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靑出於藍) 8
- 헨젤과 그레텔 -맑은 하늘 아래 새초미가 요술봉을 치켜들었다.
"Rabbit Carrot Pretty Change~!"새초미의 요술봉에서 쏟아져 나온 분홍빛이 시야를 감쌌다.
빛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제빵모와 앞치마를 착용한 꾸러기 수비대가 서 있었다.
"자, 그럼 다들 힘내서 과자집을 완성하는거야~!"
"「「「오~!!!」」」"
좋은 대답이군.
똘기, 강다리, 호치, 새초미, 미미, 키키의 반응에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느긋히 구경이나 하고 있을까나.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 나라에서 받은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까.
마법사 로브 아래의 붕대 투성이 팔을 한차례 쓰다듬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분주히 과자 만들기를 시작하는 꾸러기 수비대를 구경하며 앉아 있던 차에,
이상한 듯 힐끔힐끔 과자집을 쳐다보던 똘기가 내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마법사 영감님?"
"뭔가? 혹시 궁금한게 있나?"
멋지게 내려온 수염을 쓰다듬으며 묻자 똘기가 어색한 웃음을 띄웠다.
"아하하, 그게 말이죠...
어째서 과자집이 '두 채'씩이나 있는건가요?"
"한 채는 손님용이고 다른 한 채는 내가 잘 곳인데?"
"아니, 그게 아니라 『헨젤과 그레텔』에서 나오는 과자집은 원래 한 채 뿐이어야 하는데..."
"이놈이? 스페인의 명물!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지은 과자집에 불만이 있단거냐!?"
"잘못했습니다!"
버럭 역정을 내자 똘기는 어마 뜨거라 몸을 돌려 과자 만드는 장소로 도망쳤다.
"쳇, 성깔 고약한 영감님이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시구려 똘기공.
과자집이 두 채인건 보나마나 사령 몬스터가 이야기 나라를 바꾼 탓 아니겠소?
그런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카스테라 자르는거나 좀 도와주시오."
"맛있겠다...하나 맛봐도 될까?"
"뭐, 양이야 충분하니까 조금 정돈 먹어도 괜찮지 않겠소?
나도 몽치 녀석에게 줄 과자도 챙겨야 하니 말이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강다리와 똘기는 과자 만들기를 이어갔다.
"호옷-!"
허공에 띄운 카스테라를 따라 뛰어오른 강다리의 손에 쥔 칼이 빛났다.
순식간에 균일한 모양으로 조각나 떨어진 카스테라가 차곡차곡 굴뚝 형태로 쌓였다.
굉장하네. 저런게 달인이라는건가.
과자 만들기 도중 틈틈이 묘기를 선보이는 강다리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던 차였다.
"아얏!?"
짧은 비명에 고개를 돌리자 과도를 든 미미의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엉성하게 껍질이 잘리다만 사과가 뒹굴고 있었다.
저 애는 여기서도 덜렁대냐.
눈물을 글썽이며 손가락을 입에 무는 모습에 한숨을 쉬곤 미미에게 다가갔다.
"이리 보여주게."
"네?"
"명색이 나도 마법사 나부랭이라, 적당한 의료 지식은 있다네."
상처난 손가락을 소독약이 발린 거즈로 닦은후 곧장 붕대로 감쌌다.
"이 정도면 상처날 일은 없겠군."
"죄송해요. 전 이런건 서툴러서..."
"뭘, 신경쓰지 말게. 누구나 서툰건 있으니 말일세."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곤 바닥을 구르는 사과를 힐끗 보았다.
기억 속의 미미는 얌전해서 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는데, 사과 깎는걸 힘들어 할 줄은 몰랐군.
미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지 말게나."
"네?"
"가능하면 할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마법사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아, 네. 마법사씨.
...저기, 그런데..."
"왜 그러나?"
"그 붕대 투성이 몸 말인데요...어쩌다 그렇게 다치신건가요?"
