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12




- 빨간모자 -




『빨간모자』의 후반부 전개는 늑대가 잠든 사이,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가르고 빨간모자와 할머니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너희들이 성심성의껏 봉사해줘야 하지 않겠어?"

거들먹거리며 내뱉은 내 요구에 대한 꾸러기 수비대의 반응은 다양했다.

"아주 영원히 잠재워주랴?"

주먹을 내밀며 이를 가는 키키.

"설마 자장가를 불러달란 얘긴가요?"

의문섞인 눈초리를 보내는 미미.

"저러다 또 귀찮은 꼴을 당할 것 같은데..."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 새초미.

"맛있는걸 잔뜩 먹고나면 잠이 잘 오는데찡."

나름대로의 잠자기 방법을 피력하는 찡찡이.

"개랑 늑대 망신 시키지 말고, 그냥 알아서 자면 안되겠소이까?"

이마를 짚으며 탄식하는 강다리.


빨간모자라는 인질이 내 뱃속에 있는 상황에 꾸러기 수비대도 쉽사리 경거망동하지 않고 의견을 나눴다.

"어찌됐건 늑대, 그러니까 로우란공을 재워야 이야기대로 빨간모자를 구할 수 있지 않겠소?"

"그런데 어떻게 재워야 할까요?"

"미미공의 의견대로 자장가를 불러서 재우든, 찡찡이 말대로 먹을걸 줘서 식곤증이 오게 만들든, 일단 할 수 있는건 뭐든 해보는게 좋지 않겠소?"

"하지만 그런다고 로우란씨가 순순히 잠들어주긴 할까요?"

"미미 말이 맞아. 차라리 이대로 저 녀석을 때려눕혀서 잠들게 만드는 편이 훨씬 더 건설적이지 않겠어?"

과격한 키키의 발언에 무심코 움찔했다.
떨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표정을 관리하는 날 힐끔 본 강다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 의견은 온건한 수단이 통하지 않을 때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그래서 말인데, 작전명은 『북풍과 태양』이 어떻겠소?"

"북풍과 태양?"

"그렇소. 사나운 북풍의 바람으로 여행자의 옷을 벗기지 못한다면, 태양의 따스함으로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수 밖엔 없지 않겠소?
다만, 원래 이야기와는 다르게 온화한 방식을 먼서 써야겠지만 말이외다."

동의를 구하는 강다리에게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누가 『태양』 역할이야?
솔직히 저런 녀석에게 자장가 같은거 불러주는건 취향이 아닌데."

"「「「......」」」"

키키의 물음에 일행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가위 바위 보!!!」」」"

외침이 울려퍼지고 희비가 엇갈렸다.

"아."

"「「「휴우...」」」"

안도하는 일행들 사이로 키키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주먹을 쥔채 망연히 서있던 키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잘부탁해 키키."
"키키씨 힘내세요!"
"힘내시구려 키키공."
"힘내~!"

"...하아..."

일행의 응원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곤 키키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의욕 없어 보이네."

"시끄러. 이게 다 네 녀석이 재워달라고 떼를 쓰니까 그런거잖아."

"떼쓰다니, 남을 애 취급하지 말아주겠습니까?"

"핫! 자장가 불러달라는 녀석이 애가 아니면 뭐야?"

"음, 틀린말은 아니군."

코웃음치는 키키에게 얌전히 수긍하곤 말을 이었다.

"그럼 애보기 잘 부탁해 엄마."

"누가 엄마냐!"

"나보고 애라며?"

벌컥 고함을 지른 키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젠장, 어쩌다 내가 이런 꼴을..."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한거잖아?"

"시끄러! 네 탓이잖아!"

씩씩거리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키키의 모습에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 키키의 입에서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키키의 노래(링크)》
《키키의 노래(가사)》

키키가 노래를 마무리 짓고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저 눈을 깜빡이는 내 모습이 거북한지 얼굴이 붉어진 키키가 노려보았다.

"뭐야? 그렇게 보지만 말고 뭐라도 말 해!"

