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쨍 내리쬐는 여름 햇살로 달아오른 아스팔트 길.
찌는듯한 더위가 느껴지는 등교길에 아침부터 노곤함이 몸을 잠식하는 것만 같다.
오늘은 특히나 햇살이 강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피부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학생들보다 심하게 더위를 타는지 유달리 목덜미며 허벅지에서 배인 땀으로 힘들어하는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
「데빌루크에선 여름같은거 없었는데...」라며 불평하는 라라의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지쳐보이는 얼굴로 후우- 한숨을 내쉬는 라라의 모습이 제법 뇌쇄적이라 나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뿌리쳤다.
당황한 마음을 추스리고 정면을 쳐다보자 학교 정문에 풍기위원들 사이에 선 코테가와가 보였다.
수첩과 펜을 든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한명한명 지켜보던 코테가와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하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코테가와~ 아침부터 대단한 무더위지?"

"그러네요. 오늘은 유별나게 더워서 밖에 있는 것도 큰일이에요.
그나저나...아키츠군은 오늘도 여전히 불량스러운 복장이군요."

"아하하, 새삼스럽게 뭘~
그런데 코테가와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에 서있는거야?"

"...설마 모르는건가요?
제가 왜 일부러, 이 더운 날에 아침부터 교문 앞에 서 있는건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코테가와는 팔짱을 낀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에 뭔가 내가 잊은게 있나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더위로 인한 짜증이 겹쳐 무심코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코테가와를 향해 도무지 떠오르는게 없다고 말하기도 거북한지라,
싱겁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려 보았다.

"음, 혹시 나랑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든지?"

"잠꼬대는 침대에서나 하세욧-!
풍기강화주간이니 이러는걸로 정해져 있잖아요!"

"읏~?"

농담은 안통하네요.
푹푹찌는 무더위 속에 방금 전의 실없는 농담은 오히려 코테가와의 화를 북돋운 것 같았다.
이젠 숫제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쿡 누르면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닥달하는 코테가와의 기세에 눌려 뒤로 밀려면서 상황파악을 위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괜찮은건가 저거?」
「내버려 둬. 어차피 방식은 다르지만 복장불량으로 단속할거 였잖아.」
「애초에 풍기단속 하면서 아키츠군에게 딴죽을 걸 담력이 되는 사람은 코테가와씨 뿐이잖아?」
「더위로 잠시 냉정함을 잃은 것 같은데 저렇게 살풀이 하고나면 좀 침착해지겠지.」
「언니...저도 언니께 매도당하고 싶어요...」
「...전부터 생각했던건데 너 머리는 괜찮은거니?」
「더워...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할짝할짝 핥고싶어...」
「어쩐지 음란한 의성어라고 생각되는건 기분탓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목소리, 태평한 목소리, 나른한 목소리, 달뜬 목소리, 지친 목소리로 대화하는 풍기위원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번에 풍기위원회의실 앞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더위를 먹었는지 풍기위원들의 사고도 반쯤 풀려있는것 같았다. 학생들 복장 체크는 제대로 하고 있는것 같지만.
정문앞에서 학생들을 체크하는 풍기위원들의 한쪽 팔에 둘러진 「풍기」라고 적힌 완장을 보고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떠올랐다.
학생들의 비행과 탈선을 막기위한 풍기위원회 주관의 자정활동, 통칭 「풍기강화주간」의 시작일이다.



얼마전, '사이난 고교 관계자들이 교외에서까지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신고가 풍기위원회에 들어왔다.
처음엔 리토랑 라라의 트러블에 관련된 신고라거나, 안좋은 소문이 많은 나와 관련된 신고인가 싶어 걱정했었는데 실상은 달랐다.

사이난 역앞에서 있었던 「룬(RUN)의 CD 판매량 1위 기념 이벤트 공연」.

신인 아이돌로 한창 기세를 타고 있는 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해서 이벤트 공연장은 팬들로 터져나갈듯 북적였다.
그런데 노래가 흐르며 팬의 환호속에서 한창 공연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콘서트 무대 위로 난데없이 교장과 모테미츠, 타치바나가 난입해 왔다고 한다.

참고로 모테미츠는 길거리 헌팅이 취미인 야구부 소속의 3학년생으로, 1년전 교내도촬 행각이 발각되어 정학처리를 받은 경력이 있어 여학생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타치바나는 리토의 중학교 시절 축구부 후배로 나쁜 녀석은 아닌것 같지만 나와 리토를 이상한 방향으로 엮이도록 만드는 바람에 조금 꺼림칙한 상대다.
교장이야 뭐...알몸으로 여학생들에게 달라붙어 할짝할짝 하고싶다고 공언하는데다 그걸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하는 변태고...
모든 행각이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미수로 그쳤다지만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위험 인물이다.

이 세명의 무대 난입으로 공연장의 열기에 흥분한 팬들마저 덩달아 폭주하는 바람에 놀란 룬이 공연 도중 황급히 무대에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
공연을 보러 왔던 라라가 무대를 정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엉망이으로 끝나버린 공연에 팬들의 불만이 터졌겠지.
아무튼 다행히 해프닝으로 마무리된 일이었지만, 명백히 아이돌에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풍기위원회에 들어온 신고는 그 사건을 두고 룬의 기획사에서 학교 측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받은 것이거나,
룬의 팬 중 한명이 그때 일로 앙심을 품고 개인적으로 한 신고인 것 같았다.

학교 밖에서까지 문제가 불거진 이번 사건으로 풍기위원회에서는 저번에 미뤄두었던 풍기강화주간 입안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모범이 되어야 할 교장이 사고를 쳤다는 것에서부터 풍기문란의 심각함을 알수 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할까.
교장의 경우엔 엿보기 외에도 때때로 알몸으로 여학생에게 덤벼드는 변질행위를 벌이는데다, 이번엔 학교 밖에서까지 비슷한 행위를 해버렸으니...
학부모 차원에서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게 이상할 수준이라, 결국 풍기위원회의를 통해 「풍기강화주간」을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 시행일이 바로 오늘이고.

그리고 내가 마주하게 된 문제는 오늘 아침까지 그 사실을 잊고 있었기에 내 복장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정함과는 한참 떨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기억하고 있었더라도 복장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그럼 아키츠군은 복장 불량이니까 운동장 10바퀴군요."

"에에~?"

"불만스럽단 얼굴 하지 말아요.
장신구를 압수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구요."

"...그건 그래."

확실히 장신구를 억지로 빼앗지 않는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주위에서 힐끗 이쪽을 주시하던 풍기위원들도 별다른 반응 없이 어깨를 으쓱이곤 다른 학생들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고교 입학 이후로 언제나 헤어밴드, 목걸이, 팔찌에 수염 스타일이었으니까, 풍기위원들로서도 이제와선 내 모습을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는 적당히 단념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정도 선으로 눈감아주는 식의 대우를 받는데 더이상 다른 풍기위원들 앞에서 코테가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얌전히 운동장으로 발을 옮겼다.


운동장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트랙을 돌고 있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더운날인데 벌칙 받는것도 고생이네요.
여학생의 뜀박질을 따라 목덜미까지 내려온 웨이브진 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어? 리사잖아?
트랙에 들어와 조금 속도를 높여 리사의 옆까지 따라붙으며 말을 건넸다.

"아침부터 서로 고생이구나 모미오카."

"하앗~? 아키츠군?"

달리다 깜짝 놀란 얼굴로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모미오카도 복장 불량으로 걸린거야?"

"아핫~ 넥타이를 깜빡했어."

와이셔츠 윗단을 슬쩍 잡으면서 리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리본 넥타이가 매어져 있어야할 넥 부분은 단추가 풀려 쇄골과 앙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깜빡한게 아니겠지. 언제나 리본은 안하고 다녔잖아?"

"아하하~ 그랬던가?
하지만 그러는 아키츠군이야말로 남말할 처지는 못되는거 같은걸?"

장신구 하나 빼먹지 않고 평소와 같은 내 모습을 훑어보며 핀잔을 주는 리사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학교 올 때까지 풍기강화주간이란걸 잊고 있었거든."

"킥킥, 그렇게 얼빠진 채로 지내는건 안된다구 아키츠군.
그나저나 더우니까 얼른 달리는거 끝내고 교실로 들어가고 싶어."

낮게 키득거린 리사는 숨을 고르며 다시 트랙을 힘껏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저렇게 뛰다간 교복 다 젖는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리사의 속도에 맞춰 속도를 높였다.
괜한 걱정은 아니었는지 10바퀴를 다돌았을 쯤엔 리사의 교복은 땀이 배여 살짝 눅눅해져 있었다.



"하아, 후우……. 정말이지 아침부터 이런 과격한 운동은 지친다니까."

