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년 4월 xx일

동방에서 온 무역선을 털던중 희귀한 보물을 획득했다.
붉은 보석을 푸른 뱀 두마리가 휘감는 디자인의 팬던트였다.
귀족들이 많은 왕국까지 간다면 꽤나 비싸게 받을수 있어 보였다.
팬던트를 보관하고 있던 상자에는 동방의 문자로 보이는 이상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글자가 새겨진 부적이 붙어져 있었지만
밀봉을 뜯고 나자 그림도, 부적도 바스라져 버렸다.
불길하다며 불안해하는 부하들을 달래며 기분나쁜 상자와 부적 조각은 바다로 던져버렸다.」

「1209년 5월 xx일

왕국으로 가는 서부사막을 가로지르다 동굴에서 악마를 만났다.
저번달에 노략질로 획득한 팬던트를 얻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교환조건으로 하찮은 마법 나부랭이와 외모를 가꾸는 잡술따윌 내거는 악마의 무능함에 그 자리에서 도끼로 목을 날려버렸다.」

「1209년 5월 xx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화산지대를 지나던 중, 동굴근처에서 야영을 하다가 깊은 어둠이 느껴지는 동굴의 안쪽에서 연회를 하던 악마의 무리를 만났다.
그 가운데 머리에 뿔이 두개 달린 붉은 피부의 악마가 나를 보더니 유쾌한듯 말을 걸어왔다.
스스로를 마왕 루시폰이라 소개한 악마는 팬던트를 조건으로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뭐랄까, 자신의 딸('그렌다'라고 하는것 같았다)에게 줄 선물로 내가 가진 팬던트를 갖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대함이 느껴지는 육체.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마왕의 모습에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바다의 지배자로서 공포로 군림하게 되었지만, 나이가 들어 점차 노쇠해져가는 나의 육신...
어쩌면, 혹시나 어쩌면, 마왕이라면 나의 소망도 들어줄수 있는게 아닌지?
격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나는 소망을 말했다.

- 인세에 둘도 없을 '극강의 육신'을...

소원과 함께 마왕에게 팬던트를 건넨 직후, 몸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혼미한 가운데 마왕의 웃음섞인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땐 주위엔 연회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마치 모든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주름살이 사라진 내 손바닥과, 북쪽의 오아시스에서 비춰진 젊은 내 얼굴.
여전히 하얀 머리털과 수염의 끝에서 살짝 보이는 검은 털, 그리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힘.

역시 그건 꿈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힘을 얻은 것이다.
그것도 젊어진 몸으로...」

「1209년 6월 xx일

부하들을 데리고 상선들이 지나는 해상경로를 배회하던중
날이 갈수록 파도가 심해지고 먹구름이 짙게 깔린 가운데 안개에 휩싸인 지대로 잘못 들어서 버렸다.
며칠째 바다위를 정처없이 헤메면서 부하들의 사기는 점차 떨어져갔다.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항해사가 심각한 얼굴로 폭풍을 걱정하고 있었다.」

「1209 6월 xx일

폭풍이 시작되었다.
악마와 거래한 대가인가...
이상한 주술이 새겨졌던 상자도 지금에 와선 저주의 의미로 밖엔 생각되지 않았다.
신이여, 부디 우릴 구원하소서...」




"...그래서 이 꼴인건가..."

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항해일지인지 일기인지 모를 종이뭉치를 읽어나가다 어쩔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보아하니 폭풍을 만나서 배도 박살나고 선원들은 모조리 물고기밥이 되어버린듯 했다.
지금 이몸 꼴을 보아하니 완전 죽다 살았구만...

바닷물에 반쯤 잠긴 상태에서 깨어난 뒤 어떻게든 육지로 올라와서 몸을 말리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모은 정보는 그렇게 많진 않았다.
현재 위치는 왕국의 남부 폭포지대의 가장 끝자락에 해당한다는 정보.
그리고 종이뭉치를 읽고 겨우겨우 떠올린 기억들 뿐이었다.

푸른 뱀이 붉은 보석을 감싼 팬던트, 마왕 루시폰.
기억속에서 쓰던 거대한 도끼, 부하, 해적, 노략질, 항해일지에 쓰여진 M.H.라는 이니셜.

