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스케 오빠, 모래 저희 집에서 전골파티를 할 예정인데 오실래요?"

"전골파티?"

"네. 오늘 아침 라라 언니가 야미짱에게 지구음식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주 금요일에 전골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시간 되시면 오지 않으실래요?"

오랜만에 미캉과 상점가 쇼핑을 하던중 파티 초대를 받았다.
나로서야 당연히 이런 초대는 기쁠 따름이니 흔쾌히 승낙했다.

그나저나 야미를 위한 파티인가.
야미는 라라를 은근히 따르는 느낌이었으니까, 라라의 권유를 받는다면 야미도 두말없이 승낙할것 같다.
남은건 야미랑 사이가 좋은 친구들을 초대하는 거려나?

"혹시 말야, 다른 친구들도 초대해도 괜찮아?
기억나는 아이들중 야미랑 친한 애들이 몇명 있어서 말야.
식재료는 각자 준비해올테니까."

"물론이죠. 사람은 많을수록 즐거우니까요."

"역시 그렇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미캉을 보곤 나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처럼 상점가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띄며 활기를 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흥정소리는 시장을 더 정겹게 느끼게 했다.
물건을 고르던 중 멀찍이서 두런대는 손님과 상인의 대화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 야채 한단에 얼마요?」
「240 엔 이라우.」
「으음...그러지말고 그냥 2단에 500엔 해줘요.」
「안돼! 그럼 난 뭐먹고 살라고?」

가끔씩은 얼빠진 행동을 하는 분들도 계시네요.
입꼬리가 미묘하게 실룩이는 날 이상하게 바라보는 미캉의 모습에 억지로 표정을 바로하곤 장보기를 계속했다.
이후 미캉과 전골파티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한동안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다음날.
쉬는시간 복도를 걷던 중 창밖에서 라라의 손에 이끌려 교사를 걷고 있는 리토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야미에게 전골파티 권유를 하러 가는거겠지.
나도 슬슬 다른 친구들에게도 권유해볼까 싶어서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료스케씨...}

"이 목소리는, 오시즈?"

주위를 둘러봤지만 오시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갸웃하고 있는데 오른쪽 벽을 통과하며 오시즈가 상반신이 드러냈다.

"오래간만이네요 료스케씨~"

"...아, 잘지냈어 오시즈?"

깜짝이야.
벽을 빠져나온 오시즈의 양옆으론 도깨비불이 떠오른 채 일렁이고 있었다.
벽에서 불쑥 나타나다니...
상식을 벗어난 이동 방법이 과연 유령답다고 해야하나? 솔직히 조금 놀랐다.
하지만 을씨년스럽게 울리던 목소리가 지금은 평범한 목소리에 가까워진걸 보면 보통으로 사람과 대화를 하는 방법에는 점점 익숙해져 가는듯 했다.

"그런데 복도에서 만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아, 양호실에서 미카도 선생님께 상담을 하고 오는 중이었거든요."

"양호실에?"

"네. 어떻게든 실체가 되고 싶어서..."

오시즈는 내가 미카도 선생님에 대해 언급했던걸 떠올리곤 최근 미카도 선생님을 방문하는 중이라고 한다.
구교사에서 지내는것이 왠지 적막하게 느껴져서 요즘에는 상담이 끝난 뒤엔 학교 건물들을 배회하며 지낸다고 한다.

"잘못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놀래킬지도 모르는데, 혹시 마주치진 않았어?"

"그게...마주치긴 했는데 이상한 반응들이었어요."

"이상한?"

"네. 그러니까...「힘든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상담해줘.」「미안. 내가 힘이 모자라서...」라고...
어쩐지 걱정해주는 얼굴들이었어요."

...세상은 참 소녀들에게 훈훈하네요.

뭐, 그 일은 넘어가고...그 때 이후로 지금껏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즈와 한동안 잡담을 했다.
예전에 폐를 끼쳤던 하루나에게 사과했던 일을 들어보건데 하루나도 예전에 비해선 오시즈를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오시즈에겐 결과적으로 좋게 일이 풀렸으니, 그 때의 일은 나쁜일만 있었던건 아니었네...
한동안 속이 좀 쓰렸지만 이번 일은 나로서도 기쁘니까.
미카도 선생님이 문제를 해결해주실때까지 당분간은 학교를 구경하고 싶다며 웃는 오시즈에게 함께 기뻐해주곤 수업시간이 가까워졌기에 이만 교실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미캉이랑 얘기해봤는데 전골파티에 다른 친구들을 더 초대하면 즐겁지 않을까?"

"응 그게 재밌겠네~ 그럼 하루나짱이랑 리사랑 미오랑 유이에게 얘기해볼께.
야미짱도 더 즐거워 하겠지 리토?"

"으, 으응...! 그, 그렇네!"

쉬는시간에 라라와 리토에게 전골파티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자 흔쾌히 동의를 얻었다.
그나저나 리토는 하루나가 온다고 하니까 정말 기쁜듯 하네. 표정으로 다 드러나고.
아...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선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뭔가 야한 망상이라도 한건가?
수영복 차림의 하루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빨개지는 리토니까 어떤 생각을 한건진 모르지만.

약간은 뻣뻣해진 동작으로 하루나에게 다가가는 리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고 할까, 하루나는 얇게 미소지으며 리토의 권유를 승낙했다.
코테가와랑 리사와 미오도 흔쾌히 수락했고. 뭐, 셋다 야미를 귀엽게 생각하니까.
마주보며 작은소리로 속닥이는 리사랑 미오의 모습을 보건데 뭔가 놀거리를 준비하는것 같았다.
보통 일상적인 즐길거리는 저 둘이 준비하곤 했으니까.
어쨌든 즐거운 시간이 될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잘먹겠습니다.」」」

"하루나 이 고기 맛있다~"

"우리집 근처 정육점에서 사왔어. 가격도 저렴해."

"좋은 가게구나~"

금요일 저녁. 리토네 집 거실에 앉아 전골요리를 먹으며 떠들썩한 식사시간을 가졌다.
정원에선 집채만한 우주식물 셀린이 6장의 꽃입 사이의 암술 위치에 난 입술로 라면을 먹고 있었다.
입술 안으로 날카로운 이빨과 혀까지 보이는데...재주도 좋게 줄기를 이용해서 젓가락질까지 하는 묘기를 보이고 있었다.
셀린이 나중에는 귀여운 아기로 바뀌는 것도 대단하지만, 저 식사 장면은 저것 나름대로 진귀한 장면이었다.
내가 우주의 신비에 눈뜨는것관 별개로, 하루나와 즐겁게 전골 이야기를 하는 라라처럼 야미도 전골요리가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것 같았다.

"...지구의 음식은 맛있군요..."

"야미짱은 어떤 음식을 먹어?"

오물거리며 전골을 먹는 야미의 모습에 미캉이 문득 떠오른듯 물었다.
설마하지만...아직도 삼시 세끼 붕어빵으로만 때우는 건 아니겠지?

"붕어빵..."

"에!?"

진짜였냐...

"음식에 특별한 조건은 없습니다."

"아니...조금 더 특별한 것이 좋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야미에게 미캉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지구에 와서 처음 먹은 음식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의미깊은 음식인것도 안다.
리토와의 연결고리를 상징하면서 야미를 나타내는 아이콘의 하나로 정착된다는 것도 아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주식이 붕어빵이라니, 영양 섭취는 대체 어떡하라고?
설마 이것도 「우주인이라 괜찮아요」로 해결되는 문제인가? 정말 그런건가?
코테가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야미에게 충고했다.

"그래 야미짱, 미캉의 말대로 앞으론 제대로 된 식사를 챙겨 먹는게 좋다고 생각해."

코테가와의 말에 동의하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야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예전에 아키츠 료스케를 만날 때마다 그는 항상 단팥빵만 먹고 있었습니다만...
가끔은 제가 붕어빵을 먹고 있을때 옆에 앉아서 단팥빵을 권한 적도 있습니다."

「「「......」」」

...도라○몽 취급받았을때 얘기로군요.
반장난으로 건네받은 단팥빵이었지만 여자애들한테 받은걸 버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으니,
결국 한동안은 삼시세끼 단팥빵만 먹고 지내는 지경이 되었다.
그나마 붕어빵 먹던 야미에게 별식으로 단팥빵을 나눠주었기에 보름만에 다 먹을수 있었지만...
덕분에 한동안은 단팥빵만 봐도 신물이 날것 같았다.

아무튼, 순간적으로 쏠린 친구들의 시선에 어색하게 젓가락질을 계속했다.

"...어, 음...그러니까...
전골 참 맛있네. 아, 아하하..."

야미의 편식을 내 탓으로 돌리지 말아줘.
...아주 조금은 내 탓도 있겠지만.
전골을 집으며 뻣뻣하게 움직이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하나둘 키득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얌전한 하루나 마저도 「풋...」하는 소리를 내면서 입을 가리고 있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리사와 미오가 다시금 야미를 설득했다.

"아키츠군처럼 편식하면 안돼~ 야미짱.
그렇게 먹다간 피부 미용에 안좋다구?
봐봐, 수염이 덕지덕지 나서 보기 흉하잖아?"

"맞어맞어. 부시시한 얼굴이 되버린다구~!"

딱히 내 피부는 나쁘진 않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살짝 윙크를 하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야미의 설득을 위해 그냥 눈감아 주기로 했다.

"골고루 먹으면 라라찌나 코테가와처럼 가슴도 커질지 몰라?"

"네?"

"무, 무슨말을 하는거야 모미오카씨!"

리사의 말에 코테가와는 당황해서 새된 소리를 내었다.
잡고있던 수저를 놓친채 멍하게 있던 야미는 붉어진 얼굴을 내저었다.

"저...저는 그런거에 관심없습니다."

약간 토라진듯 고개를 돌리는 야미의 모습은 어쩐지 새침 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미로서는 거북한 주제였나보다.
사내 아이들도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리사랑 미오가 대담한건지도 모르지만.



조금 혼란스러웠던 식사가 끝나고 목욕탕을 사용할 순서를 정했다.
원래는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기에 목욕은 계획에 없었지만,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으니 기왕 놀러온거 파자마 파티를 하자고 라라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라라의 말에 미캉도 기꺼운듯 말했다.

"옷이라면 저나 라라 언니의 옷도 있어요.
료스케 오빠라면 아빠 옷이 있으니까 아마도 괜찮을꺼에요.
게다가 전 야미랑 더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그래~ 이런 때야말로 친목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야미야미도 물론 찬성이겠지?"

야미와 어깨를 맞추며 즐거운 표정을 하는 미캉의 모습에 리사랑 미오도 기쁘게 동의했다.
머뭇거리던 하루나의 경우엔 리토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곤 조금 기쁜듯한 모습으로 승낙했고.
사랑하는 아가씨니까 좋아하는 사내아이의 집에 머무는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겠지.
코테가와도 다른 친구들의 반응에 약간 고민하다가 집에 연락을 드린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루나도 코테가와의 뒤를 이어 휴대폰을 손에 들고 일어나 복도 한쪽으로 갔다.
둘이 집에 연락을 하는 동안 어느덧 대화는 목욕 순서를 정하는 쪽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함께 들어가는게 어떠냐는 라라의 제안에 놀란 미캉이 걱정했다.

"에!? 함께 목욕이라니?
그러기엔 목욕탕이 좁아서 무리야 라라언니."

"괜찮아! 「공간왜곡장치」로 공간을 넓히면 돼!
그정도의 기계라면 금방되니까~"

과연...발상의 스케일이 다르다.
식은 죽 먹은 느낌으로, 목욕탕에 함께 들어가기 위해 공간왜곡장치를 만들다니...
엉뚱하지만 확실히 엄청난 아가씨로군요 라라양.

라라에 대해서 황당함과 감탄이 반반 섞인 감상을 가지고 있을때 갑자기 복도 끝에 서있던 코테가와의 외침이 들렸다.

"아, 아니야!"

응?
당황한듯한 코테가와의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코테가와를 바라보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코테가와는 황급히 목소리를 죽였다.
휴대폰 너머로는 왠지 유쾌한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머, 그러니? 난 또 료짱네 집인줄 알았지.」

이건 코테가와의 어머니 목소리인가?
근데 료짱? ...아, 나였던가?
그러고보니 그렇게 부르신적이 있었지.
코테가와네 오빠는 유짱, 나는 료짱.
친근하게 느껴지는 호칭에 살짝 웃음이 나왔지만...그런데 어째서 거기서 제가 나오나요 어머님?

"(어째서 거기서 아키츠군 얘기가 나오는거야?)"

「하지만 유이짱~ 저번에 아키츠군 전화 받고선 수영장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왔었잖아?」

"(그땐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있다고 말했었잖아?)"

「어라, 그랬나?」

"(그렇다니까. 어쨌든 오늘은 친구들이랑 같이 있을테니까... 이만 끊을께.)"

「아, 유짱한텐 비밀로 해줄께-」

"그런거 아니라니까!"

딸깍-

그대로 휴대폰을 닫아버리곤 볼을 살짝 부풀린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곤 코테가와는 「정말...」이라는 한마디를 내뱉곤 한숨을 쉬었다.
진절머리 나는듯 머리를 홰홰 돌리다가 멍하니 지켜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한 코테가와는 금새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별거 아니야. 자고 오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조금 걱정을 받았을 뿐이니까.
그나저나 사이렌지는 허락 받았어?"

"응, 언니가 친구들이랑 재밌게 보내라고..."

은근슬쩍 하루나에게 물어보는걸로 코테가와는 화제를 바꿨다.
언니라...그러고보면 하루나는 언니(사이렌지 아키호)랑 단 둘이서 지내고 있었지?
나중에 가면 하루나의 언니와 코테가와의 오빠가 만나기도 하던데 어떻게 될라나 몰라.
잘만 된다면 코테가와랑 하루나의 사이가 경사스러운 관계가 될지도 모르니까 개인적으론 응원하고 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라라의 공간왜곡장치가 완성되었다.
빨라!? 정말 식은 죽 먹을 시간도 안걸렸네...
손바닥 만한 반구형 기계를 들고 싱글벙글 하며 라라가 일어섰다.

"그럼 이제 다들 목욕하러 가자~
...아, 그전에 식기 정리부터 해야지?"

깜빡 잊었다는듯 손으로 입을 가리는 라라의 모습에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그러지말고 다들 욕실로 들어가.
뒷정리는 내가 할테니까."

"에? 료스케가?"

"안돼요. 료스케 오빤 손님이잖아요?"

놀라는 라라와 미캉이 만류해왔다.

"어차피 나랑 유우키는 너희들이 씻고나서 욕실에 들어갈테니까 그동안 식기를 정리해두면 돼.
그리고 자취하면서 설거지 한두번 해본것도 아니니까 딱히 불편해할 것도 없다구."

"그래도..."

