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벅꾸벅...

쉬는시간. 책상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고 있던 중 시야 한구석에서 불규칙적으로 상하운동을 하는 물체가 관심을 끌었다.

"...유우키?"

"므...?"

정리하던 노트를 덮고선 고개를 위아래로 힘없이 흔들거리는 리토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쯤 잠겨가던 리토의 눈꺼풀이 열렸다.
부스스한 얼굴로 정신을 차린 리토는 양팔을 위로 치켜들곤 힘껏 기지개를 폈다.

"으으읏...! 하아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고 눈을 깜빡인 리토는 양손 중지로 미간을 매만졌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리토의 얼굴을 살피니 안색이 조금 핼쓱해 보였다.
하루나와 대화를 나누던 라라도 드물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리토를 보았고,
하루나도 리토에게 다가와 안색을 살폈다.

"리토~ 괜찮아?"

"아...괜찮아."

"유우키군... 어쩐지 피곤해보여."

"괘, 괜찮아 사이렌지.
그냥...최근 아버지 화실에 가서 만화 어시스트를 한다고 바빴거든."

하루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리토는 당황하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시스트라...마감 때문에 사이바이씨께 불려갔었나보네.
연재를 3개나 맡아서 하는 인기 만화가 사이바이씨다보니 「사이바이 스튜디오」는 언제나 마감으로 바쁘다.
덕분에 마감이 임박해오면 리토에게도 구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애독하는 「영웅학원」이 나오게 되기까지는 리토의 도움이 컸다고 하겠다.
리토 뿐만이 아니라 꾸준한 연재를 위해 힘써준 사이바이씨, 저스틴, 그리고 브왓츠와 마울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아, 참고로 브왓츠와 마울은 저스틴의 부하로 있는 에이전트들이다.
금발 올백에 뾰족한 턱수염, 왼쪽 눈가에 세로로 길게 난 상처가 인상적인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브왓츠.
짧은 흑발에 각진 외모의 인상파 거구가 마울이다.
둘다 눈썹을 밀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영락없는 야쿠자 스타일이다.
처음 러브러브 공원에서 저스틴 일행과 조우했을 땐, 공원에 있던 사람들도 브왓츠와 마울이 야쿠자가 아닌지 생각했으니까.
인상과는 달리 순박한 면이 있는 사람들이라 오래 만나다보면 둘의 험악한 얼굴도 곧 익숙해지지만.

라라의 명령으로 사이바이씨의 만화를 돕기 시작한 저스틴이지만,
지금의 저스틴은 만화를 그리는데 높은 자부심을 가지게 된것 같았다.
만화 아티스트 전문가를 꿈꾸며 착실히 앞길을 준비해가고 있다고 하고.

사이바이씨의 일을 도우면서 틈틈이 신인 만화가 공모전에 낼 원고도 작성하며 지내는것 같은데, 나로선 꽤나 좋은 결과가 있을거라 보고 있다.
화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저스틴이 작업한 그림을 접할 수 있었는데,
저스틴에게 잠재되어있던 만화가로서의 기량은 생각 이상으로 출중해 보였으니까.
다만 그림체가 소녀만화 풍일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지만...
솔직히 '데빌루크 최강의 검사'라는 호칭과는 전혀 매치가 안되잖아?

빠른 속도로 지구에 적응한 저스틴과 마찬가지로 마울과 브왓츠도 점점 지구에 익숙해져 가는것 같다.
특히나 마울은 최근 매지컬 쿄코에 푹 빠져 지내는 것 같고.
매지컬 쿄코 피규어를 발견하곤 「우효~! 귀엽다~!」라고 외친 마울을 봤을 땐 무심코 마시던 걸 뿜어버렸지만...
데빌루크로 돌아가면 지구의 애니와 만화를 퍼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하던데...어찌 될라나 몰라.
마울의 계획을 알게된 저스틴의 반응을 잠시 회상해보았다.

- 문화를 발판으로 다른 별과 교류라니...마울도 성장했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던 저스틴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괜찮을까? 이걸로 정말 괜찮은걸까 데빌루크?


아무튼...그건 그거고, 지금은 안색이 창백한 주제에 애써 웃고있는 리토를 돌보는게 우선이다.
하루나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마음은 멋지다만 힘들땐 쉬는게 순리지.

"힘들다면 양호실에서 잠시 쉬다 오는게 어때 유우키?
지금 이 상태로는 수업을 들어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거라구.
선생님껜 내가 말씀드릴테니. 조금 몸을 추스리고 오도록 해.
뭐니뭐니해도 건강이 제일이니까."

"...아키츠가 그런 말을 하니까 지나치게 설득력있는걸."

쓴웃음을 지은 리토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양호실에서 좀 쉬고 올께.
선생님껜 설명 좀 부탁해."

"걱정말라니까~"

"몸 조심해 유우키군."
"양호실까지 함께 갈래 리토?"

"고마워 사이렌지, 라라.
함께 갈것 까진 없어. 그렇게까지 힘든건 아니니까...응?"

우웅-!

일어서던 리토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휴대폰을 연 리토의 반응으로 보건데 문자가 온것 같았다.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던 리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렌 녀석, 귀찮게 굴긴..."

"무슨일이야 리토?"

라라의 물음에 리토는 수신 문자를 보여 주었다.
나도 옆에 끼어서 어떤 내용인지 읽어보았다.

탈의실로 운동복 좀 가져다 줘.

...진짜 간결하네.
앞뒤 잘라먹고 보내온 실로 간략하기 그지없는 문자였다.

"옷이라도 젖은걸까?"

"알게 뭐야 그녀석...
기껏 처음으로 보내온 문자가 심부름이나 시키는거라니..."

"그럼 안돼 리토~
렌이랑 친하게 지내야지. 친구잖아?"

"하지만 그녀석, 나랑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잖아..."

그야 렌이 라라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10년전부터 짝사랑하던 라라가 리토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렌이 리토에게 살갑게 구는건 왠만하선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리토에게 문자로 도움을 청한걸 보면 전혀 가망이 없는건 아닌데...
...설마하니 번호를 알고 있는 동성 친구가 리토밖에 없었기 때문은 아니겠지?
아무튼, 도움을 청하는 문자조차 무뚝뚝하기 그지없게 보낸걸 보면 갈길이 멀어 보였다.
그냥 내가 대신 운동복을 가져다주는게 나으려나?
리토는 지금 피곤한 상태이고, 렌은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면서도 탐탁치 않아 하니까.
라라의 충고에 우물거리면서 투덜대는 리토에게 제안했다.

"렌의 운동복이라면 내가 가져다 주도록 할께.
유우키 넌 피곤하니까 그냥 양호실로 가는게 좋을것 같아."

"...미안하지만 부탁할께 아키츠."

"괜찮으니까~"

이마를 한차례 쓸어올린 리토는 복도로 나와 양호실 방향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리토를 보내고 나도 렌의 운동복을 가지러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렌은 몇반이지?


렌의 반은 지나가던 여학생에게 묻고서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교내 제일 미소년 렌이라면 동급생 중에선 모르는 여학생은 없으니까.
라라 일편단심인 렌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겠지만.

렌의 자리에서 옷이 든 가방을 집어들고 탈의실로 향했다.
갈아입은 옷은 도로 넣어야 하니까 가방채로 들고가는게 좋겠지.

2학년으로 올라오면서 라라와 반이 달라진 이후로 렌은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사랑의 라이벌로 여기는 리토가 라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초조함도 늘어난것 같았다.
라라에게 온갖 미사여구로 구애하듯 말하는 행동도 요즘은 뜸해졌고.
어쩌다 리토와 함께 있는 라라를 볼 때면, 리토랑 다투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라라와는 제대로 된 대화도 못하는 눈물나는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것 같다.
10년 동안 줄곧 라라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던데...인생 참 각박하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탈의실에 도착했다.
어깨에 맨 가방을 한번 확인하고는 한손을 들어 손등으로 탈의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렌, 안에..."

벌컥-!

노크를 하며 말문을 연 순간 문이 안으로 열리며 누군가 내게 달려들었다.
달려든 이는 내 품에 파고들며 달라붙듯 양팔로 내 허리를 휘감아왔다.

"꺄아♡ 리토~!"

