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
가슴 언저리에 머리를 기댄 소녀가 고른 숨을 흘리고 있다.
내 다리 위에 자신의 다리를 걸치고선 옆으로 누워 잠든 소녀의 모습에 흐릿한 눈을 깜빡인다.
일어나려니 품안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아쉬움이 인다. 
조심스레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직 아침은 머니까.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분홍빛 자장가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 진짜!?"

"하루나의 언니가 두명의 남자에게 고백을 받았다고?" 

"쉿! 목소리가 너무 커 리사!"

쉬는시간.
교실 한 편에서 들려온 하루나와 리사, 미오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동해 귀를 기울였다.
화제는 하루나의 언니, 그러니까 사이렌지 아키호씨의 연애담에 관한 것이었다.
흥미진진한 어조로 리사가 재촉했다.

"그래서 결국엔 어떻게 됐어?"

"그게..."

-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 않아.
-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어.

"...래."

"헤~ 여유있으시다~!!"

곤란한 얼굴의 하루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미오가 감탄사를 흘렸다.

"어른의 향기가 느껴져."

"그리고 내일도 남자를 만나러 간다나봐."

"오오, 굉장해~"

"나도 남자의 마음을 가지고 놀아보고 싶어."

팜므파탈적인 희망을 내비치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튼 하루나찌의 언니는 굉장하네.
그야말로 여자판 아키츠군 아냐?"

"엣? 심해 리사! 그렇게까지 말할건 없잖아!"

쿠쿵...!
하루나의 격렬한 항의가 머리를 강타했다.

그렇게까지...그렇게까지...

"저기저기~ 하루나찌 하루나찌."

"왜 미오?"

"저-기서 아키츠군이 엄청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에?"

미오의 말에 고개를 돌린 하루나가 좌절한 나의 눈과 마주쳤다.

"...아!? 아, 아냐 아키츠군!
그런 의미가 아냐!
방금건 아키츠군을 나쁜 의미로 쓰면 안된다는 의미로 말한거였어!"

"사, 사이렌지이이이! 나는 믿고 있었어!"

"회복 빠르네..."

"남자는 역시 단순하네."

금새 좌절에서 벗어나 반색하는 내 태도에 리사와 미오가 수근거렸다.
호들갑 떠는 내게 당황하는 하루나.
핀잔을 주는 코테가와.
언제나처럼 소란스레 쉬는 시간은 흘렀다.




토요일 낮.
약속 장소에 나온 아키호씨는 긴 생머리에 세미정장 차림이었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
여동생 카페는 어떠니?"

"기왕이면 다른 곳을 가는 편이 좋겠어요."

"어머, 어째서?
아키츠군은 그런 곳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거긴 친구가 아르바이트 하는 곳이라서..."

멋쩍은 내 얼굴에 아키호씨가 웃음을 머금었다.

"후후 이 누나랑 같이 있는 모습을 친구에게 보이는게 부끄러운거구나?
아니면, 나랑 있는 모습을 그 친구라는 여자아이에게 보이는건 곤란한거니?"

하필이면 어제 하루나와 리사, 미오의 대화를 들은 마당에, 아키호씨와 함께 있는 모습을 미오에게 보이는건 거북하다.
미오의 감상이「아키츠군마저 유혹한 어른의 여성! 과연 아키호씨!」가 될지 「어른의 여성마저 유혹한 아키츠군! 드디어 연상에게까지 손을 댄거야?」가 될지는 모르겠다만.

"...곤란한거려나요."

"어머..."


내 말에 아키호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가리곤 웃었다.

"후후, 청춘이구나. 아키츠군.
우리 하루나도 조금 정도는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야."

"그런가요?"

결국 내 의견을 존중해서 갈 곳은 다른 카페로 바뀌었다.



"자아, 아앙~할래?"

케이크 조각을 가까이 내밀고선 아키호씨가 장난스레 웃었다.

"아앙~ 냠."

입안에 감도는 달콤함을 즐기며 싱글싱글 웃자 아키호씨가 한손으로 뺨을 괴었다.

"역시 사내아이는 잘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다지 놀라진 않아서 조금 재미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할 수 있을 때 즐기는 편이 제일이니까요.
사실 당황할 시간조차 아깝죠."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이런 호강을 누려보겠어.
아키호씨도 나를 사내아이로 여기지 이성으로서 의식하진 않을테니, 마음 편하게 있어도 될테고.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는건 어떤거죠?"

"에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거니?
너무 그렇게 담담한 반응이면 이 누나는 슬퍼.
아니면 혹시 이 누나랑 함께 있는건 싫어?"

"그럴리가 없잖아요.
이래뵈도 아키호씨 정도의 미인을 상대하는거라 내심 들떠있다구요."

설령 그것이 연심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더라도 두근거리는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키호씨의 고민을 먼저 들어두는 편이, 좀 더 편하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으응~ 하긴, 일부러 네가 물어줬는데 이제와서 빙빙 돌려서 말하고 싶진 않으니까."

아키호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짧게 용건을 전했다. 

"내「연인」역할을 맏아줬으면 해."

...이것 참 왕도적인 패턴이로군.


아키호씨의 부탁은 나에게 오늘 하루만 자신의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최근 아키호씨에게 고백한 남자 둘을 단념시키기 위해서라나?

"실제로 알게 된 기간은 그렇게 길진 않았지만, 아키츠군의 인품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해.
하루나를 성실하게 에스코트 해주거나, 스토커로부터 하루나를 지켜주었잖아."

얼굴에 금칠해주니 부끄럽지만, 그런데 하루나를 도와준거랑 연인 역할을 맡는거랑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거람?

"네가 하루나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해 주는 좋은 아이였으니까.
속셈 없이 도와줄 사내아이라 믿었기 때문에 이런 일을 부탁하고 싶었어.
...혹시 서운했니?"

"그럴리가요. 경위야 어쨌든 이성과의 데이트는 두근거리니까요."

게다가 남이 나를 믿고 의지해준다는건 기쁘니까.

"후후, 고마워.
사과의 의미로 연인인척 할 때, 조금 정도라면 과격하게 행동해도 괜찮으니까~"

진짜입니까....

아무튼, 기껏 아키호씨가 부탁하러 오신거니까, 오늘은 힘내보기로 할까.




"소개할께. 이 쪽이 내 남자친구인 아키츠군이야."

"「「또 이 녀석이냐아아아아!?」」"

"「「엣」」"



문제 해결!



타임 어택 플레이를 하는 것 마냥 속공으로 끝나버렸다.

내 팔에 가슴을 꾹 누른채로 팔짱을 끼며 커플임을 과시하던 아키호씨는, 허탕을 먹은 심정으로 사라진 두 남자의 자취를 훑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렸네."

"그러게요."

"그런데 「또 이 녀석이냐」라니, 혹시 네가 뭔가를 한거니?"

아키호씨의 물음에 나도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나마 짐작이 갈만한걸 떠올랐다.

"으음...헌팅당하던 여자애들을 여러번 가로챘던 탓이려나요?"

중학교 때부터 헌팅남들과 얽힌 여자애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으니까 그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유우사키와 데이트 도중 만났던 마유미라는 누나라든지 말이다.
알고보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자신을 도운 적이 있다고 마유미씨가 말했었고.

아니면 여자애들을 도와준 뒤에,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내 이름을 써도 좋아」라고 했던게 원인인가?
...그렇지만 설마하니 고백한 남자를 거절하는 수단으로 쓴다는 발상은 못했어요.
하긴, 고백하는 남자들 중엔 때때로 강압적인 사람도 있으니까,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돌파구가 되어준다는 점에선, 악명도 이따금 쓸만할 때가 있구나 싶다.

"뭐어, 100명의 여자랑 잤다는 소문 덕분에, 여자애들을 빼내올 때 불필요한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서 편했지만요."

넉살좋게 웃는 내게 아키호씨는 곤란한 듯 쓴 웃음을 지었다.

"저기, 아키츠군."

"네?"

"아키츠군은 닭과 달걀 중에서 어느 쪽이 먼저라고 생각해?"

유명한 질문이네.
어느 생물학과 여대생은, 질문자가 발생학 교수님이냐 분류학 교수님이냐에 따라서 바뀐다고 했지.

"으응, 글쎄요. 그런데 갑자기 그 질문은 왜...?"

"후후, 그냥 떠올랐을 뿐이야."

키득거리곤 아키호씨는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주었다.


남은 시간은 아키호씨와 함께 카페에서 느긋히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너무 일찍 끝나버린 예정 탓에 아키호씨가 서비스해준 추가 데이트 타임이라고 해야하나?
재밌게 보고 있는 만화라든지, 요즘 관심있는 아이돌이라든지, 최근 있었던 행사나 앞으로 열릴 축제라든지로 마음가는대로 화제거리가 휙휙 바뀌다보니 카페에서 시간은 금새 흘러갔다.
몇번씩 음료와 디저트를 추가하면서 얘기하는 동안 저녁이 가까워졌으니까.

낮이 긴 여름인데도 하늘은 이미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탓에, 아키호씨의 추천 가게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뒤는 곧장 귀갓길에 올랐다.
아키호씨를 에스코트하며 화제는 오늘 있었던 일로 옮겨갔다.

"드라마를 보면 이따금 오늘 같은 일이 있잖아?
끈질기게 달라붙는 남자를 쫓아내고 싶어서, 알고 지내는 친구에게 가짜 연인을 부탁하는 것 말야."

"네. 이따금 있죠, 그런 전개."

"그리고 가짜 연인을 데려온 여자에게, 둘이 진짜 연인사이라는걸 증명해보라고 외치는 바보같은 남자들도 나오잖아?"

"아아, 맞아요. 대개는 키스 같은걸로 그런 사람들을 납득시키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조르는거 자체가 비상식 아녜요?"

