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후 나나와 모모에게 아이스크림을 헌납했다.
여름이기도 하고, 나나에게 사과하는 의미를 담아서.
저녁 설거지를 마친 뒤엔 게임 삼매경에 빠진 나나와 모모를 두고 밤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난데없는 가십에 휩쓸려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하루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생각하는걸 잊어버렸고.
산책하면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봐야겠다.
...최근엔 하루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구나.
마트에서의 하루나가 보여준 미심쩍은 반응이 영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그러고보면 하루나는 더이상 스토커에 시달리진 않는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길 모퉁이를 돌려던 차였다.
"아..."
"어?"
모퉁이에서 마주친 하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이렌지?"
"아, 아키츠군?"
또 저런 반응이야...
매번 만날 때마다 이렇게 놀라면 나도 대응하기 곤란하다구.
당황하던 하루나는 이내 표정을 추스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아키츠군..."
"안녕 사이렌지~ 산책 하는 중이야?"
"아니, 편의점에 다녀오던 중이었어."
편의점? 그런것 치곤 빈손으로 보이는데?
"아, 혹시 편의점 택배 부치고 온거야?"
"응. 아빠가 부탁한 물건이 있어서 급하게 보내느라..."
하루나는 부모님과는 따로 살고 있다고 했었지.
여름이라 낮이 길었지만, 슬슬 주변에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방금전 스토커 문제를 떠올린 탓에 이대로 하루나와 헤어지는건 껄끄러울 것 같다.
"그럼 만난김에 집까지 바래다 줄께."
"엣? 괘, 괜찮아! 그럴것 까진 없어!"
"사이렌지."
"네, 넷!?"
당황해선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는 하루나의 태도에 조금 눈썹을 세우곤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하루나를 빤히 응시하며 주장을 관철했다.
"스토커에게 시달린게 엊그제인데 괜한 고집 부리지 마."
"으, 으응..."
"별로 이상한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건 아니니까."
"엣...아, 아냐! 그런식으로 의심하진 않았어!"
"그럼 집까진 같이 돌아가는거다?"
"...응."
...무리한 강행이었으려나.
그래도 혼자 귀가시키고 걱정하는것 보단 나아.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나를 데리고 조금은 서먹한 기분으로 하루나의 집을 향했다.
"마론은 건강히 지내고 있어?
저번에 나나랑 둘이서 개천에 빠졌다던데."
"딱히 평소랑 다른 모습은 없었어.
언제나 기운이 넘쳐나서 곤란할 정도야."
"다행이네. 혹시나 몸이 아파서 산책을 나오지 못하는게 아닌가 걱정했거든."
"후후, 걱정해줘서 고마워."
"참! 마론은 펫푸드만 먹여? 왜, 저번에 마트에서 펫푸드 코너에 있었잖아."
"응. 사람이 먹는 음식은 마론의 건강에 안 좋으니까 가능하면 다른 음식은 피하고 있어.
가끔씩 밥먹는 중에 다리에 매달려서 칭얼댈땐 곤란하지만 개껌으로 달래고 있달까."
"큭, 그 녀석도 참 응석받이구나?"
"그, 그럴까나?"
"뭐, 나나의 동물 친구들도 응석이 심한 편이지만.
씻는게 싫어서 나나에게서 도망치는 강아지들도 있었고."
"나나는 지구 동물과도 친해진거야?"
"응. 동네를 떠돌던 강아지 몇마리를 사이버 사파리에 초대해서 지내고 있어.
혹여나 동네를 배회하는 동물들이 보이면 자기한테 데려와 달래.
동물들이랑 얘기해보고 사이버 사파리에 살게 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겠다더라구."
"착한 아이네 나나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아..."
"왜, 왜 그래 아키츠군?"
"아니. 그냥...나나랑 있었던 일 때문에 코테가와에게 혼난게 떠올라서."
"아...오늘 풍기위원실에 불려갔었지?"
"응. 오해를 풀긴 했는데, 오해 받을 일을 하지 말라고 혼났어.
