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탕이랑 풍선 받아가세요~"

"와앗? 고마워요 토끼씨~"

"후후, 귀여운 꼬마 아가씨니까 주는거에요?
오후에 열리는「매지컬 쿄코」공연, 즐거울테니 꼭 보러 와줘요~"

"응~!"

생글거리며 사탕과 풍선을 받아든 소녀는 멀찍이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리본으로 묶어올린 오른쪽 사이드 포니테일이 소녀의 달음박질을 따라 경쾌하게 흔들렸다.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은 아빠가 내쪽을 바라보곤 가볍게 인사를 보내왔다.
호의섞인 미소를 보내는 아이 아빠의 모습에 오른손을 흔들어주며 소녀의 가족을 배웅해주었다.

가을의 화창한 날씨속에서 주말의 러브러브 공원은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과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로 활기를 띄고 있었다.
가끔씩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엔 평소와는 다른 호기심이 깃들어 있는것 같았다.
재잘거리는 대화 중에는「귀엽다」는 말까지 섞여 있는걸 보면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왼손에는 귀엽게 데포르메된 매지컬 쿄코가 그려진 풍선을 쥐고, 팔오금엔 색색이 포장된 사탕을 담은 사탕 바구니를 걸친 나.
아직은 여분이 많이 남아 보충할 필요는 없을것 같아 안심하는 가운데,
온몸에 뒤집어 쓰고 있는 분홍색 토끼 인형옷이 조금 갑갑하게 느껴졌다.
세트장에서 준비로 분주할 아저씨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렇게 인형옷 차림으로 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계기를 떠올려 보았다.




"매지컬 쿄코 할로윈 특집이요?"

일주일 전,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중 사이난 유원지「귀신의 집」에서 일하는 우주인 아저씨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래. 얼마 있으면 할로윈 데이니까.
저번에 말했었지? '매지컬 쿄코 플레임'에 단역 출연 제의를 받았었다고.
할로윈 특집으로 귀신의 집 멤버들이 출연해주길 바라더라고.」

"와~! 아저씨들도 드디어 유명세를 타게 됐군요? 축하드려요~!"

「하핫~ 고마워. 이걸로 사이난 유원지도 훨씬 번성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음주 일요일에 시간있어?」

"시간요? 딱히 예정은 없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그날 러브러브 공원에서 매지컬 쿄코 공연을 할 예정이라 행사 도우미가 필요하거든.
도우미 역의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할까 하다가 네 생각이 나서 말야.
보수는 나름 괜찮은 편이라고 하던데, 혹시 일일 아르바이트 해볼 생각 있어?」

아저씨로서는 아는 사이인 내게 먼저 일거리를 주고 싶었나보다.
SOLGAM의 범죄자들을 잡을때 아저씨들의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도우미 역할을 해보는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것 같았기에 흔쾌히 아저씨의 제의를 승락했다.
운이 좋으면 아이돌인 키리사키 쿄코의 친필 사인이라도 받을수 있으려나?



그리고 시간은 흘러 매지컬 쿄코 공연날.
오전의 러브러브 공원에서 우주인 아저씨들을 만나 도우미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까지 공원에서 아이들에게 사탕과 풍선을 나눠주면서 매지컬 쿄코 공연 홍보 활동을 하는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리고 드라큘라 아저씨에게 도우미로 활동할 동안 입을 인형옷을 건네받았다.
귀에 빨간 리본을 예쁘게 장식한 분홍색 토끼 인형옷이었다.

"홍보 아르바이트의 정석은 역시 인형옷이지!"

정석이라는데는 공감합니다만...성별까지 정해져 있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는데요?
설정상 여성 캐릭터라고 하던데, 세심하게 음성 변조기까지 달려 있었다.
지구에서 변장을 하고 지내는 우주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분장 인형에까지 음성 변조 기능을 넣는 꼼꼼함에 경탄이 나올 정도였다.
건네받은 인형옷을 살펴보고나자 드라큘라씨가 진지한 얼굴로 어깨를 잡아오며 강조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심해야 할건 하나야.
첫째도 동심. 둘째도 동심. 셋째도 동심이다.
아이들의 환상을 깨지마! 인형옷 안에 사람 같은건 없다구?"

"아...네, 넷."

박력이 깃든 드라큘라씨의 기세에 눌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말이 미덥지 못했는지, 고양이 인형옷을 입은 도우미랑 즐겁게 촬영하던 여고생이 탈을 벗은 도우미의 얼굴을 목격하곤 울면서 도망갔다는 소문을 들려주면서,
인형옷을 입고 나서는 부디 행동에 주의해주길 다시한번 당부받았다.
생각 이상으로 도우미 활동중엔 이미지 관리에 신경써야 할것 같았다.



그후 분홍 토끼 인형옷을 입고 토끼 머리를 뒤집어쓴뒤, 사탕바구니와 풍선을 챙겨서 분장실을 나섰다.
처음에는 긴장한 탓도 있고 인형탈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기에, 한동안 공원 한가운데서 쩔쩔매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공원에 나온 아이들을 하나 둘 상대하면서 토끼 인형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방금전 여자아이에게 풍선을 건네줄 즈음엔 여성 캐릭터같은 어조를 연기할 여유도 생겨났고,
지나가면서 힐끗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가볍게 손을 흔들어줄 정도로 넉살도 가질수 있었다.
이따금 장난을 치려고 다가오는 사내아이들은 조금 골치가 아팠지만...

할로윈용 공연 준비라는걸 어디서 들었는지,「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이라고 외치면서 달려드는 사내아이들.
대답을 듣기전에 장난부터 치고 보는 악동 녀석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솜씨좋게 사탕이랑 풍선을 건네주는 것도 꽤나 고생이었다.
꼬마 녀석들은 사탕보단 호들갑을 떨며 과장스럽게 피하는 내 모습을 보는걸 더 즐거워 하는것 같았지만 말이다.

뭐, 그래도 내가 무슨 커다란 토끼 인형처럼 보였는지, 가끔씩 다리에 매달려오는 어린 아이들은 귀여웠다.
집에 가져가고 싶다며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에 아이 어머니와 함께 사이좋게 난처해보는 경험은 신선했었다.
팔자에도 없는 애교를 떨며 사탕과 풍선을 건네주곤 아쉬워하는 아이를 좋게 달래서 보내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니~ 토끼 인형옷은 좋네요~ 평소에도 없는 관심을 이렇게나 받고 말이죠~
소소한 해프닝들에 곤란함을 느끼는 가운데 조금씩 기분이 고조되어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물론 음성 변조기 때문에 인형탈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는 여성스러운 목소리였지만.
허밍을 하며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작스런 바람이 공원을 세차게 휩쓸고 지나갔다.

"웃...!"

「꺄악!?」

바람에 밀려 거세게 흔들리는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잡고 있는데, 여성의 짧은 비명이 귓가에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바람에 하늘 높이 날려가는 비치 모자가 보였다.

"읏샤~!"

모자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달려가 뛰어올라선 허공에 뜬 모자를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그대로 바닥에 착지하려고 자세를 잡던 중, 갑작스레 부유감이 느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내 몸을 허공에 받치고 있는 느낌.
하지만 그런 감각도 잠시, 곧 부유감이 사라지며 내 몸은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왼쪽 팔오금에 걸린 사탕 바구니가 쏟아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하곤 모자의 주인을 찾자,
원피스를 입은 긴 생머리의 소녀가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에 양옆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특징적인 리본과 끈...오시즈(무라사메 시즈)다.
새하얀 피부가 입고있는 프릴 달린 흰색 원피스와 조화를 이루며 매력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쇄골과 겨드랑이가 드러난 원피스만으론 가을 날씨에 조금 쌀쌀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비치 모자를 오시즈에게 건네주었다.

"오늘은 바람이 세네요. 조심하세요 예쁜 아가씨~"

"아, 고마워요 토끼씨."

오시즈는 모자를 받아들며 살포시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아무래도 방금전 모자를 잡았을때 느낀 부유감은 오시즈의 염동력 때문인듯 했다.
토끼 인형옷 차림인데다가 목소리까지 다르다보니 나인지 알아보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안에 사람은 없다」고 알바 시작전부터 워낙 강조를 받은탓에 일부러 정체를 밝히기도 애매해 이대로 물러나려다가,
오시즈가 소중한듯 모자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중한 모자인가 보군요?"

"네.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고른 모자인걸요."

리사, 미오와 함께 고른 모자일까?
몸을 얻은 오시즈를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더니 리사랑 미오도 좋은 일을 해주는군요.

"그나저나 토끼씨는 정말 높게 뛰시네요?
모자를 잡는 장면을 보곤 깜짝 놀랐어요."

"그야 토끼니까요~"

「「「토끼씨 굉장해~!」」」

"까, 깜짝이야...!"

갑작스레 옆에서 들려온 외침에 움찔하곤 몸을 돌렸다.
방금전 장난을 걸어오던 사내아이들과, 풍선을 받았던 여자아이들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전에 공중에서 모자를 잡았을때 어떻게 한거야?"

"이만~큼 높이 뛰었잖아?"

"게다가 공중에 떠있는것 같았어!"

오시즈의 모자를 잡았을 때의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나보다.
오시즈의 염동력으로 허공에 잠시 떠있다 보니, 남들이 보기엔 내가 하늘을 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질문 공세에 옆에 서있던 오시즈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난처해하는 오시즈의 모습에 나도 어떻게 아이들에게 대답해줘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비밀이에요~」라고 말하는게 나을까 생각하던중 갑자기 몸에 충격이 전해졌다.

"와아~! 리토! 이 토끼인형 귀여워~!"

"엣~?"

즐거운 목소리로 라라는 양팔로 내 몸을 꽈악 껴안아왔다.
민소매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치고선 꺄아~ 하며 어린아이처럼 달라붙어 기뻐하는 라라의 모습에 놀라 엉거주춤 서있으려니
당황한 리토가 황급히 내게서 라라를 떼어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라라! 그렇게 함부로 만지면 실례라고!"

"에~ 귀여운데..."

갑작스런 해프닝에 아이들의 주의가 라라에게 쏠렸다.
덕분에 방금전의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 오시즈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라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라라씨, 리토씨?"

"앗! 오시즈짱도 있었네? 안녕~ 혼자서 온거야?"

"네. 모처럼 몸을 얻었으니 오랜만에 꾸며 입고 산책이나 해볼까 해서요.
라라씨도 리토씨와 산책중인가요?"

"응. 오늘 러브러브 공원에서 재밌는 공연이 한다길래 미캉과 야미랑 함께 왔어.
그런데 그 옷 예쁘다~!"

"헤헤, 고마워요. 리사씨랑 미오씨와 함께 고른 옷이거든요.
실은 방금전 모자가 바람에 날려가는걸 토끼씨가 잡아주셔서 인사드리는 중이었어요."

"토끼 인형씨가?"

오시즈의 이야기에 내쪽을 바라보는 라라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후후...방금전엔 귀엽게 봐줘서 고마워요 아가씨.
여기 이 아가씨와는 친구분이신가봐요.
남자 친구와 함께 놀러온건가요?"

"아, 아니. 우린 그런 사이가..."

"응! 리토랑 함께 매지컬 쿄코 공연 보러 왔어~!"

당황하며 부정하는 리토의 말을 끊으며 라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라라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언니도 매지컬 쿄코를 보러 온거야?"

"응, 좋아하는 프로그램이거든~!
러브러브 공원에서 매지컬 쿄코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운이 좋지 뭐야~"

아이들과 섞여 재잘거리는 라라의 모습에 리토는 고개를 푸욱 숙이며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그러니까 난 이런 유치원생용 쇼는 보러 오기 싫었다니까...」라고 작게 푸념하는 리토의 소리가 들렸다.

공연의 도우미 앞에서 잘도 그런 실례되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리토씨...
물론 안들리게 작게 말했겠지만 그렇게 부끄러운건가?
등장 인물들의 옷차림이 조금 야하기에 다른 의미로 부끄럽다면 이해는 가지만.
아무튼 매지컬 쿄코의 열성적인 팬인 라라에게도 홍보용 선물을 건네기로 했다.

"그럼 매지컬 쿄코의 팬인 아가씨도 여기 풍선이랑 사탕을 받아가세요~"

"앗? 매지컬 쿄코 풍선이다. 고마워 토끼씨~!"

매지컬 쿄코가 그려진 풍선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보다.
풍선을 받아들곤 꼬리를 살랑이며 싱글벙글하는 라라의 모습에 살짝 웃곤 오시즈에게도 풍선을 건네었다.
저번에 하루나의 몸에 들어갔을때 TV로 매지컬 쿄코 방송을 봤던 오시즈도 오늘 공연에 꽤나 흥미를 가진것 같았다.
풍선을 못받은 아이는 없나 둘러보다가 리토와 라라를 쫓아온 야미와 미캉을 발견하곤 물었다.

"뒤에 계신 숙녀분들도 풍선 하나씩 어떠세요?"

"괜찮아요 전."

"괜찮습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하려나, 미캉과 야미는 풍선을 사양했다.
뭐, 공연 시작까진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면 되겠지.




"그럼 토끼씨는 어디에서 왔어?"

"후후~ 달에서 왔답니다~?"

라라와 대화하던 아이들이 내쪽으로 질문의 화살을 돌렸을때 나온 대답이다.
눈앞에서 이야기중인 두 우주인(라라와 야미)의 모습을 보고 지어낸 '토끼씨=우주인'설이지만 동화적인 느낌도 주기에 나름대로는 괜찮은 답변이었다고 생각했다.
다만...아이들의 호기심을 얕본게 죄라면 죄였다.
그걸 정말로 믿은 몇몇 아이들이 내보내는 끊임없는 질문공세에 내가 괜한 농담을 한건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라라...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내 이야기에 집중해주는건 기쁜데, 우주인인 네가 그런걸 믿지마.
설마 달에 진짜로 토끼가 살고 있는건가?

"달엔 정말로 그랑○가 있어?"

몰라.

"지구의 지배자는 세일러○이란게 진짜야?"

아니. 그랬다면 은하의 지배자는 데빌루크가 아니었겠지.

만화나 애니메이션 설정을 물어오는통에 대답하기 곤란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이상한거 말고 제발 평범한걸로 물어봐 좀~!

"어쩌다 지구에 오게 됐어?"

고맙다 거기 소녀!
맘같아선 바구니에 든 사탕을 전부 주고 싶을 정도다.

"으응~ 떡방아를 찧으면서 지구를 보다가 말야...
지구의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솜사탕 맛이 나지 않을까 궁금해졌거든."

"그래서 지구에 온거야?"

"응~그래서 지구에 온뒤엔 산봉우리에 걸쳐있는 구름 맛을 보려고 몇번이나 구름모자를 쓴 산에 올라가봤다?
그런데 아무리 산정상을 헤매도 구름이 안보이는거야...훌쩍..."

내 대답에 아직 어린 아이들은 그러고보면 나도 그랬어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가 좀 커진 사내녀석들 중엔 바보라고 수근거리는 맹랑한 꼬맹이들도 있었다.

"우~ 놀리지마~! 와보질 않았으니 모르는거잖아!
지구인 중엔 달이 치즈로 된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단 말야~!"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하는 내가 재밌는지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우우...그래도 지구에 온 김에 솜사탕 대신 할로윈 데이때 사탕이랑 과자라도 먹고 가려고 이렇게 남아있는 거라구."

우는 시늉을 하며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야미가 궁금한듯 미캉에게 물었다.

"(할로윈 데이는 무슨 날입니까?)"

"(아, 할로윈은 10월 31일에 유령같은 분장을 하고서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이라고 외치고 사탕이나 과자를 받는 날인데...)"

미캉이 할로윈에 대해서 야미에게 설명해주는 동안, 난 다음 질문을 받아야 했다.

"어떤 방식으로 지구에 온거야?"

"풍선을 타고 지구까지 왔답니다~"

「「「에...」」」

의심스럽다는듯 지긋이 나를 응시하는 꼬마들의 반응에 살짝 식은땀이 흘렀다.

"지, 진짜야~? 정통파 우주인의 방식이라구?
어린왕자는 철새를 타고 지구까지 왔다잖아요?"

게다가 까치랑 까마귀가 만드는 사랑의 오작교는 은하수마저 잇는다고.

"(...지구의 새들은 생물을 초월했군요.)"

"(아니...저거 동화니깐 야미짱.)"

사내아이 한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고작 풍선으로 우주 여행이 가능한거야?"

"후후~ 달토끼의 과학력은 세계제일이랍니다?"

"아니, 그거 이미 과학의 영역이 아니잖아."

무심코 태클을 거는 리토에게 태연하게 응수했다.

"아서 클라크씨가 말씀하셨죠.
충분히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 말이죠~"

"애초에 풍선이라는것부터가 이상하잖아!?"

머리를 감싸쥐는 리토는 더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둔듯 고개를 흔들었다.
우주인이 존재한다는걸 아니까 뻔한 거짓말에도 진위 판단을 헷갈리는것 같았다.
리토의 말에 사내아이는 손에 들린 풍선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더니 나를 보았다.

"그럼 토끼씨는 그 풍선으로 하늘을 날 수 있어?
방금전 모자를 잡았을때 처럼?"

"으음~ 잠시 동안은 말이죠."

"그럼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보여줄수 있어?"

"에..."

사내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의심반 기대반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끄응...귀찮게 됐네.
괜스레 동화같은 설정으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다가 난데없이 하늘을 나는 시연까지 하게 될줄이야.
하지만 이걸 무사히 해결하기만 하면 아이들의 의심스런 시선도 피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도 이 정도의 요구는 번거로울 뿐이지, 충분히 대처 가능한 범위 내의 사건이다.
어깨를 으쓱하곤 태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 좋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못보여드릴것도 없겠죠."

"진짜?"

"물론이죠. 다만 지구에선 저 혼자만으론 힘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요.
달에서보다 6배 정도 힘이 더 들거든요."

말을 끝마치곤 친구들 옆에 서있는 오시즈에게 다가갔다.

"그럼 방금전 모자를 놓쳤던 아가씨께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네?"

"공중에 떠오르는데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말이죠.
하나, 둘, 셋 하고 천천히 숫자를 센 다음 공중에 뜨고 싶은데 도와주시겠어요?"

"에, 그러니까..."

"(한번만 부탁드릴께요 요술쟁이 아가씨~)"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오시즈는 놀란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정도면 어떤 의도인지 오시즈도 눈치챘겠지?

"알았죠? 하나~ 둘~ 셋~! 하면 떠오르는거에요?"

"아, 네!"

강조하듯 다시 묻는 내게 오시즈는 잠시 얼떨떨해 하다가 곧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뒤로 물러나 어느새 둥글게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오시즈에게 부탁했다.

"그럼 숫자를 세어주세요 아가씨."

"네. 하나~ 둘~"

부디 오시즈가 잘해주길 바라며 긴장한채 왼손에 쥔 풍선줄을 꽉 잡았다.

"셋~!"

순간 방금전과 같은 강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천천히 하늘로 떠오르는 내 모습에 아이들이 놀라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은 오시즈의 염동력으로 떠오른건데...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받는 모양새가 되어버린지라 영 민망하다.
조금 쑥스러워져서 염동력으로 나를 띄우느라 검지와 중지로 나를 가리키는 오시즈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잠시동안 하늘에 떠있는 트릭을 성공시킨뒤로 아이들은 내 말을 정말로 믿게 된것 같았다.
달엔 정말로 토끼가 살고 있었다는 식으로...
어쩐지 감수성이 오르고 지력이 떨어졌다는 메시지가 떠오른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호응이 커질수록 덩달에 내 허풍도 멈출줄 모르는 기세로 대책없이 커져만 갔다.

"지구에 와서 제일 무서웠던건 늑대에요.
「아기돼지 삼형제」읽어봤어요?
입바람만으로 집을 날려버린다니...반칙이에요."

"맞아요! 거기까지가면 정말 초능력이라구요!"

"늑대 대단해~!"

"(...과연 지구의 생물은 경시할 수 없군요.)"

"(야, 야미짱...그러니까 저건 동화라니까?)"

최근 동화책에 탐독했던지 열렬하게 반응하는 오시즈, 신기하다는듯 듣는 라라, 진짜로 믿고 있는 야미에 그걸 지적하는 미캉.
아이들 사이에 끼어서 동화를 섞은 엉망진창인 설정에 심취한 넷은 꽤나 호흡이 잘 맞는것 같았다.

"그럼 토끼씨는 외롭지 않아?"

"네?"

"달에 가족들을 두고 왔을거잖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하는 소녀가 기특해서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을 뻔 하다 참았다.

"괜찮아요~ 할로윈만 끝나면 도로 돌아갈테고, 지구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는걸요?
그리고 지구엔 저 말고도 많은 우주인들이 있으니까요~"

"정말?"

"물론이죠. 믿겨지지 않나요?"

"으응...잘 모르겠어..."

"좋아요. 그럼..."

손가락을 물고 고민하는 소녀에게 웃어주곤 몸을 일으켜 오른손을 들었다.

"자~ 이중에 우주인, 고대인, 초능력자, 이세계인이 있으면 손을 들어주세요~"

"네~!"

활기찬 목소리로 웃으며 라라가 한손을 번쩍 들었다.
그뒤로 오시즈가 아하하 웃으며 손을 올렸고, 그 둘을 바라보던 야미도 천천히 손을 들었다.
분위기를 읽어준 세사람에게 감사.
정말이지 의리가 있네요.
셋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봐요. 저말고도 이렇게나 많이 있잖아요?"

"우주인은... ET처럼 생겼거나 무서운 모습일거라 생각했어."

"그런 모습의 우주인도 있겠죠.
그래도 상냥한 사람들도 많으니까 무서워하진 말아요."

이야기를 듣던 아이중 한명이 문득 떠오른듯 외쳤다.

"아! 나도 우주인 한명 알고 있어!"

"정말? 누군데?"

"왜 있잖아, 공원에서 자주 보이는 형말야."

"아, 수염성인!"

"쿨럭...!"

"토끼씨? 왜그래?"

"아, 아뇨. 갑자기 사레가 좀..."

당황해서 나온 기침을 참느라 좀 고생했다.
흠흠 헛기침을 하곤 능청스럽게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수염성인이라는 분도 우주인인가봐요~?"

"응. 원랜 지구를 침략하는 나쁜 우주인이었는데 우리가 쓰러뜨린 뒤론 착하게 살겠다고 했어."

"그런데 자꾸만 지구를 침략하려고 공원에 나타난다?"

그건 니들이 자꾸만 나한테 악역을 맡기니까 그런거잖아.
얌전히 어울려주다가 하마터면 수염 태워먹을뻔한 경험까지 했다고 이 악동들아.
엣헴하고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자랑스레 말하는 사내아이들의 모습에 살짝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악당이지만 잘 놀아줘서 재밌어."

"응. 생각보단 좋은 오빠야. 나뭇가지에 풍선이 걸려있는걸 잡아다 주기도 했어."

"...그분이 그 이야길 들으시면 정말 기뻐하겠네요."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는 식의 대답들이었지만 기뻤다.
악동이라고 해서 미안해 이녀석들아.
담에 공원에서 만나거든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줘야겠군.


"토끼씨는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

좋아하는 노래?
글쎄다...기왕이면 우주인과 관련된 노래중에 기억나는게...아, 맞다.

"「밥상과 우주인」을 좋아해요."

평화로운 분위기를 띄는 곡이라 좋아하는 노래다.

"처음 들어봐..."

"들려줄까요?"

"응. 한번 불러줘."

"음~ 그럼 부족하지만..."

아르바이트 하면서 노래 부르는 역할을 맡을거라곤 생각못해 봤지만...
음성 변조기 때문에 노래가 제대로 들릴까 조금 걱정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밥상과 우주인」오늘 저녁 밥상 앞에 우주인이 있다면
심지어 요리도 우주인의 솜씨면
처음 보는 반찬들에 일단 기가 질려 버리고
왕성한 식욕 짐싸들고서 나가겠죠
후회되겠죠 내가 왜 그때 손 잡았을까
어떻게 벗어나 볼까 눈치만 보고 있지만
하지만 단지 우주인의 약점 같은것만 찾으려 하지마요
함께 할 때 미련없이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요
흘러가는 것이 우주의 너나 할 것 없는 서로의 철학이죠
이제 가식은 구겨던져 모두가 우주에 사는 거죠.


괜한 걱정이었는지 노래는 다행히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위화감없이 불러진것 같았다.
역시 우주인의 과학기술은 대단하네요.

"포근한 느낌의 노래네..."

노래를 듣던 미캉이 작게 중얼거렸다.
동감이다. 원래 개그계 치유물 작품의 엔딩곡으로 쓰인 노래인데다가 작품 분위기와의 싱크로율에서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슬슬 모여있는 아이들도 해산시켜야 할것 같아 이만 이야기를 마무리하는게 좋을 것 같다.
아직 풍선과 사탕을 받지못한 아이들에게 남아있는 풍선과 사탕을 나눠주면서 이야기했다.

"오늘 있는 공연이 할로윈 특집인건 아시죠?
무대엔 괴물로 분장하신 다양한 분들이 오실거에요.
빨간 능금빛 와인을 즐긴다며 괜히 멋을 부리는 드라큘라씨라든가,
달을 담아낸 술을 마신다고 우기면서 헤롱거리는 늑대인간씨라든가 말이죠."

"킥킥~ 뭐야 그거, 바보같애."

"그렇죠? 무서운 얼굴을 가졌으면서도 어쩐지 얼빠진 분들이라구요."

"혹시 그 아저씨들은 우주인이야?"

갸웃하는 여자아이에게 웃으며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후후~ 글쎄요? 어쩌면 그분들이 우주인일지도 모르죠."

"엣? 정말?"

"아니면 방금전 손을 들어준 언니들처럼 우리와 같은 사람일수도 있고 말이에요."

"어...?"

"터무니없는 게으름벵이거나,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탄 낯선 사람일수도 있죠."

"치이~! 결국 누가 우주인인지 모른다는거잖아?"

"풋...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볼을 부풀리는 소녀의 모습에 살풋 웃곤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춰 소녀와 얼굴을 맞추었다.

"그러니까...지구인이라든가, 우주인, 초능력자, 이세계인, 미래인, 과거인 같은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아요.
모두 우리랑 다를바 없는 사람이니까요."

괴악한 능력을 지닌 우주인들이 많아서 정말로 다를바 없는지는 의구심이 든다만, 요점은 편견없이 대해주자는 거니까.
내 말을 들은 소녀는 혼란스러운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어려워..."

"음, 간단히 말하자면 친구들이나 만나는 사람들한테 잘해주라는 거에요."

"으응..."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보곤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앞으론 주위 사람들에게 좀더 다정하게 대해주면 기쁠거에요.
그럼 언젠가 여러분이 친절히 대해준 누군가가 기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가 말할지도 몰라요.
지구 사람들은 친절했다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라라와 리토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그러니까 거기있는 멋진 분도 좀더 애인을 소중히...어라?"

방금전까지 라라 옆에 있던 리토가 안보이네?
고개를 돌려 공원을 둘러보다가 저만치 벤치에 앉아 쉬고있는 리토가 보였다.
여름축제 때도 의욕없이 벤치에 앉아있었다고 미캉이 그러던데, 매지컬 쿄코 공연 보는게 그렇게 싫었던걸까.
아니면 너무 길어지는 내 이야기에 질려 일찌감치 빠져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누구한테 이야기하는거야 토끼씨?"