"우왓!?"

남자 탈의실에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목소리에 놀라서 품안에 안겨들어온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복슬복슬해 보이는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자주빛 눈동자와 정수리 부근에 더듬이마냥 튀어나온 두가닥의 머리카락.

"룬!?"

룬-엘시-쥬에리아.
특정한 계기로 성별과 인격이 바뀌는 메모루제별의 왕족, 렌-엘시-쥬에리아의 또다른 인격이자 성별.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 찰싹 달라붙어 있던 룬은 고개를 들어 날보며 환하게 웃었다.

"에헤헤~ 리토...오...?"

고개를 들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말을 멈춘 룬.
품에 안긴채 멍한 표정을 짓는 룬을 내려다 보았다.

매듭이 풀려 흔들거리는 넥타이와 허리까지 흘러내린 겉옷.
양옆으로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사이로 부풀어오른 뽀얀 가슴이 계곡을 이루며 노출되어 있었다.
달라붙은 룬의 몸에서 말랑한 가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녀석, 브래지어 안했어!?
그러고보니 교복도 남자 교복인데...설마 학교에서 재채기로 성별이 바뀌어 버린건가!?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굳어있던 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꺄아악!?"

퍽-!

"으악!?"

놀란 룬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떠밀었고,
룬에게 떠밀린 나는 들고있던 가방을 놓친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놓쳐버린 가방에서 떨어져 나온 옷가지가 사방에 흩어졌고,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바닥의 차가움에 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팔랑~

"...응?"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려고 할 때 무언가 가벼운 물체가 내 얼굴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분홍빛이 감도는 실크 재질의 천이 시야를 가렸다.
얼굴을 뒤덮은 천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코가 간지러웠다.

"아...아, 아..."

당황한채 더듬거리는 룬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서, 설마 이건...?
얼굴을 덮은 천을 손으로 잡았다.

"꺄아아! 이 변태야아아---!"

짜악-!




"우으으...!"

털을 세운 고양이마냥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오는 룬.
오랜만에 얼굴에 빨간 단풍잎을 새긴 나는 뺨을 살살 매만지면서 룬의 시선을 외면했다.
방금전 내 얼굴에 내려앉은 천, 요컨데 속옷을 빼앗듯이 낚아채곤 룬은 잡아먹을듯한 시선을 계속 보내고 있었다.
명치 부근까지 벌어졌던 와이셔츠를 여미던 룬은,
브래지어 없이 와이셔츠를 입은게 신경쓰였는지 방금 전부터 주욱 한팔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대체~! 리토군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어째서 네가 온거야!?"

발을 동동 구르며 따지는 룬에게 약간 위축된채 답했다.

"리토는 피곤하다며 양호실에 갔어.
그래서 리토 대신 렌에게 운동복을 건네주려고 온거라구."

"그런..."

예상치 못한 답변에 허를 찔린듯 룬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룬은 이내 울상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리토군에게 어필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찬스? 설마 문자를 보낸것도 렌이 아니라 룬이었던건가?
중얼거리는 룬의 말에서 대략적인 상황이 짐작해 보았다.

학교에 온 렌이 운나쁘게 재채기를 해버려서 룬으로 바뀌었다.
당장 옷을 갈아입으려던 룬은 무언가 꿍꿍이를 떠올리고는 비어있는 탈의실에 들어가 리토에게 문자를 보낸다.
아마도 렌인줄 알고 옷을 가져다주려고 온 리토랑 탈의실에서 '우후후' 할 예정이었겠지.
엄청나게 적극적인 아가씨니까 아마도 냅다 리토에게 덤벼들지 않았을까?
방금전 달라붙던 룬의 행동을 보건데 거의 확실할지도.
앞뒤 잘라먹은 짤막한 문자도 룬인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려던걸테고.
굳이 '여자교복'이라고 하지 않고 '운동복'이라고 한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나름대론 리토랑 렌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온건데 어째 룬의 방해를 한 꼴이 되어버려 좀 미안했다.

"저기, 방해했다면 미안해 룬."

"...됐으니까 밖에서 기다려."

"응?"

내가 되묻자 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갈.아.입.을.거.니.까! 나가있으라구!"

"아, 알았어!"

눈썹을 추켜세우며 노려보는 룬을 피해 탈의실 밖으로 잽싸게 빠져 나왔다.
...그런데 왜 난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거야?
별수없이 벽에 등을 댄채 탈의실 앞에서 룬이 갈아입길 기다렸다.
벽너머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탈의실 안에서 투덜대는 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째서 리토군은 오질 않은거야?
- 조금쯤은 라라말고 나한테 신경써줘도 좋잖아?
- 아니지, 지금 곧장 양호실로 가서 리토군의 간병을 한다면...! 리토군의 호감도 업?
- 좋아! 이걸로 가는거야!
- 그나저나 운동복 말고 그냥 여자 교복으로 갈아입을까?
- 수염이 가방채로 가져온게 다행이네. 교복도 들어있었으니까.

...룬, 너 평소엔 날 수염이라고 부르고 다니는거냐?
딱히 상관은 없지만.
룬이 리토에게만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신경쓰는건 알고 있으니.
게다가 어차피 양아치니 뭐니 멋대로 부르는 녀석들도 있고.

- ...속옷은 여벌이 없네.
- 남은 속옷은 방금전 이거 하나뿐인데...별수 없나...

스르륵...

- 으... 어, 어쩐지 찝찝해... 이상한 느낌...

"......"

이럴땐 정말이지 내 귀가 밉다...
졸지에 속옷에 파렴치한 짓을 한뒤 억지로 소녀에게 입힌 변태가 된 느낌이다.
묘한 상상에 부끄러워져서 무심코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탈의실을 나온 룬의 얼굴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갈아입은 옷이 든 가방을 내게 들게하곤 룬은 복도를 걸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룬의 뒤를 따라가며 자연스레 룬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방금전 갈아입은 속옷이 신경쓰이는지 룬은 가끔 치마자락과 허벅지를 매만졌다.
마음은 알겠지만 제발 그만해.
치마가 들춰지면서 자꾸만 허벅지랑 속옷이 언뜻언뜻 보여서 민망하단 말야.

"어딜 쳐다보고 있는거야?"

"...아무것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뒤돌아보며 째려보는 룬의 눈을 외면했다.
지금 긍정했다간 반대쪽 뺨에도 손바닥 자국이 생겨버리겠지.
의심스럽다는듯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룬은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열었다.

"리토군은 양호실이라고 했지?"

"응."

"그럼 난 양호실로 가볼테니까 가방은 내 자리에 놔줘."

졸지에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뭐, 이번은 룬의 방해를 한것도 있으니 얌전히 말을 듣는게 좋겠지.

"그리고..."

"?"

룬은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잠시 주변을 살피고 복도에 사람이 없는걸 확인한 룬은 내게 다가왔다.
박력있는 눈빛을 보내는 룬에 밀려 무심코 뒤로 물러나려는 내 옷자락을 잡은 룬은 작게 속삭였다.

"오, 오늘일 소문내면 가만두지 않을꺼야...!"

"...안냅니다."

퍼뜨릴 리가 있나. 그랬다간 졸지에 나만 변태가 되버리잖아.
그렇잖아도 최종귀축 양아치라는 소문 때문에 한동안 좌절감에 빠져 지냈는데...
이번 일은 그냥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두는게 최선이다.
몇번씩 다짐을 받은 룬은 뒤로 나를 보곤 「흥-!」하며 콧소리를 내고 양호실로 떠나 버렸다.

...우울하다.


룬의 반으로 들어가 룬(렌)의 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내 뺨을 붉게 물들인 손바닥 자국을 본 학생들의 수근대는 소리를 피해 밖으로 나왔다.

리토 대신 심부름 한번 해주는게 이렇게 정신을 피곤하게 할줄은 몰랐다.
나도 양호실에서 쉬어야 하는거 아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면 또 룬이랑 마주치게 된다고.
리토의 간병을 하고싶어 하는 룬에게 훼방꾼 취급 받는건 사절이다.
그냥 바람을 쐬면서 기분전환이나 하는게 나을까 싶어 복도를 걷는 도중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라라와 마주쳤다.

"라라?"

"아, 료스케 안녕~!"