...프린세스 메이커 2의 '머슬 할발'이었냐...

아니, 그러니까 그거잖아?
악마의 팬던트를 달라던 악마의 조건이 맘에 안들어서 썰어버렸더니,
마왕이 거래를 걸어와서 강한 육체를 조건으로 교환했다는거.

근데 그렌다는 또 뭐여?
딸내미 선물?
...꼬마공주 유시냐?
설마 여기 용사의 이름이 건버드(유시의 아버지)는 아니겠지?

악마의 거래라느니 저주라느니 한창 불길한 소리나 적어놨더니만,
결국엔 딸바보 마왕님이 딸 선물 주려고 이 몸에 젊음을 준건가.

새삼스레 지금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넘치는 힘을 주체못하고 근질근질해 하는 육체.
깨진 유리에 비친, 흰머리와 수염에 어울리지 않는 젊고 강인한 얼굴.
...무병장수는 확실할것 같네...가 아니고...

비를 피한답시고 거대한 나무 밑에 서있다가 난데없이 벼락맞고 나무구멍에 빠지는걸로 의식을 잃었는데...
영락없이 죽은줄로 알았건만, 깨어나보니 프린세스 메이커2의 세계.
게다가 '머슬 할발'이라니.(젊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뭔일이래?

주저앉은채로 끄응...하며 앓는 소리를 내보다가
한차례 머리를 긁적이곤 엉덩이를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났다.

주위는 인기척이 드문 자연림.
이대로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고,
지금은 그저 사람들이 있는 왕국으로 가보는게 나을것 같았다.
기억에 남은 남부지대의 지리를 더듬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힘내서 살아가 볼까.
상황에 따라선 9살에 마왕을 잡은 용사가 산다는 기상천외한 세계에서...



난생 처음보는 인어 모습의 괴물(패치 피쉬)이라든가 물고기 머리의 괴인(피쉬맨)이라든가
트롤을 만나서 죽을 고생을 했다.
육체가 아무리 튼튼해봤자 애초에 내가 목숨걸고 하는 투쟁 같은걸 해본적이 있을리 없잖아?
게다가...맨손으로 뭘 어떻게 하라고?!
풍랑에 쓸려갔는지 머슬할발이 즐겨쓰던 도끼도 없는 상황에서 믿을건 오로지 무식한 완력뿐이었다.
적의 공격을 어떻게든 피하고 막으며 상대를 냅다 바닥에 내리꽂아 박살을 내는걸로 대부분의 상대를 처치했다.

다만...적의 공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맞는 횟수가 워낙 많다 보니까,
안그래도 후줄근한 옷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그나마 아랫도리의 옷은 훼손이 덜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고마워, 망할 자식들아.

덕분에 왕국으로 가는 길의 검문소에서 마주친 왕국 경비대에겐 거지로 착각당하기까지 했다.
그후, 검문을 위해 신분증을 요구하는 왕국 경비병에게 풍랑을 만난 사실을 이야기 하며 선처를 구하는 과정에서 좀 해프닝이 있었다.

"...그럼 해변에서 왕국까지 맨몸으로 폭포지대를 지나왔단 말인가?"

질린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경비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싸움방식은 막싸움 수준이었지만, 완력이랑 몸의 튼튼함 만큼은 엄청나서 어떻게든 올수 있더라고요.

반쯤 걸레가 되어버린 내 옷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경비병들은 이내 관리에게 부탁해 간단한 신원조회를 했다.
당분간 인상착의와 관련해서 서류들(행방불명, 범죄자 목록 따위)을 훑어보던 관리는
소정의 금액으로 통행증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통행증 발급에 100G요."

...방금전에 내가 표류했다는 얘기 못들은겁니까!?
나 지금 빈털털이라고요.
무기는 커녕 갈아입을 옷도 없는 신세란 말입니다!

"...잡템으로 대신할순 없나요?"


완고한 관리에게 한동안 애걸복걸 하다가, 패치 피쉬를 잡고나서 챙긴 비늘 조각들을 건네 주고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검문소를 나올때, 여관비로 쓰라며 조금씩 돈을 보태주던 경비병들의 친절함에 눈물이 났다.