"그렇지?
남자들은 「당신이 싫습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걸까?
그야 드라마에선 그런 남자들이 오히려 사랑의 큐피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야."

무례한 큐피트도 다 있구나.
설령 그 덕분에 사이가 진전되더라도 큐피트에게 고마워할 일은 없겠지.

"뭐, 오늘은 그런 드라마틱한 전개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렸지만 말이죠."

내 지적에 아키호씨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전개는 예상 못했어.
두 남자들이랑 말다툼 하나 없이 끝나버릴 줄은 몰랐거든.
그래도 덕분에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한숨을 쉰 아키호씨가 문득 내게 장난스레 웃었다.

"아, 혹시 아키츠군으로선 아쉬우려나?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를 키스할 기회를 놓친게?"

"아뇨 딱히."

"정말~! 아키츠군!
그렇게 담백하게 말하면 이 누나도 상처받는다구?"

"앗, 죄송해요. 하지만 아키호씨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는걸요."

"그럼?"

"그런 상황이 되었다면 키스는 피하는 쪽으로 대응했겠죠.
그런건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을테니까."

...남자의 경우는 꼭 그렇지 않은 녀석들이 많지만.
리토의 절친이라던 사루야마도 기회다 싶으니까 냉큼 하루나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아키츠군은 꽤 완고하구나?
강경한건지 숙맥인건지..."

"유혹에 쉬이 넘어가는 사내아이가 사이렌지 곁에 있어도 곤란할테죠?"

"후후, 그러네.
그런 점을 믿고 너를 데이트에 권했던거니까."

"뭐, 그것도 있지만 말이죠,"

"?"

최근 우주인 자매 덕분에 떠들썩한 집을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우리 집 식객이 키스는 결혼한 다음에 하는거라고 그러더라구요."

"후훗- 귀엽네에.
그거 나나의 말이지?"

아키호씨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러니까 방을 착각한 것 뿐이라니까!"

"에에~ 또?"

"시끄러! 착각해버린건 어쩔 수 없잖아!"

"후후, 덜렁거린걸로 그렇게 당황하기는."

"바보 취급 하지마!"


"아키츠군?"

"아, 죄송해요. 잠시 멍해있었어요."

문득 떠오른 아침의 소란에서 벗어나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저로서도 즐길 수 있었는걸요.
아키호씨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낸 시간은 충분히 즐거웠으니까요."

담담한 고백에 아키호씨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은 하루나가 부럽네."

"사이렌지가 부러워요?"

"근처에 괜찮은 남자가 있다는 점에서 말야."

"괜찮은 남자?
그게 저를 말하는거라면 기쁘지만, 저도 그다지 품행이 좋진 않은데요."

"여성을 배려해주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것도 말야.
최근 남자들은 그런 배려라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내가 보기엔 아키츠군은 충분히 멋진 이성이라구?"

"에...고마워요 아키호씨.
그렇게 좋게 평가 받을 줄은 몰라서 좀 낯간지럽네요."

"후후, 외모만 깔끔하게 바꾸면 더 멋질텐데 말야.
요즘 시대에 그런 수염 스타일로는 여자애들에게 먹히진 않는다구?"

"아, 아하하...그건 유감이네요."

"흐응? 태도를 보니 바꿀 맘은 없는가봐?"

"초등학생 때부터 지켜온 스타일을 이제와서 바꾸는건 좀..."

푸웃!

내 말에 허를 찔린듯 아키호씨가 헛기침을 했다.
응? 어디가 웃긴 부분이 있었어?

"초, 초등학교 때부터 수염을 길렀어?"

"네. 뭐어, 대충 6학년 때부터?"

"푸, 푸흡...! 아, 아키츠군은 조숙했구나."

한동안 킥킥 웃음을 흘려대던 아키호씨가 진정한 듯 허리를 폈다.

"정말이지, 너랑 있으면 재밌을거 같아.
시시콜콜한 얘기에도 말이 통하고 이따금 의외의 반응이 되돌아오거든.
조금 얼빠진 면도 귀엽고 말야."

"귀, 귀여운겁니까?"

연상에게는 고교 불량아라도 귀여운 면이 보이는건가?


그렇게 아키호씨의 대응하기 곤란한 놀림에 한동안 쩔쩔매고 있던 차였다.

바스락-

"어머?"

어둑한 수풀 속에서 고양이와 강아지가 한마리씩 튀어나왔다.
우리에게 다가오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춘 두 길짐승은 사이좋게 작게 울음을 흘렸다.

냐~
멍~

"응...혹시 배가 고픈걸까? 곤란하네.
미안하지만 지금은 너희들에게 줄 먹이를 갖고 있지 않거든."

냐아~!
멍~멍~!

"저기, 그렇게 울어도,,."

"...아키호씨."

"응?"

"물러서세요."

"왜 그래?"

냐~
먀아-
그륵...!

푸드득-

사방에서 차례로 들려오는 길짐승들의 울음소리.
가로수에서 들려오는 날짐승의 날개짓.

사방에서 나는 기척에 당혹스러워하며 뒷걸음질치던 아키호씨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느샌가 우리는 개와 고양이 떼에 둘러싸여 있었으니까.

"아...아키츠군, 이건, 꺄!?"

창백한 얼굴로 나를 보던 아키호씨를 잽싸게 안아들었다.

"아, 아키츠군?"

"꽉 잡으세요!"

놀란 얼굴의 아키호씨에게 주의를 준 뒤, 들짐승들의 포위망을 건너뛰었다.

왈-! 컹-!
먀야아아아아!!!!
까아아-!

저만치 멀어진 어둠속에서 울부짖는 짐승들에 아키호씨가 오싹한듯 내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요란히 홰치는 날개짓과 함께 어둑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새들의 무리가 쫓아온다.

마을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짐승들의 울부짖음 속에서 전개된 도주극.
언제까지고 계속될 듯한 기괴한 도주극은, 들짐승 무리를 따돌리고 도착한 공원의 공터에서 막을 내렸다.

부스럭-

"히익!?"

수풀속에서 나타난 개의 모습에 아키호씨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니. 개가 아니다.
예전에 본 적 있는, 개의 형상을 한 탐색 로봇이었다.

"이건...?"



"찾았다-"

"「「!?」」"



어두운 밤 하늘.
검붉은 드레스를 입은 나나가 검은 날개를 펼친채 하늘을 등지고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쫓기던 상황도 잊고 아키호씨를 안아든채 멍하니 나나의 연보라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아키호에겐,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뭐?"

"이 거짓말쟁이야---!!!"

나나의 외침이 공원을 가득 울렸다.

"사과해! 하루나한테 사과해! 아키호한테 사과해!"

혼란해하는 나와 아키호를 무시하고 나나는 한껏 분통을 터뜨렸다.




아키호씨를 나에게서 떼어놓은 뒤, 나나는 곧장 날 끌고선 하루나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돌연 시작된 추리극.

범인은 나.
탐정은 나나.
피해자는 사이렌지 자매...그러니까 하루나랑 아키호씨.

나나에 의해 드디어 폭로되는 나의 악행들! 같은 느낌일까?
예상치 못한 반전? 의외의 진범?
없어 없어.

하지만 굳이 반전을 들라면...



추궁당하는건 나인데, 
차례차례 튀어나오는 나나의 발언에,
진범도 아닌데 시시각각 창백해져가는 하루나의 표정이랄까.


무엇에 대한 추리인지도 모른채, 나나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지난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하루나와 료스케의 사이에 위화감을 느낀건 지난주 마트 쇼핑에서 하루나를 만났을 때야.
나랑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료스케가 나타나자 하루나는 당황해선 곧바로 자리를 떠나버렸거든."

식객인 나나와 모모의 방을 확장하면서 추가로 가구를 알아보던 시기같다.
그때 마트에서 보인 하루나의 반응이 신경쓰여서 나도 한동안 하루나와의 관계 개선에 고민했었지.

"또다른 위화감은 내가 마론을 산책시키던 아키호와 만났을 때야."

"아, 나나가 차에 치이려던 우리 마론을 구해줬던 날이구나."

"답례로 사이렌지의 옷을 여러벌 받은 날이지?"

"...그래 변태."

내 말에 나나가 울컥한 얼굴로 날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왜...?

"...그 때, 마론의 주인을...아키호를 찾으려고 마론에게 물었어.
정작 마론은 「주인에겐 좋은 향기가 난다」느니하는 쓸데없는 얘기만 할 뿐이어서, 아키호를 찾는덴 하나도 도움이 되질 않았지만.

하지만 그 때 들었어!
금발의 건들건들한 남자가 주인을 쫓아다닌다고!
이때부터 료스케의 양다리는 시작되었던거야!"

...응? 으응?

흘러넘길 수 없는 말에 나나의 말에 끼어들었다.

"저기, 나나? 혹시 아키호씨를 쫓아다니는 건들건들한 금발이라는게 혹시 나야?"

"너말고 누가 있어!"

그야 이 동네에서 보통 금발 양아치라고 하면 나 뿐이지만...

곁눈질을 하자 아키호가 입을 가리며 싱글싱글 웃고있다.

"설마하니 아키츠군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아키호씨...그런 적 없다는건 아키호씨가 더 잘 알고 계시잖아요."

"후후, 그래.
그 때도, 그리고 이전 질문에도...넌 같은 선택을 했는걸."

"......"

아키호씨는 어깨를 으쓱이곤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나. 네 추리는 알겠어.
하지만 지적할게 있는데...
마론이 말한 주인이란 혹시 내가 아니라 하루나를 가리키는건 아니니?"

내가 아키호씨가 아닌 하루나를 쫓아다녔다는 식의 오해가 생겨도 곤란합니다만?
내 불안과 달리 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때 마론이 명백하게 아키호를 보곤 주인이 왔다고 말했는걸."

