."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던 두명은 발끈한 모모가 나나의 꼬리를 잡아채면서 본격적으로 마루에서 뒹굴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땀투성이인채로 잘도 다투는구나.
날이 더우니 개방적이 되는건지 후끈후끈한 열기속에 바닥을 구르며 「후얏?」이니「꺅?」이니 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서로의 꼬리를 잡은채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에 쓴웃음이 났다.
에로틱한 다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나나가 모모의 꼬리를 잡아채는 와중에 들어올려진 모모의 원피스 아래로 어른스러운 속옷이 보였을 때, 가볍게 감탄섞인 휘파람을 부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한 둘의 눈흘김을 모른척 하곤 장바구니에 든 먹거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더위에 지친 둘이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햄야채볶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양파와 피망, 당근을 함께 넣어 색상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어 보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나나와 모모에게도 호평이었다.
"아~ 잘먹었다!"
"잘먹었어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둘을 보니 나도 보람은 있다만...
물끄러미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수놓인 접시를 확인했다.
나나의 접시 한쪽에 쌓여있는 피망. 모모의 접시에 담겨있는 당근 무더기.
...편식이냐?
눈으로 묻자 나나와 모모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피망 싫어."
"당근은 조금..."
니들이 애냐...
다음부턴 서로의 피망이랑 당근을 바꿔먹는게 좋을까 의논하는 둘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테이블 뒷정리를 돕고난 뒤, 둘은 게임기에 달라 붙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얼마전 모모가 새로 사온 게임을 하나보다.
나나는 껌으로 풍선을 불어가면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은지 생각만큼 잘 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으악! 또 죽었잖아?"
"이지 모드로 플레이 하는건 어떨까?"
"자, 잠깐만 모모. 이제 슬슬 익숙해져 가는것 같으니까..."
"...그 말 꺼낸게 이걸로 벌써 다섯번째야 나나.
이지 모드에선 컨티뉴가 무한이니까, 일단 이지 모드로 연습해서 익숙해지는게 낫지 않아?"
"큭,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바꾸는건 진 기분이 든다고.
두고봐. 그런거 없이도 오늘 안에 반드시 엔딩을 보고 말테니까!"
"후우..."
나나의 고집에 모모도 고개를 내젓곤 물러섰다.
승부 근성을 불태우는 나나의 대사를 듣건데 아무래도 오늘은 클리어를 목표로 밤을 샐 작정인가보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고, 나나랑 모모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니 밤샘을 해도 딱히 걱정은 없지만...내 잠자리가 문제다.
소파에 앉아서 한창 게임 플레이 중인 둘의 앞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태연하게 눈을 붙이기엔 나도 그렇고 둘로서도 영 껄끄로운 선택이다.
결국 오늘은 나나와 모모가 마루에서 자고, 내가 방안에서 자는 걸로 둘과 이야기를 맞췄다.
마루에 둘의 잠자리를 깔아두고 일어섰다.
"그럼 나 먼저 잔다. 게임하다 밤 새진 말고."
"네. 안녕히 주무세요 료스케씨."
"흥, 밤까지 끌지 않아. 이런 게임 같은거, 단숨에 클리어 할테니까."
...정말로 일찍 자기는 할건가?
의욕만만한 나나의 모습을 걱정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나와 모모가 우리집에 머물게 되면서 몇가지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내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처럼 생긴 물체인데,「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라고 한다.
「사이버 사파리 랜드」는 예전에 나나와 모모의 계획으로 초대되었던 '트러블 퀘스트'와 같은 가상공간으로, 동물 친구들이 편하게 살수 있도록 나나가 조성한 오리지널 세계다.
저번에 나나가 데다이얼로 불러내었던 우주 멧돼지군은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불려져 나온것이라고 한다.
왜 내 방에 이게 놓여졌냐면, 내 방이 나나와 모모의 잠자리이기 때문이다.
나? 난 마루에 잠자리를 깔고 잔다.
홈스테이 하는 녀석들이 침대를 쓰고 정작 집주인이 마루에 잔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만, 여자애는 차가운데 앉으면 안된다는 얘기도 있잖은가.
시기가 여름이라서 '차가운 바닥'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만...
리토네 집에 방이 모자라서 우리집에 지내러 온 나나와 모모인데, 적어도 리토네 벽장에서 지내는 라라보다는 나은 거주 환경을 제공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무감에 결정한 사항이다.
가끔 찾아오는 저스틴의 눈치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나나와 모모가 아버지인 기드에게 지구에 머무는걸 반억지로 허락을 받은뒤, 저스틴이 둘에게 용돈을 줄 겸 찾아왔었다.
「이런 녀석이랑 함께 지내실거면 차라리 저희가 사는 곳에 오십시오!」라는 저스틴의 주장에 나나랑 모모와 함께 저스틴의 거처로 가보았다.
조촐한 다다미방이었다. 나나의 가차없는 평가에 따르면 좁고 지저분했다.
기존의 거주자만 해도 저스틴, 마울, 브왓츠 3명인데 이 좁은 방에 나나랑 모모가 더해진다고? 잠잘때 테트리스 하듯이 잘 셈이냐?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결론과 함께 저스틴의 의견은 거절했다.
낙담하는 저스틴을 위로할겸, 저스틴의 수상작 '은하의 랩소디'의 감상을 말하며 정중한 태도로 저스틴에게 사인을 부탁했을때, 날 가리키며 '이런 녀석' 운운하던 저스틴의 급변한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헛기침을 하곤「...그래도 알고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저스틴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나나와 모모의 얼굴도 인상깊었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은 되는지「혹시 잠자리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하고 물어오는 저스틴의 과보호도 잠자리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잠자리를 정하는 일 만큼이나 서로에게 배려가 필요했던 부분은 옷을 넣는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집의 크기와는 별개로 나 혼자 살고 있었던 집이니 만큼 가구의 개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속옷 보관은 같은 서랍장의 다른 단에 하기로 정한 뒤,「혹시 실수인척 저희 속옷을 꺼내가진 않으시겠죠?」라며 추파를 던지는 모모에겐 정중히 부정의 말을 전해두었다.
회상은 여기까지로 하고, 공포영화를 봤던 날 이후로 내 침대에서 자는건 처음이라 새삼 감회에 젖은채 이불을 펼쳤다.
침대 머리 맡에는 휴대폰처럼 생긴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이 두개 놓여 있었다.
가상 세계에 놓아둔 물체를 불러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나와 모모는 주로 친구들을 불러내는데 사용하는듯 하다.
침대에 놓아둔걸보니 '이것도 휴대폰마냥 알람기능이 있는걸까?'하는 의문을 갖곤 데다이얼을 책상 위에 옮겨다 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슬슬 포기하는게 좋지 않아 나나?」
「으으...이상해! 분명 TAS라는 사람은 엄청 쉽게 플레이 하던데!」
아니, 그거 사람이 아니니까...
마루에서 들려오는 나나와 모모의 대화에 속으로 딴죽을 걸곤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거실 바닥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배꼽을 드러낸채 만족감에 겨운 얼굴로 잠자는 나나의 모습에 무심코 헛웃음이 샜다.
나나의 옆에 누워있는 모모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얌전히 잠에 빠져 있다.
다만 모모도 이불은 덮는둥 마는둥 한게 아무래도 여름 더위 탓인가보다.
아니면 이불 덮을 생각도 못할만큼 피곤했다든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흘리는 둘을 내려다 보다가 흘러내린 이불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나나처럼 배꼽을 드러내놓고 자다간 감기걸릴것 같았으니까.
'잘록하고 매끈한 허리네'라는 감상과 함께, 「우웅...」하며 작게 몸을 뒤척이는 나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주었다.
새액-새액-하는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이렇게 자는걸 보니까 확실히 귀엽네.
부스스하게 흩어진 분홍 머리카락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데빌루크」니까 마치 천사같다는 표현을 쓰는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눈호강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무슨 꿈을 꾸는지 군침을 흘리며 자는 나나의 입가를 닦아줄까 하다가, 나나의 옆머리에 붙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나의 분홍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부정형 물체가 나나의 머리카락에 엉겨 있었다.
바로 어젯밤 나나가 게임 하면서 씹고 있던 풍선껌.
야 임마...
껌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잔거냐? 대체 몇시까지 놀았던거야...
내심 투덜거리곤 나나의 옆 머리를 손가락으로 받쳐올렸다.
잔뜩 엉켜있네 이거...아침부터 액땜하게 생겼구먼.
작게 신음을 흘리며 나나의 머리카락을 살펴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고있던 모모가 눈을 떴다.
"으음..."
아직 졸린지 몸을 뒤척이며 게슴츠레 눈을 뜬 모모는 몽롱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마주하곤 한차례 눈을 깜빡였다.
"......료스케씨?"
"이런, 일으켜 버린거야? 밤늦게 논것 같길래 여간한 일로는 깨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
아연해하던 모모가 눈을 크게 치떴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채 뭔가를 찾듯 이불 속을 뒤지던 모모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데다이얼이..."
"데다이얼이라면 내 방 책상에 놔뒀는데?"
내 말에 흠칫 몸을 떤 모모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몸을 가렸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모모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이걸 노렸던 건가요?"
뭐가?
"무슨 짓을 하려는거죠? 대답에 따라선 가만있지 않겠어요."
"무슨짓이냐니...나, 적어도 그렇게 경계시킬 정도로 질나쁜 행동은 안하고 지냈었잖아?"
"깨어난 순간 눈앞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는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에요.
옆에서 자고 있는 자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남자였다면 더더욱..."
"응, 그건 그렇네."
"...부정해주세요 거기선.
더 믿을 수 없게 되잖아요?"
무심코 수긍해버린 내 태도에 모모는 반 울상을 되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동의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구.
딱히 뭘 하려던건 아니었어?"
"...흑심을 품고선, 자고있는 틈을 타 저희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는 변태로 밖엔 안보이는걸요?"
"이봐, 난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냐.
자는 틈을 노려 엉큼한 짓을 할 만큼 비굴하지도 않고.
그건 내 자존심 문제라고.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자고 있는걸 깨워서 하는 쪽이..."
"에, 엣...?"
내 말에 모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듯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린 모모는 살그머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번데기마냥 이불로 몸을 만채 조용해진 모모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모모를 불렀다.
"모모?"
"저, 저기...지금까지 일은 전부 잠꼬대였던걸로..."
어이, 여보세요? 야한짓 하려고 깨운거 아니니까 자는 시늉 안해도 되거든요?
하는 짓이 귀여워서 화날 생각도 안든다만.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꾸와 함께 잠자는 시늉을 하는 모모에게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니까 진정하고 이것 좀 보라구."
"......"
이불 위로 눈만 빼꼼 내놓은채 경계하는 모모에게 나나의 머리카락을 들어보였다.
나나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핑크색 껌을 발견한 모모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
"으앙 이게 뭐야~?"
하품을 하며 눈을 뜬 나나는 옆머리에 달라붙은 껌을 확인하곤 울상을 지었다.
게임 클리어 후 만족감과 피로감 속에서 껌도 안뱉고 바로 잠에 빠진 만용의 결과라고 할까?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떼려다가 실패한 나나는 어쩔줄 모른채 울상을 지으며 가위를 찾았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려는 나나의 만행을 기겁하며 말리곤 화장대 위에 놓인 무스를 가져왔다.
무스를 든채 소파에 앉곤 소파 앞 마루에 나나를 앉혔다.
손바닥에 무스를 짜서 껌이 붙은 머리카락 주변을 살살 문질렀다.
"껌을 씹은채로 자니까 그런거잖아. 좀 조심하라구."
"히잉..."
"그런데 생각보단 일찍 일어났네?