...몇달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내가 가지고 있던 비늘(칠흑의 비늘)이 상점에서 개당 250G에 거래된다는걸 안것은 여담이다.
뭐, 그렇다 쳐도 그 당시 아쉬운건 나였기 때문에 좋은 경험 했다치고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신원불명자에게 통행증을 발급해준 은혜도 있었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으라차아아아-!"

쩌어억-!

기합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도끼에 아름드리 나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이걸로 오늘 벌목장에서 할 몫은 다 끝난건가?

"수고했네 머슬할발.
처음에 일을 맡길땐 확신을 못했지만, 자넨 천생 도끼질을 할 태생이로군!
나무베는 폼이 많이 엉성하긴 해도, 이렇게나 빨리 일을 끝마치는 걸 보면 자네 도끼질 하난 역시 알아줘야 한다니까."

"아하하..."

도끼질 하는 폼이 엉망이지만, 워낙 힘이 넘쳐서 말입니다.
그나마 10일이 지난 지금은 적당히 그럴싸하게 보일정도로 도끼질을 하게 되었다.
역시 튼튼한 몸이 최고의 재산이지!

"아무튼, 자네 이름을 보면 확실히 도끼질을 잘할것 같긴 해."

"이름요?"

"머슬 할발이라면 무투대회의 우승을 몇번이나 해온 자의 이름이 아닌가.
엄청한 실력의 용병이자 해적두목이라더군.
그래서 처음 자네의 이름을 들었을땐 많이 놀랐었다네."

"그, 그런가요?"

"하지만 듣기로 머슬 할발은 중년은 넘은 나이라고 하던데
세상엔 특이한 동명이인도 있군?"

"핫,핫,핫... 그렇네요."

진짜로 동일인이지만요.

"그나저나...겨우 10일동안이었지만 수고해줬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나무를 벨 수 있었어.
그런데, 정말로 이제 나뭇꾼 일은 그만할건가?"
이런 말 하는것도 그렇지만 자네는 정말 소질이 있어.
평생 나뭇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거라고."

...일생을 나뭇꾼으로 지내고 싶진 않은데요.

"나뭇꾼도 좋지만 저로선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뭐길래 그러나?"

"적어도 머슬 할발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면
그랑 비슷한 업적이라도 이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넨 뛰어난 전사가 꿈인 모양이군?"

"네. 당분간은 용병 생활이라도 하면서 마물들을 소탕해볼까 합니다.
운이 좋다면 수확제때의 무투회에서 활약할수도 있겠죠."

젊어선 모험도 하고 명성도 쌓으면서 재산 빵빵하게 불리고,
나중엔 왕궁 무관같은 안정된 직업을 구해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습니다.
물론 알콩달콩 함께 살 참한 신부도 찾아보고 말이죠.

"아무튼, 수확제까진 3개월도 안남았으니 그전에 경험이라도 쌓아둬야죠."

"그런가... 그럼 힘내도록 하게. 나도 응원하고 있을테니."

이후 같이 일하던 분들과 아쉬움이 담긴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어서오십시오 손님. 제노의 무기점입니다."

"도끼 없나요?"

"나무하시게요?"

"......"

...무기들이 죄다 검이네...

결국 벌목장에서 쓰던 도끼 한자루를 구해서 당분간 쓰기로 했다.
시작부터 엇나가는게 조금 불안하게 느껴진 하루였다.



사람이 살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건 바로 의식주.
나만의 집이 없다보니 여관비로 나가는 돈때문에 소지금 문제로 항상 골치가 아팠다.
소지품이라고는 도끼랑 며칠전 나뭇꾼일을 하면서 벌어들인 소량의 금액.
게다가 그 남은 돈도 며칠뒤면 다 떨어지게 된다.
옷도 옷가게에서 싸게 산 단벌로 버티고 있는데, 이러다가 다시 품팔이를 해야할 처지가 될것 같았다.

"...역시 돈을 버는덴 무사수행이 최고지."

남부폭포지대에서 어떻게든 몬스터와 아웅다웅해서 습득했던 아이템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굳혔다.

