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돌아왔다.

며칠전 까지만해도 가을이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묻지마라. 나도 모르니까.
난데없이 여름 교복을 입고서 등교해야 했던 내 심정을 이해해 달라구.
고교 2학년에 와서 여름을 두번이나 겪게 되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사자에상 시공」인가?
깊게 생각해도 답이 나오진 않을것 같았기에 적당히 일상에 순응하기로 했다.
기껏 정리해놓았던 여름 옷들을 다시 꺼내는게 번거로웠지만,
며칠전 싸게 샀던 여름 옷을 입을 기회가 빨리 찾아온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고.
아무튼 후끈후끈한 날씨탓에 어젠 창문을 열어놓고 잠들었는데...



잠결에 느껴진 위화감에 눈을 떴다.
양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숨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왼쪽을 본다.

스으-

핑크색 단발 소녀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고 있다.

"......"

오른쪽을 본다.

냠-

살짝 웨이브진 핑크색 장발의 소녀가 내 팔을 잡고 물고 있다.
오물거리는 가운데 드러난 송곳니가 인상적이다.

"......"

왼쪽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는 애가 '모모', 오른쪽에서 내 팔에 이빨을 들이댄 녀석이 '나나'.
얼마전 가상 현실 게임속으로 나와 친구들을 초대했던 라라의 동생들이다.
뭐라고 할까 '기분좋은 꿈이로군.'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꿈은 아닌 것 같다.
...이 녀석들이 왜 여기 있어?
얌전히 자고 있는 모모는 냅두고서라도, 침이 잔뜩 묻어있는 오른팔에 이빨을 박은채 잠들어있는 나나의 모습에 몰래 한숨을 쉬었다.
옷 빨아야겠네.

그전에...분위기 좋으니까 한 숨 더 자자.

새근대는 숨소리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게 조금 더 이대로 있고 싶은 맘이 든다.
주말이기도 하니 조금 정돈 여유 부려도 괜찮겠지.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잠들어 있는 꼬맹이들의 모습을 한차례 눈에 담은 후 새액새액 대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한번 잠에 빠졌다.




해가 중천에 걸렸을 즈음 나나와 모모랑 사이좋게 눈을 떴다.
서로 졸린 눈으로 하품한 채 인사를 나눈 후,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거실에 앉았다.
자면서 풀어두었던 머리를 다시 트윈테일로 묶는 나나와 거울을 보며 머리띠를 쓰는 모모를 거실에 두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건네받은 음료수를 마시면서 모모가 용건을 말했다.

"잠시만 여기서 머물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그게, 언니 생각이 나서 지구로 왔는데 정작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아서요."

"잠잘 곳을 찾던중에 네가 사는 집이 떠올랐단 말이지.
혼자 사는 집 주제에 비교적 넓었으니까."

"그게 이유냐..."

가끔 부모님도 주무시고 가시니까 셋이 지낼 공간은 충분한 집이긴 하다만 얘내들도 참 거리낌이 없구먼.

"뭐야? 혹시 안되는거야?"

"아니, 나야 물론 환영인데."

뭐, 라라의 동생들이기도 하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귀엽고.
대뜸 남정네 집에 쳐들어와서 재워달라고 부탁하는걸 보면 역시 애들인건지, 베짱이 좋은건지 모르겠다만.

"나야 상관 없지만 너희들로서는 유우키네 집이 더 좋지 않아?
유우키 집엔 라라도 있으니까 함께 있을 수 있잖아?"

"저번에 언니를 게임속으로 초대할 때 가보니까, 거긴 남는 방이 없던데?"

"방이 없어?"

"네. 라라 언니가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요?
리토씨의 벽장 속이라구요."

"해리○터!?"

라라 방이 따로 있는게 아니었어?
그야 목욕탕 넓히는데 쓰던 공간왜곡을 이용하면 벽장 속에도 방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좀...
아니, 그전에 리토네 집은 2층짜리 주택이잖아! 근데 어째서 남는 방이 없어?
방이란 방을 죄다 창고로 쓰기라도 하는거야? 이상하잖아!
가볍게 패닉에 빠져 외친 내 말을 이해 못한 나나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모모의 말을 보충했다.

"좌우지간 언니랑 같은 곳에 지내는건 어려울 것 같더라구.
게다가 거기 있으면 저스틴한테 들킬...앗."

"(나, 나나!)"

아차 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나나와 당황하는 모모의 태도에 어리둥절 하다가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야, 너희들 설마...?"

"아, 아하하~"

어이없어하는 내 반응에 모모가 어색하게 웃었고 나나가 얼굴을 외면했다.

"...귀찮았단 말야. 가정교사는 재미없게 자꾸만 우주의 역사랑 예의범절만 가르치구."

볼을 부풀리며 작게 투정하는 나나의 말에 확신을 가졌다.
응, 알겠다. 역시 얘네들도 라라처럼 '가출'한건가.
공부하기 귀찮았다던가 하는 이유로 지구로 도망쳐온건 어쨌건 리토의 집에 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리토네 집에 있으면 저스틴에게 틀킬 위험 100%니까.
가출하면서 저들 나름대론 머리를 굴렸나보다.
끄응~하며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매만지는 내게 모모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스틴의 눈길을 피할수 있으니까 료스케씨의 집에 온건 맞지만 꼭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료스케씨는 신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신용?"

"저번에 저희랑 먼저 만났던걸 다른 사람에겐 얘기하지 않았죠?"

"응? 아, 그야 물론."

「트러블 퀘스트」시나리오 짜러 우리집에 왔을 때의 일을 말하나보다.
게임 밖으로 나온 뒤에도 딱히 말할 이유도 없었기도 했지만.

"후후, 그러니까에요."

「내가 맞았지?」하고 웃는 모모에게 나나가 쳇-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료스케씨가 비밀을 지켜줬으니까 저희도 료스케씨를 믿고 의지하고 있는거라고요."

"...말은 잘해요."

배시시 웃는 모모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정말이지, 이렇게 말하면 좋은 의미로 거절할 수 없게 되버리잖아.
쓴웃음을 지으며 항복하듯 가볍게 양손을 들어올리는 내 모습에 나나와 모모가 상쾌한 얼굴로 하이 파이브를 했다.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릴께요 료스케씨."

"잘 부탁해 아케치 료스케."

"아키츠 료스케다..."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나나에게 딴죽을 걸었다.

"나중에 지구에서 지내는걸 허락 받으면 아빠에게서 용돈도 나올테니까 그때 집세를 지불할께요.
그동안은 저희가 도울수 있는거라면 기꺼이 도울테니까요.
아, 하지만 밤놀이 상대 같은건 못해드려요?"

"할 것 같냐!"

공주님이라면서 어째서 이렇게 개방적인 아이로 자랐담?
에로한 농을 던지는 모모의 모습에 장래가 불안해졌다.
결국 우리집에 머무는 동안 나나는 청소, 모모는 식사준비를 도와주는걸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럼 지금부터 밖에 나가자~!"

모모와 함께 만든 점심을 먹고난 후, 기운 넘치는 나나와 나나의 주장에 동조한 모모를 데리고 집을 나왔다.
시간은 이제 막 1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늘 한가운데서 내리쬐는 햇살 탓인지 주말치곤 비교적 거리에 사람이 적은 편이었다.
신기한듯 이리저리 거리를 구경하는 나나와 모모를 따라가고 있는데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그며니 주위를 살폈다.

「어이, 저기 좀 봐.」
「귀여운 애들인데? 외국인인가?」
「트윈테일의 여자앤 활기찬게 귀여워 보이는데?
단발머리 여자애랑 페어룩인건가?」
「코스프레 아냐? 특이한 복장이고.」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나나와 모모의 모습을 확인했다.
쇄골과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튜브 탑 원피스.
원피스와 따로 분리되어 손목부터 팔목 약간 위까지를 가리는 검정소매.
목의 칼라를 장식한 동그란 금빛 액세서리. 스트라이프 니삭스.
갈기갈기 찢어진것 같은 디자인의 원피스 치마 아래로 언뜻 보이는 드로워즈.
나나의 복장이 붉은색과 검은색 메인이고, 모모의 복장이 검은색과 녹색 메인이라는 것을 빼면 둘이 거의 동일한 디자인이었다.
확실한건 라라의 드레스폼 만큼 이상하진 않지만, 보통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꽤나 동떨어진 차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뒤에 저녀석은 아키츠 료스케잖아?」
「설마 저 애들을 꼬셔서 데리고 다니는건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데, 역시 연하를 좋아한다는게 사실이었나?」
「쳇. 좋다 말았네.」
「귀신같은 놈. 이 거리에선 처음보는 여자애들인데 어디서 또 저런 애들을 꼬신거야?」

...내 탓도 있었네요.
소리가 들린 곳을 힐끗 바라보자 험담을 해대던 녀석들이 냉큼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한다.
작게 한숨을 내쉬자 마을 구경을 하던 모모가 이상한듯 쳐다봤다.

"료스케씨?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그런가요? 그보다 어쩐지 주위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것 같은데 혹시 저희 모습이 이상해 보이는 건가요?"

"뭐, 지구에서 일반적인 옷차림은 아니지."

"에, 진짜?"

내 말에 나나도 새삼 주위 시선을 의식했는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며 만지작 거렸다.
나도 주위 수근거림을 듣고 있기 거북했는지라 우선 나나와 모모를 데리고 옷가게로 피신하기로 했다.
적어도 둘의 옷차림 때문에 집중되는 시선은 덜어낼 수 있을테니까.



옷가게에서 내 지갑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두명의 여름옷을 골랐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 모모는 원피스로 갈아입고서 옷가게를 나왔다.
속옷 매장에서 속옷을 고르는게 조금 고역이었지만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어느덧 시간은 3시를 지나고 있었다.
한껏 달궈진 지표면에선 더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이국적 분위기에 들떠있던 나나와 모모의 기세마저도 한풀 꺾인듯 했다.

"더워..."
"조금 더운걸요."

"그럼 시원한거라도 사먹으러 갈까?"

"좋아~!"
"아. 그럼 저긴 어때요?"

"응?"

모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았다.

여동생(妹) 카페 - hasumi

...또 저기냐?

"미안하지만 저긴 안돼."

"에에~ 어째서?"
"료스케씨는 저런 곳을 자주 간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매일매일 갈 정도로 자금이 넘쳐나진 않아.
게다가 방금전에 옷을 산 뒤라서 저기에서 먹기엔 자금이 조금 빠듯하다구."

"으..."

꽤나 소지금이 줄어든 지갑을 꺼내 보이자 나나는 입을 다물곤 안타까운듯 신음을 흘렸다.
모모도 자금 사정을 알곤 더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냥 아이스크림으로 참아줘."

풀이 죽은 나나의 모습에 미안해하며 아이스크림을 사러 마트쪽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옷소매를 잡혀 발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나나가 방금전 의기소침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호기심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저기저기 아케치."

"아키츠다. 왜그래?"

"저거 맛있어 보이는데 뭐라고 적혀 있는거야?"

"응?"

새삼 얘내들이 아직 지구의 문자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곤 나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스크림 체인점 옆에 커다란 빙수 사진이 박혀있는 광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보자,「신메뉴 커플 빙수」판매중? 가격은..."

가격을 보니 지갑의 허용범위 내였다.
설명을 들은 나나의 눈이 반짝였다.

"나 저거 먹고 싶어!"

"...뉘랑 먹을거시뇨?"

"응? 그야 당연히 나랑 모모잖아."

당연하다는듯 대꾸하는 나나의 태도에 「내 몫은 없는거냐?」라는 태클은 마음속에 묻어두고 둘을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은지 얼마되지 않아 커플 빙수가 나왔다.
큼지막한 빙수볼 안에 화려하게 토핑이 된 빙수의 모습에 반색하며 나나가 스푼을 들었다.
곧바로 빙수에 스푼을 꽂으려던 나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의아한듯 물었다.

"아케치?"

"아키츠 료스케라니까...
료스케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럼 료스케. 넌 빙수 안먹어?"

"별로 상관없어."

신메뉴의 맛이 궁금하긴 하다만, 여자애들 둘이서 먹는 빙수에 괜히 스푼을 꽂을 엄두는 못내겠다.

"그러지말고 한입 먹어봐.
돈은 네가 내는건데,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으면 신경쓰인단 말야."

나나가 내민 스푼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스푼을 건네받았다.

"...그럼 사양않고."

토핑과 시럽이 섞인 빙수를 입에 떠 넣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 달콤함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는데 테이블을 뒤지던 나나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모모. 혹시 남는 스푼 없어?"

"미안하지만 나나. 이건 내 스푼이야.
그리고 네 스푼은 료스케씨가 쓰고 있잖아.
원래 스푼은 2개 뿐이었으니까."

"어? 어?"

모모의 말에 내쪽을 바라보는 나나의 시선에 입에 넣었던 스푼을 뺐다.
침이 살짝 묻어있는 스푼을 보고 당황하는 나나의 모습에 왠지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이래서야 마치 내가 어린애 먹을걸 뺏어먹은 어른이 된것 같잖아.
민망해서 한숟갈 먹은 빙수에 더이상 스푼을 꼽아넣지도 못하고 그대로 있으려니,
음음~ 하면서 맛있게 빙수를 먹던 모모가 기분이 좋은지 흥얼거렸다.

"무슨 걱정이야 나나.
보아하니 료스케씬 더이상 먹을 생각이 없는것 같으니까 저 스푼을 쓰면 되잖아?"

"무, 무슨? 저걸 어떻게 써!"

"...심한 반응이잖냐, 너."

"네가 더 심해!"

버럭하는 나나와 달리 밋밋한 내 반응이 재미없었는지 모모가 피-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재미없는 반응이네요.
이럴땐 간접키스~! 라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힐 장면이잖아요?"

