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드리운 가운데 나와 코테가와 만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는 교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에 코테가와의 머릿결이 한차례 흩날렸다.
사르륵- 기분좋게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를 바라보던 코테가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아키츠군..."

"레알?!"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내 모습에 살며시 웃으며 코테가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기뻐!
마치 꿈만 같아...
코테가와가 날 좋아해주다니..."

"...그게 아니에요."

"응?"

고개를 젓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코테가와에게로 다가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 코테가와는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유이라고 불러줘 료스케..."

뜨거운 한숨이 귓가를 타고 흐르며 목덜미를 간질였다.
뇌리를 흔드는 달콤한 목소리에 홀린듯, 코테가와의 눈동자를 빠져들듯 응시했다.
메마른 침을 삼키곤 입술을 벌려 떨리는 목소리로 코테가와...아니, 유이의 이름을 불렀다.

"좋아해 유이......"




"으, 음냐......유이...에헷..."

"...아키츠 료스케?"

"...으응...?"

달콤한 목소리에 녹아들듯 멍해진 정신을 가눌생각도 않은채 목소리가 난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단쪽에서 머리를 뒤로 틀어묶고 안경을 쓴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하겠습니다. 화학물질 H2O 를 뭐라고 하지요?"

"후아암...산소..."

"......"

조그맣게 킥킥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귓가에 들리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흐릿한 시야에 눈을 비비고 돌아보니 어느새인가 클래스메이트들이 자리에 앉아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일어선채 서로 마주보고 있던 유이는 내 오른쪽 책상에 앉아서 골치 아프다는듯 이마를 잡고 있었다.

"......어라? 여긴...?"

아리송한 상황에 머리가 따라잡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려니
교탁에 서계신 여성, 그러니까 화학 선생님께선 두통이 이시는지
관자놀이를 한차례 메만지시곤 나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네."

롤플레잉 게임이라도 즐기시는겁니까.
키득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업시간에 겁도없이 숙면을 취한 용기있는 아키츠군.
화장실에 가서 산소로 세수하면서 H2O 는 대체 뭘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세요."

"...넵."

꾸벅 고개를 숙이곤 뒷문을 통해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왔다.
찬물에 얼굴을 씻어 정신을 차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망상 넘치는 꿈을 꾸다니.
거울 너머에 비친 붉어진 얼굴을 보곤 부끄러움을 잊고자 양뺨을 소리나게 두드렸다.




"아키츠군은 좀더 공부를 해야겠네요.
방금전 질문은 중학교때도 배운거였잖아요."

점심시간.
함께 식사를 끝마친 코테가와가 도시락을 정리하면서 한 말이다.

"잠결에 실수한거였어..."

그냥 잠이 덜깬 상태에서 나온 말이라니까?
내 대답이 미덥지 않았는지 코테가와는 다시한번 충고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에요. 좀더 학업에 힘써야 한다구요."

"저번에는 단정함이 본분이라고 했으면서..."

"둘다 중요하니까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며칠 뒤에는 테스트가 있잖아요?"

코테가와의 우려섞인 관심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뒤에서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리토가 내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키츠.
나도 요즘 제대로 공부하질 않았거든.
아버지 만화 어시스턴트 하는것도 바빴고...
그러니까 함께 힘내자구."

"그..."

엄지를 치켜세우곤 원츄를 날리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리토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리토...그런게 아니야...
외모가 이래서 오해하는진 모르겠지만,
나 그렇게까지 공부랑 담쌓고 지낸건 아니라고?
오히려 내쪽이 널 걱정해줘야 한단 말야...

그렇다고 기껏 걱정해주는 리토가 무안하게 면박을 줄수도 없는지라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이해보였는지 코테가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의욕없어 보이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안되요 아키츠군.
성실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구요."

"일단 성실하게 생활할 마음인데 말이지..."

"방금전 수업때 졸았으면서...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구요."

깜빡 졸았던 화학수업시간의 일 때문에 코테가와는 내 말이 영 믿음이 가지 않았나보다.

"어떻게 하면 아키츠군이 공부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뭐야뭐야? 무슨 이야기?"

리토에 이어서 미오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궁금한듯 물어오기에 손가락으로 코테가와를 가리키며 답해줬다.

"어떻게 하면 날 공부시킬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것 같은데?"

"강건너 불구경 하듯 말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 문제가 아니라 아키츠군 당신의 문제라고요!?"

버럭- 소리를 낸 코테가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미오는 뭔가 떠오른듯 손바닥을 탁 두드렸다.

"아, 그럼 이건 어때?
방과후 일대일 개인교습 같은건?
분명 옆에서 도와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개인교습 말인가요?"

"헤에~ 그거 괜찮은데?"

"모미오카?"

어느새 다가온 리사가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내 책상위에 살짝 걸터앉은 리사는 내쪽으로 몸을 숙이며 히죽 웃었다.

"후후...그럼 리사 선생님과 개인 교습을 시작해볼래 아키츠군?"

