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쨍쨍히 내리쬐는 여름의 오후.
후끈한 열기 속에서 가볍게 장보기를 마치곤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있는 두 꼬마 우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나는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으로 마루에 대(大)자로 널브러져 있었고, 원피스 차림의 모모는 지친 기색으로 부채를 부치며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 오셨어요 료스케씨?"

"료스케에에에...아이스크림 사왔어?"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그거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진이 빠진 목소리로 반응하는 나나를 향해 장바구니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들었다.
반색하며 일어나 다가온 나나와 모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주곤, 종이박스안에 넣어서 베란다 한쪽에 보관해뒀던 선풍기를 꺼내왔다.

최근 들어 계속된 무더위에 나나와 모모는 노곤하게 바닥에 늘어져 버렸다.
이런 더위라면 진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지만, 아무래도 데빌루크성인은 보통사람보다 여름에 더 약한 것 같다.
라라의 말에 따르면 데빌루크에선 여름이라는 계절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일까?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라라도 여름엔 때때로 힘들어하던 걸 떠올리면 여름엔 별도의 피서 수단이라도 알아봐야 할 듯했다.
에어컨을 장만하든가, 시원한 카페에라도 데려가서 시간을 보내든가, 아니면 에어컨이 나오는 미캉네 집에 아이스크림이라도 싸들고 놀러 간다든가.
개인적으론 3번. 더위도 피하고 나나랑 모모가 라라와 만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니까.

선풍기에 씌워둔 비닐 커버를 벗기고, 선풍기 날을 한차례 닦은 뒤 전원을 연결해 틀었다.
아이스크림을 다먹은 나나와 모모가 선풍기 앞에 앉아 기분 좋은지 눈을 감았다.

"하아 시원해..."

나른한 표정을 지은 나나의 목소리가 선풍기 바람에 흩어지며 울렸다.

"아~~~ 우리는~ 우주인이다~"

사실입니다.
TV에서 본건지 우주인 놀이를 하는 나나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깐, 나나. 그렇게 선풍기에 가까이 앉아 있으면 나한테 바람이 안오잖아?"

"모모 넌 부채가 있으니까 괜찮잖아?"

"억지 부리지 마. 나도 부채만으론 안된다구."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던 두명은 발끈한 모모가 나나의 꼬리를 잡아채면서 본격적으로 마루에서 뒹굴뒹굴거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땀투성이인채로 잘도 다투는구나.
날이 더우니 개방적이 되는건지 후끈후끈한 열기속에 바닥을 구르며 「후얏?」이니「꺅?」이니 야릇한 신음소리와 함께 서로의 꼬리를 잡은채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에 쓴웃음이 났다.
에로틱한 다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나나가 모모의 꼬리를 잡아채는 와중에 들어올려진 모모의 원피스 아래로 어른스러운 속옷이 보였을 때, 가볍게 감탄섞인 휘파람을 부른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일어나 옷매무새를 바로한 둘의 눈흘김을 모른척 하곤 장바구니에 든 먹거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었다.


더위에 지친 둘이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녁상을 차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햄야채볶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양파와 피망, 당근을 함께 넣어 색상에도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어 보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테이블에 앉은 나나와 모모에게도 호평이었다.

"아~ 잘먹었다!"
"잘먹었어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둘을 보니 나도 보람은 있다만...
물끄러미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수놓인 접시를 확인했다.
나나의 접시 한쪽에 쌓여있는 피망. 모모의 접시에 담겨있는 당근 무더기.
...편식이냐?

눈으로 묻자 나나와 모모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했다.

"...피망 싫어."
"당근은 조금..."

니들이 애냐...
다음부턴 서로의 피망이랑 당근을 바꿔먹는게 좋을까 의논하는 둘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테이블 뒷정리를 돕고난 뒤, 둘은 게임기에 달라 붙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얼마전 모모가 새로 사온 게임을 하나보다.
나나는 껌으로 풍선을 불어가면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난이도가 높은지 생각만큼 잘 하진 못하는 것 같지만.

"으악! 또 죽었잖아?"

"이지 모드로 플레이 하는건 어떨까?"

"자, 잠깐만 모모. 이제 슬슬 익숙해져 가는것 같으니까..."

"...그 말 꺼낸게 이걸로 벌써 다섯번째야 나나.
이지 모드에선 컨티뉴가 무한이니까, 일단 이지 모드로 연습해서 익숙해지는게 낫지 않아?"

"큭,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바꾸는건 진 기분이 든다고.
두고봐. 그런거 없이도 오늘 안에 반드시 엔딩을 보고 말테니까!"

"후우..."

나나의 고집에 모모도 고개를 내젓곤 물러섰다.
승부 근성을 불태우는 나나의 대사를 듣건데 아무래도 오늘은 클리어를 목표로 밤을 샐 작정인가보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기도 하고, 나나랑 모모는 학교에 다니지도 않으니 밤샘을 해도 딱히 걱정은 없지만...내 잠자리가 문제다.
소파에 앉아서 한창 게임 플레이 중인 둘의 앞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태연하게 눈을 붙이기엔 나도 그렇고 둘로서도 영 껄끄로운 선택이다.
결국 오늘은 나나와 모모가 마루에서 자고, 내가 방안에서 자는 걸로 둘과 이야기를 맞췄다.
마루에 둘의 잠자리를 깔아두고 일어섰다.

"그럼 나 먼저 잔다. 게임하다 밤 새진 말고."

"네. 안녕히 주무세요 료스케씨."

"흥, 밤까지 끌지 않아. 이런 게임 같은거, 단숨에 클리어 할테니까."

...정말로 일찍 자기는 할건가?
의욕만만한 나나의 모습을 걱정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나와 모모가 우리집에 머물게 되면서 몇가지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내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처럼 생긴 물체인데,「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라고 한다.
「사이버 사파리 랜드」는 예전에 나나와 모모의 계획으로 초대되었던 '트러블 퀘스트'와 같은 가상공간으로, 동물 친구들이 편하게 살수 있도록 나나가 조성한 오리지널 세계다.
저번에 나나가 데다이얼로 불러내었던 우주 멧돼지군은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불려져 나온것이라고 한다.

왜 내 방에 이게 놓여졌냐면, 내 방이 나나와 모모의 잠자리이기 때문이다.
나? 난 마루에 잠자리를 깔고 잔다.
홈스테이 하는 녀석들이 침대를 쓰고 정작 집주인이 마루에 잔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만, 여자애는 차가운데 앉으면 안된다는 얘기도 있잖은가.
시기가 여름이라서 '차가운 바닥'이라는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만...
리토네 집에 방이 모자라서 우리집에 지내러 온 나나와 모모인데, 적어도 리토네 벽장에서 지내는 라라보다는 나은 거주 환경을 제공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무감에 결정한 사항이다.
가끔 찾아오는 저스틴의 눈치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나나와 모모가 아버지인 기드에게 지구에 머무는걸 반억지로 허락을 받은뒤, 저스틴이 둘에게 용돈을 줄 겸 찾아왔었다.
「이런 녀석이랑 함께 지내실거면 차라리 저희가 사는 곳에 오십시오!」라는 저스틴의 주장에 나나랑 모모와 함께 저스틴의 거처로 가보았다.
조촐한 다다미방이었다. 나나의 가차없는 평가에 따르면 좁고 지저분했다.
기존의 거주자만 해도 저스틴, 마울, 브왓츠 3명인데 이 좁은 방에 나나랑 모모가 더해진다고? 잠잘때 테트리스 하듯이 잘 셈이냐?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결론과 함께 저스틴의 의견은 거절했다.

낙담하는 저스틴을 위로할겸, 저스틴의 수상작 '은하의 랩소디'의 감상을 말하며 정중한 태도로 저스틴에게 사인을 부탁했을때, 날 가리키며 '이런 녀석' 운운하던 저스틴의 급변한 태도는 인상적이었다.
헛기침을 하곤「...그래도 알고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녀석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저스틴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나나와 모모의 얼굴도 인상깊었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은 되는지「혹시 잠자리는 불편하진 않으십니까?」하고 물어오는 저스틴의 과보호도 잠자리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잠자리를 정하는 일 만큼이나 서로에게 배려가 필요했던 부분은 옷을 넣는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집의 크기와는 별개로 나 혼자 살고 있었던 집이니 만큼 가구의 개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자의 속옷 보관은 같은 서랍장의 다른 단에 하기로 정한 뒤,「혹시 실수인척 저희 속옷을 꺼내가진 않으시겠죠?」라며 추파를 던지는 모모에겐 정중히 부정의 말을 전해두었다.


회상은 여기까지로 하고, 공포영화를 봤던 날 이후로 내 침대에서 자는건 처음이라 새삼 감회에 젖은채 이불을 펼쳤다.
침대 머리 맡에는 휴대폰처럼 생긴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이 두개 놓여 있었다.
가상 세계에 놓아둔 물체를 불러오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나나와 모모는 주로 친구들을 불러내는데 사용하는듯 하다.
침대에 놓아둔걸보니 '이것도 휴대폰마냥 알람기능이 있는걸까?'하는 의문을 갖곤 데다이얼을 책상 위에 옮겨다 놓고 침대에 누웠다.

「이제 슬슬 포기하는게 좋지 않아 나나?」
「으으...이상해! 분명 TAS라는 사람은 엄청 쉽게 플레이 하던데!」

아니, 그거 사람이 아니니까...

마루에서 들려오는 나나와 모모의 대화에 속으로 딴죽을 걸곤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거실 바닥에서 이불을 걷어차고 배꼽을 드러낸채 만족감에 겨운 얼굴로 잠자는 나나의 모습에 무심코 헛웃음이 샜다.
나나의 옆에 누워있는 모모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얌전히 잠에 빠져 있다.
다만 모모도 이불은 덮는둥 마는둥 한게 아무래도 여름 더위 탓인가보다.
아니면 이불 덮을 생각도 못할만큼 피곤했다든지.
새근새근 숨소리를 흘리는 둘을 내려다 보다가 흘러내린 이불로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나나처럼 배꼽을 드러내놓고 자다간 감기걸릴것 같았으니까.
'잘록하고 매끈한 허리네'라는 감상과 함께, 「우웅...」하며 작게 몸을 뒤척이는 나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주었다.

새액-새액-하는 고른 숨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이렇게 자는걸 보니까 확실히 귀엽네.
부스스하게 흩어진 분홍 머리카락조차도 사랑스러워 보인다.
「데빌루크」니까 마치 천사같다는 표현을 쓰는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아침부터 눈호강 한번 제대로 하는구나.

무슨 꿈을 꾸는지 군침을 흘리며 자는 나나의 입가를 닦아줄까 하다가, 나나의 옆머리에 붙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나의 분홍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부정형 물체가 나나의 머리카락에 엉겨 있었다.
바로 어젯밤 나나가 게임 하면서 씹고 있던 풍선껌.

야 임마...

껌을 뱉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 잔거냐? 대체 몇시까지 놀았던거야...
내심 투덜거리곤 나나의 옆 머리를 손가락으로 받쳐올렸다.
잔뜩 엉켜있네 이거...아침부터 액땜하게 생겼구먼.
작게 신음을 흘리며 나나의 머리카락을 살펴보고 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고있던 모모가 눈을 떴다.

"으음..."

아직 졸린지 몸을 뒤척이며 게슴츠레 눈을 뜬 모모는 몽롱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마주하곤 한차례 눈을 깜빡였다.

"......료스케씨?"

"이런, 일으켜 버린거야? 밤늦게 논것 같길래 여간한 일로는 깨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

아연해하던 모모가 눈을 크게 치떴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한채 뭔가를 찾듯 이불 속을 뒤지던 모모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데다이얼이..."

"데다이얼이라면 내 방 책상에 놔뒀는데?"

내 말에 흠칫 몸을 떤 모모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몸을 가렸다.
경계하는 눈빛으로 모모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이걸 노렸던 건가요?"

뭐가?

"무슨 짓을 하려는거죠? 대답에 따라선 가만있지 않겠어요."

"무슨짓이냐니...나, 적어도 그렇게 경계시킬 정도로 질나쁜 행동은 안하고 지냈었잖아?"

"깨어난 순간 눈앞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는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거에요.
옆에서 자고 있는 자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남자였다면 더더욱..."

"응, 그건 그렇네."

"...부정해주세요 거기선.
더 믿을 수 없게 되잖아요?"

무심코 수긍해버린 내 태도에 모모는 반 울상을 되었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동의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구.
딱히 뭘 하려던건 아니었어?"

"...흑심을 품고선, 자고있는 틈을 타 저희에게 이상한 짓을 하려는 변태로 밖엔 안보이는걸요?"

"이봐, 난 그렇게까지 변태는 아냐.
자는 틈을 노려 엉큼한 짓을 할 만큼 비굴하지도 않고.
그건 내 자존심 문제라고.
그런 짓을 할 바에는 차라리 자고 있는걸 깨워서 하는 쪽이..."

"에, 엣...?"

내 말에 모모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듯 내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린 모모는 살그머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번데기마냥 이불로 몸을 만채 조용해진 모모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며 모모를 불렀다.

"모모?"

"저, 저기...지금까지 일은 전부 잠꼬대였던걸로..."

어이, 여보세요? 야한짓 하려고 깨운거 아니니까 자는 시늉 안해도 되거든요?
하는 짓이 귀여워서 화날 생각도 안든다만.
농담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꾸와 함께 잠자는 시늉을 하는 모모에게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니아니, 그런게 아니니까 진정하고 이것 좀 보라구."

"......"

이불 위로 눈만 빼꼼 내놓은채 경계하는 모모에게 나나의 머리카락을 들어보였다.
나나의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핑크색 껌을 발견한 모모가 눈을 깜빡였다.

"...어머..."




"으앙 이게 뭐야~?"

하품을 하며 눈을 뜬 나나는 옆머리에 달라붙은 껌을 확인하곤 울상을 지었다.
게임 클리어 후 만족감과 피로감 속에서 껌도 안뱉고 바로 잠에 빠진 만용의 결과라고 할까?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떼려다가 실패한 나나는 어쩔줄 모른채 울상을 지으며 가위를 찾았다.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려는 나나의 만행을 기겁하며 말리곤 화장대 위에 놓인 무스를 가져왔다.
무스를 든채 소파에 앉곤 소파 앞 마루에 나나를 앉혔다.
손바닥에 무스를 짜서 껌이 붙은 머리카락 주변을 살살 문질렀다.



"껌을 씹은채로 자니까 그런거잖아. 좀 조심하라구."

"히잉..."

"그런데 생각보단 일찍 일어났네?
밤새 놀았다길래 한 정오쯤은 되야 일어날 줄 알았는데."

"덥고 찝찝해서 씻고 싶었거든.
정말이지 이 더위는 언제쯤 사그라드려나 몰라."

투덜대면서 손바닥으로 부채를 부치던 나나는 바람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목덜미께를 잡고 옷을 펄럭거렸다.
쇄골 아래까지 노출된 민소매 티라서 소파에서 나나를 내려다보는 나로선 언뜻언뜻 드러나는 껌딱지 같은 무언가 때문에 시선을 두기가 곤란했다.
...아, 색깔이 말이다. 볼륨을 말하는게 아님.

"뭐하니 조신하지 못하게."

"그치만 덥단 말야..."

투정부리는 나나에게 작게 한숨을 쉬며 묵묵히 나나의 머리카락에 무스를 발랐다.
이윽고 머리카락에 붙은 껌들이 녹아 떨어질 기미가 보이자 빗으로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빗으며 껌을 훑어내었다.

"어머,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한창 빗질을 하고 있던 중 욕실에서 씻고 나온 모모가 우리 둘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잘됐네 나나. 료스케씨 덕에 머리카락을 자를 필요가 없어져서."