밤새 놀았다길래 한 정오쯤은 되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덥고 찝찝해서 씻고 싶었거든.
정말이지 이 더위는 언제쯤 사그라드려나 몰라."
투덜대면서 손바닥으로 부채를 부치던 나나는 바람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목덜미께를 잡고 옷을 펄럭거렸다.
쇄골 아래까지 노출된 민소매 티라서 소파에서 나나를 내려다보는 나로선 언뜻언뜻 드러나는 껌딱지 같은 무언가 때문에 시선을 두기가 곤란했다.
...아, 색깔이 말이다. 볼륨을 말하는게 아님.
"뭐하니 조신하지 못하게."
"그치만 덥단 말야..."
투정부리는 나나에게 작게 한숨을 쉬며 묵묵히 나나의 머리카락에 무스를 발랐다.
이윽고 머리카락에 붙은 껌들이 녹아 떨어질 기미가 보이자 빗으로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빗으며 껌을 훑어내었다.
"어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한창 빗질을 하고 있던 중 욕실에서 씻고 나온 모모가 우리 둘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됐네 나나. 료스케씨 덕에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가 없어져서."
"그렇지?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려고 했을땐 놀랐다구.
장발은 기르기도 관리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예쁜걸 자른다니 아깝잖아?"
"에? 예뻐?"
"그럼그럼~ 게다가 폭신폭신한 감촉도 맘에 쏙 들어."
"...혹시 껌떼는거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건 아니지?"
"설마."
껌떼기랑 상관없이 쓰다듬고 싶을 만큼 기분좋긴 하다만, 더워서 팔락팔락 손부채를 부치는 녀석을 계속 붙잡아둘만큼 염치 없진 않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꼼꼼히 떼어내곤 나나를 일으켰다.
"자, 다됐어. 이제 껌은 없지만, 무스를 쓰기도 했으니까 한번 머릴 감는게 나을꺼야."
"응, 안그래도 더워서 씻을 참이었으니까. 고마워 료스케~!"
일어서서 핑크빛 웨이브 장발을 한차례 만지작거린 나나는 싱긋 웃음을 보이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선풍기 앞에 전세놓은듯 앉아있는 나나와 모모가 보였다.
오늘도 선풍기 앞에서 시간을 보낼 셈인가?
또다시 선풍기 앞에서 늘어질 기미를 보이는 둘에게 안되겠다싶어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있지말고 함께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
"쇼핑?"
"그래. 얼마 뒤면 여름축제니까 너희가 입을 유카타도 골라볼 겸해서 말야."
"갈래!" "좋아요."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나와 모모와 함께 상점가에 들렀다.
홍차가 다 떨어졌다는 모모의 말에 우선 홍차 매장을 둘러보았다.
모모가 홍차를 살펴보는동안 나도 진열된 홍차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이 코너 저 코너를 돌아다니던 중 진열대 한쪽에 놓인 귀여운 꿀벌 인형이 눈길을 끌었다. 마스코트 캐릭터인가?
진열대 위에 놓인 홍차 티백이나 틴의 겉면엔 테디베어나 민속의상을 입은 어린이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물품이네...
어디, 가격은...5팩들이 티백이 578엔!? 아, 틴에 든 잎차는 1260엔이네.
가격은 비싼편이지만 귀여운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지라 포기하기가 왠지 아깝다.
수집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가격은 어느정도 눈감아도 되지만...
가격이냐 귀여운 디자인이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손님, 어떤 종류의 제품을 찾으시나요?"
"아, 그러니까...후르츠 계열의 홍차를 찾고 있었어요."
과일향이 나는 제품이 괜찮을것 같아서 답하니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진열대 한쪽을 가리켰다.
"후르츠 계열로는 이쪽의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 4 종류가 있습니다.
종류별로 한번씩 향을 맡아보시겠나요?"
"네."
종업원은 찻잎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왼쪽에서부터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입니다."
"어디어디...「헤에, 좋은 향이네요.」오~?"
종업원이 내민 유리병에 얼굴을 가져가는데 오른편 뒤에서 모모가 끼어들었다.
뺨이 맞닿을만큼 가까워진 모모가 오른쪽 유리병의 향기를 맡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스읍-하는 숨소리가 어쩐지 달콤하다.
분명 화이트 피치의 복숭아 향 탓이다.
귓볼이 뜨겁다.
향을 맡아보던 모모가 만족스러운듯 웃음지었다.
"산뜻한 향이네요. 료스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으응, 달콤한 복숭아 향이네."
"어머...제 향기라니 료스케씨도 참~"
입가를 가리고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탁탁 두드리는 모모에게 당황해서 변명했다.
"어? 아, 아니. 모모(モモ) 네가 아니고 복숭아(もも, 모모)향...어라?"
"풋- 색남씨."
말이 꼬인 내 모습에 모모가 피식 웃곤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좋은 향이네요. 거기다 여기 홍차는 꽤나 디자인이 귀여운걸요?"
"모모 넌 사고 싶은걸 정한거야?"
"아직요. 뭘 고를까 둘러보다가 료스케씨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한번 와봤어요.
과일향이 나는 이 홍차가 제법 괜찮아 보이네요. 쿠키랑 함께 먹으면 좋을 듯 해요."
"그래? 그럼 이번 홍차는 이걸로 살까?"
의견을 조율하는 우리를 보던 종업원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애인이신가요?"
"왜요? 혹시 커플 경품 같은게 있나요?"
종업원의 말에 모모가 반색하며 잽싸게 팔짱을 껴왔다.
넉살도 좋구나 이녀석.
그래도 갑자기 몸을 기대오진 마. 네 발육은 솔직히 반칙이니까.
팔을 누르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움찔하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조절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스스럼없이 보여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 시즌 한정 스페셜 티를 커플 한정으로 할인해주는 이벤트가 있긴 합니다만..."
"핫핫핫. ...친구 동생입니다."
"후후후, 집주인씨에요."
냉큼 팔을 풀며 정색하는 우리에게 애매한 미소를 띄워버린 종업원이었다.
"계산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나왔다.
"괜찮은 가계였죠?"
"응. 홍차향도 좋았고 디자인도 귀여웠고 말야."
이후, 다른 매장에서 동물인형을 사온 나나와 합류해 의류 매장으로 이동했다.
맘에드는 유카타를 고르는데 제법 시간을 들인지라, 카페에서 파르페로 더위를 식힐 즈음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에 돌아와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나나와 모모는 골라온 유카타를 들고서 거울에 비춰보고 있었다.
유카타를 들고 이리저리 맞춰보던 모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게 물었다.
"저기, 료스케씨?"
"왜그래?"
"유카타 입는거 말인데요, 어떻게 입는지 잘 모르겠는데 좀 봐주실수 있나요?"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몰라. 기껏 아는거야 유카타 안엔 속옷을 안 입는다는 것 정도라서 도움도 안될텐데?"
"엑!?"
내 대답에 나나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알몸으로 이걸 입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아무리 그래도 팬티는 입겠지. 그래도 위에는 안 입던걸?"
"진짜?"
"왠지 묘하게 확신하고 계신것 같네요?"
확신이라면 확신이지.
코테가와의 유카타 차림을 떠올려보면 그랬단 얘기니까.
"그냥..."
"그냥?"
"......경험?"
"「「......」」"
찌르는듯한 둘의 시선에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나중에 코테가와나 다른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볼께.
축제까진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흐응...료스케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모모가 어깨를 으쓱하곤 나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나나. 그럼 넌 평소처럼 입으면 되잖아?"
"왜 내 가슴쪽을 보는거야!?"
가슴쪽에 눈길을 주며 이야기하는 모모에게 나나가 발끈해선 소릴 질렀다.
"괜찮아 나나. 그것도 나름대로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익! 그 이긴듯한 태도가 싫다고!
두고봐. 나중에 모모보다 훨씬 멋지게 자라줄테니까!"
"어머~ 기대할께."
민망한 대화가 오가느라 표정관리가 힘든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지 그래?
못들은척 딴청을 피우는 내 모습에 모모가 히죽 웃었다.
"후후...한창인 미소녀들이랑 함께 있느라 료스케씨도 큰일이네요."
미소녀라서 문제인게 아니라 에로 토크가 문제인겁니다.
"자기 입으로 미소녀라고 말하는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침부터 잠자리에서 덮쳐지진 않았겠죠?)"
"(쉿! 너도 오해 풀었잖아?)"
장난스레 속삭이는 모모에게 놀라 황급히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아침의 위기감이 사라진 반작용인지 대범해졌다고 해야하나, 오늘따라 모모의 행동에는 여유로움이 드러났다.
혹시 모모는 기싸움 할때면 밀리기 싫어하는 성격인건가? 아침의 일로 꿍해 있는것보다야 훨씬 좋다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모는 당황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듯 쿡쿡 웃더니 농을 던졌다.
"뭐, 한창 피가 끓을 나이인 료스케씨니까 그런 고뇌를 모르는건 아니지만요.
그러고보면 사내아이는 침대 밑에 소중한 물건들을 숨긴다고 하던데...혹시 료스케씨도?"
"그럴리가 있나."
"침대 밑? 중요한 물건이 뭐야 모모?"
"알고 싶어 나나? 그럼 귀를 좀 가까이..."
"뭔데 그래?"
"야, 잠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나의 귀에 모모가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야.한.책.♡)"
"!? 저, 저질이야...!"
저질스러운건 너희 망상쪽이야 요 발랑까진 녀석들아.
애초에 숨길만한 물건이라고 해도 떠오르는게 없다고.
...기껏해야 책장 한쪽에 꽂아둔, 룬의 수영복 화보가 실린 연예인 잡지 정도?
룬에게 저 책이 발견된다면 분명 좋은 꼴은 못볼테니 숨겨야 할 물건이라면 숨겨야할 물건이지만, 애초에 룬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있기야 하려나 몰라.
나나에게 침대 밑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는 모모를 말리곤 점심 준비를 서둘렀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모모가 내쪽을 빤히보며 중얼거렸다.
"쌓여있네요."
"뭐가?"
"청소년기의 왕성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잔뜩 쌓여있는거죠?"
"절대 아냐! 성희롱이라구 이건!"
"호오? 왕성한 독서욕 때문에 책이 쌓여있다는게 뭐가 성희롱이란거죠?"
"윽..."
"쌓여있네요."
"또 뭐가?"
"얼룩덜룩해지고 꾸깃꾸깃한 뭉치들이 잔뜩 쌓여있는 통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고 있잖아요?"
"아니라니까! 난 그렇게까지 원숭이가 아니라고!
"호오? 빨래 바구니에 담아둔 빨래 냄새가 퀴퀴하다는건데 어째서 원숭이가 된다는거죠?"
"큭... 너, 너말야..."
"쌓여있네요."
"...또 뭔데?"
"아침마다 그 물건이 기운차게 팔딱팔딱 튼실한걸 보면 누가 봐도 쌓여있다고 생각할거에요."
"언제 본거야!?"
"호오? 아침수산시장에서 대야 안에 펄떡이는 활어가 잔뜩 쌓여있다는건데 뭘 봤다고 그러시는거죠?"
"이거 완전 억지잖아!?"
"쌓여있네요."
"네, 쌓여있네요."
"왕성한 욕망을 주체못해서 쌓여있는거죠?"
"맞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네."
"얼룩덜룩하고 비릿한 뭉치 냄새가 통안에서 진동하는거죠?"
"응, 여름이라 더 그런가보네."
"아침마다 팔딱팔딱 튼실튼실할만큼 쌓여있는거죠?"
"네네, 어차피 또 책이니, 빨래니, 물고기니 하는거지?"
"아뇨? 휴지통이 임신할 만큼 료스케씨의 성욕이 잔뜩 쌓여있다구요."
