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나나와 모모가 놀러나간 뒤,
언제나와 같이 나선 산책길에서 다가온 만남은 평소와 차이가 났다.
여느때와 같이 동네를 거닐던 무렵이었다.
냐앙~
"?"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몸을 돌리자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작은 고양이가 산책로 옆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한차례 몸을 떨어 들러붙은 이파리를 털어내는 아기 고양이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귀여운 녀석을 운좋게 봤다며 만족하곤 다시 몸을 돌리는데 방금 전 고양이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울었다.
...혹시 이거 꿈 아냐?
주저하다가 다시 한번 몸을 돌려 고양이를 내려다봤다.
물끄러미 날 올려다보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와~ 귀여워라. 그런데 이녀석 내가 무섭지 않나?
나나의 말로는 내가 꽤나 위험한 냄새인지 분위기인지를 풍긴다고 하던데.
색다른 반응을 보여주는 고양이의 태도에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을 흔들며 츳츳 부르자 달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고양이는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사람을 기피하지 않는데, 아직 어려서 그런거려나?
"왜 그러니? 혹시 나랑 놀고 싶어?"
냐아~ 냥냐아~
손을 내밀자 고양이가 툭-하고 앞발을 내 손위에 올렸다.
사랑스럽네 이녀석.
탁탁하고 내 손바닥을 앞발로 쳐보는 고양이를 바라보다 살짝 고양이의 앞발을 쥐자 말랑말랑한 육구가 눌렸다.
육구가 부드럽고 깨끗한데 이녀석 길고양이가 맞는건가?
냐-
"아 미안. 싫었어?"
육구를 잡힌 고양이가 부르르 몸을 떨자 사과하곤 쥐고있던 손을 풀었다.
어쩌면 주인있는 고양이일지도 모르니까, 우선 나나에게 데려가 봐야겠다.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멀뚱멀뚱 제자리에 앉아있던 아기 고양이를 조심스레 안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안겨진채 몸을 뒤틀며 발버둥치는 아기 고양이를 달래듯 어르자 고양이는 마지 못한듯 품에서 얌전해졌다.
착한아이구나.
다른 녀석들도 이 아이 만큼이나 따라준다면 기쁠텐데.
"나 돌아왔어~"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왔다.
마루에 내려놓은 고양이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나나와 모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내 산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기도 했고, 토요일이니 어쩌면 귀가가 늦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 둘이 돌아올 때까진 고양이랑 노닥거리고나 있을까나.
얌전히 제자리에 앉아선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고양이 곁에 앉았다.
동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건 오랜만이라 긴장한채 살며시 고양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조심스레 머릴 쓰다듬자 고양이는 처음엔 얌전히 있었지만, 잠시 후 귀찮은 듯 앞발로 머리를 쓱 훑으며 내 손을 치웠다.
"우후후..."
응. 이 아이는 내게서 도망치거나 하지 않네.
헤실헤실 풀리는 얼굴이 조절이 안되었다.
고양이의 옆에 엎드린채 고양이를 쳐다보자 고양이는 깜짝 놀란 듯 앞발로 내 얼굴을 눌렀다.
몽실몽실한 육구가 볼에 닿았다.
...행복해.
냐앗~!?
"앗, 미안해."
무심코 육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고양이의 반응에 놀라 손을 치웠다.
팡팡~!
사과하는 내게 고양이가 나무라듯 내 이마를 탁탁 두드렸다.
이건 포상이군요? 감사합니다.
턱을 마루에 괸채 나른하게 풀어진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고양이가 다시금 앞발로 내 뺨을 눌렀다.
냐-냐-
툭툭
걱정스러운듯 뺨을 토닥이며 고개를 기울이는 아기 고양이의 모습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정도로 귀여웠다.
"아니, 괜찮아.
이건 기뻐서 그런거니까. 걱정해줘서 고마워."
녹아들것만 같은 행복을 만끽하면서 마루에 엎드린채 대답하는 내게 고양이는 몇차례 내 이마를 두드리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집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호기심이 많아보이네.
촤아악-!
냐아앗-!?
"엣?"
마루에 놓인 식물들을 둘러보며 지나가던 고양이를 근처의 우주식물이 꽃잎을 벌리며 삼켜버렸다.
이런! 저번에 강아지를 삼켰던 식물 녀석이 또 사고를 친건가.
모모가 주의를 주었는데도 계속 저러네.
당황해서 우주식물에게 다가가 모모가 하듯 꽃잎을 쓰다듬으며 말을 건넸다.
"얘, 그 아인 먹는게 아냐. 놔주렴."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듯 꽃잎을 위로 향한 식물은 곧 닫힌 꽃잎을 오므렸다.
퇘엣-
철퍽-
"......"
...말을 잘 따라주는 착한아이구나. 방식은 좀 거칠지만.
내 얼굴에 고양이를 내뱉곤 우주 식물은 다시금 얌전히 꽃잎을 닫았다.
점액 범벅이 된채 내 얼굴에 달라붙은 고양이는 정신이 없는지 힘겹게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얘는 여자아이였구나.
내 얼굴에 달라붙어 축 늘어진 고양이를 받아들고 알게된 사실에 조용히 한숨을 쉬곤 욕실로 향했다.
냐앗~!
고양이라 그런지 물을 싫어하는 듯 아기 고양이는 꽤나 앙탈을 부리며 발버둥을 쳤다.
괜한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미지근한 물로 온도를 맞추곤 점액 투성이 몸으로 바둥거리는 고양이를 달랬다.
"얌전히 있어줘. 이러면 씻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구.
너도 이대로 끈적끈적한채 지내는건 싫잖니?"
뉴우...
"그래그래. 좋은 아이구나."
얌전해진 고양이를 욕실에 앉히곤 조심스레 물을 흘렸다.
가끔 바둥거리는 고양이를 달래며 샤워볼을 사용해서 고양이에게 묻은 점액을 씻어냈다.
씻긴 뒤엔 헤어드라기이의 서늘한 바람으로 말려주고 고양이를 닦았다.
팡팡-!
"엣? 미안. 그렇게 씻는게 싫었어?"
몸을 다 말리자 고양이 펀치를 날리기 시작한 아이를 달랬다.
찰칵.
먀-!
좋았어! 보물 사진 겟~!
항의하듯 몸을 세워선 양 앞발을 벌리며 우는 고양이의 모습에 싱글싱글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팡팡-!
찰칵하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가르릉대며 우는 고양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냐-
"네 눈은 정말로 예쁘구나."
무덤덤한 일자눈이거나 멍한 눈이거나 시선이 어긋난 눈이거나 동태눈이 아닌 맑게 반짝이는 눈을 보노라면 분명 이 녀석은 나중에 품격있는 고양이로 자랄 것 같다.
"네가 좋다면 나와 함께 지내지 않을래?
너 같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곁에 있어준다면 정말 기쁠거야."
바둥바둥
"아하하~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괜찮아.
나나가 돌아오면 제대로 주인에게 데려다 줄테니까.
혹시나 네 어미와 헤어진거라면 어미를 찾아줄께.
그러니까 지금만 이대로 있어줘."
정말로 유감스럽지만 나는 장래 유망한 큐트 계열 고양이에게 차인 것 같다.
얌전해진 고양이를 내려놓곤 한차례 등을 보듬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나마 오늘의 추억삼아 고양이 사진을 그 나름대로 남길 수 있었던건 성과라고 할까.
악수하듯 앞발을 손으로 쥔채 함께 찍은 사진이라든지.
생글생글 웃으며 좋아라하는 날 고양이도 체념했는지 얌전히 따라주었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어울려준 고양이에게 감사.
얌전히 앉아있던 고양이가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었다.
"졸리니?"
대답이 없는 고양이를 안고선 침대에 내려놓았다.
푹신푹신한 침대에서 똬리를 틀고선 고양이는 눈을 감았다.
어려서 잠이 많은거려나.
날이 따스해 졸음이 온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나도 나나랑 모모가 돌아오기 전에 잠시 낮잠이나 잘까.
침대에 올라 고양이 곁에 누웠다.
"잘자렴."
작게 울음소릴 내곤 조용해진 고양이의 곁에서 눈을 감으며 나도 오랜만의 게으름을 즐기기로 했다.
새액- 새액-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옅은 숨소리와 배와 가슴께에서 느껴지는 묵직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건 감청색(紺靑色) 머리카락과 새하얀 살결이었다.