미미의 물음에 쓴웃음을 짓곤 로브를 걷어 붕대 투성이 팔을 들어보였다.
"이거 말인가?
최근
호환(虎患)을 당해서 말일세.
덕분에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하지 뭔가."
다쳐서 몸이 불편한 못하는 불쌍한 신세의 늙은 마법사가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런 나를 위해서 『헨젤과 그레텔』이야기 나라의 과자집을 완성하는 것이 꾸러기 수비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고.
"마녀의 사역마는 고양이라고 하잖나?
그렇다면 나 같은 마법사의 사역마로는
호랑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지.
덕분에 호랑이 길들이기를 시도했다가 그만 호랑이에게 당해버렸지만. 핫핫핫~!"
"그거 웃어 넘길 일이 아니잖아요?"
기가 막힌듯 미미가 딴죽을 걸었다.
"그렇게 당하고서도 여전히 호랑이를 사역마로 고집했던거예요?"
"물론! 호랑이가 사역마라니 멋지잖은가?"
- 호랑이를 사역마로 길들이고 싶어!방금 전까지 호랑이를 연호하며 추하게 생떼를 쓰던 내게 질려버린 꾸러기 수비대가 결국은 손을 들곤 『정령소환』으로 호치를 소환했지.
동료들에게 자초지정을 듣곤 살그머니 이마를 감싸쥐던 호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거기다 보게나.
내 멋진 호랑이 사역마 덕분에 과자 만들기도 수월히 잘 풀리고 있지?"
"...수월히 돕고 있는 것 처럼 보이세요?"
"응?"
큼지막한 손을 서툴게 놀리면서 쩔쩔매는 호치의 움직임이 아련하다.
아무래도 처음 해보는 과자 만들기로 꽤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가보다.
어떻게 봐도 수월하다고 볼법한 모양새는 아니었기에 미미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음...처음은 누구나 다 서툴기 마련이지.
무리하지 말고 반죽 만들기 같은걸 도와주라고 전해주지 않겠니?"
내 부탁에 미미는 고개를 끄덕이곤 애잔함이 감돌기 시작한 호치에게로 향했다.
과자 만들기는 밤이 되서야 마무리 되었다.
뿌듯해 하면서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꾸러기 수비대는 너나 할 것 없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었다.
과자 만들기 도움도 받았고 어차피 과자집은 두 채나 있으니까, 한 채 정도는 예정대로 꾸러기 수비대가 머물 수 있도록 하는게 좋겠지.
수월하게 일이 풀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일을 기약하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상처가 욱신거리는게 곱게 잠들긴 글렀군.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붕대 아래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곤 일어났다.
아무래도 통증이 가시거나 졸음이 몰려올 때까진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책상으로 자리를 옮기곤 재봉 도구를 꺼내 들었다.
바느질에 몰두하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다음 이야기 나라에서 사용할 도구가 조금씩 형태를 이뤄가는 모습에 뿌듯해 하던 차였다.
철컥-
"응?"
출입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끼이익-
거슬리는 경첩소리와 함께 천천히 과자집의 출입문이 열렸다.
꾸벅꾸벅 고개를 흔들며 휘청거리는 걸음거리로 안으로 들어온 분홍머리 소녀, 미미.
채 뜨다만 눈을 비비며 집 안에 들어온 미미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더니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가 한차례 흔들리고, 황당해하는 나를 내버려둔채 미미는 이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곯아 떨어졌다.
...뭐야 이거?
"...잠자리를 헷갈린건가?"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해서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적이곤 중얼거렸다.
밖에서 볼일이라도 보고 돌아오다가 실수로 들어올 과자집을 착각한거려나?
아니면...실수가 아니거나.
...뭐가 어쨌든 일단 문 정도는 닫는게 예의 아니냐?
미미가 열어둔 채로 방치된 출입문을 도로 닫았다.
침대에 누운채 고른 숨을 흘리는 미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야 침대에서 자긴 글렀군.
