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돌아왔다.

며칠전 까지만해도 가을이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지마라. 나도 모르니까.
난데없이 여름 교복을 입고서 등교해야 했던 내 심정을 이해해 달라구.
고교 2학년에 와서 여름을 두번이나 겪게 되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사자에상 시공」인가?
깊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진 않을것 같았기에 적당히 일상에 순응하기로 했다.
기껏 정리해놓았던 여름 옷들을 다시 꺼내는게 번거로웠지만,
며칠전 싸게 샀던 여름 옷을 입을 기회가 빨리 찾아온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고.
아무튼 후끈후끈한 날씨탓에 어젠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느껴진 위화감에 눈을 떴다.
양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왼쪽을 본다.

스으-

핑크색 단발 소녀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다.

"......"

오른쪽을 본다.

냠-

살짝 웨이브진 핑크색 장발의 소녀가 내 팔을 잡고 물고 있다.
오물거리는 가운데 드러난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

왼쪽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는 애가 '모모', 오른쪽에서 내 팔에 이빨을 들이댄 녀석이 '나나'.
얼마전 가상 현실 게임속으로 나와 친구들을 초대했던 라라의 동생들이다.
뭐라고 할까 '기분좋은 꿈이로군.'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꿈은 아닌 것 같다.
...이 녀석들이 왜 여기 있어?
얌전히 자고 있는 모모는 냅두고서라도, 침이 잔뜩 묻어있는 오른팔에 이빨을 박은채 잠들어있는 나나의 모습에 몰래 한숨을 쉬었다.
옷 빨아야겠네.

그전에...분위기 좋으니까 한 숨 더 자자.

새근대는 숨소리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게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은 맘이 든다.
주말이기도 하니 조금 정돈 여유 부려도 괜찮겠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잠들어 있는 꼬맹이들의 모습을 한차례 눈에 담은 후 새액새액 대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한번 잠에 빠졌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즈음 나나와 모모랑 사이좋게 눈을 떴다.
서로 졸린 눈으로 하품한 채 인사를 나눈 후,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거실에 앉았다.
자면서 풀어두었던 머리를 다시 트윈테일로 묶는 나나와 거울을 보며 머리띠를 쓰는 모모를 거실에 두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건네받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모모가 용건을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머물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그게, 언니 생각이 나서 지구로 왔는데 정작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잠잘 곳을 찾던중에 네가 사는 집이 떠올랐단 말이지.
혼자 사는 집 주제에 비교적 넓었으니까."

"그게 이유냐..."

가끔 부모님도 주무시고 가시니까 셋이 지낼 공간은 충분한 집이긴 하다만 얘내들도 참 거리낌이 없구먼.

"뭐야? 혹시 안되는거야?"

"아니, 나야 물론 환영인데."

뭐, 라라의 동생들이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귀엽고.
대뜸 남정네 집에 쳐들어와서 재워달라고 부탁하는걸 보면 역시 애들인건지, 베짱이 좋은건지 모르겠다만.

"나야 상관 없지만 너희들로서는 유우키네 집이 더 좋지 않아?
유우키 집엔 라라도 있으니까 함께 있을 수 있잖아?"

"저번에 언니를 게임속으로 초대할 때 가보니까, 거긴 남는 방이 없던데?"

"방이 없어?"

"네. 라라 언니가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요?
리토씨의 벽장 속이라구요."

"해리○터!?"

라라 방이 따로 있는게 아니었어?
그야 목욕탕 넓히는데 쓰던 공간왜곡을 이용하면 벽장 속에도 방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좀...
아니, 그전에 리토네 집은 2층짜리 주택이잖아! 근데 어째서 남는 방이 없어?
방이란 방을 죄다 창고로 쓰기라도 하는거야? 이상하잖아!
가볍게 패닉에 빠져 외친 내 말을 이해 못한 나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모모의 말을 보충했다.

"좌우지간 언니랑 같은 곳에 지내는건 어려울 것 같더라구.
게다가 거기 있으면 저스틴한테 들킬...앗."

"(나, 나나!)"

아차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나나와 당황하는 모모의 태도에 어리둥절 하다가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야, 너희들 설마...?"