"저기,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

코가 맞닿을 얼굴을 가까이 한 리사의 모습에 약간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에 앉은채로 슬쩍 상체를 뒤로 빼는 날 재밌다는듯 바라보면서 리사는 문제를 냈다.

"그럼 문제~ 「내 것인데 남이 더 많이 쓰는 것」은?"

"「이름」."

"정답~!"

리사는 잘했다는듯 책상에 걸터 앉은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제를 맞춘 학생을 대견한듯이 칭찬하는 선생님 역할인가...
...근데 이거 공부가 아니라 그냥 수수께끼잖아!
그리고 부끄러우니까 머리 쓰다듬는건 멈춰줘.

"후후~ 잘 맞췄어요 아키츠군.
착한 학생에겐 상을주지 않으면~"

"응?"

초승달같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리사는 왼손으로 치마를 잡더니 슬쩍 위로 걷어올렸다.
걷어올려진 치마의 그림자 너머로 프릴이 달린 실크색 속옷과 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가랑이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예상을 넘은 대담한 행동에 놀란 나를 보며 리사는 유혹하듯 말했다.

"이 안을, 알고 싶지 않니?"

"...꼴깍."

"잠깐! 뭐하는거야 모미오카씨!
아키츠군도 그 시선 치우지 못해요!?"

내 상의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리사를 코테가와가 황급히 말리며 외쳤다.
코테가와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잽싸게 돌리는 날 보며 리사는 유쾌한듯 웃으며 손을 치웠다.

"아하하~ 역시 보고 싶었구나? 남자들은 단순해~♬
유감이지만 서비스는 여기까지~"

아니, 여전히 내 책상위에 앉은채로 다리를 꼬고 있으면 치마속이 보이는데?
약간 얼굴이 상기된 주제에 계속 히죽거리기나 하고...
가끔씩 리사가 보이는 도발적인 태도는 발돋움하고 싶은 나이대의 표현인가,
아니면 당황하는 남자애들을 보는 재미로 하는 행동인걸까?
1학년 학원제 때 애니멀 찻집때의 동물 의상을 부끄러워 했던 적도 있고,
성희롱 같은건 친구들 사이에서만 치는것 같으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딴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때 다시금 미오가 의견을 냈다.

"그럼~ 내기는 어때?"

"내기?"

"성적 승부 말야.
아키츠군의 호승심을 이용하는거지.
저번에 라라찌와의 결투도 투쟁심이 남아있어서였잖아?"

"응~ 그러고보면 승부할 때의 아키츠군은 꽤나 즐거워 보였잖아?"

...그건 싸우는게 좋아서 그랬던게 아닌데?
내가 무슨 배틀 매니아도 아니고.
그땐 라라의 긴장감 없이 유쾌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편승한거 였다고.
거기다 「피할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잖아?

"성적으로 승부라...
확실히 아키츠군에겐 괜찮은 방법이겠네요."

미오에게 동의하는 리사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곤 내쪽을 보며 확고해 보이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럼 아키츠군. 저랑 내기하지 않을래요?
성적승부 말이에요."

코테가와의 의도가 뭔지는 대강 알겠다.
넘쳐흐르는 나의 파괴욕구, 투쟁심, 승부사 근성...뭐, 어쨌든 그런걸 자극해서 공부를 장려한다는 거겠지.
착각이지만...
그야 라이벌이 있다면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지.
상대보다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할테니까.
나로서야 재밌는 승부가 될꺼라고 생각하지만...불량하다고 소문난 나를 상대로 모범생인 코테가와가 경쟁의식을 갖고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을것 같진 않은데?
코테가와로서는 오히려 공부할 의욕이 떨어지지 않나?

"한쪽만 유리한 승부는 사양하고 싶은데..."

"도망치는건가요?"

"...어째서 그렇게 되는거야?"

마땅찮은듯한 내 반응에 리사와 미오는 옆에서 야유하듯 부추겼다.

"에~ 설마 질까봐 겁나는거야 아키츠군~?"

"항상 코테가와씨에게 눌려 지냈잖아~
한번쯤은 역전의 기회를 노려봐도 되지 않겠어?
아, 물론 이긴다면 말이지~"

...이거 지금 깔보이는거 맞지?
일부러 그러는듯 깔깔대며 놀리는게 속이 빤히 보이지만...
이렇게까지 도발해주는데 승부를 받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피하진 않는다고."

"오오~! 과연 승부사답네~!"

꺄악 거리는 리사와 미오의 호들갑에 주위 클래스메이트들의 시선도 하나 둘 집중되었다.