"그렇지?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려고 했을땐 놀랐다구.
장발은 기르기도 관리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예쁜걸 자른다니 아깝잖아?"

"에? 예뻐?"

"그럼그럼~ 게다가 폭신폭신한 감촉도 맘에 쏙 들어."

"...혹시 껌떼는거 일부러 시간 끌고 있는건 아니지?"

"설마."

껌떼기랑 상관없이 쓰다듬고 싶을 만큼 기분좋긴 하다만, 더워서 팔락팔락 손부채를 부치는 녀석을 계속 붙잡아둘만큼 염치 없진 않다.
머리카락에 붙은 껌을 꼼꼼히 떼어내곤 나나를 일으켰다.

"자, 다됐어. 이제 껌은 없지만, 무스를 쓰기도 했으니까 한번 머릴 감는게 나을꺼야."

"응, 안그래도 더워서 씻을 참이었으니까. 고마워 료스케~!"

일어서서 핑크빛 웨이브 장발을 한차례 만지작거린 나나는 싱긋 웃음을 보이곤 곧장 욕실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선풍기 앞에 전세놓은듯 앉아있는 나나와 모모가 보였다.
오늘도 선풍기 앞에서 시간을 보낼 셈인가?
또다시 선풍기 앞에서 늘어질 기미를 보이는 둘에게 안되겠다싶어 말을 꺼냈다.

"그렇게 있지말고 함께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

"쇼핑?"

"그래. 얼마 뒤면 여름축제니까 너희가 입을 유카타도 골라볼 겸해서 말야."

"갈래!" "좋아요."



외출준비를 마치고 나나와 모모와 함께 상점가에 들렀다.
홍차가 다 떨어졌다는 모모의 말에 우선 홍차 매장을 둘러보았다.
모모가 홍차를 살펴보는동안 나도 진열된 홍차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이 코너 저 코너를 돌아다니던 중 진열대 한쪽에 놓인 귀여운 꿀벌 인형이 눈길을 끌었다. 마스코트 캐릭터인가?
진열대 위에 놓인 홍차 티백이나 틴의 겉면엔 테디베어나 민속의상을 입은 어린이같은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물품이네...
어디, 가격은...5팩들이 티백이 578엔!? 아, 틴에 든 잎차는 1260엔이네.
가격은 비싼편이지만 귀여운 디자인이 눈길을 끄는지라 포기하기가 왠지 아깝다.
수집용이라고 생각한다면 가격은 어느정도 눈감아도 되지만...

가격이냐 귀여운 디자인이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으려니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손님, 어떤 종류의 제품을 찾으시나요?"

"아, 그러니까...후르츠 계열의 홍차를 찾고 있었어요."

과일향이 나는 제품이 괜찮을것 같아서 답하니 종업원이 웃는 얼굴로 진열대 한쪽을 가리켰다.

"후르츠 계열로는 이쪽의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 4 종류가 있습니다.
종류별로 한번씩 향을 맡아보시겠나요?"

"네."

종업원은 찻잎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접시에 담아 가져왔다.

"왼쪽에서부터 로얄 애플, 걸즈티, 진저레몬, 화이트 피치입니다."

"어디어디...「헤에, 좋은 향이네요.」오~?"

종업원이 내민 유리병에 얼굴을 가져가는데 오른편 뒤에서 모모가 끼어들었다.
뺨이 맞닿을만큼 가까워진 모모가 오른쪽 유리병의 향기를 맡았다.
귓가를 간질이는 스읍-하는 숨소리가 어쩐지 달콤하다.
분명 화이트 피치의 복숭아 향 탓이다.
귓볼이 뜨겁다.

향을 맡아보던 모모가 만족스러운듯 웃음지었다.

"산뜻한 향이네요. 료스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으응, 달콤한 복숭아 향이네."

"어머...제 향기라니 료스케씨도 참~"

입가를 가리고 웃으면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탁탁 두드리는 모모에게 당황해서 변명했다.

"어? 아, 아니. 모모(モモ) 네가 아니고 복숭아(もも, 모모)향...어라?"

"풋- 색남씨."

말이 꼬인 내 모습에 모모가 피식 웃곤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좋은 향이네요. 거기다 여기 홍차는 꽤나 디자인이 귀여운걸요?"

"모모 넌 사고 싶은걸 정한거야?"

"아직요. 뭘 고를까 둘러보다가 료스케씨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한번 와봤어요.
과일향이 나는 이 홍차가 제법 괜찮아 보이네요. 쿠키랑 함께 먹으면 좋을 듯 해요."

"그래? 그럼 이번 홍차는 이걸로 살까?"

의견을 조율하는 우리를 보던 종업원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혹시 애인이신가요?"

"왜요? 혹시 커플 경품 같은게 있나요?"

종업원의 말에 모모가 반색하며 잽싸게 팔짱을 껴왔다.
넉살도 좋구나 이녀석.
그래도 갑자기 몸을 기대오진 마. 네 발육은 솔직히 반칙이니까.
팔을 누르는 말랑말랑한 감촉에 움찔하면서 가까스로 표정을 조절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스스럼없이 보여서 드린 말씀이었어요.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 시즌 한정 스페셜 티를 커플 한정으로 할인해주는 이벤트가 있긴 합니다만..."

"핫핫핫. ...친구 동생입니다."
"후후후, 집주인씨에요."

냉큼 팔을 풀며 정색하는 우리에게 애매한 미소를 띄워버린 종업원이었다.



"계산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매장을 나왔다.

"괜찮은 가계였죠?"

"응. 홍차향도 좋았고 디자인도 귀여웠고 말야."

이후, 다른 매장에서 동물인형을 사온 나나와 합류해 의류 매장으로 이동했다.
맘에드는 유카타를 고르는데 제법 시간을 들인지라, 카페에서 파르페로 더위를 식힐 즈음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에 돌아와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했다.
나나와 모모는 골라온 유카타를 들고서 거울에 비춰보고 있었다.
유카타를 들고 이리저리 맞춰보던 모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내게 물었다.

"저기, 료스케씨?"

"왜그래?"

"유카타 입는거 말인데요, 어떻게 입는지 잘 모르겠는데 좀 봐주실수 있나요?"

"미안하지만 나도 잘 몰라. 기껏 아는거야 유카타 안엔 속옷을 안 입는다는 것 정도라서 도움도 안될텐데?"

"엑!?"

내 대답에 나나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럼 알몸으로 이걸 입어야 한다는 거야!?"

"아니...아무리 그래도 팬티는 입겠지. 그래도 위에는 안 입던걸?"

"진짜?"

"왠지 묘하게 확신하고 계신것 같네요?"

확신이라면 확신이지.
코테가와의 유카타 차림을 떠올려보면 그랬단 얘기니까.

"그냥..."

"그냥?"

"......경험?"

"「「......」」"

찌르는듯한 둘의 시선에 헛기침을 하곤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나중에 코테가와나 다른 친구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해볼께.
축제까진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흐응...료스케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모모가 어깨를 으쓱하곤 나나를 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 나나. 그럼 넌 평소처럼 입으면 되잖아?"

"왜 내 가슴쪽을 보는거야!?"

가슴쪽에 눈길을 주며 이야기하는 모모에게 나나가 발끈해선 소릴 질렀다.

"괜찮아 나나. 그것도 나름대로 희소가치가 있으니까."

"익! 그 이긴듯한 태도가 싫다고!
두고봐. 나중에 모모보다 훨씬 멋지게 자라줄테니까!"

"어머~ 기대할께."

민망한 대화가 오가느라 표정관리가 힘든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지 그래?
못들은척 딴청을 피우는 내 모습에 모모가 히죽 웃었다.

"후후...한창인 미소녀들이랑 함께 있느라 료스케씨도 큰일이네요."

미소녀라서 문제인게 아니라 에로 토크가 문제인겁니다.

"자기 입으로 미소녀라고 말하는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침부터 잠자리에서 덮쳐지진 않았겠죠?)"

"(쉿! 너도 오해 풀었잖아?)"

장난스레 속삭이는 모모에게 놀라 황급히 입술에 손을 가져갔다.
아침의 위기감이 사라진 반작용인지 대범해졌다고 해야하나, 오늘따라 모모의 행동에는 여유로움이 드러났다.
혹시 모모는 기싸움 할때면 밀리기 싫어하는 성격인건가? 아침의 일로 꿍해 있는것보다야 훨씬 좋다만.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모는 당황하는 내 모습이 만족스러운듯 쿡쿡 웃더니 농을 던졌다.

"뭐, 한창 피가 끓을 나이인 료스케씨니까 그런 고뇌를 모르는건 아니지만요.
그러고보면 사내아이는 침대 밑에 소중한 물건들을 숨긴다고 하던데...혹시 료스케씨도?"

"그럴리가 있나."

"침대 밑? 중요한 물건이 뭐야 모모?"

"알고 싶어 나나? 그럼 귀를 좀 가까이..."

"뭔데 그래?"

"야, 잠깐?"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나의 귀에 모모가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야.한.책.♡)"

"!? 저, 저질이야...!"

저질스러운건 너희 망상쪽이야 요 발랑까진 녀석들아.
애초에 숨길만한 물건이라고 해도 떠오르는게 없다고.
...기껏해야 책장 한쪽에 꽂아둔, 룬의 수영복 화보가 실린 연예인 잡지 정도?
룬에게 저 책이 발견된다면 분명 좋은 꼴은 못볼테니 숨겨야 할 물건이라면 숨겨야할 물건이지만, 애초에 룬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있기야 하려나 몰라.
나나에게 침대 밑에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물건에 대해 설명하려는 모모를 말리곤 점심 준비를 서둘렀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모모가 내쪽을 빤히보며 중얼거렸다.

"쌓여있네요."

"뭐가?"

"청소년기의 왕성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서 잔뜩 쌓여있는거죠?"

"절대 아냐! 성희롱이라구 이건!"

"호오? 왕성한 독서욕 때문에 책이 쌓여있다는게 뭐가 성희롱이란거죠?"

"윽..."


"쌓여있네요."

"또 뭐가?"

"얼룩덜룩해지고 꾸깃꾸깃한 뭉치들이 잔뜩 쌓여있는 통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고 있잖아요?"

"아니라니까! 난 그렇게까지 원숭이가 아니라고!

"호오? 빨래 바구니에 담아둔 빨래 냄새가 퀴퀴하다는건데 어째서 원숭이가 된다는거죠?"

"큭... 너, 너말야..."


"쌓여있네요."

"...또 뭔데?"

"아침마다 그 물건이 기운차게 팔딱팔딱 튼실한걸 보면 누가 봐도 쌓여있다고 생각할거에요."

"언제 본거야!?"

"호오? 아침수산시장에서 대야 안에 펄떡이는 활어가 잔뜩 쌓여있다는건데 뭘 봤다고 그러시는거죠?"

"이거 완전 억지잖아!?"


"쌓여있네요."

"네, 쌓여있네요."

"왕성한 욕망을 주체못해서 쌓여있는거죠?"

"맞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여있네."

"얼룩덜룩하고 비릿한 뭉치 냄새가 통안에서 진동하는거죠?"

"응, 여름이라 더 그런가보네."

"아침마다 팔딱팔딱 튼실튼실할만큼 쌓여있는거죠?"

"네네, 어차피 또 책이니, 빨래니, 물고기니 하는거지?"

"아뇨? 휴지통이 임신할 만큼 료스케씨의 성욕이 잔뜩 쌓여있다구요."

"이, 이익...!"

소악마같은 미소를 지은 모모에게 발끈해선 이마라도 한번 튕겨주려고 침대로 다가갔다.
다가오는 날 보면서도 모모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자신의 이마로 향하는 내 손을 모모가 양손으로 잡았다.

"후후, 이마로 되겠어요?"

모모가 내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까이 가져갔다.

"어, 어? 자, 잠깐?"

"밤놀이 상대는 못해드려도 쌓여있는걸 해소시키는데 조금쯤 도움을 드릴 순 있는데요?"

달뜬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는 모모의 숨결에선 복숭아향이 났다.

"안 쌓여있대두!
그러니까 이런 도움은 필요없...응? 가슴이 끈적끈적해?"

모모의 가슴에 닿은 손바닥에 끈적끈적한게 묻었다.
이건...풍선껌?
아연해하는 날 보며 모모가 히죽 웃었다.

"모모인줄 알았어?
유감, 나나였습니다~!"

"꺄아아아악!? 가슴이 껌딱지가 돼버렸어!?"

"껌딱지라고 하지마!"

손바닥에 잔뜩 달라붙은 껌딱지에 놀라 비명을 지르자 발끈한 나나가 내게 덤벼들었다.
침대에 밀려 넘어뜨려진 내게 나나가 달라붙어왔다.

"크윽!?"

"두번 다시 껌딱지 같은거엔 신경쓰지 못하게 해주겠어!"

"야!?"



옷가지가 훌훌 날아가고 이불 안으로 나나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불을 뒤집어쓴채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나나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전해져왔다.
이, 이 녀석 알몸이잖아!?

"더우니까 말야. 여름이잖아?"

송글송글 땀방울을 흘리며 나나가 배시시 혀를 내밀었다.
내 티셔츠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더듬던 나나는 이불속에 가려진 오른손으로 내 가랑이 사이를 더듬었다.
붉어진 얼굴로 뻐끔뻐끔 입을 벌리고 있자니 나나가 작은 입을 벌려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후후, 딱딱하네. 역시 쌓여있었잖아?
자아~ 커져라 료스케의 엑스칼리버~"

쓰다듬쓰다듬.

그만둬 쇼커!?




......아놔 꿈.

한심한 비명을 마지막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낯익은 마루의 천장에 눈을 깜빡이다가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에 황급히 이불을 걷어 바지를 벗었다.

...맙소사...

밤꽃 냄새를 풍기며 눅눅하게 젖어있는 팬티에 자연스레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은 아직 새벽. 나나와 모모는 한창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한껏 눅눅해진 팬티를 대충 휴지로 닦고선 갈아입을 팬티를 가지러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소리없이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자 침대에 자고있는 나나와 모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으- 하는 옅은 숨소리를 흘리며 편안히 잠에 빠져있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 방금전 꿈이 떠올라 자기혐오로 죽을 것만 같았다.
미안해 모모. 미안 나나. 이상한 역할로 꿈에 나오게 만들어서. 앞으론 편식한다고 화내지 않을테니까...
가까스로 좌절하려는 마음을 다잡고 조용히 서랍장을 뒤져서 새 팬티를 꺼냈다.
그대로 방을 벗어나려던중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보았다.
침대 커버가 흔들리더니 침대 밑에서 기어나온 개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저번에 나나가 데려온 떠돌이 개 중 하나였던걸로 기억한다.
굳어있는 내 모습을 보던 개는 게슴츠레 내쪽을 바라보다가 길게 하품을 하곤 도로 침대 아래로 들어가버렸다.

"휴우...간 떨어질뻔 했네."

가슴을 쓸어내리곤 이번에야말로 소리없이 방을 나왔다.
마루에 나오자 소파 위에서 뒹굴고 있던 개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나가 가상현실에서 개들을 꺼내놓은건가?
의아했지만 지금은 눅눅해진 팬티를 씻는게 먼저라 욕실로 들어갔다.



민망한 뒷처리를 끝내고 나서 팬티를 들고 욕실을 나왔다.
기왕 내친김에 쌓여있는 빨래감도 한꺼번에 빨려고 베란다로 나온직후, 빨래 바구니에서 뒹굴고 있는 개들을 보곤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야 이게!? 왜 개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있어?
아까전 마루에서 봤던 개도 이상해. 분명 어젯밤 잠자기 전엔 개 같은건 한마리도 없었다고?