"괜찮다니까?"

가벼운 설전이 오가고 난 뒤, 밀어붙이기 식의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여자애들은 목욕탕으로 향했다.
나와 리토는 식기들을 부엌으로 옮긴뒤 설거지를 위해 고무장갑을 찾았는데...

"...한 켤레 밖에 없네?"

"...그러게?"

나와 리토 둘이서 식기를 씻기엔 조금 난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미캉에게 혹시 여분의 장갑이 있나 물어보고 싶지만 이미 욕실에 들어간 뒤고,
싱크대의 서랍들을 뒤져봤지만 여분 장갑 같은건 없어 보였다.
이리저리 찬장을 뒤지는 내모습을 보던 리토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일을 나눠서 하는게 어때?
여자애들이 씻는동안 난 자고 갈 빈방을 청소하고 있을께."

"응. 그게 좋겠네.
그럼 설거지는 내게 맡겨~!
아, 기왕이면 내가 입을 파자마도 한번 찾아 봐줘."

"기억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청소하면서 아버지 파자마도 찾아볼테니까.
그럼 난 2층에 올라가볼께."

말을 마치고 리토는 방정리를 위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들을 차례로 씻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식기를 씻어 건조대에 올려놓는 작업을 반복했다.
마무리로 테이블을 닦기 위해서 한차례 행주를 씻었다.
리토는 아직 2층에서 방정리 중인건가?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며 설거지를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목욕탕 쪽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구우웅-!
우당탕!

「꺄악!」
「엄마야?!」

"뭐, 뭐야?"

욕실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소리와 심상치 않은 진동음, 그리고 여자아이들의 비명에 놀라서 욕실로 향했다.
거실에서 욕실로 가는 세면실 문을 열자 좌측에 수건비치대와 세면대, 우측에 세탁기가 놓여져 있었다.
(리토 집 욕실 구조는 [거실]▷[세면실]▷[목욕탕] 의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세면실 중앙의 맞은편에는 욕실 문이 있었는데, 문 손잡이 위에는 방금전 라라가 발명한 반구형의 공간왜곡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욕실 문 건너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졌기에 걱정되어 욕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물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다는 파렴치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욕실문 바로 앞에서 멈춰섰다.
보일러가 꺼졌다든가 문제가 생겨서 응급처치나 구급품이 필요하다든가 하는건 아닌지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

"다들 괜찮,"

"이상하네? 어째서 갑자기 목욕탕이 원래대로 된거지?"

벌컥-

거침없이 안쪽으로 활짝 열린 목욕탕 문 앞에선 발가벗은 라라가 문고리를 잡아 당긴채 서있었다.
새하얀 피부가 망막을 가득 채우는 장면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채로 굳어버렸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채 피부에 달라붙은 핑크빛 머리카락.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들이 몸을 따라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흐르던 물방울이 배꼽에 고였다가 또르륵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에 홀린듯 시선을 내리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어라? 료스케?"

날 보고서도 고개를 갸웃할 뿐 몸을 가리는 행동조차 취하지 않는 라라.
때 뭍지 않은 아이같은 무방비함이 내 죄악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의아해하던 라라는 다시금 할 일을 떠올렸는지 내게서 시선을 때곤 몸을 숙여 욕실문에 붙은 공간왜곡장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라라의 몸이 숙여지면서 자연스레 목욕탕 내부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욕조안에서 코테가와의 가슴을 찌르고 있던 리사.
하루나의 등뒤에 붙어서 하루나의 가슴을 양손으로 받치며 희롱하던 미오.
욕조 밖에서 미캉의 등을 밀어주는 야미.
야미에게 등을 맡긴채 욕실 스툴(목욕 의자)에 앉아 있던 미캉.
목욕이 끝나갈 즈음이었는지 소녀들은 피부를 가려줄 비누거품조차 없이 적나라하게 알몸을 드러낸 상태였다.

초여름은 벌써 한참 전에 지나갔는데 말이지.
이렇게나 앵두가 한가득...

아하하 이녀석 아하하.

황급히 몸을 가리곤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소녀들의 시선에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째서 이곳에?"

창백해진채 물어오는 소녀들의 물음에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억지로 굴려 말을 꺼냈다.

"그...혹시 다치진 않았나 걱정이 되서...
아, 아하하..."

"변론은 그게 전부입니까?"

위아래를 감싼채 머리카락을 천천히 떠올리는 야미의 모습에 꿀꺽 군침을 삼켰다.
욕실을 가득메운 금빛 실타래는 어느새 주먹, 철퇴,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쬐는 빛으로 절묘하게 음영이 드리운 무표정한 얼굴로 야미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상냥하게 부탁해..."

"...거절합니다!"

부끄러운듯 몸을 배배 꼬는 내 모습에 야미는 이마에 핏대를 세우곤 외쳤다.
「어라? 어째서 장치가 꺼져 있었던거지?」라는 라라의 말을 들으며 다가오는 심판 앞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페케가 리토를 도와 잠자리를 준비해줬기에 방정리와 함께 숙박 준비도 완료된 것 같았다.
모두들 목욕이 끝나고 파자마 차림으로 갈아 입은 뒤 거실에 모이기로 했다.
나도 리토가 건네준 사이바이씨의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아직은 약간 얼얼한 볼을 매만지며 거실 바닥에 앉아 있으려니 여자애들이 방에서 나오는게 보였다.
리토네 어머니(유우키 링고) 파자마까지 꺼낸건지 다행히 파자마 수는 모자라지 않은듯 했다.
서로의 파자마 차림을 보며 즐거운듯 이야기 하던 소녀들은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들 바닥에 앉자 리사와 미오가 우리에게 쪽지와 필기구를 나눠주었다.
아마도 뭔가 놀거리를 생각해 온 것 같았다.

"그럼 받은 쪽지들에 신체 부위 3가지, 행동 3가지를 적어서 라라에게 건네줘."

주술목 게임이라도 하려는걸까?
인원수가 적으니까 1인당 선택지를 늘인것 같았다.
어떤걸 적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쪽지에 옮겨 적었다.

「머리카락」「빗어준다」
「코」「쥔다」
「배꼽」「약손」

쪽지를 라라에게 건네주자 라라는 작은 스크린이 달린 네모난 금속 함에 쪽지를 집어 넣었다.
그새 또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었어?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모습을 보고 라라가 웃으며 알려줬다.

"아, 이건 받은 단어를 적당히 조합해서 말이 통하는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장치야.
「혀로 팔굽혀펴기한다」같은 이상한 말이 안나오게 조합해주는 용도로 만들었거든~"

"오~그거 굉장한데?
그 짧은 시간만에 이런걸 만들었다니, 솔직히 놀랬어.
즐거운 게임이 될것 같은걸?"

"에헤헤~"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내 반응에 라라는 멋쩍은 표정으로 기계를 만지작 거렸다.
라라로서는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 약간 쑥쓰러운것 같았다.
쪽지함을 보며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리토를 보았다.
라라의 재능을 병기개발에 쓰려는 다른 약혼자들과 달리 악의가 없는 리토의 태도를 좋아하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리토도 라라의 발명품에 조금은 긍정적인 관심을 가져준다면 라라도 기뻐할텐데 말이지.
뭐, 라라가 가장 기뻐할 일은 리토가 라라에게 정식으로 고백하는거겠지만 하하하.

여튼, 쪽지가 전부 쪽지함에 들어가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위이잉.


- 사와다 미오가 야미의 어깨를 주무른다.

조금 걱정했던것과 달린 건전한 내용의 문장이 만들어져서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리사가 푸념을 했다.

"아아~ 어째서 가슴이 안걸린거야~"

적었냐 그걸!?

"야미야미는 어깨도 부드럽네~"

어처구니 없어하는 나와 별개로 미오는 즐거운듯 야미의 뒤에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가만히 앉아서 마사지를 받는 야미에게 미오가 웃으며 물었다.

"저기 말야~ 가슴을 만져주면 커진다는데 야미야미도 어때?"

"...거절합니다."

"에에~ 유감~"

마사지가 끝나고 미오가 자리에 앉자 다음 추첨이 계속 되었다.


- 아키츠 료스케가 라라 사타린 데빌루크의 머리카락을 빗어준다.

"...어라?"

내 쪽지가 걸렸네...
그것도 목적어랑 서술어 한세트로.
조금 신기해하며 일어나 라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료스케가 빗어주는거야?"

"그렇게 됐네. 혹시 빗 있어?"

"제가 가져올께요 료스케 오빠."

미캉이 일어나 세면실에서 빗을 가져다 주었다.
덤으로 머리끈도 건네주었는데...본격적으로 하란 얘긴가?
빗과 머리끈을 건네받곤 라라의 뒤에 앉자 라라가 말을 건네왔다.

"으응~그러고보면 데빌루크에 있을땐 시녀들이 빗어줬는데 지구에 와선 남이 해준 적은 없었네.
예쁘게 빗어줘 료스케~"

"아하하...그렇게 능숙하진 않겠지만 노력해볼께."

조심스레 라라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받치곤 빗으로 빗겨 주었다.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에서 사라락 하는 기분좋은 소리가 들렸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장발이라서 혹시 빗겨주다가 엉키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이지 비단처럼 부드럽네...
얌전히 앉아 기분이 좋은듯 콧노래를 부르는 라라의 모습에 내심 안심하며 빗질을 계속했다.
그런데 빗질도 거의 다 끝나갈 때 즈음 리사가 뭔가 불만인듯 야유를 해왔다.

"에에~ 그걸로 끝이야?
이대로 끝내면 시시하니까 뭐라도 좀 해보라구 아키츠군~!"

조금은 시끌벅적한 게임 진행을 기대했었는지 리사는 김이 샌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머리 빗는데 무슨 재미를 추구한다고 그래?
어쩐다...
아, 머리끈.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라에게 물었다.

"저기, 라라. 괜찮다면 네 머릴 한번 묶어봐도 될까?"

"응? 괜찮아 료스케."

"그럼 조금 실례할께."

라라의 허락을 받고 라라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아서 올린다.
가마 부분까지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머리끈을 이용해서 하나로 묶고나서 손을 떼었다.

"쨘~ 포니테일 완성!"

포니테일로 묶은 뒷머리는 자화자찬일진 몰라도 꽤나 잘 어울렸다.
귀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가슴까지 내려오고 있었고
모아진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흰 목덜미는 건강미 넘치는 느낌을 주었다.
하루나나 다른 친구들도 호의적인 반응으로 머리 스타일을 평가해주었다.

"잘어울리는데 라라?"

"평소랑 다른 느낌이 정말 예뻐 라라찌~"

"아하하~ 그래? 고마워 료스케~"

"으응...천만에. 나야말로 드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 감사할 따름이야."

여자애 머릴 빗어주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으니.
조금 설렌 채로 제자리에 앉자 다시금 기계음과 함께 추첨이 시작되었다.


- 유우키 리토가 코테가와 유이의 발바닥을 약손...정정합니다. 쓰다듬는다.

...저건 내꺼네.
「내손은 약손이다」라는 표현은 쓰임새가 한정되서 안좋았으려나?
그나저나 근처에서 리사가 분한듯한 표정을 짓는걸 보니 뭔가 발바닥과 조합할 행동이 따로 있었나보다.
아마도 건전한건 아닐테니까 신경쓰지 않는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 했다.
남자애한테 발을 매만져지는 경험을 한 코테가와는 부끄러운듯 조금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후로 몇번의 추첨이 이어졌다.

「사이렌지 하루나가 모미오카 리사의 가슴을 쥔다.」라는 공수 역전의 문장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시행하는 하루나 쪽이 더 부끄러워 하는것 같았지만.
그리고 다시금 내 차례가 돌아왔다.


- 야미가 아키츠 료스케와 코를 맞댄다.

...이건 또 무슨 단어의 조합인거냐.
일어나서 아이들이 둘러앉은 원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야미도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잘 부탁드리죠 아키츠 료스케."

"어...으응."

내 앞에서서 날 올려다 보는 야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았다.

"저기, 얼마정도 맞대고 있으면 돼?"

"더도 말고 딱 1분."

미오의 말에 수긍하곤 야미를 내려다 보았다.
차분히 서있는 야미의 모습에 살짝 목덜미를 긁적이곤 야미의 양어깨에 손을 짚었다.
순간 약하게 어깨가 떨린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떨림은 가라앉았다.
나를 응시하는 야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야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몸을 숙이고 있는데 내 얼굴을 작은 손바닥이 감싸왔다.

"야미?"

"혹시나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잡아두겠습니다."

따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지만요.
야미의 행동에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상황이 묘한것 같았다.
마주보고 서있는 야미의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하는 나.
내 양뺨에 손을 얹고서 고개를 들어 나와 얼굴을 맞대려는 야미.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만큼 거리가 가까워지며 가만히 응시하는 상황.
...어쩐지 키스하는 장면처럼 느껴지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건 아닌지 리사와 미오는 꺅-꺅- 거리면서 법석을 떨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나와 코테가와, 미캉도 약간 얼굴이 붉어진채 바라보고 있었고.
리토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고...
힐끗 곁눈질을 하던 도중 뺨을 눌러오는 손바닥에 야미를 바라보았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야미는 조용히 말했다.

"어딜 보고 있는겁니까?
이쪽을 향하십시오."

"아...그래."

나를 향한 야미의 진홍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점점 가까워져 마침내 코가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살짝 벌어진 야미의 입술 사이로 얕게 내쉬어진 한숨이 얼굴을 간질었다.
숨결에서 느껴지는 묘한 근지러움에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뜨겁습니다. 아키츠 료스케."

"미, 미안..."

약간 얼굴이 상기된 야미에게 사과하곤 침을 삼켰다.
야미의 오똑한 코가 내 코에 닿으며 살짝 누르는 느낌을 주고 멈췄다.
작게 들려오는 호흡소리와 숨결로 살짝 달아오른 공기에 조금씩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입술이 닿을것만 같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진홍빛 눈동자는 빨려들어갈 만큼 깊게 느껴졌다.
뺨을 잡은 야미의 손가락이 조금씩 꼼지락 거리자 무심코 야미의 작은 어깨를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던 찰나 미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1분 지났습니다~!
둘다 이만 자리에 앉아도 좋아."

"...아? 아아,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어느새 내 뺨에서 손을 뗀 야미의 모습에 나도 야미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내려놓았다.
가슴을 쓸어내리곤 자리에 앉아 크게 숨을 내쉬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1분은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긴 시간이구나.
가슴에 손을 얹은 날 발견하곤 리사가 풋-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하하~! 아키츠군 얼굴이 새빨개졌어!"

"아키츠군도 의외로 숙맥이네~"

"너희들이 내 입장이 되보면 그런 소리 못한다구..."

