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흠흠~♪"

가방을 챙겨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교한다.
오늘따라 몸에서 기운이 넘쳐흐르는 것이 그야말로 컨디션 최상!

무엇을 숨기랴?
오늘이 바로 인기 만화가 유우키 사이바이 선생님(37)의 만화 「영웅학원」의 신간이 나오는 날이다.
피가 끓는 것처럼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영웅학원」의 이야기에 매료된 이후로, 언제나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발행된 최신본.
하교시간을 이렇게까지 애타게 기다렸던 날은 오랜만이었다.

슬쩍 지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본다.
자금은 만전. 문제가 될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절대로 산다.
두권 산다! 감상용과 소장용으로 각각 한권씩!
기다려라 신간아~ 내가 간다!

"후...후후후..."

기쁨으로 자연스레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중에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봐...아키츠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어.」
「어딘가에서 순진한 여자애라도 꼬신걸까?」
「뭔가 못된 꿍꿍이라도 떠오른 걸지도 몰라. 왜, 최근엔 야쿠자마저도 울렸다고 하잖아?」
「아하하~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과장이 심했다 얘.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깡패라도 잡은거 아냐?」

깡패가 아니고 우주 마피아였습니다만...
지나가는 학생들의 오해섞인 수근거림에 귀가 간지러워진지라 한차례 헛기침을 하곤 잽싸게 그 장소를 벗어났다.


하교길을 벗어나 도착한 상점가는 쇼핑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상점가 한편에 「本」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서점으로 들어가 신간코너를 살펴 보았다.

영웅학원, 영웅학원...있다!

다행히도 신간코너 한쪽에 꽂혀있는 「영웅학원」신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학교 수업 때문에 늦게 서점에 와서 그런지, 남아 있는 신간은 한권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머지 한권을 더 사려면 다른 서점에도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한권이라도 건진게 어디냐고 스스로를 달래며 「영웅학원」으로 손을 뻗었다.
약간 아쉬움을 품은 채 「영웅학원」의 커버에 손을 올렸을 때, 누군가의 손이 내 위로 겹쳤다.

덥썩-

"응?"

"에?"

내 손등에 올려진 희고 가는 손가락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손가락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 저...? 호, 혹시..."

마주한 사람은 틀어올린 머리에 둥근 무테 안경을 쓴, 아직은 앳된 티가 남아있는 여성이었다.
안경의 여성은 왠지 당황한듯 내 얼굴을 보며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이 사람은...

"...하루코 선생님?"

"사이바이 선생님?"

그래. 미캉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인 닛타 하루코 선생님이다.
어려보이는 외모만큼이나 순진한 성격이라 거짓말에 약한 분이다.
그리고 하루코 선생님의 말처럼 내 이름은 사이바이...가 아니잖아!

하루코 선생님, 설마 날 사이바이씨로 착각하고 있어?
가발을 쓰고 사이바이씨 역할을 했을때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가!?
무심코 하루코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른 내 행동에 하루코 선생님은 「역시...!」라며 눈을 빛냈다.

양손을 맞잡고 순진하게 눈을 빛내는 하루코 선생님은 설레일만큼 귀여웠지만,
이상하리만치 쉴새없이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으로 내등은 조금씩 축축해져 갔다.

"학생복 차림이라 설마했는데...
정말로 사이바이 선생님이셨다니...!"

"에? 아...아하하~ 그, 그게 말이죠..."

어쩌지?어쩌지?
이미 늦은것 같지만 모르는척 하루코 선생님을 회피할까?
아니면 이대로 오해를 유지하곤 재빨리 여기를 벗어날까?
그것도 아니면 솔직하게 실토해? 아니, 그러면 미캉에게 폐가...

예상치 못한 조우였기에 대처할만한 방안이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말을 돌려보자.

"그, 그런데 하루코 선생님께선 서점에 무슨 일로?"

"저야 물론 사이바이 선생님의 팬이니까요.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에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었거든요."

"아...네, 그렇군요."

누가 봐도 기쁜듯한 표정으로 즐겁게 이야기하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애써 마주 웃어주었다.
활기차게 대답하던 하루코 선생님은 나를 보다 뭔가 떠올랐는지 조금 머뭇거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저기...그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해요."

"네?"

"그, 그러니까..."

의아해하며 하루코 선생님을 바라보자 하루코 선생님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심결인지 두손으로 가슴을 가리듯 살짝 감싸는 포즈를 취한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서 깨달았다.
그 때 현관문에서의 해프닝 말이구나!

"아, 아뇨. 그거야 제쪽이 오히려 실례를..."

파렴치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내 볼도 함께 붉어졌다.
붉어진 내 얼굴을 힐끗 본 하루코 선생님은 더듬거리면서 사죄하듯 허리를 숙였다.