......?
고른 숨소리를 따라 작게 상하하는 어깨.
내 가슴께에 기대어진 머리와 올려진 양팔.
배 근처에 맞닿은 두개의 둥글고 부드러운 살결.
알몸의 하루나가 내 배와 가슴께에 상체를 걸친채 잠들어 있었다.
기분탓인지 내쉬어진 숨결에선 달짝지근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것 같았다.
...하루나!?
왜? 어째서?
뭐야 이건? 뭐가 어떻게 된거야?
설마 알몸으로 공간 이동을 시키는 뿅뿅 워프군?
라라의 발명품인 뿅뿅 워프군의 워프에 휘말린거야?
그치만 워프 포인트가 내 집으로 설정될리 없잖아?
그보다 아기 고양이는 어디갔어!?
하루나와 떨어지려 해도, 몸이 맞닿은 상태라 움직였다가 하루나가 깨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패닉이다.
...좀 더 자는 척하자.
나보다 먼저 깨어난 하루나가 나 몰래 빠져나갈때 까지 기다리는게 하루나의 존엄을 위해서도 최선이다.
결론을 내리곤 다시 눈을 감은채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시간이 안가.
가슴이고 허벅지고 하루나와 닿은 부위가 치명적으로 자극이 강하고, 어쩐지 좋은 향기도 나서 패닉 상태고.
괴로운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엎드린 자세가 잠자기엔 불편했는지 마침내 하루나가 깰 낌새를 보였다.
"으음..."
옅은 신음과 함께 작게 몸을 뒤척이던 하루나의 가슴이 배를 눌렀다.
이제 그만둬! 나 지금 상태가 정말로 위험하단말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내 사정을 모른채, 하루나의 머리가 움직였고 곧이어 부스스한 목소리로 하루나가 중얼거렸다.
"원래대로 돌아왔어...?"
원래대로?
설마 진짜로 방금전 아기 고양이가 하루나였던건가.
언제부터 하루나가 '샴푸(란마 1/2)' 비슷한 체질이 되어버린거야?
"오, 옷이..."
말하지마.
그렇잖아도 눈감고 애써 시각정보를 차단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의 재확인은 내 인내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튼, 십중팔구 하루나가 라라의 발명품에 휩쓸린거겠지.
알몸이 되어버리는 해프닝은 대개는 라라의 발명품 탓이고.
알몸상태로 깨어나서 당황한 하루나는 자신에게 상체를 깔린채 잠들어 있는 날 깨닫곤 숨을 죽였다.
긴장한듯 침을 삼키곤 한참을 침묵하던 하루나가 중얼거렸다.
"...아키츠군...자고 있어...?"
응. 안깨어 있어.
그러니까 말 걸지마.
그것보다 슬슬 진짜로 위험하니까 어서 빨리 몸 치워.
다행히도 조심스레 내 상체에서 몸을 비킨 하루나가 내 옆에 누웠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곁에 누워있는 하루나의 상태에 의문을 느낄 즈음 하루나의 숨이 팔에 닿았다.
"...어째서, 그 때...그런 말을 했어...?"
흘러나온 소리는 속삭이듯 작았다.
내 팔에 이마를 기댄 하루나의 가는 숨소리가 번졌다.
"아키츠군... 나는..."
...나는 어느 타이밍에 일어나야 하는걸까...?
잠시 후,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나더니, 옷장이 열리고 부스럭거림 뒤에 옷장이 닫혔다.
맨살과 옷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내게 다가온 하루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어나, 아키츠군..."
머뭇거림 뒤에 어깨를 흔드는 하루나의 손길에 생각을 정리하곤 잠시 후 조심스레 눈을 떴다.
"......응?"
눈을 뜨자 새하얀 와이셔츠를 걸쳐입은 하루나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이렌지?"
"아, 안녕 아키츠군."
"여긴 어쩐일...아니, 그전에 잠시만."
묻다말고 침묵하는 내 모습에 하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이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 모습은 이상하지?
깨워준 상대가 알몸 와이셔츠 한장 차림이라면 누구라도 놀란다고.
"...바지는 어쨌어?"
"아, 아키츠군의 바지는 사이즈가 맞질 않아서..."
내 지적에 부끄러워진듯 하루나는 와이셔츠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숨기듯 손으로 가렸다.
응. 그야 하루나가 내 바지를 입으면 흘러내리겠지.
하지만 적어도 실내에 있을땐, 사내아이에게 맨다리를 죄다 보일바엔 그거라도 입는 쪽이 나았을거야 하루나.
와이셔츠가 큰 덕에 중요한 부분은 가릴 수 있었지만.
붉어진채 변명하는 하루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루나가 움찔하며 와이셔츠 아랫자락을 손으로 잡고 가리는걸 모른척하곤 방을 나왔다.
나나랑 모모의 방은 잠겨있으니 들어갈 수 없고, 급한대로 건조기에 넣어뒀던 하루나의 중학교 하복을 꺼내왔다.
방으로 돌아와 하루나에게 중학교 하복을 건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거부터 입도록 해."
"고, 고마워."
"나는 나가있을테니까."
"으응..."
방 밖에서 기다리자 잠시 후 하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다 입었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와이셔츠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하루나와 마주했다.
속옷이 없다보니 한 팔로는 교복 가슴께를 가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치맛자락을 매만지는 하루나는 부끄러운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굳이 부끄러움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되도록 담담하게 하루나를 대하기로 마음먹곤 경위를 물었다.
"일어났더니 갑자기 사이렌지가 있어서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혹시 라라의 발명품에 휘말리기라도 한거야?"
"으응, 맞아. 라라가 만든 동물로 변하는 발명품을 만졌다가 그만..."
"응? 라라가 그런것도 만들었어?"
"나나가 동물들과 더불어 놀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나봐."
과연...
좋은 마음씨다.
허나 알몸이다.
효과가 풀리면 알몸이다.
...나나가 그걸 선물로 받더라도 절대로 쓰지 않겠군.
쓰고 나면 알몸이 되는 발명품 같은거 주저없이 쓰려는건 라라 뿐이겠지.
방금 전까지 고양이로 있으며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는지 부끄러워하는 하루나를 보곤 몸을 일으켰다.
사정을 들었으니 이제 남은건 하루나를 돌려보내는 것 뿐이다.
"일단, 집까지 바래다 줄께."
"...고마워."
신발장에 있던 어머니의 샌들을 신기곤 하루나를 데리고 나온건 좋았는데 아무래도 한가지 실수한 것 같다.
속옷을 입지 않고 맨몸에 교복만 걸치고 있다보니 하루나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져가는게 보였으니까.
치맛자락을 만지작 거리면서 가슴께를 한팔로 가린채 조심스레 걷는 하루나의 모습이 보통 신경쓰이는게 아니었다.
불안한 얼굴로 걷다가 바람이 불라치면 깜짝놀라는 하루나의 모습에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하루나의 한 손을 잡았다.
"에? 아키츠군?"
"...저기로 가자."
"엣? 자, 잠깐? 아앗!?"
당황하는 하루나의 한손을 쥐고선 발걸음을 놀렸다.
여성 속옷 매장
"아, 아키츠군. 여긴..."
"그렇게 수상한 태도로 걸으면 오히려 시선을 모을테니까."
속옷 매장에 도착해서 하루나의 손을 놓았다.
"사이렌지도 그 상태로 계속 신경쓰며 걷는건 무리지?
차라리 여기서 속옷을 한벌 사서 입는 쪽이 나아."
"하, 하지만..."
"...사이렌지."
"으, 으응?"
"생각해봐.
만약, 지금 상태로 모미오카나 사와다를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리사랑, 미오?"
"만약 둘을 만나 평소의 성희롱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
- 저기저기~! 어어어~째서 하루나는 노브라야?
- 거기다 노팬티다냥? 냐아아아앙~! 대범하잖냥 하루냥~!
- 우후후~ 대체 누굴 꼬시려고 이런 옷차림을 하고 거리를 배회하는걸까나 으응~?
- 노팬티 냥이 하루냥! 노팬티 냥이 하루냥! 여동생 냥냥 카페도 지금은 노팬티 서비스다냥~!
용이하게 결말이 보였는지 사이렌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니까 얌전히 속옷을 사둬.
혹시 모를 위험에 휩쓸리는것 보단 낫잖아."