정말이지, 동물책 읽고 싶다길래 나나를 데려온거였는데 어째서 그렇게 된거람..."
"아하하...고생이었네.
풍기위원실에서 꽤나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이고."
"...따지고보면 사이렌지 탓도 있지만."
"어!? 나, 나말야!?"
난데없이 화살을 향해져서 깜짝 놀란 하루나를 뚱하니 쳐다봤다.
"어제 점심시간에 사이렌지가 도망쳐버린 탓에 그걸로 교실에 남은 내가 온갖 의혹을 받아내야 했으니까.
불을 붙였던 모미오카랑 사와다가 뒤늦게 수습해줬긴 했지만, 의심스런 시선을 완전히 해소하진 못했고.
나중에 가선 동물을 좋아하는 연하 소녀가 취향이라는 소문으로 변질되기까지 했다구.
...덕분에 풍기위원실에서 나나의 일에 더해서 그 일로도 설교를 받느라 시간이 두배는 더 걸려버렸어."
"엣, 그, 그래...?"
쩔쩔매는 하루나의 모습에 머리에 손깍지를 한채 피식 웃었다.
"그렇다니까. 아아~ 그때 사이렌지가 유연하게 농담을 받아넘겨 줬더라면 좋았을텐데~ 하구 설교 듣는 동안 조금 원망했었다구~"
"그, 그건 아키츠군이...!"
"응? 내가?"
"아, 아니. 아무것도..."
"......"
얼버무리며 입을 다문 하루나의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어떻게든 대화를 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잘 풀어나가나 싶었는데 또다시 이거야.
방금전 상황에서 하루나가 조금만 더 강단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꼬였던 문제의 원인을 들을 수도 있었을텐데.
내 한숨에 움찔하는 하루나의 반응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그냥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말야, 사이렌지."
"으, 으응?"
당황한채 날 보는 하루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사이렌지를 알게된지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지만, 그동안 꽤나 많은 일들을 함께 겪어 왔다고 생각해.
일상을 보내거나 이상한 해프닝에 휘말리거나 하면서, 다른 친구들 만큼이나 사이렌지와도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쌓아왔다고 믿고 있었어.
그런데 혹시 그건 내 자만이었던거야?"
"아, 아냐 그렇지 않아.
아키츠군과는...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최근들어 날 피하는 건 어째서야?"
"그건..."
"혹시라도 내가 사이렌지 널 난처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면 말해줘.
오해가 있었다면 해명할테고, 내게 문제가 있다면 고치도록 노력할테니까."
자, 이렇게까지 까놓고 말했으니까,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해 달라구.
만약 정말로 유우사키랑 내가 대화했던 내용이 문제라면 거기에 대해선 해명해 줄테니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 번은 없어?
속에서 잔뜩 올라간 기세와는 반대로 묵묵히 하루나를 응시했다.
입가에 오른손을 가져간채 시선을 방황하던 사이렌지가 입술을 지긋이 다물었다.
천천히 하루나의 입이 열렸다.
"저, 아키츠군..."
"응."
"...그땐 어째서..."
바스락-
"!?"
부스럭거리는 수풀소리에 화들짝 놀란 하루나가 말을 멈췄다.
들짐승이었는지 곧 수풀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소리와 함께 이내 수풀은 잠잠해졌다.
사소한 사건이 끝나고 이야기의 다음을 바라며 하루나를 쳐다보자, 갑자기 하루나가 상체를 직각으로 숙였다.
"사이렌지?"
"미, 미안...!
나...그만 갈께!"
야 이 한심아아아아!?
그렇게 뒷걸음질만 치니까 리토랑 엇갈리는거잖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몸을 돌려 도망치듯 뛰어가는 하루나의 뒷모습에 속으로 절규하며 불렀다.
"사이렌지!"
"미안해~~~!"
"아니, 앞을,"
빠아악!
"뀹~!?" "크옷!?"
"...조심 하라고..."