활기찬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라라에게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힘이 넘치는구나 라라는.
그 활력의 반만큼이라도 나눠받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라를 바라보다 라라의 한손에 든 유리병에 눈이 갔다.
손톱만한 크기의 약이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라라, 그건?"

"이거? 리토 주려고 가져온 약이야.
얼른 기운을 차리면 좋을텐데~"

"자양강장제 같은거야?"

"응? 그게 뭐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은 라라의 얼굴을 보고 아차싶었다.
아직 라라가 어렵거나 생소한 말에는 익숙하지 않다는걸 잊고 있었네.

"아...그러니까 '몸을 건강히 하는 약'이란 뜻이야. 피로회복제 같은거."

"응! 맞아 그런거~"

싱글벙글 웃던 라라는 문득 내 얼굴을 보곤 갸우뚱했다.

"료스케? 왠지 기운이 없어 보여.
료스케도 한알 먹어볼래?"

"...응. 고마워."

피로회복제를 먹으면 지금의 우울한 기분도 조금 나아지려나?
라라의 배려에 감사하며 건네진 알약을 받았다.
그런데 이거 물없이 먹어도 되는걸까?
...아무렴 어때. 그냥 삼키면 되겠지.
입을 열어 털어넣듯 약을 삼켰다.
어느정도 효과가 있으면 좋을텐데.
약을 먹는 내 모습을 지켜본 라라가 기대감 서린 얼굴로 물어왔다.

"어때? 힘이 나는것 같아?"

"으음...그러니까..."

-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정말로 기운이 흘러넘치는데?"

"정말? 잘됐다~"

약간 놀란듯한 내 반응에 라라는 양손을 마주하며 밝게 웃었다.
환하게 미소지은 라라를 보니 덩달아 기분이 들떴다.
마주보는것만으로도 활기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바꾸기엔 충분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생각 이상으로 라라가 건네준 피로회복제의 효능은 뛰어난 것 같았다.
벌써부터 온몸에 활기가 돈다고 할까?
이럴땐 약을 건네준 라라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게 맞겠지.
라라에게 지금의 느낌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할 말을 떠올려 보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뭐라고 할까...
으음... 아, 그래......



최고로 High한 기분이다...



"아파...료스케..."

"...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난 라라의 양어깨를 붙잡은채 복도 벽에 라라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코가 닿을 듯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 라라는 괴로운듯 얕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깜짝 놀라 라라의 어깨를 놓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미, 미안! 괜찮아 라라?"

"으응, 괜찮아."

고개를 저은 라라는 어깨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갑자기 어깨를 꽉 잡길래 놀랐어."

"아...그게 말이...지...?"

"...료스케?"

말을 꺼내다말고 갑자기 입을 다문 내 모습에 라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듯 나를 바라보는 라라의 모습을 마주 응시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분홍빛 머리카락.
짧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매끈한 허벅지.
가냘파 보이는 흰 목덜미와 초록색 리본 아래로 부풀어오른 가슴.
그리고...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향해지는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

-두근

순간 가슴이 크게 울렸다.
난데없이 두근거리는 심장에 놀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갑자기 이건 무슨...?

"료스케?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얼굴이 붉어."

"으, 응!? 괘, 괜찮아.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해도...으응~ 잠시만~!"

"어...?"

갑작스레 라라는 내 뒤통수에 손을 얹고 머리를 앞으로 당겼다.
가까이 다가오는 라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가운데 라라의 이마가 내 이마에 맞닿았다.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얼굴에 닿으며 살짝 볼을 쓸었다.

"...어디보자..."

"!?"

야...야 이 천연 아가씨야...
이성에게 이런 행동은 심장에 안좋다고!

"으응...조금 열이 있는것 같은데?"

이마를 댄채 말하는 라라의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입김이 얼굴을 뒤덮었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치아와 말랑말랑한 혀가 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입술 사이로 살짝 내밀어져 꿈틀거리는 혓바닥.

만약 맞닿으면... 부드러울 것같아...
속삭이듯 들려오는 라라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달콤해서...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눈앞의 라라에게 뻗어갔다.

"저기, 혹시 약이 잘못된거야 료스케?"

"...!"

걱정스러움이 묻어나는 라라의 목소리에 정신이 깨었다.
라라를 감싸안듯 내밀어지던 손을 치우곤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료스케?"

"미안!"

"아? 잠깐, 료스케?"

손을 뻗어오는 라라를 뿌리치고 황급히 달아났다.
이 이상 라라와 함께 있다간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점차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필사적으로 사고했다.

뭐야?
뭘 먹은거야 나는?
어째서 라라를 보고 이렇게 두근거리는거지?
피로회복제가 아니었던가?
대체 라라는 리토에게 뭘 주려고......!?

- 리토는 피곤해서 양호실에 갔어.

- 리토가 먹을 약이야.

- 자양강장제 같은거?

- 약이 잘못된거야 료스케?

떠, 떠올랐다!

「자양강장제」라 쓰고 「발정제」라고 읽는 약.
우주인에겐 자양강장제로 쓰이지만,
지구인이 복용할 경우, 이여자 저여자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헌팅하는 난봉꾼이 되어버리는 엉망진창인 약!
설마 라라가 미카도 선생님께 받아왔던 건가?

벌어진 입에서 자연스레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평소보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커진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전 라라와 함께 있을 때 생겨나던 충동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정도 반응이라면...참을 수 있어.
부작용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면 몰라도 어떤 효과를 가진 약인지 알았으니 대처할 방법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 대단한 방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이대로 여자아이들을 만나지 않고 얌전히 약효과가 끝나길 기다리는게 최선일 듯 했다.
약 효과가 하루종일 간다면 차라리 하교를 하는게 나았겠지만, 기억하기로는 기껏해야 한시간 정도밖에 안되었던걸로 기억한다.
효과가 끝날 때까지 체육 창고 근처에라도 가서 쉬고 있을까?


별수 없이 수업 한시간 정도는 빠질 각오를 하고 체육 창고 쪽으로 갔다.
체육 수업중이었는지 열려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가 매트리스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슬슬 약효가 제대로 돌기 시작한건지 온몸엔 주체하지 못할만큼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덕분에 두근거리는 심장도 평소보다 시끄러웠지만 천천히 심장 부근을 어루만지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조금씩 몸이 진정해가는걸 느끼며 이대로 가만히 한숨 잘까 생각하던 차에 창고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음? 거기 누구 있나?"

운동복을 입은 포니테일의 여학생.

"...린...선배?"

"아키츠?"

의아한 목소리와 함께 린 선배가 다가왔다.
양손 가득히 공을 든 린 선배는 매트리스에 앉아 튐틀에 기대어있는 나에게 다가와 날 내려다보았다.

"이런 곳에서 땡땡이라도 치고있는건가?
칭찬할 순 없는데."

"하하...사정이 있어서 말이죠."

"체육 창고에 있어야 할 사정?
뭔진 모르겠지만 기왕 만난김에 체육 비품 정리하는거나 좀 도와주면 좋겠군."

공을 내려놓은 린 선배는 날 이끌고 창고 밖에 있던 비품들을 창고로 옮기는걸 돕도록 했다.
가까워진 린 선배로 인해 다시금 커진 맥박소리를 진정시키면서 아무렇지 않게 학교 비품을 창고로 들어날랐다.
여전히 맥박은 거세게 울렸지만 처음 라라와 접했을때 보단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혹시나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스스로 조심하고 있는 만큼, 달아오르던 몸도 조금은 진정한듯 했다.

"그래서? 체육창고엔 무슨 볼일이었지?"

"린 선배 말씀대로 땡땡이라고 해두죠. 틀린 말은 아니니까..."

"좀 더 성실히 지내는게 좋아. 3학년이 되면 바빠지니까 말이지."

"3학년이라...아직까진 멀게만 느껴지는데 말이죠."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1년이라는 시간은 빨리 간다고?"

"...킥..."

"왜그러나 아키츠?"

린 선배는 갑자기 키득거리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유쾌한 기분으로 손사레를 치며 린 선배에게 답했다.

"아뇨아뇨~ 그게...고등학교에 들어와선 어째선지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서 말이죠.
눈코뜰새 없이 소란스러운 나날들이 계속된다고 할까요?
매일매일이 즐거워서 시간 가는줄도 몰랐거든요."