일단은 개들을 말리는게 우선이라 빨랫감을 입에 물어 대려는 개들을 얼렀다.
몇몇은 손짓을 따라 얌전히 물러났지만 개중엔 빨랫감을 물고 도망가려는 녀석도 있었다.
한번에 전부를 잡을 순 없었는지라 일단 먼저 목덜미를 잡은 녀석의 입에서 옷감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빨랫감을 빼내었다.
빨랫감을 빼내고 개를 놓아주자 녀석은 곧장 마루로 달아났다.

손에 잡힌 빨랫감은 나나의 팬티였다.
...혹시 자기 주인 냄새를 맡고 가져가려고 한건가?
근데 이거 이빨 때문에 헤지진 않았으려나?
침자국이 묻은 팬티를 살짝 펼쳐보는데 옆에서 「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가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든 팬티를 보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나나에게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잠깐! 이건,"

"이잇! 뭘 빤히 바라보는거야!"

내 말을 막으며 나나는 빨개진 얼굴로 자기 팬티를 낚아챘다.
팬티를 뒤로 감추면서 날 노려보는 나나에게 민망해하다가 방금전 떠오른 의문을 부딪혀 화제를 돌렸다.

"아, 나나. 그러고보니 묻고 싶은게 있는데."

"...뭐야 변태?"

"집안에 개들이 가득 차 있는데 혹시 네가 풀어놓은거야?"

"...아! 어제 놀다가 게이트 닫는걸 깜박했어!"

내 질문에 나나가 깜짝 놀란듯 다급히 방안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어젯밤부터 오늘아침까지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린채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집안을 돌아다니는 개들을 가상공간으로 돌려보내는걸로 부산스레 하루의 시작을 열었다.
아침식사동안 뽀로통한 얼굴로 밥을 먹는 나나와, 나나의 태도에 의심스런 눈으로 날 보는 모모 때문에 아침 밥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하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면 꿈에서 나온 두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서 붉어지는 얼굴을 숨기기 급급했을 뿐이었으니까.

뭐, 정오가 될 즈음에는 다 털어내고서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지나 산책겸 마을을 걷다가 미소라당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과자와 빵을 보다가 문득 어제 산 홍차가 떠올랐다.
모모가 해주는 홍차랑 쿠키를 함께 먹으면 맛있을것 같네.
아침의 일도 사과할 겸해서 미소라 당에 들어가 쿠키를 사 집으로 향했다.

더위를 타는 두 녀석들을 위해 덤으로 마트에서 아이스크림도 몇개 사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게임센터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했다.
원피스를 입은 짧은 분홍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건슈팅 게임을 하고 있었다. 모모다.
어쩐지 총을 쏘면서 연신 곤혹스러워하기에 의아했지만 게임 타이틀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버추○ 캅」이네. 당황해하며 파란 양복을 입은 악당에게 총을 쏘는 모모의 뒷모습을 불쌍하게 응시했다.
파란양복. 화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알을 죄다 몸으로 막아내면서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깎아대는 흉악한 괴물이다.

「Somebody help me!」

"에?"

「Please, don't shoot!」

"어, 어라?"

「Nooooo---!」하는 괴성과 함께 플레이어의 라이프를 몇번이나 깎아댔을까.

「GAME OVER」

결국 모모는 파란양복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패배했다.
과연 파란양복. 최악의 난적이라는 악명은 거저 얻어진게 아니다.

"......"

게임오버 화면이 뜨고서도 모모는 한참을 총을 든채 멈춰서 있었다.

"후...후후..."

이윽고,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낮은 웃음을 흘린 모모는 조용히 총을 내려놓고 다른 게임기로 이동했다.
펀치 머신 앞에 선 모모는 말없이 동전을 투입구에 넣었다.
펀치 머신에 불이 들어오고 누워있던 글러브가 세워지자 모모는 작게 숨을 들이 쉬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는 모모를 구경하던 남자 한명이 슬그머니 모모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이, 예쁜 아가씨? 아가씨처럼 갸냘픈 소녀가 그런걸 쳤다간 잘못하면 손이 부러질지도 몰라?
그런 위험한건 하지 말고 시간되면 나랑 같이..."

콰아아아앙---!!!

강렬한 충격음과 함께 펀치 머신이 크게 들썩였다.
게임기들의 BGM을 묻어버릴만큼 엄청난 굉음이 게임센터를 울리면서 놀란 사람들이 펀치머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슈우우우우...

게임기들의 음악들 사이로 글러브에 바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린다.
삐걱삐걱대는 펀치머신의 화면에 신기록이 갱신되었다.
다만, 사람들은 스코어보단 방금전 굉음을 일으킨 조그마한 체구의 모모에게 더 경악한 표정이다.
과연 데빌루크. 아무리 어려도 보통 사람과는 한가닥 다른 완력이다.
모모에게 헌팅을 시도하던 남자는 어느샌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후우...릴렉스~ 릴렉스~"

돌아서선 상쾌한 얼굴로 이마를 훔친 모모는 미묘한 얼굴을 한 날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료스케씨? 언제 오셨어요?"

"아, 아. 집으로 가다가 네 모습이 보이길래 잠깐 구경하고 있었어.
...아이스바 하나 먹을래?

"어머, 고마워요."

건네받은 아이스바를 입에 물고선 모모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배시시 웃었다.
시원한걸 먹곤 기분이 나아진건가보다.
방금전의 행동은 여름의 무더위 탓으로 이해하자.

"나나가 안보이는데, 함께 나오지 않은거야?"

"나나는 아직 집에 있을거에요.
찾는 물건이 있어서 한창 집안을 뒤지고 있는 중이거든요."

아이스바를 할짝이며 대답한 모모는 다시금 의욕이 솟았는지 눈을 반짝곤 게임센터를 돌아보았다.

"후우~ 시원하네요. 자, 그럼 다시 한판 더!"

"아직 더 하는거야?"

"물론이죠. 적어도 방금전 게임만큼은 설욕하지 않으면...!"

"그럼 난 먼저 집에 가있을께.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곤란하니까.
아, 쿠키도 사왔으니까 나중에 홍차랑 함께 먹자. 미소라당에서 사온건데 거기 쿠키는 맛있기로 유명하거든."

"헤에? 그거 기다려지는걸요.
저도 집에가면 맛있는 홍차를 대접해 드릴테니까 기대해주세요~"

생글거리며 손을 흔드는 모모에게 마저 손을 흔들어주곤, 다시금 건슈팅에 도전하는 모모의 뒷모습을 본후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섰다.

"나나, 나 돌아왔,"

두두두두두두두-!

"이 짐승아아아아아아아!"

퍼어억-!



"꿱!?"

민소매 티에 핫팬츠 차림의 나나가 전력투구로 내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너는! 그렇게도! 내 팬티가 좋은거야? 이 변태야!"

날아차기에 직격당해 비틀거리는 내 멱살을 잡은 나나가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내게 대들었다.

"왜, 왜그래?"

"몰라서 물어!?"

나나가 한손에 쥔 물체를 쑥 내밀었다.
조그마한 천조각이 나나의 손끝에서 나풀나풀 흔들렸다.
...음?

"저기 나나, 혹시나 해서 묻는거지만 이거 설마..."

"이, 이잇...! 보면 몰라? 내 속옷이잖아!"

버럭 화를 내면서 나나가 속옷을 쫙 펼쳐들었다.

"야! 너 대체 뭘 보여주는거야!?"

"시끄러! 잘 보라구!"

한껏 얼굴이 붉어진 나나가 내민 속옷이 코앞까지 내밀어졌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수치 플레이야?

"분명 이걸 세탁하려고 내놓았었는데 안보여서 찾아봤었어.
아끼는건데...세탁기 근처를 찾아봤는데도 없었구.
그래서 다른데 떨어뜨린건가 싶어서 집안 구석구석까지 찾았어.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보였는데...네, 네 침대 밑에서 이게 나왔다고!
야한책 대신 이런걸 쓰는거야!?
침대밑에 숨겨둔 중요한 물건이라는게 이런거냐구!"

속옷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이거'라고 지칭하는 나나는 부끄러움과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날 추격하듯 나나는 속옷의 눅눅히 젖은 자국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이 침자국은 뭐야!
너 내 속옷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해댄거냐구!
이 호색한! 저질! 변태! 짐승!"

"아니거든!? 내가 한게 절대로 아니거든!?"

"거짓말하지마! 너말고 대체 누가 있다는거야!"

"자, 잠깐? 어지러우니까 흔드는건 제발 그만...!?"

발끈한 나나에게 멱살을 잡힌채 탈곡기 속 곡물마냥 탈탈탈 털리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심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바보가 살았다.
하루는 바보가 장에 가서 고기를 샀다.
고기를 사면서 정육점 주인장에게 부탁해 레시피가 적힌 종이쪽지도 함께 받았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던 중 독수리가 날아와 고기를 낚아채러 바보에게 덤벼들었다.
고기와 레시피가 적힌 쪽지중 어떤걸 보호해야할지 고민하던 바보는 종이쪽지를 꽉 잡았고, 독수리는 안심하고 고기를 낚아채 날아갔다.
고기를 낚아채서 하늘 높이 사라지는 독수리를 보면서 바보는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바보같은 독수리 녀석! 레시피가 없으면 고기를 요리할 수가 없잖아!"

레시피가 적힌 종이 쪽지를 쥔 바보는 독수리를 비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바보가 범인, 독수리가 나, 고기는 너, 레시피가 팬티."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

"내용물이 없는 팬티엔 관심없습니다."

"이 변태야아아아아아!"

짜악-!

진지한 얼굴로 주장하다가 따귀를 맞았다.
뺨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날 씩씩거리면서 노려보던 나나는 홱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했다.

"야? 어디가?"

"언니한테 갈꺼야!
이런 변태가 사는 집 같은거, 당장에라도 나갈꺼야!"

핫팬츠에 민소매티만 입은채 밖으로 나가려는 나나에게 당황해서 나나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자, 잠깐만! 설명이 좀 부족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부웅-!」읏!? 진정하라구?"

"이익...!"

나나가 휘두른 주먹을 피하면서 설득을 계속했다.
잡힌 팔을 풀려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나나가 더이상 참지 못했는지 반대편 손으로 뭔가를 꺼내들었다.
물질전송장치「데다이얼」?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가이노시시노,"

"으아아아! 인터셉트으으읏-!"

탁-!

"엣...?"

우주 멧돼지 녀석을 실내에 소환하는 만행을 저지르려는 나나에게 기겁해서 황급히 데다이얼을 손으로 쳐내곤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곤 벽에 밀어붙였다.
아스팔트를 갈아버리면서 돌진하던 멧돼지 녀석이 소환되었더라면, 그 집채만한 덩치만으로도 집안이 엉망진창이 될게 뻔했기에 살짝 식은땀이 났다.

"하, 하아... 멋대로 그런걸 꺼내면 곤란하잖아?"

"...아..."



데다이얼을 놓치곤 벽에 밀어붙여진 나나는 순간 뭐가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저만치 바닥에 떨어져 방치된 데다이얼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나나는, 몇차례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연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나나의 벌어진 입술이 살짝 떨린 것 같았다.

"자, 이제부턴 좀 진지한 시간을 가져보자구."

이빨을 드러내며 웃자 나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뭐, 뭘 할 셈이야?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뭘?"

"힉!?"

실수한건가.
나나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기도 싫고, 데다이얼로 소환할 우주생물에게 집안이 박살나는것도 싫어서 양손목을 붙잡고 벽에 밀어붙인게 나나의 공포심을 자극했나보다.
시시각각 얼굴이 파래졌다 붉어졌다를 반복하며 눈동자가 흔들리는 나나를 보면, 대충 어떤식의 위험한 전개를 상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그래도 여기서 두손을 놔버리면 지금 상태의 나나는 내 변명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나버릴것만 같다.
차라리 그냥 이대로 해명을 마친 뒤에 놔주는 쪽이 오해를 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다.

"이런 상태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너한테 해꼬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진정해."

"......"

"일단, 네가 화난 이유에 대해선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우선 내 말도 한번 들어주길 바래. 그 후엔 화를 내도 받아들일테니까."

"으, 으응..."

차분히 말하는 내 태도에 조금은 진정한건지, 두려운 얼굴을 보이면서도 나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우선 어제 저녁에 모모가 했던 말에 대해서 반박할께.
남자아이는 야한 물건을 침대밑에 숨긴다는거 말인데..."

내 말에 나나의 볼이 붉어졌지만 무시하고 말을 계속했다.

"「나는 그런 행동은 안한다」라고 말해도 안 믿을지도 모르니까,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자구.
만약 네가 좋아하는 남자의 팬티를 손에 넣었다고 쳐."

"읏! 나, 난 그런덴 관심없어!"

"아니.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말야."

"...상상하기도 싫어."

"나도 마찬가지라구. 거기, 못믿겠다는 시선은 일단 치워."

불신어린 눈빛의 나나의 반응에 신음을 삼켰다.

"여기서 질문. 너라면 그 팬티를 그 남자가 쓰는 침대 밑에 숨기려 할까?"

"하?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리 없잖아. ...아!"

"그렇지? 그리고 내 방 침대는 내가 아니라, 너랑 모모가 사용하고 지내지.
적어도 상식이 있다면 언제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곳에 숨길만큼 무모한 짓은 안할꺼야.
지금에 와선 거긴 '내 침대'가 아니라 「'너랑 모모'의 침대」니까."

"...그럼 왜 내 속옷이 거기에 있었어?
난 거기에 둔 기억이 없다구.
거, 거기다 그 침자국은..."

어물거리다 부끄러워졌는지 말을 흐리는 나나에게 조심스레 추측을 말했다.

"글쎄...솔직히 나로서야 짐작만 할 따름이지만, 오늘 아침에 빨래 바구니에서 개들이 빨랫감을 물고 달아나는 일이 있었거든.
그때 너랑 실랑이 하느라 도망가는 녀석들을 다 잡진 못했는데, 아마도 그때 놓친 개가 침대에 놔둔게 아닐까?
침이야 개들이 물고 있다가 묻은걸테고. 데다이얼로 불러내서 개들에게 한번 물어보는게 어때?"

"어...으응."

아침에 속옷을 가지고 드잡이질 했던 기억을 떠올렸는지 나나는 낯을 붉혔다.
얼마나 설득이 통했는진 모르지만 나나도 방금전까지의 격한 반응과 달리 몸부림치지도 않고 얌전히 있는걸보면 적어도 놔주자마자 달아날 것 같진 않았다.

진정한 나나의 모습에 나도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벌컥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어...요...?"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모의 발걸음이 멈췄다.
눈앞의 광경, 그러니까 나나의 양 손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인 내 모습에 모모의 웃는 얼굴은 아연한 얼굴이 되고,
나나의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나나의 데다이얼을 발견하고선 마침내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시바리스기.(거대 인면수(人面樹))"

"우아악!?" "꺄아아!?"

데다이얼에서 뿜어져 나온 빛과 함께, 습격해 온 인면수에 기겁해 서로 얼싸안은 우리 둘의 비명으로 두번째 해프닝은 시작되었다.




모모가 홍차를 타는 동안 미소라당에서 사온 쿠키를 접시에 담았다.
방금전 소란 속에서 쿠키가 조금 부서지긴 했어도 다행히 가루가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모모의 오해를 풀고 나서 너저분해진 거실을 정리하곤 모두가 진정할겸 티타임을 갖기로 했다.

차분히 홍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정리했다.
속옷 도둑 사건의 진상은 예상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의 사이, 열려있는 게이트를 통해 사이버 사파리 랜드에서 개들이 나왔다.
잘곳을 찾아 집안을 돌아다니던 개들 중 한마리가 나나의 냄새를 맡고 빨래 바구니에서 팬티를 물고선 침대 아래에 기어들어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어 나나의 말에 따라 사이버 사파리 랜드로 개들이 돌아가면서 침대 밑에는 덩그러니 팬티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팬티를 찾던 나나가 침대 밑에서 그걸 발견하게 되면서 오해가 시작되었단 얘기다.

