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고 여름축제가 다가왔다.
반팔 티셔츠에 긴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와 어스름해지기 시작한 거리를 걸었다.

유카타와 나막신(게다)을 차려 입고 나가볼까 생각했었지만
그 차림으로 축제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는건 좀 버거울듯해서 경장으로 나왔다.
작년 축제때도 유카타 차림의 젊은이들은 드물었으니 딱히 이상하게 보이진 않겠지.
듣자하니 리토도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간다는 것 같고.

그러고보면 리토는 여름 축제에 딱히 흥미를 가진것 같진 않았다.
의욕없는 얼굴을 하던 리토를 떠올리면 나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는듯 해서 얼른 머릿속에서 리토의 얼굴을 지웠다.
모처럼 코테가와랑 함께 보낼 여름 축제인데 기운내지 않으면!

코테가와에게 축제구경을 권했을때의 대답을 떠올려본다.

「에? 축제 말인가요? 저랑?
...조, 좋아요. 아키츠군 혼자만 축제에 보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리고 학생들이 풍기가 흐트러지는것도 걱정이니까.
말해두지만, 딱히 축제에 가고 싶은건 아니에요?」

축제에 가고 싶었던 거군요. 압니다.
솔직한 라라와는 정 반대 의미로 알기 쉬운 아가씨로군요.
저렇게까지 속내가 드러난다면 솔직하지 못한 모습도 오히려 귀여울 따름이다.

그리고 정한 약속장소가 지금 내가 향하는 코테가와의 집이다.
축제거리로 향하는 방향에 코테가와의 집이 있었기에 축제 가는 도중에 들러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코테가와랑 약속을 잡은 이후 야미에게도 여름 축제에 함께 가는걸 권하려 했으나 리사와 미오에게 선수를 뺐겼다.
유카타를 골라줄 때부터 함께 가기로 약속했나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더니...
리사 일행과는 일정이 맞지 않았기에 나중에 축제에서 만나길 바랄 따름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어느새 코테가와의 집앞에 도착했다.
코테가와는 준비가 끝났으려나?
코테가와의 옷차림을 기대하며 벨을 눌렀다.

딩동-

「네」

목소리가 들리며 현관문이 열렸다.
금발에 목걸이, 검은 티를 입은 남성이 현관문을 연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코테가와의 오빠인 '코테가와 유우'이다.
나를 본 유우씨가 놀라며 입을 벌렸다.

"너는...!"

뭔가 경계하는듯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유우씨의 모습에 내심 아차싶었다.
크리스마스때의 첫만남때 인상이 좀 안좋았나보다.
우선 유우씨에게 화해의 표시로써 웃음지으며 말을 걸어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코테가와 오라버님."

"...누가 네놈 오라버니야!"

교섭실패.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첫인상이 좀 안좋았다는 수준이 아닌데?
그야말로 도둑놈 쳐다보듯 날 보는 유우씨의 시선은
사람의 첫인상이란 이렇게까지 나쁘게 박힐수 있다는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어찌됐건 침묵만 해선 될것도 안되니까
용건을 전하고 코테가와를 불러와서 중재를 부탁하는게 최선일것 같다.

"저기, 여름축제에 함께 가려고 코테가와를 데리러 왔습니다만..."

"누구 맘대로?"

"그게...코테가와랑 약속했는데요?"

"뭐, 뭐라고?!"

엄청난 목소리와 함께 마루에 무릎을 꿇고 좌절포즈를 취해버린 유우씨.
난데없는 오버 액션에 놀란 나를 신경쓰지도 않고
유우씨는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믿을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돼...
유이가...그 까칠한 여동생이 남자랑 약속을?
그것도 저런 소문자자한 불량배랑!"

...첫만남 때문이 아니라 소문 때문이었습니까...
고등학교 들어와선 학교내에서 벌어지는 트러블을 제외하면 별다른 말썽없이 지냈건만...
중학교때 소문이 사그라들려면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걸까요?

나도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엉거주춤 서있으려니 부엌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셨다.
코테가와의 어머님인 듯 했다.

"유짱. 현관앞에서 뭐하고 있어?
어머? 너는...?"

놀란듯 나를 바라보는 코테가와의 어머니께 당황하면서도 인사를 드렸다.

"아, 안녕하세요.
코테가와의 클래스메이트인 아키츠 료스케라고 합니다."

아주머니의 반응을 보기가 무서뭐서 90도로 인사를 드린채 고개를 들지 않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들린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올려버렸다.
아주머니께서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고 계셨다.

"난 또 누구라고.
네가 유이의 친구였구나?"

"저기...죄송한데 혹시 절 아시나요?"

왠지 안면이 있는듯한 아주머니의 반응에 언제 만난적이 있던가 열심히 기억을 뒤지고 있으려니
아주머니가 웃으며 대답하셨다.

"놀래켰다면 미안하구나.
상점가에서 가끔씩 동생이랑 함께 장보는 널 봤거든.
인상깊은 외모라서 기억하고 있었단다."

미캉과 장보기를 하던걸 보셨나보다.
다행히 나에 대한 인상이 나빠보이지 않는지라 안도하며 용건을 말씀드렸다.

"다름이 아니고, 여름 축제에 코테가와와 함께 갈 약속을 해서요.
그래서 데리러 왔습니다."

"에..."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뜨시던 아주머니는 이내 웃으며 말씀하셨다.

"유이는 너무 결벽해서 친구들과 잘 사귈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사내아이까지 집에 초대할 정도였다니 놀라운걸?"

"그, 그런가요?
하지만 풍기위원으로서 엄격한 태도는 보이지만
실제론 학생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덕에 클래스메이트들도 신뢰하고 있고요."

"그러니?"

"물론이죠."

당연하지만 코테가와를 가장 신뢰하고 있는건 나.
코테가와가 아니었더라면 고등학교에서 반친구들과 어울린다는건 바람으로만 끝났을지도 모르니까.

웃으며 코테가와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아주머니는 문득 생각난듯 나에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곧 축제가 시작되지 않니?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그러고 보면 코테가와는?"

"2층에 유이의 방이 있단다.
지금쯤이면 준비가 거의 끝났을테니 올라가보렴.
아, 그리고..."

살짝 내 귓가에 얼굴을 대고 아주머니가 조용히 속삭이셨다.

"올라가면 유카타를 차려입은 유이에게 감상을 들려주려무나.
네가 오기까지 3시간동안 옷단장을 했거든."

"에...?
...아, 알겠어요."

얼떨떨해하면서도 수긍하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옷단장에 그렇게까지 정성을 들였다니...
문득 내가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한다.
가벼운 반팔티에 긴바지.
...코테가와의 옷차림을 칭찬하기보다 격에 안맞는 내 차림에 사과부터 해야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에 1층을 내려다 보자 아주머니는 바닥에 주저 앉은 유우씨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유짱. 이런데서 앉아 있으면 안돼요.」

「하지만 유이가...」

...코테가와의 오빠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데도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지만서도.



코테가와의 방문에 서서 노크를 한다.
혹시나 옷을 덜 입은 상태라면 곤란하니까.
리토네 집에서 배운 교훈은 아직 잊지 않았다고.

똑-똑-

"코테가와?
지금 도착했는데. 준비는 끝났어?"

"아키츠군?
잠시만 기다려요."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코테가와의 방문이 열렸다.

세종류의 꽃무늬가 수놓아진 유카타와 오비(허리부분을 감싸는 띠).
긴 생머리를 틀어올려 양어깨로 흘러내리도록 한 머리모양.
평소와 달리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이상할 만큼 요염해 보였다.

"많이 기다렸나요 아키츠군?"

"......"

"저기...아키츠군?"

"으, 으응?"

아무말 없이 계속 코테가와를 쳐다만 보고 있자 약간 얼굴이 붉어진 코테가와가 나를 부른다.
놀라서 정신을 차리곤 대답하는데 영 미덥지근한 반응이었나보다.
코테가와는 의심스러운듯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저질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본건 아니겠죠?"

"처, 천만에!
난 단지..."

"단지?"

잠시 말을 주저하는 내 모습을 코테가와가 추궁한다.

"단지, 코테가와의 유카타 차림과 지금 머리 올린걸 보고 말이지..."

정직하게 말해야 하나...
...방금전 아주머니가 감상을 들려주라고도 하셨는데 솔직하게 말하기엔 정말이지 부끄럽다.
여자애에게 정면에서 예쁘다고 말하려니 무슨 추파 던지는것 같다고?
이런 부끄러움 따위엔 좀더 무신경해도 좋았는데...!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퉁명스럽게 구는 초등학생도 아닌데 이 무슨 솔직하지 못함?

솔직함과 수치심의 싸움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가 코테가와와 시선을 마주한다.

조용히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코테가와의 모습이 보인다.
약간 긴장한 듯 목덜미를 매만지는 코테가와를 보고 마음을 굳혔다.

그래...이럴때 안 말하면 평생동안 언제 말해보겠냐.
말하고 나서 파렴치하단 소릴 들을지언정 침묵한뒤 후회하진 않겠다!
부서져라 나의 수치심!

"...아찔해서 넋을 잃었습니다."

"......"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게 느껴지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여자애가 듣고 싶어하는 대사 순위권에 이 말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여성을 보고 넋을 잃을 경험을 해보는건 남자로선 일생에 바라마지 않는 일이니까.

코테가와도 내 낯뜨거운 대사에 얼굴이 붉어져선 양손으로 뺨을 살짝 가리고 있다.
이윽고 안색을 회복하며 답례한다.

"칭찬 고마워요 아키츠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해봤는데 괜찮았나 보네요?"

"물론! 정말로 예쁘다고.
사진을 찍어 두지 못하는게 후회될 따름이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내 모습에 당황하며 코테가와가 물었다.

"그, 그래요?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요?"

"맵시있게 입은 유카타도, 꽃장식된 끈으로 틀어올린 머리모양도 정말 어울려.
하지만 그중에서도 드러난 목덜미가 굿!
매끈하고 새하얀게 그야말로 최고!"

"역시 파렴치 했잖아요?!"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들어올려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나에게
새빨갛게 된 코테가와가 빽하고 소리질렀다.
수치심을 한번 버리니 나중에 뭔가가 망가진듯 했다.
마음의 소리가 필터링도 없이 새어나오네.

"...이제 됐어요!
얼른 축제나 가요."

흥- 소리를 내며 살짝 시선을 외면한 코테가와가 나를 제치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나도 뒤따라 가면서 약간 걱정이 되어 주의를 주었다.

"저기, 유카타 차림으로는 뛰는건 위험「꺄아-!」?!"

주의를 채 끝내기도 전에 균형을 잃고 계단에서 넘어지려는 코테가와를 황급히 부축한다.
다행히 굴러떨어지기 전에 무사히 잡을수 있었음에 안도하며 코테가와의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 코테가와?"

"아...?"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당황해서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코테가와였지만 이내 안색을 고친다.

"......"

정정.
안색을 고치는게 아니다.
안색이 바뀐거다.

붉어진 표정이 매서워지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가 코테가와를 안는 포즈여서 그렇다던가 하는게 아니다.
원인은...그러니까 그거다.

유카타 옷섶 안으로 파고들어간 내 오른손.
코테가와의 왼가슴을 쥔 내 손바닥을 느끼곤 깨달았다.
...이 세상에선 유카타 안에 속옷은 안 입는게 매너군요.

"아, 아키츠군..."

워낙 엄청난 일을 당해서 그런지 말까지 더듬으면서 노려보는 코테가와가 무섭다.
하지만, 역시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손을 치우고 얌전히 심판을 받는게 그나마 구제의 여지가 있군요.
얌전히 물러나 똑바로 서자 눈앞에서 힘껏 팔을 휘두르는 코테가와가 보인다.

"파렴치한!"



"어머? 료짱 얼굴이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라는 아주머니께 대답하는 나.
팔짱을 끼곤 시선을 외면한 코테가와의 옆에서 따로 할 말을 찾지못한 채,
오랜만에 뺨에 물든 단풍을 매만지면서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료짱」... 친숙해서 좋네요 아주머니.

그때 어느새 회복한듯한 유우씨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혹시나 축제를 빌미삼아서 유이한테 허튼짓을 한다면..."

"무슨말을 하는거니 유짱?
유이의 친구를 너무 박정하게 대하지 말아줘."

도중에 아주머니가 타박하자 유우씨가 난처해하며 반박했다.

"하지만 어머니!
저녀석에 대한 소문은 모르는 녀석이 없다고요.
다른건 몰라도, 천명이 넘는 여자랑 사귀었다잖아요?
유이를 장난으로 갖고 놀려는 수작인지도 모른단 말예요!"

...그걸 믿습니까.
말이 안되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아예 면전에 대고 말하는건 고맙지만요...

방금전 일로 토라졌는지 코테가와는 나에 대한 소문을 변호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수없이 스스로 오해를 풀수 밖에 없을듯 했다.
우선 유우씨부터 설득하는게 좋을까...
유우씨에게 손을 들어 전제가 틀렸음을 말한다.

"저...따로 사귀고 있는 사이는 아닌데요."

"역시 장난인거냐?!"

...오히려 더 화를 내?
어떻게 진정시키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해봤다.

"실은 사귀고 있...「그딴 교제 허락할까보냐!」"

...대체 나보고 어떻게 반응하라고요?
원래 이렇게 다혈질인 오라버니가 아니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동생문제로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난처해하는 나를 보다가 결국은 코테가와가 끼어들었다.

"오빠. 너무 그렇게 흥분하지마.
이번에 가는 축제는 다른 친구들과도 함께 하는거라고.
그리고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은 전부는 모르지만,
적어도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보여준 태도는 성실했어.
...게다가 오빠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잖아?"

"윽..."

여럿의 여성과 교제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당하자 약간 주춤하는 유우씨를 보던 아주머니가 이야기에 쐐기를 박는다.

"자자~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고 유이랑 료짱은 이만 가보렴.
이러다가 축제에 늦을지도 몰라?"

"그러고보니...이만 가도록 하죠 아키츠군."

"으응. 안녕히 계세요 아주머니, 코테가와 오라버님."

"그래. 다음에도 놀러오도록 하렴~"

채 말을 끝내지 못한 유우씨를 뒤로하고 아주머니께 인사한뒤 재빨리 코테가와의 집을 벗어났다.



"휴우...갑갑해 죽는줄 알았어."

크게 한숨쉬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나를 보며 코테가와가 풋 하고 웃는다.

"엄살부리지 말아요.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을 오빠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야 내가 중학교 땐 유우씨도 고등학생이었을테니, 야쿠자 양아치 소문은 듣고 지냈겠지.
주로 중고생들 사이에서 떠도는 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나이 또래들의 뜬 소문은 대개는 허황된거라고?

유우씨에게 박혀있는 인상을 지우려면 좀더 함께 부대끼면서 서로를 알아가든가,
아니면 내가 지금 스타일을 포기하는수 밖엔 없을듯 하다.
물론 후자는 당분간 무리이므로 전자쪽이 빠를듯 하다. 아마도...



축제거리에 도착하자 신사 입구의 문(토리이)으로 이어지는 노점상의 행렬이 보였다.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등불이 어둑한 밤거리를 운치있게 밝히고 있었다.
혹시나 양아치 외관의 나를 신경쓰진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낮보다는 어두운 주변과 축제의 들뜬 분위기속에서 지나가는 이를 신경쓸만큼 한가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덕분에 축제의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에 덩달아 즐거워지는 기분이 들며 코테가와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코테가와, 어디를 먼저 가볼까?"

"물어봐주는 배려는 고맙지만, 그런건 남자쪽이 제안하는거에요 아키츠군."

"그, 그런가?"

여자애랑 함께 뭘 해본 경험이 있어야 말이지...
으음, 어느걸 해볼까.
고개를 들어 어둑해진 하늘을 본다.
여름이라 밤이 짧음에도 이정도 어둠이라면 저녁을 먹지 않았다면 시장할 시간이다.

"그럼 우선은 간단히 요기하면서 노점상을 둘러볼까?
축제를 기다리느라 저녁은 아직이거든."

"그러는게 좋겠네요. 저기 장어구이가 어떤가요?"

"축제에 장어구이 노점상이라...특이하네.
한번 가볼까?"

코테가와가 가리킨 방향에선 머리에 흰두건을 쓴 숏컷의 소녀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장어를 팔고 있었다.
그 옆에선 친구로 보이는 장발 소녀가 노래에 맞춰 능숙하게 불길을 조종하며 양념을 바르고 있었다.
노점상을 하는 동갑뻘 소녀를 보는건 또 처음이네...
가까이 다가가자 단발 소녀가 웃으며 반긴다.

"어서오세요 손님~"

붙임성 좋아보이는 아가씨네.
내 외모에도 신경쓰지 않고 밝게 미소 짓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며 장어구이를 주문한다.

"장어구이 2인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여기 장어구이 2개 부탁해요~"
"응. 잠시만~"

주문하고 금새 얇게 썬 파와 부추, 생강 외 재료가 얹어지고 소스를 바른 장어구이가 나왔다.
일회용기에 담아진 장어구이를 건네며 단발 소녀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애인이 참 예쁘시네요."

"애, 애인?!"

의례적으로 하는 말에 코테가와가 놀라며 반응했다.
어리둥절하는 단발 소녀로부터 장어구이를 받고 대답했다.

"아하하...고마워요.
장사 잘하세요~."

"네. 손님도 즐거운 축제 보내세요~."

장어구이 하나를 코테가와에게 건네주고 노점상을 벗어났다.
코테가와는 당황하면서도 일회용기를 받고 뒤따라 왔다.
대나무 이쑤시개로 장어를 집어들고 입가로 옮긴다.
부드럽게 녹아내릴듯 하면서도 탱탱한 느낌, 그리고 절묘한 소스의 맛이 어울어져 감탄사가 절로 났다.
노점상에서 이런 맛을 느낄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

"이거 생각 이상으로 맛있는데?...코테가와?"

동의를 구하며 뒤를 돌아보자 코테가와는 일회용기를 잡은채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장어구이에 손대지도 않고 물음에 반응이 없는것에 이상해서 다시 한번 코테가와를 불렀다.

"어이~ 코테가와?"

"...아키츠군?"

"멍하니 왜그러고 서있어?"

"그게..."

"혹시 아까 노점상에서 들은 말 때문이야?"

"네. 조금 놀라서..."

양손으로 일회용기를 든채 제자리에 서서 수긍하는 코테가와.
애인으로 오해받는건 생소한 경험이었는지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태도에 코테가와에게 말을 한다.

"너무 그렇게 신경쓸건 없어.
방금전 소녀는 손님의 기분을 띄워주기 위한 의례적인 인사를 한거잖아?
거기서 괜히 부정해도 서로 어색해 지니까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는게 좋다고."

공기(분위기)를 읽는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해서 진한 농담을 하시는 아저씨에게 걸려도 하하하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고.

코테가와는 내 말을 듣고 있더니 물었다.

"아키츠군은... 어땠나요?

"뭐가?"

"방금전 여자애의 말을 들었을 때 말이에요."

"나야 기뻤지.
그런 말을 듣는건 나로선 처음이기도 했고,
게다가 코테가와를 칭찬하는 말이었잖아?"

"...그래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코테가와는 일회용기를 열어 대나무 이쑤시개에 꽂힌 장어구이를 집어든다.
입에 장어구이를 넣고 맛을 음미하던 코테가와가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맛있지?"

끄덕-

수긍하는 코테가와를 보며 웃곤 등불을 따라 늘어선 노점상을 하나씩 구경하며 축제거리를 걸었다.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을 지나며 특이한 음식들을 보기도 하고 희귀한 구경을 하기도 했다.
돈내고 산 타코야키를 자기 것처럼 먹어치우는 오흉폭투라는 이름의 무시무시한 동아리도 보았지만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 같고 이름에 비해선 무난히 축제를 즐기는 모습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한동안 노점상들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금붕어 노점상을 지날때쯤 몸빼옷에 머리를 빡빡민 중년 아저씨가 우리들을 불러 세웠다.

"헤이~ 거기 커플!
한번 해보지 그래?"

금붕어 낚시를 가리키며 손짓하는 모습에 넉살도 좋다고 웃으며 금붕어 낚시터로 다가갔다.
코테가와도 익숙해진듯 쓴웃음을 지으며 따라와 옆에 섰다.

"오오~ 잘생각했어!
애인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라고~"

"고마워요 아저씨~.
코테가와도 한번 해볼래?"

"좋아요. 승부해보지 않을래요 아키츠군?"

축제에 와서 첫 게임이라 그런지 의욕에 넘치는 모습으로 코테가와가 승부를 제안해왔다.
이럴땐 승부를 받아 주는게 예의.

"그럴까? 아저씨 여기 두사람 부탁해요."

"그러지, 힘내보라고 둘 다!"

아저씨로부터 각자 종이 망을 받아들고 금붕어가 들어있는 항아리를 바라본다.
축제에 와서 제대로 해본 경험은 없지만 이런건 금붕어를 낚는 것보단 즐기는 걸로 충분하니까 편하게 생각하자.
가벼운 마음으로 금붕어를 향해 종이 망을 내민다.

찌익-

"...아저씨. 종이 망 하나 더!"

정정. 조금은 불타올랐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놓여진 종이 망들을 하염없이 쳐다본다.
하나같이 찢어져있는 종이망들.
...이걸로 어떻게 금붕어를 낚아올리란거지?
게임이라고 만만하게 볼게 아니군요.
결국 코테가와도 나도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패배의 쓴잔을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약간 불쌍하다는듯 바라보던 아저씨가 갑자기 생각난듯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보니...넌 낯이 익은데?
상점가에서 여동생이랑 자주 장보러 왔었지?"

"어, 그렇습니다만..."

미캉이랑 장보는걸 아는사람이 의외로 있었구나...
내쪽이 너무 튀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코테가와가 의외의 사실을 알았다는듯 물어온다.

"여동생이 있었나요 아키츠군?"

"응? 아니. 친동생은 아니고 미캉이라고... 유우키의 여동생이야.
예전에 장보기에서 내쪽이 도움을 받은 후론 항상 함께 장보기를 하고 있어."

"그래요?"

"이런, 친동생이 아니었나?
사이가 좋길래 영락없는 오누이인줄 알았지 뭐야."

사이좋게 보였다니 감사하군요 아저씨.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아저씨가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별 상관없겠지만...방금전 그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금발의 긴머리 여자애랑 함께 왔다 갔어."

"금발의 여자애...야미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미캉이라면 라라와 함께 축제에 왔을텐데...
어째서 미캉과 야미만 함께 있는거지?"

원래라면 리토랑 라라와 함께 다닐텐데 무슨 일일까?
이상하다 싶어서 아저씨에게 물어본다.

"저기, 그 둘은 어느쪽으로 갔나요?"

"저쪽. 아까부터 게임이 있는 노점상들만 돌아다니고 있던데?
저 방향으로 주욱 가면서 게임이 있는 노점상들을 찾다보면 나올거다.
그나저나 금발 여자애 말인데, 표정은 무뚝뚝해 보였는데 왠지 약간 화가 난것 같더라.
만나거든 좀 달래주도록 해~"

"고마워요 아저씨~
이만 가보자 코테가와."

"그래요."



금붕어 노점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격 노점상에서 인형들을 상대로 분투하는 야미의 모습이 보였다.
미캉은 옆에서 프랑크 소시지를 든채로 야미가 게임하는걸 구경하고 있었다.
둘에게 다가가자 나를 발견한 미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료스케 오빠도 축제에 왔었네요? 옆의 언니는?"

"안녕 미캉. 이쪽은 우리반 풍기위원인 코테가와 유이야.
코테가와는 알겠지만 이쪽이 유우키의 여동생인 유우키 미캉이고."

코테가와가 미캉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을 건넨다.

"만나서 반가워. 코테가와 유이라고 해."

"유우키 미캉이에요. 미캉으로 부르시면 되요."

무난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우리를 눈치챈 야미가 공기총을 내리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코테가와 유이. 그리고 아키츠 료스케."

"안녕 야미."

"안녕하세요 야미.
유카타가 정말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코테가와 유이."

야미가 입은 화사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유카타를 바라보던 코테가와가 내 옆구리를 툭툭 친다.

"아키츠군도 뭐라고 한마디 해봐요."

"어? 으응...정말 사랑스럽다고 생각해.
게다가 평소와 머리장식도 다른게 신선해서 정말 좋은걸?"

이국적인 외모에 새하얀 피부를 감싼 유카타는 야미의 모습을 한층 더 신비롭게 보이도록 했다.
유카타 위에 새겨진 수많은 꽃들과 원래 머리를 묶던 장식 대신 올린 꽃모양의 악세서리는 평소보다 더 정갈한 느낌을 갖게 했다.
...노출도가 훨씬 적어져서 그렇게 보이는건지도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아키츠 료스케."