"시꺼. 간접키스로 거기까지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만화속에나 있는거라고."

"여자에 대한 환상이 없네요."

없진 않지만 거기까지 숙맥인 소녀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닙니다.

"음, 역시 경험이 많아서 그런걸까요?"

"넌 날 어디까지 매도하고 싶은거냐..."

"하지만 나나는 벌써부터 이렇게나 당황하고 있다구요.
그리고 나나, 서두르지 않으면 나 혼자 다 먹어버릴지도 몰라?"

"윽...!"

모모가 스푼을 옮길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빙수를 애타게 바라보던 나나가 신음을 흘렸다.
빙수와 내가 들고있는 스푼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나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불쌍해보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모모도 놀리는건 거기까지 하라고.
자 여기 새 스푼."

냉큼 가게 한쪽에 놓여있던 통에서 새 스푼을 가져와 건네자, 비장한 눈빛으로 일어나던 나나가 「어라?」하고 당황한채 멈춰 버렸다.

"뭐해? 어서 받지않고."

"어? 그러니까..."

"빙수 녹기전에 얼른 받으라구."

내 왼손에 들린 새 스푼과 오른손에 들린 헌 스푼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하니 서있는 나나의 모습이 어쩐지 재밌어서 피식 웃어버렸다.

"뭐야? 설마 너, 내가 쓴걸 뺏어다 쓰기라도 할 생각이었냐?"

"누, 누가!"

나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옆에서 킥킥대는 모모의 반응에 그제야 모모에게 놀림당한걸 알아챘나보다.
빼앗듯 내게서 새 스푼을 가로챈 모모는 화난듯 퍽퍽 빙수를 퍼서 입에 넣었다.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빙수의 양에 함께 먹던 모모는 스푼을 든채로 아연하게 나나를 바라보았다.

"어이, 좀 천천히 먹어."

"신경꺼!"

"그렇게 빨리 먹다간 두통이..."

"흐야아아아~~~!?"

"...그러게 내가 뭐랬냐."

먹다말고 머리를 부여잡곤 신음을 흘리는 나나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걸 그렇게 빨리 먹으니 머리가 아플 수 밖에.

"안 뺏어 먹으니까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이...!"

두통이 이는 머릴 움켜잡은채 이쪽을 노려보는 나나의 시선에 반응이 곤란했다.
정작 사건을 조장한 모모는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금 빙수를 맛보고 있었다.

나나가 두통을 삭힐 동안 나나와 모모에게 라라의 지구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학교에서 라라가 벌인 일들이 흥미로웠는지 둘은 꽤 재미있는 반응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나도 말 할 맛이 났던지라 꽤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지만.



집에 돌아와 씻은 후, 상점가에서 산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와 핫팬츠, 모모는 원피스, 난 저번에 샀던 반팔 티셔츠로.
도중에 벗어둔 옷을 세탁할 때 조금 트러블이 발생했다.
민감한 나이대라서 자신들의 옷은 스스로 빨겠다고 주장하던 나나와 모모의 의견을 존중해서 세탁을 맡겼더니 그녀석들, 세탁기를 아예 망가뜨려 놓았다.
「데빌루크 특제 다크매터 세제」에 의해 검은 거품을 내뿜으며 사망한 세탁기 앞에서,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억지 웃음을 짓는 내게 둘은 얌전히 빨랫감을 넘겼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소파에 앉아 쉬면서 TV 채널을 돌리다가 화면에 나타난 타이틀을 보고 채널을 고정시켰다.

「납량특집」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고마운 방송이다.
다만 애들도 있는데 보기는 좀 그럴것 같아서 다시 채널을 돌리려는데 나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왔다.

"지금 하는건 뭐야 료스케?"

"납량특집이라고, 공포물 같은걸로 여름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프로그램이야.
하지만 너희들이 보기엔 좀 안좋을것 같아서 다른걸 보려고 하는데."

"항~! 애 취급 하지마.
나도 이제 다 컸다구."

아, 그러냐?
밋밋한 가슴을 내밀며 잘난체하는 나나의 모습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는데 모모도 가세했다.

"저도 궁금하네요. 지구의 방송은 어떨지 부디 감상해봤으면 해요."

"그래? 그렇다면야..."

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곤 나란히 TV 맞은편의 소파에 앉았다.
왼쪽에서부터 나, 나나, 모모 순으로 앉은 뒤, 마루의 불을 껐다.

"왜 불을 끄는거야?"

"이런 프로그램은 원래 불을 끄고 보는게 정석이니까."

"그래?"

"후후, 기대되는걸요?"

"뭐, 좀 있으면 시작하니까 조용히 감상하라구."

참고로 영화 제목은 「엑소○스트」였다.




"야."

"......"
"......"

"어이? 이제 끝났으니까 그만 좀 달라붙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에 매달려있는 나나를 떼어냈다.
뭐, 붙어있던 나나의 몸이 차가웠기 때문에 시원하긴 확실히 시원했지만.
모모도 굳은 얼굴로 처음보다 나나의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자정이 다 되갔다.
내일은 학교가야 하니까 이만 자야지.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자 내 뒤를 나나와 모모가 말없이 바짝 붙어 따라왔다.
어쩐지 어미 오리가 된 느낌이네.
장롱에서 베개를 꺼내들곤 나나와 모모에게 침대를 가리켰다.

"너희 둘은 침대에서 자도록 해.
난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그럼 좋은 꿈 꿔."

"자, 잠깐!"

황급히 내 상의를 잡는 나나의 행동에 나가려다 말고 몸을 돌렸다.

"...왜?"

"너, 그러고보니 귀신 쫓는거 잘한댔지?"

"아, 뭐. 어느 정도는."

빙의령 쫓는 살풀이를 하는덴 꽤나 이골이 났지.

"그, 그럼 같이 자자!"

"......"

물끄러미 나나를 바라보자 당황한 나나가 이리저리 손짓하며 변명했다.

"이, 이상한 의미는 아냐!
그냥 손님인 우리만 침대를 쓰면 미안하니까 그런거야!
영화가 무서웠다거나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그럼 귀신 쫓는건 왜 물어봤냐...

가만히 나나의 말을 듣고 있던 내 반응이 시원찮자 나나는 벌컥 화를 내며 주머니에서 뭔갈 꺼내들었다.
휴대폰? 아니, 「데다이얼」인가?
우주 마피아 잡을때 라라가 썼던 물질전송장치잖아?

"이...! 좋아!
네가 없어도 내 친구들이 있으면 충분하니까!
귀신이 나타날 낌새가 보이면 즉시 기가이노시시노기를 불러서..."

"...혹시나 해서 묻지만 걘 누군데?"

"집채만한 우주 멧돼지."

"......이건 압수."

"아!?"

냉큼 나나의 손에 들린 데다이얼을 가로챘다.

"야! 내놔~!"

"시꺼 임마! 아무리 귀신이 무섭기로서니 남의 집안에서 그런 맹수를 풀어두려는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을것 같냐!"

"무섭지 않다고 했잖아!"

"쳇, 어이 모모. 너도 가만있지말고 나나한테 뭐라고 한마디 해주라고. ...모모?"

"네?"

가만히 서있다 내말에 고개를 든 모모의 손에는 굉장히 낯익은 장치가 들려있었다.

「데다이얼」

...모모...너도냐?



결국 겁을 먹을대로 먹어버린 두 우주인 소녀들과 함께 침대에서 자기로 했다.
패닉 상태로 괴팍한 우주생물을 소환해서 집이 통째로 박살나느니 이편이 차라리 낫지.
위치는 내가 침대 바깥쪽, 나나가 가운데, 모모가 침대 안쪽이었다.
불을 끄고 어두워진 방안에서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나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료스케, 자?"

"아니."

"그래..."

안심한듯 한숨을 내쉰 나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후...

"료스케...깨어있어?"

"...너희들 잘 때까진 안 잘테니까 걱정말고 자기나 해."

"혹시 자고 있는 틈에 이상한 짓을 한다면..."

"적당히 그 소재로부터 멀어져.
애초에 그랬으면 어젠 어떻게 잤냐?"

귀신을 걱정하면서도 내쪽을 경계하는 나나의 태도에 콧방귀를 뀌었다.
으으-하며 신음을 흘리던 나나는 작게 투덜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닫았다.
...소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는건 애교로 봐주도록 하자.
아무튼 일찍 자긴 글렀군.
이후 두 녀석이 무사히 잠이 들때까지 2시간 가까이 걸렸다는것만 말해둔다.



다음날.
몸을 누르는 무게감에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내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나나가 보였다.
한팔과 한다리를 내 배위에 걸치고 잠에 빠져있는 나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쇄골과 겨드랑이가 드러난 민소매 티셔츠에 허벅지가 거의 드러난 핫팬츠 차림의 나나였는데,
거기에 잠꼬대를 어떻게 했는지 말려올라간 티셔츠 탓에 배꼽이 드러나 있었다.
배꼽 다 보인다. 얌전하게 좀 자라...
시간을 보니 아직 새벽이었다.
......좀더 자자.
나나의 몸을 바로 해주려다가 안그래도 늦게 잤는데 괜히 깨우는거 아닌가 싶어서 그냥 둔채 다시금 눈을 감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훨씬 더 굉장한 자세가 되어있었습니다.



아침식사 준비를 끝내고 나나와 모모를 깨웠다.
식사를 마친후 교복으로 갈아입은 후 열쇠를 건냈다.

"그럼 난 학교 다녀올테니까.
여기 여벌열쇠. 혹시 나갈땐 이걸로 문단속 부탁할께."

"네. 다녀오세요~"

"잘 다녀와."



학교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일은 없었다.
라라에게 나나와 모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건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라라도 딱히 뭔갈 알고있는 눈치는 아니었고.
언제까지고 숨길 일은 아니지만, 그런건 나나와 모모가 라라를 만나러 가면서 알게 되는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하교후 귀가하던 중 길가의 벤치에 앉아있는 나나를 목격했다.
벤치 주위에 몰려있는 강아지들에게 즐거운듯 말을 건네는 나나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자 나나가 손을 흔들었다.

"어이~ 료스케.
수업은 끝마친거야?"

"응. 그런데 뭐하고 있었던거야?"

"이 애들이랑 잠깐 이야기 중이었어.
최근엔 여름이라 털이 긴게 불편하다는데?"

"그러고보면 너 동물이랑 대화할 수 있었지."

"어? 알고 있었어?"

"응. 라라가 너랑 모모에 대해서 얘기해 줬거든."

"언니가?"

"그래. 귀엽고 착한 동생들이라고 어찌나 칭찬하던지 부러울 지경이었다구..."

"어, 언니도 차암~ 창피하게 그런 소릴..."

불평하지만 싫진 않았던지 나나의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마도 언니가 소중히 여겨주는게 기뻤겠지.
덕분에 기분이 들뜬 나나로부터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뒷머리만 남은 콧수염 영감님은 나만 보면 혼을 낸다느니, 가끔 보이는 멀대같은 남자는 해골을 몸에 걸치고 다녀서 먹음직스럽다느니 같은 얘기였다.
대화가 끝난후 나나는 동물들을 가상 공간으로 집어 넣었다.
듣기로는 나나의 동물 친구들이 살고있는 사이버 사파리 랜드라고 한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쫓기는 생활보단 이 편이 그 녀석에게도 좋겠지.

"그러고보면 모모는? 함께 밖으로 나온거야?"

"응. 모모는 꽃집에 가본다고 하던걸?
지구의 식물에 관심이 가나봐."

"그래? 그런데 좀 있으면 저녁 식사 시간인데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게 낫지 않겠어?"

"응. 그럼 내가 모모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찾았습니다! 나나님!"

"엣!?"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골목 귀퉁이에서 저스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마울, 브왓츠까지도.
당황한 나나를 보며 저스틴이 엄숙한 태도로 자세를 바로했다.

"데빌루크 왕의 명령을 받아 왔습니다.
비행선을 준비해두었으니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우우..."

결국 저스틴의 눈을 피한것도 하루가 한계였나.
완고해 보이는 저스틴의 모습에 나나는 신음을 흘리다 내 뒤로 숨어버렸다.
그제야 내쪽으로 시선을 돌린 저스틴이 눈썹을 찌푸렸다.

"음? 넌...그 수염 성인이로군?"

"...슬슬 날 이름으로 부를 때도 되지 않았어?"

"흥."

당치않다는듯 코를 울린 저스틴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평소의 바보같은 눈매와 달리 강렬하게 빛나는 시선에 긴장하고 있자 저스틴이 씹어뱉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저번엔 우리가 꽤나 신세를 진거 같더군. 
제법 엉망진창이었다고 하던데. 난 빚지곤 못사는 성격이라서 말야..."

"야, 튀어!"

"꺄악!?"

저스틴의 말이 끝나기 전에 냉큼 나나를 안아들고서 순식간에 도주했다.

"뭣!? 기껏 좋게 봐줬더니...!
거기서라 이 유괴범 놈아!"

"좋은 의미였어!? 그게!?"

난 또 신세를 졌다는 말에 칼부림이라도 하는줄 알았더니!
우주인식 대화법인가? 뭘 저렇게 이상하게 말하는거야?
아무튼 기왕 튄거 여기서 발목이 잡히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놀렸다.
상점가를 뛰어다니면서 저만치 꽃집 앞에서 꽃들을 구경하고 있는 모모의 모습을 발견했다.

"어이~! 모모!"

"어머? 나나, 료스케씨? 무슨일..."

"캐치~!"

"꺄앗~?"

자세를 바꿔 양팔에 재주껏 한명씩 들어올린뒤, 팔에 앉은채 내 머리를 부여잡은 두명의 비명을 들으면서 다시금 속도를 높였다.