「뭐야? 성적승부?」
「불량아 아키츠 료스케랑 풍기위원 코테가와 유이가?」
「방금전 여자애들의 도발에 넘어가서 받은것 같은데?
게다가 아무래도 이번엔 저 녀석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보이고...」
「하지만 성적승부라니, 아무리 그래도 결과가 너무 뻔한 승부 아냐?」
「아냐. 혹시 모른다고.
1학년때 저녀석과 같은 반 친구에게 듣기론 '엘리트 야쿠자'란 별명도 있었다던데...」
「야, 그건 성적 때문에 그런게 아냐.
성적에 신경쓰느라 학교에선 비교적 큰 사고는 안쳐서 붙어진 별명이라고.
그리고 저녀석 성적을 알아보려고 녀석의 성적표를 들여다 볼 간큰 녀석이 어딨어?」

...틀린 말은 아니다만.
실제로 시험 이후 성적은 개별 통지였으니까 상대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한 알 수 없다.
성적 공개로 경쟁을 과열시키지 않는 학풍이 나로선 정말 마음에 들지만.
공부하는 모습에서 나도 어느정도는 모범생으로 인정 받을꺼라 생각했는데 유감.

「게다가 방금전 수업시간에 선생님 질문에 대답하던거 못들었어?
저녀석의 뇌구조는 '밥+싸움+여자'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

자업자득이었습니까...
살짝 한숨을 쉬곤 다시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만약 이기면 어떻게 할꺼야?"

"음...그럼 제가 이긴다면 아키츠군의 수염「역시 학교에서 내기는 나쁜 일이군요.」끝까지 들어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에게 코테가와가 소리쳤다.
리사랑 미오도 재밌겠다는듯이 뒤에서 양 어깨를 꾹 누르며 날 억지로 제자리에 앉혔다.

"에에~ 좋잖아 아키츠군?
이번 기회에 그 나이들어 보이는 수염은 잘라버리라구~?"

"맞아-맞아-.
구레나룻 자르고 나니까 훨씬 젊어보였잖아?"

"놔, 놔라! 이놈들아!
난 이젠 내기에서 내 수염 같은건 절대 안걸꺼라고!"

「「「...이젠?」」」

내 저항을 바라보던 클래스메이트들이 내 말에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저 수염 매니아가 구레나룻을 잘랐을때 무슨 변덕인가 싶어서 몸을 사렸는데,
설마 예전에 잘라낸 구레나룻은 내기에서 져서 잃었던건가?」
「누군진 몰라도 맹자다...
아무리 승부에 이겼다지만 저 불량배 상대로 진짜로 구레나룻을 밀어버렸을줄이야...」

지금 그 맹자중 한명이 남은 수염마저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승부는 풍기위원의 승리군.」
「아아...심리전에서 이미 끝났어.
마음에서부터 진 아키츠 료스케의 패배다...」

벌써부터 승부 결과를 단정지은 녀석들에게 태클걸 여유는 없었다.
DI○의 비밀을 내기 조건으로 걸어버린 갬블러 다비의 심정이 지금과 같을까.
거기까지 심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위기감은 확실히 느껴졌다.
꿈속에서마저 이계트립을 당하는 악몽을 또 겪으라고?
리사랑 미오에 눌려 반항하는 나를 코테가와가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아키츠군. 농담이었으니까."

"거짓말 하지마!
눈이 진심이었다고?"

"...조금은요.
그래도 이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아키츠군도 의욕을 내지 않을테니까."

코혼- 하고 한차례 헛기침을 한뒤 코테가와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럼 수염대신 다른 조건을 걸죠.
아키츠군의 성적이 나쁘면 다음에 시행되는 「풍기강화주간」 동안 임시풍기위원으로 활동해주세요.
물론 그 기간 동안은 헤어밴드나 목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는 착용 금지입니다."

-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들렸다.

"설사 지더라도 80점 이상 받는다면 벌칙은 없던걸로 해드리죠.
그만큼 아키츠군이 노력했다는거니까."

코테가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승부 내용은 이걸로 끝이에요.
시험까지 힘내길 바래요."

...응?

"저기..."

"뭔가요 아키츠군?"

뭔가 미심쩍게 끝나버린 내기 내용에 의문이 생겼다.

"조건은 이게 끝이야?"

"그런데요?"

"...내가 이길 경우엔?"

"네?" "응?" "어?" "에?"

「「「뭐?」」」

애초에 내가 이길수 있다곤 생각하질 않아!?
실례인 녀석들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모습에 이마에 혈관마크가 생길것 같았다.
코테가와는 놀랐다는 표정을 금새 지우곤 슬쩍 웃었다.

"그렇네요...아키츠군이 이긴다면 뭐든 한가지 들어드리죠."

관대해 보이는 표정도 지을줄 아시는군요 코테가와씨.
확실히 관대해도 좋을 조건이지만...애초에 질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후회하진 말라고."

"아키츠군이야말로 힘내야 할껄요?
대신 60점 이하라면 염색한 머리도 바꾸고 수염까지 밀어버릴테니 각오하는게 좋아요.
뭐, 정말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염색 정도는 봐드리죠."