답례하는 야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리자 미캉이 조용히 날 쳐다보는게 보인다.
그러고보면 자기소개를 하느라 아직 미캉의 옷차림을 칭찬하지 않았구나.
꽃잎 모양의 고기가 달린 끈으로 오비를 장식하고 둥근 꽃잎 무늬가 그려진 유카타를 입은 미캉.
잘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미캉도 정말 예쁘게 차려입었구나.
훨씬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걸?"

"고마워요 료스케 오빠."

싱긋 웃으며 미캉이 대답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나보다 하고 다행으로 생각하며 미캉에게 방금까지 궁금했던 점을 물어본다.

"그런데 미캉. 원래는 라라와 함께 있던거 아니었어? 리토는?"

"리토는 축제에 오자마자 지쳤다면서 근처 의자에서 쉬고 있을꺼에요.
그리고 라라 언니는..."

살짝 야미의 방향을 쳐다보더니 슬며시 나에게 다가와 귀에 손을 댄다.
귓가를 간질이는 숨소리에 약간 묘한 기분을 느끼며 미캉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야미가 게임에 서툴잖아요?
라라 언니가 자꾸자꾸 경품을 타는바람에 비교당한 야미가 기분이 상했어요.
그래서 야미랑 같이 왔던 언니 둘이서 라라 언니를 데리고 딴곳으로 가고,
제가 남아서 야미와 노점을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아아...그래서였군.
아무리 놀이라지만 옆의 사람과 지나치게 비교되는건 기분좋진 않겠지.
그런 의미에선 나와 코테가와는 야미와 좋은 시합이 될것 같다.

"야미. 사격 대결 하지 않을래?"

"당신과 말입니까?"

"나말고도 코테가와랑 미캉과도 함께 하는게 어떨까?
어차피 나도 축제를 제대로 즐겨보는건 이번이 처음이고.
방금까진 금붕어 낚시에서 참패를 하고 와서 이번엔 꼭 설욕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좋습니다."

"사격은 금붕어 낚시보단 낫겠죠. 이번에야 말로 맞춰보이겠어요."

"에? 저도 하는거에요?"

수긍하는 야미와 의욕만만한 나와 코테가와.
미캉은 의외의 참전에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기껏 축제에 와서 놀이한번 안하고 가긴 그렇잖아 미캉?"

"으응...료스케 오빠 말이 맞네요."

고개를 끄덕이고 미캉도 사격 시합에 합류하기로 했다.
내가 맨먼저 공기총을 들고서 셋을 보며 말한다.

"그럼 나먼저 시작한다. 꼴찌하는 사람이 간식 사주는거다?"

약간 놀란듯한 셋의 표정이 보이지만 대답은 듣지않아!
승부 시작!



...한개도 못맞췄다.
완전히 쭈그리고 그자리에 앉아버린 나.

공기총에 코르크 마개.
이런 조합을 생각해낸 녀석은 틀림없이 악마다.
이걸로 대체 어떻게 상품을 맞추란거야?
공기총 명중률은 정말이지 형편없었다.
코르크는 바람만 살짝 불어도 휘어지고.
게다가 어쩌다 한번 상품에 코르크가 명중했을 땐,
툭...소리와 함께 코르크가 힘없이 떨어졌다.
대책이 없네요 정말...

"기운내요 아키츠군.
친구랑 동생에게 사준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생각하라고요."

"코테가와...난 소지금 걱정으로 이러는게 아냐.
아무리 놀이라지만 여기까지오면 내 자존심 문제라고."

"그, 그런가요?"

의기소침해진 나를 코테가와가 위로하는 사이 야미가 두번째로 나선다.
첫번째인 나의 패배를 위안으로 삼았는지 방금전보다 훨씬 기분이 풀린듯한 얼굴로 상품들을 조준했다.

아까까지 고군분투하던 것의 결실인지 결국 빗자루를 든 마녀 인형 하나를 떨어뜨리는데 성공하곤 야미가 미소지었다.
그 기쁨 이해하지...
나도 느껴보고 싶었지만.
그나저나 방금 인형, 검은 모자에 흑백 의상을 보고 매지컬 쿄코라고 생각했는데 금발인걸 보니 다른 건가보다.
예쁘게 디폴메된 마녀인형을 소중히 안으며 야미는 물러났다.

세번째 차례는 코테가와.
동지의식을 느끼는 코테가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코테가와도 나른한 표정의 고양이 인형을 맞춰서 떨어뜨렸다.
배반했군? 야미와 같이 나를 배반했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캉의 차례.
의외로 빠르게 돌아온 순서에 아직까지 다 먹지 못한 프랑크 소시지를 손에 들고 우물쭈물 하는 미캉.
대신 들고 있어줄까 싶어서 쭈그린 자세에서 일어나려니까 미캉은 그대로 소시지를 입에 문채로 공기총을 잡았다.
상품들을 바라보며 조준하는 미캉을 보면서 약간 고개가 갸웃했다.

특별히 이상한건 없는데...왠지 모를 묘한 느낌이 드는데 뭘까?
뭔가 두근두근 하면서도 이유를 몰라서 고민하고 있으려니 이윽고 미캉이 사격을 마치고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방금전 물고있던 프랑크 소시지를 마저 먹기 시작하자
아까까지 느껴지던 이상한 두근거림 또한 사라졌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쪽보단 시합 결과가 좀더 궁금했기에 나는 생각하는걸 그만두었다.

결과는 미캉이 곰인형, 과자, 스누○ 인형을 맞춰서 3개로 1등.
코테가와와 야미가 각각 인형 1개씩을 맞춰서 공동 2등.
그리고 내가 0개로 4등. 꼴찌였다.

한숨을 나왔지만, 기지개를 편뒤 곧 기운을 차리곤 세명에게 물었다.

"그럼 각자 뭘 먹고 싶어?"

"글쎄요...프랑크 소시지는 방금 먹었고.
료스케 오빠가 추천하는건 있나요?"

"아까 축제에 오면서 봤는데, 신사 경계의 토리이(신사 입구의 문)에서 파는 장어구이는 어때?
먹어보니까 정말 맛있더라고."

"그럼 전 그걸로 할께요."

미캉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머지 둘을 바라보며 물었다.

"코테가와랑 야미는?"

"전 방금 장어구이를 먹었으니까 지금은 사양할께요 아키츠군.
나중에 축제를 좀더 즐긴 뒤에 고르도록 하죠."

"저도 이쪽의 고리 던지기를 한뒤에 선택 하겠습니다."

"그럼 함께 고리던지기를 할까요 야미?"

"좋습니다. 코테가와 유이."

코테가와랑 야미는 아무래도 지금은 식욕이 없는 듯 했다.
둘이서 고리 던지기를 할동안 미캉을 데리고 다녀오는게 나을듯 해서
미캉으로 부터 방금전 경품 3개를 받아 코테가와랑 야미에게 건네준다.

"그럼, 미캉이랑 장어구이 노점상에 다녀올테니 잠시만 기다려.
그동안 미캉이 딴 경품들 보관 부탁할께."

"알았어요."

코테가와랑 야미에게 미캉의 경품을 맡기곤 미캉과 함께 장어구이 노점상으로 향했다.



신사입구로 향하던 중 부채가게 앞에서 잠시 미캉이 멈춰섰다.

"왜그래 미캉?"

"조금 더워서 부채를 하나 사는게 어떨까 해서요."

찬찬히 부채들을 살피던 미캉은 이윽고 꽃 세송이와 꽃잎 3장이 그려진 둥근 부채를 골랐다.
지갑을 꺼내며 가격을 물어보려던 미캉을 말렸다.

"부채는 내가 계산할께. 물론 장어구이도 함께."

"에? 그럴것까진 없어요 료스케 오빠!"

사양하는 미캉에게 그다지 문제될건 없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괜찮잖아? 원래 장어구이는 코테가와랑도 같이 먹은거라서,
안그래도 한번은 사주고 싶었던거니까.
방금전 시합 벌칙은 부채를 사는걸로 하는게 나로선 마음이 찜찜하지 않을것 같은데?"

"...료스케 오빤, 손해볼 타입이에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풋...뭐에요 그게?"

실없는 소리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미캉은 부채를 받아들곤 고맙다고 인사해왔다.
몇번의 트러블로 미캉에게 빚진듯한 심정이 이걸로 나았으면 좋겠건만...
그런 꿍꿍이를 내심 품고 있으려니 미캉이 오른손에 든 부채를 천천히 부쳤다.

"후우...밤이지만 역시 여름이라 그런지 덥네요."

"그러네......?"

동의하며 왼쪽에 선 미캉을 바라보다 순간적으로 심장에 격통이 느껴졌다.
쉽게 말해서 하트에 게○볼그.

왼손으로 유카타 상의를 살짝 들추며 오른손에 든 부채를 팔락거리는 미캉.
쇄골 아래에 맺힌 땀방울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리며 유카타 틈새로 사라져갔다.
벌어진 유카타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가 뇌골수를 직격하는 충격을 주었다.

"되도록이면 시원하게 입고 나온다고 했는데 이렇다니...언젠가 한번 수영장에라도 가보고 싶네요."

"그, 그래..."

되도록 시원하게 입어?
설마 너도...

땀을 식히려고 부채를 부치는 오른손에 힘을 주다가 왼쪽손에도 힘이 들어갔나보다.
약간 헤쳐진 옷섶사이로 애, 앵두가...!

순간적으로 코로 피가 쏠리는걸 느끼며 황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다행히 정말로 피가 나오진 않았다.

"정말 덥네요..."

그, 그만해! 날 엿보기 변태로 만들 셈이냐 미캉?!
필사적으로 코에 몰리는 피를 억제하는것도 버거울 지경인데 하반신에서마저 반역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고?
제발 좀 봐주라...

아까전 사격 노점상에서 느꼈던 두근거림의 실체를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이상한 분위기는 소시지를 입에 물고 있던 미캉이 풍기던 묘한 색기였다는걸...

발걸음에 어색함이 느껴질만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기 직전
미캉은 유카타 옷섶을 잡고있던 왼손을 내렸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수 있었다.



혼자만의 허무한 투쟁을 끝내고 기운 빠진 상태로 장어구이점에 도착하자 방금전과 마찬가지로 단발소녀가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두분~
...어라?"

왠지 묘한 표정을 짓는 단발소녀의 모습에 갸우뚱하면서도 피곤했기에 신경쓰지 않고 주문을 한다.

"장어구이 하나 부탁해요."

"아...네. 알겠습니다.
여기 장어구이 하나~"
"네. 장어구이 하나 갑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장어구이를 일회용기에 담아 단발 소녀가 건넸다.
장어구이를 받아들고 미캉이 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

"고마워요 료스케 오빠. 방금전 부채도, 장어구이도."

"천만에 미캉."

그때 대화하는 우리를 지켜보던 단발소녀가 주저하면서 물었다.

"저기...실례지만 여동생인가요?"

"아뇨. 친구의 여동생입니다만...?"

"아, 그러신가요? 축제 즐겁게 보내세요~"

"고마워요 예쁜 언니~"

"아하하..."



왠지 맥이 빠져 보이는 단발소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노점상을 떠났다.

장어구이는 미캉에게 대호평이었다.
저 노점상엔 무언가 특별한 비법이 있는듯 했다.
고리 던지기 상점으로 돌아가보니 이제 막 야미가 놀이를 끝내고
코테가와의 순서가 돌아온 상태였다.
미캉이 들고 있는 일회용기를 보며 야미가 물었다.

"유우키 미캉. 그건?"

"아까 료스케 오빠가 말한곳에서 산 장어구이.
하나 남았는데 먹어볼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대나무 이쑤시개로 장어구이를 집어 입안에 넣은 야미는 눈이 살짝 커졌다.

"...맛있군요."

"그렇지?
야미도 이걸로 간식을 하는게 어떨까?"

"코테가와 유이가 고리 던지기를 하는 동안 다녀온다면 괜찮겠네요."

"에...그럼 지금 바로 가는건가?"

이럴꺼면 넉넉하게 두개를 사오는게 나았을껄 그랬나?
미캉과 야미가 자리를 교대하고 다시한번 신사 입구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야미가 멈추며 가면가게를 보며 물었다.

"여러가지 가면이 있군요.
우주인의 얼굴을 본뜬 것인가요?"

"아니. 그냥 애니나 만화, 특촬물에서 나온 캐릭터들을 본떠 만든 가면들이야.
혹시 마음에 드는 가면이 있어?"

"...이 고양이 가면이..."

"응, 그럼 이걸로 주세요."

미캉때와 마찬가지로 잠시간의 실랑이를 벌인뒤 고양이 가면을 사서 야미에게 건네주었다.

그나저나...고양이 귀처럼도 보이는 악세서리.
고양이 같은 성격.
좋아하는 동물 고양이.
게다가 지금의 고양이 가면.
...사랑스럽구먼.
귀여운건 정의.



고양이 가면을 비스듬히 쓴 야미와 함께 세번째로 장어구이점에 도착하자 단발소녀가 애매하게 웃으면서 맞이한다.

"아...어서오세요.
그런데..."

야미와 나를 번갈아보면서 시시각각 얼굴이 묘하게 변하는 단발소녀의 상태를 걱정하며 재차 주문을 한다.

"장어구이 하나 부탁해요.
...그나저나, 어디 아픈가요?"

"아, 아뇨... 여기 장어구이 하나~"
"장어구이 하나 갑니다~
...에? 아까전 그 손님이잖아요?"

"아하하~ 그게 어쩌다보니 자주 만나네요..."

계속해서 같은 곳에 오는것도 민망한지라 볼을 긁적이고 있으려니
장어구이를 일회용기에 담아 단발 소녀가 야미에게 건넸다.

"가면과 장어구이 고맙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응? 아아...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네 야미.
그럼 장사 잘하세요~"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갑자기 단발소녀가 나를 부르며 멈춰세웠다.

"손님?"

"응?"

고개를 돌려보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의 단발소녀가 보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만히 서 있으려니 주저하던 단발소녀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자애를 울리면 안돼요?"

"아니, 그거 오해..."

"안돼요?"

"네..."

이해한다는듯이 상냥하지만 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건 소녀에게 얌전히 수긍하고 물러났다.
고작 몇시간만에 나에 대한 인상이 커플에서 철없는 바람둥이 수준으로 내려가다니...
다음번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남자(리토)와도 함께 가서 오해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야미와 함께 고리던지기 노점상으로 돌아갔다.



고리던지기가 끝나고 야미도 왠만한 놀이는 즐겨본터라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축제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한쪽에서는 무대를 만들어서 빙고대회나 장기자랑을 하고 있기에 구경하면서 웃기도 했다.
축제의상으로 보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아가씨가 텅빈 양산안에 손을 넣어 고양이를 꺼내는 묘기를 보이자 관객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방금전까지 장어구이를 팔던 단발 소녀와 친구로 보이는 소녀도 장기자랑에 참가해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를 북돋웠다.
맵시있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아기자기한 인형극을 선보일땐 아이들과 여성들이 굉장한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코테가와랑 미캉, 야미도 귀여운 인형들이 움직이는 모습에 흠뻑 빠져든 듯 보였다.

예상 이상으로 화려한 장기자랑에 한동안 시간가는줄 모르고 있다가 시장기가 느껴져 근처 노점상에서 먹을걸 찾아보았다.
문어빵(타코야키)과 떡꼬치(미타라시 당고)를 사먹으며 거리를 걷다보니 어느새 노점상의 줄이 끝나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런...축제장소 구석까지 와버렸네?"

"축제에서 즐길건 이제 거의 다 보았죠?"

"......"

"야미, 뭘보고 있어?"

미캉의 말에 야미의 시선이 향한 쪽을 바라보니 벤치가 놓여진 공터에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사이좋게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러브러브공원같은 분위기네...
알면서도 굳이 말해본다.

"여긴...커플들의 집합장소구나.
역시 축제라서 그런가?"

동의를 구하듯 셋을 바라보자 저마다 제각각의 반응을 보인다.
야미는 지긋이 커플들을 바라보며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미캉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코테가와는 당황해서 시선을 둘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코테가와는 연상인데 가장 늦됨이군요.
진한 키스까지 하는 커플도 있으니 저런거엔 내성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는데...

어찌됐건 조금은 긴장을 풀어주는게 좋을까 싶어서 코테가와를 부른다.

"코테가와?"

"왜, 왜요 아키츠군?"

"저사람들이 신경쓰여?"

"그, 그런거에 흥미없어욧-!"

흥미 있네요.
더듬지만 않았으면 설득력 있었을겁니다.
야미와 미캉도 흥미있게 보고 있으니 딴곳으로 이동하기도 그렇고,
우선은 지나치게 저사람들을 의식하는 코테가와를 달랜다.

"너무 그렇게 정색하지 마.
서로 좋아하니까 자연스레 저렇게 되는거라고."

"자연스러운건가요...?"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뭔가요?"

"초심자의 한계입니다."

그러고보면 설득하고 있는 나도 늦됨이라고.
우리 넷중에 연애해본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코테가와는 기가 막히다는듯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키츠군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내가 바보같아요."

"저기, 그래도 긴장은 풀렸지?"

"뭐...어느정도는요."

좋은 평가는 못받았지만 목적을 달성한것에 만족하며 야미와 미캉에게 시선을 향하니 야미가 나에게 물어본다.

"아키츠 료스케. 당신은 사랑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응?"

"연애라는 감정...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알고 싶습니다.
뭔가...매우 소중한 감정이란 생각이 들어서..."

대답을 기다리는 야미를 보다가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혹시 누구 대신 대답해줄 사람 없어?
코테가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는다.
미캉쪽으로 쳐다보니 부채로 얼굴을 슬쩍 가리고 있다.
귀엽긴 한데 지금 필요한건 도움이라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입니까?

별수없이 그냥 내 생각을 말한다.

"나는...서로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게 연애라고 생각해.
그 사람을 바라보는것만으로 행복하고, 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울고 웃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게 사랑 아닐까?"

굳이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우정이나 가족애일수도 있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도 저렇게도 정의될 말을 해버렸네...

"의미가 된다...입니까?"

나로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듣고선 곰곰히 생각에 빠진 야미를 보니 약간 걱정이 되었다.
기억하기론 연애소설 쪽이야 야미가 찾아서 볼테니 난 다른 방면에서 조언을 해보자.
연애 쪽 조언은 못해주더라도 때로는 의외의 방향에서 출구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음, 생텍쥐페리의「어린왕자」에서 여우와의 대화를 읽어본다면 혹시나 도움이 될지도 몰라.
네가 바라는 연애와 맞진 않더라도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는 것에 대해선 알 수 있을테니까."

"고맙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별말을..."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야미와의 대화를 듣던 미캉이 문득 생각난듯 말했다.

"아참! 잠시 후에 불꽃놀이가 벌어지잖아요?"

"어머? 그러고보니..."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행사입니까?"

이제야 기억났다는듯 반응하는 우리를 미캉이 이끌었다.

"이럴게 아니라 불꽃놀이 구경하기 좋은 곳으로 가요.
거리는 인파 때문에 구경하기도 불편하니까요."



미캉을 따라 거리를 걸은 뒤 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축제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옥상에 도착하자 미캉이 입을 열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에요.
불꽃놀이 볼때 좋은 곳이죠."

"헤에...이런 곳을 알고 있었구나 미캉?"

"옛날에 리토와 둘이서 왔을때 찾아낸 곳이죠."

유이가 축제거리를 내려다보며 신기해 하는것에 대답한 미캉은 걸어올라오느라 더웠는지 다시금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더운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은근슬쩍 왼손으로 옷섶 끌어당기는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쇄골 뿐만 아니라 땀방울이 맺힌 가슴 한가운데가 죄다 드러나 보인다고?

요염한 자태속에서 느껴지는 배덕감이 마음을 쿡쿡 찔러댔기에 시선을 돌려 축제 거리를 바라보았다.
신사 입구에서부터 우리가 지나왔던 곳을 차례로 훑어보던중 무심코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라?"

"왜그래요 료스케 오빠?"

의아한듯한 내 반응에 미캉이 궁금한듯 물어오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말했다.

"아니, 유우키랑 사이렌지가 보여서."

"어디인가요?"

"그게...아까 지나왔던 연인들의 공터인데?"

"에?"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미캉이 바라보자
코테가와와 야미도 덩달아 연인들의 공터쪽을 쳐다본다.

노점상과 공터가 만나는 중간에 리토와 하루나가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무언가 리토가 말하는걸 하루나가 듣는 모습이었다.
리토가 주먹을 꽉 쥐고 있는걸 보면 무언가 심각한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설마 고백인가?

"유우키 리토와 사이렌지 하루나군요.
마주보고 가만히 서있는데 무얼 하는 걸까요?"

"리토...설마?"

"설마...아, 아니. 라라가 있는데?"

야미와 미캉, 코테가와는 둘을 보며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펴는것 같았다.
야미와 코테가와도 왠지 모르게 흥미진진한 눈빛을 보내는걸로 보아 연애쪽에 아예 무지하거나 흥미가 없는건 아닌것 같았다.
어떻게 될까 나도 궁금해서 바라보려는데 순간 하늘높이 솟아오른 불빛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타타탁-
퍼엉-

본격적으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으며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쁘다..."
"화려하네요."
"보기 좋죠?"
"멋지네. 그나저나..."

불꽃이 수놓아진 하늘을 향하던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리토의 모습이 보였다.
고백 실패냐...

"...어째 잘 안된것 같지?"

"거절당한 걸까요?"

"그렇다기보단...아마도 불꽃 소리에 고백이 묻힌게 아닐까...?"

"한심해 리토..."

"사랑에는 상황도 따라줘야 하는군요..."

어째 불꽃놀이보다 연애사정에 관심이 더 큰 것 같다?
여하튼 화려하게 피던 불꽃도 어느새 하나 둘 짐으로써 축제의 끝을 알렸다.

건물을 내려가 리토가 있던 공터쪽으로 가니 라라와 리사, 미오가 온것이 보였다.
사람 몸만큼 커다란 상품더미를 든 라라를 보니 할말이 없었다.
명중률과 균형이 엉망인 총이랑 고리들로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까지 딸 수 있는거냐...
잠시 고민했지만 깊게 생각하면 패배이므로 신경을 끊었다.



축제가 파하고 야미는 리사와 미오, 하루나와 함께 돌아갔고, 미캉은 리토와 라라랑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이만 돌아가려고 코테가와를 불렀다.

"우리도 이만 돌아가자 코테가와.
집까지 바래다 줄께."

"아. 고마워요 아키츠군."

코테가와와 함께 인파속을 헤치며 신사 입구로 향하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축제 때 돌아다니면서 손이라도 잡아볼껄 그랬나?
고백에 실패한 리토를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군요.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코테가와의 발걸음에 맞춰 걷고 있으려니
코테가와가 잠시 멈춰서며 무릎을 굽혀 발을 주무른다.
다리가 불편한가 싶어 허리를 숙여 물어본다.

"괜찮아 코테가와?"

"네, 괜찮아요.
단지 게다(유카타 신발)가 조금 불편해서 그런거에요."

하긴...목재로 된 신발로 계속 걸었으니 아프기도 할듯했다.
축제 여기저기를 돌면서 혹사한 발을 매만지는 코테가와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럼 조금 쉬었다가 돌아가도록 할까?
일부러 서둘러 돌아갈 필요도 없고 말야."

몇분 정도 쉬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싶어서
앉은자세로 코테가와를 마주보며 동의를 구하자
잠시 침묵하던 코테가와가 말했다.

"아키츠군..."

"응."

"방금전 내기...기억하고 있겠죠?"

"응? 아아. 기억하고 말고."

사격게임을 하면서 했던 내기 같았다.
미캉에겐 부채를, 야미에겐 고양이 가면을 사줬었지.
축제에 몰입하다보니 코테가와에게만 아무것도 해준게 없구나.
하지만 지금은 노점상도 다 철수했는데...
어떡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려니 코테가와가 내 귓가에 얼굴을 대었다.

"...대신이에요. 집까지 업어다 주세요."

「내기니까...」

속삭이는듯한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둑한 밤길을 조용히 감싸는 달빛속을 걸으며 코테가와의 집으로 향했다.
등에 업힌 코테가와는 방금전부터 가만히 팔을 내 목에 두른채 침묵하고 있었다.
신사 근처 숲에서 매미소리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느껴지는 적막감은 의외로 나쁘진 않았다.

아무말 없이 걸음을 옮기길 몇분...
귓가에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이번 축제는...정말로 즐거웠어요.
지인들과 이렇게 축제를 즐기는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거든요."

"나도 정말 즐거웠어.
경품을 따지 못한건 유감이었지만
축제에 와서 이렇게 기분 좋았던 적은 처음이야."