10 바퀴 돌기가 끝나고 멈춰선 우리는 잠시 트랙 위에서 숨을 돌렸다.
안그래도 한껏 여름인걸 과시하듯 더운 아침인데다 운동을 끝낸 직후라, 푸념을 흘리는 리사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땀과 열기로 인해 목덜미에 달라 붙은 모습이 건강미 넘치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바닥 부채로는 땀을 식히던 리사는 마냥 성에 차지 않았는지 와이셔츠 목덜미를 잡곤 팔랑팔랑 흔들며 바람을 일으켰다.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목덜미께가 펄럭이며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부풀어오른 가슴이 드러났다.
볼륨감을 과시하는 가슴위로 살짝 땀이 맺혀있는 장면이 섹시해 보여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다만 팔락거리며 들춰지는 옷자락 안으로 언듯언듯 드러나는 브래지어의 모습이 조마조마하면서도 민망했다.
이젠 목덜미 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지, 안그래도 짧은 치마를 조심성 없이 펄럭펄럭 흔드는 리사의 모습에, 사춘기 호기심과 양심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가 리사를 불렀다.

"저기, 모미오카."

"왜?"

"덥다곤 하지만 옷 매무새에는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응?"

고개를 갸웃하던 리사는 자신의 얼굴, 가슴, 치마쪽을 오가며 정처없이 헤엄치고 있는 내 시선에서 상황을 깨달은듯, 이내 히죽 웃으면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오히려 내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헤에...아키츠군은 그렇게나 내 옷차림이 신경쓰이는거야~?"

은근한 목소리를 내는 리사의 상체가 슬쩍 앞으로 숙여졌다.
기울어진 상체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 양가슴을 리사의 왼팔이 떠받치듯 감싸고, 리사의 오른손이 와이셔츠 목덜미께에 살짝 걸치듯 놓였다.
와이셔츠 목덜미에 걸린 리사의 오른손에 힘이 실리자, 풀어헤쳐진 와이셔츠가 벌어지며 리사의 도드라진 가슴께가 선명히 드러났다.
막 운동을 끝마친터라 땀으로 반투명해진 와이셔츠가 열기를 띈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목덜미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쇄골을 따라 앙가슴으로 또르륵 흘러내렸다.
부풀어오른 새하얀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서 느껴지는 색기에 당황해 고개를 들자, 옅게 볼을 붉힌 리사의 장난스런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후후, 키 차이를 이용해서 여자애의 가슴안을 훔쳐보다니 아키츠군도 응큼하구나?"

"엣...?"

아니, 이건 리사 네쪽이 몸을 숙인거...
풍겨져나오는 색향에 도무지 시선을 떼기 곤란...아, 아니! 도무지 시선을 두기 곤란하다.

"어때~? 이렇게 하면 나도 제법 섹시해 보이지 않아?"

은근한 목소리로 대담한 말을 하는구나 리사.
아무튼, 아찔할정도로 매력적이라는건 동의한다.
하지만 번뇌가 머리를 점령할 정도로 유혹적인 상황이라지만, 나에게도 부끄러움이란게 남아 있습니다.
리사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곤란해 붉어진 얼굴로 입만 뻐끔뻐끔 하고 있자 리사의 눈이 갸름한 초승달을 그렸다.

"어머? 말이 안나올정도로 매력적이야?
아니면, 혹시 위쪽보다 치마 안쪽에 더 관심이...「자, 잠깐! 뭐하는거에요 거기 둘!」"

이젠 숫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는 포즈를 취하는 리사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고 리사를 말리려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교문에서 단속중이던 코테가와가 당황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눈썹을 치켜 세웠다.

"모미오카씨! 다른 학생들도 많은데 단정치 못하게 뭐하는 짓이에요!
아키츠군도 벌칙 끝났으면 여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구요!"

"아, 아..."

"아하하~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코테가와~
그럼 아키츠군, 아침부터 재밌는 반응 잘봤어~"

붉어진 얼굴로 어리벙벙하게 반응하는 나와 당황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너털 웃음을 짓던 리사는, 운동장 한쪽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매곤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하아...정말이지 모미오카씨는...
풍기 단속 기간이란걸 이해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키츠군도 멍하니 굳어있지말고 그만 교실에 가봐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토한 코테가와는 이내 날 향해 내쫓듯 손을 내저었다.
쫓기듯 들어온 교실에선 방금전까지 일이 없었던것 마냥 태연한 얼굴의 리사가 책상위에 앉아 미오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풍기강화주간이라지만 교실은 어쩐지 평소와 다를바 없는것 같아 쓴웃음을 짓곤 자리에 앉았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지난 후, 2교시부터 소지품 검사를 시작했다.
학년별로 풍기위원들이 교실을 돌면서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한다.
수업 시간까지 할애 하다니, 이번엔 진짜 본격적으로 풍기 단속을 하려나보다.
나는 코테가와의 덤으로 풍기위원 보조로 활동하게 되었다.
장신구 착용을 허가받은 대신에 맡게된 일이다.
다른 풍기위원들은 아무도 그런건 신경쓰지 않았지만,
예외적인 대우를 받는 이상 그에 걸맞는 일을 하는게 옳다는것이 코테가와의 의견이었고,
나도 1학년 때부터 불량스러운 복장을 용납받는 대신 위원장 보조로 코테가와의 일을 도운 경험이 있었기에 위화감없이 풍기위원 보조를 맡기로 했다.
아, 물론 담배갑은 압수당했다. 용인되는건 수염이랑 장신구까지만.

사전에 공지를 해둔 소지품 검사였지만, 우리반에선 나 이외에도 소지품 관련으로 지적을 받는 학생들이 제법 나왔는데, 여학생 중에 소지품 검사에 걸린 사람은 둘이었다.
아이돌 활동에 바빠서 가끔 학교를 빼먹다보니 풍기단속주간 공지를 몰랐던 룬.
그리고 매일 리토를 트러블에 휘말리게 하는 말괄량이 왕녀 라라였다.

룬으로선 며칠만에 학교에 왔다가 풍기 단속에 걸린 상황인지라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룬의 소지품중에서 나온, 팬시한 디자인의 수류탄 같은 타원형 물체를 손에 든 코테가와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룬씨. 이 수류탄처럼 생긴건 뭔가요?
설마 위험 물품인건 아니겠죠?"

"그...이건 말이지..."

곤란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룬은 코테가와의 귓가에 얼굴이 가까이 하고선 작게 속삭였다.

"(옷소멸 가스야.)"

...이로 두꺼비의 옷소멸 가스탄이군. 가스에 닿은 상대를 알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목욕탕 사건 때도 그렇고 도저히 여자애가 가지고 다닐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 물건인데 대체 왜 가지고 다니는거람?

"네!? 어째서 이런걸..."

"어? 그, 그게말이지...마, 맞아! 은하홈쇼핑에서 치한퇴치용 가스를 사려다 착각한거였어! 아, 아하하..."

"치한퇴치용?"

"응. 아이돌 활동을 하다보면 스토커 같은 위험이 있으니까 호신용으로 사려고 말이지..."

"그래요? ...좋습니다. 그런거라면 어쩔수 없네요.
하지만 이런 물건을 교내에 들고 다니는건 위험하니까, 일단 압수물품으로 풍기위원회에 보관하고 있다가 방과 후에 돌려드리도록 할께요."

"응. 뭐, 나도 잘못해서 산거니까 그런거라면 납득이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한 룬을 뒤로하고 코테가와가 발견한 다음 풍기 단속 대상은 라라였다.

라라의 경우는 터무니 없는 물건이 걸려 버렸다.
바로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 팬티.
대체 누구거야? 아니, 물론 충분히 예상은 가지만.
라라의 가방 안에서 나타난 팬티를 목격하고 코테가와가 새빨개진 얼굴로 라라를 향했다.

"라, 라라씨...이건 대체 뭐죠?"

"응? 그거 리토의 팬티야."

"유우키군의!?" "리토군의!?"

"뭐? 내꺼!?"

리토가 경악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라의 말에 하루나가 얼굴을 새빨갛게하고 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째서 이런걸?"

"내 발명품인 「킁킁 토레스군」은 물건에 배인 냄새로 물건의 주인을 찾을 수 있거든.
이게 있으면 리토가 어디에 있어도 찾아갈 수 있으니까 항상 가지고 다니는거야."

"그럼 굳이 팬티가 아니어도 됐잖아!!"

재밌어하는 시선, 질린듯한 시선, 부러워하는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리토의 절규가 교실을 울렸다.

"...앞으론 그냥 손수건 정도로 해두세요."

코테가와는 차마 리토의 팬티를 압수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조그마한 구형 물체만 압수한 뒤 가방을 내렸다.
민망한 얼굴로 라라의 가방에서 팬티를 회수해가는 리토의 모습은 기억의 구석에서 지워주는 친절함을 보일때다.
우리반 소지품 검사가 끝나고 다른 반으로 이동하기 전, 코테가와는 비어있는 시즈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무라사메씨는 결석...은 아니군요.
가방도 있고 1교시에 앉아있는걸 봤는데 어딜 간거죠?"