"이, 이익...!"
소악마같은 미소를 지은 모모에게 발끈해선 이마라도 한번 튕겨주려고 침대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날 보면서도 모모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의 이마로 향하는 내 손을 모모가 양손으로 잡았다.
"후후, 이마로 되겠어요?"
모모가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까이 가져갔다.
"어, 어? 자, 잠깐?"
"밤놀이 상대는 못해드려도 쌓여있는걸 해소시키는데 조금쯤 도움을 드릴 순 있는데요?"
달뜬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모모의 숨결에선 복숭아향이 났다.
"안 쌓여있대두!
그러니까 이런 도움은 필요없...응? 가슴이 끈적끈적해?"
모모의 가슴에 닿은 손바닥에 끈적끈적한게 묻었다.
이건...풍선껌?
아연해하는 날 보며 모모가 히죽 웃었다.
"모모인줄 알았어?
유감, 나나였습니다~!"
"꺄아아아악!? 가슴이 껌딱지가 돼버렸어!?"
"껌딱지라고 하지마!"
손바닥에 잔뜩 달라붙은 껌딱지에 놀라 비명을 지르자 발끈한 나나가 내게 덤벼들었다.
침대에 밀려 넘어뜨려진 내게 나나가 달라붙어왔다.
"크윽!?"
"두번 다시 껌딱지 같은거엔 신경쓰지 못하게 해주겠어!"
"야!?"
옷가지가 훌훌 날아가고 이불 안으로 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쓴채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나나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이, 이 녀석 알몸이잖아!?
"더우니까 말야. 여름이잖아?"
송글송글 땀방울을 흘리며 나나가 배시시 혀를 내밀었다.
내 티셔츠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더듬던 나나는 이불속에 가려진 오른손으로 내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붉어진 얼굴로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자니 나나가 작은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후후, 딱딱하네. 역시 쌓여있었잖아?
자아~ 커져라 료스케의 엑스칼리버~"
쓰다듬쓰다듬.
그만둬 쇼커!?
......아놔 꿈.
한심한 비명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낯익은 마루의 천장에 눈을 깜빡이다가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황급히 이불을 걷어 바지를 벗었다.
...맙소사...
밤꽃 냄새를 풍기며 눅눅하게 젖어있는 팬티에 자연스레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은 아직 새벽. 나나와 모모는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한껏 눅눅해진 팬티를 대충 휴지로 닦고선 갈아입을 팬티를 가지러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침대에 자고있는 나나와 모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으- 하는 옅은 숨소리를 흘리며 편안히 잠에 빠져있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 방금전 꿈이 떠올라 자기혐오로 죽을 것만 같았다.
미안해 모모. 미안 나나. 이상한 역할로 꿈에 나오게 만들어서. 앞으론 편식한다고 화내지 않을테니까...
가까스로 좌절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서랍장을 뒤져서 새 팬티를 꺼냈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려던중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다.
침대 커버가 흔들리더니 침대 밑에서 기어나온 개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저번에 나나가 데려온 떠돌이 개 중 하나였던걸로 기억한다.
굳어있는 내 모습을 보던 개는 게슴츠레 내쪽을 바라보다가 길게 하품을 하곤 도로 침대 아래로 들어가버렸다.
"휴우...간 떨어질뻔 했네."
가슴을 쓸어내리곤 이번에야말로 소리없이 방을 나왔다.
마루에 나오자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던 개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나가 가상현실에서 개들을 꺼내놓은건가?
의아했지만 지금은 눅눅해진 팬티를 씻는게 먼저라 욕실로 들어갔다.
민망한 뒷처리를 끝내고 나서 팬티를 들고 욕실을 나왔다.
기왕 내친김에 쌓여있는 빨래감도 한꺼번에 빨려고 베란다로 나온직후, 빨래 바구니에서 뒹굴고 있는 개들을 보곤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야 이게!? 왜 개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있어?
아까전 마루에서 봤던 개도 이상해. 분명 어젯밤 잠자기 전엔 개 같은건 한마리도 없었다고?
일단은 개들을 말리는게 우선이라 빨랫감을 입에 물어 대려는 개들을 얼렀다.
몇몇은 손짓을 따라 얌전히 물러났지만 개중엔 빨랫감을 물고 도망가려는 녀석도 있었다.
한번에 전부를 잡을 순 없었는지라 일단 먼저 목덜미를 잡은 녀석의 입에서 옷감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빨랫감을 빼내었다.
빨랫감을 빼내고 개를 놓아주자 녀석은 곧장 마루로 달아났다.
손에 잡힌 빨랫감은 나나의 팬티였다.
...혹시 자기 주인 냄새를 맡고 가져가려고 한건가?
근데 이거 이빨 때문에 헤지진 않았으려나?
침자국이 묻은 팬티를 살짝 펼쳐보는데 옆에서 「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든 팬티를 보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나나에게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잠깐! 이건,"
"이잇! 뭘 빤히 바라보는거야!"
내 말을 막으며 나나는 빨개진 얼굴로 자기 팬티를 낚아챘다.
팬티를 뒤로 감추면서 날 노려보는 나나에게 민망해하다가 방금전 떠오른 의문을 부딪혀 화제를 돌렸다.
"아, 나나. 그러고보니 묻고 싶은게 있는데."
"...뭐야 변태?"
"집안에 개들이 가득 차 있는데 혹시 네가 풀어놓은거야?"
"...아! 어제 놀다가 게이트 닫는걸 깜박했어!"
내 질문에 나나가 깜짝 놀란듯 다급히 방안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어젯밤부터 오늘아침까지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집안을 돌아다니는 개들을 가상공간으로 돌려보내는걸로 부산스레 하루의 시작을 열었다.
아침식사동안 뽀로통한 얼굴로 밥을 먹는 나나와, 나나의 태도에 의심스런 눈으로 날 보는 모모 때문에 아침 밥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하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면 꿈에서 나온 두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서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기 급급했을 뿐이었으니까.
뭐, 정오가 될 즈음에는 다 털어내고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지나 산책겸 마을을 걷다가 미소라당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과자와 빵을 보다가 문득 어제 산 홍차가 떠올랐다.
모모가 해주는 홍차랑 쿠키를 함께 먹으면 맛있을것 같네.
아침의 일도 사과할 겸해서 미소라 당에 들어가 쿠키를 사 집으로 향했다.
더위를 타는 두 녀석들을 위해 덤으로 마트에서 아이스크림도 몇개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게임센터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원피스를 입은 짧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건슈팅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모다.
어쩐지 총을 쏘면서 연신 곤혹스러워하기에 의아했지만 게임 타이틀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버추○ 캅」이네. 당황해하며 파란 양복을 입은 악당에게 총을 쏘는 모모의 뒷모습을 불쌍하게 응시했다.
파란양복. 화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알을 죄다 몸으로 막아내면서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깎아대는 흉악한 괴물이다.
「Somebody help me!」
"에?"
「Please, don't shoot!」
"어, 어라?"
「Nooooo---!」하는 괴성과 함께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몇번이나 깎아댔을까.
「GAME OVER」
결국 모모는 파란양복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과연 파란양복. 최악의 난적이라는 악명은 거저 얻어진게 아니다.
"......"
게임오버 화면이 뜨고서도 모모는 한참을 총을 든채 멈춰서 있었다.
"후...후후..."
이윽고,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낮은 웃음을 흘린 모모는 조용히 총을 내려놓고 다른 게임기로 이동했다.
펀치 머신 앞에 선 모모는 말없이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펀치 머신에 불이 들어오고 누워있던 글러브가 세워지자 모모는 작게 숨을 들이 쉬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모모를 구경하던 남자 한명이 슬그머니 모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예쁜 아가씨? 아가씨처럼 갸냘픈 소녀가 그런걸 쳤다간 잘못하면 손이 부러질지도 몰라?
그런 위험한건 하지 말고 시간되면 나랑 같이..."
콰아아아앙---!!!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펀치 머신이 크게 들썩였다.
게임기들의 BGM을 묻어버릴만큼 엄청난 굉음이 게임센터를 울리면서 놀란 사람들이 펀치머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우우우우...
게임기들의 음악들 사이로 글러브에 바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린다.
삐걱삐걱대는 펀치머신의 화면에 신기록이 갱신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스코어보단 방금전 굉음을 일으킨 조그마한 체구의 모모에게 더 경악한 표정이다.
과연 데빌루크. 아무리 어려도 보통 사람과는 한가닥 다른 완력이다.
모모에게 헌팅을 시도하던 남자는 어느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릴렉스~ 릴렉스~"
돌아서선 상쾌한 얼굴로 이마를 훔친 모모는 미묘한 얼굴을 한 날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료스케씨? 언제 오셨어요?"
"아, 아. 집으로 가다가 네 모습이 보이길래 잠깐 구경하고 있었어.
...아이스바 하나 먹을래?
"어머, 고마워요."
건네받은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선 모모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배시시 웃었다.
시원한걸 먹곤 기분이 나아진건가보다.
방금전의 행동은 여름의 무더위 탓으로 이해하자.
"나나가 안보이는데, 함께 나오지 않은거야?"
"나나는 아직 집에 있을거에요.
찾는 물건이 있어서 한창 집안을 뒤지고 있는 중이거든요."
아이스바를 할짝이며 대답한 모모는 다시금 의욕이 솟았는지 눈을 반짝곤 게임센터를 돌아보았다.
"후우~ 시원하네요. 자, 그럼 다시 한판 더!"
"아직 더 하는거야?"
"물론이죠. 적어도 방금전 게임만큼은 설욕하지 않으면...!"
"그럼 난 먼저 집에 가있을께.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곤란하니까.
아, 쿠키도 사왔으니까 나중에 홍차랑 함께 먹자. 미소라당에서 사온건데 거기 쿠키는 맛있기로 유명하거든."
"헤에? 그거 기다려지는걸요.
저도 집에가면 맛있는 홍차를 대접해 드릴테니까 기대해주세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드는 모모에게 마저 손을 흔들어주곤, 다시금 건슈팅에 도전하는 모모의 뒷모습을 본후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나나, 나 돌아왔,"
두두두두두두두-!
"이 짐승아아아아아아아!"
퍼어억-!
"꿱!?"
민소매 티에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전력투구로 내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너는! 그렇게도! 내 팬티가 좋은거야? 이 변태야!"
날아차기에 직격당해 비틀거리는 내 멱살을 잡은 나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내게 대들었다.
"왜, 왜그래?"
"몰라서 물어!?"
나나가 한손에 쥔 물체를 쑥 내밀었다.
조그마한 천조각이 나나의 손끝에서 나풀나풀 흔들렸다.
...음?
"저기 나나, 혹시나 해서 묻는거지만 이거 설마..."
"이, 이잇...! 보면 몰라? 내 속옷이잖아!"
버럭 화를 내면서 나나가 속옷을 쫙 펼쳐들었다.
"야! 너 대체 뭘 보여주는거야!?"
"시끄러! 잘 보라구!"
한껏 얼굴이 붉어진 나나가 내민 속옷이 코앞까지 내밀어졌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수치 플레이야?
"분명 이걸 세탁하려고 내놓았었는데 안보여서 찾아봤었어.
아끼는건데...세탁기 근처를 찾아봤는데도 없었구.
그래서 다른데 떨어뜨린건가 싶어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찾았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였는데...네, 네 침대 밑에서 이게 나왔다고!
야한책 대신 이런걸 쓰는거야!?
침대밑에 숨겨둔 중요한 물건이라는게 이런거냐구!"
속옷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이거'라고 지칭하는 나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날 추격하듯 나나는 속옷의 눅눅히 젖은 자국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이 침자국은 뭐야!