「두분을 내려놔라 이 못된 수염성인 놈아!!!」

"할 수 있으면 해봐라아아아!"

분노한 외침을 내뱉는 저스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상점가를 질주했다.
한참동안 이어진 술래잡기 후, 더이상 따라오는 기척이 없자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안 쫓아오나?"

"못 쫓아오는게 아닐까요?"

안심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팔뚝에서 내려온 모모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스틴은...'길치'니까요..."

"...허무한 승부였다."

그런줄 알았다면 차라리 골목길을 요리조리 돌아가는게 나을뻔했군.



이후 집으로 돌아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나나와 모모에 의해 설득이라는 이름의 무력시위가 저스틴 일행을 상대로 행해졌다.
초거대 멧돼지짱(기가이노시시노기)이라든지 뿌리를 촉수마냥 움직이는, 나무인지 의심스러운 인면수(人面樹)의 도움으로 말이지...
결국 둘을 데려가는데 실패한 저스틴의 보고로 나나와 모모의 지구 체류가 인정되었다.

다만 유감스러웠던 점은...

"기가이노시시노기이이이이------!"

"괘, 괜찮아! 포○몬 센터에 데려가기만 하면 이런 상처쯤은..."

"그게 뭔데!?"

도중에 목표물을 착각한 멧돼지짱과 나의 사소한 충돌사고가 있었다는 것과, 이 세계엔 '포○몬 센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절한 멧돼지짱을 전송기로 되돌린 후, 미카도 선생님께 맡기는 걸로 겨우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상점가에서 벌어졌던 추격씬이 야쿠자 영애 납치범과 야쿠자의 추격전으로 왜곡되어 마을에 퍼졌다.
한동안 소문이 사그라들진 않을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묵묵히 두 녀석의 옷감을 세탁기 넣어 돌리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
오늘(8월12일) 자정에 터틀러님께 축전을 받았습니다.
'연재 2주년 기념 축전'이요.ㅠㅠ
저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쿨럭쿨럭;
덕분에 저도 빨빨빨거리면서 쓴지라 다행히 오늘내로 올릴 수 있었네요; (분량은 좀 짧았지만요^^;)
료스케의 양아치버전+여성화버전+완전체버전이 함께 있는 축전이라서 더 감동이었습니다.

멋진 축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터틀러님~!

이불이를 아껴주시는 독자님들도 정말 감사드려요~!*^^*

완결까지 즐거운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닷!+ㅂ+/

*** 터틀러님께서 보내주신 35화 축전을 하단 참조 이미지에 추가하였습니다.
나나와 모모가 귀엽게 나왔더라고요^^
축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터틀러님^^

p.s. 참조 이미지

제 2왕녀 나나 아스타 데빌루크

제 3왕녀 모모 베리아 데빌루크

나나 모모 여름옷 1

나나 모모 여름옷 2

나나 머리 품

나나 머리 품(원피스)

기가이노시시노기쨩(멧돼지)

터틀러님의 35화 축전(납량특집 관람)

p.s.2. 연재 2주년 축하 축전 by 터틀러님 *-_-*


Posted by 루트(根)
,

축전을 보내주신 터틀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2주년 기념 축전' 정말 감사드려요ㅠㅠ


료스케 완전체


쾌남아!

턱을 치켜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멋집니다+ㅂ+b

역시 전대물 레드!!

그리고 나서 배틀물 주인공 아니냐는 소리를 들으셨다고...맞는 말입니다ㅋ(퍽!)





료스케 표정집1


1. 화난 얼굴

2. 헬렐레한 얼굴

3. 곤란한 얼굴

4. 옆모습

입니다.

개인적으로 2번의 얼굴이 참 귀엽게 잘 나왔다고 생각합니다*-_-*

정말로 큐트해요=3=/~♥

4번의 옆모습도 핸썸하게 잘나왔고요. 옆모습 그리는거 정말 어렵던데 멋지게 잘 그리시더군요d+ㅠ+b





료스케 표정집2


5. 웃는 얼굴

6. 진지한 얼굴

입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는 료스케의 모습이 즐거워 보이더군요^^

수염깎은 얼굴들을 계속 보다보니까 이녀석 정말로 빨리 얼굴 깔끔하게 해줘야 하는데...하고 고민하게 됩니다^^;

연재가 빨리 될수록 빨리 깎을테니 분발하겠습니다(퍽)





코테가와 엔딩


터틀러님이 마음에 그리시던 코테가와 엔딩입니다^^

코테가와랑 료스케가 행복한 미래를 맞이하길 바래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저런 미래를 맞이할 수 있도록 바래야죠+_+/





★이불이 2주년 기념 축전★




터틀러님께서 보내주신 8월 12일 이불이 연재 2주년 축전입니다.ㅠㅠ

자정에 받아서 정말 놀랬습니다.ㅠㅠb

그저 감사의 말씀을 드릴뿐ㅠㅠ

양아치버전&여성화버전&완전체버전이 만화 타이틀컷처럼 되어있는데다가 Congratulation이라고 되어있는것까지 감동의 향연이더군요 어흑흑ㅠㅠ

정말 감사드려요 터틀러님~!

이불이 연재 힘내겠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섰다.
겸사겸사 상점가에 들러 철지난 여름 옷을 싸게 구매하곤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도착했을 무렵엔 이미 날이 저물어 어두워진 공원을 가로등의 불빛이 밝히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여름옷을 정리해서 보관해 두어야겠다고 마음먹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만치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인형이 보였다.
흰색 블라우스에 짧은 치마를 입은 하루나였다.
애완견인 마론을 품에 안은채 어쩐지 초조해 보이는 표정으로 빠르게 걷는 하루나가 걱정되서 불러보았다.

"사이렌지?"

"!? 누, 누구?"

내 부름에 흠칫 놀란 하루나가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뒤로 물러섰다.
기분 탓이 아닌지 얼굴에는 명백히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응?"

왜 그러나 싶다가 공원의 나무 그림자 때문에 내 몸이 가려진 상태란 걸 깨달았다.
가로등의 불빛이 비치는 곳으로 이동해 모습을 드러내자, 하루나는 얼굴이 풀어지더니 움츠러든 어깨가 내려갔다.

"...아키츠군..."

"이런 시간에 만나다니 우연이네.
산책중이었어?"

"아...응, 마론의 산보를 시키고 있었어."

"...마론의? 그런것치곤 마론을 안아들고 있잖아.
걸음도 빨랐고 긴장한 것 같던데...혹시 무슨 일 있었어?"

명백히 이상한 상황에 좀더 하루나를 추궁해보자 하루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게...자꾸만 누군가 쫓아오는 느낌이 들어서..."

"...스토커?"

"으응. 최근 저녁에 산책을 할 때면 계속해서 그런 기척이 들어."

깡패들이랑 헌팅남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번엔 변질자 놈들이 설치는거냐?
야미 납치 미수 오해로 내게 설교하던 경찰이,
「최근 공원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난다는 제보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어.」라며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게 떠올랐다.
만약 변질자가 나타난다면 즉시 경찰에 넘겨버리겠다고 마음먹곤 불안해하는 하루나에게 제안했다.

"그럼 오늘은 내가 집까지 바래다 줄께."

"아키츠군이?"

놀란 하루나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부연해 말했다.

"응. 나도 산책하던 중이었고, 딱히 바쁜일도 없으니까.
남자가 함께 있는데도 뒤따라오는 간 큰 녀석은 설마 없겠지."

그것도 힘 깨나 쓸거 같은 양아치 스타일의 남자가 동행인이라면 더더욱.
내 제안에 하루나는 머뭇거리다 내 눈치를 살폈다.

"저...그래도 괜찮아?"

제의는 고마운데 괜스레 폐를 끼치는것 같아 미안해 하는걸까?
이런 때마저 그런 일을 신경쓰지 않았으면 해서 일부러 가벼운 투로 대답했다.

"아아~ 물론이지. 오히려 내쪽에서 동행을 부탁하고 싶은거라고?
어두컴컴한 밤에 남정네 혼자 걸어다니는건 영 따분하다구.
적어도 사이렌지 같은 미소녀를 에스코트 할 수 있다면 훨씬 보람도 있을텐데 말야.
아, 미리 말해두지만 흑심은 없어?"

"...그런 말 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보이는거 알고 있어?"

"으응~ 사실 요만큼 정돈 있어요."

"...쿡..."

「왕~?」

엄지와 검지로 작게 공간을 만들어 보이자 하루나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득이는 하루나의 태도에 안겨있는 마론이 이상한듯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긴장이 풀린듯 마론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면서 하루나는 내게 살풋 미소지었다.

"후훗, 그럼 에스코트 잘 부탁할께 아키츠군."

"아. 맡겨달라구~"



마론을 도로 바닥에 내려놓은 하루나의 왼편에 서서 걸음을 맞추었다.
꼬리를 이리저리 털며 앞장서서 기운차게 움직이는 마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루나에게 물었다.

"미행당하는 느낌이라고 했지?
혹시 미행하는 사람을 직접 본적은 있어?"

"그게...어두워서 실루엣만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중절모를 쓰고 코트를 걸친 거대하고 뚱뚱한 체형의 사람이었어."

우와아...본격적인 스토커다.
옷차림부터가 '나 수상한 사람이오' 하고 주장하는 격이니.
그런 차림의 사람이 미행하는데 겁먹지 않는게 이상하지.
스토커에 대해 떠올리곤 다시금 불안해하는 하루나를 달래면서 공원을 걸었다.
어느덧 공원의 산책로가 끝나가고 하루나도 안심한듯 긴장했던 표정이 풀어져갈 즈음, 뒤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냐아~

가지가 부딪히는 소리에 고개를 뒤로 돌리자, 우리가 지나온 길 뒤의 수풀에서 들고양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

왈왈-!

고양이를 발견한 마론은 몸을 돌려 수풀속의 고양이를 향해 맹렬하게 짖으며 달려들었다.
갑작스럽게 뒤쪽으로 돌진한 마론의 행동으로, 마론의 목줄을 쥐고있던 하루나는 미처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넘어갔다.

"꺄악!?"

"읏차~"

물론 하루나가 넘어지는걸 옆에서 빤히 지켜보고만 있진 않겠지만.
손에 든 종이봉투를 바닥에 떨구곤 왼손으론 하루나의 왼 손목을, 오른손으론 하루나의 오른쪽 어깨를 잡아 하루나를 받쳐들었다.
뒤로 기울어진 하루나의 몸 때문에 반쯤 옆에서 껴안은 듯한 자세로 하루나를 지지하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사이렌지?"

"아..."

눈이 동그래진채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하루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시야를 얼굴로 채울듯 가까운 거리에 하루나가 숨을 집어삼켰다.
살짝 붉어진 하루나의 얼굴에 머쓱해져서 어깨에 두른 팔을 풀고 하루나를 일으켜 세웠다.

"미안. 위험해 보여서 잡았던건데 그만 놀라게 해버렸네."

"아, 아냐...고마워 아키츠군."

표정을 바로하며 답례를 표한 하루나는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리곤 몸을 숙여 마론과 눈을 마주했다.

"안돼 마론~!
그렇게 갑자기 뛰면 위험하잖니?
예전에도 그러다 큰일날 뻔한거 알아?"

찰싹~

「끄응~」

마론의 등을 두드리며 질책하는 하루나에게 공감했다.
마론은 너무 멋대로 행동해서 하루나를 곤란하게 하는 일이 많으니까.
지금처럼 정신없이 날뛰다가 차에 치여 죽을 위기도 겪으니까, 이 기회에 예의범절을 배우는게 마론에게도 좋겠지.
타박받은 마론이 하루나의 꾸중을 피해 달아나다가 팽팽해진 목줄에 걸려 바둥거렸다.
달아날 생각하지말고 반성을 하라고...
적어도 애물단지인지 애완동물인지 고민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르륵...

"!?"

후웅-

마론을 꾸짖는 하루나를 보다가 바닥에 내팽겨친 종이봉투를 집어들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뒤편에서 낮은 울음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시야에 들어온 건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쓰레기통이었다.

"사이렌지!"

"꺅?"

퍼억-! 와르르~!

황급히 하루나를 뒤에서 껴안고 몸을 숙인 직후,
등을 강타한 쓰레기통과 함께 쓰레기 더미가 내 몸위로 쏟아져 내렸다.

"아키츠군!?"

하루나의 비명이 귓가를 울리는 가운데 쓰레기통이 던져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중절모와 코트 차림의 거구가 이쪽을 노려본 채 서 있었다.

"아키츠군! 괜찮아?"

"아아, 괜찮아. 내 몸은 튼튼하니까.
그보다 사이렌지는 어디 다친곳 없어?"

"으응, 아키츠군 덕분에..."

품에 안긴 하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덩치가 하루나의 몸보다 컸기 때문인지, 하루나는 딱히 상처를 입거나 옷이 더러워지진 않은 것 같았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켜 스토커로부터 하루나를 숨기듯 몸을 나섰다.

"위험하니까 마론이랑 내 뒤에 있어."

"으, 으응...!"

하루나는 당황하면서도 마론을 안아들었다.
정면에 서있는 스토커는 흥분했는지 어깨로 숨을 쉬고 있었다.
팔뚝도 제법 우람해서 힘깨나 쓰게 생겨 보이는게, 그저 소심하기만 한 스토커는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거야.
이대로 스토커를 쓰러뜨리고 경찰에 넘기려고 주먹을 말아쥐는데 스토커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뚱뚱하다고? 크륵..."

"뭐?"

"잘도 그렇게 말했군! 여자!"

으르렁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스토커를 견제하면서 머릴 굴렸다.
설마 저녀석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하루나의 말을 엿들은건가?
그걸로 저기까지 과격하게 반응한다고?
이거 진짜 위험한 녀석이네...