"아, 뭐랄까..."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이다가 키키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 의외로 깜찍한 노래를 부르는구나."

"뭐, 뭐야? 나빠!?"

"아니, 그러니까 마음에 들었다구."

"큭..."

주먹을 부들부들 쥔채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키키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른 노래가 그렇게 이상했나?

- 그냥 지나치지 말고 차라도 권해줘. 싫어? 나중에 날계란을 던질테야!
- 이쪽을 바라봐줘. 이제 어딜 갈까? 영화, 만화, 놀이공원, 그리고 밤엔... 싫어? 나중에 삶은 달걀을 던질테야!

"뭘 그렇게 싫어하는거야? 귀여운 노래였는데."

"그럼 이게 좋아할 일이냐!
대체 내가 왜 사령사천왕을 상대로 이런 부끄러운 흉내를 내야하는거야!"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했는지 바닥을 지근지근 밟아대며 키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무 흥분했잖아. 진정해."

"큭!"

"괜찮아? 차라도 마실래?"

"너한테 부탁한거 아니거든!?"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키키가 새빨개진 얼굴로 악을 썼다.
귀가 따가워서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틀어 막았다.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쳐 어깨로 숨을 쉬는 키키의 모습에 귀를 막은 양손을 치웠다.
한차례 머리를 쓸어넘기고선 투덜대곤 키키가 삐딱하니 물었다.

"그래서, 슬슬 잠이 오냐?"

키키의 물음에 싱긋 웃었다.

"한곡 더."

뻐억!

"꾸엑!?"

키키가 휘두른 주먹에 맞고 바닥을 굴렀다.
난데없는 폭력에 뺨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키키가 덤벼들었다.

"뭐, 뭐하는거야!?"

"시끄러! 이렇게 된 이상 이걸로 잠재워주마!"

"야! 너 태양 역할이라며!?"

"내 주먹이 바로 태양이다! 태양권!"

"눈이! 눈이이이---!?"

키키의 주먹에 눈을 얻어맞고 뒹굴었다.

"너무하잖아! 내 눈 좀봐! 퍼렇게 멍이 들었잖아! 어쩔거야!?"

"넌 원래 퍼렇잖아! 티도 안나!"

"너무해! 차라리 달걀을 던져!"

"...그놈의 가사, 영원히 기억에서 소거시켜주마!!!"

"엄마야~~~!?"

"누가 엄마냐!"



"심하네요..."

"내 이럴줄 알았소."

"어쩐지 키키가 무섭다찡."

"동감이네."

구경꾼 근성을 발휘하는 꾸러기 수비대 일행은 키키의 돌발 행동을 말릴 생각이 없나보다.

"하아아앗!"

"어이쿠!?"

뒷걸음질치다 움푹 파인 지면에 걸려 자세가 흐트러진 틈을 놓치지 않고 키키가 돌진해왔다.
몸통 박치기에 당해 그대로 넘어진 내 위에 키키가 올라타 마운트 자세를 취했다.

"그럼 이대로 한숨 푹 재워주마!"

"난폭해!"

"시끄러! 늑대가 안자면 빨간모자를 구해낼 수가 없잖아!"

"큭!?"

있는 힘껏 주먹을 치켜든 키키에 반응해 양팔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키키가 노리던 것이었다.

지이익!

늑대 파자마의 지퍼가 열리고, 키키가 파자마 속으로 거칠게 팔을 집어넣은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저리 비켜!"

파자마 안으로 침입한 키키의 팔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가리던 팔로 억지로 키키의 몸을 밀어냈다.

물컹-

"「「!?」」"

손바닥에 눌리는 부드러운 감촉에 경악함과 동시에 키키의 몸이 튕기듯 일어났다.
마운트 자세를 유지한채 한팔로 가슴을 가린 키키의 얼굴이 수치와 분노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 이자식...!"

무섭다.
방금전 해프닝으로 키키의 눈초리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 도리도 없으니, 체념 속에 열린 지퍼라도 닫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만!"