너 내 속옷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해댄거냐구!
이 호색한! 저질! 변태! 짐승!"
"아니거든!? 내가 한게 절대로 아니거든!?"
"거짓말하지마! 너말고 대체 누가 있다는거야!"
"자, 잠깐? 어지러우니까 흔드는건 제발 그만...!?"
발끈한 나나에게 멱살을 잡힌채 탈곡기 속 곡물마냥 탈탈탈 털리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심했다.
"여기서 바보가 범인, 독수리가 나, 고기는 너, 레시피가 팬티."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내용물이 없는 팬티엔 관심없습니다."
"이 변태야아아아아아!"
짜악-!
진지한 얼굴로 주장하다가 따귀를 맞았다.
뺨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날 씩씩거리면서 노려보던 나나는 홱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야? 어디가?"
"언니한테 갈꺼야!
이런 변태가 사는 집 같은거, 당장에라도 나갈꺼야!"
핫팬츠에 민소매티만 입은채 밖으로 나가려는 나나에게 당황해서 나나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자, 잠깐만! 설명이 좀 부족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부웅-!」읏!? 진정하라구?"
"이익...!"
나나가 휘두른 주먹을 피하면서 설득을 계속했다.
잡힌 팔을 풀려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나나가 더이상 참지 못했는지 반대편 손으로 뭔가를 꺼내들었다.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가이노시시노,"
"으아아아! 인터셉트으으읏-!"
탁-!
"엣...?"
우주 멧돼지 녀석을 실내에 소환하는 만행을 저지르려는 나나에게 기겁해서 황급히 데다이얼을 손으로 쳐내곤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곤 벽에 밀어붙였다.
아스팔트를 갈아버리면서 돌진하던 멧돼지 녀석이 소환되었더라면, 그 집채만한 덩치만으로도 집안이 엉망진창이 될게 뻔했기에 살짝 식은땀이 났다.
"하, 하아... 멋대로 그런걸 꺼내면 곤란하잖아?"
"...아..."
데다이얼을 놓치곤 벽에 밀어붙여진 나나는 순간 뭐가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방치된 데다이얼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나나는, 몇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연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나나의 벌어진 입술이 살짝 떨린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턴 좀 진지한 시간을 가져보자구."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나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뭘 할 셈이야?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뭘?"
"힉!?"
실수한건가.
나나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기도 싫고, 데다이얼로 소환할 우주생물에게 집안이 박살나는것도 싫어서 양손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인게 나나의 공포심을 자극했나보다.
시시각각 얼굴이 파래졌다 붉어졌다를 반복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나나를 보면, 대충 어떤식의 위험한 전개를 상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여기서 두손을 놔버리면 지금 상태의 나나는 내 변명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나버릴것만 같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해명을 마친 뒤에 놔주는 쪽이 오해를 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다.
"이런 상태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너한테 해꼬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진정해."
"......"
"일단, 네가 화난 이유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우선 내 말도 한번 들어주길 바래. 그 후엔 화를 내도 받아들일테니까."
"으, 으응..."
차분히 말하는 내 태도에 조금은 진정한건지, 두려운 얼굴을 보이면서도 나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우선 어제 저녁에 모모가 했던 말에 대해서 반박할께.
남자아이는 야한 물건을 침대밑에 숨긴다는거 말인데..."
내 말에 나나의 볼이 붉어졌지만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런 행동은 안한다」라고 말해도 안 믿을지도 모르니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구.
만약 네가 좋아하는 남자의 팬티를 손에 넣었다고 쳐."
"읏! 나, 난 그런덴 관심없어!"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말야."
"...상상하기도 싫어."
"나도 마찬가지라구. 거기, 못믿겠다는 시선은 일단 치워."
불신어린 눈빛의 나나의 반응에 신음을 삼켰다.
"여기서 질문. 너라면 그 팬티를 그 남자가 쓰는 침대 밑에 숨기려 할까?"
"하?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리 없잖아. ...아!"
"그렇지? 그리고 내 방 침대는 내가 아니라, 너랑 모모가 사용하고 지내지.
적어도 상식이 있다면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곳에 숨길만큼 무모한 짓은 안할꺼야.
지금에 와선 거긴 '내 침대'가 아니라 「'너랑 모모'의 침대」니까."
"...그럼 왜 내 속옷이 거기에 있었어?
난 거기에 둔 기억이 없다구.
거, 거기다 그 침자국은..."
어물거리다 부끄러워졌는지 말을 흐리는 나나에게 조심스레 추측을 말했다.
"글쎄...솔직히 나로서야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오늘 아침에 빨래 바구니에서 개들이 빨랫감을 물고 달아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때 너랑 실랑이 하느라 도망가는 녀석들을 다 잡진 못했는데, 아마도 그때 놓친 개가 침대에 놔둔게 아닐까?
침이야 개들이 물고 있다가 묻은걸테고. 데다이얼로 불러내서 개들에게 한번 물어보는게 어때?"
"어...으응."
아침에 속옷을 가지고 드잡이질 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나나는 낯을 붉혔다.
얼마나 설득이 통했는진 모르지만 나나도 방금전까지의 격한 반응과 달리 몸부림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걸보면 적어도 놔주자마자 달아날 것 같진 않았다.
진정한 나나의 모습에 나도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벌컥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어...요...?"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모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의 광경, 그러니까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인 내 모습에 모모의 웃는 얼굴은 아연한 얼굴이 되고,
나나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나나의 데다이얼을 발견하고선 마침내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시바리스기.(거대 인면수(人面樹))"
"우아악!?" "꺄아아!?"
데다이얼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함께, 습격해 온 인면수에 기겁해 서로 얼싸안은 우리 둘의 비명으로 두번째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모모가 홍차를 타는 동안 미소라당에서 사온 쿠키를 접시에 담았다.
방금전 소란 속에서 쿠키가 조금 부서지긴 했어도 다행히 가루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모모의 오해를 풀고 나서 너저분해진 거실을 정리하곤 모두가 진정할겸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차분히 홍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정리했다.
속옷 도둑 사건의 진상은 예상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의 사이, 열려있는 게이트를 통해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개들이 나왔다.
잘곳을 찾아 집안을 돌아다니던 개들 중 한마리가 나나의 냄새를 맡고 빨래 바구니에서 팬티를 물고선 침대 아래에 기어들어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나나의 말에 따라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개들이 돌아가면서 침대 밑에는 덩그러니 팬티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팬티를 찾던 나나가 침대 밑에서 그걸 발견하게 되면서 오해가 시작되었단 얘기다.
개들에게 물어보고 진상을 알게 된 나나는 어쩔줄 몰라 했다.
언급하기도 민망한 사건인지라 나도 굳이 사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붉어진 얼굴로 고민하는 나나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조금 놀릴겸 핀잔을 주었다.
"뭐, 확실히 넌 귀여우니까 그런 오해를 받아도 어쩔수 없겠지만, 침자국 운운하면서 변태취급을 한건 좀 마음이 아프더라."
"우, 우으으..."
"맞아 나나. 무엇보다 료스케씨는 속옷 같은걸로 만족할만큼 얌전하지 않은걸?
여차하면 자고있는 여자를 깨워서 욕구를 풀려는 사람이니까."
"아니거든? 그거 어디까지나 비유였다고."
속옷 도둑은 귀엽게 보일 만큼 범죄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모모에게 딴죽을 거는데, 기죽어 있던 나나가 억울한지 항의했다.
"하, 하지만! 마루에서 자던 개가 말했단말야!
오늘 새벽에 료스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팬티를 숨기듯이 들고 몰래 욕실로 들어가는걸 봤다고!"
푸웃-!?
모모가 마시던 홍차를 뿜었다.
"콜록콜록..."
새빨개진 얼굴로 기침을 하는 모모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나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래서 그거 분명 내 팬티를 들고 간거라고 생각했는...데..."
항의하던 나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수치심이 자극됩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을 내뱉었다.
"...그건 내 팬티였다구..."
조그맣게 중얼거린 내게 나나는 붉어진 얼굴로 와악! 하고 발악하듯 외쳤다.
"애초에 네가 나쁜거잖아! 자기 속옷 들고서 욕실 들어가는데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행동했던거야!"
"나, 나나...그거 아마..."
부끄럼을 타는 나나를 말리면서 모모가 머뭇머뭇 나나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만. 전부 내가 잘못했으니까. 여기서 제발 그만해주세요.
하지만 나나의 얼굴이 확 붉어진걸 보니 이미 늦은것 같다.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버린 나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좌절감에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당황하는 둘의 기척이 전해져온다.
"쿠, 쿠키가 맛있네요."
"그, 그치?"
"...홍차도 맛있네."
"「「「하, 하하하...」」」"
"「「「......」」」"
거북한 침묵이 거실을 맴돈다.
태어나서 그렇게 민망한 티타임은 처음이었다.
월요일. 하교후 집에 돌아오니 열린 방문 사이로 물건을 뒤적이는 소리와 나나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들어가자 웨이브진 장발을 풀어내린 나나가 핫팬츠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뒤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머리끈이 사라졌어."
이번엔 머리끈이냐.
저번처럼 침대 밑을 살피는 나나의 모습에 어제 일이 오버랩되었다.
"다 좋은데 말이다... 그 자세는 좀 위험하지 않아?"
"응?"
그러니까 핫팬츠 차림으로 엉덩이를 들고 엎드려있는 그 자세 말이다.
치골이 드러날 만큼 짧은 핫팬츠의 벌어진 가랑이 틈으로 속옷이 보이고 있었다.
"팬티 보인다구."
"죽엇 이 변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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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2월이 지나버렸네요.OTL;
1월 중순에 플롯짜놓고 이제야 완성하다니 참...--;
39화...힘내자...ㅠㅠ;
삽화에 수고해주신 터틀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생함이 전해지는 삽화가 귀여워서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징하게 느린 업로드 죄송요ㅠㅡ
늑장 연재에 한달째 묵혀둔 삽화에 양심이 아픕니다orz;
그리고 구정전에 올릴것 같다고 본의 아니게 뻥을 치게 되서 죄송해요 초매사츄님.ㅡㅜ;
다른 독자님들께도 죄송합니다m(_ _)m;;;
p.s. 참조 이미지
잠꼬대 하는 나나 - 터틀러님의 초안. 이불덮어주기 전 장면입니다. 자는 모습들이 귀여웠죠^^
p.s2.참고로 일본어로 복숭아(Peach)는 모모(挑, もも).
p.s3. 원래 플롯상에 있었던 미캉, 야미, 하루나의 얘기는 잘랐습니다.
매끄럽지도 않고, 저걸 넣어서 매끄럽게 써나가기엔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버렸네요.OTL;;;
담에 개별 이야기로 만들어보죠...쿨럭....( --);
후끈한 열기 속에서 가볍게 장보기를 마치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는 두 꼬마 우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으로 마루에 대(大)자로 널브러져 있었고, 원피스 차림의 모모는 지친 기색으로 부채를 부치며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 오셨어요 료스케씨?"
"료스케에에에...아이스크림 사왔어?"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진이 빠진 목소리로 반응하는 나나를 향해 장바구니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반색하며 일어나 다가온 나나와 모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곤, 종이박스안에 넣어서 베란다 한쪽에 보관해뒀던 선풍기를 꺼내왔다.
최근 들어 계속된 무더위에 나나와 모모는 노곤하게 바닥에 늘어져 버렸다.
이런 더위라면 진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지만, 아무래도 데빌루크성인은 보통사람보다 여름에 더 약한 것 같다.
라라의 말에 따르면 데빌루크에선 여름이라는 계절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일까?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라라도 여름엔 때때로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면 여름엔 별도의 피서 수단이라도 알아봐야 할 듯했다.