"너같은 잘난 여자는 내 맘을 모르겠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말거는 것도 부끄러워서 지켜만보던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없겠지!
남자랑 그렇게 붙어있는 헤픈 여자 주제에 잘도 이 나에게 창피를...!"

점점 격해져가는 스토커의 반응을 위험시하고 경계하는데 옷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힐끗 뒤를 돌아보니 사이렌지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채 내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거친 스토커의 반응이 하루나의 공포심을 부채질했나보다.
안겨있던 마론도 걱정스러운듯 끄응 소리를 내며 하루나를 올려다 보았다.
하루나를 안심시키려고 손을 뒤로해 하루나의 손을 맞잡았을 때, 스토커의 어조가 변했다.

"어딜 보는거야...?"

방금전 노도와 같은 기세는 어디가고 순식간에 애절한 눈빛으로 바뀐 스토커는 하루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기, 나를 봐. 나를 바라봐줘.
기껏 이렇게 당신 앞에 나타났잖아?
언제나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어.
언제나 당신의 등을 쫓으며 지내왔어.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다고 생각해?
얼마나 당신만을 생각해왔는지 알아?
좋아해. 그러니까..."

"아...아키츠군..."

하루나의 목소리가 두려움으로 떨렸다.
저렇게 감정변화가 격렬한 스토커라니...자칫 잘못했으면 하루나가 큰일날 뻔했다.
왈왈하고 스토커를 견제하는 마론을 대견하게 생각하곤 하루나를 안심시켰다.

"괜찮으니까 무서워하지마. 반드시 널 지켜줄 테니까.
보라구. 나 뿐만이 아니고 마론도 널 지켜주려 하고 있잖아?"

"마론..."

한팔로 마론을 껴안은 채 하루나는 내 손을 꽉 잡았다.
경계하는 이쪽의 태도에 스토커는 허탈해하며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껏 해온건 뭐였어?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알게 뭐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기왕 답을 알고 있으니까 친절히 대답해주자.
아, 물론 답례는 필요없어.

"스토커 행위잖아? 명백한 범죄다."

"아냐! 난 단지...단지 지켜보고 싶어서...!"

"하? 그래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고 충동적으로 사람이 다칠뻔 한 짓을 한거냐?
이래서야 좋아하긴 커녕 미움받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미워한다고?"

내 말에 우뚝 멈춰선 스토커는 아연해하며 하루나를 바라보았다.

"정말로...날 미워하는거야?"

스토커의 시선에 하루나는 무서워하며 내 등뒤에 움츠리듯 숨었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스토커를 경계하듯 그르릉거리는 마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미움 받았어...크륵...!"

음울함이 느껴지는 스토커의 목소리에 겁먹은듯, 하루나가 잡은 내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음의 울림을 내며 신음하던 스토커가 비틀거리며 등을 돌렸다.

"그래...그럼...날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이제 둘이서 잘 살아보라구!
나도 이젠 두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테니까!
살빠진 날 보고 후회해도 이젠 좋아해주지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으우워어어어~~~~~~!"

박력있는 울음소리와 함께 스토커는 눈물을 흩뿌리며 쿵-쿵-쿵- 달려가 버렸다.
어안이 벙벙한채 스토커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폭풍과도 같은 스토커였다..."

"끝난...걸까?"

"응~ 뭐... 아마도 그런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우선은 집까지 바래다 줄께.
당분간은 산책할 때 동행하면서 경과를 지켜봐야겠지."

"으, 으응, 고마워..."

방금전 스토커의 말을 의식한건지 하루나의 볼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 그보다 아키츠군의 옷이...!"

"아..."

방금전 쓰레기통을 뒤집어쓰다시피 하다보니 옷의 뒷부분이 얼룩덜룩해져선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옷 냄새 때문에 부끄럽다고 하루나를 혼자 집으로 보낼 수도 없었다.
결국 나무 뒤에 숨어서 상점가에서 산 여름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자기 잘못인양 풀이 죽은채 사과해오는 하루나를 달래고 하루나의 집까지 동행했다.



딩동-

"언니, 나왔어."

「아, 잠시만 기다려~」

현관문이 열리며 긴 생머리의 미인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하루나의 언니인 사이렌지 아키호씨다.

"다녀왔니 하루나~
...어머, 너는?"

"안녕하세요?"

"아~! 저번에 하루나를 집까지 데려다 준 아이구나?"

"예, 뭐..."

오밤중에 여동생과 함께온 내게 반가운듯 말을 건네오는 아키호씨는 특별히 날 경계하거나 하진 않는 눈치였다.
오시즈가 하루나의 몸에 빙의한 날 밤, 하루나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줬을 때 얼굴을 본걸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그때의 에스코트는 제법 만만치 않았었지만...




부스럭-

흠칫.

콰직-

"힉~!"

꽈아악-!

"으앗? 사, 사이렌지 잠깐만?"

그날 밤, 오시즈를 보내고 난 뒤 하루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는건 큰일이었다.
수풀의 바스락거림에 놀라 팔짱을 껴오는 하루나의 행동은 두근거렸다만, 그 상태로 냅다 날 수풀로 던져버리려는데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전까지 유령인 오시즈와 대면하고 있었던터라, 평소와 달리 사소한 소리에도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후 고양이의 을씨년스런 울음소리에 낮게 비명을 지르고 내게 달라붙어 온 건 좋아.
여자아이가 내게 의지해오는 행동은 솔직히 기쁘니까.
하지만 내 등뒤로 팔을 두른채, 냅다 베어허그를 물려오는 여자아이가 있을거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으스러져라 꽉 내 몸을 껴안는 하루나의 힘은 딱히 괴롭거나 하진 않았지만,
허리를 분질러 버릴 것만 같은 격렬한 기세에 솔직히 쫄았다.
밀착한 상태라 알 수 있는, 슬렌더한 체형 어디에서 이런 괴력이 나오는거야?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비명을 지르던 하루나는, 이윽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건지 깨닫곤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내 품에서 벗어났다.
얌전하고 청순한 이미지인 하루나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가련해 보였지만, 이런 모습을 보려고 일부러 무서워하는걸 방치할 순 없었다.
아무리 하루나가 귀신이나 심령현상에 약하단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지만, 패닉 상태에 빠진 하루나와 계속해서 실랑이를 벌이는건 되도록이면 사양하고 싶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불안한듯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하루나를 불렀다.

"저기 말야 사이렌지?"

"으, 으응? 왜그래 아키츠군?"

"혹시 귀신 같은게 나올까봐 그래?"

움찔-.

아. 역시...
방금전 오시즈와의 만남이 하루나가 평소 갖고있던 유령에 대한 공포를 자극했나보다.
좀더 만남의 시간이 길어진다면 하루나도 오시즈에게 익숙해지겠지만, 적어도 그날이 오늘은 아닌것 같다.

"미, 미안. 아키츠군...
나, 귀신 같은건 정말로 무서워서...
미안해..."

"아, 아니. 질책하려던건 아니었는데..."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채로 내 말에 심하게 위축된 하루나의 모습에 곤란한 나머지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우선은 하루나를 진정시키는게 먼저일 것 같아, 약간은 민망한 자기 어필을 하기로 했다.

"심령현상 같은걸 무서워 하는건 알겠지만 나도 옆에 있으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자랑은 아니지만 유령 비슷한걸 쫓아내보기도 했고 불량배 한둘쯤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어쩌다보니 귀신을 부린다는 소문까지 나돌면서 괴담의 발생지 취급을 받을 정도로 과장되어 버리긴 했지만.

"으, 으응..."

"그리고 생각해봐. 보통은 귀신보다 날 더 무서워한다구?
불량학생이랑 야밤에 단둘이 걷고 있는데 귀신을 걱정할 겨를은 보통 없잖아?
귀신은 무서워하면서 날 무서워하지 않는건 어째 이상...음?"

"에?"

아니아니, 이게 아니지!?
눈을 깜빡이는 하루나의 모습에 실수했다고 깨닫곤 얼른 말을 주워담았다.

"아...그러니까 날 무서워하지 않을 담력이면서 귀신 같은걸 무서워하는건 아니지 않을까 하고..."

"엣? 으응?"

"끄응... 그러니까, 네가 날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말이 오락가락하는 날 어쩔줄 모르며 바라보는 하루나의 모습에 한차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정말...!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다보니 완전 지리멸렬한 대사가 되어버렸다.
날 무서워 하라고 말하기라도 하려는거였냐?
이래서야 하루나를 달래긴 커녕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중요한건 하루나가 날 믿어주면 되는거니까 괜한 비유로 횡설수설하는건 그만 두기로 했다.
말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가만히 하루나와 눈을 마주한다.
마주보는 시선에 당황하는 하루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함께 있는 날 믿어준다면, 널 지켜줄께.
네가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워하지 말아줘."

내 말에 하루나는 눈이 동그래진채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잠시후 킥킥거리는 웃음 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쿡쿡거리며 여유를 되찾은 하루나가 살짝 미소지었다.

"...응. 그래."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온 하루나의 변화에 안도했다.
그후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여유가 생긴 하루나를 데리고 무사히 하루나의 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뭐, 그때 애써서 하루나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주면서 아키호씨를 만나게 된거다.
아무튼 집까지 바래다주는건 끝났으니 나도 이만 돌아가야지.

"그럼 난 이만 가볼께 사이렌지."

"아...고마워 아키츠군."

"벌써 가는거니?
잠시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는게 어떠니?"

"하하...권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집에 가서 씻고 싶은 맘이 우선이라서요."

"아..."

공원에서 대충 닦아내었다지만,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액체가 묻었던 머리카락이랑 피부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은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대접이고 뭐고 지금은 그저 얼른 집에서 샤워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렇게 됐으니까...
그럼 사이렌지, 내일 학교에서 보자구."

"아, 저기! 잠시만 아키츠군!"

"응?"

한시바삐 돌아가려는 날 하루나가 붙잡았다.

"나 때문에 옷을 더럽힌거잖아?
이대로 보내면 내가 미안하니까...
우리집 목욕탕을 빌려줄테니 씻고가."

...이봐요.
동갑의 남정네한테 그런 권유를 하다니 무방비가 지나친거 아뇨?
아니면 그런걸 생각할 겨를이 없을만큼 이 천사표 아가씨가 미안해하고 있는건가?

"...사이렌지는 가끔 대담한 발언을 하는구나?"

"어?"

배려가 지나친 하루나의 말에 무심코 중얼거리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한건지 떠올린 하루나는 볼이 새빨개졌다.
얼굴이 확 붉어져 신음하는 하루나의 모습에 아키호씨가 헤에~하며 재밌어하는 표정을 짓는게 보였다.

"지금이니까 말해둘께.
다른 남자에겐 그런 말을 꺼내지 않도록 조심해줘.
미인의 말은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니까."

특히 리토.
망상전개에 들어가는건 '기본'이고, 악의없는 트러블 발생은 '필수'다.
...둘다 같은 뜻이네.
이미 선택이고 뭐고 없구나.
그래도 리토라면 그런걸 해도 하루나에게 미움받지 않을테니 용하다고 해야하나.

"아, 아냐 아키츠군! 난 그저 아키츠군이 걱정되서..."

예상 이상으로 당황하며 해명하려는 하루나를 진정시켰다.

"알고 있어. 사이렌지가 그런 의도로 말한게 아니란 것 쯤은."

"...아키츠군은...조금 심술궂지 않아?"

"아하하~ 미안.
사이렌지의 말에 나도 조금은 당황했거든.
사실은...날 믿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방금전 권유는 하루나의 천성에서 나온거라 본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똑같은 권유를 했을테니.
하지만 하루나는 의도하진 않았겠지만...신뢰받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역시 아키츠군은 짖궂은것 같아."

화를 내지도 못하고 곤란한 표정이 되어버린 하루나의 중얼거림에 쓴웃음을 짓곤 하루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럼 다음번에 산책할때 연락 부탁해.
난 이만 가볼테니까..."

꽉-

"...아키호씨?"

몸을 돌리려다 팔을 잡혀서 어리둥절하며 아키호씨를 바라보자 아키호씨가 장난스런 얼굴로 날 이끌었다.

"자자~ 그렇게 튕기지 말고 일단 들어오도록 해.
모처럼 숫기없는 우리 하루나가 여기까지 권유해준거라구?
여자를 부끄럽게 만드는건 사내아이가 할 행동이 아니잖아?"

"어, 어?"

속사포로 말을 내뱉은 아키호씨에게 대꾸할 말을 생각할 새도 없이 팔을 잡혀 집안까지 질질 끌려갔다.



OTL...

"뭐야 이런건...기껏 폼잡고 떠나려 했는데 이 전개는..."

샤워까지 마치고 여벌의 여름옷으로 다시 갈아입고선 좌절포즈를 취한 나.
이미 내 옷은 세탁기에서 돌아가고 있는 상태.
이제와선 그냥 떠나지도 못한다.

"쿡쿡, 언니가 막무가내여서 미안해 아키츠군."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것 같아 보이는건 기분탓입니까?

"아니, 덕분에 나도 찝찝함을 없앨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그런데...아키호씨는?"

"언니라면 편의점에 갔어.
대접할 음료를 사러 간다고..."

"그래?"

대접은 좋지만 외갓남자가 있는데 여동생 혼자 집에 놔두고 갑니까 보통?
너무 하잖냐.
말을 하고선 새삼스레 의식이 되었는지, 어색하게 침묵하는 하루나에게 넌지시 대화를 이어갔다.

"부모님은 늦으시는 거야?"

"아빠는 일 때문에 엄마랑 함께 다른 곳에 계셔서, 이집엔 나랑 아키호 언니 둘이서 살고 있어.
...아, 물론 가끔씩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기도 하지만..."