친구들과 함께 오는 축제는 몇년만인지 모르겠다.
근심없이 웃으며 축제를 맞이하는 것도...
싱글싱글 거리고 있으려니 코테가와가 약간 주저하듯 내게 물었다.

"아키츠군은...지금 행복한가요?"

"물론이지! 굳이 오늘 축제뿐만이 아니고,
수학여행이라든가 크리스마스 파티라든가...
학교 행사나 명절이 이처럼 즐거웠던적은 처음이야.
요즘들어선 좋은 일만 생기는것 같아서 오히려 걱정일 지경이라고?"

중학교때 깡패들과 사이좋게 주먹다짐을 하던 기억따윈 추억조차 아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 코테가와나 미캉, 야미,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선배를 알게된 것.
친하게 된 동네 꼬맹이들과 상점가의 어른들.
고등학교부터 다가오기 시작한 따스한 만남은 정말이지 잊지못할 추억일꺼다.

"풋...긍정적이네요 아키츠군은."

"엥?"

왠지 모르게 킥킥대는 코테가와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 말이 그렇게 이상했던가?
뭔가 잘못 말한게 있었나 고민하려니 코테가와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보니 노점상 아저씨와 알고 있는 사이 같던데 무슨일이 있었나요?"

"그게 말이지..."



고교입학 첫날에 상점가에서 겪었던 일을 코테가와에게 풀어나갔다.
기막혀하면서도 재미있게 듣는 코테가와에게 흥이 나서는
상점가 어른들과 알게된 사건 이외에도 동네 꼬마들과 친해진 이야기라든가
만화가인 유우키네 아버지께 사인북을 받은 이야기 등을 계속 이어갔다.



재미있던 경험을 이야기 하며 웃고 떠들다보니 어느새인가 코테가와의 집앞에 도착했다.

"...벌써 도착했네?"

"고마워요 아키츠군. 이제 내려주세요."

"으응..."

자리에 주저앉고 조심스레 코테가와를 내린다.
내려선 코테가와가 물러나는걸 확인하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내 볼에 무엇인가 부드러운 물체가 닿은게 느껴졌다.
시선을 돌려보니 축제에서 코테가와가 딴 고양이 인형이 나른한 표정으로 내 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코테가와가 고양이 인형을 내 볼에 누르고 있는거였지만.

아리송한 얼굴로 바라보자 코테가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업어준 답례예요."

"어...?"

"그럼, 잘자요 아키츠군."

코테가와가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한손엔 고양이 인형을 들고서...

문이 닫히는걸 바라보면서 고양이 인형이 닿았던 볼을 살짝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답례? 인형을 준다는 얘기 아니었어?

...뭐, 상관없나.

모처럼의 여름 축제를 여자아이들과 보낼수 있었기에 기분은 최고였다.
유카타 차림이 잘어울렸던 셋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휘파람을 불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사이난 고교의 스핑크스 문제.

문 : 아침엔 초등학생, 점심엔 중학생, 저녁엔 고등학생을 먹는것은?
답 : 아키츠 료스케.

......죽자.



====================================

각각의 유카타 차림

코테가와

미캉1

미캉2

야미



늦었습니다...-_-;
추석때 끙끙대서 생각해봤지만 소득은 없었고,
역시 직접 적으면서 하는게 진도는 나가는군요;
(노트에 필기하건, 텍스트를 두드리건)

축제때 소재로 생각해둔 만남들은 많았는데 중구난방이 될까 걱정되어 이하생략(...)
원작에서 하와이안 셔츠의 교장은 내보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지만
뒤통수가 나왔던 저스틴은 노점상 대결을 생각해보다가 파기.
남자들끼리의 이벤트는 보는 사람은 물론이고 쓰는 저도 재미가 없습니다-_-;

사키들은 원작에선 없었고
축제에 등장했던 인물들 전부와 만나는건 욕심이 과하다고 생각해서 팀을 적당히 나눴습니다.

료스케-코테가와-미캉-야미
라라-리사-미오(경품 게임에 빠짐)
리토-하루나(커플 분위기)

원래라면 리토가 의욕없이 벤치에만 앉아 있을경우, 하루나를 못 만날 가능성도 높습니다만...
화장실을 다녀오던중 만났다던가, 이동중의 하루나를 우연히 보았다던가...운이 좋다고 해야겠죠^^;
(원작에선 코테가와랑 대화하려고 벤치에서 일어나 있을때 미코시(가마행렬) 구경 인파에 휩쓸려서 하루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나저나 1학년때 그냥 넘어갔던 문화제,
2학년땐 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혹여나 연극제 같은걸 한다면 주어진 배역은 후크선장 정도겠지만...
한 15~20편 정도 더 진행된 뒤에 플롯이 잘 짜진다면 가을 문화제로 나올지도요.

...한참 남았네...-_-;


뭐, 개인적인 희망사항은 만화속에서 본편 내용과 상관없이 서비스 컷으로 주어지는 페이지를
가끔 이야기에 등장시켜 보는거죠=ㅅ=a
(이야기 전개상 활용 가능하다면 말이죠.)
근데 기억나는 서비스 컷은 죄다 미캉뿐이네요(...)



p.s.각자가 서로를 대하는 어조에 관해서.

(수정사항)미캉은 하루나의 경우에 이름으로 부르더군요.
(도중에 사이렌지 언니라고 하기도 하던데...번역본이었기에 그런걸까요?-_-;)
다른 이들에게 존칭을 붙이던에 아직은 미정.
미캉이 코테가와를 부를때는 코테가와씨나 코테가와 언니 둘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코테가와는 미캉에겐 평대.
원작에선 코테가와가 야미를 대할때도 평대에 야미짱이라고 부릅니다만...(107화쯤)
만나는 방식이 좀 달랐으니 어쩌겠습니까-_-a;

몇화쯤 더 지나고 나면 사이가 가까워져서 편하게 대하게 되었다 식으로 가지 않을까 합니다.
(한 대여섯편 안에 그렇게 되겠죠.)


Posted by 루트(根)
,

「...담배가 흡연자와 비흡연자에게 미치는 피해는 이처럼 심각하며...」



"금연하세요 아키츠군."

"네?"



수업 중 흡연의 폐해에 대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흘려 넘기자 쉬는 시간에 코테가와가 한 말이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코테가와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아키츠군, 지금 담배 가지고 있죠?"

"응? ...어, 그렇긴 한데..."

상의 겉옷 안쪽 포켓에 들어 있는 담뱃갑을 손가락으로 톡 쳐본다.
내 행동을 보고 대충 짐작을 했는지 코테가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본다.

"아까 수업에서 흡연의 위험성에 대해서 들었겠죠?
지금까진 아키츠군이 학교에서 담배를 피운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지적하지 않았었지만, 역시 담배는 몸에 해로워요.
그러니까, 금연하세요 아키츠군."

"에..."

자연스레 곤란한 얼굴이 나와버린다.
애초에 흡연 같은 걸 하지도 않으니 금연 운운은 문제가 되진 않는데
몸을 보호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조금 전 대화를 들었는지 클래스메이트들이 하나둘씩 우리 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기 봐, 아키츠군이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어.」
「코테가와씨가 금연하라고 하던데?」
「그렇다곤 해도 수업이 끝나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말할 줄이야...」
「아키츠군은 어떻게 대응할까?」

...그걸 몰라서 문제입니다.
이 요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순순히 안 피겠다고 해도 다음번에 담뱃갑을 들고 있는게 걸리면 수습할 수 없을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담배를 안 피는건 정말이지만 담뱃갑을 가진채로 얘기하면 설득력이 없는데...
...그래도 솔직히 흡연은 안한다고 말해볼까?

"저기...코테가와?"

"뭐죠?"

"나, 담배는 가지고 있지만 피지는 않아."

"......"

입을 다물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코테가와.
클래스메이트들조차 못들을걸 들었다는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들었니?」
「담배를 가지고 있지만 흡연가가 아니래?」
「믿겨지니?」
「아니, 전혀.」
「너 오타쿠 부정할 때 했던 말과 비슷한데?」
「...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오타쿠는 아니라고!!」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이 또 있네요.」

괜히 말했다...
오히려 의심만 더 북돋울 뿐이었구나.
코테가와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아키츠군은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거군요."

"음...그렇지 뭐."

"그럼, 담뱃갑을 꺼내 보겠어요?"

"...응?"

"담뱃갑이 개봉되지 않은 새것이라면,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아키츠군의 말을 믿도록 하겠어요."

"......"

식은땀이 등뒤를 타고 흘러내린다.
담배를 피지 않는다곤 하지만 하루에 한번은 의식에 가깝게 담배를 입에 물곤 한다고.
불은 안붙이지만...
게다가 지금 포켓에 들어있는 건 지난주에 산 담뱃갑.
이미 개봉되어 몇개비를 소모한 상황인데, 지금 보이면 빼도박도 못하고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건 시간문제다.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가 버럭 화를 내며 내 상의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계속 딴청을 피운다면 직접 확인하겠어요!"

"엑?! 꺄악~!"

설마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나올줄은 몰랐는지라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러버렸다.
어울리지 않게 고음으로 내지른 비명에 소리친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포켓 상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던 코테가와는 비명을 듣자 그 상태로 굳어버렸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코테가와는 얼굴을 새빨갛게 하면서 외쳤다.

"무, 무슨 반응이 그래요?!"

아니, 갑작스레 여성이 가슴께로 손을 대어오면 누구나 놀란다고 생각합니다만...
방금전 비명은 확실히 뭔가 어긋나 있었지만.
불량의 가슴에 손을 얹은상태로 얼굴을 마주한 풍기위원의 모습은 클래스메이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나보다.

「까야~코테가와씨 대담해~」
「저렇게 거리낌없이 손을 집어넣을 줄이야...」
「과연 코테가와씨.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일을 태연히 해주는군! 동경해!」
「거기가 저려왔다!」
「「「변태!」」」

주변의 소리를 들었는지 코테가와는 안그래도 붉은 얼굴이 더 달아오르면서 황급히 손을 빼냈다.
그 와중에서도 포켓에서 담뱃갑을 꺼낸건 정말로 대단한 프로정신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드러나게된 이미 개봉된 상태의 담뱃갑.

설사 코테가와가 원래 담배 개비수를 모를지라도, 담뱃갑 안에 빈공간이 명백히 보이는 상황에서 할 생각이란 뻔했다.
담뱃갑을 보던 코테가와가 눈매를 날카롭게 하곤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피고 있잖아요!"

"자, 잠깐. 오해다. 침착하게 이야기하면 안다."

"웃기지 말아요!"

격앙해서 소리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깨갱-」소리가 날듯 목이 한껏 움츠러 들었다.
지켜보던 클래스메이트들 중 리토도 질린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이, 아키츠...여기까지 와서 변명하는건 무리라고...?"

"남자답게 인정하라구~"
"맞아맞아~"

리사와 미오까지?
...하긴, 나였더라도 이 상황에서 믿어주진 않았을꺼다.
그냥 얌전히 인정하자.
어차피 흡연 소문이야 예전부터 있었던거고, 이제와서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테니.

"더 이상 할말이 있나요 아키츠군?"

"...없습니다."

기가 죽어버린 나를 바라보던 코테가와는 푹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키츠군을 탓하는건 아니에요.
클래스메이트들의 건강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학교 내에서 흡연에 주의하고 있는것도 알고 있고요.
다만, 지금 이걸 압수하는건 아키츠군의 건강을 걱정하기 때문이란걸 알아주었으면 해요."

"어, 으응...고마워."

걱정하는 시선에 깃든 상냥함에 황망히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었다.

그래...코테가와의 걱정과 위로도 받았겠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차피 수염이랑 다르게 담뱃갑은 바로 보충이 가능하잖아?
그냥 담배 없이 생활해보고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다시 사면 되지 뭐.

내가 얌전히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코테가와도 안심한듯 미소지었다.
리토와 하루나, 라라, 리사, 미오도 어깨를 토닥이며 저마다 격려의 말을 한마디씩 했다.

"이번 기회에 금연해보라구."

"역시 건강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

"몸에 안좋다니까 끊게되어서 정말 잘됐네~"

"금연은 정말 힘들다던데 힘내 아키츠군~"

"코테가와씨에게 멋진 모습 보여주라고~"

"어째서 저인가요?!
뭐...자신의 몸이니까 좀 더 소중히 하도록 해요 아키츠군."

"...고마워 모두들."

나... 담배는 안피지만.
그래도 모두들 고마워~.

졸지에 흡연자로 인식된 어색함과 친구들의 격려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고
표현하기 곤란한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귀가를 하면서 반나절 동안 아무일도 없었다는데 우선 안심했다.
초등학교 6학년때 하루에 2~3번 꼴로 위험한 경험을 했던것과 달리,
양아치 스타일을 고수한 뒤로는 1년에 손에 꼽힐 정도만 위험한 상황이 있었다.
물론 위험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튕겨나가는 운전사 분들이지만.
애꿎은 아저씨들 몸걱정, 보험걱정, 직장걱정을 대신 해주느라 열심히 자동차를 피하던 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중학교 1,2,3학년을 거치면서 악명이 쌓일수록 사고 발생률은 점차적으로 줄어들었다.
(깡패들과의 패싸움도 사고라면 사고지만 제외하기로 한다. 그걸 치면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사고 발생률이 잦다고...)
고등학교 들어선 사고의 위험성도 많이 낮춰 졌는지 공사장 철근 낙하라든가 교통사고 같은 사고는 한번도 겪은적이 없었다.

며칠동안 상태를 보고 담배를 들고 다니는 것도 그만둘까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으려니
도로에 강아지 한마리가 갑자기 뛰어드는게 보였다.
나비에 정신이 팔린것인지 다가오는 자동차도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이런...!

놀라는 주위 사람들속에서 뛰쳐 나가며 도로 한가운데 선 강아지에게 달려갔다.
갑작스레 잡아온 내손에 놀란 강아지가 짖는게 들리고 바로 옆까지 다가온 자동차가 보인다.

으라차!

잽싸게 도약하며 차들을 넘어 건너편 인도로 뛰어내린다.
돌발 상황에 브레이크를 밟은 방금전 자동차 운전자와 혼란스러워진 도로에 대처하기 곤란한 나머지
조금 멀리까지 도망친 뒤 강아지를 내려다 보았는데...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쉴새없이 손가락을 깨무는 멍멍이.

...저스틴을 깨물던 그 멍멍이인가?
역시 난 이곳 개들과는 안 맞아...
한숨을 쉬며 멍멍이를 길에 내려놓고 떠났다.



그나저나 강아지가 무사한건 다행인데...
괜히 도로에서 '자동차'와 충돌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 신경쓰인다.
아니, 내쪽에서 먼저 자동차 앞으로 뛰어들었으니 너무 과민한 반응인가?
하지만...으응...

대답이 안나오는 상황에서 끙끙대며 걷고 있으려니 건물 사이의 골목길에서 무언가 불온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그러니까 우린 흥미 없다니까?」

「그런말해봤자. 함께 놀아보자구~」
「좋잖아. 그러지 말고 우리랑 함께 놀자구.」

겁먹은듯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와 휘파람을 불면서 설득하는 남자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대착오적인 헌팅남들이구먼...
여자애들이 무서워하고 있는데 설득이 통할것 같냐?
난처한 상황을 도와주면서 방금전 고민도 해결할 겸 해서 골목에 들어서려 하자 또 다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더이상 억지 부리면 가만있지 않겠어?」

「에~ 가만있지 않으면 어쩔건데?」
「오오~ 무서워! 겁주지 말아줘~」
「너희 언니라도 데려 오려구?」

「아, 아키츠군에게 일러줄꺼야!」

...엥?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나의 이름에 발걸음을 뚝 멈춰버렸다.
어째서 갑자기 내 이름이 나와?
...혹시 내가 아는 여자애인가?
당황해서 잠시 멈칫한 사이에 놀란듯한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키츠라고?」
「설마...그 아키츠 료스케?」

「그, 그래! 우리에게 손이라도 하나 까딱했다간 아키츠군이 가만있지 않을꺼라고!」

「너희들...혹시 아키츠의 여자친구냐?」

「?! 마...맞아!」
「그, 그러니까 더이상 귀찮게 굴지 말라고!」

「어이, 이거 정말일까?」
「그, 글쎄? 그 녀석 애인이란 애들이 워낙 많아서...」
「거짓말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손대려던 녀석들은 아키츠 놈에게 한명도 남김없이 박살났다고.」
「아키츠 녀석...! 설마 이 동네 여자아이들은 전부 다 먹어 치운건가!」

아냐... 난 무죄라고.
더이상 놔뒀다간 정말로 별의별 소리를 지껄일것만 같았기에 이만 이야기를 멈추기로 했다.
골목길로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를 들은 녀석들과 소녀들이 나를 바라보고 놀란다.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어?"

"엑?!"
"아...아키츠군?"

놀란듯 하면서도 나를 알아보는 소녀들의 목소리에 시선을 향해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같은반 클래스메이트이며 하루나와 같이 테니스부에 속해있는 두명의 소녀들.
한명은 단발 머리로 좌우로 내린 머리칼에 머리핀을 2개씩 꽂고 있는 소녀.
다른 한명은 투 사이드 업으로 한 장발을 리본으로 장식한 안경을 쓴 소녀.
둘이서 함께 다니는 모습이 자주 보이는 아이들인데 정작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조용히 상황을 넘기려고 아는체를 한다.

"오늘은 테니스 부활동은 없었나보네?
아무튼 이만 가자. 사이렌지도 기다린다고."

"에...? 으, 으응."
"하루나를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니까..."

내쪽으로 다가오는 두 여학생들에게 길을 비켜주면서 남자들이 신음소리를 낸다.

"...정말이었잖아?"
"그러니까, 반반하다 싶은 여자애들은 다 건드렸다고..."
"크..."

안 건드렸어.
100명과 잤다는 소문 때문에 별 희안한 얘길 다 듣게 되는군.
내심 한숨을 쉬며 여자애들이 내 등뒤로 물러서자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눈이 마주친 남자들이 움찔하며 변명을 한다.

"미, 미안. 모르고 한일이야."
"우린 그냥 얘기나 좀 하려고..."

"아아, 그건 됐고."

도중에 말을 끊는다.
영양가 없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무난히 해결됐는데 괜히 주먹다짐을 해서 여학생들을 겁먹게 할 수도 없고.
그저 지금 내가 필요한건 하나다.

"그건 그렇고...너희들, 담배 있냐?"

「「「에?」」」

"없어?"

"아, 아니! 여기..."

어리둥절하면서도 주춤주춤 담뱃갑을 내민 남자로부터 담배 한개비를 집어들고 돌려준다.

"땡큐~.
그리고 다음번엔 이런 일로 만나진 않길 바래."

당황한 남자들에게 주의를 주고 여학생들을 데리고 골목을 빠져 나왔다.



여자애들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듯 내 뒤를 따라 조용히 걸어 왔다.
어느정도 골목과 거리가 멀리 떨어졌다 싶어서 잠시 멈춰 뒤로 돌았다.
약간 겁먹은 듯한 시선의 여학생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방금전 녀석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겠지.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해."

"저, 저기..."

"응?"

주저하면서도 무언가 말하려는 단발 소녀에게 시선을 보내자
무서웠는지 살짝 시선을 피하면서 인사해왔다.

"고, 고마워..."

"방금전엔 고마웠어..."

단발 소녀에 이어 장발 소녀도 감사의 인사를 해오자 살짝 놀랐다.
저번에 귀신 소동 때문에 눈만 마주치면 피하려던 여학생들이었기에
이렇게 답례까지 들을 줄은 생각못했다.
그래서인지 목덜미를 쓰다듬은채로 약간 더듬으며 대답했다.

"에, 그러니까...천만에요? 아하하..."

이상한 표정으로 웃으며 답하는 내 모습이 웃겼는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두명.
이윽고 단발 소녀가 궁금한듯 물었다.

"그런데, 우리가 테니스부인거 알고 있었구나?"

"응? 어...사이렌지와 테니스 코트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봤었거든."

"아! 그래서..."

이제 알았다는듯 시원한 표정을 짓는 단발 소녀를 보며 얘기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사이렌지가 기다린다는 건 거짓말이었다고?"

"알고 있어 그정도는~"

"하루나의 이야기가 나왔을땐 놀랐지만..."

두 소녀의 대답을 듣고 괜한 노파심이었다고 생각하곤 말했다.
혹시나 이런 일이 또 있다면 곤란하니...

"그리고 만약에 방금전 같은 상황이 또 생기면
아까처럼 내 이름을 대도록 해.
어차피 이 거리 불량배들은 한번씩 아픈꼴을 당해본 탓에
함부로 건들진 못할꺼라고."

예전처럼 불량서클 규모로 불량배들이 모여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지금처럼 2~3명 이하로 몰려다니는 불량배들이 그렇게 간큰 행동을 하리라곤 볼 수 없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두명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어쩔줄 몰라하는 듯한 모습으로 둘이서 눈빛을 주고 받더니 조심스레 나에게 물어온다.

"저, 저기 아키츠군?"

"왜그래?"

"설마...골목길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 들었어?"

"응? ...응 뭐, 난 귀가 밝은 편이라서..."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는 나에게 창피한듯 얼굴이 빨개지는 두명.
그 「여자친구」발언이 신경쓰였나.
하지만 괜찮다고.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여자친구란건 그때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거짓말이었잖아?
그런 거짓말이야 들으면 기쁘긴 하지만,
따로 이상한 오해는 안하니까 걱정말라고."

"으응, 맞아."

"그래도 미안, 아키츠군."

"괜찮다니까~
어차피 이런 상황은 익숙하니까."

"...익숙해?"

"그러니까 중학교때 말이지..."





중학교 3학년, 반년동안 미쳐 날뛰던 시기가 끝나고 불량서클들도 몽땅 쪼개졌을 즈음이었을꺼다.
현재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슬슬 띄어가기 시작하던 러브러브공원을 걷던중 멀리서 헌팅남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해하는 5명의 여학생들이 보였다.

도와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데 그중에 당돌해보이는 여학생 한명이 「우린 아키츠군의 애인이야!」라고 외치는걸 듣고 순간 다리가 꼬일뻔 했다.
아마도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말한 여자애의 임기응변 같았다.
100명의 여자와 잤다는 아키츠 료스케에 대한 악명은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물러설것이라 생각했던 헌팅남들은 오히려 야유를 해대었다.

「이봐이봐...맨날 쌈박질만 하고 다니는 그녀석이 애인같은게 있을리가 없잖아?」
「그녀석은 척봐도 주먹을 치켜들며 「히로인은 권이다!」라고 말할 녀석이라고!」
「거짓말은 상황을 봐가며 말해야 한다고~」

맞는 말이지만 왠지 화가 난다 이놈들아...
머리가 약간은 돌아가는 녀석들이었는지, 최근 반년동안 하루도 빠지지않고 싸움에 미쳐 지냈던 내가 애인과 만날 시간이 없다는걸 눈치챌 만큼은 똑똑했나보다.
예상치못한 대응에 당돌했던 여학생도 당황한듯한 반응을 보이며 주춤했고,
그 모습이 오히려 헌팅남들을 자극했는지 더더욱 다가오며 강압적으로 헌팅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면서 여학생들을 불렀다.

"여어~ 여기 있었구나!
공원이 넓어서 찾는데 헤메었다고~"

"에?"

놀라며 바라보는 5명의 여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준후 헌팅남들을 바라본다.
당사자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헌팅남들이 날보며 저마다 떠들어 댔다.

"거, 거짓말?"
"저 특징적인 수염이랑 금발올백...진짜 아키츠 료스케잖아?!"

놀라든 말든 적당히 헌팅남들에게 대꾸한다.

"어쨌든, 얘들이랑 모처럼 만났는데 귀찮게 하지 말고 그냥 가라."

그런데 의외로 헌팅남들치곤 꽤나 강단이 있었나보다.
한명이 약간 흥분해선 삿대질을 해대며 나에게 반박해온것이다.

"우, 웃기지마!
거짓말을 하려면 똑바로 해야지!
여자애들 어리둥절해 하는게 다 보인다고!"

엥?

고개를 돌려보니 당황한듯 표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여자애들이 보인다.
아놔...분위기 파악 좀 빨리 해서 장단을 맞춰줬으면 좋았는데.
난처한듯한 심정이 내 얼굴에 나타났는지 의기양양해하며 헌팅남이 외쳤다.

"역시 애인이니 뭐니 하는건 거짓말이지?
사실은 저 애들 이름도 모르는 사이잖아?"

...뭘믿고 그렇게 기세등등한지 모르겠네.
어차피 여기서 니놈들을 패버리면 애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잖아?
하지만, 반년간 질릴정도로 깡패들을 패면서 지냈는데 이제와서 헌팅남들에게까지 일일이 주먹다짐을 하는건 되도록이면 사양하고 싶다.

얼굴을 태연한 표정으로 바꾸며 여자애들에게 묻는다.