우선 무사수행 중 야외에서 잠잘때 쓸 텐트를 사기 위해서 마을 시장에 들렀다.

"우선, 텐트랑 혹시 모르니 쾌유환을 사두는게 좋을까..."

"거기 당신!"

"...응?"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만두머리를 한 차이나 드레스의 소녀가 양손에 부채를 펼쳐 든 채 서있었다.
소녀는 양옆머리에 꽃무늬 장식을 하고 이마에 나비모양 장식을 달고 있었으며, 만두머리를 묶은 끈은 무릎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당연하지만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부른게 아닌가 해서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 있으려니
붉은 차이나 드레스의 소녀는 발끈한 표정으로 한손의 부채를 들어 나를 가리켰다.

"어딜 보는건가요! 여깁니다, 여기!"

"...나말야?"

소녀가 찾는게 내가 맞는지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요! 당신.
여기에 당신말고 누가 또 있다는 거에요?"

"...저기, 미안한데..."

"뭐가 말이죠?"

다른 한손을 옆구리에 대고 인상을 찡그린 소녀에게 사죄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누군지 기억이 안나는데..."

"무슨소린가요?
저도 당신은 처음봅니다."

"엥?"

그럼 길가는 날 불러세운 이유가 뭐야?
딱히 길가다가 저 아가씨랑 부딪히지도 않았잖아?

"그럼, 무슨일이야 꼬마 아가씨?"

"꼬마라뇨!
이래뵈도 14세라고욧!!"

아니, 어떻게 봐도 미성년자잖아?
중학생 뻘이라고?

"그리고 당신한테 꼬마란 소리 들을 이유 없어요!
당신도 끽해봐야 20살 남짓으로 보이잖아요?
그리고 그 이상하게 기른 수염 좀 다듬어요. 지저분해 보이니까."

"......"

초면의 상대에게 정말이지 심한 소리다...

한동안 나를 노려다보며 씩씩 거리던 만두머리 소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후우...이게 아니지...
이러려고 말을 건게 아닌데.
당신이 이상한 소릴 하니까 원래 목적을 잊을뻔 했잖아요?"

"에, 그러니까...미안합니다?"

"어째서 의문형?
...아무튼, 좋아요.
보아하니 무술가로 보이는데 저랑 한번 겨뤄보지 않겠나요?"

"엥?"

겨뤄?

"내가?"

"네."

"...너하고?"

"그렇죠."

"......뭘 한다고?"

"아까부터 당연한걸 왜 자꾸 물어봐요?
결투 하잔 말이에요!"

신경질을 내며, 팍- 소리가 날정도로 부채를 접어 나를 가리키며 외치는 만두머리 소녀.
...그러니까 지금 난 길거리에서 도전받은 상황인거냐.
젠장, 모험의 시작을 하기도 전에 이게 왠 날벼락이야?

어느새 주위엔 사람들이 구경하러 원을 형성해 몰려들어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들이 지금부터 있을 결투를 기대하는것 같았다.
큰일났네...
14살 밖에 안먹은 여자애 상대로 싸움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꼴사나운 짓거리 밖에 안될것 같다.
이겨도 소녀를 때린 폭한, 혹시나 져도 계집애보다 못한 놈이란 평가가 따를것 같아 무섭다.
그냥 적당히 속여 넘기자.

"사람 잘못 봤어. 난 무술가 같은게 아니거든."

내말이 끝나자 마자 만두머리 소녀는 코웃음을 치며 부채로 입을 가리며 날 노려봤다.

"시치미 떼지 마시죠.
방금 텐트랑 쾌유환 사러 간다고 하는것 다 들었습니다.
무사수행을 떠나는 사람이 무술가가 아니면 뭐라는거죠?"

이런, 방금전 중얼거린걸 들었던건가?
하지만 이런걸로 포기할 순 없지.

"어쨌든...이만 포기하시죠.
제 이름은 '타오 란팡'.
당신에게 결투를 신청「저기...나 도끼도 여관에 두고 왔는데...」..."

빠직...

응?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란팡이 손에 들고있던 부채가 뚝-소리를 내며 두동강이 나버렸다.

...어머나?