초초함이 묻어있는 하루나의 마지막 말은 어쩐지 사족처럼 생각되었다.
뭐, 결론은 이 집엔 나랑 하루나 둘 뿐이다 이거로군요.
어떤 화제로 하루나의 긴장을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학학거리며 하루나의 주위를 맴도는 마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정. 나랑 하루나랑 마론 셋이었다.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려는 마론의 모습이 귀여워서 손을 뻗었다.
쓰다듬어 보려고 뻗어진 손을 힐끗 본 마론은 휙하고 옆으로 비켜서며 내 손길을 피했다.
아 역시...
살짝 낙담한 내게 하루나가 물었다.

"아키츠군은 개를 좋아해?"

"으응...어느 정도는."

최근엔 이 동네 개들은 도저히 상종 못 할 잡것들이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지만 굳이 입에 담진 않는다.
애견인인 하루나 앞에서 할 말도 아니고, 대화를 이어가기에 괜찮은 화제거리였으니까.

"혹시 좋아하는 종이 있어?"

"그레이트 피레네 종을 좋아해.
덩치도 크고 점잖아서 참 좋아했어."

그레이트 피레네 종으로 유명한거 하면 그 녀석이지.
치요의 애완견 장군이(타다키치).
순한 얼굴을 하고서 치요의 옆에 서있던 모습은 정말 보기 훈훈했지.

"아키츠군은 큰 개를 좋아하나보구나?"

"딱히 그런건 아니지만, 작은 개들은 방금전 마론처럼 날 피해서 말이지.
제대로 안아볼 기회도 없었다구."

"그럼 마론을 한번 안아볼래?"

"마론을?"

"응. 마론은 얌전하니까 안아도 괜찮을거라고 봐."

...여자만 밝혀대는 이놈이 얌전해?
눈에 콩깍지가 꼈구나 하루나.

"작은 개들은 폭신폭신하고 사랑스러우니까, 안아보면 아키츠군도 마음에 들꺼야."

...'폭신폭신'이라...
......뭐어~ 거기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네.
응, 어쩔 수 없는거야.

"음...그럼 호의를 받들어서..."

"응. 이리와 마론."

끙~?

하루나의 손짓에 가까이와 안긴 마론은 내가 마론을 안아들려고 손을 내밀자 갑자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역시 넌 여자가 좋은거냐 이 에로한 강아지야...

"마론~ 그렇게 싫어하지 말고 잠시만 참아줘."

끄응...

하루나의 타이름에 신음소리를 낸 마론은 버둥거리는걸 멈추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겼다.
얌전해진 마론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쓰다듬어 보았다.

"어때? 감상은?"

"으음~ 복실복실한게 꽤나 기분 좋은..."

몰캉~

응?

조심스럽게 만지작만지작 마론을 쓰다듬다가 마론의 발바닥이 손가락에 닿았다.
손가락에서 느껴진 말랑말랑한 육구의 감촉에 손놀림을 멈추었다.

...몰캉~

...강아지란거 의외로 기분 좋은 생물이었구나.
이 감촉은 꽤...

그르릉...

와작-!

"......"

마론이 내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아드득. 까드득...

"......."

"마, 마론?"

...야한짓만 하는 멍멍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놀란 하루나를 헤실헤실 얼굴이 풀린채로 바라보며 웃는다.

"음음~ 사이렌지네 멍멍이는 애교가 넘치는구나?"

"아, 아키츠군? 그거 절대 애교가 아니니까!
지금 깨물리고 있으니까!?
그것보다 그만둬 마론~!"

양팔을 푸드득하며 하루나는 황급히 내게서 마론을 떼내었다.
내 손가락을 물고있는 마론을 억지로 떼어놓은 하루나는 마론을 내려놓곤 필사적으로 사과해왔다.

"미안해 아키츠군!
우리 마론이 그런짓을 해서...!
평소엔 얌전한 아이인데...정말로 미안!"

"...아냐 사이렌지.
방금전에 마론은 정말로 귀여웠으니까."

"...에?"

"아하하~ 작은 개는 이렇게 사랑스러웠구나.
정말로 처음 알았어."

어리둥절한 하루나에게 웃으면서 마론을 칭찬했다.
아쉬움이 담긴 눈길로 마론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하루나가 묘한 표정으로 납득했다.

"...뭔가 이상하지만 아키츠군이 개를 정말 좋아한다는건 잘 알겠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방금전엔 정말로 사랑스러웠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방금전 육구의 감촉을 떠올린다.
그렇군. 애견인들은 이 감촉도 알고 있단 말이렸다?
개가 사랑스러운 이유를 오늘 하나 알았다.

바닥에 내려진 마론은 사과하는 하루나의 관심을 끌려는듯 하루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의외로 독점욕이 강한가보다.
끄응끄응하며 하루나의 다리에 몸을 비비던 마론은 하루나에게서 기대한만큼의 반응이 없자 자세를 낮추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멍멍~!

"꺄악~!?"

갑자기 덤벼들어온 마론에 놀란 하루나가 바닥에 넘어지자,
마론은 하루나의 몸위에 올라탄채 격렬한 움직임으로 하루나의 온 몸을 핥기 시작했다.

"꺄!? 그, 그럼 안돼~!"

당황하는 하루나의 외침에도 상관하지 않고 마론은 열심히 하루나의 몸을 핥았다.
뺨, 목덜미, 옆구리, 허벅지. 심지어 치마 밑 가랑이를 핥아대는 마론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상의랑 치마가 밀려올라가 배꼽이며 팬티며 맨 다리를 드러낸 하루나는,
입을 벌린채 멍하게 선 내 모습을 보곤 수치심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보, 보지 말아줘 아키츠군...!"

"아, 아! 그렇지!"

이렇게 정신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 한시바삐 이 성희롱 멍멍이를 하루나한테서 떼어 놓아야지.
치마 사이에 얼굴을 묻으려는 마론을 필사적으로 억제하는 하루나에게서 마론을 떼어냈다.

"하아...하아..."

"괜찮아 사이렌지?"

"괘, 괜찮아 아키츠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버렸네..."

"...혹시 방금전 스킨쉽은 사이렌지에겐 평소의 일이야?"

"그, 그럴리가 없잖아!
이렇게 격렬한 스킨쉽은 나도 오늘이 처음...「어머~ 뭐가 처음인걸까 하루나?」...에?"

제3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손에 봉지를 든 아키호씨가 웃는 얼굴로 현관에 서 있었다.
능글능글한 미소를 짓는 아키호씨에게 하루나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 언니? 언제부터...?"

"글쎄~ 문밖에서「꺄~ 그럼 안돼~」라는 대사를 들었을 때 부터일까?"

하루나의 물음에 답한 아키호씨는 우리 둘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하루나와 하루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나.
마론의 난동으로 구겨지고 흐트러진 하루나의 상의는 살짝 올라가 배꼽이 드러나 있었고,
걷어올려진 치마 아래론 팬티와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하루나를 물끄러미 보던 아키호씨는 흐응~ 하며 검지를 입술에 대고 웃었다.

"혹시나 싶어서 느긋하게 와봤는데...
역시 너희들 그런 사이였구나?"

"아, 아냐 언니!"
"아닙니다."

새빨개져서 항의하는 하루나를 괜찮아 괜찮아 하며 웃어넘긴 아키호씨는 미숙한 여동생의 성장을 흐뭇하게 여기는것 같았다.
이후 어떻게든 오해가 풀린 뒤, 숙맥이라며 구박하는 아키호씨에게 하루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동생을 걱정하는 언니인건 확실했는지, 오늘 동행한 이유를 들은 아키호씨에겐 스토커로부터 하루나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들었다.
음료를 대접받은 뒤, 더러워진 내 옷은 세탁해서 내일 주겠다는 아키호씨의 강권에 밀려 고개를 끄덕이곤 하루나의 집을 뒤로하고 저녁의 산책을 마쳤다.




다음날 학교.

"좋은 아침이에요 아키츠군."

"응~ 좋은아침 코테가와~"

"아침부터 기운이 넘쳐보이네요?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아, 그게 말이지.
강아지의 육구의 감촉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거든~"

"응? 혹시 만져봤나요?"

"응. 어제 사이렌지네 강아지 마론을 안아봤는데 말야.
발바닥의 육구 감촉이 정말로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더라구."

"거긴 민감한 부위라던데, 싫어하진 않던가요?"

"글쎄? 손가락을 깨물어주면서 애교부리는게 귀엽던걸?"

"...그 깨문다는걸 애교로 생각하는 아키츠군도 아키츠군이네요."

가방에서 꺼낸 책을 정리하며 궁금한듯 코테가와가 물었다.

"강아지는 무슨 종이었어요?"

"사이렌지 말로는 보스턴 테리어종이라고 하더라구.
덕분에 고양이도 좋지만 가끔은 개도 귀엽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

"부럽네요. 저도 만져봤음 좋았을텐데...
뭐, 아키츠군처럼 튼튼한 손가락이 아니라 무리겠지만요."

아쉬워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너무 기쁜티를 낸건가 고민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면서도 고양이에게 기피되는 코테가와로선 생각하는게 많았나보다.
기분전환으로 다음에 함께 고양이 관련 사진집이라도 알아보는게 나으려나?

책상안의 정리가 끝나고 조례가 시작하기 전에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다.
교실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등교중이던 하루나와 얼굴을 마주쳤다.

"아... 안녕 아키츠군."

"응. 좋은 아침 사이렌지."

"아, 맞아. 이거 돌려줄께."

하루나는 한손에 들고 있던 종이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봉투를 받아 안을 보니 깨끗하게 개어진 옷이 들어있었다.

"어제 우리집에 옷을 놔두고 갔었잖아.
다림질 해뒀으니 집에가면 걸어서 보관해둬."

"고마워. 여기까지 해줄 줄은 몰랐는데.
가정적이구나 사이렌지는?"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하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젠 아키츠군에게 신세를 졌으니까."

"아하하...도움이 되었다니 기쁜데.
뭐, 나야말로 어젠 사이렌지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까 말야."

"그렇게 기뻤어?"

"물론이지~!
사이렌지의 마론은 최고였으니까.
특히 그 부드러운 육구가... 어흠어흠... 나도 모르게 본심이..."

너무 들뜬 모습을 보인듯 해서 말을 얼버무리는 내게 사이렌지가 작게 웃었다.

"의외로 작고 귀여운거에 사족을 못쓰는 아키츠군의 모습은 신선했어."

"사이렌지 덕에 큰게 전부가 아니란걸 알았으니까.
부드럽고 아담한게 정말로 사랑스러웠다구."

거함거포주의는 환상입니다.
귀여운게 진리.
아, 그래도 너만은 언제나 좋아한단다 장군아.

"후후...아키츠군이 원한다면 다시 한번 안을 기회를 줄께."

"진짜? 기대되는걸~?
아, 그리고 다음번 저녁 산책땐 권해줘.
며칠동안은 조심하는게 좋으니까 상황을 지켜보게 집까지 바래다 줄께."

"으응, 고마워. 그럼 다음번에도 부탁할께 아키츠군.
좀 있으면 조례시간이니 이만 들어가보는게 좋겠어."

마침 복도 저편에서 호네카와 선생님께서 오시는 모습이 보였기에 하루나와 함께 서둘러 교실로 향했다.
그날은 수업내내 싱글벙글 했던지라 몇몇 학생들은 내가 마음에 드는 여성을 헌팅한거 아니냐며 수근거리기도 했지만 특별한 일 없이 무난히 지나간 하루였다.




토요일 오후.
집안 청소를 끝마치고 거실에서 쉬고 있는데 현관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오신다거나 하는 연락은 없었는데...누구지?
약간의 기대를 담아 현관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너는..."

"저기...오랜만이네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머리카락.
양옆으로 휘어져 삐져나간 귀뒷머리.
양어깨가 트인 블라우스와 짧은 주름 치마.
며칠전 우리집에 잠시 머물다간 소녀가 현관앞에 서 있었다.
놀란 얼굴을 한 내게 소녀는 봉투를 건넸다.

"그때 잠바를 빌려주셨잖아요.
돌려 드리러 왔어요."

"아...고마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재회하게 됐네?"

"아하하...그렇네요."

헤어질때 다신 볼일 없을 것처럼 말해 놓고선,
어색하게 웃는 이 소녀는 의외로 의리있는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올래?
마실거라도 대접하고 싶으니까."

"아, 네."

어쩐지 긴장한 것 같아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약간 의아해 하면서도 소녀를 집안으로 들였다.
그리고...거실에 얹은 소녀에게 컵을 건네주곤 입가로 물컵을 가져갔을 때,
숨을 가다듬곤 눈을 질끈 감은 소녀가 큰 소리로 폭탄을 터뜨렸다.

"저, 저랑...데이트 해요!"

푸우웃-!?



"...저기 말이다?"

"네."

"솔직히 넌 귀엽게 생겼고, 나도 저번에 너한테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영화 권유같은걸 해보란 얘길 꺼냈긴 했지만 말이다..."

침착하게 입가에 흐른 음료를 닦아낸다.

"우선 난 네 이름도 모르는 입장이거든?"

그러고보니 다음번에 만나면 이름 가르쳐준다고 했던가?

"유, 유우사키 리코라고 해요!
리토의 먼 친척이죠.
정말로 좋은분이라고 리토에게 소개 받아서..."

"뻥치지마라!"

"히익!?"

기가차서 고함을 지르다 그만 사레가 걸렸다.

"쿨럭쿨럭...큽...!
유우키 그 녀석은...쿨럭, 음음...
자의로 남한테 여자를 소개시켜 줄 녀석은 아니라고!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녀석이 그럴 겨를이 있을 것 같아?"

빡-!

"아팟!?"