코테가와를 만나고, 미캉과 만나고, 야미, 리토와 라라를 알게 되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그만큼 다양한 일들도 겪었다.
가끔씩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유쾌한 웃음이 나오는 추억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기를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고 대답할거다.

"...그런가. 그건 정말 다행이로군.
그 마음가짐을 소중히 하도록 해.
중요한 시간은 그만큼 빨리 지나가서 아쉽게 느껴지거든."

"린 선배는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 있었나요?"

"글쎄...딱히 없는걸?
...아, 그러고보면 한가지 아쉬운건 있군."

"뭔데요?"

"1년 전, 네가 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 찾아가서 한번 겨뤄보지 못한 것."

"네에?"

무심코 심장이 벌렁 뛰었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자극을 받았는지 다시금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진정해 이 바보 녀석아.

"그때야 널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을 시절이니까, 멋모르고 네게 달려들었을테지.
솔직히 말해 동네 불량배들을 쓰러뜨렸다는 네 실력을 알고 싶기도 했거든.
만약 그랬더라면 꽤나 즐거운 승부가 되었을것 같은데 말이지."

"아, 아하하..."

하마터면 고교 입학 첫날부터 배틀물을 찍을 뻔 했군...
죽도로 양아치에게 매타작하는 검도 미소녀 활극물.
장담컨데 진지함도 뭣도 없는 싸움이 되었을 거다.
아마도 죽도가 몽땅 부러지는 황당한 결말로 끝날 것 같으니까.
...개그 보정이 붙는다면 케○로처럼 하늘로 날려가 버리는 씬이 연출됐을지도 모르겠지만.
린 선배가 상식인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뭐, 어쩌면 괜찮은 후배를 1년 일찍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왠지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부끄러운데요?"

툭던지듯 중얼거린 린 선배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전에도 느꼈던거지만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를 리드하는 발언을 내뱉는 린 선배다.
강하고 멋져서, 그야말로 동경의 여자 선배 이미지라고 할까?
생각해보면 사키 선배의 호위라는 인상이 강해서 그렇지, 이런 모습의 린 선배를 동경하는 학생들도 꽤나 많을거 같은데...
나중에 졸업식 때 우는 사람들도 나오는거 아냐?

"그러고보면 선배들도 내년이면 졸업이로군요."

"...그렇군."

"대학생이 되는거네요."

"그래."

"지금처럼 모두와 만나지는 못하겠죠?"

"...아마도 그렇겠지."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린 선배와 사키 선배, 아야 선배를 볼수 있을까?
코테가와의 오빠(유우)처럼 인근 대학에 진학하면 만날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처럼 매일 얼굴을 맞대긴 힘들겠지만.
하지만...

"뭐, 그래도 린 선배는 언제나 사키 선배와 함께 있을것 같지만요."

"당연하다. 나의 일족은 대대로 「텐죠인 가(家)」를 받들었으니까."

"굳이 그런게 아니더라도 마찬가지겠죠."

"응?"

"린 선배는 아야선배와 사키선배랑 함께 있을 땐 언제나 즐거워 보였는걸요?"

"...아아, 그렇고말고."

약간 감회에 젖은듯 조용히 답하며 린 선배는 미소지었다.
졸업 후에도 선배들은 함께 있을 수 있겠지.
그녀들의 우정을 부럽다고 생각하던 중 문득 떠오른 생각에 린 선배를 불렀다.

"저기, 린 선배."

"응?"

"졸업할 때 말이에요. 선배의 단추를 하나 받을 수 없을까요?"

"...단추를?"

"기념으로 한개 가지고 싶어서요.
어차피 제 졸업식 때 단추를 달라는 후배가 나타날 것 같지도 않고."

학창시절에만 해볼 수 있는 추억이니까.
어차피 주는 입장이 못된다면 받는 입장에 서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보통은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부탁하는 걸로 알고 있지만요...」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보며 린 선배는 작게 웃었다.

"그렇게 부정적인 견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좋아. 네가 바란다면."

"정말요?"

"나중에 가서 잊어버리지나 않도록 해."

농담조로 말을 건네는 린 선배의 모습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거로군요.
졸업식 때에도 나름 괜찮은 추억거리가 생기게 된지라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덜컹-

"음?"
"어라?"

갑작스레 들려온 금속음과 함께 주위가 어둑해졌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자 닫혀버린 창고문이 보였다.
...누군가 문을 잠궜어!?

린 선배와 함께 창고문에 다가서서 문을 당겨보았다.
덜커덕 거리는 소리만 들릴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졸지에 갇혀버렸네...이걸 어떻게 하지?
린 선배쪽을 바라보고 물었다.

"안 열리는데...그냥 문을 부술까요?"

"진정해. 어차피 다음 체육 수업때 문이 열릴거다.
괜히 학교 기물을 파손하지 말도록.
어차피 너도 땡땡이 치고 있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어른스러운 린 선배의 반응에 딱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창고문에서 물러섰다.
린 선배는 창고안에 놓인 매트리스 중 하나를 골라서 그 위에 조용히 앉았다.
차분한 린 선배의 모습에 나도 침착해져서 린선배 근처의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았다.

옅은 어둠이 깔린 체육 창고 안은 고요했다.
창고위로 난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만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었다.
희미한 숨소리 만이 들리는 가운데 린 선배쪽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가슴에 대고 앉은 린 선배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린 선배?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별거 아니야. 잠시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니까."

"고민이 있다면 말씀해보세요.
듣는 것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에헴~하며 가슴을 두드리는 날 보며 린 선배는 피식 웃었다.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던 린 선배는 조금 주저하듯 말을 꺼냈다.

"지금 상황에 오니까 떠오른거지만...깊게 생각하진 않도록 해."

"네."

"넌...주술을 믿나?"

"주술요?"

"그러니까...여자아이들의 심심풀이 놀이로 쓰는 것 말이다."

아...분신사바 같은거 말이로군.
그런데 갑자기 주술 이야기가 왜 나오는거지?

"혹시... 선배는 지금 이 상황에 처한게 뭔가의 주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래."

내 물음에 답한 린 선배는 말을 꺼낸걸 후회하는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미안하군. 바보같은 물음이었어.
그런 미신 따위...믿을 가치도 없는데."

"믿어요."

"...뭐?"

"믿고 있다구요."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린 선배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날 놀리려는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잖아?"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린 선배는 날 응시했다.
그렇게 바라봐도 내 대답은 변함없다.

"우주인들도 만났는데 미신이라고 못믿을것도 없잖아요?
예전엔 믿지 않았지만...지금은 믿을 수 있어요."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도.
현실감이 조각도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누군가의 영혼에서 떨어져나온 파편에 불과하던 내가, 하나의 온전한 생명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기적.
이만큼으로도 내게 주어진 기적은 넘치도록 충분하니까.

"...그런가."

진지하게 답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린 선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믿고 있는거로군.
장난같은 미신이나 운명론 따위도."

"운명은 현실로써 받아들이는거죠.
뒤는 어찌되었든 밝고 즐거운 일만을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좋은 말이군. 네가 떠올린건가?"

"아뇨. 여자를 밝히지만 중요한 순간엔 멋졌던 어느 고교생이요."

기억속에 남아있던 게임속의 주인공의 대사.
선부학원의 타○로우라면 꽤나 유명한 녀석으로 기억한다.
뭐, 명대사보단 「불○ 마를 날이 없는 녀석」,「색한이 옷을 입었다」로 더 유명한 녀석이지만, 필요한 순간엔 정말로 반할만큼 멋진 녀석이었지.

"...그건 너 아닌가?"

"...실례지만 묻는건데, 그건 여자를 밝힌다는 점 말인가요, 아니면 멋진 녀석이라는 점 말인가요?"

"그거야 네가 판단할 일이지."

"그럼...후자로 알아들을께요."

"호오?"

재밌다는듯 묘한 웃음을 짓는 린 선배에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말했다.

"린 선배가 말해주셨잖아요. 그렇게 주눅들어 있지 말라고.
적어도 린 선배 앞에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테니까 말이죠."

"내 앞에선 말인가?
...이거참, 후배 하난 잘뒀군."