교사로서 방정맞은 모습을 보여서 죄송했다는 둥 사과해오는 하루코 선생님의 행동에 양심이 찔렸다.
애초에 난 사이바이씨가 아닌데다가 사과는 내쪽에서 하는게 맞는거 아냐?
주변에서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사람들도 신경쓰여서 하루코 선생님을 진정시켜야할 것 같았다.
양손이 무릎에 닿을듯 허리를 숙인 하루코 선생님의 어깨를 잡고 몸을 세웠다.

"진정하세요 하루코 선생님."

"사이바이 선생님?"

"그 때의 일은 하루코 선생님께서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서로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고, 다행히 하루코 선생님께서도 다치진 않으셨으니까 다행한 일이죠.
오히려 저로서는 득을 봤달까,"

"네?"

...아, 실수.
내 쪽이 잘못이었다는 식의 대사를 하려던게 말 잘못 골랐다.

"아, 아니 하루코 선생님같은 미인을 도울수 있어서 기뻤단 의미로..."

"엣?"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당황해서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게 아니라 좋은 향기가 났달까...콧잔등을 간질던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달까...
자그마한 몸집이 갸날펐달까..."

"에? 엣?"

당황한 나머지 칭찬인지 성희롱인지 모를 말만 횡설수설 늘어놓아 버렸다.
헌팅이라도 할 작정인건가 나는...!?

"저...사, 사이바이 선생님?"

이야기하다 말고 갑자기 머리를 싸매며 신음을 흘리는 내 모습에 하루코 선생님이 어쩔줄 몰라했다.

"괘, 괜찮습니다. 하루코 선생님."

"괜찮다니요? 그렇게 안색이 나쁜데..."

정말로 괜찮다니까요?
그저 자기혐오에 빠진 소년의 허무한 자학일 뿐이니까.

이대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간 지리멸렬한 대사로 자폭해버릴것 같다.
그냥 적당한 대사로 빨리 대화를 끝내고 여길 벗어나자.
아무래도 그게 최선일것 같으니까.

안절부절 못하며 내쪽으로 주춤 손을 뻗어오던 하루코 선생님의 양어깨를 잡는다.

"꺅?"

놀라는 하루코 선생님의 반응을 무시하고 힘주어 말한다.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하루코 선생님께선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여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지 말고 좀더 자신을 가져도 좋다구요?"

그러니까 이런 소모적인 사과 주고받기는 이걸로 끝! 이해했어요?

하루코 선생님을 응시하며 아이 컨택트를 주고받았다.
이 주제로 대화하는건 이만 끝내자는 뜻을 되도록 마음 상하지 않게 에둘러 말했는데 알아들었으려나?
선생님이라는 직함도 있고 아마도 이해했을거라 생각하지만...

하루코 선생님의 어깨에 올려진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양볼 위로, 하루코 선생님의 눈자위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엄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입가를 가린 양 손가락 사이로 달뜬듯한 한숨이 새어나오며 얼굴을 간질었다.
옅은 민트향이 배인 숨결을 타고 하루코 선생님의 스러질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이런건... 곤란해요, 사이바이 선생님..."

...뭐가 곤란하다는 건가요 하루코 선생님?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잖아!?

톡-톡-

"응?"

등 뒤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손엔 책을, 다른 손엔 붕어빵 봉투를 든, 무릎까지 오는 금발이 인상적인 소녀...그러니까 야미가 서있었다.
내가 야미를 바라보자 펼쳐든 책을 한손으로 탁-소리나게 접은 야미는 눈을 가늘게 뜨곤 나를 쳐다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야미?"

"여성을 설득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미안하지만, 좀 더 장소를 가리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응?"

주위로 신경을 돌리니 서점 곳곳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속삭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처럼 하루코 선생님도 이제서야 상황을 눈치챈듯 화악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러더니 문득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든 하루코 선생님은 나를 보곤 중얼거렸다.

"...아키츠...료스케?"

...망했다.


야미가 부른 내 이름을 듣고 망연한 표정을 지은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결국 서점 밖으로 나와서 하루코 선생님께 솔직하게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서투르게 거짓말을 하다간 불필요한 오해가 더 커질수도 있고.
미캉과 관련된 이야기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야미도 하루코 선생님의 곁에서 내 해명에 귀를 기울였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하루코 선생님은 곤혹스러워 하면서도 어떻게든 수긍해주었다.

"그랬군요. 사이바이 선생님 대신으로..."

"미캉의 아버지는 만화가였군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납득하는 둘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하루코 선생님은 뭔가 신경쓰이는게 떠올랐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그 때의 사인본은..."

"아. 그건 사이바이 선생님의 친필 사인이 맞아요.
가정방문에 찾아뵙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면서 닛타 선생님께 건네 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중간 과정에서 약간은 각색이 있었지만 뭐 어때.
사이바이씨의 팬인 하루코 선생님께 이정도 립서비스는 센스지.

"그런가요..."

하루코 선생님은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굳이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들러서 사이바이씨의 사인본을 받아왔던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인본마저 가짜인 상태로 하루코 선생님께 들켰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자니 식은땀이 난다.