개들에게 물어보고 진상을 알게 된 나나는 어쩔줄 몰라 했다.
언급하기도 민망한 사건인지라 나도 굳이 사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 사과해야할지 붉어진 얼굴로 고민하는 나나의 모습이 귀여워 보여 조금 놀릴겸 핀잔을 주었다.

"뭐, 확실히 넌 귀여우니까 그런 오해를 받아도 어쩔수 없겠지만, 침자국 운운하면서 변태취급을 한건 좀 마음이 아프더라."

"우, 우으으..."

"맞아 나나. 무엇보다 료스케씨는 속옷 같은걸로 만족할만큼 얌전하지 않은걸?
여차하면 자고있는 여자를 깨워서 욕구를 풀려는 사람이니까."

"아니거든? 그거 어디까지나 비유였다고."

속옷 도둑은 귀엽게 보일 만큼 범죄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모모에게 딴죽을 거는데, 기죽어 있던 나나가 억울한지 항의했다.

"하, 하지만! 마루에서 자던 개가 말했단말야!
오늘 새벽에 료스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팬티를 숨기듯이 들고 몰래 욕실로 들어가는걸 봤다고!"

푸웃-!?

모모가 마시던 홍차를 뿜었다.

"콜록콜록..."

새빨개진 얼굴로 기침을 하는 모모의 반응에 놀라면서도 나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래서 그거 분명 내 팬티를 들고 간거라고 생각했는...데..."

항의하던 나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수치심이 자극됩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조그마한 목소리로 답을 내뱉었다.

"...그건 내 팬티였다구..."

조그맣게 중얼거린 내게 나나는 붉어진 얼굴로 와악! 하고 발악하듯 외쳤다.

"애초에 네가 나쁜거잖아! 자기 속옷 들고서 욕실 들어가는데 왜 그렇게 의심스럽게 행동했던거야!"

"나, 나나...그거 아마..."

부끄럼을 타는 나나를 말리면서 모모가 머뭇머뭇 나나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만. 전부 내가 잘못했으니까. 여기서 제발 그만해주세요.
하지만 나나의 얼굴이 확 붉어진걸 보니 이미 늦은것 같다.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아버린 나나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좌절감에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당황하는 둘의 기척이 전해져온다.

"쿠, 쿠키가 맛있네요."

"그, 그치?"

"...홍차도 맛있네."

"「「「하, 하하하...」」」"

"「「「......」」」"

거북한 침묵이 거실을 맴돈다.
태어나서 그렇게 민망한 티타임은 처음이었다.




월요일. 하교후 집에 돌아오니 열린 방문 사이로 물건을 뒤적이는 소리와 나나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방안에 들어가자 웨이브진 장발을 풀어내린 나나가 핫팬츠 차림으로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뒤지고 있었다.

"뭐하고 있어?"

"머리끈이 사라졌어."

이번엔 머리끈이냐.
저번처럼 침대 밑을 살피는 나나의 모습에 어제 일이 오버랩되었다.

"다 좋은데 말이다... 그 자세는 좀 위험하지 않아?"

"응?"

그러니까 핫팬츠 차림으로 엉덩이를 들고 엎드려있는 그 자세 말이다.
치골이 드러날 만큼 짧은 핫팬츠의 벌어진 가랑이 틈으로 속옷이 보이고 있었다.



"팬티 보인다구."

"죽엇 이 변태야!"



==============================
늦어서 죄송합니다.
2월이 지나버렸네요.OTL;
1월 중순에 플롯짜놓고 이제야 완성하다니 참...--;
39화...힘내자...ㅠㅠ;


삽화에 수고해주신 터틀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생생함이 전해지는 삽화가 귀여워서 최고였습니다.
그리고 징하게 느린 업로드 죄송요ㅠㅡ
늑장 연재에 한달째 묵혀둔 삽화에 양심이 아픕니다orz;


그리고 구정전에 올릴것 같다고 본의 아니게 뻥을 치게 되서 죄송해요 초매사츄님.ㅡㅜ;
다른 독자님들께도 죄송합니다m(_ _)m;;;



p.s. 참조 이미지

잠꼬대 하는 나나 - 터틀러님의 초안. 이불덮어주기 전 장면입니다. 자는 모습들이 귀여웠죠^^

p.s2.참고로 일본어로 복숭아(Peach)는 모모(挑, もも).

p.s3. 원래 플롯상에 있었던 미캉, 야미, 하루나의 얘기는 잘랐습니다.
매끄럽지도 않고, 저걸 넣어서 매끄럽게 써나가기엔 데드라인이 코앞이라(...)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버렸네요.OTL;;;
담에 개별 이야기로 만들어보죠...쿨럭....( --);


 


Posted by 루트(根)
,

암천묵시록님, 신이다님, 터틀러님의 이불이 축전 모음입니다.

쪽지로 허가 받은 분들을 먼저 업로드 하였습니다.

다른 분들도 연락이 되서 허가를 받으면 축전을 업로드 하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

쨍쨍 내리쬐는 여름 햇살로 달아오른 아스팔트 길.
찌는듯한 더위가 느껴지는 등교길에 아침부터 노곤함이 몸을 잠식하는 것만 같다.
오늘은 특히나 햇살이 강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피부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학생들보다 심하게 더위를 타는지 유달리 목덜미며 허벅지에서 배인 땀으로 힘들어하는 라라의 모습이 보인다.
「데빌루크에선 여름같은거 없었는데...」라며 불평하는 라라의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지쳐보이는 얼굴로 후우- 한숨을 내쉬는 라라의 모습이 제법 뇌쇄적이라 나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뿌리쳤다.
당황한 마음을 추스리고 정면을 쳐다보자 학교 정문에 풍기위원들 사이에 선 코테가와가 보였다.
수첩과 펜을 든채 등교하는 학생들을 한명한명 지켜보던 코테가와의 시선이 내쪽으로 향하자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코테가와~ 아침부터 대단한 무더위지?"

"그러네요. 오늘은 유별나게 더워서 밖에 있는 것도 큰일이에요.
그나저나...아키츠군은 오늘도 여전히 불량스러운 복장이군요."

"아하하, 새삼스럽게 뭘~
그런데 코테가와는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왜 여기에 서있는거야?"

"...설마 모르는건가요?
제가 왜 일부러, 이 더운 날에 아침부터 교문 앞에 서 있는건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코테가와는 팔짱을 낀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에 뭔가 내가 잊은게 있나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더위로 인한 짜증이 겹쳐 무심코 얼굴을 살짝 찌푸리는 코테가와를 향해 도무지 떠오르는게 없다고 말하기도 거북한지라,
싱겁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려 보았다.

"음, 혹시 나랑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든지?"

"잠꼬대는 침대에서나 하세욧-!
풍기강화주간이니 이러는걸로 정해져 있잖아요!"

"읏~?"

농담은 안통하네요.
푹푹찌는 무더위 속에 방금 전의 실없는 농담은 오히려 코테가와의 화를 북돋운 것 같았다.
이젠 숫제 손가락으로 내 볼을 쿡쿡 누르면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닥달하는 코테가와의 기세에 눌려 뒤로 밀려면서 상황파악을 위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괜찮은건가 저거?」
「내버려 둬. 어차피 방식은 다르지만 복장불량으로 단속할거 였잖아.」
「애초에 풍기단속 하면서 아키츠군에게 딴죽을 걸 담력이 되는 사람은 코테가와씨 뿐이잖아?」
「더위로 잠시 냉정함을 잃은 것 같은데 저렇게 살풀이 하고나면 좀 침착해지겠지.」
「언니...저도 언니께 매도당하고 싶어요...」
「...전부터 생각했던건데 너 머리는 괜찮은거니?」
「더워...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할짝할짝 핥고싶어...」
「어쩐지 음란한 의성어라고 생각되는건 기분탓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안한 목소리, 태평한 목소리, 나른한 목소리, 달뜬 목소리, 지친 목소리로 대화하는 풍기위원들의 무리가 보였다.
저번에 풍기위원회의실 앞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것 같은데.
더위를 먹었는지 풍기위원들의 사고도 반쯤 풀려있는것 같았다. 학생들 복장 체크는 제대로 하고 있는것 같지만.
정문앞에서 학생들을 체크하는 풍기위원들의 한쪽 팔에 둘러진 「풍기」라고 적힌 완장을 보고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떠올랐다.
학생들의 비행과 탈선을 막기위한 풍기위원회 주관의 자정활동, 통칭 「풍기강화주간」의 시작일이다.



얼마전, '사이난 고교 관계자들이 교외에서까지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위를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는 신고가 풍기위원회에 들어왔다.
처음엔 리토랑 라라의 트러블에 관련된 신고라거나, 안좋은 소문이 많은 나와 관련된 신고인가 싶어 걱정했었는데 실상은 달랐다.

사이난 역앞에서 있었던 「룬(RUN)의 CD 판매량 1위 기념 이벤트 공연」.

신인 아이돌로 한창 기세를 타고 있는 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듯 해서 이벤트 공연장은 팬들로 터져나갈듯 북적였다.
그런데 노래가 흐르며 팬의 환호속에서 한창 공연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콘서트 무대 위로 난데없이 교장과 모테미츠, 타치바나가 난입해 왔다고 한다.

참고로 모테미츠는 길거리 헌팅이 취미인 야구부 소속의 3학년생으로, 1년전 교내도촬 행각이 발각되어 정학처리를 받은 경력이 있어 여학생들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타치바나는 리토의 중학교 시절 축구부 후배로 나쁜 녀석은 아닌것 같지만 나와 리토를 이상한 방향으로 엮이도록 만드는 바람에 조금 꺼림칙한 상대다.
교장이야 뭐...알몸으로 여학생들에게 달라붙어 할짝할짝 하고싶다고 공언하는데다 그걸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하는 변태고...
모든 행각이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미수로 그쳤다지만 도저히 안심할 수 없는 위험 인물이다.

이 세명의 무대 난입으로 공연장의 열기에 흥분한 팬들마저 덩달아 폭주하는 바람에 놀란 룬이 공연 도중 황급히 무대에서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다.
공연을 보러 왔던 라라가 무대를 정리해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엉망이으로 끝나버린 공연에 팬들의 불만이 터졌겠지.
아무튼 다행히 해프닝으로 마무리된 일이었지만, 명백히 아이돌에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풍기위원회에 들어온 신고는 그 사건을 두고 룬의 기획사에서 학교 측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덩달아 받은 것이거나,
룬의 팬 중 한명이 그때 일로 앙심을 품고 개인적으로 한 신고인 것 같았다.

학교 밖에서까지 문제가 불거진 이번 사건으로 풍기위원회에서는 저번에 미뤄두었던 풍기강화주간 입안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모범이 되어야 할 교장이 사고를 쳤다는 것에서부터 풍기문란의 심각함을 알수 있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할까.
교장의 경우엔 엿보기 외에도 때때로 알몸으로 여학생에게 덤벼드는 변질행위를 벌이는데다, 이번엔 학교 밖에서까지 비슷한 행위를 해버렸으니...
학부모 차원에서 항의가 들어오지 않는게 이상할 수준이라, 결국 풍기위원회의를 통해 「풍기강화주간」을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 시행일이 바로 오늘이고.

그리고 내가 마주하게 된 문제는 오늘 아침까지 그 사실을 잊고 있었기에 내 복장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단정함과는 한참 떨어진 상태라는 것이다.
기억하고 있었더라도 복장을 바꿀 생각은 없지만!

"그럼 아키츠군은 복장 불량이니까 운동장 10바퀴군요."

"에에~?"

"불만스럽단 얼굴 하지 말아요.
장신구를 압수하지 않은 것 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라구요."

"...그건 그래."

확실히 장신구를 억지로 빼앗지 않는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주위에서 힐끗 이쪽을 주시하던 풍기위원들도 별다른 반응 없이 어깨를 으쓱이곤 다른 학생들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고교 입학 이후로 언제나 헤어밴드, 목걸이, 팔찌에 수염 스타일이었으니까, 풍기위원들로서도 이제와선 내 모습을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는 적당히 단념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정도 선으로 눈감아주는 식의 대우를 받는데 더이상 다른 풍기위원들 앞에서 코테가와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기에 얌전히 운동장으로 발을 옮겼다.


운동장에는 이미 나보다 먼저 트랙을 돌고 있는 여학생의 뒷모습이 보였다.
더운날인데 벌칙 받는것도 고생이네요.
여학생의 뜀박질을 따라 목덜미까지 내려온 웨이브진 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어? 리사잖아?
트랙에 들어와 조금 속도를 높여 리사의 옆까지 따라붙으며 말을 건넸다.

"아침부터 서로 고생이구나 모미오카."

"하앗~? 아키츠군?"

달리다 깜짝 놀란 얼굴로 리사가 고개를 돌렸다.

"모미오카도 복장 불량으로 걸린거야?"

"아핫~ 넥타이를 깜빡했어."

와이셔츠 윗단을 슬쩍 잡으면서 리사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리본 넥타이가 매어져 있어야할 넥 부분은 단추가 풀려 쇄골과 앙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깜빡한게 아니겠지. 언제나 리본은 안하고 다녔잖아?"

"아하하~ 그랬던가?
하지만 그러는 아키츠군이야말로 남말할 처지는 못되는거 같은걸?"

장신구 하나 빼먹지 않고 평소와 같은 내 모습을 훑어보며 핀잔을 주는 리사에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학교 올 때까지 풍기강화주간이란걸 잊고 있었거든."

"킥킥, 그렇게 얼빠진 채로 지내는건 안된다구 아키츠군.
그나저나 더우니까 얼른 달리는거 끝내고 교실로 들어가고 싶어."

낮게 키득거린 리사는 숨을 고르며 다시 트랙을 힘껏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도 같은 의견이었지만 저렇게 뛰다간 교복 다 젖는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리사의 속도에 맞춰 속도를 높였다.
괜한 걱정은 아니었는지 10바퀴를 다돌았을 쯤엔 리사의 교복은 땀이 배여 살짝 눅눅해져 있었다.



"하아, 후우……. 정말이지 아침부터 이런 과격한 운동은 지친다니까."

10 바퀴 돌기가 끝나고 멈춰선 우리는 잠시 트랙 위에서 숨을 돌렸다.
안그래도 한껏 여름인걸 과시하듯 더운 아침인데다 운동을 끝낸 직후라, 푸념을 흘리는 리사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웨이브진 머리카락이 땀과 열기로 인해 목덜미에 달라 붙은 모습이 건강미 넘치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바닥 부채로는 땀을 식히던 리사는 마냥 성에 차지 않았는지 와이셔츠 목덜미를 잡곤 팔랑팔랑 흔들며 바람을 일으켰다.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목덜미께가 펄럭이며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부풀어오른 가슴이 드러났다.
볼륨감을 과시하는 가슴위로 살짝 땀이 맺혀있는 장면이 섹시해 보여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다만 팔락거리며 들춰지는 옷자락 안으로 언듯언듯 드러나는 브래지어의 모습이 조마조마하면서도 민망했다.
이젠 목덜미 만으론 성이 차지 않는지, 안그래도 짧은 치마를 조심성 없이 펄럭펄럭 흔드는 리사의 모습에, 사춘기 호기심과 양심 사이에 잠시 고민하다가 리사를 불렀다.

"저기, 모미오카."

"왜?"

"덥다곤 하지만 옷 매무새에는 조심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응?"