"아, 아하하~"

어이없어하는 내 반응에 모모가 어색하게 웃었고 나나가 얼굴을 외면했다.

"...귀찮았단 말야. 가정교사는 재미없게 자꾸만 우주의 역사랑 예의범절만 가르치구."

볼을 부풀리며 작게 투정하는 나나의 말에 확신을 가졌다.
응, 알겠다. 역시 얘네들도 라라처럼 '가출'한건가.
공부하기 귀찮았다던가 하는 이유로 지구로 도망쳐온건 어쨌건 리토의 집에 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리토네 집에 있으면 저스틴에게 틀킬 위험 100%니까.
가출하면서 저들 나름대론 머리를 굴렸나보다.
끄응~하며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매만지는 내게 모모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스틴의 눈길을 피할수 있으니까 료스케씨의 집에 온건 맞지만 꼭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료스케씨는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신용?"

"저번에 저희랑 먼저 만났던걸 다른 사람에겐 얘기하지 않았죠?"

"응? 아, 그야 물론."

「트러블 퀘스트」시나리오 짜러 우리집에 왔을 때의 일을 말하나보다.
게임 밖으로 나온 뒤에도 딱히 말할 이유도 없었기도 했지만.

"후후, 그러니까에요."

「내가 맞았지?」하고 웃는 모모에게 나나가 쳇-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료스케씨가 비밀을 지켜줬으니까 저희도 료스케씨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거라고요."

"...말은 잘해요."

배시시 웃는 모모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말하면 좋은 의미로 거절할 수 없게 되버리잖아.
쓴웃음을 지으며 항복하듯 가볍게 양손을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나나와 모모가 상쾌한 얼굴로 하이 파이브를 했다.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릴께요 료스케씨."

"잘 부탁해 아케치 료스케."

"아키츠 료스케다..."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나나에게 딴죽을 걸었다.

"나중에 지구에서 지내는걸 허락 받으면 아빠에게서 용돈도 나올테니까 그때 집세를 지불할께요.
그동안은 저희가 도울수 있는거라면 기꺼이 도울테니까요.
아, 하지만 밤놀이 상대 같은건 못해드려요?"

"할 것 같냐!"

공주님이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개방적인 아이로 자랐담?
에로한 농을 던지는 모모의 모습에 장래가 불안해졌다.
결국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나나는 청소, 모모는 식사준비를 도와주는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럼 지금부터 밖에 나가자~!"

모모와 함께 만든 점심을 먹고난 후, 기운 넘치는 나나와 나나의 주장에 동조한 모모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시간은 이제 막 1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 한가운데서 내리쬐는 햇살 탓인지 주말치곤 비교적 거리에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신기한듯 이리저리 거리를 구경하는 나나와 모모를 따라가고 있는데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그며니 주위를 살폈다.

「어이, 저기 좀 봐.」
「귀여운 애들인데? 외국인인가?」
「트윈테일의 여자앤 활기찬게 귀여워 보이는데?
단발머리 여자애랑 페어룩인건가?」
「코스프레 아냐? 특이한 복장이고.」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나나와 모모의 모습을 확인했다.
쇄골과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튜브 탑 원피스.
원피스와 따로 분리되어 손목부터 팔목 약간 위까지를 가리는 검정소매.
목의 칼라를 장식한 동그란 금빛 액세서리. 스트라이프 니삭스.
갈기갈기 찢어진것 같은 디자인의 원피스 치마 아래로 언뜻 보이는 드로워즈.
나나의 복장이 붉은색과 검은색 메인이고, 모모의 복장이 검은색과 녹색 메인이라는 것을 빼면 둘이 거의 동일한 디자인이었다.
확실한건 라라의 드레스폼 만큼 이상하진 않지만,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꽤나 동떨어진 차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 저녀석은 아키츠 료스케잖아?」
「설마 저 애들을 꼬셔서 데리고 다니는건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역시 연하를 좋아한다는게 사실이었나?」
「쳇. 좋다 말았네.」
「귀신같은 놈. 이 거리에선 처음보는 여자애들인데 어디서 또 저런 애들을 꼬신거야?」

...내 탓도 있었네요.
소리가 들린 곳을 힐끗 바라보자 험담을 해대던 녀석들이 냉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마을 구경을 하던 모모가 이상한듯 쳐다봤다.