약간 쑥스러운듯 웃는 린 선배를 마주보며 나도 덩달아 웃었다.
부끄러움으로 조금 내 볼이 발개졌지만.
웃음을 멈춘 린 선배는 뭔가 결심한듯 나를 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뒤돌아 서다오."

"...? 그러죠."

약간 붉어진 린 선배의 말대로 린 선배와 마주보던 자세를 고쳐 뒤돌아 앉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
절대로 뒤돌아 보면 안돼?"

내게 주의를 준 린 선배는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등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린 선배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린 선배의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저주 따윈 아무렇지 않아.)"

...해주?
방금전 주술을 푸는 방법인가?

세번의 중얼거림이 끝난 뒤 창고엔 다시 정적이 방문했다.
주문을 외운 뒤, 한동안 침묵하던 린 선배는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참 바보같군... 그렇게 수월히 일이 풀릴 리가 없는데..."

"선배? 실패한건가요?"

"자, 잠깐! 아직 돌아서면...!"

"......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들어온것은 새하얀 살결.
상의를 전부 벗은채 서있는 린 선배의 모습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옴폭하게 패인 배꼽.
도톰하게 부풀어오른 가슴.
건강미 넘치는 매끄러운 살결.
운동한 뒤 땀으로 젖은 피부에서 후끈하게 느껴지는 열기...
사그라들었던 열기가 차오르며 다시금 심장이 급격히 뛰기 시작한다.

얼굴이 빨개진 채 황급히 가슴을 가리는 린 선배를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키츠?"

가까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당황하며 린 선배는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 아키츠...!
이건 피치못할 이유로..."

"......"

말없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린 선배는 초조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보다 난 아직 그럴 생각이...꺅?!"

뒷걸음질치던 린 선배는 매트리스에 발이 걸려 매트리스 위로 넘어졌다.

"으윽...!?"

넘어진 린 선배의 위에 올라타 그대로 린 선배의 양 어깨를 내리눌렀다.

"큿...! 아, 아키츠?"

몸부림치면서 내게서 벗어나려는 린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소용없어요 선배. 힘으로 날 밀쳐낼 순 없으니까.
헛된 저항일 뿐이라구요.
그러니까...

"아키츠? 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린 선배의 떨리는 눈동자를 응시한다.
아마도 지금 내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겠지.
멋대로 날뛰며 미칠듯이 타오르는 심장도.
무언가를 애타게 갈구하듯 끊임없이 경련하는 근육도.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 거칠어진 숨결을 린 선배에게 토해낸다.

"...흐..."

"...그런가."

저항하던 린 선배의 움직임이 멈췄다.
당황하던 린 선배의 얼굴이 점점 침착하게 바뀌었다.
린 선배는 가만히 손을 들었다.
내 얼굴을 만지려는듯 손을 뻗던 린 선배의 움직임이 멎었다.
어깨를 잡힌 상황에서 그런 움직임은 무리라구요 린 선배.
살짝 인상을 찌푸린 린 선배는 어깨를 거머쥐고 있는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키츠..."

"...후욱..."

뜨거운 숨이 폐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온다.

"말했었지? 비록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만은 널 믿어주겠다고..."

차분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날뛰는 심장의 박동과 린 선배의 조용한 목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며 귓가에 울렸다.

"하...악..."

"지금에 와서 말하기엔 바보같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네가 그런 녀석이 아니란걸, 아직도 믿고 있다."

린 선배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한점의 미혹도 느껴지지 않는 곧은 눈동자.

   그때?

멋진 눈이다.
너무도 올곧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뛰는 눈동자.

            그때가 언제였지?

몸속에서 지칠줄 모르는 기세로 순환하는 더운 피에 갈증이 인다.
숨결이 조금씩 거칠어지며 린 선배의 얼굴을 응시한다.

      양호실에 사키 선배를 데려다 준 날이었나?

운동으로 배어나온 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문득...목이 말랐다.

   선배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준 날이었나?

조금씩 고개가 숙여지며 린 선배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환풍구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이 창고를 비췄다.
바닥에 쓰러져 어깨를 붙잡힌채 나를 올려다 보는 린 선배의 눈은 어쩐지 슬퍼 보였다.

               ......그날 선배가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주눅이 들지 말라고...
...뭐야... 방금전에도 내가 말했던 대사잖아...?

"크...하..."

"...만약, 내가 틀렸다면...결국 그건 내 탓이겠지..."

천천히 린 선배의 눈이 감겼다.
내 손을 잡은 린 선배의 손도 스르르 치워졌다.

"아..."

손가를 감싸주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며 추위가 느껴졌다.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창고는 적막함이 감돌고 있었다.
으슬으슬 몸이 떨리는 가운데 어느샌가 찾아온 침묵이 무섭다.

어지러움 속에 구토감이 엄습하며 시야가 흐려져간다.

뚝...

"...?"

볼위로 튀어오른 물방울에 린 선배의 눈이 열렸다.
의아해하며 눈을 뜬 린 선배의 얼굴이 점차 변해갔다.

"아...우..."

"아, 아키츠?"

방금전까지 침착하던 린 선배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번져버린 눈물 너머로 삐뚤어져 보이는 린 선배의 얼굴이 우스꽝스럽다.

"괘, 괜찮은거냐 아키츠?"

누가 누굴 걱정하는건가요.
깔려 넘어진 선배가 위에서 억눌러오던 날 걱정하다니 희극이 따로 없다.
린 선배를 속박하던 손을 치우고 천천히 일어서 뒤로 물러났다.

"...죄송해요 린 선배."

"아키츠?"

우드득-!

그대로 체육 창고 문을 뜯어버리고 창고를 뛰쳐나왔다.
뒤에서 린 선배가 뭐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성난 기세로 뛰는 심장 소리가 한가득 머리를 울리고 있었으니까.
체육 창고를 벗어나 곧장 구교사를 향했다.
최근엔 오시즈도 학교를 배회하느라 구교사엔 없으니.
지금은 낡은 책장들만이 남아있는 구교사의 도서실로 들어갔다.
현재의 도서실로 책을 전부 옮기면서 한적해진 구교사의 도서실은 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구교과서 몇권만이 흩어져 있는 바닥에 가만히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뭐라고 할까...역시 이건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발○제」약발이 지나치겠지!?
리토가 먹었을 땐 끽해야 뽀샤시한 미화 효과에다가 버터 바른것처럼 느끼한 대사만 날리는 정도의 효능이었다고!
근데 지금 내 상태는 대체 뭐야?
방금 전 린 선배랑은 말그대로 덮치기 일보직전의 수준까지 갈뻔 했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잖아!
리토나 나나 같은 지구인인데 피로회복제의 부작용이 이렇게까지 다른 이유는 대체 뭐냐고...!

보는 사람도 없겠다 식-식- 새어나가는 숨을 다스릴 생각은 애초에 포기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래봤자 답이 안나오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러고보면 리토도 하루나에게 「너의 몸을 나에게 줘!」라고 말하기 직전에 약효가 끝났던가...?
허허...이거 정말 위험한 약일세...

마음같아선 미카도 선생님께 상태를 보이고 싶었지만, 지금 상태로 미카도 선생님께 갔다간 미카도 선생님에게마저 몹쓸 짓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미카도 선생님이 약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더라면, 애초에 리토나 라라에게 우주인용 피로회복제를 건네주진 않았을테니까.
야미나 다른 우주인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 천재는 확실히 천잰데...지구인의 증상에 대한 대처는 잘못 받았다간 사단이 날지도 모르니 조심하자...

생각을 이어나가는 가운데 뜀박질치는 심장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주체하지 못하고 빨라지는 두근거림에 점차 감정이 고양된다.

뜨거워...

온몸을 가득 채울듯 치밀어오르는 격한 감정에 현기증이 날것 같았다.

외딴 곳에서 혼자 궁상떠는 상황이 서글퍼서 홧김에 옆에 있는 책장을 움켜쥐었다가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모양을 따라 뜯겨져 나간 나무조각을 보곤 침묵해버렸다.