정말이지 키스하기 직전의 거리였단 말야.
뜨거운 숨이 닿았던 방금전 상황을 떠올리며 몰래 손가락으로 입술을 한차례 매만지다가 야미와 눈이 마주쳤다.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는 야미의 시선에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자
야미는 가만히 날 따라하듯 입가로 오른손을 가져가 오른손 검지로 아랫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살짝 눌러진 입술이 말랑말랑할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망상에 빠진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입술에 가져댔던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이후 몇번의 추첨이 돌아가며 해프닝들이 연출되었다.
리토가 하루나에게 목마를 해주다가 넘어져서 쓰러진 리토의 얼굴이 하루나의 가랑이에 파뭍혀 하루나가 비명을 지르며 따귀를 날렸다든가,
라라에게 무릎 베개를 받고서 얼굴이 확 붉어진 야미를 리사와 미오가 깔깔거리며 놀리거나,
코테가와가 미오의 엉덩이를 쓰다듬는다라는 문장이 나와서 코테가와가 곤욕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나의 차례가 되었다.


- 아키츠 료스케가 유우키 미캉의 배꼽을 핥는다.

"잠깐만!?"

기겁해서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경악한채 일어선 날 보던 리사가 낄낄대며 말했다.

"오오~! 이거 생각보다 더 굉장한게 나왔잖아?"

...생각보다? 뭔뜻이냐 리사?

"원래는 「발바닥을 핥는다」를 예상했는데 말이지~"

...아까전에 발바닥만 나왔을 때 아쉬워한게 이것 때문이었군.
미캉을 바라보니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당황스럽지? 나도 그래.
배꼽 핥기라니...매니악하기 그지없는 플레이다.
게다가 알고 지내는 초등학생 여자애한테 그걸 하라니...변태가 따로 없다고.

"그, 그럼..."

"잠깐 미캉!? 멈춰! 타임!"

"료스케 오빠?"

머뭇거리면서 상의 아래를 조금 들어 배꼽을 내보이려는 미캉의 모습에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당황한 내 모습에 리사와 미오는 재밌어하며 부추겼다.

"어서 하라구 아키츠군. 하지 않으면 벌칙이 있다구~?"

"그냥 벌칙을 받을께..."

"에에~ 아키츠군. 하지 않는거야?"

"그런짓, 할수 있을꺼 같아?"

"우우~ 재미없어~!"

야유하는 미오의 반응은 무시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이건 틀림없는 아웃.
게다가 미캉의 오빠인 리토도 있다고.
자기 눈앞에서 여동생한테 그런 짓 하는 걸 용납할 오빠가 있을거 같으냐?
그냥 벌칙을 받고 말지.

"그럼 아키츠군, 벗어줘~"

"...어?"

"벌칙이야. 명령을 실행하지 못할 경우엔 한벌씩 옷을 벗는거라구~"

주술목 게임에 덧붙여 탈의 게임인거냐...
다른 선택지는 재고의 가치도 없었기에 순순히 파자마 상의를 벗었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을까...
게임은 어느새 파렴치함을 점점 더해갔다.
도중에「코테가와의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는 선택지가 걸린 뒤,
째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을 받고선 또다시 벌칙 받기를 선택해 버렸고.
바지를 벗고나서야 '그냥 소매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어쩔수 없나.

파렴치한 선택지를 피하기 위해서 내쪽이 속옷만 입은 파렴치한 모습으로 되어버리자 몇몇 아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라라야 알몸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딱히 시선을 돌리거나 하진 않았고
리사랑 미오의 경우엔 오히려 노골적으로 날 바라봐서 부끄러운 나머지 은근슬쩍 손으로 몸을 가리기도 했다.



한동안 진행되던 게임도 시간이 많이 흘러 끝내기로 했다.
다행히 팬티 한장을 남긴채 벌칙 방어에 성공해 한숨을 쉬고 다시 파자마로 갈아 입었다.
이미 보여줄건 거의 다 보여준것 같아서 수치심도 뭣도 안 남은것 같지만...

숙박은 여자애들의 경우 미캉과 라라의 방에 나눠서 자기로 했다.
라라의 방엔 하루나와 라라, 리사랑 미오가, 미캉의 방에는 미캉과 야미와 코테가와가 자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리토의 방엔 나와 리토 둘이서 자게 되었고.

"그럼, 잘자 아키츠."

"응. 유우키도 좋은 꿈 꾸라구."

리토의 침대에 함께 누워 눈을 감았다.
친구랑 같이 자는 경험은 오랜만이구나.
어색하지만 조금은 기뻤기에 약간 미소지으며 잠에 들었다.



뭉클...



...?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눈을 뜨자 내쪽을 향해 리토가 돌아누운채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내몸에 걸쳐진 리토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리토의 손이 내 파자마 바지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스러워하는데 「으음...」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리토의 손가락이 내 바지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거냐 리토!?

"음...맛있을거 같은 마시멜로..."

마시멜로가 아냐!
뭐야 이 파렴치한 손놀림은...!
엉덩이에 파고든 손가락이 점점 가랑이 안쪽을 향하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뺐다.
대, 대체 어딜 만지는거야!? 적당히 하라고!

침대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마시멜로를 찾아 침대위로 손을 더듬거리는 리토를 보았다.
꼼지락 거리면서 침대를 만지는 리토의 손놀림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곤 리토에게 사과했다.

미안 리토...
내가 널 과소평가 하고 있었어.
평소의 순진함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너의 손놀림과 망상만큼은 파렴치했다는걸...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서 자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끼이익 소리가 나며 리토의 방문이 열렸다.
놀라서 문쪽을 바라보니 반쯤 눈이 감긴채로 꾸벅꾸벅 졸면서 라라가 침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몽유병처럼 다가와 리토의 침대로 올라온 라라는 리토를 껴안은채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리토오~♡"

리토를 부르며 그대로 골아 떨어진 라라를 침대구석에 쭈그리고 앉은상태로 가만히 지켜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 둘의 사이에 끼어서 자는건 도저히 못할 짓이지...
잠결에 라라의 꼬리에 손을 뻗어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리토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한 라라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리토의 방을 나왔다.
...둘을 배려해주는것 이전에 여기 있다간 정신이 못버틸것 같았다.
밤새도록 이상한 잠꼬대와 신음소리를 듣고 태평하게 잘만큼 내 신경이 굵진 않다고.

별수 없이 1층으로 내려가 거실의 소파에 드러누워 눈을 붙이기로 했다.
초가을이라 조금 쌀쌀한 느낌이 들지만...이불을 가지러 리토의 방에 되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고,
몸도 튼튼하니까 이정도는 괜찮겠지.
천천히 잠기운이 돌며 몽롱해지는걸 느끼곤 소파에 누운채 다시금 잠에 빠졌다.




흔들흔들...

"아키츠군?"

"...으응...?"

어깨를 잡고 흔드는 누군가의 손길에 눈을 떠보니 코테가와가 고개를 숙인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코테가와?"

"어째서 이런 시간에 여기서 자고 있는건가요?
유우키군의 방에서 자는거 아니었어요?"

의아한 얼굴로 묻는 코테가와를 보곤 한차례 하품을 하곤 답했다.

"아함...도중에 라라가 리토의 침대위로 올라와서 말이지.
그...왠지 그 방에 있기 힘들어 졌달까. 분위기를 읽었다고 할까..."

한손으로 허리를 매만지면서 하품을 하는 나에게 코테가와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희 방에서 자도록 해요. 바닥에서 잘 공간은 있으니까."

"아니, 난 여기서 자도 괜찮은데?"

"이런데서 이불도 없이 자면 몸에 안좋다구요.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고 방에 올라가 있어요."

"어, 응."

내 손을 잡고 억지로 날 일으켜 세운 코테가와의 강경한 태도에 밀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코테가와는 물이라도 마시려 내려온거야?"

"조금 손을 씻으러 나온거에요."

손을? ...아아, 화장실을 돌려 말하는 거로군.
모른척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미캉의 방으로 올라갔다.



「미캉(みかん)의 방」이라고 쓰인 하트무늬 팻말을 확인하고 조용히 미캉의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는 미캉이 몸을 옆으로 살짝 기울인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평온하게 자고 있었다.
...야미는 어디있지?

이상하게 생각하며 미캉의 방안으로 한걸음 내딛자 갑자기 오른편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옆구리를 향해 휘둘려졌다.
난데없는 횡액에 급히 몸을 뒤로 젖히며 칼날면을 잡아내자 방의 오른편 귀퉁이에서 금빛 물체가 내쪽으로 튀어나왔다.
야미...!?
이번엔 변형된 손칼날을 휘둘러오는 야미의 손목을 잡고 급히 바닥에 쓰러뜨렸다.
수면상태에서 나온 무의식중의 공격이었는지 생각보다 손쉽게 야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위에서 내리누르듯 양팔을 잡고 야미를 바닥에 눕히고 나서야 숨을 돌릴수 있었다.
수면중에도 경계상태라니, 잘 때 함부로 건들면 안되겠네...
용케도 수영장 호텔에서 숙박할 땐 문제가 없었다며 안도하고 있을때 천천히 야미의 눈이 떠졌다.

"...아키츠 료스케?"

"아. 안녕 야미, 좋은 꿈 꿨어?"

가볍게 인사한 날 보곤 야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무슨...!?"

"쉬...조용히. 미캉이 깬다구."

몸부림치며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야미의 양팔을 잡은채 당황하며 말했다.
얌전히 자러와 놓고선 곤히 자고 있는 미캉을 깨우면 민폐일 따름이다.
멈칫하는 야미에게 다시 주의를 환기시키려 얼굴을 마주한채 속삭였다.

"(한밤중에 시끄럽게 떠들면 좋지 않잖아?
물론 나도 소란스러워 지는건 바라지 않으니까.)"

"......"

조용히 귓가에서 속삭인 내 말에 야미는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다물고 침묵해버렸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진홍색 눈동자로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야미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야한 짓은, 싫습니다..."

"...으응?"

스러질듯 귀에 들려온 야미의 말에 의아해 하다가 문득 현재 상황을 되돌아 봤다.
야미를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야미의 양팔을 속박하고 있는 나.
...누가 봐도 야한 목적으로 방에 침입한 변태로군요 이건.
흐트러진채 바닥에 넓게 퍼진 길다란 금빛 머리카락이 야미의 모습을 더 가련하게 보이게 했다.
의도치 않은 상황에 꿀꺽 침을 삼키곤 천천히 야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빼려는데 등 뒤에서 무서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키츠군?"

조용하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기기긱-소리가 날 듯 삐걱거리며 억지로 고개를 돌리자 코테가와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보며 서있었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채 코테가와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신용한 건 제 실수였나보네요."

"아니, 그게 말이지..."

"안심해요. 그렇다고 방에서 내쫓지는 않을테니까.
...그것보다 아키츠군도 이불 하나 정돈 필요하겠죠?"

왠지 초가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꺼운 이불을 들고서 코테가와는 생긋 미소지었다.




"...더워..."

고치처럼 두꺼운 이불에 둘둘 말려 끈으로 꽁꽁 묶인채 방 바닥에 방치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코테가와가 베개도 함께 챙겨줬기에 머리를 공중에 붕 띄운 채로 잠자게 될 처지는 아니었지만...
밤이라 쌀쌀하다곤 해도, 막 여름이 끝난 초가을이었기에 이렇게 둘둘 말려선 그저 덥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방금전까지 방 귀퉁이에 선채로 자던 야미는 코테가와의 말을 듣고 침대에 올라가 잠을 청했다.
코테가와는 침대를 사이에 두고 나와 반대편에 누웠고.
이불에 말려 덥고 갑갑한 느낌 속에 '물이라도 한모금 마시고 잘걸'하는 생각을 하며 얌전히 눈을 감았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선인장도, 오아시스도 없는 황량한 사막을 정처없이 걷고 있었다.
내려쬐는 강렬한 햇살속에 타오르는 갈증을 느끼며 헐떡이던 낮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이상한데...분명 사막의 밤은 춥다고 들었는데 여전히 더워...
억지로 잠에 들었는데 한밤중에 느껴진 온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감촉에 눈이 떠졌다.
어째선지 하늘에서 내려온 타원형 바위가 날 짓누르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날 깔아뭉개고 있는 바위를 치우려다가 바위에 맺힌 이슬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강우량이 적은 사막에서 식물들의 귀중한 수분 공급원.
갈증에 목마른 입을 열어 바위에 맺힌 이슬을 정성스레 핥았다.

「햐악?」

...응? 기대했던 차갑고 시원한 감촉이 아닌, 따듯하고 말캉한 감촉이 혀에 느껴지며 위화감 속에서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보이는건 얼굴을 덮은 부드럽고 새하얀 피부와 말려올라간 파자마 상의.
컥...설마?
고개를 움직여 상황을 확인하자 침대에서 떨어진 미캉이 내 얼굴에 착지한 상태였다.
미캉의 배가 내 얼굴을 가리는 형태로.
말려올라간 파자마 아래로 보이는, 움푹 파인 홈 근처에 반들거리는 액체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부스스한 얼굴로 미캉이 눈을 떴다.

"...료스케 오빠?"

"여...조, 좋은 아침 미캉?"

"아, 죄송해요! 지금 비킬께요."

날 깔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서 미캉은 얼굴을 붉히곤 일어났다.
일어난 미캉이 옷차림을 바로하면서 반들거리던 배꼽은 파자마 아래로 사라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료스케 오빠.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거에요?"

"첫째로, 여기에 있는 이유는 유우키네 방 침대로 라라가 들어와서.
둘째로, 이런 모습으로 있는 이유는...목줄이랄까?"

"? 어쨌든, 이불은 이제 풀어드릴께요."

미캉은 솜씨좋게 이불을 묶고있던 끈을 풀어주었다.
갑갑한 상태에서 겨우 벗어나 한숨을 쉰 나에게 미캉이 티슈를 건네주었다.

"아, 그리고...침 흘렀어요.
고개는 똑바로 하고 자야한다구요. 료스케 오빠."

"어...고마워. 아, 아하하..."

졸면서 흘러 나온건 아니지만...
조금 죄책감을 느끼면서 받아든 화장지로 입가를 닦았다.