"으음...그랬니?"

「금발 남자라면 조금 짐작이 가는게 있지만...」이라며 중얼거리곤 아키호씨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날 쫓아다니고 있다고 얘기했을 뿐이었지?
그렇다면 딱히 그게 아키츠군이 나랑 사귀거나 한다는 의미는 아니잖니?"

아키호의 말에 나나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눈으로 답했다.

"그야 아키호는...오늘 료스케랑 데이트 했잖아.
데이트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거니까..."

"어머어머~"

아키호씨는 나나의 순수함이 어지간히도 사랑스러운가보다.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선 어쩔줄 몰라하시는걸 보면.
귀여운 여동생을 대하듯 사랑스런 시선으로 아키호씨가 다시 물었다.

"응. 나와 아키츠군이 사귀고 있다고 나나가 생각한 이유는 이해했어.
후후...그런데 나나?"

"왜?"

아키호씨가 눈을 반짝였다.

"나나의 말대로라면, 아키츠군이 하루나와 사귀고 있다는 증거도 있단 말이로구나?"

"「「엣?」」"

아키호씨의 지적에 나와 하루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언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게 있을리 없잖아!"

하루나의 외침에 나나가 놀라 물었다.

"하루나, 설마 료스케를 옹호해주는거야?"

"아냐. 그저 나나는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니까..."

"속으면 안돼 하루나!
료스케는 나쁜 녀석야!!
자안-뜩! 여자아이를 울렸다는 못된 녀석이니까!
하루나도 슬프게 만들거라구!"

나나의 외침에 당황하면서도 하루나는 꿋꿋히 맞섰다.

"아, 아키츠군은 나쁜 사람이 아냐!
그리고 나랑 아키츠군은 그런 사이가 아니라구!"

"그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니...어째서?"

"왜냐하면...!"

나나가 상기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루나는 알몸 와이셔츠로 료스케랑 침대에서 나뒹굴었잖아!!!"

"와악!! 와아아아악!!!?"

나나의 외침과 하루나 비명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개들이 알려줬어!
료스케 옷장의 와이셔츠에서! 그리고 침대에서! 처음 맡는 냄새가 있었대!
알고보니 그건 하루나의 냄새였고!

거기다 화요일 밤 산책 때 마론이 그랬어!
하루나가 얼마 전에 료스케의 냄새를 잔뜩 밴 채로 집에 돌아왔다고 말했단 말야!
서로 살을 맞대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짙게 냄새가 배일리 없잖아!"

나나의 폭탄 발언에 아키호가 경악해서 나와 하루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표정관리는 둘째치고 하루나는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다.
하루나의 반응에 눈이 점이 된 채로 뻐끔뻐금 입을 여닫던 아키호씨는 날보곤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사귀지 않는다는 거짓말은 넘어가 줄테니까,
소중히 해줘 우리 하루나..."

"여동생 혼삿길 막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제 시집은 다 갔으니 됐잖아.
아키츠군은 하루나의 소중한 것을 훔쳐갔으니."

"아니거든요!? 맹세컨데 사이렌지에게 이상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거든요!?"

"바로 우리 하루나의 마음입니다."

칼리오스트로의 성(루팡 3세)?

부탁이니 제 말 좀 들어요!
공황상태에 빠진건지 아키호씨는 뜬금없는 명대사를 읊고는 마음이 붕 떠있는 모양새다.

결국, 추리극은 탐정의 폭탄발언이 피해자 자매를 넉다운시키면서 강제 중단 되었다.




"어머~ 정말로 귀엽네 우리 하루나 사진은~♪"

"어, 언니~!"

"미안해 하루나! 정말 미안해!"

"괘, 괜찮아 나나.
화나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좀 부끄러울 뿐이니까!"

"아키츠군~ 나중에 이 사진 나한테도 좀 보내줄래?"

"아, 안돼 언니!"

허둥대는 하루나를 모른척하곤 아키호씨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내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결국 우스꽝스러운 양다리 의혹은 아키호씨와 나나에게 내 휴대폰에 담긴 하루나의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고 라라의 '동물로 변하는 발명품'을 얘기함으로써 풀 수 있었다.
다만 그 탓에 원망스런 시선을 보내는 하루나를 달래야 했지만.

"그러니까 지워달라고 했는데..."

"미안. 하지만 이게 아니었으면 둘의 오해를 풀긴 어려웠을걸."

"그렇긴 하지만..."

"나야 이미 안 좋은 소문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니까 상관없지만, 이상한 오해 탓에 사이렌지가 피해를 보는건 좋지 않잖아.
소문이라는건 생각보다 오래 가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실은 사진을 지우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응. 설령 누가 뭐래도 이 사진은 안 지울거야.
처음으로 내게서 달아나지 않았던 고양이인걸.
내 평생 보물로 삼을거라구."

"아키츠군..."

하루나의 시선이 불쌍한 것을 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고양이 귀엽잖아 고양이.
벌써 이름까지 붙여뒀다구."

"...어떤 이름인데?"

"「하루냥」"

하루나의 손날이 이마에 꽂혔다.




"이야아~ 마지막까지 즐거웠어 아키츠군♪"

이마를 매만지고 있는 내게 아키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아까 공원에서 안겼을 땐 제법 멋졌어.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니까~
그럼 나나도 조심해서 돌아가~!"



아키호와 하루나의 배웅을 받고 하루나의 집을 나섰다.
나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하루나의 집에서 요란하게 추리를 선보였던 나나는 말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혹시 낙담한거려나?
터무니없는 오해로 하루나와 아키호씨에게 폐를 끼쳤으니까.
오늘의 실수로 어지간히도 기운이 빠진 것 같아서 위로할 겸 말을 건넸다.

"너무 그렇게 풀죽어 있지마.
결국엔 다들 웃으며 넘어가주었잖아.
나도 생각보단 즐거웠고말야."

"...마."

"응?"

"걱정하는척 하지마."

나나가 새빨갛게 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실은 화났으면서...
자신만만하게 나섰다가 성대하게 실패한 날 비웃고 싶은거면서..."

"야, 그런거 아니니까 진정해.
꽤 놀라긴 했지만 거기까지 심술궂게 굴 생각은 없다구."

나나가 이런저런 꿍꿍이가 있었던건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 나로서도 두근두근한 경험을 했으니까.
나나를 진정시키려고 화나지 않았다는걸 다시 강조하자 나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깐 정말 최악이었어.
말은 횡설수설이었고, 머릿 속은 뒤죽박죽...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방금전 추리극도 드라마 같은 전개는 아니었지.
추리 도중에 자주 말이 끊기고, 다들 공황상태에 빠져 제대로 들을 이도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으니, 제대로된 추리극을 펼칠 상황도 아니었다.

"...원래는 이러려던게 아니었어.
지리멸렬하지 않게, 제대로 정리해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네 속을 떠보면서, 네가 하루나랑 아키호를 속이고 있다는 증거를 밝히고 싶었는데..."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목요일에 널 만났을 때도...잔뜩 알아보려 했는데...!

어째서 옷장에서 하루나의 냄새가 밴 와이셔츠가 나왔는지.
어째서 침대에...하루나의 잔향이 있었는지...

전부 밝혀내서 잔뜩 화내려고 했는데...
그, 그랬는데..."

외침이 점차 잦아들었다.

...아아, 차양 아래에서 나나와 재회한 그 때인가.

나나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차양 아래 서있는 널 보았을 때,
어, 어째선지...머리가 새하얗게되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게 되어버려서..."

나나가 원망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입을 다문채 서있길 한참. 나나의 입술을 떨렸다.

"...거짓말쟁이."

"......"

"너 때문이야...
네가, 잊지 않았으니까."

"...그래."

줄곧 궁금했다.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재회했을 때, 나나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재회가 필연적이었음을 알게 된 지금에 와서도, 그 때의 답을 알고 싶었다.

"어째서 네가 그 곳에 홀로 서있었는지...
그런 것만 머릿속에 남아버려서...

네, 네가 손수건을 건네주었을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네가 공연히 화가 나서...
그런데도, 너에게 화내려고 쫓아온 내 자신이 자꾸만 싫어져서..."

꾸깃꾸깃 팔뚝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곤 나나가 고개를 떨궜다.

"변태 주제에 걱정하지마...
너도 화내란 말야.
네가 그러니까...
네가 자꾸만...이상하게 구니까...
나도 이상해져 버렸잖아..."

그야말로 남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도움이 될 책을 찾아다니거나, 상담을 받거나, 거리를 배회하거나, 결국 그런 곳에서 배회하고 만든 것도.
환각이나 환청을 의심하면서도 나를 들뜨게 만든건, 친절하게 인형까지 들고 찾아온 바로 너 때문이라고.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에 낮게 탄식하곤 울먹이는 나나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훌쩍이는 나나를 달래면서 나나로부터 이제껏 궁금해하던 일들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수요일 저녁. 내 방에서 빨래 바구니를 들고 나나가 나왔던 날.
그 때 빨래 바구니 속에는 개가 숨어있었다고 한다.
열린채 방치된 옷장은, 하루나의 냄새가 밴 와이셔츠를 발견했기 때문에.
어수선했던 침대는, 하루나의 냄새가 밴 침대를 수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장과 침대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던건, 내가 씻고 나온 기척에 나나가 서둘러 방을 나오려 했기 때문에.
와이셔츠와 개를 빨래 바구니 안에 숨기곤 옷감으로 덮은 뒤 방을 떠났다는게 그날 밤의 전말이었다.