박살이 나버린 부채를 손에 쥐고 부들부들 떨던 란팡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 들었다.

"아, 진짜...!
사내가 이것저것 하나하나 소심하게 굴지 말란 말예욧-!"

"으갸갹!?"

파라락-!

부서진 부채를 내 얼굴을 향해 던지며 란팡은 몸을 낮춰 다리를 쓸듯 나를 공격해왔다.

"자, 잠깐? 난 아직 내 이름도 안말했다고?!"

통성명도 없이 덤벼들기냐?!

"당신의 이름따위 궁금하지도 않아욧-!"

이거...아무래도 진짜 화가 머리끝까지 난것 같은데?
푸른 빛의 눈동자와 반대로 붉게 달아오른 뺨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듯 했다.

"하앗!"

"으앗?!"

공중에서 날아들며 궤도를 바꾸는 부채를 피하랴,
권법으로 덤벼드는 란팡을 피하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결투전에 다른 부채 하나가 박살이 나버려서 부채 하나만 상대해도 된다는걸까.
뭔가 분한듯한 란팡의 표정을 보면, 원래라면 좀더 복잡했을 공격이 부채 하나를 잃음으로써 훨씬 단조로워진듯 했다.

바락바락 공격하다가 날아가던 부채를 잡아채 휘두른 란팡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치잇...! 겁쟁이처럼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꺼에요?"

"그렇게 말해도...어라?"

뭔가 가슴께가 허전해서 슬쩍 아래를 내려다 보곤 경악했다.
날아오던 부채의 공격이 스쳤는지 어느새 길게 찢어진 흔적들이 수없이 나있어 엉망이 된 내 상의...

아...아아아아아---?!
내, 내 단벌옷이 찢어졌다아아?!
평상복으론 무술가들이 날리는 부채공격을 도저히 버틸수 없는것 같았다.
이, 이래서 갑옷이 필요한건가...!

텐트랑 쾌유환 사고 나면 평상복 살 돈도 없어진단 말이다!
울분에 차서 란팡을 노려보자 란팡은 주춤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에요?"

"...피하기만 한다고 그랬지?"

"...하, 이제 제대로 싸워볼 생각이 든건가요?"

정신을 차리곤 전의를 다지는 란팡을 보며 양주먹을 불끈쥐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후회하게 해주마!"

"그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껴안아 주겠어!"

"에엑?"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란팡을 무시하곤, 양팔을 벌리고 전력으로 란팡을 덮쳐갔다.

"으라아아아아!"

"꺄아악-?!"

기겁해서 옆으로 피하면서 바로 공격태세로 들어가려는 란팡.
하지만, 상정범위 안이다!
내가 노렸던건 바로 이거다!

무릎까지 흘러내리는 만두머리를 묶은 끈...!

"잡았다!"

"에? 꺅!"

불균형한 자세에서 강하게 끈을 잡힌 란팡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끌려와 바닥에 넘어졌다.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는 꼬맹이들처럼 유치하지만 상관없어!
더이상 옷이 상하기 전에 빨리 끝내는게 최선이다!

일어나려던 란팡을 위에서 덮을듯이 짓눌렀다.
양손으로는 란팡의 양팔을, 양 다리로는 란팡의 다리를 속박한채 바닥에 밀어붙였다.

"으읏...?!"

고정시키던 끈이 당겨져 한쪽 머리가 풀어 헤쳐진 란팡은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전투기술이라면 모르겠지만 완력으로 비교하자면 애초에 자릿수 자체가 다르다고.
바닥에 쓰러진 란팡을 보며, 무술가를 상대해 거운 첫 승리에 나도 모르게 유열에 찬 미소가 지어졌다.

"후, 후후후...드디어 잡았다..."

"뭐, 뭐에요?"

안색이 조금 변한 란팡이 나를 바라보며 아직 지지 않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럼 이제 옷에 대한 대가를 받아볼까...

"자, 이 대가를 어떻게 치뤄 줄꺼지...?"

"무슨...?"

"모르나? 아, 과연...모르겠지.
아직 어린애에게 이해하긴 무리인가?"

내가 찢어놓은 이 옷을 사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노동의 신성함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이해할 순 없지.