이후 세수를 한 뒤 주방으로 들어간 미캉의 옆에서 아침식사 준비를 도왔다.
아침에 벌어졌던 해프닝에 대해서 사과하는 의미도 있었으니까.
요리를 준비하는 도중 2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오, 오해야 사이렌지!」「꺄악!」「짜악-!」

신음소릴 내는 라라의 꼬리를 움켜쥔 리토의 모습을 하루나가 보기라도 한걸까?
리토의 방에서 들려오는 하루나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테이블을 정리했다.
역시나랄까...리토가 있고 라라가 있는 생활은 트러블이 끊이질 않는구나.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내려오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살짝 웃음짓곤 요리한 음식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오늘도 언제나 처럼 즐거운 하루가 될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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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다 새었네요...쿨럭;
다들 좋은 꿈 꾸세요~*^^*
Zzz...ㅇ<-<

(처음 나왔던 시장 콩트는 실제로 가끔 있는 일이더군요^^;)

p.s.1.리토 집의 욕실은 거실에서 세면실을 지나서 욕실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세면실]▷[욕실]

그리고 잠자는 방을 정할 때 왜 미캉이랑 라라, 리토 방 3개 밖에 선택지가 없었던건 원작 설정이 애매해서 그랬습니다.
원작 116화에서 나나와 모모가 리토네 집에서 지내길 부탁하면서, 천장과 지붕 사이에 공간왜곡장치로 방을 만들죠.
2층 집인데...집도 큰데...왜 그냥 다른 방을 쓰지 않고 번거롭게?=_=;
게다가 다른 방은 창고로 쓰이는지, 문이 잠겨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래서 결국 이야기에선 미캉과 라라, 리토의 방만 등장시켰습니다.



p.s.2.본문에 나온 주술목의 원래 조합 몇개는 이렇습니다.

코 - 쥔다
손바닥 - 맞댄다
배꼽 - 약손
발바닥 - 핥는다

아무튼 주술목 게임이다보니 조금 매니악한 선택지도 나올수 있었지만 자중.
뭐, 매니악한 플레이로는 제이더 님의 부서진 세계 팬픽(19禁)에서 봤던 나래가 퀘이사 눈 핥는 플레이가 최고(퍽...)

도중에 라라 머리카락 빗어주기가 나온 이유는...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머리 스타일이었기 때문(...)=x=;;



p.s.3. 관련 이미지

학교를 배회하는 오시즈

범인은 페케

라라 머리 묶음1

라라 머리 묶음2

라라 머리 묶음3

서서 잠자는 야미

미캉


Posted by 루트(根)
,
석양이 드리운 가운데 나와 코테가와 만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는 교실.
열린 창문 틈으로 불어온 바람에 코테가와의 머릿결이 한차례 흩날렸다.
사르륵- 기분좋게 느껴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나를 바라보던 코테가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아키츠군..."

"레알?!"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내 모습에 살며시 웃으며 코테가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기뻐!
마치 꿈만 같아...
코테가와가 날 좋아해주다니..."

"...그게 아니에요."

"응?"

고개를 젓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코테가와에게로 다가가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 코테가와는 내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대며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유이라고 불러줘 료스케..."

뜨거운 한숨이 귓가를 타고 흐르며 목덜미를 간질였다.
뇌리를 흔드는 달콤한 목소리에 홀린듯, 코테가와의 눈동자를 빠져들듯 응시했다.
메마른 침을 삼키곤 입술을 벌려 떨리는 목소리로 코테가와...아니, 유이의 이름을 불렀다.

"좋아해 유이......"




"으, 음냐......유이...에헷..."

"...아키츠 료스케?"

"...으응...?"

달콤한 목소리에 녹아들듯 멍해진 정신을 가눌생각도 않은채 목소리가 난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교단쪽에서 머리를 뒤로 틀어묶고 안경을 쓴 정장 차림의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하겠습니다. 화학물질 H2O 를 뭐라고 하지요?"

"후아암...산소..."

"......"

조그맣게 킥킥대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귓가에 들리는 이질적인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흐릿한 시야에 눈을 비비고 돌아보니 어느새인가 클래스메이트들이 자리에 앉아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일어선채 서로 마주보고 있던 유이는 내 오른쪽 책상에 앉아서 골치 아프다는듯 이마를 잡고 있었다.

"......어라? 여긴...?"

아리송한 상황에 머리가 따라잡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려니
교탁에 서계신 여성, 그러니까 화학 선생님께선 두통이 이시는지
관자놀이를 한차례 메만지시곤 나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용사여."

"...네."

롤플레잉 게임이라도 즐기시는겁니까.
키득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업시간에 겁도없이 숙면을 취한 용기있는 아키츠군.
화장실에 가서 산소로 세수하면서 H2O 는 대체 뭘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도록 하세요."

"...넵."

꾸벅 고개를 숙이곤 뒷문을 통해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왔다.
찬물에 얼굴을 씻어 정신을 차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수업시간에 졸다가 망상 넘치는 꿈을 꾸다니.
거울 너머에 비친 붉어진 얼굴을 보곤 부끄러움을 잊고자 양뺨을 소리나게 두드렸다.




"아키츠군은 좀더 공부를 해야겠네요.
방금전 질문은 중학교때도 배운거였잖아요."

점심시간.
함께 식사를 끝마친 코테가와가 도시락을 정리하면서 한 말이다.

"잠결에 실수한거였어..."

그냥 잠이 덜깬 상태에서 나온 말이라니까?
내 대답이 미덥지 않았는지 코테가와는 다시한번 충고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에요. 좀더 학업에 힘써야 한다구요."

"저번에는 단정함이 본분이라고 했으면서..."

"둘다 중요하니까 말이죠.
그렇지 않아도 며칠 뒤에는 테스트가 있잖아요?"

코테가와의 우려섞인 관심에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는데 뒤에서 어깨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니 리토가 내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키츠.
나도 요즘 제대로 공부하질 않았거든.
아버지 만화 어시스턴트 하는것도 바빴고...
그러니까 함께 힘내자구."

"그..."

엄지를 치켜세우곤 원츄를 날리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리토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리토...그런게 아니야...
외모가 이래서 오해하는진 모르겠지만,
나 그렇게까지 공부랑 담쌓고 지낸건 아니라고?
오히려 내쪽이 널 걱정해줘야 한단 말야...

그렇다고 기껏 걱정해주는 리토가 무안하게 면박을 줄수도 없는지라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걸로 답했다.
그런 내 모습이 안이해보였는지 코테가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의욕없어 보이는 태도로는 아무것도 안되요 아키츠군.
성실하게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구요."

"일단 성실하게 생활할 마음인데 말이지..."

"방금전 수업때 졸았으면서...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하라구요."

깜빡 졸았던 화학수업시간의 일 때문에 코테가와는 내 말이 영 믿음이 가지 않았나보다.

"어떻게 하면 아키츠군이 공부에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뭐야뭐야? 무슨 이야기?"

리토에 이어서 미오가 우리에게 다가와서 궁금한듯 물어오기에 손가락으로 코테가와를 가리키며 답해줬다.

"어떻게 하면 날 공부시킬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것 같은데?"

"강건너 불구경 하듯 말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 문제가 아니라 아키츠군 당신의 문제라고요!?"

버럭- 소리를 낸 코테가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던 미오는 뭔가 떠오른듯 손바닥을 탁 두드렸다.

"아, 그럼 이건 어때?
방과후 일대일 개인교습 같은건?
분명 옆에서 도와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개인교습 말인가요?"

"헤에~ 그거 괜찮은데?"

"모미오카?"

어느새 다가온 리사가 대화에 끼어들어왔다.
내 책상위에 살짝 걸터앉은 리사는 내쪽으로 몸을 숙이며 히죽 웃었다.

"후후...그럼 리사 선생님과 개인 교습을 시작해볼래 아키츠군?"

"저기, 얼굴이 너무 가까운데..."

코가 맞닿을 얼굴을 가까이 한 리사의 모습에 약간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에 앉은채로 슬쩍 상체를 뒤로 빼는 날 재밌다는듯 바라보면서 리사는 문제를 냈다.

"그럼 문제~ 「내 것인데 남이 더 많이 쓰는 것」은?"

"「이름」."

"정답~!"

리사는 잘했다는듯 책상에 걸터 앉은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제를 맞춘 학생을 대견한듯이 칭찬하는 선생님 역할인가...
...근데 이거 공부가 아니라 그냥 수수께끼잖아!
그리고 부끄러우니까 머리 쓰다듬는건 멈춰줘.

"후후~ 잘 맞췄어요 아키츠군.
착한 학생에겐 상을주지 않으면~"

"응?"

초승달같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리사는 왼손으로 치마를 잡더니 슬쩍 위로 걷어올렸다.
걷어올려진 치마의 그림자 너머로 프릴이 달린 실크색 속옷과 그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가랑이가 망막을 가득 채웠다.
예상을 넘은 대담한 행동에 놀란 나를 보며 리사는 유혹하듯 말했다.

"이 안을, 알고 싶지 않니?"

"...꼴깍."

"잠깐! 뭐하는거야 모미오카씨!
아키츠군도 그 시선 치우지 못해요!?"

내 상의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리사를 코테가와가 황급히 말리며 외쳤다.
코테가와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잽싸게 돌리는 날 보며 리사는 유쾌한듯 웃으며 손을 치웠다.

"아하하~ 역시 보고 싶었구나? 남자들은 단순해~♬
유감이지만 서비스는 여기까지~"

아니, 여전히 내 책상위에 앉은채로 다리를 꼬고 있으면 치마속이 보이는데?
약간 얼굴이 상기된 주제에 계속 히죽거리기나 하고...
가끔씩 리사가 보이는 도발적인 태도는 발돋움하고 싶은 나이대의 표현인가,
아니면 당황하는 남자애들을 보는 재미로 하는 행동인걸까?
1학년 학원제 때 애니멀 찻집때의 동물 의상을 부끄러워 했던 적도 있고,
성희롱 같은건 친구들 사이에서만 치는것 같으니 너무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잠시 딴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때 다시금 미오가 의견을 냈다.

"그럼~ 내기는 어때?"

"내기?"

"성적 승부 말야.
아키츠군의 호승심을 이용하는거지.
저번에 라라찌와의 결투도 투쟁심이 남아있어서였잖아?"

"응~ 그러고보면 승부할 때의 아키츠군은 꽤나 즐거워 보였잖아?"

...그건 싸우는게 좋아서 그랬던게 아닌데?
내가 무슨 배틀 매니아도 아니고.
그땐 라라의 긴장감 없이 유쾌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편승한거 였다고.
거기다 「피할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잖아?

"성적으로 승부라...
확실히 아키츠군에겐 괜찮은 방법이겠네요."

미오에게 동의하는 리사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곤 내쪽을 보며 확고해 보이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럼 아키츠군. 저랑 내기하지 않을래요?
성적승부 말이에요."

코테가와의 의도가 뭔지는 대강 알겠다.
넘쳐흐르는 나의 파괴욕구, 투쟁심, 승부사 근성...뭐, 어쨌든 그런걸 자극해서 공부를 장려한다는 거겠지.
착각이지만...
그야 라이벌이 있다면 공부에도 도움이 되겠지.
상대보다 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할테니까.
나로서야 재밌는 승부가 될꺼라고 생각하지만...불량하다고 소문난 나를 상대로 모범생인 코테가와가 경쟁의식을 갖고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을것 같진 않은데?
코테가와로서는 오히려 공부할 의욕이 떨어지지 않나?

"한쪽만 유리한 승부는 사양하고 싶은데..."

"도망치는건가요?"

"...어째서 그렇게 되는거야?"

마땅찮은듯한 내 반응에 리사와 미오는 옆에서 야유하듯 부추겼다.

"에~ 설마 질까봐 겁나는거야 아키츠군~?"

"항상 코테가와씨에게 눌려 지냈잖아~
한번쯤은 역전의 기회를 노려봐도 되지 않겠어?
아, 물론 이긴다면 말이지~"

...이거 지금 깔보이는거 맞지?
일부러 그러는듯 깔깔대며 놀리는게 속이 빤히 보이지만...
이렇게까지 도발해주는데 승부를 받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지.

"...좋아,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피하진 않는다고."

"오오~! 과연 승부사답네~!"

꺄악 거리는 리사와 미오의 호들갑에 주위 클래스메이트들의 시선도 하나 둘 집중되었다.

「뭐야? 성적승부?」
「불량아 아키츠 료스케랑 풍기위원 코테가와 유이가?」
「방금전 여자애들의 도발에 넘어가서 받은것 같은데?
게다가 아무래도 이번엔 저 녀석 분위기도 심상치 않아 보이고...」
「하지만 성적승부라니, 아무리 그래도 결과가 너무 뻔한 승부 아냐?」
「아냐. 혹시 모른다고.
1학년때 저녀석과 같은 반 친구에게 듣기론 '엘리트 야쿠자'란 별명도 있었다던데...」
「야, 그건 성적 때문에 그런게 아냐.
성적에 신경쓰느라 학교에선 비교적 큰 사고는 안쳐서 붙어진 별명이라고.
그리고 저녀석 성적을 알아보려고 녀석의 성적표를 들여다 볼 간큰 녀석이 어딨어?」

...틀린 말은 아니다만.
실제로 시험 이후 성적은 개별 통지였으니까 상대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한 알 수 없다.
성적 공개로 경쟁을 과열시키지 않는 학풍이 나로선 정말 마음에 들지만.
공부하는 모습에서 나도 어느정도는 모범생으로 인정 받을꺼라 생각했는데 유감.

「게다가 방금전 수업시간에 선생님 질문에 대답하던거 못들었어?
저녀석의 뇌구조는 '밥+싸움+여자'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

자업자득이었습니까...
살짝 한숨을 쉬곤 다시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만약 이기면 어떻게 할꺼야?"

"음...그럼 제가 이긴다면 아키츠군의 수염「역시 학교에서 내기는 나쁜 일이군요.」끝까지 들어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에게 코테가와가 소리쳤다.
리사랑 미오도 재밌겠다는듯이 뒤에서 양 어깨를 꾹 누르며 날 억지로 제자리에 앉혔다.

"에에~ 좋잖아 아키츠군?
이번 기회에 그 나이들어 보이는 수염은 잘라버리라구~?"

"맞아-맞아-.
구레나룻 자르고 나니까 훨씬 젊어보였잖아?"

"놔, 놔라! 이놈들아!
난 이젠 내기에서 내 수염 같은건 절대 안걸꺼라고!"

「「「...이젠?」」」

내 저항을 바라보던 클래스메이트들이 내 말에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저 수염 매니아가 구레나룻을 잘랐을때 무슨 변덕인가 싶어서 몸을 사렸는데,
설마 예전에 잘라낸 구레나룻은 내기에서 져서 잃었던건가?」
「누군진 몰라도 맹자다...
아무리 승부에 이겼다지만 저 불량배 상대로 진짜로 구레나룻을 밀어버렸을줄이야...」

지금 그 맹자중 한명이 남은 수염마저 자르는 만행을 저지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승부는 풍기위원의 승리군.」
「아아...심리전에서 이미 끝났어.
마음에서부터 진 아키츠 료스케의 패배다...」

벌써부터 승부 결과를 단정지은 녀석들에게 태클걸 여유는 없었다.
DI○의 비밀을 내기 조건으로 걸어버린 갬블러 다비의 심정이 지금과 같을까.
거기까지 심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위기감은 확실히 느껴졌다.
꿈속에서마저 이계트립을 당하는 악몽을 또 겪으라고?
리사랑 미오에 눌려 반항하는 나를 코테가와가 진정시켰다.