목요일 저녁에 게임 하면서 달라붙은 이유는(나나 자신이 폭주한거라며 말을 덧붙였지만) 다소 황당했다.
마론이 말하는 짙은 냄새가 뭍어나려면, 대체 얼마나 진한 신체 접촉이 필요한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댄다.
자칭 스킨십 마스터인 마론의 주장으론, 어지간히 오랫동안 강도높은 스킨십을 한게 아니라면 거기까지 강하게 냄새가 뭍을리 없다나.
예전 산책에서 내가 하루나를 껴안았을 때 하루나에게 밴 나의 냄새는 훨씬 옅었다고 마론이 그랬다니까.
(아마도 스토커 사건 때를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럼 대체 나나에게 뭍은 내 냄새의 강도는 어떤 식으로 확인하는건지 의아했는데, 자기 방에 돌아간 뒤 곧장 개들에게 냄새를 맡게 부탁했단다.

나나의 행동력에 내심 놀라워하고 있었는데, 계속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나의 폭주에는 다소 엉뚱한 사건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최근 마트에서 만났을 당시엔 서먹했던 나와 하루나.
그런데 다이어트 소동이 있었던 날 밤의 산책에서는 나와 하루나의 사이에 서먹한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 의아해하던 중 문득 나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엉뚱한 생각.
나나 자신이 지구 동물들 관련으로 즐겨보는 자연 다큐멘터리.
그 중 최근에 봤던 보노보 이야기의 내용.

화해 방법은 「짝짓기」.

...보노보의 화해방법이 어째서 나와 하루나가 몸을 겹쳐서 화해했을거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는거야?

내 의문의 답은 금새 나왔다.

"보노보도 지구인도 유인원이잖아?"

...아, 그래. 그런 인식이구나?

두꺼비건 파충류건 기생수건 악마건 이족보행 생명체라면 죄다 우주인으로 한데 묶어서 취급하는 곳이지 여기는...
라라의 약혼자 후보놈들의 변변찮은 꼬락서니를 떠올려보면, 우주인이라고 딱지만 붙여놓으면 서로 자식도 낳을 수 있는 것 같고.
...모습만 비슷하면 우주인과 동물 사이에도 자식이 생길 수 있는거 아닌가 몰라...

아무튼, 같은 유인원이니까 화해방법도 보노보랑 비슷할거라고 생각했다나.
괜히 모모가 보노보같은 방식은 싫다며 엉뚱한 발언을 한게 아니었군...

그리고 나중 일이지만 내가 하루나를 '어른스럽다'고 했던 것도, 나나가 나와 하루나가 어른스런(파렴치한) 방식, 즉, 짝짓기로 화해했다라는 결론 내는데 다소는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나 본인도 이런 황당무계할 뿐인 결론은 망상일 뿐이라 치부하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물이 하나 둘 발견되어버리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내 방에서 나온, 하루나의 냄새가 밴 와이셔츠.
내 침대에서 나는 하루나의 잔향.
마론의 말 - 하루나에게 짙게 뭍은 나의 냄새.

넘치도록 드러난 상황 근거 앞에선 황당무계했던 상상은 더이상 망상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와이셔츠를 발견한 다음날, 나나가 견학을 왔던 것도 어쩌면 나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날 저녁.
하루나의 집에서 나나가 다시 마론을 만나 얘기를 나눴을 때, 나나의 여중생 차림을 본 마론의 말이 결정타였다고 한다.

- 그래. 그 옷이야.
"?"
- 주인이 그 금발의 냄새를 잔뜩 묻힌채로 왔을 때 「그 옷(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어.
"!?!?"

그 말에 나나는 곧장 하루나 집을 떠나서 날 추궁하려고 달려왔다고 한다.
곰인형은 나로부터 냄새를 추적해서 왔다는 이상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고른거였다고 한다.
곰인형에 뭍은 내 냄새라...지난주에 샀을때 안아들고 돌아온게 마지막인데 용케도 내 냄새가 남아 있었다 싶다.
나나의 말로는 나랑 자기 냄새가 반반 섞인 탓에 찾는데 시간이 더 걸렸댄다.

"그럼 그 날, 돌아가는 길에 내게 이런 차림을 좋아하냐고 물었던건..."

"료스케는 여동생 카페 단골일만큼 연하를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분명 하루나에게 중학교 때 교복을 입히고선 흐, 흥분했을거라고..."

...맙소사...

그러니까 즉, 내가 하루나에게 여중생 플레이를 시키면서 놀았다고 생각한거야?
나나가 하루나네 집에서 죄다 폭로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전부 쏟아냈다면 분명 지금쯤 그 많은 오해들을 푸느라 아직도 하루나 집에 잡혀있었겠지. 

...아. 그러고보면 궁금한게 더 있었네.
적당히 울음이 잦아든 나나에게 물었다.

"딱 하나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는데."

"뭔데?"

"내 옷이나 머리의 냄새를 맡은건 어째서야?"

"엣, 그, 그건..."

순식간에 나나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저기...그거 꼭 말해야 해?"

우물쭈물 눈치를 보는 나나의 모습에 피식 웃곤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여자아이에게 하는 질문으로는 거북하다고 봤지만...

"물론. 요 며칠간 날 걱정하게 만든 벌이라고 생각해."

"우..."

내 완고한 반응에 주먹을 꽉 쥔채로 몸을 떨던 나나는 작게 입을 열었다.

"...드라마에서...여자들이 하는걸 봤어.
남자의 옷 냄새를 맡고선「다른 여자의 냄새가 난다.」고 말하던걸.
그, 그러니까 나도 옷에 얼굴을 가까이 하면 냄새 같은걸 맡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해서..."

"그래서? 어땠어?"

"뜨겁고 조금 시큼했...무슨 말을 하게 하는거야 변태야!!"

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해두지만, 별로 이상한 느낌이었다거나 한게 아냐!
막 벗어놓은 옷이었던 탓이라구!"

"음, 별 느낌 아니었구나?
난 네가 달라붙거나 했을땐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부끄러웠는데. 오오, 무서워라."

"!? 나, 나도 부끄러웠거든!?
일부러가 아니었거든!
그땐 하루나를 위해서 어쩔수 없이 그런거였거든!"

"아니, 그러면 일부러인게 맞잖아."

"윽...!"

"뭐어, 괜찮아. 이젠 네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도 알았으니까 됐어.
마지막엔 네 말마따나 폭주하는 기색도 보였지만."

"말하지마...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엄청 부끄러워졌어..."

"넌 좀 더 부끄러워해도 돼.
최근 네 모습이 이상해서 걱정했던 내가 바보같아."

"뭐, 뭐야, 혼낼거야?"

"오? 그런 각오는 있어?
아이가 저지른 일은 어른이 책임지는거니까, 나나는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잘못했으면 아이건 어른이건 혼나는게 맞지만, 엉성한 도발에 나나는 발끈했다.

"난 아이가 아냐!"

"그런건 눈물부터 닦고 말해라."

나나의 뺨에 손을 얹곤 엄지로 나나의 눈물을 닦았다.
뺨에 손대져 발개진 볼과 눈을 한채 부끄러움에 나나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내가 울었다는건 남들에겐 비밀이니까."

"흐응? 맨입으로?"

"...뭘 바라는데?
부끄러운 사진 같은건 거절이니까."

"응?"

어째서 사진?

"모모가 너는 남몰래 여자애들의 이상한 사진을 찍는게 취미니까 조심하랬어."

...모모는 바니걸 차림으로 당근을 먹는 악몽에 시달려야 한다고 생각해.
자매니까 걱정해준것 같다만, 역시 입은 재앙의 근원이라니까.

"사진은 됐어."

꾸욱-

"...어?"

나나의 입술을 검지로 누르며 싱긋 웃었다.
부드러움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으니까.
날 걱정하게 만든 대가는 받았다고 치자.

"이걸로 봐줄께.
이것도 남들에겐 비밀이다?"

"......"

와작-!

"으에엑!?"

손가락을 물어버린 나나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다.

"그, 그만둬!"

황급히 손을 치우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날 삿대질했다.

"너, 너어...! 야, 야한 짓 하지마!"

"그, 그렇게 화낼 일이야?
혼내거나 한 것도 아니었잖아."

"더 나빠!"

"나쁘다니, 아니 애초에 거기까지 야하진,"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부끄러우니까 야한짓 맞아!"

부끄러우면 야한 짓이냐...

"이상한거 떠올리게 하지마!"

"뭘?"

"신경꺼!"

"그, 그러냐..."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씩씩대던 나나는 다짐하듯 소리쳤다.

"핥거나 하면 가만 안 둘거야!!!"

후, 후후후...

"안되는건 엄지랑 검지 중 어느쪽?"

"둘 다 안되는게 당연하잖아아아아!!!"




"얼굴 보지마 바보야."

"왜?"

"기세에 맡겨서 날뛰고 나니까...
지금까지 한 일들이 터무니없이 부끄러워졌어."

방금전 일에 더해, 요 일주일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는지 나나는 얼굴을 푹 숙인채 얼굴을 가렸다.

"적당히 고개 들고 가자.
쳐다보지 않을테니까."

"싫어. 훔쳐볼거잖아."

어쩌란 말야...

곤란한 나머지 뒤통수를 매만지다가 나나에게 등을 돌리곤 꿇어 앉았다.

"업혀."

"...뭐?"

"얼굴 보이기 싫다며.
밤도 늦었는데 언제까지 이런곳에 있을 수도 없잖아."

등을 내밀고 손으로 재촉하자, 짧은 침묵 뒤에 나나가 조심스레 내 등에 몸을 기댔다.

"...엉덩이 만지거나 하면 가만 안둘거야."

"예이예이."




나나를 업은채 귀갓길에 올랐다.
조용한 산책로를 걷는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나나가 툭-하고 화두를 던졌다.

"...저기말야...
연애라는거, 역시 난 잘 모르겠어.
내가 어린애라서 그런걸까?"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나는 부러운듯 한숨을 쉬었다.

"모모처럼 몸매가 좋았다면 나도 어른스럽게 될 수 있었을까?"