고개를 갸웃하던 리사는 자신의 얼굴, 가슴, 치마쪽을 오가며 정처없이 헤엄치고 있는 내 시선에서 상황을 깨달은듯, 이내 히죽 웃으면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오히려 내쪽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헤에...아키츠군은 그렇게나 내 옷차림이 신경쓰이는거야~?"

은근한 목소리를 내는 리사의 상체가 슬쩍 앞으로 숙여졌다.
기울어진 상체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 양가슴을 리사의 왼팔이 떠받치듯 감싸고, 리사의 오른손이 와이셔츠 목덜미께에 살짝 걸치듯 놓였다.
와이셔츠 목덜미에 걸린 리사의 오른손에 힘이 실리자, 풀어헤쳐진 와이셔츠가 벌어지며 리사의 도드라진 가슴께가 선명히 드러났다.
막 운동을 끝마친터라 땀으로 반투명해진 와이셔츠가 열기를 띈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목덜미에 맺혀있던 땀방울이 쇄골을 따라 앙가슴으로 또르륵 흘러내렸다.
부풀어오른 새하얀 가슴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에서 느껴지는 색기에 당황해 고개를 들자, 옅게 볼을 붉힌 리사의 장난스런 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후후, 키 차이를 이용해서 여자애의 가슴안을 훔쳐보다니 아키츠군도 응큼하구나?"

"엣...?"

아니, 이건 리사 네쪽이 몸을 숙인거...
풍겨져나오는 색향에 도무지 시선을 떼기 곤란...아, 아니! 도무지 시선을 두기 곤란하다.

"어때~? 이렇게 하면 나도 제법 섹시해 보이지 않아?"

은근한 목소리로 대담한 말을 하는구나 리사.
아무튼, 아찔할정도로 매력적이라는건 동의한다.
하지만 번뇌가 머리를 점령할 정도로 유혹적인 상황이라지만, 나에게도 부끄러움이란게 남아 있습니다.
리사의 말에 뭐라 답해야 할지 곤란해 붉어진 얼굴로 입만 뻐끔뻐끔 하고 있자 리사의 눈이 갸름한 초승달을 그렸다.

"어머? 말이 안나올정도로 매력적이야?
아니면, 혹시 위쪽보다 치마 안쪽에 더 관심이...「자, 잠깐! 뭐하는거에요 거기 둘!」"

이젠 숫제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는 포즈를 취하는 리사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고 리사를 말리려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외침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교문에서 단속중이던 코테가와가 당황한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와 양손을 허리에 얹고 눈썹을 치켜 세웠다.

"모미오카씨! 다른 학생들도 많은데 단정치 못하게 뭐하는 짓이에요!
아키츠군도 벌칙 끝났으면 여기서 노닥거리지 말고 얼른 교실로 들어가라구요!"

"아, 아..."

"아하하~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코테가와~
그럼 아키츠군, 아침부터 재밌는 반응 잘봤어~"

붉어진 얼굴로 어리벙벙하게 반응하는 나와 당황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너털 웃음을 짓던 리사는, 운동장 한쪽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어깨에 매곤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하아...정말이지 모미오카씨는...
풍기 단속 기간이란걸 이해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키츠군도 멍하니 굳어있지말고 그만 교실에 가봐요."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매만지며 한숨을 토한 코테가와는 이내 날 향해 내쫓듯 손을 내저었다.
쫓기듯 들어온 교실에선 방금전까지 일이 없었던것 마냥 태연한 얼굴의 리사가 책상위에 앉아 미오와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풍기강화주간이라지만 교실은 어쩐지 평소와 다를바 없는것 같아 쓴웃음을 짓곤 자리에 앉았다.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지난 후, 2교시부터 소지품 검사를 시작했다.
학년별로 풍기위원들이 교실을 돌면서 소지품 검사를 한다고 한다.
수업 시간까지 할애 하다니, 이번엔 진짜 본격적으로 풍기 단속을 하려나보다.
나는 코테가와의 덤으로 풍기위원 보조로 활동하게 되었다.
장신구 착용을 허가받은 대신에 맡게된 일이다.
다른 풍기위원들은 아무도 그런건 신경쓰지 않았지만,
예외적인 대우를 받는 이상 그에 걸맞는 일을 하는게 옳다는것이 코테가와의 의견이었고,
나도 1학년 때부터 불량스러운 복장을 용납받는 대신 위원장 보조로 코테가와의 일을 도운 경험이 있었기에 위화감없이 풍기위원 보조를 맡기로 했다.
아, 물론 담배갑은 압수당했다. 용인되는건 수염이랑 장신구까지만.

사전에 공지를 해둔 소지품 검사였지만, 우리반에선 나 이외에도 소지품 관련으로 지적을 받는 학생들이 제법 나왔는데, 여학생 중에 소지품 검사에 걸린 사람은 둘이었다.
아이돌 활동에 바빠서 가끔 학교를 빼먹다보니 풍기단속주간 공지를 몰랐던 룬.
그리고 매일 리토를 트러블에 휘말리게 하는 말괄량이 왕녀 라라였다.

룬으로선 며칠만에 학교에 왔다가 풍기 단속에 걸린 상황인지라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룬의 소지품중에서 나온, 팬시한 디자인의 수류탄 같은 타원형 물체를 손에 든 코테가와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룬씨. 이 수류탄처럼 생긴건 뭔가요?
설마 위험 물품인건 아니겠죠?"

"그...이건 말이지..."

곤란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룬은 코테가와의 귓가에 얼굴이 가까이 하고선 작게 속삭였다.

"(옷소멸 가스야.)"

...이로 두꺼비의 옷소멸 가스탄이군. 가스에 닿은 상대를 알몸으로 만들어 버리는.
목욕탕 사건 때도 그렇고 도저히 여자애가 가지고 다닐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 물건인데 대체 왜 가지고 다니는거람?

"네!? 어째서 이런걸..."

"어? 그, 그게말이지...마, 맞아! 은하홈쇼핑에서 치한퇴치용 가스를 사려다 착각한거였어! 아, 아하하..."

"치한퇴치용?"

"응. 아이돌 활동을 하다보면 스토커 같은 위험이 있으니까 호신용으로 사려고 말이지..."

"그래요? ...좋습니다. 그런거라면 어쩔수 없네요.
하지만 이런 물건을 교내에 들고 다니는건 위험하니까, 일단 압수물품으로 풍기위원회에 보관하고 있다가 방과 후에 돌려드리도록 할께요."

"응. 뭐, 나도 잘못해서 산거니까 그런거라면 납득이야."

한숨을 내쉬며 안도한 룬을 뒤로하고 코테가와가 발견한 다음 풍기 단속 대상은 라라였다.

라라의 경우는 터무니 없는 물건이 걸려 버렸다.
바로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사각 팬티.
대체 누구거야? 아니, 물론 충분히 예상은 가지만.
라라의 가방 안에서 나타난 팬티를 목격하고 코테가와가 새빨개진 얼굴로 라라를 향했다.

"라, 라라씨...이건 대체 뭐죠?"

"응? 그거 리토의 팬티야."

"유우키군의!?" "리토군의!?"

"뭐? 내꺼!?"

리토가 경악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라의 말에 하루나가 얼굴을 새빨갛게하고 라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째서 이런걸?"

"내 발명품인 「킁킁 토레스군」은 물건에 배인 냄새로 물건의 주인을 찾을 수 있거든.
이게 있으면 리토가 어디에 있어도 찾아갈 수 있으니까 항상 가지고 다니는거야."

"그럼 굳이 팬티가 아니어도 됐잖아!!"

재밌어하는 시선, 질린듯한 시선, 부러워하는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리토의 절규가 교실을 울렸다.

"...앞으론 그냥 손수건 정도로 해두세요."

코테가와는 차마 리토의 팬티를 압수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조그마한 구형 물체만 압수한 뒤 가방을 내렸다.
민망한 얼굴로 라라의 가방에서 팬티를 회수해가는 리토의 모습은 기억의 구석에서 지워주는 친절함을 보일때다.
우리반 소지품 검사가 끝나고 다른 반으로 이동하기 전, 코테가와는 비어있는 시즈의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무라사메씨는 결석...은 아니군요.
가방도 있고 1교시에 앉아있는걸 봤는데 어딜 간거죠?"

"아, 시즈시즈라면 쉬는 시간에 미카도 선생님이 부르셔서 양호실에 갔어.
아직 미카도 선생님과 함께 있는거 아니야?"

"그랬군요."

구교사에서 벗어난 이후 미카도 선생님의 호의로 인공 육체를 가진 시즈는, 인공 육체의 점검도 겸해 미카도 선생님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
때때로 미카도 선생님의 조수로서 간호복을 입고서 심부름을 하기도 하는데 가끔씩 덜렁대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는게 미카도 선생님의 평.
미오의 말에 납득한 코테가와는 나와 다른 풍기위원들과 함께 다른 교실로 이동했다.



몇개의 반을 돌면서 소지품 검사를 하고나자 압수 물품을 담은 바구니 중 하나가 어느새 가득차 버렸다.
생각보다 걸린 학생이 많았고 잡지류나 두꺼운 만화책의 무게 때문에 들고 다니기도 불편했기에 꽉찬 바구니는 풍기위원실에 놔두고 오기로 했다.

"그럼 이 바구니는 아키츠군이 풍기위원회의실로 가져가주세요.
전 다른 풍기위원과 남은 교실을 돌도록 할테니까요.
아, 혹시 모르니까 풍기위원실에 가면 압수물에 붙일 네임 스티커도 몇장 더 가져와 주세요."

"응. 알겠어."

코테가와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이고 휴대용 게임기, 만화, 잡지 등으로 가득찬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한바구니에 넣기엔 조금 과하게 담은 감이 없잖았지만 기왕 풍기위원실에 가는거면 지금까지 압수한 물품을 한꺼번에 가져가는게 좋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과욕 덕분에 바구니 밖으로 물품이 떨어지지 않게 복도를 걷는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워졌다.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막 양호실을 지날 때, 양호실 안쪽에서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컥 양호실 문이 열렸다.

"아, 큰일! 수업 늦었을지도!"

"어?"

양호실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던 시즈가 문앞을 지나고 있던 날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바구니에 든 물건에 신경쓰느라 몸을 재빨리 움직이 못하고 주춤하던 내게 시즈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충돌했다.

"아!?"

시즈와의 충돌로 인해 들고있던 바구니에서 몇몇 물건이 후두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압수물중 전자기기는 바구니 안쪽에 넣어둔지라 크게 당황하지 않고 있었는데, 바닥에 딱딱한 물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아래에서 솟아오른 가스가 우리 둘을 감쌌다.

퍼엉~!

"꺄악!?" "우앗!?"

막 사과하며 떨어진 물건을 주우려 몸을 숙이던 시즈는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가스에 묻혀 비명을 질렀다.
뭐야 터졌길래 갑자기 이런 가스가...설마!?
순간적으로 도달한 해답에 안색이 창백해지고, 곧 가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즈가 보였다.

"아..."

가스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알몸을 드러낸 채 녹아내리는 옷자락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 시즈의 모습이 있었다.
역시 옷 소멸 가스가 터진거였잖아!?
풍기위원실에 가는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풍기문란이 클라이맥스야! 게다가 나의 노출도 클라이맥스!
피부에서 느껴지는 휑한 감각은 나도 시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에? 어, 어라 이게 대체 무슨...? ...료스케씨...?"

놀란 가운데 황급히 몸을 가린 시즈는 아연히 내쪽을 보다가 곧이어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몸을 돌렸다.
허허...바구니 들고 있느라 몸을 가리질 못했어.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을 애써 추스리곤 다른 사람이 오기전에 시즈를 데리고 양호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양호실로 들어서자 시즈는 재빨리 침대안에 들어가 침대 시트로 몸을 가렸다.
나도 뭔가 몸을 가릴만한걸 찾다가 마땅한게 없어서 시즈가 못보게 침대옆 커튼 뒤로 내 몸을 숨겼다.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정하고 나자, 커튼 너머로 침대에 시트를 두른채 앉은 시즈의 실루엣이 움직이는게 보였다.

"저...료스케씬 어째서 양호실 앞에 계셨던거에요?"

"풍기위원실에 압수물품을 놓아두려고 가던 중이었거든.
방금은 압수한 물품중에 우주인용 옷소멸 가스탄이 바닥에 떨어져 터진것 같아."

"아, 그래서..."

침착해져서 수긍하는 시즈의 반응에 안심하다가, 곧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자 다시금 막막해졌다.
알몸 상태로 갈아입을 옷도 없이 시즈랑 둘이서 언제까지 양호실에 갇혀 있어야 하는거야?

"그런데, 시즈 넌 갈아입을 옷은 없어?
가끔 조수하면서 간호복을 입기도 했잖아."

"간호복은 미카도 선생님 저택에 있어요.
선생님의 일을 도와드리는건 주로 미카도 선생님 댁에 우주인 환자분들이 올 때라서..."

"으응...그렇다고 이 상태로 둘이서 양호실에서 있는것도 난처한데..."

"그, 그러게요..."

시즈도 곤란한지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침묵이 양호실을 맴돌았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은채 언제 사람이 양호실에 들어올까 조마조마해하고 있는데 시즈가 입을 열었다.

"저, 료스케씨."

"응?"

"그대로 계속 커튼 앞에 서 있다간 사람이 들어왔을때 곤란할거에요."

"윽, 그야 그렇지."

알몸의 남자가 양호실에서 서있는 모습을 봤다간 십중팔구 「변태다!」라는 비명이 울릴거다.
얕게 신음소리를 내며 고민하고 있자 커튼 너머로 주저하는 목소리로 오시즈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료스케씨도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게 어떨까요?"

"에엑?"

시즈의 제안에 놀라 새된 목소리를 내자, 당황한듯 커튼 너머의 실루엣이 부산히 움직였다.

"이 시트는 크니까 둘이서도 충분히 몸을 가릴 수 있어요!
그러면 료스케씨도 몸을 숨길수 있고, 커튼이 침대를 가려주니까 적어도 남에게 곤란한 모습을 보이진 않을거에요."

"아니, 정 안되면 난 침대 아래라도 들어가 숨어있을테니까...
시즈 네가 그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제안하지 않아도 된다구."

"저, 저는 괜찮아요!"

"시즈?"

"괜찮아요..."

되뇌이는 시즈의 목소리는 사그라질듯 갸냘펐다. 




시즈가 침묵해버리고 양호실에선 시트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압수물품 바구니에서 삐져나온, 대담한 의상을 입은 연애인이 커버를 장식한 화보집이 자꾸만 눈길을 끈다.
여름이라 사람들이 개방적이 된건가 아니면 여름이라 내가 더위를 먹은건가, 사고가 흐트러지며 머릿속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다.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른 상태에서 천천히 커튼을 지나 시즈가 앉아있는 침대를 향한다.
긴장으로 굳어진 몸을 삐걱삐걱 움직이며 두근두근 방망이질치는 심장소리가 시즈에게 들키지 않길 바라며 침대에 올랐다.
상체를 일으킨채 고개를 숙이곤 가슴께까지 시트를 끌어올린 시즈의 옆에 앉아 허리 아래를 시트로 가렸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침대위에 쏟아져 내린다.
피부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어 간다.

"...따뜻하네요."

"으응, 그렇네."

옆에 앉은 오시즈와 팔이 닿을 때마다 몸이 자연스레 긴장하게 되지만, 침착한 분위기의 시즈를 따라 나도 조금씩 조용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갔다.
이대로 햇살에 녹아버리는건 아닐까 멍하니 앉아있다가 불현듯 코테가와가 부탁한 네임 스티커에 생각이 미쳤다.

"아..."

"왜 그러세요?"

"풍기위원실에서 네임 스티커를 가져와 달라고 부탁받은게 떠올라서."

"압수품이 많았나보죠?"