"진정해요 아키츠군. 농담이었으니까."

"거짓말 하지마!
눈이 진심이었다고?"

"...조금은요.
그래도 이정도까지 하지 않으면 아키츠군도 의욕을 내지 않을테니까."

코혼- 하고 한차례 헛기침을 한뒤 코테가와는 자세를 바로했다.

"그럼 수염대신 다른 조건을 걸죠.
아키츠군의 성적이 나쁘면 다음에 시행되는 「풍기강화주간」 동안 임시풍기위원으로 활동해주세요.
물론 그 기간 동안은 헤어밴드나 목걸이, 팔찌 같은 액세서리는 착용 금지입니다."

-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들렸다.

"설사 지더라도 80점 이상 받는다면 벌칙은 없던걸로 해드리죠.
그만큼 아키츠군이 노력했다는거니까."

코테가와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승부 내용은 이걸로 끝이에요.
시험까지 힘내길 바래요."

...응?

"저기..."

"뭔가요 아키츠군?"

뭔가 미심쩍게 끝나버린 내기 내용에 의문이 생겼다.

"조건은 이게 끝이야?"

"그런데요?"

"...내가 이길 경우엔?"

"네?" "응?" "어?" "에?"

「「「뭐?」」」

애초에 내가 이길수 있다곤 생각하질 않아!?
실례인 녀석들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모습에 이마에 혈관마크가 생길것 같았다.
코테가와는 놀랐다는 표정을 금새 지우곤 슬쩍 웃었다.

"그렇네요...아키츠군이 이긴다면 뭐든 한가지 들어드리죠."

관대해 보이는 표정도 지을줄 아시는군요 코테가와씨.
확실히 관대해도 좋을 조건이지만...애초에 질 생각은 없다는 거겠지?

"...후회하진 말라고."

"아키츠군이야말로 힘내야 할껄요?
대신 60점 이하라면 염색한 머리도 바꾸고 수염까지 밀어버릴테니 각오하는게 좋아요.
뭐, 정말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염색 정도는 봐드리죠."

...어차피 이 학교엔 별의별 머리색이 다있으니까 염색은 문제없지 않아?
아무튼, 나도 그렇게 만만하진 않다 이거야.
이래뵈도 검정고시로 대학갈 수준은 되었다고.
...「현대법학입문(現代法學入門)」을 들고 다니며 읽는 코테가와도 만만치 않지만.
오랜만에 공부쪽으로 승부욕에 불타오르는 전개가 될지도...

"에~ 재밌겠다! 그럼 리토- 나랑 '성적내기'할래-?"

"핫, 라라 너한텐 안진다고!"

자신만만하게 무덤을 파지 말아줘 리토...
상식이 엄청 결여된 라라지만, 문과계통은 몰라도 이과계통에 있어선 은하계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고?
뭐,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수학점수 100점을 1000점으로 학교에서 올려주거나 하진 않으니까 리토에게도 승산은 있겠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갈 정도는.
예전에 우연히 봤던 리토의 성적표를 떠올리며 마음 속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날의 내기 이후 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
코테가와를 쓰러뜨리기 위해 난 혹독한 공부를 하고 있다.
납덩이를 차고 수학 문제를 풀고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영단어를 외우며 달궈진 모래에 손을 찌르며 교육방송을 본다.
하지만 혹독한 수련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다.
왜지? 내 공부방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걸까?」

"그래서, 실제론 어때?"

"...뭐가 말야 사와다?
그리고 방금전 내용은 대체 뭔데?"

"아키츠군의 공부 방법에 대한 추측들인데, 왠지 너무 그럴싸해서 말이지~"

"그래서 아키츠군에게 직접 물어보는거야.
정말로 뭔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공부하는건 아닌지 말야~"

내기를 한 다음날, 학교에 오자 리사와 미오에게 들은 소문이었다.
왠지 흑색 가쿠란(옛날 남학생복)을 입은채 열혈모드로 공부를 빙자한 육체 수련을 하는 구시대 불량배의 모습이 떠오르는 소문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방금전 질문을 무시하곤 가방에서 조용히 안경집을 꺼내들었다.
안경을 꺼내 쓰자 옆자리에서 코테가와가 놀란듯한 얼굴을 했다.

"아키츠군. 혹시 눈 나빴어요?"

"아니, 이건 무도수 안경이야."

"어째서 그런걸?"

"그냥...공부할때 좀더 집중할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심리적인 효과라고 할까?
외적인 변화를 줘서 마음가짐을 바로하는 수단으로 쓰려고 사둔거다.
클래스메이트들의 뻔한 결말을 예상하는 태도는 솔직히 불만이었기에,
반전이라는 묘미를 이번 시험을 통해 보여주려고 결심했으니까.

"그래서, 어때?
좀 머리좋아 보이지 않아?"

빤히 쳐다보는 코테가와와 다른 아이들을 보며 안경을 쓴채 감상을 묻자 왠지 다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응...뭐라고 할까..."

"굉장해~ 안경을 쓴 것만으로도 이정도로 바뀔 줄이야~!"

미묘한 코테가와의 반응과 달리 미오는 왠지 흥분한듯 해 보였다.
평소에 안경을 쓰고 지내는 미오니까 다른사람과 달리 좀더 특별한 의견을 보여주려는건가?

"이젠 양아치는 커녕 그야말로 두뇌파 야쿠자 보스 같은 품격이 느껴져-!
엄청난 업그레이드라고-!"

"양복 차림으로 서있으면 영락없이 냉철한 야쿠자 그룹 보스?"

"맞아맞아-. 농담이 아니고 진짜 「엘리트 야쿠자」로 보인다구~?"

"......"

안경=엘리트 입니까.
남자 위원인 마토에 아게루도 안경을 썼으니 틀린말은 아닌데.
호들갑을 떠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에 할말이 없었다.
'품격있는'이 덧붙여졌네요.
양아치에서 야쿠자 보스로 업그레이드 돼서...
미오의 말을 시작으로 「나 = 야쿠자 그룹 후계자」설을 두고 웅성거리기 시작한 클래스메이트들의 모습에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는게 제일이라는걸 실감했다.
시험날까지 힘내자, 나...




그리고...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를 받은후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실수도 없었고 컨디션도 좋았다. 결과도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럽고.
교실 한쪽에서는 라라가 리토의 등에 매달린채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응~ 응~ 리토.
이번 주말 백화점에서 「매지컬 쿄코」쇼가 있대! 가~자~"

"그! 그러니까 그딴 유치원생이나 보는 쇼는 가기 싫어!!"

"분명 보면 리토도 재미있다고 할 걸♬"

"들러붙지 좀 마!"

패자는 얌전히 복종하세요.
아무래도 리토는 성적승부에 진것과는 별개로 「매지컬 쿄코」공연 같은건 피하고 싶나보다.
리토랑 라라의 문제야 저 둘이 알아서 잘 할테니 난 내 문제에만 신경써야겠다.
자리에 앉은채 안색이 창백해진 코테가와의 어깨에 툭-하고 손을 올렸다.
흠칫-하며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코테가와는 얼굴에 약간 땀방울을 매단채 어색하게 웃었다.

"아...아키츠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일만큼 가까워진 코테가와를 보며 짙은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원 한~가~지"

"...딸꾹."

긴장한 나머지 딸꾹질이 나온 코테가와의 모습에 잠시 멈칫해 있자 뒤에서 리사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야한거 부탁해~"

진심입니까 이 성희롱 아가씨야.
남들 다 보는 앞에서 그런 파렴치한 부탁따위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주위 녀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듯 했다.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내쪽을 바라보며 수근대는걸 보면.

「드디어 시작된건가...'반역의 아키츠 료스케'가...」
「분명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부탁을 하려는거야.」
「서, 설마 러브호텔인가!?」
「그리고 그 일을 약점으로 잡아서 이후로도 이렇고 저런짓을...」
「코테가와씨 어떡해...」
「괘, 괜찮아. 여차하면 경찰에...」

...요즘 고교생들의 사고는 무섭네요.
겨우 내기 하나로 그런 부탁을 하는게 말이돼? 상식적으로 생각해...
게다가 그런 부탁을 한다고 순순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거 같냐고. 그렇지 코테가와?

......코테가와씨?
그렇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면 제쪽이 오히려 송구합니다만...

진심으로 경계하는 듯한 코테가와의 모습에 골치가 아파져
시험기간 동안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콧잔등을 한차례 매만졌다.
난 아직 바라는 것도 생각 안해봤다고...
안그래도 요즘 공부한다고 바빴는지라 그냥 좀 편하게 있고 싶은데 이런 반응은...음...?
문득 떠오른 일이 있어서 코테가와를 보았다.
왠지 들고양이처럼 경계하는 눈초리의 코테가와의 모습을 보니 떠오른거지만...
모처럼 시험도 끝났으니 코테가와도 기분전환이나 시켜주는게 좋을까?
불안한듯 내 눈치를 살피는 코테가와를 향해 지금 떠오른 소망을 말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어느 주말 아침.
약간은 따듯한 바람을 맞으며 극장가 근처에서 쉴 공간을 찾았다.
눈에 들어온 벤치에 앉아 쉬면서 손에 집어든 팜플렛을 보았다.

「버림받은 고양이」

상자속에서 고개를 내민 고양이의 그림이 그려진 팜플렛.
이번에 극장에서 상영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테니스 부의 사야카와 코요미가 읽고 있던 'MISTY'라는 잡지에서 소개된 영화인데,
어린이들이나 소녀들 취향의 귀여운 그림체로 소개되어 꽤나 인기가 좋을듯 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코테가와가 재밌게 본다면 좋을텐데 말이지.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잠시 몸을 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만치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단발, 웨이브 장발, 트윈테일의 여자애 셋이 영화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른들 없이 친구들끼리 보러 온건가? 귀여운 꼬마들이네...
그러고보면 라라가 오늘 백화점에 매지컬 쿄코를 보러가고 싶어했는데 리토가 동의했을까 몰라.

"많이 기다렸어요 아키츠군?"

등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와 쇄골이 드러난 짧은 민소매 원피스 차림의 코테가와가 목에 두른 스카프를 매만지며 서있었다.

"코테가와? 벌써 온거야?"

"아키츠군이야 말로 왜이렇게 빨리 나온거에요?
혹시 많이 기다리진 않았어요?"

"아니...나도 막 도착한 참이야."

남자쪽이 먼저 나와 기다리는게 매너니까 나름대론 생각을 해서 나온건데.
역시 일찍 나온게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코테가와를 기다리게 만들뻔 했으니까.
물방울 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코테가와는 평소의 교복차림과 달리 개방적으로 보였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에 원피스 위로 드러난 피부를 슬쩍 가리면서 코테가와는 얼굴을 붉혔다.

"뭐, 뭐에요... 이런 옷차림도 좋잖아요?
저도 가끔은 평범하게 꾸미고 싶다구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잘 어울린다고 말하려고 했다고?"

"에...고마워요."

약간 쑥스러워하는 코테가와를 데리고 우선 매표소로 갔다.
조금은 대기줄이 늘어난 매표소 앞에서 방금전 영화를 보러 온 세 여자아이의 바로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성인 1장이요.」
「고등학생 1장이요.」
「초등학생 1장이요.」
「초등학생 1장이요.」
「고등학생 1장이요.」

앞에선 줄이 모두 빠지고 우리 차례가 되어 매표소 앞에 서서 매표소 안의 단발 여성 직원에게 돈을 건넸다.

"고등학생 2장이요"

"저, 죄송하지만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요."

이정도야 이미 예상범위 안이니까 일부러 얼굴 붉힐 필요는 없겠지.
언젠가 사회에 나갈때쯤엔 '동안이시네요'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태연하게 지갑에서 학생증을 꺼내 직원에게 건냈다.
약간 당황스러운 표정의 직원으로부터 표를 건네 받곤 코테가와와 함께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앞서 들어간 초등학생들의 뒷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어떤 내용일까요?"

"글쎄...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되게 귀엽고 감동이라는데?"

"확실히...팜플렛을 보니 꽤 기대되네요."

"그렇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동안 하나둘씩 관객들이 영화관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불이 들어오자 모두들 스크린으로 주의를 집중했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놓고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자 앞에서 여자애들의 즐거운듯한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재미있었어~」

「응, 나 쪼끔 울었다?」

공감한다 소녀여...
고양이 이자식, 짐승 주제에 사람의 눈물샘을 이렇게 자극하기는...

「그치만 뒤에서 보던 큰 언니들도 엄청 울더라.」

「아하하, 그래.」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다가 옆에 앉은 코테가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훌쩍...흐윽...히끅..."

"괜찮아 코테가와?"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울음을 그치지 않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등을 두드려 주면서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아니, 분명 감동의 해피엔딩이었잖아?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을 잡은 고양이의 이야기인데 여기까지 울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코테가와 말고도 훌쩍거리는 여고생도 보이고...
감수성은 어린이들 보다는 사춘기 소녀들이 더 높군요...

한참을 토닥여서 겨우 울음이 잦아든 코테가와를 데리고 영화관을 나오는데 주위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여자애가 울면서 남자와 나오고 있어.」
「응? ...남자놈 분위기가 완전 깡패인데?」
「대충 짐작이 간다. 보나마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는 안보고 저 여학생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거라구.」
「조용한 극장안에서 비명도 못질렀을텐데 불쌍하게...」
「어쩌다 저런 아저씨에게 속아서...」

착각입니다.
뭐, 그 에로 게임 같은 망상?
게다가 아저씨라니...난 아직 고등학생이라고!
숙덕거리는 주위의 모습에 코테가와도 뭔가 이상하는 걸 느꼈는지 나와 눈을 맞추고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영화가 끝난후 약간 시장기를 느껴 미소라당의 슈크림을 사먹곤 다음 일정에 대해서 코테가와랑 이야기를 나눴다.

"이젠 뭘하죠 아키츠군?"

"음...팬시샵에 한번 들러보는건 어떨까?
방금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니까 고양이 인형같은거 하나정돈 갖고 싶어서 말이지."

"그럴까요?"

왠지 눈이 초롱초롱 기대감으로 빛나는듯한 코테가와의 모습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나왔다.

"왜, 왜 웃는 거에요?"

"아하하. 아니, 코테가와는 정말로 고양이를 좋아하는가보다 싶어서..."

"이상할거 없잖아요!?"

놀림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화난 코테가와의 타박을 받으며 상점가의 팬시샵을 들렀다.




지그시-

"(아키츠군...그,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빤히-

"(제발 그만해요 아키츠군...! 제쪽이 다 부끄럽다고요!)"

"귀, 귀엽다아..."