변상금을 톡톡히 뜯어내려는 마음이 듬뿍담긴 심상치 않은 내 목소리에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관객들.

「서, 설마 이런 대낮에 마을 한복판에서?」
「그런 대담한...! 용자...아, 아니. 범죄자다!」
「저 소녀, 불쌍하게도...어쩌다 저런 음흉한 사내에게 싸움을...」

과연 한복판에서 소녀를 협박하는건 대담하긴 하지...
그래도 시비는 저쪽이 먼저 걸었다고?

관객들의 말을 듣던 란팡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시, 싫어...!"

눈가에 눈물마저 맺힌채로, 란팡은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이미 잡혀버린 이상은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그러네...

"후후...발버둥쳐봤자...「퍽-!」...!"

순간, 필사적으로 바둥거리던 란팡의 무릎이 내 중앙을 직격했다.

"크어억?!"

"에?"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이 전해져 오는 순간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선
바닥을 뒹굴거리며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

뭐, 뭐가 극강의 육신이고 최강이야?
남성의 숙명적인 약점은 그대로잖아?!
정신이 나갈것 같은 괴로움에 몸을 웅크리고 한동안 끙끙대고 있으려니
바닥에 쓰러져 있던 란팡이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대로 다가와 조심스레 나를 쳐다봤다.

"저기...괘, 괜찮아요?
이봐요...?"

괜찮을것 같습니까 이 아가씨야...
걱정해주는건 고마운데, 이럴거였으면 처음부터 시비를 안걸었으면 좋았을꺼야...
무투가가 날린 니킥의 데미지는 아직까지 가라앉을줄 몰랐다.

웅크리고 있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죽을상을 하고 있는 사내들의 얼굴도 보기 싫고,
얼굴을 붉히며 어머어머를 연발하는 여인네들의 시선도 쪽팔린다.
어서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아까부터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민 손을 꼼지락대는 란팡의 얼굴을 보았다.

"여, 여어...꼬마 아가씨."

"네?"

"네...네 승리다."

"지금 그런걸 따지고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괜찮은거에요?"

"그, 그러니까 여관까지만 좀 부축해줘..."

"에?"

역전승을 한 란팡에게 승자의 관대함을 부탁하는 나였다.
어리둥절하던 란팡이었지만 결국엔 어찌어찌 나를 일으켜 여관까지 데려다 주었다.



질질 끌리듯 어린 소녀에게 반쯤 업혀져 오는 나를 본 여관 주인이 히죽 웃음지었다.
뭡니까 그 웃음은?

"여어~ 꼴사나운 모습이구먼. 그쪽 아가씨에게 작업 걸다가 얻어맞기라도 한거야?"

"...피해자는 제쪽입니다만..."

"그러니까 미안하다니까요...!"

얼굴을 창백히 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나와
불평하면서도 부축해주는 란팡을 번갈아 보던 여관 주인은 낄낄대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부축해주었다.

"그럼 이젠 내가 돌보도록 하지.
아가씬 이만 돌아가봐도 좋아."

"저기...괜찮을까요?"

"괜찮아 괜찮아~ 이녀석 몸하나 튼튼한건 벌목장 주인에서 충분히 들었으니까.
잠시 누워있다보면 회복하겠지."

"그럼, 이만 가볼께요.
...아, 그전에."

꾸벅-하고 인사를 한뒤 여관을 떠나려던 란팡은 다시 뒤를 돌아서 나를 보았다.

"거기 당신."

"끄응...나말야?"

되물어본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란팡은 말을 이었다.

"그러고보면 통성명을 안했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머슬 할발."

"...이상한 이름이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니 할말은 없다.

"뭐라고 불러야 하죠? 머슬? 아니면 할발?"

"그냥 합쳐서 '머슬 할발'이라고 불러.
나도 그게 듣기 편해."

"머슬 할발..."

중얼거리며 내 이름을 되뇌던 란팡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마주했다.

"그럼, 머슬 할발.
오늘 일은 미안했어요.
화가 났다지만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였군요."

깊게 몸을 낮추며 사과하는 모습에
괜히 민망해져서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뭐...
나도 좀 추태를 보인것 같아 미안해.
그리고 아까전 일은 신경쓰지마.
고의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다음번엔 제대로 시합해보도록 해요."