에어컨을 장만하든가, 시원한 카페에라도 데려가서 시간을 보내든가, 아니면 에어컨이 나오는 미캉네 집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싸들고 놀러 간다든가.
개인적으론 3번. 더위도 피하고 나나랑 모모가 라라와 만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니까.
선풍기에 씌워둔 비닐 커버를 벗기고, 선풍기 날을 한차례 닦은 뒤 전원을 연결해 틀었다.
아이스크림을 다먹은 나나와 모모가 선풍기 앞에 앉아 기분 좋은지 눈을 감았다.
"하아 시원해..."
나른한 표정을 지은 나나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흩어지며 울렸다.
"아~~~ 우리는~ 우주인이다~"
사실입니다.
TV에서 본건지 우주인 놀이를 하는 나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 나나. 그렇게 선풍기에 가까이 앉아 있으면 나한테 바람이 안오잖아?"
"모모 넌 부채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억지 부리지 마. 나도 부채만으론 안된다구."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던 두명은 발끈한 모모가 나나의 꼬리를 잡아채면서 본격적으로 마루에서 뒹굴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땀투성이인채로 잘도 다투는구나.
날이 더우니 개방적이 되는건지 후끈후끈한 열기속에 바닥을 구르며 「후얏?」이니「꺅?」이니 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서로의 꼬리를 잡은채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에 쓴웃음이 났다.
에로틱한 다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나나가 모모의 꼬리를 잡아채는 와중에 들어올려진 모모의 원피스 아래로 어른스러운 속옷이 보였을 때, 가볍게 감탄섞인 휘파람을 부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한 둘의 눈흘김을 모른척 하곤 장바구니에 든 먹거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더위에 지친 둘이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햄야채볶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양파와 피망, 당근을 함께 넣어 색상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어 보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나나와 모모에게도 호평이었다.
"아~ 잘먹었다!"
"잘먹었어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둘을 보니 나도 보람은 있다만...
물끄러미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수놓인 접시를 확인했다.
나나의 접시 한쪽에 쌓여있는 피망. 모모의 접시에 담겨있는 당근 무더기.
...편식이냐?
눈으로 묻자 나나와 모모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피망 싫어."
"당근은 조금..."
니들이 애냐...
다음부턴 서로의 피망이랑 당근을 바꿔먹는게 좋을까 의논하는 둘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테이블 뒷정리를 돕고난 뒤, 둘은 게임기에 달라 붙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얼마전 모모가 새로 사온 게임을 하나보다.
나나는 껌으로 풍선을 불어가면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은지 생각만큼 잘 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으악! 또 죽었잖아?"
"이지 모드로 플레이 하는건 어떨까?"
"자, 잠깐만 모모. 이제 슬슬 익숙해져 가는것 같으니까..."
"...그 말 꺼낸게 이걸로 벌써 다섯번째야 나나.
이지 모드에선 컨티뉴가 무한이니까, 일단 이지 모드로 연습해서 익숙해지는게 낫지 않아?"
"큭,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바꾸는건 진 기분이 든다고.
두고봐. 그런거 없이도 오늘 안에 반드시 엔딩을 보고 말테니까!"
"후우..."
나나의 고집에 모모도 고개를 내젓곤 물러섰다.
승부 근성을 불태우는 나나의 대사를 듣건데 아무래도 오늘은 클리어를 목표로 밤을 샐 작정인가보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고, 나나랑 모모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니 밤샘을 해도 딱히 걱정은 없지만...내 잠자리가 문제다.
소파에 앉아서 한창 게임 플레이 중인 둘의 앞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태연하게 눈을 붙이기엔 나도 그렇고 둘로서도 영 껄끄로운 선택이다.
결국 오늘은 나나와 모모가 마루에서 자고, 내가 방안에서 자는 걸로 둘과 이야기를 맞췄다.
마루에 둘의 잠자리를 깔아두고 일어섰다.
"그럼 나 먼저 잔다. 게임하다 밤 새진 말고."
"네. 안녕히 주무세요 료스케씨."
"흥, 밤까지 끌지 않아. 이런 게임 같은거, 단숨에 클리어 할테니까."
...정말로 일찍 자기는 할건가?
의욕만만한 나나의 모습을 걱정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나와 모모가 우리집에 머물게 되면서 몇가지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내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처럼 생긴 물체인데,「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라고 한다.
「사이버 사파리 랜드」는 예전에 나나와 모모의 계획으로 초대되었던 '트러블 퀘스트'와 같은 가상공간으로, 동물 친구들이 편하게 살수 있도록 나나가 조성한 오리지널 세계다.
저번에 나나가 데다이얼로 불러내었던 우주 멧돼지군은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불려져 나온것이라고 한다.
왜 내 방에 이게 놓여졌냐면, 내 방이 나나와 모모의 잠자리이기 때문이다.
나? 난 마루에 잠자리를 깔고 잔다.
홈스테이 하는 녀석들이 침대를 쓰고 정작 집주인이 마루에 잔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만, 여자애는 차가운데 앉으면 안된다는 얘기도 있잖은가.
시기가 여름이라서 '차가운 바닥'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만...
리토네 집에 방이 모자라서 우리집에 지내러 온 나나와 모모인데, 적어도 리토네 벽장에서 지내는 라라보다는 나은 거주 환경을 제공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무감에 결정한 사항이다.
가끔 찾아오는 저스틴의 눈치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나나와 모모가 아버지인 기드에게 지구에 머무는걸 반억지로 허락을 받은뒤, 저스틴이 둘에게 용돈을 줄 겸 찾아왔었다.
「이런 녀석이랑 함께 지내실거면 차라리 저희가 사는 곳에 오십시오!」라는 저스틴의 주장에 나나랑 모모와 함께 저스틴의 거처로 가보았다.
조촐한 다다미방이었다. 나나의 가차없는 평가에 따르면 좁고 지저분했다.
기존의 거주자만 해도 저스틴, 마울, 브왓츠 3명인데 이 좁은 방에 나나랑 모모가 더해진다고? 잠잘때 테트리스 하듯이 잘 셈이냐?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결론과 함께 저스틴의 의견은 거절했다.
낙담하는 저스틴을 위로할겸, 저스틴의 수상작 '은하의 랩소디'의 감상을 말하며 정중한 태도로 저스틴에게 사인을 부탁했을때, 날 가리키며 '이런 녀석' 운운하던 저스틴의 급변한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헛기침을 하곤「...그래도 알고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저스틴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나나와 모모의 얼굴도 인상깊었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은 되는지「혹시 잠자리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하고 물어오는 저스틴의 과보호도 잠자리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잠자리를 정하는 일 만큼이나 서로에게 배려가 필요했던 부분은 옷을 넣는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집의 크기와는 별개로 나 혼자 살고 있었던 집이니 만큼 가구의 개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속옷 보관은 같은 서랍장의 다른 단에 하기로 정한 뒤,「혹시 실수인척 저희 속옷을 꺼내가진 않으시겠죠?」라며 추파를 던지는 모모에겐 정중히 부정의 말을 전해두었다.
회상은 여기까지로 하고, 공포영화를 봤던 날 이후로 내 침대에서 자는건 처음이라 새삼 감회에 젖은채 이불을 펼쳤다.
침대 머리 맡에는 휴대폰처럼 생긴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이 두개 놓여 있었다.
가상 세계에 놓아둔 물체를 불러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나와 모모는 주로 친구들을 불러내는데 사용하는듯 하다.
침대에 놓아둔걸보니 '이것도 휴대폰마냥 알람기능이 있는걸까?'하는 의문을 갖곤 데다이얼을 책상 위에 옮겨다 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슬슬 포기하는게 좋지 않아 나나?」
「으으...이상해! 분명 TAS라는 사람은 엄청 쉽게 플레이 하던데!」
아니, 그거 사람이 아니니까...
마루에서 들려오는 나나와 모모의 대화에 속으로 딴죽을 걸곤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거실 바닥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배꼽을 드러낸채 만족감에 겨운 얼굴로 잠자는 나나의 모습에 무심코 헛웃음이 샜다.
나나의 옆에 누워있는 모모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얌전히 잠에 빠져 있다.
다만 모모도 이불은 덮는둥 마는둥 한게 아무래도 여름 더위 탓인가보다.
아니면 이불 덮을 생각도 못할만큼 피곤했다든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흘리는 둘을 내려다 보다가 흘러내린 이불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나나처럼 배꼽을 드러내놓고 자다간 감기걸릴것 같았으니까.
'잘록하고 매끈한 허리네'라는 감상과 함께, 「우웅...」하며 작게 몸을 뒤척이는 나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주었다.
새액-새액-하는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이렇게 자는걸 보니까 확실히 귀엽네.
부스스하게 흩어진 분홍 머리카락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데빌루크」니까 마치 천사같다는 표현을 쓰는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눈호강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무슨 꿈을 꾸는지 군침을 흘리며 자는 나나의 입가를 닦아줄까 하다가, 나나의 옆머리에 붙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나의 분홍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부정형 물체가 나나의 머리카락에 엉겨 있었다.
바로 어젯밤 나나가 게임 하면서 씹고 있던 풍선껌.
야 임마...
껌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잔거냐? 대체 몇시까지 놀았던거야...
내심 투덜거리곤 나나의 옆 머리를 손가락으로 받쳐올렸다.
잔뜩 엉켜있네 이거...아침부터 액땜하게 생겼구먼.
작게 신음을 흘리며 나나의 머리카락을 살펴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고있던 모모가 눈을 떴다.
"으음..."
아직 졸린지 몸을 뒤척이며 게슴츠레 눈을 뜬 모모는 몽롱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마주하곤 한차례 눈을 깜빡였다.
"......료스케씨?"
"이런, 일으켜 버린거야? 밤늦게 논것 같길래 여간한 일로는 깨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
아연해하던 모모가 눈을 크게 치떴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채 뭔가를 찾듯 이불 속을 뒤지던 모모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데다이얼이..."
"데다이얼이라면 내 방 책상에 놔뒀는데?"
내 말에 흠칫 몸을 떤 모모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몸을 가렸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모모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이걸 노렸던 건가요?"
뭐가?
"무슨 짓을 하려는거죠? 대답에 따라선 가만있지 않겠어요."
"무슨짓이냐니...나, 적어도 그렇게 경계시킬 정도로 질나쁜 행동은 안하고 지냈었잖아?"
"깨어난 순간 눈앞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는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에요.
옆에서 자고 있는 자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남자였다면 더더욱..."
"응, 그건 그렇네."
"...부정해주세요 거기선.
더 믿을 수 없게 되잖아요?"
무심코 수긍해버린 내 태도에 모모는 반 울상을 되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동의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구.
딱히 뭘 하려던건 아니었어?"
"...흑심을 품고선, 자고있는 틈을 타 저희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는 변태로 밖엔 안보이는걸요?"
"이봐, 난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냐.
자는 틈을 노려 엉큼한 짓을 할 만큼 비굴하지도 않고.
그건 내 자존심 문제라고.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자고 있는걸 깨워서 하는 쪽이..."
"에, 엣...?"
내 말에 모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듯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린 모모는 살그머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번데기마냥 이불로 몸을 만채 조용해진 모모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모모를 불렀다.
"모모?"
"저, 저기...지금까지 일은 전부 잠꼬대였던걸로..."
어이, 여보세요? 야한짓 하려고 깨운거 아니니까 자는 시늉 안해도 되거든요?
하는 짓이 귀여워서 화날 생각도 안든다만.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꾸와 함께 잠자는 시늉을 하는 모모에게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니까 진정하고 이것 좀 보라구."
"......"