...어차피 이 학교엔 별의별 머리색이 다있으니까 염색은 문제없지 않아?
아무튼, 나도 그렇게 만만하진 않다 이거야.
이래뵈도 검정고시로 대학갈 수준은 되었다고.
...「현대법학입문(現代法學入門)」을 들고 다니며 읽는 코테가와도 만만치 않지만.
오랜만에 공부쪽으로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전개가 될지도...

"에~ 재밌겠다! 그럼 리토- 나랑 '성적내기'할래-?"

"핫, 라라 너한텐 안진다고!"

자신만만하게 무덤을 파지 말아줘 리토...
상식이 엄청 결여된 라라지만, 문과계통은 몰라도 이과계통에 있어선 은하계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고?
뭐,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수학점수 100점을 1000점으로 학교에서 올려주거나 하진 않으니까 리토에게도 승산은 있겠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정도는.
예전에 우연히 봤던 리토의 성적표를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날의 내기 이후 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
코테가와를 쓰러뜨리기 위해 난 혹독한 공부를 하고 있다.
납덩이를 차고 수학 문제를 풀고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영단어를 외우며 달궈진 모래에 손을 찌르며 교육방송을 본다.
하지만 혹독한 수련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다.
왜지? 내 공부방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걸까?」

"그래서, 실제론 어때?"

"...뭐가 말야 사와다?
그리고 방금전 내용은 대체 뭔데?"

"아키츠군의 공부 방법에 대한 추측들인데, 왠지 너무 그럴싸해서 말이지~"

"그래서 아키츠군에게 직접 물어보는거야.
정말로 뭔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부하는건 아닌지 말야~"

내기를 한 다음날, 학교에 오자 리사와 미오에게 들은 소문이었다.
왠지 흑색 가쿠란(옛날 남학생복)을 입은채 열혈모드로 공부를 빙자한 육체 수련을 하는 구시대 불량배의 모습이 떠오르는 소문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방금전 질문을 무시하곤 가방에서 조용히 안경집을 꺼내들었다.
안경을 꺼내 쓰자 옆자리에서 코테가와가 놀란듯한 얼굴을 했다.

"아키츠군. 혹시 눈 나빴어요?"

"아니, 이건 무도수 안경이야."

"어째서 그런걸?"

"그냥...공부할때 좀더 집중할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심리적인 효과라고 할까?
외적인 변화를 줘서 마음가짐을 바로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사둔거다.
클래스메이트들의 뻔한 결말을 예상하는 태도는 솔직히 불만이었기에,
반전이라는 묘미를 이번 시험을 통해 보여주려고 결심했으니까.

"그래서, 어때?
좀 머리좋아 보이지 않아?"

빤히 쳐다보는 코테가와와 다른 아이들을 보며 안경을 쓴채 감상을 묻자 왠지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뭐라고 할까..."

"굉장해~ 안경을 쓴 것만으로도 이정도로 바뀔 줄이야~!"

미묘한 코테가와의 반응과 달리 미오는 왠지 흥분한듯 해 보였다.
평소에 안경을 쓰고 지내는 미오니까 다른사람과 달리 좀더 특별한 의견을 보여주려는건가?

"이젠 양아치는 커녕 그야말로 두뇌파 야쿠자 보스 같은 품격이 느껴져-!
엄청난 업그레이드라고-!"

"양복 차림으로 서있으면 영락없이 냉철한 야쿠자 그룹 보스?"

"맞아맞아-. 농담이 아니고 진짜 「엘리트 야쿠자」로 보인다구~?"

"......"

안경=엘리트 입니까.
남자 위원인 마토에 아게루도 안경을 썼으니 틀린말은 아닌데.
호들갑을 떠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품격있는'이 덧붙여졌네요.
양아치에서 야쿠자 보스로 업그레이드 돼서...
미오의 말을 시작으로 「나 = 야쿠자 그룹 후계자」설을 두고 웅성거리기 시작한 클래스메이트들의 모습에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는게 제일이라는걸 실감했다.
시험날까지 힘내자, 나...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은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실수도 없었고 컨디션도 좋았다. 결과도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교실 한쪽에서는 라라가 리토의 등에 매달린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응~ 응~ 리토.
이번 주말 백화점에서 「매지컬 쿄코」쇼가 있대! 가~자~"

"그! 그러니까 그딴 유치원생이나 보는 쇼는 가기 싫어!!"

"분명 보면 리토도 재미있다고 할 걸♬"

"들러붙지 좀 마!"

패자는 얌전히 복종하세요.
아무래도 리토는 성적승부에 진것과는 별개로 「매지컬 쿄코」공연 같은건 피하고 싶나보다.
리토랑 라라의 문제야 저 둘이 알아서 잘 할테니 난 내 문제에만 신경써야겠다.
자리에 앉은채 안색이 창백해진 코테가와의 어깨에 툭-하고 손을 올렸다.
흠칫-하며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코테가와는 얼굴에 약간 땀방울을 매단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아키츠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일만큼 가까워진 코테가와를 보며 짙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원 한~가~지"

"...딸꾹."