"혹시 모르니까 여유분을 가져와 달라는거였어.
우리 반에도 룬이나 라라 외에도 걸린 사람이 꽤 됐거든.
라라는 소지품중 어떤건 워낙 파격적이라 압수하진 않았지만."

"그래요? ...아!"

"왜그래?"

내 말을 듣던 중 시즈가 팟-하고 떠오른듯 눈을 빛냈다.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요!"

"어? 진짜?"

"네, 라라씨에게 부탁하는거에요.
라라씨의 머리에 장식된 발명품이 옷을 만들수 있었죠?"

"아! 페케!"

라라에 의해 만들어진 코스츔 로봇 페케.
변신 가능 외에도 옷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페케라면 녹아버린 나랑 시즈의 옷도 새로 만들어 줄 수 있겠지.

"하지만 라라에게 어떻게 연락을 하지?"

"제가 유체이탈을 해서 유령 상태로 라라씨에게 다녀오면 되요."

"......아."

그러고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깜빡하고 있었던 시즈의 능력을 떠올리며 이마를 탁-치자 시즈가 미안한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좀 더 빨리 생각해 냈어야 했는데."

"아냐아냐. 너도 나도 너무 당황해서 그 생각을 못한거니까.
게다가 네가 지금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반증인것 같아서 오히려 다행인걸."

"그럼 지금 바로 라라씨께 다녀올께요."

이젠 제법 유체이탈의 요령이 생겼는지 자연스레 시즈의 머리에서부터 시즈의 영혼이 빠져 나왔다.
침대에 앉아있던 자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시즈의 몸은 힘없이 내쪽으로 기울었다.
내 몸에 기대어진 시즈(몸)의 피부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당황하면서, 인공육체의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시트를 황급히 도로 끌어올렸다.
시즈(몸)의 한쪽 어깨를 잡은채 경직된 내 모습에, 유령 상태로 공중에 떠있던 시즈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곧 라라씨를 데려오도록 할께요.
그동안 제 몸을 잘 부탁드릴께요."

살풋 미소지은 시즈는 내 어깨에 기대어진 자신의 인공 육체에 당황하는 날 뒤로 하고 커튼을 통과해 사라졌다.
유령상태의 시즈가 통과한 커튼 너머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다가 품안에 있는 시즈의 인공육체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은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시즈.
인공육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살결과 피부에 전해지는 온기.
살짝 미소를 지은 입매에서 전해지는 생동감은 마치 시즈가 깊은 잠에 들었을 뿐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품에 기댄채 잠든 듯 눈을 감은 시즈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다가 '이대로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하고 작게 탄식했다.
내 숨소리와 시계바늘소리만이 조용한 양호실에 울리는 가운데,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왔다.
이 소리는 혹시 미카도 선생님?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미카도 선생님이 양호실 안으로 들어왔다.

"응? 혹시 침대에 누구 있니?"

커튼으로 비치는 실루엣에 의아해하며 다가온 미카도 선생님은 침대에서 시트로 몸을 가린채 붙어있는 나와 시즈의 모습에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몸임을 확연히 알 수 있는 나와 시즈의 드러낸 어깻죽지에, 입을 가린 미카도 선생님에게서 「어머어머~」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학교에서, 그것도 양호실 침대에서 오시즈짱이랑 이런 대담한 짓이라니..."

"대담한 짓인건 맞지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아닐겁니다."

후후후 웃음을 지으며 조롱해오는 미카도 선생님께 해명하려는 찰나 타닥타닥하는 발소리와 함께 라라가 양호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라라씨를 데리고 왔어요 료스케씨~!"

"료스케~ 오시즈짱이 불러서 왔는데 괜찮아?"

"아, 마침 잘왔어 라라. 지금 옷이 없어서 그러는데 의복 수선을 부탁하려고 연락을..."

"이...이 변태! 너 양호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거야!"

"파, 파렴치한...! 그 모습은 대체 뭔가요 아키츠군!?"

정정. 라라만 온게 아니군요. 「옷소멸 가스탄」의 소유주인 룬이랑 풍기단속을 하던 코테가와까지 따라왔네요.

경악하는 룬과 코테가와에게 옷소멸 가스탄이 사고로 터졌다는 설명을 하고나선 엄청난 매도를 받은뒤 풍기문란으로 감점처리 되었다.
알몸의 여자애랑 단둘이서 침대 시트 하나로 몸을 감싸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시즈가 먼저 제안했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걸 언급하는건 시즈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인데다, 시즈가 했던 제안은 내가 거절하려면 거절할 수도 있는 거였으니까 변명의 여지도 없었고.
뭐, 나로선 부끄럽고 긴장되면서도 두근두근했던 경험인지라 방금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똑같은 선택을 다시 하라면 민망해서 도저히 못할 것 같지만.

여담이지만 미카도 선생님이 시즈에게 부탁한건 양호실에 새로 들어온 약품을 알맞게 분류해 보관하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쉬는시간에 잠시 비품 정리를 맡겼는데, 오시즈짱도 참 너무 성실해서 문제라니까..."

미카도 선생님의 말마따나 쉬는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약품을 정리를 끝낸 뒤 개인적으로 양호실 청소를 시작한게 문제였다.
시즈가 2교시 시작하고서도 교실에 돌아오지 못한건, 청소에 집중하다가 미처 벨소리를 듣지 못해서 였다고 한다.
사정을 듣게된 미카도 선생님은 미안한듯 시즈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풍기강화주간의 첫날을 소란스레 보내고서 귀가했다.
유달리 더운 오늘 날씨에 차가운거라도 사먹는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집에 있는 두 녀석들 몫까지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공물로 바친 아이스크림 덕에 나나와 모모로부터 평소보다 열렬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고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고나선 저마다의 일에 몰두했다.

나나는 최근들어 보기 시작한「금색의 갓○」를 보면서 울고 있다.

"우우... 우마곤... 나만은 네 이름이 슈나이더였다는걸 기억해줄께!
그래도 카프카씨는 정말 대단하네~! 나같은 능력이 없어도 동물의 말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면서 책을 읽는 와중에 감상을 늘어놓는게 만화책에 푹 빠진듯 하다.

모모는 은하통신판매 사이트에서 쇼핑중이다.
식물용 영양제라든지 마음에 드는 티백을 고르고 있었다.

난 마루의 테이블에 앉아 교과서를 펼쳤다.
곧 있으면 시험기간이니까 이제부터 준비를 해놓는게 좋을테니까.
시간이 지나고, 적당히 밤도 늦었기에 내가 덮을 이불을 방에서 꺼내 마루의 소파 위에 올려놓곤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나나가 만화책을 책장에 꽂아넣고 먼저 침실로 들어간 후, 쇼핑을 끝마치고 뒤따라 침실로 들어가려던 모모가 나를 보며 물었다.

"료스케씨는 안 주무세요?"

"응. 며칠 뒤면 시험이라서.
난 좀더 공부하다 잘테니까 너희 먼저 자도록 해."

"으음..."

내말에 모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방으로 들어가던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포트에 물을 끓이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잠시 후, 모모가 홍차를 컵받침과 함께 내왔다.

"한잔 드세요.
홍차엔 각성 효과가 있으니 도움이 될 거에요."

"아...잘 마실께. 고마워 모모."

"후후, 별말씀을요. 그럼 전 먼저 자러 갈께요."

찻잔을 내려놓은 모모는 생긋 웃곤 방으로 들어갔다.
좋은 아이구나 모모는...
모모의 마음씀씀이에 고마움을 느끼며, 방금전보다 고양된 기분으로 교재에 집중하면서 천천히 홍차를 들이켰다.


나나와 모모가 잠자리에 들고나서 제법 시간이 흘렀다.
시계바늘이 1시를 가리킬 즈음, 봐야할 부분은 충분히 읽어보았기에 나도 이만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교과서와 문제집을 정리하고, 소파에 올려두었던 이불을 마루 바닥에 깔고 자리에 누웠다.
방금전 본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한차례 되뇌이보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이 안와...

누운지 1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정신이 말똥말똥한게 도무지 잠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거...생각보다 홍차의 각성 효과가 강한데.
째깍째깍하는 초침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한채 누워있는건 시간이 아까웠기에 잠이 올 때까지 책이라도 좀더 읽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공부하다가 졸음이 오면 그때 다시 자리에 누우면 되겠지.
마루 불을 켜고선 탁자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창밖에서 짹짹거리는 참새소리가 들리고, 방문이 열리며 잠옷 차림의 나나가 마루로 나왔다.
입을 가리며 작게 하품을 하곤 목이 마른지 부엌으로 향하던 나나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쳐든 내 모습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엑~ 이른 아침부터 공부야 료스케?"

"하하...조금 의욕이 지나쳤달까..."

아침부터가 아니라, 실은 밤을 새버린 거지만...
뻑뻑해진 눈가를 매만지면서 슬슬 찾아오기 시작한 졸음을 애써 쫓아내었다.

졸릴때까지만 공부하자는 내 바람과는 달리, 밤새도록 약한 흥분한 상태가 지속되어 버려서, 결국엔 책을 읽다가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제밤 모모가 타준 홍차는 생각 이상으로 각성 효과가 강했다.
다만 각성효과가 끝난 아침이 되어서야 뒷북치듯 찾아온 졸음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나른해진 정신을 다잡으면서 욕실로 가 몸을 씻어 졸음을 쫓아내고선 아침 식사를 만들 준비를 했다.




꾸벅...꾸벅...

「그러니까 여기선 이 공식을 이용해서...」

"(아키츠군...아키츠군?)"

점심시간을 앞둔 오전의 마지막 수업인 수학시간.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저만치 멀리서 들려오는듯 하다.
옆자리에서 날 깨우려는 코테가와의 노력도 지금은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피곤한거야...?
햇살이 따스해서 졸음이 몰려든 적은 있어도, 피로 때문에 졸음이 밀려오는건 처음있는 일인데...
아무래도 점심 시간에 옥상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게 좋을것 같다.
내쉬곤 내 어깨를 흔드는 손길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흔드는 가운데, 어쩐지 코테가와의 한숨 소리가 들린것 같았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반찬이 입에 들어오는지 코에 들어오는지 모를만큼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식사를 끝마칠 즈음엔 수업때만큼 졸음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묘하게 몸을 잠식하는 노곤함은 여전했기에 예정대로 옥상에서 한숨 자려고 교실을 나섰다.

"후아-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옥상 문을 열었다.
정오의 햇살은 뭉게구름에 가렸고 불어오는 바람에도 서늘함이 감돌았다.
잠자기엔 딱 절호조인 상황이구나.
만족에 겨운 미소를 지은채 옥상 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이대로 예비종이 울릴 때까지만 자도록 할까?
얼굴에 내려쬐는 엷은 햇살의 따스함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으려 할 때, 얼굴 위로 그늘이 지며 내리쬐던 햇살을 막았다.

"안녕 잠꾸러기씨~?"

"......?" 



장난스러움이 배어나오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내 머리맡에 위치한 새하얀 허벅지와 체크무늬 치마가 눈에 들어왔다.
웨이브진 금발과 장난기가 배인 갈색 눈동자, 웃음기를 머금은 입모양.
더불어 치마 안쪽으로 보이는 레이스가 달린 새하얀 팬티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리곤 멍하니 멈춰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리사의 치맛자락을 살짝 들추며 지나가자 급격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푸웃!? 너 왜 그런 위치에 서있는거야!?"

"아하하하~! 방금전 아키츠군 반응 정말 이상한거 알고있어?"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리사는 등뒤로 깍지를 낀채 키득키득 웃었다.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하고 교실을 나가길래 궁금해서 따라왔더니 낮잠자러 온거였어?"

"아아. 모미오카 네 덕분에 이미 반쯤 잠이 달아나버렸지만...냐음..."

방금전 행동이 내 잠을 깨우는게 목적이었다면 훌륭했다.
평소였다면 번뇌로 낮잠은 꿈도 꾸지 못했을거다.
하품이 나오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눈물을 찔끔 흘렸다.

"에에~ 반 밖에? 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피곤해 하는거야?"

"그냥. 어쩌다보니 어제 밤을 새버렸거든."

"흐응? 혹시 홈스테이 중인 라라찌네 동생들과 밤새도록 '어른의 놀이'를 하느라 피곤한거라든가~?"

"하암...그런 농담은 그만해 달라구. 공부하다가 마신 홍차가 생각보다 각성효과를 잘 받아서 밤을 새버렸을 뿐이니까."

"재미없는 이유네."

"나도 졸음이 밀려오는 지금 상황이 전혀 재밌지 않아..."

"하지만 의외로 성실하네?
저번에 코테가와랑 성적 내기때도 그렇고 아키츠군도 제법인걸?"

"오, 칭찬해주는거야?"

"뭐, 수업시간에 졸았던걸 빼면 전체적으론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는데~
이런저런일로 아키츠군에겐 꽤나 의지하기도 했고.
굳이 지적하자면 무드에 좀 더 신경을 써준다면 좋을까나?"

"헤에? 모미오카한테 그런 평가를 받게 되다니 정말 기쁜걸."

"그거 진심?"

"물론이지. 모미오카는 개방적으로 보여도 의외로 남자 보는 눈은 엄격하니까.
1학년 때 헌팅받았을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잖아."

"아핫~! 그런 껄렁껄렁한 남자들에겐 전혀 관심 없으니까 말야.
나도 기왕이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구.
그나저나 아키츠군도 제법 좋은 여자보는 눈이 있잖아? 포인트 업이야."

장난스레 윙크를 하곤 리사는 살며시 내 옆에 앉았다.

"졸린거지?
교실에 돌아갈때 깨워줄테니 한숨 자도록 해."

"어? 괜히 네 시간 빼앗는거 아냐?"

"괜찮아. 나도 옥상에 올라온 김에 잠시 쉬었다 갈 예정이니까."

무릎을 모으며 대답하는 리사에게 안심하며 다시 양팔을 베고 누웠다.

"가끔은 이렇게 옥상에 올라와보는 것도 좋네.
풍기단속기간이라서 더 그런걸까, 햇살이 이렇게나 따스하니까 수업같은건 전부 잊고서 한가하게 낮잠이나 잘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네...한번쯤은 그런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늦잠잔 덕에 오후 수업은 지각이고, 요란스레 복도를 뛰어넣고선 수업중인 교실에 몰래 들어가려다 선생님께 걸려서 꾸지람을 듣는 나와 리사.
적당히 데워진 옥상 바닥에 등을 댄채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런 일탈도 나중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는 걸까?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한차례 쓸어넘긴 리사가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경쾌함이 느껴지는 기분좋은 노랫소리에 귀가 기운다.
자장가로 삼는다면 어쩐지 즐거운 꿈을 꿀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햇살을 품은 뭉게구름은 따뜻한 쿠션같지 않으려나.
조금씩 밀려오는 졸음에 길게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럼 수업시작 전엔 일으켜줘 모미오카..."

"후후...잘 자 아키츠군."

웃음을 흘리는 리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금새 잠에 빠져 들었다.




"아키츠군...아키츠군?"

"...으응?"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거꾸로 선 코테가와의 얼굴이 나와 마주보고 있다.
아니, 내 머리맡에 주저앉은 코테가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거다.
코테가와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을듯 가깝다.

"...아, 잘 잤어 코테가와?"

"......사람이 걱정되서 기껏 찾으러 다녔더니 모미오카씨랑 팔자좋게 자고 있었나봐요?"

"응?"

의아해하며 시간을 확인하곤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미 5교시가 끝났잖아!

"엑!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거야?"

"하아암~ 일어났어 아키츠군?"

기겁하며 몸을 일으키자, 내 오른편에서 자고 있던 리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왜 너까지 자고 있는거야 리사?

"모미오카...깨워준다는 약속은?"