이불 위로 눈만 빼꼼 내놓은채 경계하는 모모에게 나나의 머리카락을 들어보였다.
나나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핑크색 껌을 발견한 모모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
"으앙 이게 뭐야~?"
하품을 하며 눈을 뜬 나나는 옆머리에 달라붙은 껌을 확인하곤 울상을 지었다.
게임 클리어 후 만족감과 피로감 속에서 껌도 안뱉고 바로 잠에 빠진 만용의 결과라고 할까?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떼려다가 실패한 나나는 어쩔줄 모른채 울상을 지으며 가위를 찾았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려는 나나의 만행을 기겁하며 말리곤 화장대 위에 놓인 무스를 가져왔다.
무스를 든채 소파에 앉곤 소파 앞 마루에 나나를 앉혔다.
손바닥에 무스를 짜서 껌이 붙은 머리카락 주변을 살살 문질렀다.
"껌을 씹은채로 자니까 그런거잖아. 좀 조심하라구."
"히잉..."
"그런데 생각보단 일찍 일어났네?
밤새 놀았다길래 한 정오쯤은 되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덥고 찝찝해서 씻고 싶었거든.
정말이지 이 더위는 언제쯤 사그라드려나 몰라."
투덜대면서 손바닥으로 부채를 부치던 나나는 바람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목덜미께를 잡고 옷을 펄럭거렸다.
쇄골 아래까지 노출된 민소매 티라서 소파에서 나나를 내려다보는 나로선 언뜻언뜻 드러나는 껌딱지 같은 무언가 때문에 시선을 두기가 곤란했다.
...아, 색깔이 말이다. 볼륨을 말하는게 아님.
"뭐하니 조신하지 못하게."
"그치만 덥단 말야..."
투정부리는 나나에게 작게 한숨을 쉬며 묵묵히 나나의 머리카락에 무스를 발랐다.
이윽고 머리카락에 붙은 껌들이 녹아 떨어질 기미가 보이자 빗으로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빗으며 껌을 훑어내었다.
"어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한창 빗질을 하고 있던 중 욕실에서 씻고 나온 모모가 우리 둘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됐네 나나. 료스케씨 덕에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가 없어져서."
"그렇지?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려고 했을땐 놀랐다구.
장발은 기르기도 관리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예쁜걸 자른다니 아깝잖아?"
"에? 예뻐?"
"그럼그럼~ 게다가 폭신폭신한 감촉도 맘에 쏙 들어."
"...혹시 껌떼는거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건 아니지?"
"설마."
껌떼기랑 상관없이 쓰다듬고 싶을 만큼 기분좋긴 하다만, 더워서 팔락팔락 손부채를 부치는 녀석을 계속 붙잡아둘만큼 염치 없진 않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꼼꼼히 떼어내곤 나나를 일으켰다.
"자, 다됐어. 이제 껌은 없지만, 무스를 쓰기도 했으니까 한번 머릴 감는게 나을꺼야."
"응, 안그래도 더워서 씻을 참이었으니까. 고마워 료스케~!"
일어서서 핑크빛 웨이브 장발을 한차례 만지작거린 나나는 싱긋 웃음을 보이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선풍기 앞에 전세놓은듯 앉아있는 나나와 모모가 보였다.
오늘도 선풍기 앞에서 시간을 보낼 셈인가?
또다시 선풍기 앞에서 늘어질 기미를 보이는 둘에게 안되겠다싶어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있지말고 함께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
"쇼핑?"
"그래. 얼마 뒤면 여름축제니까 너희가 입을 유카타도 골라볼 겸해서 말야."
"갈래!" "좋아요."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나와 모모와 함께 상점가에 들렀다.
홍차가 다 떨어졌다는 모모의 말에 우선 홍차 매장을 둘러보았다.
모모가 홍차를 살펴보는동안 나도 진열된 홍차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이 코너 저 코너를 돌아다니던 중 진열대 한쪽에 놓인 귀여운 꿀벌 인형이 눈길을 끌었다. 마스코트 캐릭터인가?
진열대 위에 놓인 홍차 티백이나 틴의 겉면엔 테디베어나 민속의상을 입은 어린이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물품이네...
어디, 가격은...5팩들이 티백이 578엔!? 아, 틴에 든 잎차는 1260엔이네.
가격은 비싼편이지만 귀여운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지라 포기하기가 왠지 아깝다.
수집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가격은 어느정도 눈감아도 되지만...
가격이냐 귀여운 디자인이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손님, 어떤 종류의 제품을 찾으시나요?"
"아, 그러니까...후르츠 계열의 홍차를 찾고 있었어요."
과일향이 나는 제품이 괜찮을것 같아서 답하니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진열대 한쪽을 가리켰다.
"후르츠 계열로는 이쪽의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 4 종류가 있습니다.
종류별로 한번씩 향을 맡아보시겠나요?"
"네."
종업원은 찻잎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왼쪽에서부터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입니다."
"어디어디...「헤에, 좋은 향이네요.」오~?"
종업원이 내민 유리병에 얼굴을 가져가는데 오른편 뒤에서 모모가 끼어들었다.
뺨이 맞닿을만큼 가까워진 모모가 오른쪽 유리병의 향기를 맡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스읍-하는 숨소리가 어쩐지 달콤하다.
분명 화이트 피치의 복숭아 향 탓이다.
귓볼이 뜨겁다.
향을 맡아보던 모모가 만족스러운듯 웃음지었다.
"산뜻한 향이네요. 료스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으응, 달콤한 복숭아 향이네."
"어머...제 향기라니 료스케씨도 참~"
입가를 가리고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탁탁 두드리는 모모에게 당황해서 변명했다.
"어? 아, 아니. 모모(モモ) 네가 아니고 복숭아(もも, 모모)향...어라?"
"풋- 색남씨."
말이 꼬인 내 모습에 모모가 피식 웃곤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좋은 향이네요. 거기다 여기 홍차는 꽤나 디자인이 귀여운걸요?"
"모모 넌 사고 싶은걸 정한거야?"
"아직요. 뭘 고를까 둘러보다가 료스케씨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한번 와봤어요.
과일향이 나는 이 홍차가 제법 괜찮아 보이네요. 쿠키랑 함께 먹으면 좋을 듯 해요."
"그래? 그럼 이번 홍차는 이걸로 살까?"
의견을 조율하는 우리를 보던 종업원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애인이신가요?"
"왜요? 혹시 커플 경품 같은게 있나요?"
종업원의 말에 모모가 반색하며 잽싸게 팔짱을 껴왔다.
넉살도 좋구나 이녀석.
그래도 갑자기 몸을 기대오진 마. 네 발육은 솔직히 반칙이니까.
팔을 누르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움찔하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조절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스스럼없이 보여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 시즌 한정 스페셜 티를 커플 한정으로 할인해주는 이벤트가 있긴 합니다만..."
"핫핫핫. ...친구 동생입니다."
"후후후, 집주인씨에요."
냉큼 팔을 풀며 정색하는 우리에게 애매한 미소를 띄워버린 종업원이었다.
"계산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나왔다.
"괜찮은 가계였죠?"
"응. 홍차향도 좋았고 디자인도 귀여웠고 말야."
이후, 다른 매장에서 동물인형을 사온 나나와 합류해 의류 매장으로 이동했다.
맘에드는 유카타를 고르는데 제법 시간을 들인지라, 카페에서 파르페로 더위를 식힐 즈음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에 돌아와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나나와 모모는 골라온 유카타를 들고서 거울에 비춰보고 있었다.
유카타를 들고 이리저리 맞춰보던 모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게 물었다.
"저기, 료스케씨?"
"왜그래?"
"유카타 입는거 말인데요, 어떻게 입는지 잘 모르겠는데 좀 봐주실수 있나요?"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몰라. 기껏 아는거야 유카타 안엔 속옷을 안 입는다는 것 정도라서 도움도 안될텐데?"
"엑!?"
내 대답에 나나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알몸으로 이걸 입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아무리 그래도 팬티는 입겠지. 그래도 위에는 안 입던걸?"
"진짜?"
"왠지 묘하게 확신하고 계신것 같네요?"
확신이라면 확신이지.
코테가와의 유카타 차림을 떠올려보면 그랬단 얘기니까.
"그냥..."
"그냥?"
"......경험?"
"「「......」」"
찌르는듯한 둘의 시선에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나중에 코테가와나 다른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볼께.
축제까진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흐응...료스케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모모가 어깨를 으쓱하곤 나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나나. 그럼 넌 평소처럼 입으면 되잖아?"
"왜 내 가슴쪽을 보는거야!?"
가슴쪽에 눈길을 주며 이야기하는 모모에게 나나가 발끈해선 소릴 질렀다.
"괜찮아 나나. 그것도 나름대로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익! 그 이긴듯한 태도가 싫다고!
두고봐. 나중에 모모보다 훨씬 멋지게 자라줄테니까!"
"어머~ 기대할께."
민망한 대화가 오가느라 표정관리가 힘든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지 그래?
못들은척 딴청을 피우는 내 모습에 모모가 히죽 웃었다.
"후후...한창인 미소녀들이랑 함께 있느라 료스케씨도 큰일이네요."
미소녀라서 문제인게 아니라 에로 토크가 문제인겁니다.
"자기 입으로 미소녀라고 말하는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침부터 잠자리에서 덮쳐지진 않았겠죠?)"
"(쉿! 너도 오해 풀었잖아?)"
장난스레 속삭이는 모모에게 놀라 황급히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아침의 위기감이 사라진 반작용인지 대범해졌다고 해야하나, 오늘따라 모모의 행동에는 여유로움이 드러났다.
혹시 모모는 기싸움 할때면 밀리기 싫어하는 성격인건가? 아침의 일로 꿍해 있는것보다야 훨씬 좋다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모는 당황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듯 쿡쿡 웃더니 농을 던졌다.
"뭐, 한창 피가 끓을 나이인 료스케씨니까 그런 고뇌를 모르는건 아니지만요.
그러고보면 사내아이는 침대 밑에 소중한 물건들을 숨긴다고 하던데...혹시 료스케씨도?"
"그럴리가 있나."
"침대 밑? 중요한 물건이 뭐야 모모?"
"알고 싶어 나나? 그럼 귀를 좀 가까이..."
"뭔데 그래?"
"야, 잠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나의 귀에 모모가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야.한.책.♡)"
"!? 저, 저질이야...!"
저질스러운건 너희 망상쪽이야 요 발랑까진 녀석들아.
애초에 숨길만한 물건이라고 해도 떠오르는게 없다고.
...기껏해야 책장 한쪽에 꽂아둔, 룬의 수영복 화보가 실린 연예인 잡지 정도?
룬에게 저 책이 발견된다면 분명 좋은 꼴은 못볼테니 숨겨야 할 물건이라면 숨겨야할 물건이지만, 애초에 룬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있기야 하려나 몰라.
나나에게 침대 밑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는 모모를 말리곤 점심 준비를 서둘렀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모모가 내쪽을 빤히보며 중얼거렸다.
"쌓여있네요."
"뭐가?"
"청소년기의 왕성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잔뜩 쌓여있는거죠?"
"절대 아냐! 성희롱이라구 이건!"
"호오? 왕성한 독서욕 때문에 책이 쌓여있다는게 뭐가 성희롱이란거죠?"
"윽..."
"쌓여있네요."
"또 뭐가?"
"얼룩덜룩해지고 꾸깃꾸깃한 뭉치들이 잔뜩 쌓여있는 통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고 있잖아요?"
"아니라니까! 난 그렇게까지 원숭이가 아니라고!
"호오? 빨래 바구니에 담아둔 빨래 냄새가 퀴퀴하다는건데 어째서 원숭이가 된다는거죠?"
"큭... 너, 너말야..."