...이 상태로 여자애를 건드렸다간 어디 뼈라도 하나 부러지겠군...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고생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빙의령이 씌였을 때도 내 의지대로 몸을 조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성을 유지하는것 만으로도 벅찼다.
이건 뭐, 여성을 만나면 설득이고 뭐고 없이 일단 찍어누르고 볼 기세로구먼...

몸에선 끊임없이 활력이 넘치고 있었지만 반대로 정신적으론 자꾸만 지쳐가고 있었다.
제발 좀 진정해라 이 바보 같은 육체야...
약효...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요동치는 심장과 날카롭게 곤두선 신경에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음에 린 선배를 만나면...사과하자...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고 알몸을 봐버린데다가 선배를 실망시켜 버렸으니까.
라라에게도 사과해야 하려나...
리토에게 줄 약을 호의로 나눠주었다가 봉변을 당할 뻔 했으니...
우주인용 약이란걸 예상했더라면 라라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할 수 있었을텐데.
어깨...많이 아팠을까?
룬에겐 미안한 일을 했군...
리토에 전적으로 목매는 아가씨에게 훼방을 놓아버렸으니.
그래도 지금쯤이면 리토랑 함께 양호실에서 우후후-하면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려나?

열이 올라 여러가지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섞인 가운데 점차 의식이 침잠해간다.
사고가 흐릿한 가운데도 심장의 고동은 진정할 줄 모르고 거세게 뛰었다.
과연 우주인의 약은 대단하네...
발○제를 참는데도 이렇게 고생이라니 아하하...
......하아아~~~
나한텐 그럴싸한 대사 하나 떠오르지 않는데.
정말이지...쓸모없는 약이로구나...

이대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약효가 끝나 있을까?
혹시나 무의식중에 몽유병처럼 멋대로 날뛰는건 아닐까?
가물가물한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는 가운데, 시야 너머로 언뜻 금빛 물체가 보인 것 같았다.

"...아키츠 료스케?"

착각이 아니었나보다.
의식이 각성해가며 시야가 되돌아온다.
검은 구두가 바닥을 밟으면서 또각또각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무릎까지 내려온 긴 금발이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렸다.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인물을 주시한다.

"......야미?"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 겁니까?"

"야미야 말로 어째서 이곳에 온거야?"

"닥터 미카도에게 진료를 받고난 뒤에, 인공육체에 대한 용건으로 오시즈를 찾고 있었습니다."

"오시즈라면...요즘엔 이곳보단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을텐데."

"그렇습니까...복도를 돌아다녀봤지만 안보였는데, 엇갈렸나보군요."

"뭐어...벽을 통과해가면서 다니니까 자칫하면 찾기 힘들지도."

또각거리는 소리가 그치고 어느새 야미는 내 앞까지 다가왔다.
책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야미가 물었다.

"...아키츠 료스케? 괜찮은건가요?"

"아아...괜찮아. 그냥 땡땡이 치고 있는것 뿐이라구."

주저앉아있는 나를 이상한듯 쳐다보는 야미의 모습에 슬쩍 미소지었다.
야미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높아지는 심박수를 인식하곤 속으론 진땀을 뺐지만.

"학교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별에서는 학력이 아주 중요하잖아요?"

"곧 들어갈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뭐. 당신이라면 알아서 하겠죠.
그것보다...조금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위험해.
눈앞에 선 야미와 마주한 이후로 안그래도 요동치던 심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대화를 계속하는건 좋지 않은데...

"방금전 유우키 리토와 만나고 왔습니다."

...리토를? 설마 「발○제」를 먹은 상태로 만난건 아니겠지?

"룬-엘시-쥬에리아를 울려버린것 같더군요."

"......뭐?"

- 리토군 바보바보!
- 뭐가 모든 여성의 마음을 듣는게 사명이란거야!

"이여자 저여자 가리지 않고 설득하려는걸 말리던 그녀를 피해 달아나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참다못한 룬은 복도에서 펑펑 울어버렸다고 한다.
...일났네.

"뭐, 그녀도 지금은 화가 풀렸는지 유우키 리토를 양호실로 데리고 가서 간호하고 있다더군요."

"아...하하..."

사랑하는 아가씨는 슬픔에 굴하지 않는 법이로군요.
그런 소릴 듣고도 꿋꿋한 룬의 태도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리토가 양호실 신세를 지도록 만든 원흉은 분명 야미겠지.
아마 야미에게도 작업을 걸다가 징계를 받은걸까?
애도.

"아무튼, 유우키 리토와 대화를 하면서 신경쓰이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유우키 리토는 제가 외로움을 탄다고 하더군요."

- 나는 말이지. 단지 홀로 지구에 와서 외로워하는 너를 내버려 둘 수 없단말야.

...그런 말을 했던가 리토는?

정말로 야미가 외로워 하고 있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리토의 말을 들은 뒤의 야미는 왠지 평소보다 좀더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단순히 약에 취해서 튀어나온 대사를 가지고 야미도 그렇게 신경쓰진 않아도 될텐데...

"유우키 리토의 말을 들은 이후로 조금...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싸움말고 살아갈 길을 모르던 과거의 제 모습을...
그래서 자문했습니다.
여긴...정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인가...라고."

말끝을 흐린 야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말해주길 기다리는건가?
...그러고보면 물어볼게 있다고 했었지.
설마 방금 말에 대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거야?

머리가 지끈거리는 터라 적절하게 말을 꾸며내긴 어려운데...
어쩔까 생각하다 선인들의 말중에 지금 상황에 쓰일법한 대사를 인용하기로 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오늘은 선물.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선물(Present:현재)이라고 부른다.

가만히 날 바라보는 야미에게 웃어주었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이지.

흘러간 과거는 바꿀 수 없기에 역사이고,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신비롭지.
유일하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현재야 말로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거지.

뭐, 워낙 여러곳에 쓰이다 보니까 원래 의도랑 다를지도 모르지만...난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어."

"선물...입니까."

"그래. 과거를 부정하라고 하진 않겠어.
하지만 과거에 얽매이진 말아줘.
너를 결정짓는 건 예전에 네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해나가는가에 달렸으니까."

"......"

조금 숨을 돌리려고 책장에 슬쩍 등을 기대는 내 모습을 야미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대중적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형성하기도 했고, 나로선 나름대로 좋아하는 말이었기에 해준건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걸로 야미를 설득할수 있으려나 몰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야미를 납득시킬 만큼 공감을 줄 수 있을지 확신은 못하겠고.
이런거 말고 좀더 직접적인 경험 같은건 없으려나?

욱신거리는 몸을 가누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그러고보면 있잖아! 야미가 지구에 머무르게 된 계기가!
옳다구나 싶어서 냉큼 조용히 서있는 야미에게 말을 건다.
물론 표정은 엄청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실제로 흘러간 시간은 짧았기에, 방금전 대화에 이어 자연스럽게 다음 말이 연결되었다.

"무엇보다도...애초에 넌 이미 답을 내리고 내게 물어온거잖아?"

"네?"

어리둥절한 야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걸 참으며 표정을 바로했다.
진지한 시선으로 야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라라와의 대화, 기억해?"

"...예."

- 귀하게 자란 공주님인 당신은...나의 괴로움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이 우주를 오직 나 홀로 살아가는 괴로움을 이해하십니까...?

- 그러네...그 말대로 난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서 왕궁 바깥 세상을 보러 온거야!
내가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까!

"그때 넌 처음으로 과거에서 벗어날 용기를 얻은게 아니었어?"

야미가 유독 라라를 따랐던 이유.
그리고 리토의 암살 의뢰가 취소된 이후에도 지구에 남았던 이유.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준 라라에게 끌리면서 야미는 점차 변하기 시작했던게 아닐까?
라라에게 다가가면서 조금씩 주변의 사람들을 알게되고 그렇게 친구들을 사귀어 가는 날들.
야미가 과거를 극복하고 한걸음 내딛을 수 있도록 용기를 준건,
적대해오던 야미조차 포용하려던 라라의 밝은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중요한건 그때 대사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고 야미가 받아들이면 되는거다.
야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그렇게 믿게 만들면 되는거지.
불량배들 상대로 말도 안되는 허풍 쳐본게 어디 한두번인가.
이번에도 뻥을 친게 들킨다면 남은 수염도 잘려나갈지 모르지만, 야미가 휑하니 우주로 떠나버리는 결말보다는 백배낫지.
그러니까 자, 와라! 의심암귀가 됐든, 자학모드가 됐든 모조리 받아쳐주마!