"아, 시즈시즈라면 쉬는 시간에 미카도 선생님이 부르셔서 양호실에 갔어.
아직 미카도 선생님과 함께 있는거 아니야?"

"그랬군요."

구교사에서 벗어난 이후 미카도 선생님의 호의로 인공 육체를 가진 시즈는, 인공 육체의 점검도 겸해 미카도 선생님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때때로 미카도 선생님의 조수로서 간호복을 입고서 심부름을 하기도 하는데 가끔씩 덜렁대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는게 미카도 선생님의 평.
미오의 말에 납득한 코테가와는 나와 다른 풍기위원들과 함께 다른 교실로 이동했다.



몇개의 반을 돌면서 소지품 검사를 하고나자 압수 물품을 담은 바구니 중 하나가 어느새 가득차 버렸다.
생각보다 걸린 학생이 많았고 잡지류나 두꺼운 만화책의 무게 때문에 들고 다니기도 불편했기에 꽉찬 바구니는 풍기위원실에 놔두고 오기로 했다.

"그럼 이 바구니는 아키츠군이 풍기위원회의실로 가져가주세요.
전 다른 풍기위원과 남은 교실을 돌도록 할테니까요.
아, 혹시 모르니까 풍기위원실에 가면 압수물에 붙일 네임 스티커도 몇장 더 가져와 주세요."

"응. 알겠어."

코테가와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용 게임기, 만화, 잡지 등으로 가득찬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한바구니에 넣기엔 조금 과하게 담은 감이 없잖았지만 기왕 풍기위원실에 가는거면 지금까지 압수한 물품을 한꺼번에 가져가는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과욕 덕분에 바구니 밖으로 물품이 떨어지지 않게 복도를 걷는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워졌다.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막 양호실을 지날 때, 양호실 안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컥 양호실 문이 열렸다.

"아, 큰일! 수업 늦었을지도!"

"어?"

양호실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던 시즈가 문앞을 지나고 있던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바구니에 든 물건에 신경쓰느라 몸을 재빨리 움직이 못하고 주춤하던 내게 시즈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충돌했다.

"아!?"

시즈와의 충돌로 인해 들고있던 바구니에서 몇몇 물건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압수물중 전자기기는 바구니 안쪽에 넣어둔지라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있었는데, 바닥에 딱딱한 물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아래에서 솟아오른 가스가 우리 둘을 감쌌다.

퍼엉~!

"꺄악!?" "우앗!?"

막 사과하며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 몸을 숙이던 시즈는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가스에 묻혀 비명을 질렀다.
뭐야 터졌길래 갑자기 이런 가스가...설마!?
순간적으로 도달한 해답에 안색이 창백해지고, 곧 가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즈가 보였다.

"아..."

가스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알몸을 드러낸 채 녹아내리는 옷자락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 시즈의 모습이 있었다.
역시 옷 소멸 가스가 터진거였잖아!?
풍기위원실에 가는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풍기문란이 클라이맥스야! 게다가 나의 노출도 클라이맥스!
피부에서 느껴지는 휑한 감각은 나도 시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에? 어, 어라 이게 대체 무슨...? ...료스케씨...?"

놀란 가운데 황급히 몸을 가린 시즈는 아연히 내쪽을 보다가 곧이어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몸을 돌렸다.
허허...바구니 들고 있느라 몸을 가리질 못했어.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을 애써 추스리곤 다른 사람이 오기전에 시즈를 데리고 양호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양호실로 들어서자 시즈는 재빨리 침대안에 들어가 침대 시트로 몸을 가렸다.
나도 뭔가 몸을 가릴만한걸 찾다가 마땅한게 없어서 시즈가 못보게 침대옆 커튼 뒤로 내 몸을 숨겼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정하고 나자, 커튼 너머로 침대에 시트를 두른채 앉은 시즈의 실루엣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저...료스케씬 어째서 양호실 앞에 계셨던거에요?"

"풍기위원실에 압수물품을 놓아두려고 가던 중이었거든.
방금은 압수한 물품중에 우주인용 옷소멸 가스탄이 바닥에 떨어져 터진것 같아."

"아, 그래서..."

침착해져서 수긍하는 시즈의 반응에 안심하다가, 곧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자 다시금 막막해졌다.
알몸 상태로 갈아입을 옷도 없이 시즈랑 둘이서 언제까지 양호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거야?

"그런데, 시즈 넌 갈아입을 옷은 없어?
가끔 조수하면서 간호복을 입기도 했잖아."

"간호복은 미카도 선생님 저택에 있어요.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는건 주로 미카도 선생님 댁에 우주인 환자분들이 올 때라서..."

"으응...그렇다고 이 상태로 둘이서 양호실에서 있는것도 난처한데..."

"그, 그러게요..."

시즈도 곤란한지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침묵이 양호실을 맴돌았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은채 언제 사람이 양호실에 들어올까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시즈가 입을 열었다.

"저, 료스케씨."

"응?"

"그대로 계속 커튼 앞에 서 있다간 사람이 들어왔을때 곤란할거에요."

"윽, 그야 그렇지."

알몸의 남자가 양호실에서 서있는 모습을 봤다간 십중팔구 「변태다!」라는 비명이 울릴거다.
얕게 신음소리를 내며 고민하고 있자 커튼 너머로 주저하는 목소리로 오시즈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료스케씨도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게 어떨까요?"

"에엑?"

시즈의 제안에 놀라 새된 목소리를 내자, 당황한듯 커튼 너머의 실루엣이 부산히 움직였다.

"이 시트는 크니까 둘이서도 충분히 몸을 가릴 수 있어요!
그러면 료스케씨도 몸을 숨길수 있고, 커튼이 침대를 가려주니까 적어도 남에게 곤란한 모습을 보이진 않을거에요."

"아니, 정 안되면 난 침대 아래라도 들어가 숨어있을테니까...
시즈 네가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제안하지 않아도 된다구."

"저, 저는 괜찮아요!"

"시즈?"

"괜찮아요..."

되뇌이는 시즈의 목소리는 사그라질듯 갸냘펐다. 




시즈가 침묵해버리고 양호실에선 시트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압수물품 바구니에서 삐져나온, 대담한 의상을 입은 연애인이 커버를 장식한 화보집이 자꾸만 눈길을 끈다.
여름이라 사람들이 개방적이 된건가 아니면 여름이라 내가 더위를 먹은건가, 사고가 흐트러지며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다.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른 상태에서 천천히 커튼을 지나 시즈가 앉아있는 침대를 향한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삐걱삐걱 움직이며 두근두근 방망이질치는 심장소리가 시즈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침대에 올랐다.
상체를 일으킨채 고개를 숙이곤 가슴께까지 시트를 끌어올린 시즈의 옆에 앉아 허리 아래를 시트로 가렸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침대위에 쏟아져 내린다.
피부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어 간다.

"...따뜻하네요."

"으응, 그렇네."

옆에 앉은 오시즈와 팔이 닿을 때마다 몸이 자연스레 긴장하게 되지만, 침착한 분위기의 시즈를 따라 나도 조금씩 조용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이대로 햇살에 녹아버리는건 아닐까 멍하니 앉아있다가 불현듯 코테가와가 부탁한 네임 스티커에 생각이 미쳤다.

"아..."

"왜 그러세요?"

"풍기위원실에서 네임 스티커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받은게 떠올라서."

"압수품이 많았나보죠?"

"혹시 모르니까 여유분을 가져와 달라는거였어.
우리 반에도 룬이나 라라 외에도 걸린 사람이 꽤 됐거든.
라라는 소지품중 어떤건 워낙 파격적이라 압수하진 않았지만."

"그래요? ...아!"

"왜그래?"

내 말을 듣던 중 시즈가 팟-하고 떠오른듯 눈을 빛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요!"

"어? 진짜?"

"네, 라라씨에게 부탁하는거에요.
라라씨의 머리에 장식된 발명품이 옷을 만들수 있었죠?"

"아! 페케!"

라라에 의해 만들어진 코스츔 로봇 페케.
변신 가능 외에도 옷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페케라면 녹아버린 나랑 시즈의 옷도 새로 만들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라라에게 어떻게 연락을 하지?"

"제가 유체이탈을 해서 유령 상태로 라라씨에게 다녀오면 되요."

"......아."

그러고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깜빡하고 있었던 시즈의 능력을 떠올리며 이마를 탁-치자 시즈가 미안한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빨리 생각해 냈어야 했는데."

"아냐아냐. 너도 나도 너무 당황해서 그 생각을 못한거니까.
게다가 네가 지금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반증인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인걸."

"그럼 지금 바로 라라씨께 다녀올께요."