"모모도 애잖아."

"하지만 다들 모모보고 어른스럽다고..."

"차분하다는게 어른스럽다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잖아."

"그래?"

"별로 초초해하거나 서두를건 없어.
너도 모모도 나도 언젠간 어른이 될테니까.
지금은 그냥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자구."

발돋움 하는걸 나쁘다고 하진 않겠지만, 무리하게 어른스러운 척해도 실패할 것 같고.

"료스케는 우리들과 함께 사는게 불편하지 않아?"

"글쎄? 함께 사는데 당황하긴 했지만 이젠 꽤나 익숙해졌는걸?
그리고 나는 지금의 소란스런 일상이 즐거우니까.
지금 시간이 계속되길 바랄만큼."

"...응."

안심한듯 나나가 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나도, 최근 2주는 힘들지만 즐거웠어.
으응...에스프레소랑 밀크티를 뒤섞은 느낌?"

"뭐야 그 느낌은...?"

등에 업힌채 장난스레 히히 웃는 나나의 태도에 덩달아 실없는 웃음이 흘렀다.



스으-

"...역시 모르겠어."

목덜미의 냄새를 맡는 나나의 행동에 어처구니 없어서 물었다.

"뭐하는거야?"

"조금 시큼한 땀냄새만 나."

"그거 아직도 하는거냐."

맥빠진 핀잔을 던지자 목덜미를 물렸다.

"...써."

땀이 있을테니까.

"...부드럽지만."

그야 살이니까.
그것보다 남의 목으로 장난치지 마라.
이젠 숫제 갉아먹는 흉내를 내는 나나에게 주의를 줬다.

"야, 적당히 그만두라구?"

왕~!
꽈악

"으겍?"

송곳니로 목덜미를 물리는 감촉에 살짝 몸을 떨었다.
내 반응이 우스운지 나나가 킥킥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대체 뭐야?"

"얄미우니까.
요 며칠 동안 날 고생시킨 복수." 

정말이지, 덕분에 마음 고생한게 누군데...
키득거리면서 장난을 치는 나나의 태도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기에, 짧은 푸념과 함께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집으로 가는 길.
자국이 남지 않을까 염려스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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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월
47화:화
48화:수
49,50,51화:목
52화:금,토

다들 연말 마무리 잘하고 계신가요?^^

음.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하려나...
이것으로 예정했던 40화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네. 40화요( --);

초기 구상단계에서는 40~52화까지가 하나의 에피소드였거든요-_-;
시기로 따지면 2학년 여름의 단 2주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였네요.
연재속도를 위해서 사상최다의 분량 쪼개기를 시도한 에피소드가 되겠습니다.
쪼개기를 남발한 장대한 삽질이 드디어 이렇게 마무리가 되는군요.

33, 34화 유우사키 에피소드가 끝난 뒤, 몇편 후에 나오게 할 예정이었던 하루나의 이야기도 40화가 되서야 겨우 다뤄볼 수 있었고 말이죠^^;

아무튼 징하게 오래갔던 에피소드도 결국 마무리 되었으니, 이젠 가벼운 맘으로 다른 에피소드도 다룰 수 있겠네요.

에피소드가 다소는 연계가 되다보니 몇몇 에피소드는 진행 순서에 신경을 써야겠지만요.

여름 불꽃축제는...좀 나중에 나오겠지만, 적어도 시기상 가을 에피소드로 넘어가기 전에는 나오겠죠=ㅅ=a;



그리고 근황이라면...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지냈습니다.

미술관이다!
이집트 박물관이다!
국제도서전이다!
일본여행이다! 스미마셍으로부터 시작하는 교토&오사카 여행!
홍차 쇼핑이다! COOKIE 밀크티 마시써!
부천국제영화제다! 변태가면2 쩔어!(작년)
카페쇼다!
뮤지컬이다! 오오 무대효과 굉장해!
다큐멘터리다!
(추억의 작품들 오프닝을 물색하며)역시 초심은 중요하지!

"오빠오빠."

"응?"

"글 안쓰고 뭐해?"

"소, 소재를 모으기 위해서 문화생활 중인데."

"소재만 모으지 말고 글 써."

"네."

"(외출하면서)돌아와서 확인할테니까."

"네...=ㅁ=;"

"참, 그리구 내 친구한테 오빠 글 소개해줬는데 잘봤데.
좋아하는 작품의 패러디라서 기뻤대."

"응? 좋아하는 작품이 어떤건데?"

"꾸러기 수비대."

"......"(최신화를 올린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민망한데...

"크리스마스 때 한편 더 쓸 수 있지 않아?"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이렇게 말해놓고선 나, 지금까지 마감일 지켰던 적이 거의 없어서..."

"일단 써."

"네."

"써.
쓰라구.
쓰란 말야."

...그런 3단 재촉과 함께 시작된 52화로 올해중에 에피소드를 마무리해서 다행이네요^^;

그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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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스케~! 같이 게임하자~!"

목욕을 마치고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로 갈아입은 나나가 권유로 거실에 앉아 컨트롤러를 잡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욕실을 쓸 예정이었으니, 모모가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에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아보였다.

레이싱 게임을 하면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던 나나와 이따금 팔이 맞닿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화들짝 놀라며 비켜서는 나나의 반응에 굳이 대응할 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게임에 몰입하다보면 이정도 해프닝 정도야 보통이니까.

다만, 「어? 어?」하는 사이에 레이싱 도중 추월당해 당황한 나나의 모습을 보곤 피식 웃음을 흘린게 잘못이었을까.
내 웃음을 도발 행위라고 받은듯, 머리에 열이 잔뜩 오른 나나로부터의 방해공작이 레이싱 와중에 하나 둘 튀어 나왔다.

팔이 스치던 처음의 머뭇거림은 어느샌가 잊혀졌는지, 팔이 맞닿는걸 넘어서, 나나는 아예 내게 몸을 기대고선 날 옆으로 밀어내려 했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내게 기대서 용을 쓰던 나나에게「후하하하하!」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웃음을 날린건 반성하고 있다.
나나의 방해에 아랑곳 않고 유리하게 레이싱 게임을 진행하는 내 모습에 나나가 신음을 흘렸다.

"아아~ 정말~!"

지금 이대론 효과가 적다고 생각했는지, 나나는 몸으로 밀어붙이는걸 멈추곤 컨트롤러를 잡은채 일어섰다.
그리곤 내 뒤로 이동한 나나가 그대로 내 등뒤에 매달렸다.
등에 매달리는 나나의 행동을 내가 벙찐 와중에, 내 왼쪽 어깨에 고개를 얹은 나나가 돌연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으야야~~~!
수염이 까끌까끌해!"

"난데없이 실례잖아 너!"

"칫, 이렇게 되면!"

나의 항의를 무시하건 수염이 닿았던 볼을 매만지며 투덜대던 나나는 이윽고 결심한듯 몸을 숙였다.
내 목에 양팔을 두르고 컨트롤러를 잡고선, 나나는 그대로 내 정수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등뒤에서 나를 감싸듯한 자세가 되어버린 나나에게 당황해 말을 버벅거렸다.

"야, 야? 너 이거 반칙..."

나온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렸다.

뺨을 간질이는 분홍빛 머리카락.
등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감촉.
몸을 두르듯 번지는 체향.

화악하고 솟아오른 부끄러움에 흐트러진 마음을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다.

"이, 이런다고 내가 질줄,"

스르륵-

"엣?"

더듬더듬 새어나온 가당찮은 허풍은, 어느샌가 올라온 나나의 꼬리가 손목을 휘감았을 때 멈춰버렸다.
꽈아악-하고 손목을 휘감은 꼬리에 힘이 들어가자, 이번에야말로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민감한 부위인 꼬리를 서툴게 자극했다간,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테니.

손목을 휘감은채 작게 흔들리는 꼬리.
새근새근 귓가를 달구는 옅은 숨결.

방금 전의 아우성과 몸싸움이 거짓말인양,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BGM만이 거실을 메우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

"으, 응."

등에 기댄채 나나가 승리를 선언했다.

게임은 끝났다.
하지만 끝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언제까지 등에 매달려 있을 셈일까 이 녀석은...

장외전술이 이유였다고 해도, 게임이 끝난 마당에 계속 이렇게 붙어 있는건 솔직히 부끄럽다.
한껏 승리의 여운에 잠겨있는 중이라면, 좀 더 기다려 주어도 될 테지만...
귓가를 자꾸만 간질이던, 달콤함마저 느껴지는 새근거리는 숨소리 탓에, 현재 진행형으로 아드님의 상태가 위험했다.

이대로 계속 몸이 맞닿아있는건 이성에 해롭다.
...기분은 좋지만.

나나가 지금 자세를 풀어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보였다.
게임도 끝난 마당에 더이상 쥐고 있을 필요도 없는 컨트롤러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정수리를 누르던 나나의 턱이 조금 미끄러졌는지, 내 머리카락에 나나의 코가 살짝 닿은 것 같았다.


스으-


...에?



"...뭐하는거니 나나?"

"!?"

모모의 목소리에 나나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싼채 욕실을 나온 모모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귓볼이 빨개진채 나나는 후다닥 소리가 날 기새로 자신의 방으로 뛰쳐들어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채 앉아있는 내게 모모가 웃으며 다가왔다.

"후후, 사이 좋네요."

놀리듯 건네진 모모의 농담에 대꾸하는 것 대신 물었다.

"...저기..."

"왜그러세요 료스케씨?"

"나말야...
...혹시 냄새나?"

"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모의 반응에 머리를 매만지다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뭐야?
아무래도 오늘 목욕은 좀 더 신경써서 해야 할 것 같았다.

...우선은, 거칠어진 아드님을 가라앉힌 뒤에.