"응..."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하루나의 모습에 안도하려니 점원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여자친구의 속옷을 같이 고르러 오셨나요?
요즘 남자분들은 대담하네요."
점원의 말에 놀라는 하루나를 보곤 한걸음 물러났다.
속옷 고르는데까지 내가 있을 필요는 없겠지.
하루나도 거북해할테고.
"그럼 사이렌지에게 맞는 걸 고르고 있어.
난 나대로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까."
"어?"
"금방 돌아올테니 걱정하지마.
그럼 이따 봐 사이렌지."
"으응..."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 하루나를 두고 의류 매장의 다른 코너로 이동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한 대책으로 산 준비물을 종이 봉투에 넣곤 하루나와 헤어졌던 속옷 매장으로 돌아왔다.
"사이렌지."
"!? 아, 아키츠군."
황급히 손에 들고있던 속옷을 뒤로 숨기는 하루나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곤 다가갔다.
"옷은 다 고른거야?"
"아, 아니. 아직...이제 시착을 해보려고...앗!"
탈의실을 가리키며 말하던 하루나의 눈이 커졌다.
"왜그래?"
"저, 저쪽..."
"응?"
하루나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향했다가 황급히 도로 고개를 되돌렸다.
아하하~ 그래서 말야~
"「「!?」」"
리사랑 미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한 곳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했나?
저만치 멀리서 재잘거리며 매장을 구경하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황급히 하루나와 몸을 숨겼다.
속옷 진열대 사이로 몸을 숨긴채 하루나와 얼굴을 마주하며 침을 삼켰다.
"(어, 어쩌지 아키츠군?)"
"(그, 글쎄...)"
주말에 여성 속옷 매장에서 친구들이랑 마주친다는 가정은 해두질 않았다고!
리사와 미오의 발걸음은 우리가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엉성하게 숨은 상태에서 둘과 만났다간 대참사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던 차에 하루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아키츠군 여기!)"
"(어, 어라?)"
하루나에게 손목을 잡힌채로 끌려가며 생각했다.
이거 어째 나랑 하루나의 상황이 방금 전이랑은 반대인거 아냐?
탈의실로 들어와 커튼을 닫곤 하루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
우리, '탈의실'에 숨은 거야?
탈의실 안에서 서로 마주한채로 우리 둘은 침묵했다.
혼자라면 몰라도 둘이서 있기엔 탈의실은 비좁았다.
그렇잖아도 좁은데 속옷을 쥔 한손을 등 뒤로 숨긴 하루나 탓에 서로간의 거리는 숨결이 전해질 만큼 가까웠다.
방금전 안도하며 미소짓던 하루나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서 고개를 숙인채 서있던 하루나를 보다가 한차례 머리를 매만지곤 사과했다.
"미안해 사이렌지.
어렵게 여기까지와서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어."
"......"
"난 따로 피해있을테니까..."
이대로 함께 탈의실에 숨어서 하루나를 거북하게 하느니, 차라리 리사랑 미오에게 걸려서 시달림을 당하는 편이 낫지.
슬그머니 탈의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하루나에게 옷깃을 잡혔다.
"사이렌지?"
"...신경쓰지마."
짧은 침묵뒤 옷깃을 잡은 하루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로...신경쓰지마."
"......"
"...니까."
"응?"
"...리사랑 미오가 떠날 때까지만이니까."
"그러니까 난 별로,"
"그 때, 교실에 혼자 두고서 도망쳐서 미안해."
"...그건 농담이었으니까 진심으로 미안해하지 말아줘."
"......"
옷자락을 놓을 낌새는 없었다.
입술을 다물고 고집스레 쳐다보는 하루나의 시선에 내쪽이 먼저 물러섰다.
"그래그래. 알았어.
저 둘이 떠날 때까지 함께 숨어있으면 되는거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나의 모습에 탈의실을 벗어나는건 포기하고 얌전히 서있기로 했다.
긴장한 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바깥에 귀를 기울인다.
야한 속옷을 둘러보면서 재잘거리는 리사와 미오의 목소리가 커튼 너머로 들려온다.
밖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다 때때로 주고받는 리사와 미오의 야한 농담에 하루나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렇게 밖에 귀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들고 있는 종이 봉투에 생각이 미쳤다.
마침 탈의실이고 잘됐다싶어 하루나에게 말을 건넸다.
"사이렌지."
"으응!?"
긴장하고 있었는지 내 부름이 깜짝놀란듯 하루나가 고개를 들어 날 올려다 봤다.
"...사실은 방금전 사이렌지에게 맞을 것 같은걸 사왔거든.
마침 탈의실에 왔으니 내가 가져온게 사이렌지에게 어울리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에...?"
"사이렌지는 지금 한손은 못쓰지?
비좁아서 움직이기도 불편할테니 시착은 내가 시켜줄께."
"시, 시착...!?
저기, 그, 그런건 됐어."
"너무 떠들지 말아줘."
"아키츠, 군...?"
"모미오카랑 사와다가 밖에 있으니까...
사이렌지도 밖의 둘에게 들키고 싶진 않지?"
"읏..."
"금방 끝낼테니까."
"......"
부스럭거리며 한손에 든 종이 봉투를 뒤적이자 하루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그 반응은.
어쩐지 겁먹은 듯한 모습에 고개를 내젓곤 종이 봉투에서 꺼낸 물건을 하루나의 머리에 씌웠다.
툭.
"...?"
눈을 뜬 하루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머리에 씌워진 캡모자를 매만진다.
"음. 이정도 크기면 적당하려나?"
"...모자?"
"응. 혹시나 아는 사람에게 중학교 교복 모습을 보이는게 신경쓰이진 않을까 싶어서.
이걸로 얼굴을 가리면 어지간해선 들키진 않겠지.
어때? 내 생각엔 제법 귀엽게 잘 어울리는것 같은데."
"......"
탈의실의 거울로 지금 모습을 확인할 법도 한데 하루나는 말없이 서 있었다.
천천히 하루나가 내게 몸을 기댔다.
"엣? 사이렌지?"
투닥투닥.
아야. 뭐야?
모자를 눌러쓴채로 내 가슴을 두드리는 하루나의 행동에 갈피를 잡지 못하곤 쩔쩔매며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탈의실 안에서의 다툼이 끝났을 무렵엔 어느새 리사와 미오도 떠나고 없었다.
볼을 부풀린채 토라진 하루나는 날 탈의실 밖으로 쫓아냈다.
뭐, 다른 이유는 아니고 속옷 시착을 하기 위해서다.
여자들 속옷은 시착한걸 도로 벗어서 계산하는건 처음 알았지만.
아니, 뭐 남자들도 구매할 속옷을 입은채로 계산하진 않겠지만, 여자도 그런지는 몰랐지.
계산을 마치곤 속옷을 입으러 도로 탈의실로 들어간 하루나를 기다리는 동안, 탈의실을 이상한 용도로 사용하지 말아달라며 조심스레 부탁해오는 점원에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어느덧 땅거미가 내린 길을 하루나와 걸었다.
산책로를 걸을 즈음엔 토라진 하루나도 어느샌가 기분이 풀렸는지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쩌면 오늘의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하루나에겐 좋은 방향으로 긴장을 푸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당황스러워하던 분위기 대신 자연스럽게 말꼬를 튼 하루나를 보는 건 오랜만이라 나도 꽤나 기분이 들떴나보다.
떠들석했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리사와 미오와 함께 함정에 빠질 뻔 했던 하루나의 고생담에 낄낄대며 웃기도 하고.
구교사 유령 사건때의 떠들석한 모험을 떠올리면서 곤란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오키와나 행성에서 표류하던 하루나 일행을 미카도 선생님이 구출해 주었다는 얘기에 쓴웃음을 짓기도 하고.
리토네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전골 파티를 했던 얘길 하다가 문득 목욕탕 사건이 떠올라버려 서로 침묵해버리기도 했다.
그 중 룬의 모도리 스컹크 사건을 이야기할때는 내 쪽이 자중하지 않고 들떠버렸다.
"아아~ 그때 어려진 아이들은 정말로 귀여웠는데 말야."
"마론도 그렇고, 아키츠군은 귀여운걸 좋아하네."
"작고 귀여운 건 사랑스럽잖아."
"그러네. 아이들이랑 어울려주는 아키츠군은 익숙해보였어.
산책하면서 이따금 동네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아키츠군을 보기도 했는걸."