"료스케씨?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그런가요? 그보다 어쩐지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것 같은데 혹시 저희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건가요?"

"뭐, 지구에서 일반적인 옷차림은 아니지."

"에, 진짜?"

내 말에 나나도 새삼 주위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며 만지작 거렸다.
나도 주위 수근거림을 듣고 있기 거북했는지라 우선 나나와 모모를 데리고 옷가게로 피신하기로 했다.
적어도 둘의 옷차림 때문에 집중되는 시선은 덜어낼 수 있을테니까.



옷가게에서 내 지갑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두명의 여름옷을 골랐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 모모는 원피스로 갈아입고서 옷가게를 나왔다.
속옷 매장에서 속옷을 고르는게 조금 고역이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3시를 지나고 있었다.
한껏 달궈진 지표면에선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국적 분위기에 들떠있던 나나와 모모의 기세마저도 한풀 꺾인듯 했다.

"더워..."
"조금 더운걸요."

"그럼 시원한거라도 사먹으러 갈까?"

"좋아~!"
"아. 그럼 저긴 어때요?"

"응?"

모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여동생(妹) 카페 - hasumi

...또 저기냐?

"미안하지만 저긴 안돼."

"에에~ 어째서?"
"료스케씨는 저런 곳을 자주 간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매일매일 갈 정도로 자금이 넘쳐나진 않아.
게다가 방금전에 옷을 산 뒤라서 저기에서 먹기엔 자금이 조금 빠듯하다구."

"으..."

꽤나 소지금이 줄어든 지갑을 꺼내 보이자 나나는 입을 다물곤 안타까운듯 신음을 흘렸다.
모모도 자금 사정을 알곤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아이스크림으로 참아줘."

풀이 죽은 나나의 모습에 미안해하며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옷소매를 잡혀 발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나나가 방금전 의기소침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저기저기 아케치."

"아키츠다. 왜그래?"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 뭐라고 적혀 있는거야?"

"응?"

새삼 얘내들이 아직 지구의 문자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곤 나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 체인점 옆에 커다란 빙수 사진이 박혀있는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보자,「신메뉴 커플 빙수」판매중? 가격은..."

가격을 보니 지갑의 허용범위 내였다.
설명을 들은 나나의 눈이 반짝였다.

"나 저거 먹고 싶어!"

"...뉘랑 먹을거시뇨?"

"응? 그야 당연히 나랑 모모잖아."

당연하다는듯 대꾸하는 나나의 태도에 「내 몫은 없는거냐?」라는 태클은 마음속에 묻어두고 둘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은지 얼마되지 않아 커플 빙수가 나왔다.
큼지막한 빙수볼 안에 화려하게 토핑이 된 빙수의 모습에 반색하며 나나가 스푼을 들었다.
곧바로 빙수에 스푼을 꽂으려던 나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의아한듯 물었다.

"아케치?"

"아키츠 료스케라니까...
료스케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럼 료스케. 넌 빙수 안먹어?"

"별로 상관없어."

신메뉴의 맛이 궁금하긴 하다만, 여자애들 둘이서 먹는 빙수에 괜히 스푼을 꽂을 엄두는 못내겠다.

"그러지말고 한입 먹어봐.
돈은 네가 내는건데,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으면 신경쓰인단 말야."

나나가 내민 스푼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스푼을 건네받았다.

"...그럼 사양않고."

토핑과 시럽이 섞인 빙수를 입에 떠 넣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 달콤함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는데 테이블을 뒤지던 나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모. 혹시 남는 스푼 없어?"

"미안하지만 나나. 이건 내 스푼이야.
그리고 네 스푼은 료스케씨가 쓰고 있잖아.
원래 스푼은 2개 뿐이었으니까."

"어? 어?"

모모의 말에 내쪽을 바라보는 나나의 시선에 입에 넣었던 스푼을 뺐다.
침이 살짝 묻어있는 스푼을 보고 당황하는 나나의 모습에 왠지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어린애 먹을걸 뺏어먹은 어른이 된것 같잖아.
민망해서 한숟갈 먹은 빙수에 더이상 스푼을 꼽아넣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으려니,
음음~ 하면서 맛있게 빙수를 먹던 모모가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렸다.