머리를 손날로 내리찍혔다.
무표정한 얼굴의 유우사키에게.

"...친척을 나쁘게 말한 벌이에요."

"엄하잖냐 너..."

"보통 이럴 땐 좋아라하고 넙죽 받아야 되는거 아녜요?"

"너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아키츠 료스케. 중학교때 이미 백명의 여자를 울린 사내죠."

"너 그거 믿고 있는거였냐..."

"무엇보다, 제가 데이트 신청하면 누구든 일발로 OK라고 부추겼던건 어디의 누구였죠?"

"반박할 말이 없구만..."

머리를 매만지면서 투덜거리곤 기분을 바꾼뒤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럼 어디 가고 싶어?"

"...영화관요."

"OK. 그럼 가볼까?"

뾰루퉁한 얼굴로 기다리던 유우사키의 모습에 피식 웃곤 집을 나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주말의 영화관은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어떤 영화로 할래?"

"으응..."

유우사키가 고민하며 상영작을 둘러보았다.
나도 느긋하게 SF, 액션 쪽의 영화 팸플릿을 들고 살펴보는데, 얼마지 않아 유우사키가 마음을 정했는지 날 불렀다.

"저, 저기...이걸로..."

유우사키가 고른 상영작을 확인했다.
인기 여배우 에키도나 파라스 주연의 로맨스 영화다.

...진심이냐...?

"그...여, 연애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인 유우사키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곤 액션 영화 팜플렛을 내려놓았다.



『사랑해요...』
『나도야...』

화면안에선 미남미녀가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힐끗 살펴본 상영관은 연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때때로 속삭이는 밀어와 함께 영화관 내에서 애정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로맨스 영화 선택은 실수였나...
부끄러워 하면서도 열심히 스크린을 응시하던 유우사키는 극장안에서 벌어지는 행각에 집중력을 잃고 당황한듯 시선을 헤매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유우사키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우사키?)"

"(아... 자, 잠시 화장실 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유우사키에게 나도 민망해져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유우사키가 나간 후, 야릇해지는 신음소리와 함께 점차 에스컬레이트하는 몇몇 커플들의 애정행각에 영화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영화관에선 제발 정숙합시다.
맘놓고 영화보기도 참 힘들다고 생각하며 맘속으로 푸념을 늘어놓고 있으려니 유우사키가 돌아왔다.
화장실 다녀오면서 뭔일이 있었는지 혼이 빠져나간듯한 얼굴로 휘청이며 걸어오는 모양새가 어째 위태로워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좌석에 가까워졌을 즈음 발을 잘못디뎠는지 「아앗?」하는 낮은 비명과 함께 내쪽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는 유우사키를 받아들긴 했는데 어째 자세가 영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내밀어진 내 팔을 어떻게 뚫고 들어왔는지, 양팔을 내 목에 두르며 내 품안으로 안기듯 쓰러진 유우사키의 움직임은 말그대로 절묘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넘어져야 이렇게 공교로운 포즈가 되는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유우사키를 안은채 나도 모르게 감탄하는 말이 나왔다.

"(너, 생각보다 대담하구나?)"

"(으긋, 그런게 아니에요!)"

"(쉿, 극장에선 조용히 해야지?)"

"(우우...)"

무슨 일인지 쳐다보는 관객들의 시선을 받은 유우사키는 내 목에 두른 팔을 풀 생각도 못하고 굳어버렸다.
커플들이 다시금 자신들의 애정행각으로 돌아갈 때까지 유우사키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품안에서 뻣뻣히 굳어있었다.



"아아~ 영화 재밌었지?"

"몰라요...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구요오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올 즈음엔 유우사키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일에는 내성이 없는 유우사키로서는 상영관 내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나보다.
상영관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둘러보던 유우사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들 커플들 뿐이었네요..."

"그야 로맨스 영화니까.
애인이랑 같이 보러 오는게 보통이겠지."

"그럼 우리도 그렇게 보였을까요...?"

"아핫~ 그렇게 보였으면 해?"

"......"

내 물음에 유우사키는 입을 다물었다.
의아한 얼굴로 유우사키를 보자 유우사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키츠씨는...제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보여?"

"아뇨, 전혀."

"...너무 솔직하구나..."

"적어도 그런 스타일론 애인은 무리일거라고...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어요."

응?

"소문을 들었어요.
아키츠씨가 다니는 학교의 테니스부 여학생과 무슨 일이 있었다고..."

사야카랑 있었던 일을 유우사키도 알 정도로 소문이 퍼진건가?
새삼 소문의 전파력에 곤란해는데 그런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유우사키가 재촉해왔다.

"말 못할 관계인거에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테니까 알려줘요."

...이상한데 호기심이 왕성하구나.

"그러니까...꽤나 호의적으로 접해주는 상대라고 할까?
뭐, 침대에서 갑자기 끌어안았을 땐 나도 당황했지만..."

"끄, 끌어안아!? 침대?"

"아, 이건 비밀이야?
다른 사람이 안다면 그 아이도 부끄러워 할테니까."

"......"

부들부들...

양주먹을 꽉 쥔채 고개를 숙인 유우사키의 몸이 떨린다.

"어이? 이봐?"

"...이 바람둥이-!"

퍼억!

"꽥!?"

냅다 질러진 유우사키의 주먹을 빰에 얻어 맞고 날아갔다.
영화관에서 일어난 난데없는 촌극에 행인들의 시선이 쏠리더니 수근거렸다.

「여자한테 차였나본데?」
「양다리 걸치다 들킨건가?」
「그럴리가. 저 놈은 양다리는 커녕 문어발을 훨씬 넘는 녀석이라구.」
「여자애가 불쌍해. 저런 녀석 따윌 좋아하다니...」

"젠장!"

행인들의 뒷담화를 뒤로 하고 울면서 뛰어가는 유우사키의 뒤를 황급히 쫓았다.
막무가내로 뛰어가는 유우사키의 어깨를 잡아 멈췄다.

"어이? 진정해."

"이거 놔요!"

울고불고 난리치는게 도무지 말을 들을 것 같아 보이질 않는다.
난처하네...

"대체 왜그래?"

"그건 당신이...아키츠씨가 여자아이를 꼬시니까 그렇잖아요!"

"아니, 그 땐 내가 꼬셔진건데?"

"......으아앙~~~!!!"

"야, 야?"

"너 같은거! 너 같은거!"

"아야!?"

나에게 매달려선 양손으로 가슴을 때려오는 유우사키.
집중된 행인들의 시선속에서 펑펑 우는 유우사키를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아, 알았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파렴치해서 미안합니다!
유혹한거 사과할테니까?
그러니 이제 그만 울음 좀 그쳐줘! 응?"

"흑...훌쩍..."

"저기, 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으니까...「아키츠? 여기서 뭐하는거지?」...린 선배?"

듬성듬성 모인 구경꾼들 중에서 익숙한 포니테일의 여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키 선배의 친구이자 호위인 린 선배이다.
평소와 달리 사키 선배도, 아야 선배도 없이 혼자 있는 모습에 생소한 느낌을 받고 있는데,
나와 유우사키를 번갈아 훑어보던 린 선배가 조용히 물었다.

"실랑이가 벌어진 것 같아서 와봤더니...
그냥 여자 친구와 다툼 중이었나?"

"에엣!?"

울다말고 놀란 유우사키의 반응이 린 선배의 주목을 끌었다.
눈물 범벅이 된채로 당황한 유우사키는 린 선배의 시선을 받더니 내 뒤로 숨어 버렸다.
새삼 울음을 터뜨린게 부끄러워진걸지도 모르겠다.
내 뒤에 숨은 유우사키의 행동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린 선배는, 딱히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었나보군.
그래도 너무 여자친구를 마음 고생 시키진 않도록."

"여자친구고 뭐고, 이번이 겨우 두번째로 만나는 거입니다만..."

"호오...? 두번만에 헌팅을 성공시킨건가?
재주도 좋군."

"아, 아니, 헌팅 같은게 아니라요...
...너도 가만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아앗?"

린 선배의 칭찬같지 않은 칭찬에 거북해져선, 등 뒤에 숨은 유우사키를 앞으로 내세웠다.
앞으로 나선 유우사키를 빤히 바라보던 린 선배는 뭐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했다.
위아래를 훑어 내리는 린 선배의 시선에 유우사키가 당황하는데 눈썹을 살짝 찌푸린 린 선배가 물었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아, 안녕하세요. 유우사키 리코입니다."

"유우키의 친척이예요.
데이트 권유를 받아서 말이죠."

"아아...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더니 그래서였나?
이거 실례했군. 내 이름은 쿠죠 린. 아키츠의 1년 선배지."

"린 선배도 영화보러 오신건가요?"

"그래. 괜찮은 액...로맨스 영화가 있다길래 왔지."

...그냥 액션 영화라고 하셔도 되요 선배.
저번에 린 선배의 취미가 영화관람이라고 들었는데 액션물이 취향이었나?

"혼자 보러 오신건가요?"

"사키님은 바쁜 분이시니 개인 취미에 이끌 순 없잖나.
아야의 경우도, 나나 아야 중 한명은 사키님을 수행해야 하니까."

"린 선배의 권유라면 사키 선배나 아야 선배도 기쁘게 응할텐데요."

"후-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
아무튼 조금 있으면 영화가 시작하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아쉽네요. 미리 만났다면 함께 볼 수도 있었을텐데..."

"아키츠 너도 혼자였다면 모처럼이니 권유라도 했을테지만...
데이트 중인데 멋없는 짓을 할 순 없겠지."

쓴 웃음을 린 선배는 유우사키를 바라보았다.

"그럼 유우사키라고 했나?
아키츠와 데이트 잘 해보도록 해.
겉모습은 좀 험해보여도 제법 괜찮은 남자니까."

"아, 네..."

긴장한듯 어깨를 움츠리는 유우사키의 모습에 린 선배는 피식 웃곤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린 선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행인들도 저마다 갈길을 가며 흩어졌다.
이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게 좋을것 같아 유우사키를 불렀다.

"그럼 이번엔 어딜 갈까?
혹시 가보고 싶은 곳 있어?"

"......"

"유우사키?"

"아, 네?
뭐라고 하셨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제야 들었다는듯 반응하는 유우사키의 모습에 다시 한번 말했다.

"영화관 다음에 가보고 싶은덴 없는지 물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아, 미안해요.
그냥...생각보다 아키츠씨에 대한 평가가 좋은것 같아서 놀랐을 뿐이에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유우사키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 목적지를 말했다.

"「여동생(妹) 카페」요."

"...왜냐고 물어봐도 돼?"

"에? 그야 아키츠씨는 그런 장소를 좋아하잖아요.
여동생 모에라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건진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너 분명 뭔가를 크게 오해하고 있어..."

로자리오의 변태설이 더해지면서 여동생 모에설은 갈수록 혐의가 짙어지는 것만 같다.
뭐...여동생 카페엔 미오도 아르바이트 중이니까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목적지를 말하곤 다시금 곰곰히 생각에 잠긴 유우사키를 데리고 여동생 카페로 향했다.




여동생(妹) 카페 - hasumi

"어서오세요~♡ 어? 아키츠군?"

"안녕 사와다."

"보고 싶었어요 료스케 오빠~♡"

메이드복을 입은채로 호칭까지 바꿔가며 애교를 떠는 미오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반갑게 맞이해주던 미오는 뒤따라 들어오는 유우사키를 보더니,
어머어머하며 얄궂은 미소를 짓곤 초승달 같은 눈매를 하며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렸다.

"료스케 오빤 바람둥이구나?
오랜만에 미오를 보러 왔나 기대했는데...
이젠 미오 한명이 여동생인걸론 만족하지 않는거야~?"

히죽히죽거리면서 우는 시늉만 하는 미오에게 가볍게 양손을 들어올렸다.

"좀 봐줘...모처럼 놀러왔는데 저번처럼 이상한 소문이 퍼지는건 사양이라구."

"킥킥... 그럼 이번에 미오를 위해서 비~싼 메뉴를 골라주면 용서해줄께 료스케 오빠~♡"

짖궂게 웃으며 미오는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창가쪽에 자리를 잡아준 뒤 주문을 받고 미오가 사라진 뒤 유우사키에게 시선을 주자,
메이드 코스프레를 한 종업원들의 모습에 유우사키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이, 이런 곳이었군요.
전혀 몰랐어요..."

"여긴 코스튬 카페라고 할 수 있으니까.
방금전 사와다도 코스튬 플레이를 좋아하니까 여기서 일하고 있는거라구."

벽 한쪽에 그려진 메모나 그림에 눈길을 주다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동생이랑 화해는 잘했어?"

"네?"

"그때 네가 말했잖아.
동생에게 시달리다가 집을 나왔다고."

"아...괜찮아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고...
평소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착실한 아이인걸요."

"헤에~ 사이가 좋은가보네.
부럽다..."

"그런가요?"

"응. 난 외동이라 형제자매가 있는 가정은 동경하고 있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카페의 분위기에 당황하던 유우사키도 동생을 화제로 삼아 대화를 이어가면서 긴장이 풀렸는지 어깨에 힘을 뺐다.
잠시 후 조각 케이크와 쉐이크가 담긴 접시를 든 미오가 돌아왔다.

"여기 주문한 케이크랑 쉐이크에요 료스케 오빠~"

"고마워 사와다."

"뭘~ 그나저나 정말로 오랜만에 오네?
하루나짱이랑 함께 온 이후로 처음아냐?
그럼 데이트 잘해 료스케 오빠~♡"

장난스레 윙크를 하고 미오는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그러고보면 하루나의 몸을 빌린 오시즈랑 여기에 왔었지.
한번더 와보고 싶다고 적었던 오시즈의 메모를 떠올리면서, 언젠가 오시즈와 이곳에 다시 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포크로 떠올린 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럼 이만 일어날까?"