동경하던 사이바이 선생님은 가짜였고,
옷도 젖어버리곤 야한 짓까지 당했다.
거기에다 소중히 간직했던 사인본마저 가짜였다면 정말로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루코 선생님과의 오해도 풀렸겠다,
이곳에서 찾은 신간은 사죄도 할겸 하루코 선생님께 양보하기로 하고
난 이만 「영웅학원」신간을 찾으러 다른 서점에나 가볼까?

서점을 나오면서 들고왔던 영웅학원 신간을 하루코 선생님께 건넸다.

"이건 닛타 선생님께 드릴께요."

얼떨결에 건네받은 책을 품에 안은 하루코 선생님은 당황하며 사양했다.

"하, 하지만 이건 아키츠군이 먼저 집은건데..."

"괜찮아요. 원래 한권으론 부족했으니까."

"에?"

"신간을 두권 사려고 했거든요.
어차피 여기서 한권을 구했어도 다른 서점에도 들러야 하니까,
이건 닛타 선생님께서 가지시는게 낫겠죠."

출간 당일에 감상용이랑 소장용을 한꺼번에 모으는건 고생이네.
여기 말고 다른 서점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데 전철이라도 타고 가야 하려나?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아, 저! 잠시만요!"

목례를 하고 물러나는 나를 보던 하루코 선생님이 황급히 내 손을 잡았다.

"가, 같이 가요."

"네?"

"아...저, 저도 두권 필요하니까..."

긴장했던 탓인지 땀이 배인 하루코 선생님의 손은 미끄러웠다.

"그럼 저도 같이 가도록 하죠."

"야미 너도?"

옆에서 합류 의사를 비친 야미는 부연해 설명했다.

"방금전까지 소설 코너에서 책을 보고 있었지만 서점 주인이 청소하느라 자꾸만 먼지가 흩날려서 말입니다."

그건 서점에서 쫓아내려는 신호인데?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얼마나 오래 서있었어?"

"서점 주인 말로는 네시간이라더군요."

"......"

너무하잖아 그건!?
게다가 주인 아저씨가 시간까지 말했다면 보통 거기서 그만 읽어야 하는거 아냐?
힐끗 바라본 서점 입구에선 채플린 수염을 한 안경낀 점장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벙긋거리는 입모양을 보건데 「그 아가씰 데리고 얼른 가버려」라는 말인듯 했다.
훠이훠이 손짓까지하며 온몸으로 떠나라는 신호를 보내는 점장의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야미는 아예 눌러앉듯 서점에 있었는지 한손에 붕어빵 봉투도 들고 있고...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야미는 봉투에서 붕어빵을 하나 꺼내서 내게 권했다.

"당신도 붕어빵 하나 어떻습니까?
아까 너무 많이 사서 식어버렸지만..."

"...잘 먹을께."

모처럼의 호의를 무시하기도 그랬기에 야미에게 붕어빵을 건네받곤 입에 넣었다.
단팥빵 사건 이후론 한동안 팥이 들어간건 피했었는데...오랜만에 먹으니까 꽤 괜찮네.
이미 식어버린 붕어빵이었지만 공복상태라는 상황, 군것질이라는 즐거움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당황하는 하루코 선생님에게 붕어빵을 건네는 야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후 일정을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전철부터 타야겠네.



덜컹-덜컹-

붕어빵을 완식한 뒤, 하루코 선생님과 야미와 함께 옆마을 서점으로 가기 위해 전철에 탔다.
의외로 미캉 관련 이야기로 야미와 즐겁게 대화를 풀어나가던 선생님은 내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아키츠군은 사이난 고교의 학생이었나요?"

"네. 올해로 고교 2년생이죠."

"젊네요. 어려도 저보단 연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아니~ 저 지금 교복 입고 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사이난 고교 춘추복인데 당연히 고교생으로 보는게 맞지 않아?

"그게...학생들과 교류를 위해서 선생님들이 교복을 입는 학교도 있다잖아요."

정○고?
J.A.V 이사장이 계신?

아무튼 어딜가나 이 수염이 문제다.
덕분에 중학교 시절에 담배 살 때도 신분증 달라는 소리 한번 들어본적 없었다고.
이 나이에 아저씨 취급 받고 싶진 않단 말이에요...
반쯤 설움을 담아서 하루코 선생님에게 태클을 걸었다.

"그러는 닛타 선생님이야 말로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 않나요?"

"뭐가 말인가요?"

- 이 앞의 커브 때문에 전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주의해주세요.

"닛타 선생님, 동안이라서 영락없이 고교생으로 보이는걸요?
사복이 아닌 교복차림이었다면 동년배 여학생으로 착각했을거라고요."

"어, 어른을 놀리면 못써요!"

"아하하~! 료스케 선생님이라고 불러보는게 어때요?"

"내쪽이 연상이라구요!
정말...「덜컹-!」꺅?!"