나지막이 한숨을 쉬곤 이불을 끌어올려 미미에게 덮어주었다.
바느질거리를 대충 정리하곤 장롱에서 깔개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바느질을 재개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만들고 있던 도구도 대충 모양새는 갖췄으니 세세한 부분은 다음번에 조정하면 되겠지.
불을 끄고 눕고선, 침대를 한번 쳐다보곤 돌아누워 잠을 청했다.
미미(羊)가 하나, 미미(羊)가 둘, 미미(羊)가 셋...
부스럭-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눈을 감은채 자는척 묵묵히 있었다.
잠시 후, 내쉰 숨이 손바닥 같은 것에 가로막혀 얼굴에 번졌다.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가보군.
잠든 척 고르게 숨을 쉬고 있자, 코 가까이 다가왔던 손바닥이 치워졌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기색에 가만히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하던 중, 바느질감을 놔뒀던 책상을 뒤적이는 소리에 가늘게 눈을 떴다.
잠들기 전까지 내가 만들고 있던 물건을 양손으로 펼쳐들고 모양새를 확인하던 미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멍멍이?"
"
늑대다."
"꺅!?"
나른하게 대꾸하자 짧게 비명을 지르며 미미가 돌아섰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방의 불을 켰다.
내 작품을 안아들고서 주춤주춤 물러나는 미미를 보며 부스스 몸을 일으키곤 한차례 하품했다.
"숙녀가 남이 자는 곳에 함부로 들어오는건 좋지 않다네."
"...죄송해요 할아버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나."
"...죄송해요
로우란씨."
"!?"
눈을 크게 뜬 나를 미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직시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확신을 담은 미미의 어투에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맞아. 어떻게 나란걸 알아챈거지?"
미미의 손가락이 내 팔을 가리켰다.
"그 팔의 상처는 호랑이에게 당한거라고 했죠?"
"그랬지."
"
호랑이는 유럽엔 없어요.그 상처가 정말 호랑이에게 당한거라면 그건 아마 호치에게 물린 상처일테죠."
미미의 지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 똘기와 이야기하던 당신은 이 과자집이
스페인에 지어졌다고 했었죠?
하지만 『헨젤과 그레텔』은
독일의 이야기잖아요.
두번씩이나 수상한 말을 했는데 의심하지 않는다는게 이상하죠. 거기다..."
미미가 자신의 손가락을 감싼 붕대를 풀자 상처없이 멀쩡한 손가락이 드러났다.
"그 수상한 사람이 순식간에 상처를 치료하기까지 한다면 의심이 안 될리 없잖아요."
"...방심했군.
잠깐 사이에 제법 영리해졌는데?"
"얄미운 누군가가 낙타 서식지라든지 이것저것 물어본 탓이거든요?"
감탄하는 내게 미미는 못마땅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미미가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빨리 『헨젤과 그레텔』이야기 나라에 침략해 온거죠?
『알라딘과 요술램프』 이야기 나라에서 헤어진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잖아요."
"너희 꾸러기 수비대에게 엉망진창으로 패배한 마당에, 빈손으로 사령궁에 돌아가기엔 염치가 없어서.
과자라도 챙겨가면 좋을 것 같았거든."
어처구니 없다는 듯 미미가 빤히 내 얼굴을 응시했다.
"『백설공주』 이야기 나라에 갔던 이유처럼 말인가요?
그런걸로 이야기 나라를 침략하지 마세요."
"나한텐 중요한 일이거든?
아무튼 내일이 되면 과자만 가지고 얌전히 돌아갈거야.
여기서도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내 말에 미미는 의심스런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내 작품을 들어보였다.
"그럼 이 물건은 대체 어디에 쓰려던 건가요?"
"
늑대 옷말야?
그건 다른 이야기 나라에서 쓰려고 만들던거야."
"다른 이야기 나라?"
이리저리 내 작품-늑대 옷-을 살펴보던 미미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이 옷, 지퍼가
앞쪽에 달려있네요?"
