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스케~! 같이 게임하자~!"

목욕을 마치고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로 갈아입은 나나가 권유로 거실에 앉아 컨트롤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욕실을 쓸 예정이었으니, 모모가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에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아보였다.

레이싱 게임을 하면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던 나나와 이따금 팔이 맞닿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화들짝 놀라며 비켜서는 나나의 반응에 굳이 대응할 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게임에 몰입하다보면 이정도 해프닝 정도야 보통이니까.

다만, '어? 어?'하는 사이에 레이싱 도중 추월당해 당황한 나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게 잘못이었을까.
머리에 열이 잔뜩 오른듯, 게임 도중 나나의 방해공작이 하나 둘 튀어 나왔다.

처음의 머뭇거림은 어느샌가 잊혀졌는지, 팔이 맞닿는걸 넘어서, 아예 내게 몸을 기대고선 날 밀어붙이려 한건 그나마 나았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내게 기대서 용을 쓰던 나나에게「후하하하하!」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웃음을 날리곤 유리하게 게임을 리드하고 있던 차였다.

"아아~ 정말~!"

지금 이대론 효과가 얇다고 생각했는지, 나나는 몸으로 밀어붙이는걸 멈추곤 컨트롤러를 잡은채 일어섰다.
그리곤 내 뒤로 이동한 나나가 그대로 내 등뒤에 매달렸다.
내가 상황을 채 이해하지 못한 차에, 내 왼쪽 어깨에 고개를 얹은 나나가 돌연 물러났다.

"으야야~~~!
수염이 까끌까끌해!"

"난데없이 실례잖아 너!"

나의 항의에도 아랑곳 없이 수염이 닿았던 볼을 매만지며 투덜거리던 나나는 다시금 몸을 숙였다.
내 목에 양팔을 둘러서 컨트롤러를 잡고, 나나는 그대로 내 정수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등뒤에서 나를 감싸듯한 자세가 되어버린 나나에게 당황해 몸이 굳어버렸다.

"야, 야? 이거 반칙..."

뺨을 간질이는 분홍빛 머리카락.
등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감촉.
몸을 두르듯 번지는 체향.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얼버무리듯 허풍을 떨었다.

"이런다고 내가 질줄,"

스르륵-

조용히 올라온 나나의 꼬리가 손목을 휘감았다.

"엣?"

꽈아악-하고 손목을 휘감은 꼬리에 힘이 들어가자, 이번에야말로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민감한 부위인 꼬리를 서툴게 자극했다간,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테니.


레이싱은 계속된다.

손목을 휘감은채 작게 흔들리는 꼬리.
새근새근 귓가를 달구는 옅은 숨결.

방금 전의 아우성과 몸싸움이 거짓말인양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BGM만이 거실을 메우고 있었다.



게임이 끝났다.

"...내가, 이겼어."

"으, 응."

등에 기댄채 나나가 승리를 선언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등에 매달려 있을 셈이람?
장외전술이 이유였다고 해도, 게임이 끝난 마당에 계속 이렇게 붙어 있는건 기분은 좋아도 솔직히 부끄럽다.
한껏 승리의 여운에 잠겨있는 중이라면, 좀 더 기다려 주어도 좋지만.

지금 자세에서 풀려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어깨에 힘을 빼고 컨트롤러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정수리를 누르던 나나의 턱이 조금 미끄러졌는지, 내 머리카락에 나나의 코가 살짝 닿은 것 같았다.


스으-


...에?



"...뭐하는거니 나나?"

"!?"

모모의 목소리에 나나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싼채 욕실을 나온 모모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귓볼이 빨개진채 나나는 후다닥 소리가 날 기새로 자신의 방으로 뛰쳐들어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채 앉아있는 내게 모모가 웃으며 다가왔다.

"사이 좋네요."

놀리듯 건네진 모모의 농담에 대꾸하는 것 대신 물었다.

"...저기..."

"왜그러세요 료스케씨?"

"나말야...
...혹시 냄새나?"

"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모의 반응에 머리를 매만지다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뭐야.
아무래도 오늘 목욕은 좀 더 신경써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내 방에 돌아올 즈음엔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기분을 전환할 겸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보면 하루나와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애완견 관련 책들도 빌렸었지.
애완견이라는 주제가 공통 관심사가 될 것 같아서 책을 빌렸던건데...
정작 하루나와의 관계 개선은 엉뚱한 부분에서 이루어졌으니, 역시 서로간의 관계는 어떤게 계기가 되어 변해가는지 모르는거구나.
묘한 감회에 젖은채 책상에 앉아 묵묵히 독서에 빠져들었다.