도망치다가 마주오던 남성에게 전력 박치기를 물려버린 사이렌지의 모습에 뒤늦은 안타까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더불어 난데없는 횡액을 당한 운나쁜 남성에게도.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 하루나가 남자에게 사과했다.
"아, 아야야...죄, 죄송합니「Grrrr...」다...?"
부딪힌 부위가 움푹 패인 찌그러진 얼굴로 기괴한 소리를 내는 남자에게 말이다.
하루나에게 시선을 내린 남자의 정수리가 네개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괘-엔-찮-아-Grrrr?"
"......"
꼬르륵...
"사이렌지이이!?"
기절해버린 하루나를 황급히 안아들었다.
아, 정말~! 난데없이 이게 왠 일이야.
품에 안긴 하루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 남자를 쳐다봤다.
정수리에서 네개로 갈라진 입을 웅얼거리며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네개의 주둥이로 갈라진 정수리 중앙에는 또하나의 이빨 무리가 둥글게 모여 있었다.
"미, 미-안-하-네-Ghoo-"
"아저씬 우주인이신가요?"
"그래. Koho..."
당황해하며 무너진 얼굴을 다듬어서 원래대로 변형시킨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나도 우주인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걸 알린 뒤론 대화는 수월하게 풀렸다.
남자는 미카도 선생님의 진료실에 다녀오던 중이었다고 한다.
방금은 지구인 변장 슈트가 충격에 찌그러진 탓에 벌어진 실수였고.
다행히 슈트의 손상은 경미해서 남자에겐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그나저나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아가씬 괜찮은가?"
"괜찮아요. 그리고 사이렌지가 갑자기 뛴 탓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런데 얼굴이 드러난것 치곤 침착하신데 이런 일이 자주 있었나봐요?"
"뭘, 그야 자네도 우주인이잖은가?"
"어."
"자네 수염성인이지?
사이난 유원지의 귀신의 집 소재로도 쓰이기도 했잖나. 거기서 일하는 우주인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길 들은 것도 있고.
뭐, 자네처럼 대놓고 우주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우주인은 드문데 말야."
"아, 아하하..."
...그 수염성인 소문 진짜로 믿는거구나.
우주는 넓으니 수염성인이 진짜로 있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종족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변신슈트를 고쳐입은 남자를 보내고 기절한 하루나를 돌봤다.
근처 벤치에 하루나를 뉘였다.
보통은 머리를 무릎베개 해주는게 맞겠지만...
하루나의 머리를 벤치에 놓고 두 다리를 들어 내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모양새가 안난다는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거 응급처치니까.
다만 짧은 치마 아래로 맨다리를 드러낸 하루나의 모양새가 정신 건강엔 좋지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지나가다 하루나의 다리로 힐끗힐끗 시선을 주는 남자들도 몇몇 있었고.
근처를 기웃거리려는 남자들 몇을 쏘아봐 쫓아내고선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우선 손수건으로 하루나의 다리 사이를 가려줄까 생각해봤는데, 어제 나나에게 눈물 닦으랍시고 손수건을 건네줘서 지금은 손수건을 갖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이대로 하루나가 야외에서 원치않게 음흉한 시선을 받는건 싫었기에, 차라리 하루나를 들어안고 하루나네 집까지 가기로 했다.
등에 업는거? 기절한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하니까 업는건 위험해.
딩동-
"네. 누구세요?"
"아키츠입니다. 사이렌지를 데려왔어요."
"아키츠군?"
벌컥-
한걸음 뒤로 물러서 있자 문이 열리며 아키호씨가 나왔다.
정신을 잃은채 내 품에 안겨있는 하루나를 보고 놀라는 아키호씨와 함께 하루나를 방으로 들였다.
침대에 하루나를 눕혀 아키호씨가 하루나를 돌보는걸 보곤 몸을 일으켰다.
숨소리도 고르고 불편해보이는 낌새도 없으니 내가 간호를 돕거나 할 것 까진 없겠지.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기다리렴."