"...혼자서 입을수 있도록 만들다보니 그렇게 된거야."
"흐응...그렇군요?"
배꼽에서 턱까지 길게 이어지는 지퍼를 찬찬히 훑어보던 미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충분히 살펴봤으면 이제 돌려줘.
어차피 너희가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닐테니까."
"네, 여기요."
미미가 건네준 늑대옷을 받고선 그대로 망토 안에 집어넣었다.
늑대옷이 망토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미미가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된거죠?
옷이 망토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는데..."
"『전우치전』의 '요술족자'를 개조했지.
'보물'을 보관하거나 꺼내는데 쓰지."
용도는 단순히 그 것 뿐만이 아니지만.
내 망토를 빤히 바라보는 미미의 시선에 짐짓 엄하게 주의했다.
"욕심부리지 마라."
"제, 제가 언제요?"
"보물 소모전을 강요당했던 『알라딘과 요술램프』때를 생각하면, 이정도 의심은 당연하다고 본다만."
"싸우기 전에 로우란씨의 전력을 깎을 의도였거든요?"
"그건 현명한 판단이군.
뭐, 말리진 않겠어.
머리 쓰면서 싸우는건 나도 환영이니까."
"자신만만하시네요.
나중에 당하고 후회하지 말아요?"
"물론.
그나저나 이제 그만 슬슬 가보는게 좋지 않아?
설마 여기서 잘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거든요!"
버럭 소리를 지른 미미는 이내 숨을 고르곤 진정했다.
"로우란씨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나갈거예요.
온 목적만 끝마치면 말이죠."
"내 속셈을 파악하려던게 아녔어?"
"그것도 있지만 부탁받은게 있거든요.
그게 아니었으면 이 밤 중에 동료들 몰래 찾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한숨을 쉬고 미미는 침대에서 엉덩이를 뗐다.
침대에서 일어난 미미가 내 앞에 섰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세요."
"...무슨 말이지?"
"본 모습의 당신에게 전해야 하는게 있으니까요."
"......"
"어서요."
"...그러지."
미미의 재촉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았다.
푸른 불길이 한차례 몸을 휘감고, 청색의 로우란의 본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흡...!"
마주선 미미가 무심코 입을 가렸다.
부분부분 탄자국이 남은 갑옷. 그을린 털.
화살에 벌집이 된 탓에 욱신거리는 등.
호치의 이빨에 당한 팔의 팔토시에서 흘러나오다 굳어버린 핏자국.
생채기가 난 얼굴과 입안에 남아있는 피맛.
양호하다고 볼 수 없는 몸 상태를 재차 인지한 탓에 다소 무뚝뚝하니 입을 열었다.
"전해야 하는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미미가 입가를 가린 손이 꼭 쥐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미미의 손이 내려갔다.
"...그대로 가만히 있어주세요."
짜악-!
화끈한 따귀에 휙하고 고개가 돌아갔다.
"...아프군."
얼얼한 볼의 감상에 미미가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오타마씨의 부탁이었어요.
할아버지를 만나거든 힘껏 때려달라고."
머리가 차게 식었다.
뺨에 가져가던 손을 도로 내렸다.
"...많이 화내던가?"
"거짓말쟁이 할아버지래요."
"...거짓말이라니. 할아버지였던 알라딘은 젊어져서 오타마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게 되었잖나?"
"그러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치사한 변명이네요.
오타마씨가 부르던 할아버지가 누굴 가리키는 거였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
"애초에 로우란씨가 '할아버지'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건 오타마씨가 생각나서였죠?"
"......"
침묵을 고수하는 내 모습에 한숨을 쉬고 미미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오타마씨의 전언이에요.
손녀가 신랑을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했어요."
"...'손녀'라..."
답답한 나머지 한차례 머리를 헤집었다.
"...젠장. 난 할아버지 같은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가요..."