"미안한데, 너희들 성이 어떻게 돼?"

"에?...저, 저기...타와라야 입니다."
"키도."
"나, 나가야마..."
"사가노야."
"...유우키라고 해."

보이쉬한 단발 여자애, 방금전 당돌했던 염색한 단발 소녀, 장발 생머리의 소녀 둘, 양갈래 땋은 머리에 안경을 쓴 소녀가 순서대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헌팅남들에게 말한다.

"자, 이제 성은 알았다. 이걸로 됐지?"

"자, 장난치는거냐?!
이름도 모르는 여자친구가 어딨어!"

"여기 있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한두명도 아니고 내가 그애들 이름을 어떻게 알아!"


어차피 오늘 만나고 잊을꺼 알아서 뭐하게?
게다가 늬들 앞에서 얘내들 이름까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 없다.
계속 딴죽을 걸어오는 녀석에게 짜증이나서 고함을 쳐버렸더니
왠지 헌팅남들이 경악하고 있다.

"뭐...설마 진짜로 100명의 애인이 있는거냐?!"
"애인이 너무 많아서 이름 조차 기억하지 못할정도라더니..."
"수염주제에수염주제에수염주제에..."

뭔가 심각하게 잘못 이해를 했는지 굉장한 시선을 보내오던 헌팅남들이 사라지고
약간 겁먹은듯 하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해오는 여자애들을 적당히 다독이고 공원밖까지 데려다줬다.





"...아무튼, 그때 말고도 몇번 비슷한 상황을 겪어서 말이지.
헌팅 당하는 여자애들에게 아는척하며 한명 두명 빼내오는걸 몇번 하다보니까
(말이 안 통하는 경우는 육체언어로 설득했다.)
어느새인가 동네의 여자란 여자는 다 건드린 녀석으로 헌팅남들한테 찍혔다고...
그땐 100명의 여자설도 슬슬 수그러들 참이었는데 내가 왜그랬는지..."

"헤에..."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재밌는 표정을 하는 둘에게 투덜거리며 시선을 돌리니 바로 옆에 쓰레기통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잘됐다 싶어 포켓안에 손을 넣어 방금전 받은 담배 한개비를 꺼낸다.

"아키츠군 그건?"

"방금전 헌팅하던 녀석에게 얻은 담배."

"하지만...코테가와씨에게 금연한다고..."

"아, 이건 피려는게 아니야...봐봐, 라이터도 없잖아?"

괜히 꺼냈다 싶었지만 다시 넣기도 뭣하고, 오해도 풀겸 직접 보이기로 했다.
적당히 담배를 입에 물고 흔들흔들 핸드폰 시계를 보며 있길 1분.
입에서 담배를 빼내 쓰레기통에 버린다.
고개를 돌리니 두사람이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키츠군...방금 그 행동은?"

"담배 피는 시늉."

"왜 그런 걸 하는거야?"

"담배는 피워야 하는데 건강은 소중하니까. 이건 그 절충안."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고들만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런 시늉조차 하지도 않았겠지만.
어쨌든, 매일 담배 한개비로 일상의 평온을 보장받을수 있다면 싸게 치는거다.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장발 소녀가 묻는다.

"...왜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음...불량해야 하니까?"

담배피는 양아치가 이계로 간단 얘긴 못들었다고 했고.
...믿고 있으니까!
예외 상황까지 가정하긴 싫어서 괜시리 불안해지는 마음을 추스르려니 단발과 장발 소녀가 킥킥 웃는다.

"...아키츠군의 사고는 이상하네."

"그, 그런가?"

"그랬다면 흡연하지 않는다고 코테가와씨에게 좀더 설명했다면 좋았잖아."

"개봉된 담뱃갑을 가진채로 설득하라고?"

"괜찮지 않았을까? 그게말야..."

단발 여학생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옷가에 얼굴을 내민다.
갑작스런 태도에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서려니
「흐음-」하는 숨을 들이쉬는 소리와 함께 여자애가 물러나 웃으며 말한다.

"아키츠군 옷엔 담배 냄새가 나지 않잖아?
1년이나 같이 알고 지내온 코테가와씨라면 아마 믿어줄거라고."

"......"

"아키츠군?"

노, 놀랐다.
얼굴 바로 아래에 머리를 들이밀던 방금전 상황에 잠시 당황했었다.
뜨끈해진 볼을 살짝 매만지려니 단발 여자애도 방금 전 상황을 이해했는지
약간 볼이 빨개진것이 보였다.
...의외로 순진하구나? 렌에게 가슴을 쥐였을땐 웃어넘기더니.
뭐, 표정을 추스리지 못한 내가 할말은 아닌가...
나를 보던 안경 쓴 장발 소녀가 장난기가 돈듯 말을 걸었다.

"아키츠군은... 의외로 숙맥이구나?"

"놀리지 말아줘..."

놀림을 받아 붉어질대로 붉어진 얼굴을 왼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테니스부 아가씨들이라 그런지 활력이 넘치는 느낌이었다.
별로 접할 기회가 없어서 몰랐었지만...



안면이 없던 여자애들과의 첫 대화는 의외로 편한 느낌이었다.
2-A는 역시나 굉장하구나~란 어긋난 감상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아이들과 알게된 것에 감개무량했다.
대화를 나누며 걷다 이윽고 갈림길이 나오자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방향도 다르고, 곧 여름철이라 여름용 새 옷도 장만해야 해서 옷가게를 들러야 했으니까.
웃으며 둘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그럼 앞으론 그런 헌팅남들에게 걸리지 않게 조심하고.
잘가 둘다~."

"...잠깐만 아키츠군."

멈칫.

손을 들고 뒤로 돌아서려는데 조용히 부르는 소리에 행동을 제지당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둘을 바라보자 단발 소녀가 눈매를 살짝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게 보였다.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나에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설마하지만 아키츠군...우리 이름을 모르는거야?"

"...죄송합니다. 모르겠어요."

애써 대화를 이름을 안불러도 되는 쪽으로 끌고 갔건마아아아안...?!
1-A의 인원이 거의 다 2-A로 왔기에 호네카와 담임 선생님께서도 자기소개를 안시켰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물론 기억 속을 뒤져봐도 이 아가씨들의 이름은 모릅니다.
묘하게 자주 등장하는 아가씨들인건 알지만서도...

평소에 여학생들 대화를 들었다면 알수도 있었겠지만,
여학생들 대화를 훔쳐들을 필요성도 못느꼈다고요.
...바로 어제까지만.

그래도 상대는 내 이름을 아는데 나는 상대를 모른다는 상황에선 사과하는게 제일이다.
(내 악평때문에 유명해서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접어두자.)
한심하게 사죄하는 나에게 두 여학생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키츠군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런걸로 화내진 않아.
다만 지금부터 기억해주면 좋아."

단발 소녀(좌우로 내린 머리칼에 머리핀을 2개씩 꽂고 있는 소녀)와
장발 소녀(투 사이드 업으로 한 장발을 리본으로 장식한 안경을 쓴 소녀)가 차례로 자기 소개를 해왔다.

"내 이름은 아라이 사야카. 알고 있겠지만 테니스 부에 들어있어."

"그리고 난 시라유리 코요미. 다음번에 이야기 할땐 이름을 기억하는지 물어볼꺼야?"

농담처럼 말하는 코요미에게 방심하지 않고 대답한다.

"물론이지. 아라이와 시라유리지?
절대로 잊지 않을테니까 너무 걱정말라고."

"...하긴, 100명의 여자들과 교제한 아키츠군이 여자애 이름을 잊을리 없지."

"아키츠군이 이름을 모르는 여자애는 매력이 없다는 소문도 있다고 하니까 말이지~."

"어이, 아까도 말했지만 그거 헛소문...!"

내가 이름을 아는 여자애는 알고 지내는 몇명뿐이라고?
매력도로 이름을 알고 있다면 이 동네 여학생들 이름은 거의 다 외웠겠다...
「젊은 여성 = 미인」의 공식이 99% 이상의 확률로 성립하는 사이난에서 그랬다간 이름 외우다가 내 머리가 앓는다고?
내 반응에 사야카와 코요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하하 미안미안~ 그렇게 놀라면서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말야."

"아키츠군은 생각했던것 보다 재밌는 사람이구나?"

"재, 재밌습니까..."

반응이 곤란한 나를 보던 두명은 웃으며 손을 흔들곤 귀가했다.
활발해서 좋구나...
좀 난처했지만, 적어도 리사랑 미오처럼 에로하진 않으니 괜찮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뒤, 나도 이만 여름 옷을 사기 위해 상점가로 향했다.
그런데 남성용품점에서 괜찮은 옷을 몇벌 골라 나오려니 건너편 길가에서 방금전 헌팅남 3명이 여자애들에게 어슬렁 거리며 다가가는게 보였다.
...세상엔 말만으론 안되는 놈들도 있군요.
후우우...한숨을 내쉬며 신호등 쪽으로 걸어가 불이 바뀌길 기다렸다.
방금전 말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녀석들에게 징계를 결심하고 있을때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호~ 귀여운 아이들이 잔뜩!」
「이봐 이봐 너희들 우리랑 놀지 않을래?」

...틀에 박힌 레퍼토리는 도무지 변하질 않는구나...응? 저 아이들은?
리토, 하루나, 라라, 리사, 미오, 그리고 평소의 흑색 전투복이 아닌 화사한 소녀옷을 입은 야미의 모습이 보인다.
야미의 옷을 맞춰주러 나온건가?
괜히 아이들 기분 상하기 전에 후딱 끝내 버리자.
...그런데 이놈의 신호등은 왜이리 불이 안바뀌는거야?
확 뛰어넘어버릴까?

리사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이 시대착오적인 헌팅남들은.」

「좋잖아 놀자구.」
「오오 이 아이도 쬐그매서 귀여운데!」

야미를 말하는거면 넌 큰일났다.
현재 폐업중이지만 우주제일의 살인청부업자라고.
리토도 동감이었는지 당황해서 야미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만둬!」

「아? 뭐야 넌.」

「나쁜말은 안할께!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만둬!」

오호 친절한 리토.
하지만 인상을 찡그리는 양아치는 생명을 구해주려는 리토의 마음씨를 알지 못했나보다.
리토의 멱살을 움켜쥐며 목소리를 깔며 협박을 하는 폼이 꽤나 익숙해 보였다.

「호오~ 한번 해보자는 거냐?」

「아니...그게 아니라...!」

...아, 신호가 바뀌었다.
횡단보도 위를 걷는 속도를 빨리 한다.
당황하는 하루나와, 화난 얼굴의 라라가 보인다.

「유우키군!」

「이봐~! 리토를 놔 줘~!!」

「...프린세스. 기다려 주세요.」

드디어 야미가 침묵을 끊고 나섰다.
그런데 저 차림으로 행동하다간 잘못하면 옷 찢어진다고?

「응?」

리토를 잡고 있던 양아치가 야미를 쳐다보자
야미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사람은...저의 타겟. 손을 대는 것은 용서 못합니다.」

「헤...?」

「하아!? 무슨 소리 하는거야!?」

「푸하하~! 손을 대면 어떻게 되는데? 꼬맹아!!」

"이렇게 된다 이자식들아."

「「「에?」」」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린 녀석들을 쳐다보며 웃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웃는건 웃는게 아니야...
이마에 핏대가 선채로 억지로 웃음을 짓는다.
한번은 봐주지만,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건 용서가 안된다고?

"내가 방금전에 이런 일로 만나지 말자고 그랬지?"

「「「히익?!」」」

"어라 아키츠군?"
"료스케잖아?"

"여어~ 모미오카, 라라."

갑작스런 조우에 놀란듯 말하는 둘에게 손을 흔들어 가볍게 인사한다.
어느새 리토의 멱살을 잡고있던 손을 놓은 양아치가 경악한듯 소리친다.

"제, 젠장! 또 아는 여자야?!"
"정말로 이 동네 여자들과 전부 사귄건가!"
"네녀석! 대체 지금까지 몇명의 여자를 먹은거냐!"

누군가의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에 무심코 생각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넌 네가 먹은 빵의 개수를 기억하나?"

「「「이...이녀석...」」」

...아, 실수.
머리 한구석에 박힌 이상한 지식들 때문에 헛소리가 나와버렸다.
불량배들이 질린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고,
지켜보던 리토나 하루나, 리사, 미오, 야미도 바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키츠군..."

"설마 정말로?"

"...저질스럽습니다."

아냐. 이건 패러디 재료라고.
우선 이 상황부터 해결한뒤 오해를 풀도록 해야겠다.
방금전까지 멋대로 헌팅하던 세명을 바라본다.

"그럼, 이제 내 말을 무시한 대가를 치뤄볼까..."

「「「자...잠깐?!」」」

퍽- 퍽- 퍽- !
풀썩.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간단하게 세명을 바닥에 재웠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설마 내가 무식하게 패기야 하겠냐.

널부러진 녀석들을 옆으로 치우고 리토 일행을 돌아본다.
야미는 조금 불만인 표정이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그야 그랬겠지만, 그 옷차림으로는 잘못하면 옷이 찢어진다고?"

"...그렇습니까?"

"그렇다니까. 특히 변화능력같은걸 사용했다간 어쩔지 모른다고...그렇지 모미오카?"

"응,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야미야미의 평소의 옷관 달리 이 옷은 그렇게 튼튼하다고는 볼 수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산 옷을 입을땐 조심하라고~"

"네에...충고 고맙습니다."

방금전 야미 대신 나섰던것에 대한 이유도 해명할 수 있어서 야미도 기분이 풀린듯 했다.
표정을 푼 야미에게 안도하며 야미의 모습을 자세히 바라본다.

별무늬 구슬이 2개씩 달린 끈으로 양머리를 투사이드 업하고,
다양한 크기의 둥근 악세사리로 엮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가슴에 영문과 함께 두송이 꽃이 위아래로 하나씩 그려진 반팔 티셔츠.
주름 치마위에 걸친 삼선 벨트.
샌들을 신은 맨발목엔 예쁜 리본이 달려있었다.

조금 오래 시선이 갔는지 야미가 나를 바라보는게 느껴져 솔직하게 칭찬해본다.

"이번에 새로 고른 옷이야?
평소 옷도 귀엽지만 이것도 정말 예쁘잖아?"

"...감사합니다 아키츠 료스케."

"그리고..."

시선을 돌려 다른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까 말한 「빵의 개수」운운한거 말인데...
그거 만화책에서 나온 대사야. 오해하진 마?"

말실수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 대사가 쓰였던 만화책의 전개를 알려준다.
흡혈귀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의 피를 빨고,
희생자의 수를 묻는 물음에 방금전과 같은 대사를 했었다고.

듣고있는 친구들의 반응을 신경쓸새 없이 열심히 해명하면서
방금전 헤어진 사야카가 해준 말을 떠올린다.

- 1년이나 같이 알고 지내온 코테가와씨라면 아마 믿어줄거라고.

설사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온 사이라면 나를 믿어줄거라고.

...알게된지 반년도 안 지났는데 믿어줄까?

"...그러니까 방금전 대사는 만화가 떠올라 무심코 내뱉은거고,
따로 여자애들을 건드렸거나 한게 아냐."

뭔가 두서없이 말을 꺼내고 끝내버린것 같은 느낌에
안절부절 못하면서 친구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데
금새 라라가 웃으며 말해왔다.

"응~ 믿어!
왜냐하면 료스케는 친구잖아?"

"라...라라!"

이 아저씬 감동했어요.(동갑이지만)
항상 호기심이 넘쳐 말썽을 일으키지만 지금은 그 순수함이 너무나 눈부십니다.
하지만, 보이스 피싱같은건 부디 조심해줘 라라.

이윽고 리사와 미오도 웃으며 동의해왔다.

"그러고 보면 적어도 고교에 와선 여자애들을 건드리는 낌새같은건 보이지도 않았잖아?"

"그래그래~ 아키츠군은 의외로 강경파일지도~"

리토와 하루나도 리사와 미오의 말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소문은 소문일 뿐이잖아?
내가 들었던 아키츠의 이야기와 실제 아키츠의 행동도 많이 달랐고."

"역시, 소문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건 아니니까...
아키츠군이 그렇게 경박하게 보이진 않았어..."

"...당신이 코테가와 유이에게 쩔쩔매는걸 보면 확실히 소문은 사실이 아닌듯 하군요.
저도 믿도록 하겠습니다."

"오오...그야말로 감동의 절정!"

인생, 착하게 살면 복이 오는군요.
고교시절에 와서 드디어 꽃피게 된 양호한 인간관계에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무언가 이 기쁨을 표현하고 싶은데 뭐 좋은게 없을까 하다가,
내가 들고 있는 여름 옷이 든 종이 가방에 생각이 미쳤다.
번뜩이는 생각에 당장 야미를 향해 기운차게 말했다.

"좋아, 기분이다!
야미! 내친김에 네 유카타 사줄께.
친구들이랑 함께 사러 가자!"

"유카타, 입니까?"

"곧 있으면 여름 축제가 시작되니까, 그때 야미 너도 유카타를 입고 함께 축제를 즐기자고~"

"아! 그러고 보면 이제 곧 축제기간이잖아?"

리사도 이제 생각난듯 날짜를 집어보더니 소리쳤다.
그리곤 야미의 손을 이끌고 다른 상점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럼 이왕이면 야미야미의 유카타도 사러가볼까?
유카타를 예쁜걸로 제대로 사시려면 역시 지금부터 초여름 전에 사는게 낫기도 하고~"

"돈은 아키츠군이 낸다고 했으니까 신경쓰지 말고 예쁜걸로 고르자~"

리사와 미오가 희희낙락하며 야미를 데려가고,
그 뒤를 나와 리토, 라라, 하루나가 따라갔다.



유카타를 파는 특설매장을 둘러보며
리토가 약간 걱정스러운듯 나를 보며 속삭였다.

"아, 아키츠. 괜찮아? 그렇게 돈을 써도?"

"괜찮아. 야미에겐 예전에 미안한 일도 있고,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으니까."

불량배 녀석들과 두번이나 얽힌건 귀찮은 일이었지만,
새로운 여자애들을 두명씩이나 알게 되었고
친구들이 나를 믿어준다는 경험도 할 수 있었잖아?

"그리고...야미가 지구에서 좀더 많은 즐거움을 느낄수 있으면 했으니까.
이런걸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거잖아?"

"아키츠..."

"그리고 방금전 타킷이니 표적이니 하던 표현은 좀 과격했지만,
유우키 널 대하는 야미의 태도도 그 나름대로의 접하는 방식이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아줘."

"으...노력해볼께."

약간 기운 빠진듯한 리토의 반응을 보며 라라가 웃으며 다가온다.

"아하하~ 리토랑 료스케는 사이가 좋구나~
그럼 나도 유카타 골라볼까?
하루나가 옷 고르는거 좀 도와줄래?"

"에? 내가?
으응...그래 라라."

그리곤 라라와 하루나도 더불어 유카타를 고르러 매장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미적 센스없는 우리 둘은 그냥 짐꾼이나 하는게 좋으려나...?



한동안의 시착시간이 지나고 야미는 검은색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진 유카타를 골랐고,
라라는 오비(허리 부분을 감싸는 띠)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유카타를 골랐다.
들어간 돈이야 1~2만엔 안팎으로 약간 높은 액이었지만, 평소에 따로 지출하는 돈도 없었고,
앞으로 계속 입을 옷인데 이정도면 괜찮지 뭘.

이후, 곱게 포장된 유카타를 들고 감사의 인사를 하는 야미의 얼굴을 봤을땐 쌤쌤은 커녕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희미하지만 행복함과 쑥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은 정말이지 귀여웠다고.
축제에 대해 모르는 라라와 야미에게 약간의 황당무계한 과장을 섞어 재밌게 말하는 리사와 미오.
아무것도 모른채 흥미진진하게 듣는 두사람에게 당황하며, 뒤에서 리사와 미오를 말리는 하루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도 정말 평화로운 하루라며 웃어버렸다.





다음날 학교에서 사야카와 코요미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코테가와가 나에게 흡연여부를 다시 물어왔다.
불량배 답게 행동하기 위해서란 내 답변을 어이없어 하긴 했지만 내가 의외로 건강에 신경쓰고 있다는 점에 안심한듯 했다.



며칠뒤, 중학교때 이야기를 전해들은 리사가 헌팅남에게 내 이름을 들먹였나보다.
학교에 와서 장난스레 전하는 리사의 말을 듣곤
혹시나 아키츠 료스케 애인 100명 루머가 애인 200명이 되는건 아닌가 걱정하자 옆에 있던 미오가 단호히 부정해주었다.
안심하는 나를 바라보며 미오가 웃으며 알려줬다.
'단위'가 바뀌었다고.

아키츠 료스케와 100다스의 애인들.

몰라 그거 무서워...
하루에 한명꼴로 사귀어도 3년은 걸리겠다?!
그거냐? 「먹은 빵」때문이냐?

좌절하는 내 등을 코테가와가 토닥여 주었다.
클래스 메이트들도 소문의 원인을 들었는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쳐다보았다.
리사에게 얘기를 해줬던 사야카와 코요미도 미안한 얼굴로 위로해오는 모습에
그래도 인복은 있다고 위안을 삼으며 겨우 기운을 차렸다.



그일이 있고 며칠 후,
헌팅남에게 얽히던 사이난 고교 여학생들이 「도와줘 아키츠군~」하는 소리를 들었다.
얼떨떨해 하면서도 구해주긴 했는데
내가 무슨 도라○몽인줄 아나보다.
킥킥대면서 고맙다며 단팥빵을 사주는걸 받고선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

바로 여름 축제편으로 넘어갈까 했는데 도중에 떠올라서 쓴 화.
야미의 유카타 고르는 이야기를 만들면, 첫 축제때부터 야미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도 되니까요.

원래는 하루코 선생님도 등장할 예정이었지만 이야기 흐름이 매끄럽지 않게 되므로 삭제되었습니다.
발렌타인 데이 편에서 시간&장소 전환 때마다 느꼈던 어색한 글 흐름을 다시 겪긴 싫어서...-_-;
(하루코 선생님 이야기를 쓰고 싶었건만...OTL;)
회상씬에 잠시 나올 예정이었던 하루나의 언니 아키호씨(현재 22세) 이야기도 생략.

당연하지만 회상씬에서의 소녀들은 더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까메오 등장이었고.

아, 그리고 위에서 나온 아라이 사야카와 시라유리 코요미 말인데.
이 소녀들입니다.
(단발소녀 : 아라이 사야카, 안경장발소녀 : 시라유리 코요미)

원작에서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위키에는 이런 호칭만 나옵니다.

단발 : 주물러지는 여자애 揉まれ子(rou ma re ko)
안경 : 벗겨지는 여자애 脫がし子(tuo ka shi ko)

다크니스 연재후 설정집에 이름이 추가되었습니다.

단발 소녀는 아라이 사야카.
안경 장발 소녀는 시라유리 코요미.

p.s. 우리말배움터 사이트에서 맞춤법 검사를 하다가 이름이랑 몇몇 용어 수정요구가 너무 많아서 일단 그대로 올립니다.
추가적인 오타는 이후 수정하기로 하겠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

12명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쫓는다.

「여왕」은 「호위」에게 횃불을 넘기고,
「호위」는 「시종」에게 횃불을 넘기고,
「시종」은 메아리에게 횃불을 넘긴다.

     어둠이 찾아오고,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잉태되지 않은 자」가 「꼬리 달린 자」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꼬리 달린 자」는 바다에 빠지고 「잉태되지 않은 자」는 파도에 삼켜진다.

「눈물 흘리는 자」가 「쌍둥이」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쌍둥이」가 메아리에 떨어진다.

「동류가 아닌 자」가 「그림자」에게 덤벼든다.

     「그림자」가 메아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눈물 흘리는 자」가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진다.

「부정하는 자」가 메아리를 부정한다.

     「눈물 흘리는 자」가 춤추고, 「부정하는 자」는 「눈물 흘리는 자」를 부정한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를 찾는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에 손짓한다.

「잊혀진 자」가 되돌아온다.

     더이상 목소리도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다.





쉬는 시간이 되어 조용히 수업 내용을 숙지하려고 책을 훑던중,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에 하루나와 라라, 리사, 미오가 서있었고
허리에 교복 겉옷을 동여맨 스타일의 리사가 최근 떠도는 소문에 대해 즐거운 듯 이야기 하고 있었다.

"저기저기 들었어? 최근 소문의 유령 이야기!"

"에...? 유령!?"

유령 이야기가 나오자 하루나가 움찔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보면 하루나는 유령 같은거에 약했지?
유령이란 단어 하나에도 저렇게 겁먹는 태도는 확실히 리토 취향의 얌전하고 가련한 모습이긴 하지만...
패닉 상태의 하루나는 그야말로 무쌍난무라서, 솔직히 유령이 더 걱정될 따름이다.