이젠 제법 유체이탈의 요령이 생겼는지 자연스레 시즈의 머리에서부터 시즈의 영혼이 빠져 나왔다.
침대에 앉아있던 자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시즈의 몸은 힘없이 내쪽으로 기울었다.
내 몸에 기대어진 시즈(몸)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당황하면서, 인공육체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시트를 황급히 도로 끌어올렸다.
시즈(몸)의 한쪽 어깨를 잡은채 경직된 내 모습에, 유령 상태로 공중에 떠있던 시즈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라라씨를 데려오도록 할께요.
그동안 제 몸을 잘 부탁드릴께요."

살풋 미소지은 시즈는 내 어깨에 기대어진 자신의 인공 육체에 당황하는 날 뒤로 하고 커튼을 통과해 사라졌다.
유령상태의 시즈가 통과한 커튼 너머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가 품안에 있는 시즈의 인공육체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은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시즈.
인공육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살결과 피부에 전해지는 온기.
살짝 미소를 지은 입매에서 전해지는 생동감은 마치 시즈가 깊은 잠에 들었을 뿐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품에 기댄채 잠든 듯 눈을 감은 시즈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이대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하고 작게 탄식했다.
내 숨소리와 시계바늘소리만이 조용한 양호실에 울리는 가운데,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다.
이 소리는 혹시 미카도 선생님?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미카도 선생님이 양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응? 혹시 침대에 누구 있니?"

커튼으로 비치는 실루엣에 의아해하며 다가온 미카도 선생님은 침대에서 시트로 몸을 가린채 붙어있는 나와 시즈의 모습에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몸임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나와 시즈의 드러낸 어깻죽지에, 입을 가린 미카도 선생님에게서 「어머어머~」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학교에서, 그것도 양호실 침대에서 오시즈짱이랑 이런 대담한 짓이라니..."

"대담한 짓인건 맞지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아닐겁니다."

후후후 웃음을 지으며 조롱해오는 미카도 선생님께 해명하려는 찰나 타닥타닥하는 발소리와 함께 라라가 양호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라라씨를 데리고 왔어요 료스케씨~!"

"료스케~ 오시즈짱이 불러서 왔는데 괜찮아?"

"아, 마침 잘왔어 라라. 지금 옷이 없어서 그러는데 의복 수선을 부탁하려고 연락을..."

"이...이 변태! 너 양호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거야!"

"파, 파렴치한...! 그 모습은 대체 뭔가요 아키츠군!?"

정정. 라라만 온게 아니군요. 「옷소멸 가스탄」의 소유주인 룬이랑 풍기단속을 하던 코테가와까지 따라왔네요.

경악하는 룬과 코테가와에게 옷소멸 가스탄이 사고로 터졌다는 설명을 하고나선 엄청난 매도를 받은뒤 풍기문란으로 감점처리 되었다.
알몸의 여자애랑 단둘이서 침대 시트 하나로 몸을 감싸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시즈가 먼저 제안했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는건 시즈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인데다, 시즈가 했던 제안은 내가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변명의 여지도 없었고.
뭐, 나로선 부끄럽고 긴장되면서도 두근두근했던 경험인지라 방금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똑같은 선택을 다시 하라면 민망해서 도저히 못할 것 같지만.

여담이지만 미카도 선생님이 시즈에게 부탁한건 양호실에 새로 들어온 약품을 알맞게 분류해 보관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쉬는시간에 잠시 비품 정리를 맡겼는데, 오시즈짱도 참 너무 성실해서 문제라니까..."

미카도 선생님의 말마따나 쉬는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약품을 정리를 끝낸 뒤 개인적으로 양호실 청소를 시작한게 문제였다.
시즈가 2교시 시작하고서도 교실에 돌아오지 못한건, 청소에 집중하다가 미처 벨소리를 듣지 못해서 였다고 한다.
사정을 듣게된 미카도 선생님은 미안한듯 시즈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풍기강화주간의 첫날을 소란스레 보내고서 귀가했다.
유달리 더운 오늘 날씨에 차가운거라도 사먹는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집에 있는 두 녀석들 몫까지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공물로 바친 아이스크림 덕에 나나와 모모로부터 평소보다 열렬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나선 저마다의 일에 몰두했다.

나나는 최근들어 보기 시작한「금색의 갓○」를 보면서 울고 있다.

"우우... 우마곤... 나만은 네 이름이 슈나이더였다는걸 기억해줄께!
그래도 카프카씨는 정말 대단하네~! 나같은 능력이 없어도 동물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책을 읽는 와중에 감상을 늘어놓는게 만화책에 푹 빠진듯 하다.

모모는 은하통신판매 사이트에서 쇼핑중이다.
식물용 영양제라든지 마음에 드는 티백을 고르고 있었다.

난 마루의 테이블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다.
곧 있으면 시험기간이니까 이제부터 준비를 해놓는게 좋을테니까.
시간이 지나고, 적당히 밤도 늦었기에 내가 덮을 이불을 방에서 꺼내 마루의 소파 위에 올려놓곤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나나가 만화책을 책장에 꽂아넣고 먼저 침실로 들어간 후, 쇼핑을 끝마치고 뒤따라 침실로 들어가려던 모모가 나를 보며 물었다.

"료스케씨는 안 주무세요?"

"응. 며칠 뒤면 시험이라서.
난 좀더 공부하다 잘테니까 너희 먼저 자도록 해."

"으음..."

내말에 모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방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포트에 물을 끓이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잠시 후, 모모가 홍차를 컵받침과 함께 내왔다.

"한잔 드세요.
홍차엔 각성 효과가 있으니 도움이 될 거에요."

"아...잘 마실께. 고마워 모모."

"후후, 별말씀을요. 그럼 전 먼저 자러 갈께요."

찻잔을 내려놓은 모모는 생긋 웃곤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이구나 모모는...
모모의 마음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끼며, 방금전보다 고양된 기분으로 교재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홍차를 들이켰다.


나나와 모모가 잠자리에 들고나서 제법 시간이 흘렀다.
시계바늘이 1시를 가리킬 즈음, 봐야할 부분은 충분히 읽어보았기에 나도 이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정리하고, 소파에 올려두었던 이불을 마루 바닥에 깔고 자리에 누웠다.
방금전 본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한차례 되뇌이보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안와...

누운지 1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정신이 말똥말똥한게 도무지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거...생각보다 홍차의 각성 효과가 강한데.
째깍째깍하는 초침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한채 누워있는건 시간이 아까웠기에 잠이 올 때까지 책이라도 좀더 읽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공부하다가 졸음이 오면 그때 다시 자리에 누우면 되겠지.
마루 불을 켜고선 탁자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창밖에서 짹짹거리는 참새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리며 잠옷 차림의 나나가 마루로 나왔다.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을 하곤 목이 마른지 부엌으로 향하던 나나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쳐든 내 모습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엑~ 이른 아침부터 공부야 료스케?"

"하하...조금 의욕이 지나쳤달까..."

아침부터가 아니라, 실은 밤을 새버린 거지만...
뻑뻑해진 눈가를 매만지면서 슬슬 찾아오기 시작한 졸음을 애써 쫓아내었다.

졸릴때까지만 공부하자는 내 바람과는 달리, 밤새도록 약한 흥분한 상태가 지속되어 버려서, 결국엔 책을 읽다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제밤 모모가 타준 홍차는 생각 이상으로 각성 효과가 강했다.
다만 각성효과가 끝난 아침이 되어서야 뒷북치듯 찾아온 졸음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나른해진 정신을 다잡으면서 욕실로 가 몸을 씻어 졸음을 쫓아내고선 아침 식사를 만들 준비를 했다.




꾸벅...꾸벅...

「그러니까 여기선 이 공식을 이용해서...」

"(아키츠군...아키츠군?)"

점심시간을 앞둔 오전의 마지막 수업인 수학시간.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듯 하다.
옆자리에서 날 깨우려는 코테가와의 노력도 지금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피곤한거야...?
햇살이 따스해서 졸음이 몰려든 적은 있어도, 피로 때문에 졸음이 밀려오는건 처음있는 일인데...
아무래도 점심 시간에 옥상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게 좋을것 같다.
내쉬곤 내 어깨를 흔드는 손길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가운데, 어쩐지 코테가와의 한숨 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반찬이 입에 들어오는지 코에 들어오는지 모를만큼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식사를 끝마칠 즈음엔 수업때만큼 졸음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묘하게 몸을 잠식하는 노곤함은 여전했기에 예정대로 옥상에서 한숨 자려고 교실을 나섰다.

"후아-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옥상 문을 열었다.
정오의 햇살은 뭉게구름에 가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서늘함이 감돌았다.
잠자기엔 딱 절호조인 상황이구나.
만족에 겨운 미소를 지은채 옥상 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이대로 예비종이 울릴 때까지만 자도록 할까?
얼굴에 내려쬐는 엷은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으려 할 때, 얼굴 위로 그늘이 지며 내리쬐던 햇살을 막았다.