딸깍-

"응?"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열린 문틈으로 분홍빛 장발이 나부꼈다.
풀어내린 웨이브진 머리카락,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나나?"

"읽을게 있어서 왔어."

"보고 싶은 책이 생긴거야?"

"응. 『영웅학원』. 네가 이따금 읽던 만화말야."

"오? 나나 너도 영웅학원에 흥미를 갖게 된거야?"

"그냥, 미캉의 아빠가 그린 만화이기도 하고, 너도 그 애독자라고 들었으니까 어떤건지 궁금했거든."

"그렇다면야 기꺼이 감상하도록 해.
사이바이씨의 팬이 늘어난다면 기쁘니까."

"여기서 읽고 가도 좋아?"

"물론이야. 신경쓰지 말고 편히 보라구."

"흐흥~ 과연 어떤 내용이려나?"

씨익 웃곤 나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영웅학원 시리즈의 첫권을 집어들었다.

풀썩-

침대에 몸을 누인 나나는 누운채 책을 펼쳤다.

편히 보랬더니, 침대를 점거해버렸네.
정말로 사양이 없네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나나를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나나가 만화에 빠진 사이에, 나는 나대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자.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이따금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이 방을 메운채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을 내려놓는 소리 후 나나가 물음을 던졌다.

"...료스케는 어떤 책 읽고 있어?"

"나? 애견인을 위한 강아지와의 소통법."

나나를 향해 몸을 돌리곤 책을 내보였다.

"그러고보면 지난주에 동물 관련 책을 빌린다고 했었지?"

"응. 조금 관심이 생겨서 말야."

"흐응..."

방금전까지 침대위에서 뒤척인 탓인지, 나나의 민소매 상의가 흐트러져 배꼽이 드러나보였다.
이상한 시선을 보내다가 나나와 거북한 분위기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되돌리려던 차였다.

"료스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한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최근까지 하루나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던 속셈이 있었기에, 내심 찔리면서도 애써 태연한척 되물었다.
내 되물음이 대답이 되지 않았는지, 나나는 한차례 눈썹을 찌푸리곤 머리에 깍지를 꼈다.



과감하게 드러난 겨드랑이와 배꼽, 길쭉한 다리 라인를 강조하는 핫팬츠가 묘하게 선정적이다.
방금전 있었던 해프닝 탓에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지도 몰랐다.

"짐작 가는건 많잖아?
미오가 일하는 곳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꼬셔서 오는거라든지."

"윽..."

민망함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문 날 보며 나나는 입술을 벌렸다.

"카페에서,"

"?"

"...그건, 일부러였어?"

나나의 물음에 갈피를 잡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말야?"

"......"

당황하는 나를 말없이 노려보곤 나나는 달싹이던 입술을 한차례 매만졌다.



"그, 그나저나 오늘 견학은 어땠어?"

추궁뒤에 괜스레 조용해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억지로 화제를 돌려보았다.

"...뭐야, 그 갑작스런 화제전환은?
그리고 견학 얘긴 아까 오면서 나눴잖아."

"하지만 견학 얘기랍시고 들은건 모모에 얽히는 남자들에 대한 불평 뿐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러네.
다들 모모 가슴만 보며 헤벌쭉 따라다니고.
남자들은 다들 그렇게 가슴이 좋은거야?"



아니 너는 그...가슴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반신이...그러니까 허리 라인이라든지 허벅지가 장난 아니게 에로합니다만?

학교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발끈했는지 공연스레 화를 내는 나나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웠다.


몇차례 투덜거림 뒤에 진정하고선 나나는 내 화제전환에 어울려주었다.

"대체로 재밌었어.
언니의 친구들도 대개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응, 다들 좋은 녀석들이니까말야."

"...만난 모두가 좋은 사람인건 아니었지만."

"응? 혹시 교장 선생님이라던가 만났어?"

"물론 변태 교장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조금 주저하더니 나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언니의 소꿉친구, 어떻게 생각해?"

"라라의 소꿉친구?
렌 말야? 아니면 룬?"

"룬."

"룬이라면, 언제나 밝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좋은 아이지.
그리고 절친."

"...절친?"

"뭐, 내가 자칭할 뿐이지만."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나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그 녀석이랑 가깝게 지내지 않는게 좋아."

"뭐어? 어째서?"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닌 것 같으니까.
네가 그 녀석을 좋게 봐주만큼, 그 녀석이 널 좋게 봐주진 않을걸?
괜히 나중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아."

"룬이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야 이따금 떠는 내숭이 고깝게 보일순 있겠지만 말야."

"설마하니 그 녀석이 예쁘다고 마냥 헤벌쭉 하는건 아니지?
모모에게 헤롱헤롱하는 다른 녀석들처럼 판단력 없이 굴지마."