"그러는 사이렌지야말로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잘 대해줬잖아.
언니 누나 역할을 잘 하는 모습이 정말 멋졌다구?"
그리고 얘기는 나나와 모모가 벌였던 가상현실 RPG 트러블 퀘스트로 넘어갔다.
"그러고보면 트러블 퀘스트 이후로 꽤나 시간이 흘렀네."
"음, 유우키랑 라라의 관계는 가상현실에서의 대답 이후로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말야."
"...분명 유우키군은 고민하고 있는걸거야."
"그러려나?"
"응. 하지만 둘의 관계는 문제없다고 생각해.
유우키군이 라라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만은 나에게도 확실히 전해졌으니까."
"...사이렌지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라라에게도 유우키의 마음이 전해졌겠지."
"그, 그럴까?"
"그래. 라라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사이렌지인걸.
누가 뭐래도 사이렌지는 라라의 가장 소중한 친구니까."
"......!"
내 말에 하루나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고개를 숙인 하루나의 모습에 문득 어떤 예감이 들었다.
"...사이렌지?"
"아! 그, 그리고 말야! 룬의 데뷔 말인데,"
"혹시 고민있어?"
화제를 돌리려는 하루나의 말을 끊고 물었다.
말을 끊겨 당황하던 하루나가 잠시 후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지금 모습이 걱정되니까 물어보는거지.
그렇게 갈등하는 티를 내는데 신경쓰일 수 밖에 없잖아.
방금 전은 마치 나 고민 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라는 느낌이었다구.
물론 이런 말 따윌 입 밖으로 냈다간 울컥하고 반발만 살 것 같아서 말을 바꿨지만.
"그러니까아- 상담이 필요한 일이 있지 않느냐 하는거야.
너, 지금 굉장히 힘겨운 표정을 하고 있다구?"
내 지적에 하루나는 자신의 얼굴로 손을 가져가 매만졌다.
"자자, 고민이 있다면 내게 말해보지 않을래?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난 딱히 고민 같은 건..."
"만약, 내가 굳이 나서도 되지 않는 일이라면 참견하진 않겠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사이렌지는 상냥하고 성실하지만 바보같잖아?"
"...엣?"
눈이 점이 된 하루나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바보같이 착해빠져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속으로만 끙끙 앓을 것만 같은 이미지니까.
속앓이만 해대다가 나중에 가선 혼자서 빵-하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불안하다구."
"...심하지 않아?"
원망스러운듯 쳐다보는 하루나의 눈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심하지.
그런데 말야 사이렌지?"
"...왜? 아키츠군."
"까놓고 말해서 사이렌지 너, 요즘 그다지 웃질 않았지?"
"......"
뭐, 웃은 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하루나를 접하면서 느낀게 그렇단거다.
최근 학교에서 보이는 하루나의 반응 중엔 때때로 과민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자주 있었고.
그러고보면 하루나의 지금 고민은 대체 뭐야?
리토를 향한 사랑에 대한 고민?
라라와의 우정에 대한 고민?
아니면 이미 대답 듣긴 물건너갔지만 유우사키랑 얽혔던 문제에 대한 고민?
아니, 그전에 이성관계로 하루나의 상담을 받아줄 만큼 하루나의 고민을 잘 아는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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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논외네. 라라를 생각해서 리토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
리사랑 미오? 역시 논외. 하루나랑 친한 사이긴 해도 얘내들은 엔딩 때까지도 하루나의 마음을 모르잖아.
사야카랑 코요미? 같은 테니스부인건 아는데 그렇게까지 절친이던가?
코테가와? 마찬가지로 둘이 거기까지 친한 사이인지 모르겠는데.
시즈? 하루나는 유령을 무서워하는데, 시즈는 유령이지. 그리고 시즈는 개를 무서워하는데, 하루나는 애견인이지. ...어떻게 하라고. 거기다 시즈는 요즘 코테가와랑 사이 좋은것 같고.
룬? 아이돌 활동으로 바쁜데다 룬의 절친은 쿄코였던걸로 기억한다. 아직까진 같이 일해보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사키, 린, 아야 선배? 세 선배랑 하루나는 현재로선 딱히 어떤 사이도 아닌것 같으니까 무리네.
미캉? 리토가 하루나를 좋아한다는 건 아는데 그 반대도 알았던가? 거기다 미캉은 리토의 여동생인데, 하루나가 리토의 일로 상담하러 갈리 없지?
야미? ...응, 무리군요. 야미가 하루나에게 상담 요청을 한다면 모르겠는데 그 반대는 상상이 안간다.
모모? 하루나도 모모도 홍차를 좋아한다는 점은 닮았는데, 솔직히 제대로 이야길 나눌 기회도 없었잖아? 논외.
나나? 그나마 유력한 후보라 생각했는데...얘는 염불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지. 요즘 마론마론 노래를 부르는게, 하루나 집에는 마론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고.
애초에 얼마전 카페에서 하루나 관련으로 기껏 한다는 얘기가 '아키호가 너한테 관심 있는것 같더라?'였고. 하루나의 고민 상담이고 뭐고 낌새도 안 보였다.
아키호씨? 언니에게 하는 연애 상담이 가장 편할것 같긴 한데, 하루나가 아키호씨를 의지할지가 의문이다.
▷▷▷ 결론 ▷▷▷
현재로서는 도움이 될것 같은 동성친구는 부재중입니다.
다음 기회를 이용하세요.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힘든 일이구나.
최근에 자주 트러블에 휘말려선 흔들흔들하는 하루나를 떠올리곤, 눈앞에서 주저하는 하루나를 좀 더 구슬려본다.
"별로 너한테 억지로 웃으라고 말하진 않아.
그런거 일부러 해도 오히려 보기 괴로울 뿐이니까."
억지로 웃음지은 내 표정을 본 코테가와의 악평을 떠올리자면 억지 웃음도 그다지 할 건 못되는 것 같다.
하지만 가끔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하루나를 이대로 방관하는 것도 어떨까 싶다.
처음 만났을 때의 유우사키도 고민같은거 없다며 태연히 장난치며 웃고 있더니만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던 중 어느샌가 폭발해버렸었고.
심증만으로 찔러봤던 유우사키때완 달리 명확하게 고민하는 티가 나는 하루나에겐 적어도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려야지.
친구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다른 친구들 중 누군가가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때까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은 싫으니까.
엇갈리는 연애사야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더라도, 하소연을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줄 순 있겠지.
상담 같은거 필요없다고 거절당하면 어쩔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연애 문제 같은걸 이성친구에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래도 이따금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어지는 일 정돈 있잖아.
만약 지금 고민이 그런 부류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나라도 좋다면 들어줄께.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혹시 알아?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질지?
정 신경쓰이면 자세한 내용은 덮어두고 개략적으로만 말해도 좋고 말야."
"......"
내 말에 한참을 주저하던 하루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키츠군."
"응."
"...친구에게 비밀사항을 하는 건 정말로 친구라 부를 수 있는걸까?"
"...응?"
"만약, 남들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다면...
친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채 있는 건 옳은걸까?
아키츠군이라면 어떨것 같아?"
"......"
어, 그것 참...묘하게 대답하기 껄끄러운 질문입니다 그려?
나로서는 '내 머릿속엔 전파계 지식들이 잔뜩 들어차 있습니다' 같은 얘기는 구태여 미주알 고주알 떠벌일 것 까진 없다는게 견해지만.
그런게 아니더라도, 이동네 사람들은 '나, 실은...우주인이야.' 같은 고백을 들어봤자 '와~! 놀라워~! 굉장해~!' 따위의, 긴장했던 당사자가 오히려 맥빠지는 반응을 보일 뿐이고.
...그런데 솔직히 내 대답은 아마 하루나가 바라는 답이랑은 정 반대지?
그래도 기껏 상담을 자처한 마당에 질문에 대한 대답은 솔직하게 하기로 했다.
"...나라면, 이야기하지 않아."
"......"
"누구나 비밀 하나 정돈 있을 수 있는거니까."
뭐, 거기까지 아득바득 숨길것도 아니니 살다보면 말을 번복할지도 모르지만, 그땐 그때고.
"...그래."
내 대답에 하루나는 쓸쓸히 미소지었다.
"...고마워. 도움이 되었어."
거짓말 하지마!
전혀 도움이 된 얼굴이 아니잖아?
그리고 애초에 뭐? 도움?