아드님 탓에 곧바로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기에, 시간을 때울겸 다시금 자리에 앉은채 컨트롤러를 잡았다.
곧장 씻지 않고 게으름 피운다고 모모에게 핀잔을 받긴 했지만.
뭐, 그렇게 말하면서도 곁에 앉아서 함께 게임에 어울려준 모모에겐 감사하고 있다.
모모의 거침없는 게임 플레이에 엉망진창으로 당하면서 나와 아드님은 냉정함을 되찾았으니까.

최근 모모는 게임 플레이를 네트워크로 방송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될지 개인적으론 흥미가 있다.
모모의 선호 장르는 현재로서는 연애 시뮬레이션인걸로 아는데, 여자아이가 미연시를 하는게 이슈가 될지도 모르겠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내 방에 돌아올 즈음엔 방금전 해프닝으로 당황했던 마음도 추스릴 수 있었다.
기분을 전환할 겸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보면 하루나와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애완견 관련 책들도 빌렸었지.
애완견이라는 주제가 공통 관심사가 될 것 같아서 책을 빌렸던건데, 지금 생각하면 쓴웃음만 나온다.
정작 하루나와의 관계 개선은 엉뚱한 부분에서 이루어졌으니, 역시 서로간의 관계는 어떤게 계기가 되어 변해가는지 모르는거구나.
묘한 감회에 젖은채 책상에 앉아 묵묵히 독서에 빠져들었다.


딸깍-

"응?"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열린 문틈으로 분홍빛 장발이 나부꼈다.
풀어내린 웨이브진 머리카락,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나나?"

"실례할께. 읽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보고 싶은 책? 어떤건데?"

"『영웅학원』. 네가 이따금 읽던 만화말야."

"오? 나나 너도 영웅학원에 흥미를 갖게 된거야?"

"그냥, 미캉의 아빠가 그린 만화이기도 하고, 너도 그 애독자라고 들었으니까 어떤건지 궁금했거든."

아아.
그러고보면 어제 카페에서 나나랑 야미가 영웅학원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
그 계기가 된게 후기에 실렸다는 내 여성편력이란건 기쁘지 않았지만.

"그렇다면야 기꺼이 감상하도록 해.
사이바이씨의 팬이 늘어난다면 기쁘니까."

"여기서 읽고 가도 좋아?"

"물론이야. 신경쓰지 말고 편히 보라구."

"흐흥~ 과연 어떤 내용이려나?"

씨익 웃곤 나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영웅학원 시리즈의 첫권을 집어들었다.

풀썩-

침대에 몸을 누인 나나는 그대로 책을 펼쳤다.

편히 보랬더니, 침대를 점거해버렸네.
정말로 사양이 없네요.

뭐어, 날 신경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있어주면 나도 맘이 편하지.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나나를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나나가 만화에 빠진 사이에, 나는 나대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키득이는 소리, 이따금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이 방을 메운채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을 내려놓는 소리 뒤에 나나가 물음을 던졌다.

"...료스케는 어떤 책을 읽고 있어?"

"나? 애견인을 위한 강아지와의 소통법."

나나를 향해 몸을 돌리곤 책을 내보였다.

"그러고보면 지난주에 동물 관련 책을 빌린다고 했었지?"

"응. 조금 관심이 생겨서 말야."

"흐응..."

방금전까지 침대위에서 뒤척인 탓인지, 나나의 민소매 상의가 흐트러져 배꼽이 드러나보였다.
이상한 시선을 보내다가 나나와 거북한 분위기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되돌리려던 차였다.

"료스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한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책을 통한 지식으로 하루나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던 속셈이 있었기에, 내심 찔리면서도 애써 태연한척 되물었다.
내 되물음이 대답이 되지 않았는지, 아니면 추궁을 피하려는걸 눈치챈건지, 나나는 한차례 눈썹을 찌푸리곤 머리에 깍지를 꼈다.



과감하게 드러난 겨드랑이와 배꼽, 길쭉한 다리 라인를 강조하는 핫팬츠가 묘하게 선정적이다.
방금전 있었던 해프닝 탓에 사고가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딴청을 피워도, 짐작 가는건 많잖아?
미오가 일하는 곳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꼬셔서 오는거라든지."

"윽..."

민망함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자, 나나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카페에서,"

"?"

"...그건, 일부러였어?"

나나의 물음에 갈피를 잡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뭐가 말야?"

"......"

당황하는 나를 말없이 노려보곤 나나는 달싹이던 입술을 한차례 매만졌다.



"그, 그나저나 오늘 견학은 어땠어?"

질문 뒤에 괜스레 조용해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억지로 화제를 돌려보았다.

"...뭐야, 그 갑작스런 화제전환은?
그리고 견학 얘긴 아까 오면서 나눴잖아."

"하지만 견학 얘기랍시고 들은건 모모에 얽히는 남자들에 대한 불평 뿐이었으니까."

구색만 좋은 변명에 뚱한 눈초리를 보내던 나나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그러네.
별로 좋은 얘긴 아니었지.
다들 모모 가슴만 보며 헤벌쭉 따라다니고.
남자들은 다들 그렇게 가슴을 좋아하는거야?
그게 뭐 대수라고..."



아니, 너를 보면 그...확실히 가슴은 대수가 아닌 것 같은데?
하반신이...그러니까 허리 라인이라든지 허벅지가 장난 아니게 에로합니다만?

학교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발끈했는지 공연스레 화를 내는 나나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웠다.


몇차례 투덜거림 뒤에 진정하고선 나나는 내 화제전환에 어울려주었다.

"대체로 재밌었어.
언니의 친구들도 대개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다행이네.
네 말대로 다들 좋은 친구들이니까 말야."

"...만난 모두가 좋은 사람인건 아니었지만."

"응? 혹시 교장 선생님이라던가 만났어?"

"물론 변태 교장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조금 주저하더니 나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저기...료스케는 언니의 소꿉친구, 어떻게 생각해?"

"라라의 소꿉친구?
남자 쪽인 렌 말야? 아니면 여자 쪽인 룬?"

"룬."

"룬이라면, 언제나 밝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좋은 아이지.
그리고 절친이고."

"...절친?"

"뭐, 내가 자칭할 뿐이지만.
나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나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데 룬에 대해선 갑자기 왜 물은거야?"

내 물음에 나나는 떨떠름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너무 그 녀석이랑 가깝게 지내지 않는게 좋아."

"뭐어? 어째서?"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닌 것 같으니까.
네가 그 녀석을 좋게 봐주만큼, 그 녀석이 널 좋게 봐주진 않을걸?
괜히 나중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아."

"룬이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야 이따금 떠는 내숭이 고깝게 보일순 있겠지만 말야."

"아, 정말~~~!"

내 변호에 나나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너에게 호의적인 녀석이 아니란 말야!
설마하니 그 녀석이 예쁘다고 마냥 헤벌쭉 하는건 아니지?
모모에게 헤롱헤롱하는 다른 녀석들처럼 판단력 없이 굴지마."

"으응..."

"...내 말이 못미더워?"

"저기, 나나."

"왜? 료스케."

"혹시 날 걱정해주는거야?"

"뭐? 내가 왜!"

---♪

나나의 새된 소리를 뚫고 휴대폰이 울렸다.
나나와의 대화를 멈추고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사이렌지 아키호』

"아키호씨네."

"어? 아키호?"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나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 너머로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얏호~! 아키츠군! 좋은 밤 보내고 있어?」

"네. 목소리를 들으니 아키호씨도 즐겁게 보내시고 계신것 같네요."

「아하하~ 그러려나?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중요한 이야기?"

「후후후, 데이트말야, 데이트.」

"...아."

「앗, 설마 이 누나와의 데이트 약속을 잊어버렸다곤 하지 않겠지?」

"그야 물론이죠. 잊어버릴리 없잖아요."

「후후, 좋아. 그럼 시간 말인데, 이번 토요일 오후 1시는 괜찮니?」

"네. 좋아요.
이번 주말은 예정이 비어있으니까, 아키호씨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면 될 것 같아요."

「어머, 그건 잘됐네.
장소는 나중에 다시 알려줄께.」

"예. 그럼 토요일에 만나죠.
기대하고 있을께요 아키호씨."

「후후, 나도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께~!
내 꿈 꾸렴~♪」

사춘기 한창의 남학생의 꿈에 나와도 괜찮은겁니까 아키호씨?
장난스런 농담과 함께 아키호씨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하는 동안 얌전히 입을 다물고 기다려준 나나에게 사과했다.

"미안. 기다리게했지?"

"...별로."

나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짧게 답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지.
그리고 나나가 걱정해줬던 것까지.
방금전 애매한 부분에서 끊긴 대화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나 네가 염려해주는건 기뻐.
그래도 나나 네가 염려하는 것처럼 룬은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티격태격하는 사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거기까지 험악한 관계는 아니라고 자신하니까.

"응. 룬에 대한 평가는 고칠께.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납득해준 나나에게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틀렸네."

"이해해줘서 고마워 나나.
함께 어울려보면 룬의 좋은 점도 분명 알게될테니까,"

"룬이 옳았어."

"응?"

난데없이 들려온 엉뚱한 말에 놀라 나나의 안색을 살폈다.
나나는 입술을 깨물곤 나를 노려 보았다.

"기껏 생각해줬는데..."

"나나?"

"바보 멍청이!
너 같은거 더는 몰라!"

퍽-!

"아풋!?"

나나가 힘껏 집어던진 베개가 얼굴에 직격했다.
한심한 소리를 흘리는 날 내버려둔채, 나나는 방을 떠나버렸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나나를 쫓아갔지만 결과는 변변찮았다.
나나의 방은 굳게 잠겨있었으니까.
어지간히 일이 꼬였다 싶어 답답한 한숨만 내쉬고 돌아섰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엔 나나의 화가 다소 가라앉길 바랄 수 밖에.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눈을 감은채 침대에 누워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늘 일들로 마음이 어수선해 잠들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중,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찰칵-

...?