혀를 차는 내 반응에 미미가 고개를 숙였다.
제자리에 선 채 꽉 쥐어진 미미의 주먹을 보곤 눈쌀을 찌푸렸다.
"이봐."
"?"
"피 묻었잖아. 닦아둬."
고개를 든 미미에게 품에서 꺼낸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미는 내밀어진 손수건과 자신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아마도 따귀를 때리다가 내 뺨의 생채기에서 묻은 피겠지.
피 묻히고 있는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아서 건네준건데 미미는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한참을 오도카니 서있던 미미는 손수건을 집어 들어 내 얼굴이 가까이 했다.
내 얼굴에 닿은 손길에 무심코 물었다.
"...뭐하는거야?"
"당신이야말로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잖아요."
손수건이 얼굴에 묻은 피와 먼지를 닦아낸다.
- 쓸데없는 걱정이야. 사령 사천왕은 튼튼하니까.
그렇게 말하려고 벌어진 입은 도로 닫혔다.
가까운 거리.
울 것만 같은 눈동자가 있었으니까.
약간, 입술이 떨린 것 같았다.
"...미안해요."
"사과받을 일 같은건 기억에 없어."
"미안해요."
"......"
떨리는 목소리.
덩달아 떨리는 손길에 생채기가 아릿하다.
...그러니까 서툰 일에 무모하게 나서는게 아니라니까.
"...다음부턴, 전령 일은 맡지마."
구깃구깃 엉망이 되어버린 미미의 얼굴이 오타마의 마지막 모습과 겹쳤다.
"너무 오래 머무른 탓인지,
내가 누구인지 착각 할 것 같으니까."
"......"
말없이 닦아주는 손수건에 피가 번졌다.
갑옷을 벗고 앉자 미미가 구급상자를 가지고 곁에 앉았다.
붕대와 치료약을 꺼내고 상처를 살피는 미미의 모습에 부끄러운 나머지 퉁명스런 말이 나왔다.
"별로. 고치지 않아도 상관없어.
솔직히 꾸러기 수비대에게 치료 받는다니 기분이 이상하니까."
"그냥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무슨 답례 말이지?"
어리둥절한 내 반응에 미미가 우뚝 멈췄다.
빤히 응시하는 미미의 시선에 당황하고 있는데, 다행히 미미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 나라에서 간호해준거 말예요.
그 답례라고 생각하세요."
"...아아. 그거 말이로군."
기절한채 호치에게 업혀온 미미를 간호했던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진심으로 몰랐다는 듯 보이는게 얄밉네요."
"그건 딱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을텐데?"
"그럼 저도 멋대로 치료할테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내 말에 대꾸하곤 미미는 등의 상처에 조심스레 약을 발랐다.
"그런데 약들은 이것 뿐인가요?
『알라딘과 요술램프』이야기 나라에서는 온갖 신기한 약이 있었잖아요."
"드라고의 벼락에 맞고 전부 불타버렸거든."
"...그런가요."
"그러니까 찾아와야지."
"네?"
"『알라딘의 요술램프』이야기 나라에서 챙겨오지 못한 물건이 많으니까.
지금은 무리더라도 보물을 되찾으러 언젠가 다시 가봐야겠어.
괜스레 쫓아올 생각 따윈 하지마.
너희가 날 잡으러 올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다녀올테니까."
"......"
"뭐야? 갑자기 조용해져선."
"아뇨, 아무것도."
등 뒤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흘렀다.
"고집쟁이."
"......흥."
한결 목소리와 손놀림이 가벼워졌다고 느낀건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등의 치료를 끝내고 몸을 붕대로 감은 뒤, 몸통 이외의 부분의 상처를 살피던 미미가 내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참, 뺨 맞은 부분은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죠?
손녀 일로 맞은 거잖아요?"
"...맘대로 해."
- 손녀 일로 맞은거라서 기왕이면 그대로 놔두고 싶었는데, 거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걸.