"아, 아하하...그냥 혼잣말이에요 혼잣말~"

덕분에 허공에 대고 말한 꼴이 된 처지가 되어버린지라 남들 보기 부끄러워졌다.
조금 라라를 도와줄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이래서야 말짱 꽝이로군.
뭐, 애초에 별 문제도 없는데 쓸데없이 조언을 해주는것도 주제넘은 짓이니까 오히려 잘된건지도 모르겠다.
살짝 붉어진 목덜미를 매만지며 이야기를 얼버무리다가 양손을 가볍게 마주쳤다.

"자, 그럼 토끼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
새로운 이야기는 잠시뒤 열리는 매지컬 쿄코 할로윈 특집편에서 즐겨주세요~
그럼 무대에서 다시 만나요~"



이야기를 끝내고 모여있던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혼자 공원을 돌아보던 오시즈는 라라, 야미, 미캉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있다 봐요 토끼씨~」라고 손을 흔드는 라라와 오시즈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곤 혼자 남은 공터에서 한껏 기지개를 폈다.
예정에 없던 우주인 연기를 하던게 부담이었는지 아이들이 사라지자 긴장감이 풀려 몸이 나른해졌다.
조금 쉬는게 좋을것 같아 공원 한쪽에 있는 벤치로 가서 앉곤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쩐지 지치는걸..."

"자요."

"응?"

갑자기 옆에서 내밀어진 음료수 캔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V넥 반팔 티셔츠에 핫팬츠, 검정과 하양의 스트라이프 니삭스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내 또래로 보이는 검은 단발의 소녀가 음료수 캔을 들고 서있었다.
TV로 봐서 익숙한 얼굴...설마?

"키리사키 쿄코씨?"

"정답."

쿄코가 웃으며 다시 캔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캔을 받곤 얼떨떨해하며 쿄코를 보았다.
이런식으로 만날수 있을거라곤 생각도 못해봤는데...지금쯤이면 공연 준비에 한창인게 아니었나?

"저기...리허설중 아니었나요?"

"쉬는시간이라서요. 30분 정도지만."

쿄코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살짝 치켜올리며 웃었다.
양손으로 캔을 잡고 당황하는 기색의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쿄코는 내 옆에 앉곤 가볍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궁금해서 몰래 와봤는데 꽤 재밌었어요.
솜사탕맛 구름이라...귀여운 이유더군요."

"아, 아하하...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방금전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나?
바로 옆에 앉아 나를 보며 대화하는 쿄코의 모습이 아직 실감나지 않아 어색한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다.

"호응도 괜찮았어요. 사람들이 꽤나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주던걸요?"

라라, 야미, 오시즈를 말하나보다.
실제로 두명은 우주인이고 한명은 400년전의 옛날 사람이니까.
장난같은 어조로 말한 나와, 거리낌없이 손을 든 라라 덕분에 정작 다른 사람들은 농담처럼 넘어가는 분위기였지만.
애초에 생김새도 지구인과 다를바 없고.

"그런데 방금전 공중에 떠오르는 건 어떻게 한거에요? 역시 마술?"

"으응...비밀이에요. 다만 혼자서는 못하는 거지만요~"

"역시 트릭이 있었군요."

물론. 오시즈의 도움 없이는 다시 보여줄수 없으니까.
트릭에 대한건 답변하기 곤란했던지라 쿄코쪽으로 말화살을 돌렸다.

"그런 쿄코씨도 마법소녀 역을 하면서 마술 한두개는 알고 있지 않나요?"

"그야 저도 이런 마술은 하지만요."

쿄코는 핫팬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원형을 잃고 움푹 찌그러진 탁구공이었다.
쿄코는 탁구공을 손바닥에 올린채 내앞에 잠시 보이곤, 손가락을 오무려 탁구공을 감싸듯 가렸다.
그리고 잠시후,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는 찌그러진 탁구공 대신에 원래의 동그란 모습을 되찾은 탁구공이 놓여져 있었다.

"간단한 마술이지만~"

"헤에... 신기한 마술이군요?"

탁구공 속의 공기를 데워서 탁구공을 부풀게 만든건가?
쿄코가 가진 재능은 불을 다루는 능력인 줄 알았더니, 열과 불을 함께 다루는 능력이었나보다.

감탄한 날 두고 주변을 둘러보던 쿄코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여긴 평화로운 곳이군요.
이 마을에 오기전까지 걱정하던게 바보같아요."

"걱정요?"

"「사이난 유원지」의 「귀신의 집」아시죠?"

"네. 유명하니까요."

"이번에 특집 공연을 준비하면서「귀신의 집」에피소드를 스텝분들과 함께 보다가 들은건데,
귀신의 집에서 사용된 이야기들은 실은 이 마을에 떠도는 도시전설에서 따온거라고 하더라고요.
어떤 불량학생과 얽힌 소문이라던데...아키츠 료스케였던가요?"

뜨끔.

"금발 염색에 금색 목걸이와 체인 팔찌를 차고 다니는 불량학생이라는데,
야쿠자와도 관련되어 있다는 루머도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선 꽤나 악명이 높다던데요?
적어도 도내에선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라고...
천명의 여자를 울렸다고해서 여자아이들은 혹여나 타킷이 되지 않을까 무서워한다기에, 이곳에 오면서도 혹시나 마주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거든요."

지금 댁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접니다.
아침부터 계속 쓰고 있는 인형옷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지며 자꾸만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귀신의 집」에피소드로 쓰인 소문들이 이런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뻣뻣하게 앉아서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내게 쿄코가 이상한듯 물었다.

"그런데 음료수 안드세요?"

"아...아무래도 공원 한가운데서 탈을 벗으면 아이들이 실망할것 같아서 말이죠~
고맙지만 아껴뒀다 나중에 마실께요."

"...역할에 충실하시군요. 역시 동심은 소중하니까?"

"뭐, 그야...하하..."

실은 제 몸의 안전 때문입니다.
지금 음료를 마시려고 가면을 벗다 얼굴을 들켰다간 쿄코가 비명을 지를것만 같으니까.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지 않겠지만 최악의 경우엔 패닉상태의 쿄코가 내지르는 화염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
내 변명에 쿄코는 어쩐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훌륭한 마음가짐이네요.
저도 본받지 않으면..."

만족한 표정을 지은 쿄코는 시계를 보더니 벤치에서 일어나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아쉽지만 이만 가봐야겠어요. 쉬는시간이 끝나가거든요."

"저랑 이야기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거 아니에요?
그럼 정말 미안한데요..."

내 우려섞인 말투에 쿄코는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토끼씨의 작은 공연은 충분히 즐거웠으니까요.
그리고 토끼씨랑 극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는걸요?
제 공연을 기대해주는 사람들을 볼때면 언제나 힘이 나니까요."

정말이지 열심인 소녀다.
자신의 역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의 자세가 눈부셔 보였기에 조금이라도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었다.
지금의 모습이 토끼인형 모습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양팔을 살짝 맞잡으며 활기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쿄코씨. 저, 응원할께요!
쿄코씨가 공연을 멋지게 끝낼수 있도록~!"

풍선과 캔을 손에 들고 사탕바구니를 맨채로 응시해오는 분홍 토끼의 모습에 쿄코는 무심코 웃음이 샌듯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렸다.

"후후, 응원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가볼께요.
어린 팬들에게 잘 대해주셔서 고마워요 토끼씨~"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들곤 쿄코는 세트장이 있는 방향으로 떠나갔다.

"후우...십년감수했네."

쿄코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손에 든 캔을 응시했다.
탄산음료네...
공원 한복판에서 탈을 벗을 생각도 없고 지금은 그다지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있다 마실까.
어느새 내용물이 많이 줄어든 사탕 바구니에 캔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좋게 쿄코도 만났겠다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지.
잠시후면 공연이 시작될 시간이기에 바구니와 남은 풍선을 챙겨 공연 준비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알겠지? 무대 근처에 서있다가 신호를 받으면 관객들중 어린아이 한명을 데리고 무대로 올라오는거야."

"제가요?"

"그래. 네가 제일 귀여운 복장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전부 괴물 옷차림이라서 아이들이 무서워할지도 모른다구."

대기실에서 할로윈 괴물들로 분장한 우주인 아저씨들이 대본을 확인하면서 내게 부탁한 배역이다.
실제론 그렇게 큰 역할은 아니었다.
연극도중 토끼옷 차림으로 무대 한구석에 서있으면서 관객중 아이 한명을 점찍어뒀다가 무대로 데려오면 되는거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얌전한 여자아이로 부탁해.
경험상 사내아이는 어디로 튈지 몰라서 배우들이 전전긍긍 할때가 많아서 말야..."

...짱구 같은 말썽꾸러기한테 걸리기라도 했던걸까?
짱구를 무대에 올렸다가 한껏 곤욕을 치룬(악역 배우를 물어뜯었다) 액션가면의 모습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중 갑작스레 대기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와아~! 여긴 뭐하는 곳이야?"
"무대 준비장인가요?"
"뭔가 시설이 많군요..."

"자, 잠깐만요? 여긴 함부로 들어오시면 곤란해요...!"

라라랑 오시즈, 야미의 목소리?
무슨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공연 준비로 한창인 장소에 들어온 라라와 오시즈, 야미를 스탭 한명이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보였다.
셋다 마이 페이스 성향이 강해서 그런지 스탭 혼자선 세명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도와주려고 다가가려할 때, 셋을 쫓아서 안으로 들어온 리토와 미캉이 황급히 스탭에게 사과했다.

"라, 라라! 죄송합니다! 곧 나갈께요!"
"죄송해요! 시즈 언니, 야미짱 얼른 나가자...!"

"에~? 매지컬 쿄코 보고 싶었는데..."
"매지컬 쿄코씨와는 못만나나요?"
"...그러지요."

미캉은 오시즈와 야미의 손을 잡고, 리토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아쉬워하는 라라의 손을 잡고 세트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 빠져나가려던 다섯을 누군가 멈췄다.

"잠깐!"

앞머리 한가닥을 갈고리 모양으로 내리고, 들창코에 콧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후덕한 인상의 남자가 다섯의 앞에 나섰다.
어...? 매지컬 쿄코의 감독님?

"아가씨. 혹시 매지컬 쿄코 좋아하니?"

"네~!"
"저도 좋아해요~!"

"흐음흐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분위기를 풍기며 발랄하게 대답하는 라라와 오시즈의 모습에 감독의 얼굴이 흡족해졌다.

"그럼 다들 잠시만 이쪽으로..."

"어어?"

감독은 당황한 리토와 함께 라라, 오시즈, 야미, 미캉을 세트장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감독과 다섯의 대화가 오갔다.
아무래도 감독은 세트장에 난입한 소녀들을 무대에 올릴 관객으로 정하고 싶은것 같았다.
몇번의 대화가 오간뒤 리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그냥 구경만 하는걸로 만족하겠다며 라라와 다른이들에게 선택권을 남기곤 리토는 먼저 세트장을 빠져나갔다.
리토가 빠져나간뒤에는 대화는 거의 감독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라라와 오시즈야 원래부터 나올 의욕이 만만했고, 미캉은 라라가 사고나 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는지 혹시 모를 뒤수습을 위해 참여하는 느낌이었다.
야미는 미캉이 무대에 오르겠다고 하자 함께 참여 의사를 밝였다.
예정했던 참여 관객수보다 훨씬 많아진 네명의 소녀를 확보하곤 감독은 흡족한듯 웃었다.
원래라면 인질역 1명이랑, 경우에 따라 인질 구출 역할을 맏을 관객(주로 아이의 보호자) 1명이 전부인걸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뭐, 베테랑 감독이시니까 알아서 잘하시겠지.
열성적인 모습으로 스탭들을 지휘하는 감독의 믿음직한 모습을 한차례 바라보곤 걱정없이 등을 돌렸다.

"역시 공연은 비쥬얼이지!"

...어쩐지 불안해졌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원에 설치된 임시 무대는 아이들을 동반한 관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할로윈에 난입한 괴물들이 무대에서 화려하게 날뛰는 동안, 난 분홍 토끼 인형옷을 입은채 풍선과 사탕바구니를 들고 무대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대에 올리기 적당한 어린소녀를 찾던중, 객석 한쪽에서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듯 공연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드 포니테일의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풍선을 건네줬을때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깊던 그 소녀였다.

타깃을 정해두고 괴물들의 퍼포먼스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리토는...안보이네. 어디에 가있는거야?
혼자서 집으로 갈만큼 무심한 녀석은 아닐텐데...
의아해서 객석 너머의 공원을 잠시 둘러보다가 공원 한쪽에서 하루나와 대화하고 있는 리토를 발견했다.
공원을 서성이던 리토가 마론(애완견)을 산책시키러 온 하루나를 우연히 만났나보다.
뭔가 장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대화하고 있는 리토를 보면 하루나 상대로는 여전히 긴장되나보다.

할로윈 괴물들의 위협적인 퍼포먼스가 끝나고 드디어 신호가 떨어졌다.

"크하하~! 어이 거기 신참~!
본보기로 귀여운 꼬마아이 한명 납치해오라구~!"

"예잇~!"

기운찬 대답과 함께 촐랑거리는 걸음걸이로 점찍어뒀던 소녀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오는 내 모습에 소녀가 앗-하며 외친다.

"아! 방금 전의 토끼씨~!"

"또 만나네요 귀여운 아가씨~"

소녀의 앞에서 몸을 숙인후, 목소리를 낮춰 은근한 어조로 묻는다.

"매지컬 쿄코를 불러줄 공주님을 고르고 있어요.
매지컬 쿄코가 활약하는 모습, 곁에서 지켜보지 않을래요?"

"정말?"

"물론이죠~"

"응~! 좋아 토끼씨~"

소녀는 기꺼이 무대에 오를 생각으로 가득한가보다.
소녀의 손을 잡기전 아이의 부모님께 잠시 양해를 구했다.

"음, 그럼 잠시만 귀여운 따님을 실례할께요~?"

"후훗~ 잘부탁해요 토끼씨?"
"즐겁게 다녀오렴."

"응~!"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양친께 인사하곤 소녀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와아~」하는 소녀를 안고 무대위에 오르자 괴물들은 흡족한듯 야비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잘했다. 그럼 그 꼬마 아가씰 인질로 잘 데리고 있으라고~"

그리곤 잠시 주위를 돌아보더니 갸웃하며 크게 중얼거렸다.

"음? 아직도 매지컬 쿄코가 나타나지 않다니...
한명으론 부족한가?"

그말이 신호가 되었는지 무대 뒤쪽이 과장되게 소란스러워지더니 괴인 한명이 또 한명의 인질을 이끌로 나타났다.

"이리 나와~!"

"꺄...꺄아아~~~"

응...?
어쩐지 어색함이 한가득 배어나오는 비명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인질을 바라보았다.
......어? 미캉?
붉어진 얼굴인채 인질역으로 나타난 미캉의 모습에 할말을 잊었다.

여성 대기실에서 갈아입었는지 미캉의 옷차림은 방금전 세트장에서 봤을때완 달랐다.
상의론 짧은 탱크탑과 그 위로 앞이 트인 작은 겉옷을 걸치고, 하의론 두개의 가죽 벨트로 장식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팬던트가 달린 체인형 목걸이를 메달고, 오른 손목엔 고리모양 팔찌를 차고 있었다.
탱크탑 차림으로 인해 드러난 오목한 배꼽과 몸매에 딱맞는 청바지가 보여주는 절묘한 라인이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풍겼다.
감독님...비쥬얼 이전에 12살짜리 애한테 묘한 색기 풍기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아이들 보는 내용에 난데없는 에로한 연출을 하려는 감독의 의도에 골치가 아파져서 잠시 하늘을 쳐다보다가,
미캉을 잡은채 이쪽으로 다가오는 괴물 아저씨의 모습에 다시 자세를 바로했다.

"이봐, 이 아가씨도 인질로 잡고 있으라구."

"네에~"

아직 공연중이니까 상념에 빠져있을 여유는 없나.
소녀와 미캉의 뒤에서 양팔로 감싸듯이 둘을 잡곤 정해진 인질의 대사를 읊도록 부탁했다.

"(알겠죠?「도와줘요 매지컬 쿄코~」하고 외치는거에요?)"

"응!"
"네..."

활기차게 대답하는 소녀와 반대로 미캉은 아직 부끄러움이 남아있는듯 조그맣게 대답했다.
소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곤 양손을 입가에 대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와줘요 매지컬 쿄코~~~~~~!!!"

무대가 떠나가라 힘차게 외친 소녀는 옆에서 주저하고 있는 미캉을 재촉했다.

"언니도 빨리~ 빨리~"

"으...도, 도와줘요 매지컬 쿄코~~~~~~!!!"

새빨개진 얼굴로 힘껏 대사를 외치곤 미캉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후후~ 고마워요 두 숙녀님~"

"에헷~"

"(...라라 언니 바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미캉의 모습에 남몰래 애도를 표하곤 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럼...드디어 주연의 등장인가?
무대 조명이 켜지며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무대에 나타난 소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흰색 블라우스와 푸른 치마, 붉은색 마녀복장으로 꾸민 매지컬 쿄코다.

"하트를 태우는 새빨간 화염!!
매지컬 쿄코 쇼 타임!!"

관객들의 환호성에 답하며 쿄코는 왼손을 모자에 가져다대며 멋지게 포즈를 취했다.
쿄코의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흰고양이는 마스코트인 '시로네'인가?
퍼포먼스로 입에서 한차례 불을 내뿜곤 팔을 빙빙 돌리며 쿄코가 괴물들과 마주했다.

"그럼 이번에도 얼른 불태워서 해결해결~♬"

"크으...! 드디어 나타났구나 매지컬 쿄코!
하지만 이번엔 네 뜻대로 되진 않을거다~!"

"응?"

알쏭달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쿄코에게 괴물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꺼내들었다.

"자, 보거라!!
오늘은 소화기를 가져왔거든!"

"에에엑~~~!!"

『큰일이다냥~! 이래서야 쿄코의 화염이 꺼지고 만다냥-!』

소화기를 보곤 놀라는 쿄코와 시로네.
정확히는 쿄코와 시로네 역을 맏은 무대 뒤의 성우다.

"큰일이야~! 어쩌면 좋지~?"

볼을 감싸고 당황하는 연기를 펼치는 쿄코의 모습에 괴물들은 득의양양해 우쭐거렸다.

"왓하하하하-!
너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껴라 매지컬 쿄코!
부끄러운 질문을 마구마구 인질에게 해줄테다~!"

"앗! 안돼~!"

...참 무력감이 느껴지는군요.
주로 긴장이 풀린다는 의미로.
역시 아동용이라 그런지 위협도 장난기가 가득한 느낌이다.
드라큘라 분장의 우주인이 힛힛힛 웃으며 인질을 데리고 있는 내쪽으로 다가왔다.

"자아~자아~ 부끄러운 질문을 받을 준비는 되었느냐아~?"

"우...! 괴물같은거 무섭지 않은걸~!"
"부, 부끄러운 질문이라니..."

용감하게도 볼을 푹푹 부풀리며 괴물을 쏘아보는 소녀와 긴장하는 미캉의 모습에 드라큘라는 「호오~?」 하며 미소를 지었다.
양팔을 벌려 크게 망토를 휘날리며 한껏 멋을 부린 드라큘라는 사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 그럼 묻겠다!
너희들의 나이는 몇살이냐?"

"5살!"
"12살요."

"......어라?"

힘차게 대답하는 소녀와 담담하게 답한 미캉의 모습에 드라큘라는 뭐가 그리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분명 여자에게 나이 질문은 금기라고 들었는데...?"

그야 성인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말이죠.
얼빠진 드라큘라의 모습에 피식거리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보다.」「저런 질문이 뭐가 부끄러운거야?」라며 놀려대는 꼬맹이도 있었다.
매지컬 쿄코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연기했다.
뭐, 어린이들에게 저런 질문을 했다고 「그런 비열한 짓을!」이라고 대응할수도 없으니 당연한가.
어리버리한 이미지로 분위기를 완화시킨 드라큘라는 한참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질문이다~! 이상형은?"

"에?"

"어이 드라큘라, 더이상 물어도 의미가 없을것 같은데?"
"에에잇! 여기서 물러설 것 같으냐! 좋아하는 사람을 말해봐~!"

이건...대답 여부랑 상관없이 엄청 부끄러울것 같은데...?
나뿐만이 아니라 두번째 질문을 들은 미캉도 당황해서 허둥대고 있었다.
함께 있던 소녀가 알아채곤 「언니 괜찮아?」라며 걱정할 지경이다.

"잇히히히~~~!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이렇게 해주마~!"

말을 마친 드라큘라는 팔을 뻗더니 내 옆구리를 간질었다.

"아...아하하하하~~~!"

어째서 내가 본보기가...!?
푹푹 옆구리를 찔러대는 통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우스꽝스런 비명이 새어나왔다.
도중에 객석에서 「본격 팀킬하는 악당」이란 수근거림이 들릴 정도였다.

"하...아하하...하아...하아..."

"어때? 봤느냐!"

숨을 허덕이는 내 모습에 의기양양하던 드라큘라는 다시금 소녀들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위협하는 드라큘라에게 당황하는 미캉을 보곤 관객들중 장난기있는 청년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힘내라 거기 소녀! 그런 질문엔 당당하게 대답해버려!」
「혹시 같은 학교 남학생이야?」
「용기있는 사람이 애인을 얻는다구~!」
「내 이름을 불러줘! 내 이름은...」
「「「죽어 변태자식!」」」

...텐션이 높은 녀석들이다.
왁자지껄한 객석의 반응에 드라큘라도 흥이 올랐는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겁주려는듯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자~ 말해봐~
좋아하는 사람은 어디의 누구~?"

미캉의 볼이 빨개졌다.
난처한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는 모양새였다.
어쩔줄 모르는 미캉의 모습에 드라큘라도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했는지 슬그머니 표적을 어린 소녀로 바꿨다.

"자~ 그럼 어디 작은 아가씨 대답부터 들어볼까?
아가씨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

드라큘라의 물음에 소녀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아빠가 좋아~!"

건강한 미소를 지은 소녀의 대답은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완화된 분위기에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소녀의 대답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미캉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아빠같은 사람니다...!"


따라하는것도 여전히 부끄러웠던지 눈을 질끈 감은 미캉의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두 소녀의 대답은 꽤나 부모님들의 마음을 자극했나보다.

「어머머 귀여워라~」
「크으...우리 딸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맞아요. 당신이랑 결혼하겠다고 말한적도 있었죠?」
「애 아빤 좋겠군...저런 귀여운 딸이 있어서.」

아, 소녀의 아빠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고 있다. 화목한 가정이구나.
객석의 반응을 본뒤 적당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판단한듯 매지컬 쿄코는 분한 얼굴로 외쳤다.

"크윽...! 소녀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다니 용서못해!"

『쿄코짱! 하지만 먼저 소화기를 어떻게 해야 된다냥-』

시로네의 말에 쿄코는 결연한 표정으로 객석을 바라보며 간절히 호소했다.

"누군가 매지컬 쿄코를 도와줄 용기있는 분은 없나요~!?"

「맡겨만 줘~!」
「맡겨주세요!」
「......」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세명의 인형이 무대위로 뛰어들었다.
야생의 라라, 오시즈, 야미가 나타났다...! 가 아니라,
오랜만에 보는 하얀색 기본 코스튬의 라라, 닌자처럼 차려입은 오시즈, 평소의 배틀드레스와 비슷한 본디지 패션의 야미가 나타났다.

"라라! 시즈! 야미!
셋이 모여 할로윈 세자매!"

퍼엉-!

대사와 함께 무대에서 폭죽이 터졌다.

머엉...

급작스런 끼워넣기 전개에 황당해져서 무심코 리토랑 하루나가 있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멀찍이서 대화하고 있던 리토와 하루나도 무대쪽을 보곤 벙쪄있는 모습이다.
무리도 아닌가. 친구와 지인이 쿄스튬 차림으로 난데없이 무대에 등장했으니까.
아, 하루나가 리토에게 뭔가 말을 걸더니 이쪽으로 온다.
아무래도 친구들이 무대에 오른 공연이니만큼 구경하는게 예의라고 생각하는걸지도 모르겠다.
리토도 어쩐지 불안한 얼굴로 하루나의 뒤를 따라 공연장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라라가 또 뭔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걱정하는것 같은데, 리토의 표정을 보면 괜스레 나도 불안해진다.

하지만 쿄코가 와-하며 깜짝 놀란 포즈까지 취하는걸 봐선 무대에 나서기 전에 협의한걸까?
쿄코의 '도와주세요'라는 대사와 대기실에서의 감독의 행동을 떠올려보면 셋의 임팩트 있는 등장은 딱히 돌발적인 상황은 아닌것 같다.

"와~~~!! 진짜 쿄코짱이다-!!
대단히 기뻐-!! 친구가 되줘!!"

"에!? 아...응..."

...물론 매지컬 쿄코의 팬인 라라의 저런 행동은 충분히 돌발적인 일이지만요.
라라는 물론 오시즈도 매지컬 쿄코를 직접 보곤 흥분했는지 괴물들에게 등을 돌려서 쿄코만 바라보고 있다.
그나마 남은 야미는 「......」인 상태로 무심하게 괴물들을 바라보고 있을뿐, 둘을 말릴 생각이 없는것 같았다.
결국 손을 맞잡아 오는 라라에게 당황한 쿄코가 애드립으로 겨우 상황을 정리했다.

"그, 그것보다 저 소화기를 어떻게든 빼앗아야 해."

『그, 그렇다냥. 매지컬 쿄코가 싸우기 위해선 악당들이 들고있는 소화기를 뺏어야 된다냥-!』

소화기 이전에 인질은 괜찮습니까?

어차피 아동용 프로인데 태클거는 내가 어쩐지 서글퍼 보인다.
내 허풍에 딴죽을 걸다가 머리를 감싸쥐던 리토의 심정이 이랬던걸까?
그냥 편하게 지켜보는게 나을지 모르겠다.
악당중에 배신자가 있거나, 소화기를 뺏은후 인질도 구출하거나 어떻게든 인질이 풀려날테지.
그런데...이상하게 괴물들이 너무 조용하다?

의아해서 괴물들을 둘러 보니까 다들 뻣뻣하게 굳어있다.

"(데, 데빌루크의 공주!)"
"(우주 제일의 암살자 금색의 어둠이잖아!)"
"(예쁜 소녀들을 섭외했다더니, 우릴 죽일셈인가 감독...!)"

아니, 그러니까 암살업은 이미 폐업했다니까요.
우주 마피아를 잡을때 함께 힘을 합쳤으면서도, 아직까지 둘의 공포스러운 이미지는 우주인 아저씨들 사이에 남아있었나보다.

"(적당히 맞아주고 쓰러지라니...잘못 맞으면 죽는다고!)"

...확실히 죽겠군.
장난으로라도 저애들이랑 주먹다짐을 잘못했다간 큰일나니까.
특히 가끔씩 힘조절이 안되는 라라랑, 실수로 컨트롤을 실패해서 폭주하는 오시즈, 징계엔 자비심이 없는 야미 세명이 한꺼번에 모인 상태다.
더욱이 맞은편에서 엄청 의욕만만한 얼굴로 팔을 휘두르는 라라를 보고 있노라면 아저씨들이 무서워하지 않는게 이상하지.
그냥 설상가상으로 라라가 이상한 기계를 꺼내서 무대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지 않기만을 바라자.

소화기를 뺏는 미션을 성공시키기 위해 작전을 짜려는듯 쿄코는 소화기를 든 괴물쪽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선 소화기만 뺏는게 중요해요.
불꽃만 쓸수 있으면 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알았어! 소화기만 뺏으면 되는거지?"

라라가 대뜸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하자 시로네가 제지했다.

『기다려라 냥. 아무 대책없이 괴인에게 다가갔다간 위험...』

"그거라면 걱정마세요~! 에잇~!"