무서워하는 하루나와는 반대로 라라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리사와 미오에게 물어온다.

"뭐야 뭐야? 유령이라면 귀신?"

"뭐, 비슷한거지."

"구교사 있잖아?
최근 거기에서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그때 책상에 엎드려있던 리토가 피식거리며 이야기에 끼어든다.

"그냥 소문일 뿐이잖아? 없다구 유령따위."

소문을 부정하며 김새는 소리를 하는 리토에게 리사와 미오가 발끈한듯 약간 눈을 치켜뜨며 대꾸한다.

"진짜야! 수상한 소리가 들려온다든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나가~]라고 말하는 걸 들은 사람도 있대!"

도깨비불이 주위에 뜰 듯한 분위기로 유령 흉내를 내며 양손을 슬쩍 드는 미오의 모습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십대 소녀들의 에너지는 정말로 재밌는 방법으로 뿜어져 나오는구나.

"거기다, 저번에 아키츠군이 1학년생의 생령을 불러내는거 유우키군도 봤잖아?"

...그때 그 안경 쓴 1학년생 말인가.
이름도 기억안나는 그 녀석을 혼내준 뒤로 사령술사(네크로맨서)따위의 이상한 칭호가 생겼었지만.
(생령을 불렀으니 생령술사 아닌가 하는 지적은 받지 않겠다. 생령술사 같은 직업은 몰라.)

그 때의 일은 나에게도 그 녀석에게도 잊고 싶은 기억일 따름이지만,
본인 있는데서 저런 사건들을 태연히 얘기하는걸 보면 악의는 없겠지.
음, 없을꺼다...

"그, 그건...생령이랑 유령이랑은 달라!
애초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남아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예상치 못한 반박에 리토는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주장을 관철했다.
미오는 방금전의 유령같은 분위기를 풀고 안경을 고쳐쓰며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상한건 그것 뿐만이 아니야.
소문이 신경쓰여 구교사 근처로 갔던 학생 한명이
구교사 근처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팻말을 봤다는거야.
호기심에 팻말을 바라보던 학생은 섬뜩함을 느꼈데.
팻말에 적힌 의미불명의 글귀들에 말야."

의미불명의 글귀들?
학교내에 유령에 대한 소문이 꽤나 퍼진지라 주변에서 듣고있던 반아이들도 호기심에 미오를 바라본다.
글귀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리사가 문득 떠오른듯 물었다.

"그러고보니 다른반의 친구도 그 글을 봤다던데 뭐라더라...?
무슨 예언처럼 보였다더라고."

"그럴줄 알고 예의 그 예언이란 걸 적어뒀지~"

리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미오가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낸다.

"역시 미오! 그래서? 어떤 내용이야?"

"잠시만 기다려봐, 그러니까, 음흠..."

잠시 목을 가다듬던 미오는 꺼낸 종이를 차분히 읽어내린다.



"12명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쫓는다.

「여왕」은 「호위」에게 횃불을 넘기고,
「호위」는 「시종」에게 횃불을 넘기고,
「시종」은 메아리에게 횃불을 넘긴다.

     어둠이 찾아오고,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잉태되지 않은 자」가 「꼬리 달린 자」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꼬리 달린 자」는 바다에 빠지고 「잉태되지 않은 자」는 파도에 삼켜진다.

「눈물 흘리는 자」가 「쌍둥이」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쌍둥이」가 메아리에 떨어진다.

「동류가 아닌 자」가 「그림자」에게 덤벼든다.

     「그림자」가 메아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눈물 흘리는 자」가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진다.

「부정하는 자」가 메아리를 부정한다.

     「눈물 흘리는 자」가 춤추고, 「부정하는 자」는 「눈물 흘리는 자」를 부정한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를 찾는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에 손짓한다.

「잊혀진 자」가 되돌아온다.

     더이상 목소리도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다."



무언가 상징적이면서도 불길한 여운을 남기는 시가 끝나자 클래스메이트들이 살짝 몸을 떤다.
다 읽은 미오도 살짝 눈을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낸다.

"으음...뭐랄까. 구교사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는 걸까?
솔직히 여기에 언급된 '메아리'라는 게 유령을 가리키는게 아닐까 생각은 하는데..."

"그런데 왠지 찜찜하게 끝나버린 결말이네?"

"응. 되돌아오지 않는다니 무슨말?
정말로 유령에 의해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뜻일까?"

미오가 리사와 말을 주고 받고 있는동안 하루나는 완전히 안색이 새하얘졌다.
저러다 기절하는건 아닐지 모르겠네...
유령따위 안 믿는다는 리토도 이상한 시를 듣고선 약간 얼굴이 파래져 있고...

시의 내용은 그야말로 공갈치기 좋아하는 사이비 예언가가 적을법한 글이다.
소문 좋아하는 십대들에게는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거리가 될수도 있겠지만,
'되돌아오지 않는다'느니 따위의 글귀가 있는데
정작 구교사로 들어갈만큼 담력있는 학생은 별로 없겠지.

"그럼 말야! 진짠지 아닌지 다 같이 확인하러 가보자!"

...데빌루크의 공주님처럼 활기를 주체하지 못해 폭주하는 소녀를 제외하면 말이다...

"헤?"

"좋은데 그거!"

"가자~가자~!"

갑작스런 라라의 발언에 당황해하던 리토의 목소리는 환호하는 리사와 미오의 목소리에 삼켜졌다.
두려움보단 호기심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는지 리사와 미오는 그야말로 의욕이 만만한 상태다.
하루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창백한 안색으로 애써 웃으며 친구들을 말리려 한다.

"저기이~...맘대로 구교사에 들어가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반 위원으로서 나는..."

척-

소극적으로 손을 들어올려서 자기 의견을 말하던 하루나를 제지하곤,
오른 손가락을 척 내밀며 단호한 목소리로 리사가 선언했다.

"이러쿵 저러쿵 하지말고 너도 오는거야!"

"에-----!?"

기겁하는 하루나의 모습에 리토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인다.
식은땀을 약간 흘리며 쉴새없이 표정이 바뀌는게,
이 구교사 탐험에 하루나와 함께 참가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고민하는것 같았다.
그런 리토가 안보이는 듯 하루나는 혼이 빠져나갈듯이 얼이 빠진 모습이다.

원래의 무난한 학교 생활 속에서라면 하루나도 얌전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있을수 있었겠지만,
리토와 라라의 트러블에 휘말린 이후로는 원래의 정숙하고 성숙한 분위기가 말그대로 날아가고
망가진 모습들을 자주 보이는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지만...학창시절이 아니면 언제 친구들과 이렇게 활기넘치는 경험을 해보겠니.
힘내라 하루나.

어느새 마음을 정했는지 리토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들어 리사에게 구교사 탐험 참가 의사를 표명한다.

"나...나도 갈래!"

"좋아! 그럼 점심시간에 다 같이 가보자!
구교사의 유령에 대한 소문과 그 이상한 예언의 비밀을 파헤치는거야!"



건강하구나 리사.
들떠있는 모습의 리사들을 한가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니,
옆자리의 코테가와가 읽던책을 내려놓곤 약간 못마땅한듯한 시선으로 리사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코테가와, 왜그래?"

의아한듯 내가 물어보자 코테가와가 나에게 시선을 돌려 낮게 말한다.

"저 애들, 또 뭔가 할 생각이 아닌가요?
구교사는 출입 금지인데 풍기 위원으로서 그냥 넘어갈순 없다구요."

"그게...최근에 도는 유령 소문 코테가와도 듣고 있지?"

"방금전 이상한 시를 읊을 때부터 들었어요.
그런 이상한 글,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 분명해요.
게다가 유령같은 비과학적인걸 믿을리 없잖아요?"

우주인도 있는데 유령이 없을까 코테가와...
이 세상엔 그야말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아하하...뭐, 저 애들이 구교사에 들어갔다와서 「유령따윈 없었다」라고 말하면,
이런 소문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소문같은건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져요.
저런 행동은 오히려 소문을 띄울뿐이라고요.
혹시라도 겁먹고 되돌아온다면 소문이 더욱 커지겠죠."

"으응..."

"게다가 선생님들이 구교사를 출입금지 시킨건 노후된 건물이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잘못해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교칙을 고집하는게 아니라 학생들을 걱정하는 거라 반박하기가 곤란하네...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코테가와의 말이 옳으니까.
...그러고보면 구교사가 많이 낡아서 바닥이 노후했다고 했었던가?

"그건 맞는말이네...
그래서, 코테가와는 지금 저애들을 말릴꺼야?"

"우선은 상황을 지켜보죠."

"어이..."

방금전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나요 코테가와씨?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코테가와는 약간 당황하며 손사레를 쳤다.

"트, 틀려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확실히 지금 저지하면 점심시간에 구교사로 가는걸 막을순 있겠죠.
하지만 수긍만 하고는 다른때에 몰래 구교사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뒤를 쫓아가서 분명히 충고하고 데려오는게 낫다고 생각한거라고요."

"확실히...저 애들 행동력은 보통이 아니니까."

지금 말린다고 곱게 들을 사람은 애초에 망설였던 리토와 하루나 둘뿐이겠구나.

"그럼 나중에 점심시간에 저 애들의 뒤를 따라가는걸로 괜찮을까?"

"그래요.
...그런데 혹시 아키츠군도 따라오려는거에요?"

내 말투에서 행동을 같이하겠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코테가와가 물어온다.

"물론이지.
애초에 혼자서 을씨년스러운 건물에 가게 놔두기엔 솔직히 걱정이라고.
게다가 유령이 아니더라도 혹시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든든한 보디가드 한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가슴을 탁하고 치는 내모습에 웃으면서 코테가와가 답례한다.

"풋...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그럼 점심시간에 함께 가보도록 하죠."

"응. 기왕이면 점심도 같이 먹자고 점심~"

"무, 무슨소릴 하는건가요!"

얼굴이 빨개져서 속삭이듯 작은소리로 외치는 코테가와에게 뻔뻔스럽게 말한다.
공적인 이유를 대며 사적인 목적을 완수한다.

"그게 말이지 점심먹으면서 조금전 계획을 점검해보는게 나을까 싶어서."

"그, 그런건 쉬는시간에도 이야기 할 수 있잖아요?"

"점심시간때 저애들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진 모르잖아?
갑작스레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때를 대비해선 필요하다고."

"하지만..."

주저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고 공적인 이유는 포기한다.
더이상은 꾸며낼 얘기도 마땅치않고,
역시 솔직하게 내 개인적인 부탁임을 드러내는게 차라리 편하겠다.

"그리고 말이지...
아직 이 반의 친구들에게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코테가와도 최근 혼자서 점심을 먹잖아?
게다가 나도 계속 혼자서 식사를 하다보니 좀 쓸쓸해.
그러니 기왕이면 점심은 함께 먹는게 외롭지도 않고 좋을것 같아서."

"어느새 매일 함께 먹는다는 전제가 깔린건가요?!"

"그러니까...내친김에?"

"무슨!"

"하지만 혼자보다는 함께 먹는 편이 더 즐겁지 않을까?"

"그, 그래도 좀 부끄럽지 않아요?"

약간 주저하듯이 코테가와가 물었다.
아? 부끄러운게 문제였나.
교내에서 클래스메이트들이 보는앞에서 이성이랑 함께 밥먹는건...솔직히 좀 부끄럽긴 하다.
하지만...

"「외로운 점심식사」와 「부끄러운 점심식사」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난 후자를 고를꺼야.
알고 있겠지만, 난 이미 작년 이맘때쯤에 수치심을 버렸다고?"

오체투지로 코테가와에게 싹싹빌었을때부터 수치심은 이미 날려보냈다.
더이상 부끄러울 일 같은게 있을쏘냐?
있을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리토도 라라랑 사이좋게 점심을 먹고 지내잖아?
나랑 코테가와가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해도 생각만큼 반응이 크진 않을꺼라고."

애초에 「미녀와 야수」라느니 「맹수 조련사」라느니, 「아가씨와 보디가드」라느니 하는 소문까지 도는데,
점심을 같이 먹는다는게 추가된다고 더이상 바뀔게 있을것 같진 않다.
...덕분에 남학생들 사이에서 「벽의 꽃」취급을 받는게 미안할 따름이지만...
(벽의 꽃 : 댄스파티에서 자발적인 파트너가 나타나지 않아서 홀로 의자에 앉아 벽에 기대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으..."

코테가와의 시선이 헤엄치듯 흔들린다.
뭔가 당혹한듯 우물쭈물 하더니 입안으로 중얼거린다.
예민한 귀의 감각과 어설픈 독순술로 해석해보니 대강 이런 문장인듯 했다.

'약혼자였잖아요 그 둘은...'

...코테가와씨.
이쪽을 양아치를 넘어 이성으로 의식해 주는건 정말로 감사한데,
이성간의 관계에 지나치게 놀랍도록 반응해서 대응이 곤란합니다.
그렇고 그런쪽으로 사고가 전개되면 나도 코테가와를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대하기 힘들어 진다고요?
잘못하다간, 의미없는 동작 하나하나조차 신경이 쓰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진정하고 지금까지 허들이 높은 시도를 해왔던 과거를 떠올려보자고.
「유령의 밤」이라든가,「수영연습」이라든가,「크리스마스 선물」이라든가,
「발렌타인데이」이라든가...!

노려라! 점심함께먹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코테가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고개를 숙여 붉어진 얼굴을 숨기며 속삭이듯 코테가와가 말한다.

"...함께 먹을 친구가 생길때까지 만이에요?"

꿈은★이루어진다.
고마워요 페이스○스...
악당이지만.





딩동 댕동 -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코테가와와 책상을 맞붙이고 도시락을 꺼낸다.
몇명이 이상한걸 보듯 바라보지만 무시.
양민 몇명의 시선에 신경쓰느니, 정면에 앉은 코테가와에게 주의를 돌리는게 훨씬 낫다.
코테가와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약간 머뭇거리는 모습이었지만,
싱글싱글 웃는 내 얼굴을 보곤 째릿하고 노려본다.

...나 뭔가 잘못했나요?

한숨을 쉬곤 호흡을 가다듬고 도시락을 꺼내는 코테가와.
수저를 들면서 코테가와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럼, 식사후에 할 일을 생각해보죠."

"응?"

어리둥절한 내 모습에 코테가와는 수저를 내려놓고 약간 화가 난듯이 날 쳐다본다.

"...아키츠군?"

"네?"

"「점심먹으면서 계획을 점검해보자」라고 먼저 말한건 어디의 누구였죠?"

"...나 입니다."

압도되어서 속삭이듯 고백하는 나를 기가 막힌듯 쳐다보던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아무튼, 식사가 끝나는대로 저 아이들을 따라가보도록 하죠.
식사를 하지 않고 간다면 우리도 그대로 일어나야겠지만요."

"그렇겠지?
그리고, 그 예언같은 글 말인데..."

"그건 신경쓸 필요 없어요.
어차피 누군가의 못된 장난일테니까요."

"아하하...그렇겠지."

코테가와와의 회화에서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냥 들키지않게 뒤에서 쫓아간다는것 정도가 결론이었다.
뭐, 난 그저 코테가와와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점심식사가 복도를 나서 계단을 내려가던 우리는 보건실을 나오는 야미를 만나게 되었다.

"야미, 보건실에는 왠 일이야?"

"아키츠 료스케?"

날 바라보며 대답하는 야미에게 말한다.

"보통은 학교에 오면 도서실에 있는줄 알았는데, 혹시 어디 아픈거야?"

약간 걱정이 되어 물어본다.
원래는 구교사의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던가?
보건실에서 나올거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걱정스러운 시선에 야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런게 아닙니다, 아키츠 료스케.
정기적으로 건강진단을 받으라는 조언으로,
보건실에 들러서 닥터 미카도와 이야기 하고 오는 길입니다.
도서실에는 이제 가려던 참이죠."

"아키츠군.
그 아이...가끔 학교 안에서도 보이던데,
아는 사이인가요?"

의아한듯이 야미를 바라보던 코테가와가 물어온다.
그러고보면, 코테가와는 야미와의 접점은 없었지?

"아, 이 아이는 야미라고, 라라와 같은 우주인이야.
책을 좋아해서 우리학교 도서실을 자주 찾아오고 있어."

유령은 믿지 않아도 라라가 있으니 우주인은 믿겠지?
코테가와는 약간 놀란듯 야미를 바라보다가,
잠시후 웃으면서 야미에게 말을 건다.

"에...야미라고 하는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코테가와 유이라고 해요.
아키츠군과 친구인가요?"

"친구...말입니까?"

야미는 코테가와의 말에 약간 어리둥절한듯한 표정을 짓다가 나를 바라본다.
한동안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당황하고 있으려니,
야미가 천천히 코테가와에게 시선을 돌려 이야기 했다.

"친한가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노(No)입니다."

"그, 그래요?"

코테가와가 약간 당황한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좌절한다.
나도 그다지 많이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나로선 우호적일 생각이었다고?
나름대로 원만한 관계를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저번의 알몸을 봤던게 치명타였나.
마음속에 우울함이 몰아치려는데 야미가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좀더 가까워지고, 좀더 알고싶어하는 사이가 친구라면,
저는...아키츠 료스케와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에..."

놀란듯 야미를 바라보는 코테가와.

"그리고, 그때 그는 저에게 친구가 되자고 해주었으니까..."

속삭이듯 말하던 야미는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려서 묻는다.

"아키츠 료스케, 그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지요?"

발렌타인데이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더불어 황당무계한 허세로 첫만남을 장식했던 날의 기억도.
약간 불안한듯 하면서도 곧게 응시해오는 야미의 눈동자가 예쁘게 느껴졌다.
이 외로움 타는 아가씨도 어느새 상대를 똑바로 바라볼만큼 용감해졌구나란 생각에 유쾌함을 느끼며 활기차게 대답한다.

"물론이지~! 그땐 정말 진심이었다고?"

"...신용이 안갑니다."

"그렇게 장난스레 말하면 누가 믿어요 아키츠군?"

"심해?!" 

희미하게 입가가 올라가며 고개를 돌린 야미나, 맥빠진듯 웃는 코테가와를 보면 진담으로 하는 말은 아닌것 같지만,
적어도 감동적인 분위기로 끝맺었으면 했습니다.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서있는 날 제쳐두고 코테가와가 야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키츠군과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야미씨.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해요."

"감사합니다. 코테가와 유이."

"굳이 풀네임으로 부르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아, 그거 야미의 습관이야.
대부분 사람들에게 경어를 쓰거나 호칭을 부르거나, 풀네임을 부르니까 말이지."

"음...우주인의 습관이라면 제쪽이 존중해야겠죠."

아니...딱히 우주인이라 그런건 아닌데?
굳이 지적 안해줘도 상관없으려나?

첫만남치곤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 야미가 문득 떠오른듯 물었다.

"그런데...방금 전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어딘가 가던 중이었습니까?"

순간 방금전까지의 목적을 떠올리곤 코테가와도 나도 당황하며 허둥댔다.

"...아! 아키츠군. 빨리 서둘러야 겠어요.
이러다가 점심시간이 다 지나간다고요!
그럼 야미씨 안녕히!"

"까, 깜빡할뻔 했다. 얼른 구교사로 가지 않으면...!
그럼 야미, 잘있어~!"

"구교사...입니까?
그럼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에?""



구교사의 도서실에 꽂힌 오래된 책들을 읽으러 자주 간다는 야미의 말에
코테가와는 낙후된 건물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 하며, 원한다면 구교사내의 책들은 모두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다.
어차피 버려진 장소고, 가져간다고 신경쓸 사람도 없을테니.
하지만 책을 둘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과,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지더라로 변화능력을 통해 벗어날수 있다는 야미의 말에
결국 구교사 출입을 눈감아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낙후되었음이 뚜렷이 보이는 2층짜리 구교사 건물 근처에 도착하자 철조망 근처에 거대한 팻말이 바닥에 꽂혀 있는게 보였다.
아니, 팻말이 아니라 차라리 거대한 나무판이었다.
정상적으로 나무판에 붙어있는 말뚝이 바닥에 꽂혀 있는게 아니라,
말뚝은 없고 나무판 자체가 우악스럽게 바닥을 파헤치며 박혀있는것이 굉장히 거친 솜씨로 만들어진 팻말이라고 느끼게 했다.
야미가 팻말을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왜 그래요 야미?"

야미의 반응에 신경을 쓴 코테가와가 물어보자 야미는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이상하군요.
분명 지난주에 이곳에 올땐 이런 팻말같은건 없었던걸로 기억합니다만..."

"에?"

"게다가 이 나무판에 쓰여진 글씨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것처럼 보입니다."

야미의 말을 듣고는 코테가와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불평했다.

"역시 누군가의 못된 장난임에 틀림없어요.
유령이라니 그런 비합리적인 존재도 있을리 없고..."

"하지만 나무판을 땅에 박은 힘은 심상치 않아 보이는군요...
근처에 기계의 흔적도 없고...
...유령...이란건 잘 모르겠지만.
이 건물...조사해 봐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그리고 이 글귀들도..."

나무판이 박혀있는 바닥을 살펴보던 야미가 일어서서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최근 미스테리 소설이라고 읽고 있는지 탐정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야미는 꽤 글에 빠진듯 했다.



12명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쫓는다.

「여왕」은 「호위」에게 횃불을 넘기고,
「호위」는 「시종」에게 횃불을 넘기고,
「시종」은 메아리에게 횃불을 넘긴다.

     어둠이 찾아오고,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잉태되지 않은 자」가 「꼬리 달린 자」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꼬리 달린 자」는 바다에 빠지고 「잉태되지 않은 자」는 파도에 삼켜진다.

「눈물 흘리는 자」가 「쌍둥이」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쌍둥이」가 메아리에 떨어진다.

「동류가 아닌 자」가 「그림자」에게 덤벼든다.

     「그림자」가 메아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눈물 흘리는 자」가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진다.

「부정하는 자」가 메아리를 부정한다.

     「눈물 흘리는 자」가 춤추고, 「부정하는 자」는 「눈물 흘리는 자」를 부정한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를 찾는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에 손짓한다.

「잊혀진 자」가 되돌아온다.

     더이상 목소리도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다.



글을 읽어본 야미가 잠시 생각하더니 뒤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돌아보며 이야기한다.

"이 글... 아무래도 구교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12명의 목소리는 12명의 사람을 뜻하는게 되겠지요.
메아리는 유령을 상징하겠지요.

꺾쇠(「」)표시로 묶어진 것은 각자의 사람을 상징하는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여왕」은 아마도 프린세스 라라.

다른 이름이 가리키는 의미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그거라면 말이 안되요.
들어간 사람은 라라씨, 하루나씨, 모미오카씨, 사와다씨, 유우키군 이 다섯 뿐이라고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합쳐도 여덟뿐이잖아요?"

코테가와의 반박에 야미가 침묵을 지킨다.
마땅한 대답을 못하는 야미를 지원해줄까싶어서 옆에서 말참견을 한다.

"...혹시나 우리 말고 들어온 사람이 있지 않을까?"

"무슨?"

"유령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드러낼 학생이 우리반에만 있는게 아닐꺼란 말이야."

"설마? 아직도 더 사람이 찾아온다는 말인가요?"

코테가와가 골치아프다는듯 한손으로 이마를 잡는사이,
야미는 무언가 영감이 떠오른듯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프린세스 이전에 이미 누군가 다녀갔을수도 있겠군요.
프린세스를 가리키는것이 「여왕」이 아니라 데빌루크를 상징하는「꼬리 달린 자」라면,
그 앞에 이미 「여왕」,「호위」,「시종」이 들어왔었다고 할수 있겠군요.
그런데 「꼬리 달린 자」에 매달린「잉태되지 않은 자」라는건...?"

"...페케 아닌가?"

"네?"

내말이 의외였는지 쳐다보는 야미에게 추가로 근거를 말한다.

"왜 있잖아... 라라의 머리에 악세서리처럼 달린 메카말야.
옷을 구성하는 메카지만 가끔 말도 하잖아.
12명의 '목소리'라고 했으니까 굳이 사람이 아니어도 되었던게 아닐까?"

"과연...메카는 확실히「잉태되지 않은자」이니까 글귀와 맞아떨어지는군요."

이야기를 듣고있던 코테가와도 대화에 참여했다.
왠지 김샌듯이 맥빠진 어조로 예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뭐에요...결국 말그대로의 의미로, 신체적 특징을 이야기 하는거였잖아요?
「꼬리 달린 자」라느니「잉태되지 않은 자」라느니 괜히 불길한 용어만 사용해선, 겁만 먹게 만들려는 수작이었어요."

"하지만...세번째 문장이 신경쓰이는군요.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말을 적었을까요?"

"...설마 아직까지 그들이 구교사에 남아있다는 뜻이란 건가요?
무언가의 사고로?"