"무슨 걱정이야 나나.
보아하니 료스케씬 더이상 먹을 생각이 없는것 같으니까 저 스푼을 쓰면 되잖아?"

"무, 무슨? 저걸 어떻게 써!"

"...심한 반응이잖냐, 너."

"네가 더 심해!"

버럭하는 나나와 달리 밋밋한 내 반응이 재미없었는지 모모가 피-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재미없는 반응이네요.
이럴땐 간접키스~! 라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힐 장면이잖아요?"

"시꺼. 간접키스로 거기까지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만화속에나 있는거라고."

"여자에 대한 환상이 없네요."

없진 않지만 거기까지 숙맥인 소녀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닙니다.

"음, 역시 경험이 많아서 그런걸까요?"

"넌 날 어디까지 매도하고 싶은거냐..."

"하지만 나나는 벌써부터 이렇게나 당황하고 있다구요.
그리고 나나, 서두르지 않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

"윽...!"

모모가 스푼을 옮길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빙수를 애타게 바라보던 나나가 신음을 흘렸다.
빙수와 내가 들고있는 스푼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나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불쌍해보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모모도 놀리는건 거기까지 하라고.
자 여기 새 스푼."

냉큼 가게 한쪽에 놓여있던 통에서 새 스푼을 가져와 건네자, 비장한 눈빛으로 일어나던 나나가 「어라?」하고 당황한채 멈춰 버렸다.

"뭐해? 어서 받지않고."

"어? 그러니까..."

"빙수 녹기전에 얼른 받으라구."

내 왼손에 들린 새 스푼과 오른손에 들린 헌 스푼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는 나나의 모습이 어쩐지 재밌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설마 너, 내가 쓴걸 뺏어다 쓰기라도 할 생각이었냐?"

"누, 누가!"

나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옆에서 킥킥대는 모모의 반응에 그제야 모모에게 놀림당한걸 알아챘나보다.
빼앗듯 내게서 새 스푼을 가로챈 모모는 화난듯 퍽퍽 빙수를 퍼서 입에 넣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빙수의 양에 함께 먹던 모모는 스푼을 든채로 아연하게 나나를 바라보았다.

"어이, 좀 천천히 먹어."

"신경꺼!"

"그렇게 빨리 먹다간 두통이..."

"흐야아아아~~~!?"

"...그러게 내가 뭐랬냐."

먹다말고 머리를 부여잡곤 신음을 흘리는 나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걸 그렇게 빨리 먹으니 머리가 아플 수 밖에.

"안 뺏어 먹으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이...!"

두통이 이는 머릴 움켜잡은채 이쪽을 노려보는 나나의 시선에 반응이 곤란했다.
정작 사건을 조장한 모모는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금 빙수를 맛보고 있었다.

나나가 두통을 삭힐 동안 나나와 모모에게 라라의 지구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학교에서 라라가 벌인 일들이 흥미로웠는지 둘은 꽤 재미있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나도 말 할 맛이 났던지라 꽤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지만.



집에 돌아와 씻은 후, 상점가에서 산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 모모는 원피스, 난 저번에 샀던 반팔 티셔츠로.
도중에 벗어둔 옷을 세탁할 때 조금 트러블이 발생했다.
민감한 나이대라서 자신들의 옷은 스스로 빨겠다고 주장하던 나나와 모모의 의견을 존중해서 세탁을 맡겼더니 그녀석들, 세탁기를 아예 망가뜨려 놓았다.
「데빌루크 특제 다크매터 세제」에 의해 검은 거품을 내뿜으며 사망한 세탁기 앞에서,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억지 웃음을 짓는 내게 둘은 얌전히 빨랫감을 넘겼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소파에 앉아 쉬면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화면에 나타난 타이틀을 보고 채널을 고정시켰다.

「납량특집」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고마운 방송이다.
다만 애들도 있는데 보기는 좀 그럴것 같아서 다시 채널을 돌리려는데 나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지금 하는건 뭐야 료스케?"

"납량특집이라고, 공포물 같은걸로 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야.
하지만 너희들이 보기엔 좀 안좋을것 같아서 다른걸 보려고 하는데."