끝까지 좀 들어라.

시로네의 경고에 오시즈는 걱정말라는듯 닌자복 차림으로 인술을 하듯 묘한 수인을 맺었다.

"어-어-?"

오시즈가 수인을 맺자 괴물의 손에 들려져있던 소화기가 갑자기 괴물의 품을 벗어나 무대 한가운데 붕-떴다.
당황한 괴물들이 어떻게 손을 쓸 틈도 없이 소화기는 하늘을 날아 오시즈의 발치에 가만히 놓여졌다.
네. 다가간게 아니고 염동력으로 가져온거니까 오시즈는 위험하지 않았네요.
다만, 눈에 띄게 당황한 괴물들과 쿄코의 모습을 보면 스토리 전개가 엄청나게 위험!

「대단해!」
「인술이야~!」
「진짜 닌자같아!」
「나○토?」

멋모르는 꼬마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고, 그런 관객들을 바라보며 쑥스러운듯 살짝 혀를 내미는 오시즈의 모습은 확실히 좋은 분위기인데...
이 진행대로 정말 괜찮은건가?

"그...대단하네요...!"

『과, 과연 할로윈 세자매다냥...』

쿄코랑 시로네도 애드립을 하면서도 목소리에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오시즈의 초능력에 당황한 미캉의 모습을 오해한 소녀가 미캉을 격려했다.

"걱정마 언니! 매지컬 쿄코가 분명 우릴 구해줄거야~!"
"아, 으응..."

소녀에게 대답하곤 라라와 야미, 오시즈를 바라보는 미캉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차있었다.
미캉의 심정을 모르는 셋은 어쩐지 의욕만만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했다.

"자, 그럼~! 각오해라 악당들~!"
"정의는 승리합니다~!"
"...이만 끝내도록 하죠."

붕붕 팔을 흔들며 나서는 라라, 닌자복 차림으로 검을 들고 멋들어진 포즈를 취하는 오시즈, 사람의 시선에 노출되는게 거북한지 빨리 공연을 마무리 하려는 야미.
그 기세에 밀려 괴물로 분장한 우주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걸음씩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놔뒀다간 「매지컬 쿄코 할로원 특집」이 아니라 「할로윈 세자매의 대활극」으로 제목이 바뀔판이다.
미처 셋을 말리지 못하고 「아...저기...」하며 허무하게 허공에 손을 뻗는 쿄코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 주저없이 다가오는 셋의 모습에 긴장이 달렸다.
인질이 있는데 왜 이렇게 태연한거야 저 셋은?
겉으론 착해보이는 분홍 토끼 인형씨가 잡고 있으니까 인질이 인질로 생각되지도 않는건가?
이대로 뒀다간 극이 엉망이 될것 같아, 인질이 있는걸 강조함으로써 잠시 대치상태를 만들기로 결심하곤 호흡을 가다듬었을 때, 드라큘라가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자, 잠깐만 타임~!"

멈칫.

다가오던 셋이 걸음을 멈추자, 드라큘라는 날카로운 눈으로 셋을 쏘아보았다.

"후, 후후후....이대로 우리가 쉽게 당할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우주인 아저씨들이 전부 드라큘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드라큘라는 장엄한 표정으로 나와 인질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인질극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셈일까?
진지한 얼굴의 우주인들의 모습을 보아하니, 방금전의 돌발 상황 속에서도 우주인들은 프로다운 노련함으로 적당한 애드립이 떠올랐나보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고 있는데 다가온 드라큘라는 난데없이 내 손을 잡았다.
인질들을 데리고 의아해하는 날 무대 한가운데 세운 드라큘라는 짧은 기합과 함께 내 등을 쑥 떠밀며 외쳤다.

"자! 해치워주세요 보스!"

......

"에에에에에에~~~~~~?"

「「「에에엑---!?」」」



"최강의 계통이 뭔지 알고 있나? 미스 쿄코."

"그야 물론 타오르는 정열의 불이죠."

"유감스럽지만 틀렸다."

"에~? 거짓말~!"

"훗...보여주지! 한호흡에 모든걸 날려버리는 바람이야 말로 최강의 계통인것을!"

다음화 - 「결전! 쿄코와 할로윈 세자매와 질풍의 늑대토끼씨」편!

모두모두 기대해주세요~!



지금쯤 아버지와 알콩달콩하며 개발일로 바쁘실 어머님.
친분있는 분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맡게된 소자는 난데없이 악의 조직의 보스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빨간 리본이 어울리는 귀여운 분홍 토끼옷 차림으로 말이죠...

정신이 날아갈것 같은 상황에서, 쿄코와 할로윈 세자매와 관객들의 경악하는 모습에 간신히 이성을 찾고 고개를 돌려 우주인들을 바라보았다.

"보았느냐! 이분이 바로 우리 토끼단의 보스인 토끼씨다!"
"믿겠습니다 보스!"
"후후, 순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악역비도의 대악당이라고!"

토끼단은 또 뭐요? 어째서 난데없는 도우미 토끼씨 악당설?
동심은 소중하다면서요!
객석에 앉은 아이들의 동심이 파괴되는게 보이지도 않아요?

「그러고보면 요즘 흑막같은 보스들은 죄다 존댓말을 쓰잖아?」
「게다가 귀엽잖아. 미형 악역에도 딱맞아!」
「공중에 떠올랐을때부터 보통이 아니었어!」
「토끼씨 대단해~!」

...요즘 애들은 반전을 좋아하네요.
관객으로 있는 아이들의 눈이 흥미진진하게 바뀐게 느껴질 정도다.
나로선 지금의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내 등을 떠밀듯 받치고 있는 드라큘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대체 이게 무슨 전개에요?)"

"(저 세명을 상대하긴 우리도 싫다구! 저애들이랑 친한 네가 나서서 어떻게 좀 해줘.)"

그렇다고 난데없이 해결사로 내세우지 마세요!

"(저번에 마피아 잡을때도 희한한 계획 잘만 세웠잖아?)"

사전에 계획세워서 상대하는거랑, 실시간으로 대처해야 하는거랑 같습니까!?
관객석에서 한껏 기대로 가득찬 시선을 보내오는 꼬마들을 보니, 여기서 물러난다는 선택은 불가능한것 같았다.

"(원래 전개는 어떻게 되는건가요?)"

"(저 셋이 인질을 구출하면서 퇴장하고, 보스인 크라켄씨가 등장해 매지컬 쿄코랑 대결하는 거야.)"

힐끗 무대 커튼 뒷쪽을 보니 집채만한 덩치의 크라켄씨가 외눈을 깜빡이며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라라, 야미, 오시즈가 두려운듯 크라켄씨는 금세 무대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결국은 어떻게든 저 셋을 무대에서 내려오게 해야 하는 거로군...
해결책을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대위에서 좌측엔 드라큘라를 비롯한 우주인들, 인질역인 소녀와 미캉, 그리고 풍선에 사탕바구니를 들고있는 나.
무대 우측엔 쿄코와 시로네, 라라, 오시즈, 야미.
관객석엔 아이와 함께온 부모님들과 그외 사람들. 그리고 무대가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오는 리토와 하루나가 보인다.
...좋아. 이걸로 간다.
드라큘라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저 셋을 무대에서 퇴장시키면 되는거죠?)"

"(맞아. 그후엔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부탁할께.)"

"(그럼 아저씨의 망토를 잠시 빌려주세요.)"

"(? 그래.)"

드라큘라에게 망토를 건네받아 목에 두르곤 숨을 들이쉬었다.

"(아저씨...)"

"(왜?)"

"(나, 이 공연이 끝나면 솜사탕을 사먹을거에요...)"

"(야, 너 그거 사망플래그...)"

혹시나 중간에 실패해도 절 탓하지 말라구요?
드라큘라의 손을 치우곤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라라, 야미, 오시즈, 쿄코를 마주보곤 뽐내듯 가슴을 펴며 입을 열었다.

"후후후...할로윈 세자매가 나선 이상, 저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순 없게 되었군요~"

"어? 토끼씨가 흑막이었어?"

여러분이 등장한 직후 흑막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렇답니다~? 제가 바로 악의조직 토끼단의 보스 토끼씨에요~"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우아하게 웃는다.
가끔 보아왔던 사키 선배의 웃음소리를 흉내내곤 거만한 포즈를 취했다.

"매지컬 쿄코를 골탕먹이기 위해 가져온 소화기를 빼앗는 멋진 활약은 잘 봤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이걸로 무대에서 내려와주셔야 겠군요."

"어림없어~!"
"토끼씨를 정의의 길로 이끌고 말겠어요!"
"......"

나름대로 무대 퇴장 의도를 강조를 했지만, 의도를 이해한건 야미뿐인것 같다.
...정말 이해했을까?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지라 솔직히 좀 불안하다.

"폭력같은 야만적인 행위는 좋아하지 않아요."

말을 하면서 자연스레 한걸음 앞으로 이동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좀더 이야기로 시간을 끌자.

"후후, 전 말이죠... 싸움에도 미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우아하고 스마트한 대결이야 말로 소녀를 위한 싸움이 아닐까요?"

"...흥미로운 지적이군요."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한걸음 더 내딛는다.

"그래서 제안을 하죠...매지컬 쿄코."

"네?"

갑작스레 불려 놀란 쿄코에게 말을 건넸다.

"토끼단의 보스인 저와 마법소녀들의 리더인 쿄코 당신과의 계약입니다.
지금부터 저와 여러분 중 '우아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패배를 인정하고 얌전히 무대에서 물러나는 것으로...어때요?"

"우아함?"

"저만의 미학인 우아함을 꺾는다면 저의 패배를 인정하고 인질들을 풀어주도록 하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쿄코.
갑작스럽게 이런 조건은 확실히 받아들이기 힘든가?
쿄코가 좀더 신뢰할수 있을 조건을 내걸어야 할까?

"믿어도 좋아요. 약속하죠.
제 역할에 맹세하고, 지키고싶은 소중한 것에 맹세하고, 응원하고 있는 누군가에 걸고 맹세하죠."

공연의 도우미로서 맹세하고, 지켜보는 아이들에 맹세하고, 매지컬 쿄코에 맹세한다.
매지컬 쿄코의 공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될수 있도록.

내 말에 쿄코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그리곤 결심한듯 쿄코는 평소의 매지컬 쿄코로 돌아와 연기를 계속했다.

"패배한다면 순순히 인질을 놓아주는거지?"

"물론이죠."

천천히 전진을 계속한다.
이제 곧...가까워진다.

"좋아~! 그럼 그 승부, 받아들이겠어!"

"좋습니다. '최후의 한사람'이 남을때까지 이 계약은 계속될 것입니다."

드디어 녀석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크..."

무심코 토끼씨에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토끼씨?"

"악마와의 거래는...언제나 불공정하지."

"무슨..."

"매지컬 시즈."

"네?"

"당신의 패착은 단 하나, 시로네가 '고양이'라는 사실이지."

"에?"

「그르르...」

「마론?」

"히익...!"

객석 한쪽에서 난데없이 들린 으르렁거림에 오시즈가 움찔거렸다.
어느새 공연을 보러 무대 가까이 도착한 리토와 하루나의 걸음이 멈췄다.
하루나의 애완견인 마론이 고개를 들어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마침내 쿄코의 곁에 있는 시로네를 발견한 마론이 크게 짖었다.

「왈-!왈-!」

「마, 마론?」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우르르...!

비명을 내지르는 오시즈를 따라 무대가 작게 떨린다.
패닉상태에 빠진 오시즈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오려는듯 머리에서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지금!

재빨리 거리를 좁혀 주저앉은채 떨고 있는 오시즈를 팔로 감쌌다.

"(걱정말아요 아가씨...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며 분리되려던 오시즈의 영혼을 다시 몸 안으로 집어놓곤 오시즈를 진정시켰다.

"...아...?"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오시즈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자리에 일어나 얼떨떨해하면서 머리를 매만지는 오시즈를 일으켜세웠다.
그동안 하루나도 마론을 진정시켰는지 마론도 더이상 짖지 않았다.

"후후...방금전 모습은 우아하지 못했어요.
아쉽지만 매지컬 시즈는 탈락이군요."

"저기...토끼씨는..."

뭔가 말하고 싶은듯 주저하는 오시즈의 입가에 살짝 손가락을 대며 웃었다.

"(소녀의 비밀은 캐묻는게 아니에요.)"

전 소녀가 아니지만요~

"그럼 매지컬 시즈씨, 공연이 끝나고 만나도록 해요."

석연치 않은듯 고개를 갸웃하며 무대 한쪽으로 퇴장하는 오시즈를 보내곤 남은 사람을 확인했다.
다음은...라라의 차례군.

"우아함을 가꾸기 위해선 아름다운 옷도 중요하죠.
매력적인 옷차림으로 이성의 호감을 얻을수 있으니까요.
매지컬 라라씨는 얼마나 멋진 패션 센스를 가지고 있을까요?"

"에? 지금 이 '드레스 모드'론 안돼?"

"...어, 어떨까요..."

드레스 모드? 저게?
확실히 비범한 패션이긴 하지만 아름다움은 커녕 SF적인 면모만 부각시키는 패션인데?
우주인의 괴악한 패션 센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쫄쫄이 타이즈를 입은 변태가 은하제일의 패션남이라고 자칭하는게 우주인들이니 원...

"자, 매지컬 라라!
당신의 패션 센스로써 당신만의 우아함을 보여주시죠."

"좋아~ 잘보라구?"

- 폼 체인지!

"어때?"
"...남성정장이네요."
안경까지 쓴게 제법 귀엽게 보이긴 하다.

"이건?"
"여경? 매니아들은 좋아하겠군요."
그냥 코스프레 같다. 다만 꼬리가 허벅지를 휘감고 있는 모습은 꽤나 섹시해보이네요.

"쨘!"
"바니걸? 아이들 정서에 나쁘니 바꿔주세요."
「저게 진짜 여자 토끼지!」라고 외치는 몇몇 늑대같은 남자들은 옆에있던 여성에게 옆구리를 꼬집혔다.

"이런건?"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것 같네요."
고질라 슈트를 뒤집어쓴 차림으로 괴수물 찍으면 딱 좋겠다.

"얍~!"
"석기시대라면 충분히 먹히겠는데요?"
돌도끼에 공룡뼈 투구?

"계○권!"
"...그건 히로인이 아니고 히어로 아닙니까?"
에네○기파라도 날릴 기세로군.

「만능 코스튬 로봇」이란 호칭에 걸맞게 페케의 폼 체인지는 끝이 없었다.
이국적인 외모의 미소녀가 마치 중국의 변검(變瞼)마냥 순식간에 옷을 변화시키는 화려한 볼거리에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런 관객의 반응에 심취했는지 라라도 즐거워져서 원래의 목적을 잊은듯 계속해서 폼 체인지를 시도했다.
그리고...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스르르-

"어라?"

라라가 입고있는 옷에서 조그만 구멍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되었군...

『면...면목없습니다 라라님...』

"페케?"

『연속 폼 체인지로 에너지가 다 된듯 합니다...더이상은...』

"이걸 걸쳐요."

"토끼씨?"

방금전 드라큘라에게 받았던 망토를 벗어 라라의 몸을 감싸준다.
조금씩 옷이 사라져가는 라라의 모습에 황급히 무대로 올라오려던 리토가 멈칫했다.
침착하라구. 적어도 여자아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앞에 쬐게할만큼 무신경하진 않으니까.

"(무대뒤의 여성 대기실에서 옷을 받아 입도록 하세요.)"

귓가에 작게 속삭여준뒤 망토를 두른 라라를 놓아줬다.

"후후, 이걸로 매지컬 라라도 탈락입니다.
다음에 만날때는 좀더 우아함을 가꾸도록 하세요."

그럼...이젠 야미만 상대하면 되는건가?
라라를 보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내게 야미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당신은...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이로군요."

"......"

들켰나?
역시 페케의 폼 체인지에 대응하는 모습은 그런 의혹을 일으킬 소지가 컸나보다.

"공원에서 보여준 트릭...
적들이 당신을 보스로 내세운것.
그리고 오시즈와 폼 체인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
당신은 혹시..."

"네네~ 거기까지~"

손을 들어 야미를 제지한다.

"이해가 빠른 아이는 싫어하지 않아요 명탐정씨.
하지만 그렇게 남의 정체를 폭로하려는 태도는 세련되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

"후후...지금건 우아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굳이 따지진 않겠습니다.
아, 하지만 이것으로 얌전히 물러나 주시는것도 저로선 환영이랍니다?"

야미가 '무대 퇴장'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좋지만, 그런게 아니라도 야미를 끌어내릴 수단은 있으니까.
게다가 야미도 공연도중 보여준 모습으론 라라와 오시즈에 이끌리다시피 무대에 선 분위기라 무대에서 퇴장시키는데 별 어려움은 없을것 같다.
낮게 웃는 내 모습에 야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 앞에 마주섰다.
그리곤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양손을 쑥 내밀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트릭 오어 트릿(Trick or Treat)?"

"...네?"

"할로윈이니까요."

어리벙벙한 내게 야미는 작게 입을 움직였다.

"(프린세스와 오시즈가 탈락한 이상 저도 여기 머무를 이유는 없습니다.)"

아아...꽤나 깔끔하게 물러나는 방식이군.
얌전히 사탕 바구니를 야미에게 내밀었다.
사탕 바구니를 손에 든 야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봉지를 뜯어 사탕을 입에 넣으며 야미가 말했다.

"할로윈 사탕을 받았으니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도록 하죠.
당신의 정체를 밝히는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야미는 어깨에서 커다란 백색 날개를 생성해 펼쳤다.
「와아~!」하는 아이들의 환호성 속에 야미는 사탕 바구니를 든채 날아올랐다.
이걸로 야미도 무사히 퇴장이구나.
겨우 한숨 돌렸다며 안도하던중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뭔가 잊은것 같은데...
의아하게 생각하며 날아오르는 야미를 보다가 야미가 막 뚜껑을 따고있는 캔이 눈에 들어왔다.
...저건 쿄코가 줬던 탄산음료잖아아아아아!?

"잠깐만요~! 그건 내꺼...!"

"큽!?"

푸화악-!




야미가 음료를 한모금 입에 머금은 뒤, 갑자기 야미의 입에서 폭발하는 기세로 거품이 튀어나왔다.

"쿨럭...!"

난데없는 해프닝과 함께 뱅글뱅글 돌며 무대위로 떨어지는 야미를 황급히 받아들었다.
야미와 함께 떨어진 사탕바구니속의 사탕들이 무대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품에 안긴채 탄산음료 거품이 묻은 입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거칠게 기침하는 야미.
남의 음료수를 뺏어먹는 대가라고 하기엔 기침을 멈추지 못하는 야미의 모습이 불쌍하다.
토끼탈을 쓴 내 머리의 그림자에 얼굴이 가려진 야미가 힘들게 나를 올려봤다.

"야, 야미씨? 괜찮아요?"

"쿨럭...당신...! 대체 뭘 넣은...!"

누가 들으면 내가 무슨 신세계의 신마냥 당신을 암살하려 한줄 알겠습니다.
토끼탈을 손으로 밀어내며 비틀비틀 일어서 날 노려보는 야미에게 애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사탕이랑 탄산음료는 함께 먹으면 위험하답니다~?"

"큽...! 이 원한은 반드시...!"

기침을 멈추지 못한채 뭔가 악당같은 대사를 남기고 야미는 황급히 무대를 떠났다.
난데없는 추태가 벌어진 무대에 벙쪄있는 관객들의 모습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어찌됐건 의도한 세명의 탈락은 성공했으니까...

"계, 계획대로...일까나?"

애매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관객을 바라보자 관객들이 너도나도 수근거렸다.

「악마다...귀여운 외모를 하고선 태연하게 저런 짓을!」
「두뇌파 악역?」
「과연 보스...! 혼자서 세명을 전부 물리쳤어...」
「이제 남은건 매지컬 쿄코 뿐인데...괜찮은건가?」

술렁거리는 관객의 반응.
저정도면 그다지 문제는 없으려나.
원래라면 마스코트 도우미였을 토끼인형에게 속으로 애도를 표하며 슬슬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그럼 인질들을 처리해볼까요?
드라큘라씨, 두 아가씨를 데려오세요."

"아...네! 보스!"

드라큘라가 데려온 소녀와 미캉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양옆에 세웠다.

"후후...어떠신가요 매지컬 쿄코?
믿고있던 세 마법소녀들의 패배한 모습은?
아~아~ 이렇게 인질도 아직 우리에게 있는 상태인데 말이죠~"

"크윽...!"

분한듯한 쿄코의 앞에서 인질의 어깨에 올려둔 손을 치우곤 과장되게 양팔을 벌린다.

"후후...인질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되시나요?
간지럽힘 형벌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하답니다?
저조차도 간지러움을 참지 못할 정도니 말이죠~!"

자, 제발 깨달아라 소녀! 미캉!

「언니~! 옆구리야!」
「옆구리를 간질이라고!」
「푹 찔러-!」

내 말에 힌트를 얻었는지 벌써부터 관중석은 옆구리를 찌르라고 외치는 꼬마들로 시끄럽다.
뭐, 관객의 소리는 못들은체 해주는게 무대에 선 사람으로서의 의리지.
관객들의 외침에 소녀와 미캉은 눈을 마주치곤 그대로 내 옆구리를 힘껏 간질였다.

"아하하하하하~!
그렇게 찌르면 안돼에에에~~~~~~!"

퍼펙트다 소녀들! ...근데 이거 진짜로 간지럽잖아!
옆구리를 사정없이 자극해오는 간지러움에 온몸을 뒤틀며 배배꼬다가 뭔가를 밟곤 앞으로 미끄러지며 힘찬 슬라이딩을 했다.

"에에엣!?"

꽈아앙---!!!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가까워진 무대 바닥에 호쾌하게 안면을 충돌시키며 심상치않은 소리가 발생했다.

「...방금 무지 아픈 소리가 났는데?」
「기절했나?」
「괜찮을까 토끼씨?」

괜찮습니다.
악역인데도 걱정해주는 관객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지만 아직 상황 파악이 안된 상태라 혼란스러운 상태다.
대체 뭐를 밟고 이렇게 미끄러진거야?
납작해진 개구리마냥 뻗은 포즈로 바닥에 엎어져있으며 생각하던중 무대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사탕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미가 떨어뜨린 사탕바구니에서 쏟아져나온 사탕을 밟은거였군요.

"저...괘, 괜찮으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매지컬 쿄코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캉과 소녀는 이미 매지컬 쿄코의 뒤로 이동한 상태로 이쪽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다.
간지럼태움을 당하면서 예상치못한 해프닝을 당했지만 이걸로 모든 상황은 정리되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나의 퇴장뿐이다.

"크, 크윽...!
내가 이런 보기흉한 모습을...핫...!?"

부들부들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리다가, 마치 뭔가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놀란 어조로 입을 가렸다.
과장되게 경악하는 내 모습에 매지컬 쿄코도 깨달았는지 팟-하고 삿대질 포즈를 취하며 선언했다.

"그렇군요! 이것으로 우아함을 잃은 당신의 패배입니다!
인질도 풀려났으니 이걸로 승부는 결정되었습니다!"

원래라면 간지럽힘을 당하면서 보인 추한 꽈배기 댄스 때문에 우아함을 잃는다는 전개를 생각했었지만,
야미가 떨어뜨린 사탕으로 훨씬 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한덕에 쿄코의 말은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인질도 풀려났으니 이 상황에서 악당에게 남은 길은 하나 뿐이지.

"큭! 이, 이건 무효야! 나는 지지 않았어!"

"승부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거야 당연하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미학인 우아함을 스스로 더럽힌다.
모순에 빠진 악당들의 전형적인 파멸 패턴이지.
그리고 슬슬 무대 구석에서 구경꾼 노릇을 하고 있는 우주인들을 주연으로 들어올려 줘야 한단 말씀.

"이대로 질순 없어...!
나와주세요 최종보스 크라켄씨~!"

{쿠오오오오---!}

"뭣!?"

나의 외침과 함께 무대 뒷쪽에서 대기하던 크라켄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아하하하하~! 알지 못했나요 매지컬 쿄코씨~?
보통 두뇌파 악역은 2인자라는것을 말이죠~"

삼류 반전 같은 대사를 내뱉곤 무대 가운데로 이동해온 크라켄씨와 자리를 바꿨다.

"후후...진짜 보스께서 나타난 이상 전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배틀쪽은 자신이 없거든요~"

살짝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는 우주인들에게 브이 사인을 날리곤 슬그머니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걸로 나도 무사히 무대 퇴장에 성공했군.
쿄코의 박력있는 외침과 괴물들의 아우성이 무대커튼 너머로 들려온다.
이제부턴 주역들의 시간이다.




"그래서 말야~ 매지컬 쿄코랑 함께 무대에 올랐다?"

"헤에~? 인기 아이돌인 키리사키 쿄코랑? 대단한걸 라라찌~!"

월요일 아침부터 들떠있는 라라로 인해 교실은 한창 활기가 넘쳐흘렀다.
쉬는시간 라라가 공연 상품으로 받은 시로네 인형을 들고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즐겁게 리사와 미오에게 주말의 일을 얘기했다.
함께 있었던 리토, 하루나, 오시즈도 옆에서 말을 거들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걸 지켜보던 중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왜 저리 들떠있는거야 라라는?"

"응? 아, 룬이구나."

옆반에서 놀러온 룬이 떠들석한 반 분위기에 궁금한 표정을 짓기에 설명해줬다.

"매지컬 쿄코와 만났거든."

"매지컬 쿄코?"

"아, 키리사키 쿄코라고 TV에 자주 나오는 여고생 아이돌 말야.
주말에 유우키랑 공원에서 매지컬 쿄코 공연을 보고 함께 상품도 받았다고 하더라고."

"리토군도?"

"듣기론 둘다 대기실에서 직접 만났다던걸?
아이돌을 만난거라서 그런지 유우키도 좀 긴장했다나봐."

"쳇...쿄코란 애보단 내가 훨씬 더 예쁜데. 리토군 바보..."

룬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투덜댔다.
질투하는구나.

"뭐, 너도 확실히 아이돌 같은 외모긴 하지."

속은 좀 시커멓다만.

"너한테 물은거 아니거든요?"

...아, 그러십니까.
칭찬을 해줘도 까칠하다니깐.

목욕탕 사건 이후론 나를 대하는 룬의 반응이 조금 예민해졌다.
이런저런 해프닝으로 못볼 꼴을 몇번 봐서 그런지 룬은 나와 대화중엔 내숭떨기를 그만둔것 같다.
대놓고 날 수염이라고 불렀을 땐, 룬의 평소 행동과의 괴리감에 내 머리가 띵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리토앞에서처럼 얌전떠는 고양이 흉내를 내진 않아서 확실히 대화하기엔 속이 편했다.
내숭의 결정체같은 룬이 틱틱대는 반응이 신선하기도 하고 말이다.

"라라찌랑 시즈랑 야미야미가 참가했는데 잘도 무대가 안무너졌네~?"

무너지는걸 전제로 얘기하는거냐 리사...
확실히 위기 상황이긴 했다만.

"아 그거? 어쩐지 모르겠지만 토끼 인형한테 라라랑 야미, 오시즈가 당해버렸어.
우아함이라든가 뭐라든가 희한한 이유로...어째 나르시즘에 빠진 악역 같더라구."

"나중에 설명을 들었는데 원래 우린 소화기만 뺏고 퇴장해야 했대요."

"우우...그래도 오시즈짱만 활약하구...
나도 매지컬 쿄코랑 힘을 합쳐 괴물들을 쓰러뜨리고 싶었는데..."