혹시 이녀석 뭔가 착각하고 있는거 아냐?
고개를 숙인채 한걸음 앞서 걷는 하루나를 뒤따라가며 태평히 불렀다.
"아, 그리고 말인데 사이렌지. 이것 좀 볼래?"
"?"
"얍~!"
꾸욱-
쑥 내밀어진 손가락이 고개를 돌린 하루나의 볼을 눌렀다.
"우?"
어리둥절하며 뺨을 매만지는 하루나를 보며 낄낄댔다.
"음, 얼굴 풀리니 이제 좀 볼 만하네."
"...뭐하는거야 아키츠군?"
살짝 눈썹이 올라간 하루나의 반응에 입술을 씰룩이며 웃었다.
"뭐긴? 남의 얘기를 다 듣지도 않고 돌아서려는 불성실한 위원장에게 불평을 담아서 한 장난이지.
너말야, 뭐~어~가 도움이 되었다는거야?
하나도 도움이 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사이렌지는 정말로 내 대답에 만족했어?"
"......"
침묵이 답을 말해주고 있네.
하루나도 제법 화가 난 상태인지 눈살을 찌푸리고 있고.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서있는 하루나를 보니 이거 지뢰 밟은 것 같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지만,
이왕 시작한 마당이고 침묵 상태를 깨려면 어떻게든 계속 떠벌여야지 별 수 있나.
한차례 머리를 매만진 뒤 한숨을 쉬곤 곤란한 얼굴로 하루나와 눈을 맞췄다.
"저기말야 사이렌지...날 배려해줘서 도움이 되었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사람이 고민을 들어주려는 사람의 마음까지 배려해서 대체 뭐가 해결된다는거야?
설령 정말로 내 대답에 만족했다 해도, 그걸로 끝이라면 난 하나도 안 기쁘거든?"
"...뭐가 문제인데?"
오? 대답이 돌아오네.
무뚝뚝하지만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하루나의 배려심에 감사해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바로 직전까지 배려심이 과하다고 하루나를 타박하고 있었지만. 하하하.
하여튼 지금은 적어도 대화가 성립할 순 있다는데 감사하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내 대답이지 사이렌지의 대답이 아니잖아.
실은 사이렌지도 알고 있지?
사이렌지는 사이렌지의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걸."
"...만약, 고민해서 나온 대답이 아키츠군과 같은 대답이라면, 고민한 의미가 있을까?"
"그야 당연히 있지.
자신이 선택한 답을 쫓는 것과 남의 답을 따라할 뿐인 건 가치부터가 다르잖아?
무엇보다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질 수 있다는 점이 좋잖아?"
애초에 하루나가 나랑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지만.
"...그 선택의 결과로 친구와 사이가 멀어지더라도 말야?"
하루나가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져?
어, 그게 정말로 실현 가능한 일이라면 내가 정말 놀랄 것 같은데.
대범하고 어처구니 없을 만큼의 관용으로 넘쳐나는 친구들이랑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하루나의 불안감은 일단 제쳐두고, 우선은 하루나의 질문에 답했다.
"물론. 자신이 옳다고 선택한 길을 가서, 실패하더라도 그 길이 옳으면 된거니까."
"...아키츠군의 그런 자세는 부러워.
나도 그런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평소엔 리더십도 있고 외부의 위협에도 잘 대처하는 주제에, 친구들과의 교우관계 트러블에선 이렇게 우물쭈물한다니까 얘는.
그런 점이 하루나의 매력적일지도 모르지만.
"사이렌지는 괜찮아."
"...뭐가?"
"사이렌지가 어떤 선택을 하건, 분명 그 선택은 고민 끝에 나온 것일테고, 그런 사이렌지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곤 생각하지 않거든."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곤 하루나의 고민에 대한 내 대답 대신 조언을 했다.
"정말로 친구에게 이야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
지금까지 고민해왔던 순간들도 언젠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분명 올테니까.
그러니 사이렌지는 사이렌지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해."
장난스레 웃곤 목소리를 밝게 한다.
"뭐,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사이렌지는 좀 더 응석부리고, 좀 더 욕심을 내고, 좀 더 자신을 위하는 편이 낫지 않아?
남을 배려하는 것 만큼이나 자신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건 중요하니까.
사이렌지는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해도 좋다고 생각해.
설령 너의 비밀사항이 심각한 것이라 하더라도,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너를 친구라 생각하는 아이들이 널 싫어하게 되진 않을거라 믿으니까."
고민 상담을 자처했지만, 지금까지 대화로 오히려 하루나가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지.
하루나도 연애문제에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진 않았을텐데.
리토의 연애사를 도와주는 사루야마처럼, 하루나에게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거려나?
중학교 시절부터 리토를 좋아해왔던 하루나의 마음을 누가 가장 먼저 알아채주려나 몰라.
그러니까, 나같은 이성 대신 부담없는 동성친구로 말이다.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루나를 보고 있던 차였다.
"...아키츠군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주는거야?"
"그야 나는 사이렌지가..."
...아.
말하다말고 입을 다물곤 당황한 얼굴이 된 나를 하루나가 응시하고 있다.
하마터면 네가 리토를 좋아하고 있다는걸 아니까라고 말할뻔 했네.
얼른 말을 돌려야...
"......사이렌지는..."
"......"
방금전 실수와 물끄러미 응시해오는 하루나의 시선에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한차례 말을 삼키곤, 침묵한 하루나를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친구니까.
정말로, 소중한...친구."
말을 마치곤 어색함과 긴장과 얼떨떨함을 숨기려 한손으로 입을 가리는 날 보며 하루나는 모자를 눌러썼다.
"...그래..."
그저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하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하다고 느껴질 즈음, 하루나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때..."
"?"
"그 때의 여자아이와는...어떻게 됐어?"
그 때? 아, 유우사키 말이로군.
"네가 떠나고서 그 녀석도 달아나버렸어.
쫓아가서 달래느라 고생이었지."
"달래?"
"...울고 있었으니까. 그 녀석."
"엣..."
내 말에 당황한 하루나가 고개를 숙였다.
"저기...미안."
"왜 사이렌지가 사과하는거야?"
"그건...나 때문에,"
"말해두는데, 그건 사이렌지 탓이 아냐.
그건 내가 한 선택이니까.
지금도 그 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철회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그 때 그 녀석을 쫓아간 걸 후회하지도 않아.
설령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대답도, 행동도 바꿀 일은 없으니까.
그러니 이건 네가 사과할 일이 아냐."
"...아키츠군은 손해보는 사람이야."
"어째서?"
"선택지가 엉망이잖아."
"일관성있게 널 쫓아와주길 바랐어?"
"아니. 만약 그랬다면 환멸했을거야."
"그건 참 유감이네."
상냥한 하루나라면, 울고 있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오해를 해명하러 온 나를 좋게보진 않았겠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내 반응에 하루나도 긴장이 완화된건지 표정이 풀어졌다.
"...그 아이는 잘 달래줬어?"
"응, 뭐...다행히도 말야.
나로서도 그 아이가 울어버릴줄은 몰라서 당황하긴 했었지만 어떻게든 달랠 수 있었지."
"...분명 그 정도로 아키츠군을 좋아했을거야."
"엑...? 아니, 그럴리가.
나 그 녀석을 만난건 그날로 겨우 두번째였는데?"
"호의를 갖게 되는건 시간으로 정해지는게 아닌걸."
"그건 맞는 말이지만..."
라라도 두번째 만남에서 리토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 아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된거였어?"
"교장에게 쫓기고 있던걸 도와줬어.
청바지에 헐렁한 반팔 차림으로 헐레벌떡 달아나고 있었거든."
"......아."
"왜 그래 사이렌지?"
입가로 손을 가져가는 하루나의 반응에 의아하며 묻자 머뭇거리며 하루나가 입을 열었다.
"...나, 실은 예전에 그 아이를 만난 적이 있어."
"정말?"
"응. 그때도 그 아이는 뭔가로부터 도망치듯 어디론가 급히 뛰어가고 있었어.
그 때...아키츠군이 그 아이를 도와준거였구나?"
"어라? 그럼 사이렌지도 나와 같은 날 그 아이를 만난거였어?"
"후후, 그것 참 우연이네."
신기한듯 하루나는 작게 웃었다.
조금은 거북했던 유우사키 관련 화제가 무난히 마무리 된 것 같아, 하루나의 고민에 대한 보충으로 생각해뒀던 화제를 꺼냈다.