긴장한 나머지 딸꾹질이 나온 코테가와의 모습에 잠시 멈칫해 있자 뒤에서 리사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야한거 부탁해~"

진심입니까 이 성희롱 아가씨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그런 파렴치한 부탁따위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주위 녀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했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내쪽을 바라보며 수근대는걸 보면.

「드디어 시작된건가...'반역의 아키츠 료스케'가...」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탁을 하려는거야.」
「서, 설마 러브호텔인가!?」
「그리고 그 일을 약점으로 잡아서 이후로도 이렇고 저런짓을...」
「코테가와씨 어떡해...」
「괘, 괜찮아. 여차하면 경찰에...」

...요즘 고교생들의 사고는 무섭네요.
겨우 내기 하나로 그런 부탁을 하는게 말이돼? 상식적으로 생각해...
게다가 그런 부탁을 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거 같냐고. 그렇지 코테가와?

......코테가와씨?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면 제쪽이 오히려 송구합니다만...

진심으로 경계하는 듯한 코테가와의 모습에 골치가 아파져
시험기간 동안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한차례 매만졌다.
난 아직 바라는 것도 생각 안해봤다고...
안그래도 요즘 공부한다고 바빴는지라 그냥 좀 편하게 있고 싶은데 이런 반응은...음...?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서 코테가와를 보았다.
왠지 들고양이처럼 경계하는 눈초리의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니 떠오른거지만...
모처럼 시험도 끝났으니 코테가와도 기분전환이나 시켜주는게 좋을까?
불안한듯 내 눈치를 살피는 코테가와를 향해 지금 떠오른 소망을 말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주말 아침.
약간은 따듯한 바람을 맞으며 극장가 근처에서 쉴 공간을 찾았다.
눈에 들어온 벤치에 앉아 쉬면서 손에 집어든 팜플렛을 보았다.

「버림받은 고양이」

상자속에서 고개를 내민 고양이의 그림이 그려진 팜플렛.
이번에 극장에서 상영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테니스 부의 사야카와 코요미가 읽고 있던 'MISTY'라는 잡지에서 소개된 영화인데,
어린이들이나 소녀들 취향의 귀여운 그림체로 소개되어 꽤나 인기가 좋을듯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코테가와가 재밌게 본다면 좋을텐데 말이지.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잠시 몸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단발, 웨이브 장발, 트윈테일의 여자애 셋이 영화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른들 없이 친구들끼리 보러 온건가? 귀여운 꼬마들이네...
그러고보면 라라가 오늘 백화점에 매지컬 쿄코를 보러가고 싶어했는데 리토가 동의했을까 몰라.

"많이 기다렸어요 아키츠군?"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와 쇄골이 드러난 짧은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코테가와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매만지며 서있었다.

"코테가와? 벌써 온거야?"

"아키츠군이야 말로 왜이렇게 빨리 나온거에요?
혹시 많이 기다리진 않았어요?"

"아니...나도 막 도착한 참이야."

남자쪽이 먼저 나와 기다리는게 매너니까 나름대론 생각을 해서 나온건데.
역시 일찍 나온게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코테가와를 기다리게 만들뻔 했으니까.
물방울 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코테가와는 평소의 교복차림과 달리 개방적으로 보였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원피스 위로 드러난 피부를 슬쩍 가리면서 코테가와는 얼굴을 붉혔다.

"뭐, 뭐에요... 이런 옷차림도 좋잖아요?
저도 가끔은 평범하게 꾸미고 싶다구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고 했다고?"

"에...고마워요."

약간 쑥스러워하는 코테가와를 데리고 우선 매표소로 갔다.
조금은 대기줄이 늘어난 매표소 앞에서 방금전 영화를 보러 온 세 여자아이의 바로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성인 1장이요.」
「고등학생 1장이요.」
「초등학생 1장이요.」
「초등학생 1장이요.」
「고등학생 1장이요.」

앞에선 줄이 모두 빠지고 우리 차례가 되어 매표소 앞에 서서 매표소 안의 단발 여성 직원에게 돈을 건넸다.

"고등학생 2장이요"

"저, 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요."

이정도야 이미 예상범위 안이니까 일부러 얼굴 붉힐 필요는 없겠지.
언젠가 사회에 나갈때쯤엔 '동안이시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태연하게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직원에게 건냈다.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의 직원으로부터 표를 건네 받곤 코테가와와 함께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앞서 들어간 초등학생들의 뒷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어떤 내용일까요?"

"글쎄...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되게 귀엽고 감동이라는데?"

"확실히...팜플렛을 보니 꽤 기대되네요."

"그렇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동안 하나둘씩 관객들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자 모두들 스크린으로 주의를 집중했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놓고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 앞에서 여자애들의 즐거운듯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었어~」

「응, 나 쪼끔 울었다?」

공감한다 소녀여...
고양이 이자식, 짐승 주제에 사람의 눈물샘을 이렇게 자극하기는...