급작스런 흔들린 전철안에서 균형을 잃은 하루코 선생님은 마주서있던 내쪽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손을 뻗어 부축을 했는데...
...어째 자세가 좀 묘하다?

양 손바닥을 내 가슴에 얹고 기대듯 내 품에 얼굴을 묻은 하루코 선생님.
하루코 선생님을 품 안으로 끌어당기듯 선생님의 허리에 팔을 두른 나.
가늘고 부드러운 옆구리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며 하루코 선생님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세요 닛타 선생님?"

"에엣...?"

고개를 든 하루코 선생님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보였다.
맞닿은 하루코 선생님의 몸이 순간 경직된 걸 느끼곤 다시 한번 하루코 선생님을 불렀다.

"...닛타 선생님?"

"꺄앗!?"

하루코 선생님은 놀라며 황급히 일어서며 몸을 뺐다.
...정확히 말하자면, 「빼려고 했었다」.

퍽!

"크풉?!"

"꺅!"

뜨압!? 혀 씹었어!
일어서려던 하루코 선생님의 머리에 턱이 부딪히는 바람에 호쾌할 정도로 혀를 씹어 버렸다.
또다시 균형을 잃고 뒤로 주저앉으려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지만 잡을 겨를이 없었다.
아픈 나머지 나도 전철 손잡이를 놓쳐버려서 몸이 기우뚱 하는 중이라고.

스르륵...꽉-.

그렇게 꼴사납게 전철 바닥에 쓰려지려는 우리 둘을 잡아오는 손길이 있었다.
어느새 손모양으로 형태를 만든 야미의 머리카락이 나와 하루코 선생님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다.
손모양의 머리카락에 기댄채 간신히 몸을 추스리는 우리 둘을 지탱하며 야미가 말했다.

"부끄러운 모습은 이만 자중하시죠. 두사람."

"미안..."
"미안해요..."

우리 셋중에 제일 어린데...우리들 중에서 가장 어른스럽군요 야미는.
기묘한 모습의 우리를 보면서 수근거리거나 킥킥 웃는 승객들의 소리에 낯을 들 수 없었다.



전철에서의 해프닝이 끝나고 겨우 목적지인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Amaz○n」이라는 이름만큼이나 큰 규모의 서점이었기에 다행히 「영웅학원」신간을 찾을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영웅학원」신간을 집어들었다.
야미는 어느새인가 소설 코너로 가서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었다.

책을 보는 야미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해야하나...?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책을 볼때 야미 얼굴은 무표정이고.
그래도 몇시간을 계속해서 읽고 사는걸 보면 즐거운것 같기도 한데.

그나저나 나도 뭔가 더 사볼 책은 없으려나?
일단 급한 용무는 끝난지라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기에 잠시 서점을 둘러볼겸 다른 코너를 볼까 싶었다.

"아키츠군? 뭔가 더 살게 있어요?"

"모처럼 이곳 서점까지 왔는데 다른 책들도 한번 살펴보려구요.
닛타 선생님께서도 함께 돌아보실래요?"

"으응, 좋아요."

내 권유를 탄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서점의 코너를 돌아보았다.

「10대를 위한 교양 도서」「20대를 위한 자기계발 도서」
「금주의 베스트셀러」「세계 명작 100선」「요리」

진열대에서 몇권을 꺼내서 훑어보다가 마음에 드는건 체크만 해두고 계산할때 한꺼번에 들고가기로 했다.
이것저것 책들을 골라보는 나에게 하루코 선생님은 신기한듯 물었다.

"아키츠군은...책을 좋아하는가 보군요?"

"아 뭐...일단은 교양이니까요.
책을 읽을 땐 마음이 편안해져서."

"후후...보기완 달리 문학소년이네요."

쿡쿡대며 작은 소리로 웃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민망해져서 콧수염을 슬쩍 매만졌다.
뭐...내 외모랑 안어울린다는건 인정해.
그건 사실이니까.
단지 중학교 재학중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책에 빠져든 시기가 있었을 따름이다.
자기 위안 목적으로 독서에 취미를 붙이다 보니까 문학소년 흉내도 수박 겉핥기 수준일 뿐이고...

그렇다고 공만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슛돌이처럼
독서를 통해서 내 외로움이 사라지는건 아니었고,
공을 친구 삼아서 축구로 이름을 떨쳤던 슛돌이와는 달리
독서를 친구 삼아서 세기의 지성인(움베르트 ○코 라든지...) 수준에 도달할 만큼 내가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건전한 방식으로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취미였기에 나 스스로는 꽤나 만족하고 있다.
게다가 독서를 취미로 가졌던 덕에 고교 들어선 언어영역 시험도 그렇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게 됐으니 결과적으론 좋은 걸까나?

"아키츠군은...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랑 많이 다르네요."

"네?"