까만 눈망울의 병아리가 롤리팝을 들고 새싹들과 함께 그려진 머그컵도.
네잎 클로버를 머리에 꽂은 앨리스가 흰토끼와 함께 앉아 찻잔을 들고 있는 크레용 그림이 그려진 수첩도.
쿠키를 든 헨델, 사탕을 든 그레텔이 강아지와 함께 서있는 그림이 그려진 다이어리도.
배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은채로 서있는 조그마한 토끼 인형도.
포켓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조그마한 크기에다 테마별로 서로 다른 글귀가 적힌 수첩들도.

하나같이 귀여움이 향기로 뿜어져 나올듯한 매력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진열대를 만지려다 코테가와에게 제지당했다.
팬시샵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수염난 남자가 팬시물품들을 호들갑스럽게 보다가 여학생에게 제지당하는 모습을 보곤 키득거리다가 다시 쇼핑을 시작했다.
키득거리는 소리에 살짝 얼굴을 붉힌 코테가와는 나를 보며 충고했다.

"대체 왜 그렇게 잡아먹을듯한 시선으로 쇼핑을 하는거에요?"

"아니...뭐라고 할까, 마음에 위안이 된다고 할까나...?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치유되는 느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넋을 놓고 팬시용품을 바라보는건 이상하게 보이는거 알아요?
조금은 주위 시선에 신경쓰면서 돌아보라구요."

"...네."

코테가와의 조언을 듣곤 얌전히 팬시들을 계속 둘러보았다.
으응...어느쪽도 전부 마음에 드는데 대체 뭘 고르면 좋지?
지갑을 살짝 열어 금액을 확인하고 고민하던 중 진열대 한쪽에 있는 접이식 우산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얼마 있으면 초가을 장마를 걱정해야 하니까 한개 정돈 사두는게 좋을까...
적당히 마음에 드는 상품들과 함께 우산을 고른 뒤 코테가와가 물건을 고르는걸 기다렸다.
리본이 달린 고양이 저금통을 고르고선 기쁜 얼굴을 감추지 않고 계산대로 향하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몰래 웃었던건 비밀이다.

팬시 용품점을 나올즈음에는 어느덧 시간이 꽤 흘러 있었기에 이만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헤어지기전 코테가와에게 조그만 종이 가방을 건넸다.

"아키츠군, 이건?"

"지금까지의 보답.
사실 이번 시험도 코테가와덕에 힘내서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 말야."

"...감사받을 일은 아니에요."

쑥쓰러운듯 고개를 숙인 코테가와는 종이 가방 안을 확인하곤 환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에 리본을 단 새하얀 고양이 인형.

"귀엽게 생긴 고양이군요?
고마워요 아키츠군."

"시로네라고 해."

"시로네?"

웃다말고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짓는 코테가와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그래 코테가와?"

"...아키츠군도 인형에게 이름을 지어주는가 보군요?"

"아니, 내가 지은게 아니라 이건 「매지컬 쿄코」에 나오는 마스코트 고양이인데..."

"매지컬 쿄코?"

"응, 마법소녀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이야."

묘한 표정에서 이상한 표정으로 바뀐 코테가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아키츠군은, 그런걸 보는군요...?"

"뭐, 뭐가 이상해?"

당황하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 키득하고 웃으며 고양이 인형을 품에 안았다.
종이 가방에 인형을 넣는 코테가와를 보며 물었다.

"그럼, 집까지 바래다 줄까?"

"괜찮아요. 오늘은 따로 볼일이 있으니까."

"...그래?"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코테가와를 배웅하곤 나도 상점가를 벗어났다.
아직은 날이 밝은 때라 잠시 공원 근처에서 산책이라도 해볼까 생각하며 천천히 걷던 중,
뒤에서 누군가 이쪽 방향으로 급히 뛰어오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타박타박타박-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전 헤어졌던 코테가와가 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코테가와?"

생각지 못한 조우에 어리둥절해 멈춰 있으려니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코테가와는 제자리에 멈춰 숨을 헐떡였다.

"하아-하아-하아..."

양손으로 무릎을 쥔채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걱정이 되어 손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저기...괜찮아 코테가와?"

"읏...이게 누구 때문인데..."

홱-소리가 날만큼 거세게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무심코 뒤로 물러났다.
나, 혹시 뭔가 했던가...?
어리둥절한 내 모습을 보고 코테가와는 숨찬 가슴을 누르며 내뱉듯 말을 토했다.

"대, 대체 어째서 전화를 안받는거에요!
덕분에 한참 찾았잖아요!"

"미, 미안.
영화 보고 나서 도로 켜놓는다는걸 깜빡했어..."

그러고보니 휴대폰을 꺼놓은 걸 아직껏 켜지 않았었구나.
사과하는 날 보던 코테가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후우...대체 내가 뭐하는건지..."

겨우 숨을 진정시키고 코테가와가 허리를 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잊은 물건이라도 있었어?"

"그게 아니고...
...아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응?"

무슨말인지 몰라 가우뚱하는 내 앞으로 코테가와가 조그만 상자를 꺼내들었다.

"저도 아키츠군에게 줄게 있었으니까요."

포장을 벗기자 디폴메된 고양이 얼굴이 달린 스트랩 두개 놓여진 상자가 보였다.
...설마 이걸 사려고 다시 팬시샵에 돌아갔다 온건가?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았지만,
선물까지 받았는데 그냥 넘어가긴 그렇잖아요?"

멍하니 있는 나에게 코테가와는 말을 이었다.

"저번에 아키츠군의 휴대폰을 봤을때 스트랩이 많이 낡았더라고요.
나참...그렇게 때가 묻을 때까지 들고 있을건 없잖아요?
아키츠군도 적당히 스트랩은 알아서 바꾸라고요."

그건 코테가와도 마찬가지였잖아...
저번에 코테가와의 휴대폰을 함께 들고있을 때 본건가?
조금 쑥쓰러워진 나머지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보면, 아키츠군.
그때 이후로 친구는 많이 사귈수 있었나요?"

"으응. 사이 좋아진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구?
유우키나 라라, 야미, 모미오카, 사와다, 아라이, 시라유리, 사키 선배, 린 선배, 아야 선배, 오시즈..."

"흐응..."

흘겨보듯 나를 쳐다보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줄줄이 말하던걸 멈췄다.

"왜, 왜그래?"

"...거의 다 여자애들 뿐네요.
어쩐지 불건전해요."

...나한테 말을 거는 남학생은 리토 말곤 없던데?
코테가와랑 대화하면서 상자 안의 고양이 스트랩을 꺼냈다.
양손에 스트랩을 하나씩 들고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코테가와도 스트랩이 많이 해졌지? 그럼..."

사륵-

"응?"

머리 위로 가벼운 뭔가가 내려앉은 느낌에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감촉에 의아할 때, 하나 둘 새하얀 꽃이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머리에, 팔에,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건...눈?"

"어째서 이 시기에...?"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는 나와 코테가와를 아랑곳하지 않고 눈송이는 그칠줄 모르고 내렸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인가?"

"늦여름이에요. 뭐, 앞쪽이 더 그럴싸 하지만요."

당황한 가운데서도 딴죽을 거는 코테가와의 태도에 피식 웃으면서 한손에 들린 스트랩을 건넸다.
눈내리는 하늘을 보며 크리스마스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학교에서 첫번째 친구인 코테가와에게 이 하나를 건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풋...아, 아하하~!"

코테가와도 같은걸 떠올렸는지 입가를 가리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약간 얼굴이 붉어진채 웃음을 그친 코테가와는 손을 내밀어 스트랩을 받아 들었다.

"뭔가 낭만적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짖궂은 장난 같아요.
이런 변덕스런 기상이변이라니..."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훔치며 코테가와는 휴대폰의 스트랩을 바꿔 걸었다.
어느덧 거리는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으로 뒤덮혔다.
어깨에 내린 눈이 조금씩 녹아 젖어드는걸 느끼곤 우산을 펼쳐 들었다.
펼쳐진 우산을 코테가와의 머리 위에 씌워주며 약간의 기대감을 안은채 다시 한번 코테가와에게 제안했다.

"그럼, 집까지 바래다 줄까?"

"...좋아요. 기껏 다시 만났는데 또 거절하기도 그렇고...
에스코트 잘 부탁드리죠 아키츠군."

"맡겨 주시라~ 아핫핫~!"

유쾌한 기분에 잠겨 코테가와와 함께 우산을 쓴채 눈오는 거리를 걸었다.

사박사박-

눈쌓인 거리를 따라 길게 이어진 네개의 발자국.
발바닥에 닿는 눈송이의 담백한 울림을 반주삼아 코테가와의 집을 향해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다음날.
난데없는 폭설로 휴교령이 내렸다.

「때 아닌 대설로 시내 상황은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지금 적설량은...」

창밖으로 불어닥치는 눈보라 때문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얌전히 방구석에 앉아 대설 속보를 보내고 있는 뉴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토끼는 말야, 외로우면 죽어버린대...

벌써부터 가을타기 시작한건지 오랜만에 보내는 나홀로 집보기가 쓸쓸하게 느껴진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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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다쓸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월요일 새벽이군요...OTL

73화의 미캉의 이야기는 남매가 함께 풀어나가야 하는 일이라 이렇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가족끼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줄 순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가족의 문제는 가족끼리 푸는게 제일이라는 주의라...=ㅅ=a;

다음편은 아마도 리토네 집에서 전골먹는 이야기가 될듯.



아 그러고보니 글쓰는 도중 트러블 만화를 보다가 1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 저스틴의 부하A를 보는 순간 팍 필이 꽂혔습니다.
(이름은 '브왓츠' 로군요. 1권의 외전격 1페이지 소설(...) 갤럭시 레전드☆저스틴 에서 금발의 이름이 나왔네요^^;)

오~ 이자식 성깔있게 생겼네...선글라스 너머의 눈매도 더럽고.
에이전트 녀석에게 눈썹이랑 콧수염 붙여주고, 일자 흉터만 없애주면 완벽하겠는데?(0ㅅ0)
잘보니까 놀랄때의 얼굴도 귀여운게 즈큐-웅☆
...이라고 생각한 제가 있었습니다. ( =ㅅ=);;;

외모의 터프함으론 이 에이전트씨나 사이바이씨나 만만찮아서 둘다 좋아하지만.
어쨌든 현재 료스케의 머리스타일은 금발에 올백이니까,
외모 상상할땐 이 에이전트 녀석을 기초로 하는게 편하겠더군요.
나이들어 보이고(...)

아무튼 료스케는 금발 에이전트 녀석이랑 사이바이씨를 퓨전-얍~! 시켜놓으면 딱 될듯(=w=)

(저스틴의 부하A - 금발 에이전트)

(사이바이씨의 이미지컷)




p.s. 이번편의 시험관련 이벤트는 원래라면 1학년때 일어났어야 정상이지만...
아시다시피 1학년때는 코테가와 이외에는 만나는 친구들이 적기에 1학년은 빨리빨리 넘겼지요.
(2학년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그리고 70화에서 시험결과가 나온후 하루나에게 점수를 물어오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을 보건데,
이학교는 따로 학생들의 성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듯 해서(개별 공지만 하는듯) 이야기에 무리가 없겠다 싶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성적표 나왔을때 장면은 마사토끼님의 킬더킹이 떠올라서 적어본것.
킬더킹 연재는 언제 다시 되려나요(=3=)


p.s.2. 원작 내용

70화 리토의 시험공부, 73화 미캉의 외로움, 74화 유이의 풍기단속편
1. 리토의 시험공부(70화)
테스트 성적이 바닥인 리토가 라라에게 개인교습을 받는 이야기.

2. 미캉의 외로움(73화)
집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외출하는 미캉과 그런 미캉을 뒤쫓아 나온 리토.
리토와 미캉 남매의 쇼핑을 미행하는 라라.
어릴적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추억을 떠올리는 미캉의 모습에 라라가 「펄펄 스노우군」을 이용해 눈을 내린다.
눈내리는 풍경속에서 미캉은 리토에게 고맙다고 중얼거린다.
이후, 스노우군을 멈추는걸 깜빡한 라라로 인해 도시는 폭설에 파뭍힌다.

매지컬 쿄코도 보러 가지 않고 리토와 미캉을 화해시켜준 라라는 정말로 차캐씁니다.

3. 유이의 풍기단속(74화)
문란해지는 학교 풍기를 유이가 단속하는 이야기.


p.s.3. 참조 이미지

책상위에 걸터앉은 리사

도발하는 리사와 미오

잡지 MISTY(왼쪽부터 시라유리 코요미, 아라이 사야카)

코테가와의 주말 옷차림

고양이 저금통을 고른 코테가와

고양이 시로네(매지컬 쿄코의 마스코트)

폭설이 내린 마을

마토에 아게루와 다른 학생들의 외모. (결론 : 리토는 우월했습니다)
Posted by 루트(根)
,
어릴적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배우는 것.

「분실물은 경찰서에 맡기는 거란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이고 내가 처한 상황은 바로 그 예외에 해당한 경우였다.
물론 내가 그 분실물을 슬쩍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던가 한건 아니다.
분실물을 경찰서에 가져갔다가 킬러로 오해받아서 경관에 의해서 총알세례를 받았던
'기타노 세○치로'와 같은 경험을 할까봐 경찰서 가기를 꺼리기 때문도 아니다.
전봇대에 붙은 수배전단지로 눈을 돌리던 사람들을 만난 경험은 있는데...

요지는 이게 아니고...경찰서에 가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분실물의 주인을 내가 알고 있다는것 때문이다.
이경우 경찰서에 분실물을 맡기는건 번거로운 일이겠지.
차라리 내가 직접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게 빠르고 확실하겠지.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잃어버린 물건을 되돌려준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험난한 일일 줄은 그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스럭-
툭...

"어라? 이건..."

세탁기를 돌리기 위해 세탁할 옷을 골라내던 중,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만 팔찌가 떨어져 내렸다.
하트모양 장식과 더불어 약간 독특하게 디자인된 금속형 팔찌.

라라가 쓰던 팔찌형 워프 장치 「뿅뿅워프군(개량형)」이다.
생체 단위의 단거리 워프가 가능하지만,
입고 있는 옷같은 것은 워프가 불가능한 아이템.
만든 사람이 천연 소녀 라라가 아니었다면
제작 의도가 정녕 '워프'인가, 아니면 '에로틱한 연출'인가 의심해 봤을 괴작이다.

...그런데 이게 대체 왜 내 바지 주머니에 있는거지?

잠시 고민을 하던중 바지에 잔뜩 뭍은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흙탕물이 말라붙은 흔적과 석고가루.
아, 며칠전 구교사에서 난리를 피우면서 엉망이 된 바지가 이거로군.
그땐 나도 워낙 정신이 없었던지라,
라라에게 돌려준다고 챙겨놓은 뿅뿅 워프군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채로 세탁물통에 넣어뒀었나보다.