"아하하~ 그랬다면 공연이 엉망이 되었을껄 라라찌~"

동감. 잘못하면 악당역을 맏은 분들이 병원신세를 지게될수도 있으니까.
극소규모로 회오리를 일으키는 '고고 바큠군' 같은 발명품이라도 하나 꺼냈다면 난장판이 됐겠지.

"그런데 토끼씨는 누구였을까?"

"무대를 수습하는 역할 같았는데, 요즘 도우미는 그런 역할도 하나봐?"

"라라찌랑 시즈, 야미야미를 상대로 잘도 연기를 했네."

"역시 배우들은 애드립의 수준이 다른걸까?"

"그러고보면 야미짱은 뭔가 알고 있는것 같았지만 대답해주지 않았어.
할로윈 데이가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던데?"


"......"

"수염? 왜그래?"

"아, 아니...갑자기 오한이..."

식은땀이 멈추질 않는다.
할로윈까지 며칠이나 남았지?
설마 진짜로 들킨건 아니겠지...?

"귀신의 집의 멤버가 아닐까? 우주인들과 서로 아는 사이 같았잖아.
라라랑 시즈에 대해 아는것 처럼 보였고."

"하루나찌도 봤어?"

"응. 마론을 산책시키다가 라라가 보이길래...
마론 때문에 놀란 시즈를 토끼씨가 진정시키면서 공연으로 자연스럽게 이어갔어.
그정도로 자연스럽게 할 정도면 돌발상황에 대처하는데 익숙한 배우가 아닐까?"

"그렇죠? 어쩐지 굉장한 여성이었어요."

"응? 여자였어 시즈?"

"네. 목소리도 그렇고 저한테 스스로를 소녀라고 칭하던걸요?"

"여자였구나...그럼 우주인 아저씨들은 아니겠네."

"어조랑 화법을 보면 우아한 분위기의 여성이 아닐까요?
자기 입으로 우아한걸 즐긴댔잖아요.
싸움이랑은 인연이 멀다고 했고요."

"그건 그냥 연기일수도 있잖아."

오시즈는 음성 변조기에 대해서 모르나보다.
오시즈를 탈락시킬때 속삭이듯 얼버무린 거짓말을 오시즈는 그대로 믿고 있는지 토끼씨가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토끼씨에 대한 추측들은 멋지게 표류하고 있다.
다행이구먼.

안도의 한숨을 쉬곤 어제의 사건을 마음속에 정리할 겸 공책 사이에 끼어 있는 사진을 살짝 꺼내보았다.
공연후 선물받은, 쿄코의 친필 사인이 쓰여진 매지컬 쿄코의 사진.
왼쪽엔 붉은 모자, 망토, 장갑, 부츠를 신고 흰색 블라우스와 파란 체크무늬 교복치마를 입은채 입가에서 작게 불을 뿜으며 이쪽을 바라보는 쿄코.
그리고 오른쪽엔 붉은 브로치를 뗀 채 가슴을 드러내며 풀어헤쳐진 블라우스와, 팬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들어올려진 교복치마 차림으로 부끄러운듯 정면을 응시하는 쿄코.
덧붙여서 왼쪽의 쿄코는 에메랄드빛 팬티, 오른쪽의 쿄코는 레몬빛 팬티다.
...이걸 남학생한테 무슨 용도로 쓰라고 준건지 솔직히 의심이 간다만...
으음...역시 이건 따로 액자에 장식해둬야 하려나.

"그게 매지컬 쿄코야?
야한 사진이네..."

"!? 쉿!"

"응? 매지컬 쿄코?"

황급히 룬에게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매지컬 쿄코라는 말에 반응해서 라라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공책 사이에 끼인 쿄코의 사진을 본 라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거 설마 매지컬 쿄코 사인!"

"키리사키 쿄코의 사인? 진짜?"

라라의 외침에 갑작스레 몰려드는 학생들의 기세에 놀라 미처 공책을 덮지도 못했다.
가슴을 드러낸 쿄코의 사진을 본 리사는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조롱해왔다.

"흐응...아키츠군도 사내아이였구나~?
이런 야한 사진이라니..."

"좋겠다..."

야한걸 싫어하는건 아니지만 그렇게 이성에게 지적받으면 부끄럽습니다 리사씨.
그리고 뭘 그렇게 부럽게 바라보는거야 라라.
쿄코 만났을때 기쁜나머지 사인 받을 생각은 잊었던거야?

"그거 나주면 안돼 료스케?"

"미안하지만 이건 선물받은거라서..."

"우우..."

"라라찌, 그럴땐 미인계를 쓰는거야.
매지컬 쿄코의 것보다 훨씬 굉장한 라라찌의 가슴이라면 아키츠군도 단숨에 함락~!"

"될것 같냐!?"

어떻게 하건간에 선물로 받은걸 남에게 준다는 선택사항은 절대 없다구.

"남자애는 큰 가슴을 좋아해 료스케?"

"그건 사람마다 다른...그러니까 모미오카가 말하는대로 하지 말라고..!"

괜히 어제의 일을 회상한답시고 사진을 꺼낸게 잘못이었다.
리사와 라라 콤비로부터 사인본을 지켜내기위한 분투로 쉬는시간은 그렇게 부질없이 흘러갔다.




"고마워요. 덕분에 공연을 무사히 마칠수 있었어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네요."

역시라고 해야하나, 공연이 끝나고 쿄코에게 정체를 들켰다.
갑자기 사과부터 해오는 쿄코의 모습에 꽤나 당황했었다.
알고보니 토끼씨를 찾아 돌아다니던 쿄코를 본 우주인 아저씨 한분이 알려줬다고 한다.
공원에서 나와 관련된 루머를 내 앞에서 꺼낸걸 신경쓰고 있는듯 해서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딱히 쿄코 자신이 험담을 늘어놓은것도 아닌데 그런 일로 화를 낼만큼 속이 좁진 않았다.
토끼탈을 벗은 내 얼굴을 본 쿄코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곧 편하게 말을 건네왔다.

"공원에서 보여준 트릭은 알것 같아요.
닌자옷을 입었던 여자애의 마술이죠?"

"그런셈이죠."

두번이나 오시즈의 초능력을 봤으니 떠올리지 않는게 이상하겠지.

"그럼 제 트릭은 풀었나요 아키츠군?"

"글쎄, 어떨까요...?"

어쩐지 기대하는 눈초리로 쿄코가 응시해온다.
자신이 우주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챈건지 알고싶은걸까?
하지만 쿄코가 우주인의 혼혈이란걸 일부러 아는체해서 쿄코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다.
벗어두었던 토끼인형탈을 다시 뒤집어쓰는 내모습에 쿄코가 갸우뚱할때, 토끼탈의 입 부근을 검지로 살며시 눌렀다.

"비밀은 말이죠...소녀를 아름답게 한답니다?"

그러니까 딱히 누군가에게 밝힐 생각도 없고 알아도 묵인한다는거지.
토끼탈을 벗자 쿄코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키츠군은 의외로 로맨티스트였군요?"

"꿈 많을 나이니까요."

"그럼...공원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로 우주인이 있다고 믿나요?"

"네."

실제로 만나기도 했고 말이지.

"하지만 막상 우주인을 만난다면 불안하지 않을까요?"

"처음엔 불안하고 두렵더라도, 결국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언제나 호기심으로 다가가는게 사람이죠.
가보지 못한 곳을 가서 처음 접하는 환경에 불안해 하면서도, 이국적인 풍취에 매료되어보고, 알지 못하던것을 알게되면서 사고가 넓어지고 성장해가는 여행처럼요."

사이난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려보면 진짜 우주인을 만나더라도 태평하게 아침 인사를 건넬것만 같다고.
리사랑 미오와 하루나가 라라의 정체를 알았을때의 반응은 진짜 비범했지만.
「외계인과 친구라니 굉장해~!」정도였지 아마?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스런 얼굴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고 쿄코양.

"우주인을 만나게되는 사람들의 반응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걸요?
넓게보면 지구인도 결국엔 우주인이잖아요?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세계도 결국은 지구촌 한가족이라고 불리게 된 것처럼 언젠간 우주인도 그렇게 가깝게 느낄 때가 오겠죠."

나를 응시해오는 쿄코를 마주보며 말을 끝맺었다.
쿄코는 잠시 생각하더니 뒤돌아서 뭔가를 꺼내들고 적기 시작했다.
펜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잠시간 계속된후 쿄코가 다시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주인은 어디에 있을거 같아요?"

"글쎄요...어디에든 있을수 있지 않을까요?
길에서 스쳐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우리가 찾아헤메던 그 일수도 있죠.
혹은 함께 밥상을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는 친구일수도 있고 말이죠."

"...그럼 언제 함께 식사나 하지 않을래요?"

"네?"

"우주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한번쯤은 동갑내기와 함께 식사를 해보고 싶었기도 하고..."

쿄코의 대답에 무심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정말이지, 이 아가씬...
이렇게 나오면 '나 우주인이요'하고 말하는거잖아요.
「당신과 지금 밥상을 마주하며 대화하는 친구는 우주인입니다」라는 노골적인 메시지랑 다를게 없다.
마음을 터놓을수 있는 또래나 같은 고민으로 동질감을 느낄 또래가 없어서 외로웠던걸까?
그러고보면 룬은 아직 아이돌로 데뷔하지 않았지.

"저야 물론 기쁘지만...전 꽤나 소문이 안좋은데 걱정되지 않아요?"

"괜찮아요. 아키츠군은..."

장난스럽게 말하는 나에게 쿄코는 눈을 마주하곤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나, 아이들이 당신에 대해 이야기 하던 내용이나, 오늘 무대에서의 모습을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처음엔 토끼의 탈을 쓴 늑대라고 생각했는데...지금 생각해보면 겉이랑 속이 바뀐걸지도 모르겠네요."

"그, 그렇습니까?"

얼굴을 마주한 쿄코의 시선에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그리고...쿄코로 좋아. 
팬들도 다들 그렇게 부르는걸? 그냥 편하게 말놓아도 돼."

"...그래? 그럼 나도 편하게 대해도 괜찮아."

생각보다 당찬 아가씨라고 생각하곤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부모님이랑 선생님(호네카와 선생님과 미카도 선생님), 친구들 합쳐서 10개 조금 넘게 등록된 번호 목록에 오랜만에 번호가 갱신되었다.
조금만 더하면 20명을 넘을지도...
...힘내자.

"아, 혹시나 말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이 번호 알려주면 안돼?"

"아...조심할께."

쿄코의 말에 번호를 등록하면서 적어뒀던 이름란을 수정했다.
「키리사키 쿄코」라 적힌 부분을 어떻게 고칠까 하다가 「마법소녀」로 고쳐썼다.
쿄코의 경우엔 내 이름 대신에 「토끼씨」라고 번호에 입력했다.
쿄코 왈, 아키츠 료스케라는 이름은 적어도 도내 학생들은 알고 있다기에 위험하단다.
...도내 깡패들이 아니고?

번호를 교환한 뒤 시계를 확인하던 쿄코가 일어섰다.

"그럼 이만 가볼께. 다음 일정이 잡혀 있거든."

"아이돌은 힘들구나...
벤치에서도 말했지만, 언제나 응원할테니 힘내."

"고마워. 아, 그리고 이건 내 사인본~!"


쿄코는 방금전 끄적이고 있던 물건을 내게 건냈다.

"내 사진이야. 소중히 여겨줘~"

"물론~!...인데 이거 좀 야하지 않아!?"

건네진 사인본 사진 오른쪽엔 쿄코의 반누드가 찍혀 있었다.
무슨 그라비아 사진도 아니고...!
벙쪄있는 내모습에 쿄코가 킥킥거렸다.

"아하하~ 사내아이들은 그런걸 좋아하잖아?"

"...어쩐지 엄청 기분이 들뜬것 같은데?"

"아, 역시 그렇게 보여?"

"뭔가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어?"

"글쎄? 후후...한번 생각해봐~"

미소를 지으며 쿄코는 분장실로 떠나갔다.
곤란한 장난을 당했다고 생각하곤 사진을 쳐다보았다.
남들 앞에 보이기 곤란한 사인본을 대체 어떻게 숨겨서 집까지 들고 간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이리저리 살펴보던중 뒷면이 보였다.
응? 이건...




"그러니까아~! 이 사인은 안된다니까아아아~~~?"

몸을 바짝 밀착해서 사진에 손을 뻗으려는 라라에게 뒷걸음질치면서 물러났다.
누누이 지적하지만 제발 속옷 좀 입어라!

"얍~!"

"앗!?"

탓-!
라라의 육탄공격에 밀려 뒤로 물러나던중 리사가 잽싸게 사진을 뺏어들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리사가 두손가락 사이에 사진을 끼우곤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거 없잖아~
역시 아이돌의 사인본은 소중한거야?
아니면...설마 키리사키 쿄코한테 직접 받기라도 한거야~?"

"그, 그럴리가 있나...!
선물받은 사인이라서 줄수 없는 거라니까?"

"야한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그런걸 말하지마!"

어조까지 바꿔선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하는 리사에게 황당해져서 버럭 소리가 나왔다.
팔랑거리며 사진을 흔들던 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뒤에 뭐라고 적혀 있는것 같은데?"
"뭔데뭔데~?"

"야!? 그거 읽으면 안돼!?"

"에~ 째째하게 굴지 말라고~ 어라?"

리사의 손가락 틈에서 흔들리던 사진은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창밖으로 날려졌다.
팔랑거리며 하늘높이 날려가는 사진에 기겁하면서 몸을 던졌다.

"으라앗~!"

휙-!

"잡았다! ...응?"

발밑이 허전하다...

「「「아키츠군!?」」」
「료스케!?」「수염!?」

"우와아악!?"

교실에서 이런식으로 추락하는건 3년만이네요.
경악하는 학급 친구들을 보며 작게 푸념을 내뱉곤 사진을 잡은채 학교 뜰로 떨어져내렸다.




최고의 응원이었어요
멋진 늑대씨

- 키리사키 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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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삽화는 터틀러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삽화를 추가로 수정해서 보내주셨네요. 연재가 지지리도 늦는데 면목 없으면서도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수정전 삽화]는 링크로 걸어두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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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_-;;;
사이난 퀘스트 편이 시작하기전에 매지컬 쿄코를 등장시키고 싶었을 따름인데 이렇게 질질 끌게 될줄은...--;;
오리지널 스토리는 우라지게 사람의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군요...OTL


그리고...
지난해 말부터 연초까지 축전으로 폭탄 세례를 받아서 엄청 기쁘네요ㅠㅠ
나르샤님, 암천묵시록님, 신이다님, 절삭기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처음으로 료스케를 그려주신, 지금은 군대에 계신 나르샤님 정말로 감사드려요.
바쁘신 와중에도 짬을 내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 훈남으로 그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ㅠㅅㅠ
남은 군생활 무사히 끝마치시길 바랍니다.

탈혼시키는 포즈를 그려주신 암천묵시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귀신잡는 포스가 풀풀 풍겨지는게 작살!=ㅅ=b

수많은 팬아트와 자창게에 3차 팬픽을 올려주신 신이다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엄청난 박력을 보여주는 외모의 료스케와 허리케인 버스터 씬을 그려주신것 정말로 감사합니다+_+
자게의 3차 이야기가 자창게로 왔을땐 정말 놀랐습니다.
킥킥대면서 즐겁게 읽었어요*^^*

팬아트와 함께 19금창작과 일창게에 3차 팬픽을 써주신 절삭기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샤프하고 와일드한 이미지의 료스케에 뻑갔습니다(=w=)b
무시무시한 연재속도로 19금게와 일창게에 팬픽을 써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모두들 축전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
지금까지 즐겁게 읽어주시는 독자분들도 정말 감사드려요ㅠㅠ

정말이지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네요.
그리고 막장같은 연재 속도에 염치도 정말 없습니다...ㅠㅠ
(진짜 통조림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지도...)

암튼...많은 관심 정말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쓰겠습니다!!!m(_ _)m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1.
료스케가 부른 노래는 황당용사 욜라세다(정들면 고향 코스모스장)의 엔딩 개사곡 : '밥상과 우주인'입니다.
한글 개사곡인 이유는 그쪽이 더 이야기 주제에 맞았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빙의령의 덕은 국적을 초월하니까요(...)

p.s.2.위험하니까 탄산음료와 멘토스를 함께 먹지 마세요. 폭발합니다(...) 탄산음료+설탕, 탄산음료+아이스크림도 금지.

p.s.3. 참조 이미지

소녀와 풍선

내용물 따윈 없어(아즈망가 대왕)

우주인의 변장법

오시즈의 원피스 차림

라라의 원피스 차림

미캉의 복장

쿄코의 사복

미캉과 야미의 무대의상

쿄코 등장

소화기에 당황하는 쿄코

라라의 드레스 폼

오시즈의 무대의상

마론을 산책시키러 나온 하루나

개를 무서워하는 오시즈

라라의 폼 체인지

라라의 옷이 사라져가는 해프닝

야미 :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달렸습니다

쿄코의 승리선언(삿대질)

선물받은 매지컬 쿄코 사인본


Posted by 루트(根)
,
올봄의 구교사 괴담을 통해서 학교에 모습을 드러낸 유령 오시즈가 드디어 육체를 얻었다.
미카도 양호 선생님이 제공한 인공육체에 빙의함으로써 육신을 가지게 된 오시즈는, 2-A에 편입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출석부에 등록된 이름은 「무라사메 시즈」.
다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그냥 오시즈라고 부르는지라 개명의 의미가 없어보여 유감이었다.

400년 만에 몸을 가지게 된 오시즈는 행복해 보였지만, 사이난 고교의 짧은 교복 치마 길이가 무척이나 신경쓰이는듯 했다.
이전 하루나에게 빙의했을땐, 즐거운 나머지 그런것엔 신경쓰지 못했다고...
부끄러워하는 오시즈가 쭈뼛쭈뼛하며 치마를 부여잡는 동안, 남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설레임으로 가슴을 부여잡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장발이 어울리는 단아한 외모의 소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소년들의 마음을 자극했나보다.
다리가 드러나는 상황을 부끄러워하던 오시즈는 결국 치마 아래에 검정 스타킹을 입어 맨다리를 가렸다.
그리고 이전을 능가하는 남학생들의 폭발적인 반응.
검정 스타킹에 집착하는 녀석들이 그렇게 많을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특히 교장선생님.「스타킹을 신은 그 발에 밟히고 싶어~!」라니, 순진한 아이한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겁니까?

아무튼, 몸을 얻은 오시즈에게 환호하며 달라붙어선 이것저것 만져대던 리사와 미오는, 주말에 오시즈와 함께 상점가에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교복외에 입을 가을철 옷과 더불어, 계절이 지나 할인에 들어간 여름 옷도 함께 구매할 생각인 듯 했다.

리사와 미오의 의견처럼 나도 할인 기간동안에 여름옷 몇벌 정도는 사두는게 좋을것 같았기에,
한가한 주말을 이용해 상점가 쇼핑이나 할겸 나들이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어? 저건...혹시 코테가와?"

운이 좋다면 오시즈나 리사, 미오와 만날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상점가를 향하던 중 멀찍이 앞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숄더백을 왼쪽 어깨에 매고 걸어가는 검은 장발의 여성이었는데, 모양새나 걸음걸이로 보아 코테가와가 맞아보였다.
2년이나 함께 지냈으니 못알아보는게 이상한거지만.
상의에 걸친 숏코트, 미니 스커트와 그 위로 둘러진 골반 벨트(Low-Sling Belt), 무릎 아래까지 오는 롱부츠를 맵시입게 입은 사복차림이 신선해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나 할까 싶어서 발걸음을 조금 빨리하는데 고개를 숙인 코테가와의 낮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건지 작게 투덜거리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평범하게 인사하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기운을 좀 북돋아줄겸 살짝 장난이라도 쳐볼까?
잰걸음으로 코테가와와의 거리를 좁힌후 코테가와의 바로 뒤까지 접근했다.
걸음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접근한뒤, 뒤에서 양손을 뻗어 코테가와의 눈을 가리며 익살맞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얏호~ 누구~게~?"

"꺄아아악!?"

퍽!

"크흡!?"

비명소리와 함께 뒤로 힘껏 내질러진 코테가와의 오른쪽 팔꿈치에 배를 직격당했다.
전해져오는 충격으로 보건데 올해들어 맞은것 중에선 최고로 깔끔한 일격이네요.
배를 부여잡은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웅크린 날 발견한 코테가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키츠군?"

"쿨럭...! 멋진 반격이다 코테가와..."

"노, 놀랐잖아요! 그보다 괜찮은거에요 아키츠군?"

"아아, 괜찮다구..."

허둥지둥하는 코테가와를 진정시키려고 고개를 들다가, 교복치마 정도의 길이(엄청나게 짧다는 의미다)의 미니 스커트 아래로 새하얀 허벅지가 보였다.
주저앉은 상태에서 로앵글로 코테가와를 올려다보는지라 아슬아슬한 스커트 안이 보일것 같아 무심코 침을 삼켰다.

"어딜 빤히 쳐다보는 거에요!"

꾸욱!

"응앗!?"

고성과 함께 코테가와의 손이 내 머리를 꽉 누르자 몸뚱이가 앞으로 쏠렸다.
균형을 잃은 몸이 코테가와의 다리를 밀듯이 쓰러지면서, 코테가와의 몸도 덩달아 뒤로 넘어졌다.

"엣? 꺅!?"
"웁?"

난데없이 뒤로 넘어져 놀란 코테가와가의 허벅지 사이로 내 얼굴이 파묻히면서 남들 보기 민망한 풍경이 벌어졌다.
얼굴에 전해지는 말랑한 감촉에 당황해서 상체를 일으킨순간, 얼굴을 향해 힘차게 휘둘러지는 숄더백이 보였다.

"이 저질!"

퍽!

"컥?"

냅다 얼굴에 꽂힌 숄더백의 충격에 신음성을 흘리며 한탄했다.
가벼운 장난으로 눈가리기나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인건 대체 뭣 때문일까 하고...



"정말이지, 놀래키지 말라구요."

"아야야...미안."

"저기...많이 아팠어요?"

"흠집났어. 이젠 장가갈 수 없게 되어버렸어..."

"...엄살이군요."

어이없다는듯 코테가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농담은 이쯤하기로 하고 코테가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방금전 한숨을 쉬고 있던데, 무슨일이야?"

"들린거에요?"

"응. 뭔가 고민이 있나 걱정되서 말야."

"...오빠 일로 조금..."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코테가와는 오빠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코테가와의 말로는 오빠인 코테가와 유우(19세)는 집에서 단정치 못한 차림으로 돌아다닌다고 한다.
웃통을 훨훨 벗고 다닌다나? 과년한 여동생 앞에서 상반신 알몸으로 활보한다니, 조금 배려심이 부족하시군요.

오늘 밖에 나온것도 오빠의 단정치 못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외출한거라고 했다.
내심 쌓인게 많았던지 코테가와의 불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코테가와의 기분을 풀어주고자 응응 고개를 주억거리며 코테가와의 말에 맞장구 쳐주었지만,
불만사항이 하나 둘 나열될수록 내 얼굴은 웃는 채로 굳어져갔다.

가라사대, 금발 염색이 마음에 안든다.
귓볼에 한 피어싱과 목걸이가 불량해보인다.
바람둥이처럼 이여자 저여자 번갈아가며 사귀는 행동이 마음에 안든다.
단정한 차림을 부탁해도 여전히 파렴치한 모습을 보인다 등등...

...어쩐지 온몸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만 같은 느낌을 도무지 지울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를 쳐다보며 푸념하던 코테가와의 눈매가 점점 사나워져가는게,
잘못하다간 비난의 화살이 내쪽으로 돌아올것 같아 식은땀이 흘렀다.
날카롭게 날 째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 저기말야..."

"뭐죠? 아키츠군?"

"...지금 코테가와의 오빠 이야기 하고 있는거 맞지?
내 이야긴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왠지 모르게 자꾸만 기시감이..."

솔직히 말해서 지금 눈앞에서 내 위아래를 훑어보고 계시는 풍기위원장으로서의 눈이 무섭습니다.
내심 찔리는게 많아 위축된 내 모습을 보던 코테가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서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아키츠군 앞에서 불평해봤자 위안이 안된다는걸 깨달았을 뿐이에요."

반박할 말이 없었다.
유우씨보단 내쪽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으니까.
낙담하던 코테가와는 오빠에서 나에게로 표적을 바꾸었다.
직접적인 거라기보단 학교에서 떠도는 나와 관련된, 그다지 긍적적이지 않은 소문들에 대한 것이었다.

- 실존하는 학교 7대 괴담 중 하나
- 중학교 시절을 아득히 초월한 천명의 애인
- 초등학생도 수비범위
- 여동생 모에
- 수염이 민감...
- 최종귀축
- 여자라면 유령도 가리지 않는다
- 귀신을 다루는 사령술사
- 야쿠자 후계자 또는 야쿠자의 비밀병기
- 수십개의 도장을 파괴한 난폭자 등등...

거...소문 한번 참 많네요.
뜬 소문을 좋아하지 않는 코테가와조차 알고 있는게 이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많은 소문이 더 있다는거야?
그야말로 온갖 도시괴담들이 총 집합된 이야기에 내가 멍해있자 코테가와는 어리벙벙한 내 반응에 한숨을 쉬었다.

"하아...이렇게 말도 안되는 뜬 소문들이 범람하면 학생들의 분위기도 흐려지는데 말이죠.
대체 어째서 말도 안되는 도시괴담에까지 아키츠군의 이름이 들어가는걸까요?"

"글쎄말야..."

중학교때 깡패들 상대로 지껄인 허풍 때문에 흑막같은 이미지가 퍼져서 그런건가?
오토바이를 집어던지며 날뛴다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격한 뒤, 깡패들 사이에서 퍼지던 말도 안되는 소문들이 이상하게 확산된건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악명이 높아지는거라 딱히 신경쓰지않고 그냥 방치하고 있었는데,
고교 들어서 교우관계 개선에서 가장 걸림돌이 되어버린지라 조금은 골머리를 썩였다.
평소엔 교내 봉사 활동도 빼먹지 않으니까 조금쯤은 좋은 이미지가 생겨도 괜찮을법한데,
가끔씩 사건에 엮일때마다 자꾸만 평판이 떨어져가는 현실이 서글프다.
사이가 어느정도 가까워진 친구들은 비교적 소문에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워낙 나도는 뜬소문이 많다보니 사소한 소문들은 며칠내로 식어버린다는 점은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미묘했다.


푸념을 마친 뒤 기분이 나아진 코테가와와 함께 상점가를 돌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학교에서의 일이야 같은 반이다보니 서로 알고 있는게 많았기에, 주말에는 뭘하며 지내는가 같은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래서 말이지, 저번 주말에 '러브러브 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가 아이들한테 붙잡혀선 난데없이 '매지컬 쿄코' 연극을 해줘야 했다구."

"동네 아이들과 사이가 좋나보네요?"

"그런 편이지. 작년에 공원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뒤론 종종 만나면 놀아주고 있어.
워낙 말썽꾸러기 들이라 내쪽이 먼저 진이 빠질때도 있지만...
저번주엔 나한테 악역 연기를 해달라면서 괴상한 뽀글머리 가발을 가져와선 씌우더라고."

아이들이 '매지컬 쿄코 플레임'을 즐겨보는지 나한테 거기에 나오는 악역을 연기해달라고 졸랐었다.
뭐라더라...모작크 장군인가 하는, 콧수염을 기른 아프로 헤어의 괴인역이었다.
아프로 머리가 된 날보고 잘 어울린다며 폭소하던 꼬마들에게 약이 올라서 한동안 술래잡기를 벌인건 지금와선 좋은 추억이다.
도중에 공원에서 매지컬 쿄코 마술봉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꺄르륵하고 봉을 휘두르며 참전했던것도 즐거운 기억이었고.