- 나중에 싸움이 끝나면 다시 때려 드릴까요?
- 어이쿠 무서워라. 네 손바닥은 제법 매서워서 두번 당하는건 사양하고 싶은데?
- 어차피 본 모습으론 그다지 아프지도 않을거면서...
"두 번째 따귀라니,『알라딘과 요술램프』에서 나눴던 얘기가 어쩌다보니 예언처럼 이뤄졌군."
"그러네요."
"한가지는 틀렸지만."
"뭐가요?"
의아해하는 미미에게 얼얼한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려 보이곤 웃었다.
"네 따귀는 지금 모습으로 맞아도 제법 아팠어."
미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었다.
미미에게 팔을 맡긴채 앉았다.
내 팔에 난 이빨자국을 확인하며 미미는 꼼꼼한 손길로 약을 발랐다.
얌전히 앉은 내 시야에는 미미의 분홍 머리카락이 가득 들어왔다.
등 뒤에 있을 때와 달리 팔을 치료하는 탓인가.
서로간의 거리가 가까웠다.
낮 내내 과자 만들기에 열중한 탓인지, 어렴풋한 과자향이 미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좋은 냄새."
달콤한 향에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미미가 흠칫 놀랐다.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미미의 눈길에,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군. 실수였어."
시선을 피하길 한참.
"...정말이지,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미미는 한숨을 쉬곤 다시 팔에 약을 발랐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약바르기가 끝났다.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는 미미의 손놀림은 엉성했다.
"그런 말은 새초미에게 하세요."
미미의 중얼거림에 고개가 절로 기울었다.
실례될 것 같은 말을 어째서 하라는거야?
너에게서 '달콤한 과자향'이 난다고 하면 새초미가 좋아할까?
'마녀의 과자집'에서 그런 말을 꺼냈다간 프로포즈는 커녕 잡아먹겠단 소리로 받아들일 것 같은데.
고민하던 중 붕대를 동여매는 힘이 강해졌다.
꽈악-
"으윽...!"
예상보다 강한 압박감에 통증에 신음이 샜다.
모른척 붕대를 조이는 미미의 모습에 혹시나 싶어 말을 걸었다.
"큭, 저기, 붕대가 조금 조이는데?"
"기분탓 아닌가요?"
"설마 아까 말실수한 걸 신경쓰는거야?
별로 잡아먹을 생각 같은거 안했다고!"
"잡아먹는다고 말했어! 저질!"
"조금 달콤한 과자 향이 나서 중얼거린 것 뿐이었다구!"
"다, 달콤하다니!
......과자?"
"그래. 하루종일 과자 만들기 하면서 과자 냄새가 배인것 같더라."
"......"
"......"
꽈아악-
"으그극!?"
"어머, 죄송해요.
역시 붕대가 조금 조였나 보네요 아라기토씨."
"윽, 그 역할은 이미 끝났거든?"
"어머, 실례했어요 할아버지, 아니, 로우란씨."
핫, 잘도 해주잖냐.
얄밉게 웃는 미미에게 통증을 참곤 씩 웃었다.
"하, 치료 고마워, 할머니."
"......"
꽈아아아악-!
"아야야야야!? 아팟!?"
양팔로 힘껏 붕대를 조이는 미미의 만행에 절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누가 할머니라구요?"
"하, 항복! 항복! 내가 잘못했으니까!"
"엄살피우지 말아요.
정말이지 손녀랑 꼭 닮아서는..."
"뭐? 설마 오타마가 너보고 할머니라 그랬,"
"누가 할머니예요!"
"푸, 푸흐흐흐, 끄아아아아!?"
날이 밝았다.
완성된 과자집과 진열된 과자들 앞에서 꾸러기 수비대에게 추가 요청을 넣었다.
"어린아이를 한명 데려와줘."
"아이는 또 왜요?"
"과자가 아이들 입맛에 맞게 잘 만들어 졌는지 확인해봐야 할거 아냐?"