놀란 얼굴로 나를 보던 야미는 천천히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물음을 한거였네요."

"아...? 하하...그렇지? 답이 정해진 질문만큼 따분한건 없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라라 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도 많이 알게되었잖아?
코테가와나 미캉, 사이렌지, 모미오카, 사와다, 오시즈 같은 친구들 말야."

긴장한 내가 바보같을 정도로 무난히 설득되어 버렸다.
...아니, 정말로 라라의 말이 야미에게 그만큼 큰 의미를 가졌던 것일지도.
어지럽게 머리 굴릴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벌써 가을인데도 덥네...
아직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건가?
열을 식힌답시고 고개를 젓던중 바닥에 널부러진 과학 교과서가 눈에 들어왔다.

지구의 자전축은 약 23.5도 기울어져 계절의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가을인데 이렇게 더운건가.
기울어진 자전축 때문에 내 몸도 따라서 옆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고.

...사고가 엉망이다...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걸 알수 있을만큼 얼굴이 후끈거렸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날 보던 야미가 갸우뚱하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어쩐지 얼굴이 붉습니다만..."

"괜...찮아."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무슨 말을 하는겁니까?"

턱을 가슴에 붙인채 대답하는 내 모습에 야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대로 내게 가까워진 야미는 몸을 숙인채 손을 내밀어 내 이마를 짚었다.

야미의 손이 닿은 순간, 급격하게 심장의 박동이 커졌다.
온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일어서며 야미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야말로 심장이 터질듯이 난동을 부리면서 온몸의 피가 들끓는것 같았다.

...미칠것만 같아...

진정하고 심호흡을 하자...
차분히 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는거다.
숨을 고르기 위해 가슴에 붙였던 턱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야미의 숙여진 몸이 있었다.
발목까지 가린 검정색 구두.
흑색 밸트가 장식된 탐스러워 보이는 매끈한 허벅지.
몸을 숙이면서 아슬아슬하게 허벅지에 걸쳐진 짧은 치마 사이로 언듯 하얀 속옷이 보인것 같았다.
작게 부풀어오른 아담한 가슴.
새하얀 얼굴과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
고양이 귀 같은 악세서리. 흔들리는 금발과 진홍색 눈동자.
두근거리는 심장때문에 야미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뻗어진 팔 너머로 야미의 매끈한 겨드랑이가 눈을 사로잡았다.

...특이한 취향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말이지...

야미의 신체 하나하나가 망막에 새겨지면서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자꾸만 시선에 주의가 가는지라 심호흡 하는것도 잊어버렸네.
...차라리 소수를 세는게 나았으려나?
눈을 떼지 못하고 야미를 바라보던 중, 야미의 손이 치워졌다.
내 이마에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선 야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서, 설마 이상한 시선을 보낸걸 들켰나?

"거짓말을...열이 나고 있잖습니까?
어서 닥터 미카도에게 가보는게 좋겠군요."

"그건... 좀 곤란한데..."

난처한 미소를 띄운 내 모습에 야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겁니까?"

"그게...실수로 우주인용 약을 복용해서 말이지.
아까부터 이성을 보면 자꾸만 심장이 멋대로 날뛰어서 말야.
가슴이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운게... 도무지 진정이 안되더군."

우주인용 약을 지구인이 먹었을 때의 부작용 같은건 미카도 선생님도 잘 모르니까, 괜히 갔다간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런 곳에 혼자있었던 겁니까?"

"그래. 그대로 학교에 있다간 내가 버티지 못할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렇게 야미 너와 가까이 마주보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곳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고."

"이상한 곳?"

의아한 얼굴의 야미에게 솔직히 대답해줬다.

"입술이라든지, 가슴이라든지, 허벅지라든지......겨드랑이라든지."

"...변태는 질색입니다."

"하하... 그래...그렇겠지."

"......"

야미에게 한차례 웃어주곤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가봐...
슬슬 참는 것도 힘들다구."

이젠 아예 온몸이 심장이 되어버린듯 거칠게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에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다.
이거 잘못하다간 하루종일 이 상태로 있어야 하는거 아냐?
귀를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야미가 다시 한번 물어왔다.

"그럼 당신은 계속 여기 있을 예정입니까?"

"몸 상태가 호전될때 까지만."

"...도움은 필요 없습니까?"

"그래. 시간이 지나면 약효도 사라질테니.
그냥 여기서 물러나주는게 돕는거라구.
미안하지만 배웅은 못해주니 이해해줘."

안그래도 몸 전체가 날뛰고 싶어 근질근질한 지경인데,
지금 배웅하려고 일어섰다간 그대로 야미를 덮칠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채 가만히 있는게 그나마 몸을 다스리는데는 제일 나아 보였다.

"...배웅 같은건 필요없습니다."

또각-하고 내딛어진 구두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려왔다.

"...가까이 오지 말라니까."

"어째서입니까?"

알면서 묻는거지 야미?
답이 정해진 질문만큼 지루한건 없다고 아까 얘기했잖아.

"가까이 오면...널 상처입힐지도 몰라..."

이제는 솟아오르는 감정이 성욕인지 가학욕구인지 모를정도로 사고가 거칠어져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야미와 접한다면 지금의 충동을 돌이킬 수 없을지 몰라 두렵다.
야미의 구두가 발치에 놓였다.
내 몸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멈춰선 야미의 눈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감정한 어조로 야미가 말을 이었다.

"전 킬러입니다."

"...!?"

"과거를 부정할 생각 따윈 없습니다.
그간 수많은 의뢰를 받았고 결국엔 전설이라는 과분한 칭호도 받았습니다."

"야미...!「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다가와도 쉽게 다치지 않습니다."

야미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마주보았다.

"전...강합니다."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한 야미는 어느덧 평소의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무엇보다, 아플 때 곁에 아무도 없다면 외롭지 않습니까."

"아...아하하~!"

웃음이 북받쳐 온다.
그래도 아직까진 야미가 가장 외로움을 탈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쪽이 야미의 배려를 받게 될 줄이야.

"응... 정말로 그래. 아플때 곁에 누군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니까.
덕분에... 지금은 외롭지 않아."

기분좋은 간지러움이 가슴을 채운다.
두근대는 심장은 여전히 지칠줄 모르고 사나운 기세로 뛰고 있었지만
열기로 달아오른 몸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져서 유쾌한 웃음이 나왔다.

야미의 배려가 기뻐서 조금 더 이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을 다시 한번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날 물끄러미 보며 서있던 야미는 잠시 고민하더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뭔가 바라는 건 없습니까?"

"바라는 거?"

"기왕 이렇게 된거, 저번에 닥터 미카도의 진료실로 절 옮겨 준 보답이라도 할겸 해서 말입니다.
뭔가 도와줄 일은 없습니까?"

"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야한 짓은 싫습니다!"

퍼억-!

"으갹~!"

야미의 머리카락 펀치가 명치에 명중했다.
급소에 전해지는 회심의 충격.
오호...이 펀치라면 세계를 노릴 수 있겠구나.
격투 만화씬이 아니지만.
한심한 비명을 지른 내게서 머리카락을 거둔 야미는 어이없다는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조금 전의 진지함은 어디로 간겁니까?"

"아니 뭐랄까...슬슬 몸이 달아올라서 분위기라도 바꿀겸..."

"...후우..."

한숨을 내쉰 야미는 몸을 굽혀 나와 눈을 맞췄다.

"그대로 가만히 계십시오."

가까이 온 야미는 내쪽으로 등을 향한채 내 다리 사이에 주저 앉았다.

"엣... 야미?"

"진정하시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어벙벙한 나에 비해서 야미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저라고 해도 몸이 닿는 정도로 당황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내 가슴에 등을 기대며 앉은 야미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가슴을 만진다거나 하는 짓은 꿈도 꾸지 마시죠."