"흐응...의외로 아이들이 무서워하지 않는군요?"

"중학교나 고등학교랑은 사정이 다르니까.
몇명은 그냥 우주인 오빠 취급 하던데?"

"수염성인이라던가 하는거 말이로군요."

"응. 사실 학생들 이외엔 나름 사이가 나쁘진 않은 편이라구?
시장에서 만나는 아주머니들이나 상점가 어른들과도 꽤 친숙해졌으니까.
공원에 갔을땐 아이 어머니께서 음료수도 사주셨는걸?"

공원에서 놀아주던 아이의 어머니께서 수고했다고 웃으시며 음료수를 건네주셨을땐 정말이지 기뻤다.
마을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미캉과 함께 장보기를 하는 동안, 점점 어른들도 나에게 익숙해지신것 같았다.
다만 목욕탕을 엿보는 악동같은 짓은 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어색하게 웃을수 밖에 없었지만...

미캉과 장보기를 시작한 며칠동안 「귀여운 따님과 함께 장보기 나온거요?」라는 귀가 따갑게 들었다며 볼멘소리를 하자 코테가와는 입을 가리며 킥킥거렸다.

"그래도 지금은 구레나룻을 자르고 외모도 많이 나아졌잖아요?
산적처럼 보이던 1학년때와는 큰 차이라구요?"

사, 산적...?
무슨 밤송이 수염을 뽐내는 우락부락한 털보 산도적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고개를 휘휘 젓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는 싱긋 웃었다.

"그렇다 치더라도, 역시 자주 보면 아키츠군의 인상도 익숙해 지는가보군요.
학생들도 조금은 루머같은데 신경쓰지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죠."

"아하하~ 그건건 힘들지 않을까?
지금이야 뜬소문 같은데 열광할 나이니까 말이지."

다만 그 소문이 확장되는 속도의 터무니없음에는 나도 참 할말이 없었다.
애초에 악명쌓기라는 명목하에 베개를 눈물로 적시면서 소문을 어느정도 방치하기도 했다지만,
사람들이 죄다 가십거리에 굶주린 건지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해져 있었습니다」마냥 하루만에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가히 전율스러울 정도였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소문을 방치하기 이전에 막을수나 있는거야?
미카도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던가.
「HAHAHA. 포기하면 편해요」라고.
어쩐지 대사가 달라진 것 같지만 기분탓이다.


퍼버버버벅-!

코테가와와 함께 이야기하던 중 갑작스럽게 골목 안쪽에서 들려온 구타음에 놀라 코테가와와 서로 마주보았다.
무슨일인지 살펴볼까 싶어 슬쩍 골목길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바닥에 쓰러진 3명의 남자를 밟고 있는 야미가 보였다.

"야미?" "야미짱?"

"아키츠 료스케, 코테가와 유이?"

"이런 곳에서 뭘하고 있는거야?"

"별거 아닙니다. 잠시 이상한 사람들과 얽혔을 뿐."

「「「우우...」」」

바닥에 쓰러진채 신음하는 녀석들을 보니 뭔가 맞아도 싼 짓을 했나보다.
평범한 복장을 봐선 깡패는 아닌것 같고, 혹시 야미에게 헌팅하다가 얻어맞기라도 한건가?
아, 참고로 이동네에서 건들거리는 녀석들중 깡패와 헌팅남을 구분하는 법은 단순하다.
모히칸이거나 대머리검은 선글라스가죽점퍼를 입었으면 깡패고, 그게 아니면 헌팅남이다.
중학교때 세기말 폭주족 같은 모습의 깡패들을 처음 봤을땐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와선 그저 그러려니 하고 납득하고 있는 상태다.
요즘은 깡패짓하며 돌아다니는 녀석들의 모습은 거의 사라진것 같은데 다들 철이 든건가?

내가 쓰러진 헌팅남들을 살펴보는 동안 코테가와가 야미와 이야기를 나눴다.

"주말에 이런곳에서 둘과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으응. 실은 나도 기분전환겸 나왔다가 아키츠군이랑 우연히 만났을 뿐이지만."

"그렇습니까?"

"이렇게된거 야미짱도 함께 상점가 쇼핑이라도 하러 가지 않을래?"

"미안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미캉의 초대를 받아 미캉네 집에 갈 예정입니다."

"그래?"

야미와 미캉의 사이는 꽤나 진전된것 같아 보였다.
수영장이나 전골파티를 통해서 서로 가까워진걸까?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며 쓰러져있는 헌팅남들을 툭툭 찔렀다.

"어이, 살아있어?"

"으윽..."

신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 헌팅남은 내 얼굴을 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컥? 아, 아키츠 료스케!?"

"어."

"뭐!?" "켁?"

순식간에 각성하면서 패닉상태에 빠진 세명에게 손가락으로 야미를 가리켜보이며 안됐다는듯 얘기했다.

"너희도 참 재수가 없다.
어쩌다 하필 골라도 야미를 건드린거냐?"

"서, 설마 아는 사이인가?"
"같은 금발? 혹시 남매였나!"

"...내 머린 염색인데?"

"뭐!?"

과장되게 놀라는 헌팅남들중 한명이 경악하며 외쳤다.

"초사○어인이라 그런게 아니었어!?"

그런 버프 스킬 같은거 모릅니다.
머리에 나사가 하나 빠진것 같은 헌팅남들의 모습에서, 과거 중학교때 만났던 깡패중 '전투력 53만' '프리○' '3단 변신' 운운하던 만화 매니아가 떠올랐다.

"...야미, 혹시 쟤내들 머리를 심하게 맞은거야?"

"아닙니다만..."

부정하는 야미의 모습에 다시금 헌팅남들을 보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그런게 가능할리 없잖아?
애초에 그건 순수한 녀석만 가능하다면서?"

난 번뇌도 많고 고민 많은 청소년이라구.
내 대답에 녀석은 코웃음치곤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순수한 악」이니까."

...야...

"킥..."

"...바보군요."

내 심정을 대변해주는 코테가와랑 야미의 반응이었다.
푸욱 한숨을 쉬곤 둘에게 주의를 주었다.

"코테가와, 야미, 가까이 오지마.
계속 여기에 있다간 이녀석들한테 바보가 옮겠어."

"코테가와? 설마 그 맹수 조련사인가!"
"아키츠 료스케의 101번째 목표라는...!"
"어? 이미 애인이 천명이라던데 101번째는 좀 이상하지 않아?"

바닥에 쓰러진채 멋대로 떠들어대는 헌팅남들의 모습에 코테가와는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적당히 질려왔기에 몸을 털며 일어섰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내게 야미가 물었다.

"그런데...옷에 꽤나 먼지가 묻어있군요."

"아아, 방금전 길거리에서 코테가와랑 둘이서 사이좋게 뒹굴었지."

"아키츠군이 밀어 넘어뜨려서 그런거잖아요. 이 저질."

코테가와의 말에 나를 보는 야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야한 짓을 한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아, 아니. 그건 코테가와가 찍어눌러서「제탓이란 거에요?」...아닙니다."

"그리고 그 수염좀 깎을 수 없어요? 방금전 닿였을때 까끌거렸다구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무리."

야미에게 변명하면서 코테가와에게 대꾸하고 있자니 헌팅남들의 경악하며 외쳤다.

"밀어 넘어뜨려? 길 한복판에서?"
"역시나 아키츠 료스케...! 귀축이란 소리는 거짓이 아니었어!"
"수, 수염이 뭐 어쨌다고오오오!?"

눈에 핏발이 서며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 헌팅남들을 보다못해 내용을 정정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

"딱히 이상한 곳은 아니고 다리 사이에..."

"와아앗!? 제발 좀 그만해요!"

"읍?"

얼굴이 빨개져선 황급히 내 입을 막은 코테가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우오옷!? 키스도 아니고 아래쪽이라고오!?"
"거물이다... 터무니없는 거물이다..."
"얼마전엔 남탕에까지 여자애를 데리고 왔다더니 과연..."

"뭐라고요?"

눈이 날카로워지며 나를 쏘아보는 코테가와에게 당황해 입을 막은 손을 치우곤 급히 변명했다.

"아, 아냐! 걔 렌이라구!"

"아, 납득했어요."

재채기로 성별이 바뀌는 렌(男)-룬(女)을 떠올린 코테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테가와의 태도가 의외였는지 헌팅남들은 멍하니 코테가와와 나를 한참 번갈아 보더니 중얼거렸다.

"...대인배?"
"공인 양다리?"

"...아키츠군...불량들은 다들 사고방식이 저런가요?"

"...저 녀석들이 나사빠진게 아닐까?"

한숨만 나오는 녀석들의 반응에 주저앉아 얼굴을 마주하곤 충고했다.

"그나저나 너희들도 참 징하다.
요즘엔 깡패 녀석들도 거의 없어졌는데, 너희도 적당히 이런일은 그만두는게 낫지 않아?"

지금껏 목격한 헌팅 수법들도 강요로밖에 안보일 정도로 조악해서 도무지 성공할 확률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깡패들의 틀에 박힌 패션센스 만큼이나, 헌팅남들의 헌팅 수법도 틀에 박혀서 이쪽 계열의 장래성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다.
내 충고에 헌팅남은 허탈한 웃음을 내뱉곤 중얼거렸다.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정말이지 이쪽 길은 꿈도 희망도 없다는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젠장...
건드리는 여자마다 죄다 네 이름을 대니까 이젠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구."

아직까지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지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로 헌팅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사이난에서 깡패짓을 할만큼 겁을 상실한 녀석은 없잖아?
진짜 뒷세계의 무서움을 알아버렸으니까..."

"어? 뒷세계?"

진짜 야쿠자라도 만난건가?
애초에 이 평화로운 사이난에 그런게 존재하는지도 솔직히 의문이다만.

"뭐야 몰랐던거냐?"

"설마하지만 '도내학군단연합'같은 정신나간 집단 얘기는 아니겠지?"

"하, 기껏해야 중고생 수준의 잔챙이들의 모임이 진짜 뒷세계에서 살아남을거라 생각하는거냐?"

뭔가 스케일이 커지는 것 같은 분위기에 야미와 코테가와가 걱정스레 물었다.

"심각한 이야기인가보군요, 아키츠 료스케."

"괜찮은건가요 아키츠군...?"

"후후...거기 뒤에 두 아가씨도 알아두는게 좋을걸?
다름아닌 아키츠 료스케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니까."

어? 나랑 관련된 얘기였어?

"...그 이야기, 좀 자세히 알려주겠어?"

조금 굳어진 얼굴로 바뀐 내 모습에 헌팅남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걱정스러운 코테가와와 진지해진 야미와 함께, 심각한 얼굴로 헌팅남의 설명을 듣던 내 표정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요상하게 변해갔다.



"처음 뒷세계에 대해서 알게된 건 작년 가을 즈음, 어느 바보 녀석의 무모한 사기 행각 때문이었지.
간 크게도 아키츠 료스케, 너를 사칭하는 녀석이 있었거든.
널 사칭하며 길거리에서 사람들 상대로 공갈이나 치는 삼류 깡패였지.
뭐, 진짜와는 얼굴이나 체격도 달랐지만 보통은 사람들이 기억하는건 아키츠 료스케의 대략적인 외관적 특징 뿐이잖아?
수염, 금발, 목걸이 따위의 악세서리를 차고 다니니 모르는 녀석들은 그저 벌벌 떨면서 숨을 죽일수 밖에.
그렇게 며칠동안 사칭하면서 다닌 결과, 어떻게 됐을거 같아?

야쿠자가 찾아왔다고.

길거리에서 학생들을 협박하며 거들먹거리던 녀석에게 갑자기 선글라스를 쓴 흑발의 검은 양복의 떡대가 다가와서는 그대로 녀석을 집어던져 버렸어.

「네녀석! 치프(사이바이씨)의 따님(미캉)을 인질로 삼았던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런 저열한 짓까지 하다니!
역시 그때 네놈을 처리했어야 했다!」

「히, 히이이이이이익------!?」

그때 보여준 야쿠자의 실체는 절대로 잊을수 없어.
'콘크리트를 박살내고 트럭을 집어던지면서' 난동을 부리는 야쿠자를 잊을 수 있을리가 없잖아?

아무 생각없이 아키츠 료스케를 사칭하던 그녀석은 그때 진짜로 죽을뻔 했다구.
혼비백산한 그녀석은 엉엉울면서 싹싹빌어서 겨우 오해를 풀어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고 해.

그때 이해했지. 아키츠 료스케가 말하던 「학생은 학생답게 놀아」라는 말의 의미를...
진짜 뒷세계의 야쿠자는 그야말로 인간을 초월한 존재란걸 말야.
게다가 치프라느니, 따님이라느니, 인질로 삼았다느니 하는 말에서 아키츠 료스케가 야쿠자 파벌과 항쟁중이라는 루머가 진짜인걸 알수 있었지.
야쿠자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터무니없이 위험한 녀석 이라는 인식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지."

...선글라스의 검은 머리 야쿠자라면 라라의 호위인 마울이로군.
작년 가을이라니까, 미캉을 인질로 잡았던 연극에 대해 오해를 풀기 전에 벌어진 사건인가?

"그 소문의 진위를 다시 한번 확실하게 증명한 사건은 올해 가을에 일어난 일이었지.

해골갑옷같은 이상한 옷으로 코스프레한 미청년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시비를 걸려고 접근한 불량들이 있었어.
타고있던 오토바이로 미청년 주위를 포위하곤 히히덕거리면서 욕설을 내뱉었지.
그런데 이리저리 협박 비슷한 말을 걸었는데 녀석이 도무지 겁을 먹지 않더란 말이지.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는 녀석에게 발끈한 깡패 한놈이 내뱉은 말이 사건의 시작이었어.

「아앙? 눈깔지 못해? 우리가 누군줄 알아?
사이난 고교의 아키츠 료스케가 바로 우리 형님이라고!」

「...호오...?」

순간 청년의 눈초리가 바뀌면서 천천히 한손을 들었어.

「브왓츠. 처리해.」

「네.」

「어?」

어느새인가 불량들의 뒤에선 청년의 부름에 대답한 검은 양복의 사내가 서있었지.
한쪽 눈에 세로로 난 살벌한 상처가 인상적인 금발의 야쿠자였다고해.
곧이어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불량들은 허공에 붕 뜬뒤 지면에 널부러져 버렸어.
다들 한방에 넘어가서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못했다더군.

그리고...고통에 떨던 한명이 억지로 얼굴을 든 순간 녀석은 말도 안되는 광경을 보고 만거야.
코스튬 플레이어같던 청년의 손에서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그들이 타고왔던 오토바이들이 조각조각 썰려나가는 장면을...
수십개로 매끄럽게 조각난 오토바이의 잔해에 창백해진 불량들에게 청년이 조용히 말했어.

「아키츠 료스케에게 전해라...
마피아 몇놈 잡았다고 너무 기고만장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저번에 못다한 결판은 언젠가 내주겠다고 말이다.
가자 브왓츠.」

「네 단장님.」

그 괴물같은 야쿠자가 언급한 것들이 정말로 결정타였지.
아키츠 료스케는 마피아를 잡았다는 사실과, 그 괴물과 적대관계에 있다는걸...

그 두사건 이후로 이 동네 불량들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지.
아키츠 료스케를 사칭한 가짜 행세를 한다든가, 아키츠 료스케를 등에 업은 행동 따위를 하려는 간큰 녀석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어.
잘못하다간 트럭으로 공기놀이를 해대는 진짜 야쿠자에게 파뭍힐 수 있으니까."

...저스틴이랑 브왓츠까지 건드렸냐...
저번에 뒷처리를 부탁했던 SOLGAM의 조직원들이 우주 마피아니까 틀린말은 아닌데.
그나저나 설마 작년 공원에서의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는건 아니겠지?

아무튼 뒷세계니 어쩌니 무서운 소릴 해대더니, 라라의 호위기사단이었군.
현재는 호위기사라기보단 사이바이 스튜디오의 어시스턴트가 메인 직함으로 보이지만.
브왓츠와 마울의 얼굴의 워낙 험악하게 생긴데다 복장마저 검은 정장이라 확실히 야쿠자로 오해할만 했네.

"후후...그러니까 조심하도록 해, 아키츠 료스케.
아무리 너라도 인간을 초월한 진짜 야쿠자들을 상대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테니까..."

"아, 아...충고 고마워. 조심하도록 하지."

괜시리 긴장했다고 생각하며, 이야기를 마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헌팅남들에게 예의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몸을 가누며 비틀비틀 일어서는 헌팅남들은 딱히 부축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한 코테가와와 야미에겐 나중에 설명해주기로 하고 둘을 데리고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정말이지...큰일나는줄 알았잖아요."

"이야기의 인물들은 프린세스 라라의 호위들이었군요."

라라의 호위기사단인 저스틴, 브왓츠, 마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나서 가슴을 쓸어내린 코테가와와 조용히 수긍한 야미였다.

"차라리 방금전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해명해줘도 괜찮지 않았어요?"

"뭐 어때. 덕분에 이 동네에서 깡패같은 녀석들이 많이 줄었으니 좋은거잖아?
날 사칭한 녀석이라든가 호가호위하는 녀석들도 한꺼번에 막아버리는 사건이었다니까 기왕 이렇게 퍼진거 두고두고 잘 써먹어야지."

애초에 그런 녀석들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까, 뒷세계 운운하는 저런 소문은 계속 유지되는게 오히려 좋을것 같았다.
곰곰히 생각하던 코테가와도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더이상 참견하지 않았다.

이후 미캉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야미와는 헤어지고 다시금 코테가와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이런저런 소재거리를 찾던 가운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코테가와는 표정이 밝아지며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고양이 인형 말고도 고양이 관련 이야기 책도 가지고 있는지 「한밤중의 데이트」라는 고양이가 주인공인 소설에 대해서 즐겁게 소개해주었다.
그외에도 고양이 관련 상품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주택을 둘러싼 담벼락 위에 서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어? 고양이다."

"에? 어디요?"

담벼락 위에 가만히 앉아있는 고양이의 모습에 나와 코테가와는 가만히 멈춰서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갈색털로 뒤덮힌 고양이가 나른하게 하품하는 모습에 무심코 얼굴이 풀릴것 같았다.
입맛을 다시는 고양이의 행동이 귀여워 보여서 손을 내밀어 고양이를 불러보았다.

"츳츳- 이리온?"

쌩-!

자길 부르는 소리에 날 쳐다본 고양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몸을 일으켜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고양이를 코테가와가 멍하니 쳐다보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코테가와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고양이에게도 아키츠군의 외모가 무섭게 느껴지는걸까요?"

"...미안."

난 그냥 친근하게 불렀을 뿐이라구? 어째서 도망치는거야?
차에 치일뻔한 강아지를 도와줬을때도 깨물리기만 하고, 이번엔 고양이를 불렀을 뿐인데 달아나고.
나한테서 무슨 육식동물같은 분위기가 풍기기라도 한다는건가?
코테가와는 고양이가 있던 담벼락을 물끄러미 응시보다 내 얼굴을 보곤 낙담하며 중얼거렸다.

"...아키츠군의 외모가 단정했더라면 달아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우...설마 내 외모 탓이란거야?"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전 앞으로 5년간은 고양이 인형으로 대리만족을 해야하는거로군요.

"저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하는데 그런 생각을 안가지는게 오히려 이상하죠.
깔끔한 외모라면 동물들도 반겨줬을지 모르잖아요?
눈매는 뭐...어떻게든 되겠죠."

"어떻게든 됩니까..."

"눈매가 좀 사나워도 웃으면 보통은 분위기가 완화된다구요."

"음...이렇게?"

미소를 띄며 코테가와를 바라보자 코테가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억지로 웃지 말아요 아키츠군.
익숙해졌다지만 역시 조금은 무서우니까."

"으..."

황급히 표정을 추스르며 양뺨을 두드리자, 기분이 풀린듯 코테가와는 피식 웃었다.

"너무 의식하지말고 자연스럽게 미소지어요.
크리스마스땐 꽤나 멋지게 웃을수 있었잖아요?"

"노력해보겠습니다..."

코테가와의 격려를 들으며 방금전의 아쉬움을 달래려던 차에, 반대편 담벼락에 서있는 또다른 고양이가 보였다.
새하얀 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던 고양이는 나른한 표정으로 담벼락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빤히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방금전의 실패가 떠올라 코테가와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아키츠군?"

"이번엔 코테가와가 고양이를 불러보는게 어때?"

"제가요?"

"코테가와라면 고양이가 도망가진 않을테니까.
그러니까 단정한 미모의 코테가와 선생님의 숙련된 기술로 직접 고양이 홀리기 시범을 보여주세요."

"...그건 비꼬는 거에요?"

살짝 볼을 부풀린 코테가와는 그래도 내심 고양이를 쓰다듬고 싶었는지 담벼락의 고양이를 조심스레 불렀다.

"냐, 냥냥-"

코테가와의 야옹하는 소리에 고양이는 잠깐 고개를 돌려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통한걸까?
하지만 무심하게도, 고양이는 얼마 안있어 우리를 외면한채 가던 길을 따라 스윽 사라져버렸고,
고양이 소리를 흉내내던 코테가와는 팔을 뻗은상태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양이 앞발처럼 살짝 손을 오므리던 모습 그대로 멈춰버린 코테가와의 얼굴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붉게 달아오른 석양이 장엄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풋..."

"왜, 왜 웃는거에요!?"

"아니, 코테가와의 냥냥하는 목소리랑 포즈가 귀여워서..."

"읏! 놀리지 말아욧!"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채 발끈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폭소하다가 코테가와에게 등을 얻어맞곤 겨우 웃음을 멈췄다.

"아하하~! 그러지말고 우리 팬시샵에라도 한번 가보지 않을래?
오늘은 귀여운 고양이 인형으로 만족하기로 하자구."

"...그러죠."


조금 풀이 죽은채로, 별로 고양이가 안와도 상관없었다며 새침을 떼는 코테가와를 위로하면서, 예전에 갔던 영화관 근처의 펜시샵에 들렀다.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분홍빛 머그컵이라든지, 매지컬 쿄코 플레임의 마스코트 고양이 시로네 인형들이 놓인 진열대를 코테가와와 함께 둘러보았다.
동물 인형들은 이렇게 쓰다듬을수 있는데...고양이들은 알은체도 안하고 달아나기 바쁘니 현실은 가혹하군요.
꼬리에 작은 방울이 달린 다람쥐 인형을 조심스레 쓰다듬어보면서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귀여운 물건들의 유혹속에서 고민하길 한참, 마음에 드는 용품과 인형들을 골라 코테가와나 나도 만족한 표정으로 펜시샵을 나설 수 있었다.
쇼핑백 안에 들어간 인형들을 살펴보며 코테가와가 물었다.

"아키츠군은 이제 어떻게 할거에요?"

"오늘은 할인중인 여름옷이나 알아볼까 싶어서 나온거라 별 다른 예정이 없다면 옷가게에 들르지 않을까?
코테가와는 어때?"

"전 기분전환도 되었으니 이만 집으로 갈까해요.
충동적으로 나온거라 딱히 지갑에 여유가 있는게 아니라서요."

"그래...? 아, 그럼 가기전에 점심이라도 함께「휘유우우우우--- 쿠웅-!」응?"

코테가와에게 점심 제의를 하려던 차에 갑자기 들여온 굉음에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역시 골목길 안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오늘따라 왜이리 어수선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거야?
내심 불평하며 골목길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저스틴, 브왓츠, 마울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전의 희안한 추락음이나 쓰러진 상태를 봐선 하늘에서라도 떨어진건가?
대체 뭘 어떻게 해서 그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서도...

가까이 다가가서 세명의 상태를 살피는 내게 코테가와가 당황해하며 물었다.

"아키츠군, 이 사람들은...?"

"아까 이야기했던 라라의 세 호위들이야.
아무래도 뭔가 트러블에 휘말린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그런데 다들 괜찮은건가요?"

"일단 위험한 상처는 없는것 같은데?"

하늘에서 떨어졌는데도 큰 상처는 없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세명 모두 기절한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육체로는 다른 우주인과 비교를 불허하는 데빌루크인이니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아는 사이인데 이대로 골목길에 쓰러진걸 내버려둘 수도 없고...
역시 사이바이 스튜디오까지 데려다주는게 나아보였다.
코테가와에게 점심 제의를 하는건 아쉽지만 포기해야 할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진 저스틴을 부축하며 코테가와에게 사과했다.

"그럼 난 저스틴이랑 이 둘을 집까지 데려다줄께.
갑자기 헤어지게 되서 미안."

아쉬워하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는 피식 웃더니 내 등을 툭 두드렸다.

"신경쓰지 말아요. 사람이 우선인게 당연하잖아요?
택시를 불러올테니까 잠시 기다려요."

코테가와가 택시를 부르러 골목길을 벗어난 동안, 기절한 저스틴을 등에 업고 브왓츠와 마울을 양 옆구리에 끼워서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자세가 불편해서 비틀비틀 움직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도로변으로 나와 코테가와가 잡아준 택시 뒷좌석에 세명을 태운후 코테가와와 헤어졌다.

사이바이 스튜디오에 도착한뒤, 놀라는 사이바이씨에게 설명하고 나서 화실에 셋을 눕혀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기껏 평화로운 마을에 지내면서도 이래저래 불쌍한 처지에 놓이는 저스틴과 그 부하들의 고달픈 삶이 안타까웠다.
힘내라 저스틴. 부디 만화계에서 너의 재능을 꽃 피울수 있길.
그리고 힘내라 마울. 힘내라 브왓츠. 야쿠자처럼 생겼지만...
제대로 지구에 적응해서 셋의 인생에도 꽃이 피길 바라며, 주말의 나들이를 마무리지었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제가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키츠 료스케가 야쿠자를 쓰러뜨렸다!」

월요일 아침 등교하자마자 귀에 들어온 소문이었다.
소문의 근원지는 골목길에서 쓰러진 세명을 끌고 나오는 아키츠 료스케를 목격했다는 헌팅남들이었다.
그 세명의 야쿠자라는 것이 트럭을 집어던지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토바이를 해체하던 바로 그 괴물들이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여서...
일반인과 동떨어진 뒷세계의 야쿠자들마저도 아키츠 료스케에겐 상대조차 되지 않았다면서,
뒷세계의 최종병기, 아니면 진정한 뒷세계의 정점이라는 소문이 진짜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확신에 가깝게 증폭되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소문에 황당해서 멍하니 서있던 중 툭툭 내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 어깨를 잡은 코테가와가 곤란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뒷세계 어쩌구 하는 루머, 역시 해명해 주는게 낫지 않았어요?"

"...일상입니다."

사이난에선 '소문의 뒤엔 언제나 아키츠 료스케'라고요.
눈가를 매만지며 애써 담담하게 말하는 내 등을 코테가와가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
짧게 써서 11월에 올리려고 했는데, 글쓰다 11월이 지나버렸어...OTL
뭐...12월안에 더 쓰겠죠^^;
미캉은 예정대로라면 다음편이나 다다음편에 등장할듯 합니다.

리사랑 미오, 오시즈는 옷가게에서 만날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짧게 쓴다고 뺐습니다.
여름옷 사러가는 이야기에서 나올 예정이었는데, 도중에 코테가와랑 만나서 펜시샵을 가버렸으니-_-a
운이 좋으면 다음편에 등장할 수도 있겠죠(...)