"아...네."

얌전히 케이크를 먹다 반정도 남기고 포크를 내린 유우사키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서두른 탓인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서던 유우사키는 발을 헛디뎌 앞으로 넘어졌다.

"꺄-!?"

...영화관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지.
두번째라 그런지 가슴에 안겨오는 유우사키를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엣!?"

내 품에 안긴 유우사키는 얼굴을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면서 내 가슴을 밀쳐내었다.
너무 힘껏 밀었는지 균형을 잃고 뒷걸음질치던 유우사키는 테이블에 부딪히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덤으로 테이블 위에 있던 식기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면서, 유우사키가 먹다 남은 케이크 조각이 얼굴에 묻어버렸다.

"아야야..."

"...넌 걸을때 좀 조심해야 겠구나."

콧잔등에 하얀 크림을 얹은채로 엉덩이를 매만지며 신음을 흘리는 유우사키를 보곤 한숨을 쉬었다.
양다리를 M자로 하곤 속옷이 보이는 민망한 자세로 바닥에 앉은 유우사키의 몸을 가리듯 유우사키의 정면에 주저앉았다.
얼굴에 손을 가져가려는 유우사키를 말리곤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유우사키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우웁~?"

"얌전히 있어."

당황해하는 유우사키의 움직임을 멈추곤 정성스레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냈다.
방금전 소란으로 카페 손님들의 시선이 쏠리자 유우사키는 붉어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료스케 오빠의 여자친구는 꽤나 덤벙이구나~?"

"아, 사와다?"

"여자친구씨는 혹시 다치진 않았어?"

"괘, 괜찮아요.
죄송해요 테이블을 엎질러서..."

"괜찮아 괜찮아~ 다치지 않았으면 그게 제일이니까."

"아, 치우는거 도와줄께 사와다."

"후후, 고마워 료스케 오빠."

어쩔줄 몰라하는 유우사키에게 웃어주곤 미오는 떨어진 식기를 정리했다.
소란스러웠던걸 제외하면 그다지 큰 사고는 없었기에 식기를 주워담고 계산을 끝마친 후,
미오의 배웅을 받으며 편한 마음으로 카페를 나올 수 있었다.



"우우..."

"이제 그만 기분을 고치는게 어때?
방금전 일이야 실수일 뿐이잖아.
그렇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구?"

큰 일이 없는건 다행이었지만 풀이 죽은 유우사키를 달래는게 일이었다.
마지막의 해프닝 때문인지 시무룩해진 유우사키는 좀처럼 기분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우사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오늘 어땠어요?"

"그야 물론 즐거웠지. 주말에 밖에서 이렇게 노는건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런것 치곤 엉망진창이었잖아요."

"글쎄,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론 재밌었는걸?
뭐, 조금 무드가 없긴 했지만 말야."

"......"

영화관이랑 카페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떠올리며 농담처럼 답했더니 유우사키는 입을 다물었다.
농담이었다고 말하려는데 주먹을 꽉 말아쥔 유우사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겠죠. 역시 저보단 하루나씨와 함께 있었을 때가 훨씬 즐거웠겠죠."

"응? 어째서 그 이름이 나와?"

난데없이 하루나의 이름이 나와서 어리둥절하고 있자 유우사키가 지그시 내 눈을 응시했다.

"카페에서 사와다라는 분이 그랬잖아요.
하루나씨라는 분과도 카페에 방문했었다고."

"아, 그랬지."

"저랑 오늘 만난것도 하루나씨의 대신이었던 거겠죠?"

쏘아붙이는 유우사키의 말이 곤혹스러웠다.

"아니, 잠깐만. 그런 의도로 너랑 나온게 아냐.
더구나 하루나...그러니까 사이렌지와 난 애초에 그런 사이도 아니고."

내 해명에도 유우사키는 노려보는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좋아요...그럼 솔직히 말해줘요.
저랑 하루나씨 둘중 한명을 고르라면 누굴 선택하시겠어요?"

"너랑 사이렌지?"

"네. 확실히 해주세요.
만약 장난으로 하고있는거라면 용서하지 않을테니까!"

뭐야 이 강압적인 이지선다는...

"그러니까...이성으로서 선택한다면 말야?"

"그래요. 솔직하게 대답해준다면...저도 아키츠씨의 대답에 납득할 테니까.
이미 들을 각오도 마쳤으니까...!"

토해내듯 말을 뱉어낸 유우사키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고개를 숙인채 허벅지에 댄 양손을 부서져라 꽉쥐고 선 유우사키를 보다가 얕게 신음을 흘렸다.
...이런 선택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너와 사이렌지 둘 중에 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고르라고 한다면 난 사이렌지 쪽이..."

"......"

"아, 오해하진 않았으면 하는데, 네가 싫다는 의미는 아니고..."

...툭.

"응?"

절망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는 유우사키의 모습에 당황해 말을 이으려던 중,
묵직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어?

저만치서 바닥에 떨어진 테니스 라켓 케이스를 주울 생각을 못한채 멍하니 서있는 하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이렌지?"

"아, 저, 저기..."

내 부름에 정신이 들었는지 당황한 사이렌지는 볼이 살짝 상기된채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그...미, 미안! 엿들을 생각은 없었어...
테니스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아키츠 군이 보여서 인사나 할까 해서 온건데...
그, 그러니까..."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대던 하루나는 빨개진 양볼을 양손으로 가리고는 황급히 뒤로 돌았다.

"미, 미안!
바, 방해하지 않을테니 천천히~!"

"어이!?"

뭐라고 말을 꺼낼 틈도 안주고 도망가는 사이렌지에게 손을 내민채로 굳어버렸다.
황당한 상황에 빠져버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침묵하고 있던 유우사키가 툭하고 중얼거렸다.

"...잘됐네요. 고백이 성공해서."

"고백이라니...너말야..."

후다닥-

"너도냐!?"

비꼬는 유우사키에게 한소리 해주려다가, 하루나와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버린 유우사키의 모습에 그만 절규했다.

"아! 젠장~!"

안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이젠 술래잡기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하루나와 유우사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점차 멀어져가는 둘의 모습을 확인한 뒤 마음을 정하곤 한쪽으로 뛰었다.



상점가 한곳의 골목길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서 등을 보인채 멍하게 서있는 유우사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하아...여기 있었냐."

"......"

"술래잡기는 여기서 끝이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구."

"...어째서 쫓아온거에요?"

"어째서냐니...그 상황에서 널 쫓지 않으면 어떡하라는거야?
너, 상태가 이상했으니까."

"그대로 사이렌지씨를 설득하러 가지 그랬어요."

"이봐...아무리 그래도 난 우선순위라는게 있어.
사이렌지는 당황했을 뿐이고, 넌 슬퍼하고 있었잖아."

"...바보."

"기껏 쫓아온 사람에게 한다는 말이 겨우 그겁니까..."

"......"

억울한 나머지 작게 푸념하는 내게 유우사키는 잠시 침묵했다.

"...사이렌지씨는...예쁜 사람이네요."

"음, 뭐 그렇지."

미인에다 모범생이고 성격도 좋고 덕망도 있다.
이만큼 출중한 여성을 찾기도 어렵지.
딱히 부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수긍하자 유우사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방금전은 괜한 질문이었어요. 애초에 답은 나와 있었는데..."

듣는쪽이 우울할 만큼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는 유우사키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오늘도 하루종일 한심한 모습만 보이고...
저 같은거...사이렌지씨와 같은 자리에 설 자격은 없었는데..."

"아니, 그건 아냐."

좌우로 늘어선 건물의 그림자에 가려 어두운 유우사키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여 무심코 반박했다.
집에서 잠자는걸 덮쳤단 오해로 폭주할 때랑, 오늘처럼 영화관에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건 난처할 따름이지만,
그런 해프닝들이 지금처럼 자신을 폄하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그야 넌 엉뚱한 잠버릇도 있고 덤벙이에다 이상한 오해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지.
하지만 네겐 나쁜점만 있는게 아니잖아?
내가 너에 대한 전부를 알고 있는건 아니지만...적어도 네가 동생을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는 알아.
어렸을 적부터 네 외로움을 참아오면서 동생이 외롭지 않게 애써왔다는걸 알아.
그렇게 동생을 소중히 여겨온 네가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할 리가 없잖아?
무엇보다 부모님이 안계신데도 꿋꿋하게, 올바르게 자라온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훌륭하다구."

"...저희 부모님은 두분다 살아계신데요?"

"...아, 집에 안계신다는 의미였어.
두분다 바쁘셔서 크리스마스 때마저 얼굴을 안보였다면서?
널 키운건 8할이 바람이고, 네 동생을 키운건 8할이 너였다는데 내 수염을 걸어도 좋아."

"...킥..."

기분이 나아진듯 유우사키가 흘린 웃음소리를 듣자 한숨 놓이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주눅들지도 말고.
당당해지라구.
넌...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아이니까."

"...그렇게 보여요?"

"그야 물론. 다른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든 난 그렇게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풀죽어있지 말라고?"

"......"

"아, 그리고 오해하는 것 같아서 다시 덧붙이는데 나랑 사이렌지는 이성교제를 하는 사이가 아냐."

"...그런가요..."

작게 중얼거리곤 침묵하는 유우사키의 반응을 기다리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시간이 꽤나 흐른 듯 하늘이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슬슬 집으로 돌아가는게 좋을것 같아 유우사키를 부르려는데 유우사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역시 믿지 못하겠어요.
사이렌지씨와 아무일도 없었다는걸..."

왜?

"하지만...믿고 싶어 졌어요..."

유우사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면으로 돌아선 유우사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보였다.

"어, 어이..."

"그게...그런 말을 들으면...저, 포기할 수 없게 되버리잖아요..."

넘쳐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야, 야?"

Hurry! Hurry! 손수건! 손수건!
눈물을 훔치는 유우사키에게 당황해 황급히 손수건을 찾았다.
카페에서 뭍은 흰 크림 부분이 안닿도록 손수건을 정돈하고 유우사키의 어깨를 잡았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거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응?"

골목길 안으로 드리운 그림자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금발에 귀걸이와 목걸이를 한 가죽점퍼의 미남자, 코테가와의 오빠인 유우씨가 서 있었다.
내게 어깨를 잡힌채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는 유우사키를 발견한 유우씨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유, 유우씨?"

"...역시 넌 믿을만한 녀석은 아니었군."

"아뇨, 그거 오해-앗!?"

"꺄아악~!"

유우사키의 비명을 배경음으로 달려든 유우씨와 난데없는 난투극을 벌였다.


다행히 싸움은 곧 진정되었다.
유우사키와 골목길 밖에 있던 유우씨의 애인인 마유미씨가 싸움을 말려줬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중학생일 적에 헌팅당하던 마유미씨를 도와준 적이 있었나보다.
사정을 들은 유우씨도 떨떠름한 얼굴로 사과해와서 기분좋게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중학교 때와 달리 구레나룻을 자른 내 모습에 놀라며 훨씬 멋져졌다고 칭찬하는 마유미씨의 말엔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후의 마유미씨와의 대화를 대충 요약하면 이렇다.

- 맹금류 같이 짜릿한 눈은 여전하구나? 처음 봤을땐 정말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다니까?
- 아, 아하하...누나는 훨씬 매력적인 여성이 되었네요.
- 어머 유혹하는거야~? 아깝네요. 난 유우가 있으니까~
- 그, 그래요? 유우씨는 좋겠네요.
- 후후~ 너도 꽤나 멋진 눈을 하고 있으니 거기 여자친구랑 잘 해보렴.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유우씨를 끌고 사라지는 마유미씨를 배웅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왜 그냥 맞고만 있었던거에요?"

"유우씨는 코테가와의 오빠라구.
친구의 오빠에게 손댈 순 없잖아?
그리고 딱히 아프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바보."

질책하듯 중얼거린 유우사키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럼 리토도 그런 이유에요?"

"뭐가?"

"미캉의 오빠니까. 그러니까 잘 대해준 거에요?
암살자에게서 죽을뻔 한걸 구해주고, 개와 바뀌었을 때도 도와주셨잖아요.
그건 미캉의 오빠였기 때문이었나요?"

"분명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유우키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니까.
여기저기 사건에 휩쓸리면서도 의외로 대범하게 행동하는데가 친구들을 소중히 여기거든."

"...의외로 고평가네요?"

"그리고 유우키가 날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나로선 지난 몇년 중에 처음으로 사귀게 된 동성친구니까.
그러니까 소중한거야."

"...그러고보면 아키츠씬 친구 별로 없었죠."

"윽...아픈델 찌르기냐?
아, 그리고 미안하지만 오해를 하나 정정해야겠어.
네가 말했던 일들은 딱히 유우키였기 때문에 도와준게 아냐.
눈앞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구.
뭐...이런 이유를 들으면 유우키는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나는..."

말을 꺼내다 말고 유우사키는 뒷말을 삼켰다.
입술을 잘근 씹은 유우사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토는...고마워하고 있을거라고...
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우물거리던 유우사키는 민망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아하하...고마워.
나도 너랑 유우키를 만나서 좋았다고 생각하니까 말야."

너털웃음을 짓곤 유우사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숙인 유우사키와 함께 멈춰서서 그대로 잠시간 나쁘지 않은 침묵을 음미했다.



"...그럼 방금전 골목길에서 했던 얘기의 계속 말인데요.
정말로 사이렌지씨랑 이상한 관계가 아닌가요?"

"기분 전환이 참 빠르구나...?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야?"

"그야...아키츠씨는 사이렌지씨의 가, 가슴을 만졌잖아요?
성희롱인데...그런데 사이렌지씨는 싫은 티도 안내고..."

"잠깐잠깐잠깐!?"