라라는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테니 혹시나 아직까지도 계속 워프 장치를 찾고 있는건 아닐까?
은하계에서 이름높은 천재라지만 덜렁대는 아가씨라서 뿅뿅 워프군을 잊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뭐, 엄청난 발명품들을 하루만에 뚝딱 만들어 내니까 이걸 잃어버렸다고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것 같지만...
아무튼 이건 챙겨뒀다가 내일 학교에서 라라에게 돌려줘야겠다.




다음날.

복도를 걷던중 「풍기위원 회의실」에서 나오는 코테가와를 만났다.
왼손에 턱을 괴고 눈썹을 찌푸리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넸다.

"여~ 좋은아침이야 코테가와."

"아키츠군?"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코테가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아침부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거야?"

"...걱정거리라고요?"

순간 코테가와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저벅저벅 뚜렷한 발소리를 내며 내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코테가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코테가와의 시선에 무심코 한걸음 뒤로 물러서 버렸다.

"저기...그렇게 바라보면 아무리 나라도 부끄러운데 말야..."

가까워진 코테가와 때문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부끄럽단 말이죠?"

코테가와는 내 반응에 즐거운 듯 생긋 웃었다.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미소지은 입술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입 아래까지만.
장담컨데 절대로 코테가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쌍심지를 켠듯 부릅뜬 두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건 요 입인걸까요 아키츠군~?"

쭈우욱-!

"에, 에햐?(에에?)"

코테가와의 손에 잡힌 볼이 양옆으로 늘어나면서 바람새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난데없이 볼이 잡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코테가와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무래도 방금전 내 말이 코테가와의 분노를 부채질한 것 같았다.

"부끄럽다는 사람이!
학교에서! 교내 제일 불량이란 소리나 듣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 와선 「천(千)의 여자를 품은 양아치」라느니!
「최종귀축 양아치」 따위의 소리를 듣고 있는건가욧-!"

꽈악-!

"아햐햐~!?(아야야!?)"

볼이 꼬집히면서 살짝 눈물이 배어 나왔다.
아, 아파?! 농담 아니고 정말로 아파?!

"입학했을때부터 말했었죠?
학생의 본분은 단정함이라고.
게다가 당신도 그 불량한 외모를 눈감아 주는 조건으로
얌전히 학교 생활을 하기로 약속했잖아요!"

"하호헤허효!(잘못했어요-!)"

오, 오랜만에 보는 코테가와의 화난 모습이다...
캬릉-! 하며 소리를 낼듯, 사나운 고양이 같은 기세로 몰아붙여오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볼이 아픈가운데 식은땀이 났다.

풍기위원 회의실 안에 남아있던 다른 풍기위원들은 회의실 문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프닝 때문에 차마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아직 열려있는 회의실 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채, 문에서 멀찍이 떨어져 회의실 안에 뭉쳐 있으면서 저마다 작은 소리로 쑥덕거렸다.

「...봤냐?」
「봤어. 사정없이 닥달하고 있는데?」
「과연 '맹수 조련사'... 저 아키츠 료스케를 저렇게까지 몰아붙일 줄은.」
「저 불량배가 저렇게까지 당하는 모습은 처음봐요.
중학교 시절의 저 사람에겐 눈만 마주쳐도 지리는 남학생들까지 있었다는데...」
「1학년인 넌 아직 모르는건가?
저녀석이 바로 사이난 고교 풍기위원의 '대(對) 아키츠 료스케용 최종병기' 코테가와 유이다. 」
「코테가와 유이 선배?」
「아, 세자리수가 넘는 불량배들이 덤벼들어도 상처하나 없었던 녀석이 저 아키츠 료스케다.
괜히 최흉 양아치니, 야쿠자 2세 소리를 듣는게 아니지.
그런데 입학후 며칠도 안되서 그 아키츠 료스케를 굴복시킨게 저 코테가와 유이라고.
폭주하는 아키츠 료스케를 통제할수 있는게 바로 코테가와지.」
「언니(お姉さま)라고 부르고 싶어요...」
「진정하고 로사리오는 내려놔.」

...모르는 사이에 여자 후배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구나.
축하합니다 코테가와.

내용은 들리지 않았겠지만 회의실에서 수근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곤,
문앞을 가로막고 떠드는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코테가와는 잡고있던 내 볼을 놓아주었다.

"으우우...아침부터 졸음이 확 깨버렸네..."

얼얼해진 뺨을 양손으로 감싸쥐면서 앓는 소리를 내는 날 보던 코테가와는
팔짱을 끼곤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아키츠군 때문에 회의 도중 고생한걸 생각하면 많이 봐준거에요."

"어...나말야?"

설마 며칠전 라라와의 결투 이후에 퍼진 소문 때문인가?

"그래요. 그나저나 문앞에서 계속 이야기 하는것도 실례니까 이만 돌아가죠.
어차피 교실에 가면 알게 되니까요."

잠시 멍해 있다가 몸을 돌려 걷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뒤를 쫓았다.
오늘 풍기위원회에서 뭔가 공지할 사항이라도 있는건가?
발걸음을 맞춰 코테가와의 옆에 나란히 선채 얼얼함이 가신 뺨을 살짝 매만지며 교실로 향했다.




"...와 같은 이유로 풍기를 어지럽히는 학생의 수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 풍기위원회에서는 우려를 표하고 있으며
며칠동안 학생들의 품행을 지켜본 뒤 「풍기강화주간」의 입안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교실에 들어선 코테가와가 풍기위원회에서 논의된 사항에 대해 학급에 알렸다.
최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학생들에 대해 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풍기위원회에서는 판단했나보다.
...설마 학교에 별의별 괴담이 나도는 것도 원인인건가.
방금전 풍기위원 회의실 앞에서 당했던 걸 떠올리면 아마도 맞겠지.
풍기강화주간이 시행되면 여러모로 내 차림새는 위험수위로 판단될테니까 나로선 풍기강화주간이 입안되지 않도록 얌전히 지내는게 나을듯 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동안 코테가와는 학생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켜주셔야 할 점은 간단해요.
교복외의 차림을 하는것은 금지입니다.
특히 아키츠군은 주의하세요."

순간적으로 클래스메이트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아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그렇게 한꺼번에 쳐다보면 좀 무섭다고.

「...하긴, 저 모습이 가장 파격적이지.」
「교칙위반의 표본이니까.」
「풍기강화주간이 되면 아키츠군이 가장 위험하겠지?」
「풍기위원실에 자주 불려나갈지도.」

...걱정해주는건지 아니면 얘깃거리 삼는건지 모르겠다.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되도록 조심할꺼라고.
수염이랑 액세서리를 없애는건 무리지만.

"당연하지만 교내에서 파렴치한 행위를 한다거나
학교에 필요없는 걸 가지고 오는 것도 금지입니다.
특히 아키츠군은 주의하세요."

"...왜 또 나야?"

방금전 얘기했는데 또 언급하는건 괴롭히는거야?

"중요하니까 두번 말했습니다."

"......"

킥킥- 거리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코테가와는 헛기침을 하곤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만약 풍기강화주간이 입안될 경우 교칙위반사항에 대한 감점을 적용하며,
감점이 10점을 넘으면 반성문을 제출해야 합니다.
그러니 당분간 품행에 주의해 주시길 당부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코테가와는 말을 끝내고 내 오른편 책상에 앉았다.
오른손으로 뺨을 괸채 위아래로 나를 흘겨보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주저하다가 물었다.

"저기...코테가와.
혹시 아침에 화난거 아직 안풀렸어?"

아침에 풍기위원실에서 만났을때부터 약간 기분이 안좋은듯한 코테가와였는데
혹시 다른 풍기위원들에게 나 때문에 안좋은 소리라도 들은건가?
조심스레 물어오는 내 모습에 코테가와는 왼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손."

"?"

턱-.

어리둥절한채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코테가와의 왼손바닥위에 올리자
코테가와는 뺨을 괴던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곤 한숨을 내쉬었다.

"...왜 반응하는건가요 아키츠군?"

"그러니까...무심코?"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하며 대답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테가와는 살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귀여운척 하지말아요. 징그러우니까."

"심해!?"

쇼크받은 시늉을 하자 날 보던 클래스 메이트들은 헛구역질을 해댔고,
정면에서 바라보던 코테가와는 못볼걸 봤다는 표정으로 내 뺨을 밀쳐냈다.

"무서운 얼굴 하지 말고 저리 치워요."

"나름대론 동정을 권하려는 의도였는데."

"그 표정이 불쌍한 표정이라면 아키츠군의 표정관리도 알만하네요."

"...그렇게 심했어?"

"먹잇감을 눈앞에 둔 짐승같은 눈매였어요."

"......"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앞으론 조금은 표정관리에도 신경을 쓰자.

"그리고 앞으론 손을 내민다고 이런식으로 곧장 반응하지 말아요.
...전 조련사 같은게 아니니까..."

아...설마 그것 때문인가?
아침에 풍기위원회의실에서 들었던「맹수 조련사」.
코테가와로서는 듣기 싫어하는 별명을 풍기위원회의 도중에 들은건가.
나랑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던 도중에 들어서 저렇게 날이 선 반응이 나온건지도.
약간 뾰루퉁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린 코테가와는 조례시간이 되어 호네카와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이내 얼굴을 바로하곤 자세를 가다듬었고 나도 얌전히 앉아 조례사항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조례후 연이어 진행된 1교시가 끝나고 쉬는시간 벨이 울렸을 때, 문득 떠오른 일이 있었다.
아침에는 시간이 없던 나머지 라라에게 「뿅뿅 워프군」을 돌려준다는걸 잊고 있었다.
교실 한쪽에서 리토랑 즐겁게 이야기 하고 있는 라라를 확인하고 가방에서 뿅뿅 워프군을 꺼냈다.
그대로 일어서 라라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어깨를 잡아오는 손이 있었다.

"...아키츠군."

"코테가와?"

몸을 살짝 뒤로 돌리자 눈썹을 치세운 코테가와가 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한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나보죠?"

"응?"

"지금 하고 있는 액세서리도 교칙위반인데 또 새 팔찌를 가져오다니...
이건 압수하겠습니다!"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내 손에서 팔찌 모양의 뿅뿅 워프군을 잡아채려는 코테가와의 행동에 살짝 몸을 뒤로 빼면서 변호했다.

"아니 이건 팔찌가 아니...「기잉-」!"

...순간 워프 머신에서 빛이 났을 때의 내 표정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려나...
'웅성웅성~''술렁술렁~'하는 효과음과 함께 쉴새없이 식은땀을 흘리는 도박묵○록의 패배자들의 모습을 떠올려주면 되겠다.


빛이 몸을 감싸는 가운데 놀란듯 눈이 크게 뜨여진 코테가와의 얼굴을 망막에 새기며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에 몸을 맡겼다.

파앗-

덜컹-!

등과 양팔에 닿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에서 비좁은 장소로 워프된걸 알수 있었다.
뒤통수를 벽에 부딪힐때의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무심코 신음이 새어나왔다.

"큿..."

"꺄악?"

"...에? 코테가와?"

"아, 아키츠군?"

코테가와도 워프 된건가?
그러니까 워프장치를 뺏으려고 날 잡고 있다가 함께 워프된거군요.

......알몸으로 말이네요.

서로의 품에서 느껴지는 맨살의 감촉에 나랑 코테가와는 동시에 경직되어 버렸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굳은것도 잠시, 곧 상황을 인식하고 경악한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꺄아악!?"

"와아앗!?"

쿵-
깡-

"아얏!?"
"으윽?!"

...비좁은 공간이었지.
헛된 몸부림이었네요 허허.
제대로 팔을 들어올리지도 못할정도로 좁은 공간이라서 머리를 매만질수도 없는게 안타까웠다.
그나저나 대체 여긴 어디야?
뒤통수를 부딪혀 신음을 흘리던 코테가와는 이내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밀쳐내려 했다.

"저, 저리 비켜요 아키츠군!"

퍽- 덜컹-!

"윽...그렇게 말해도 여긴 뒤로 물러설 곳도 없다고..."

손으로 내 가슴을 밀어낸 코테가와 덕에 다시 한번 벽에 머리를 박고선 신음을 흘렸다.

"어, 어째서 우리가 이런곳에 있는거죠?
방금전까지만 해도 우린 교실에 있었잖아요?"

"내 손에 들려있던 팔찌 말인데,
그거 라라의 긴급 탈출용 아이템이야.
옷은 워프가 안되는 결함품이지만..."

"파...파렴치해!
그것보다 뒤로 좀 비켜요 아키츠군...!"

"그러니까 나 지금 등을 벽에 붙이고 있다니까?"

나랑 코테가와가 당황스레 움직이자 계속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응? 방금전 울려대는 소리를 봐선 이 공간을 둘러싼 금속이 그렇게 두꺼운것 같진 않은데.
뭔가 캐비닛 같은걸까?

....혹시...?

"자, 잠깐만 코테가와.
아마도 여긴...「꺄하하하」「그게 말이야~」...!"

딸깍-

저만치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란스런 소녀들의 목소리가 중구난방 들려왔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한 코테가와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 아키츠군. 여긴 설마...)"

"(...아마도.)"

예전에 라라가 워프장소로 설정해놓았던 「여자 탈의실」이군요.
지금 나와 코테가와는 옷을 보관하는 락커 안으로 워프된거고.
들키는 순간 난 사회적으로 끝장인건 두말할것도 없구나 하하...

"(우선, 학생들이 탈의실에서 나갈때까지 이대로 있을 수 밖에 없을까요...)"

"(...그래야겠지?)"

리토라면 알몸을 쬐어도 따귀 한대나 정좌로 설교 받는걸로 어떻게든 되었겠지만...
내가 그런 짓을 했다간 곱게 끝날것 같지 않다.
코테가와도 풍기위원으로서의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지금같은 상황에서 라라처럼 수치심 없이 나갈수도 없을테고.

「역시나?」
「그렇다니까.」

재잘대며 이야기 하는 소녀들의 목소리에 숨죽이며 긴장하고 있는데 코테가와가 소근거렸다.

"(잠깐, 달라붙지 말아요 아키츠군!)"

"(난 이미 벽에 붙어 있다고!?)"

"(그런...)"

코테가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코테가와랑 맞붙어 있는 지금 상황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꼈다.
몸을 포개듯 들러붙은 상태로 계속 있으려니 가슴과 허벅지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에 이성이 날아갈것 같았다.

"(...응? 잠깐, 뭔가 닿았어...!
싫어. 이런 때 뭘 생각하는거에요?!)"

"(그, 그런말 해봤자 제멋대로...)"

제발 자중해줘 내 몸아...
이러다가 코테가와가 비명이라도 지르면 내 인생은 그대로 끝이라고?!
지금 상황에서 미싱 퍼플은 범죄다!
절박한 내 의지와는 별개로 피부와 피부가 맞닿은 가운데 사태는 점점 위험해져갔다.