그럼 좋은 밤 되세요^^

p.s.이번화 참조 : 92화
요약 : 미캉네 집에 놀러간 야미를 본 저스틴이 암살로 오해하여 야미에게 덤벼들다가 마울&브왓츠와 함께 라라에게 맞고 저하늘의 별이 된다.

***참조 이미지***

코테가와 사복차림 및 표정

코테가와 남매(유이, 유우)

코테가와 : "냐옹냐옹"

하늘에서 떨어진 저스틴, 브왓츠, 마울(by 라라의 분노 펀치)

***기타 이미지***

오시즈(교복)

오시즈(검정스타킹)

오시즈(원피스) : 하복 구매하면서 만나는 이야기를 넣으려다 짧게 쓰려고 제외.

매지컬 쿄코의 모작크 장군

헌팅남

깡패 : 어째서 중학교시절 료스케앞에 나타난 녀석들이 세기말 버전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장면. 료스케도 처음엔 어이없어 했지만 지금에와선 납득(체념)한 상태입니다^^;

가짜 아키츠 료스케 : 금발에 수염, 악세서리를 흉내. 현재 사이난 고교 3년생.
머리카락 올백이 아니라 앞머리를 뿔마냥 길게 앞으로 뻗어 고정시킨 리젠트 스타일이라는것에서부터 이미 가짜.
(엘비스 프레슬리 머리에서 과장더해서...)
원작에서 1회 등장했기에 써봤습니다.

트럭을 집어던지는 마울


Posted by 루트(根)
,
미캉과 함께 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던 중이었다.

"아, 맞다. 입욕제 사야 하는데."

"입욕제?"

"네. 라라 언니가 부탁한게 있었거든요."

입욕제 코너로 이동한 미캉은 한차례 훑어보더니 아이돌의 그림이 그려진 입욕제를 집어 들었다.
붉은 마녀모자를 쓰고 붉은 망토를 두르고 붉은 장갑을 끼고 붉은 구두를 신은채,
분홍색 하트고리 안에 금색 별이 조각된 지팡이를 손에 든 단발머리 소녀가 입욕제에 새겨져 있었다.
인기 아이돌 키리사키 쿄코가 맡은 특촬물 캐릭터, 매지컬 쿄코다.
불꽃을 다룬다는걸 강조하기 위해선지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하다시피 한 옷차림에다,
흰색 블라우스 칼라 부분의 하늘색 리본에 마저도 붉은색 브로치가 장식되어 있었다.
아, 그래도 체크무늬 치마만큼은 파란색이었다.


「부글부글 입욕제」 매지컬 쿄코가 추천하는 입욕제
일순간에 온천풍의 목욕탕을 만들어드립니다.

* 현재 1+1 할인 행사중 *



"저번에 TV 광고에서 매지컬 쿄코가 선전하는걸 라라 언니가 보곤 꼭 한번 쓰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아아, 라라는 매지컬 쿄코를 정말 좋아하니까 말야.
그러고보니 우리집도 슬슬 입욕제를 새로 장만할 때가 된거 같네."

"마침 1+1 할인 기간이니까 두개 사서 하나씩 나눠 가질까요?"

"아, 그거 괜찮겠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기에 미캉과 함께 부글부글 입욕제를 구입한뒤 오늘의 장보기를 끝마쳤다.

미캉을 집까지 바래다준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뒤 장보기한 물품들을 정리해두고선 욕조에 물을 받고 입욕제를 풀었다.
조금씩 솟아오르는 물거품을 바라보며 기대감 속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일었다.
입욕제 설명대로 온천처럼 녹아내릴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려나?



...녹아내렸습니다.

욕조가.




욕조에 담긴 물이 심상치 않은 기세로 부글부글 거리는 모양새에 갸우뚱하고 있자, 후두둑 콸콸 하는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욕조.
「어라?」하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벌어진 지나친 참상(박살난 욕조)에 타월만 허리에 두른채 좌절포즈로 목욕탕 바닥에 쓰러졌다.

네...누가 우주인 아니랄까봐 쿄코양도 한건 커다랗게 해주시는군요.
우주인이 쓰는 물건은 입욕제조차 범상치 않다는거냐?

키리사키 쿄코가 우주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대가로 박살나버린 욕조 앞에서 눈물을 삼키다가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미캉네 집만이라도 이 참극을 피할 수 있기를...
미캉네 집에 연락하려고 거실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들었을때, 타이밍 좋게 휴대폰 벨이 울렸다.

- 꼬마아가씨(꼬마아가씨) 기다려요(기다려요)
이걸갖고(이걸갖고) 가셔야죠(가셔야죠)
반짝반짝 빛나는 조그만 황금 마법팔찌♪


「발신자 : 미캉」

"......"

...설마 참극을 막기엔 이미 늦은겁니까?
잠시 주저하다가 휴대폰을 열었다.

딸깍-

"...여보세요?"

「여보세요? 료스케 오빠?」

"미캉?"

「방금샀던 입욕제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라라 언니가 입욕제를 사용하다가 목욕탕이 부서져버렸기에 놀라서 연락드렸어요.
결함품인지 라라 언니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까 샀던 입욕제는 쓰지 마세요! 아셨죠?」

"어...응. 알려줘서 고마워 미캉."

늦었어 미캉.
벌써 써버렸다고 그 입욕제...
괜히 깔끔하게 지낸답시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입욕제를 사용한게 문제였다.
안그랬다면 지금 같은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텐데...
결국 미캉네 집도 우리 집도 참사를 피할 순 없었나보다.

통화를 종료하곤 푸욱- 한숨을 쉬며 욕실로 시선을 옮겼다.
녹고 깨져 부스러진 욕조의 모습을 보건데 몸을 씻을 공간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게 분명했다.
방금전 욕조 바닥에 쓰러지며 부스러기가 묻은 몸은 목욕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그 욕구를 해결하는건 불가능해 보였다.
머리를 한차례 긁적이다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목욕탕에나 갈까..."

초등학교 6학년 겨울, 양아치 스타일로 외모를 바꾼 뒤로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곳인데...
사회인이 되기 전엔 다시 갈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건만 세상일이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건가보다.




「따끈따끈 온천(ぽかぽか溫泉)」

슬슬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거리를 지나, 대나무들이 주위를 장식하고 있는 목욕탕 「따끈따끈 온천」으로 들어갔다.
늦은시각의 남탕 안은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다만 내가 남탕에 들어가면서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문제라면 문제일뿐.
학생으로 보이는 녀석들 중엔 얼른 목욕을 끝내고 허둥지둥 나가는 녀석도 있었다.
...이래서 남탕은 오기 싫었다구요.
한숨을 쉬며 한쪽 구석에 앉아 몸에 물을 끼얹는데, 옆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넌..."

"...응?"

고개를 들자 회색 머리카락에 자주빛 눈동자의 미소년이 서있었다.
렌-엘시-쥬에리아(男). 룬(女)의 또다른 인격이자 라라에게 구애하고 있는 메모루제별의 왕족이다.
방금까지 씻던 중이었는지 렌은 몸에 비누거품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아키츠였던가?"

"어, 응. ...렌이지?
너도 이곳을 이용하는거야?"

"우주선의 욕실이 고장나서."

"그래?"

어딘가 집을 구해서 지내는줄 알았더니, 지구까지 타고왔던 우주선에서 지금껏 생활해 왔나보다.
그럼 야미도 렌처럼 우주선 생활을 하고 있는걸까?
야미에 대한 생각을 하다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 우려섞인 시선을 렌에게 부딪쳤다.

"그런데...넌 남탕같은 곳에 와도 괜찮은거야?"

"뭐!? 내가 남자답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거냐!"

그런 의미로 말한건 아니었는데, 렌은 날카롭게 반응하며 버럭 화를 냈다.
어릴적 라라에게 여장당한 기억때문인지, 렌은 언제나 남자다움에 집착하는것 같다.
아니, 남자다워지면 라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던가? 좀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내가 의도한건 그런게 아니라고 해명할 필요가 있었기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잘못해서 재채기라도 하면...「엣-취!」역시잖냐!?"

말하기가 무섭게 렌이 재채기를 하며 연기에 휩싸였다.
연기가 걷히자 렌이 있던 자리엔 풍성한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에 자주빛 눈동자를 가진 미소녀-룬이 서있었다.
...알몸으로 말이지요.

"엣? 꺄악!?"

갑작스레, 그것도 남탕에서 알몸으로 등장하게 된 룬은, 타월만 허리에 걸친 나를 보곤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렸다.
난데없는 여자아이의 등장으로 남자들은 눈이 동그래진채 뚫어져라 이쪽을 시선을 모았고, 남자들의 시선에 당황한 룬은 황급히 내뒤로 숨었다.

"으으...렌 이 멍청이...!
하필 이런 장소에서 몸이 바뀔게 뭐야?"

뒤에서 내 어깨를 잡고 숨은 룬은 이를 갈면서 화를 삭였다.

"...나갈래?"

"당연하잖아! 이런 장소, 한시도 있고싶지 않아."

타박하듯 말하곤 룬은 우리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남탕의 남자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거기, 시선들 좀 치워요. 이쪽의 아저씨가 지금 꽤나 기분이 안 좋거든요?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은 그날로 묻어버리겠데요."

야!? 누가 그런 살벌한 말을 했다고 그래?
그리고 누가 아저씨야?

내 마음속 항의와는 별개로, 순식간에 고개를 숙이는 남자들의 반응을 보건데, 룬의 말은 극적일 정도로 효과가 좋은것 같았다.
「역시 야쿠자」「흉악범」「악마」「전학간다 = 묻힌다」운운하는 동갑내기 또래들의 수근거림에 남자들은 얼굴을 하얗게 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금껏 다른 도시로 '전학'갔던 녀석들은 사실 모두 묻혔던것」이라고 망상을 부풀리기 시작한 남자아이들의 소리에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180도 돌아가버린 상황에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룬은 최대한 내 몸을 이끌면서 벽쪽으로 붙어서 남탕을 벗어나려고 했다.
남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룬은 내 몸을 방패삼아 옆으로 옆으로 이동했다.

"잘 좀 가려."

"내쪽에선 등뒤가 안보이니까, 네가 날 이끌고 움직여야 한다고..."

"칫...!"

혀를 찬 룬은 내 어깨를 좀더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별수없이 룬에게 이끌려가는 형태로 조금씩 움직이던 중, 자꾸만 다리를 스치는 허벅지의 감촉에 얼굴이 달아올랐기에 주의를 주었다.

"그...허벅지가 닿고있어."

"읏! 어디에 신경을 쓰는거야!?"

미끌-

"꺄악!?"

"우왓!?"

첨벙-!

옆으로 이동하며 잡아먹을듯 화를 내던 룬은, 발에 묻은 비누거품 때문인지 젖은 바닥때문인지, 미끌어지면서 뒤쪽에 있던 욕탕 안으로 빠져버렸다.
당연하지만 룬에게 어깨를 잡혀있던 나도 덩달아 욕탕안으로 속절없이 빨려들어갔다.
무방비 상태에서 머리부터 거꾸로 잠겨버린 탓에 입과 코로 물을 삼켜버린 나는 허우적대며 욕탕에서 일어섰다.
욕탕에 빠진 와중에 허우적대던 룬은 엉겁결에 내 목에 팔을 감고서 함께 욕탕 밖으로 얼굴을 꺼낼 수 있었다.

"하아하아...콜록콜록...!"

"푸핫~! 쿨럭...! 흐, 흐얏!?"

뭉클.

코로 들어간 물에 정신없는 가운데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에 등골에 전류가 달렸다.
내 목에 팔을 둘러서 내 등에 밀착한채 정신없이 기침하는 룬 때문에...
비누거품이 묻은 룬의 가슴이 매끄럽게 위아래로 미끄러지면서 등을 문질러오는 감촉에 정신이 날아갈것만 같았다.

"가, 가슴이 등에 닿고 있습니다만?"

"하아,하아...아앗!?"

룬도 정신을 차리고서야 눈치챘는지 황급히 내게서 떨어지려다가, 남탕이라는 상황을 깨닫곤 어깨를 잡은채로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리곤 다시 내 몸을 이끌며 이번에야말로 무사히 남탕을 벗어났다.



"네가 이상한 소릴 하니까 그렇게 됐잖아!"

불가항력이었다구 그건...
남탕을 벗어나 탈의실에 도착하자마자 룬은 곧장 내몸에서 떨어졌다.
몸을 씻던 도중 일어난 사건이었기에 미처 타월을 챙기지 못했던 룬은 어쩔수없이 양손으로 가슴과 다리사이를 가렸다.
비난의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던 룬은 내 허리춤에 둘러진 타월을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 이 저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불룩하니 앞으로 솟아오른 타월의 모습을 보고 시선을 돌리는 룬의 모습에, 나도 당황해서 허리를 구부려 몸을 숙였다.
방금전 등에 맞닿았던 가슴의 감촉 때문에 원기왕성해진 아드님.
덕분에 앞으로 불쑥 튀어나온 타월을 가리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여자애 앞에서 이런 민망한 꼴을 보이게 되다니 부끄러워 죽을것 같다.
급히 몸을 돌린 내게 룬이 물었다.

"몸에 비누거품이 남았는데...혹시 닦을만한 물건 없어?"

"어...내 타월이라도 줄까?"

"뭐, 뭐?"

엉거주춤 허리에 둘러진 타월을 벗으려고 하자 룬이 정색했다.

"자, 잠깐! 내 앞에서 벌거벗고 뭘 할 생각이야 이 변태!"

벼, 변태?
뭘 할 생각이라니...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거야!?

"아니, 그러니까 내 타월로 대충이나마 몸을 닦는게 어떨까 해서 말이지..."

순간 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네가 허리에 둘렀던걸 쓸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렇게 성난...그, 그걸 문질러대던 수건을 어떻게 쓰란 말야?"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식의 묘사는 제발 그만해줘...!"

룬의 격한 반응에 나도 내 행동의 비상식성을 말그대로 절실히 깨닫곤 얼굴이 익은채로 이미 반쯤 풀다만 타월을 추스렸다.
아무래도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망가졌었나보다.
'알몸의 여자아이에게 타월을 건네주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알몸이 되는 남자'라니 무슨 정신나간 행동인지 원...
그냥 잠시 탈의실 밖으로 나가 새 수건을 가져오는게 나을것 같다.
응, 역시 그게 제일 상식적인 행동이지.

"그럼 내가 새 수건을 가져올테니까 구석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그럴거야. 사람들이 오기전에 빨리 가져오기나 하라구."

"알았다니까."

룬에게 답하곤 우선 허리에 두른 타월을 다시 가다듬으려 할때, 탈의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대화소리가 들렸다.

"어? 누가 탈의실쪽으로 오는것 같은데?"

"엑!?"

놀란 룬은 숨을 공간을 찾기위해 탈의실을 돌아보았다.
학교 탈의실처럼 캐비닛에 숨을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지만,
불행하게도 옷가지를 넣는 캐비닛은 상하 2단 구조라서 룬이 몸을 숨기기에는 너무 작아보였다.

캐비닛에 숨는걸 포기한 룬은 한쪽 구석에 있는 캐비닛과 캐비닛 사이의 오목한 공간으로 이동했다.
구석에 그대로 선채로 숨으려던 룬은 캐비닛 맞은편의 거울을 보고 굳어 버렸다.
맞은편에 스킨, 로션, 빗, 헤어드라이기 등이 배치된 테이블 위로,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서 벽에 붙여진 반신거울은 룬의 상체를 적나라하게 비쳐주고 있었다.
혹여나 거울에 비치는걸 피하기 위해 몸을 숙인 룬은 가슴을 손으로 가리곤 무릎을 가슴께로 붙이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구석졌다지만 탈의실 한가운데 지점에서 본다면 오목한 공간에 숨은 룬의 발끝이 보일지도 몰랐다.

앞은 탈의실로 들어오려는 남자들, 뒤는 언제 남탕에서 나올지도 모르는 남자들.
룬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내게도 최악의 상황이고.
이대로 룬을 혼자 두고 도망칠수도 없고, 여기에 있자니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남자 탈의실에서 단둘이 있는 남녀 한쌍이라니.
들키기라도 했다간 이상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탈의실 문앞에서 양해를 구해야 하나?

'야심한 밤에 힘들게 목욕탕을 찾아오신 여러분껜 죄송하지만,
우주에서 온 신비한 별의 쌍둥이(룬, 렌) 공주님께서 현재 남자 탈의실을 점거하고 농성중이오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점거 이유요? 어째서 대중 목욕탕에선 탈의실 바깥에 수건을 배치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탈의실을 석방하길 원한다면 사내아이가 추잡한 짓을 해대지 않은 깨끗한 목욕 수건 한장을 가져오십시오.
사이난 최고의 네고시에이터

협잡꾼인 저의 의견으로는 차라리 후추 한병을 가져다 주는게 훨씬 평화적인 해결책일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게 국제 상식이고, 유감스럽게도 후추는 전학갔기 때문에 목욕탕에 있을것 같진 않군요.'

초조해하는 룬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안절부절 못하고 아바바 거리며 엉망진창인 사고속에서 혼란스러워 하던중, 룬이 날 불렀다.

"아키츠군! 빨리 이쪽으로 와!"

"어?"

"빨리 와서 여기 좀 가려달란 말야!"

"아, 알았어!"

룬의 다급한 손짓에 허둥지둥 룬이 숨어있는 구석으로 다가가 룬의 정면을 가렸다.
당연하지만 룬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에 양팔로 벽을 짚고 선 나와의 구도는 꽤 이상했다.
바닥에 앉은 룬은 내 허리를 가린 타월을 눈 앞에서 보곤 얼굴을 붉혔고,
나도 알몸의 소녀가 가슴을 가린채로 내 허리 높이에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는 상황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나마 가까스로 아드님을 가라앉히는데 성공했기에 더 민망한 전개가 되는건 피했다고 안도해야하나?
고개를 숙여 바닥에 주저앉은 룬을 내려다보다 얼굴을 들었을 때, 탈의실 안으로 몇명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목소리를 듣건데 학생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은 한쪽구석의 캐비닛 사이에 벽을 짚고선 날보곤 의아한 목소리로 수근거렸다.

"(응? 저기 저사람 뭐하는거야?)"
"(왜 궁상맞게 구석에서 벽을 짚고 저렇게 서있어?)"
"(어, 어이...저 금발...혹시 그녀석 아닐까? 아키츠 료스케.)"
"(뭐? 야, 소름돋는 소리 하지마! 그런 녀석이 왜 여기서 저런 궁상을 떨고 있겠어?)"

난 전생에 뭔 죄를 지었길래 역귀 취급을 받아야 하는걸까요.
...미안. 알고 있습니다. 전생이 아니고 그저 현생에 쌓은 업보악명탓이란 걸.
수근거리는 남자아이들의 인기척에 한껏 쪼그려앉은 룬은 긴장한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궁금한데...한번 얼굴을 확인해볼까?)"
"(야, 야. 그만둬. 신경을 거슬리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팬다고 악명이 자자했잖아.)"
"(옷 갈아입는 척하면서 가까이 가면 괜찮지 않을까?)"
"(멀리도 아니고 탈의실 중간까지만 가도 알텐데?)"
"(...그정도라면 괜찮을까?)"

위험해!
잘못하다간 이쪽으로 다가올것 같아서 고개를 살짝 뒤로 빼서 학생들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오면 갈아버린다?"

금발에 특징적인 수염을 본 학생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 진짜 아키츠 료스케?"
"젠장! 이런 곳에서 만날줄이야...합!?"

말실수를 하곤 입을 가리며 눈치를 보는 학생의 모습에 속으로 한탄하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찬란한 인생 역정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주로 빌어먹을 불량배들에서부터 오해로 가득찬 시선을 보내오던 학생들과의 기억),
고뇌로 가득차 비탄에 빠진 얼굴이 되도록 애썼다.

"고민중이니까 번거롭게 굴지말고 얌전히 욕탕에나 들어가라고."

"네, 넷!"

푸르러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건데 내 얼굴은 애통함보다는 흉악함을 전달해준 것 같았다.
당황하던 학생들은 급히 대답하곤 최대한 내게서 떨어진채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뭐, 어찌됐건 겨우 한시름 놓은건가. 안도감이 밀려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녀석들만 떠나면 얼른 밖에서 새 수건을 가져다 룬에게 건네주자.
한시라도 빨리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수 있기를 기원하며 시간이 흘러가기만 기다는데 허리춤이 어째 허전해졌다.

스르륵-
툭-

...어?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휑한 기운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니,
방금전 룬에게 주려고 반쯤 풀어놓았던 타월이 느슨해졌는지 허리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요컨데 지금의 나는 알몸.
숨을 삼키는 룬의 소리에 상황을 이해하곤, 머리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바닥에 앉은 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벽을 짚고 선 나와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은채 나와 마주한 룬.
바로 눈앞에서 나의 아드님과 마주한 룬은 경악한 나머지 입을 벌려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아..."

야!? 입 벌리지마? 뜨거운 한숨이 거기에 닿고 있다고!?

"(히익!?)"

룬의 입에서 새어나온 따뜻한 숨결에 닿아버린 아드님의 기세는 순식간에 스피어 더 궁그닐.
불가항력이라는 변명을 늘어놓기에는, 생리현상이란 미명하에 여자아이의 코앞에 그걸 내밀어버린 현재 상황은 난처하기 그지 없었다.

"(치, 치워...!)"

"(뒤로 물러났다간 들킨다고!?)"

안그래도 흘러내린 타월을 주울 생각도 안한채 부자연스럽게 벽짚고 서있는 내 모습을 힐끔힐끔 이상하게 쳐다보는 녀석들의 시선이 신경쓰이고 있는데,
여기서 엉덩이를 조금이라도 뒤로 뺐다간 직각으로 일어선 아드님의 옆모습을 탈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들킬 확률 100%라고!?
지금까지 겪어왔던 오해의 레퍼토리를 참조해서 녀석들의 반응을 예측해보면 어떻게 될까?
'최종귀축으로 진화한 아키츠 료스케는 작금에 이르러선 무생물인 탈의실 벽마저 겁탈하는 경지에 올랐도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내 항변에 룬은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열다가, 바로 코앞에서 뜨거운 입김에 자꾸만 반응하는 아드님의 모습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벽에 뒤가 막혀 물러설곳이 없던 룬은 이 이상 없을만큼 붉어진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룬이 눈을 감자 나도 어느정도 사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케이, 진정하자.
닿을지도 모르는 서로간의 간격을 이 상태로 계속 유지하는것도 고문이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번뇌에 빠진 아드님을 진정시키는거다.
하나- 둘- 하나- 둘-
차분히 숨을 들이쉬며 내뱉는다.
느릿느릿 내쉬는 호흡에 맞춰, 거세지던 아드님의 기세도 잠시 멈칫했다.
좋아. 이대로 계속 가는거다.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숨을 들이킨다.
탈의실의 갑갑한 공기 중으로 희미한 비누향의 부드럽게 코에 스며들었다.
음, 좋은 향기네. 남자들의 땀냄새나 맡을줄 알았더니 꽤나 괜찮은 향이잖아?
청량함이 느껴지는 비누 내음은 아래로부터 풍겨져 나왔다.

...음? 그러고보면 아래쪽엔 룬이...

비누거품이 잔뜩 묻은 룬의 알몸을 떠올리자, 방금까지의 노력도 허무하게, 진정해가던 아드님은 순식간에 뻣뻣한 콧대를 한껏 들어올려 버렸다.
...진정시키기 실패.

호흡을 고르다말고 끽하고 목졸린 듯한 소리를 내어버린 내 숨소리에 살며시 눈을 뜬 룬은,
다시금 치켜올라가는 아드님을 보곤 불이 날듯 얼굴이 빨개지며 다시 눈을 감았다.
주섬주섬 옷을 입는 남학생들의 수근거림을 배경음으로, 룬과 나에게 있어 서술하기조차 민망한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이윽고 남학생들이 남탕에 들어가고 다시 룬과 둘만 탈의실에 남게 되자, 벽에서 손을 떼고 룬에게서 물러났다.
몸을 일으킨 룬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믿을 수 없어! 이 변태!
그, 그...! 그런걸 내 코앞에서...!"

"미안해..."

"...최악이야..."

다시금 주저앉아서 우울한 얼굴로 침체한 룬의 모습을 보다가 탈의실을 나섰다.
탈의실 밖에서 새 수건을 허리에 두른뒤, 여분의 수건 몇장 들고 다시 탈의실로 돌아와 룬에게 건네었다.

"여기, 수건..."

"......"

룬은 말없이 수건을 건네받곤 몸을 닦았다.
뒤돌아서서 남탕과 탈의실 밖에서 오는 사람이 없는지 주의하고 있자, 어느새 룬은 옷을 갈아입는걸 끝마쳤다.
사과해오는 나를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룬은 내키지 않는다는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날 구해줬으니까 이번은 용서해줄께."

"...정말?"

"딱 한번 뿐이야. 대신! 오늘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마. 알았어?"

"아, 물론이지!"

다행히 예전에 도움을 준 것 덕에 룬에게 용서를 받을수 있었다.
흥분한 아드님을 면식있는 이성에게 생으로 보인다는,
나로서도 잊고싶을 만큼 부끄러운 경험을 한터라 우울하기 그지없었는데 그나마 다행인가.
한숨을 쉬며 안심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룬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손가방을 집어들었다.

"가는거야?"

"언제까지 남자 탈의실에 있을 순 없잖아?"

탈의실 문앞까지 걸어간 룬은 살짝 고개를 돌려 힐끗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네 등은 의외로 보통이었구나?"

"...응?"

"야쿠자니 뭐니 하길래, 등에 도깨비 문신이라도 하고 있을줄 알았는데 말야."

문신같은거 바늘이 안박히니 무리고(할 생각도 없지만), 애초에 야쿠자도 아닙니다.
룬은 떨떠름한 얼굴로 선 날보며 피식 웃곤 탈의실을 벗어났다.

혼자 탈의실에 남아 멍하게 서있던 난 쓴웃음을 짓곤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마지막에 조금 뜬금없으면서도 오해섞인 발언을 들은 덕에 기분은 묘했지만,
부끄러운 일을 겪어 룬과 서로 서먹하던 분위기가 한결 나아진 느낌이다.
혹시 룬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푸는 대화였던걸까?
룬이 떠나기 전에 뭐라도 맞장구를 쳐주는 편이 나았을거라 아쉬워 하곤 다시 남탕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제대로 목욕을 하지도 못했고, 방금전 욕탕에서 룬이 매달려왔을 때 묻었던 거품이 아직 등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남탕에 들어가 구석가에 있는 목욕탕 의자에 앉았다.
방금전 벌어졌던 해프닝 때문인지 사람들은 애써 나와 거리를 두려하는 모습이었다.
수근거리는 소리에 신경쓰고 싶지 않았기에 얌전히 몸을 씻는데만 몰두했다.
한참 몸을 씻고 있으려니 바로 옆자리에 뚱뚱한 남자 한명이 앉아서 샤워기를 틀어 씻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한두칸씩은 떨어져서 씻는데 바로 옆사람 근처에 앉다니 유들유들한 사람인가보네.
피식 웃곤 머리에서부터 물을 끼얹으려고 눈을 감았다.

터억-

순간, 머리에 무언가 닿았다.

"아하하하! 해냈다구요 형님~!"

눈을 뜨자 옆에 앉았던 뚱보가 환호성을 지르며 남탕 밖으로 뛰쳐나가는게 보였다.

"...뭐야 저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 머리에 장난을 치다니, 이상한 사람도 다있네.
투덜거리며 머리에 얹어진 물체를 치우려고 손을 올렸다.
하지만 얼굴 높이까지 올라가던 손은 도중에 움직임을 멈춘채 굳어버렸다.