"뭐, 사이렌지의 고민 상담은 끝났다 쳐도 말야, 방금전 사이렌지의 질문이 너무 추상적이라서 내 답변도 추상적일수 밖에 없었잖아?
그러니까 다른 친구의 고민 이야기를 들려주지.
고민의 이유가 다르더라도 사이렌지에게도 참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키츠군, 그렇게 뽐내면서 말하지 않아도..."
"후흥-, 딴죽을 걸 정도면 어느정도 기운은 차렸나보네?"
"쿡...못말려."
웃음기를 머금은 하루나를 보곤 속으로 화젯거리를 정리했다.
하루나 본인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것 보단 여기선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얘기를 이끌어나가는 편이 좋겠지.
"만약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누굴 선택할지에 대한 화제인데 말야."
"...으응."
"만약 라라라면, 방금전 질문에 어느 쪽을 택할거라 생각해?"
"라라?"
"음. 그러니까, 별건 아니고..."
고개를 갸웃하는 하루나를 보고 보충 설명을 넣었다.
"...렌 말야.
오로지 라라를 만나기 위해서 지구로 온거잖아."
"......아."
이제야 떠올렸다는 듯 반응하지마 하루나.
아무리 최근 렌보다 룬이 활동하는 빈도가 높다지만! ...높다지만!
교내 제일 미소년의 존재감이 희박해져가는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내심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라라의 이상한 약혼자 후보들과는 달리, 렌은 순수하게 라라 본인을 줄곧 좋아하고 있잖아.
그런데 라라는 유우키만을 바라보니까, 1학년 때부터 줄곧 마음고생하는 렌의 모습이 신경쓰여서 말야."
렌의 라라를 위하는 마음과 용기는 리토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걸 드러낼 기회가 없다는게 문제지.
외모야 뭐, 리토도 렌에게 꿀리지 않는 미소년이고.
누군가가 리토를 보고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을 때, '저게 보통이면 다른 남학생들은 죄다 오징어잖아!'라고 외칠뻔 했던 건 여담이다.
하루나는 렌의 이야기에 공감하듯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아키츠군은 라라가 유우키군과 렌군 둘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신경쓰이는거로구나?"
"응. 맞아."
"...아키츠군은, 만약 라라라면 어떤 선택을 할거라 생각해?"
...어라?
"그거 내가 사이렌지에게 한 질문인데, 내가 답해야 하는거야?"
"아키츠군은 라라랑 이야기가 잘 통하잖아.
그런 아키츠군이라면 라라의 마음을 알 수 있을거라 생각해."
그렇다고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려주는 건 아니지 않아?
거기다 하루나도 라라랑 얘기는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내 의견을 물어보는 건 그만큼 라라의 마음이 신경쓰인다는거겠지.
리토와 렌, 라라 셋의 현재 상황은 아마도 하루나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비슷할 테니까.
잠시 생각해보곤 말했다.
이런 대답으로 하루나가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다면야 나쁘진 않겠지.
"내 생각을 말하자면, 라라는 셋 다 슬퍼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
"어떻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면,
그리고 만약 나머지 둘이 서로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말야..."
꿀꺽 침을 삼키는 하루나에게 폭탄을 떨어뜨린다.
"우선 얘기해 두는데, 우주의 개방성을 얕보지마."
"응?"
"일부다처(一夫多妻)든, 일처다부(一妻多夫)든, 다처다부(多妻多夫)든...선택은 언제나 열려있으니까."
"에에엣!?"
하루나가 새된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 아, 아키츠군? 그건 너무 개방적인게 아닐까?"
"다 함께 행복해지는 답을 바란거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뒤얽힌 관계인 셋이...뭐, 넷이나 그 이상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서로 납득한다면 그게 최선이겠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야."
다만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선택지가 하루나에겐 상식의 밖에 있었다는게 문제지만.
"만약 라라나 유우키, 렌 중 한명이라도 그런걸 바라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좋아하는 이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셋이, 또는 그 이상이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봐."
내 말을 한번에 받아들이긴 어려웠는지 하루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양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상식 외의 선택지가 어지간히도 마음을 흔들었나보다.
"그..."
"왜 그래?"
"...아키츠군은, 정말로 다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야.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간에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하루나가 삼각관계를, 어쩌면 사각, 오각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야 일은 잘 풀리겠지.
라라야 뭐, 다함께 행복해진다는 선택지를 거절하진 않을테고.
다만 렌과 라라의 문제라면...
라라가 렌도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리토를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렌도 좋아하고 있다면.
정말로 라라가 리토와 더불어 렌도 함께 좋아해줄 수 있다면, 렌도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한 미래는 아닐 것이다.
좋아하는 여자가 여럿이어도 된다면, 좋아하는 남자가 여럿이면 안 될 이유는 없잖아?
더불어 데빌루크행성에 남성우월주의가 퍼져있는게 아니라면, 후계자가 여자면 안될 이유도 없고.
솔직히 데빌루크의 정명한 후계자는 약혼자 후보 따위가 아닌 라라 본인이고.
그러니까 라라는 좀 더 상식을 버려줬으면 좋겠다.
나머지는...리토가 다 함께 행복해진다는 선택지를 고를 뿐이다.
늦어도 고교 졸업전까진 어떻게든 결말이 나겠지. 대학까지 모든 친구들이 같은 대학을 가진 않을테니까.
만약 리토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단 한명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해주겠지만...조금은 복잡한 기분이 될지도 모르겠다.
상식을 돌파한 이야기가 부담이 되었던걸까.
걸어가면서도 붉어진 얼굴을 한참이나 식히지 못하던 하루나가 천천히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키츠군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
"내 말?"
"선택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상식돌파한 연애관에 대한 얘기인가.
라라가 문어발식 관계를 선택할거라는데 장담해주길 바라는건가 싶어서 이어질 하루나의 말을 기다렸다.
"...다음에 그 아이를 만난다면,"
"그 아이?"
"그러니까 유우사키말야."
"어라?"
"왜 그래 아키츠군?"
"아니, 저기..."
신경쓰이는 점이 있어서 하루나에게 물었다.
"...나, 사이렌지에게 그 아이의 성(姓)이 '유우사키'라는 거, 말했던가?"
"......"
내 말에 하루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이렌지?"
"마, 말했어! 분명! 대화 중에!"
"어, 그, 그런가?"
"응! 절대로 말했으니까!"
"으, 으응..."
하루나의 주장에 기세가 눌려 고개를 주억이다 문득 떠오른게 있었다.
"...아. 그러고보면, 설마 그 때야?"
"무, 무슨 말일까...?"
내 반응에 당황해하는 하루나에게 떠오른 답을 내놓았다.
"풍기강화주간에 코테가와랑 시즈와 점심 먹으면서 유우사키 관련으로 얘기를 했던 적이 있었거든."
설마 그 때 내가 유우사키라는 성을 언급 했던걸까?
"그, 그래! 그 때 말야!
그것보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 그렇지.
말 끊어서 미안해 사이렌지.
그러니까...무슨 얘기였지?"
하루나의 질책에 솔직히 사과하곤 아까전 말의 계속을 기다렸다.
어쩐지 방금전보다 피곤한 얼굴이 된 하루나는 한차례 숨을 들이쉬곤 말을 이었다.
"...아키츠군이 그 아이를 다시 만났을 땐, 그 아이의 마음을 아키츠군이 마주봐 줬으면 좋겠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기분은...잘 알고 있으니까.
그 아이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야 유우사키는 귀엽고, 행복해질 수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를 받아들여준다면, 그 아이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걸 보여준다면, 나도 아키츠군의 말을 믿어보기로 할께."
"......"
내 말을 믿어주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굳이 날 갖고 그 연애관을 실증해보겠다는 생각은 버려.
엉망진창 연애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하루나가 이사람 저사람을 꼬시려 드는 내 모습을 보곤, 오히려 상식이 없는 연애관에 환멸을 갖거나 하진 않을지가 걱정이라고!
곤란한 얼굴이 겉으로 나왔나보다.
하루나가 어쩐지 심술궂은 어조로 물었다.
"설마 아키츠군은 자신이 없어?"
"아니,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 유우사키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하루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만약, 유우사키를 좋아하게 되어도, 그러니까 그..."
주저하다가 조심조심 입을 열었다.
"...사이렌지는, 날 싫어하게 되거나 하진 않는거지?"