"(잠깐, 움직이지말아요...!
이런 상태에서 움직이면...)"

부탁이니까 제발 그런 대사는 하지 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한단 말야.

추잡한 상상을 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속에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는데
이쪽으로 가까워 지는 발걸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늦었네 늦었네~ 좀있으면 체육수업 시작이니까 서두르지 않으면~ 」

큰일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있는 락커를 열려고 하는것 같은데
이대로 문이 열린다면...!
순간 오른손을 코테가와의 옆구리로 뻗었다.

"(바, 바보! 뭘하려는...)"

덜컥-

"(...!)"

「어라?」

「왜그래?」

「그게...락커가 안열리는데?」

「고장난건가?
시간 없는데 그냥 다른 애 락커를 함께 써.」

「으...별수없나?」

...휴우.

멀어져가는 발걸음 소리에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줄 알았다.
손가락으로 락커 문을 붙잡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안그랬으면 상상하기도 무서운 결말이 있었겠지.

「빨리 가지 않으면 시작하겠어.」

「자 그럼 가볼까-」

하나둘 소리가 사라지고 어느덧 탈의실은 조용해졌다.

...달칵.

이윽고 락커 문이 열리고 나와 코테가와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조용히 근처에 널린 옷을 주워 입고서 코테가와는 고개를 돌려 수건을 허리에 두른 나를 째려보았다.
눈가에 반쯤 눈물이 맺힌 상태로 코테가와는 양주먹을 들어 내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으악?"

"이 바보! 멍청이! 저질!
숨어있는 틈을 타서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에요!"

"미, 미안!
고의는 아니였어...!"

아프진 않았지만 울상을 지으면서 때려오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그저 얌전히 맞으면서 사과하는게 마음이 편할것 같았다.
한동안 나를 두들겨대던 코테가와는 이내 제자리에 주저앉아 훌쩍이기 시작했다.

"히끅...어째서, 왜 내가 이런꼴을..."

"저, 저기...미안해 코테가와..."

도를 넘어선 파렴치함에 우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엉거주춤 주저앉아 코테가와를 달랬다.
등을 토닥이며 코테가와를 달래고 있으려니 벌컥-소리와 함께 탈의실 문이 열리고
멍멍이 형태의 로봇과 함께 라라가 들어왔다.

"찾았다 유이~ 료스케~!"

"라라?"

「목표 탐색 완료임다.」

"수고했어~ 「킁킁 토레스군」"

냄새 추적형 로봇인가?
라라가 들고있는 옷가지를 보면 우리 옷의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쫓아올 수 있었나보다.

「아키츠~! 괜찮아?」

「코테가와 괜찮은거야?」

이윽고 다른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며 리토와 리사, 미오도 뛰어들어왔다.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리토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왔다.

"갑자기 빛이 나고 옷만 남기고 둘이 사라져서 놀랐어.
또 라라가 이상한 발명품이라도 시험한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저번에 구교사에서 주웠던 뿅뿅 워프군을 돌려주려다가 오작동이 일어났어.
라라, 여기 뿅뿅 워프군."

"아, 고마워 료스케~
찾는걸 깜빡 잊고 있었어~"

혀를 내밀고 웃으며 라라는 워프 장치를 건네 받았다..
옆에선 코테가와에게 옷을 돌려주는 리사와 미오의 모습이 보였다.

"코테가와. 여기 옷."

"으응...고마워요."

"어라? 코테가와, 울었어?"

"처, 천만에요. 방금전 이동때 머릴 조금 부딪혀서 그런것 뿐이에요."

"에? 다치진 않았어? 유이?"

"그러니까 괜찮다니까요?"

놀라는 라라를 코테가와가 달래고 나자 리사는 나랑 리토를 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코테가와가 갈아입을수 있게, 아키츠군과 유우키는 밖에 나가있어~"

"아, 응."

"저기 말야...나도 지금 타월 하나만 걸치고 있다고...?"

탈의실을 나가는 리토의 모습에 당황해하며 모미오카에게 지금 내 모습을 상기시켰다.
리토는 그렇다 쳐도, 설마 나보고 반나체 상태로 복도에서 몸을 쬐고 있으라는건 아니겠지?

"별수 없네. 그럼 유우키만 나가있어.
아키츠군은 저기 구석에 뒤돌아서 있던가 하고.
혹시 코테가와의 몸매를 감상하고 싶어서 뒤돌아본다거나 하진 않겠지~?"

...미안합니다.
그보다 더한 짓을 했어요...
안그래도 방금전까지 몸이 멋대로 뜨거워져서 정신이 없었다고요.

"무, 무슨 파렴치한 말을 하는거야 모미오카씨!"

코테가와는 당황해하며 모미오카에게 항의했다.
방금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상기된 된채로 얼굴을 돌렸다.

"정말이지, 풍기를 어지럽히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흐응~?"

리사는 콧소리를 내며 코테가와의 뒤쪽으로 돌아서더니
별안간 왼손으로 코테가와의 왼가슴을 움켜쥐며 히죽거렸다.

"그런말 하게전에~
실은 파렴치한 몸으로 구성되있는 주제에~"

"......!"

난데없이 벌어진 성희롱에 코테가와는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굳어버렸다.
과연 성희롱적 스킨쉽이 잦는 리사.
남학생이 있는 앞에서 잘도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일을 해주시는군요.
움켜쥔 옷자락 위로 가슴의 볼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엄청나게 자극이 강했다.
그러던 중 리사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의아한듯 입을 열었다.

"어라? 이 감촉은...? 그러고보니 코테가와 지금 속옷..."

"저, 적당히 좀 하세요옷!!!"

황급히 리사를 뿌리치며 코테가와는 가슴 가리고 뒤로 물러나 가쁜 숨을 내쉬었다.

"대, 대체 뭐하는거에요 모미오카씨!"

"아핫~ 분위기 타다 보니까~"

"그걸 말이라고...게다가 아키츠군은 또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던거에요!"

"아니 나는 그저..."

주륵...

"...응?"

코에서 흘러내리는 뜨끈한 액체에 무심코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손가락에 묻어 나온 붉은 피.

"어라? 료스케 괜찮아?"

"헤에? 아키츠군, 설마 흥분한거야?"

"코테가와의 몸매에 헤롱헤롱?"

"아, 아키츠군 당신...!"

놀랐다는듯 바라보는 라라, 놀잇감을 찾은듯 즐거운 눈매를 한 리사와 미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코테가와의 모습에 황급히 코를 막으며 변명했다.

"아, 아냐! 그런게 아냐!
이건..."

「「「이건?」」」

"......지적 호기심?"

나처럼 탐구심 넘치는 청소년이라면 코로부터 호기심이 흘러넘치는 경우도 있어.
결코 코피는 아니에요.

"이 변태---!!!
빨리 나가지 못해요!?"

퍽-!

"으악! 죄송합니다!"

분노한 코테가와가 던진 휴대폰에 얼굴을 맞곤 황급히 탈의실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리토가 소란스러운 탈의실 안의 소리에 당황한듯 내게 물어왔지만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적당히 얼버무렸다.
다행히도 밖에 지나가는 학생들은 없었기에 잽싸게 교복으로 갈아입은 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물건 하나 돌려주려던것 뿐인데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코테가와의 설교를 듣고
알몸으로 워프당하는 일도 겪고,
자칫하다간 사회적, 윤리적으로 아웃인 상황까지 올 뻔했다.
안그래도 아침부터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코테가와였는데
방금전 상황은 그야말로 불난곳에 부채질은 커녕 기름을 끼얻는것 같은 행위였다.
...나중에 코테가와한테 제대로 사과해야겠다.



코테가와랑 다른 아이들이 나올때까지 하릴없이 기다리던 중 방금전 집어든 코테가와의 휴대폰을 내려다 보았다.
액정에 시간이 떠있는 검은색 휴대폰과 휴대폰을 장식한 고양이 스트랩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이건...

약간은 색이 바랬지만 귀엽게 웃고있는 고양이 얼굴.

크리스마스 때의 고양이 스트랩, 아직껏 하고 있었구나...
그때로부터 반년이 훨씬 지났기에 이미 새 스트랩으로 바꿨을꺼라 생각했는데.
...뭐, 나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반대편 손으로 주머니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든다.
지금은 살짝 때가 묻은 고양이 스트랩이 좌우로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 당신에게 멋진 만남이 찾아오길...

"...멋진 만남...인가."

"아키츠?"

"아무것도 아냐."

의아한듯 쳐다보는 리토의 모습에 고개를 젓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기 말야 코테가와.
그저 내멋대로의 생각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만약 지금도 네가 이 스트랩을 간직하고 있다면,
크리스마스 때의 교환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면...

이따금 떠오르는 그때의 추억에 쑥쓰럽게 웃던 날들은,
매만지다가 때가 묻은 스트랩을 조심스레 닦아내던 날들은...

소중한 추억과 선물.

그때의 추억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던거지?
제대로 된 추억 하나 갖지 못했던 소년 혼자만 빠져들어 있는
한심한 자기 연민의 굴레는 아니었던거지?

그때 크리스마스의 교환 이후로 많은 일들이 있었어.

겨울의 마지막 야미를 만나고, 리토와 라라를 만났어.
사키선배와 린, 아야 선배를 만나고 조금 무섭지만 학생들을 아끼는 미카도 선생님도 만났어.
만화가 사이바이 선생님의 화실을 찾아가고, 가정방문을 오신 하루코 선생님을 뵙기도 했지.
사야카와 코요미를 헌팅남들로 부터 도와주기도 했고.

지금까지도 휴대폰에 연결되어 있는 스트랩처럼,
그때 네가 기원해준 바람도 이어져가고 있어.
너의 바람처럼 내가 바랐던 날들도 이루어질수 있으려나?

스트랩에 매달려 흔들리는 두개의 고양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두 휴대폰을 맞대보았다.
이리저리 맞부딪히고 스쳐가는 고양이 스트랩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실없는 짓을 하고있는게 조금 부끄러워져 이내 휴대폰을 떼어놓곤 웃어버렸다.

"뭘 그렇게 실실 웃고 있는건가요 아키츠군?"

"아, 코테가와? 이제 나온거야?"

고개를 돌리자 여자 탈의실에서 나온 코테가와, 리사, 라라의 모습이 보였다.
코테가와의 시선이 내 손에 향한걸 보곤 코테가와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휴대폰 여깄어. 그리고 방금전엔 정말 미안해."

"고마워요. 그런데 진심으로 사과하는거 맞나요?"

"물론이지~! 지금이라면 일만번이라도 기꺼이 사과할꺼라고~"

"...이상하게 즐거운것 같네요. 아키츠군?"

"기분탓이야 기분탓~"

손사래를 치는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코테가와는 시선을 내려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우선은 교실로 돌아가는게 먼저겠군요.
벌써 예전에 수업 시작했다구요."

"에~ 기왕 늦은거 땡땡이 치면 안돼 코테가와?"

"안됩니다. 모미오카씨."

"땡땡이는 재밌는거야?"

조금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우리들은 교실로 돌아갔다.
앞장서 걷는 코테가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채 흔들리는 고양이 인형이 보였다.
발걸음에 맞춰 앞뒤로 흔들리는 그 모습에 슬쩍 웃음이 흘렀다.

...이런 일상도 나쁘진 않아.

시끌벅적한 학교생활에 한숨을 쉬는 리토를 보며 미소짓곤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뭐죠 아키츠군?"

"...왜 난 여기서 반성문을 쓰고 있는걸까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죠."

방과후, 풍기위원실에 남아서 반성문을 썼다.
이유?
명목상으론 복장위반 및 수업 지각.
실제로는 파렴치했던 해프닝에 대한 벌이었다.

지은 죄치곤 가벼운 벌이었는지라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채 감시모드에 들어간 코테가와의 옆에서 얌전히 반성문을 작성했다.
가끔씩 풍기위원실을 지나치던 학생들이 힐끗거리면서 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런 시선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었기에 무난하게 반성문을 완성해 제출하고 코테가와와 하교했다.




다음날.

"...그건 뭐야 코테가와?"

"묵주에요."

"응. 알고있어. 로사리오잖아. 근데 왜 그렇게 많아?"

"몰라요. 등교하는데 갑자기 이걸 건네면서 자기 목에 걸어달라는 여학생들을 만나서...
우선 가지고 있다가 방과후에 걸어달래요.
교칙위반이니까 목걸이 같은건 금지라고 공지했는데..."

"...내가 돌려줄께."

"에? 그러지 않아도...「내가 할께.」그, 그래요."

얼떨떨한 코테가와에게서 로사리오들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조용히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오랜만에 사용하게 되는구나.
그러고보면 제 용도로 쓰이는건 오늘이 처음인가?
불량배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는 십자가 목걸이를 천천히 목에 걸었다.




방과후 교칙위반의 후배들에게 친절하게 로사리오를 돌려주었다.
겁먹은 그네들을 진정시킨 뒤,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주곤 웃으며 말해주었을 뿐이다.
- 서열관계는 코테가와, , 너희들 순서라고.
폭력으로 얼룩졌던 목걸이도 가끔은 쓸모가 있네요.
「오라버님」이라고 불러보란 요구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 여학생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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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네. 죄송합니다.

늦은데다가 분량도 참...=ㅅ=;;;

원래라면 이 뒤에 며칠간의 이야기를 더 연결시킬까 했는데...
연결이 좀 어색했기도 하고,
중간에 변경된게 생겨서 그냥 다음편에 넣기로 했습니다.-_-;

이편저편 써지는것 부터 썼더니 미완성된 글들만 생겨버렸...-_-;
나중에 미완성인편 마저 쓸땐 좀 편하겠지요 쿨럭...;

아무튼, 이제 20화네요.
앞자리수도 바뀌었으니 좀더 분발해야죠^^;

아, 그리고 코테가와의 존칭은 료스케에 대해서만으로 할까 조금 고민중입니다.
만화책 보시면 알겠지만 다른 친구들에겐 평대를 합니다.
그런데 원작에서도 가끔씩 공대를 섞어쓰기도 해서 어투를 어떻게 할지 고민되더군요^^;


그나저나 다크니스 말인데...
야미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것 같은데
이제부턴 연애위주의 일상편은 볼수 없는걸까요?=_=a;
(사키양이라든가 하루코 선생님이라든가 기껏 이름이 공개된 조연 소녀 아라이 사야카, 시라유리 코요미라든가...)

p.s.1. 20화 관련 내용.

원작2화에서 리토와 라라가 락커 안에 함께 워프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원작74화의 풍기강화주간이 언급되었습니다. 현재 시점은 풍기강화주간이 있기 며칠~몇주전 쯤.

p.s.2.관련 이미지

뿅뿅 워프군 개량형

킁킁 토레스군

리사의 코테가와 성희롱
Posted by 루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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