"그게말이지, 아키츠군이 자는 모습이 너무 편안해보여서 그만... 에헷~"

「에헷~」이 아니야!?

"뭐 어때? 이런 땡땡이도 학창시절에나 허락되는 특권이니까~"

"헤에...특권, 인거군요 모미오카씨?"

"에? 코, 코테가와도 있었어?"

이마에 십자마크를 새긴채,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서있는 코테가와의 표정이 무섭다.
눈을 뜨고선 그제야 코테가와를 발견한 리사의 얼굴이 히죽거리며 웃던 그대로 경직되었다.

함께 우리를 찾아 돌아다니던 미오와 시즈가 옥상문을 열고 올 때까지 나와 리사는 정좌 상태로 사이좋게 코테가와의 설교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 누워있는 아키츠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키츠군, 아키츠군~ 아키츠군은 왜 옥상에 올라온거야?"

"여기는 하늘이 가까우니까.
내 야망은 하늘을 손에 넣는거거든."

바닥에 몸을 누인 아키츠군은 반할것만 같은 거대한 야망을 내비치며 하늘이 아니라 내 치마 안을 열심히 훔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야심으로 가득찬 아키츠군의 시선이 내 허벅지에 고정되길 한참...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아키츠군이 내 눈동자를 응시하며 외쳤습니다.

"그걸 하자 모미오카!"

"그거라니?"

"바보녀석! 이 상황에서 그거라면 하나밖에 없잖아! 합체다!"

"하, 합체!?"

열기를 띤채 이글거리는 아키츠군의 눈동자는 멋졌지만, 버튼이 풀린 와이셔츠의 가슴골에 집중되는 시선을 받았을 땐, 역시 아키츠군은 좀 더 무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당황하는 내 모습을 신경쓰지 않은채, 말을 마친 아키츠군은 나의 손을 이끌고선 자신의 위로...(하략)



"다시 써오세요."

"에에~? 재밌지 않았어?"

"전혀 재밌지 않아욧! 반성문을 쓰랬더니 이게 대체 뭔가요?"

즉흥으로 휘갈겨쓴 리사의 반성문을 읽던 코테가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쪽은 진지하게 반성문을 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반성문까지 장난기 넘치는 글이었다면 인내심이 끊어진 코테가와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을거다.
마음속으로 안도하고 있는데 내 반성문을 집어든 코테가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공부하다 밤을 샜는지라 옥상에서 잠시 수면을 취하려던게 그만 수업 시간을 놓쳤습니다.
아마도 햇빛을 가리던 뭉게구름이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었겠지요.
뭉게구름은 수직으로 발달한 구름으로 적운이라고도 하며, 여름철에 지면이 가열되어 상승기류에 의해 생깁니다.
보통 아침에 나타나기 시작해 낮동안 발달하고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사라집니다...(하략)



"...이건 무슨 지구과학 숙제라도 되는건가요 아키츠군?"

"...반성문 용지 채우기가 생각보다 힘들더라구."

민망해하는 날 보던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곤 나와 리사의 반성문을 챙겨넣었다.
앞으로는 조심하라며 관대함을 보여주는 코테가와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 앉았다.
5교시 수업시간의 필기내용을 코테가와에게 빌리곤 잠시 교실을 둘러보던 중, 룬의 자리가 가방 하나 없이 비어있는걸 발견했다.

"응? 룬이 자리가 없네?"

"룬씨라면 아이돌 활동 때문에 점심시간에 조퇴했어요."

"바쁘구나. 조금 부럽기도 하고."

"학교를 빨리 마친게 말인가요?"

"아니, 룬은 벌써부터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룬을 보면 나도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서."

"꽤나 건설적인 생각이네요."

"그러게말야~ 그럼 아키츠군은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봤어?"

옆에서 시즈랑 미오와 얘기를 하던 리사가 대화를 듣고 끼어들었다.

"나?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가업을 잇는다든가 하는건?"

"가업을 잇는건 좀 꺼려지는데..."

일상 생활에서 가끔 겪는 이해 불가의 물리 현상 때문에 물리학자로서의 길은 초등학교때 단념했던 적이 있어서...
아, 그렇다고 지금도 과학자가 되는게 싫다거나 한건 아니다.
십수년째 과학자로서 성공해서 지내고 계신 부모님들의 예를 보면, 굳이 과학자의 길을 단념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니까.
다만 한번 단념했던 길을 다시 쫓는다는 어색함이 사라지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 뭔가 이유라도 있는거야?"

"혹시 정말 소문대로 부모님이 야쿠자 가계라든지?"

"아냐, 부모님께선 두분 다 과학자시라구."

"아하하 미안미안~ 아키츠군이라면 야쿠자 2세 였어도 믿었을텐데 유감.
중학교때 아키츠군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땐, 분명 암흑계를 휘어잡는 거물로 성장할거라고 다들 의견이 일치했는데 말야."

"하, 하, 하..."

"그래도 기왕이면 아키츠군은 커다란 꿈을 가졌으면 좋겠어."

은근한 목소리로 리사가 내 귀에 속삭였다.

"여자는 말야, 야망을 가진 남자에게 이끌리는 법이라구?"

그래서 어머니는 세계정복이 중2때 꿈이었다는 아버지랑 결혼한건가?
...시덥잖은 생각은 그만두고 진지하게 듣자.
사람은 꿈의 크기만큼 성장한다고 하니까.

"조언 고마워. 진지하게 생각해 볼 테니까.
그럼 모미오카는 장래에 뭐가 되고 싶은지 정했어?"

"난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싶어. 네일 아티스트도 해보고 싶구.
졸업하면 관련 학원에서 공부를 하려나? 미오는 어때?"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싶어.
기왕이면 취미를 살리는 쪽으로 가고 싶거든."

그러고보면 미오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동생 카페는 고양이귀 메이드 코스프레도 하던 카페였지.
코스튬 플레이를 즐겨하는 미오는 패션 센스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다고 하니까 장래가 기대가 된다.
아, 지금은 해외에 계신다는 리토 어머니의 직업도 패션 디자이너인것 같던데, 나중에 미오가 배움을 청할 일도 있으려나?

"그래서 언젠가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아키츠군을 프로듀스 해보고 싶은데 말야~"

"어? 나 말야?"

손가락으로 날 가르키자 미오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응응. 아키츠군은 야성미가 있어서, 분명 그 컨셉으로 나가면 무섭도록 어울릴테니까.
그러니까 내가 크면 아키츠군의 프로듀서가 되어줄께."

미오의 말에 리사가 반색하면서 이야기를 키웠다.

"그럼 장래에 나랑 미오가 아키츠군의 코디를 해주는건 어때?
다듬기에 따라선 아키츠군도 제법 멋진 남자가 될것 같으니까.
어디~ 우선은 그 거추장스런 헤어밴드부터 치워볼까~?"

"전력으로 사양하겠습니다."

"잇힛힛~! 좋으면서 튕기기는~
자아자아, 이 누나가 훌륭한 어른으로 만들어줄테니까 얌전히 이리온~?"

"그거 아가씨가 해도 될 대사가 아냐!"

뉘앙스 마저 이상하잖아!
능글맞은 아저씨 흉내를 내며 손가락을 꼼지락 꼼지락 하는 리사에게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양손으로 헤어밴드를 가린채 집요하게 뻗어지는 리사의 손길을 피했다.
리사의 행동을 보고 장난기가 동했는지 옆구리를 간질이며 내 가드를 내리려는 미오에게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리사와 미오 콤비의 장난이 끝나고 이야기의 화살은 코테가와를 향했다.

"코테가와의 장래희망은 뭐야?"

"저는......크흠, 좀더 생각해 봐야겠죠."

남몰래 「고양이」라고 중얼거린걸로 봐선 고양이 관련으로 직업을 생각해본걸까?
아마 룬도 그랬고, 리사와 미오가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직업으로 하려고 했기에 덩달아 자신이 좋아하는걸 연관지어 생각한것 같지만,
고양이를 좋아해도 정작 고양이들이 잘 따르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풍기위원으로서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자면 검사(檢事) 이미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다.

"시즈시즈는 어때?"

"저도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미카도 선생님의 조수로 일하면서 하고 싶은걸 찾아보려는데, 기왕이면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좋겠어요."

유령이었던 시즈가 육체를 얻은건 아직 일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장래 꿈을 결정하려면 현대에 익숙해질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와르르-

드물게 건설적인 주제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복도에서 다량의 물건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교실을 나서니 라라의 발명품들이 복도에 어지러이 널부러져있다.
물건의 주인인 라라는 휴대폰 모양의 데다이얼을 손에 들고선 곤란해하고 있었다.

"라라찌? 무슨일이야?"

"아하하~ 데다이얼이 상태가 안좋아서 멋대로 다 나와버렸어."

"정말...바로 어제 소지품 검사를 한 참인데, 학교에 이상한 물건을 가져오면 안되잖아요 라라씨."

불만스러운 얼굴로 불평하면서도 코테가는 복도에 앉아 떨어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어제 양호실에서 라라의 발명품의 도움을 받았던 나와 시즈도 덩달아 물건 줍기에 참여했다.

"신기한 기계들이 많네요.
어디에 쓰는 물건들이죠?"

"거기있는 개 로봇은「킁킁 토레스군」. 물건의 냄새를 맡아서 소유주를 찾아가는 로봇이야.
이쪽의 여우로봇은 「펄펄 스노우군」. 하늘에서 눈을 내리게 하는 장치야.
저 헬멧은 시각이랑 다른 감각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그리고 이건 「만능툴」인데 물건을 개조하는데 써."

자신의 발명품에 흥미를 보이는 시즈에게 라라는 즐겁게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해주었다.
라라의 설명을 들으며 물건을 정리하던 시즈의 오른손이 우연히 같은 물건을 집으려던 코테가와의 왼손과 겹쳤다.

"아, 그 물건은..."

파지직!

"꺅?" "꺄악!?"

"...접촉한 물건에 강력한 자장을 발생시켜서 흡착시키는 효과가 있어."

시즈와 코테가와가 잡고 있는 말굽자석 모양의 물체에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둘을 감쌌다.
빛이 사라지고 황급히 발명품에서 손을 치우려던 시즈와 코테가와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이건?"

"떼어지지 않네요..."

아연해하는 시즈의 오른손은 코테가와의 왼손을 감싸쥔채 찰싹 붙어 있었다.




"일단 시간이 지나면 효과가 사라질거라고 생각해."

코테가와랑 시즈의 손을 들러붙게 만든 발명품을 해석해 본 라라가 낸 결론이다.

"얼마나 효과가 지속되는거죠?"

"으응~ 대략 하루 정도?"

"그런..."

"에헤헤..."

"...무라사메씨는 어쩐지 기쁜듯 하네요."

"친구랑 손잡는 건 좋은거구나 싶어서요."

"하아..."

헤실헤실 웃는 시즈의 모습에 코테가와가 웃는건지 화내는건지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코테가와씨 손은 부드럽고 따스하네요."

"무, 무슨 말을..."

"사이 좋아보이네 너희들."

빨개진 얼굴의 코테가와에 싱글벙글하는 시즈의 조합을 짧막히 평했다.
정말이지 이건 신선하구나.

남은 수업시간 동안 시즈는 코테가와의 왼쪽 자리에 앉게 되었다.
원래 그 자리의 주인인 나는 시즈의 자리에 앉았고.
손이 들러붙어 있었기에 둘은 서로의 책상을 붙이고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들어오신 선생님께선 책상을 붙인채 손을 잡고 앉아있는 시즈와 코테가와를 보곤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모른척 수업을 진행하셨다.
워낙 2-A가 이상한 일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까 선생님들의 신경도 굵어지신듯 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판단이 곤란한 점이지만.
둘이서 한 교과서를 들고 수업을 듣는 모습은 제법 보기 좋았다고만 해두겠다.

하교시간이 되자 코테가와랑 시즈의 거취로 잠시 논의가 있었다.
서로간의 의견이 오간후, 시즈는 코테가와의 집에 하룻밤 머무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첫 합숙이 기대되는지 들떠있는 시즈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덩달아 기분이 풀린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시즈와 함께 교문을 나섰다.




다음날.
교실로 들어서니 코테가와랑 시즈가 보였다.
다행히 자석 효과가 끝났는지 양손은 자유로운 상태였다.
즐겁게 말을 건네는 시즈와 거기에 응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서 둘의 사이가 어제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합숙하면서 더 사이가 좋아진걸까?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시즈가 도시락을 든채 싱글거리며 다가왔다.

"료스케씨, 코테가와씨~ 점심 같이 먹어요."

붙여진 책상위에 시즈가 큼지막한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펼져진 도시락의 다채로운 반찬에 감탄하면서 젓가락을 들었다.

"어제 코테가와의 집에서 숙박은 즐거웠어?
아침의 모습을 보면 대충 상상은 가는데."

"물론이에요. 친구집에 자러가는건 처음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족분들도 친절히 대해주셨는걸요."

시즈가 함께 코테가와네 집에 갔을때 어머니께선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고 한다.
코테가와의 아버지랑 오빠인 유이씨가 모인 자리에서 트러블을 일으키긴 했지만.
저녁식사 중에 테이블 아래로 물통이 떨어지려고 했을 때, 무심코 염동력을 사용했다는 시즈.
코테가와네 가족들은 시즈의 염동력에 대해서 신기해 하면서도 TV로만 보던 초능력자인가 하며 대범하게 웃어넘겼다고 한다.

"정말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식탁이었어요.
오랜만에 가족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쑥쓰러운 듯 잠시 고개를 숙인 시즈는 이내 코테가와의 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코테가와의 방엔 고양이 관련 물품이 흘러 넘치는것 같았다.
고양이 인형, 고양이 베게, 고양이 쿠션, 고양이 스트랩, 고양이 머그컵, 고양이 앨범, 고양이 퍼즐.
고양이를 좋아하는 코테가와 답다고 해야하나.
당연하지만 코테가와의 방에서 한침대에서 같이 잤다든지.
듣기론 자석효과는 오늘 아침이 되서야 끊어졌다고 한다.

"이 도시락도 코테가와씨네 어머니께서 싸주신거에요.
코테가와씨랑 저랑 료스케씨랑 사이좋게 먹으라고요~"

"아하하, 맛있게 잘먹었다고 전해드려줘 코테가와."

"그러죠. 들어시면 기뻐하실거에요."

"아, 료스케씨에 대해선 코테가와씨 다른 가족분들도 잘 알고 계셨어요."

"정말?"

"네. 코테가와씨가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때면 절반은 료스케씨 이야기였으니까 말이에요."

"무, 무라사메씨...!"

당황하는 코테가와의 반응을 모른척하고 시즈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료스케씨, 유우씨에게 뭔가 미움받는 일이라도 했었나요?"

"왜?"

"저녁먹으면서 료스케씨의 화제가 나오면 유우씨는 조금 께름직한 얼굴을 하셨거든요.
게다가 이런저런 불평을 하셨어요.「그녀석은 바람둥이야.」라고.
저번에 료스케씨가 갈색 단발머리의 귀여운 여자애를 울린걸 봤대요."

"쿨럭!?"

"리토? 괜찮아?"

밥먹다 걸렸는지 갑자기 기침을 하는 리토의 등을 라라가 두드려 주었다.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가슴을 두드리다가 물을 마시는 리토의 모습을 보다가 시즈에게 답했다.

"아...그게 아마 유우키의 친척 여자애였을꺼야.
데이트 신청을 받아서 함께 영화를 봤었는데 조금 대답을 잘못해서 달래던 중이었어."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요? 아키츠군이?"

코테가와...그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은 조금 마음이 아파.

"그외에도 다른 목격담도 얘기해주시던데요.
분홍머리 쌍둥이 외국인 자매랑 옷가게에 가는걸 보기도 했고..."