"예?"
"우리 하루나를 데려다 줬는데 그냥 보내면 내가 미안하잖아.
적어도 음료라도 한잔 마시고 가."
"그러시다면..."
"좋아~! 그럼 난 우선 하루나 상태를 살피고 나갈테니까, 잠시만 마루에서 기다려줘."
아키호씨의 말에 수긍하고 거실로 나왔다.
화장실을 쓰고 나와 거실에 앉아 둘러보니, 하루나의 방문이 닫혀 있었다.
아마도 외출복 차림으로 뉘인 하루나의 옷이라도 갈아입히는가보다.
거실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며 기다리자, 잠시 후 하루나의 방문이 열리고 아키호씨가 나왔다.
조용히 하루나의 방문을 도로 닫아주곤, 아키호씨는 주방에서 음료를 챙겨 거실의 테이블로 옮겼다.
아키호씨가 건넨 음료를 마시며 짧막히 담소를 나눴다.
아키호씨의 말로는 하루나의 용태엔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그건 정말로 다행인데...안도하는 내 얼굴을 보며 싱글싱글 웃는 아키호씨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키츠군 너도 알다시피 우리 하루나가 좀 숙맥이잖니.
그래서 언니로서 대신 너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줬는데 말이지~"
저에 대해서 나나에게 물었던게 그런 의도였습니까?
"그래서 우리 하루나랑 진전은 있었어?"
"...사이렌지와 저는 그런 관계는 아닌데요.
무엇보다 최근엔 사이렌지 쪽에서 절 피하는 눈치였고..."
"으응~ 그래?
그러고보면 최근 하루나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으려나?
그래도 저번에 왔을땐 분위기 좋았잖아?"
"그때 일은 오해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하하 그랬던가? 그럼 둘 사이에서 무슨 일 있었던거야?
난데없이 하루나가 기절해서 집에 돌아오다니 언니로선 정말 걱정이라구.
우리 하루나랑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 언니는 자세히 캐묻고 싶은데 말야."
"좀 봐주세요..."
하루나의 언니로서 걱정된다는 이유를 내세우면 약하게 나갈 수 밖에 없다구요.
"추측할 뿐이지만, 사이렌지가 절 피하고 있는건 아마 얼마전에 있었던 일 때문일거에요."
"호오? 어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건 피하고 있던 유우사키와의 일을 짧막하게 이야기했다.
하루나와 유우사키 둘 중 누굴 이성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하루나라고 답했고, 그걸 때마침 지나가던 하루나가 들어버린 것을.
이야길 들은 아키호씨는 어머어머~ 하며 입을 가리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여자애 눈앞에서 다른 여자를 선택하다니, 섬세하지 못했네."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용서하지도 납득하지도 않을거라고 했는걸요."
"헤에...솔직한 대답이라?"
아키호씨가 눈을 가늘게 뜨곤 싱긋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아키호씨?"
"후후, 정말로 그래?"
"뭐가요?"
"정말 솔직한 맘으로 하루나를 선택했어?"
"네. 그렇지만요..."
"흐응? 그럼 이건 어때?"
아키호씨가 내 팔을 잡곤 몸을 기댔다.
꾸욱-하고 가슴이 팔에 짓눌리는 감촉에 몸을 움찔 떨었다.
내 반응을 즐기며 아키호씨가 싱글싱글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랑 하루나, 둘 중 어느 쪽이 매력적이야?
대답이 마음에 든다면 데이트 정도는 생각해봐줄 수도 있는데."
아키호씨의 말에 살며시 미간을 매만졌다.
어째서 여기서 또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선택 밖에 주어지지 않는거야?
"...사이렌지가 더 매력적이에요."
"어라라?"
고개를 갸웃하곤 아키호씨가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히익!?"
"혹시 내가 매력이 없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도 갑자기 그런 공격은 어떨까 합니다만!?"
"그럼 우리 하루나를 선택한 이유를 물어도 될까?"