「그치만 뒤에서 보던 큰 언니들도 엄청 울더라.」

「아하하, 그래.」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옆에 앉은 코테가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훌쩍...흐윽...히끅..."

"괜찮아 코테가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울음을 그치지 않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등을 두드려 주면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니, 분명 감동의 해피엔딩이었잖아?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을 잡은 고양이의 이야기인데 여기까지 울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코테가와 말고도 훌쩍거리는 여고생도 보이고...
감수성은 어린이들 보다는 사춘기 소녀들이 더 높군요...

한참을 토닥여서 겨우 울음이 잦아든 코테가와를 데리고 영화관을 나오는데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여자애가 울면서 남자와 나오고 있어.」
「응? ...남자놈 분위기가 완전 깡패인데?」
「대충 짐작이 간다. 보나마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는 안보고 저 여학생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거라구.」
「조용한 극장안에서 비명도 못질렀을텐데 불쌍하게...」
「어쩌다 저런 아저씨에게 속아서...」

착각입니다.
뭐, 그 에로 게임 같은 망상?
게다가 아저씨라니...난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숙덕거리는 주위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뭔가 이상하는 걸 느꼈는지 나와 눈을 맞추고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영화가 끝난후 약간 시장기를 느껴 미소라당의 슈크림을 사먹곤 다음 일정에 대해서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나눴다.

"이젠 뭘하죠 아키츠군?"

"음...팬시샵에 한번 들러보는건 어떨까?
방금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니까 고양이 인형같은거 하나정돈 갖고 싶어서 말이지."

"그럴까요?"

왠지 눈이 초롱초롱 기대감으로 빛나는듯한 코테가와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왜 웃는 거에요?"

"아하하. 아니, 코테가와는 정말로 고양이를 좋아하는가보다 싶어서..."

"이상할거 없잖아요!?"

놀림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화난 코테가와의 타박을 받으며 상점가의 팬시샵을 들렀다.




지그시-

"(아키츠군...그,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빤히-

"(제발 그만해요 아키츠군...! 제쪽이 다 부끄럽다고요!)"

"귀, 귀엽다아..."

까만 눈망울의 병아리가 롤리팝을 들고 새싹들과 함께 그려진 머그컵도.
네잎 클로버를 머리에 꽂은 앨리스가 흰토끼와 함께 앉아 찻잔을 들고 있는 크레용 그림이 그려진 수첩도.
쿠키를 든 헨델, 사탕을 든 그레텔이 강아지와 함께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다이어리도.
배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은채로 서있는 조그마한 토끼 인형도.
포켓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조그마한 크기에다 테마별로 서로 다른 글귀가 적힌 수첩들도.

하나같이 귀여움이 향기로 뿜어져 나올듯한 매력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진열대를 만지려다 코테가와에게 제지당했다.
팬시샵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수염난 남자가 팬시물품들을 호들갑스럽게 보다가 여학생에게 제지당하는 모습을 보곤 키득거리다가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키득거리는 소리에 살짝 얼굴을 붉힌 코테가와는 나를 보며 충고했다.

"대체 왜 그렇게 잡아먹을듯한 시선으로 쇼핑을 하는거에요?"

"아니...뭐라고 할까, 마음에 위안이 된다고 할까나...?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치유되는 느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넋을 놓고 팬시용품을 바라보는건 이상하게 보이는거 알아요?
조금은 주위 시선에 신경쓰면서 돌아보라구요."

"...네."

코테가와의 조언을 듣곤 얌전히 팬시들을 계속 둘러보았다.
으응...어느쪽도 전부 마음에 드는데 대체 뭘 고르면 좋지?
지갑을 살짝 열어 금액을 확인하고 고민하던 중 진열대 한쪽에 있는 접이식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얼마 있으면 초가을 장마를 걱정해야 하니까 한개 정돈 사두는게 좋을까...
적당히 마음에 드는 상품들과 함께 우산을 고른 뒤 코테가와가 물건을 고르는걸 기다렸다.
리본이 달린 고양이 저금통을 고르고선 기쁜 얼굴을 감추지 않고 계산대로 향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몰래 웃었던건 비밀이다.

팬시 용품점을 나올즈음에는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있었기에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헤어지기전 코테가와에게 조그만 종이 가방을 건넸다.

"아키츠군, 이건?"

"지금까지의 보답.
사실 이번 시험도 코테가와덕에 힘내서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 말야."

"...감사받을 일은 아니에요."

쑥쓰러운듯 고개를 숙인 코테가와는 종이 가방 안을 확인하곤 환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리본을 단 새하얀 고양이 인형.

"귀엽게 생긴 고양이군요?
고마워요 아키츠군."

"시로네라고 해."

"시로네?"

웃다말고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짓는 코테가와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그래 코테가와?"

"...아키츠군도 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는가 보군요?"

"아니, 내가 지은게 아니라 이건 「매지컬 쿄코」에 나오는 마스코트 고양이인데..."