"쌓여있네요."
"...또 뭔데?"
"아침마다 그 물건이 기운차게 팔딱팔딱 튼실한걸 보면 누가 봐도 쌓여있다고 생각할거에요."
"언제 본거야!?"
"호오? 아침수산시장에서 대야 안에 펄떡이는 활어가 잔뜩 쌓여있다는건데 뭘 봤다고 그러시는거죠?"
"이거 완전 억지잖아!?"
"쌓여있네요."
"네, 쌓여있네요."
"왕성한 욕망을 주체못해서 쌓여있는거죠?"
"맞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네."
"얼룩덜룩하고 비릿한 뭉치 냄새가 통안에서 진동하는거죠?"
"응, 여름이라 더 그런가보네."
"아침마다 팔딱팔딱 튼실튼실할만큼 쌓여있는거죠?"
"네네, 어차피 또 책이니, 빨래니, 물고기니 하는거지?"
"아뇨? 휴지통이 임신할 만큼 료스케씨의 성욕이 잔뜩 쌓여있다구요."
"이, 이익...!"
소악마같은 미소를 지은 모모에게 발끈해선 이마라도 한번 튕겨주려고 침대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날 보면서도 모모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의 이마로 향하는 내 손을 모모가 양손으로 잡았다.
"후후, 이마로 되겠어요?"
모모가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까이 가져갔다.
"어, 어? 자, 잠깐?"
"밤놀이 상대는 못해드려도 쌓여있는걸 해소시키는데 조금쯤 도움을 드릴 순 있는데요?"
달뜬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모모의 숨결에선 복숭아향이 났다.
"안 쌓여있대두!
그러니까 이런 도움은 필요없...응? 가슴이 끈적끈적해?"
모모의 가슴에 닿은 손바닥에 끈적끈적한게 묻었다.
이건...풍선껌?
아연해하는 날 보며 모모가 히죽 웃었다.
"모모인줄 알았어?
유감, 나나였습니다~!"
"꺄아아아악!? 가슴이 껌딱지가 돼버렸어!?"
"껌딱지라고 하지마!"
손바닥에 잔뜩 달라붙은 껌딱지에 놀라 비명을 지르자 발끈한 나나가 내게 덤벼들었다.
침대에 밀려 넘어뜨려진 내게 나나가 달라붙어왔다.
"크윽!?"
"두번 다시 껌딱지 같은거엔 신경쓰지 못하게 해주겠어!"
"야!?"
옷가지가 훌훌 날아가고 이불 안으로 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쓴채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나나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이, 이 녀석 알몸이잖아!?
"더우니까 말야. 여름이잖아?"
송글송글 땀방울을 흘리며 나나가 배시시 혀를 내밀었다.
내 티셔츠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더듬던 나나는 이불속에 가려진 오른손으로 내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붉어진 얼굴로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자니 나나가 작은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후후, 딱딱하네. 역시 쌓여있었잖아?
자아~ 커져라 료스케의 엑스칼리버~"
쓰다듬쓰다듬.
그만둬 쇼커!?
......아놔 꿈.
한심한 비명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낯익은 마루의 천장에 눈을 깜빡이다가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황급히 이불을 걷어 바지를 벗었다.
...맙소사...
밤꽃 냄새를 풍기며 눅눅하게 젖어있는 팬티에 자연스레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은 아직 새벽. 나나와 모모는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한껏 눅눅해진 팬티를 대충 휴지로 닦고선 갈아입을 팬티를 가지러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침대에 자고있는 나나와 모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으- 하는 옅은 숨소리를 흘리며 편안히 잠에 빠져있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 방금전 꿈이 떠올라 자기혐오로 죽을 것만 같았다.
미안해 모모. 미안 나나. 이상한 역할로 꿈에 나오게 만들어서. 앞으론 편식한다고 화내지 않을테니까...
가까스로 좌절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서랍장을 뒤져서 새 팬티를 꺼냈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려던중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다.
침대 커버가 흔들리더니 침대 밑에서 기어나온 개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저번에 나나가 데려온 떠돌이 개 중 하나였던걸로 기억한다.
굳어있는 내 모습을 보던 개는 게슴츠레 내쪽을 바라보다가 길게 하품을 하곤 도로 침대 아래로 들어가버렸다.
"휴우...간 떨어질뻔 했네."
가슴을 쓸어내리곤 이번에야말로 소리없이 방을 나왔다.
마루에 나오자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던 개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나가 가상현실에서 개들을 꺼내놓은건가?
의아했지만 지금은 눅눅해진 팬티를 씻는게 먼저라 욕실로 들어갔다.
민망한 뒷처리를 끝내고 나서 팬티를 들고 욕실을 나왔다.
기왕 내친김에 쌓여있는 빨래감도 한꺼번에 빨려고 베란다로 나온직후, 빨래 바구니에서 뒹굴고 있는 개들을 보곤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야 이게!? 왜 개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있어?
아까전 마루에서 봤던 개도 이상해. 분명 어젯밤 잠자기 전엔 개 같은건 한마리도 없었다고?
일단은 개들을 말리는게 우선이라 빨랫감을 입에 물어 대려는 개들을 얼렀다.
몇몇은 손짓을 따라 얌전히 물러났지만 개중엔 빨랫감을 물고 도망가려는 녀석도 있었다.
한번에 전부를 잡을 순 없었는지라 일단 먼저 목덜미를 잡은 녀석의 입에서 옷감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빨랫감을 빼내었다.
빨랫감을 빼내고 개를 놓아주자 녀석은 곧장 마루로 달아났다.
손에 잡힌 빨랫감은 나나의 팬티였다.
...혹시 자기 주인 냄새를 맡고 가져가려고 한건가?
근데 이거 이빨 때문에 헤지진 않았으려나?
침자국이 묻은 팬티를 살짝 펼쳐보는데 옆에서 「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든 팬티를 보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나나에게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잠깐! 이건,"
"이잇! 뭘 빤히 바라보는거야!"
내 말을 막으며 나나는 빨개진 얼굴로 자기 팬티를 낚아챘다.
팬티를 뒤로 감추면서 날 노려보는 나나에게 민망해하다가 방금전 떠오른 의문을 부딪혀 화제를 돌렸다.
"아, 나나. 그러고보니 묻고 싶은게 있는데."
"...뭐야 변태?"
"집안에 개들이 가득 차 있는데 혹시 네가 풀어놓은거야?"
"...아! 어제 놀다가 게이트 닫는걸 깜박했어!"
내 질문에 나나가 깜짝 놀란듯 다급히 방안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어젯밤부터 오늘아침까지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집안을 돌아다니는 개들을 가상공간으로 돌려보내는걸로 부산스레 하루의 시작을 열었다.
아침식사동안 뽀로통한 얼굴로 밥을 먹는 나나와, 나나의 태도에 의심스런 눈으로 날 보는 모모 때문에 아침 밥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하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면 꿈에서 나온 두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서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기 급급했을 뿐이었으니까.
뭐, 정오가 될 즈음에는 다 털어내고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지나 산책겸 마을을 걷다가 미소라당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과자와 빵을 보다가 문득 어제 산 홍차가 떠올랐다.
모모가 해주는 홍차랑 쿠키를 함께 먹으면 맛있을것 같네.
아침의 일도 사과할 겸해서 미소라 당에 들어가 쿠키를 사 집으로 향했다.
더위를 타는 두 녀석들을 위해 덤으로 마트에서 아이스크림도 몇개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게임센터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원피스를 입은 짧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건슈팅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모다.
어쩐지 총을 쏘면서 연신 곤혹스러워하기에 의아했지만 게임 타이틀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버추○ 캅」이네. 당황해하며 파란 양복을 입은 악당에게 총을 쏘는 모모의 뒷모습을 불쌍하게 응시했다.
파란양복. 화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알을 죄다 몸으로 막아내면서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깎아대는 흉악한 괴물이다.
「Somebody help me!」
"에?"
「Please, don't shoot!」
"어, 어라?"
「Nooooo---!」하는 괴성과 함께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몇번이나 깎아댔을까.
「GAME OVER」
결국 모모는 파란양복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과연 파란양복. 최악의 난적이라는 악명은 거저 얻어진게 아니다.
"......"
게임오버 화면이 뜨고서도 모모는 한참을 총을 든채 멈춰서 있었다.
"후...후후..."
이윽고,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낮은 웃음을 흘린 모모는 조용히 총을 내려놓고 다른 게임기로 이동했다.
펀치 머신 앞에 선 모모는 말없이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펀치 머신에 불이 들어오고 누워있던 글러브가 세워지자 모모는 작게 숨을 들이 쉬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모모를 구경하던 남자 한명이 슬그머니 모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예쁜 아가씨? 아가씨처럼 갸냘픈 소녀가 그런걸 쳤다간 잘못하면 손이 부러질지도 몰라?
그런 위험한건 하지 말고 시간되면 나랑 같이..."
콰아아아앙---!!!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펀치 머신이 크게 들썩였다.
게임기들의 BGM을 묻어버릴만큼 엄청난 굉음이 게임센터를 울리면서 놀란 사람들이 펀치머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우우우우...
게임기들의 음악들 사이로 글러브에 바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린다.
삐걱삐걱대는 펀치머신의 화면에 신기록이 갱신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스코어보단 방금전 굉음을 일으킨 조그마한 체구의 모모에게 더 경악한 표정이다.
과연 데빌루크. 아무리 어려도 보통 사람과는 한가닥 다른 완력이다.
모모에게 헌팅을 시도하던 남자는 어느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릴렉스~ 릴렉스~"
돌아서선 상쾌한 얼굴로 이마를 훔친 모모는 미묘한 얼굴을 한 날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료스케씨? 언제 오셨어요?"
"아, 아. 집으로 가다가 네 모습이 보이길래 잠깐 구경하고 있었어.
...아이스바 하나 먹을래?
"어머, 고마워요."
건네받은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선 모모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배시시 웃었다.
시원한걸 먹곤 기분이 나아진건가보다.
방금전의 행동은 여름의 무더위 탓으로 이해하자.
"나나가 안보이는데, 함께 나오지 않은거야?"
"나나는 아직 집에 있을거에요.
찾는 물건이 있어서 한창 집안을 뒤지고 있는 중이거든요."
아이스바를 할짝이며 대답한 모모는 다시금 의욕이 솟았는지 눈을 반짝곤 게임센터를 돌아보았다.
"후우~ 시원하네요. 자, 그럼 다시 한판 더!"
"아직 더 하는거야?"
"물론이죠. 적어도 방금전 게임만큼은 설욕하지 않으면...!"
"그럼 난 먼저 집에 가있을께.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곤란하니까.
아, 쿠키도 사왔으니까 나중에 홍차랑 함께 먹자. 미소라당에서 사온건데 거기 쿠키는 맛있기로 유명하거든."
"헤에? 그거 기다려지는걸요.
저도 집에가면 맛있는 홍차를 대접해 드릴테니까 기대해주세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드는 모모에게 마저 손을 흔들어주곤, 다시금 건슈팅에 도전하는 모모의 뒷모습을 본후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나나, 나 돌아왔,"
두두두두두두두-!
"이 짐승아아아아아아아!"
퍼어억-!
"꿱!?"
민소매 티에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전력투구로 내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너는! 그렇게도! 내 팬티가 좋은거야? 이 변태야!"
날아차기에 직격당해 비틀거리는 내 멱살을 잡은 나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내게 대들었다.
"왜, 왜그래?"
"몰라서 물어!?"
나나가 한손에 쥔 물체를 쑥 내밀었다.
조그마한 천조각이 나나의 손끝에서 나풀나풀 흔들렸다.
...음?