"엣...?"
내 말을 듣고 삽시간에 얼굴이 붉어진 하루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과, 과장됐어 아키츠군!
그, 그런걸로 나, 아키츠군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으니까!"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사이렌지."
"아키츠군이 이상한 소릴 하니까...!"
한동안 실랑이 끝에, 아우성치던 하루나와 그걸 달래던 나는 둘다 진이 빠진채 근처 벤치에 앉아 쉬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요컨데 하루나는 자신에게 용기를 줄 계기를 달라는 거잖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사이렌지."
"어떻게?"
"유우사키가 되었든 다른 누군가가 되었든간에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노력할테니까...
그동안 사이렌지도 연인을 만든다는 건 어때?"
"엑!? 나, 나도!?"
"물론! 나 혼자 연애 문제로 골머리 썩는 건 어쩐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 나는 별로..."
"응! 너라면 별로 어려울것도 없잖아? 사이렌지 정도의 미인이라면 누구라도 거절하지 못할 걸?"
말꼬리를 잡아채여 혼란한 하루나를 설득한다.
"그리고 이건 좋은 기회이기도 해."
"기회?"
"내가 성공한다면 사이렌지가 용기를 얻고.
사이렌지가 성공한다면 내가 용기를 얻을테니까."
둘이 함께 도전해서 시너지 효과를 보자는거지.
빨간불도 함께 건넌다면 두렵지 않다잖아.
물론 양심이 있다면, 그리고 생명이 소중하다면 빨간불에선 건너지 맙시다.
"둘 중 한명이 혼자 앞서나가는 것도, 뒤쳐져 바삐 쫓아가는 것도 외롭잖아.
그러니까, 함께 걸어가자."
"함께..."
"응. 서로가 용기를 내서,
언젠가 나의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생기고, 사이렌지에게도 손을 잡아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걸로 서로 Win-Win이겠지?"
연인과 행복해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기쁘게 웃으며 축하해 줄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소중하니까 말야.
하지만 내가 제안한 미래상은 아마도 하루나에겐 미덥지 않아 보였나보다.
머뭇거리던 하루나의 입에서 나온건 승낙이 아닌 질문이었으니까.
"...혹시 우리 둘 다 못 사귀면?"
"어라? 혹시 못 사귈까봐 겁나니까 벌써부터 약한 소리하는거야?
이럴 때야 말로 필요한 건 용기라고.
렌을 봐. 언제나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라라에게 마음을 전하고 있잖아?"
"정말이지..."
킥킥 웃는 하루나를 보다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사이렌지는 행복해질거야. 내가 보증할께."
"......"
"뭐어, 걱정마.
단정하고 성실하지만 소심한 사이렌지가 졸업식까지도 연인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 땐 내가 어떻게든 해 줄테니까."
가슴을 탕- 하고 두드렸다.
졸업식에서 하루나에게 고백하려는 녀석이 있다고 리토에게 몰래 귀띔이라도 준다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하루나에게 달려가 주겠지.
내 허풍에 사이렌지는 가만히 미소지었다.
"...응. 그땐 잘 부탁할께 아키츠군."
"하하하~ 맡겨두라구."
그렇게 어쩌면 고교생활 마지막이 될 오지랖 계획을 구상하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땅거미가 내린지도 한참.
어두워진 공원엔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 수풀 안쪽 어두운 곳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는 하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아키츠군?"
"어두운 곳, 별로 좋아하지 않지?
불안하다면 손 정도는 잡아줄 수 있어.
물론 사이렌지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말야."
그냥 내버려뒀다가 예전처럼 허리를 분질러버릴 기세로 껴안아지는 건 사양하고 싶고.
아프지도 않고 솔직히 기분은 좋았지만 무섭다고 그거.
포옹이라는 건 본디 더 마음 따스해지는 것일텐데...
또, 패닉상태로 주저앉아서 떠는 하루나를 달래다가, 난데없이 다리를 잡아채여서 철퇴마냥 휘둘러질 위기에 빠지는 것도 사양이다.
다만 친한 사이라도 이성이랑 손잡는다는 건 얌전한 아이들에겐 부담스러우려나.
낮에 별의별 일을 다 당했다지만, 스킨십에 대한 부끄러움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내밀어진 손을 보던 하루나가 중얼거렸다.
"그 때도 이런 저녁이었지?"
"응?"
눈을 깜빡이는 내게 하루나가 웃었다.
"별로 싫거나 하지 않아."
"오, 그건 참 다행,"
"함께 있어주겠다고...지켜주겠다고 말한 널 믿고 있는걸."
"......"
...이거 내가 했던 말이잖아.
부끄럽게.
"저기...그거 직접 들으니까 엄청 부끄러운데."
민망함에 새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자 하루나가 작게 웃음을 흘린다.
"못 이기겠다니까... 정말이지, 사이렌지를 좋아하게 된 사람은 큰일이겠어."
"후후, 누구야 그건?"
"......노 코멘트로."
그런거 말할 수 있을리 없잖아.
키득하는 웃음 뒤에 하루나가 손을 내민다.
한 손으론 붉어진 얼굴을 가린채, 내밀어진 하루나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잡았다.
"......오늘만이니까."
"후훗, 고마워."
손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함.
하루나의 웃음과 두근대는 고동 속에 하루나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보면 사이렌지는 어째서 고양이일 때 하필 풀숲에 숨어있었어?"
"아키츠군을 만나고 싶었으니까."
"엣? 나를?"
"아, 아니 그게..."
하루나가 당황해선 팔을 휘둘렀다.
덕분에 맞잡고있던 내 손도 이리저리 휘적였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나짱이 아키츠군의 집에 지내고 있잖아?
그러니까 나나라면 고양이 상태인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아, 아...그래서..."
"응...아키츠군은 산책하다 자주 만나니까.
평소의 산책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아키츠군을 만날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
처음 고양이 상태로 되었을 땐 사이렌지도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라라도 개에게 쫓기던 오시즈를 도와주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니까 도움을 청할 데도 없었겠지.
그 와중에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는 나나가 떠올랐고, 이어서 산책하다 마주치는 내게 생각이 미쳤던거로군.
"아키츠군이 산책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건 좋아하니까.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때론 오늘처럼 신기한 만남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야."
"후후, 어쩐지 마론이 생각나네."
"그래?"
"산책을 좋아하잖아."
"아, 그건 닮았을지도."
"귀여운걸 보면 정신을 못차리곤 하고."
"아하하..."
고양이에 사족을 못 쓴 기억이 떠올라 머쓱해서 머리를 매만졌다.
"가끔 스킨십이 지나쳐 음란해 보이기도 하지만..."
"으, 음란..."
"스토커로부터 날 지켜주기도 했고."
"아하하, 쑥쓰럽네 이거 참."
"...어째서 아키츠군이 쑥스러워 하는거야?"
"엣?"
"엣."
"...내가 사이렌지를 도와준 이야기 아니었어?"
"마론의 이야기야."
"에엣!? 대체 언제부터?"
"그러니까, 처음부터."
맙소사. 하루나가 날 놀렸어!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건가.
"그래도 그 때 일은 나도 쑥스러워해도 괜찮지?"
"...마론의 이야기라니까?"
"나도 지켜줬잖아!?"
웃음을 참는 하루나에게 부-부- 항의했다.
"응. 물론 고마워하고 있어 아키츠군."
"엎드려 절 받기는 사양하고 싶은데 말야..."
"마론은 아키츠군처럼 뽐내거나 하진 않는걸."
"네네. 역시나 마론은 인기 만점이네요.
나나도 요즘엔 마론마론 노래를 부르면서 사이렌지네 집에 들락날락하던데, 정말이지 부럽네 그 녀석."
볼멘 목소리로 푸념하며 투덜내는 내 모습에 하루나는 키득 웃었다.
"...응. 나도, 그런 마론이 좋아."
맞잡은 손을 쥔채 하루나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미안해 아키츠군.
나 때문에 오늘 하루를 다 써버렸잖아?"
"아니,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닌걸?
이런저런 해프닝이 있었다지만 오늘은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말야."
귀여운 고양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 꼽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하루였지.
"...아키츠군은 혹시 나에게 바라는 건 없어?"
"바라는 것?"
"고민을 들어준 답례를 하고 싶어.
만약...해 줄 수 있는거라면, 들어줄께."