코테가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예언같은 글따위 장난이라고 생각했으면서...
한숨을 내쉬면서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킨다.

나를 돌아보는 코테가와와 야미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이렇게 의견을 나눠봤자 더이상 건질건 없어.
우린 절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고 이대로 이야기만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이제 슬슬 구교사로 들어가서 직접 사람들을 찾는게 좋다고 생각해."

"아...역시 그래요.
이야기를 하다보니 앞서간 아이들과도 지나치게 떨어진것 같고.
우선 안의 상황이 어떤지 확인하지 않으면...
예언 따위 믿지 않지만, 혹시라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이 갇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동의합니다...
그럼 어느 방향으로 들어갈까요?
구교사로 들어가는 문은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한개씩 있습니다만."

구교사 내부로 들어가는 문의 위치를 말하며 의견을 물어보는 야미에게 단호하게 주장했다.

"오른쪽!"

"...근거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오른쪽은 바른쪽이야. 난 언제나 바른길을 걷는다고."

""......""

겨울도 아닌데 차가운 바람이 셋사이에 흘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이고 침묵마저 차가웠다.
빤히 나를 쳐다보던 둘은 이윽고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했다.

"...왼쪽으로 가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죠."

"어째서?!"

항의하는 나를 무시하고 구교사 왼쪽문을 향해 걸어가는 두사람을 바라보다
투덜대며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나였다.



구교사에 들어가자 곧바로 계단이 보였다. 위를 향하는 계단과 아래로 향하는 계단.
구교사엔 지하층도 있었던가?
갸우뚱하는 나와 상관없이 코테가와는 야미와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지하와 1층, 2층. 어느쪽을 먼저 탐색하죠?"

"2층을 먼저 조사하고 1층, 지하 순으로 탐색하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그렇게 하죠."

서로 고개를 끄덕이곤 2층으로 올라가는 둘을 보며 나도 졸래졸래 따라갔다.
보통은 남자인 내가 앞장서야 하는게 매너가 아닐까 합니다만...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두운 구교사.
정오의 시간엔 햇빛이 거의 수직으로 내려쬐는지라, 깨진 유리창 너머로 빛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복도에 코테가와는 약간 위축된듯 했다.

"낮인데도 꽤...어둡네요..."

"시간이 좀 지나면 어두운곳도 잘 보일테니까 너무 걱정마."

"별로...불안해한건 아니에요."

"...불빛이 보입니다."

"에?"

앞장서던 야미의 말에 앞을 바라보자 복도의 구석에서 무언가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불이 켜진 상태의 손전등이 복도에 쌓인 목재더미들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건..."

"손전등이군요.
이렇게 불이 켜진채 떨어져 있다는건...역시 누군가 이곳에 왔다가 사고를 당한걸까요?"

"서, 설마... 구교사에 흉악범 같은자가 잠복하고 있는건 아닐까요?"

"성급한 가정은 금물입니다만...확실히 불안하군요."

"그런...학생들은 대체 어디에?"

겁을 먹은듯 하지만 여전히 학생들을 찾으려는 코테가와의 모습을 대단하다고 느끼며
우선 코테가와를 달래기 위해 어깨를 툭 친다.

"꺅-?!"

"으앗?"

화들짝 코테가와에게 나도 덩달아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내쪽을 바라보던 코테가와는 안심한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화를 내며 따진다.

"무, 무슨짓이에요 아키츠군! 놀랐잖아요?"

"미, 미안. 그냥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했어."

"아키츠군은 그 아이들이 걱정되지 않는건가요?"

"그게 아니라...여기에 난투의 흔적이나 피같은건 보이지 않잖아?
우선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 어딘가 숨어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장소는 이 구교사로 한정되어있으니, 하나하나 교실들을 돌아보면서 찾아보면 언젠간 학생들을 발견할수 있다고 봐."

"그...그럴까요?"

"그렇다니까. 우선 내가 교실에 들어가면 야미가 복도에서 망을 봐주면서 코테가와를 지켜주길 바래."

"그러도록 하죠."

내 부탁에 야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코테가와가 놀란듯 반문한다.

"에? 야미에게?"

아마도 언니격인 자신이 야미를 지켜야 겠다고 생각했나보다.
확실히 그림은 되는데...

"저래뵈도 야미는 우주에서 손꼽히는 실력자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그래요?"

"걱정마십시오. 코테가와 유이."

"아...그럼, 잘부탁해요 야미씨."

당황하면서도 답변하는 코테가와를 바라보곤 2층의 계단입구의 화장실부터 들어간다.

"그럼 난 하나씩 방을 둘러볼께. 혹시나 무슨 일이 있거든 소리쳐서 알려줘?"

"알겠어요 아키츠군."
"알겠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화장실을 돌아보고 교실을 돌면서 혹시몰라서 청소도구함마저 열어봤으나 숨어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복도 끝의 화장실도 둘러보고 나자 남은건 대강당으로 보이는 홀로 들어가는 철문.
여기마저 없다면 2층에는 사람이 없는거겠지.

한숨을 내쉬며 홀로 향하는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돌려 당기자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 뒤에 무언가로 막아놓은듯 하다.
...나무막대라도 걸어놓은 건가?
잠시 멈칫하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코테가와와 야미가 다가온다.

"아키츠군? 무슨일이에요?"
"무슨 일입니까? 아키츠 료스케."

"그게...여기 문이 잠겨있어. 안쪽에서 뭔가로 닫아놓은거 같은데?"

"그렇다는것은...?"

"아마도 이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거겠지?
글에서 적힌대로라면, 먼저 들어왔던 3명의 학생들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문을 열테니 잠시 물러나있어."

본격적으로 문을 뜯어낼 의욕 만만인 나를 보며 야미가 묻는다.

"차라리 제가 칼로 문 사이의 장애물을 베어내는게 더 낫지 않습니까?"

"문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잘못하면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베일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당기는 문이라면 뜯어내는편이 좋을꺼라고 생각해서 말이지."

"혹시나 건너편에 있는게 흉악범이라면 당신이 위험할수도 있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내 몸 튼튼한거야 야미도 알고있잖아?
트럭에 치여도 난 멀쩡하다고~
설사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니까 걱정마."

"...당신은 정말로 지구인인지 가끔씩 의문이 듭니다."

"그거...칭찬은 아니지?"

어이없다는듯한 야미의 얼굴을 바라보다 피식 웃고는 철문을 잡는다.

"혹시나 파편이 튈지 모르니까 조심하라고...「저기...」?"

팔에 힘을주며 양쪽으로 문을 뜯어내려는 나를 보곤 코테가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의아한듯 쳐다보는 나에게 코테가와는 주저하듯이 말한다.

"...그냥 경첩(문 이음새)부분을 잘라내면 되지 않나요?"

""......""

지적해놓고서도 민망한듯 볼을 긁적히는 코테가와를 쳐다보다,
나도 야미도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람은 때론 힘보단 머리를 써야 합니다...



사악-!



야미의 머리칼이 철문의 양쪽 경첩들을 베어낸다.
위아래에 쇠막대로 잠금이 되어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우드득.

손잡이를 잡고 철문이 앞으로 넘어지지 않게 뒤로 당긴다.
천천히 철문을 바닥에 내려놓자 대강당처럼 생긴 홀이 나타났다.

"그럼, 들어가볼까..."

빛하나 들어 오지 않은채 어둠으로 뒤덮힌 홀 안으로
조심스러 들어가며 혹시나 사람이 있을까 싶어 목소리를 높여본다.

"어이~ 누구 없~「타아앗-!」네?"

빠악-!

"꺄악? 아키츠군!"

무언가 머리에 부딪히자 엉겁결에 덤벼오는 검은 인형을 구속한다.
바닥이나 벽 상태가 어떤지 모르기에 쓰러뜨리거나 벽에 밀어붙이는 행동을 피하고,
다시금 휘둘러지는 길쭉한 물체를 팔을 들어 막고 상대방의 뒤로 돌아 팔과 허리를 끌어안고 깍지를 낀다.

"꺄-?!"

고음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숨어있는 여학생인가보다.
당황해서 발버둥치는 인형을 달래기 위해서 열심히 말을 내뱉는다.

"지, 진정하세요! 도와주러 온거「린을 놔줘!」「놔줘요!」"

팍- 퍽-

뒤쪽에서 다른 두명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나를 항해 공격해온다.
세사람...역시 처음 온 일행이다.
우선 진정시키는게 먼저일 듯 하다.
흉악범은 아니니 안고있던 사람, 쿠죠 린 선배를 놓아준다.

껴안았던 몸을 풀자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리는 셋.
경계하는 눈빛으로 손에 든 막대기들을 놓지않으려는 세명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코테가와와 야미가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키츠군?"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습니다."

"아, 괜찮아. 저쪽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는걸 미처 생각못했네."

둘을 안심시키는 말을 할때, 거리를 벌렸던 셋이서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키츠군? 혹시 그쪽은 아키츠 료스케인가요?"

"네.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 텐죠인 선배신가요?"

"맞아요. 그 둘은?"

"동급생인 코테가와랑 친구인 야미입니다.
최근 구교사에 대한 소문때문에 잠시 조사할 겸 찾아왔죠."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막대기를 내리는 셋을 보니 긴장이 탁 풀린것 같았다.
이제 셋을 데리고 1층으로 내려가서 구교사 밖으로 보내는 것이 최선일 듯 하다.

"그나저나, 좀더 가까이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지요."

천천히 셋이 그늘 밖으로 나온다.
가까워진 셋을 보니 옷이 약간 지저분해져 있고 피곤한듯 눈에 기미가 져 있었다.
초췌한듯한 세명의 표정을 보니 고작 몇시간으로 이렇게 될 얼굴이 아닌것 같았다.

"오랜만이군요 아키츠군."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에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하는 텐죠인 선배와는 별개로 쿠죠 선배는 약간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까 껴안았을때의 일 때문인듯 한데...저도 경황이 없었던지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배님...
우선 걱정되는 점부터 묻는다.

"저기, 텐죠인 선배. 실례지만 여기에 들어온건 언제인가요?"

"어제 저녁이었어요."

허... 구교사에서 밤을 새었단 말이잖아?
이렇게 초췌할법 하다고 생각하며 텐죠인 선배에게 넌지시 권유했다.

"저기, 그러시다면 이제 저희와 함께 구교사를 빠져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승낙할것이라 생각한 질문에 텐죠인 선배는 초췌한 상태에서도 도도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요. 이 학교의 여왕인 내가 이 학교에서 모르는 일 따윈 있어선 안됩니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할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아요!"

"그런...사키님!"
"이제 이런 이상한 곳엔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린? 아야까지?"

아우성치는 둘에게 당황해하는 텐죠인 선배를 바라보던 야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키에게 말을 걸었다.

"「여왕」...당신이 「여왕」이었습니까?"

"맞아요. 내가 바로 사이난 고교의 여왕 텐죠인 사키랍니다?"

자부심 강한듯 뽐내는듯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하는 텐죠인 선배를 바라보던 야미는,
쿠죠 선배와 후지사키 선배에게 시선을 돌렸다.

"과연...그리고 저들이 당신의 「호위」와「시종」이겠군요."

"이상한 표현이군요. 그렇다면 그렇지만..."

"그리고 '횃불'은 방금전 손전등인가?"

"무슨 말을...?"

"야미씨. 또 그 예언 이야기인가요?"

"예언...? 그건 무슨 말이죠?"

코테가와가 야미에게 말을 걸자 듣고있던 텐죠인 선배가 이상한듯 물어온다.
야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텐죠인 선배에게 묻는다.

"구교사 앞의 팻말에 적힌 글을 못보셨습니까?"

"팻말? 그런게 있었나요?
우리가 들어올땐 어두운 밤이라 그런건 보지 못했어요."

"그렇습니까..."

"그래서, 그 예언이란건 대체 뭔가요?"

"그건..."

야미가 텐죠인 선배와 쿠죠 선배, 후지사키 선배에게 구교사 근처에 적힌 글을 읊어준다.
토시하나 안틀리고 읊는 야미의 기억력이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해서, 저는 당신들이 각각「여왕」,「호위」,「시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도에서 보았던 손전등은 당신들이 들고온 '횃불'일테고,
그곳에서 '메아리'라는 존재를 보고 당신들은 도망친것이겠죠."

"마, 맞아요. 어둠속에서 비친 두개의 불빛이 마치 눈동자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후지사키 선배가 동의해온다.

"이...이상한 예언이군요.
되돌아오지 않는다니..."

텐죠인 선배도 태연한듯 하지만 약간씩 목소리가 떨리는게 느껴진다.

"사키님...역시 그냥 돌아가죠.
이곳은 뭔가 이상합니다."

"린..."

쿠죠 선배의 간언에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텐죠인 선배에게 나도 더불어 말한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굳이 이상했던 두개의 불빛을 제외하더라도,
이곳은 매우 낙후되어서 잘못하면 사고가 발생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 구교사 탐험은 이만 포기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할수 없군요.
린과 아야도 걱정이니 이만 돌아가기로 하죠."

마지못해 수긍하듯한 텐죠인 선배에게 안심하면서 일행을 이끌로 계단이 있는 복도 반대편을 향해 걸어간다.
부서진 유리창들, 삐걱거리는 바닥, 떨어져나간 문짝이 을씨년스러움을 더하는 가운데,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선지 텐죠인 선배가 야미에게 말을 건다.

"그나저나, 그 예언이란것 말인데, 우리말고도 따로 들어온 학생들이 있다는 건가요?"

"네. 프린세스 라라와 유우키 리토와 그의 동료들이 소문을 듣고 구교사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만..."

"?! 라라도 왔다고...?"

"아키츠 료스케와 코테가와 유이의 말로는 방금전 들어온 인물은 모두 여섯이라고 합니다.
프린세스 라라가 「꼬리 달린 자」.
그녀의 머리에 달린 장식(페케)이「잉태되지 않은 자」
그외 나머지 학생들도 각각의 호칭을 갖고 있겠지요."

"저...저기..."

그때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후지사키 선배가 주저하듯이 말을 꺼낸다.
시선이 집중되자 위축되던 후지사키 선배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이 예언,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그게...줄의 앞이 띄어쓰기가 되어있는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들을 따로 모아뒀더니 이렇게 되었어요."

후지사키 선배가 수첩에 적어둔 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12명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쫓는다.

「여왕」은 「호위」에게 횃불을 넘기고,
「호위」는 「시종」에게 횃불을 넘기고,
「시종」은 메아리에게 횃불을 넘긴다.

「잉태되지 않은 자」가 「꼬리 달린 자」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눈물 흘리는 자」가 「쌍둥이」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동류가 아닌 자」가 「그림자」에게 덤벼든다.

「부정하는 자」가 메아리를 부정한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를 찾는다.

「잊혀진 자」가 되돌아온다.



     어둠이 찾아오고,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꼬리 달린 자」는 바다에 빠지고 「잉태되지 않은 자」는 파도에 삼켜진다.

     「쌍둥이」가 메아리에 떨어진다.

     「그림자」가 메아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눈물 흘리는 자」가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진다.

     「눈물 흘리는 자」가 춤추고, 「부정하는 자」는 「눈물 흘리는 자」를 부정한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에 손짓한다.

     더이상 목소리도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다.



순서가 바뀐 시를 보이며 후지사키 선배가 이야기 한다.

"왼쪽에 붙은 문장은 메아리를 쫓는 사람들의 행동,
오른쪽으로 밀려나간 문장은 그후의 결말을 이야기 하는걸로 보이지 않아요?"

"확실히...그렇게도 볼 수 있겠군요."

수긍하는 야미와 반대로 코테가와가 당치 않다는듯 반박한다.

"하지만 이 시의 내용은 틀렸어요.
지금 우리는 이렇게 선배들과 만나서 구교사를 나가려 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그렇지만...문제는 그게 아니에요."

"무슨말이죠 아야?"

텐죠인 선배가 물어오자 후지사키 선배가 수첩에서 꺾쇠 부분을 가리킨다.

"꺾쇠 표시로 된 호칭들...전부 12개 였어요."

"그런데요?"

"「쌍둥이」는... '둘'이잖아요?"

"...에?"

"만약 이 해석이 맞다면...
이 시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전부 '13명'이라고요...?"

"......"

갑자기 추위를 느끼는지 살짝 팔을 껴안는 일행들을 보며 후지사키 선배가 말한다.

"설사 장난이라도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여 위협하는 시를 써놨는데,
숫자에서 실수를 한다는건 말이 안되요.
혹시나 「쌍둥이」가 둘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단순한 그 사람만의 특성이라면 모르겠지만..."

"구교사에 들어온 클래스메이트 중에 쌍둥이가 있다는 얘긴 못들어봤는데요."

내가 추가로 이야기 하자,
야미도 심각하게 얼굴을 바꾸곤 후지사키 선배에게 물었다.

"...그말은,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는 '목소리'가 아니란 뜻입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그게...몇몇 목소리의 행동은 무언가 이상해요.

「그림자」에게 덤벼드는「동류가 아닌 자」.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지고 춤추는「눈물 흘리는 자」.
메아리에 손짓하는「이끄는 자」.
그리고, 되돌아온「잊혀진 자」.

적어도 이 넷은 무언가 이질적이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요.
혹시, 그중 누군가가 '메아리'이지 않을까요?"

"이...이상한 소린 그만두세요 아야!"

"하지만 사키님..."

"괜한 억측으로 쓸데없이 겁먹어봤자 소용없어요!
우리가 이대로 구교사를 빠져나간다면 이런 예언 따윈 상관없는 거잖아요?
이 텐죠인 사키에게 그런 시시한 예언 따위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걸 알려드리죠."

약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며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텐죠인 선배.
오랜만에 다른 이들의 위에 서는 사람다운 모습을 보는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코테가와도 텐죠인 선배의 말에 힘껏 수긍하며 동의한다.

"그, 그래요. 어차피 구교사를 나가면 두번다신 예언이라는 것에 휘둘릴 일도 없을테니까요.
그렇죠 아키츠군?"

"응? 아...그렇겠지.
예언같은거, 어차피 그냥 재미로 받아들이면 되는거잖아?"

"...그렇겠죠?"

"물론. 그것보다 이제 슬슬 가보자고요.
남아있는 학생들도 신경쓰이고."

약간 긴장한듯한 코테가와를 안심시키면서 다시 계단이 있는 복도 끝으로 일행을 이끈다.
방금전 대화를 생각하는지 야미는 말없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쿠죠 선배와 후지사키 선배는 텐죠인 선배의 옆에서서 뒤따라 오고 있었다.
침묵을 지킨 가운데 삐걱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며 복도를 걸어가길 잠시,
조금전 지나쳤던 손전등이 목재더미들 사이에 떨어져 있는것이 보였다.

"아, 저건...우리 손전등이에요 사키님."

"그렇군요. 그 귀신과 만나서..."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몸을 살짝 떠는 세 선배를 보려니,
코테가와가 앞으로 나가 손전등을 주웠다.

"다행히 아직 불이 켜지는군요.
낮이긴 하지만, 교사내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으니까 손전등이 있다면 좀더 시야가 밝아지겠죠."

"그럼 내가 앞장설께."

손전등을 받아들기위해 코테가와에게 걸어간다.
야미와 선배들도 내 뒤를 따라온다.
코테가와로부터 손전등을 건네받고 앞을 바라본다.
계단까진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곧 계단이 보일겁니다.
1층에 내려가는대로「빠직-」...?"

발밑에서 들린 무언가 균열이 가는 소리에 뒤에 선 세명의 선배들이 크게 뒤로 물러서고,
야미와 코테가와도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바닥이 무너져내렸다.

쿠르릉-!

"꺄아---!"

"코테가와!"

다행히 야미는 우주인다운 운동신경으로 가볍게 뒤로 날아뛰었다지만,
코테가와는 미처 벗어나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닥과 함께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바닥에 부딪히면 좋은 꼴은 못볼거 같아 황급히 코테가와의 몸을 끌어당겨서 어깨와 다리를 안아올린다.
코테가와도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내 목을 끌어안는다.
적어도 목을 안는 행동이 안전벨트 대신은 되겠구나.
남은건 충격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럽게 착지하는것-!

탁-

급작스런 추락에 비해 조용한 소리를 내며 무사히 착지에 성공했다.
그리고 살며시 몸을 낮춰 코테가와를 안고있는 팔을 내린다.
제대로 복도에 선 코테가와는 놀라면서도 안심한듯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해왔다.

"고, 고마워요 아키츠군."

"뭘~당연한 일이라고.
그나저나..."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쌓여있던 목재더미와 우리 여섯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서 떨어져 내린 복도는 굉장히 큰 구멍이 나있었다.
복도의 앞뒤가 완전히 단절될만큼 넓게 뚫린 커다란 구멍은, 일반인이 뛰어넘기엔 무리로 보였다.
어떻게 한다...

이윽고 야미가 구멍 근처로 조심스레 다가와 안부를 묻는다.

"괜찮으십니까 코테가와 유이?"

"아, 괜찮아요 야미. 아키츠군 덕에 살았어요."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고마워요."

"어이~ 내 걱정은 안해주는거야?"

"...당신은 이런걸론 다치지 않으니 걱정은 불필요합니다."

"지금 네 말로 다쳤다고?!"

"그렇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성격. 의외로 소심함."

"이봐?!"

"그나저나...건물의 낙후가 예상이상으로 심각하군요. 조심해야 겠습니다."

"......"

시선 돌리지 마? 그리고 말 돌리지마!
은근슬쩍 피식거리는걸 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아무튼, 이대로 2층 복도 반대편으로 건너가는건 무리일듯 합니다.
한명씩 안고 뛴다면 모르겠지만 반대편쪽이 착지시의 충격을 버틸지도 모르겠으니까요."

어떻게 할까요...라고 중얼거리는 야미에게 제안해본다.

"그러지말고 그냥 이쪽 구멍으로 한명씩 내려오면 안돼?
내가 한사람씩 들고 착지할테니까 1층으로 바로 가자고.
지금 서있는 바닥은 위층보단 튼튼해 보여서 한명씩 내리다가 무너질것 같진 않아."

살짝 바닥을 발로 통통 쳐보며 얘기하는 나에게 야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요..."

"그?!...파렴치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겠죠."

코테가와가 잠시 항의하려다가 단념하고 수긍한다.
뛰어서 위로 올라가기 전에 코테가와를 바라보며 주의를 준다.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얼마 걸리진 않겠지만,
혹시나 주변에서 이상한 낌새가 있으면 바로 소리쳐.
즉시 내려올테니까."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아키츠군."

"그럼..."

탓 하는 소리와 함께 뚫려진 구멍을 통해 가볍게 2층으로 넘어온다.
어안이 벙벙해져 나를 바라보는 세선배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들으셨겠지만 구멍을 통해서 한명씩 1층으로 내려드리겠습니다.
혹시나해서 말씀드리는거지만, 맹세코 절대 이상한 행동같은건 하지 않을테니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으음...어떡하죠?"

"사키님, 여기선 우선 승낙하시는것이 좋겠습니다."

"2층 계단을 못쓰는 이상 다른 방법은 없어요."

의견을 나누던 선배들은 이윽고 수긍하더니,
우두머리격인 텐죠인 선배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도도한 표정을 지은 텐죠인 선배가 나를 마주 보며 당당히 말한다.

"이 나를 수행하게 된걸 영광으로 아세요."

이런 때마저도 고귀함을 잊지않는 모습에 약간 감탄과 함께 귀여움을 느끼면서
허리를 숙이며 정중한 인사와 함께 장난스레 말한다.

"예이 공주님~."

"?!누, 누가 공주예요?
여왕이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해선 얼굴을 빨갛게하며 반박하는 텐죠인 선배를 보며 아차했다.
평소의 태도가 도도하지만 말괄량이 왕녀님같은 느낌이라 그만 말실수를 했다.
실수했단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정중히 응대한다.
좀더 연극풍으로 무난히 상황을 넘기는게 좋을것 같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여왕님.
부디 아둔한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길..."

"......앞으론 주의하도록 하세요."

시선을 외면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텐죠인 선배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쿠죠 선배와 후지사키 선배의 모습이 보인다.

살짝 내밀어진 텐죠인 선배의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러자 깜짝 놀라며 텐죠인 선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뭐, 뭐하는거죠?"

얼굴이 빨개져서 말을 더듬는 텐죠인 선배에게 어리둥절하다가 깨달았다.
아...아까 코테가와랑 함께 떨어질때 내 행동이 안보였나?

"그게...공주님 안기로 한분씩 내려드릴껍니다만...?"

"에?!"

목소리가 높아지며 목덜미까지 붉어진 텐죠인 선배가 더듬거리며 묻는다.

"어, 업는건 안되나요?"

...선배님.
포즈상으론 나을지 몰라도,
전 그게 더 부끄러울것 같은데요?