"쳇, 까다로운 영감님이네."
"아앙? 뭐라고?"
"아, 아뇨."
작게 투덜대곤 똘기는 요지경을 하늘로 향해 들었다.
『정령소환! 찡찡이!』요지경에서 뿜어져 나온 빛에서 찡찡이가 소환되는 사이 미미가 내게 다가왔다.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려는 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미미는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찡찡이는 왜 부른 거예요?)"
"(과자 먹고 싶어 할 거 같아서.)"
"(그게 이유예요?)"
"(응. 아이니까 과자 같은거 좋아하지 않아?)"
"하아..."
눈앞을 가득채운 과자에 반색하는 찡찡이의 모습에, 미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나대로 눈여겨둔 과자들을 조용히 망토에 담아넣었다.
쥬켄이랑 해라가 과자를 마음에 들어하면 좋을텐데.
소소한 희망을 과자에 담으며 조용히 이야기 나라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흥! 엉망진창이군.
사천왕 주제에 꾸러기 수비대 녀석들 따위에게 당하다니 형편없는 놈!"
어째서 나는 고작 흰둥이 사천왕에게 이런 영양가 없는 평가를 듣고 있어야 하는거야?
해라 총사령관에게 무사히 보고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온 뒤.
통로를 서성이다가 백색의 고우센과 마주쳤다.
녀석은 붕대 투성이인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보곤 노골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뒤로 나온 말이 사천왕의 수치니 뭐니 하는 내용이고.
아무리 내가 자기랑 소 닭보듯 하는 사이라지만, 다쳐서 돌아온 동료에게 할 말이 그것 뿐이냐?
"으응? 뭐야 그 눈은?
설마 이 내게 불만이라도 있는거냐?
한입거리도 못되는 녀석이. 케하하하하!"
...고놈 참 자신감 넘치네.
사천왕 최초로 사망하는 녀석, 즉 사천왕 최약체 주제에 거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뭐, 굳이 사실을 들이댐으로써 고우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에, 고우센의 비아냥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거대화한 너는 그야말로
『거대한 호랑이』니까, 나 같은건
『한입에 삼켜질테지』."
"크크크 뭐야? 의외로 분수를 잘 알고 있잖아?
약골은 약골답게 정보수집 따위 하찮은 일이나 하고 있으라구."
킬킬킬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곤 고우센은 떠나갔다.
잠시 뒤, 고우센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걸 확인하곤 망토를 살짝 들췄다.
"갔으니까 이만 나와도 돼."
"응."
다람쥐 마냥 입안 가득 과자를 머금은 쥬켄이 망토 안에서 튀어나왔다.
금빛 눈동자로 고우센이 사라진 통로를 노려보던 쥬켄이 불만을 터뜨렸다.
"고우센 녀석, 웃기네.
덩치만 큰 멍청이 주제에 잘난척 하기는."
"입에 과자 부스러기 묻었다."
손수건으로 쥬켄의 입가를 닦아주자 쥬켄은 손수건을 휙 낚아챘다.
"그런데 방금 전엔 왜 고우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어?
네가 계속 가만히 있으니까 어쩐지 너랑 한 팀인 나까지 바보 취급 당하는 것 같잖아!"
"고우센과 실랑이가 벌어져서 다퉜다간 네가 숨어 있는게 들키잖아."
"상관없어. 고우센 따윈 내가 박살내면 그만이니까."
"입에 과자를 잔뜩 넣은 채로 말야?"
"......"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는 쥬켄을 보곤 피식 웃었다.
쥬켄이 내 망토에 숨었던건 사천왕 답지 않게 볼썽 사나운 모습으로 과자 먹는걸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니까.
입안의 과자를 삼킨 뒤, 쥬켄은 내 망토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그나저나 신기한 망토네?
안쪽에 다른 공간이 있잖아."
"응. 이 망토는 창고 역할과 통로 역할을 하니까.
망토 저편은 보물과 이어지도록 되어있거든."