"항~! 애 취급 하지마.
나도 이제 다 컸다구."

아, 그러냐?
밋밋한 가슴을 내밀며 잘난체하는 나나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데 모모도 가세했다.

"저도 궁금하네요. 지구의 방송은 어떨지 부디 감상해봤으면 해요."

"그래? 그렇다면야..."

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곤 나란히 TV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왼쪽에서부터 나, 나나, 모모 순으로 앉은 뒤, 마루의 불을 껐다.

"왜 불을 끄는거야?"

"이런 프로그램은 원래 불을 끄고 보는게 정석이니까."

"그래?"

"후후, 기대되는걸요?"

"뭐, 좀 있으면 시작하니까 조용히 감상하라구."

참고로 영화 제목은 「엑소○스트」였다.




"야."

"......"
"......"

"어이? 이제 끝났으니까 그만 좀 달라붙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에 매달려있는 나나를 떼어냈다.
뭐, 붙어있던 나나의 몸이 차가웠기 때문에 시원하긴 확실히 시원했지만.
모모도 굳은 얼굴로 처음보다 나나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자정이 다 되갔다.
내일은 학교가야 하니까 이만 자야지.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자 내 뒤를 나나와 모모가 말없이 바짝 붙어 따라왔다.
어쩐지 어미 오리가 된 느낌이네.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들곤 나나와 모모에게 침대를 가리켰다.

"너희 둘은 침대에서 자도록 해.
난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그럼 좋은 꿈 꿔."

"자, 잠깐!"

황급히 내 상의를 잡는 나나의 행동에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왜?"

"너, 그러고보니 귀신 쫓는거 잘한댔지?"

"아, 뭐. 어느 정도는."

빙의령 쫓는 살풀이를 하는덴 꽤나 이골이 났지.

"그, 그럼 같이 자자!"

"......"

물끄러미 나나를 바라보자 당황한 나나가 이리저리 손짓하며 변명했다.

"이, 이상한 의미는 아냐!
그냥 손님인 우리만 침대를 쓰면 미안하니까 그런거야!
영화가 무서웠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그럼 귀신 쫓는건 왜 물어봤냐...

가만히 나나의 말을 듣고 있던 내 반응이 시원찮자 나나는 벌컥 화를 내며 주머니에서 뭔갈 꺼내들었다.
휴대폰? 아니, 「데다이얼」인가?
우주 마피아 잡을때 라라가 썼던 물질전송장치잖아?

"이...! 좋아!
네가 없어도 내 친구들이 있으면 충분하니까!
귀신이 나타날 낌새가 보이면 즉시 기가이노시시노기를 불러서..."

"...혹시나 해서 묻지만 걘 누군데?"

"집채만한 우주 멧돼지."

"......이건 압수."

"아!?"

냉큼 나나의 손에 들린 데다이얼을 가로챘다.

"야! 내놔~!"

"시꺼 임마! 아무리 귀신이 무섭기로서니 남의 집안에서 그런 맹수를 풀어두려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을것 같냐!"

"무섭지 않다고 했잖아!"

"쳇, 어이 모모. 너도 가만있지말고 나나한테 뭐라고 한마디 해주라고. ...모모?"

"네?"

가만히 서있다 내말에 고개를 든 모모의 손에는 굉장히 낯익은 장치가 들려있었다.

「데다이얼」

...모모...너도냐?



결국 겁을 먹을대로 먹어버린 두 우주인 소녀들과 함께 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패닉 상태로 괴팍한 우주생물을 소환해서 집이 통째로 박살나느니 이편이 차라리 낫지.
위치는 내가 침대 바깥쪽, 나나가 가운데, 모모가 침대 안쪽이었다.
불을 끄고 어두워진 방안에서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나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료스케, 자?"

"아니."

"그래..."

안심한듯 한숨을 내쉰 나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후...

"료스케...깨어있어?"

"...너희들 잘 때까진 안 잘테니까 걱정말고 자기나 해."

"혹시 자고 있는 틈에 이상한 짓을 한다면..."

"적당히 그 소재로부터 멀어져.
애초에 그랬으면 어젠 어떻게 잤냐?"