"거친 외모랑 달리 차분한것 같기도 하고, 가끔은 나이에 맞게 장난스러운 면도 있고,
어떨 땐 덤벙대는 모습도 보이고...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즐거워진다고 할까요?"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다...
하루코 선생님의 칭찬에 멋쩍어져 속이 근지러웠다.

"아,아하하~! 하루...닛타 선생님도 참~"

"...그렇게 호칭에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하루코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으니까."

"어, 정말요?"

"사이바이 선생님 흉내낼 때도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 않았나요?
게다가 겉모습으론 오히려 저보다 연상으로 보이고..."

"이렇게 보여도 전 아직 17세 입니다만!?"

"...그럼, '하루코 누나'라고 불러볼래요?"

"에?"

"노, 농담이니까 그렇게 정색하지 말아요? 무섭다구요...!"

눈이 동그래진 내 모습에 당황하며 하루코 선생님은 손을 저었다.
설마 아까 전철에서 「선생님이라기 보단 동급생으로 보인다」며 놀렸던 걸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었던건 아니겠지...?
말해놓고선 되려 자기가 당황하는 하루코 선생님의 반응에 난처한 웃음이 흘렀다.
확실히 다섯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날것 같으니 누나라고 불러도 틀린건 아닌데...
그래도 살면서 누나라고 불러본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누나라고 부르라면 나라도 해도 조금은 쑥스럽다고요?

어색한 분위기로 하루코 선생님과 마주하고 있는데 구원의 손이 뻗어졌다.

"다들 찾고 있던 책은 찾았습니까?"

먼저 계산을 끝낸건지 한손에 종이봉투를 든 야미가 카운터에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응. 지금은 괜찮은 책이 더 없을까 한번 돌아보는 중인데...야미는 뭘 골랐어? "

"저 말입니까?"

야미는 봉투에 든 책을 꺼내보였다.

어디보자...「전래동화 모음집」,「사랑에 살다」,「작은 아씨들」
그리고...

"...「어린왕자」?"

"「세계 명작 100선」 코너를 지나다 발견했습니다.
여름 축제 때 당신이 추천해 줬었죠..."

책들을 다시 봉투에 담으면서 야미는 말을 이었다.

"소개글에 따르면 1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었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라고 했고,
한번쯤 사서 보는 것도 좋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하긴 야미는 전래동화나 명작소설, 연애소설 쪽에 관심이 많았지?
즐겁게 읽어준다면 나도 추천해준 보람이 있을텐데 말이지.
아무튼 야미도 용무가 끝났으니, 서점 안을 돌아보는건 이정도로 끝내고 이만 책을 골라서 집으로 돌아가볼까?

"저, 저기..."

"...응?"

야미랑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눈여겨둔 책을 골라서 계산대로 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바지춤을 잡아 당겼다.
날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처음보는 어린 꼬마가 빤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마음에 드는 사내아이였다.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왜 그러니?
혹시 부모님이랑 따로 떨어진거야?"

"으응~ 그런게 아니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꼬마는 왠지 기대감이 어린 눈초리로 날 보았다.
...왜?

"저기...혹시 형 이름이 '아키츠 료스케'야?"

"어? 맞긴 한데..."

처음 보는 아이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지?
같은 동네에 있던 꼬맹이들이라면 몰라도 여기에 사는 아이들이 내 이름을 알진 않을텐데?
내 대답을 들은 아이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면서 크게 외쳤다.

"거봐! 내가 맞다고 그랬지!"

외침이 끝나자 진열대 끝에서 하나둘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정말이야?"
"진짜 아키츠 료스케?"
"이 오빠가?"
"정말로 있었구나..."

...엥?
이게 대체 뭔 일이래?

나를 둘러싸곤 초롱초롱 눈을 빛내기 시작한 꼬맹이들의 모습에 무심코 주춤하며 몸을 뒤로 뺐다.
난데없는 상황에 야미는 의아해하며 날 쳐다보았다.
하루코 선생님도 나랑 꼬마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해 하셨고.
그렇게 바라보셔도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소란스러운 아이들의 목소리에 서점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내쪽으로 쏠렸다.
뭐야 이건? 도무지 짐작도 안가는 이 상황은?
서, 설마 몰래 카메라 같은 건가?

"지금 이 소란은 대체 뭔가요 아키츠 료스케?"

"나한테 묻지 말아줘..."

신기하다는듯 이리저리 나를 바라보는 꼬맹이들의 시선에 견디다 못해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아이를 불렀다.

"저기...얘야?"

"응!"

"그...물어보기 미안한 말이다만,
대체 네 친구들이 어째서 이렇게 놀라고 있는건지 물어도 될까?"

"어? 형 몰랐어?"

알면 내가 이렇게 묻고 있겠냐!?
눈을 깜빡이던 아이는 친구에게서 책을 건네받아 나에게 내밀었다.

"여기 이거."

"...「영웅학원」?"

"형은 영웅학원 몰라?"

"그야 알고 있지. 좋아하는 만화인걸. 그런데 그게 왜?"