"업힌 상태로 착지하면 잘못하다간 혀를 깨물거나, 턱을 다칠수 있거든요.
게다가...신체 접촉이 더 많아서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구체적으론 가슴이라든가 허벅지라든가 말입니다...

"?!아, 알았어요.
이대로 좋아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채로 수긍하는 텐죠인 선배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어깨를 잡고,
다리 뒤로 팔을 넣어 텐죠인 선배를 안아올린다.
흠칫-하며 텐죠인 선배의 몸이 떨리는게 느껴진다.
음...이렇게까지 반응하시면 저도 좀 송구한데요...
...더 부탁할것도 있는데 가능하려나?

"저기, 텐죠인 선배?"

"...뭔가요, 아키츠군?"

"그게...죄송하지만 착지시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제 목에 팔을 두르는걸 추천합니다만..."

"......"

"이, 이상한 뜻이 아니에요?
그냥 혹시모를 위험에 대비한 안전벨트같은 용도로..."

"...알았어요."

살그머니 텐죠인 선배의 손이 내 목을 감싸 안는다.
방금전의 급박한 상황과 달리 이렇게 천천히 상황이 전개되다보니 괜시리 의식이 간다.
가까워진 텐죠인 선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져 버린다.
덕분에 약간 어색한 걸음으로 구멍쪽으로 다가가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야미가 툭-하고 내뱉는다.

"엣찌한 인간이군요."

"아냐!"

이건 이상한 생각을 해서 하반신이 이상해졌다든가 해서 걸음이 어색한게 아니라고?
그저 몸이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었을 뿐이라니까!
구멍 앞에 서서 코테가와에게 신호를 보낸다.

"코테가와~! 지금 내려갈테니 구멍근처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어줘."

"알겠어요 아키츠군.

...이제 내려와도 괜찮아요~!"

밑에선 준비가 끝난것 같아 내려가기 전 텐죠인 선배에게 주의를 준다.

"하나, 둘, 셋 하면 밑으로 내려갈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선배."

"난 여왕이에요.
한심한 모습따윈 보이지 않아요."

"하하, 알고 있다고요 선배."

"..."

"그럼 갑니다. 하나, 둘, 셋~"

쉬익-

사뿐-

최대한 충격을 완화시키면서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다.
바닥은 역시나 큰 삐걱거림없는게 안정적인듯 하다.
텐죠인 선배는 따로 다치거나 하진 않았지?
고개를 살짝 숙여 바라보니 눈앞을 가리는 금발머리가 보인다.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채로 텐죠인 선배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천천히 앉으며 텐죠인 선배를 내려놓으며 일으켜 세운다.

"이제 끝났어요 텐죠인 선배."

"으응? ...! 그, 그렇군요."

화들짝 놀라며 내게서 거리를 벌린 텐죠인 선배는 잠시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헛기침을 하곤 답례를 해왔다.

"언제 내려왔는지도 모를만큼 정중했어요.
믿음직스러운 후배군요 아키츠군은."

"아하하~ 영광입니다 텐죠인 선배."

사람들의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하물며 그것이 가뭄에 콩나듯 한 빈도라면 더더욱.
쑥쓰럽게 웃으며 뒷통수를 매만지던 나는 다시 2층을 바라본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데리고 올테니 두분은 잠시 기다려 주시길..."



위로 올라와서 다음 사람을 안고 가기로 했다.
이번 차례는 쿠죠 린 선배.

"자, 잘부탁 해."

"걱정마세요 쿠죠 선배."

개인적으로 상상했던 검도 소녀의 이미지랑 달리 쿠죠선배는 남자다운 씩씩한 말투가 아니라 정중한 어투를 쓴다는걸 처음 알았다.
대화해본 적이 적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가씨에게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며 속으로 사죄.
붉어진채로 머뭇거리는 쿠죠 선배를 안아들고 가볍게 1층으로 착지한다.
세번째 하는 일이다 보니 방금전보단 훨씬 긴장이 풀린것 같았다.



다음 차례는 후지사키 아야 선배.
약간 겁먹은 듯 눈가에 약간 눈물이 맺혀있는게 보였다.
그나저나 안경...좀 위험하지 않을까?

"저기, 후지사키 선배."

"네?"

"그 안경, 착지할 때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잠시 포켓에 따로 보관해두시는게 어떨까요?"

"아...그럴께요."

그나저나 후배에게 존대말은 좀 그렇지 않나요 후지사키 선배.
원래 성품이 그러시다면 할말은 없습니다만...

후지사키 선배는 안경을 벗어서 옷안에 넣은뒤 나를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둥근 안경을 치우자 드러난 눈은 생각했던것 이상으로 깨끗했다.
안경 같은거...투명하거나 좀더 예쁜 안경으로 바꾼다면 훨씬 귀여울텐데...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이상했는지 후지사키 선배가 약간 겁먹은듯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 저기...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아뇨. 그냥, 안경을 벗으니 예쁘다고..."

"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심코 말해버린 말에 선배를 헌팅하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급히 얼버무렸다.
하지만 급히 고개를 돌린 후지사키 선배의 붉어진 귓가를 보니 이미 늦은것 같았다.
민망해서 후딱 끝내버리자고 생각해 후지사키 선배의 어깨를 잡고 훌쩍 들어올렸다.

"꺄!"

놀라는 후지사키 선배를 무시하고 구멍 앞으로 다가가 말한다.

"셋하면 내려갑니다. 하나, 둘"

"자...잠깐만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셋!」꺄아아아---!"

황급히 내 목을 끌어안으며 후지사키 선배가 비명을 질렀다.
조용히 착지한 뒤에도 후지사키 선배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날 끌어안고 있었다.
바닥에 내리려고 하니까 눈을 감은채로 필사적으로 끌어안는 모습이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내 어깨에 머리를 꼭 파묻고 달라붙은 후지사키 선배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그런데, 목덜미 근처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은...음...저기요?
약간 붉어진채 곤란해하는 내 얼굴을 보곤 텐죠인 선배, 쿠죠 선배, 코테가와가 다가와 후지사키 선배를 진정시킨다.

"아야, 이제 그만 진정해요."

"사키님 말씀대로, 이만 정신차려."

"후지사키 선배, 이제 괜찮아요."

"...사키님?"

텐죠인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한 후지사키 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곤 황급히 팔을 풀어 떨어져 나간다.

"죄...죄송해요!"

얼굴을 붉힌채 필사적으로 사과해오는 후지사키 선배의 모습에 대응이 곤란한지라, 
조금 상기된 목덜미를 살짝 매만지면서 하하 웃어넘길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직 2층에 야미가 남아있지?



다시 2층으로 뛰어 올라오자 1층의 상황을 보던 야미가 나를 쳐다본다.

"무슨 일입니까 아키츠 료스케?"

"그야, 널 데리러 왔지."

"저를?"

의아한듯 물어오는 야미의 모습이 이상해서 대답한다.

"이제 남은건 야미 뿐이잖아. 그러니 데리고 가려고."

"전 혼자서도 내려갈 수 있습니다.
굳이 변화능력을 쓸것도 없습니다."

고개를 젓는 야미에게 굴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혼자서 내려올수 있건 없건은 상관없어.

건물에 들어갈 때 뒤따라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건,
뒤에 선 사람이 문을 열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잖아?

타인을 생각해주는 상냥한 문화라고.
가끔씩은 다른 사람이 내민 손을 맞잡아 주는것도 좋잖아."

"......"

혼자 내려갈 수 있었다면 방금전의 대화 도중에도 스스로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길 바랐으니까,
다른 이들처럼 배려를 받고 싶었기에 내려오지 않은게 아닌가?
그렇기에 아무말없이 위에서 바라만보고 있었던게 아닐까?

침묵하던 야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확실히...상대의 배려는 감사히 받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그렇지?"

싱긋 웃는 나에게 야미가 천천히 다가와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그럼, 부족한 몸이지만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잠깐?!
무슨 대사가 그래?
이 상황에서 쓰기엔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이? 그 말 대체 어디서 배웠어?"

당황한 내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야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온다.

"구교사의 도서실의 옛 서적에서 읽은 책에 나와있던 대사입니다만...
여성이 쓰는 고풍스러운 표현이라 생각해서 썼는데 이런때 쓰는게 아니었습니까?"

"...노 코멘트."

뉘앙스가 완전 다르다고?
대체 무슨 책을 읽은거냐 야미...

한숨을 쉬며 야미의 몸을 안아든다.
긴 금발이 바닥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쓸어담으며 들어올린다.
조그만 몸이 품에 안겨들며 목에 팔을 감아왔다.
작은 입술을 벌려 속삭이듯 야미가 말했다.

"에스코트 잘 부탁드립니다 아키츠 료스케."

"맡겨주세요 작은 공주님~."

외모나 가끔 보이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귀여운 어린 공주님이니까.
고양이 나라의 공주님이래도 믿을꺼라고 속으로 웃으며 1층을 향해 뛰어 내렸다.



모두들 1층으로 내려와 몸을 추스르고 복도를 바라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출구로 나가는 문이 보였고, 그 옆에 2층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반대편 복도 너머는 어둑한 그림자에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다.
텐죠인 선배가 쿠죠 선배와 후지사키 선배를 대신해 나에게 물었다.
(적당히 서로간에 안면도 익혔고, 생각으로 부를땐 이름 쪽이 편하니까 이후론 사키, 린, 아야 선배로 지칭하겠다.)

"그럼 이대로 구교사 밖을 나가는건가요?"

"선배님들께선 교사 밖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앞서온 친구들을 찾아서 돌아가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우리들도 같이 가도록 하죠."

"네?"

"사, 사키님?"

의외의 답변에 어리둥절한 나를 바라보며 사키 선배가 선언했다.

"학생들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학교의 여왕인 내가 혼자서 도망친다는건 말도 안되요.
그러니까, 나머지 1층과 지하도 함께 둘러보도록 하죠."

「라라랑 유우키군을 구하는건 본의가 아니지만...」이라며 첨언하는 사키 선배를 기가막힌듯 바라보다가 살짝 웃음이 새었다.

나의 학생들입니까...
평소엔 나르시즘끼가 약간 있지만, 지금 모습은 정말 멋졌어요 선배.

린 선배와 아야 선배도 사키 선배의 말에 감화된듯 「역시 사키님!」을 말하며 동의했다.
너털 웃음을 지으며 사키 선배들과 함께 어둠으로 덮힌 반대편 복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씩 화장실과 교실안을 둘러보면서 차근차근 조사하던중 복도 중간 부근의 직원실로 보이는 방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손을 들어 일행의 주의를 환기시킨뒤, 조심스럽게 직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직원실 내부.
잘못 들은것 같지는 않고, 아무래도 숨어있는 누군가가 기척을 감추고 있는듯 해 보였다.
숨어있는게 학생이라면 안심시키기 위해서 목소리를 낸다.

"어이~아무도 없어요~?
라라~? 유우키~? 모미오카~? 사와다~? 사이렌지~?
나 아키츠라고~"

"라라씨- 혹시 아무도 없나요~?"

나와 코테가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뒤, 직원실 구석에 있는 캐비넷이 살짝 들썩인다.
세 선배와 코테가와가 움찔하며 약간 물러서자 내가 조용히 캐비넷으로 다가간다.

"혹시 거기 있는거 라라야? 아니면 유우키?
지금 여기 코테가와랑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어."

"...아, 아키츠군이야?"

"이 목소리는, 모미오카?"

순간 캐비넷이 활짝 열리면서 눈물에 젖은 리사와 미오가 내게 달려들었다.

"우와앙~! 아키츠군~!"
"무서웠어~!"

"에, 잠깐?"

엉겁결에 달라붙은 둘을 마주안고 당황하고 있자 코테가와와 야미와 선배들이 다가왔다.

"침착하세요 모미오카씨, 사와다씨. 이젠 괜찮아요."

"괜찮습니까?"

"불쌍하게도, 무서웠나보군요..."

"훌쩍..."
"킁..."

저기...나 교복 젖어요?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가는 내 교복 상의에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두사람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달래려고 노력했다.

훌쩍이던 둘이 진정하고 떨어지자,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서 내밀려다 주저한다.
...사람은 둘인데 손수건이 하나면 어떡하지?
그때 내 행동을 지켜보던 코테가와가 자신의 손수건을 내게 건네온다.

"이것도 함께 건네 주세요."

"아, 고마워 코테가와."

"천만에요. 여자아이의 얼굴은 항상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고마워 아키츠군. 코테가와씨."
"고마워요."

손수건을 건네받고 얼굴을 닦은 리사와 미오는 이윽고 감사의 말을 건내왔다.
겸양하며 코테가와는 방금전 떠오른 의문을 꺼내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곳에 숨어서 뭘 하고 계셨나요?"

"그게..."



리사와 미오가 더듬거리면서 방금전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라라, 하루나, 리토, 리사, 미오 이렇게 다섯이 구교사 1층을 둘러보고 있을때,
어디선가 이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는 것이다.

{나가...}

{나가...}
{나가...}
{나가...}

수많은 소리가 중첩되어 울리는 현상에 일행들이 창백해져 있으려니
복도의 바닥이 무너지며 라라, 하루나, 리토가 떨어져 내렸다는 것이다.
리사와 미오만이 1층에 주저앉아있다가 떨어진 세명을 찾기위해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과실 근처를 걷던중 갑자기 의자가 떠오르며,
이어서 쓰레받기, 책, 신발 따위가 날아오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에 기겁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처음 봤어 폴터가이스트 현상..."
"정말로 무서웠어..."

방금전에 겪었던 상황이 떠오르는지 살짝 몸을 떠는 리사와 미오를 보던 야미가 중얼거렸다.

"울리는 목소리...
역시 그건 '메아리'인 걸까요?"

생각에 잠기는 야미의 모습을 눈치챈 리사와 미오가 순간 눈을 반짝이며 야미를 바라보았다.

"저...저기 아키츠군."

"왜그래 모미오카?"

말을거는 리사에게 답하자, 왼손으로 야미를 가리키며 리사가 물어왔다.

"저 아이 가끔 학교 안에서도 보이던데...친구?"

"아, 그래. 야미라고 해.
책 읽는걸 좋아해서 도서실에 자주 오는 편이야."

"헤-"

"정말 귀엽다~!"

"......"

신기한듯 바라보는 리사를 제치고 갑작스레 미오가 야미에게 달라붙었다.
무언가 사랑스러운 생물을 보는듯한 얼굴로 야미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리사마저 덩달아 달라붙으며 야미의 볼이 약간 밀려 올라가며 야미의 진지한 눈매가 엉망이 되는게 보기 우스웠다.

"꺄~ 피부 매끈매끈~!"

야미가 얼떨떨해 하거나 말거나 한동안 야미에게 달라붙어 꺄꺄 소리를 내는 리사와 미오는 방금전까지의 두려움을 잊은듯,
완전 활기가 넘쳐 보였다.

"건강하네..."

"안말려도 되는건가요 아키츠군?"

"뭣하러? 덕분에 저애들 긴장도 많이 풀린것 같잖아?"

"그렇다면 그렇지만..."

"확실히...귀여운 아이군요. 뭐 아무리 그래도 학교 넘버원은 바로 나 텐죠인 사키지만 말이죠."

얌전히 지켜보는 나와, 음음 하며 수긍하는 사키 선배의 모습에 코테가와는 포기한듯 가만히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한동안의 진한 포옹이 끝난뒤 떨어진 두명을 보며 야미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당신들이 「쌍둥이」인듯 하군요."

""「쌍둥이」?""

"구교사 앞에 적혀있던 글 말입니다."

"아~! 우리도 그거 봤어~.
굉장히 불길하게 써놨던데 대체 무슨 말인진 모르겠더라고."

"맞어~맞어~"

이상한 글에 대해서 불평하는 리사와 미오를 보며 야미가 추리모드로 들어가서 설명을 시작했다.

"「여왕」과「호위」와「시종」은 여기의 텐죠인 사키, 쿠죠 린, 후지사키 아야 입니다.
「꼬리 달린 자」는 프린세스 라라, 「잉태되지 않은 자」는 메카인 페케입니다."

"어? 그렇게 해석되는거였어?"

"확실히 라라찌는 꼬리가 달렸으니까~.
그럼, 「눈물 흘리는 자」는 하루나일까?
하루나는 왠지 울것만 같았으니까."

"그런데 어째서「쌍둥이」가 나랑 미오인거야 야미야미?"

"...야미야미?"

첫만남부터 이상하게 귀여운 호칭을 얻어버린 야미는 반응이 곤란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애들 텐션은 원래 저러니까 신경쓰지 마 야미...
헛기침을 하곤 야미는 다시 말했다.

"당신들은 둘이서 한팀의 페어(Pair)로 보입니다.
아마도 그점이 「쌍둥이」라는 호칭을 갖게 했겠죠."

"에~ 그런가?"

"그럴지도~"

둘중 하나가 빠지면 어색한 느낌이 드니까 확실히 「쌍둥이」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동류가 아닌자」는 아마도...유우키 리토라고 생각합니다.
여섯명중 유일하게 성별이 다르니까요."

"하지만 아키츠군도 남자잖아~?"

"남자가 두명인데 「동류가 아닌 자」는 이상하지 않아?"

"글쎄요...저도 정확히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애초에 이 글은 이상한 내용 투성이니까요.
그저 추측해볼 따름이죠.
계속해보면 「부정하는 자」는 코테가와 유이입니다."

"에...나?"

코테가와가 놀란듯 자신을 가리키자
야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한다.

"당신은 유령을 믿지 않습니다.
메아리가 가리키는 것이 유령이라고 한다면,
유령을 부정하는 당신이 「부정하는 자」가 되는게 맞습니다."

"그럼, 야미 당신은 어디에 해당하나요?"

"저는...아마도 「그림자」가 아닐까 합니다.
어둠(야미)이니까요."

뭐냐, 그 「키라다까라(키라니까)」같은 발언은...

"그렇다면, 아키츠군은?"

"에? 나?
난...별로 어울리는 호칭이 없는데?
그런 이야기 보단, 우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라라 일행을 데려오는게 우선 아닐까?"

"그건 그렇네요."

코테가와와 사키 선배들의 동의하에 발걸음을 되돌려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추리를 방해받아서 기분이 상했는지 야미는 볼을 약간 부풀렸다.
리사와 미오는 귀엽다고 꺄아-거릴 따름이었지만...



1층으로 떨어졌던 위치를 지나서 어느덧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발견한 미오와 리사가 들떠서 말한다.

"앗 계단이다! 드디어 찾았어~!
이걸로 지하로 내려갈 수 있어!"

"라라찌 일행은 괜찮을까~"

"아무튼...드디어 남은 후배들을 찾으러 내려갈수 있겠군요.
방금전 두 명이 겪은 이상한 현상에 대해선 충분히 조심하는게 좋겠네요."

"사키님은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조심하세요."

"아키츠군. 사내아이다운 모습 기대하겠어요."

"걱정말라고 코테가와. 모두들 무사히 밖으로 나가게 할테니까."

서로 회화를 주고받으면서 약간 고조된 분위기로 계단을 향하려니,
갑자기 야미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멈추세요...!"

"왜그래? 야미야미."

리사의 질문이 끝나자 마자 갑자기 복도 한쪽에 놓여진 소화기가 달각 달각 흔들리더니 공중에 떠오른다.
머리위 높이까지 떠오른 소화기를 보며 리사와 미와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비명을 지른다.

"꺄---! 또 다시 폴터가이스트!"

"미, 믿을수 없어요!"

"사, 사키님!" "어, 어떻하죠?"
"지, 진정해요 둘다."

당황하는 동료들과 별개로 야미는 냉정하게 소화기로 다가가 머리카락의 칼날을 휘두른다.

푸화학-!

소화기의 허리부분이 머리칼날에 의해 끊어지며 안의 분말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우왓?!"

분말을 피해 뒤로 물러난 우리들 앞에 이윽고 새하얀 분말가루를 가득묻은채 소화기를 든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얀 사람은 당황한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낸다.

"어...얼레?"

"새하얀...사람!?"

중얼거리는 리사의 말에 설명하듯, 몸에 묻은 분말을 털어내며 야미가 말한다.

"투명한 몸도 이렇게 하면 아주 잘 보이는군요."

"투...투명인간!?"
"그럼 폴터가이스트는 저 녀석의 짓!?"

리사와 미오가 놀라는 사이에 야미는 새하얀 투명인간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왠지 이럴땐 내가 나섰어야 할것 같은데 말이지...
능력의 다양성 면에선 야미가 우세라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 힘드네...

"대답하세요.
당신이 누구이고...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것인지..."

"......!"

주춤거리던 투명인간은 소화기를 바닥에 내던지곤 뒤를향해 도망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힉-! 모두들 도와줘!"

"모두?"



{크흐흐흐 어리석은 녀석들
얌전히 나갔으면 됐을 것을...}




이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자 야미가 긴장한채 위를 쳐다본다.
순간 벽의 나무가 박살나며 거대한 촉수한개가 튀어나와 야미의 몸을 휘감았다.

"!"

"야미야미!...꺄?!"

"야미씨?! 모미오카! 사와다!"

"무, 뭔가요 저 괴물은?!"

놀랄새도 없이 선두에 선 야미와 리사와 미오를 촉수로 휘감은채 괴 생물체는 그대로 지하로 떨어져 내렸다.
이런...!

선두와 후위의 거리가 벌어진게 문제였다.
남은 이들을 여기에 놔두고 가기에도 불안하다.
서둘러 일행을 향해 외친다.

"코테가와! 사키 선배!"

"에...?"

어리둥절한 사키 선배를 바라보며 황급히 외친다.

"얼른 계단으로 내려가자고요!
저런 괴물따위, 금방 해치워 버릴테니까!"

"저, 정말인가요?"

믿지 못하겠다는듯이 바라보는 사키 선배에게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을 한다.

"물론이죠! 깡패 수십명을 상대로도 상처하나 없었던 몸이라고요!
야미랑 두명을 최대한 빨리 구해낼껍니다!"

"그렇다면, 좋아요.
서두르죠 린, 아야."

"네, 사키님."
"괜찮을까요?"

"서두르는게 좋겠어요 아키츠군."

발걸음을 서두르며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뒤따라오는 코테가와와 선배들의 발걸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뭔가 중얼거리는 사키 선배의 소리도 함께.

'방금 사키 선배라고...'

...실수.
머릿속으로 이름을 부르다보니 급할때도 이름으로 튀어나오는군요.
지금은 넘어가고, 혹시라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면 사과하도록 하자.

계단을 다 내려가자 철문으로 닫힌 입구가 보인다.
뒤에서 당황하는 선배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문제없다.
장애물따위, 이젠 별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겠지?

"코테가와. 그리고 선배들. 문을 열테니 혹시나 파편이 튀지 않도록 피해 있으세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면서 오른쪽 주먹을 말아쥐고 힘껏 휘두른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철문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무슨...!"

놀라는 코테가와와 선배들을 뒤로하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며 지하 복도로 한걸음 들어가서 본것은 하나의 폭풍이었다.

그것은 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거운, 그리고 조잡했다.
그건 말 그대로 철퇴...아니, 인간이었다.
리토오오오---?!

"싫어어어어어!
오지마~~~!"


리토의 팔을 양손으로 잡은채 돌개바람처럼 뱅글뱅글 돌며 괴물들을 문자그대로 '날려버리는' 하루나.

「와-!」
「갸-?!」

하늘을 날며 비명을 지르는 괴물들과 더불어,
쉴새없이 돌아가는 가운데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고 혹이 잔뜩 난 리토의 모습.
「사...사, 사, 사이렌지...! 진정해...!」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리토의 소리가 들리지만,
하루나에겐 닿지 않는 모양이다.

{뭐!? 뭐냐~~!?}

풍차마냥 빙글빙글 돌면서 리토를 휘두르며 다가오는 하루나에게 겁먹은듯
야미와 리사, 미오, 라라를 잡은 상태의 문어괴물이 당황하며 소리친다.

{우와와와! 오지마~!
너...너도 붙잡아주마!}


그리곤 스르륵하고 촉수를 꺼내 하루나의 몸을 아래에서부터 휘감아 올린다.
가랑이 사이를 공략하다니, 꽤나 저질적인 속박술이군요...

"---------!
......!"

촉수가 몸에 닿은 순간 하루나의
눈이 땡그랗게 변하며 눈물 맺혔다.

파앙-!

그리곤 바닥에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리토를 이용한 강력한 양손 서브를 날려버렸다.

콰앙-!

방금전 내가 철문에 먹였던 일격과 맞먹는 소리를 울리며
리토의 몸이 문어의 눈위 이마에 부딪쳤다.
문어 괴물의 갑옷같은 이마에 금이 가며 문어 괴물은 뱅글뱅글 눈을 돌리며 기절해버렸다.

쿵...!