조심스레 방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누구?
나나? 모모?
왜?

온갖 의문들이 어지러이 머릿속을 돌아다닐 때, 속삭이듯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료스케...자?"

나나의 목소리다.

방금 전까지 화내던 것과 다르게 얌전한 나나의 모습.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심 당황해선 어떻게 대응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나나는 그 침묵의 틈을 내가 자고 있다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되돌아가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오는거야?

조용히 방문이 닫혔다.

딸깍-

방문을 걸어잠그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발소리를 죽이며 나나가 침대로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는 침대 앞에서 멈췄다.

침묵.
이따금 옅게 퍼지는 숨소리.
묵묵히 내려 꽂히는 시선을 느낀건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

침을 삼키는 소리.
작게 심호흡 하는 소리.
멈췄던 발걸음이 머뭇머뭇 떼어진다.

침대를 누르는 느낌과 함께, 부스럭거리며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온 나나가 내 곁에 누웠다.
나나가 내뱉은 숨이 피부에 닿았다.
애써 자연스러운척 누워있는 내 곁에 누워있길 잠시.
나나는 천천히 내 팔에 머리를 기댔다.

......

일분, 이분, 삼분.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는 듯 보이는 침묵 속에서, 나나는 툭-하고 중얼거렸다.

"뭘하고 있는거람, 나는..."

......

무심코였는지, 말을 내뱉은 스스로에게 놀란듯 나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반응을 살피듯 숨을 죽이던 나나는, 고르게 숨을 내쉬는 내 모습에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그렇게 숨죽이며 내 곁에 누워있던 나나가 문득 속삭였다.

"...변태."

아뇨.
나는 곤충이나 갑각류마냥 탈피하지 않습니다.

"짐승."

삼단논법.
대전제: 나나는 동물들의 친구다.
소전제: 나는 짐승. 즉, 동물.
결론: 그러니까 나나는 나의 친구.

"여동생 바보."

물론, 나는 여동생 카페 단골입니다.

"팬티도둑."

소송.

"바람둥이."

애인이 100명이니, 200명이니, 100다스니 하는 그거죠? 압니다.
터무니 없는 규모의 중상모략은 사양이라구.

정말이지, 자고 있는 척하는 사람 곁에서 이게 대체 뭐하는거람...
장난스런 속삭임을 무시하고 자는척 하는건 제법 고역이었다.
소리를 죽인채 작게 키득거리곤 나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침묵이 내려앉고 잠시.
스스로에게 묻듯 나나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로...어째서 나는 이러고 있는걸까...?
도중부터 모르겠어..."

맥없이 중얼거리던 나나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였다.

"...네 탓이야."

입술에 무언가 닿았다.
그것이 나나의 손가락이라고 깨달은 건, 나나가 입술에 댄 손가락을 살며시 누른 뒤였다.

"...네가, 거짓말쟁이니까."

조심스런 움직임으로 손가락이 입술을 약하게 눌렀다.

"그러니까..."

손가락이 치워졌다.
나나의 손이 조심스레 소맷자락을 잡았다.

"...잔뜩 화내고,
잔뜩 사과하게 만들거야."

......

"...잘자."

내 품에 몸을 기댄채 나나는 천천히 잠에 빠졌다.




...뭐야 정말...

남이 벗어둔 옷에 얼굴을 가져갔으면서
옷장이나 침대를 어지럽혔으면서
베개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으면서

그 날과 같은 모습으로 차양 아래에서 재회하거나
자신의 옷차림을 좋아하느냐며 물어보거나
가만히 기대오거나, 걱정스레 충고해주거나

...모르겠어.

나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아마도 조만간, 나나가 낸 무언지 모를 대답에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불안함과 걱정이 뒤섞여 혼란한채, 풀어진 긴장과 함께 찾아온 수마에 몸을 맡겼다.



==================================

다들 오랫만에 뵙습니다(_ _);
11월을 날려먹고 이제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네요;;

시간상 예정했던 파트에서 전반부를 51화로 먼저 올립니다.

도중에 다소 역동적인 소재도 있었지만, 전개가 과하다 싶어 삭제했더니 일창게 제한 용량에 턱걸이 했네요.
빠듯하게 본문이 메모장 15kb를 조금 넘는 용량이 되어서 한숨만...-_-;
다행이랄까, 후반부를 52화로 넘긴게 아쉽달까...;

조만간 찾아뵐 수 있도록 해야죠(_ _);;

뭔가 제대로 된 후기도 남기고 싶은데, 생각날 때마다 후기에 하고싶은 말들도 모아둬야겠제요^^;

그럼 다들 월요일 맞이 잘하세요~!*^^*


Posted by 루트(根)
,

 
"료스케~! 같이 게임하자~!"

목욕을 마치고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로 갈아입은 나나가 권유로 거실에 앉아 컨트롤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욕실을 쓸 예정이었으니, 모모가 욕실을 사용하는 동안에 적당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아보였다.

레이싱 게임을 하면서 몸을 좌우로 기울이던 나나와 이따금 팔이 맞닿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화들짝 놀라며 비켜서는 나나의 반응에 굳이 대응할 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게임에 몰입하다보면 이정도 해프닝 정도야 보통이니까.

다만, '어? 어?'하는 사이에 레이싱 도중 추월당해 당황한 나나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게 잘못이었을까.
머리에 열이 잔뜩 오른듯, 게임 도중 나나의 방해공작이 하나 둘 튀어 나왔다.

처음의 머뭇거림은 어느샌가 잊혀졌는지, 팔이 맞닿는걸 넘어서, 아예 내게 몸을 기대고선 날 밀어붙이려 한건 그나마 나았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내게 기대서 용을 쓰던 나나에게「후하하하하!」하고 어른스럽지 못한 웃음을 날리곤 유리하게 게임을 리드하고 있던 차였다.

"아아~ 정말~!"

지금 이대론 효과가 얇다고 생각했는지, 나나는 몸으로 밀어붙이는걸 멈추곤 컨트롤러를 잡은채 일어섰다.
그리곤 내 뒤로 이동한 나나가 그대로 내 등뒤에 매달렸다.
내가 상황을 채 이해하지 못한 차에, 내 왼쪽 어깨에 고개를 얹은 나나가 돌연 물러났다.

"으야야~~~!
수염이 까끌까끌해!"

"난데없이 실례잖아 너!"

나의 항의에도 아랑곳 없이 수염이 닿았던 볼을 매만지며 투덜거리던 나나는 다시금 몸을 숙였다.
내 목에 양팔을 둘러서 컨트롤러를 잡고, 나나는 그대로 내 정수리 위에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등뒤에서 나를 감싸듯한 자세가 되어버린 나나에게 당황해 몸이 굳어버렸다.

"야, 야? 이거 반칙..."

뺨을 간질이는 분홍빛 머리카락.
등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체온과 감촉.
몸을 두르듯 번지는 체향.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얼버무리듯 허풍을 떨었다.

"이런다고 내가 질줄,"

스르륵-

조용히 올라온 나나의 꼬리가 손목을 휘감았다.

"엣?"

꽈아악-하고 손목을 휘감은 꼬리에 힘이 들어가자, 이번에야말로 움직임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민감한 부위인 꼬리를 서툴게 자극했다간, 난처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되어버릴 테니.


레이싱은 계속된다.

손목을 휘감은채 작게 흔들리는 꼬리.
새근새근 귓가를 달구는 옅은 숨결.

방금 전의 아우성과 몸싸움이 거짓말인양 게임에서 흘러나오는 BGM만이 거실을 메우고 있었다.



게임이 끝났다.

"...내가, 이겼어."

"으, 응."

등에 기댄채 나나가 승리를 선언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등에 매달려 있을 셈이람?
장외전술이 이유였다고 해도, 게임이 끝난 마당에 계속 이렇게 붙어 있는건 기분은 좋아도 솔직히 부끄럽다.
한껏 승리의 여운에 잠겨있는 중이라면, 좀 더 기다려 주어도 좋지만.

지금 자세에서 풀려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어깨에 힘을 빼고 컨트롤러를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였다.
정수리를 누르던 나나의 턱이 조금 미끄러졌는지, 내 머리카락에 나나의 코가 살짝 닿은 것 같았다.


스으-


...에?



"...뭐하는거니 나나?"

"!?"

모모의 목소리에 나나가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감싼채 욕실을 나온 모모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귓볼이 빨개진채 나나는 후다닥 소리가 날 기새로 자신의 방으로 뛰쳐들어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한채 앉아있는 내게 모모가 웃으며 다가왔다.

"사이 좋네요."

놀리듯 건네진 모모의 농담에 대꾸하는 것 대신 물었다.

"...저기..."

"왜그러세요 료스케씨?"

"나말야...
...혹시 냄새나?"

"네?"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모의 반응에 머리를 매만지다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뭐야.
아무래도 오늘 목욕은 좀 더 신경써서 해야 할 것 같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 내 방에 돌아올 즈음엔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기분을 전환할 겸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보면 하루나와의 서먹한 관계를 개선해보려고 애완견 관련 책들도 빌렸었지.
애완견이라는 주제가 공통 관심사가 될 것 같아서 책을 빌렸던건데...
정작 하루나와의 관계 개선은 엉뚱한 부분에서 이루어졌으니, 역시 서로간의 관계는 어떤게 계기가 되어 변해가는지 모르는거구나.
묘한 감회에 젖은채 책상에 앉아 묵묵히 독서에 빠져들었다.


딸깍-

"응?"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열린 문틈으로 분홍빛 장발이 나부꼈다.
풀어내린 웨이브진 머리카락, 민소매 상의와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나나?"

"읽을게 있어서 왔어."