"안녕 잠꾸러기씨~?"

"......?" 



장난스러움이 배어나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내 머리맡에 위치한 새하얀 허벅지와 체크무늬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웨이브진 금발과 장난기가 배인 갈색 눈동자, 웃음기를 머금은 입모양.
더불어 치마 안쪽으로 보이는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팬티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곤 멍하니 멈춰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리사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추며 지나가자 급격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푸웃!? 너 왜 그런 위치에 서있는거야!?"

"아하하하~! 방금전 아키츠군 반응 정말 이상한거 알고있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리사는 등뒤로 깍지를 낀채 키득키득 웃었다.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하고 교실을 나가길래 궁금해서 따라왔더니 낮잠자러 온거였어?"

"아아. 모미오카 네 덕분에 이미 반쯤 잠이 달아나버렸지만...냐음..."

방금전 행동이 내 잠을 깨우는게 목적이었다면 훌륭했다.
평소였다면 번뇌로 낮잠은 꿈도 꾸지 못했을거다.
하품이 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에에~ 반 밖에? 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피곤해 하는거야?"

"그냥. 어쩌다보니 어제 밤을 새버렸거든."

"흐응? 혹시 홈스테이 중인 라라찌네 동생들과 밤새도록 '어른의 놀이'를 하느라 피곤한거라든가~?"

"하암...그런 농담은 그만해 달라구. 공부하다가 마신 홍차가 생각보다 각성효과를 잘 받아서 밤을 새버렸을 뿐이니까."

"재미없는 이유네."

"나도 졸음이 밀려오는 지금 상황이 전혀 재밌지 않아..."

"하지만 의외로 성실하네?
저번에 코테가와랑 성적 내기때도 그렇고 아키츠군도 제법인걸?"

"오, 칭찬해주는거야?"

"뭐, 수업시간에 졸았던걸 빼면 전체적으론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는데~
이런저런일로 아키츠군에겐 꽤나 의지하기도 했고.
굳이 지적하자면 무드에 좀 더 신경을 써준다면 좋을까나?"

"헤에? 모미오카한테 그런 평가를 받게 되다니 정말 기쁜걸."

"그거 진심?"

"물론이지. 모미오카는 개방적으로 보여도 의외로 남자 보는 눈은 엄격하니까.
1학년 때 헌팅받았을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잖아."

"아핫~! 그런 껄렁껄렁한 남자들에겐 전혀 관심 없으니까 말야.
나도 기왕이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구.
그나저나 아키츠군도 제법 좋은 여자보는 눈이 있잖아? 포인트 업이야."

장난스레 윙크를 하곤 리사는 살며시 내 옆에 앉았다.

"졸린거지?
교실에 돌아갈때 깨워줄테니 한숨 자도록 해."

"어? 괜히 네 시간 빼앗는거 아냐?"

"괜찮아. 나도 옥상에 올라온 김에 잠시 쉬었다 갈 예정이니까."

무릎을 모으며 대답하는 리사에게 안심하며 다시 양팔을 베고 누웠다.

"가끔은 이렇게 옥상에 올라와보는 것도 좋네.
풍기단속기간이라서 더 그런걸까, 햇살이 이렇게나 따스하니까 수업같은건 전부 잊고서 한가하게 낮잠이나 잘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네...한번쯤은 그런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늦잠잔 덕에 오후 수업은 지각이고, 요란스레 복도를 뛰어넣고선 수업중인 교실에 몰래 들어가려다 선생님께 걸려서 꾸지람을 듣는 나와 리사.
적당히 데워진 옥상 바닥에 등을 댄채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일탈도 나중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는 걸까?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한차례 쓸어넘긴 리사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경쾌함이 느껴지는 기분좋은 노랫소리에 귀가 기운다.
자장가로 삼는다면 어쩐지 즐거운 꿈을 꿀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햇살을 품은 뭉게구름은 따뜻한 쿠션같지 않으려나.
조금씩 밀려오는 졸음에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수업시작 전엔 일으켜줘 모미오카..."

"후후...잘 자 아키츠군."

웃음을 흘리는 리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금새 잠에 빠져 들었다.




"아키츠군...아키츠군?"

"...으응?"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거꾸로 선 코테가와의 얼굴이 나와 마주보고 있다.
아니, 내 머리맡에 주저앉은 코테가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거다.
코테가와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을듯 가깝다.

"...아, 잘 잤어 코테가와?"

"......사람이 걱정되서 기껏 찾으러 다녔더니 모미오카씨랑 팔자좋게 자고 있었나봐요?"

"응?"

의아해하며 시간을 확인하곤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미 5교시가 끝났잖아!

"엑!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거야?"

"하아암~ 일어났어 아키츠군?"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자, 내 오른편에서 자고 있던 리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왜 너까지 자고 있는거야 리사?

"모미오카...깨워준다는 약속은?"

"그게말이지, 아키츠군이 자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보여서 그만... 에헷~"

「에헷~」이 아니야!?

"뭐 어때? 이런 땡땡이도 학창시절에나 허락되는 특권이니까~"

"헤에...특권, 인거군요 모미오카씨?"

"에? 코, 코테가와도 있었어?"

이마에 십자마크를 새긴채,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서있는 코테가와의 표정이 무섭다.
눈을 뜨고선 그제야 코테가와를 발견한 리사의 얼굴이 히죽거리며 웃던 그대로 경직되었다.

함께 우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미오와 시즈가 옥상문을 열고 올 때까지 나와 리사는 정좌 상태로 사이좋게 코테가와의 설교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 누워있는 아키츠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키츠군, 아키츠군~ 아키츠군은 왜 옥상에 올라온거야?"

"여기는 하늘이 가까우니까.
내 야망은 하늘을 손에 넣는거거든."

바닥에 몸을 누인 아키츠군은 반할것만 같은 거대한 야망을 내비치며 하늘이 아니라 내 치마 안을 열심히 훔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야심으로 가득찬 아키츠군의 시선이 내 허벅지에 고정되길 한참...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아키츠군이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외쳤습니다.

"그걸 하자 모미오카!"

"그거라니?"

"바보녀석! 이 상황에서 그거라면 하나밖에 없잖아! 합체다!"

"하, 합체!?"

열기를 띤채 이글거리는 아키츠군의 눈동자는 멋졌지만, 버튼이 풀린 와이셔츠의 가슴골에 집중되는 시선을 받았을 땐, 역시 아키츠군은 좀 더 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당황하는 내 모습을 신경쓰지 않은채, 말을 마친 아키츠군은 나의 손을 이끌고선 자신의 위로...(하략)



"다시 써오세요."

"에에~? 재밌지 않았어?"

"전혀 재밌지 않아욧! 반성문을 쓰랬더니 이게 대체 뭔가요?"

즉흥으로 휘갈겨쓴 리사의 반성문을 읽던 코테가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쪽은 진지하게 반성문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반성문까지 장난기 넘치는 글이었다면 인내심이 끊어진 코테가와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을거다.
마음속으로 안도하고 있는데 내 반성문을 집어든 코테가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공부하다 밤을 샜는지라 옥상에서 잠시 수면을 취하려던게 그만 수업 시간을 놓쳤습니다.
아마도 햇빛을 가리던 뭉게구름이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뭉게구름은 수직으로 발달한 구름으로 적운이라고도 하며, 여름철에 지면이 가열되어 상승기류에 의해 생깁니다.
보통 아침에 나타나기 시작해 낮동안 발달하고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사라집니다...(하략)



"...이건 무슨 지구과학 숙제라도 되는건가요 아키츠군?"

"...반성문 용지 채우기가 생각보다 힘들더라구."

민망해하는 날 보던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곤 나와 리사의 반성문을 챙겨넣었다.
앞으로는 조심하라며 관대함을 보여주는 코테가와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5교시 수업시간의 필기내용을 코테가와에게 빌리곤 잠시 교실을 둘러보던 중, 룬의 자리가 가방 하나 없이 비어있는걸 발견했다.

"응? 룬이 자리가 없네?"

"룬씨라면 아이돌 활동 때문에 점심시간에 조퇴했어요."

"바쁘구나. 조금 부럽기도 하고."

"학교를 빨리 마친게 말인가요?"

"아니, 룬은 벌써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룬을 보면 나도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서."

"꽤나 건설적인 생각이네요."

"그러게말야~ 그럼 아키츠군은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봤어?"

옆에서 시즈랑 미오와 얘기를 하던 리사가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나?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가업을 잇는다든가 하는건?"

"가업을 잇는건 좀 꺼려지는데..."