"그~러~니~까~ 여기 좀 봐."

사내아이는 책의 끝부분을 뒤적이더니 거의 마지막 부분을 집고 펼쳤다.
...후기? 「사이바이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밀어진 「영웅학원」신간을 잡고서 후기라 적힌 부분을 읽었다.
하루코 선생님과 야미도 호기심이 인듯 내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함께 후기를 읽었다.
몇가지 잡담과 함께 시작된 후기를 읽던 중 내 눈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었다.


Q:영웅학원을 집필하시면서 모티브로 삼았던게 있으신가요?

A:강인한 정신력과 뜨거운 마음으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지요.
그나이 또래들 답게 풍부한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소문들이 꽤나 도움이 되었죠.
가끔은 말도 안되는 전설들도 있었지만요.
사실은 그런게 더 재밌어서 조금씩 참고하기도 했습니다.

Q:말도 안되는 전설이라면?

A:흔히들 도시전설이라 부르는 것들 말입니다.
천명의 불량배와 겨뤘다고 하는 중학생 이야기 같은거죠.
학창시절 특유의 허풍섞인 이야기들이었지만, 갈피를 잡을수 없는 기묘함을 가진 인물상이 흥미로웠습니다.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를 잡기 어려운 인물이라고 할까요?


본 기자가 개인적으로 알아낸 자료에 따르면
유우키 사이바이 작가님이 살고 있는 사이난에서 떠도는 소문들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대 100의 싸움에서 승리한 중학생.
천명의 불량배를 상대한 양아치.
백명의 여자와 잤다는 중학생.
천명의 여자를 애인으로 거느린 양아치.
귀신을 부리는 사령술사.
피구공을 다루는 도장파괴범.
도라○몽.
...

전형적인 도시전설에 걸맞게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 뿐이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사실은 사이난의 모든 도시괴담들에는 공통적으로 한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키츠 료스케」

한 사람이 정말로 이토록 많은 괴담의 주인공이 될수 있는 것인가?
혹시나 이야기로만 떠도는 가공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아키츠 료스케라는 인물은 실존하는것 같았다.

사이난에서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취재해 보았다.

"아키츠 료스케? 딱히 불량배가 아니라도 이 도시에서 녀석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
금발 올백에 헤어밴드. 목걸이와 체인형 팔찌. 결정적으로 콧수염과 턱수염, 그리고 구레나룻.
이런 외모를 한 학생은 그 녀석 하나뿐이니까.
최근엔 구레나룻을 잘랐다고 하던데...글쎄, 실연이라도 당한거 아냐? 하하~!"

"그 녀석과는 결코 맞서면 안돼.
전설을 쓰러뜨린답시고 덤벼들었던 놈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구.
학군단 연합이라고 위세좋게 떠들던 녀석들은 이젠 뿌리조차 안남았고...
패닉에 빠져서 자중지란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아마도 녀석이 뭔가 했겠지."

"녀석을 상대하게 되었을 때? 도망쳐야지.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숨을 생각은 절대로 하지마.
피치 못해 숨게 된다면 결코 눈을 뜨면 안돼.
만약 눈을 뜬다면, 어둠속에서 널 응시한 채 입술이 찢어질듯 미소를 지은 녀석을 보게될 테니까..."

"장신구를 하나 벗을 때마다 변신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고 깡패들 사이에 떠돌던 소문인데...녀석은 언제나 피에 젖은 십자가 목걸이를 품속에 넣고 다닌대.
지금까지 거의 본 사람이 없지만, 일단 꺼내들면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

"여자? 젠장! 사이난의 여자란 여자는 모조리 그 녀석이 먹어치웠다고!
멋모르고 헌팅하다가 그 자식한테 박살난게 한두번이 아냐.
헌팅당하던 여자애들이 꺄꺄 거리면서 녀석의 등뒤에 달라붙었을 때 얼마나 열불이 뻗쳤는지 알아?
어째서 그딴 수염을 좋아하는거야?"

"건강한 아이. 조금 날카롭게 생겼지만...
가끔 시장에서 모습을 보곤 해요. 동생이랑 같이 쇼핑하는 모양이던걸?"

"아! 나도 그 형 알고 있어! 수염별에서 온 수염성인이야!
지구인들의 얼굴을 수염으로 뒤덮기 위해 지구에 왔대.
공원에서 회전 회○리슛 쓰는 것도 봤다?"

"동네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모습을 봤어요.
의외로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

"피구왕."

"바다에서 본 몸매가 꽤 멋졌어.
...말해두지만 몸매 뿐이야?"

"의외로 평소 학교에선 조용해.
가끔씩 사고를 일으키긴 하지만 선생님의 지시에는 잘 따르는것 같았어.
청소 같은 것도 안 빼먹던데?
생각보다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거물의 냄새가 나는 녀석이야.
난 알 수 있어.
예전에 겁도 없이 녀석에게 싸움을 걸었을 때, 나한테 녀석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 학생은 학생답게 놀아.