"보고 싶은 책이 생긴거야?"

"응. 『영웅학원』. 네가 이따금 읽던 만화말야."

"오? 나나 너도 영웅학원에 흥미를 갖게 된거야?"

"그냥, 미캉의 아빠가 그린 만화이기도 하고, 너도 그 애독자라고 들었으니까 어떤건지 궁금했거든."

"그렇다면야 기꺼이 감상하도록 해.
사이바이씨의 팬이 늘어난다면 기쁘니까."

"여기서 읽고 가도 좋아?"

"물론이야. 신경쓰지 말고 편히 보라구."

"흐흥~ 과연 어떤 내용이려나?"

씨익 웃곤 나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영웅학원 시리즈의 첫권을 집어들었다.

풀썩-

침대에 몸을 누인 나나는 누운채 책을 펼쳤다.

편히 보랬더니, 침대를 점거해버렸네.
정말로 사양이 없네요.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는 나나를 힐끗 보고는 몸을 돌렸다.
나나가 만화에 빠진 사이에, 나는 나대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자.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이따금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만이 방을 메운채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을 내려놓는 소리 후 나나가 물음을 던졌다.

"...료스케는 어떤 책 읽고 있어?"

"나? 애견인을 위한 강아지와의 소통법."

나나를 향해 몸을 돌리곤 책을 내보였다.

"그러고보면 지난주에 동물 관련 책을 빌린다고 했었지?"

"응. 조금 관심이 생겨서 말야."

"흐응..."

방금전까지 침대위에서 뒤척인 탓인지, 나나의 민소매 상의가 흐트러져 배꼽이 드러나보였다.
이상한 시선을 보내다가 나나와 거북한 분위기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슬그머니 시선을 되돌리려던 차였다.

"료스케가 책을 읽는 이유는 여자아이를 꼬시기 위한거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최근까지 하루나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던 속셈이 있었기에, 내심 찔리면서도 애써 태연한척 되물었다.
내 되물음이 대답이 되지 않았는지, 나나는 한차례 눈썹을 찌푸리곤 머리에 깍지를 꼈다.



과감하게 드러난 겨드랑이와 배꼽, 길쭉한 다리 라인를 강조하는 핫팬츠가 묘하게 선정적이다.
방금전 있었던 해프닝 탓에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걸지도 몰랐다.

"짐작 가는건 많잖아?
미오가 일하는 곳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꼬셔서 오는거라든지."

"윽..."

민망함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문 날 보며 나나는 입술을 벌렸다.

"카페에서,"

"?"

"...그건, 일부러였어?"

나나의 물음에 갈피를 잡지 못해 눈을 깜빡였다.

"뭐가 말야?"

"......"

당황하는 나를 말없이 노려보곤 나나는 달싹이던 입술을 한차례 매만졌다.



"그, 그나저나 오늘 견학은 어땠어?"

추궁뒤에 괜스레 조용해진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억지로 화제를 돌려보았다.

"...뭐야, 그 갑작스런 화제전환은?
그리고 견학 얘긴 아까 오면서 나눴잖아."

"하지만 견학 얘기랍시고 들은건 모모에 얽히는 남자들에 대한 불평 뿐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러네.
다들 모모 가슴만 보며 헤벌쭉 따라다니고.
남자들은 다들 그렇게 가슴이 좋은거야?"



아니 너는 그...가슴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하반신이...그러니까 허리 라인이라든지 허벅지가 장난 아니게 에로합니다만?

학교에서의 일을 떠올리곤 발끈했는지 공연스레 화를 내는 나나를 보며 떠오른 생각을 애써 지웠다.


몇차례 투덜거림 뒤에 진정하고선 나나는 내 화제전환에 어울려주었다.

"대체로 재밌었어.
언니의 친구들도 대개 좋은 사람들이었으니까."

"응, 다들 좋은 녀석들이니까말야."

"...만난 모두가 좋은 사람인건 아니었지만."

"응? 혹시 교장 선생님이라던가 만났어?"

"물론 변태 교장도 있었지만..."

어째선지 조금 주저하더니 나나가 내 눈치를 살폈다.

"...언니의 소꿉친구, 어떻게 생각해?"

"라라의 소꿉친구?
렌 말야? 아니면 룬?"

"룬."

"룬이라면, 언제나 밝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좋은 아이지.
그리고 절친."

"...절친?"

"뭐, 내가 자칭할 뿐이지만."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나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너무 그 녀석이랑 가깝게 지내지 않는게 좋아."

"뭐어? 어째서?"

"...별로 좋은 녀석이 아닌 것 같으니까.
네가 그 녀석을 좋게 봐주만큼, 그 녀석이 널 좋게 봐주진 않을걸?
괜히 나중에 상처받지 않으려면 거리를 두는 편이 좋아."

"룬이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 그야 이따금 떠는 내숭이 고깝게 보일순 있겠지만 말야."

"설마하니 그 녀석이 예쁘다고 마냥 헤벌쭉 하는건 아니지?
모모에게 헤롱헤롱하는 다른 녀석들처럼 판단력 없이 굴지마."

"으응..."

"...내 말이 못미더워?"

"저기, 나나."

"왜? 료스케."

"혹시 날 걱정해주는거야?"

"뭐? 내가 왜!"

---♪

나나의 새된 소리를 뚫고 휴대폰이 울렸다.
나나와의 대화를 멈추고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사이렌지 아키호』

나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로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얏호~! 아키츠군! 좋은 밤 보내고 있어?」

"네. 목소리를 들으니 아키호씨도 즐겁게 보내시고 계신것 같네요."

「아하하~ 그러려나?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연락했어.」

"중요한 이야기?"

「후후후, 데이트말야, 데이트.」

"...아!"

「앗, 설마 이 누나와의 데이트 약속을 잊어버렸다곤 하지 않겠지?」

"그야 물론이죠. 잊어버릴리 없잖아요."

「후후, 좋아. 그럼 시간 말인데, 이번 토요일 오후 1시는 괜찮니?」

"네. 좋아요.
이번 주말은 예정이 비어있으니까, 아키호씨의 시간에 맞춰 움직이죠."

「어머, 그건 잘됐네.
장소는 나중에 다시 알려줄께.
그럼 토요일 데이트 기대하고 있을께~!
내 꿈 꾸렴~♪」

사춘기 한창의 남학생의 꿈에 나와도 괜찮은겁니까 아키호씨?
장난스런 농담과 함께 아키호씨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로 대화가 끊겼던 탓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 잠시 생각을 떠올리곤, 딱딱한 표정의 나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나나 네가 염려하는 것처럼 룬은 나쁜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룬에 대한 평가는 고칠께.
내가 오해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수월하게 납득해준 나나에게 의아해하면서도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내가 틀렸네."

"이해해줘서 다행이야.
함께 어울려보면 룬의 좋은 점도 분명 알게될테니까,"

"룬이 옳았어."

"응?"

나나가 입술을 깨물곤 나를 노려 보았다.

"기껏 생각해줬는데..."

"나나?"

"바보 멍청이!
너 같은거 더는 몰라!"

퍽-!

"아풋!?"

나나가 힘껏 집어던진 베개가 얼굴에 직격했다.
한심한 소리를 흘리는 날 내버려둔채, 나나는 방을 떠나버렸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나나를 쫓아갔지만 결과는 변변찮았다.
나나의 방은 굳게 잠겨있었으니까.
어지간히 일이 꼬였다 싶어 답답한 한숨만 내쉬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최근 일로 마음이 어수선해 잠들지 못하고 초조해하던 중,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찰칵-

...?

조심스레 방문이 열렸다.

"...료스케...자?"

나나의 목소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내심 당황해선 어떻게 대응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나나는 그 침묵을, 내가 자고 있다고 해석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되돌아가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오는거야?

딸깍-

방문을 걸어잠그며 나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생각되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나나가 침대로 걸어왔다.
부스럭거리며 조심스레 침대에 올라온 나나가 내 곁에 누웠다.

애써 자연스러운척 누워있는 내 곁에 누워있길 잠시.
나나는 천천히 내 품에 머리를 기댔다.

......

일분, 이분, 삼분.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는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나는 툭-하고 중얼거렸다.

"...어째서 나는 이러고 있는걸까...?"

......

"도중부터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듯 나나가 말을 흐렸다.

"...네 탓이니까."

입술에 무언가 닿았다.
그것이 나나의 손가락이라고 깨달은 건, 나나가 입술에 댄 손가락을 살며시 누른 뒤였다.

"...네가, 거짓말쟁이니까."


"그러니까..."

손가락이 치워졌다.
나나의 손이 조심스레 소맷자락을 잡았다.

"...잔뜩 화내고,
잔뜩 사과하게 만들거야."

......

"...잘자."

내 품에 몸을 기댄채 나나는 천천히 잠에 빠졌다.




...뭐야 정말...

남이 벗어둔 옷에 얼굴을 가져갔으면서.
옷장이나 침대를 어지럽혔으면서.
베개를 집어던지며 화를 냈으면서.

그 날과 같은 모습으로 차양 아래에서 재회하거나.
자신의 옷차림을 좋아하느냐며 물어보거나.
가만히 기대오거나, 걱정스레 충고해주거나.

...모르겠어.

나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언젠가, 아마도 조만간, 나나가 낸 무언지 모를 대답에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불안함과 걱정이 뒤섞여 혼란한채, 긴장이 풀리며 찾아온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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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오랫만에 뵙습니다(_ _);
11월을 날려먹고 이제서 꾸물꾸물 기어나왔네요;;

51화 전반부의 초안을 올립니다.

후반부는 얼기설기 기워진 상태라서 올리기엔 부적합해서-_-;

제대로 된 후기는 51화 완성할 때 함께 올리겠습니다.

그럼 다들 월요일 맞이 잘하세요~!^^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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