일상 생활에서 가끔 겪는 이해 불가의 물리 현상 때문에 물리학자로서의 길은 초등학교때 단념했던 적이 있어서...
아, 그렇다고 지금도 과학자가 되는게 싫다거나 한건 아니다.
십수년째 과학자로서 성공해서 지내고 계신 부모님들의 예를 보면, 굳이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니까.
다만 한번 단념했던 길을 다시 쫓는다는 어색함이 사라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 뭔가 이유라도 있는거야?"

"혹시 정말 소문대로 부모님이 야쿠자 가계라든지?"

"아냐, 부모님께선 두분 다 과학자시라구."

"아하하 미안미안~ 아키츠군이라면 야쿠자 2세 였어도 믿었을텐데 유감.
중학교때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땐, 분명 암흑계를 휘어잡는 거물로 성장할거라고 다들 의견이 일치했는데 말야."

"하, 하, 하..."

"그래도 기왕이면 아키츠군은 커다란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

은근한 목소리로 리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여자는 말야, 야망을 가진 남자에게 이끌리는 법이라구?"

그래서 어머니는 세계정복이 중2때 꿈이었다는 아버지랑 결혼한건가?
...시덥잖은 생각은 그만두고 진지하게 듣자.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하니까.

"조언 고마워. 진지하게 생각해 볼 테니까.
그럼 모미오카는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정했어?"

"난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싶어. 네일 아티스트도 해보고 싶구.
졸업하면 관련 학원에서 공부를 하려나? 미오는 어때?"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싶어.
기왕이면 취미를 살리는 쪽으로 가고 싶거든."

그러고보면 미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동생 카페는 고양이귀 메이드 코스프레도 하던 카페였지.
코스튬 플레이를 즐겨하는 미오는 패션 센스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까 장래가 기대가 된다.
아, 지금은 해외에 계신다는 리토 어머니의 직업도 패션 디자이너인것 같던데, 나중에 미오가 배움을 청할 일도 있으려나?

"그래서 언젠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아키츠군을 프로듀스 해보고 싶은데 말야~"

"어? 나 말야?"

손가락으로 날 가르키자 미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응응. 아키츠군은 야성미가 있어서, 분명 그 컨셉으로 나가면 무섭도록 어울릴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크면 아키츠군의 프로듀서가 되어줄께."

미오의 말에 리사가 반색하면서 이야기를 키웠다.

"그럼 장래에 나랑 미오가 아키츠군의 코디를 해주는건 어때?
다듬기에 따라선 아키츠군도 제법 멋진 남자가 될것 같으니까.
어디~ 우선은 그 거추장스런 헤어밴드부터 치워볼까~?"

"전력으로 사양하겠습니다."

"잇힛힛~! 좋으면서 튕기기는~
자아자아, 이 누나가 훌륭한 어른으로 만들어줄테니까 얌전히 이리온~?"

"그거 아가씨가 해도 될 대사가 아냐!"

뉘앙스 마저 이상하잖아!
능글맞은 아저씨 흉내를 내며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하는 리사에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양손으로 헤어밴드를 가린채 집요하게 뻗어지는 리사의 손길을 피했다.
리사의 행동을 보고 장난기가 동했는지 옆구리를 간질이며 내 가드를 내리려는 미오에게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리사와 미오 콤비의 장난이 끝나고 이야기의 화살은 코테가와를 향했다.

"코테가와의 장래희망은 뭐야?"

"저는......크흠, 좀더 생각해 봐야겠죠."

남몰래 「고양이」라고 중얼거린걸로 봐선 고양이 관련으로 직업을 생각해본걸까?
아마 룬도 그랬고, 리사와 미오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하려고 했기에 덩달아 자신이 좋아하는걸 연관지어 생각한것 같지만,
고양이를 좋아해도 정작 고양이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풍기위원으로서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자면 검사(檢事) 이미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시즈시즈는 어때?"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미카도 선생님의 조수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걸 찾아보려는데, 기왕이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어요."

유령이었던 시즈가 육체를 얻은건 아직 일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장래 꿈을 결정하려면 현대에 익숙해질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와르르-

드물게 건설적인 주제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복도에서 다량의 물건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교실을 나서니 라라의 발명품들이 복도에 어지러이 널부러져있다.
물건의 주인인 라라는 휴대폰 모양의 데다이얼을 손에 들고선 곤란해하고 있었다.

"라라찌? 무슨일이야?"

"아하하~ 데다이얼이 상태가 안좋아서 멋대로 다 나와버렸어."

"정말...바로 어제 소지품 검사를 한 참인데, 학교에 이상한 물건을 가져오면 안되잖아요 라라씨."

불만스러운 얼굴로 불평하면서도 코테가는 복도에 앉아 떨어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어제 양호실에서 라라의 발명품의 도움을 받았던 나와 시즈도 덩달아 물건 줍기에 참여했다.

"신기한 기계들이 많네요.
어디에 쓰는 물건들이죠?"

"거기있는 개 로봇은「킁킁 토레스군」. 물건의 냄새를 맡아서 소유주를 찾아가는 로봇이야.
이쪽의 여우로봇은 「펄펄 스노우군」. 하늘에서 눈을 내리게 하는 장치야.
저 헬멧은 시각이랑 다른 감각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그리고 이건 「만능툴」인데 물건을 개조하는데 써."

자신의 발명품에 흥미를 보이는 시즈에게 라라는 즐겁게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해주었다.
라라의 설명을 들으며 물건을 정리하던 시즈의 오른손이 우연히 같은 물건을 집으려던 코테가와의 왼손과 겹쳤다.

"아, 그 물건은..."

파지직!

"꺅?" "꺄악!?"

"...접촉한 물건에 강력한 자장을 발생시켜서 흡착시키는 효과가 있어."

시즈와 코테가와가 잡고 있는 말굽자석 모양의 물체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둘을 감쌌다.
빛이 사라지고 황급히 발명품에서 손을 치우려던 시즈와 코테가와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이건?"

"떼어지지 않네요..."

아연해하는 시즈의 오른손은 코테가와의 왼손을 감싸쥔채 찰싹 붙어 있었다.




"일단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질거라고 생각해."

코테가와랑 시즈의 손을 들러붙게 만든 발명품을 해석해 본 라라가 낸 결론이다.

"얼마나 효과가 지속되는거죠?"

"으응~ 대략 하루 정도?"

"그런..."

"에헤헤..."

"...무라사메씨는 어쩐지 기쁜듯 하네요."

"친구랑 손잡는 건 좋은거구나 싶어서요."

"하아..."

헤실헤실 웃는 시즈의 모습에 코테가와가 웃는건지 화내는건지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코테가와씨 손은 부드럽고 따스하네요."

"무, 무슨 말을..."

"사이 좋아보이네 너희들."

빨개진 얼굴의 코테가와에 싱글벙글하는 시즈의 조합을 짧막히 평했다.
정말이지 이건 신선하구나.

남은 수업시간 동안 시즈는 코테가와의 왼쪽 자리에 앉게 되었다.
원래 그 자리의 주인인 나는 시즈의 자리에 앉았고.
손이 들러붙어 있었기에 둘은 서로의 책상을 붙이고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께선 책상을 붙인채 손을 잡고 앉아있는 시즈와 코테가와를 보곤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른척 수업을 진행하셨다.
워낙 2-A가 이상한 일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까 선생님들의 신경도 굵어지신듯 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판단이 곤란한 점이지만.
둘이서 한 교과서를 들고 수업을 듣는 모습은 제법 보기 좋았다고만 해두겠다.

하교시간이 되자 코테가와랑 시즈의 거취로 잠시 논의가 있었다.
서로간의 의견이 오간후, 시즈는 코테가와의 집에 하룻밤 머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첫 합숙이 기대되는지 들떠있는 시즈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덩달아 기분이 풀린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즈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다음날.
교실로 들어서니 코테가와랑 시즈가 보였다.
다행히 자석 효과가 끝났는지 양손은 자유로운 상태였다.
즐겁게 말을 건네는 시즈와 거기에 응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서 둘의 사이가 어제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합숙하면서 더 사이가 좋아진걸까?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시즈가 도시락을 든채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료스케씨, 코테가와씨~ 점심 같이 먹어요."

붙여진 책상위에 시즈가 큼지막한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펼져진 도시락의 다채로운 반찬에 감탄하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어제 코테가와의 집에서 숙박은 즐거웠어?
아침의 모습을 보면 대충 상상은 가는데."

"물론이에요. 친구집에 자러가는건 처음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족분들도 친절히 대해주셨는걸요."