하하, 걸작이지?
녀석에게선 어딘지 보통 양아치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일반인에게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더군.
어쩌면, 그게 바로 거물이 가지는 품격이라는 건지도 모르지.
최근에 듣기론 야쿠자 조직의 비밀병기라거나, 야쿠자 그룹의 후계자라는 소문까지 있던데...아마도 사실이 아닐까?"


이상이 「영웅학원」의 소재에 쓰였다는 도시 괴담의 주인공 「아키츠 료스케」에 대한 소문들이다.
그외에도 많은 재미난 소문들이 있었으나 페이지 문제로 간략히 마무리 한다.
다양한 소문 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아키츠 료스케」라는 인물의 행적이 궁금하다면 「영웅학원」다음권을 기대해주시길 바라며...


"...쿨럭..."

후기를 다 읽은 뒤 총체적으로 내린 나의 감상은 사레걸린 소리였다.

뭐 이런 쓸데 없는것까지 시시콜콜 써놓은거야?
마지막에 와선 영웅학원 후기가 아니라 그저 황당무계한 가십거리 범벅이 되어버렸잖아?

야미와 하루코 선생님도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당신은 제가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유명인이었군요."

"기쁘진 않은데 말이지..."

"아, 아키츠군...아무리 그래도 애인이 천명이나 되는건 역시..."

"오해입니다."

"...정말이에요?"

"오해입니다."

순진하게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주세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천명의 애인같은거 가능할리 없잖아요?
「영웅학원」을 덮자 지켜보던 아이들이 너도나도 할것없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저기~! 가장 재밌었던 싸움 얘기해줘~!"
"영웅학원 주인공처럼 멋진 얘기였어?"
"어떻게하면 여자애들이랑 사이좋게 지낼수 있어?"
"오빠는 술래잡기 자신있어?"
"회전 ○오리슛 한번 보여줘~!"

"자, 잠깐만...!?"

즐겁게 떠들어대는 아이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려 정신이 없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런저런 질문들에 일일이 대답하는게 난처해 하다가,
결국 꼬맹이들의 열화같은 성원에 힘입어 서점 밖에서 허리케인 버스터를 시연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뚜렷한 나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쏘아지는 피구공에 아이들과 지켜보던 사람들이 환호해줘서 조금 쑥스러웠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친절하게 「허리케인 버스터」라고 소개해줬지만
모두들 「회전 회○리 슛」을 연호했다는 것 정도일까...?

급조한 공연을 즐겁게 구경해준 사람들에게 화답한 뒤에야 야미와 하루코 선생님과 함께 간신히 서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철을 타고 다시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이만 해산하기로 했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며 하루코 선생님은 「영웅학원」 한권을 야미에게 건네주었다.
책을 손에 들고 갸우뚱하는 야미를 보며 하루코 선생님은 싱긋 미소지었다.

"한권은 야미에게 줄께."

"저...말인가요?"

"물론. 나와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건 즐거운 일이니까."

아아, 그런 거였군.
그러니까 하루코 선생님은 감상용이랑 선물용으로 책을 산건가?
납득했다.
과연이라고 할까...훌륭한 팬의 모범이시로군요 하루코 선생님.

"(그게... 사실은 두권으로 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응?

작게 속삭이며 야미에게 책을 건넨 하루코 선생님은 한껏 기지개를 폈다.

"아아~ 즐거운 하루였어~"

"...그렇네요. 재밌는 하루였습니다."

기운차 보이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야미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수긍했다.
뭐, 나도 하루코 선생님을 속였던거에 대한 죄책감도 덜었으니 의미있는 하루였다고 할까나?

"저도 즐거웠어요. 아, 그리고 이거..."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서 하루코 선생님께 건넨다.

"이건 뭔가요?"

"사이바이 선생님의 명함이에요."

유우키 사이바이씨의 이름과 함께 사이바이 스튜디오의 주소와 연락처가 적힌 명함.

"다음 가정방문 땐, 직접 사이바이 선생님이랑 약속을 잡아보시는 것도 좋을거에요."

같은 사이바이씨 팬으로서 동질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나나 리토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사이바이 선생님을 하루코 선생님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명함을 건네받은 하루코 선생님은 놀란 얼굴을 하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아키츠군. 다음번엔 꼭 진짜 사이바이 선생님을 만나뵐테니까."
그리고..."

끼이익-

하루코 선생님이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도중에 말을 끊긴 하루코 선생님은 버스와 우리를 번갈아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아키츠군. 야미."

"안녕히 가세요 닛타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닛타 하루코."

"정말... 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좋은데."

"쯧쯧쯧~! 그럼 닛타 선생님께서 먼저 편하게 대해주셔야죠~"

어른쪽에서 먼저 말을 놓아야죠.
장유유서잖아요?

"아하하~ 그런걸까?"