"아키호씨는 지금으로선 그다지 연애에 신경쓰고 있진 않은것 같아서요."
기억하기론 아키호씨는 구애해오는 남성들을 태연히 거절하는 커리어 우먼이었던걸로 아니까.
뭐, 구애해온 남자들에게 매력이 없었던 탓일수도 있지만.
"응? 그렇게 보이니?"
"감(感)일 뿐이니까 장담은 못하지만, 적어도 전 사이렌지가 이성으로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후후, 그렇구나. 그럼 만약 우리 하루나랑 사귈수 있다고 한다면 어때?"
"엣?"
"...풋! 뭐니? 매번 하루나를 선택했으면서 그런건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은?"
눈을 동그랗게 뜬 내 모습이 웃겼을까.
아키호씨가 웃음을 터뜨리며 팔짱을 풀고 물러났다.
"...사이렌지랑 사귄다니, 생각해본적도 없어서."
"...뭐니 그건? 혹시 우리 하루나로는 성에 안찬다는 말?
그런 말까지 내뱉어 놓고서도?"
"아, 아니 그게..."
인상을 찌푸리는 아키호씨의 반응에 당황해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선 하루나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 하지 않으면서도, 아키호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만한 대응을 보여야 할 때다.
...뭐, 이 정도면 굳이 대답이 궁색할 것도 없고.
"사이렌지는 매력적인 소녀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이렌지와의 사이가 서먹한 마당에 그런식으로 대할 수 있을리 없잖아요."
"그렇게 하나하나 하루나의 반응만 살피다간 언제까지고 진척이 없을거야.
우리 하루나는 숙맥이니까, 좀 강하게 팍! 하고 나가줘야 한다구."
"그건 사양할께요."
"에에~ 어째서?"
"사이렌지는 최근 스토커에게 시달렸잖아요."
"...그랬지. 그때 아키츠군이 하루나를 도와준건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 아뇨. 별로 감사를 바랄 일까진 아니니까요."
"그런데 스토커 사건이 왜?"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은 상대를 괴롭게 할 뿐이라는 걸 봤으니까요.
스토커 탓에 두려워하는 사이렌지의 모습을 봤어요.
상대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의 의사를 존중한 뒤에 나와야 하는거잖아요.
저는, 사이렌지가 다시 그런 괴로움을 겪지 않길 바라고 있어요.
거기다..."
"거기다?"
"...뭐, 아키호씨도 아시다시피 전 그다지 좋은 소문이 돌진 않잖아요?
이상한 뜬소문이 잔뜩 나도는 저랑 얽히는건 사이렌지에겐 폐일테고.
그러니까 사이렌지를 배려해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을 사이렌지가 만났으면 좋겠어요."
"소문이라...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이야 지난 몇년간 알음알음 퍼질 정도였으니까.
왠 중학생 꼬맹이 하나가 말도 안되는 소문을 주렁주렁 달고서 온 동네를 떠들석하게 만들 줄 누가 알았겠어?"
"아하하..."
"하지만 소문은 결국 소문일 뿐이지?"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 리 없는 법이죠."
"설령 사실이 있다손 쳐도, 나는 소문보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걸 믿어."
"......"
"거기다 우리 하루나가 그런 소문을 신경써서 너를 기피할거라고 생각하는거라면 대실망인걸?"
"쿡...저도 알아요.
사이렌지는 그런 아이가 아니란건."
"흐응? 정말일까나?"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내는 아키호씨에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초여름에, 친구들에게 헌팅하는 녀석들을 쫓아내던 와중에 바람둥이라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게 아니라고, 착각한거라고 필사적으로 친구들에게 해명했었죠.
지리멸렬하고 두서없는 말을 내뱉고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절 사이렌지는 믿어주었죠."
- 역시,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건 아니니까.
아키츠군이 그렇게 경박하게 보이진 않았어.
"그때...정말로 기뻤어요."
"......"
"친구들과 만날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다고...