시즈가 함께 코테가와네 집에 갔을때 어머니께선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고 한다.
코테가와의 아버지랑 오빠인 유이씨가 모인 자리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긴 했지만.
저녁식사 중에 테이블 아래로 물통이 떨어지려고 했을 때, 무심코 염동력을 사용했다는 시즈.
코테가와네 가족들은 시즈의 염동력에 대해서 신기해 하면서도 TV로만 보던 초능력자인가 하며 대범하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정말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식탁이었어요.
오랜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쑥쓰러운 듯 잠시 고개를 숙인 시즈는 이내 코테가와의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코테가와의 방엔 고양이 관련 물품이 흘러 넘치는것 같았다.
고양이 인형, 고양이 베게, 고양이 쿠션, 고양이 스트랩, 고양이 머그컵, 고양이 앨범, 고양이 퍼즐.
고양이를 좋아하는 코테가와 답다고 해야하나.
당연하지만 코테가와의 방에서 한침대에서 같이 잤다든지.
듣기론 자석효과는 오늘 아침이 되서야 끊어졌다고 한다.

"이 도시락도 코테가와씨네 어머니께서 싸주신거에요.
코테가와씨랑 저랑 료스케씨랑 사이좋게 먹으라고요~"

"아하하, 맛있게 잘먹었다고 전해드려줘 코테가와."

"그러죠. 들어시면 기뻐하실거에요."

"아, 료스케씨에 대해선 코테가와씨 다른 가족분들도 잘 알고 계셨어요."

"정말?"

"네. 코테가와씨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때면 절반은 료스케씨 이야기였으니까 말이에요."

"무, 무라사메씨...!"

당황하는 코테가와의 반응을 모른척하고 시즈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료스케씨, 유우씨에게 뭔가 미움받는 일이라도 했었나요?"

"왜?"

"저녁먹으면서 료스케씨의 화제가 나오면 유우씨는 조금 께름직한 얼굴을 하셨거든요.
게다가 이런저런 불평을 하셨어요.「그녀석은 바람둥이야.」라고.
저번에 료스케씨가 갈색 단발머리의 귀여운 여자애를 울린걸 봤대요."

"쿨럭!?"

"리토? 괜찮아?"

밥먹다 걸렸는지 갑자기 기침을 하는 리토의 등을 라라가 두드려 주었다.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물을 마시는 리토의 모습을 보다가 시즈에게 답했다.

"아...그게 아마 유우키의 친척 여자애였을꺼야.
데이트 신청을 받아서 함께 영화를 봤었는데 조금 대답을 잘못해서 달래던 중이었어."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요? 아키츠군이?"

코테가와...그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은 조금 마음이 아파.

"그외에도 다른 목격담도 얘기해주시던데요.
분홍머리 쌍둥이 외국인 자매랑 옷가게에 가는걸 보기도 했고..."

"홈 스테이중인 라라네 여동생들이네.
일상에서 입을만한 옷을 고르러 같이 간거야."

"아, 그러고보니 룬씨랑 데이트 하는 것도 봤다고...「자, 잠깐!」"

큰소리로 시즈의 말을 끊은 룬이 벌떡 일어섰다.

"데이트 아니거든? 그냥 우연히 산책하다가 만나서 얘기했을 뿐이야!"

"응. 정말 우연히 만나서 얘기한 것 뿐이라니까."

"에~ 정말이야?"

미심쩍은 얼굴을 한 리사가 물었다.

"어디서 만났는데?"

"서점" "미소라당"

「「「......」」」

클래스 메이트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강해졌다.
리사도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듯 눈매가 초승달을 그렸다.

"후으응~? 어째서 대답이 어긋난걸까?"

"미소라당이었잖아 수염!"

"아, 아니. 원래 서점에서 만났다가 미소라당에 간거였잖아."

"헤에? 그러니까 둘이서 서점에서 만나서 함께 미소라당으로 간거라 이 말이지?"

"아냐! 정말로 우연이었단 말야!
내가 뭣 땜에 황금 같은 주말을 이런 수염이랑..."

"세번이나 우연히 만난것도 인연이라서 빵값은 내가 냈지."

"오오~ 세번씩이나? 그거 정말로 대단한 우연인걸~? 아직 더 숨기고 있는게 있다는거네?"

"쓸데없는 얘기하지마! 오해하잖아!"

아니 물론 나도 실수하긴 했지만...
룬 너의 과민반응이 오히려 리사와 미오의 장난질을 부채질한다는걸 이제 슬슬 깨달았으면 한다.

"헤에? 사이가 좋구나?"

"아니라니까!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인다는거야?"

"그래그래 다 이해한다니까~"

"큿...!"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히죽거리는 리사와 미오의 반응에 룬이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것 같아서 장난스럽게 농담을 하는 리사를 제지했다.

"놀리는건 거기까지 하라구 모미오카.
룬은 아이돌이니까 그런일엔 예민할 수 밖에 없는거잖아.
그리고 룬 너도 너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간 오해받을지도 모른다구?"

"누구 때문에 이런 처지가 됐는데...!"

울컥하고 째려보는 룬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룬의 반응을 즐기는 던 리사가 내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후후, 저렇게 틱틱대지만 그래도 결국엔 둘이서 함께 있었단거지? 대체 어떻게 꼬신거야?"

"꼬셨다기 보단 차였는데."

"엣? 설마 진짜로 헌팅!?"

"뭐, 뭐...!?"

당황하는 룬의 모습에 급히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함께 도서관에 가보지 않겠냐고 권했,"

「「「오오오~!?」」」

"이, 이...! 수염 이 멍청아!"

퍼억-!

"히데붓!?"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학생들의 반응에,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던 룬이 난데없이 꺼내든 몸통만한 나무 해머를 내게 휘둘렀다.
슬랩스틱 개그도 아니고 이런 고전적인 공격을 할줄이야...
바닥에 처박힌 날 내버려두고 씩씩거리면서 교실을 나가버린 룬을 당황해 쫓아가는 리사와 미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적어도 끝까지 해명할 시간은 달라고 너희들...
당황하는 시즈를 달래며 자업자득이라며 쓴소리를 하는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방과후 코테가와랑 함께 풍기위원실에 남았다.
압수물품 항목과 풍기위반학생 목록을 다시한번 체크하려는 코테가와의 꼼꼼함이 이유였다.
풍기강화주간이 끝나면 반성문을 제출한 학생들의 압수물품은 되돌려줄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풍기위원 보조로서 코테가와를 도우려고 남았고.

코테가와랑 함께 여러 바구니에 가득 쌓인 압수물품을 하나하나 소유주 목록과 대조해 보았다.
어디어디~ MP3 플레이어, 닌텐○DS, 게임CD, 그리고... 「고양이귀 메이드 컬렉션」?
이 무슨 매니악한...
아, 이건 내 담배갑이네. 이건 그냥 새로 한갑 사는게 나을것 같다.

목록 확인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나눴다.
코테가와로서는 이번 풍기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시끌시끌한 2-A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지만 브레이크 역이 없으면 폭주할 것만 같은 몇몇 학생들에겐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풍기강화주간의 계기가 되었던 세사람(모테미츠, 타치바나, 학생이 아니지만 교장) 외에는 나랑 리토랑 라라랑 사키 선배가 주의 학생에 들었다.

리토의 경우는 교내 성희롱 건으로 접수된 신고,
라라는 발명품이나 우주인용 물품을 사용해 일으키는 사건들,
사키 선배는 때때로 보이는 기행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다만 사키 선배의 경우는 텐죠인 그룹이 사이난 고교의 스폰서를 맡고 있어서 대부분의 풍기위원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워 하는가보다.
코테가와는 그런건 아랑곳하지않고 꼬박꼬박 주의를 주고 있다지만...

그러고보면 코테가와의 강직함 때문인지 내게 주의를 주는 풍기위원은 코테가와 하나 뿐이구나.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며 답해주었다.
그건 내가 요주의 인물로 지정된 이유 때문이라고.
나? 나는 기물파손이 원인이었다.

라라와의 싸움에서 운동장 수도를 파손시킨것.
그리고 체육창고의 철문을 뜯어버린것.

수도관에 대한 배상은 라라와의 싸움을 주선했던 사키선배가 배상하면서 무마시킬 수 있었고,
체육창고 건에 대해선 자수해서 가벼운 처분을 받았었다.

다만 체육창고 건에 대해선 손가락 모양으로 뜯겨져나간 철문 때문에 꽤나 뒤숭숭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문을 신경써서인지 풍기위원들이 내게 제재를 가하는걸 꺼리게 되어서 결국 코테가와가 날 전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맹수조련사」어쩌구 하며 말했다가 째려보는 코테가와에게 입을 다물게 된 풍기위원들이 있었던걸 떠올려 보면 꽤나 코테가와의 존재감은 강렬한 것 같다.

불평하면서 목록을 살펴보던 코테가와는 짧게 신음을 흘리면서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으음..."

"왜그래 코테가와?"

"아뇨, 그냥 어깨가 조금 뻐근해서..."

하루동안 시즈랑 붙어있던 탓일까?
역시 어젠 평소처럼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겠지.
목을 천천히 돌리며 어깨를 주무르는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내가 어깨를 풀어줄께."