몸 아래로 꼬물꼬물 내려가던 팔을 키키가 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키키의 허벅지 사이에 내 팔이 꽉 끼였다.
내 팔을 허벅지로 누른채 키키가 붉어진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너어...베짱 한번 좋은데?"

키키에겐 방금 전 내 손길이 자신의 몸을 노린것으로 보였나보다.
으르렁거리는 키키의 모습에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지퍼를 잠그려고 손을 내린 것 뿐이야?
그야 방금전 내 행동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지만, 애초에 그건 네가 내 위에 억지로 올라타있기 때문 아닐까?"

"헤에?"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키키가 붉은 입술로 싱긋 미소지었다.

그러니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단 말이다.

"누가 좋아서 이러는줄 알아!?
그 잘난 주둥이부터 다물게 만들어줄까?"

말만으로 끝낼 생각은 없는지 다시금 주먹을 치켜드는 키키의 모습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꺅!?"

내 팔을 잡는답시고 다리를 오므린게 키키의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그 상태로 마운트 자세를 유지하는건 무리였으니까.
짧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쓰러지는 키키에게서 비켜나 황급히 일어났다.
사납게 이쪽을 노려보며 몸을 일으키는 키키에게서 엉거주춤 멀어졌다.

다행히 사태는 다른 꾸러기 수비대 일행의 만류로 진정되었다.

"차, 참으시오 키키공!"

"이거 놔-! 저녀석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어!"

"참아 키키. 늑대를 재우고 빨간모자를 구하기 위해서잖아."

"그래요. 부끄럽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요 키키."

"그럼 너희도 자장가 불러!"

"「「어?」」"

"설마 이런 꼴을 나 혼자만 당하게 할 셈이야?"

아무래도 『태양』역할의 희생자가 늘어난 것 같았다.



《미미의 노래(음악)》
《미미의 노래(가사)》

조용해진 미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불렀다.

"...이봐?"

"...새근-"

"야..."

"...으응?"

부시시 일어난 미미가 눈을 비비곤 기지개를 켰다.

"후와아...벌써 아침인가요?"

"아니. 너 방금 전까지 자장가 부르던 중이었거든?"

"어머? 어느새 제가 꿈속이었던거죠?"

"...네 쪽이 잠에 빠지면 어떡하냐."

이 녀석도 정말 정말 엉뚱한 기질이 있다니까.
한숨을 쉬는 내게 미미가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잠이 오나요 로우란씨?"

도리도리.

"이상하네요. 이렇게나 잠이 잘 오는데."

"노래는 좋았어. 대담하기도 했고."

"대담해요?"

- 잠이 올 때면 떠올려봐요 미미를.
하나에서 백까지 나를 생각해봐.

미미(羊)가 하나. 미미(羊)가 둘.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 나라에서 잠잘때 실제로 시도해 보긴 했지.
도중에 방해받아서 깨버렸지만.

"네 말대로, 앞으론 잠들지 못할 땐 널 떠올리면 되겠네."

"네?"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미미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자리로 돌아갔다.
한참 뒤에야 가사 내용을 떠올리곤 당황하는 미미와 눈총을 보내오는 새초미의 모습에 킥킥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새초미의 노래(음악)》
《새초미의 노래(가사)》

"휘유-! 새초미 귀여워! 휘유-!"

노래를 마치고 윙크를 보내는 새초미에게 열광하며 외쳤다.

"이 곳에 와서 정말 좋았어..."

총총걸음으로 재빨리 되돌아가는 새초미의 모습을 보며 여운에 잠겨 있는데 키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런데 미미 노래 빼곤 자장가랑 상관없지 않아?"

"...아."

그제야 원래 목적을 깨달은 듯한 일행의 모습에 키키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들 얼이 빠졌군.
머쓱했는지 강다리가 넌지시 내게 물었다.

"졸리시오 로우란공?"

"새초미의 노래를 졸면서 들을 순 없잖아? 완전 말짱합니다."

"「「「잠들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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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 초안 먼저 올립니다.

꾸러기 수비대 캐릭터송도 있었다니 신기함.

다들 더위 조심하세요^^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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