귀신을 걱정하면서도 내쪽을 경계하는 나나의 태도에 콧방귀를 뀌었다.
으으-하며 신음을 흘리던 나나는 작게 투덜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닫았다.
...소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는건 애교로 봐주도록 하자.
아무튼 일찍 자긴 글렀군.
이후 두 녀석이 무사히 잠이 들때까지 2시간 가까이 걸렸다는것만 말해둔다.



다음날.
몸을 누르는 무게감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내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나나가 보였다.
한팔과 한다리를 내 배위에 걸치고 잠에 빠져있는 나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쇄골과 겨드랑이가 드러난 민소매 티셔츠에 허벅지가 거의 드러난 핫팬츠 차림의 나나였는데,
거기에 잠꼬대를 어떻게 했는지 말려올라간 티셔츠 탓에 배꼽이 드러나 있었다.
배꼽 다 보인다. 얌전하게 좀 자라...
시간을 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좀더 자자.
나나의 몸을 바로 해주려다가 안그래도 늦게 잤는데 괜히 깨우는거 아닌가 싶어서 그냥 둔채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훨씬 더 굉장한 자세가 되어있었습니다.



아침식사 준비를 끝내고 나나와 모모를 깨웠다.
식사를 마친후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열쇠를 건냈다.

"그럼 난 학교 다녀올테니까.
여기 여벌열쇠. 혹시 나갈땐 이걸로 문단속 부탁할께."

"네. 다녀오세요~"

"잘 다녀와."



학교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일은 없었다.
라라에게 나나와 모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라라도 딱히 뭔갈 알고있는 눈치는 아니었고.
언제까지고 숨길 일은 아니지만, 그런건 나나와 모모가 라라를 만나러 가면서 알게 되는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하교후 귀가하던 중 길가의 벤치에 앉아있는 나나를 목격했다.
벤치 주위에 몰려있는 강아지들에게 즐거운듯 말을 건네는 나나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자 나나가 손을 흔들었다.

"어이~ 료스케.
수업은 끝마친거야?"

"응. 그런데 뭐하고 있었던거야?"

"이 애들이랑 잠깐 이야기 중이었어.
최근엔 여름이라 털이 긴게 불편하다는데?"

"그러고보면 너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었지."

"어? 알고 있었어?"

"응. 라라가 너랑 모모에 대해서 얘기해 줬거든."

"언니가?"

"그래. 귀엽고 착한 동생들이라고 어찌나 칭찬하던지 부러울 지경이었다구..."

"어, 언니도 차암~ 창피하게 그런 소릴..."

불평하지만 싫진 않았던지 나나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마도 언니가 소중히 여겨주는게 기뻤겠지.
덕분에 기분이 들뜬 나나로부터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뒷머리만 남은 콧수염 영감님은 나만 보면 혼을 낸다느니, 가끔 보이는 멀대같은 남자는 해골을 몸에 걸치고 다녀서 먹음직스럽다느니 같은 얘기였다.
대화가 끝난후 나나는 동물들을 가상 공간으로 집어 넣었다.
듣기로는 나나의 동물 친구들이 살고있는 사이버 사파리 랜드라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쫓기는 생활보단 이 편이 그 녀석에게도 좋겠지.

"그러고보면 모모는? 함께 밖으로 나온거야?"

"응. 모모는 꽃집에 가본다고 하던걸?
지구의 식물에 관심이 가나봐."

"그래? 그런데 좀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인데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게 낫지 않겠어?"

"응. 그럼 내가 모모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찾았습니다! 나나님!"

"엣!?"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골목 귀퉁이에서 저스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마울, 브왓츠까지도.
당황한 나나를 보며 저스틴이 엄숙한 태도로 자세를 바로했다.

"데빌루크 왕의 명령을 받아 왔습니다.
비행선을 준비해두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우우..."

결국 저스틴의 눈을 피한것도 하루가 한계였나.
완고해 보이는 저스틴의 모습에 나나는 신음을 흘리다 내 뒤로 숨어버렸다.
그제야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저스틴이 눈썹을 찌푸렸다.

"음? 넌...그 수염 성인이로군?"

"...슬슬 날 이름으로 부를 때도 되지 않았어?"

"흥."