사이렌지를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음 상냥한 친구들 덕분에 치유되는 기분을 만끽했던 하루였지.
그때의 헌팅남들 탓에 100다스의 애인이니 도라○몽이니 따위의 소문이 나돌게 된건 여담이지만.
"...하나만 물을게."
장난기를 지운 아키호씨와 눈을 마주했다.
"우리 하루나를 좋아하니?"
"......"
잠시 생각한뒤 답을 정했다.
"...말하지 않을래요."
"어째서니?"
"그건 아키호씨가 들어야 할 말이 아니니까요.
만약 말한다면, 그걸 듣는건 사이렌지여야 하니까요."
"어머..."
"사실은 유우사키와 있었던 이야기도 되도록이면 말하고 싶진 않았어요.
유우사키로서도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건 싫었을테니까.
하지만 아키호씨가 사이렌지를 걱정해서 말씀드린것 뿐이니까요."
"아키츠군은 혹시 입이 무거운 타입이야?"
"별로 조개입인건 아니지만, 어지간해선 다른 사람의 사정을 시시콜콜 떠들고 싶진 않을 뿐이에요."
"그건 꽤나 믿음직하네.
그런데말야 아키츠군?"
"네?"
"방금전 질문 말인데."
하루나를 좋아하냐는 질문?
"말했다면 어쩌면 뭔가 바뀌었을지도 몰라. 음후후~"
"...혹시 사이렌지에게 지금 대화를 얘기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응? 후후, 걱정마.
나는 말하지 않을테니까."
괜스레 사람의 맘을 졸이게 만드는 아키호씨를 보니 이 사람도 참 장난기가 많구나 싶었다.
"혹시라도 제 대답에 따라서 사이렌지와의 사이를 주선하려고 생각하셨다면 그만두시는 편이 좋아요.
사이렌지의 등을 떠미는건 좋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 사이렌지는 생각하시는것만큼 숙맥도 아니고, 언제까지고 제자리 걸음하지도 않을테니까요."
"응?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하루나는 등을 떠밀어주지 않으면 좋은 남자 하나 만나지 못할것 같은데?"
"사이렌지라면 원한다면 언제든지 멋진 청춘을 만끽할 수 있을텐데요."
"에에~ 우리 하루나가?"
"물론이죠.
예쁘고 머리 좋은데다 성실하고, 어린애들을 상냥하게 돌보는것도 능숙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친구들을 이끌면서 친구들에게 신뢰받는 멋진 위원장이거든요.
어두운 곳이나 귀신을 무서워하는 면이 있긴 해도, 그런건 오히려 귀여운 요소죠.
이런 사이렌지가 인기 없을리 없잖아요?"
"......"
"...왜 그렇게 보시나요?"
"아, 아니...풋, 우, 우리 하루나를 좋게 봐줘서 기뻐서 그런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동생 칭찬하는걸 웃는건 심하잖습니까?
입술을 씰룩씰룩하면서 능글맞은 얼굴을 하는 아키호씨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음, 그래도 언니인 내가 모르는 하루나의 모습을 알고 있다니 조금 질투나는걸?"
"뭐...함께 있으면서 자연스레 알게 된거니까요."
여동생으로서의 사이렌지와 친구로서의 사이렌지의 모습은 다를테고.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시간이 제법 지났기에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가벼운 맘으로 산책하러 나왔다가 난데없는 해프닝에 꽤 시간을 들여서 나나랑 모모가 걱정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일어서자 배웅하러 따라온 아키호씨가 물었다.
"방금 전 이야기 말인데, 정말로 우리 하루나와 그런걸로 좋은거니?"
"무슨 말씀인가요?"
"그러니까, 혹시 말야, 만에 하나 우리 하루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쳐."
"만에 하나라고 할 정도로 사이렌지가 부족할리 없는데요.
오히려 사이렌지의 매력을 아는 눈썰미를 가진 남자쪽이 만에 하나의 행운을 타고났다고 해야,"
"그런 세세한건 됐으니까."