"으응..."

"...내 말이 못미더워?"

"저기, 나나."

"왜? 료스케."

"혹시 날 걱정해주는거야?"

"뭐? 내가 왜!"

---♪

나나의 새된 소리를 뚫고 휴대폰이 울렸다.
나나와의 대화를 멈추고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사이렌지 아키호』

나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로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얏호~! 아키츠군! 좋은 밤 보내고 있어?」

"네. 목소리를 들으니 아키호씨도 즐겁게 보내시고 계신것 같네요."

「아하하~ 그러려나?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중요한 이야기?"

「후후후, 데이트말야, 데이트.」

"...아!"

「앗, 설마 이 누나와의 데이트 약속을 잊어버렸다곤 하지 않겠지?」

"그야 물론이죠. 잊어버릴리 없잖아요."

「후후, 좋아. 그럼 시간 말인데, 이번 토요일 오후 1시는 괜찮니?」

"네. 좋아요.
이번 주말은 예정이 비어있으니까, 아키호씨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죠."

「어머, 그건 잘됐네.
장소는 나중에 다시 알려줄께.
그럼 토요일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께~!
내 꿈 꾸렴~♪」

사춘기 한창의 남학생의 꿈에 나와도 괜찮은겁니까 아키호씨?
장난스런 농담과 함께 아키호씨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로 대화가 끊겼던 탓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잠시 생각을 떠올리곤, 딱딱한 표정의 나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나 네가 염려하는 것처럼 룬은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룬에 대한 평가는 고칠께.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납득해준 나나에게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틀렸네."

"이해해줘서 다행이야.
함께 어울려보면 룬의 좋은 점도 분명 알게될테니까,"

"룬이 옳았어."

"응?"

나나가 입술을 깨물곤 나를 노려 보았다.

"기껏 생각해줬는데..."

"나나?"

"바보 멍청이!
너 같은거 더는 몰라!"

퍽-!

"아풋!?"

나나가 힘껏 집어던진 베개가 얼굴에 직격했다.
한심한 소리를 흘리는 날 내버려둔채, 나나는 방을 떠나버렸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나나를 쫓아갔지만 결과는 변변찮았다.
나나의 방은 굳게 잠겨있었으니까.
어지간히 일이 꼬였다 싶어 답답한 한숨만 내쉬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최근 일로 마음이 어수선해 잠들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중,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찰칵-

...?

조심스레 방문이 열렸다.

"...료스케...자?"

나나의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내심 당황해선 어떻게 대응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나나는 그 침묵을, 내가 자고 있다고 해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되돌아가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오는거야?

딸깍-

방문을 걸어잠그며 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생각되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나나가 침대로 걸어왔다.
부스럭거리며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온 나나가 내 곁에 누웠다.

애써 자연스러운척 누워있는 내 곁에 누워있길 잠시.
나나는 천천히 내 품에 머리를 기댔다.

......

일분, 이분, 삼분.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는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나는 툭-하고 중얼거렸다.

"...어째서 나는 이러고 있는걸까...?"

......

"도중부터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듯 나나가 말을 흐렸다.

"...네 탓이니까."

입술에 무언가 닿았다.
그것이 나나의 손가락이라고 깨달은 건, 나나가 입술에 댄 손가락을 살며시 누른 뒤였다.

"...네가, 거짓말쟁이니까."


"그러니까..."

손가락이 치워졌다.
나나의 손이 조심스레 소맷자락을 잡았다.

"...잔뜩 화내고,
잔뜩 사과하게 만들거야."

......

"...잘자."

내 품에 몸을 기댄채 나나는 천천히 잠에 빠졌다.




...뭐야 정말...

남이 벗어둔 옷에 얼굴을 가져갔으면서.
옷장이나 침대를 어지럽혔으면서.
베개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으면서.

그 날과 같은 모습으로 차양 아래에서 재회하거나.
자신의 옷차림을 좋아하느냐며 물어보거나.
가만히 기대오거나, 걱정스레 충고해주거나.

...모르겠어.

나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아마도 조만간, 나나가 낸 무언지 모를 대답에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불안함과 걱정이 뒤섞여 혼란한채, 긴장이 풀리며 찾아온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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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오랫만에 뵙습니다(_ _);
11월을 날려먹고 이제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네요;;

51화 전반부의 초안을 올립니다.

후반부는 얼기설기 기워진 상태라서 올리기엔 부적합해서-_-;

제대로 된 후기는 51화 완성할 때 함께 올리겠습니다.

그럼 다들 월요일 맞이 잘하세요~!^^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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