당치않다는듯 코를 울린 저스틴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평소의 바보같은 눈매와 달리 강렬하게 빛나는 시선에 긴장하고 있자 저스틴이 씹어뱉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저번엔 우리가 꽤나 신세를 진거 같더군. 
제법 엉망진창이었다고 하던데. 난 빚지곤 못사는 성격이라서 말야..."

"야, 튀어!"

"꺄악!?"

저스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냉큼 나나를 안아들고서 순식간에 도주했다.

"뭣!? 기껏 좋게 봐줬더니...!
거기서라 이 유괴범 놈아!"

"좋은 의미였어!? 그게!?"

난 또 신세를 졌다는 말에 칼부림이라도 하는줄 알았더니!
우주인식 대화법인가? 뭘 저렇게 이상하게 말하는거야?
아무튼 기왕 튄거 여기서 발목이 잡히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놀렸다.
상점가를 뛰어다니면서 저만치 꽃집 앞에서 꽃들을 구경하고 있는 모모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이~! 모모!"

"어머? 나나, 료스케씨? 무슨일..."

"캐치~!"

"꺄앗~?"

자세를 바꿔 양팔에 재주껏 한명씩 들어올린뒤, 팔에 앉은채 내 머리를 부여잡은 두명의 비명을 들으면서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두분을 내려놔라 이 못된 수염성인 놈아!!!」

"할 수 있으면 해봐라아아아!"

분노한 외침을 내뱉는 저스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상점가를 질주했다.
한참동안 이어진 술래잡기 후, 더이상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안 쫓아오나?"

"못 쫓아오는게 아닐까요?"

안심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팔뚝에서 내려온 모모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스틴은...'길치'니까요..."

"...허무한 승부였다."

그런줄 알았다면 차라리 골목길을 요리조리 돌아가는게 나을뻔했군.



이후 집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나나와 모모에 의해 설득이라는 이름의 무력시위가 저스틴 일행을 상대로 행해졌다.
초거대 멧돼지짱(기가이노시시노기)이라든지 뿌리를 촉수마냥 움직이는, 나무인지 의심스러운 인면수(人面樹)의 도움으로 말이지...
결국 둘을 데려가는데 실패한 저스틴의 보고로 나나와 모모의 지구 체류가 인정되었다.

다만 유감스러웠던 점은...

"기가이노시시노기이이이이------!"

"괘, 괜찮아! 포○몬 센터에 데려가기만 하면 이런 상처쯤은..."

"그게 뭔데!?"

도중에 목표물을 착각한 멧돼지짱과 나의 사소한 충돌사고가 있었다는 것과, 이 세계엔 '포○몬 센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절한 멧돼지짱을 전송기로 되돌린 후, 미카도 선생님께 맡기는 걸로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상점가에서 벌어졌던 추격씬이 야쿠자 영애 납치범과 야쿠자의 추격전으로 왜곡되어 마을에 퍼졌다.
한동안 소문이 사그라들진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묵묵히 두 녀석의 옷감을 세탁기 넣어 돌리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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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월12일) 자정에 터틀러님께 축전을 받았습니다.
'연재 2주년 기념 축전'이요.ㅠㅠ
저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쿨럭쿨럭;
덕분에 저도 빨빨빨거리면서 쓴지라 다행히 오늘내로 올릴 수 있었네요; (분량은 좀 짧았지만요^^;)
료스케의 양아치버전+여성화버전+완전체버전이 함께 있는 축전이라서 더 감동이었습니다.

멋진 축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터틀러님~!

이불이를 아껴주시는 독자님들도 정말 감사드려요~!*^^*

완결까지 즐거운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닷!+ㅂ+/

*** 터틀러님께서 보내주신 35화 축전을 하단 참조 이미지에 추가하였습니다.
나나와 모모가 귀엽게 나왔더라고요^^
축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터틀러님^^

p.s. 참조 이미지

제 2왕녀 나나 아스타 데빌루크

제 3왕녀 모모 베리아 데빌루크

나나 모모 여름옷 1

나나 모모 여름옷 2

나나 머리 품

나나 머리 품(원피스)

기가이노시시노기쨩(멧돼지)

터틀러님의 35화 축전(납량특집 관람)

p.s.2. 연재 2주년 축하 축전 by 터틀러님 *-_-*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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