...농담이었는데 그건...
정색하며 딱잘라 말하는 야미에게 굳이 반박하고 싶진 않았다.
주저앉은 야미의 몸 주위로 기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넓게 퍼졌다.
슬쩍 팔을 들자 풍성한 야미의 금빛 머리칼이 손등을 타고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렸다.
손등을 스치는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에 두근대는 심장이 더 빨라진것 같았다.
내게 등을 기댄 야미의 체향이 후각을 자극하며 마비될것같은 달콤함이 뇌리에 파고 들었다.
조금 주저하다가 살며시 팔을 벌려 뒤에서 야미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상한 곳을 만지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황송하옵니다 작은 공주님~ 윽!?"

야미의 손가락이 볼을 꼬집었다.

"에고...그냥 장난인데..."

"분위기 타서 멋대로 굴지 마시죠."

뒤돌아 보며 톡쏘듯 말한 야미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팔안에 담긴 야미의 몸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온다.
계절은 가을. 식욕도 왕성하고 더불어 잠자기에 딱 좋은 시기다.
조금 졸음이 몰려오는걸 느끼곤 야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말야...만약, 이대로 잠들면 어떻게 되는걸까?
몽유병처럼 난리치지나 않을지 좀 걱정인데..."

"걱정하지 마시길. 혹시나 색골로 변해 날뛴다면 그땐 구교사째로 날려버려 드리죠.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전혀 안심이 안되는데요!?"

정말이지 상식을 모르는 우주인 소녀다...
되도록이면 평화적인 해결을 원합니다 야미씨.


도서실 창문 너머로 학교의 벨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울려퍼지는 벨소리가 어쩐지 자장가 같다.
품안에 있던 야미는 주위에 널린 책을 머리카락으로 집어들곤 읽고 있었다.
정말이지 책을 좋아하는구나 야미는...
달아오른 몸과 반대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분위기에 차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지 편안해진 것 같아."

"...그러고보면, 아기는 엄마의 심장소리에 편안해진다고 합니다."

...난 아이는 아니지만.

등을 기댄 야미에게서 심장의 고동이 몸을 타고 전해져온다.
규칙적으로 울려오는 박동에 마음이 안정되며,
야미의 심장 소리에 맞춰 내 가슴의 박동도 차츰차츰 진정되어 갔다.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비친 금빛 머리카락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응...야미는 좋은 엄마가 될거야..."

"......편히 쉬시길..."

조용한 야미의 목소리가 어루만지듯 귓가를 맴돌았다.
품안에 느껴지는 기분좋은 온기와 두근대는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몰려오는 노곤함 속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깨어났을 땐 양호실의 침대 안이었다.

잠에 빠진 나를 야미가 안고 양호실로 데려온 것 같았다.
야미에게 대강 사정을 전해들은 미카도 선생님은 곤란한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우주인용 자양강장제가 지구인에게 그런 부작용이 있을줄은 몰랐어.
이건 더이상 학생들에게 주면 안되겠네..."

자양강장제가 든 유리병을 한 손에 들고 미카도 선생님은 중얼거렸다.
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미카도 선생님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라?

"왜 그러니 아키츠군?"

"아, 아뇨. 아무것도..."

빤히 바라보는 날 눈치채고 의아해하는 미카도 선생님께 고개를 젓곤 일어섰다.

"그럼 몸도 괜찮아졌으니 전 이만 교실로 돌아갈께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렴~"

손을 흔드는 미카도 선생님께 인사하고 양호실을 빠져나왔다.

교실로 돌아가면서 방금전 양호실에서 본 「자양강장제」의 생김새를 떠올려 보았다.
어두운 색을 띈 구슬 크기만한 환약.
...내가 먹은 약이랑 다르게 생겼잖아?
내가 먹은건 밝은 색을 띄고 손톱만한 크기의 환약이었는데...
입안에 넣으면서 우연히 본 거지만, 스마일 마크 마냥 얼굴 그림이 약에 그려져 있던것 같기도 하고.

그럼...내가 먹었던건 대체 뭐였던거지?




방과후, 뒤뜰에서 린 선배를 만났다.

"죄송합니다아아아아아---!"

"아, 아키츠?"

"파렴치한 짓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아아아아---!"

"자, 잠깐! 갑자기 무슨...?"

거두절미하고 냅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죄부터 했다.
린 선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지만 사과를 멈추지 않는다.
오늘 있었던 해프닝의 원인을 알게 되자, 말그대로 땅을 파고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니까.


교실로 돌아가 쉬는시간에 라라에게 물어서 내가 복용한 약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버서커DX」

한알로 원기 1000배가 된다는 데빌루크 전사의 비약이다.

먹으면 활기가 넘치게 된다는 라라의 말을 나 나름대로 적절하게 이해한 결과,
일단 복용하고 나면 엄청나게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즉, 내가 느꼈던 두근거림은 극대화된 투쟁심으로 인한 거였다.

투쟁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태에서 이성을 접했기에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해버린 것.
흔들다리 효과군요. 압니다.
게다가 만난 사람들마다 다들 한 실력하는 여성들이다 보니까 고취된 투쟁심이 장난 아니었겠지.
린 선배보다 라라와 야미에게 더 두근 거렸던 이유도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린 선배 보다는 라라와 야미가 훨씬 더 강하니까.

죽고 싶다...
그걸 난 사랑의 열병같은거라고 착각해서는...!
여자애들한테 손을 대려고 하던 행동도 「발○제」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것도 전부다 내 탓이었잖아!?
투쟁심을 성욕으로 착각하다니 대체 어디의 바보자식이냐!?

라라의 설명을 들은 뒤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머리를 싸매며 괴로워 하다가 친구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 당했다.
머리 아픈 아이를 보는 듯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친구들의 시선에 그야말로 부끄러움이 하늘을 찌를듯 솟아올랐다.


그리고...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지금 이렇게 린 선배에게도 사과하고 있는거고.
말 그대로 이마로 땅을 파는 내 모습에 린 선배는 어쩔줄 몰라 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입장이면서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느라 린 선배는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창고에서의 일로 린 선배는 화나 있지 않았다.
가슴을 보였던것 때문에 얼굴이 꽤 붉어져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보였던 이상한 반응들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걱정하는 선배를 앞에 두고 「선배랑 주먹다짐 하고 싶은 마음을 사랑으로 착각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건 정말 염치가 없었고...
끙끙 머리를 굴리다가 「선배의 모습에 두근거리는걸 참지못해 그만 실수 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선배를 놀린다고 한대 맞았다.

틀린말은 아니었는데...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빨개진 얼굴로 주먹을 휘두르는 린 선배는 귀여웠다.

그래도 노산승룡패는 너무 하지 않습니까 선배...

아래턱을 맞고 수직으로 떠오르며 쓸데없는 감상을 안는 나였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시리도록 깊고 푸르러 이대로 하늘로 빠져들것만 같았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활기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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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이 되기 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좀 늦었네요-_-;

소재 자체는 2월에 생각했던건데 참...-_-a
(살 붙인건 6월이지만)
암튼, 갈길이 멀군요^^;

「버서커DX」는 1학년 때 등장한 약입니다.
알약 형태로 1번, 스프레이 형태로 1번 나왔었죠.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려나요?=ㅅ=?)

효과는 료스케의 설명대로입니다.
원작에서 팽귄이 먹었을땐 폭주한채 하늘을 날았지요.
실험쥐가 먹었을땐 유리상자를 부수고 학생들을 공격하며 날뛰었고.
약 이름 그대로 광전사 효과가 있습니다.
료스케가 먹은건 원작에서 리토가 먹었던「자양강장제」가 아니었던거죠.

이상, 광전사 버프 상태로 전개된 료스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 덤으로 마지막 씬은 공중에 떠오르면서 본 장면.


p.s. 참고 이미지

룬1

룬2

라라(버서커DX편)

쿠죠 린

힘세고 강한 야미

버서커DX

자양강장제 복용시

노산승룡패



p.s2. 트러블 쓴다고 백미 밀린것 생각하면 좀 난감=_=a;
백미 완결은 트러블 완결되고 난 다음이려나요...--;;;
(소재는 쌓이고 있으니 백미도 완결까지 가겠지만)
구상해둔 파랜드 택틱스 팬픽은 백미 연재할 때나 쓸수 있으려나?=ㅂ=;;;


p.s3. 린과의 대화 후반 파트에서 띄어쓰기 했던것... 몽땅 취소 되어 있었더군요-_-;;;
수정했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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