"엣? 괘, 괜찮아요."

"자자, 사양하지 말고 여기 앉으라구."

"남자한테 맛사지 받는건 부끄럽다구요!"

"다리 맛사지까지 받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으으..."

곤란해하는 코테가와를 이끌고 의자에 앉혔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코테가와는 고개 숙였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 웃음이 새나오려는걸 참고서 코테가와의 뒤에 섰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등뒤를 덮고 있었다.
어깨를 주무르기 전에 머리카락을 모으는게 나을듯 해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부드러운 감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타고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자 코테가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아, 미안. 어깨가 머리카락에 가려서 좀 치우려고..."

"...그정도는 봐드리죠. 하지만 다음번엔 미리 말하세요. 조금 놀랐으니까."

"응응! 알겠어~"

"...왜 그런 수상한 웃음을 흘리는거죠 아키츠군?"

"아니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음번'엔 나도 제대로 허락받고 할테니까~"

"무슨...!? 그런식으로 말을 왜곡하지 말아줄래요?
다음번은 꿈도 꾸지 말아요!"

"에에~"

입을 놀리는것과 달리 손으론 착실하게 코테가와의 어깨를 주물렀다.
성실한 손놀림에 코테가와도 긴장을 풀고 몸을 맏기듯 조용해졌다.
가만히 앉아서 맛사지를 받는 코테가와의 뒷모습을 내려다 보다가 머리카락을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코테가와는 머리카락이 예쁘지."

"그, 그런가요?"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는 코테가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긴 생머리가 정말로 어울려 보인다구.
예전에 여학생들도 코테가와 머릿결 좋은걸 부러워하기도 했구말야."

"그, 그랬나요?"

쑥쓰러워하는 코테가와의 반응을 보며 맛사지를 끝냈다.
남은 업무는 많지 않았기에 금새 일이 마무리 되었다.
대조작업을 하느라 바구니에서 꺼내었던 물품들의 뒷정리를 끝내고 코테가와랑 나는 한숨을 돌렸다.

"수고했어 코테가와."

"아키츠군도 수고 많았어요. 정말이지 삼일동안 이렇게 압수 물품이 많이 쌓일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으으읏~"

개운한 표정의 코테가와가 한껏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던 순간이었다.

틱- 



"!?"

"...!"

코테가와의 등에서 작은 금속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코테가와가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몸을 숙였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나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냉정하게 사고해보았다.
코테가와의 저 반응...역시 방금 전의 그건 브라 후크 끊어진 소리입니까?

"코테가와, 혹시 방금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나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뭐가 일어난건진 아는데."

"큭,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살쪘다거나 그런 이유는 절대로 아니니까!"

"알아. 발육이 좋으니까 그랬,「빡-!」크억!?"

무심코 대꾸하다가 코테가와가 집어던진 잡지에 코를 맞았다.
내 코를 치곤 날아가는 잡지명은 '네코미미 메이드 컬렉션'이었다.

"아코코... "

"성희롱이에요 아키츠군. 파렴치한 대사로 감점시켜 드릴까요?"

"잘못했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는 코테가와에게 코를 매만지며 사죄했다.

툭, 딸깍, 데구르르...치익-

"응?"

등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바구니에 놓여져있던 구체가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데빌루크의 표식이 새겨진 주먹만한 크기의 구체에서 치익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봐이봐...설마 또 라라의 발명품이 오작동한건 아니겠지?
아무리 취미로 만든거라지만 안전장치가 너무나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오오오!
금방이라도 터질듯 파직파직거리는 소리를 내는 구체에 기겁해 황급히 코테가와의 몸을 감싸안았다.

"코테가와!"

"꺅!? 자, 잠깐! 아키츠군?"

파앙-! 퍼어엉-!
팡-! 투두두두두두!
퍼벙-! 펑!
타다다다다다다!

코테가와를 껴안고서 몸을 숙인 직후 구체가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교실을 수놓았다.
다채로운 색상과 모양의 불꽃이 터지며 교실을 가득 메우길 잠시 곧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은 허공에 스러지듯 자취를 감추었다.
라라의 불꽃놀이용 발명품이었나...?
다행히 옷이 불똥에 약간 그슬린것 외엔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품에 안겨있는 코테가와의 상태를 확인하자 코테가와는 양손을 내 가슴에 댄채로 굳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코테가와가 멍하게 입을 열었다.

"아키츠군...지금은...?"

"라라의 폭죽이 터진것 같아.
아마도 여름 축제용으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거였군요. 하, 하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코테가와를 보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기계가 터진 주변은 제법 그슬려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뒷정리가 큰일일것 같네.

"요란한 폭죽이었네요.
그러고보면 얼마 뒤면 여름 축제네요."

"응. 기다려 지는걸?"

"그러게요. 이번엔 무라사메씨와 함께 축제를 보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기대되네요."

하룻밤 사이에 사이가 엄청 좋아졌나보구나 너희들.

"그러고보면 코테가와의 축제때 머리 모양도 예뻤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해 올꺼야?"

"...목덜미 드러낸게 그렇게 좋아요?"

"아,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단 평소랑 달라서 신선한 느낌이잖아?
물론 아까 말한것처럼 평소의 머리모양도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궁색한 내 변명에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외면하던 코테가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볼께요.
...그나저나 아키츠군?"

"응?"



"...언제까지 안고 있을 셈인가요?"

"......"

폭죽에서 코테가와를 보호하던 자세를 풀지 않고 있는 나.
그러니까 여전히 몸을 숙여 코테가와를 껴안고 있는 상황이다.
품에 안긴채 날 올려다보는 코테가와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껴안은 부위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그만 상황 도피를 하고 있었나보다.
대답을 기다리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앗, 그러니까...깜짝 놀란 나머지 팔이 굳어서 안 풀려서 말이지..."

"......"

"...라고 말하면 믿어줄지도, 라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안된다.
조용히 응시해오는 코테가와의 태도가 소리없는 압박이 된다.

"고, 고의는 아니었달까, 부드럽고 따뜻한게 기분이 좋아서 푸는걸 잊고 있었달까.
그... 조, 조금은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지도...라고 생각했다든가... 아, 아하하..."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코테가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살며시 왼손 검지로 내 입술을 눌렀다. 

 



 

"감점"


입가에 호선을 그린 코테가와의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그럼 수업도 끝났겠다, 노래방으로 GO~!"

"「「「오오~!」」」"
"해방이다~!"
"놀러가자 놀러~!"

풍기강화주간의 마지막 날.
방과후, 리사와 미오의 주도로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해방감에 찬 친구들의 호응에 힘입어 노래방에 가는 일행은 대인원이 되었다.

노래방에선 리토에게 달라붙어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를 부르던 룬이 도중에 재채기를 하며 렌(男)으로 변신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몸이 바뀐 직후 질겁을 하며 리토에게서 떨어진 렌은 룬의 노래인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를 열심히 이어 불렀다.
지켜보던 리사와 미오는 치마를 입은채 열창하는 렌의 모습에 박장 대소를 했고.
그래도 렌이 부르는 룬의 노래도 의외로 어울렸다는게 친구들의 평가였다.
리사와 미오의 듀엣이 끝나고 코테가와랑 시즈가 나란히 마이크를 잡았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라라를 두고 다투는 리토와 렌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풍기도 좋지만 역시 고교시절은 이런 활기넘치는 자유분방함이 제일이지.
라라가 부르는 매지컬 쿄코 오프닝 곡을 들으며 선곡을 위해 노래방 책을 펼쳐들었다.



p.s. 분위기를 띄울만한 곡을 찾다가 리사의 제안으로 리사와 듀엣으로 「Sex Bomb」를 불렀다.
음정에 몰입한 친구들이 웃으며 듣는 가운데, 코테가와의 못마땅한 눈빛이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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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테가와의 특기는 영어시험(2급)

오랜만에 뵙습니다^^;
거의 4개월만이네요(...)
연재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11월에 올린다는 약속도 깨먹었고 참 할말이 없네요...쿨럭쿨럭;;
지지리도 늦은 연재에도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론 좀 틈틈이 써나갈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번 37화 삽화는 터틀러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11월부터 삽화를 보내주셨는데 37화 완성이 올해 말이었다는게 면목이 없네요 쿨럭;
예쁜 삽화들을 워낙 많이 받은지라 글 쓰면서도 이 용량으로 괜찮은건가? 하고 자꾸만 걱정이...( --);
터틀러님 감사합니다. 앞으론 꾸준히 쓸께요m(_ _)m

그럼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새해가 되기 전에 올린다고 후기가 짧으니 양해 바랍니다^^;

p.s.참조 이미지

마지막 삽화 무뎃생본

마지막 삽화 톤첨가본

메리크리스마스(by 터틀러님)

룬의 헤머 어택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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