"...또?"

"물론이죠.
당신은 도끼가 없었고,
나도 내 무기인 부채 한자루가 모자라 전력이 아니었으니까요.
다음번엔 저의 진심을 보여드리도록 하죠."

팩- 소리를 내며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린 상태로 나를 보던 란팡은
이번에야 말로 몸을 돌려 경쾌한 발걸음으로 여관을 나섰다.

머리를 묶은 끈이 경쾌한 발걸음에 맞춰 허공에서 춤추는걸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방금전 말을 상기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좀 봐주세요..."

제대로된 전투법도 숙지하지 못한 내가 도끼를 들고 대인전을 치렀다가는
손한번 못뻗고 일방적으로 패배하거나,
헛나간 도끼질에 팔자에도 없는 도끼살인마가 될지도 모른다고.
들어야 할 사람도 없는 가운데 허무한 메아리만이 여관을 울렸다.

모험을 계획한 첫날부터 꼬여버린 일정에 답답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낭만과 열정에 부푼 첫 모험...과연 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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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써보고 싶나?"
"러브 코미디요."
"...그 다음은?"
"착각물이요."
"그리고?"
"안야한거요."
"흐음...그럼, 커플링은 어떤걸 좋아하나?"
"1대 1로 맺어지는거요."
"...자네..."
"네?"
"코가 길어졌네."
"......(슬그머니 코를 가린다.)"



트러블 쓰다가 막힐때 쓸듯합니다.=ㅅ=a
퀄리티는...글쎄요...-_-;
원래는 시간을 많이 스킵할 때마다 <1209년 x월 어느장소> 이렇게 표기하려고 했었는데
일창게에서 그렇게 쓰긴 이상할것 같아서 생략해놨더니 좀 이상한...-_-;;

참고로 꼬마공주 유시는 노래는 정말 좋아하지만
애니메이션 모든 편을 시청한게 아니라서, '그렌다'는 그냥 까메오입니다.



인물 목록 (1210 기준 연령)

[등장인물 이미지]

(이미지 출처 bidong.namoweb.net/bidong/pm25.html)

프랑소아 모레 (18) - 화려지만 오만한 귀족 아가씨. 갈색 웨이브 머리. 흰 드레스에 붉은 망토.
타오 란팡 (15) - 부채를 든 중화풍 소녀. 만두머리
카테나 테라 (?) - 일본도를 휘두르는 여검사.
나타샤 드리프시코 (19) - 가시곤봉을 휘두르는 비키니 차림의 여전사. 금발 벽안.
죠니프 더 퀸 (16) - 채찍을 휘두르는 노출도 높은 복장의 여자. 금발. 붉은 색상의 속옷에 가까운 차림.

아니타 카산드라 (10) - 딸의 전사 라이벌. 갈색 웨이브 장발. 입술의 오른쪽 아래에 애교점. 자만심. 무기점 알바.
웬디 라키시스 (10) - 딸의 마법 라이벌. 자칭 마☆법★소☆녀★! 잡화점 알바.
페트레시아 한 (10) - 딸의 사교 라이벌. 금발 벽안. 연보라 리본. 거만함. 부잣집.
마르시아 쉐어웨어 (10) - 딸의 가사 라이벌. 푸른 웨이브. 착하다. 마을에서 가장 예절바른 소녀. 레스토랑 알바.

쥴리에트 (22) - 댄스대회에 등장. 중동지역차림. 리본춤을 춘다.
피올리나 (23) - 댄스대회. 회색에 가까운 갈색 웨이브. 족두리 같은걸 쓰고 있으며 하얀 상의에 푸른 치마.
아니스 (20) - 댄스대회. 인도지역차림. 옅은 갈색 피부. 이마에 붉은 튤립 문양을 그렸다.
도베 (24) - 댄스대회. 무용교실의 춤선생님. 은발.

리이 수녀님 (?) - 성당의 수녀님.

발큐리아 (?) - 전쟁을 관장하는 여신.
대마법사 훼이 (?) - 유쾌한 금발 대마법사.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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