"홈 스테이중인 라라네 여동생들이네.
일상에서 입을만한 옷을 고르러 같이 간거야."

"아, 그러고보니 룬씨랑 데이트 하는 것도 봤다고...「자, 잠깐!」"

큰소리로 시즈의 말을 끊은 룬이 벌떡 일어섰다.

"데이트 아니거든? 그냥 우연히 산책하다가 만나서 얘기했을 뿐이야!"

"응. 정말 우연히 만나서 얘기한 것 뿐이라니까."

"에~ 정말이야?"

미심쩍은 얼굴을 한 리사가 물었다.

"어디서 만났는데?"

"서점" "미소라당"

「「「......」」」

클래스 메이트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강해졌다.
리사도 재밌는 걸 발견했다는듯 눈매가 초승달을 그렸다.

"후으응~? 어째서 대답이 어긋난걸까?"

"미소라당이었잖아 수염!"

"아, 아니. 원래 서점에서 만났다가 미소라당에 간거였잖아."

"헤에? 그러니까 둘이서 서점에서 만나서 함께 미소라당으로 간거라 이 말이지?"

"아냐! 정말로 우연이었단 말야!
내가 뭣 땜에 황금 같은 주말을 이런 수염이랑..."

"세번이나 우연히 만난것도 인연이라서 빵값은 내가 냈지."

"오오~ 세번씩이나? 그거 정말로 대단한 우연인걸~? 아직 더 숨기고 있는게 있다는거네?"

"쓸데없는 얘기하지마! 오해하잖아!"

아니 물론 나도 실수하긴 했지만...
룬 너의 과민반응이 오히려 리사와 미오의 장난질을 부채질한다는걸 이제 슬슬 깨달았으면 한다.

"헤에? 사이가 좋구나?"

"아니라니까! 어딜 봐서 그렇게 보인다는거야?"

"그래그래 다 이해한다니까~"

"큿...!"

입술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히죽거리는 리사와 미오의 반응에 룬이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것 같아서 장난스럽게 농담을 하는 리사를 제지했다.

"놀리는건 거기까지 하라구 모미오카.
룬은 아이돌이니까 그런일엔 예민할 수 밖에 없는거잖아.
그리고 룬 너도 너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다간 오해받을지도 모른다구?"

"누구 때문에 이런 처지가 됐는데...!"

울컥하고 째려보는 룬의 시선이 내 얼굴에 꽂혔다.
룬의 반응을 즐기는 던 리사가 내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후후, 저렇게 틱틱대지만 그래도 결국엔 둘이서 함께 있었단거지? 대체 어떻게 꼬신거야?"

"꼬셨다기 보단 차였는데."

"엣? 설마 진짜로 헌팅!?"

"뭐, 뭐...!?"

당황하는 룬의 모습에 급히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함께 도서관에 가보지 않겠냐고 권했,"

「「「오오오~!?」」」

"이, 이...! 수염 이 멍청아!"

퍼억-!

"히데붓!?"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학생들의 반응에,
새빨개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던 룬이 난데없이 꺼내든 몸통만한 나무 해머를 내게 휘둘렀다.
슬랩스틱 개그도 아니고 이런 고전적인 공격을 할줄이야...
바닥에 처박힌 날 내버려두고 씩씩거리면서 교실을 나가버린 룬을 당황해 쫓아가는 리사와 미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적어도 끝까지 해명할 시간은 달라고 너희들...
당황하는 시즈를 달래며 자업자득이라며 쓴소리를 하는 코테가와의 목소리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방과후 코테가와랑 함께 풍기위원실에 남았다.
압수물품 항목과 풍기위반학생 목록을 다시한번 체크하려는 코테가와의 꼼꼼함이 이유였다.
풍기강화주간이 끝나면 반성문을 제출한 학생들의 압수물품은 되돌려줄 예정이라고 한다.
나는 풍기위원 보조로서 코테가와를 도우려고 남았고.

코테가와랑 함께 여러 바구니에 가득 쌓인 압수물품을 하나하나 소유주 목록과 대조해 보았다.
어디어디~ MP3 플레이어, 닌텐○DS, 게임CD, 그리고... 「고양이귀 메이드 컬렉션」?
이 무슨 매니악한...
아, 이건 내 담배갑이네. 이건 그냥 새로 한갑 사는게 나을것 같다.

목록 확인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나눴다.
코테가와로서는 이번 풍기활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시끌시끌한 2-A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지만 브레이크 역이 없으면 폭주할 것만 같은 몇몇 학생들에겐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풍기강화주간의 계기가 되었던 세사람(모테미츠, 타치바나, 학생이 아니지만 교장) 외에는 나랑 리토랑 라라랑 사키 선배가 주의 학생에 들었다.

리토의 경우는 교내 성희롱 건으로 접수된 신고,
라라는 발명품이나 우주인용 물품을 사용해 일으키는 사건들,
사키 선배는 때때로 보이는 기행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다만 사키 선배의 경우는 텐죠인 그룹이 사이난 고교의 스폰서를 맡고 있어서 대부분의 풍기위원들은 상대하기 껄끄러워 하는가보다.
코테가와는 그런건 아랑곳하지않고 꼬박꼬박 주의를 주고 있다지만...

그러고보면 코테가와의 강직함 때문인지 내게 주의를 주는 풍기위원은 코테가와 하나 뿐이구나.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며 답해주었다.
그건 내가 요주의 인물로 지정된 이유 때문이라고.
나? 나는 기물파손이 원인이었다.

라라와의 싸움에서 운동장 수도를 파손시킨것.
그리고 체육창고의 철문을 뜯어버린것.

수도관에 대한 배상은 라라와의 싸움을 주선했던 사키선배가 배상하면서 무마시킬 수 있었고,
체육창고 건에 대해선 자수해서 가벼운 처분을 받았었다.

다만 체육창고 건에 대해선 손가락 모양으로 뜯겨져나간 철문 때문에 꽤나 뒤숭숭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문을 신경써서인지 풍기위원들이 내게 제재를 가하는걸 꺼리게 되어서 결국 코테가와가 날 전담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맹수조련사」어쩌구 하며 말했다가 째려보는 코테가와에게 입을 다물게 된 풍기위원들이 있었던걸 떠올려 보면 꽤나 코테가와의 존재감은 강렬한 것 같다.

불평하면서 목록을 살펴보던 코테가와는 짧게 신음을 흘리면서 왼쪽 어깨를 주물렀다.

"으음..."

"왜그래 코테가와?"

"아뇨, 그냥 어깨가 조금 뻐근해서..."

하루동안 시즈랑 붙어있던 탓일까?
역시 어젠 평소처럼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겠지.
목을 천천히 돌리며 어깨를 주무르는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내가 어깨를 풀어줄께."

"엣? 괘, 괜찮아요."

"자자, 사양하지 말고 여기 앉으라구."

"남자한테 맛사지 받는건 부끄럽다구요!"

"다리 맛사지까지 받았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으으..."

곤란해하는 코테가와를 이끌고 의자에 앉혔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코테가와는 고개 숙였다.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여 웃음이 새나오려는걸 참고서 코테가와의 뒤에 섰다.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등뒤를 덮고 있었다.
어깨를 주무르기 전에 머리카락을 모으는게 나을듯 해 머리카락에 손을 대었다.
부드러운 감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타고 사라락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자 코테가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아, 미안. 어깨가 머리카락에 가려서 좀 치우려고..."

"...그정도는 봐드리죠. 하지만 다음번엔 미리 말하세요. 조금 놀랐으니까."

"응응! 알겠어~"

"...왜 그런 수상한 웃음을 흘리는거죠 아키츠군?"

"아니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음번'엔 나도 제대로 허락받고 할테니까~"

"무슨...!? 그런식으로 말을 왜곡하지 말아줄래요?
다음번은 꿈도 꾸지 말아요!"

"에에~"

입을 놀리는것과 달리 손으론 착실하게 코테가와의 어깨를 주물렀다.
성실한 손놀림에 코테가와도 긴장을 풀고 몸을 맏기듯 조용해졌다.
가만히 앉아서 맛사지를 받는 코테가와의 뒷모습을 내려다 보다가 머리카락을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코테가와는 머리카락이 예쁘지."

"그, 그런가요?"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는 코테가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긴 생머리가 정말로 어울려 보인다구.
예전에 여학생들도 코테가와 머릿결 좋은걸 부러워하기도 했구말야."

"그, 그랬나요?"

쑥쓰러워하는 코테가와의 반응을 보며 맛사지를 끝냈다.
남은 업무는 많지 않았기에 금새 일이 마무리 되었다.
대조작업을 하느라 바구니에서 꺼내었던 물품들의 뒷정리를 끝내고 코테가와랑 나는 한숨을 돌렸다.

"수고했어 코테가와."

"아키츠군도 수고 많았어요. 정말이지 삼일동안 이렇게 압수 물품이 많이 쌓일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으으읏~"

개운한 표정의 코테가와가 한껏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켜던 순간이었다.

틱- 



"!?"

"...!"

코테가와의 등에서 작은 금속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코테가와가 황급히 가슴을 가리며 몸을 숙였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상황에 나도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냉정하게 사고해보았다.
코테가와의 저 반응...역시 방금 전의 그건 브라 후크 끊어진 소리입니까?

"코테가와, 혹시 방금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나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뭐가 일어난건진 아는데."

"큭, 오해할까봐 말해두는데 살쪘다거나 그런 이유는 절대로 아니니까!"

"알아. 발육이 좋으니까 그랬,「빡-!」크억!?"

무심코 대꾸하다가 코테가와가 집어던진 잡지에 코를 맞았다.
내 코를 치곤 날아가는 잡지명은 '네코미미 메이드 컬렉션'이었다.

"아코코... "

"성희롱이에요 아키츠군. 파렴치한 대사로 감점시켜 드릴까요?"

"잘못했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는 코테가와에게 코를 매만지며 사죄했다.

툭, 딸깍, 데구르르...치익-

"응?"

등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바구니에 놓여져있던 구체가 땅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데빌루크의 표식이 새겨진 주먹만한 크기의 구체에서 치익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연기가 솟아올랐다.
이봐이봐...설마 또 라라의 발명품이 오작동한건 아니겠지?
아무리 취미로 만든거라지만 안전장치가 너무나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오오오!
금방이라도 터질듯 파직파직거리는 소리를 내는 구체에 기겁해 황급히 코테가와의 몸을 감싸안았다.

"코테가와!"

"꺅!? 자, 잠깐! 아키츠군?"

파앙-! 퍼어엉-!
팡-! 투두두두두두!
퍼벙-! 펑!
타다다다다다다!

코테가와를 껴안고서 몸을 숙인 직후 구체가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교실을 수놓았다.
다채로운 색상과 모양의 불꽃이 터지며 교실을 가득 메우길 잠시 곧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은 허공에 스러지듯 자취를 감추었다.
라라의 불꽃놀이용 발명품이었나...?
다행히 옷이 불똥에 약간 그슬린것 외엔 딱히 큰 문제는 없었다.
품에 안겨있는 코테가와의 상태를 확인하자 코테가와는 양손을 내 가슴에 댄채로 굳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코테가와가 멍하게 입을 열었다.

"아키츠군...지금은...?"

"라라의 폭죽이 터진것 같아.
아마도 여름 축제용으로 만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거였군요. 하, 하하..."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코테가와를 보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기계가 터진 주변은 제법 그슬려 새까맣게 되어 있었다.
뒷정리가 큰일일것 같네.

"요란한 폭죽이었네요.
그러고보면 얼마 뒤면 여름 축제네요."

"응. 기다려 지는걸?"

"그러게요. 이번엔 무라사메씨와 함께 축제를 보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여러모로 기대되네요."

하룻밤 사이에 사이가 엄청 좋아졌나보구나 너희들.

"그러고보면 코테가와의 축제때 머리 모양도 예뻤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해 올꺼야?"

"...목덜미 드러낸게 그렇게 좋아요?"

"아,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단 평소랑 달라서 신선한 느낌이잖아?
물론 아까 말한것처럼 평소의 머리모양도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궁색한 내 변명에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외면하던 코테가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볼께요.
...그나저나 아키츠군?"

"응?"



"...언제까지 안고 있을 셈인가요?"

"......"

폭죽에서 코테가와를 보호하던 자세를 풀지 않고 있는 나.
그러니까 여전히 몸을 숙여 코테가와를 껴안고 있는 상황이다.
품에 안긴채 날 올려다보는 코테가와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껴안은 부위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그만 상황 도피를 하고 있었나보다.
대답을 기다리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앗, 그러니까...깜짝 놀란 나머지 팔이 굳어서 안 풀려서 말이지..."

"......"

"...라고 말하면 믿어줄지도, 라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안된다.
조용히 응시해오는 코테가와의 태도가 소리없는 압박이 된다.

"고, 고의는 아니었달까, 부드럽고 따뜻한게 기분이 좋아서 푸는걸 잊고 있었달까.
그... 조, 조금은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지도...라고 생각했다든가... 아, 아하하..."

횡설수설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코테가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살며시 왼손 검지로 내 입술을 눌렀다. 

 



 

"감점"


입가에 호선을 그린 코테가와의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그럼 수업도 끝났겠다, 노래방으로 GO~!"

"「「「오오~!」」」"
"해방이다~!"
"놀러가자 놀러~!"

풍기강화주간의 마지막 날.
방과후, 리사와 미오의 주도로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다.
해방감에 찬 친구들의 호응에 힘입어 노래방에 가는 일행은 대인원이 되었다.

노래방에선 리토에게 달라붙어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를 부르던 룬이 도중에 재채기를 하며 렌(男)으로 변신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몸이 바뀐 직후 질겁을 하며 리토에게서 떨어진 렌은 룬의 노래인 사랑의 메타모르포제를 열심히 이어 불렀다.
지켜보던 리사와 미오는 치마를 입은채 열창하는 렌의 모습에 박장 대소를 했고.
그래도 렌이 부르는 룬의 노래도 의외로 어울렸다는게 친구들의 평가였다.
리사와 미오의 듀엣이 끝나고 코테가와랑 시즈가 나란히 마이크를 잡았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라라를 두고 다투는 리토와 렌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풍기도 좋지만 역시 고교시절은 이런 활기넘치는 자유분방함이 제일이지.
라라가 부르는 매지컬 쿄코 오프닝 곡을 들으며 선곡을 위해 노래방 책을 펼쳐들었다.



p.s. 분위기를 띄울만한 곡을 찾다가 리사의 제안으로 리사와 듀엣으로 「Sex Bomb」를 불렀다.
음정에 몰입한 친구들이 웃으며 듣는 가운데, 코테가와의 못마땅한 눈빛이 묘하게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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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테가와의 특기는 영어시험(2급)

오랜만에 뵙습니다^^;
거의 4개월만이네요(...)
연재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11월에 올린다는 약속도 깨먹었고 참 할말이 없네요...쿨럭쿨럭;;
지지리도 늦은 연재에도 기다려주신 독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론 좀 틈틈이 써나갈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이번 37화 삽화는 터틀러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11월부터 삽화를 보내주셨는데 37화 완성이 올해 말이었다는게 면목이 없네요 쿨럭;
예쁜 삽화들을 워낙 많이 받은지라 글 쓰면서도 이 용량으로 괜찮은건가? 하고 자꾸만 걱정이...( --);
터틀러님 감사합니다. 앞으론 꾸준히 쓸께요m(_ _)m

그럼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새해가 되기 전에 올린다고 후기가 짧으니 양해 바랍니다^^;

p.s.참조 이미지

마지막 삽화 무뎃생본

마지막 삽화 톤첨가본

메리크리스마스(by 터틀러님)

룬의 헤머 어택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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