굉음을 내며 쓰러진 문어괴물과 마찬가지로,
어느새 찐빵모양으로 얼굴 부풀어 오른 리토도 덩달아 기절해버렸나보다.
가련....

어느샌가 하루나에 의해 괴물들은 모두 기절한채 쓰러져있었다.
코테가와는 부들부들거리며 경악한채로 하루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사이렌지씨...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야...야만스러운 아가씨군요. 품위가 없어요."

"사키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있습니다."

"! 시, 시끄러워요!"

빽하니 당황해하는 사키선배의 반응처럼, 잡혀있던 라라랑 야미도 하루나에게 놀랍다는 시선을 보낸다.

"하루나 굉장해!"

"꽤 하는군요..."

정말로 공감.
내가 별달리 활약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하루나의 능력은 놀라울 따름이다.

엉망진창이 되서 "규우~~~" 하는 소리만 내는 리토를 간호하며 끊임없이 사과하는 하루나를 바라보며,
지구인 최강 전설은 어쩌면 하루나가 가져갔을수도 있었을꺼라 생각하곤,
이 엄청난 아가씨를 좋아하게 된 리토에게 애도를 표했다.
내구력 하나 만큼은 리토도 지구 최강급이니 어떻게보면 잘 어울리는 커플이지만.

놀라움을 표현하던 라라와 야미는 시선을 돌려 쓰러진 괴인들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귀신들 잔뜩 있었네."

"아닙니다. 프린세스.
어딜봐도 모두 우주에서 온 내방자입니다."

"에?"

"그...그 말대로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문어 괴물을 보고 야미가 움찔 놀란다.
방금전 잡혀있을때 도무지 힘을 못쓰는것 같더니 저런 류의 미끌미끌한 상대는 질색이었지?
라라야 꼬리를 잡혀서 맥도 못췄을테고.
...트러블 세계관 최강 4인방인데 의외로 우스꽝스러운 약점이 있네요.
(패닉모드의 하루나라면, 최강 사천왕을 오천왕으로 만들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문어 우주인은 이마를 촉수로 쓰다듬더니 말했다.

"우...우리들은 모두 고향 별에서 정리해고 당했어.
우주를 방랑하다가 이곳에 흘러들어오게 되었지.
그리고 어느샌가 그런 녀석들이 모여들어서..."

"저...정리해고?
우...우주에 정리해고 같은게 있는거야?"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곤 하루나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리토가 어이없다는듯 물었다.
코테가와조차 같은 감상인듯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과연... 그래서 거처를 지키기 위해 유령소동을 일으켰다 이거로군."

부서진 철문방향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며 말하는 소리에 모두들 놀라서 고개를 향했다.
하얀 의사용 가운을 입고 뾰족한 귀를 가진 짧은 흑발의 여성. 미카도 보건 선생님이다.

"미카도 선생님!"

"오랜만이네."

라라의 반가운듯한 목소리에 미카도 선생님이 답하자 우주인들이 저마다 수근거린다.

"미카도...?"
"그 유명한 닥터 미카도!?"

우주인들의 반응이 재밌는지 입가를 가리며 쿡하고 웃던 미카도 선생님이 우주인들에게 놀랍다는듯 이야기해왔다.

"후후...당신들 이 아이들에게 손을 대고도 용케도 그 정도로 끝났나 보네."

"에?"

...또 놀려먹을 생각이시군요 미카도 선생님.
아니나 다를까 노린듯한 극적인 연출로 우주인들은 엄청나게 경악한 반응을 보였다.

"데빌루크의 공주와...!
살인청부업자 「금색의 어둠」!?"

아니, 야미는 아마도 폐업했을껀데...
과거의 명성이 어디로 가는건 아니지만.

우주인들이 한곳에 모여 부들부들 떨며 생명을 청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미카도 선생님...심술궂게 너무 겁주지 마시지 그러셨어요.

"히이이익~
죽이지마~"

"아이 참 그런짓 안 해~"

난처해하는 라라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니
문어 우주인이 야미에게 달라붙으려 하며 울고있는게 보인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조...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베어버릴거예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다가오는 문어 우주인의 모습은 불쌍해 보이기도 하면서도,
솔직히 좀 무섭다...
징그러운게 질색인 야미는 몸을 뒤로 빼면서 왼손을 칼날로 만들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카오스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가운데 따라가지 못한 학생들이 멍하니 있으려니,
장본인인 미카도 선생님이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면서 우주인들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사정은 알겠는데 역시 여기에서 사는것은 안 좋을거라 생각해.
...어쩔 수 없지.
내가 당신들에게 일을 소개해 주도록 할까!"

"에!?"

놀라며 바라보는 우주인들에게 웃으며 미카도 선생님이 말한다.

"아는 사람 중에 지구에서 유원지 경영자를 하고 있는 우주인이 있어.
당신들 귀신의 집 같은 곳에 딱 맞지 않아?"

"저...정말입니까! 야호~!"

환호하는 우주인들을 바라보던 코테가와가 슬그머니 내게 다가와 묻는다.

"아키츠군... 설마하니 저 선생님도 우주인인가요?"

"응. 닥터 미카도라고 하면 우주의 유명한 의사라고 하더라고.
야미의 치료를 담당하는 주치의기도 해."

"아...그래서 야미씨가 학교 보건실에서...
그나저나 우주인들이 꽤 많이 지구에 와있나 보군요?"

"그렇지? 나도 좀 신기하게 생각해."

코테가와와 대화를 주고 받고 있으려니 옆에서 사키 선배도 대화에 참가해왔다.

"그럼 구교사의 유령에 대한 소문은 귀신에 의한 소행이 아니었군요."

"아, 텐죠인 선배?"

내가 반응하자 사키 선배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한다.

"...편하게 불러도 괜찮아요 아키츠군."

"어...그래도 되나요?"

어색하지 않았으려나 걱정했는데 말이지...
내가 난처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사키 선배가 말을 덧붙인다.

"뭐, 당신에게는 발렌타인데이때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유우키군이 이상한 짓을 하려던걸 막아줬던 적도 있고,
오늘 구교사에 갖혀있던걸 도와준것도 있으니...이름을 부를 자격은 충분해요.
린과 아야도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요.
그렇죠?"

"에?...아, 사키님 말씀이 맞습니다."

"네, 이름으로 부르는 정도라면..."

"아하하...고마워요 사키 선배도, 린 선배도, 아야 선배도."

"...나야말로 멋진 후배를 알게되서 기쁘군요.
불량스러운 외견에 비해서 꽤나 견실하잖아요?"

"하...하...하...그런 소리 많이 듣는 편이죠."

어딜가나 이 외모가 문제라는건 참 고민이다.
사람에 대한 인식은 첫인상이 70%를 차지한다는데,
언제쯤 이놈의 수염과 머리를 고칠수 있을까 답답해졌다.

한편 리사와 미오는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하루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하루나 진정됐어?"

방금전의 소행을 벌인 일도 있기에 하루나는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응...그런것 같아."

"근데 결국은 귀신의 짓이 아니었구나."

"맞아 맞아. 몇 번이나 쫄아서 손해만 봤잖아."

"그건 그렇고 저 사람들도 우주인이란걸 알고 나니까
그렇게 무섭지 않아 그치?"

"아하하!"

리사와 미오가 가볍게 떠들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행이네요...모두들 일자리를 찾아서...}

"에?"

처음으로 듣는 맑은 목소리에 리사가 깜짝놀라 돌아본다.

거기에 서있는건 도깨비불 두개에 감싸진 상태로,
전통복을 다소곳이 차려입고 양 귀밑 머리에 장식을 한 장발의 소녀 유령.

{이걸로 저도 조용히 지낼 수가 있게 됐어요.}

하루나는 눈이 점으로 되어 창백해지고,
리사와 미오는 입을 쩍 벌린채 굳어있다.
리토는 얼굴에 종선이 나있고, 라라와 야미는 멍하니 바라본다.
코테가와는 땀을 흘리고 있고 사키선배 일행도 눈을 크게 뜬 상태다.
미카도 선생님도 어머나 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괴물들은 쉴새없이 땀을 흘리고 있다.

이쪽의 반응을 신경쓰지 않은듯 소녀의 유령은 활짝 웃으며 자기 소개를 한다.

{아, 말씀드리는게 늦었네요.
전 400년전에 이 땅에서 죽은 오시즈라고 해요♪}



「「「끼......

끼야아아아 정말로 나왔다~~~~!!」」」

「「「우와아아~~~~!!!」」」





허겁지겁 구교사 밖으로 달아나는 동료들과 우주인들을 내보내며 가만히 오시즈를 바라본다.
홀로 남은 나를 바라보던 오시즈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도망가지 않나요?}

"무섭지 않으니까 도망가지 않아."

웃으며 말을 건네는 여자애 유령은 무섭다기보단 코미컬할거다.
「유령의 밤」때 보았던 유령분장은 진짜 유령도 능가했다고.

{그런가요?}

"그것보다 400년이나 이곳에서 혼자 지냈다면 외롭지 않아?"

{모르겠네요...심심하다면 심심하지만요.}

"지금의 세상...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마을은 우주인마저도 납득하는 곳이니까,
원한다면 밖으로 나와 방금전 사람들을 만나보는것도 좋아.
친절한 사람들이니 익숙해지면 금새 웃으며 대해줄거라고."

{그럴까요?}

"그래. 방금전 흰 가운을 입은 미카도 선생님을 찾아서 보건실로 가본다면,
어쩌면 활동할수 있는 육체를 줄수도 있을테니까 힘내보라고."

{에...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
다만, 이 마을의 개는 이상한 녀석들이 많으니까 마을을 다닐땐 조심하고."

{...고마워요.}

살짝 웃음을 보이는 오시즈의 모습에,
400년전의 아가씨면서도 왠지 연하로 느껴져 웃으면서 오시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손을 치우자 놀란듯한 얼굴로 머리를 매만지는 오시즈가 보인다.

"그럼, 나도 이만 가볼께. 안녕~"

{아...당신, 어떻게...?}

"바깥에서 다시 만나면 대답해줄테니까~!"

점심시간도 거의 끝나가겠다,
수업에 늦으면 안되니까 이만 아디오스~
당황하는 오시즈를 뒤로하고 나도 재빨리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섰다.



나와보니 구교사 앞의 철조망 근처에 서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우주인들은 미카도 선생님을 따라 어디론가 가버린듯 했다.
곧 수업이 시작할텐데 어째서 저렇게 서있는지 궁금해 다가가 물었다.

"어이~ 다들 지금 뭐하고 있어?"

"아, 아키츠군."

약간 당황한듯 답하는 코테가와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곧 수업종이 울릴텐데 여기서 뭐하는거야?"

"그게...함께 팻말에 적힌 글을 해석하고 있었어요."

"아직도?"

"아뇨. 이제 막 끝난 참이에요. 그런데..."

머뭇거리는 코테가와의 모습이 이상해서 갸웃하고 있으려니,
야미가 진지한 분위기로 내게 말했다.

"아키츠 료스케."

"으응?"

"방금전 닥터 미카도와 함께 이곳으로 나온뒤 글이 적힌 팻말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문득 일행을 쳐다보니 당신만이 빠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는걸 말입니다."

어느새 추리모드로 들어간건지 심각한 분위기를 잡고 말하는 야미의 모습에
다른 친구들도 왠지 집중하는듯 했다.
방금까지 어떤 결론을 낸듯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데 대체 어째서?

"그러니까 만약, 당신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 구교사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내가 없었다면?"

"네."

"글쎄...특별히 뭔가 바뀌기라도 하는거야?"

"바뀝니다."

척- 하며 손가락을 내세우며 야미가 말했다.

"아키츠 료스케. 당신이 빠졌을때의 상황을 가정해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없었다면 저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보건실을 나선 저는 코테가와 유이와 이야기 하지않고 좀더 일찍 구교사로 갔을테고,
구교사 2층엔 신경쓰지 않고 평소처럼 1층의「도서실」로 향했겠지요.
그리곤 1층을 탐색하던 프린세스 일행과 마주칠수도 있었겠죠.

코테가와 유이도 복도에서 마주친 저와 이야기 하느라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구교사로 갔겠지요.
시간이 늦지 않아 1층의 클래스메이트들과도 제대로 합류할수도 있었을테고 말이죠."

"그렇다면...그렇겠지?
야미와 코테가와의 접점은 그당시 없었으니까 말야."

내가 수긍하자 야미와 코테가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주의를 모으고 야미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러면, 이제 시를 분석하겠습니다...

12명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쫓는다.

목소리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메아리는...유령이라고 생각했지만 우주인들이었습니다.

「여왕」은 「호위」에게 횃불을 넘기고,
「호위」는 「시종」에게 횃불을 넘기고,
「시종」은 메아리에게 횃불을 넘긴다.


「여왕」「호위」「시종」은 각각 텐죠인 사키, 쿠죠 린, 후지사키 아야를 가리킵니다.

어둠이 찾아오고, 「여왕」과 「호위」와 「시종」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횃불은 그들이 떨어뜨린 손전등을 의미하고,
저희가 2층으로 가지 않았다면 세사람은 아직도 구교사에 갇혀 있었겠죠.

「잉태되지 않은 자」가 「꼬리 달린 자」에 매달려 대롱거린다.

「잉태되지 않은 자」는 프린세스의 옷을 구성하는 메카인 페케를,「꼬리 달린 자」는 프린세스를 의미합니다.

「꼬리 달린 자」는 바다에 빠지고 「잉태되지 않은 자」는 파도에 삼켜진다.

방금전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일행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걸어다니는 인체모형, 해골들에 의해서 수도관이 터져 프린세스가 쏟아지는 물에 휩싸였다더군요.
그 도중에 페케가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눈물 흘리는 자」가 「쌍둥이」에 기대어 울부짖는다.

「눈물 흘리는 자」는 사이렌지 하루나. 유령을 극도로 무서워 합니다.
「쌍둥이」는 콤비(페어)인 모미오카 리사와 사와다 미오를 상징합니다.

「쌍둥이」가 메아리에 떨어진다.

방금전 두명이 문어 우주인에게 사로잡혔을때의 상황을 뜻합니다.

「동류가 아닌 자」가 「그림자」에게 덤벼든다.

아키츠 료스케...당신이 없었다면, 유우키 리토는 유일한 남성이 됩니다.
따라서 「동류가 아닌 자」는 유우키 리토를 의미하는거죠.
「그림자」는 어둠(야미)을 뜻하는 저입니다.
그러면 유우키 리토가 저에게 덤비는 상황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었죠.
다만 예상하자면, 아마도 1층의 도서실에 제가 있었다면,
긴장한 유우키 리토와 사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림자」가 메아리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투명인간의 정체를 밝힌다는걸 의미합니다.
하얀 분말가루를 뒤집어쓰고 투명인간은 결국 정체를 드러냈지요.

「눈물 흘리는 자」가 「동류가 아닌 자」를 메아리에 내던진다.

지하에서 사이렌지 하루나가 유우키 리토를 휘둘러 우주인들을 쓰러뜨린걸 의미합니다.

「부정하는 자」가 메아리를 부정한다.

코테가와 유이가 유령의 존재...실제는 우주인이지만, 유령을 부정한것을 뜻합니다.

「눈물 흘리는 자」가 춤추고, 「부정하는 자」는 「눈물 흘리는 자」를 부정한다.

사이렌지 하루나가 몸을 회전시키면서 공격하던걸 춤을 춘다로 표현한것 같습니다.
코네가와 유이는 그 모습을 보고 사이렌지 하루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이끄는 자」가 메아리를 찾는다. 

가르치는 자, 교사인 닥터 미카도가 우주인들을 발견하는걸 뜻합니다.

「이끄는 자」가 메아리에 손짓한다.

닥터 미카도가 우주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걸 의미합니다.

「잊혀진 자」가 되돌아온다.

방금전 스스로를 '오시즈'라 소개한 유령이 나타난걸 뜻합니다.
400년전에 죽었다고 했으니...잊혀졌다는 표현은 들어맞겠지요.

더이상 목소리도 메아리도 울리지 않는다.

우리들이 모두 구교사를 벗어나고,
우주인들도 모두 떠나가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꺾쇠(「」)표시가 된 인물이 모두 13명임에도,
12명의 목소리라 표현한 이유는...
「잊혀진 자」는 메아리를 쫓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중 동료가 아닌자는 「잊혀진 자」였던 거죠."

긴장한 얼굴로 야미를 바라보던 일행들이 야미의 대사가 끝나자 하나 둘 크게 숨을 몰아쉰다.

짝짝짝-

라라가 순수하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친다.

"대단해 야미짱!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어?"

"과찬입니다. 프린세스."

"야미야미는 대단하네~"

"귀여운 아이치곤 꽤나 흥미로운 설명이군요."

"재밌는 설명이었어요 야미씨."

"아아~ 결국엔 이 글도 그렇게 무섭진 않았잖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들을 보고는 왠지 소외된듯한 느낌에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야미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야미?"

"왜그러십니까 아키츠 료스케?"

"어째서 12명이어야 하는데 13명이었는지,
각각의 호칭의 의미가 뭔지는 정말 흥미있게 들었어.
솔직히 정말 감탄했다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 있어?"

"네?"

어리둥절한 야미에게 좀더 직접적으로 추궁한다.

"그,러,니,까. 어째서 이 시에서 '나'는 빠졌을까요 명탐정 야미씨?"

"그건..."

"한문장으로 깔끔한 결론을 부탁해요~"

"그, 그러니까..."

아...당황한다. 당황한다.
놀리면 안되는데 당황하는 야미의 모습이 무언가 가슴을 간질인다.
코테가와가 심술궂게 구는 내 모습을 보더니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째려본다.
미안, 장난이었으니까 얼른 사과할께.

"야미, 그냥 농담이었으니까..."

"...버, 범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시에선 등장도 못한 사람이 난데, 어째서 갑작스레 범인설?!
야미도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이상한 말을 꺼내고선 얼굴이 빨개져서 침묵하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매만지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야미에게 물었다.

"야미...너 최근에 추리소설 읽고있어?"

"...소년탐정 김○일. 재밌었습니다..."

그거였냐?!

나와 야미의 웃기지도 않는 말놀음을 보던 리토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결국, 아키츠도 와서 14명이 되었으니 이 예언은 틀린거지? 
애초에 나와 관련된 예언 하나도 확실히 빗나갔잖아."

"우응~아마도 그렇겠지~?"

라라가 동의를 표하자 리토가 질린다는 듯이 나무판을 바라본다.

"누가 이런 악취미적인 시를 썼는지 몰라도,
더이상 이런건 보고 싶지도 않아.
계속 놔두다간 학교에 괴담이 추가될거라고."

"에~ 재밌지 않아?"

"그래 그래.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거라고~"

"재밌겠냐!"

에~하며 불만을 품는 리사와 미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리토를 바라보던 라라가 웃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이거 뽑을께~!
친구들이 불안해하는건 치우지 않으면~!"

그리곤 바닥에 박혀있는 나무판을 엄청난 괴력으로 단번에 뽑는다.

후두둑-

깔끔하게 뽑아져 나온 나무판 아래로 흙이 떨어져 내렸다.
라라는 웃으면서 나무판을 한쪽 손에 들고 말했다.

"그럼 이건 내가 가져가서 처리할께~.
어딘가 적당한데 버리면 되겠지.
...어라?"

갑자기 고개를 갸우뚱 하는 라라의 모습에 일행이 행동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대표로 궁금해하던 코테가와가 물었다.

"왜그러나요 라라씨?"

"에, 그게...
땅속에 한문장이 더 있는데?"

「「「에-?」」」

모두가 라라가 들고있는 나무판에 가까이 다가가자,
흙이 묻어 지저분한 나무판 바닥에 무언가 글씨가 쓰여져 있다.
호기심에 들뜬 일행이 라라에게 물었다.

"뭔데 뭔데?"

"그게, 흙이 묻어서 잘 안보여~. 좀 털어낼께."

"어디 어디..."

"...에?"

"이건...?"





- 그러나 이 예언은 시작하지 않으면 끝나지도 않는다.



「「「......」」」

으스스한 공기가 일행을 감싸안으며, 주위는 한동안 침묵에 휩싸였다.

「예, 예언따위...안 믿어.」
「귀...귀신?」
「누군가요 대체! 이,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한 사람은...!」
「사, 사키님...추우신가요?」
「...꼬르륵」
「하, 하루나?!」
「사, 사이렌지! 괜찮아?」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는 일행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미안.





이후 구교사에 대한 괴담이 엄청난 기세로 학교에 퍼졌다.
예언같은 글귀와 그대로 일어난 사실.
만약 일행의 숫자가 딱 맞아떨어졌다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되어 피에 점철된 소문으로 바뀌어 버렸다.

괴담의 이야기 속에 내 존재가 빠져 있었던 것도 구설수에 올랐다.
어째서 괴담에는 아키츠 료스케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유령이 아키츠 료스케를 두려워 했다든가,
아키츠 료스케야말로 괴담의 진짜 주인이라든가,
모든 괴담의 배후에는 아키츠 료스케가 있다든가,
사령술사(네크로맨서) 아키츠 료스케의 공동묘지 괴담따위의
얼토당토 안한 이야기들이 돌면서 나를 보는 학생들의 시선속에 깃든 두려움이 증폭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심지어는 지금까진 벌레보듯한 시선만 보내오던 여학생들마저도 섬뜩해하며 시선을 피하는게 울고 싶었다.

미안한거 취소.

난 그저 반복적인 교내 봉사가 좀 따분했을 따름이고,
봉사하는 김에 구교사에 들어가려는 녀석들을 좀 막고 싶었을 따름이고,
어쩌다보니 팻말이 좀 깊숙히 박혀서 마지막 문장이 파묻혔을 뿐인데...

자업자득이라지만 지금의 상황은 내게 너무나 힘듭니다...





p.s. 아야 선배가 최근들어 조금은 센스가 돋보이는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맵시없는 불투명 동그라미 안경에서 벗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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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추가

(왼쪽부터 쿠죠 린, 텐죠인 사키, 후지사키 아야 )


(후지사키 아야 - 안경 벗었을 때)


(어릴적 셋의 모습)


(오시즈 - 유령)


마지막 시구는 국내 모 대작의 오마주.
(10년 전 작품이니 네타는 아니겠지?-_-;)

아무튼...원작상으로도 4화에 걸쳐 진행된 이야기다 보니 분량이 좀 되는군요=_=;

그리고, 도도한 아가씨 사키양은 원래라면 이렇게까지 자주 이야기에 등장할 아가씨가 아니었지만,
'스토리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을 활약시킨다'는 것에 충실하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저스틴과 행복하게 되길 바라는건 정말이에요?( -_-);; 



p.s. 원작의 이야기는 야미가 해석한 내용과 같습니다.

구교사의 유령의 소문을 밝히기 위해 사키,린,아야가 밤중에 구교사를 들렀다가
어둠속에서 빛나는 두개의 눈동자를 보곤 비명을 지르며 손전등을 떨어뜨리는걸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다음날, 유령의 소문을 들은 라라, 하루나, 리토, 리사, 미오가 구교사를 찾습니다.
도서실에서 나오는 야미를 흉악범으로 오해하고 리토가 덮치는 에로한 해프닝이 벌어지고 야미가 합류합니다.
이후 코테가와가 등장해서 유령따윈 없다며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때 {나가}란 소리와 함께 복도가 붕괴되면서 라라,하루나,리토,코테가와가 떨어집니다.
야미, 리사, 미오는 떨어진 일행을 찾기위해서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을 찾아보게 됩니다.

아래층에선 조그만 털뭉치 우주인들에 의해 움직이는 인체모형과 해골모형으로 인해서 수도관이 터져
라라가 물에젖어 페케가 떨어져나가서 알몸이 되는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이때 하루나는 기절합니다.

위층에선 투명인간을 만난 야미가 소화기를 터뜨려 투명인간의 정체를 밝혀냅니다.
이후 동료의 도움을 바라는 투명인간으로 인해서 거대 문어 우주인에 의해 야미,리사,미오가 붙잡힙니다.

굉음과 함께 아래층으로 떨어진 문어 우주인에게 라라마저 잡혀버리고,
수십명의 괴물들이 복도에서 튀어나와 절체절명의 순간,
기절했던 하루나가 괴물들을 보곤 패닉상태에 빠져 리토를 휘둘러 괴물들을 때려눕힙니다.

상황이 정리되고, 그들의 정체가 유령이 아닌 우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고,
소란스러운 구교사의 상황을 보러온 미카도 선생님이 우주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줍니다.

이후 진짜 유령인 오시즈가 우주인들이 직장을 구한걸 축하하러 나타나자 모두들 비명을 지릅니다.

이때 구교사의 창고같은 곳에 숨어있던 사키, 린, 아야는 갑자기 들려온 비명소리에 벌벌 떠는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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