고민 상담이라고 해봐야 반쯤 억지로 토해내게 한 것 같아서, 거기까지 고마워하면 오히려 내 쪽이 민망한데.
"난 사이렌지에게 보답을 바라고 고민을 들은게 아냐.
난 그저..."
하루나가 기운을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말하려다 말을 멈췄다.
...기왕 부탁을 들어주겠다는데, 조금쯤은 바라는 걸 말해도 되려나?
최근 하루나와 서먹했던 관계를 더 이상은 반복하고 싶진 않았기에 굳이 말해보기로 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지금처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정말 기쁠거야."
"...그게 다야?"
"응."
"다른건 없어?"
"이미 넘칠만큼 충분해."
"......"
"저기, 혹시 지나친 바람이려나...?"
하루나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라 곤란해하고 있던 차였다.
"...가끔은..."
"?"
"아키츠군도 유우키군이나 사루야마군처럼 같은 중학교였다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어."
옅게 웃는 하루나의 모습에 긴장이 풀려 덩달아 웃음지었다.
"그랬다면 아마 지금보다 4년은 철이 덜 든 불량아를 만났을거야."
킥킥...
내 말이 우스웠는지 하루나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았다.
"아키츠군."
"응?"
"고마워."
"뭐가 말야?"
"후후...전부 다."
하루나는 싱긋 미소지었다.
나로서는 처음 마주하는 표정에 무심코 헛웃음이 나왔다.
"...뭐야. 너, 잘 웃을 수 있었잖아."
"...나, 그렇게 웃음이 적었어?"
"아니, 아예 웃질 않았던 건 아닌데..."
애매한 웃음도 웃음이고, 곤란한 웃음도 웃음이고, 쓴웃음도 웃음이고, 쓸쓸한 웃음도 웃음이니까 문제지.
다만 친구들을 걱정시키고 있는게 아니었는지 불안해하는 하루나를 보니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어떻게 대답해야하나 고민하다 공원을 훑어보았다.
여름을 알리는 폭죽 조각이 공원 쓰레기통 근처에 떨어져 있다.
꽃처럼 웃는다는 표현이 어울리던 방금 전 미소와, 불꽃이 하늘을 가득 채웠던 여름의 야경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키호씨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은 듯 했다.
집까지 에스코트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나를 하루나가 불러세웠다.
"잠시만 기다려줘 아키츠군."
"응?"
"돌려줄게 있으니까, 잠시만 안에 들어와 기다리지 않을래?"
"들어갈 것까진 없어. 난 그냥 현관에 서있어도 괜찮아.
여자아이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는 건 되도록이면 조심하고 싶고."
"나, 아까 아키츠군을 믿고 있다고 말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믿어주는 건 나도 기쁘지만, 사이렌지는 사내아이에겐 좀 더 경계심을 갖는 편이 좋을 것 같으니까."
"정말...난 앞가림 못하는 어린애가 아니라구."
날 설득하는 건 단념했는지 하루나는 푸념을 흘리곤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가벼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하루나가 종이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왔다.
종이 가방 안에는 방금전 하루나가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 들어있었다.
"혹시나 나나가 이걸 찾을지도 모르니까...
교복은 아키츠군이 도로 가지고 돌아가줘."
"응, 그럴께."
난데없이 하루나가 줬던 옷이 사라지면 나나도 당황할테고, 의심은 십중팔구 나에게 돌아올테니까.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는데 하루나가 뭔가 주저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왜 그래?"
의아한듯 바라보자 하루나가 불안한듯 부끄러운듯 종이 가방을 힐끗 쳐다보곤 날 올려다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상한 짓 하면 안돼?"
"......"
"아키츠군?"
쿡.
"아얏?"
검지로 하루나의 이마를 찔렀다.
믿고 있다는 건 대체 뭐였어.
이마를 부여잡은 하루나에게 한숨을 내쉬곤 맥빠진 어조로 답했다.
"정말이지...그런 짓 안해."
"미, 미안."
"아, 모자도 돌려줄께."
"모자는 선물이니까 받아둬."
"그래도..."
"사이렌지 외엔 쓸 사람이 없는걸.
그리고 모자도 귀여운게 사이렌지랑 잘 어울렸잖아?
무엇보다..."
목소리를 죽이는 날 의아한듯 바라보는 하루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곤 장난스레 웃었다.
"역시 말야, 남자아이에게 첫 선물로 속옷을 받았다는 추억보단,
모자를 첫 선물로 받았다는 추억 쪽이 좀 더 그럴싸하잖아?"
"!?"
얼굴 새빨개진 하루나를 보곤 뒤로 물러나 킥킥 웃었다.
"...심술궂어 아키츠군은."
"아하하...그래도 내 입장도 생각해줘.
여자아이에게 주는 첫 선물이 속옷이라니 봐달라고."
연인도 아닌 이성으로부터의 첫 선물이 속옷이라니, 그거 성희롱이잖아.
낭만은 커녕 상식의 파편조차 없다.
"거기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이렌지는 얌전하고 성실하니까, 그만 괴롭혀주고 싶은가봐."
"괴, 괴롭혀주고 싶다니...애 같아."
"음. 그럴지도.
섬세하지 못했던 점은 반성할게."
"...정말 반성하고 있는거야?"
"핫핫핫 정말이라니까~"
"정말이지..."
뿌-하고 볼을 부풀린 하루나는 한숨을 쉬곤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나도 사과할께."
"응? 뭘 말야?"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는 아키츠군에게 화를 냈던 것 말야.
아키츠군은 나름대로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던건데 무작정 화를 내서 미안해."
"...그러고보면 나, 사이렌지의 화난 얼굴은 처음봤어."
"미, 미안..."
화냈다고 할까, 그냥 화난 얼굴을 한 것 뿐이지?
놀라기야 했지만, 하루나가 고함을 지르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그런걸로 사과할 것까진 없을텐데.
"괜찮아. 오히려 난 사이렌지가 화를 내줘서 기쁜걸."
"엣."
내 말에 하루나가 당황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몸을 뒤로 뺐다.
"저, 저기...아키츠군은 혹시 '그런 취미'야?"
...뭔 소리야 이녀석.
콕.
"아얏?"
하루나가 이마를 누르며 울상을 지었다.
"또, 또 찔렀어?"
"실례인 생각을 하는 나쁜 위원장에게 주는 벌입니다.
기쁘게 받아들이세요."
"난 벌을 받는게 기쁘거나 하지 않아!
그럼 방금 전 아키츠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라는거야?"
"...사이렌지는 가끔 바보 같지 않아?"
"너무해 아키츠군!"
불평하는 하루나를 보곤 어쩔수 없이 한번 더 말해주기로 했다.
"사이렌지는 상냥하잖아?
그런데도 내가 사이렌지에게 짖궂게 구는 만큼,
사이렌지도 나에게 화낼 수 있다는 점이 기쁜거야."
"그거...결국 나한테 심술궂게 군다는 뜻 아냐?"
"...뭐, 됐어. 딱히 사이렌지가 몰라도."
어깨를 으쓱하곤 한걸음 물러나자 오히려 신경쓰였는지 하루나가 묻는다.
"뭐야? 뭘 모른다는거야 아키츠군?"
"글쎄? 중요한 것도 아니고 몰라도 괜찮은거 아닐까?"
"그렇게 말하면 더 신경쓰이잖아?"
"정 궁금하면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지 않아?"
"더더욱 의미불명이야 아키츠군!"
어쩐지 좋을대로 당황하는 하루나의 모습에 동하는 장난기를 다스리곤 원망스러운 듯한 하루나의 시선을 뒤로 하고 귀가했다.
====================
7월 말에 올릴 예정이었는데 결국 업로드가 한 주 밀려 8월에 올리게 되었네요OTL;
다음편이면 대충 에피소드 마무리가 되려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연계 에피소드랍시고 이걸 죄다 40화(초안) 한편에 우겨 넣으려 했던 제가 바보였네요=_=;
앞으론 욕심부리지 말고 써야죠.
그리고 슬슬 청출어람(靑出於藍) 4화나 백미(白眉) 1화(리메이크)도 병행해 써봐야겠습니다.
청출어람은 삽화를 대체 얼마나 묵히고 있는거람...orz;
(3화 쓴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가고...)
그럼 다들 더위 조심하시고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p.s. 참조 이미지.
화낼 수 있다는 건
고양이와의 조우(터틀러님 러프)
아기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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