익살맞게 손가락을 흔들며 반박한 내 모습에 한차례 웃음을 터뜨리곤 하루코 선생님은 버스에 올랐다.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 하루코 선생님은 즐거운 얼굴로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럼...다음에 만나면 함께 사인본을 받으러 가요, 료스케군. 야미짱~!"

"에?"

벙찐 얼굴로 하루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익숙치 않은 장난이 부끄러웠는지 상기된 얼굴을 한채 하루코 선생님은 킥킥거리고 있었다.
이름으로 불러지는건 솔직히 예상에 없었는데...
이대로 그냥 보내드리면 한방 먹은 느낌에 영 떨떠름할것 같다.

자고로 상대방이 먼저 한걸음 다가와 준다면 이쪽은 두걸음 다가가 주는게 예의.
왠지 모르게 북받쳐 오르는 유쾌함을 담아, 닫히기 시작한 버스문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다음에 봐요 하루코 누나~!"

「꺄아악~!?」

딱쿵~!

버스 유리창 너머로 하루코 선생님이 휘청~하고 몸을 기우뚱하는게 보였다.
버스봉 한쪽에 이마를 부딪히곤 이쪽을 바라보는 하루코 선생님의 모습에 폭소했다.

"아하하하~! 안녕히 가세요 하루코 선생님~!"

한손으로 배를 부여잡곤 웃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채 한껏 손을 흔들면서 하루코 선생님을 배웅했다.
이마를 매만지며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던 하루코 선생님도 이내 피식 웃곤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하여간 귀염성 있는 선생님이시라니까.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와 야미도 정류장을 떠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미는 걸어가면서 오늘 산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땐 앞을 보면서 다니는게 좋을텐데 말이지...
독서에 열중하는데 일부러 야미에게 말을 걸기도 그래서 나도 덩달아 사왔던 책 중 한권을 꺼내 들었다.


「선(禪)」《 여인을 안고 강을 건너다 》

탄산(坦山) 스님과 한 젊은 중이 강가에 이르러,
한 아름다운 여인이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탄산이 말했다.

"아가씨, 제가 건네 드리죠."

그리고는 그 여인을 안아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반나절을 걸었다.
날이 저물어 어느 절에서 자게 되었을 때, 젊은 중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우리처럼 출가한 사람은 여색(女色)을 가까이할 수 없는데, 아까 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아! 그 여인 말인가?"

탄산이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일찌감치 내려놓았는데, 그대는 아직도 안고 있는가?"


"...그러고 보면..."

"응?"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책에서 눈을 떼고 야미를 보았다.

"방금전, 닛타 하루코를 누나라고 부르더군요.
모습을 보니 많이 놀란것 같던데... 실례가 아니었습니까?"

"아...그거야 하루코 선생님, 연상이고...
게다가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으니까."

하루코 선생님으로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순진한 분이라 내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가 기대되었다는 점이 더 컸다.

내 답변을 들은 야미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럼 저에게도 야미 누나라고 부르는게 어떻습니까?"

야미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부르는건 미캉 또래 정도 되는 애들한테나 가능한거라고.

"야미...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리 봐도 넌 나보다 연하라고?"

"크로노스력으로 24세입니다."

"진짜!?"

순간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린채로 굳어버렸다.
...그럼 이제부턴 '야미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거야?
겨우 중학생처럼 보이는 애한테?
설마 야미가 24세였다니...그것도 크로노스력일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지!?

망연하게 야미를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크로노스력」은 대체 뭐야?

현재 지구에서 통용되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라고!
「크로노스력」 1년이 100일인지 200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속았다는 생각이 물씬 들어서 야미를 째려보자 야미는 슬쩍 책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귀여운 포즈 취하지마...!
그런다고 내가......

헤실헤실 풀리려는 표정을 억지로 다잡으면서 야미에게 물었다.

"그럼 지구 나이로 야미는 몇살인데?"

내 물음에 야미는 가만히 검지를 세우곤 입술을 가렸다.



"......비밀입니다."




p.s. 야미가 영웅학원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코 선생님의 배포용 서적은 충분히 효과를 발휘했나보다.

앞으로는 세권 사자.

감상용. 소장용. 그리고 포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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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다루고 싶어서 구상했던 이야기입니다.
원랜 18화랑 19화 사이에 쓸 예정이었는데,
워낙 연재가 뜸했던지라 본편에 더 신경을 쓰다보니 뒷전으로 밀려났다가 이제야 쓰게 되네요^^;

시라유리 코요미나 아라이 사야카 양의 이야기도 쓰고 싶은데...
생각해둔건 있으니 계절이 맞다면 나오겠죠=ㅂ=a

즐겁게 봐주시면 감솨하겠습니다. 쿨럭...m(_ _)m;;;


터틀러님 축전(영웅학원 후기를 읽는 료스케, 야미, 하루코 선생님)


p.s.참고 이미지

유우키 사이바이

독서하는 야미

하루코 선생님 1

하루코 선생님 2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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