"...어? 몸이?"

어쩐지 익숙한 감각과 함께 멈춰버린 몸에 당황했다.
역빙의? 아니, 그거랑은 어쩐지 미묘하게 다른데?
혼란스러운 마음과는 무관하게 몸은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욕탕 의자에서 일어나 어색한 동작으로 남탕을 벗어나던중, 벽에 걸린 반신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위에 고정되어 있는, 소형 카메라가 장착된 금속 안테나.

결론. 몸을 뺏겼습니다. 역빙의가 아니라 이상한 기계를 머리에 씌워져서.

하하하!



...웃을일이 아니잖아!?

경악해하는 내 마음을 무시한채 내몸은 멋대로 남탕을 벗어나 한곳으로 이동했다.
이동한 곳에서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벽이 있었다.
여탕과 이어진듯, 구멍 너머에서 여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구멍너머로 상황을 살펴보자 목욕탕 천장까지 닿을만큼 거대한 사족보행 로봇이 금빛 장발을 기른 여자아이, 야미와 대치하고 있었다.

"SOLGAM의 무인형 전투로봇이군요..."

또 SOLGAM 이야? 야미의 입에서 재수털리는 녀석들의 이름을 들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당연한 결과라고 할까, 야미에게 덤벼들던 전투 로봇은 순살당했다.
로봇의 목에 올라탄 야미가 양팔을 돌리자 우드득-!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로봇의 목이 뜯겨져나갔다.
목이 뜯겨져나간 로봇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며 단순한 고철이 되어버렸다.

"이런 구식 로봇 상대론 능력을 쓸것도 없습니다."

과연 야미는 대단하네. 전설로 불렸다는건 빈말이 아니었군.
집채만한 크기의 로봇이 어린 소녀에게 박살나는 광경은 비현실적이기 그지없었다.
무심코 탄성을 내뱉을때, 머리위에 달린 컨트롤러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큿!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이제부터가 진짜다!』

"어? 어?"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여탕으로 통하는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야 임마!? 안돼!"

비명과 함께 여탕에 착지하자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키츠 료스케?"
"료스케?"
"료스케 오빠?"
"꺄악! 뭐야 이 변태 수염!"

눈이 살짝 크게 뜨여진 야미.
놀란 얼굴의 라라.
수건으로 몸을 가린채 당황하는 미캉.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룬.
...에? 룬? 다시 몸을 씻으러 여탕에 들어온건가!?
난데없는 남자(나)의 등장에 여탕 안은 혼란에 빠졌졌다.
여성들의 목소리로 여탕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야미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키츠 료스케...결국 이런 짓까지 하게 되었군요."

"자, 잠깐! 이건 내 의지가 아냐!"

"그럼 뭐하는 온겁니까 당신은?"

"그러니까..."

『아키츠 료스케라고 했던가? 이녀석에게 특수 생체병기 안테나를 붙였다.
지금은 내 조종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지.』

"...씻으러 왔다가 우주인에게 조종당했습니다."

친절한 설명 고마워요 빌어먹을 우주인 자식아.
아무래도 야미의 현상금을 노리고 덤벼드는 현상금 헌터 같다.
하필이면 여탕에 있을때 습격해온걸 보면 헌터가 아니라 단순한 변태일지도 모르지만.

『조사에 따르면 이녀석은 너와 정면으로 마주하고서도 살아남은자라더군.
심지어 데빌루크 성인과도 대등하게 싸웠다지?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천명의 인간과 싸워 이겼다고도 하고, 이 행성 마피아의 비밀병기이기도 하다던데.
이보다 더 믿음직하고 굉장한 패는 없지!』

...헌터 맞군요.
다만 정보수집을 판타지로 하셨네요.
1:1000의 대결이라든가 비밀병기설 같은건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입니다.

『형님! 계획대로 안테나 붙이고 왔습니다!』
『알고 있어. 지금 조작 중이다.』

방금전 목소리는 방금전 남탕에서 만났던 뚱보?
처음 들렸던 헌터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자아, 금색의 어둠! 이번엔 쉽지 않을거다!
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우하우하 해주지!』

이 변태가!?
터무니없는 헌터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난 야미를 향해 돌진해갔다.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던 야미는 슬쩍 옆으로 피하더니 다리를 들어 내 배를 걷어찼다.

퍼억-!

"우아앗~?"

야미에게 맞고 뒤로 날려버려져선 방금전 기능이 정지한 사족보행 무인로봇의 배 아래로 떨어졌다.
불행하게도 바닥의 충격이 전해졌는지 네발로 서있던 로봇이 균형을 잃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날 깔아뭉개버렸다.

쿠우웅- 우직-!

"꺄악! 료스케 오빠!?"
"료스케!"

로봇의 배로 시야가 가려진 가운데 미캉의 비명와 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닥과 로봇사이에 샌드위치마냥 끼인게 우스꽝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나 무사하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몸위에 걸터앉은 로봇의 몸통을 양팔을 벌여 잡았다.

구구궁...끼기긱-

"에?"

그그극-

"거, 거짓말..."

미캉의 경악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로봇의 타원형 몸뚱이를 들어올리며 일어섰다.
팔로 잡은 부분이 우그러져버린 로봇을 안테나의 내장 카메라로 보던 헌터가 탄성을 내뱉았다.

『...후, 후후...후하하하하!
이건 기대이상의 물건인데?』

우지끈- 콰지직-


환희하는 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봇의 허리에 박아넣은 양팔에 힘이 들어가며 그대로 로봇을 허리부터 두조각으로 찢어버렸다.
난데없이 벌어진 차력쇼에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동그래지는 광경을 보자니 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봤느냐 이 힘을! 계획대로다!』
『대단합니다 형님!』
『강인!무적!최강! 아하하하하! 그야말로 최고의 패를 뽑았다!
이녀석만 있다면 금색의 어둠을 잡는것 따윈 식은죽먹기!』

이 자식들, 남의 몸 갖고 맘대로 떠들지 말라고.

『간다! 에너미 컨트롤러! ABBBB ABBAAA!』
『...형님, 또 이상한걸 보셨습니까?』
『괜찮잖아? 미개행성의 문화치곤 재밌었단 말이다.
이대로 금색의 어둠에 다이렉트 어택!』

뭐야 이 만담 개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다시금 야미를 향해 덤벼들었다.
야미는 태연하게 머리카락으로 수십개의 주먹을 만들어 날렸고, 난 전신에 주먹을 맞고 다시금 뒤로 날려졌다.
젠장, 오늘 몸 한번 험하게 굴리겠구만!

『혀, 형님!』
『괜찮아. 조작이 가능한걸보면 데미지는 적어.』

내가 안 괜찮습니다.
뭐야 이 바보같은 돌격은?
상처없는 내 모습에 야미의 머리카락이 변형되어 철퇴와 칼날로 바뀌었다.

"과연...이해했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당신을 상대로 봐주는것 따윈 사치였다는걸..."

"자, 잠깐?"

야미가 본격적으로 싸움에 임하려는 태도인것 같아서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계속 야미랑 겨루게 되어봤자 내게 좋을건 없고,
무엇보다 여탕에서 여성들의 알몸을 바라보는것도 사회적인 의미로 아웃이고,
이런 장소에서 허리에 수건 하나 두른채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계속 연출하는것도 민망하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것 같았다.

"야미, 부탁이 있어."

"유언입니까?"

"유언!?"

부정의 뜻으로 고개를 휘휘 저으려다 포기했다.
조종당하고 있으니 고개마저 맘대로 안돌아가...

"10분만 시간을 끌어줘."

"10분?"

"그래. 10분만 버티면 야미 네 승리다."

몸의 제어를 빼앗긴 적이야 수십번은 되니까.
이번 경우는 조금 특수하지만 대처법은 충분하다고.
내 말에 잠깐 생각하던 야미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뭔가 꿍꿍이가 있겠지요."

「하지만...」으로 말을 이은 야미는 어째선지 머리카락을 치켜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시간을 끄는 건 좋지만, 이대로 쓰러뜨려 버려도 상관없겠지요?"

"...응?"



『후하하하하! 끝이다!』
"큭! 이렇게 강할줄은!"
"료스케 안돼!"
"료스케 오빠 정신차려요!"
"아키츠군! 제발 그만둬!"

일방적으로 야미를 몰아붙이는 내 모습에 라라와 미캉, 룬이 다급히 외친다.
라라가 야미를 도와 싸우지만 2:1이 되었는데도 전황은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다.
드디어 쓰러진 야미와 라라에게 마무리 공격을 넣으려는 순간, 내지른 주먹이 야미의 코앞에서 멈춘다.
어리둥절한 야미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10분이 지났군. 타임아웃이다."
『뭣!?』

손을 들어 머리에 꼽힌 컨트롤러를 떼어낸다.
컨트롤을 벗어난 나의 행동에 헌터가 경악한다.

『어, 어떻게?』
"알거없어."

육체를 빼앗기는거야 수십번도 더 당해봤으니까.
흥미로운 육체 조작법이었지만 이제 적응했다.
힘밀기로 무식하게 제어를 찾을수도 있었지만, 역시 스마트하게 몸을 되찾는게 취향이란 말이지...
그리하여 멋지고 강한 아키츠 료스케는 현상금 헌터들을 묵사발내고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잘됐군 잘됐어~



...라는 전개를 생각했던적도 있었습니다...

「전투력 측정기스카우터」라고 들어보았나?
이 시점에 와서 3분컵라면 전설 야채 왕자님 같은 꼴을 당하게 될 줄이야...



10분 운운이 끝난 직후 덤벼든 나의 직선적인 공격을 피하던 야미는 별안간 뒤로 뛰어서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욕탕 안에서 우햐우햐 해주마!』

헌터 녀석의 얼씨구나 하는 목소리가 컨트롤러에서 들리며, 내 몸은 바닥을 박차고 허공에 떠서 욕탕으로 포물선 운동을 하며 떨어져 내렸다.
아...공중에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낙하하는 경험은 처음이다.
아래로 하강하는 내 모습을 보던 야미는 머리카락을 움직였다.
욕조에 가득찬 물 속으로 깔린 머리카락이 보자기처럼 넓게 퍼지며 수면위로 거세게 솟아올랐다.

푸화악-!

솟아오른 야미의 머리카락과 함께 욕탕의 물들이 폭발하듯 터지며 허공에 뜬 내게 쏟아졌다.

『우왓! 뭐, 뭐냐?』

그야말로 하늘을 향해 폭포수같은 기세로 역류하는 물벼락에 시야가 가려지자 헌터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수영장에서 봤던 물장구의 응용인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물벼락을 가르면서 야미가 위로 뛰쳐올라왔다.

퍼어억-!

"으아앗!?"

휘둘러진 머리카락 펀치에 맞고 튀어올라가 천장에 부딪히곤 바닥에 추락했다.
바닥에 부딪힌 직후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눈앞에서 폭우처럼 쏟아지는 주먹을 맞고서 한쪽 벽에 처박혀버렸다.
형편없이 당하는 내 모습에 헌터가 아연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 어째서 이런...!
분명 조사에 따르면 힘으로는 금색의 어둠을 상회할텐데...!』

등신아. 컨트롤이 문제라고...

격투게임으로 치면, 고수랑 초보의 승부.
야미도 실내라서 날개같은건 꺼내지 못하고, 수건으로 몸을 가리느라 한손을 쓰지 못한다는 패널티가 있다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걸 패널티로 놓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수준차다.
헌터녀석의 조작능력이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

우선 시야를 확보할 수단이 머리 위에 장착된 카메라 뿐인게 문제다.
소형 카메라가 볼수있는 좌우 시야각의 제한 문제도 있고, 머리 위에 부착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 아래쪽의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야미가 근접해서 다가오면서 아래로 몸을 숙이거나 옆으로 돌아 공격하기만 해도 카메라로는 야미를 볼 수 없다.
쉽게 말해서 바로 오른쪽에 멀뚱멀뚱 서있는 사람조차 카메라는 인식할 수 없단 거다.
(1인칭 시점의 슈팅 게임에서, 바로 옆에서 점프하며 장난을 치는 적군조차 눈치채지 못하다가 바보같은 죽음을 맞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반사신경의 문제도 있고, '수동조작'으로 인해서 '보고, 조작하고, 반응하는데' 걸리는 시간차.
게다가 안그래도 상황이 나쁜데, 헌터 녀석은 여자들 알몸을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려서 컨트롤도 건성으로 하고...
정면을 가드하지도 않은채 무작정 타월을 벗기려고 양팔을 벌린채 돌진하다가 얻어맞았을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전술은 커녕 상식조차 없는 지경.
대놓고 말하자면 '기체는 좋았지만 사용자가 저급'이네요.
이걸로 이길 생각이 있었다면 넌 정말 바보다.

근데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면 나도 마음이 좀 아파...

소녀들 상대로 「나 쎄에에에에에!」 하며 주먹을 휘두르는 망나니 짓을 할 생각따윈 애초에 없었어.
보통 적으로 돌아서면 파워업 보정이 붙는게 정석이라지만, 솔직히 보정 같은건 없어도 돼.
「아군일 때는 든든하지만 적일 때는 최악」이라는 대사도 있지만 그것까지도 바라진 않아.

전투는 브레인이야... 스마트하게 싸워야 한다구.
누가 내 몸 가지고 이렇게 무식하게 싸우래?
덕분에 난 야미의 공격을 한대도 못피하고 전부 직격당했다고. 그야말로 샌드백처럼.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마법의 가을」은 중학교 3학년때 이미 끝났나 봅니다.

워낙 정신없이 당하다보니, 육체 컨트롤을 되찾을 시도는 생각도 제대로 못하고 허무하게 시간만 흘러버렸다.
싸움은 유효타 하나없는 공방의 계속이었다.
야미는 엉망진창인 내 움직임을 전부 피해버렸으니 데미지가 없었고,
나야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도 끄떡없는 몸덕에 여전히 팔팔한 상태였다.
무너진 벽더미에서 상처 하나 없이 몸을 일으키는 날 보곤 야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터무니없이 튼튼하군요 아키츠 료스케..."

"...지금은 이 몸이 원망스러운데...
정말이지 이렇게 많이 얻어맞은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라구?"

대체 몇발을 먹은거야?
세자리수는 아니라는게 다행이지만.

"후...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건 야미 네가 세번째다."

"...갑자기 왠 되도 않는 폼을 잡는겁니까 아키츠 료스케?"

"...미안. 조금 분위기 타봤어."

결국 또 엉망진창으로 당할거라면 말만이라도 폼나게 하고 싶었다구!

"아무튼, 그럼 앞의 두명은 누구입니까?"

"저스틴이랑 라라."

"그럼 프린세스.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맡겨줘!"

"...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야미를 도우려고 라라마저 전투에 참전해버렸다.

『2:1 인가...! 그래도 이쪽은 아직 데미지가 없다고!』

야, 야 이 빌어먹을 중생아...!
직접 싸우는게 아니라고 너무 태평한거 아냐?
싸울 의욕 만만해보이는 라라의 모습에 식은땀이 날것 같았다.
'산넘어 산'이란건 이런 경우를 말하는거로군.

선공은 라라였다.
「이얍!」하는 기합성과 함께 내질러진 주먹에 맞고 또다시 하늘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
맞을때마다 이렇게 가볍게 날아가다니 평소라면 꿈도 못꿀 경험을 하게 만들어 주는군, 빌어먹을 헌터 자식...
여전히 변함없는 움직임으로 일어서는 내 모습에 라라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라? 직격했는데...?"

『후후후후후...철벽철벽철벽~! 이몸은 무적이다!』
『그것도 만화의 대사입니까 형님?』

지금 얻어맞고 있는건 나라고!
그리고 그 대사는 뭐야? 철벽의 파알? 원○스?
강철봉 한방에 쓰러져버린 녀석의 대사같은거 재수없을 뿐인데.

라라는 우우하며 볼을 부풀리더니 꼬리를 들어올려 꼬리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저건 설마...빔공격?

"얍-!"

빠직!

"읏!?"

라라의 꼬리에서 쏘아져 나온 빔에 맞아서 타월이 너덜너덜해졌다.

"윽, 또냐...!"

「「「꺄아~~~」」」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타월에 당황하는 가운데 여자들의 교성이 들렸다.
주변으로 주의를 향하자 이쪽을 향해 눈을 가리면서 호들갑을 떠는 아가씨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붉히면서도 눈을 가린 손틈으로 힐끗힐끗 훔쳐보는 여자들의 모습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니 이 아가씨들은 도망도 안가고 대체 뭘 구경하고 있는거야!?
라라의 빔공격 후 나를 관찰하던 야미가 중얼거렸다.

"...상처하나 없군요..."

아, 그건 참 불행중 다행이지.
이 무식한 헌터 놈이 도무지 피할 생각을 안하는데도 몸이 건사한 지금은, 튼튼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다만...소년만화 배틀물에선 남자는 상의가 벗겨질 지언정 하의는 팬티조차 노출시키지 않는다던데,
정작 허리에 둘러진 내 타월은 빔을 맞아 걸레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정적인 타격을 받지않고 계속 일어서는 내 모습에, 라라와 야미는 다른 방도를 생각하려는지 공격을 잠시 멈췄다.
야미와 라라의 협공에 이리저리 엉망으로 당해버린 내 모습에 헌터가 혀를 찼다.

『쳇...시드만 터진다면 2:1 상황 쯤이야 단숨에...』
『형님! 알수없는 대사는 이제 그만하세요!』
『너무 흥분하지 마. 유산균은 잘 섭취하고 있는거냐?』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니까요!? 대체 지구에 와서 얼마만큼의 만화를 본겁니까?』
『후후, 넌 네가 먹은 빵의 개수를 기억하나?』
『...영문을 모르겠어!』

만화에 심취했구나 헌터 녀석들.
머리위에서 떠들어대는 소리에 푸욱 한숨을 내쉬는데 야미가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야미?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거야?"

"아뇨, 별거 아닙니다. 만화라고 하니까 잠시 소년만화의 필살기 같은게 떠올랐을뿐..."

"싱겁긴..."

최근에 읽은 영웅학원 이후로 야미는 만화에도 어느정도 관심을 가진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야미도 필살기 같은게 있으려나?
머리카락으로 날리는 거대한 금빛 주먹을 보면 떠오르는건 석파천경권이었는데.
야미의 호칭도 '금색'의 '어둠'이니까 갓 핑○라든지 다크니스 ○거 같은것도 어울릴것 같고.
...설마 지금 이 장소에서 쓸 필살기를 생각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몸이 튼튼하건 어쨌건간에 애초에 필살기 같은 흉악한 공격은 절대 맞고싶지 않다.

헌터들의 만담동안 야미와 대화를 나누면서 지루한 대치가 계속되던 중 보다못한 룬이 라라를 불렀다.

"라라! 그러지말고 뭔가 좀 해봐! 네 발명품으로 저 컨트롤러를 어떻게 할순 없는거야?"

룬의 외침에 라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그래! 페케를 불러서 만능툴을 쓰면..."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둘 것 같으냐!』

몸이 앞으로 튕겨나가듯 쏘아지면서, 몸을 돌려 여탕 입구로 향하던 라라를 뒤에서 껴안았다.

"엣?"

『후후...데빌루크 프린세스의 두뇌는 은하에서도 유명하지.
그렇게 하도록 놔둘만큼 방심하지 않아.』

"후엣?"

"으, 으악!?"

라라의 등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집어넣은 양손으로 라라의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하자,
라라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새어나와 나도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나랑 라라가 당황하는것과 별개로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걸었다.
움켜쥔 라라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손가락을 통해 전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우홋! 빈유도 좋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혀, 형님? 원래 목적은?』
『바, 바보녀석! 데빌루크의 공주를 내버려둔다면 무슨일을 저지를지 모른단 말이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바로 승리의 열쇠다!』

"히야앗?!"

말은 진지한 주제에 성희롱하지 말라고!
계속되는 애무에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라라는 날 뿌리치려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헌터의 조작이 어떻든간에 힘은 내쪽이 우위였기에 라라는 쉽사리 내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라의 어깨에 걸쳐놓듯 올려진 내 얼굴을 라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향긋한 샴푸 내음이 풍겼다.
으으응- 신음하면서 성대를 울리는 소리가 얼굴에 전해지며 간지러운 느낌이 뇌를 자극했다.
...이럴때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난...
자기 혐오에 빠지려는 나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라라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면서 라라의 엉덩이가 자꾸만 내 몸을 스쳤다.

나: 아들아 이게 무슨 짓이냐?
아들: 최종귀축의 자리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님.


"료, 료스케... 엉덩이에 뭔가가 닿았어..."

움직이다말고 얼굴이 빨개져서 소근거리는 라라의 목소리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탁이니까 움직이지 말아줘..."

"하, 하지만...아읏..."

울상을 지으며 뭐라고 말하려던 라라는 다시금 가슴을 희롱당하면서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우히히~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좋구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는건 인정하지만, 댁같은 변태마냥 흥분하고 싶진 않습니다.
흥분한 헌터의 외침속에서 파렴치하게 가슴을 비비는 손길에 라라가 다시금 저항했다.

"아...안돼 료스케..."

『돼!』

자꾸만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라라의 목소리 덕분에, 지금 상황에 대한 곤혹스러움과 여자아이를 강제로 희롱한다는 수치심이 더해져 양심이 붕괴할것만 같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야미와 시간을 끌면서 몸의 컨트롤을 찾았어야 했는데, 시간을 벌기는 커녕 야미에 의해 엉망진창으로 당하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몸을 제어할 엄두도 못냈다.
필사적으로 몸의 제어를 되찾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하려던 찰나, 헌터의 외침이 귀를 때렸다.

『좋아, 그럼 이제 타월을 벗겨!』

"야, 야!? 제발 이제 그만둬!?"

지금도 이미 충분하리만큼 최악의 변질자 행위인데, 이이상 내 업보를 쌓게 하지 말라고!
정신 집중하는 것도 잊고 기겁해서 소리치자 친절하게도 대답이 돌아왔다.

『하! 네말에 따를 의리는 없다!』

내용은 전혀 친절하지 않았지만.
괴로운 신음을 흘리는 라라의 몸에서 이미 반쯤 흐트러진 타월을 천천히 잡아당기는 내 손을 배덕감 속에 지켜보며 외쳤다.

"썸바디 헬프 미~~~!"

"변태는 퇴치합니다!"

퍼어억-!

"미이이~!?"

야미의 외침과 함께 옆구리에 강렬한 발차기를 맞고 라라에게 떨어져 훌훌 허공을 날아올랐다.
천장을 향한채로 바닥에 쓰러진 직후, 왼뺨에 충격이 전해지면서 고개가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배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야미의 왼발이 내 배위에 올려져 있었다.
즉, 지금 내 왼뺨을 짓밟고 있는 조그맣고 어쩐지 말랑한 물체는 야미의 오른발이로군요.

『아, 안움직여?』

개그 보정이라도 들어갔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헌터의 조작에도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아키츠 료스케..."

"야, 야미?"

"당신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이렇게 저질스러운 행동을 하는군요."

"야, 그건 내가 아니...「꽈아악-」으갸갸~?"

볼을 내리누르는 힘이 강해지면서 머리가 바닥을 파고들듯 짓눌렸다.

"이, 이렇게 된건 정말 할말이 없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자의가 아니었다고? 으긋...!"

잘근잘근 뺨을 짓눌러대는 야미를 설득하려고 필사적으로 야미의 얼굴쪽으로 눈알을 굴리다가 흠칫했다.
타월 아래로 빠져나온 양다리. 내 얼굴을 밟으면서 벌어진 허벅지 안쪽이 드러나보이며 무심코 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 야미."

"변명할 거리가 있다면 어디한번 해보시죠 아키츠 료스케."

"그...타월은 좀더 잘 가리는게 좋아."

"!? 어딜 보고 있는 겁니까!?"

퍼억-!

"꿱~!?"

야미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곤 황급히 가랑이 사이를 가리며 머리카락 펀치로 내 몸을 강타했다.

"참아 야미짱!"
"야, 야미짱 진정해!"

바닥에 쓰러진채 난타당하는 내 모습에 놀란 라라와 미캉이 야미를 말리러 가까이 다가왔다.

"어? 벌써 끝난거야?"

어느새 탈의실에 다녀온 모양인지 한손에 손가방을 든 룬이 가까이 다가왔다.

"룬, 그건?"

"아, 혹시 몰라서 치한퇴치용 도구를 가져왔는데...아무래도 쓸일이 없었나보네."

바닥에 큰대(大)자로 쓰러져있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룬은 손가방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내 한쪽 팔이 뻗어져 나가면서 룬의 발목을 붙잡았다.

"엑? 뭐, 뭐야!?"

『후후, 방심은 금물이지.』

이죽거리는 헌터의 목소리와 함께 룬의 발목을 잡은채로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확실히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는데..."

『아, 나도 이대로 끝장인가 싶었는데, 이 녀석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매번 내 기대를 배반해주는군.』

"익! 아키츠군! 이거 놓지 못해?"

"미안, 무리."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면 한참도 예전에 바닥에 엎드려 모두에게 사과했을거라구.

야미는 룬을 인질로 잡고 선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주보았다.
라라는 붉어진 얼굴로 살짝 눈을 치뜬채 타월로 몸을 가린채 서 있었고, 미캉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인질극에 긴장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룬의 몸을 뒤에서 단단히 잡고나서, 헌터는 득의양양하게 명령했다.

『자, 인질의 목숨이 아깝다면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 물러나라.』

"......"
"룬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룬 언니..."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세명을 보며 헌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후후, 그럼 다시금 즐겨볼...아니 승부를 내볼까? ...응?』

헌터의 도착적인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룬의 가슴을 위에서 내려다 보게된건 최악의 경험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며 보인 광경은, 고개를 숙인 바로 그 타이밍이야 말로 최악이었다는걸 깨닫게 해줬다.
몸을 가린 수건 위로 동년배에 비해서 도드라져 보이는 룬의 가슴 계곡 같은건 문제도 아니었다.
용감하게도 혹은 무모하게도, 룬은 어떻게든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손가방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막 어떤 물체를 꺼내던 도중이었다는 것이다.
분명 지금 이 장면을 목격한 것은, 빌어먹을 악운이 악당을 가호한 것처럼, 헌터에게 있어선 분명 최고의 행운일 것이다.
컨트롤러의 카메라 너머로 룬의 행동을 파악하자마자 헌터는 내몸을 조종해 룬의 손목을 잡아챘다.

『허튼짓 하지마!』

"꺄악!?"

놀란 룬은 비명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타원형 물체를 놓치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타원형 물체는 바닥에 충돌하는 순간 폭음과 함께 대량의 가스를 방출했다.

펑-!

"흡-!"
"꺄!?"
"읍!"

가스에 휩쓸리면서 야미와 미캉은 급히 호흡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고, 라라도 놀라면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나야 당연하지만 피하지도 못하고 가스를 그대로 흡입해버렸다.
무슨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최루탄 같은 물건이 아닌게 다행인가.
가스가 사라져 라라와 미캉의 모습이 보인 순간 눈이 튀어나올것만 같았다.
방금전 몸을 가리던 수건을 어디로 뒀는지 둘 다 알몸을 드러낸채 당황하며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효~! 멋진데!』

헌터의 환호성을 들으면서 충격적인 장면에 뻣뻣하게 굳어있으며(애초에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지만) 문득 생각했다.
야미는 어디로 사라진거지?
의문을 떠올리기 무섭게 등뒤에서 금빛 머리카락들이 뻗어져나와 룬을 잡고 있던 손을 낚아챘다.
풀려난 룬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고, 몸을 돌리려던 난 등뒤에서 야미의 난타 공격을 받고선 그대로 정면의 벽으로 날아가 충돌했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때 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앗! 이로 두꺼비의 옷 소멸 가스를 꺼내버렸잖아!?"