"매지컬 쿄코?"

"응, 마법소녀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이야."

묘한 표정에서 이상한 표정으로 바뀐 코테가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아키츠군은, 그런걸 보는군요...?"

"뭐, 뭐가 이상해?"

당황하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 키득하고 웃으며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았다.
종이 가방에 인형을 넣는 코테가와를 보며 물었다.

"그럼, 집까지 바래다 줄까?"

"괜찮아요. 오늘은 따로 볼일이 있으니까."

"...그래?"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코테가와를 배웅하곤 나도 상점가를 벗어났다.
아직은 날이 밝은 때라 잠시 공원 근처에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생각하며 천천히 걷던 중,
뒤에서 누군가 이쪽 방향으로 급히 뛰어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타박-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전 헤어졌던 코테가와가 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코테가와?"

생각지 못한 조우에 어리둥절해 멈춰 있으려니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코테가와는 제자리에 멈춰 숨을 헐떡였다.

"하아-하아-하아..."

양손으로 무릎을 쥔채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손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저기...괜찮아 코테가와?"

"읏...이게 누구 때문인데..."

홱-소리가 날만큼 거세게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나, 혹시 뭔가 했던가...?
어리둥절한 내 모습을 보고 코테가와는 숨찬 가슴을 누르며 내뱉듯 말을 토했다.

"대, 대체 어째서 전화를 안받는거에요!
덕분에 한참 찾았잖아요!"

"미, 미안.
영화 보고 나서 도로 켜놓는다는걸 깜빡했어..."

그러고보니 휴대폰을 꺼놓은 걸 아직껏 켜지 않았었구나.
사과하는 날 보던 코테가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우...대체 내가 뭐하는건지..."

겨우 숨을 진정시키고 코테가와가 허리를 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잊은 물건이라도 있었어?"

"그게 아니고...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응?"

무슨말인지 몰라 가우뚱하는 내 앞으로 코테가와가 조그만 상자를 꺼내들었다.

"저도 아키츠군에게 줄게 있었으니까요."

포장을 벗기자 디폴메된 고양이 얼굴이 달린 스트랩 두개 놓여진 상자가 보였다.
...설마 이걸 사려고 다시 팬시샵에 돌아갔다 온건가?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선물까지 받았는데 그냥 넘어가긴 그렇잖아요?"

멍하니 있는 나에게 코테가와는 말을 이었다.

"저번에 아키츠군의 휴대폰을 봤을때 스트랩이 많이 낡았더라고요.
나참...그렇게 때가 묻을 때까지 들고 있을건 없잖아요?
아키츠군도 적당히 스트랩은 알아서 바꾸라고요."

그건 코테가와도 마찬가지였잖아...
저번에 코테가와의 휴대폰을 함께 들고있을 때 본건가?
조금 쑥쓰러워진 나머지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보면, 아키츠군.
그때 이후로 친구는 많이 사귈수 있었나요?"

"으응. 사이 좋아진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구?
유우키나 라라, 야미, 모미오카, 사와다, 아라이, 시라유리, 사키 선배, 린 선배, 아야 선배, 오시즈..."

"흐응..."

흘겨보듯 나를 쳐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줄줄이 말하던걸 멈췄다.

"왜, 왜그래?"

"...거의 다 여자애들 뿐네요.
어쩐지 불건전해요."

...나한테 말을 거는 남학생은 리토 말곤 없던데?
코테가와랑 대화하면서 상자 안의 고양이 스트랩을 꺼냈다.
양손에 스트랩을 하나씩 들고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코테가와도 스트랩이 많이 해졌지? 그럼..."

사륵-

"응?"

머리 위로 가벼운 뭔가가 내려앉은 느낌에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감촉에 의아할 때, 하나 둘 새하얀 꽃이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머리에, 팔에,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건...눈?"

"어째서 이 시기에...?"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는 나와 코테가와를 아랑곳하지 않고 눈송이는 그칠줄 모르고 내렸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인가?"

"늦여름이에요. 뭐, 앞쪽이 더 그럴싸 하지만요."

당황한 가운데서도 딴죽을 거는 코테가와의 태도에 피식 웃으면서 한손에 들린 스트랩을 건넸다.
눈내리는 하늘을 보며 크리스마스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학교에서 첫번째 친구인 코테가와에게 이 하나를 건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풋...아, 아하하~!"

코테가와도 같은걸 떠올렸는지 입가를 가리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약간 얼굴이 붉어진채 웃음을 그친 코테가와는 손을 내밀어 스트랩을 받아 들었다.

"뭔가 낭만적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짖궂은 장난 같아요.
이런 변덕스런 기상이변이라니..."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치며 코테가와는 휴대폰의 스트랩을 바꿔 걸었다.
어느덧 거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으로 뒤덮혔다.
어깨에 내린 눈이 조금씩 녹아 젖어드는걸 느끼곤 우산을 펼쳐 들었다.
펼쳐진 우산을 코테가와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약간의 기대감을 안은채 다시 한번 코테가와에게 제안했다.