됐습니까...
"하루나를 좋아하는 남자가 나타났다면, 그리고 하루나가 그 남자애랑 사귄다면 너는 그걸로 좋니?"
좋잖아. 딱히.
누군가가 하루나를 좋아한다손 쳐도, 여기선 하루나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하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키호씨는..."
"응?"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랑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어요?"
"나? 나라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노리고 싶달까?"
인기만점의 아키호씨라면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지는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솔직한 아키호씨의 대답에 작게 웃곤 맞장구쳤다.
"후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건 사이렌지도 마찬가지겠죠."
"...어, 혹시 그게 나랑 유우...어쩌고 하는 여자아이의 질문의 대답이니?"
"...그렇다고 말하진 않았는걸요?"
어깨를 으쓱하는 날 아키호씨가 째려봤다.
"...얄밉네. 어른을 놀리는건 안된단다?"
"아하하..."
머쓱하게 웃곤 나가려고 현관문을 잡았을 때였다.
"참, 아키츠군."
"네."
"데이트하자."
"......엣?"
"아핫~! 귀엽네에~ 그런 얼굴도 할줄 알았어?
이건 드디어 내가 한방 먹인걸까나?"
만족스레 웃는 아키호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황망한 맘을 담아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어라~? 이 누나랑 데이트는 싫어?"
"아, 그건 감사...가 아니라!
어째서 난데없이 데이트!?"
"대답이 맘에 들었으니까."
허어...?
- 대답이 마음에 든다면 데이트 정도는 생각해봐줄 수도 있는데.
아니, 그 대답의 어디에서 아키호씨가 만족할만한 요소가 있었다는거야?
"우리 하루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내아이를 위해서 언니가 데이트 정돈 해준다는거야~"
"본심은?"
"에에~? 이 누날 믿지 못하는거니 아키츠군?"
"여동생을 소중히 생각하는 언니가, 여동생을 소중히 생각하는 남자에게 데이트 신청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중입니다만."
"그게 그렇게 되나?"
한차례 힐쭉 웃은 아키호씨가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뭐, 사실은 너랑 얘길하다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게 생겨서 말야~)"
둘 뿐인데 굳이 목소릴 낮출 필요가 있나요?
"그러시다면야 도와드릴께요."
"어? 그렇게 간단히?"
"아키호씨가 무리하다고 생각되는걸 제게 부탁을 하진 않으실테고.
미인의 부탁을 사양하는건 실례겠죠?"
"넉살도 좋게 그런말을 하는구나 아키츠군은?"
장난기 섞인 내 대답에 아키호씨가 피식 웃었다.
"그럼 연락처 교환할까?"
번호와 메일을 교환하곤 하루나의 집을 뒤로 했다.
"그럼 다음에 연락할께 아키츠군~!"
"네.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테니까요?"
"아하하~ 예쁘게 차려입고 갈테니 기대하라구?"
"예이~"
"아. 그러고보니 아키츠군."
"네?"
"하루나가 그러던데 너 담배 안핀다며?
그럼 담배갑은 왜 가지고 다니는거니?"
"어, 그러니까...패션?"
"......풋.
아하하하하! 너 진짜 재밌는 녀석이구나?"
"아팟!?"
대답이 궁색해서 장신구 같은 느낌으로 설명했더니 등을 얻어맞았다.
웃는건 좋지만 폭소하며 등짝을 쳐대는건 그만둬 주세요 아키호씨.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키호씨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곤 등을 매만지며 하루나의 집을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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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엔 업무가 있어서 업로드를 못했네요m(_ _)m;
원래 44화 분량은 이게 아니었는데, 예정했던 부분까지 다듬기가 덜 끝나서 결국 나눠서 올립니다-_-;
청출어람이나 백미는 이불이 에피소드가 마무리되면(45, 46화쯤?)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주말 마무리 잘하시고 45화에서 뵈어요~!+_+/
p.s. 참조 이미지
우주인(하루나 시점)
우주인(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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