옷 소멸 가스? 뭐야 그게!?
야미와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우주 두꺼비의 옷 녹이는 액체랑 비슷한건가?
그래서 가스 범위안에 있던 사람들(야미, 미캉, 라라, 룬)의 수건이 녹아버린거로군.
거꾸로 벽에 박혀 생각하던 중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져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반신이 휑하다...

호들갑을 떨면서 눈을 가리는 여성들의 모습에 가증스러움이 느껴졌다.
어이 거기! 꺄꺄 하면서 손가락 사이로 다 보고 있잖아요!?

『우햐햐~! 천국이다!』

아니오. 지옥입니다.
몸을 가리려 애쓰는 야미와 룬의 모습에 흥분한 헌터의 목소리에 반박하며, 자꾸만 화끈거리는 볼을 쓰다듬고만 싶었다. 쓰다듬을수 없지만.
죽을만큼 부끄럽습니다...
내 수치심과는 무관하게 헌터의 환호성 속에서 룬에게 덤벼들었다.
당황한 룬이 다시 손가방에 손을 집어넣으려던걸 막곤, 손가방을 목욕탕 한쪽으로 던져버렸다.

"아..."

망연해하는 룬의 몸을 밀어뜨려 바닥에 쓰러뜨리자 내게 깔린 룬을 비명을 질렀다.

"꺄!? 비켜 이 변태야!"

『우홋~! 앙탈을 부리는 모습이 귀여운데~』

"뭐야!"

한손으론 가슴을, 다른 한손으론 다리 사이를 가린 룬의 위에 올라타 천천히 몸을 숙였다.
가슴과 다리를 가린 손을 치우려고 내밀어지는 내 팔을 본 룬은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듯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본 룬은 입술을 한차례 질끈 씹곤 갑자기 양팔을 내목에 둘렀다.
그리곤 목에 둘러진 팔을 끌어당기며 그대로 내 품에 안기듯 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흉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과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룬의 더운 숨결에 귓볼이 새빨개졌다.

"무, 무슨..."
『안보여!?』

"이렇게 하면 카메라로는 안보이니까."

당황한 내게 대답하며 룬은 한껏 몸을 밀착해왔기에 몸을 압박하며 짓눌리는 가슴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빨개진 내 귀에 입술을 가까이한 룬은 입술을 열어 귓구멍으로 숨을 불어넣듯 낮게 속삭였다.

"...원래대로 돌아오면 각오하도록 해."

다만 그 내용은 연인들이 사이좋게 나누는 밀어 같은게 아니라, 씹어먹을듯한 어조의 협박이었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을 끝마친 룬은 양손으로 내 머리를 껴안으며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엣취-!"

커다란 재채기 소리가 따갑게 귀를 찔렀다.
재채기와 함께 발생한 연기가 사라지자 눈앞에는 룬 대신 회색 단발에 자주빛 눈동자를 가진 렌이 쓰러져 있었다.
카메라로 룬의 변신 광경을 목격한 헌터가 이를 갈았다.

『남자!? 제길...! 메모루제 성인이었나?』
『어, 여자 아닙니까 형님?』
『바보야!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여자일리 없잖아!』
『그건 대체 무슨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까!?』

"누가 귀엽다는거냐아아아!"

퍽-!

렌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내 배를 걷어차며 바닥을 미끄러지듯 내게서 빠져나왔다.
바닥을 짚으며 일어선 렌은 걷어찼던 발바닥을 매만지면서 얼굴을 찡그리다가, 꺄꺄~! 거리는 여성들의 환호성에 황급히 몸을 가리며 숨었다.

『칫, 할수없군. 그럼 다른 녀석으로...!』
『으아악! 잡으라는 금색의 어둠은 안잡고 대체 뭐하시는겁니까 형님!』
『안그래도 그렇게 할꺼다!』

헌터들의 대화가 끝나자 내몸은 다시금 야미를 향해 덤벼들었다.
방금전의 대결과 다르게 유일하고도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나와 야미가 알몸이라는것.
알몸으로 덤벼드는 내 모습을 본 야미의 눈동자가 뱅글뱅글 거리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의미불명의 대사와 함께 무차별적으로 펀치를 날려대는 야미에게선 방금전과 같은 절제된 움직임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자꾸자꾸 일어서서 덤벼드는 나를 상대하면서도 야미는 양손으로 몸을 가렸는데,
아무리 머리카락을 사용한 변화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양팔을 사용하지 못하고 싸우는 방식은 지금까지의 전세를 변화시킬 만큼의 차이를 가져왔다.

야미가 밀리는 모습에 다시금 라라가 참전해서 나와 다퉜다.
알몸인걸 신경쓰지 않고 싸우는 라라는 확실히 뛰어난 전력이었지만,
라라의 체술이 뛰어난건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한 힘대 힘 대결로는 형세를 역전시킬순 없었다.
현재 난 몸을 가릴 생각도, 방어할 생각도 없이 오로지 힘만을 믿고 공격 일변도의 싸움만 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어느 시점에서 균형은 무너졌다.
야미의 머리카락 공격을 그대로 맞으면서 머리카락들 사이로 돌진해서 뚫고 들어갔다.
내게 허리를 잡힌채 쓰러지며 당황해하는 야미의 얼굴이 보였다.
바닥에 쓰러진 야미는 내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근력에서 밀렸기에 쉽사리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야미의 양다리를 무릎으로 찍어누르며, 야미의 양팔을 한손으로 잡아 머리위의 바닥에 내리 눌렀다.
몸을 가리지 못해 새하얀 피부를 드러낸 야미는 얼굴이 붉어진채 몸을 비틀다가 멈칫했다.

"아키츠 료스케..."

"으, 으응?"

"...배꼽에 뭔가 닿았습니다."

...빌어먹을 아서스! 이 패륜아 자식아!
시선을 아래로 내리곤 배꼽위에 얹어진 아드님을 본 야미는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선 거세게 몸부림쳤다.

"큿... 야한짓은... 싫습니다!"

불가항력입니다.

"그만둬 료스케!"

날 말리려고 덤벼든 라라는 휘둘러진 내 손을 피하다가 꼬리를 붙잡혔다.

"꺄악!?"

『방심했군! 데빌루크 여성의 약점이 꼬리라는건 알고 있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손에 거머쥔 꼬리를 매만지자 라라는 확 달아오른 얼굴로 무력하게 쓰러져 버렸다.
야미 위에 올라탄채 한손으론 야미의 양팔을, 다른 한손으론 라라의 꼬리를 잡는것으로 승부는 났다.

"그, 그만...그렇게 문지르지 마..."

"큭...끝까지 응큼한 짓을...!"

쳐다보기 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는 두 아가씨의 모습을 카메라로 지켜본 헌터가 희희낙락했다.

『으히히히~! 드디어 잡았다 금색의 어둠!』
『훌륭하십니다 형님!』

"...멋대로 날뛰는것도 지금뿐입니다."

『아, 설마하지만 컨트롤러를 부술 셈이라면 포기하는게 좋아.
안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부쉈다간 큰일날걸?』

"...!"

칼날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변형시키던 야미는 눈살을 찌푸리곤 변형을 풀었다.

『자아 그럼! 아키츠 료스케여! 금색의 어둠을 희롱해라!』

"...야, 난 그런 변태짓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애초에 나 지금 남아있는 손발이 하나도 없거든?"

『입이 있잖아?』

"뭐, 뭐!?"
"무, 무슨...!"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야미와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서로의 몸에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변태(헨타이), 아니 큰일(타이헨)!
입을 사용한 플레이라는 매니악한 선택지를 제시한 헌터에게 동료 헌터도 당황한듯 말을 더듬었다.

『혀, 형님! 빨리 결착을!』
『바, 바보야! 이대로 끝내기엔 지금까지의 수고가 너무 아깝단 말이다!
적어도 녀석에게 굴욕을 선사하지 않으면...!』
『형님이 이런 변태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뭐!? 이제와서 무슨 말이냐!』

헌터들의 투닥거림속에서도 몸의 멈추지않고 진행을 계속했다.
야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을것처럼 접근하는 내 얼굴에 야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얼굴을 밀어내기위해 머리카락을 일으켜세우던 야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위험합니다 미캉!"

"어?"

"미안해요 료스케오빠! 에잇-!"

등뒤에서 미캉이 달려들어 내 머리에 매달리면서 손에 든 샤워볼로 컨트롤러를 가렸다.

『뭐야!? 앞이 안보여!』

샤워볼에서 나온 바디클렌저 거품이 컨트롤러에 가득 묻으면서 헌터는 당황했다.
물론 나도.
내 머리를 잡은 미캉은 컨트롤러를 가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등에 매달려왔다.
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맨들맨들했습니다.
무엇이?...라고 하진 않는데.
얼굴에 쏠린 피 때문에 양볼이 후끈거릴 때, 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린 거품이 눈에 들어가며 따끔따끔 눈을 자극했다.
......치한 퇴치 스프레이에 당한 이후로 처음 겪는 고통이구나.

"뜨아악!?"

"에? 꺄아아~!"

『고, 공격당했나!? 어디서!?』

내 엄살섞인 비명에 당황한 헌터가 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내 등뒤에 매달려 있던 미캉도 덩달아 비명을 지르면서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카메라 렌즈가 거품으로 가려진 주제에 자꾸만 움직이려는 헌터 탓에 목욕탕을 헤메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비누를 밟고선 허우적대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버렸다.

"우왓!"
"꺄악!"

엉망진창으로 목욕탕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등뒤에 매달렸던 미캉과 뒤엉켜 쓰러졌다.
공교롭게도 미캉이 바닥에 깔리는 형태로.
미캉의 어깨를 지나 바닥에 키스한 내 얼굴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눈물로 거품을 흘려보내며 양팔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며 눈을 떴다.
눈앞에선 신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매만지는 미캉의 새하얀 살결이 보이고 있었다.
「아야야...」하며 살짝 눈물이 맺힌 눈을 뜬 미캉은 눈앞에서 휘둥그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날 발견했다.

"꺄아아! 보지 말아요 료스케 오빠!"

놀란 미캉은 자신의 몸을 덮듯 겹쳐진 내 몸을 다급히 오른발로 밀어내었다.

"흐야악!?"
"히에엣?"

발바닥이 아드님에 그레이즈!

서로의 피부를 자극하는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것 같은 야릇한 감촉에 나와 미캉은 비명을 질렀다.
위험! 진짜로 위험! 제발 참아줘 내 아드님아!
이 상태로 폭발(컨트롤러가 아닙니다)이라도 하면 내 인생은 그야말로 끝장이다.
이미 한참전에 돌이킬수 없을만큼 끝난것 같지만, 훑듯이 스치는건 제발 그마아안!

"미캉에게 뭐하는 짓입니까!"

퍼어억-!
첨벙-!

고함소리와 함께 내질러진 야미의 발차기를 맞고 튕겨져간 나는 여탕 한쪽의 욕탕에 빠졌다.
한껏 물을 들이마시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욕탕물에 눈이 씻겨져 다행히 눈의 아픔은 가셨다.

『후후후...제 2라운드 개시다.』

...불행하게도 카메라마저 복구되었습니다.

『아하하하하! 걸렸군! 금색의 어둠! 이것이 나의 「도주경로」다...
카메라의 거품을 흘려내기 위한 욕조까지의 경로.
네놈은 이 테이가와의 지혜대결에서 진거다! 바로 날 이 욕조속에 빠뜨림으로써 말이다!』

"...함정에 빠진건 당신입니다."

『뭐?』

"잡았다!"

짤막한 외침과 함께 등뒤에서 접근한 라라가 내 양어깨 아래로 팔을 걸어 내 몸을 붙잡았다.
등에서 느껴지는 가슴의 뭉클한 감촉에 혼란해하는 가운데 내 목덜미에서 깍지를 낀 라라가 야미에게 신호했다.

"좋아! 해치워 야미짱-!"

"어?"

야미는 천천히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마광관살포, 갑니다."

관살(貫殺)!? 뚫어!?

"야!? 너 지금 날 죽일 생각이냐!?"

"지금 이 상황에 딱 어울리는 필살기명이더군요.
그리고...변태는 척결입니다."

"노, 농담이지!? 이 오라버니가 잘못했으니까!"

"당신같은 오라버니 둔적 없습니다!"

『그래! 애초에 그 대사는 등뒤의 사람에게 하는 대사란 말이다!
딱 알맞게 꼬리까지 달고 있잖아?』

"댁은 좀 닥치고 있어!"

지금 팔자에도 없는 필살기를 정통으로 맞게 생겼는데 사람 놀리는것도 아니고!
양팔에 힘을 주고 싶었지만, 라라도 필사적으로 내 몸을 구속한 양팔을 꽉 맞잡고 있었고,
애초에 컨트롤이 헌터 놈에게 있는터라 라라의 붙잡기에서 제대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등뒤에서 짓눌러오는 라라의 가슴에도 지금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야미의 모습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큭...이거 잘 안풀리는데!』
『아까처럼 꼬리를 붙잡아요 형님!』
『시야 밖에 있어서 힘들다고!』

헌터는 어떻게든 라라의 꼬리를 잡으려고 내 팔을 조작해 등뒤로 손을 놀렸다.

"어림없어~!"

라라는 능숙하게 꼬리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내 손길을 피했다.

『서둘러요 형님! 금색의 어둠의 기세가 심상찮다구요!』
『알고 있다니까! 젠장, 제발 좀 잡히라고!』
『제가 해볼께요!』
『뭐? 야 임마! 그렇게 함부로 다루면...』

동생으로 생각되는 녀석이 조작하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손의 움직임이 조악해졌다.
꼬리를 잡기위해 허우적대며 움직이던 손길이 엉뚱하게 라라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흐앗...?"

살집좋게 부풀어오른 엉덩이를 더듬는 손길에 라라가 당혹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히익!? 거, 거기가 아냐...!"

자꾸만 가랑이 사이로 향하는 손길에, 깍지를 풀며 도망칠수도 없는 라라는 다리를 오므리며 몸을 뒤틀었다.

『어, 어?』
『이 변태녀석! 위기가 코앞인데 제정신인거냐?』
『형님이 하실 말입니까! 그리고 전 고의가 아니라구요!』
『등신아! 지금 금색의 어둠의 기세가 더 사나워 졌다고!』

"아...읏... 햐앗...!?"

엉덩이를 더듬던 손길에 흐느적대던 꼬리가 결국 손아귀에 잡히자 라라는 힘이 풀린듯 어깨를 잡고있던 깍지를 풀었다.

다급히 라라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야미의 금빛 머리카락마광관살포이 드릴처럼 강렬한 회전과 함께 쏘아졌다.
기술명도 안부르고 쏘는거냐!
아무리 몸이 튼튼하다지만 필살기 같은걸 무방비로 맞을만큼 무모하진 않았기에,
축 늘어진채 등뒤에 기댄 라라를 업고선 황급히 옆으로 뛰었다.

콰아아아앙------!

굉음을 울리며 머리카락이 바닥과 충돌하자 큼지막한 구멍이 순식간에 바닥을 장식해버렸다.
오늘 이곳 장사는 망했군...
등뒤에 업힌 라라를 내려놓으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 라라를 내려 놓았다?
나 방금 '라라를 업고서' 피한거 맞지?

"피했습니까 아키츠 료스케..."

"자, 잠깐만! 야미! 나 조종 풀렸어! 풀렸으니까!"

"...스스로 풀어낸겁니까?"

"그, 글쎄? 나도 어떻게 된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컨트롤에서 벗어난것 같은데?"

위기의 와중에 어떻게든 제어를 되찾은건가?
아니면...『쾅-!』응?

컨트롤러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심상치않은 굉음에 놀라 야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근처의 수건을 몸에 걸친 야미와 미캉과 시선을 교환하곤 여탕밖으로 뛰쳐 나갔다.
당연하지만 여탕을 나서며 수건을 챙기는건 잊지않았다.

목욕탕을 돌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찾아 이동하자 자판기 근처의 쓰레기통 근처에서 네명이 다투고 있었다.

「이야압! 받아라!」
「으랏~!」
「이, 이녀석들!」
「뭐, 뭐냐?」

"유우키! 렌!?"

"리토!"

몽둥이를 손에 든 리토와 렌이 특이한 복장을 한 말라깽이와 뚱보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저 뚱보는 내 머리에 컨트롤러를 장치한 그녀석이잖아?

"바닥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 뚜껑을 보니 현상금 헌터들은 저곳에 숨어 있었나보군요."

야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곤, 궁금한 점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하고 리토와 렌에게 가세해서 헌터들에게 덤벼들었다.

협공을 받고 상처 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두 헌터를 꽁꽁 묶어두고서 렌에게 들은 자초지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여탕을 빠져나온 렌이 헌터들을 잡기위해 돌아다니다가, 목욕탕에서 마주친 리토의 도움을 받아 함께 수색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헌터 둘의 다툼으로 소란스러운 지점을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그대로 습격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럼 둘의 습격에 헌터들이 컨트롤러를 조작하지 못한 덕분에, 내 몸의 제어를 쉽게 되찾을 수 있었던걸까?

이후 라라의 도움으로 머리에 설치된 컨트롤러를 안전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절차로 난 사죄 모드로 들어갔고.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리며 여자아이들에게 사과했다.
이런일이 벌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는 소녀들에게 얌전히 사실을 나열했다.
입욕제를 사용했다가 욕실이 녹아내렸단 이야기를 한 순간 미캉과 라라가 어색한 얼굴을 했다.
아니, 너희가 미안해 할건 아니지. 욕조가 녹아내리는 흉악한 물건을 팔 생각을 한 우주인들이 문제지.
모종의 이유로 잠시 탈의실을 나섰다 돌아와 씻으려는중 컨트롤러를 머리에 부착당했다는 부분에서는 렌(男)이 어색하게 딴청을 피웠다.
애초에 목표가 나였으니 입욕 시간이 달랐어도 어차피 일어날 사건이었기에 렌이 신경쓸건 아닌데 조금 불편했나보다.

야미는 자신을 쫓던 헌터들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것이 마음에 걸리는것 같았다.
그래서 「따끈따끈 온천」의 수리비는 야미가 지불하기로 했다.
정확히는 중고로봇을 처분한 비용과 헌터들의 돈을 갈취해서였지만 뭐 어때.
그렇게 우주인 입욕제 하나로 시작된 목욕탕 기행은 현상금 헌터의 난입으로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냐면...



라라에겐 이런저런 파렴치한 행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다시금 사과했다.
그때 일을 떠올린 라라는 얼굴을 붉혔지만 내 사과를 받아들여주었다.
말만으로 끝내기엔 저지른 일이 너무 컸기에, 기분전환을 위해 리토와 함께 보라고 매지컬 쿄코 공연 티켓을 건네주자 라라는 뛸뜻이 기뻐했다.
일등석 구한다고 밤이슬을 몇시간 동안 맞으며 얻은거라,
저렇게 기뻐해준다면 나로서도 구해온 보람이 느껴지고 정말로 용서를 받은 기분이 들기에 기쁘다.
리토는 어린애들이나 보는거라며 마땅치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미캉과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사과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미캉은 딱히 보답같은걸 바라진 않았다.
그저 평소의 장보기에서 도와주는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답했다.
대견한 소녀군요 미캉은...
다만 마지막에 있었던 해프닝그레이즈이 조금 문제가 되었다.

가끔 장보기를 하면서 대화하는데 눈을 맞추지 못한다든가,
갑자기 붕붕 머리를 휘젓곤 얼굴이 붉어진다든가...
주체가 누구나고? 그야 물론 나랑 미캉 둘다.
며칠뒤엔 제대로 눈을 마주보며 대화할 수 있었지만 한동안 장보기를 하는면서 거북함이 느껴져 괴로웠다.



그리고 룬은 어땠냐 하면...



내밀어진 바구니에 담겨있는 샌드위치를 내려다 보았다.
눈앞엔 생글거리는 여자아이가 바구니를 내밀고 서있었다.
장면만 보면 정말 행복하기 그지없는 상황인데...
건네준 상대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입만 생글거리는 여자아이이고,
건네받은 샌드위치가 지독할정도로 붉은색을 띄고 있다면 상대의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끝이 찡해질정도로 흉악한 향을 풍기는 샌드위치에 질린 표정을 지은 내게 룬이 히죽 미소지었다.

"이걸 먹는걸로 용서해줄게."

"...그냥 맞는걸로 해결하면 안될까?"

"폭력적인 여자라는 인상을 받긴 싫거든.
그리고 넌 맞아도 별로 안 아프잖아?"

그래도 따귀는 좀 많이 아픈데요.

"...일단 확인하지만, 우주인용 약 같은걸 넣진 않았겠지?"

"전혀. 난 라라처럼 상식이 없진 않다구."

"...많이 매운거야?"

"라라는 맛있게 잘 먹던데?"

...그 미각이 파탄난 아가씨의 평가를 어떻게 믿어?
더더욱 불안해지며 우거지상을 한 내 얼굴에 룬이 인상을 썼다.

"무서운 얼굴해도 소용없어."

"...불쌍한 표정을 지은건데."

"어머 그랬어? 난 또 협박이라도 하려는줄 알았지."

"....."

더이상 말을 섞었다간 계속해서 룬의 페이스에 휘말릴것 같아 조심스레 바구니에 든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들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기에 입안으로 넣길 망설이는 날 보며 룬이 닥달했다.

"자, 어서 먹어. 여자아이가 손수 만들어준 샌드위치라고? 기쁘지 않은거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분명 그 눈물은 내 혀에 대한 사죄의 마음으로 가득차 있겠지.
결국 체념하고선 붉은색 샌드위치를 입안으로 가져다 넣었다.
입안에 들어온 순간 혓바닥을 자극하는 느낌에 눈이 번쩍 떠졌다.
컥!? 매, 매워!

"어때? 맛있지?"

"너, 너... 날 죽일 속셈이냐?"

"그럴리가. 입맛에 맞지 않았다면 이건 어때?"

룬은 히죽이며 녹색 야채들이 가득한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입안에 옮기자 퍼지는 맛에 무심코 눈물이 날것 같았다.

와, 와사비!?

"어때? 맛있지?"

"무, 물좀...!"

"맛있지?"

"마...맛있어..."

"그래그래, 잘알고 있잖아?"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물을 건네주는 룬의 모습에 눈물이 흐를것만 같았다.
그날 완식한 샌드위치덕에 며칠 동안이나 음식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단 사실은 여담이다.



마지막으로 야미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다.

"붕어빵 1000개?"

야미는 붕어빵 천개로 넘어가 준다고 했다.
많아!? 아니 그전에...

"한꺼번에?"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부르겠습니다."

"...어느 세월에 다 먹으려고?"

"알아서 할테니 걱정마십시오."

"좀더 다양하게 좋은 음식으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

영양 섭취는 골고루 합시다.

"그럼 고급음식을 천번 대접해줄 수 있습니까?"

"...미안, 무리입니다."

차라리 100번 정도 식사를 대접해주는건 어떻겠냐는 제안은 거절당했다.

"질보단 '양'입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야미의 대답에 더이상 토를 달지 않고 수긍했다.
굳이 야미가 붕어빵을 고집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야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테고, 그것은 아마도 내게 재정적인 부담을 덜어준다는데도 의미가 있을지도 몰랐다.
부담을 덜어주는데 1000개라는 개수는 어쩐지 모순된것 같았지만...

그나저나 천개라...
하루 하나씩 먹는다면 3년은 걸리겠군.
그것도 매일매일 야미의 얼굴을 본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수치라 그 기간이 조금 아득하게 느껴졌다.


생각외로 야미가 한번에 사는 붕어빵의 개수는 많지 않았다.
보통은 만날 때마다 2개 정도를 사는게 전부였다.
하나는 내게 주고, 하나는 야미 자신이 먹고.
야미의 호의를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붕어빵을 받아 입에 문채 생각했다.

내가 1개를 먹었으니까 야미에게 사준건 1개로 쳐야 하는건가?
야미랑 나랑 반반씩 돈을 낸다면 애초에 야미에게 붕어빵을 사주는게 아닌 꼴이 되는거니까.
결국 2배로 돈이 나가게 되는거군요.
전골파티에서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들인건지,
식사용이 아니라 군것질용으로 붕어빵을 섭취하는 야미의 모습에 안심이 되면서도, 약속이 끝나기 까지의 기간이 조금 걱정되었다.
이런 속도로 언제 천개를 채우나요?

"...붕어빵을 다 사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려나?"

"당신이 죽기 전까진 다 받을테니 걱정마시죠."

죽을 때까지입니까...
그냥 속편하게 평생이 걸린다고 생각하는게 낫겠군.

"예이예이. 그나저나 날도 좋은데 잠시 산책이나 할까?"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야미와 함께 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힐끗 시선을 돌려 야미를 바라보았다.
야미는 양손으로 붕어빵을 잡곤 붕어빵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었다.
조금씩 베어 먹는 야미의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야미를 따라 손에든 붕어빵을 천천히 입가로 가져가던 도중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붕어빵 2개가 데이트 비용이라면 엄청 남는 장사를 하고 있는거구나...라고.
혼자서 킥킥대기 시작한 나를 이상한듯 쳐다보며 갸우뚱하는 야미를 데리고 마을의 명소인 「러브러브 공원」으로 들어섰다.



밤이되고 어둠이 깔린「러브러브 공원」을 돌아다니다, 북적이는 연인들의 문란한 장면을 목격한 뒤 야미에게 습격당했다.
고의로 응큼한 장소로 끌고갔다는 이유와 함께.
댁같은 초인을 상대로 고의로 그런 짓을 할 간큰 인간은 없습니다. 나 빼고.
당연하지만 야미의 습격이란게 절대 야한 의미가 아니었기에, 사랑이 넘치는 공원에서 난데없이 살벌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반쯤 놀리려고 어스름한 즈음에 공원에 데려갔다가 하마터면 수염까지 깎일뻔했다.
친애의 표현도 좋지만, 장난은 적당히 하자고 생각하며 머리에 난 혹을 한차례 쓰다듬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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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위스 님( 님)께서 보내주신 삽화를 28화에 추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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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중간에 다른편을 끄적이다가 정작 28화를 2주간 손놓고 있다보니 늦었습니다-_-;
끄적이던것도 미완성으로 놔둔 상태지만...몇편 뒤에는 나오겠죠;
그나저나 일요일 안에 올릴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올리고 보니 월요일이 되어버렸네요 쿨럭...-_-;

아무튼 1인칭 시점이다보니 이번편은 에로사항이 많더군요.
몸은 조종당하는 료스케가 움직이는데, 정작 대사는 헌터(테이가)가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전개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수도 있을겁니다.

그리고 붕어빵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욕탕 이야기를 하다가 뒤에 다른 이야기가 늘어지면 뭔가 흐름도 이상해서 적당히 도중에 끊었거든요.

그럼 모두들 좋은 꿈 꾸세요~*^^*

(제 꿈엔 다음편 시나리오나 좀 튀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p.s. 참조 이미지


매지컬 쿄코 - 키리사키 쿄코

매지컬 쿄코의 입욕제

남탕에 등장한 룬

남자 탈의실의 숨는 곳(실사)

현상금 사냥꾼 두명

이로 두꺼비 옷 소멸 가스

야미의 당황한 얼굴 묘사를 위한 이브 얼굴 참조

룬의 특제 엄청매운 샌드위치

한밤중의 러브러브 공원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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