"저기 나나, 혹시나 해서 묻는거지만 이거 설마..."
"이, 이잇...! 보면 몰라? 내 속옷이잖아!"
버럭 화를 내면서 나나가 속옷을 쫙 펼쳐들었다.
"야! 너 대체 뭘 보여주는거야!?"
"시끄러! 잘 보라구!"
한껏 얼굴이 붉어진 나나가 내민 속옷이 코앞까지 내밀어졌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수치 플레이야?
"분명 이걸 세탁하려고 내놓았었는데 안보여서 찾아봤었어.
아끼는건데...세탁기 근처를 찾아봤는데도 없었구.
그래서 다른데 떨어뜨린건가 싶어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찾았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였는데...네, 네 침대 밑에서 이게 나왔다고!
야한책 대신 이런걸 쓰는거야!?
침대밑에 숨겨둔 중요한 물건이라는게 이런거냐구!"
속옷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이거'라고 지칭하는 나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날 추격하듯 나나는 속옷의 눅눅히 젖은 자국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이 침자국은 뭐야!
너 내 속옷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해댄거냐구!
이 호색한! 저질! 변태! 짐승!"
"아니거든!? 내가 한게 절대로 아니거든!?"
"거짓말하지마! 너말고 대체 누가 있다는거야!"
"자, 잠깐? 어지러우니까 흔드는건 제발 그만...!?"
발끈한 나나에게 멱살을 잡힌채 탈곡기 속 곡물마냥 탈탈탈 털리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심했다.
"여기서 바보가 범인, 독수리가 나, 고기는 너, 레시피가 팬티."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내용물이 없는 팬티엔 관심없습니다."
"이 변태야아아아아아!"
짜악-!
진지한 얼굴로 주장하다가 따귀를 맞았다.
뺨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날 씩씩거리면서 노려보던 나나는 홱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야? 어디가?"
"언니한테 갈꺼야!
이런 변태가 사는 집 같은거, 당장에라도 나갈꺼야!"
핫팬츠에 민소매티만 입은채 밖으로 나가려는 나나에게 당황해서 나나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자, 잠깐만! 설명이 좀 부족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부웅-!」읏!? 진정하라구?"
"이익...!"
나나가 휘두른 주먹을 피하면서 설득을 계속했다.
잡힌 팔을 풀려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나나가 더이상 참지 못했는지 반대편 손으로 뭔가를 꺼내들었다.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가이노시시노,"
"으아아아! 인터셉트으으읏-!"
탁-!
"엣...?"
우주 멧돼지 녀석을 실내에 소환하는 만행을 저지르려는 나나에게 기겁해서 황급히 데다이얼을 손으로 쳐내곤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곤 벽에 밀어붙였다.
아스팔트를 갈아버리면서 돌진하던 멧돼지 녀석이 소환되었더라면, 그 집채만한 덩치만으로도 집안이 엉망진창이 될게 뻔했기에 살짝 식은땀이 났다.
"하, 하아... 멋대로 그런걸 꺼내면 곤란하잖아?"
"...아..."
데다이얼을 놓치곤 벽에 밀어붙여진 나나는 순간 뭐가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방치된 데다이얼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나나는, 몇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연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나나의 벌어진 입술이 살짝 떨린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턴 좀 진지한 시간을 가져보자구."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나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뭘 할 셈이야?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뭘?"
"힉!?"
실수한건가.
나나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기도 싫고, 데다이얼로 소환할 우주생물에게 집안이 박살나는것도 싫어서 양손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인게 나나의 공포심을 자극했나보다.
시시각각 얼굴이 파래졌다 붉어졌다를 반복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나나를 보면, 대충 어떤식의 위험한 전개를 상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여기서 두손을 놔버리면 지금 상태의 나나는 내 변명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나버릴것만 같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해명을 마친 뒤에 놔주는 쪽이 오해를 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다.
"이런 상태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너한테 해꼬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진정해."
"......"
"일단, 네가 화난 이유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우선 내 말도 한번 들어주길 바래. 그 후엔 화를 내도 받아들일테니까."
"으, 으응..."
차분히 말하는 내 태도에 조금은 진정한건지, 두려운 얼굴을 보이면서도 나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우선 어제 저녁에 모모가 했던 말에 대해서 반박할께.
남자아이는 야한 물건을 침대밑에 숨긴다는거 말인데..."
내 말에 나나의 볼이 붉어졌지만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런 행동은 안한다」라고 말해도 안 믿을지도 모르니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구.
만약 네가 좋아하는 남자의 팬티를 손에 넣었다고 쳐."
"읏! 나, 난 그런덴 관심없어!"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말야."
"...상상하기도 싫어."
"나도 마찬가지라구. 거기, 못믿겠다는 시선은 일단 치워."
불신어린 눈빛의 나나의 반응에 신음을 삼켰다.
"여기서 질문. 너라면 그 팬티를 그 남자가 쓰는 침대 밑에 숨기려 할까?"
"하?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리 없잖아. ...아!"
"그렇지? 그리고 내 방 침대는 내가 아니라, 너랑 모모가 사용하고 지내지.
적어도 상식이 있다면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곳에 숨길만큼 무모한 짓은 안할꺼야.
지금에 와선 거긴 '내 침대'가 아니라 「'너랑 모모'의 침대」니까."
"...그럼 왜 내 속옷이 거기에 있었어?
난 거기에 둔 기억이 없다구.
거, 거기다 그 침자국은..."
어물거리다 부끄러워졌는지 말을 흐리는 나나에게 조심스레 추측을 말했다.
"글쎄...솔직히 나로서야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오늘 아침에 빨래 바구니에서 개들이 빨랫감을 물고 달아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때 너랑 실랑이 하느라 도망가는 녀석들을 다 잡진 못했는데, 아마도 그때 놓친 개가 침대에 놔둔게 아닐까?
침이야 개들이 물고 있다가 묻은걸테고. 데다이얼로 불러내서 개들에게 한번 물어보는게 어때?"
"어...으응."
아침에 속옷을 가지고 드잡이질 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나나는 낯을 붉혔다.
얼마나 설득이 통했는진 모르지만 나나도 방금전까지의 격한 반응과 달리 몸부림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걸보면 적어도 놔주자마자 달아날 것 같진 않았다.
진정한 나나의 모습에 나도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벌컥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어...요...?"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모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의 광경, 그러니까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인 내 모습에 모모의 웃는 얼굴은 아연한 얼굴이 되고,
나나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나나의 데다이얼을 발견하고선 마침내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시바리스기.(거대 인면수(人面樹))"
"우아악!?" "꺄아아!?"
데다이얼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함께, 습격해 온 인면수에 기겁해 서로 얼싸안은 우리 둘의 비명으로 두번째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모모가 홍차를 타는 동안 미소라당에서 사온 쿠키를 접시에 담았다.
방금전 소란 속에서 쿠키가 조금 부서지긴 했어도 다행히 가루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모모의 오해를 풀고 나서 너저분해진 거실을 정리하곤 모두가 진정할겸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차분히 홍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정리했다.
속옷 도둑 사건의 진상은 예상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의 사이, 열려있는 게이트를 통해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개들이 나왔다.
잘곳을 찾아 집안을 돌아다니던 개들 중 한마리가 나나의 냄새를 맡고 빨래 바구니에서 팬티를 물고선 침대 아래에 기어들어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나나의 말에 따라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개들이 돌아가면서 침대 밑에는 덩그러니 팬티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팬티를 찾던 나나가 침대 밑에서 그걸 발견하게 되면서 오해가 시작되었단 얘기다.
개들에게 물어보고 진상을 알게 된 나나는 어쩔줄 몰라 했다.
언급하기도 민망한 사건인지라 나도 굳이 사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붉어진 얼굴로 고민하는 나나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조금 놀릴겸 핀잔을 주었다.
"뭐, 확실히 넌 귀여우니까 그런 오해를 받아도 어쩔수 없겠지만, 침자국 운운하면서 변태취급을 한건 좀 마음이 아프더라."
"우, 우으으..."
"맞아 나나. 무엇보다 료스케씨는 속옷 같은걸로 만족할만큼 얌전하지 않은걸?
여차하면 자고있는 여자를 깨워서 욕구를 풀려는 사람이니까."
"아니거든? 그거 어디까지나 비유였다고."
속옷 도둑은 귀엽게 보일 만큼 범죄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모모에게 딴죽을 거는데, 기죽어 있던 나나가 억울한지 항의했다.
"하, 하지만! 마루에서 자던 개가 말했단말야!
오늘 새벽에 료스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팬티를 숨기듯이 들고 몰래 욕실로 들어가는걸 봤다고!"
푸웃-!?
모모가 마시던 홍차를 뿜었다.
"콜록콜록..."
새빨개진 얼굴로 기침을 하는 모모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나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래서 그거 분명 내 팬티를 들고 간거라고 생각했는...데..."
항의하던 나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수치심이 자극됩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을 내뱉었다.
"...그건 내 팬티였다구..."
조그맣게 중얼거린 내게 나나는 붉어진 얼굴로 와악! 하고 발악하듯 외쳤다.
"애초에 네가 나쁜거잖아! 자기 속옷 들고서 욕실 들어가는데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행동했던거야!"
"나, 나나...그거 아마..."
부끄럼을 타는 나나를 말리면서 모모가 머뭇머뭇 나나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만. 전부 내가 잘못했으니까. 여기서 제발 그만해주세요.
하지만 나나의 얼굴이 확 붉어진걸 보니 이미 늦은것 같다.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버린 나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좌절감에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당황하는 둘의 기척이 전해져온다.
"쿠, 쿠키가 맛있네요."
"그, 그치?"
"...홍차도 맛있네."
"「「「하, 하하하...」」」"
"「「「......」」」"
거북한 침묵이 거실을 맴돈다.
태어나서 그렇게 민망한 티타임은 처음이었다.
월요일. 하교후 집에 돌아오니 열린 방문 사이로 물건을 뒤적이는 소리와 나나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들어가자 웨이브진 장발을 풀어내린 나나가 핫팬츠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뒤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머리끈이 사라졌어."
이번엔 머리끈이냐.
저번처럼 침대 밑을 살피는 나나의 모습에 어제 일이 오버랩되었다.
"다 좋은데 말이다... 그 자세는 좀 위험하지 않아?"
"응?"
그러니까 핫팬츠 차림으로 엉덩이를 들고 엎드려있는 그 자세 말이다.
치골이 드러날 만큼 짧은 핫팬츠의 벌어진 가랑이 틈으로 속옷이 보이고 있었다.
"팬티 보인다구."
"죽엇 이 변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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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2월이 지나버렸네요.OTL;
1월 중순에 플롯짜놓고 이제야 완성하다니 참...--;
39화...힘내자...ㅠㅠ;
삽화에 수고해주신 터틀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생함이 전해지는 삽화가 귀여워서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징하게 느린 업로드 죄송요ㅠㅡ
늑장 연재에 한달째 묵혀둔 삽화에 양심이 아픕니다orz;
그리고 구정전에 올릴것 같다고 본의 아니게 뻥을 치게 되서 죄송해요 초매사츄님.ㅡㅜ;
다른 독자님들께도 죄송합니다m(_ _)m;;;
p.s. 참조 이미지
잠꼬대 하는 나나 - 터틀러님의 초안. 이불덮어주기 전 장면입니다. 자는 모습들이 귀여웠죠^^
p.s2.참고로 일본어로 복숭아(Peach)는 모모(挑, もも).
p.s3. 원래 플롯상에 있었던 미캉, 야미, 하루나의 얘기는 잘랐습니다.
매끄럽지도 않고, 저걸 넣어서 매끄럽게 써나가기엔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담에 개별 이야기로 만들어보죠...쿨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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