"흐응, 단순히 멋내기용으로 걸친 망토가 아니란거구나?"
"후후, 부러워?"
"그다지. 그보다 방금전 나눠준 과자는 왠거야?"
"이야기 나라에서 꾸러기 수비대가 만든걸 가져온거야.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뒀길래 조금 빼돌렸지."
망토 안에서 과자들을 하나씩 꺼내며 설명했다.
"이건 새초미가 만든거. 이건 미미가 만든거. 이건 키키가 만든거.
이건 똘기랑 강다리가 만든거. 이건 호치가 만든 『쇼콜라 쿠키』지.
전부 해라님이랑 너 주려구 챙겨온거라구."
"헤에..."
쇼콜라 쿠키를 입에 넣어 음미하면서 쥬켄이 힐끗 내 몸을 살폈다.
"그런데 그 붕대 투성이 몸은 뭐야?
어쩌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다쳤어?"
"몰매를 맞았거든."
"누구한테?"
"꾸러기 수비대, 이야기 나라 주인공, 그리고 이야기 나라의 악당들 세 패거리 전원에게."
내 대답에 쥬켄이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뭘 어떻게하면 세 그룹을 전부 적으로 돌려버리게 되는건데?"
"그러게 말야."
쥬켄의 핀잔에 어깨를 으쓱했다.
"뭐, 엉망진창으로 당한 덕분에 나도 반성했어.
앞으로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좀 더 머리를 굴리는 방향으로 행동하겠다고 마음 먹었지.
기왕이면 해라님께 영리한 모습도 보이고 싶달까.
멋지고 근엄한 카리스마 고양이로 말야."
내 바람에 쥬켄의 눈매가 힐쭉 휘었다.
"풋-"
"어? 우, 웃었어!?"
"큭큭...아, 아니. 로우란 너 그런거 신경쓰고 있었어?"
"당연하지! 날 봐!
이 우아한 혈통의 푸른 털을! 보기만 해도 위엄 있잖아?"
"아니, 네 본성은 분명 다 들키고 있으니까.
네가 근엄하게 생긴 주제에 의외로 푼수 같다는건 다들 알고 있을걸?"
"너무해!"
"킥킥. 그나저나 이 과자 맛있네."
쇼콜라 쿠키를 입에 넣곤 쥬켄은 배시시 웃었다.
"다른 과자도 맛있지만 난 이제 제일 맛있어.
달콤하고 씁쓸한 맛이 마음에 들거든!"
"......"
"왜그래?"
"아니, 역시 넌 해라님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방금전 알현실에서 마주했던 해라도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 ...씁쓸하군.호치가 만든, 조금 타버린 쇼콜라 쿠키를 묵묵히 입에 넣고 눈을 감던 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참, 로우란."
"왜?"
"다녀온 이야기 나라는 어디였어?"
"『헨젤과 그레텔』"
"어떤 내용인데?"
과자에 손을 가져가며 묻는 쥬켄에게 싱긋 웃었다.
"과자집의 과자를 먹은 아이들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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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 만에 뵙습니다...m(_ _)m;;;
청출어람은 자그마치 1년 7개월 만이네요 쿨럭쿨럭;
다들 무더위 속에서 잘 보내고 계신가요?
이번 주말은 한풀 더위가 꺾여서 좀 살만하네요.
개인사로 바빠서 업로드가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_ _);;
여자친구가 이젠 와이프가 되었거든요.
결혼 후 기쁜 일들에 이리저리 치이다보니 글쓰기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_@;
뭐; 글 좀 쓰라고 와이프랑 여동생이 타박해준 덕에 조금씩은 쓸 수 있었습니다만, 아직 갈길이 멀군요ㅠㅠ
다음 업로드는 10월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을이 되겠네요.
(계간연재라니 악몽이다...ㅠㅠ;)
무더위가 지나가길 바라며 다들 행복한 매일 되시기 바랍니다~! m(_ 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