"그럼, 집까지 바래다 줄까?"

"...좋아요. 기껏 다시 만났는데 또 거절하기도 그렇고...
에스코트 잘 부탁드리죠 아키츠군."

"맡겨 주시라~ 아핫핫~!"

유쾌한 기분에 잠겨 코테가와와 함께 우산을 쓴채 눈오는 거리를 걸었다.

사박사박-

눈쌓인 거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네개의 발자국.
발바닥에 닿는 눈송이의 담백한 울림을 반주삼아 코테가와의 집을 향해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난데없는 폭설로 휴교령이 내렸다.

「때 아닌 대설로 시내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지금 적설량은...」

창밖으로 불어닥치는 눈보라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얌전히 방구석에 앉아 대설 속보를 보내고 있는 뉴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토끼는 말야, 외로우면 죽어버린대...

벌써부터 가을타기 시작한건지 오랜만에 보내는 나홀로 집보기가 쓸쓸하게 느껴진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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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다쓸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월요일 새벽이군요...OTL

73화의 미캉의 이야기는 남매가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일이라 이렇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가족끼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가족의 문제는 가족끼리 푸는게 제일이라는 주의라...=ㅅ=a;

다음편은 아마도 리토네 집에서 전골먹는 이야기가 될듯.



아 그러고보니 글쓰는 도중 트러블 만화를 보다가 1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 저스틴의 부하A를 보는 순간 팍 필이 꽂혔습니다.
(이름은 '브왓츠' 로군요. 1권의 외전격 1페이지 소설(...) 갤럭시 레전드☆저스틴 에서 금발의 이름이 나왔네요^^;)

오~ 이자식 성깔있게 생겼네...선글라스 너머의 눈매도 더럽고.
에이전트 녀석에게 눈썹이랑 콧수염 붙여주고, 일자 흉터만 없애주면 완벽하겠는데?(0ㅅ0)
잘보니까 놀랄때의 얼굴도 귀여운게 즈큐-웅☆
...이라고 생각한 제가 있었습니다. ( =ㅅ=);;;

외모의 터프함으론 이 에이전트씨나 사이바이씨나 만만찮아서 둘다 좋아하지만.
어쨌든 현재 료스케의 머리스타일은 금발에 올백이니까,
외모 상상할땐 이 에이전트 녀석을 기초로 하는게 편하겠더군요.
나이들어 보이고(...)

아무튼 료스케는 금발 에이전트 녀석이랑 사이바이씨를 퓨전-얍~! 시켜놓으면 딱 될듯(=w=)

(저스틴의 부하A - 금발 에이전트)

(사이바이씨의 이미지컷)




p.s. 이번편의 시험관련 이벤트는 원래라면 1학년때 일어났어야 정상이지만...
아시다시피 1학년때는 코테가와 이외에는 만나는 친구들이 적기에 1학년은 빨리빨리 넘겼지요.
(2학년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그리고 70화에서 시험결과가 나온후 하루나에게 점수를 물어오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을 보건데,
이학교는 따로 학생들의 성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듯 해서(개별 공지만 하는듯) 이야기에 무리가 없겠다 싶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성적표 나왔을때 장면은 마사토끼님의 킬더킹이 떠올라서 적어본것.
킬더킹 연재는 언제 다시 되려나요(=3=)


p.s.2. 원작 내용

70화 리토의 시험공부, 73화 미캉의 외로움, 74화 유이의 풍기단속편
1. 리토의 시험공부(70화)
테스트 성적이 바닥인 리토가 라라에게 개인교습을 받는 이야기.

2. 미캉의 외로움(73화)
집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외출하는 미캉과 그런 미캉을 뒤쫓아 나온 리토.
리토와 미캉 남매의 쇼핑을 미행하는 라라.
어릴적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추억을 떠올리는 미캉의 모습에 라라가 「펄펄 스노우군」을 이용해 눈을 내린다.
눈내리는 풍경속에서 미캉은 리토에게 고맙다고 중얼거린다.
이후, 스노우군을 멈추는걸 깜빡한 라라로 인해 도시는 폭설에 파뭍힌다.

매지컬 쿄코도 보러 가지 않고 리토와 미캉을 화해시켜준 라라는 정말로 차캐씁니다.

3. 유이의 풍기단속(74화)
문란해지는 학교 풍기를 유이가 단속하는 이야기.


p.s.3. 참조 이미지

책상위에 걸터앉은 리사

도발하는 리사와 미오

잡지 MISTY(왼쪽부터 시라유리 코요미, 아라이 사야카)

코테가와의 주말 옷차림

고양이 저금통을 고른 코테가와

고양이 시로네(매지컬 쿄코의 마스코트)

폭설이 내린 마을

마토에 아게루와 다른 학생들의 외모. (결론 : 리토는 우월했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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