유우사키의 폭탄발언에 머리가 띵했다.
가슴을 만져? 내가? 사이렌지의?

"너, 너 그런 저질스런 루머 누구한테 들었어?"

"...아키츠씨가 직접 말했잖아요!"

"뭐? 내가!?"

발뺌하는것처럼 보였는지 방금전까지의 얌전한 분위기를 집어던지곤 버럭 화를 내는 유우사키의 태도에 당황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그것도 사이렌지씨한테 직접!"

그건 대체 무슨 변태같은 플레이인가요...

"저기, 미안하지만 난 전혀 그런 기억이 없는데?"

"이익...! 사, 사이렌지의 멜론은 최고였다고...
부드러운 육구 였다고 아키츠씨가 직접 얘기했잖아요!"

얼굴이 새빨개져선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 유우사키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사이렌지의...멜론? 사이렌지의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 잠깐 있어봐.


멜론? 


- 사이렌지의 '멜론'은 최고였으니까. 특히 그 부드러운 육구가...

- 사이렌지의 '마론'은 최고였으니까. 특히 그 부드러운 육구가...

......「마론」이잖아!?

...단어 하나 틀린걸로 이렇게까지 괴멸적인 오해를 하게 되는군요.
하루나는 슬렌더한 미인이라는 사실은 눈감아 주기로 하자.
사이렌지의 애완견 마론에 대해 차근차근 얘기를 해주자 유우사키는 당황하면서 중얼거렸다.

"애완견의 이름이 마론이었군요...
하, 하긴, 그러고 보면 멜론이라고 하기엔 사이렌지씨는..."

"...너, 사이렌지가 그말 들으면 울꺼야."

"윽..."

기죽은 유우사키는 다시금 항의하듯 물었다.

"그, 그럼 사이렌지씨랑 잤다는건요?"

"...그건 또 무슨 소문인데?"

대충 이 녀석이 어떤 식으로 사건을 왜곡해 기억하는지 알게된 이상 덤덤한 마음가짐으로 유우사키의 말을 기다렸다.

"영화관에서 말했잖아요!
침대에서 서로 끌어안았다고..."

"...걘 사이렌지가 아니라 아라이 사야카라는 같은 반 친구인데?"

"...어?"

"그리고 야한 짓을 한게 아니라, 다쳐서 양호실 침대에 뉘어주다가 조금 해프닝이 있었던거야.
껴안았다는 말 하나로 거기까지 비약하는건 정말로 어떨까 합니다만?"

근거가 죄다 논파된 유우사키는 결국 좌절포즈로 무너져 내렸다.

"나 변태..."

"...여전히 네 망상력은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구나."

"아, 아녜요! 전 음란한 아이가 아녜요......"

항의하다가 점점 쥐꼬리만한 목소리가 되어버린 유우사키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자자~ 네가 은근히 밝힌다는건 이해했으니까 그만 일어서라구.
모처럼 차려입은 옷이 더러워지잖아?"

"아니라구요오..."

기가죽은 유우사키의 등을 토닥이며 유쾌한 웃음이 터져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았다.



후두둑-
툭-

"이런? 비가..."

"엣?"

자괴감에서 빠져나온 유우사키를 데리고 상점가를 거닐던 중 뺨에 묻은 빗방울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두방울씩 떨어져 내리던 비는 어느새 거센 기세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가을비에 당황한채 유우사키를 데리고 피할 곳을 찾았다.
다행히 상점가라 근처 편의점의 비가리개 밑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네요..."

"뭐, 가을이니까.
게다가 이 동네는 가끔 날씨가 이상하잖아.
저번엔 늦여름인데도 폭설이 왔었지?"

"아, 아하하...그랬었죠."

왠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유우사키를 이상하게 바라보다 곧 고개를 돌렸다.
비에 젖은 블라우스 너머로 브래지어가 비치고 있으니까.

"아키츠씨?"

"...비가 곧 그칠것 같진 않으니까 우산을 사는게 좋겠네."

의아해하는 유우사키를 데리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쓸 우산 하나와 유우사키가 입을 비옷 한벌을 골랐다.
어째서 자신만 비옷인지 묻는 유우사키에게 말없이 손가락으로 블라우스를 가리키자,
옷이 비치고 있는걸 깨달은 유우사키는 당황하며 건네준 비옷을 재빨리 걸쳐입었다.


편의점을 나서고 바라본 하늘은 먹구름이 끼어 제법 어둑해져 있었다.
하나 둘 불을 밝히기 시작한 상점가 거리를 유우사키와 함께 걸었다.
찰박거리는 발소리와 우산에 부딪히며 튕겨나가는 빗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사이렌지씨는 집에 무사히 들어가셨으려나요?"

"거리상으론 대충 지금쯤이면 이미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마치 사이렌지씨의 집에 가본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응. 며칠전에 스토커에 시달리던 사이렌지를 에스코트 해주면서 알게 됐거든."

"스, 스토커!?"

"뭐, 당분간은 조심해야 겠지만 아마 큰 문제는 없을거야."

당황한 유우사키를 안심시키며 공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좀 이상한 스토커였지만 그렇게 충격을 먹은 상태에서 더이상 이상한 짓을 할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첫 만남때 있었던 해프닝까지 화제에 올랐다.

"아무튼 너랑 다시 만날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기대가 있었긴 했지만 솔직히 만남이 만남이다보니 얼굴보기 민망해하지나 않을지 걱정이었거든.
다시 만날 일은 없을듯 말하기도 했었고."

"...싫어하는건 아니었어요.
그저 이곳에 올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그건 유감이네...그래서, 오늘 하루는 만족스러웠어?"

"네. 오늘은...적어도 저에게 있어선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뭐, 나도 너랑 있어서 꽤나 즐거웠으니까."

"아하하 어쩐지 간지럽네요."

"그럼 다시 만날 수도 있을까나?"

"......"

"유우사키?"

"......아마..."

속삭이듯 발해진 유우사키의 말은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유우사키의 태도에 화제를 바꾸려고 했을 때 저편의 영화관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풍성한 포니테일은 빗속에서도 인상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 저 사람은...린 선배?"

비가 와서 집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건가?
우산을 씌워드리러 가는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자 유우사키가 등을 가볍게 밀었다.

"...가봐요."

"유우사키?"

몸을 돌리자 유우사키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생각보다 비옷이 컸는지 머리에 쓴 후드가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학교 선배죠? 신경쓰지 말고 가보세요."

"그렇지만 널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했는데..."

머뭇거리는 내 태도에 유우사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는거죠? 저 선배가.
그럼 고민하지 말고 가봐요.
별로 섭섭하다거나 그런게 아니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요."

"......"

"방금전 사이렌지 대신 절 선택해 주었잖아요.
그러니까...이번엔 이쪽이 양보할께요."

"하지만..."

망설이면서 우산을 들지 않은 손을 유우사키에게 뻗자, 유우사키가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유우사키?"

거리를 벌린 유우사키의 행동에 놀라 뻗은 손을 멈췄다.
내 손을 피하듯 물러난 유우사키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 평가는 기쁜걸."

"그러니까...지금 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요..."

"......"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비가 유우사키의 얼굴을 때린다.
볼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린 빗방울이 턱에서 물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조용히 빗방울을 맞던 유우사키는 작게 미소지었다.

"비옷...정말 고마워요."

"...응."

"...잘가요."

"...그래."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유우사키는 이윽고 몸을 돌려 빗속으로 사라졌다.

유우사키가 사라지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영화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입구 한켠에 서있는 린 선배의 뒤로 돌아서 우산을 내밀었다.

"영화는 즐거우셨나요 린 선배?"

"...아키츠?
데이트 중이던게 아니었나?
함께 있던 여자애는 어쩌고?"

"비가 와서 도중에 헤어졌어요."

"에스코트 해주지 않은건가?"

"린 선배를 에스코트 해주라고 하곤 먼저 가버렸거든요."

"...혹시 네가 화나게 만든건 아니겠지?
우리 또래 여학생들은 섬세하니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린 선배에게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손에 든 우산을 고쳐 들었다.
말없는 재촉에 린 선배는 한숨을 쉬곤 웃음을 띄며 우산에 들어왔다.
쿠죠 가(家)로 향하면서 오늘 본 영화에 대해서 린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며 가을비 속을 걸었다.

"그런데 그 애랑은 무슨 일 있었나?"

"아아...유리구두를 잃어버린 신데렐라를 위해 가죽구두를 건네주었거든요."

"...알 수 없는 말을 하는군."




월요일 아침.
주말에 유우씨를 만난 얘기를 코테가와에게 늘어놓았다.
사정을 들은 코테가와는 머릴 싸매고 신음을 흘렸다.

"오빠...주말부터 대체 무얼..."
"그리고 거기서 유우씨가 「유이를 갖고 싶으면 나를 쓰러뜨려봐라!」라고 해서 말야~"
"아, 그건 거짓말이군요."
"어째서 알아!?"



「그래서, 승부는?」
「졌습니다.」
「...뭘 자랑스러워 하는거에요?」

주우욱-

「아야!?」



================================

신데렐라: 유리구두 → 가죽구두
원전에서는 신데렐라가 신은 구두가 가죽구두였는데 이게 번역하는 과정에서 유리구두로 잘못 번역되었고
('털가죽'을 뜻하는 불어 vair를 '유리'를 뜻하는 verre로 오해함)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엔하위키 참조입니다.

늦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완성을 목표로 달렸는데 참...-_-;;;



축전과 삽화를 올려주신 터틀러님과 34화 축전을 맡아주신 암천묵시록님 감사드립니다.



수많은 축전과 함께 1, 2, 3화 삽화 올려주신 터틀러님 감사드립니다.

33화 유우사키의 우는 모습 축전에서 두근두근했습니다=///=b

훤칠한 소년으로 나온 완전체 료스케의 모습은 우혹 멋진 남(...퍽!)

화난 얼굴 료스케는 최강의잉여님의 레드 발언을 듣고 그럴싸해!? 라고 생각해버린...^^;

쪽지로 받은 료스케의 웃는 얼굴 축전도 좋았습니다^^
얘도 수염밀고 인남캐가 되서 친구가 생긴다면 축전처럼 밝게 웃음짓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지요;ㅅ;

1화 삽화로 들어간 축전에서 보여주신 코테가와랑 료스케의 구도는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임팩트 있는 마지막을 장식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완전체로 일상그림(Feat.후지사키 아야)도 감사드립니다.
아야의 축전을 받을 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해봤었는데 말이죠ㅠㅠb
아야 스토리도 좀더 보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캉과 야미, 료스케의 일상편 축전에서도 료스케는 참 갈궈지는군요=w=;
하지만 그런게 또 좋습(...)

료스케 여성버전에선 여성버전 설명후 곧바로 축전이 날아와서 놀랐고도 기뻤습니다m(_ _)m

2화 미캉과 료스케 축전에선 귀여운 미캉이 참으로 좋았죠+_+b
땀한방울 지우니 인상이 바뀐 료스케랑, 미캉 눈에 비친 료스케의 얼굴이랑, 귀여움이 느껴지는 미캉이 최고~0ㅅ0b

3화 라라특제야구배트 사건에선 료스케의 당황한 표정이 웃겼습니다=w=b
뻗뻗하게 굳어서 땀을 뻘뻘 흘리는게 적절했지요^^



34화 삽화를 올려주신 암천묵시록님 감사드립니다.
비오는 날의 료스케와 유우사키의 대화씬을 멋지게 그려주셨죠.^^
오오오~! 하면서 열심히 쓰자! 하고 생각했지요.

...........근데 이거 '지난주말'에 받은 삽화에요(...)
멋진 삽화까지 받아놓은 주제에 이걸 일주일 동안 묵혀뒀습니다...OTL;;;;;
지난주(...)에 삽화를 그려주신 암천묵시록님 죄송합니다.
토욜까지 올린다고 해놓고선 일요일이 되었네요...OTL;;;

글좀 빨리 써보겠답시고 33화 리리플도 미루고 있었는데 이래서야 원...;;;
그냥 글 핑계 대지말고 할거나 제대로 해야죠...ㅠㅠ;



아무튼;; 삽화와 축전을 보내주신 터틀러님, 암천묵시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편을 기다려주시는 독자분들도 정말 감사드려요~m(_ _)m



p.s.지난편과 이번편을 쓰면서 의도했던것 중엔 리토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호라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부족했던 부모의 관심, 부모 대신 동생의 보호자로서 행동하며 스스로의 나약함을 드러낼 수 없었던 환경.
이런 것이 리토의 현재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리토가 정말로 보통의 소년을 상징하는 주인공이라면 이런 이유가 가장 타당하다고 봤거든요.
유년기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정신적으로 성숙해 나가는 성장물이라면 이런 전개도 있을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작중 갓핸드나 육식계, 하렘왕의 자질이니 하는 개드립(...) 보다는,
유년기에 결핍되었던 가족애에 대한 갈망이 무의식중에 표출된거라고 하는게 좀더 리토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33화와 34화의 이야기가 쓰여졌습니다.=_=a;

...뭐, 나름대로의 재해석이었지만, 그냥 그런거 신경끄고 개그 코드로 진행시키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쿨럭쿨럭...=_=a;



p.s.2. 여담이지만 33화 뒤에서 나온 야미의 빵빵한(...) 가슴은 라라의 발명품에 피폭되어 일어난 현상입니다.
딱히 트랜스 능력을 쓴건 아니었죠.
다만 지금의 현상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의지가 제로였을 뿐(...)
지금쯤이면 라라가 원래대로 되돌려 줬겠죠^^;



p.s.3.

하루나와 마론

사이렌지 아키호

장군이(타다키치)

마론의 스킨쉽

사와다 미오

유우사키가 생각한 침대의 상황

스토커


Posted by 루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